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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사 중에 진행되는 사제의 강론은 8분을 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집중력을 잃고 잠이 들고 마니까요. 사제는 때때로 말을 너무 많이 해서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2024년 6월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주례한 알현 중)● “이것은 전쟁이 아닙니다. 아이들에게 폭격을 가하는 것은 ‘잔학 행위’일 뿐입니다. 마음에 와닿기 때문에 이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2024년 12월 바티칸에서 진행한 크리스마스 연례 연설 중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공습을 비판하며)● “제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여러분의 신앙을 희석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오렌지나 사과, 바나나를 희석한 주스를 마십니다. 하지만 희석된 상태의 신앙을 마시지는 마십시오. 신앙은 여러분이 희석하는 다른 것과는 달리 전부이며 완전해야 합니다.”(2013년 7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세계청년대회 중)● “마피아처럼 악의 길을 따르는 자들은 신과 교감하지 않습니다. 마피아 단원들은 파문됐습니다.”(2014년 6월 이탈리아 범죄집단 마피아의 한 파벌인 ‘은드란게타’의 본거지 칼라브리아주에서 연 미사에서)● “돈이 (인간에게) 봉사하는 게 아니라 지배하는, 배제와 불평등의 경제에 대해서 단호히 ‘아니오’라고 말합시다. 이러한 경제는 우리 모두를 죽입니다. 이러한 경제는 우리를 배제합니다. 이러한 경제는 우리의 어머니인 지구를 파괴합니다.”(2015년 7월 9일 볼리비아에서 열린 민중운동세계대회 메시지 중)● “이민자들은 가난, 기아, 착취에서 벗어나고,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어야 하는 이 지구 자원의 불공정한 분배에서 벗어나 보다 더 나은 삶을 찾아 나서는 우리의 형제자매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생활 조건을 개선하고,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나눌 올바르고 떳떳한 행복을 얻고자 하지 않습니까?”(2016년 4월 ‘세계 이민의 날’ 담화 중)● “교회는 전투가 끝난 뒤의 야전병원입니다. 심각하게 다친 사람에게 콜레스테롤이 높은가, 혈당치가 어떤지 물어보는 일은 쓸모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가 입은 상처를 치유하고 나서야 나머지 것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2013년 8월 언론 인터뷰 중)● “가톨릭교회 내에서도 과학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무리 부정하고 숨기고 은폐하려고 해도 기후 위기의 징후는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희망이 없다는 식의 태도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기후 위기의 영향에 노출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자살행위입니다.”(2023년 10월 발표한 생태회칙 ‘찬미받으소서’ 중)●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며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습니다. 모든 시민권은 생명권이라는 가장 우선적이며 궁극적인 권리를 인정하는 것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생명권은 경제, 이념을 비롯한 어떤 조건에서도 종속되지 않습니다.”(2014년 4월 이탈리아 프로라이프 캠페인 중에서)● “민간인에 대한 폭격은 어떤 경우에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병원이 파괴되고 한 국가의 에너지망이 공격받아 아이들이 얼어 죽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2025년 1월 바티칸에서 열린 주교황청 외교사절 신년교례회에서)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21일(현지 시간)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평생 가난한 이들과 어울리며 복음을 실천한 인물이다.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2013년 3월 즉위해, 가톨릭 교회 2000년 사상 첫 남미 출신이자 1282년 만의 비(非)유럽권 교황이란 기록도 세웠다.교황은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장 시절에도 허름한 아파트에 살며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이런 소탈한 모습은 2019년 영화 ‘두 교황(The Two Popes)’에도 소개됐다. 교황청 방문 때도 주로 대중교통을 이용했던 그는 “교황청 방문할 돈으로 빈자들에게 기부하라”고 했다.● “하느님 가르침을 따른 평범한 사람”‘아시시의 프란치스코’에서 즉위명을 딴 프란치스코 교황은 1936년 12월 17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철도 노동자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명은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교황은 평소 어린 시절을 “고집불통에다 주먹이 먼저 나가던 문제아”라고 회고했다. 교황은 자서전에서 “여느 소년과 다를 바 없지만, 주님에게서 큰 선물을 받았다”며 “바로 부끄러워할 줄 아는 수치심”이라고 술회했다.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지만, 1958년 예수회에 입문해 수도사의 길을 걸었다. 젊은 시절 폐렴 합병증으로 한쪽 폐를 떼어냈는데, 이 때문에 말년에 잦은 호흡기 질환으로 고생했다.소탈한 면모는 교황 선출을 위한 콘클라베 참석 때도 드러났다. 구두가 낡아 신부들이 새 구두를 사드렸을 정도였다. 가톨릭에서 추기경은 에미넨차(Eminenza), 주교는 에첼렌차(Eccellenza)로 부른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친근한 ‘파드레(신부)’로 불러주길 원했다.프란치스코 교황은 고령과 건강을 이유로 자진 사퇴한 베네딕토 16세에 이어 교황으로 선출됐다. 교황청 안팎에 대한 신뢰 회복이 절실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교황은 평소 “교회 기본 정신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며 “초창기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 바른 해법”이라고 강조했다. 교황에 오른 뒤엔 교황궁 전용 숙소를 거부하고 사제들의 공동 숙소인 카사산타마르타에서 생활했다.교황은 교회 내부 개혁에도 힘썼다. 취임 시 직원들에게 보너스를 주던 관례를 폐지하고, 바티칸 은행감독위원회가 매년 추기경들에게 지급하던 보너스도 없앴다. 교황청 부속 연구소들과 바티칸시국 부서들의 경제 운용 문제를 조정하는 ‘재무심의회(Consiglio per L’Economia)’도 신설했다.● “타인의 비극에 눈감지 말라”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관한 관심과 지원은 교황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취임 넉 달 만에 교황청 밖 첫 미사를 이탈리아 최남단 람페두사섬에서 집전했다. 이 섬은 정치 불안과 가난을 피해 유럽으로 가는 북아프리카 난민들의 경유지였다.2014년 6월 중동을 방문해 평화 기도회를 열기도 했다. 교황은 당시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대통령과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이 참석한 가운데 “이 땅은 평화 정착에 성공할 기회가 있었지만 실패했고, 이것이 우리가 여기에 모인 이유”라고 했다.논쟁적인 사회 문제에도 전향적이었다. 2016년 “예수도 난민이었다”며 바티칸 특별미사에 빈민과 난민 6000여 명을 초대했다. 2023년엔 로마 가톨릭 사제들의 동성 커플에 대한 축복을 공식 승인해 “가톨릭 교회의 중대한 변화”라는 평가를 받았다.교황의 인기에 힘입어 신자 수가 늘어나며 ‘프란치스코 효과’란 신조어도 나왔다. 교황이 미사에 입장하면 성당 곳곳에서 주교와 추기경들이 스마트폰을 꺼내 들곤 했다. 교황의 공식 ‘X’ 팔로어는 현재 1864만 명에 이른다.교황은 즉위 10주년 인터뷰에서 소망을 묻자 “평화”라는 한 단어로 답했다. 그는 “타인의 비극에 눈을 감고 ‘내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무관심”이라며 국제사회에 ‘무관심의 세계화’를 경계할 것을 촉구했다.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가톨릭 사상 첫 남미 출신으로 ‘가난한 이들의 성자’로 불렸던 프란치스코 교황이 21일(현지 시간) 선종(善終)했다. 향년 88세.교황청 궁무처장인 케빈 페렐 추기경은 이날 “프란치스코 교황이 오늘 오전 7시 35분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셨다”라며 “그는 우리에게 복음의 가치를 충실히 하고, 용기를 갖고 보편적인 사랑을 실천하며 살도록 가르쳤다”고 발표했다. 페렐 추기경은 이어 “교황은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헌신했다”며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로서 보여준 모범에 대해 깊은 감사를 표한다”라고 덧붙였다.2013년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된 프란치스코 교황은 재위 12년 동안 청빈하고 소탈한 행보로 세계적인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평소 호흡기가 약했던 교황은 올해 2월 14일 이탈리아 로마 제멜리 병원에 입원해 폐렴이 확인돼 “심각한 상황”이란 진단을 받았다. 젊은 시절 폐렴을 앓아 한쪽 폐 일부를 절제한 것으로 알려진 교황은 겨울이면 만성 호흡기 질환에 시달려 왔다.한때 위중한 상태에 빠졌던 교황은 상태가 호전되며 지난달 23일 38일간의 입원을 마치고 퇴원했다. 이후 찰스 3세 영국 국왕을 접견하고 로마 시내 교도소를 방문하는 등 조금씩 활동을 재개했다. 선종 전날인 20일 부활절 대축일에도 성 베드로 광장에 모습을 드러내 부활절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장례는 교황의 생전 뜻에 따라 간소하게 치러질 것으로 보인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최근 발간된 자서전 ‘희망’에서 “장례 준비는 끝났다. 교황 장례 예식이 성대해 담당자와 상의해 간소화했다”며 “품위는 지키되, 다른 그리스도인들처럼 소박하게 치르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이에 장례 규정을 개정해 역대 교황들이 묻힌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이 아닌 로마 시내에 있는 산타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에 안장될 예정이다.교황의 선종에 따라 바티칸 애도 의식은 9일간 이어진다. 교황청은 21일 오후 8시경 교황 거처인 카사산타마르타 예배당에 마련된 관에 유해를 안치하며 장례 절차에 들어갔다. 일반인 조문은 23일부터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장례식과 안장 일정은 향후 추기경들이 결정한다.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유럽의 오래된 박물관이나 성당에는 대부분 성유물(聖遺物) 전시관이 있다. 성인(聖人)들의 것으로 알려진 손가락뼈, 넓적다리뼈 심지어 아래턱뼈 등 신체의 일부를 전시해 놓은 공간인데, 중세 유럽의 경우 유명 성인의 유해를 안치한 곳은 몰려드는 순례자들 때문에 지역 경제가 바뀔 정도였다고 한다. 성유물 하나 없는 곳은 보잘것없는 곳으로 치부됐기 때문에 교황청에서 유해를 조금씩 잘라 보내주기도 했다고 하니, 당시 신자들의 성유물 숭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만하다.분자생물학자이자 임상의학 전문가인 저자가 과거부터 현재까지 유명한 사람들의 신체 일부를 소유하고 숭배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사회문화적으로 풀어냈다. 아인슈타인의 뇌, 나폴레옹의 음경, 갈릴레오의 가운뎃손가락, 최초의 여성 극지탐험가 프론치셰바의 잇몸 등 다양한 신체 일부가 등장하는데, 각각의 부위에 얽힌 사연도 함께 서술했다. “아인슈타인은 죽고 나면 자기 머리를 노리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걸 잘 알았다. 그래서 자기 머리가 해부되거나 전시되는 걸 원치 않는다고 분명히 말했다. …안타깝게도 그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이 사망한 지 몇 시간 만에 그의 머리가 사라졌다.”(4장 ‘아인슈타인의 도둑맞은 두뇌’ 중)아인슈타인의 뇌는 부검의에 의해 240조각으로 잘려 실험되고, 일부는 미국과 전 세계 과학자들에게 보내졌다. 도대체 무엇을 알고 싶었던 것일까? 아인슈타인의 천재성을 밝히기 위한 그들의 기괴한 연구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아인슈타인의 뇌 대부분이 비교 대상인 일반적인 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결론만 남겼다고 말한다.저자는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아인슈타인의 예처럼 불과 70∼80년 전까지만 해도 호기심 또는 주술적인 이유로 시체에서 신체 일부를 떼어내고, 보관하고 소유하는 일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관습은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오늘날에도 경제적 이득을 위해 신체 부위를 사고파는 암시장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원제 ‘Vital organs: a history of the world’s most famous body parts’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지난달 23일(현지 시각) 퇴원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부활절을 앞두고 이탈리아 로마 시내의 한 교도소를 깜짝 방문해 묵주 등을 선물하며 격려했다.17일(현지 시각) 교황청에 따르면 교황은 부활절을 사흘 앞둔 성목요일인 이날 로마 레지나 코엘리 교도소를 찾아 재소자들에게 “여러분 곁에 있고 싶었다”라며 인사를 전했다. 이날 교황은 신의 대리자를 상징하는 흰색 주케토(모자)와 수단을 입고 휠체어에 앉아 이동했다. 30여 분간 교도소에 머물며 70여 명의 재소자들을 만난 교황은 “나는 항상 예수님처럼 성 목요일에 감옥에 와서 발 씻는 것을 좋아했다”라며 “올해는 할 수 없지만 여러분과 가까이 있고 싶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족을 위해 기도한다”라고 말했다. 로마 시내 중심부의 트라스테베레 지구에 있는 레지나 코엘리 교도소에는 1100여 명의 재소자가 있으며, 이탈리아 내에서도 과밀 문제가 가장 심각한 곳으로 꼽힌다2013년 즉위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매년 성목요일에 교도소, 난민센터, 노인 요양원 등을 방문해 세족식을 진행했다. 성목요일 세족식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하루 전 최후의 만찬을 하기에 앞서 열 두 제자들의 발을 씻겨준 것에서 비롯된 의식. 프란치스코 교황은 즉위 후 ‘가장 가난한 자를 위한 가난한 교회’를 강조하며, 교회가 사회의 낮은 자리로 다가가야 한다는 소신을 밝혀왔다. 교황은 매년 성목요일 세족 의식을 열어 소외된 사람들을 만나는 기회로 삼아 왔지만 올해 세족식은 건강 상태를 고려해 생략됐다.프란치스코 교황 담당 의료진은 최소 두 달간 휴식을 권고했지만, 최근 교황은 건강이 회복되며 외부 활동을 늘려가고 있다. 이에따라 교황이 20일 부활절 미사에 직접 나설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광복 80주년과 불기 2569년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독립운동가이자 불교 개혁운동가인 용성 대종사(1864~1940)를 기리는 봉축음악회가 열린다.대한불교조계종 불교음악원(원장 박범훈)과 평택시립국악관현악단은 29일 경기 평택 한국소리터 지영희홀(오후 7시 반), 30일 서울 서초구 국립국악원 예악당(오후 7시)에서 ‘광복 80주년 기념 봉축음악회 교성곡 용성’을 개최한다. 용성 대종사는 1919년 3·1운동 민족 대표 33인으로 참여한 독립운동가이자 불교 근대화와 개혁, 대중화에 앞장선 한국 근세 불교 중흥조. 임시정부에 독립 자금을 지원하고, 독립운동가를 양성하는 등 만해 한용운 스님과 함께 불교계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손꼽힌다. 독립운동에 이바지한 공을 인정받아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받았다.1, 2부로 진행되는 ‘용성’은 용성 대종사의 삶과 역사, 출생과 유년 시절, 출가와 시련, 3·1운동 등 파란만장한 삶의 굴절을 국악관현악 반주와 합창, 독창 등으로 선보인다. 박범훈 불교음악원장은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을 이끌었으며 조선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잃었던 나라를 찾기 위해 노력했던 용성스님의 정신을 기리는 무대를 통해 민족정신을 배양하는 소중한 기회를 선사할 것”이라고 밝혔다.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올해는 기독교 한국 선교 140주년 되는 해. 한국 개신교계는 1885년 4월 아펜젤러 선교사(1858∼1902·미국 북감리회)와 언더우드 선교사(1859∼1916·미국 북장로회)가 인천항에 도착한 때부터 공식적으로 한국 선교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기독교는 140년 동안 종교를 넘어 정치, 문화, 경제, 사회, 교육 등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게 하는 초석이 됐다. 대한민국의 오늘을 만든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모습을 정리했다.1.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 근대교육기관 설립개신교 중 가장 먼저 한국에 발을 디딘 미국 북장로회와 미국 북감리회는 선교 일환으로 학교 설립을 서둘렀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각각 언더우드 학당과 배재학당을 설립했는데 뒤를 이어 한국에 도착한 미국 남장로회와 호주, 캐나다 장로회 등은 물론 성공회, 구세군 등 군소교파까지도 학교 설립을 선교의 주요 사업으로 삼았다. 1885년 8월 아펜젤러 선교사가 서울 정동에 문을 연 배재학당(남학교)은 한국 최초의 근대 학교가 됐다. 이듬해인 1886년 5월 서울 정동에는 미국 감리교회 선교사 스크랜튼 여사가 여학교인 이화학당(현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을 설립했다. 이화학당은 당시 여성 차별로 인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던 이 땅의 여성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줬다.서울에서 미 북장로회가 주도한 교육사업 중 가장 큰 성과는 연희전문(현 연세대학교의 전신)의 설립. 1912년 언더우드 선교사는 한국에서 대학을 설립하기 위해 미국에서 대대적인 모금 운동을 벌였고 미국 독지가 스팀슨 등의 기부금으로 현재의 신촌 캠퍼스 부지를 마련했다. 1917년 4월 설립 인가를 받은 연희전문학교는 이후 세브란스 의전과의 통합을 거쳐 현재의 연세대학교로 발전했다.2. 여성 교육과 여권 신장의 산실기독교가 이 땅의 여성 문제,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기본적 인권 회복에 끼친 영향은 실로 혁명적로, 한국 근대 여성운동은 기독교의 전래와 발전에 거의 모든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녀 평등사상은 기독교에 앞서 천주교가 이 땅에 전래하면서 시작했다. 하지만 그 양과 질에서 여성의 지위 향상이 본격적으로 이뤄진 것은 개신교 선교와 함께였다. 복음이 전파된 뒤 감리교에서는 전득삼이, 장로교에서는 한씨 부인이 여성으로서 처음으로 세례를 받았는데 이는 남존여비 사상이 뿌리 깊던 당시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영혼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계기가 됐다. 여성들은 예수 앞에서는 남녀가 평등하다는 것을 알게 됐고 갇혀 살던 규방 생활에서 나와 일요일에는 교회에 나가 남성과 마찬가지로 예배드리는 행동으로 이어졌다.예배 참석은 여성 교육으로 이어졌다. 성경을 읽기 위해서는 한글을 배워야만 했기 때문이다. 자기 의사를 문자로 표현할 수 있게 된 여성들은 전보다 훨씬 더 당당하게 사회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해 나갔다. 3. 항일과 독립운동100여 년 전 이 땅에 선교사들이 뿌린 씨앗은 대한민국이 독립하고 성장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06년 프랭클린 윌리엄스 선교사(1883∼1962)가 충남 공주에 세운 기독교 사립학교인 영명학교는 유관순 열사의 모교. 1914년 12세의 나이로 입학한 유관순 열사는 이곳에서 2년여를 수학한 뒤 엘리스 샤프 선교사의 추천으로 서울 이화학당에 진학했다.1919년 일본 동경에서 벌어진 2·8 독립선언은 유학 중인 기독교계 학생들이 중심이 된 거사다. 그 구심점은 동경의 조선 YMCA였고 이 때문에 선언 장소도 YMCA였다. 이후 3·1운동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기독교계 학교와 학생들이 차지한 비중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당시 연희전문학교 학생 등 기독교계 학생들은 민족지도자들의 3·1운동과는 별개로 기독교 학교 학생연합체가 주도하는 전민족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했다. 이들은 서울 숭동교회를 회합 장소로 사용하면서 독자적인 선언서를 준비하는 등 구체적인 단계까지 운동을 추진했다. 그러나 추진 과정에서 민족지도자들의 3·1운동 계획을 알고 이에 합류하게 된다.4. 개화의 산실이 된 기독교선교사들은 수백 년간 내려온 구습(舊習)을 타파하고 풍속을 개량하기 위해 애를 썼다. 선교를 위해 지방을 다니던 한 선교사는 “내가 시골 농가에 가서 보니 방 안에 더러운 흙만 붙이고 종이로 도배하지 아니하고, 또 방을 쓸지도 아니하기에 그 이유를 물으니 ‘우리 농부의 집은 정결하게 하면 못 쓰는 게 풍속이다’라고 했다”라며 당시 농촌 실정을 지적했다. 또 “병이 들어 치료하고 약을 쓰는 데도 위생 등 이치는 상관하지 않고 자기 풍속만 지키고 있었다”라고 적었다. 이런 선교사들의 인식은 이 땅에서 미신, 아편 등을 몰아내고 허례허식에 물든 관혼상제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됐다.5. 술, 담배, 아편과의 전쟁19세기 말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술과 담배, 아편의 폐해를 목격하고 이를 막기 위해 금주·금연 운동을 시작했다.1895년 장로교회와 1897년 감리교회는 세례 조건으로 금주·금연을 요구했으며 이는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 형성을 위한 윤리적 규칙이기도 했다. 금주·금연은 초기 한국 교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표지였고 새로운 인간상과 국가 건설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교회의 금주·금연 운동이 단순히 기독교적인 윤리 운동 차원을 넘어 민족 운동에 이바지하게 된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한국 사람들이 소비하는 돈의 상당 부분이 술과 담배, 아편으로 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막거나 줄이고, 대신 우리 물건 사기 운동을 펼치면 첫째 자신의 건강과 사회적 폐해를 줄이는 것은 물론이고 민족 자본 형성에도 도움이 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1920년대 들어 교회의 금주·금연 운동은 민족적 차원으로 확대됐는데 총독부 정책에 호응하는 친일파의 모습과 이에 대비되는 교회의 금주 운동은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고 국채보상운동 등 구국 운동과 연결되며 민족의식을 고취했다.6. 근대 의료기관의 확대선교사들이 이 땅에서 처음 시작한 일들은 당시 사람들이 원하던 교육과 의료 부문부터 시작됐다. 영혼의 구원과 함께 육신의 치료에 힘쓰고 무지를 계몽해 새로운 세계를 밝혀주는 게 선교의 첩경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정부의 포교 금지 정책을 완화하는 데도 효과적이었다. 당시 선교사들이 병원과 학교 설립에 주력한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병원은 학교에 비해 남녀노소, 신분에 차이 없이 누구나 이용하고 혜택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선교의 큰 수단이 됐다.대표적인 예가 조선 최초의 근대식 종합병원인 세브란스병원이다. 1904년 9월 설립된 이 병원은 설립 기금 1만 달러를 헌금한 루이스 세브란스의 이름을 땄는데 1909년 세브란스 의학교 인가를 받고, 1947년 세브란스 의과대학으로 승격했다.1887년 10월 문을 연 보구녀관(普救女館)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여성 병원이자 여성 의학교육 기관이다. 보구녀관은 ‘모든 여성을 위한 병원’이란 뜻으로 남성 의사에게 진료받지 못하는 여성을 위해 메타 하워드 선교사를 비롯한 여성 의료 선교사들이 진료에 나섰다. 지금의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이화의료원의 전신으로 보구녀관은 진료 외에 의료 선교와 의학교육, 간호교육에도 매진해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 박에스더와 최초의 간호사 이그레이스, 김마르다를 배출했다.7. 우상과 미신의 타파초기 선교사들에게 한국 사회에 뿌리 깊게 배어 있는 미신과 우상 신봉 문화는 그 고유의 역사성을 인정하면서도 바꿔야 할 대상이기도 했다. 알렌은 ‘한국의 풍습, 무당’이란 글에서 당시 미신과 관련된 모습을 이렇게 서술했다.“서울의 밤은 매우 조용한데 정적을 깨뜨리는 소리 중 하나가 무당이 내는 소리다. 무당의 말을 믿는 사람은 대부분 하층민이다. 사용하는 도구는 장구, 심벌, 구리 막대기, 징, 바구니, 우산, 부채, 인형 등이며 이 중 바구니는 콜레라에 걸린 사람의 몸에 쥐가 있다고 믿고 고양이 소리를 내면서 긁는 도구로 쓰인다. 그리고 환자의 상태에 따라 무당은 사용하는 도구나 인형 등을 결정한다.”초기 내한 선교사들은 한국의 일상이 돼 버린 우상과 미신을 보면서 이런 현실을 시정하고자 했다. 이런 일 역시 교육이나 의료 활동을 통해 점차 시정될 수 있을 것으로 봤고 이의 타파를 계몽하고자 했다.8. 노비와 백정의 해방계급 타파와 평등의 이상 실현에서 교회의 백정(白丁) 해방운동만큼 우여곡절이 많았던 것도 없다. 이들은 호적에서 제외된 천민 계급으로 가장 비천한 하층 구성원이었다. 비록 갑오경장(1894년)으로 제도상 신분적 평등이 보장됐다고는 하지만 오랜 관습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었다.교회가 이런 상황에 관심을 보인 것은 1895년 4월이었는데 서울 곤당골 장로교회(승동교회) 무어 선교사(1860∼1906)는 조정에 보낸 진정서를 통해 백정들의 가련한 상태를 낱낱이 알리면서 비인도적인 천대를 막아달라고 건의했다. 이런 노력으로 같은 해 5월 전국에 백정에 대한 신분 해방과 갓 착용 허용을 알리는 방이 붙었고 승동교회에는 6명의 백정이 입교했다. 하지만 문제는 간단하지 않았다. 어제까지 백정이었던 사람이 양반 신자들에게 “형제”라고 부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 장로교 선교활동으로 전국에서 입교한 교인이 200여 명에 불과하던 시절에 6명이나 되는 백정의 입교는 그 자체로 큰 진통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 교회의 공식적인 회의록이나 문서 등에 이런 백정 문제가 거의 언급되지 않은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그러나 교회가 시작한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인식은 이후 실질적인 신분 타파 사회로 나아가는 마중물이 됐다.9. 한글의 보급과 재발견선교사들은 한글을 보급하고 대중화시키는 데도 힘을 썼다. 교회에서 말씀의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성경을 보급해야만 했고 이를 위해서는 한글을 가르치는 것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교인 중에 한문으로 성경을 보는 이도 별로 없고, 더구나 국문으로 보는 이도 몇이 못 된다. 금년부터는 주일 오후마다 국문 공부를 착실히 한다 하니 성경의 뜻을 많이 깨닫고 영혼의 양식을 넉넉히 만들기에 유조할 뿐더러 문자상에도 유식한 사람들이 되겠더라’ (1902년 5월 경기 남방지역의 한 교회 통신 중)교회의 성경을 통한 한글 보급은 결과적으로 문맹 퇴치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리고 그 상당수는 배움의 기회를 가지지 못했던 부녀자들이었다. 당연히 성경 보급도 크게 늘었는데 1886년까지 1만5690권이던 성경 보급은 1887년 한 해에만 6600권이, 1892년까지는 57만8000권이 보급됐다. 이런 분위기는 1893년 성경의 번역과 출판을 담당하는 기구인 대한성교서회 창설로 이어졌다. 10. 출판 문화의 보급1885년 한국지부를 설치한 대영 성서공회가 1936년까지 이 땅에서 출판한 성경은 무려 1807만9466권에 이른다. 전체 국민이 2000만 명 남짓하던 시대에 성경 출판 1800만 권이란 숫자는 기독교가 이 땅의 출판문화에 얼마나 이바지했는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한국 선교에서 출판과 인쇄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인식한 것은 1885년 아펜젤러, 스크랜튼 선교사 등을 파견한 미 북감리교 선교부였다. 북감리교 선교부는 한국에서의 출판 사업을 위해 1887년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던 올링거 목사(1845∼1919)를 파견했다. 그는 영어, 한문, 한국어를 인쇄하는 삼문출판소를 설립하고 기독교문서협회도 창립해 초대 회장이 됐다. 1892년 그가 월간지로 간행한 ‘Korean Repository(한국 지식·정보 보관소)’는 당시 한국 사정을 과학적·문헌적으로 제공하는 가장 권위 있는 자료이기도 했다.올링거 목사로부터 시작된 기독교 서적 출판의 역사는 이후 1893년 감리교 선교사로 다시 내한한 헐버트로 이어졌고, 이후 국내외 종교인들과 신자들이 각종 출판사를 설립하고 서적을 출간하며 기독교를 넘어 한국 출판문화로 성장했다.우는 자와 함께 울라… 어려운 이와 함께 한 140년11. 사회복지 사업의 초석지역과 사회를 위한 복지 사업은 이 땅에 기독교가 전래한 이래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온 정신이다. 이런 활동은 개화기, 일제강점기는 물론 6·25전쟁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데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심장병 환자 무료 수술·엘림복지타운 건설 등이 대표적이다.여의도순복음교회의 심장병 환자 무료 수술은 1984년 21명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6000여 명이 넘는 환자들에게 새 생명을 줬다. 대상 국가도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몽골 등으로 확대됐고 특히 지난해 7월에는 6·25전쟁 당시 유엔군으로 참전한 에티오피아 용사의 손자 테카렌 메릿 베주아엣(7세) 어린이를 포함해 5명의 어린이가 무사히 수술받고 여의도순복음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하기도 했다.여의도순복음교회가 1988년 7월 경기 군포시에 준공한 엘림복지타운은 불우청소년과 무의탁 노인들을 위한 복지시설. 약 6만6000㎡(2만여 평)의 부지에서 500여 명의 불우청소년들에게 다양한 분야의 직업 교육을 제공하고 200여 명의 무의탁 노인을 수용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동양 최대 복지시설이었다. 1988년 경로원과 직업전문학교로 시작한 엘림복지타운은 1994년 선교원, 1997년 요양원을 개원했다.12. 시민운동의 산실이 되다한국기독교청년회(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YMCA)는 일제강점기 민족 근대화와 독립운동에 가장 앞장선, 오래된 시민단체 중 하나. 현재 국내에서 활동하는 모든 시민단체의 모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화기인 1903년 영국의 복음주의 개신교인들이 들여왔는데 당시에는 황성기독교청년회라고 불리며 개신교와 서양 문화 유입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이 단체를 통해 이 땅에 야구, 농구, 배구, 수영이 들어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이승만 대통령도 1910∼1912년 YMCA 간사로 재직하며 교회 설교, 성경연구반 인도, 전국적인 YMCA망 구축, 번역 사업 등을 맡았다.일제강점기 많은 지식인과 독립운동가들이 YMCA와 인연을 맺었는데 이는 2·8 독립선언과 3·1운동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시민운동의 정신은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져 부마민주항쟁 당시 노무현 변호사가 부산YMCA 이사와 시민중계실 법률 자문을 맡기도 했다. YMCA가 일제강점기, 군사독재 시절에도 재야 운동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YMCA가 외국인 선교사와 사제들이 활동하는 국제단체라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여기에 명백한 기독교 단체기에 독재정권이 민주화 운동 인사들에게 흔히 덮어씌웠던 공산주의자라는 의혹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13. 새 나라의 기틀을 만들다1948년 5월 31일, 대한민국 첫 국회인 ‘제헌 국회’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로 개회됐다. 옛 중앙청 회의실에서 198명의 의원이 참석했는데 당시 임시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 박사는 이 자리에서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의 이 일이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목사인 이윤영 의원의 기도가 이어졌다.우리나라 첫 헌법인 제헌헌법에 예수 그리스도 정신의 핵심인 자유와 평등사상이 반영된 것은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14. 공산주의를 막는 방패가 되다절대적인 존재를 믿는 기독교와 신이란 존재를 부정하는 공산주의는 애초부터 양립 불가능한 관계였다. 이 때문에 공산주의 사상을 인정할 수 없는 한국 기독교계는 6·25전쟁 당시 수많은 신자가 목숨을 잃고 교회가 불태워지는 엄청난 피해를 겪었다.60여 명의 전 교인이 신앙과 자유를 지키려다 인민군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전남 영광군 야월교회는 이런 역사의 산증인. 야월교회는 광주·목포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한 미국 남장로교회 유진 벨 선교사(1868∼1925)가 1908년 설립한 곳으로 그의 사위인 윌리엄 린턴 선교사는 인요한(존 린턴) 국민의힘 국회의원의 조부이기도 하다. 인근 염산교회도 전쟁 당시 77명의 교인이 순교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당시 염산교회를 이끈 김방호 목사는 교인들이 피란을 권했으나 “목사가 어떻게 교회와 성도를 두고 다른 곳에 가느냐”라며 남아 있다가 변을 당했다.이런 사례는 전쟁 당시 전국에 걸쳐 무수히 많이 벌어졌는데 “신앙을 버리지 않으면 죽이겠다”라는 인민군의 협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는 성도들의 신념은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 사라지지 않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15. 대한민국 발전의 원동력 ‘희망’을 일깨운 지도자들세계가 놀라는 ‘한강의 기적’은 한국 교회 부흥과 궤를 같이한다. 특히 전쟁 후 폐허가 된 극빈국 대한민국 국민을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라는 희망의 메시지로 일으켜 세운 조용기 목사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1958년 서울의 변두리인 은평구 대조동 깨밭에서 천막 교회로 출발한 여의도순복음교회는 1992년에 이르러 성도 수 70만 명에 이르는 세계 최대 교회로 성장했다.조용기 목사는 “천당과 지옥 이야기보다는 용기와 희망을 설교하려고 애썼다. 부자 교회 못 가고 우리 교회에 온 가난한 사람들이 용기와 희망을 얻고 위로를 받는 것이 나에게도 큰 힘이 됐다”라고 고백했다. 이런 힘이 국민적 용기와 희망으로 승화해 산업화의 원동력이 됐고, 오늘 선진국의 밑거름이 됐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평이다.여의도순복음교회는 2대 담임목사인 이영훈 목사가 부임하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조용기 목사가 강조한 희망의 목회를 절대 긍정과 절대 감사의 신앙으로 한 단계 끌어올려 성도들에게 소외된 계층에 대한 사랑 실천과 봉사의 가치를 강조하는 성숙의 길로 나아갔다. 이 또한 갈등과 경쟁으로 얼룩진 우리 사회에 또 다른 희망이 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16. 민주화운동의 구심점2025년 한국 기독교 선교 140주년을 맞아 지난해 목회데이터연구소가 진행한 ‘한국교회의 한국 사회 기여에 대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들은 해방 전은 ‘항일 민족 운동(85%)’, 해방 후는 ‘민주화운동(57%)’을 가장 큰 기여로 꼽았다. 그만큼 한국 기독교가 이 땅의 민주화에 이바지한 바가 큰데 그 상징 중 하나가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 있는 한국기독교회관이다.1970년 1월 문을 연 한국기독교회관은 명동성당과 더불어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산실로 불리던 재야 운동 세력의 구심지. 1970년대 초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한국기독교학생총연합, 한국기독청년협의회 등의 단체들과 진보적 성향의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이곳에 입주해 민청학련사건 구속자들의 석방 운동과 목요기도회 등을 전개하며 반독재민주화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1976년 3·1 민주 구국 선언 사건, 1978년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농성, 1980년 5월 서강대생 김의기가 투신자살로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리려 했던 곳이기도 하다.17. 통일을 꿈꾸며 북한 지원에 나서다2023년 11월 평화통일연대가 주최한 ‘한국교회 초청 화해와 평화, 평화통일을 위한 포럼’에 따르면 한국 교회의 북한 지원 규모는 국내 대북 민간 지원단체 지원 총액의 70%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남북 관계 경색 국면에서도 ‘남북 평화 구축의 조성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평가다.특히 여의도순복음교회의 평양 심장병원 건립 추진은 인도적 지원은 물론이고 남북통일이라는 더 큰 꿈으로 나아가기 위한 희망의 걸음이다. 1984년부터 국내에서 심장병 환자들을 무료로 치료해 온 여의도순복음교회는 북한의 심장병 환자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돌보고 치료하기 위해 2007년 12월 평양 중심부에 3만3000㎡ 규모의 심장병 치료 전문 종합병원을 착공했다. 지하 1층, 지상 7층 규모의 이 병원은 안타깝게 2010년 3월 북한에 의한 ‘천안함 피격 사건’ 이후 남북 관계가 경색되면서 공사도 중단된 상태. 남북한 민간 교류의 상징이었던 평양심장병원은 현재 7층 건물의 골조 공사만 끝낸 상태로 머물러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남북 관계가 회복돼 병원이 완공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병원이 완공되면 북한 주민들에게 수준 높은 의료 서비스와 함께 남북 평화공존과 통일을 앞당기는 중요한 역할 해낼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18. 이웃과 함께 아파하고 우는 한국 교회한국 기독교와 교회 역사는 국가와 국민이 어려운 상황에 부닥칠 때마다 누구보다 먼저 나선 희생과 봉사의 역사이기도 하다.특히 여의도순복음교회는 국가가 어려운 상황을 맞을 때마다 성도들이 함께 모여 금식하고 눈물로 기도하며 위기를 극복하는 데 앞장섰다. 또 태안 앞바다 기름 유출 사고, 세월호 참사, 코로나 팬데믹, 이태원 참사, 지진과 산불 등의 재난이 일어났을 때 성도들의 헌금을 모아 지원금을 보내고, 직접 사고 현장을 찾아가 자원봉사를 하며 ‘우는 자와 함께 울라’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했다.최근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산불로 피해를 본 지역 주민을 돕기 위해 10억 원의 긴급 구호헌금을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지원한 것은 그 작은 예 중 하나. 구호헌금은 경북 의성군, 안동시·청송군·영양군·영덕군을 비롯해 경남 산청군과 하동군, 울주군 등 산불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된 곳을 위해 사용됐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2020년 코로나19 대구·경북 지역 확산 당시에도, 2023년 튀르키예 대지진과 이태원 참사 때도 각각 10억 원을 지원했다.19. 도움을 받는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한국 기독교계의 해외 선교와 봉사는 그 어떤 나라보다도 활발하다. 대표적인 예가 여의도순복음교회가 만든 국제구호 NGO ‘굿피플’이다.대사회적 구제 사업을 더 전문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1999년 7월 설립된 ‘굿피플’은 2005년 파키스탄 지진, 2008년 미얀마 사이클론 재해, 2011년 일본 대지진, 2023년 시리아 강진 등이 발생했을 때마다 긴급 구호단을 파견해 재난 구조와 인명 구조, 의료봉사 등 사업을 전개해 왔다.굿피플의 해외 지원 사업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전개됐는데 보건소 건축 및 운영, 보건의료 전문 인력 양성, 건강검진 및 의약품 지원 등 보건 분야에만 무려 156만7000여 명이 혜택을 받았다. 학교 기숙사와 도서관, 아동센터 건립,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한 장학금과 급식 지원, 전문교육 커리큘럼 구축을 통해서는 9만9800여 명이 도움을 받았고, 우물 등 정수 센터와 정수시설, 상수도, 화장실 설치 등으로 5만5400여 명이 깨끗한 환경에서 살 수 있게 됐다.20. 저출생 극복으로 미래를 세우다여의도순복음교회가 국가와 미래세대를 위해 가장 역점을 두는 활동은 ‘저출생 극복’이다.여의도순복음교회는 2012년 교계에서는 처음으로 매년 출산장려금 지원을 시작했다. 결혼격려금, 미혼모 자립 지원 등 지금까지 순복음교회가 저출생 극복을 위해 지원한 금액은 800억 원이 넘는다. 정부 기관도 아닌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저출생 극복에 앞장서는 이유는 국민이 없으면 교회도 존립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 이영훈 목사는 각종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나라 출산율이 2명대에서 1명대로 급격히 떨어지는 걸 보면서 이러다가는 국민이 사라져 국가가 소멸하는 날이 오겠다는 두려움이 들었다”라며 “저출생 문제 해결은 국가는 물론이고 교회를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라고 말했다.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부활절은 성탄절과 함께 기독교 최대 명절 중 하나다. 교회는 초대 교회 당시부터 복음이 전파된 곳이면 어떤 곳에서도 역경을 이겨내고 부활절을 기독교 최대 행사로 정착시켜 왔다.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죄악과 죽음의 어두운 세력에 대한 승리와 아울러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상징해 주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부활절 예배는 한국 교회뿐만 아니라 한민족 전체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주님의 축복이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일본 통치자들의 억압과 협박, 방해 공작으로 1894년 이후 연합예배로 지켜지던 부활절 행사는 지역으로 분산되는 어려움에 부닥쳤다. 해방 후인 1947년에는 서울 남산광장에서 최초의 연합예배가 치러졌지만 6·25전쟁으로 일시 중단됐고, 1962년까지는 교파와 지역을 초월해 모든 신자가 함께 연합해 예배를 드려왔으나 이후로는 교단 및 연합 기구의 분열 등을 이유로 연합과 분리를 거듭하는 아픔을 겪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한국 선교 140주년을 맞는 올해 부활절에 서울 강남구 광림교회에서 열리는 부활절 연합예배는 진보·보수를 아우르는 72개 교단이 참여하는 명실상부한 한국 개신교 연합예배로 치러진다. 한국 기독교 부활절 예배의 역사를 사진으로 정리했다.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140주년을 맞은 한국 기독교는 이제 사랑과 용서, 화해의 정신으로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진정한 희망의 상징이 돼야 합니다.” 올해는 1885년 4월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1858∼1902·미국 북감리회)와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1859∼1916·미국 북장로회)가 인천항에 도착한 지 꼭 140주년 되는 해다. 한국 개신교는 공식적으로 이때부터 한국 선교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11일 경기 용인 새에덴교회에서 만난 소강석 한국기독교 140주년 기념대회 상임대회장(새에덴교회 담임목사)은 “초기 한국 교회는 교육, 의료, 한글 확산과 인권 신장에 큰 역할을 했다”며 “한국 기독교 140주년을 맞아 한국을 위해 헌신한 수많은 선교사의 정신과 활동을 조명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소 목사는 아펜젤러, 언더우드 외에도 수많은 선교사와 그 가족들이 한국을 위해 봉사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었는데 널리 알려지지 않은 점을 안타까워했다. 그중 한 명이 전북 군산 지역에서 활동했던 윌리엄 정킨 선교사(1865∼1908)다. 1899년 궁멀교회(현 구암교회)를 세운 정킨 선교사는 멜볼딘 여학교, 영명학교(현 군산제일중고교), 군산 예수병원 등을 잇달아 설립하며 군산을 넘어 전북 지역 선교의 뿌리를 내리게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 아들을 이곳에서 풍토병으로 잃는 아픔을 겪었고, 그 자신도 폐렴으로 숨졌다. 프랭클린 윌리엄스 선교사(1883∼1962)는 유관순 열사를 배출하며 일제강점기 충남 지역의 독립운동과 근대화의 산실이었던 공주 영명학교(1909년 설립)를 세웠다. 유관순 열사는 1914년 열두 살의 나이에 이 학교에 입학해 2년여간 수학한 뒤 앨리스 샤프 선교사(1871∼1972) 주선으로 서울 이화학당에 입학했다. 소 목사는 “정킨 선교사는 물론이고 최초의 한글 구약 성경 번역 작업을 주도한 윌리엄 데이비스 레이놀즈 선교사(1867∼1951), 평양을 중심으로 서북지방 선교에 힘쓴 새뮤얼 모펏 선교사(1864∼1939) 등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 땅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한 선교사들을 학술 심포지엄, 다큐멘터리 제작, 기념 음악회 등을 통해 집중 조명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23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열리는 기념 음악회 ‘칸타타, 빛의 연대기’는 140년 동안 이 땅에서 헌신한 선교사들의 활동과 그 후손들이 만들어온 긴 여정을 합창과 오케스트라로 표현한다. 그는 또 “한국 기독교 140주년이 기독교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기독교의 본질과 가치의 정수는 사랑에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한국 교회가 너무 우리만의 이너 서클, 카르텔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사회적 공감과 정서와 괴리된 한국 교회의 모습은 사랑과 용서, 희생의 길을 걸어가야 할 기독교 본연의 모습은 아니지 않나 싶지요.” 소 목사는 최근 사회적 갈등을 치유하는 데 교회가 앞장서야 한다고 했다. 그는 “남북으로 나뉜 현실만도 비극인데, 보수-진보, 우파-좌파로 갈라져 극단적인 분열과 충돌을 계속하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느냐”며 “교회의 본령은 사랑과 용서, 화해의 정신으로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희망의 미래를 여는 것이지 광장에서 사회 분열과 대립의 중심에 서는 것이 아니다”라고 당부했다.용인=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140주년을 맞은 한국기독교는 이제 사랑과 용서, 화해의 정신으로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진정한 희망의 상징이 돼야 합니다.”올해는 1885년 4월 아펜젤러 선교사(1858∼1902·미국 북 감리회)와 언더우드 선교사(1859∼1916·미국 북 장로회)가 인천항에 도착한 지 꼭 140주년 되는 해다. 한국 개신교는 공식적으로 이때부터 한국 선교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11일 경기 용인 새에덴교회에서 만난 소강석 한국기독교 140주년 기념대회 상임대회장(새에덴교회 담임목사)은 “초기 한국교회는 교육, 의료, 한글 확산과 인권 신장에 큰 역할을 했다”라며 “한국기독교 140주년을 맞아 한국을 위해 헌신한 수많은 선교사의 정신과 활동을 조명할 계획”이라고 말했다.소 목사는 아펜젤러, 언더우드 선교사 외에도 수많은 선교사와 그 가족들이 한국을 위해 봉사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었는데 널리 알려지지 않은 점을 안타까워했다. 그중 한 명이 전북 군산 지역에서 활동했던 윌리엄 전킨(W M Junkin·1865∼1908) 선교사다.1899년 궁멀교회(현 구암교회)를 세운 전킨 선교사는 멜볼딘 여학교, 영명 학교(현 군산제일중고교), 군산 예수 병원 등을 잇달아 설립하며 군산을 넘어 전북 지역 선교의 뿌리를 내리게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 아들을 이곳에서 풍토병으로 잃는 아픔을 겪었고, 그 자신도 폐렴으로 숨졌다.프랭클린 윌리엄스 선교사(1883∼1962)는 유관순 열사를 배출하며 일제강점기 충남 지역의 독립운동과 근대화의 산실이었던 공주 영명학교(1909년 설립)를 세웠다. 유관순 열사는 1914년 열두 살의 나이에 이 학교에 입학해 2년여 간 수학한 뒤 엘리샤 샤프 선교사(1871~1972) 주선으로 서울 이화학당에 입학했다.소 목사는 “전킨 선교사는 물론이고 최초의 한글 구약 성경 번역 작업을 주도한 윌리엄 데이비스 레이놀즈 선교사(1867~1951), 평양을 중심으로 서북지방 선교에 힘쓴 사무엘 마펫 선교사(1864~1939) 등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 땅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한 선교사들을 학술 심포지엄, 다큐멘터리 제작, 기념 음악회 등을 통해 집중 조명할 계획”이라고 말했다.23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열리는 기념 음악회 ‘칸타타, 빛의 연대기’는 140년 동안 이 땅에서 헌신한 선교사들의 활동과 그 후손들이 만들어온 긴 여정을 합창과 오케스트라로 표현한다.그는 또 “한국기독교 140주년이 기독교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라고 강조했다.“기독교의 본질과 가치의 정수는 사랑에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한국 교회가 너무 우리들만의 이너 써클, 카르텔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사회적 공감과 정서와 괴리된 한국 교회의 모습은 사랑과 용서, 희생의 길을 걸어가야 할 기독교 본연의 모습은 아니지 않나 싶지요.”소 목사는 최근 사회적 갈등을 치유하는 데 교회가 앞장서야 한다고 했다. 그는 “남북으로 나뉜 현실만도 비극인데, 보수·진보, 우파·좌파로 갈라져 극단적인 분열과 충돌을 계속하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느냐”라며 “교회의 본령은 사랑과 용서, 화해의 정신으로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희망의 미래를 여는 것이지 광장에서 사회 분열과 대립의 중심에 서는 것이 아니다”라고 당부했다.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대한불교조계종(총무원장 진우 스님)이 국민의 지친 마음을 위로하고 갈등을 치유하기 위한 ‘담선(談禪)대법회’를 14∼20일 봉행한다. 담선대법회는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 후 혼란한 민심을 안정시키고,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3년마다 봉행했던 법회다. 선(禪)의 지혜를 통해 국민 화합과 국가 번영을 발원하는 역사 깊은 법석(法席)이다. 법회 기간 매일 오후 3시(15일은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조계사 대웅전 앞 특설무대에서 열리는 이번 법회는 진우 스님의 발원으로 조계사와 미래본부, 전국선원수좌회가 공동 주최한다. 이번 대법회는 중국 당나라 때 선승인 육조 혜능의 설법을 기록한 ‘육조단경(六祖壇經)’을 교재로 진행되며, 한국 불교의 대표적인 선지식 스님 7인이 하루씩 차례로 법회를 이끈다. 14일은 백담사 조실 영진 스님, 15일 석종사 조실 혜국 스님, 16일 송광사 방장 현묵 스님, 17일 백양사 수좌 일수 스님, 18일 축서사 조실 무여 스님, 19일 상원사 용문선원장 의정 스님, 20일 해인사 방장 대원 스님 등이다. 조계종은 “최근 국가적으로 어려운 일을 겪으며 마음의 불안을 느끼는 국민이 많다”며 “흐트러졌던 우리 마음을 살펴보고 어지러운 마음을 치유하는 자리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함께 산책하는 강아지가 미치도록 좋아할 때가 있다. 이른 아침, 아직 이슬이 마르기 전에 동네 앞 야산을 산책할 때다. 비가 그친 직후면 더 ‘환장’한다. 온갖 풀잎의 냄새를 맡고, 온몸을 비비고 땅에 구르는데 마치 디즈니랜드에서 미키마우스를 만난 아이들 같다고 할까. 야생동물 생물학자로 일하다 ‘향기’의 매력에 빠져 천연 조향사로 전업한 저자가 다채로운 향기를 내는 식물에 관해 쓴 책이다. 식물도감의 일종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유향과 몰약, 향신료, 향수 등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역사와 문화, 생태, 산업, 첨단 기술까지 다양한 분야를 넘나든다. 인류의 문화사에서 ‘향기’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 가장 유명한 향수 중 하나인 샤넬 No.5는 분리된 향기 분자의 효과에 의존한 최초의 향수는 아니지만, 현대 향수의 상징이 되었다. 꽃향기가 나는 여성에게 염증을 느낀 코코 샤넬은 자신을 위해서 1920년대의 새로운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환상의 향수 제작을 의뢰했다. 그녀가 원한 향수는 여성스러우면서 깨끗하고 우아한 향이 나고, 진취적인 여성들에게 팔릴 만한 향수였다.”(12장 ‘향기의 세계: 산업과 패션’에서) 분명 ‘향기 나는 식물’에서 시작된 이야기인데 읽다 보면 선사 시대부터 산업화 시대에 이르기까지 식물과 이어진 사람들의 신앙과 권력, 부, 중독, 혐오, 패션 등 온갖 모습을 보게 된다. 저자는 식물이 향기를 만드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꽃가루 매개 동물과 포식자인 나방, 딱정벌레, 세균과 곰팡이, 꿀벌과 파리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내는 향기로 꽃가루 매개 동물을 끌어들이고, 질병과 싸우고, 초식동물을 쫓아내는 등 상호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사람도 누구나 자신만의 향기가 있지만 상호작용을 통해 누군가의 것은 향기로, 누군가의 것은 냄새라고 불린다. 앞에 ‘좋은’ ‘맑은’이란 수식어가 붙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더러운’ ‘고약한’이 붙는 사람도 있다. 향기로웠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추한 냄새를 내는 사람으로 바뀌고, 그 반대도 허다하다. 지금 향기를 내고 있는가, 아니면 냄새를 피우고 있는가. 어느 쪽인가.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저출생을 극복하지 못하면 나라가 사라집니다. 나라가 없는데 교회는 있을 수 있습니까?”4일 서울 동작구 CTS기독교TV에서 만난 감경철 저출생대책국민운동본부 본부장(CTS기독교TV 회장)은 “본업보다 출산 장려 운동을 더 열심히 하는 것 같다”란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저출생대책국민운동본부는 2022년 8월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정치 경제 문화 등 우리 사회 각 분야 지도자가 모여 발족한 민간단체로, 올 1월 교회 등 종교시설에서도 영유아 돌봄을 할 수 있도록 관련 법령(국토교통부령 제1439호)을 개정하는 데 산파 역할을 했다.감 본부장은 “지난해에만 전국에서 어린이집이 2000곳 가까이 문을 닫았고, 어린이집이 한 곳도 없는 읍면동이 600여 곳에 이른다”며 “아이를 낳아도 맡길 곳이 없으니 출산을 꺼리고, 아이가 없으니 다시 어린이집이 사라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종교시설을 영유아 돌봄 시설로 활용하자는 아이디어는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특히 교회는 읍면동, 작은 마을까지 대부분의 지역에 있고, 예배나 목회 활동이 없는 시간에는 사실상 비어 있는 경우도 적지 않아 이를 활용하자는 것. 그는 “수요가 없는 곳에 민간 어린이집이 생길 리도 없고, 그렇다고 국가가 하면 전국적으로 막대한 비용이 든다”며 “종교기관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수익 문제로 폐원할 염려도, 신자들이 다 주민이니 이전할 우려도 없다”고 말했다.감 본부장은 1일 ‘전국 17개 광역시도 기독교총연합회 초청 설명회’를 개최하는 등 요즘 전국을 돌며 법령 개정 사실을 알리고 교회의 동참을 호소하고 있다.“개정 법령은 교회가 영유아뿐만 아니라 노약자, 장애인도 돌볼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종교시설이 아닌 별도의 공간을 마련하거나 종교시설을 용도 변경해야 했는데, 이제는 일정 요건만 갖추면 그럴 필요가 없어진 거죠. 교회로서도 더 수월하게 지역 사회와 주민에게 봉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니 일석이조(一石二鳥)이기도 합니다.”그는 19년 전인 2006년 ‘생명과 희망의 네트워크’, 2010년 출산장려국민운동본부를 설립하며 저출생 극복 운동에 뛰어들었다. 우리나라의 출산율이 급격히 감소하는 게 눈에 보였지만 인구 감소가 국가 위기로 이어질 것이라는 사회적 공감대는 형성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 저출생대책국민운동본부(2022년), ‘행복한 출생 든든한 미래’(2023년)를 잇달아 발족했고, 2022년 대선과 2024년 총선 때는 저출생 대책 정책 제안서를 만들어 각 정당에 전달했다. 올 1월 종교시설 내 아동 돌봄이 가능해진 것은 이런 노력의 결과다.감 본부장은 “저출생은 주거와 보육 문제를 풀지 않으면 해결하기 어렵다”며 “주거는 정부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보육은 우리 같은 종교기관과 민간에서도 충분히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 정책과 종교시설 활용 등 민간 영역을 함께 아우른다면 저출생 문제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저출생을 극복하지 못 하면 나라가 사라집니다. 나라가 없는데 교회는 있을 수 있습니까?”4일 서울 동작구 CTS기독교TV에서 만난 감경철 저출생대책국민운동본부 본부장(CTS기독교TV 회장)은 “본업보다 출산 장려 운동을 더 열심히 하는 것 같다”라는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저출생대책국민운동본부는 2022년 8월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정치 경제 문화 등 우리 사회 각 분야 지도자가 모여 발족한 민간단체로, 올 1월 교회 등 종교시설에서도 영유아 돌봄을 할 수 있도록 관련 법령(국토교통부령 제1439호)을 개정하는데 산파 역할을 했다.감 본부장은 “지난해에만 전국에서 어린이집이 2000곳 가까이 문을 닫았고, 어린이집이 하나도 없는 읍면동도 600여 곳에 이른다”라며 “아이를 낳아도 맡길 곳이 없으니 출산을 꺼리고, 아이가 없으니 다시 어린이집이 사라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종교시설을 영유아 돌봄 시설로 활용하자는 아이디어는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특히 교회는 읍면동, 작은 마을까지 대부분의 지역에 있고, 예배나 목회 활동이 없는 시간에는 사실상 비어 있는 경우도 적지 않아 이를 활용하자는 것. 그는 “수요가 없는 곳에 민간 어린이집이 생길 리도 없고, 그렇다고 국가가 하면 전국적으로 막대한 비용이 든다”라며 “종교기관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수익 문제로 폐원할 염려도, 신자들이 다 주민이니 이전할 우려도 없다”라고 말했다.감 본부장은 1일 ‘전국 17개 광역시도 기독교총연합회 초청 설명회’를 개최하는 등 요즘 전국을 돌며 법령 개정 사실을 알리고 교회의 동참을 호소하고 있다.“개정 법령은 교회가 영유아뿐만 아니라 노약자, 장애인도 돌볼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종교시설이 아닌 별도의 공간을 마련하거나 종교시설을 용도 변경해야 했는데, 이제는 일정 요건만 갖추면 그럴 필요가 없어진 거죠. 교회로서도 더 수월하게 지역 사회와 주민에 봉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니 일석이조(一石二鳥)이기도 합니다.”그는 19년 전인 2006년 ‘생명과 희망의 네트워크’, 2010년 출산장려국민운동본부를 설립하며 저출생 극복 운동에 뛰어들었다. 우리나라 출산율이 급격히 감소하는 게 눈에 보였지만, 인구 감소가 국가 위기로 이어질 것이라는 사회적 공감대는 형성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 저출생대책국민운동본부(2022년), ‘행복한 출생 든든한 미래’(2023년)를 잇따라 발족했고, 2022년 대선과 2024년 총선 때는 저출생 대책 정책 제안서를 만들어 각 정당에 전달했다. 올 1월 종교시설 내 아동 돌봄이 가능해진 것은 이런 노력의 결과다.감 본부장은 “저출생은 주거와 보육 문제를 풀지 않으면 해결하기 어렵다”라며 “주거는 정부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보육은 우리 같은 종교기관과 민간에서도 충분히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정부 정책과 종교시설 활용 등 민간 영역을 함께 아우른다면 저출생 문제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일본이 우리처럼 부처님을 진심으로 아끼며 관리할지 걱정이에요. 또 전처럼 무슨 일이라도 생기지는 않을지….”지난달 31일 충남 서산 부석사(浮石寺). 이날 사찰은 ‘금동관세음보살좌상(사진) 100일 친견 법회’가 열리고 있어 647년 만에 귀향한 부처님을 보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고려 시대(14세기) 제작된 높이 50.5cm, 무게 38.6kg의 이 불상은 2012년 한국인 절도범들이 일본 쓰시마섬 간논지(觀音寺)에서 훔쳐 와 팔려다 적발됐다. 이후 일본 측과 소유권 다툼 끝에 2023년 10월 대법원 판결로 돌려주기로 결정됐으나, 반환 전 불상을 모시고 법회를 열고 싶다는 부석사 측 요청으로 1월 25일부터 5월 5일까지 100일 친견 법회가 열리고 있다. 부석사 주지인 원우 스님은 “이제 한 달 정도밖에 안 남았는데 일본 측은 어디에 부처님을 모실지 결정도 못 한 상태”라고 답답해했다. ―애초 쓰시마섬 시립 박물관에 보관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만….“지난달 25, 26일 친견 법회 상황을 알리고 향후 협력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일본에 가 쓰시마시와 박물관 관계자들을 만났어요. 저도 시립 박물관에 모시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간논지 주지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라고 하더군요.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는 박물관을 원하는데, 지역 주민들은 간논지에 모시길 바란다는 거예요.” ―간논지는 무인 사찰 아닙니까.“상주하는 스님이 없는 사찰이지요. 주지도 다른 절 주지가 간논지 주지를 겸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런 곳에 부처님을 모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2012년 도난도 그렇게 허술하게 방치했다가 벌어졌는데…. 그런데 관리·보관 면에서는 박물관이 낫겠지만 일본 입장에서는 그것도 흔쾌히 선택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요.“세계적으로 약탈 문화재는 취득 입증 책임이 소장자에게 있어요. 정당하게 취득했다는 걸 입증하지 못하면 돌려줘야 하거든요. 일제강점기 때 유출돼 미국 보스턴 미술관에 있다가 80여 년 만인 지난해 4월 돌아온 석가불 진신사리(眞身舍利·석가모니 몸에서 나온 사리)와 나옹·지공 선사 사리가 같은 경우죠. 박물관에 보관하면 오히려 한국에 돌려줄 가능성이 생기는 셈이니까요.” ―우리 대법원이 일본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까?“타인의 물건이라도 일정 기간 점유했다면 소유권이 넘어간 것으로 보는 ‘취득 시효’ 법리에 따라 인정했는데, 그것과 약탈 문화재 반환은 별개니까요. 앞서 말한 석가불 진신사리도 취득 시효만 따지면 돌려받을 수 없었을 겁니다.” ―대법원 판결이 난지 꽤 됐는데, 정부 차원의 환수 노력은 있었습니까.“아무것도 들은 게 없어요. 대법원 판결과 약탈 문화재 환수 노력은 별개인데…. 반환 절차도 원래 대전 국립문화유산연구원으로 갔다가 거기서 일본으로 갈 예정이었는데, 연구원은 빠지는 것으로 변경됐어요. 어차피 갈 것인데 괜히 책임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게 아닌지…. 그래도 우리 문화재인데 좀 더 소중하게 여겨줬으면 하지요.”서산=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일본이 우리처럼 부처님을 진심으로 아끼며 관리할지 걱정이에요. 또 전처럼 무슨 일이라도 생기지는 않을지….”지난달 31일 충남 서산 부석사(浮石寺). 이날 사찰은 ‘금동관세음보살좌상 100일 친견 법회’가 열리고 있어 647년 만에 귀향한 부처님을 보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고려 시대(14세기) 제작된 높이 50.5cm, 무게 38.6kg의 이 불상은 2012년 한국인 절도범들이 일본 쓰시마섬 간논지(觀音寺)에서 훔쳐 와 팔려다 적발됐다. 이후 일본 측과 소유권 다툼 끝에 2023년 10월 대법원 판결로 돌려주기로 결정됐으나, 반환 전 불상을 모시고 법회를 열고 싶다는 부석사 측 요청으로 1월 25일부터 5월 5일까지 100일 친견 법회가 열리고 있다. 부석사 주지인 원우 스님은 “이제 한 달 정도밖에 안 남았는데 일본 측은 어디에 부처님을 모실지 결정도 못 한 상태”라고 답답해 했다.―애초 쓰시마섬 시립 박물관에 보관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만.“지난달 25, 26일 친견 법회 상황을 알리고 향후 협력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일본에 가 쓰시마시와 박물관 관계자들을 만났어요. 저도 시립 박물관에 모시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간논지 주지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라고 하더군요.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는 박물관을 원하는데, 지역 주민들은 간논지에 모시길 바란다는 거예요.”―간논지는 무인 사찰 아닙니까.“상주하는 스님이 없는 사찰이지요. 주지도 다른 절 주지가 간논지 주지를 겸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런 곳에 부처님을 모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2012년 도난도 그렇게 허술하게 방치했다가 벌어졌는데…. 그런데 관리·보관 면에서는 박물관이 낫겠지만 일본 입장에서는 그것도 흔쾌히 선택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어떤 어려움이 있는지요.“세계적으로 약탈 문화재는 취득 입증책임이 소장자에게 있어요. 정당하게 취득했다는 걸 입증하지 못하면 돌려줘야 하거든요. 일제강점기 때 유출돼 미국 보스턴 미술관에 있다가 80여 년 만인 지난해 4월 돌아온 석가불 진신사리(眞身舍利·석가모니 몸에서 나온 사리)와 나옹·지공 선사 사리가 같은 경우죠. 박물관에 보관하면 오히려 한국에 돌려줄 가능성이 생기는 셈이니까요.”―우리 대법원이 일본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까?“타인의 물건이라도 일정 기간 점유했다면 소유권이 넘어간 것으로 보는 ‘취득시효’ 법리에 따라 인정했는데, 그것과 약탈 문화재 반환은 별개니까요. 앞서 말한 석가불 진신사리도 취득시효만 따지면 돌려받을 수 없었을 겁니다. 간논지가 사적으로 소유하면 그런 문제는 없지만 보관 문제가 있으니…. 그래서 일본 측이 결정을 못 하는 것 같아요.”―요즘 산불이 심각한데, 대비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요.“이 지역은 아직 산불 피해는 없는데, 금동관세음보살좌상이 국보급 문화재로 평가받다 보니 소방서와 함께 대피 훈련도 하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고 있어요. 밤에는 외부인 출입을 금지하고,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 문도 잠가 놓고요. 그런데, 한밤중에 몰래 절에 와 자물쇠를 열어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어요. 그래서 방화도 대비할 겸 폐쇄회로(CC)TV를 20개 넘게 설치하고 경보 시스템도 설치했지요.”―대법원 판결이 난지 꽤 됐는데, 정부 차원의 환수 노력은 있었습니까. “아무것도 들은 게 없어요. 대법원 판결과 약탈 문화재 환수 노력은 별개인데…. 반환 절차도 원래 대전 국립문화유산연구원으로 갔다가 거기서 일본으로 갈 예정이었는데, 연구원은 빠지는 것으로 변경됐어요. 어차피 갈 것인데 괜히 책임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게 아닌지…. 그래도 우리 문화재인데 좀 더 소중하게 여겨줬으면 하지요.”서산=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사람의 눈은 파장이 380∼750nm(나노미터)인 가시광선(可視光線) 영역만 인식할 수 있다. 이 파장 밖을 사람은 볼 수 없지만 다른 생물, 예를 들어 벌과 같은 곤충은 자외선을 볼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적외선을 볼 수 있다면, 사람은 야간 투시경으로 보는 것처럼 붉은 열기의 덩어리로 보일 것이다. 그러면 사람의 진짜 피부색은 뭘까? 지금 눈에 보이는 색이 진짜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세계적인 작곡가이자 피아노 연주자인 사카모토 류이치(坂本龍一)와 생물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후쿠오카 신이치(福岡伸一)가 보이는 것 ‘너머’의 세상을 이야기한 것이다. 저자들은 인간이 우주를 인식하는 방식을 별과 별자리에 비유한다. 서로 몇천, 몇억 광년 떨어진 별을 자의적으로 연결해 별자리를 그리고, 이렇게 인간에게 유의미한 ‘시그널’만 추출해 자연을 이해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공기의 진동을 통해 전파되는 ‘소리’는 지구라는 행성 전체에 늘 존재하는데, 우리는 별자리처럼 그중 8음계 또는 12음계만 따와 ‘음악’이라고 생각한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 보면 사카모토의 음악이 왜 그렇게 만들어졌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얼핏 음악에 관한 이야기로 보이지만, 그보다는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 그 경계를 넘어 인생과 세상에 관해 말하는 철학에세이에 더 가깝지 않나 싶다. 따로 음악을 틀지 않아도 읽는 내내 사카모토의 음악이 들리는 기분이다.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담임목사가 1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에서 열린 ‘한미동맹 강화와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도회’에서 뉴저지주 의회로부터 ‘공동입법 결의문’(Joint Legislative Resolution) 정본을 전달받았다.뉴저지주 상·하원 120명 전원이 만장일치로 채택한 이 결의문은 한미동맹 및 세계 평화를 위해 노력해 온 이 목사의 헌신을 뉴저지주 의회가 높이 평가해 공식 표창한다는 내용이다. 뉴저지 상·하원 결의안은 뉴저지주 의회가 수여하는 최고 수준의 공적 표창으로, 각 분야에서 도덕적 권위와 사회적 공헌이 탁월한 인사에게 수여된다. 이 목사는 이날 한미동맹 강화에 이바지한 공적으로 미국 연방하원으로부터 감사증(Commendation)도 받았다. 이 목사는 수상 소감에서 “한국교회는 이제 세계를 섬기는 사명을 감당해야 하고, 진리와 사랑으로 인류 공동체의 회복에 앞장서야 할 때”라며 “특히 한미동맹에 대한 신앙적·사회적 중요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고 앞으로 양국의 연대와 평화 기도가 지속되기를 기대한다”라고 말했다.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헌법재판소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 승복하지 않고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나 집단이 있다면 그들은 ‘짐승’과 다를 것이 없다.”(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헌재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모두) 결과에 승복해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발언과 행동에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헌재가 4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를 예고하자 원로 및 전문가들은 1일 헌재 결정에 대한 조건 없는 승복을 강조했다. 초유의 12·3 비상계엄과 장기화된 탄핵 정국으로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분노한 민심이 헌재 심판 결과를 받아들이고 일상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정치·사회 지도자부터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정치권 지도자들이 통합과 치유의 메시지를 적극적으로 내놓는 등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 국민 통합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불복하면 감당할 수 없는 위기 맞을 것” 원로들은 탄핵 찬반 세력과 양당이 극단적으로 대립하면서 한국 사회의 갈등이 위험 수준으로 치솟았다고 진단했다. 헌재 심의가 길어진 것도 양측이 세 대결 양상으로 치닫는 요인이 됐다고 분석했다. 최 교수는 “대통령 탄핵 찬성과 반대 양측이 자제하지 않으면 한국 정치는 감당할 수 없는 위기를 맞게 될 것”이라며 “시민들이 계속 광장으로 달려 나오는 건 위험천만하다”고 했다. 그는 “탄핵이 인용되면 반대 측에서 항의 집회를 벌이는 등 소요가 일 것”이라며 “대선에 후보를 내 정상적으로 선거를 하고 결과에 순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만약 대통령 파면 결정이 나지 않으면 혼란이 훨씬 클 것이라는 게 최 교수의 진단이다. 그는 “한국 사회가 모든 결과를 다 수용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고, 그런 경우엔 사태가 폭동으로 번질 위험마저 있다”며 “대통령이 임기 단축과 개헌을 시도한다고 해도 엄청난 논쟁을 불러올 것인데, 얼마나 동의를 얻을지 모르겠다”고 우려했다. 손 교수는 “개인적으로 윤 대통령의 계엄 선포가 국가와 국민에 대한 폭력이고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도 “어떤 결론이 나더라도 속이 쓰릴지언정 받아들여야 한다. 한번 결정된 헌재 판결을 무리하게 바꾸겠다면 남는 것은 폭력뿐”이라고 강조했다. 정대철 대한민국헌정회장은 “‘동의하지 않는다는 데 동의했다(agree to disagree)’는 민주주의 기본 원칙에 대한 이해와 서로의 차이에 대한 인정이 정치 지도자나 사회 지도자나 국민들한테 필요하다”며 “지금이라도 윤 대통령의 승복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선고 당일) 여야 지도부에서 승복한다는 공식 성명부터 내야 한다”며 “(국민들이 승복하게 만들기 위해선) 차기 주자들이 구두선(口頭禪)에 그치지 않게 통합 얘기를 자꾸, 계속해야 한다”고 했다. ● “이제 통합의 시간이 돼야” 국민 분열이 극심해진 현 상황에 대해 정 회장은 “한쪽에서는 다수결, 한쪽에서는 거부권 등으로 힘의 논리를 자제하지 못해 여기까지 왔다”며 “정치 지도자들이 헌재의 결과를 자기 유리한 쪽으로 서로 유도하기 위해 지금 양쪽에서 텐트를 치고 장외 정치를 하는 이런 모습은 민주국가에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분석했다. 그는 “선고날인 4일 ‘국가를 걱정하는 원로 모임’에서 국민들은 평상으로 돌아가고 정치인도 원내로 돌아가라고 권면할 예정”이라며 “탄핵심판 이후 국민통합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된다”고 말했다. 손 교수는 “법적 판단과 별개로 모든 사태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사람이 바로 윤 대통령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며 “전쟁이나 전시에 준하는 상황도 아닌데 계엄을 선포하고 총을 든 군인을 국회로 보낸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탄핵이 인용될 경우 탄핵 반대 쪽은 헌재의 결과에 승복하고 특히 일부 지도자들은 1월 서울서부지방법원 폭력 난입과 같은 일이 초래되지 않도록 지지층 결집 메시지를 자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개헌 등을 통한 시스템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최 교수는 “일찍이 보지 못했던 정부 여당과 의회 권력 간의 극한 대립이 계엄이라는 불덩이를 만나 엄청난 폭발력을 갖게 됐다”며 “이번 사태를 정당들이 민주주의의 위기를 넘어 새로운 민주주의를 만드는 전기로 삼아아 한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위성정당을 불러온 현행 비례대표제를 없애고, 다당제의 정착을 위해 중대선거구제나 결선투표제를 도입하는 등 선거제도를 바꾸자고 제안했다. 강 교수도 “헌재 결정이 또 다른 갈등이나 극단적 대결로 가지 않고 자연스럽게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며 “정치제도의 개혁이나 개헌 논의도 나오고 있는데 승자독식 구조를 깨고 포용적 형태의 국정 운영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일부 유튜브 채널 등을 통해 왜곡된 정보가 증폭돼 정치 양극화가 심화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조종엽 기자 jjj@donga.com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한국 불교가 1700년 역사라면 비구니의 역사도 1700년이라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비구니 역사를 정리하거나 기록한 책은 단 한 권도 없었지요. 불교계 안에서도 신라 최초의 출가자가 남성이 아닌 여성인 사씨(史氏) 스님이란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한국 불교 1700년 역사상 최초로 비구니의 활동과 역사를 정리한 책 ‘역사 속 한국 비구니’가 나왔다. ‘한국비구니승가연구소’가 출간한 이 책은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역사 속에 묻혀 있던 뛰어난 비구니들을 발굴하고 활동을 정리했다. 지난달 28일 서울 강남구 법룡사에서 만난 수경 스님은 “세계 여성불교 역사에서 천년이 넘는 비구니 역사를 중단없이 이어온 나라는 한국 외에 찾아보기 어렵다”라며 “그 유구한 역사를 이어받아 미래로 가기 위해 과거와 현재를 조명하는 것이 꼭 필요했다”라고 했다. 대한불교조계종 전국비구니회 수석부회장인 그는 이 책의 기획부터 출간까지 산파 역할을 했다. ―외람됩니다만, 인터뷰 준비를 하면서 비구니가 이렇게 많은 줄 몰랐습니다.“조계종 스님이 1만1000여 명 정도인데 비구니가 5000명이 넘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잘 드러내지 않아서 많은 줄을 사람들이 잘 모르지요. 지금만 그런 게 아니에요. 당나라 때 편찬한 주서(周書) 이역열전 ‘백제’ 편에는 ‘남승과 여승, 절과 탑은 매우 많으나 도교의 도사는 없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비구와 더불어 비구니가 나란히 거론될 만큼 백제에 비구니가 많았다는 방증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에도 비구니에 관해 기록된 책이 없었다는 게 이해가 안 갑니다.“예를 들어 고려는 불교가 국교일 정도로 불교문화의 황금기였지만, 광종 때 승과제를 도입하면서 응시 자격을 비구에게만 줬어요. 비구니는 공식적으로 활동할 여지가 없었던 거죠. 교단도 남성 중심으로 운영되면서 더 입지가 줄었고요. 지금도 구술을 듣기 위해 찾아뵈면 ‘굳이 상(相)을 세우려 한다’라고 말씀하시는 비구니 스님이 많아요.” ―‘상을 세운다’라는 게 무슨 뜻입니까.“상에는 ‘드러낸다’라는 뜻이 있는데, 여기엔 자기가 한 일을 스스로 과시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조용히 수행과 자기가 할 일만 묵묵히 하면 되지, ‘내가 누구다’ ‘어떤 일을 했다’ 하고 드러내는 것을 수행자로서 가벼운 처신이라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이런 생각에 심지어 윗대 스님들의 자료를 불태운 경우도 있지요.” ―기록이 그리 없으면 자료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20여 년 전인 1999년 중앙승가대 교수였던 본각 스님(전 전국비구니회장)의 노력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당시 외부에서 근세 비구니 스님에 관한 자료를 요청받았는데, 찾아 보니 자료가 거의 없었다고 해요. 그래서 자비로 한국비구니연구소를 설립하고, 제자들과 함께 전국을 돌며 자료를 찾고 원로 비구니 스님에게 전해오는 이야기를 들어 녹음하고 정리한 거죠. 이런 밑바탕이 없었으면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비구니 기록이 거의 없었던 데는 남성 중심 문화의 영향도 컸던 건가요.“아니라고 말할 순 없겠지요. 지금도 주요 보직이나 원로회의 의원 자격은 ‘비구’로 한정돼 있어요. 과거보다 늘기는 했지만, 중앙종회 의원 81명 중 비구니는 10명뿐이지요. 아무래도 공적인 지위나 역할을 하는 사람이 더 많이 기록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동안 가려져 왔던 뛰어난 비구니 스님들과 그들의 활동을 기록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될 테고, 남성 중심 문화도 바뀔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제 시작이지요.”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