김소민

김소민 기자

동아일보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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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소민 기자입니다.

somin@donga.com

취재분야

2025-11-29~2025-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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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0년 한길… 이제 내가 민들레 솜털이 됐구나”

    최근 온라인에서 소소하게나마 화제가 된 영상이 있다. 제목은 ‘이해인 수녀님께 사인 요청하면 벌어지는 일’. 말 그대로 이해인 수녀(80)가 사인해주는 모습을 담은 영상이다. 수녀는 필통에서 어른 주먹만 한 도장을 꺼내 ‘쾅’ 찍고, 색연필로 꽃 그려 넣고, 장미 스티커 꺼내 종이를 빈틈없이 꾸민다. 사인 하나에 5분이 걸렸다. “다꾸(다이어리 꾸미기) 대신 사꾸(사인 꾸미기)”라는 댓글이 달렸다.지난달 22일 산문집 ‘민들레 솜털처럼’(마음산책·사진)을 펴낸 이 수녀를 1일 전화로 만났다. “7년 만에 제주를 찾아 김기량성당에서 특강과 독자 만남을 진행하고 있다”는 그는 ‘명랑 수녀’답게 목소리부터 경쾌했다. “우리 집안은 어머니, 언니가 나이 들어도 이렇게 목소리가 젊어요. 제가 수녀원에 안 왔으면 앵커가 됐을 거예요, 호호.” 1976년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를 낸 지 벌써 49년. 신간은 인터뷰와 미공개 대담 가운데 꼭 남기고 싶은 말을 시와 함께 엮은 산문집이다. 이 수녀는 “50년 전 책은 민들레 영토, 이번엔 민들레 솜털”이라며 “가끔 거울을 보면 머리가 하얗게 셌다. ‘어머, 내가 존재 자체로 진짜 민들레 솜털이 됐구나’ 그런 묵상을 하게 된다”고 했다.“민들레 영토 때는 ‘이 땅에서 내가 고독의 진주를 캐며 꽃으로 피어나야 되는데. 좁은 돌 틈에 피어나 민들레처럼 강인하게 살아야 되는데’ 그런 결심을 갖고 글을 썼어요. 그 민들레 한 송이의 수녀가 50년 한길을 가서, ‘진짜 민들레 영토가 됐구나. 내가 한 송이 민들레로 솜털을 날리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1964년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 입회한 그는 수도 생활 60년이 준 선물은 “모든 사람이 다 정겹고, 처음 보는 이도 일가친척처럼 느껴지는 것”이라고 했다. 수녀원 창고엔 1980년대 중반부터 모은 독자 편지가 수십만 통 쌓여 있다고 한다. 특히 교도소에서 온 편지는 대부분 직접 답한다.“이감됐으면 교도관한테 물어서라도 답장해요. 가령 공주 감호소에 있다가 다른 곳에 갔다면, 옮긴 지역에 있는 독자한테 ‘크리스마스 때 나 대신 뭐라도 전해 달라’고 부탁한 적도 있어요.” 화제가 된 ‘사꾸’에 대해선 “사인 하나하나가 기도라 생각한다”며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니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단 맘으로 정성껏 한다”고 했다. “전국 각지에서 예쁜 스티커를 보내줘요. 일본 출장 다녀왔다며 보내주기도 하고. 제가 ‘스티커 부자’예요. 온갖 스티커가 다 있어요. 스티커, 색연필, 메모지는 항상 제 가방에 있어서 어딜 가도 들고 다녀요.” 50년 가까이 글을 써 온 ‘민들레 소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을까.“신앙 안에서 한길로 오느라 참 애썼다고 하고 싶네요. 마음 변해서 민들레 영토에서 도망칠 수도 있었을 텐데. 고독의 진주를 키워내고 시에 나오는 대로 살아보려 안간힘을 썼구나. 고맙다, 축하한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 2025-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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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들레 소녀’의 50년 한길…“내가 이제 솜털을 날리는구나”

    최근 온라인에서 소소하게나마 화제가 된 영상이 있다. 제목은 ‘이해인 수녀님께 사인 요청하면 벌어지는 일.’ 말 그대로 이해인 수녀(80)가 사인해주는 모습을 담은 영상이다. 수녀는 필통에서 어른 주먹만한 도장을 꺼내 ‘쾅’ 찍고, 색연필로 꽃 그려 넣고, 장미 스티커 꺼내 종이를 빈틈없이 꾸민다. 사인 하나에 5분이 걸렸다. “다꾸(다이어리 꾸미기) 대신 사꾸(사인 꾸미기)”라는 댓글이 달렸다.지난 달 22일 산문집 ‘민들레 솜털처럼’(마음산책)을 펴낸 이 수녀를 1일 전화로 만났다. “7년 만에 제주를 찾아 김기량성당에서 특강과 독자 만남을 진행하고 있다”는 그는 ‘명랑 수녀’답게 목소리부터 경쾌했다. “우리 집안은 어머니, 언니가 나이 들어도 이렇게 목소리가 젊어요. 제가 수녀원에 안 왔으면 앵커가 됐을 거예요, 호호.”1976년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를 낸 지 벌써 49년. 신간은 인터뷰와 미공개 대담 가운데 꼭 남기고 싶은 말을 시와 함께 엮은 산문집이다. 이 수녀는 “50년 전 책은 민들레 영토, 이번엔 민들레 솜털”이라며 “가끔 거울을 보면 머리가 하얗게 셌다. ‘어머, 내가 존재 자체로 진짜 민들레 솜털이 됐구나’ 그런 묵상을 하게 된다”고 했다.“민들레 영토 때는 ‘이 땅에서 내가 고독의 진주를 캐며 꽃으로 피어나야 되는데. 좁은 돌 틈에 피어나 민들레처럼 강인하게 살아야 되는데’ 그런 결심을 갖고 글을 썼어요. 그 민들레 한 송이의 수녀가 50년 한 길을 가서, ‘진짜 민들레 영토가 됐구나. 내가 한 송이 민들레로 솜털을 날리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1964년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 입회한 그는 수도 생활 60년이 준 선물은 “모든 사람이 다 정겹고, 처음 보는 이도 일가친척처럼 느껴지는 것”이라고 했다. 수녀원 창고엔 1980년대 중반부터 모은 독자 편지가 수십만 통 쌓여 있다고 한다. 특히 교도소에서 온 편지는 대부분 직접 답한다.“이감됐으면 교도관한테 물어서라도 답장해요. 가령 공주 감호소에 있다가 다른 곳에 갔다면, 옮긴 지역에 있는 독자한테 ‘크리스마스 때 나 대신 뭐라도 전해달라’고 부탁한 적도 있어요.”화제가 된 ‘사꾸’에 대해선 “사인 하나하나가 기도라 생각한다”며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니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단 맘으로 정성껏 한다”고 했다. “전국 각지에서 예쁜 스티커를 보내줘요. 일본 출장 다녀왔다며 보내주기도 하고. 제가 ‘스티커 부자’예요. 온갖 스티커가 다 있어요. 스티커, 색연필, 메모지는 항상 제 가방에 있어서 어딜 가도 들고 다녀요.”50년 가까이 글을 써 온 ‘민들레 소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을까.“신앙 안에서 한 길로 오느라 참 애썼다고 하고 싶네요. 마음 변해서 민들레 영토에서 도망칠 수도 있었을 텐데. 고독의 진주를 키워내고 시에 나오는대로 살아보려 안간힘을 했구나. 고맙다, 축하한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 2025-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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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학으로 본 ‘전통 의식주’… 조상의 지혜, 여기 담겼죠

    《“전통 의식주엔 우리가 살아온 지혜가 담겨 있어요. (요즘 K컬처가 주목받는 건) 이제 와 그걸 새롭게 느끼는 거죠. 원래 아주 무궁무진합니다.”최근 출간된 신간 ‘살림의 과학’(사이언스북스)은 독특한 책이다. 요즘 해외에서도 관심 높은 ‘K헤리티지(문화유산)’를 “가상의 옛집을 둘러보는 시간 여행자” 콘셉트로 구성했다. 부엌이나 안방, 대청, 사랑채, 마당 등을 집주인 몰래 살펴보는 형식이다. 책을 집필한 이재열 경북대 생명과학부 명예교수(75)는 전공이 ‘미생물학’이다. 문화유산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2009년에도 ‘담장 속의 과학’(사이언스북스)이란 관련 서적을 냈다. 지난달 26일 경기 용인시 자택에서 인터뷰에 응한 그는 “옛 선조들의 ‘살림의 과학’을 좇다 보면, 더 아름답고 멋진 삶을 살기 위해 애써 온 옛사람들의 노력과 꿈을 읽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신간은 특히 전통 의식주에 담긴 과학에 집중한다. 이를테면 ‘조선 양반들은 추운 겨울에도 구멍이 송송 뚫린 갓을 썼는데, 보온은 어떻게 했을까’ 같은 궁금증에 대한 답을 찾아본다.》선비들은 위가 트인 방한모를 쓰고, 그 위에 갓을 올려 쓴 뒤 끈으로 묶어 방한을 하며 의관도 정제했다. 이처럼 꼭대기가 열린 모자는 중국과도 차별화되는 조선의 고유한 의복이었다. 전통 살림의 과학은 오늘날에도 적잖은 의미가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구멍이 뚫려 ‘숨을 쉬는’ 전통 옹기가 대표적이다. 옹기를 필터로 사용해 제3세계에 보급할 정수기를 만들 수 있는지 검토된다고 한다. 과학자인 이 교수가 전통 문화에 관심을 가진 건 1978년 28세 때였다. 서울대 농생물학과를 졸업한 뒤 독일 유학길에 올라 박사 과정 지도교수를 찾아뵌 자리였다. 악수를 나눈 뒤 교수 입에서 나온 첫마디가 뜻밖이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고려 자기에 대해 얘기해 줄래?”“알고 보니 교수님이 취미로 동양 미술사를 공부하셨더라고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오히려 제가 한국에 대해 너무 모르는 거예요. 이른바 정체성이 없었던 거죠. 독일어로 지도교수를 ‘독토어파터(Doktorvater)’라고 하는데, 아버지처럼 많은 영향을 주셨습니다.” 이를 계기로 이 교수는 한국으로 돌아와 역사와 고미술에 빠져들었다. 경북대 재직 시절에도 틈만 나면 전국 고미술상을 찾아다니며 고대 토기나 그릇받침, 항아리, 단지를 수집했다. 30년 넘게 발품을 팔다 보니 준(準)전문가가 됐다. 그렇게 수십 년간 수집한 백제·신라·가야 등 토기 157점을 2013년 한성백제박물관에 기증했다. 박물관은 이를 바탕으로 2021년 특별전 ‘흙으로 만든 그릇, 토기’를 열기도 했다. 그의 서재도 작은 전시관을 방불케 했다. 3세기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토기가 진열장에 놓여 있었다. 뽁뽁이와 노끈으로 단단히 감싼, 가야의 손잡이가 있는 잔들도 칸마다 들어 있었다. “이런 건 이삿짐센터도 취급을 안 해요. 전부 제가 짐을 싸고 풀어요. 지난해 서울에서 이사 올 때도 하나도 안 깨졌어요. 보고 있으면 즐거워요. 책 읽는 것과 똑같아요.” 인터넷과 인공지능(AI)으로 즉각 답을 얻는 시대. 하지만 이 교수는 ‘맥락’을 탐구하는 공부의 즐거움을 강조했다. “자연 속에서 더불어 즐겁게 살아가려는 우리 살림살이 속엔 자연을 닮아 가려는 아름다운 마음이 깃들어 있어요. 부족한 살림에도 넉넉한 마음을 누릴 수 있는 지혜를 추구해 온 게 우리 전통문화의 특징이라고 봅니다.”용인=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 2025-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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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드래곤 홍콩 화재에 100만 홍콩달러 기부…국내 연예계, 기부 행렬

    홍콩에서 발생한 대형 화재에 국내 연예인들과 엔터테인먼트 업계 기부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30일 가수 지드래곤 소속사 갤럭시코퍼레이션은 지드래곤이 홍콩 시민들의 심리적 치유를 응원하기 위해 100만 홍콩달러(약 1억8800만 원)를 기부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해당 기부금은 피해자 구조와 복구에 힘쓰는 소방관과 자원봉사자를 돕는 데 쓰일 예정이다.SM엔터테인먼트가 100만 홍콩달러를 기부한데 이어 슈퍼주니어 100만 홍콩달러, 에스파 50만 홍콩달러, 라이즈가 25만 홍콩달러를 각각 기부했다. 그룹 아이들도 100만 위안(약 2억700만 원)을 보내며 기부에 동참했다. 그룹 아이브, 보이넥스트도어, 엑소 첸백시, 투어스도 각각 50만 홍콩달러를 전달했다. JYP엔터테인먼트는 긴급 구조 및 재난 후 재건을 위해 월드비전 홍콩에 200만 홍콩달러를 전달했고, 그룹 스트레이 키즈는 100만 홍콩달러를 소속사 JYP엔터테인먼트와 별도로 기부했다. YG엔터테인먼트 또한 100만 홍콩달러를 기부했다. 하이브 뮤직그룹 APAC 6개 레이블(빅히트 뮤직, 빌리프랩, 쏘스뮤직, 플레디스 엔터테인먼트, KOZ 엔터테인먼트, 어도어)도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에 5억 원을 기부했다.28~29일 홍콩에서 ‘2025 마마 어워즈’를 개최한 CJ 그룹은 타이포 웡 푹 코트 지원 기금에 2000만 홍콩달러(약 37억8140만원)를 기부했다.지난 26일 홍콩 북부 타이포 지역에 위치한 고층 아파트에서 대형 화재로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현지 매체에 따르면 현재 사망자는 128명, 부상자는 79명으로 집계됐다. 종자는 200여 명으로 수색 작업에 따라 사망자가 더 늘어날 전망이다.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 2025-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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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할인-광고-온라인몰 없이도… 美 매출 1위 ‘힙한 마트’

    오프라인 유통의 위기라는 말을 자주 듣는 시대다. 온라인에서 클릭 한 번이면 구매할 수 있게 되면서 오프라인 매장은 텅 비어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온라인몰도 없고, 가격 할인도 없으며, 광고조차 하지 않는데도 미국에서 단위 면적당 매출에서 압도적 1위를 자랑하는 마트가 있다. 미국 경험이 있는 이들에겐 친숙한 마트 체인 ‘트레이더 조(Trader Joe′s)’다.이 책은 1967년 트레이더 조를 창업한 조 쿨롬이 직접 집필해 더 눈길을 끈다. 그는 서문에서 “기업가와 예비 기업가를 돕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히며, 트레이더 조의 성장 과정과 당시 경제적 상황을 ‘MBA 수업’처럼 병치해 설명한다. 책을 읽다 보면 위기는 늘 반복됐고, 결국 그 위기를 돌파한 이들이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예를 들어 1970년대 베트남전 지출과 1973년 오일쇼크로 물가가 급등했을 때 트레이더 조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세 가지 전략을 실행했다. 첫째, 자체 소식지를 발행했다. 둘째, 공정거래법의 빈틈을 활용해 수입 와인 가격을 대폭 낮췄다. 셋째, 친환경 식품을 본격적으로 도입했다. 이 중 자체 소식지의 탄생 과정은 흥미롭다. 트레이더 조는 마요네즈, 참치 통조림, 핫도그, 땅콩버터 같은 식품을 대상으로 블라인드 시식회를 열어 1등 제품을 선정하고 ‘시중 최저가’에 판매하는 정책을 시작했다. 바로 이 시식회 결과를 알리기 위해 자체 소식지를 만들기 시작한 것. 여기에 독자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만화도 삽입했는데, 이 유쾌한 구성은 금세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자체 소식지는 단순한 홍보물이 아니라 정보물에 가까운 교육적 매체가 됐다. 고객들이 아예 3공 바인더에 묶어 보관할 정도로 호응이 컸다. 이에 한동안 트레이더 조는 표지에 바인더용 구멍을 인쇄해 제공하기도 했다. 이는 트레이더 조가 ‘교육 수준은 높지만 소득은 낮은’ 소비자층에게 유독 큰 지지를 받은 이유를 보여준다. 소식지는 트레이더 조가 다른 소매업체와 확연히 구별되는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소비자들이 획일적 ‘대중’이 아니라 취향과 가치관을 지닌 ‘독립적 개인’으로 자리 잡도록 도운 셈이다. 책을 읽다 보면 인재 확보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보게 된다. 저자는 “왜 지금까지 트레이더 조를 모방하는 데 성공한 기업이 없는가”라는 질문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의 답은 명확하다. 높은 임금과 후한 복지를 제공하려는 기업이 거의 없었고, 따라서 트레이더 조만큼 유능한 직원들을 끌어오고 지켜낼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기준은 단순했다. 매장에서 일하는 평범한 풀타임 직원이라면 캘리포니아 가구 기준 중위소득은 벌어야 한다는 원칙이었다.쿨롬은 오랜 시간 경영을 하며 이 높은 임금 정책을 고수했고, 이를 유지할 방법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임차료가 다소 높더라도 ‘가장 높은 매출을 올릴 수 있는 자리’, 즉 최고의 입지에 매장을 여는 전략도 그중 하나였다. 15년짜리 임대차 계약은 소매업에서 가장 돌이키기 어려운 결정이었기에, 그는 이 부분만큼은 철저히 본인이 통제했다. 그 결과 30년 동안 트레이더 조를 운영하면서 질병이나 노화 같은 개인적 사정을 제외하면 풀타임 직원의 이직이 거의 없었다. 에코백 품절 대란이나 냉동김밥 인기 등 한국인에게도 ‘힙한 마트’로 여겨지는 트레이더 조의 성공 법칙은 별다른 게 아니었다. 그저 단순하면서도 기본적인 ‘원칙’을 잘 지켰다. 이건 경영인은 물론이고 다른 누구라도 세상살이에서 명심해야 할 금과옥조(金科玉條)가 아닐까.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 2025-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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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설국이 눈국? 칸트가 그리스 학자?… ‘AI 오류’ 범벅된 지식의 보고

    서울대 도서관에서 열람할 수 있는 A출판사의 한 전자책에는 “일본의 소설 ‘눈국’에서는…”이란 문장이 등장한다.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유명한 소설 ‘설국(雪國)’을 인공지능(AI)이 ‘눈국’으로 잘못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철학을 다룬 또 다른 전자책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부딪히는 일은 우리 삐라에서 매우 흔한 일입니다”란 대목이 있다. ‘삐라’란 단어가 어떤 맥락에서 들어갔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문장이다. 최근 학계나 출판계에서 AI를 활용하는 건 일상화됐다. 기획이나 자료 조사, 퇴고 등 저술 과정에서 AI를 적극적으로 쓰는 저자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별다른 감수 과정도 거치지 않은 채 무더기로 만들어낸 AI 콘텐츠가 국내 대학 도서관 장서로 무분별하게 유입되는 건 심각한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기본 국어 문법도 틀리는 AI 전자책해당 출판사가 펴낸 ‘음운론’을 다룬 책도 문제가 많았다. “‘신라’라는 단어에서도 ‘ㅅ’ 다음의 ‘ㄴ’은 ‘ㄹ’과 만나 ‘ㄹ’로 변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실라’가 아닌 ‘신라’로 발음됩니다”라는 내용이 담겼다. ‘신라’를 ‘실라’라고 읽는 건 국어의 기초 문법인 ‘유음화(流音化) 현상’의 대표적인 사례다. 출판사는 이런 전자책을 ‘청소년을 위한 OO시리즈’라며 다량으로 출간했다. 이 시리즈만 서울대 도서관에서 약 1000권이 검색된다. 원래 출판사는 저자가 실수해도 편집팀이 교정하는 과정을 거친다. 한 출판사 관계자는 “책 한 권을 만들 때 최소 세 차례 교정을 거치는 ‘3교’가 관행”이라며 “사전 원고 검토까지 포함하면 편집자 손이 평균 4번은 닿는다. 게다가 분야 전문가를 감수자로 두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AI 출판 도서는 고전을 번역하면서 역자는 물론이고 원전을 표기하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았다. B 출판사는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의 ‘미래 형이상학을 위한 서문’ 번역본을 내면서 원전이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저술이라고 표기했다. 칸트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김재호 서울대 학부교수는 해당 책을 검토한 뒤 “칸트의 ‘변증론’을 헤겔의 ‘변증법’이라 오역하는 등 내용에 대한 이해 없이 잘못된 번역어를 많이 사용했다”고 짚었다. 서울대 도서관은 전자책 규모를 확대하면서 A, B출판사의 AI 출판물을 소장하게 된 것으로 파악됐다. 서울대 측은 “A출판사 발행 전자책은 해당 출판사 외 다수의 도서를 제공하는 구독 전자책 플랫폼에 포함된 사항”이라고 설명했다. 해당 서점에서 서울대에 제공하는 전자책은 대략 15만 권이다. 서점 관계자는 “출판사들에 ‘생성형 AI로 만들었을 경우 표기를 해달라’는 지침을 전달하고 있지만, 표기 여부는 사실상 출판사 마음”이라며 “강제성이 없어 자체적으로 판단을 내려 제외시킬 근거가 약하다”고 했다. 출판사들은 수차례 연락을 시도했으나 닿지 않았다.● AI 전자책 검증 ‘큐레이터’ 시스템 도입해야 이에 관련 윤리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으면 ‘마구잡이 AI 도서’가 양산돼 출판계와 학계에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울대 사회과학대 박사과정 연구자 C 씨는 “학생 다수가 학술적 목적에서 도서관 책들을 찾아보는데, 기본 출처 표시부터 제대로 안 된 책들이 섞여 있는 건 문제”라며 “AI로 썼다는 건 명확히 밝혀야 하고, 학교는 책들이 제대로 분류되고 있는지 관리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AI 정보의 홍수 시대에 책과 글을 선별하고 검증하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허위 정보를 걸러내는 ‘큐레이션’의 역할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한 학술 출판사 관계자는 “AI 출판물이 서울대 도서관에 들어갔다는 건 사서들도 이를 거를 기준 자체가 없었다는 의미”라며 “대학과 공공도서관이 책 선정 기준을 다시 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해외에선 이미 ‘AI 양산 도서’의 도서관 유입을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유럽작가협의회(EWC)와 유럽문학번역가협회협의회(CEATL), 유럽출판사연합(FEP)은 4월 공동 성명을 내고 “생성형 AI로 만든 콘텐츠를 문화 자산으로 간주해선 안 된다”며 “공적 자금으로 운영되는 도서관은 이러한 종류의 산출물을 구매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 2025-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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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AI ‘딸깍 출판’ 최소 9000권, 검증없이 서울대 도서관에 버젓이

    “‘(옷을) 입다’에서 ‘ㅂ’이 ‘ㄷ’ 앞에서 ‘ㅁ’으로 변하여 ‘임다’로 발음되는 것은 단어 내부 규칙입니다.”‘입다’를 “입따”로 읽는 건 웬만한 초등학생도 아는 발음이다. 하지만 이런 기본 사실조차 틀린 전자책이 서울대 도서관에 버젓이 비치돼 있다. 대학생과 연구자들이 인공지능(AI)으로 무분별하게 제작해 오류가 상당한 책들을 참고서로 쓸 환경에 노출된 것이다. 동아일보 취재에 따르면 서울대 도서관엔 AI로 전자책을 만드는 것으로 알려진 출판사 A와 B의 서적 약 9000권이 비치돼 있다. 업계에서 이른바 ‘딸깍 출판’(클릭하면 AI가 책을 만든다는 뜻)의 대표 사례로 꼽는 곳들이다. 다른 출판사들이 감수 없이 내놓은 AI 전자책들이 도서관에 더 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특히 A 출판사는 지난 1년 동안 전자책 7311권을 출간했다. 일일 20권꼴로, 하루 78권을 찍어내기도 했다. 분야도 인문, 사회와 과학·기술을 망라한다. 저자는 대부분 ‘△△팀’ 등으로 돼 있으며, 인터넷에 ‘AI 기술을 활용한 스마트 퍼블리싱’이라고 소개했다. 전문가들은 AI 제작 전자책이 기존 학술자료와 똑같이 제공되는 점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한 서울대 연구자는 “AI 저작물로 명시하지 않으면 틀린 내용을 인용하거나 출처 표기를 잘못해 연구 윤리를 위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대 측은 “해당 서적들은 대형 서점의 구독 플랫폼을 통해 소장한 것으로 파악됐다”며 “대학 내 관련 규범이 만들어지면 준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설국이 눈국? 칸트가 그리스 학자?… ‘AI 오류’ 범벅된 지식의 보고AI로 찍어낸 전자책들, 서울대 도서관에 버젓이‘음운론’ 전자책 기초문법 틀리고… 고전 오역 수두룩, 기본출처 누락도서점 전자책 구독… 검증없이 유입, “대학-서점 걸러낼 시스템 마련해야”서울대 도서관에서 열람할 수 있는 A출판사의 한 전자책에는 “일본의 소설 ‘눈국’에서는…”이란 문장이 등장한다.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유명한 소설 ‘설국(雪國)’을 인공지능(AI)이 ‘눈국’으로 잘못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철학을 다룬 또 다른 전자책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부딪히는 일은 우리 삐라에서 매우 흔한 일입니다”란 대목이 있다. ‘삐라’란 단어가 어떤 맥락에서 들어갔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문장이다.최근 학계나 출판계에서 AI를 활용하는 건 일상화됐다. 기획이나 자료 조사, 퇴고 등 저술 과정에서 AI를 적극적으로 쓰는 저자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별다른 감수 과정도 거치지 않은 채 무더기로 만들어낸 AI 콘텐츠가 국내 대학 도서관 장서로 무분별하게 유입되는 건 심각한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기본 국어 문법도 틀리는 AI 전자책해당 출판사가 펴낸 ‘음운론’을 다룬 책도 문제가 많았다. “‘신라’라는 단어에서도 ‘ㅅ’ 다음의 ‘ㄴ’은 ‘ㄹ’과 만나 ‘ㄹ’로 변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실라’가 아닌 ‘신라’로 발음됩니다”라는 내용이 담겼다. ‘신라’를 ‘실라’라고 읽는 건 국어의 기초 문법인 ‘유음화(流音化) 현상’의 대표적인 사례다. 출판사는 이런 전자책을 ‘청소년을 위한 OO시리즈’라며 다량으로 출간했다. 이 시리즈만 서울대 도서관에서 약 1000권이 검색된다.원래 출판사는 저자가 실수해도 편집팀이 교정하는 과정을 거친다. 한 출판사 관계자는 “책 한 권을 만들 때 최소 세 차례 교정을 거치는 ‘3교’가 관행”이라며 “사전 원고 검토까지 포함하면 편집자 손이 평균 4번은 닿는다. 게다가 분야 전문가를 감수자로 두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AI 출판 도서는 고전을 번역하면서 역자는 물론이고 원전을 표기하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았다. B 출판사는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의 ‘미래 형이상학을 위한 서문’ 번역본을 내면서 원전이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저술이라고 표기했다. 칸트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김재호 서울대 학부교수는 해당 책을 검토한 뒤 “칸트의 ‘변증론’을 헤겔의 ‘변증법’이라 오역하는 등 내용에 대한 이해 없이 잘못된 번역어를 많이 사용했다”고 짚었다.서울대 도서관은 전자책 규모를 확대하면서 A, B출판사의 AI 출판물을 소장하게 된 것으로 파악됐다. 서울대 측은 “A출판사 발행 전자책은 해당 출판사 외 다수의 도서를 제공하는 구독 전자책 플랫폼에 포함된 사항”이라고 설명했다. 해당 서점에서 서울대에 제공하는 전자책은 대략 15만 권이다.서점 관계자는 “출판사들에 ‘생성형 AI로 만들었을 경우 표기를 해달라’는 지침을 전달하고 있지만, 표기 여부는 사실상 출판사 마음”이라며 “강제성이 없어 자체적으로 판단을 내려 제외시킬 근거가 약하다”고 했다. 출판사들은 수차례 연락을 시도했으나 닿지 않았다.● AI 전자책 검증 ‘큐레이터’ 시스템 도입해야이에 관련 윤리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으면 ‘마구잡이 AI 도서’가 양산돼 출판계와 학계에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울대 사회과학대 박사과정 연구자 C 씨는 “학생 다수가 학술적 목적에서 도서관 책들을 찾아보는데, 기본 출처 표시부터 제대로 안 된 책들이 섞여 있는 건 문제”라며 “AI로 썼다는 건 명확히 밝혀야 하고, 학교는 책들이 제대로 분류되고 있는지 관리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했다.전문가들은 AI 정보의 홍수 시대에 책과 글을 선별하고 검증하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허위 정보를 걸러내는 ‘큐레이션’의 역할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한 학술 출판사 관계자는 “AI 출판물이 서울대 도서관에 들어갔다는 건 사서들도 이를 거를 기준 자체가 없었다는 의미”라며 “대학과 공공도서관이 책 선정 기준을 다시 검토해야 한다”고 했다.해외에선 이미 ‘AI 양산 도서’의 도서관 유입을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유럽작가협의회(EWC)와 유럽문학번역가협회협의회(CEATL), 유럽출판사연합(FEP)은 4월 공동 성명을 내고 “생성형 AI로 만든 콘텐츠를 문화 자산으로 간주해선 안 된다”며 “공적 자금으로 운영되는 도서관은 이러한 종류의 산출물을 구매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 2025-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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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도 역시 ‘손맛’이지… 출판계 필사책 열풍

    7일 신작 장편소설 ‘어스탐 경의 임사전언’(황금가지)을 출간한 이영도 작가는 비슷한 시기 ‘필사노트 1―후회는 부정된 자신에의 그리움’도 냈다. 전작 장편소설 ‘폴라리스 랩소디’ ‘오버 더 초이스’와 중단편소설 18편에서 발췌한 184개 문장을 담은 필사책이다. 최근 출판계에선 인기 작가의 신간과 필사책을 함께 출간하는 방식이 마케팅 공식으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 신간에 대한 주목도를 높일 수 있는 데다, 이미 책을 소장한 독자들이라도 소장용이나 선물용으로 필사책을 ‘N차’로 구매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작가의 필사노트를 펴낸 황금가지 출판사 관계자는 “책에 담긴 문장은 독자들로부터 추천받았다”며 “작품을 읽을 때의 감정을 되짚어 보기에 좋으리라 생각되는 문구를 추렸다”고 했다. ‘이영도 필사노트’는 ‘드래곤 라자’ ‘눈물을 마시는 새’ 등에서 발췌한 문장을 담은 2, 3권도 출간을 앞두고 있다. 원래 필사책의 원조로는 2015년 출간된 ‘나의 첫 필사노트’(새봄출판사)가 꼽힌다. 이효석 이상 김유정의 대표작을 왼쪽에 싣고, 오른쪽에 독자가 따라 쓸 수 있는 공간을 배치했다. 지금은 거의 모든 필사책이 이 편집 방식을 따르지만, 당시만 해도 생소한 방식이었다. 이전까지 필사란 별도의 공책을 마련해 자신이 읽은 책을 그곳에 다시 써 보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이후 필사책은 시를 비롯한 문학이 위주였지만, 요즘엔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올 초 가수 장원영의 추천으로 베스트셀러가 됐던 ‘초역 부처의 말’(포레스트북스)은 3월 필사책으로도 선보였다. ‘저속노화’ 열풍을 일으킨 정희원 전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교수의 글을 묶은 필사책 ‘저속노화 명심 필사노트’(생각의힘) 역시 다음 달 1일 출간될 예정이다. 매일 한 구절씩 필사하도록 한 ‘일력’ 형태도 있다. ‘쇼펜하우어의 문장 365일 필사 일력’(헤르몬하우스)은 날마다 한글과 영문을 병기해 필사하면서 영문 감각도 익힐 수 있도록 구성했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 2025-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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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기작가 신간엔 이것도 함께…출판계 공식이 된 필사책

    이달 7일 신작 장편소설 ‘어스탐 경의 임사전언’(황금가지)을 출간한 이영도 작가는 비슷한 시기 ‘필사노트 1―후회는 부정된 자신에의 그리움’도 냈다. 전작 장편소설 ‘폴라리스 랩소디’ ‘오버 더 초이스’ 및 18편의 중단편소설 18편에서 발췌한 184개 문장을 담은, 408쪽 분량의 필사책이다. 황금가지 출판사 관계자는 “노트에 담긴 문장은 네이버 카페를 통해 독자들로부터 추천받았다”며 “작품을 읽을 때의 감정을 되짚어보기 좋으리라 생각되는 문구를 추렸다”고 했다. ‘이영도 필사노트’는 ‘드래곤 라자’ ‘눈물을 마시는 새’ 등에서 발췌한 문장을 담은 2, 3권도 출간을 앞두고 있다.최근 출판계에선 인기 작가의 신간과 필사책을 함께 출간하는 방식이 마케팅 공식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이미 책을 소장한 독자도 소장, 선물용으로 필사책을 ‘N차’ 구매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노린 것.필사책의 원조로는 2015년 출간된 ‘나의 첫 필사노트’(새봄출판사)가 꼽힌다. 이 책은 이효석 이상 김유정의 대표작을 왼쪽에 싣고, 오른쪽에 독자가 따라 쓸 수 있는 공간을 배치했다. 지금은 거의 모든 필사책이 이 편집 방식을 따르지만 당시에는 생소한 방식이었다. 이전까지 필사란 별도의 공책을 마련해 자신이 읽은 책을 그곳에 다시 써보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필사책의 초기에는 시를 비롯한 문학이 위주였지만 요즘엔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올 초 베스트셀러로 떠오른 ‘초역 부처의 말’(포레스트북스)은 3월 필사책으로 출간됐고, ‘저속노화’ 열풍을 일으킨 정희원 전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교수의 글을 묶은 필사책 ‘저속노화 명심 필사노트’(생각의힘) 역시 다음 달 1일 출간될 예정이다.매일 한 구절씩 필사하도록 한 일력 형태도 있다. ‘쇼펜하우어의 문장 365일 필사 일력’(헤르몬하우스)은 날마다 한글과 영문을 병기해 필사하면서 영문 감각도 익힐 수 있도록 구성했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 2025-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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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망상에 잘 빠지는 뇌… 타인의 신발을 신고 걸어보라

    #1. 조현병을 앓는 30대 프랭크 던바는 정부의 인공위성이 고의로 자신의 몸에 ‘에너지 빔’을 쏘고 있고, 그 결과 육체적 통증과 팔다리 경련이 생긴다고 확신한다. #2. 소도시 상점 매니저인 세실리 퍼킨스는 인공위성 음모론 관련 유튜브 영상을 몇 시간씩 본다. 자신이 피해자라 믿는 건 아니지만, 언제든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에 시달린다.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를 중단하라”며 소셜미디어에 글을 올리고 지역구 의원에게 청원서도 보낸다.미국 정신과 의사이자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대(UCSF) 교수인 저자가 책에서 소개한 사례들이다. 프랭크는 전형적인 망상 사례다. 세실리는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중요한 대목에서 차이가 있다. 세실리의 믿음은 프랭크처럼 주관적 체험(통증)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온라인에서 접한 정보에 근거한다. 저자는 이런 사례를 정신질환과 별도로, ‘망상 비슷한 믿음’이라는 범주로 구분한다. ‘집단 망상’은 세계적으로 점점 더 많은 이들이 허위 정보와 음모론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이른바 ‘망상 비슷한 믿음’을 갖게 된 현실을 짚고 원인과 해법을 탐구한 책이다. 우선 저자는 음모론이 특정 집단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강조하며 이야기를 연다. 인지 편향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취약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계를 판단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경험적 규칙에 의존한다. 이런 ‘빠른 사고’는 신속한 결정을 돕지만 동시에 현실을 왜곡하는 함정도 낳는다. 충분한 정보를 검토하지 않은 채 즉각적인 인상으로 결론을 내리고, 이는 종종 잘못된 믿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 최근 들어 달라진 건, 이러한 인지적 취약성이 사회적·구조적 요인과 결합해 초대형 위기로 확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집단적 망상이 사회 전반으로 번지게 된 가장 큰 요인으로 ‘인터넷’을 지목한다. 이전만 해도 비상식적이고 특이한 믿음에 동의하는 사람을 동네에선 찾기 어려웠다. 있어도 오히려 조롱을 받곤 했다. 지금은 상황이 정반대다. 인터넷 덕에 가장 비주류적인 믿음까지 공유할 동료를 손쉽게 찾을 수 있게 됐다. ‘비주류’라는 말 자체도 무의미해졌다. 그렇다면 집단 망상에 대한 ‘치료법’은 뭘까. 저자는 의사답게 몇 가지 해법도 제시한다. 첫 사례는 NPR 최고경영자였던 진보주의자 켄 스턴이다. 그는 2016년 미국 전역을 여행하며 복음주의 교회에 가고, 텍사스에서 멧돼지를 사냥하고, 보수 성향 티파티 모임에도 직접 참석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인들은 생각만큼 극단적으로 분열돼 있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이런 여행 체험을 담은 책 ‘공화당원 같은 나: 어떻게 진보의 거품에서 벗어나 우파를 사랑하게 됐는가’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합의점과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적었다. 여행을 마친 뒤 스턴은 민주당 지지를 철회하고 스스로 무당파를 선언했다. 두 번째 사례는 작가 존 하워드 그리핀이다. 그는 1959년 피부색을 흑인처럼 만들고, 인종 분리 정책을 시행 중이던 미 남부를 6주간 자동차로 여행했다. 그 과정에서 직접 경험한 인종차별을 ‘흑인이 된 나’에 기록했다. 실제로 ‘흑인으로 살아 보는 경험’을 통해 흑인의 현실에 가능한 한 가까이 다가간 것이다. 저자는 진정한 이해에 이르기 위해선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고 한참을 걸어 봐야 한다”고 말한다. 지나치게 많은 사회적 상호작용이 온라인에서 이뤄지는 오늘날, 직접 사람을 만나고 경험하는 일은 우리와 이념적으로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게 한다. 그리고 이는 감정적 양극화를 누그러뜨리며, 극단적 갈등의 벼랑에서 물러나게 하는 데 필수적인 처방이기도 하다. 읽는 내내 저자의 주장에 공감이 가는 책이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 2025-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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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 전반으로 번지는 집단 망상…‘잘못된 믿음’ 벗어나려면

    #1. 조현병을 앓는 30대 프랭크 던바는 정부의 인공위성이 고의로 자신의 몸에 ‘에너지 빔’을 쏘고 있고, 그 결과 육체적 통증과 팔다리 경련이 생긴다고 확신한다.#2. 소도시 상점 매니저인 세실리 퍼킨스는 인공위성 음모론 관련 유튜브 영상을 몇 시간씩 본다. 자신이 피해자라 믿는 건 아니지만, 언제든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에 시달린다.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를 중단하라”며 소셜미디어에 글을 올리고 지역구 의원에게 청원서도 보낸다.미국 정신과 의사이자 캘리포니아대 샌프란시스코(UCSF) 교수인 저자가 책에서 소개한 사례들이다. 프랭크는 전형적인 망상 사례다. 세실리는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중요한 대목에서 차이가 있다. 세실리의 믿음은 프랭크처럼 주관적 체험(통증)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온라인에서 접한 정보에 근거한다. 저자는 이런 사례를 정신질환과 별도로, ‘망상 비슷한 믿음’이라는 범주로 구분한다.‘집단 망상’은 세계적으로 점점 더 많은 이들이 허위 정보와 음모론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이른바 ‘망상 비슷한 믿음’을 갖게 된 현실을 짚고 원인과 해법을 탐구한 책이다. 우선 저자는 음모론이 특정 집단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강조하며 이야기를 연다. 인지 편향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취약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계를 판단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경험적 규칙에 의존한다. 이런 ‘빠른 사고’는 신속한 결정을 돕지만 동시에 현실을 왜곡하는 함정도 낳는다. 충분한 정보를 검토하지 않은 채 즉각적인 인상으로 결론을 내리고, 이는 종종 잘못된 믿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최근 들어 달라진 건, 이러한 인지적 취약성이 사회적·구조적 요인과 결합해 초대형 위기로 확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집단적 망상이 사회 전반으로 번지게 된 가장 큰 요인으로 ‘인터넷’을 지목한다. 이전만 해도 비상식적이고 특이한 믿음에 동의하는 사람을 동네에선 찾기 어려웠다. 있어도 오히려 조롱을 받곤 했다. 지금은 상황이 정반대다. 인터넷 덕에 가장 비주류적인 믿음까지 공유할 동료를 손쉽게 찾을 수 있게 됐다. ‘비주류’라는 말 자체도 무의미해졌다.그렇다면 집단 망상에 대한 ‘치료법’은 뭘까. 저자는 의사답게 몇 가지 해법도 제시한다. 첫 사례는 NPR 최고경영자였던 진보주의자 켄 스턴이다. 그는 2016년 미국 전역을 여행하며 복음주의 교회에 가고, 텍사스에서 멧돼지를 사냥하고, 보수 성향 티파티 모임에도 직접 참석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인들은 생각만큼 극단적으로 분열돼 있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이런 여행 체험을 담은 책 ‘공화당원 같은 나: 어떻게 진보의 거품에서 벗어나 우파를 사랑하게 됐는가’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합의점과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적었다. 여행을 마친 뒤 스턴은 민주당 지지를 철회하고 스스로 무당파를 선언했다.두 번째 사례는 작가 존 하워드 그리핀이다. 그는 1959년 피부색을 흑인처럼 만들고, 인종 분리 정책이 시행 중이던 미 남부를 6주간 자동차로 여행했다. 그 과정에서 직접 경험한 인종차별을 ‘흑인이 된 나’에 기록했다. 실제로 ‘흑인으로 살아보는 경험’을 통해 흑인의 현실에 가능한 한 가까이 다가간 것이다.저자는 진정한 이해에 이르기 위해선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고 한참을 걸어봐야 한다”고 말한다. 지나치게 많은 사회적 상호작용이 온라인에서 이뤄지는 오늘날, 직접 사람을 만나고 경험하는 일은 우리와 이념적으로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게 한다. 그리고 이는 감정적 양극화를 누그러뜨리며, 극단적 갈등의 벼랑에서 물러나게 하는 데 필수적인 처방이기도 하다. 읽는 내내 저자의 주장에 공감이 가는 책이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 2025-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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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주 첫 한인 이민자, 그의 이름은 ‘코리아’ 였다”

    《우리에겐 아픈 역사인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던 1876년, 한 열일곱 살 조선 청년이 중국 상하이에서 호주행 배에 올랐다. 당시 호주는 골드러시로 금광 채굴 인력이 몰리던 시기. 그는 수많은 중국인들에 섞여 신세계로 갔다. 18년 뒤 1894년 시민권을 받으며 ‘존 코리아(John Corea)’라고 이름 지었다. 현재 기록상 확인되는 호주 최초의 한인 이민자다.》이 존재를 세상에 알린 건 송지영 호주국립대 교수(49·정치학 전공·사진)다. 2016년 이민 간 그는 호주연구재단 지원을 받아 ‘재호 한인 이민사’를 정리하는 연구팀을 이끌고 있다. 호주에서 한국인 이민사를 독립적으로 연구하는 팀을 만든 건 처음이다.17일 캔버라 자택에서 동아일보 화상 인터뷰에 응한 송 교수는 “존 코리아는 ‘코리아’란 성을 기록으로 남긴 덕에 찾을 수 있었다”며 “19세기 말 호주에 많은 한인이 있었고, 광산 등 산업 곳곳에서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송 교수가 이런 이민사를 통해 한국 근현대사를 조망한 책 ‘이민의 진화’(푸른숲)가 5일 국내 출간됐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며 호주에 다다른 청년들부터 오늘날 워킹홀리데이 세대까지 시대마다 변화한 이민의 역사를 담았다.호주 내 한인 디아스포라(Diaspora) 연구는 한국 근대사를 이민사란 새로운 관점에서 들여다보는 시도이기도 하다. 시대별 한국 사회가 겪은 문제들이 다양하게 노정된다. 송 교수는 “특히 청년들은 ‘인간 안보(human security)’가 보장되는 곳으로 이동한다”며 “이민은 개인의 선택처럼 보이지만, 실은 한국의 미래를 비춰 보는 지표”라고 했다. ‘인간 안보’는 1994년 유엔개발기구가 세계 이주와 이민 동기를 파악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 이민의 정치적·경제적 요인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자는 뜻이다. 송 교수가 재호 한인동포 78명을 인터뷰했더니 ‘과도한 경쟁’과 ‘수직적인 직장 문화’ 등이 한국을 떠난 주요 원인으로 꼽혔다.실은 송 교수 역시 1세대 이민자다. 한국에서 30년, 영국 5년, 싱가포르 5년을 거쳐 호주에서 10년째 살고 있다. 한국에서 국회의원 비서관으로 일하던 시절 극심한 번아웃을 겪은 뒤 유학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도 인간 안보를 꿈꾸며 호주로 향한 청년이었던 셈이다. 송 교수는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주로 북한인권 등 탈북자 연구를 했다. 이후 한국의 결혼 이주 여성 문제에도 집중했다. 이러한 경계인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재호 한인 연구로 이어졌다. ‘호주에서 더 행복한가’를 묻자 “가지 않은 길에 대해 평가를 내리는 건 참 어렵다”고 했다. “20년 전 한국에서 성차별에 회의를 느꼈지만, 호주엔 인종차별의 벽이 있었습니다. 1세대 이민자들이 20대엔 현지인보다 건강하지만, 40대에 들어서면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지고 암 발생률도 높다는 연구가 많아요. 나이가 들어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는 사례도 적지 않습니다. 1세대 이민자들의 건강이 생애 주기를 거치며 어떻게 변하는지도 중요한 연구 주제죠.” 그는 “더 나은 삶을 찾아 떠나는 게 이민이지만, 어디가 더 나은 사회인가에 대한 고민은 끝이 없다”고 했다. 특히 존 코리아 관련 자료를 찾으며 그런 생각이 더 깊어졌다. 코리아는 빅토리아주 밀두라 근처 니콜스 포인트 묘지에 묻혀 있었다. 정부 기록을 검색해 찾아낸 자리는 묘비 하나 없는 평지였다고 한다. 타국에서 생을 마친 첫 재호 한인의 묘. 그 앞에서 송 교수는 “나는 어디서 죽고 싶은가란 질문을 자주 떠올리게 됐다”고 했다. 내륙 황무지 묘지는 가톨릭과 유대인, 중국인 묘역 등 구분이 여전히 남아 있다. 죽어서도 나눠져 있는 삶. 송 교수는 책의 수익금을 모아 존 코리아의 묘비를 세울 계획이다. “내년이 존 코리아가 호주에 온 지 150주년이에요. 꼭 묘비를 세워 드리는 게 제 꿈입니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 2025-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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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험해도 온기 느끼려, 현지인 삶으로 첨벙 들어가는 거죠”

    “저는 이상하게 자기네 집 가서 밥 먹자는 사람들이 많아요.”이병률 시인(58·사진)의 여행 스타일은 EBS TV 프로그램 ‘세계테마기행’과 비슷하다. 현지에 스며들어 부대끼는 여행을 한다는 점이 닮았다. 2012년 베트남 호찌민을 여행했을 때도 시장에서 우연히 만난 현지 주민의 초대를 받았다. 아래로 낚싯대를 드리우면 물고기가 잡힌다는 물가의 작은 움막이었다. 이 시인은 “너무너무 모기가 많은 집이었다. 하도 뜯겨서 술을 많이 마실 수밖에 없었다”며 씩 웃었다.이런 여행 경험을 바탕으로 최근 산문집 ‘좋아서 그래’(달)를 낸 이 시인을 13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이미 ‘끌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내 옆에 있는 사람’ 등 여러 여행 에세이를 출간한 여행 애호가. 하지만 낯선 사람을 무방비로 따라가는 건 위험하진 않을까.“위험하죠. 그래도 가요. 가면 재밌는 일들이 생기죠. 인류가 나한테 열어젖히는 자신의 온기일 수도 있으니까, 그 안으로 첨벙 들어가 보는 거예요.”1995년 일간지 신춘문예로 등단하기 전, 이 시인은 프랑스 파리에서 2년을 지냈다. 이후 시집 한 권 내지 못해 막막하던 시절에도 파리를 다시 찾곤 했다. 신간엔 그가 방황의 순간마다 돌아가 안긴 도시, 파리의 풍경과 기운이 담겼다. 가수 아이유의 ‘바이, 썸머’ 앨범 커버 등을 제작한 최산호 일러스트레이터가 삽화를 그렸다. 시인이 묘사한 파리의 풍경과 삽화를 함께 보는 재미가 있다. 파리의 어떤 기운이 시를 쓰게 했는지 묻자, “파리는 우울하다”는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파리는 겨울이 길어요. 겨울이 우기이기도 하고. 3월 말부터 해가 조금 나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발작을 일으킬 정도로’ 좋아해요. 창의적인 것은 슬프고 상처가 깊을 때 폭발력 있게 만들어지는 것에 가깝거든요. 그런 환경이 창작을 가능하게 했던 것 같아요.”이 시인은 “파리는 사랑하기 쉬운 곳”이라고도 했다. 한번은 파리 생마르탱 운하에 걸터앉아 메모를 하고 있는데, 노부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집에서 쓰던 그릇과 포크를 쟁반에 담아 소풍 나온 모습이었다. “무슨 글을 쓰냐”길래 “시 쓴다”고 답했더니, “집에 빈방이 있으니 거기서 쓰라”며 그를 데려갔다.“처음 갔을 땐 일주일 정도 있었고, 이후에도 두 번 정도 더 갔어요. 진짜 같이 먹고 자고 했죠. 사랑이 많은 사람들인 거예요.”이번 신간은 달 출판사 대표이기도 한 이 시인이 ‘여행그림책’ 시리즈의 문을 여는 책이다. 나태주, 천선란, 정세랑, 고선경 작가 등이 다음 필자로 예고돼 있다. 나태주 시인(80)은 오랫동안 구호단체를 통해 후원해 온 탄자니아의 16세 소녀를 만나기 위해 지난해 8월 현지를 찾았다. 그 여정을 시로 쓰고 손수 그림까지 그렸다고 한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 2025-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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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하게 집에서 밥 먹자는 사람 많아…인류가 내게 주는 온기”

    “저는 이상하게 자기네 집 가서 밥 먹자는 사람들이 많아요.”이병률 시인(58)의 여행 스타일은 TV 프로그램 ‘세계테마기행’을 닮았다. 팔짱 끼고 구경만 하는 여행이 아니라, 현지인 집에 스며들어 부대끼는 여행을 한다는 점에서다. 2012년 베트남 호찌민을 여행했을 때도 시장에서 우연히 만난 현지인에게 초대를 받았다. 바로 아래 낚싯대를 드리우면 물고기가 잡힌다는 물가의 작은 움막이었다. 이 시인은 “너무너무 모기가 많은 집이었다”며 “너무 뜯겨서 술을 많이 마실 수밖에 없었다”며 씩 웃었다.신작 여행산문집 ‘좋아서 그래’(달)를 낸 이 시인을 13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끌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내 옆에 있는 사람’ 등 베스트셀러 여행 에세이를 써온 작가답게 그는 남다른 여행 철학을 들려줬다. ‘위험하진 않느냐’는 질문에는 이렇게 말했다. “위험하죠. 그래도 가요. 가면 쓸 게 있어요. 재밌는 일들이 생기죠. 인류들이 나한테 열어젖히는 자신의 온기일 수도 있으니까, 그 안으로 첨벙 들어가 보는 거예요.”신간은 이 시인이 대표로 있는 달 출판사에서 새롭게 시작한 ‘여행그림책’ 시리즈의 첫 책이다. 이 시인을 시작으로 나태주, 천선란, 정세랑, 고선경 등이 다음 타자로 예고돼 있다. 특히 나태주 시인(80)은 지난해 8월, 오랫동안 월드비전을 통해 후원해온 16세 소녀를 만나기 위해 탄자니아를 찾았다. 그 여정을 시로 쓰고 직접 연필로 그림까지 그려 책에 담았다. 8박 9일 동안 나 시인과 동행한 이 시인은 “안 주무시고 그날 치를 스케치하고 글로 쓴 뒤 다음 날 아침 식사 자리에서 ‘어젯밤 쓴 글인데 읽어줄게요’ 하시더라”며 혀를 내둘렀다.1995년 일간지 신춘문예로 등단하기 전, 그는 프랑스 파리에서 2년을 지냈다. 이후 시집 한 권 내지 못해 막막하던 시절에도 파리를 다시 찾곤 했다. 신간은 그가 방황의 순간마다 돌아가 안긴 도시, 파리의 풍경과 기운을 풀어낸 책이다. 파리의 어떤 기운이 시를 쓰게 했는지 묻자 “파리는 우울하다”는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파리는 겨울이 길어요. 겨울이 우기이기도 하고. 3월 말부터 해가 조금 나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발작을 일으킬 정도로’ 좋아해요. 창의적인 것은 슬프고 상처가 깊을 때 폭발력 있게 만들어지는 것에 가깝거든요. 그런 환경이 창작을 가능하게 했던 것 같아요.”또 그는 “파리는 사랑하기 쉬운 곳”이라고도 했다. 한번은 파리 생마르탱 운하에 걸터앉아 메모를 하고 있는데, 한 노부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집에서 쓰던 그릇과 포크를 쟁반에 담아 소풍 나온 모습이었다. “무슨 글을 쓰냐”길래 “시 쓴다”고 답했더니 “집에 빈방이 있으니 거기서 쓰라”며 그를 데려갔다. “처음 갔을 땐 일주일 정도 있었고, 이후에도 두 번 정도 더 갔어요. 진짜 같이 먹고 자고 했죠. 그건 사랑이 많은 사람들인 거예요.”그는 책의 메시지를 이렇게 정리했다.“우리는 평균 속으로 들어가려 하고, 평균 이상이 되려는 욕망 속에서 살아요. 하지만 그게 아니어도 선택지는 많죠. 이 책을 통해 그 ‘다른 것들’을 들여다보고, 그 방향에서 희망을 느꼈으면 좋겠어요. 뻔한 길이 아닌 다른 길에도 충분한 희망과 빛이 있다고 생각하면, 사는 게 훨씬 재밌어지겠죠.”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 2025-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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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역사가 시험한 인생… 매큐언의 ‘70년 레슨’

    어릴 적 다니던 피아노 학원의 풍경을 떠올려 보자. 피아노 한 대와 의자가 겨우 들어가는 좁은 연습실. 연습이 한 번 끝날 때마다 빈칸을 빗금 쳐가며 지우던 기억. 작고 네모난 창문까지.‘부커상’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등을 수상한 영국 소설가 이언 매큐언의 신작 ‘레슨’은 바로 그런 장면으로 문을 연다. 열한 살 기숙학교 소년 롤런드가 좁은 방 안에서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있다. 강압적이면서도 어딘가 유혹적인 여교사와 단둘이서. 그녀가 불현듯 소년의 얼굴을 붙잡고 입술을 덮치는 순간, 소년은 창문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그림자를 포착한다. 바깥세상이 밀려들며 내밀한 공간을 흔드는 찰나다. 세상에 완전히 개인적인 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레슨’은 개인의 삶과 역사가 어떻게 맞물리는지를 탐구하는 소설이다. 가장 사적인 순간에 역사가 개입해 그것을 무너뜨리거나, 혹은 뜻밖의 방향으로 밀어주는 장면들이 반복된다. 매큐언은 세계사와 일상의 경이로운 얽힘을 보여주기 위해 주인공 롤런드 베인스의 삶을 70여 년에 걸쳐 추적한다. 기숙학교 신입생 롤런드는 카리스마와 관능을 겸비한 피아노 교사 미리엄 코넬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3년간 남몰래 연정을 품던 그는 쿠바 미사일 위기로 핵전쟁의 공포가 절정에 달하던 어느 날, 충동적으로 미리엄의 집을 찾아간다. 매큐언은 바로 이 장면에서 ‘역사’가 한 개인의 삶에 스며드는 지점을 포착한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절멸의 공포 속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느끼지 않았을 것이라고. 소설 곳곳에는 ‘만일’로 시작하는 사고실험이 등장한다. 만일 흐루쇼프가 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하지 않았더라면, 만일 케네디가 해군을 보내 그 섬을 봉쇄하지 않았더라면, 롤런드는 그날 자전거를 타고 선생의 시골집으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대학에 진학해 어문학을 공부하며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작은 역사적 결정이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다는 점에서, 매큐언은 ‘역사’와 ‘사생활’의 경계를 끊임없이 뒤흔든다.이 작품은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많이 담긴 소설로 꼽힌다. 매큐언은 주인공 롤런드와 동갑인 1948년생으로, 직업군인이던 아버지를 따라 해외를 전전하며 유년기를 보냈고, 11세에 부모 곁을 떠나 영국 공립 기숙학교에 입학했다. ‘속죄’ ‘칠드런 액트’ ‘암스테르담’ 등 세계적 베스트셀러를 써온 70대 중반의 작가가 이번에는 회고록에 가까운 소설을 통해 자신을 현재의 자리로 이끈 우연과 선택의 연쇄를 더듬는 듯하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이어지는 한 인물에 대한 긴 인생 서사가 무겁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럼에도 읽는 즐거움은 확실하다. 특히 각 시대를 풍미한 음악과 패션으로 세월의 질감을 드러내는 대목들이 그렇다. 열네 살 롤런드는 존 메이올과 에릭 클랩턴의 영향을 받아 머리를 길렀고, 롤링 스톤스 공연에서 본 브라이언 존스의 블랙진에 매료돼 발목이 낀 듯한 바지를 즐겨 입었다. 존 레넌보다 먼저 플라스틱 안경테를 착용하기도 했다. 사소한 취향과 유행의 단면 속에서 개인이 시대와 얼마나 밀접하게 얽혀 있는지, 매큐언은 정교한 세필로 그려낸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 2025-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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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근배 시인 “아버지께 큰절의 뜻으로 詩 올립니다”

    “새로 태어나는 기쁨으로 쓴 시들을 모았습니다.” 한국시인협회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등을 역임한 원로 시인 이근배 시인(85·사진)이 2019년 ‘대 백두에 바친다’ 이후 6년 만에 새 시집 ‘아버지의 훈장’(시인생각)을 펴냈다. 1930년대 중반 충남 아산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공로로 2020년 뒤늦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된 부친 이선준 씨(1911∼1966)에 대한 그리움과 곡절 많던 가족사를 담은 시들이 주로 수록됐다. 12일 서울 중구의 한 식당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 시인은 “전쟁으로 1년 남짓 같이 살다 헤어진 아버지가 뒤늦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건 놀라운 개벽 같은 일이었다”며 “아버지께 큰절을 올린다는 뜻으로 제목을 골랐다”고 말했다. 6·25전쟁 이후 부친의 남로당원 경력 등이 문제돼 온 가족이 오랫동안 힘든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는 1962∼1964년 다섯 개 일간지 신춘문예에 총 일곱 번,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신인예술상에 세 번 당선돼 ‘신춘문예 10관왕’으로도 유명하다. 이 시인은 “신춘문예에 당선된 작품들은 모두 분단에 대한 것이었다”며 “아버지 때문이라도 늘 조국 분단이 내 안에 박혀 있었다. (분단은) 민족이 공유한 화두지만 나는 그걸 시로 쓰는 데 꽂힌 셈”이라고 말했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 2025-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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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5세 김형석, 세계 최고령 저자 ‘셀프 경신’

    “사람이 ‘언제 늙는고’ 하니 ‘이젠 늙었다’ 생각할 때 늙어요.” 1920년 4월 23일생. 올해 105세인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가 12일 신간 ‘김형석, 백 년의 유산’(21세기북스·사진)을 펴냈다. 그는 이날 서울 중구의 한 식당에서 가진 간담회에서 “지금도 내 정신이 늙었단 생각은 하지 않는다”며 “사람들과 이렇게 ‘대화’하면 공감대가 생기지 않느냐”고 했다. 여전히 정정한 김 교수는 간담회 뒤엔 동아일보와 따로 만나 추가 인터뷰에도 응했다. 김 교수는 지난해 5월 인문서 ‘김형석, 백 년의 지혜’(21세기북스)를 펴낸 뒤 같은 해 9월 기네스북에 ‘세계 최고령 저자’로 이름을 올렸다. 이번 신간은 자기 기록을 경신한 셈. 그는 “(앞으로) 나보다 나이 많은 저자가 나올 테니 큰 관심은 없다”면서도 “한두 권쯤 더 쓰면 그땐 (기록 깰 이가) 잘 없으려나”라며 여유롭게 웃었다. 이번 신간은 동아일보에 연재 중인 ‘김형석 칼럼’ 등을 포함해 그가 평생 품어온 사랑에 대한 성찰을 담았다. 김 교수는 “인생이란 사랑의 나무를 키우는 것”이라며 “내가 사랑하는 제자들, 가난한 이들,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느끼는 이들에게 뭔가 주고 싶어 했던 게 지금에 이르렀다. 이렇게 살았더니 후회는 좀 적다”고 했다. 1945년 광복 당시 스물다섯이던 김 교수는 사상의 자유를 찾아 38선을 넘어 내려왔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엔 자유가 결핍된 시대를 체험한 이의 주체적 인간관이 묻어났다. “내 인생의 4분의 1을 일제강점기에 살며 ‘내 나라에 살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런데 공산 국가는 내 나라가 아닐뿐더러, 나라다운 나라도 아니었어요. 조심스러운 얘기지만 일제 강점기도 개인이 자기 사상을 갖고 살 수는 있었어요. 공산주의 세계에선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2년 뒤 38선을 넘어와 오늘이 된 겁니다.” 김 교수는 청년들에게도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길 당부했다. 그는 “30대 전후까지 ‘60∼70대엔 어떤 인생을 살게 될까’ 자화상을 그려봐야 한다”며 “그게 없으면 평생 내 인생을 살지 못한다”고 했다. 최근 화두인 인공지능(AI)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김 교수는 “인문학에선 하나의 물음에 하나의 답만 있는 게 아니다”며 “인문학도들도 AI 시대에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했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세 가지 원칙은 변하지 않습니다. 첫째, 진실과 거짓을 구분해야 합니다. 둘째, 양심에 비춰 선과 악을 구분해야 합니다. 셋째, 인간이 주인이란 생각을 버리면 안 됩니다. 이 세 가지만 지키면 어떤 시대라도 괜찮을 거예요.” 김 교수는 오랫동안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선생을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아왔다. 이날 역시 인촌에 대한 얘기를 먼저 꺼내며 그리움을 드러냈다. “인간은 인격만큼 존경을 받습니다. 인촌 선생은 제가 만나본 사람 가운데 인격적으로 가장 훌륭한 분이었어요. 그분을 보면서 인격이 무엇인가를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저만큼 높은 봉우리엔 오를 순 없겠구나 싶었죠.” 인터뷰와 간담회 내내 김 교수는 또렷하게 달변을 이어갔다. 이리도 맑은 정신으로 장수하는 비결이 있을까. “정서적 건강이 중요해요. 백 살이 됐을 때 같이 백 살 된 친구를 세어보니 7명이었어요. 모두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첫째, 남 욕하지 않습니다. 둘째, 화내지 않습니다. 물론 가장 좋은 노하우는, 실력 있는 가정의학과 의사를 만나 시키는 대로 하는 겁니다, 하하.”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 2025-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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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커상 후보 수전 최 “아버지는 트렁크 하나 들고 미국에 건너왔죠”

    “아버지는 한국의 유복한 가정을 떠나,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미국에 트렁크 하나 들고 건너왔습니다. 존재 전체를 바꿔야 했던 사람과 함께 성장한 건 제게 깊은 각인을 남겼습니다.” 장편소설 ‘플래시라이트(Flashlight)’로 세계적 권위의 문학상인 영국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한국계 미국인 작가 수전 최(56)가 9일(현지 시간) 영국 런던 주영한국문화원에서 개최한 북토크에 나섰다. 그는 이 자리에서 “통제 불가능한 외부 상황에 의해 인생이 형성되는 인물에 대해 쓰는 데 관심이 많다”며 “여기엔 아버지의 영향이 큰 것 같다”고 했다. 미 인디애나주에서 한국인 아버지와 유대계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최 작가는 텍사스에서 자랐다. 1990년 예일대 문학사 학사, 1995년 코넬대 문예창작학과 석사를 취득했다. 현재 펜 아메리카(PEN America) 이사로 활동하며 존스홉킨스대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치고 있다. 올해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그의 여섯 번째 장편 ‘플래시라이트’는 전후 재일교포 사회와 미국 교외를 배경으로 20세기 역사적 격랑 속에 휘말린 한 가족의 서사를 그린 작품이다. 부커상 심사위원단은 “대륙과 세기를 능숙하게 가로지르는 이 야심 찬 작품에서 수전 최는 역사적 긴장과 친밀한 드라마를 놀라운 우아함으로 균형 있게 담아냈다”고 평했다. 올해 부커상 수상작은 10일 오후 9시 반(한국 시간 11일 오전 6시 반) 영국 런던에서 열리는 시상식에서 발표된다. 소설은 재일교포로서 보이지 않는 차별을 겪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교수가 된 석, 그의 미국인 부인 앤, 딸 루이자의 수십 년에 걸친 삶을 따라간다. 작품 속 가족 구성은 작가의 실제 가족사와 닮았다. 최 작가는 1세대 영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최재서(1907∼1964)의 손녀다. 아버지 최창(1931∼2022)은 6·25전쟁 이후 도미해 인디애나주립대 수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최 작가는 주인공 석을 재일교포로 설정한 이유에 대해 “책을 쓰기 한참 전에 자이니치(재일교포)에 대해 알게 됐다”며 “이들이 20세기 전반 한국과 일본의 대단히 힘들고 복잡한 관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또 다른 창이 된다는 점에 매료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책을 쓸 때마다 창작적 혼란을 경험한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는 상태로 책을 시작하고, 절대로 개요를 짜지 않는다”며 “책에 담고 싶었던 몇 가지 요소에서 시작했지만, 책의 구조나 이야기의 흐름은 쓰면서 찾아낸다”고 했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 2025-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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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극단적 생애를 지닌 100년전 ‘그 작가’가 다시 주목받는 이유

    “미시마? 소설은 잘 쓰지. 그런데 작가는 별로.”소설가 양선형이 ‘일본 작가 미시마 유키오(1925~1970)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지인들에게 물었을 때 받은 답변이라고 한다. 그는 8월 출간한 에세이 ‘미시마의 도쿄’(소전서림)에서 “미시마만큼 독자를 난처하게 만드는, 나아가 해괴한 충격에 빠뜨리는 이도 드물다”고 썼다.미시마의 탄생 100년을 맞은 올해, 국내 문학계에서 조용하지만 뚜렷한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미출간 작품이 번역돼 나오는가 하면, 작가의 생애와 문학을 돌아보는 에세이도 잇따르고 있다. 1970년 천황제 부활을 촉구하며 할복으로 생을 마감하는 등 정치적 논란과 극단적 생애를 지닌 인물임에도 그의 문학이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올해 들어 그의 유작인 ‘풍요의 바다’ 4부작(민음사)과 단편 12편을 모은 첫 단편선집 ‘시를 쓰는 소년’(시와서)이 처음 번역돼 출간됐다. 국내 최다 단편(24편)을 수록한 단편선집 ‘미시마 유키오’(현대문학)도 이달 중순 출간을 앞두고 있다. 대중적인 장르 소설 ‘목숨을 팝니다’(알에이치코리아)도 새 번역본으로 출간됐다. 출판계에선 미시마가 그려낸 ‘인물’에 주목한다. 그의 작품에는 균열을 안고 흔들리는 인물이 등장한다. 정체성, 자존감, 고립감 같은 주제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작가였기에, 그만큼 현대적 재해석의 여지가 크다. 자전적 소설 ‘가면의 고백’(1949)의 주인공은 자신의 욕망을 감추기 위해 끊임없이 ‘정상’을 연기하지만, 그 연기가 무너질까 두려워한다. 대표작 ‘금각사’(1956)의 미조구치 역시 결핍에서 출발해 파국으로 끝난다. 말더듬이라는 콤플렉스와 타자와의 단절 속에서 그는 ‘아름다움’만을 절대적 가치로 붙든다. 그 숭배는 집착으로 변해 결국 금각사를 불태우는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진다.강연옥 현대문학 단행본1팀장은 “부잣집 도련님 시절부터 자위대에 가고자 했지만 심신이 건강치 못해 거부당했던 경험, 동성애 경험, 할복까지, 드라마틱한 미시마의 삶이 각각의 작품 안에 스며들어 있다”며 “물론 작가와 작품을 분리해서 봐야 하는 측면도 있지만, 삶의 연대기가 공교롭게 작품의 주요 소재로 들어가 자전적 소설을 읽는 듯한 재미가 있다”고 했다. “‘인간실격’의 다자이 오사무와는 또 다른 허무와 쓸쓸함의 정서가 있다”고 덧붙였다.문체와 재미 그 자체도 미시마 작품의 매력으로 꼽힌다. ‘풍요의 바다’를 편집한 박지아 민음사 해외문학팀 차장은 “오늘날 웹소설이라 해도 될 만큼 읽는 재미가 있다”며 “자기 친구를 환생된 상태로 계속 만나는데,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극한의 재미에 도달하면서도 동시에 ‘공(空)’과 같은 불교적 주제를 진하게 느끼게 만든다”고 했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 2025-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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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마약 조직에 딸 잃은 엄마, 끝까지 쫓다

    2014년 1월 24일, 멕시코에서 가장 폭력적인 카르텔 조직 ‘세타스’가 21세 여대생을 납치했다. 가족은 딸을 구하기 위해 평생 모은 돈에 은행 대출까지 받았다. 모두 합쳐 1만 달러(약 1450만 원)가 좀 안 됐지만 있는 대로 끌어모았다. 가족은 이후에도 몸값을 두 차례나 냈지만, 돌아오는 건 또 다른 요구뿐이었다. 납치범들은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가족의 절박함을 집요하게 악용했다. 그리고, 딸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마약 카르텔에 딸을 잃고 복수에 나선 어머니, 미리암 로드리게스의 일대기를 담은 르포르타주다. 미국 뉴욕타임스(NYT) 국제 탐사보도 특파원으로 2025년 퓰리처상 해설 보도 부문을 받은 저자가 사건 관계자의 인터뷰와 방대한 기록을 바탕으로 당시 상황을 복원했다. 책은 미리암의 고군분투뿐 아니라 폭력이 일상화된 멕시코 현대사를 교차해 가며 국가의 모순을 그려 낸다. 미리암은 납치 용의자를 직접 추적했다. 조직원이 소셜미디어에 올린 사진 속 아이스크림 체인점 로고 하나를 단서 삼아, 주(州) 전역의 매장 수십 곳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몇 시간씩 잠복했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밝은 빨간색으로 염색하며 외모를 바꿨고, 보건부 공무원으로 위장해 공무원증을 목에 건 채 일대 가가호호를 돌며 가짜 설문조사까지 했다. 그리고 마침내 용의자의 실명과 생년월일(1994년 12월 23일)을 확보했다. 실명을 알아야 고소도, 체포영장 청구 압박도 가능했다. 그는 경찰에게 자신이 수집한 정보를 전달했고, 수사 진행이 더디면 공식 요청서를 보내 수사관들을 재촉했다. 제도가 무너질 대로 무너진 가운데, 공권력을 그나마 움직이게 만들기 위해서는 인내와 끈질긴 인맥 쌓기가 필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범인 일부가 어머니가 제공한 단서를 바탕으로 한 소탕 작전에서 사살되거나 체포돼 수감됐다.저자는 이토록 극단적인 폭력이 어떻게 일상이 됐는지 역사적 배경을 짚는다. 폭력에 길들여진 지역사회, 조직범죄와 결탁한 공권력, 오랫동안 유지된 일당 독재가 그 원인으로 제시된다. 미리암이 살던 타마울리파스주는 미국과 멕시코 국경의 주요 관문으로, 마약 밀수를 둘러싼 카르텔 간 전쟁이 격렬했던 지역이다. 특히 멕시코 육군 특수부대 출신 탈영병들로 구성된 세타스는 참수, 산 채로 황산에 녹이는 고문, 무차별 학살 등을 저질렀다. 2011년 멕시코의 살인 사건은 2만8000건에 이르렀다. 정부가 통계를 내기 시작한 이후 최악의 기록이다. 지역 은행들은 납치 피해자 가족을 위한 ‘몸값 대출 상품’까지 내놓을 정도였다. 납치가 얼마나 일상화됐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세타스에 맞선 지 3년이 지난 2017년 5월 10일, 미리암은 괴한 두 명에게 총 8발을 맞고 목숨을 잃었다. 당시 그의 손은 늘 권총을 넣어 다니던 핸드백 안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 최근 캄보디아 한국인 대학생 납치·살인 사건을 떠올려보면, 멕시코의 마약·폭력 문제가 이젠 그저 먼 나라의 비극만은 아니다. 딸의 실종을 파헤치다 숨진 미리암의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건, 근본까지 망가진 제도 앞에서 ‘당위’와 ‘정의’란 게 얼마나 무력한지다. 불의에 맞섰고, 정부를 움직였으며, 시대의 패러다임을 바꾸기 위해 한 시민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 미리암의 삶은 그래서 더욱 울림이 크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 2025-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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