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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광둥성 선전시에 있는 화웨이 옥스혼 연구개발(R&D) 캠퍼스의 인공호수에는 검은 백조 4마리가 산다. 런정페이 회장 지시로 마리당 120만 호주달러(약 9억9500만 원)를 주고 호주에서 수입했다. 검은 백조를 보며 연구원 2만 명이 고정관념을 깨고 상상력을 키우라는 취지다. ▷“중국 공산당이 네트워크의 취약점을 악용하고 중요한 통신 인프라를 훼손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는 그제 중국 공산당 및 군사기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이유로 중국 화웨이와 ZTE의 장비를 구입하는 통신업체엔 보조금을 주지 않기로 했다. 사실상 미국 통신시장에서 퇴출시킨 것이다. 미국 정보당국은 전산망에 침투해 정보를 빼돌릴 수 있는 ‘백도어(뒷문)’가 화웨이 장비에 심어져 있다고 본다. ▷세계 1위 통신장비업체, 2위 스마트폰 제조업체(대수 기준)인 화웨이는 미중 신(新)냉전의 한가운데 서 있다. 중국 인민해방군 장교 출신으로 1987년 회사를 세운 런 회장이 아무리 부인해도 실제론 중국 권부 소유의 회사라는 게 미국 측 판단이다. 비상장회사여서 런 회장 지분이 1%에 불과하다는 점 외에 지배구조가 베일에 싸여 있다. 화웨이(華爲)란 이름은 ‘중화민족을 위해 행동한다’는 ‘중화유위(中華有爲)’에서 따왔다. ▷미국 당국은 2007년 이란에 통신장비를 공급했다는 이유로 뉴욕 출장 중이던 런 회장을 조사했다. 중국 제조업의 질적인 성장을 꾀하는 ‘중국제조 2025’ 계획이 발표된 2015년 이후 미국의 경계심은 높아졌다. 5G 선두주자인 화웨이에 첨단산업 주도권을 뺏길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화웨이에 얽힌 한국의 이해득실은 복잡하다. 화웨이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에서 연간 10조 원 규모의 D램, 낸드플래시를 구매하는 주요 고객이다. 미국이 화웨이에 자국 기술, 장비가 사용된 반도체 공급 통제를 강화하면 타격이 불가피하다. 반면 5G 장비, 스마트폰 시장에서 화웨이는 삼성전자와 경쟁 관계다. 미국의 압박에 서구 선진국 업체들이 화웨이 장비 구매를 꺼리고 있어 반사이익이 기대된다. ▷코로나19 사태로 중국 중심의 글로벌 공급망이 흔들리자 미국은 경제번영네트워크(EPN) 등 중국을 뺀 공급체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블랙 스완’이란 책에서 나심 탈레브 뉴욕대 교수가 글로벌 금융위기를 예견한 뒤 검은 백조는 ‘도저히 발생할 것 같지 않지만 실제로 발생하는 일’이란 뜻을 얻었다. 중국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고 첨단기술 굴기를 뽐내온 화웨이엔 코로나19가 검은 백조가 될지도 모른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인디언 영화에 나오는 백인 기병대 대장이 생각난다.” 지난해 4월 정세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은 존 볼턴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이렇게 비난했다. 인디언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웠지만 학살자로도 비판받은 제7기병대 커스터 장군의 콧수염과 고집 센 표정을 볼턴에게서 발견했던 모양이다. 작년 2월 하노이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회담이 ‘노딜’로 끝난 책임을 볼턴에게 돌리며 한 말이었다. ▷볼턴이 쓴 ‘그 일이 일어난 방: 백악관 회고록’이 미국 정가를 뒤흔들고 있다. 어제는 2018년 6월 싱가포르 정상회담 때 트럼프가 김 위원장에게 ‘낚여(hooked)’ 회담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어리석은 실수를 했다는 내용이 공개됐다. 볼턴은 또 김 위원장이 트럼프에게 핵실험을 하지 않겠다고 한 약속은 ‘브루클린 다리를 판 것’이라고 비판했다.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물 팔아먹었다’는 뜻의 미국 표현이다. 미북 비핵화 외교에 대해선 ‘한국의 창조물’이란 말로 정상회담을 주선한 문재인 정부에 불편한 심정을 내비쳤다. ▷볼턴은 미국 외교계의 대표적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이다. 아버지 조지 부시 대통령 때 발탁됐고 아들 부시 대통령 때 국무부 차관, 유엔 주재 미 대사로 북핵 문제를 다뤘다. 2002년 이라크 이란 북한 3개국을 ‘악의 축’으로 규정해 제재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트럼프의 국가안보보좌관이 된 그가 작년 하노이 회담에서 선(先) 핵폐기, 후(後) 보상의 ‘리비아 모델’을 꺼내들자 당황한 북한은 협상을 결렬시켰다. ▷리비아 모델은 독재자 카다피 원수의 비참한 최후를 지켜본 북한 정권으로선 상상조차 하기 싫은 방식이다. 게다가 66시간 기차로 이동한 ‘최고 존엄’에게 망신을 준 볼턴은 북한엔 국적(國賊)이나 다름없다. 작년 단거리미사일 발사를 볼턴이 비판하자 북한 외무성은 “전쟁광 볼턴은 인간 오작품”이란 반응을 내놨다. 트럼프에게도 작년 9월 해임된 볼턴이 재선 가도의 큰 걸림돌이 됐다. 트럼프는 트위터를 통해 “미친 볼턴이 리비아 모델을 살펴보고 있다고 말했을 때 다 망했다”라고 힐난했다. ▷미국 언론이 경쟁적으로 책 내용을 보도하면서도 “자기비판이 결여돼 있다”고 꼬집는 건 오만에 가까운 볼턴의 캐릭터 때문이다. 하지만 트럼프가 동맹국 관계, 인종차별 문제 등에서 안팎의 신뢰를 잃어가는 지금 볼턴의 폭로 쪽에 더 믿음이 가는 게 사실이다. 게다가 연일 막말, 도발을 이어가다 “비핵화라는 개소리는 집어치우라”고까지 뻔뻔스레 떠드는 북측 태도를 보면 그들이 절대 핵을 포기할 리 없다는 볼턴의 지론이 선견지명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은 너무 과소평가돼 있습니다.” 2006년 그리스 정부는 이전 6년간 GDP 규모를 25%씩 상향 조정했다고 발표했다. 지하경제가 큰 몫을 차지하는 그리스의 진짜 경제규모를 보여주려면 GDP를 높여 잡아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그 바람에 그리스는 매춘 밀거래 돈세탁 등 범죄부문까지 포함해 단박에 GDP를 25% 늘린 나라가 됐다. ▷그리스가 GDP를 분식(粉飾)한 진짜 이유는 국가채무, 재정적자를 적어 보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GDP 숫자가 커지면서 GDP 대비 국가채무, 재정적자 비율은 떨어졌다. 하지만 숫자만 바꿨다고 경제가 진짜 좋아졌을 리 없다. 국가신용등급이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진 후 2009년 말 추락하기 시작해 무디스 기준 등급이 2년 3개월 만에 A1에서 최하위 C로 16계단 떨어졌다. ▷코로나19 대응에 재정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청와대와 여당은 요즘 ‘좋은 채무론’을 내세운다. ‘적자국채를 발행해 돈을 풀어도 GDP가 더 많이 늘어나면 좋은 것’이란 논리다. 하지만 이는 기초산술에 안 맞는 발상이다. 재정지출을 늘렸을 때 GDP가 얼마나 늘어나는지 보여주는 ‘재정승수’가 한국은 0.3∼0.5다. 즉 1조 원을 풀 때 GDP는 3000억∼5000억 원 증가에 그친다는 뜻. ▷국가채무비율 급증은 국가신용등급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신용평가사 피치는 올해 2월 “한국의 국가채무 비율이 2023년 46%까지 높아지면 등급 하락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3차 추경까지 반영하면 지난해 38.1%였던 이 비율이 올해 말 43.5%로 급등한다. 마이너스 성장으로 GDP가 줄면 46% 선을 올해 안에 넘길 수도 있다. ▷그렇다고 곧바로 등급이 떨어지는 건 아니다. 코로나19 사태로 모든 나라들이 재정을 풀면서 부채비율이 높아지고 있어 신용평가사들도 칼같이 기준을 적용하기 어렵다. 한 나라의 빚 갚을 능력을 평가하는 만큼 산업경쟁력, 증세 여력도 고려한다. 그럼에도 등급 하락을 극도로 경계해야 하는 건 1997년 외환위기 때 경험했듯 한번 시작되면 걷잡을 수 없이 추락하기 때문이다. 복구하는 시간도 오래 걸린다. 외환위기 이후 그전 등급을 되찾는 데 13년이 걸렸다. ▷신용등급이 하락하면 국채이자가 올라 재정에 다시 부담을 주는 악순환이 시작된다. 3차에 걸친 60조 원의 추경으로 나랏빚이 111조 원 늘면서 한국은 올해에만 20조 원 안팎의 국채이자를 지불해야 한다. 만약 신용등급까지 강등돼 이자율까지 높아지면 그야말로 빚이 빚을 부르는 상황이 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계량경제학의 창시자 어빙 피셔 교수는 1920년대 미국 예일대가 자랑하는 최고의 경제학자였다. 주식 투자에서 큰 성공을 거둔 그는 1929년 10월 14일 투자자 모임에서 “주가가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고원(高原)에 이르렀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열흘 뒤 다우존스평균지수는 하루 만에 30% 이상 폭락했다. 대공황의 시작을 알린 ‘검은 목요일’이었다. 이후 3년간 주가는 10분의 1로 추락했고 피셔는 파산했다. ▷대공황 이후 최악이란 코로나19 경제위기가 계속되고 있지만 증시는 정반대로 달리고 있다. 4일까지 코스피는 5일 연속 상승해 2,151.18로 거래를 마쳤다. 바닥을 쳤던 3월 19일보다 47.6% 올랐고 연중 최고치인 1월 22일의 94.9%를 회복했다. 미 전역 시위 확산 등 악재에도 불구하고 3일 뉴욕 증시 S&P500지수 역시 전날보다 1.36% 급등하며 2월 19일 연중 최고치의 92%를 회복했다. 증시만 보면 ‘V자형 회복’ 양상인 것이다. ▷대공황 때와 결정적으로 달라진 건 중앙은행, 정부의 대응이다. 대공황 당시 미 정부는 재정적자를 염려해 긴축정책을 폈고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통화 공급을 주저했다. 하지만 이번에 미 연준은 무제한 양적완화, 제로금리로 막대한 유동성을 공급했고 트럼프 행정부는 재정 지출을 크게 늘렸다. 한국도 3차에 걸쳐 60조 원 가까운 추경을 진행하고 있으며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사상 최저인 0.5%로 낮췄다. ▷그 덕에 유동성 풍년인데 여유자금을 가진 사람들은 돈 넣을 데가 없어 고민이다. 예·적금에 1억 원을 넣어봐야 월 이자가 10만 원도 안 된다. 과거 경제위기 때 최악의 순간만 넘기면 주가가 회복되는 걸 경험한 한국의 ‘동학개미’들은 3월 말부터 외국인이 내놓은 우량주를 속속 사들였다. 최근엔 돈 굴릴 데가 없어 돌아온 외국인에게 주식을 팔아 차익 실현을 하고 있다. 다만 이 과정에서 기업 실적에 관계없이 주가가 뛰고 사소한 이슈에 주가가 출렁이는 등 주가와 실물의 디커플링이 심화됐다. ▷거품이려니 하면서도 상승 랠리를 보며 지금이라도 뛰어들까 고민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도 이런 질문을 많이 받는 모양이다. 그는 최근 칼럼에 투자자들이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세 가지 규칙을 소개했다. “첫째, 주식시장은 경제가 아니다. 둘째, 주식시장은 경제가 아니다. 셋째, 주식시장은 경제가 아니다.” 실물과 증시가 따로 놀기 시작하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도 예측불가란 뜻이다. 90여 년 전 피셔 교수의 역사적 망신이 경제 전문가들에게는 큰 교훈이 됐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행복감 제고에 약간 효과 있음, 근로의욕 고취 효과는 별로 없음.’ 핀란드 사회보장국이 지난달 6일 내놓은 기본소득(basic income) 실험 최종 보고서는 이렇게 요약된다. 기본소득 도입 찬성파와 반대파는 이 결과를 놓고도 각자 유리한 쪽으로 해석했다. 핀란드 정부는 2016년 말부터 2000명의 실업자에게 2년간 아무 조건 없이 매달 기본소득 560유로(약 76만4000원)를 지급하고 기본소득을 받지 않은 비수급 실업자와 스트레스 수준, 취업률 등을 비교한 정부 차원의 기본소득 실험을 세계에서 처음으로 실시했다. ▷기본소득 찬성론자들은 모든 국민에게 동일 액수의 기본소득을 정기적으로 지급하면 빈곤층의 안정감이 높아지고 더 적극적으로 취업에 나설 것이라고 생각한다. 핀란드 실험에서는 이런 기대가 입증되지 않았다. 스위스에서는 2016년 전 국민에게 매달 2500스위스프랑(약 320만 원)의 기본소득을 주는 법안이 발의됐지만 근로의욕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 국민이 많아 국민투표에서 부결됐다. ▷이렇게 검증되지 않은 제도지만 한국 정치권에선 주도권 선점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미래통합당 김종인 비대위원장은 3일 “당이 ‘실질적 자유’를 어떻게 구현해 낼지가 가장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실질적 자유’는 기본소득 이론 체계를 구축한 벨기에 경제학자 필리프 판파레이스가 쓴 개념이다. 김 위원장은 더불어민주당 비대위 대표 시절인 2016년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세계적으로 불평등 격차를 해소하는 방법의 하나로 기본소득 논의가 시작됐다는 걸 매우 주목해야 한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여권 역시 2022년 대선의 어젠다로 떠오를 가능성이 있는 기본소득 주제를 놓칠 수 없다는 분위기다. 민주당 소병훈 의원은 ‘기본소득에 관한 법률 제정안’ 발의를 준비 중이다. ▷최근 집행된 긴급재난지원금 총예산이 14조3000억 원이다. 4인 가족 기준 100만 원씩 지급된 이번 지원금 수준의 기본소득을 매달 전 국민에게 나눠주려면 연간 171조 원이 든다. 이런 재원 문제 때문에 청년층, 노인층 등에 제한적으로 지급하는 방안이 우선적으로 검토될 공산이 크다. ▷효과가 검증되지 않았는데도 여러 선진국이 기본소득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수백 년에 걸쳐 복잡해지고 효율성이 떨어진 복지 시스템을 기본소득 도입을 통해 정비하는 것이 효율적일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한국에서 논의되는 기본소득은 기존 복지체계에 ‘선심성 돈다발’을 추가로 얹는 형태다. 여야는 기본소득 논의를 본격화하기 전에 현재의 복지체계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부터 설명해야 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특히 한우와 삼겹살 매출이 급증했다고 합니다.” 26일 국무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긴급재난지원금의 소비 진작 효과가 나타났다며 반색했다. 그러면서 “기부에 참여하고 있는 국민들께도 특별히 감사드린다”고 했다. 하루 전 춘천시 중앙시장 내 약국을 찾은 최문순 강원지사는 재난지원금으로 받은 강원상품권으로 탈모치료제를 샀다. ‘기부하지 말고 지역에서 소비하자’는 주장대로 실천에 나선 것이다. ▷25일까지 12조9640억 원이 풀린 재난지원금은 코로나19로 얼어붙은 소비심리에 온기를 불어넣고 있다. “평소 못 먹던 한우로 ‘플렉스(flex·과시적 소비를 일컫는 신조어)’했다”는 이들이 늘면서 한우 도매가가 역대 최고가를 경신했고 돼지고기 가격도 덩달아 뛰었다. ‘공짜면 황소도 잡아먹는다’는 속담이 현실이 됐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5월 소비자심리지수도 석 달 만에 반등했다. ▷다만 기부는 정부 여당의 기대에 못 미치는 수준이다. 지급 대상 2171만 가구 중 94.7%인 2056만 가구가 총지급 예상액 14조2448억 원의 91%를 이미 타갔다. 지급 시작 전 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7∼20%의 국민이 기부 의사가 있고 10% 부가가치세를 고려하면 푸는 돈의 30%는 환수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현실은 차이가 있다. ▷물론 이미 사회적 혜택을 많이 받았다며 자발적으로 기부하거나 신청하지 않은 이들이 주변에 꽤 있다. 반면 공식 기부처를 고용보험기금으로 고정한 것이나, 자발성을 강조하면서도 심리적 부담을 준 여권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어 굳이 받아썼다는 이들도 있다. 고소득층 가운데는 ‘어차피 내가 갚을 돈’이라며 당당히 받아 소비하는 이들도 있다. 나랏빚이 쌓이면 어차피 고소득층에게 증세(增稅) 부담이 주로 돌아올 것인 만큼 기부할 생각이 없다는 주장이다. 2018년 기준 전체 근로자의 상위 30%(560만 명)가 근로소득세수의 94.9%를 부담했다. ▷공무원들은 고심하는 분위기다. 고위 공무원 가운데는 혹시라도 승진이나 인사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이들도 있다. “가족의 선택은 강제할 수 없다”며 가족 전체 수령액 중 자기 몫만 부분 기부했다는 공무원도 있다. ▷“정부가 보유한 정책 수단의 숫자가 정책 목표보다 많거나 같을 때에만 경제정책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틴베르헌의 법칙’은 정책전문가들 사이에선 상식이다. 국민이 재난지원금을 소비해 자영업자, 소상공인 매출이 늘고 있다면 그것으로 이미 정책 목표 달성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기부 문화 확산 같은 다른 목표에 너무 많은 미련을 남길 필요는 없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3월 말 당정청이 긴급재난지원금 지급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처음 모였을 때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들고 온 소득 하위 50% 가구 지원 구상에 유일하게 편들어준 인물이 김상조 대통령정책실장이다. 더불어민주당 기세에 밀려 지급대상이 하위 70%로 늘고 총선 후 다시 전 국민 지급으로 결론 나는 과정에서 부총리가 재정 악화를 우려하며 버티는 모습을 보였던 데에도 김 실장의 심정적 조력이 있었다고 한다. 진보성향 학자로 현 정부의 첫 공정거래위원장을 거쳐 청와대에 들어간 김 실장이 총선을 전후해 보인 모습이 의외여서 기억에 남았다. 김 실장은 작년 10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을 ‘양손잡이 경제학자’라고 소개한 적이 있다. 트루먼 미 대통령 일화를 빗댄 표현이다. “한편으론(on the one hand) 이렇지만 다른 한편으론(on the other hand) 저렇다”식으로 정책 장단점을 함께 거론하는 경제학자들을 보고 트루먼이 짜증내며 “손이 하나만 있는 경제학자를 데려오라”고 했다. 김 실장은 또 “아무리 좋은 정책도 시장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게 대통령의 철학”이라고 말했다. ‘대통령도 나처럼 양손잡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 같다. ‘대공황 이후 최악’이란 말이 익숙해질 정도로 코로나19 사태 이후 각국 정부는 ‘한쪽 손’만으로 해결하기 힘든 위기에 빠졌다. 국민 안전을 위해 격리를 최대한 유지하면서도 경제활동을 재개해 무너진 가계·기업을 살려야 하는 게 모든 정부가 처한 딜레마다. 저소득층 생계유지를 위해 돈을 풀어야 하지만 재정적자 확대로 국가신용도 하락, 외국자본 유출을 걱정해야 하는 건 기축통화국이 아닌 개도국의 딜레마다. 위기가 닥쳤을 때 최고경영자(CEO)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는 경영학이 오래 고민해온 주제다. 최고의 경영전문가들 중에 위기 속 리더가 갖춰야 할 덕목으로 ‘프로블럼(problem)’과 ‘딜레마(dilemma)’를 구별하는 능력을 꼽는 이들이 있다. 말 그대로 ‘문제’를 만나면 해법(solution)을 찾아 실천에 옮기는 걸로 충분하다. 하지만 딜레마는 어느 쪽을 선택해도 부작용이 따르기 때문에 대응 방식이 달라야 한다. 현명한 대처법은 한쪽을 대뜸 선택하지 말고 상황을 관리(manage)하면서 이를 극복할 창조적 아이디어를 모색하는 것이다. 현 정부 경제정책은 ‘한손잡이’란 비판을 받을 만했다. 소득 양극화를 ‘문제’로 인식한 정부는 2년 만에 30% 가까이 최저임금을 올리는 해법을 썼다. 긴 근로시간도 ‘문제’로 보고 주 52시간 근로제를 답으로 내놨다. 하지만 최저임금이 급등하자 편의점주, 음식점 주인들이 직원을 해고해 저소득층이 일자리를 잃었다. 탄력근로제 보완 없이 근로시간 감축을 강행하자 근로자는 수입이 줄고, 기업은 생산에 차질이 빚어졌다. 딜레마를 정답이 있는 문제로 인식하다 보니 속도 조절 등 관리에 실패한 것이다. 코로나 사태와 총선 압승 이후 변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해외로 나갔다가 유턴하려는 기업의 투자 의욕을 꺾는 수도권 규제, 김대중 대통령 때부터 20년간 진척 없는 원격의료 등의 사안에 대처하는 청와대와 정부의 기류가 달라졌다. 섣불리 다루면 지지층이나 여당의 강한 반발을 초래할 수 있는 사안들이다. 코로나 사태가 금기에 가까운 딜레마를 뛰어넘을 기회를 제공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달 10일 취임 3주년 연설의 대부분을 경제 문제에 할애했다. 정권 초부터 수많은 논쟁을 부른 ‘소득주도 성장’은 빠졌다. 오너인 국민의 위임을 받아 나라의 전문경영인으로 일할 시간이 이제 2년 남았다. 그 안에 최대한 많은 딜레마를 극복하고 성공한 국가 경영자로 기억되려면 대통령이 제일 먼저 능수능란한 양손잡이 리더가 돼야 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주택도시보증공사(HUG) 외에 주택 보증 기관을 추가해 경쟁시켜야 한다.” 건설업체와 재건축 조합들 사이에서 최근 이런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주택법이 30채 이상 주택을 선(先)분양할 때 소비자 피해를 막기 위해 보증보험에 의무적으로 가입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보증을 내주는 기관은 HUG 한 곳뿐이기 때문이다. ▷주택도시기금법에 따라 설립된 HUG는 주택 분양, 임대보증금, 전세보증금 등의 보증 업무를 도맡는 공기업이다. HUG 독점 문제가 최근 도드라진 건 여러 재건축·재개발 사업들이 HUG와 마찰을 빚으면서다. HUG는 ‘보증 리스크 관리’라는 이유로 서울, 경기 과천시 등을 고분양가 관리지역으로 지정해 보증 전에 분양가를 심사하고 있다. 높은 분양가로 주변 아파트 값을 자극하지 못하게 가이드라인을 정하고 있는 셈이다. ▷HUG가 보증을 서주지 않으면 사업 진행이 불가능해진다. 서울 둔촌주공아파트 조합은 1만2000가구의 대단지 재건축을 추진하면서 HUG와 분양가에 대한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해 사업이 지체되고 있다. 수수료 수입으로 지난해에만 4850억 원의 영업이익을 챙기면서도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상전 노릇’을 한다는 게 건설업체와 재건축 조합들의 불만이다. 울며 겨자 먹기로 HUG 요구에 맞춰 분양가를 낮춘 아파트는 당첨만 되면 수억 원대 차익을 올릴 수 있는 ‘로또 청약’이 된다. ▷주택 보증 시장에 경쟁 체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지적은 2008년부터 제기됐다. 2017년에는 시장경쟁 촉진이 주 업무인 공정거래위원회가 “복수 주택 보증 기관 체제를 도입하라”고 국토교통부에 권고했고 그 시한이 올해까지다. 당시 국토부는 HUG 외에 ‘장관이 지정하는 보험회사’가 보증을 해줄 수 있도록 관련 규정을 고쳤지만 아직까지 업체를 지정하지 않고 있다. 다른 보증업체가 들어와 HUG를 피할 길이 생기면 아파트 분양가를 잡을 강력한 수단이 약화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는 게 건설업계의 생각이다. ▷HUG로선 억울한 면이 있다. 정부 정책을 충실히 수행한다는 이유로 비판의 타깃이 되기 때문이다. 경쟁체제 도입으로 시장에 새로 들어오는 민간업체가 높은 수수료를 챙기려고 고가 아파트 분양에 집중할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신용도가 낮은 중소 건설업체의 수수료가 높아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하지만 시장경제 원리에 맞지 않는 ‘보증 독점’이란 수단으로 아파트 값을 언제까지나 억누를 수 없다는 건 정부나 HUG 관계자들도 잘 알고 있다. 정부와 여야는 21대 국회에서 시장의 문을 여는 쪽으로 개선책을 찾아야 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억대 연봉’은 한국 직장인 100명 중 3명만 도달하는 최고 수준의 급여다. 임원도 아닌 직원 평균 연봉이 1억 원을 넘는다면 월급쟁이에게 ‘꿈의 직장’이다. 지난해 한국에 이런 억대 연봉 직장은 33곳이었다. ▷기업평가 사이트 CEO스코어가 지난해 500대 기업 연봉을 분석한 결과 임원을 제외한 직원 평균 연봉이 가장 높은 곳은 KB금융그룹 지주사인 KB금융(1억3340만 원)이었다. 하나금융지주도 1억2280만 원으로 4위를 차지했다. 시중은행과 달리 금융지주사는 직원 수가 적고 간부의 비중이 커 평균 연봉이 높다. 업종별로 봤을 때 증권사(1억430만 원), 은행(9200만 원)도 대기업 평균(7920만 원)보다 연봉이 각각 32%, 16% 높았다. 한국에서 연봉 1억 원 이상인 직장인은 2018년 기준 49만 명, 전체 임금근로자의 3.2%다. ▷문제는 이처럼 ‘높은 연봉 일자리’인 금융권이 정보기술(IT)과 핀테크 발전으로 대면업무가 줄어듦에 따라 일자리도 감소한다는 점이다. 지난해 말 6개 시중은행의 직원 수는 6만8000명으로 1년 전보다 0.9% 줄었다. 코로나19 사태로 가속화된 ‘언택트(비대면) 트렌드’는 금융권 일자리를 더 줄일 수 있다. IBK기업은행 NH농협은행 등이 공채를 진행 중이지만 다른 시중은행들은 하반기로 일정을 미루고 있다. ▷2017년 연봉 1∼5위를 휩쓸었던 정유업계의 위상도 흔들리고 있다. SK에너지는 1위에서 지난해 2위로 물러났고 에쓰오일은 4위에서 18위로, GS칼텍스는 5위에서 19위로 내려앉았다. 대형 장치산업인 정유업체는 전문 엔지니어의 연봉이 월등히 높아 ‘제조업 분야 신의 직장’으로 불린다. 하지만 실적 악화로 정유업계 연봉은 8760만 원으로 전년보다 4.7% 줄었다. 명예퇴직을 고려하는 업체까지 나오고 있다. ▷미국에서도 ‘여섯 자릿수 연봉(six-figure income)’, 즉 10만 달러(약 1억2260만 원)는 고연봉자를 구분하는 전통적 기준이다. 미국 정부가 ‘경기부양 수표(stimulus check)’를 연봉 9만9000달러 이하 직장인에게만 지급하는 것도 10만 달러 이상을 고소득으로 보기 때문이다. 전 국민의 93.6%가 수표를 받았다. ▷갈수록 높은 연봉의 일자리가 많아져야 할 텐데 현실은 정반대다. 코로나19 사태로 고연봉 업종들의 실적이 나빠지고 들어가는 문도 좁아지고 있다. 마이너스 성장과 원화 가치 하락이 겹치면 작년 3만2047달러였던 1인당 국민소득이 올해 3만 달러 밑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월급쟁이에겐 기운 빠지는 현실이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99개월 만에 4월 무역수지가 적자를 볼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획재정부 김용범 1차관은 29일 제1차 비상경제 중앙대책본부(경제 중대본) 회의 결과를 브리핑하면서 우울한 전망을 내놨다. ‘무역수지 100개월 연속 흑자’라는 대기록 달성이 불과 한 달을 남기고 무산될 것이란 소식이다. 3월 무역수지 확정치는 다음 달 1일 발표된다. ▷상품 수출액과 수입액을 비교한 무역수지의 적자는 코로나19 탓이다. 미국 중국 유럽 등 주요 교역국의 국경이 막히면서 수출이 크게 감소한 반면 수입은 그만큼 줄지 않았다. 4월 1∼20일 무역수지가 34억5500만 달러(약 4조2000억 원) 적자여서 남은 기간 만회하기가 어렵다. 수출, 수입을 합한 금액을 국내총생산으로 나눈 무역의존도가 한국은 68.8%로 미국(20.4%)의 3.4배, 일본(28.1%)의 2.4배다. 그만큼 다른 선진국에 비해 무역 축소가 전체 경제에 미치는 타격이 클 수밖에 없다. ▷한국이 월 기준 마지막 무역 적자를 냈던 2012년 1월은 유럽 재정위기 영향으로 세계 경제가 휘청거리던 때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지나치게 돈을 푼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들이 몇 년이 지나 재정적자로 국가부도 상황에 직면했다. 유럽을 중심으로 세계 경제가 위축되면서 휴대전화, 선박 등을 중심으로 한국의 수출이 전년 동월 대비 6.6% 감소한 데다 국제유가 급등으로 수입액이 크게 늘어 19억6000만 달러 무역적자를 냈다. ▷그로부터 두 달도 지나지 않은 2012년 3월 15일 한국과 미국 사이에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됐다. 노무현 대통령 때 시작돼 이명박 대통령 때 발효된 한미 FTA를 계기로 수출이 활성화되면서 이후 8년 넘게 월간 무역수지 흑자 릴레이를 이어왔다. 광복 이후 한국이 연간 무역수지 흑자를 낸 것은 1986년이 처음이었다. 이후 4년간 흑자를 내다 다시 적자로 돌아섰다. 그러다 1998년 원-달러 환율 상승 덕분에 높아진 가격경쟁력을 바탕으로 수출이 급증해 흑자로 전환했다. ▷무역수지가 적자를 내면 국내 외환이 줄어들고 국가신용도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무역적자는 코로나로 인한 일시적 현상”이라고 정부가 설명하지만 국제질서는 수출주도형 한국 경제에 불리한 반(反)세계화와 보호무역 강화 쪽으로 급격히 움직이고 있다.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자동차 수출이 1분기에 선방했지만 코로나 영향이 본격화된 2분기에는 큰 폭의 감소가 불가피하다. 8년 전 한미 FTA처럼 앞뒤가 꽉 막힌 현재의 상황을 타개할 반전 카드가 필요한 때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미국 뉴욕상업거래소 5월 인도분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 가격이 20일 전날보다 305% 폭락해 배럴당 마이너스 37.63달러라는 초유의 기록을 세웠다. 원유 1배럴(159L)을 사가는 사람에게 생산자가 4만6000원을 얹어준다는 뜻이다. 세계가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유가다. WTI는 영국 북해산 브렌트유, 중동산 두바이유와 함께 세계 3대 유종으로 국제유가의 표준이 되는 고급 기름이다. ▷생산지가 텍사스, 오클라호마주 등 미 내륙이란 점이 마이너스 가격에 영향을 미쳤다. 다음 달까지 미국 내 코로나19 종식과 소비 회복을 기대하기 어렵고, 현지 저장시설은 2주면 꽉 찰 것이란 전망 때문에 아무도 5월 생산될 원유를 미리 구매하려 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유정 특성상 수도꼭지 잠그듯 생산을 멈추기도 어렵다. 바다까지 옮겨 해외로 수출하려면 추가 비용이 든다. 차라리 가져가는 사람에게 웃돈을 얹어주는 게 낫게 된 것이다. 같은 날 해상유전에서 생산돼 유조선으로 실어 나르기 편한 북해산 브렌트유는 25.57달러에 거래됐다. WTI도 코로나 영향이 적어질 6월 인도분은 21달러 선을 유지했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독려 끝에 23개 산유국 모임인 ‘오펙플러스(OPEC+)’는 하루 970만 배럴 감산에 합의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하루 3000만 배럴 줄어든 세계 원유 수요를 고려하면 너무 적어 가격을 끌어올리기엔 역부족이다. 유가를 끌어내려 세계 1위 산유국이 된 미국의 셰일가스 산업을 고사시키는 게 사우디아라비아 러시아 등의 속마음이란 분석도 나온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한국이지만 석유화학제품은 반도체(17.3%), 자동차(7.9%)에 이은 3위(7.5%) 수출품이다. 정유업체 매출의 60%가 나프타 등 수출이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 전 비싸게 산 원유는 유조선에 실려 속속 항구에 도착하고 국내 저장시설은 꽉 차서 재고 비용만 늘고 있다. 항공유 판매는 작년 동월 대비 80%, 휘발유도 15% 감소했다. 수출품 가격은 빠르게 하락해 ‘정제 마진’은 마이너스다. 돌릴수록 손해여서 일부 업체는 공장을 세웠다. ▷원유 값이 떨어져도 판매가의 60% 이상이 세금인 휘발유 값은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위기에 빠진 정유업계는 유류세 부담을 줄여달라고 요청하지만 세수의 10% 정도인 에너지세를 깎아줬다가 재정에 구멍이 뚫릴까 봐 정부는 소극적이다. 원유 값이 떨어지면 대형 LNG선을 생산하는 조선업, 중동에 진출한 건설업체들도 큰 타격을 받는다. 마이너스 유가가 경제에 희소식만은 아닌 이유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코로나19 위기는 우리 곁에 가까이 있는 공장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해준다.” 기획재정부 김용범 1차관은 며칠 전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렸다. 그간 마스크를 확보하느라 뛰어다니며 느낀 소회였다. 이어 “우리나라에 공장이 100여 개 있어서 마스크도 이 정도로 숨통을 틔울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국가적 위기 때 제조업 기반이 국내에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절감한 나라는 한국만이 아니다. 미국 정부는 이달 초 포드, GM 등 자동차기업에 인공호흡기 생산을 강제하려고 1950년 6·25전쟁 발발 직후 제정된 국방물자생산법까지 동원해야 했다. 설계·개발 기술이 넘쳐나도 정작 제품을 생산할 공장이 미국 땅 안에 없었던 것이다. 먼저 위기를 넘어선 중국 인공호흡기 업체들은 각국에서 쏟아지는 주문에 24시간 공장을 돌리고 있다. ▷코로나 사태로 ‘리쇼어링(reshoring)’의 중요성이 새삼 부각됐다. 낮은 비용, 넓은 시장을 쫓아 기업이 해외로 나가는 ‘오프쇼어링(off-shoring)’의 반대말로 떠났던 기업이 모국에 복귀하는 게 리쇼어링이다. 한국에선 ‘기업유턴’이란 말을 같은 뜻으로 써 왔다. 트럼프 정부는 법인세 최고세율을 35%에서 21%로 낮췄고, 일본 아베 정부도 법인세 실효세율 인하와 입지규제 완화로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생산시설을 해외로 내보낸 선진국들은 제조설비를 특정국에 몰아둘 때의 위험성을 깨달았다. ‘계란은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주식시장 금언이 국제 산업 체계에서도 작동하는 셈이다. 세계의 공장 중국발 팬데믹은 20년 이상 지탱해온 ‘글로벌 공급망’에 변화를 불러올 것으로 예상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달 8일 “‘안전한 한국’을 부각해 해외로 나간 기업들을 국내로 유치하겠다”고 말했다. 리쇼어링 경쟁에 나서겠다는 의지다. 하지만 경쟁국들이 만만찮다. 미국은 리쇼어링을 ‘안보사안’으로 인식해 밀어붙일 태세다. 베트남 등 동남아 신흥국들도 유리한 위치에 서 있다. 반면 한국은 선진국들이 인하경쟁을 벌일 때 드물게 법인세 최고세율을 25%까지 높인 나라다. 3년간 32.8% 올린 최저임금 탓에 인건비 경쟁력도 낮다. ▷“나는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일자리 자석(employment magnet)’이 되길 원한다. 기업들이 떠나는 걸 훨씬 어렵게 만들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2017년 취임 직후 말했듯 리쇼어링의 본질은 ‘자국민을 위한 일자리 확보’다. 한국이 이번 경쟁에서 앞서나갈 수 있을까. 기업은 정부의 의지가 아니라 숫자로 드러나는 혜택에 반응한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배달의민족(배민)은 “치킨은 살 안 쪄요, 살은 내가 쪄요” 등 스치다 봐도 머리에 콕 박히는 광고 카피로 유명한 배달앱 브랜드다. 배민을 운영하는 우아한형제들은 2018년 말 한국의 네 번째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조 원 이상 벤처기업)에 올랐다. 이 업체가 코로나19 사태 와중에 자영업자, 소비자, 정치권의 뭇매를 맞았다. ▷논란의 시작은 우아한형제들이 이달 1일 발표한 수수료 체계 개편이다. 부과 방식을 회원 업체당 월 8만8000원씩 받던 정액제에서 주문액의 5.8%를 떼는 정률제로 바꾼 것이다. 코로나 사태로 어려움을 겪는 음식점주들이 당장 “수수료가 몇 배로 뛴다”며 반발했다. 배민 측이 “돈 많이 쓰는 업체의 광고 독점을 막기 위한 조치로 업체의 52.8%는 이득”이라고 해명했지만 소용없었다. 시장점유율 1위 배민(55.7%) 운영사 우아한형제들은 2, 3위 업체 요기요(33.5%), 배달통(10.8%) 대주주인 독일 기업 딜리버리히어로에 4조7000억 원에 인수돼 공정위의 기업결합 심사를 받고 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7일 “국민 무시에 영세 상인 착취하는 독점기업 말로는 어떻게 될까요”라는 제목의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배민과 경쟁할 배달전문 공공앱 개발 방침을 밝히면서 “앱 개발 전까지 전화로 주문하자”고 제안했다. 이와 별도로 소상공인연합회도 수수료 없는 배달앱을 개발하겠다고 나섰다. 결국 10일 우아한형제들 김봉진 의장은 “전면 백지화하고 이전 체제로 돌아가겠다”고 밝혔다. ▷며칠 사이 배민에 실망해 전화로 주문하는 소비자가 늘자 일부 자영업자는 또 다른 애로를 겪었다. “전화 받다 보면 닭 튀길 시간이 부족하다. 앱으로 주문해 달라”고 응대하는 경우도 있었다. 최저임금이 급등해 종업원을 내보낸 가게가 많은 탓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2월 고용원 없는 나 홀로 자영업자는 작년 동월 대비 14만9000명 늘었다. 수수료가 아깝지만 이미 배달앱 없이 운영하기 어려운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지자체들의 공공 배달앱 실험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보기술(IT) 전문가들 사이에선 14만 명의 음식점 회원을 10년 걸려 확보해 운영 노하우를 쌓은 플랫폼 사업자와 단기간에 만든 앱으로 지자체가 경쟁하는 건 무모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결제액이 목표의 1%에도 못 미친 서울시 제로페이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 소상공인에겐 무료라고 선심 쓰지만 시스템 구입, 운영, 업그레이드에 들어갈 인력, 투자에 막대한 세금이 들어갈 수 있다. 독점 여부는 엄중히 판단하되 공공의 역할은 시장경쟁 촉진에서 멈춰야 한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북한 보건성이 지금까지 코로나19 확진자가 단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세계보건기구(WHO)에 보고했다. 에드윈 살바도르 WHO 평양소장은 “북한이 ‘이달 2일 현재 2만8000명을 격리 조치했다가 509명만 남기고 해제했으며, 자국민 698명과 외국인 11명 등 총 709명을 대상으로 진단검사를 실시한 결과 확진자는 없었다’고 보고해 왔다”고 7일 전했다. ▷세계 확진자가 214개국, 144만 명 이상으로 늘어난 8일 현재 공식 확진자가 없는 나라는 유엔 193개 회원국 중 예멘, 레소토, 투발루 등 16개국이며, 중국과 국경을 맞댄 14개국 중엔 북한과 타지키스탄뿐이다. 노동신문은 최근 “세상에서 가장 우월한 사회주의 보건제도 덕”이라고 자랑했다. ▷국내외 전문가들은 북한 의료 수준이 크게 낙후된 데다 중국 접경지역에서 밀무역이 성행하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코로나 청정국’이라는 주장을 믿기 어렵다고 말한다. 지시를 어기고 중국인과 접촉한 접경지역 의심 환자를 감염 여부조차 확인하지 않고 총살했다는 주장이 탈북민을 통해 전해졌다. 폐렴으로 사망하면 유족 동의 없이 화장 처리해 유골만 전달한다는 소식도 흘러나왔다.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사령관은 이달 초 “모든 정보를 근거로 할 때 (확진자가 없다는 것은) 불가능한 주장”이라고 말했다. 앞서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북한 군부대에서 100명 이상 사망자가 생겼다고 보도했다. ▷북한이 통제사회답게 일찌감치 강력한 봉쇄 조치를 취한 것은 사실이다. 북한은 1월 말 북-중 국경을 봉쇄하는 등 육상 항공 해상 통로를 꽁꽁 걸어 잠갔다. 중국 우한에서 처음 발병한 게 2019년 12월, 사람 간 전염 가능성을 중국 정부가 공식 확인한 것이 1월 21일이었으니 초기에 문을 닫아건 것이다. 서민 경제활동의 중심인 장마당도 폐쇄해 주민 간 접촉을 막았다. 이달 10일 최고인민회의에 참석할 전국 대의원 687명도 3월 말부터 2주 이상 격리를 거친 뒤 평양에 도착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주재하는 회의에 참석한다. ▷식량, 생활필수품의 유일한 공급 채널인 접경무역 중단이 장기화되면서 주민 생활고는 깊어지고 있다. 데일리NK에 따르면 3월 초 평양 쌀값은 국경 폐쇄 전보다 60% 이상, 밀가루 식용유 설탕 휘발유 등은 20∼60%나 폭등했다. 중국 관광객이 뿌리던 달러가 끊어져 환율도 치솟았다. 코로나 피해가 없다고 주장하다 보니 국제기구의 지원을 받을 명분도 부족해졌다. 확진자 0명 기록에 북한 정권이 자존심을 거는 바람에 병보다 영양 결핍으로 쓰러지는 북한 주민이 더 많지 않길 바랄 뿐이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누리엘 루비니 미국 뉴욕대 교수와 벤 버냉키 전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문제로 촉발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가장 유명해진 경제 전문가들이다. 코로나19 사태가 향후 경제에 미칠 영향을 놓고 최근 두 석학은 정반대 전망을 내놓았다. ▷금융위기를 정확히 예측했던 루비니는 ‘닥터 둠’이란 별명처럼 세계 챔피언급 경제 비관론자다. 평소 시장의 환영을 못 받다가도 큰 경제위기가 터지면 ‘용한 점쟁이’ 찾듯 언론이 그의 발언에 주목한다. 루비니는 한 인터뷰에서 현 상황을 “대공황보다 심한 특대급 대공황(Greater Depression)”으로 진단했다. 또 “V자, U자, L자도 아닌 I자형으로 수직 추락할 것”이라며 특유의 비관론을 펼쳤다. ▷그러자 다음 날 버냉키가 나섰다. 그는 “전형적 경제 불황보다 대형 눈폭풍(snowstorm)에 가깝다. 매우 가파른 침체가 있겠지만 꽤 빠른 회복을 보일 것”이라며 V자 또는 U자형 회복에 무게를 뒀다. 버냉키는 ‘대공황의 시사점’이란 논문으로 박사를 딴 ‘공황 감별사’이자 최근 연준이 내놓고 있는 무제한 양적 완화의 원조다. ▷이처럼 상반된 시각은 이번 사태를 글로벌 밸류체인(가치사슬) 변화를 촉발할 구조적 위기로 보느냐, 전쟁·허리케인 같은 일시적 사건 사고로 보느냐에 따라 갈린다. 루비니가 맞는다면 소비 위축과 생산 차질에서 시작된 충격은 기업 줄도산, 금융위기에 이어 자산 가격 폭락과 디플레이션으로 귀결된다. 버냉키가 옳다면 감염병 확산이 멈추고 치료제, 백신 개발이 가시화되는 시점에 억눌린 소비와 생산은 되살아난다. 각국 정부가 그간 쏟아낸 막대한 유동성에 힘입어 주식, 부동산 등 자산 가격의 상승과 인플레이션도 나타날 수 있다. ▷루비니와 버냉키의 분석은 역대 최저 수준의 실업률 등 건강 체질을 자랑하던 미국 경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핵심 산업 경쟁력 저하, 급격한 최저임금 상승 등 심한 기저질환을 앓아온 우리 경제가 받을 충격파와 회복 양상은 다를 수밖에 없다. 또 무역 의존도가 70%인 한국은 국내에서 코로나19가 종식돼도 미국, 유럽의 문제가 모두 해결된 뒤에야 회복을 기대할 수 있는 구조다. ▷2008년 미국 투자은행 골드만삭스가 국제유가 200달러를 전망할 때 정반대로 폭락을 예상한 것이 적중해 유명해진 김경원 세종대 경영경제대학장의 전망은 이렇다. “체질 개선을 위한 근본적 해법을 찾지 못하면 추락하던 한국 경제는 코로나19 사태가 끝날 때 바닥을 치고 반짝 상승한 뒤 Ⅹ축을 따라 옆걸음질치는 ‘하키스틱+일(一)자형’으로 움직일 것이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해외출장을 떠난 지 27일 만에 귀국했다. 이에 따라 검찰의 롯데그룹 비자금 수사에 속도가 붙을 것으로 전망된다. 3일 오후 2시 38분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한 신 회장은 취재진들에게 “성실히 검찰 수사에 협조하도록 하겠다”면서 기존 입장을 반복했다. 신 회장은 앞서 지난달 14일(현지시간) 미국 루이지애나주 롯데케미칼 공장 기공식에 참석했을 때에도 “전 계열사에 검찰 조사에 성실히 임하도록 주문했다”라고 밝힌 바 있다. 이날 일본 도쿄 하네다공항을 출발하는 대한항공 비행기를 탄 신 회장은 오후 2시 38분에 김포공항 입국장에 나타났다. 어두운 표정의 신 회장은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하면서 “(국민들에게)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하게 생각한다”라며 말문을 열었다. 형인 신동주 전 일본롯데홀딩스 부회장이 자신을 일본 롯데홀딩스 이사에서 해임하는 안건을 통과시키기 위해 주총을 계속 열겠다고 밝힌 데 대해서는 “큰 문제없다고 생각한다”면서 경영권 방어에 자신감을 보였다. 폐렴 증상으로 서울아산병원에 입원 중인 아버지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을 문병할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생각해 보겠다”라고 짧게 답했다. 앞서 신 회장은 검찰이 롯데그룹을 압수수색하기 3일 전인 지난달 7일 대한스키협회장 자격으로 멕시코 칸쿤에서 열리는 국제스키연맹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했다. 이후 14일 미 루이지애나주 롯데케미칼 공장 기공식에 참석한 뒤 일본롯데홀딩스 주주총회 참석을 위해 16일부터 일본 도쿄에 머물러왔다. 25일 일본롯데홀딩스 주주총회 이후에는 일본 롯데 금융 관계자 등과의 면담 등을 이유로 귀국 시기를 늦춰 왔다.박중현기자 sanjuck@donga.com}

희생양이란 말은 구약성서에서 비롯됐다. 정확히 말하면 양(羊)이 아니라 ‘희생염소(scapegoat)’다. 고대 유대인들은 속죄의 날 의식을 치르기에 앞서 염소 두 마리를 골랐다. 제비를 뽑아 한 마리는 도살해 피를 뿌리고, 나머지 한 마리는 황무지로 내쫓았다. 산 채 광야로 내몰린 희생염소는 사회 구성원들의 허물을 대신 뒤집어쓰고 떠난 것으로 간주됐고 남은 이들은 죄의 사함을 받는다고 믿었다. 요컨대 내 안의 죄를 외부화해 마음의 평화를 찾는 것이 희생염소 의식의 요체다. 세계적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은 그의 저서 ‘내 안의 유인원’에서 “잘못된 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은 우리의 특기가 아니다. 희생양 찾기는 인류가 지닌 가장 기본적이고 강력하면서 잘 의식하지 못하는 심리적 반사작용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고 썼다. 희생양 만들기는 인간뿐 아니라 침팬지 등 유인원에게 내재된 본성이며 책임 회피를 선호하는 방향으로 인류가 진화해 왔다는 설명이다. 이런 본성을 확인할 수 있는 일이 최근 한국 사회에서 벌어졌다. 이미 익숙해진 겨울철의 황사, 미세먼지가 올해엔 유독 초여름까지 이어지고 정부 당국의 예보까지 수시로 틀려 국민들의 짜증이 폭발했다. 이런 와중에 미세먼지의 상당 부분은 중국이 아니라 국내에서 배출된 것이란 분석들이 속속 나오면서 사태가 복잡해졌다. 미세먼지는 바다 건너 온 것이라 믿을 때 기관지는 답답해도 마음은 편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모두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나 아닌 누군가에게 책임을 돌려야 하는 일이 된 것이다. 첫 타깃은 디젤차였다. 이어 석탄을 때는 화력발전소들도 손가락질을 받았다. 급기야 삼겹살과 고등어까지 표적이 됐다. 애먼 삼겹살과 고등어가 희생육(肉), 희생어(魚)가 된 건 환경부가 진행한 밀폐공간 미세먼지 발생 실험의 대상으로 꼽혔기 때문이다. 온 국민이 즐겨 먹고, 기름기가 많다는 이유였다. 시계를 되돌려 1970, 80년대 서울을 생각해 보자.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매캐한 공기를 호흡하며 살던 당시엔 지금처럼 책임을 전가하는 일이 많지 않았다. 너나없이 집집마다 난방을 위해 연탄가스를 배출했고, 검은 매연을 내뿜는 버스를 타고 출퇴근했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게 분명한 잘못에 인간은 관대해지는 경향이 있다. 요즘 미세먼지의 주범으로 지목된 이들은 하나같이 억울해한다. ‘클린 디젤차’를 사면서 환경을 해칠 것이라고 생각한 경유차 주인은 없다. 삼겹살, 고등어를 구워 먹으며 죄책감을 느낀 국민이 몇이나 될까. 석탄화력발전소 허가를 내줬다고 비판받는 정부 관계자들은 먼지 배출이 적은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극력 반대해 온 환경단체 등에 불만이 크다. 불확실한 자료에 근거해 벌이는 미세먼지 주범 찾기 게임은 심리적 안정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사회적 실익은 없다. 그보다 나은 선택은 이런 사안을 발전의 계기로 삼는 것이다. 정부 대책에 일부 포함된 것처럼 수소전지차, 전기차 등의 판매를 지원해 친환경차 개발 경쟁에서 한국 기업이 앞서가도록 돕는 게 그런 방법이다. 발전소 미세먼지를 걸러내는 기술을 고도화해 중국 등에 수출할 수도 있다. 고등어, 삼겹살이 정말 문제라면 집진 시설을 갖추고 생선을 구워 파는 생선가게, 친환경 삼겹살집에 인센티브를 주는 방안도 가능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4년 3월 열린 제1차 규제개혁 장관회의에서 “복지, 환경, 개인정보보호와 같이 꼭 필요한 규제도 있다. 좋은 규제는 더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좋은 규제는 미래산업을 키우고 일자리를 만든다. 지금이 그런 규제가 꼭 필요한 때다. 박중현 소비자경제부장 sanjuck@donga.com}

4·13총선의 새누리당 공약으로 등장한 ‘한국형 양적완화’는 한국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해 국책은행 자본을 늘리고 이를 산업 구조조정 재원으로 쓰자는 아이디어다. 이 공약을 내걸고 선거에 승리하면 국민 동의를 얻은 것으로 치고 한은법을 고쳐 조선, 해운산업 구조조정 자금을 조달한다는 계획이었다. 여당이 선거에서 지면서 물 건너간 것처럼 보이던 이 방안은 지난달 말 박근혜 대통령이 필요성을 강조하자 되살아났다. 곧바로 한은은 “국책은행 자본 확충은 재정의 역할”이라며 반기를 들었다. 특히 한은이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다’라고까지 주장하자 선거 참패로 신경이 곤두선 정부, 여당은 “여소야대를 틈타 한은이 ‘독립운동’을 한다”며 발끈했다. 이어 구조조정 재원을 한은과 정부 어느 쪽이 부담해야 할지 경제 전문가들 사이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어느 쪽이든 국민 부담이라 무의미한 ‘주머닛돈이 쌈짓돈’ 논쟁 같지만 꼼꼼히 따져 보면 차이가 적지 않다. 가장 큰 차이는 국가부채 문제다. 한은이 찍어내는 돈은 국가부채에 잡히지 않는다. 반면 정부가 돈을 대면 국가부채 증가가 불가피하다. 재정적자가 계속 커지는 현실을 고려하면 한은 부담이 맞아 보인다. 돈 낼 사람도 다르다. 한은이 돈을 찍어 통화량이 늘면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압력이 생기고, 화폐 가치 하락만큼 현금 등을 보유한 전 국민이 나눠서 부담하게 된다. 이른바 ‘인플레이션 택스(Inflation Tax)’다. 이와 달리 재정 부담은 세금 내는 사람에게만 돌아간다. 지난해 소득세를 낸 근로소득자는 2명 중 1명(51.9%)뿐이다. 그렇다면 부담 정도가 관건이다. 올해 3월 현재 시중통화량(M2)은 2296조 원. 10조 원 규모의 구조조정 자금이 물가를 올릴 가능성은 대단히 낮다. 인플레이션 택스가 발생하지 않을 공산이 크다는 뜻이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 수준에 머물러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이 걱정되는 지금 약간의 인플레이션은 오히려 고마운 일이다. 역시 한은 부담이 국민에게 유리한 셈이다. 부담하는 세대도 다르다. 한은이 돈을 찍어내면 돈이 많은 기성세대가 더 큰 부담을 진다. 반면 재정을 써 국가부채가 늘면 미래 세대에 부담이 전가된다. 제조업 호황기의 과실을 누린 기성세대가 구조조정의 부담을 지는 게 옳은 일이다. 환율 조작과 관련해 미국이 한국을 ‘관찰 대상국’으로 지정한 상황에서 돈을 풀어 원화 가치를 떨어뜨리려 한다는 비판을 피하는 데에도 한은이 돈 대는 쪽이 유리하다. 선진국 중앙은행들이 이미 자국 경제구조 문제 해결에 발권력을 동원한 적이 많기 때문이다. 이주열 한은 총재가 ‘자본확충펀드’를 통해 간접적으로 국책은행 자본 확충에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양측의 의견 차는 좁혀졌다. 다만 ‘단기 대출’ 형식으로 하고, 정부가 지급보증을 서야 한다고 한은이 고집해 막판 힘겨루기가 벌어지고 있다. 정부 지급보증은 국가부채로 잡히기 때문에 논의가 원점으로 돌아간다. 단기 대출도 양적완화 효과를 반감시킨다. 늑장 구조조정으로 사태를 악화시킨 정부, 국책은행 등은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이와 별도로 돈을 어디서 낼지는 철저히 국가경제의 득실을 따져 결정해야 한다. 한국 경제에 닥친 문제가 수십 년에 한 번 생길 산업 시스템 개편이란 점을 고려할 때 한번 허용하면 정부, 여당이 수시로 발권력을 동원할 것이란 한은의 우려는 과해 보인다. 사상 초유의 양적완화 정책으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세계 금융 시스템을 지킨 벤 버냉키 전 미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은 당시를 회고한 자서전에 ‘행동하는 용기’란 제목을 붙였다. 지금 한은에 필요한 건 가본 적 없는 길에 나설 용기다.박중현 소비자경제부장 sanjuck@donga.com}

라면은 한국인의 솔 푸드(soul food)다. ‘눈물 젖은 빵’을 우리말로 의역하면 ‘눈물 섞인 라면’쯤 되지 않을까. TV 채널마다 ‘먹방’들이 온갖 맛있는 음식을 보여줘도 소비자들은 여전히 라면 관련 뉴스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런 라면 판매량이 지난해까지 3년 연속으로 줄었다.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작년에 한국에서 팔린 봉지라면 및 컵라면은 총 25억1700만 개. 2014년보다 1.8% 감소했다. 앞서 2013년에는 1.6%, 2014년에는 3.2%나 줄었다. 역성장의 가장 큰 이유는 인구 정체에 따른 시장 포화였다. 아무리 라면을 좋아하는 사람도 하루 세끼 라면을 먹진 않는다. 건강에 대한 높아진 관심도 영향을 미쳤다. 침체 일로에 있던 라면시장에 지난해 하반기부터 큰 변화가 시작됐다. 농심 오뚜기 팔도 등이 프리미엄 짜장, 짬뽕 등의 신제품을 경쟁적으로 내놓은 것이다. 이 ‘럭셔리 라면’들은 일반 라면의 갑절 값인데도 불티나게 팔렸다. 그 덕에 지난해 라면 판매 개수가 줄었지만 총 판매액은 오히려 2.4% 증가했다. 급기야 올해 1분기(1∼3월)에는 라면 판매 개수까지 작년 동기 대비 6.8% 상승세로 돌아섰다. 매출은 이보다 훨씬 높은 20.4%나 급증했다. 이 추세가 이어진다면 올해 라면업계는 급성장할 것으로 보인다. 일부 소비자단체들이 ‘변칙 가격 인상’이라 비판하지만 싼 라면이 여전히 팔리고 있고, 소비자들이 자발적으로 고급 라면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비싼 라면을 팔아 수익성이 개선된 라면업계는 설비 투자, 신규 채용을 늘리고 있다. 라면시장의 ‘굵은 면발 효과’는 우리 경제 전반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수출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에 기여한 비중은 지난해에 23.1%로 전년보다 9.5%포인트나 떨어졌다. 또 올해 1분기 수출은 1년 전보다 겨우 0.1% 늘었다. 세계적 경기 침체가 지속되고 조선, 철강 등 주력 수출 분야의 구조조정이 시작된 상황에서 조만간 수출이 다시 성장을 견인하긴 어렵다. 답은 결국 내수에서 찾아야 한다. 성장의 벽에 부딪힌 라면업계가 찾은 해법은 ‘고(高)부가가치화’였다. 차별화된 맛의 고급 제품을 내놓자 소비자들은 기꺼이 두 배 값을 지불했다. 소비 침체 속에서도 더 나은 제품, 서비스에 지갑을 열 의지가 있다는 뜻이다. ‘돈이 없어 못 쓴다’면서 해외여행 지출을 아끼지 않는 중산층 덕에 호황을 누리는 여행업계를 보라. 이미 장기 저성장 단계에 진입했고, 인구 증가가 멈춘 우리 사회에서 앞으로 가능한 성장은 라면시장과 같은 방식일 공산이 크다. 부자라고 하루 네댓 끼를 먹진 않지만 이들이 더 고급한 세끼 식사에 훨씬 많은 돈을 쓰면 관련 시장은 커지고 일자리는 늘어난다. 4·13총선에서 승리한 더불어민주당의 ‘경제민주화’와 국민의당 ‘공정성장론’은 형평성의 관점에서 경제를 본다는 게 공통점이다. 양극화 해소, 복지 확대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이런 정책이 성장의 해법이 될 것으로 믿는 경제 전문가는 많지 않다. 고급화, 고부가가치화를 통해 이뤄진 라면시장의 성장이 이들에게는 불평등을 야기하고, 서민의 피해만 키운 부도덕한 사례로 보일지도 모른다. 총선 직후 김종인 더민주당 대표의 경제 브레인인 최운열 비례대표 당선자가 “고용을 실제로 늘리는 방법은 서비스산업 활성화에서 찾아야 한다”며 금융, 교육, 관광, 물류 분야와 함께 의료산업 활성화를 거론했을 때 이런 점이 명확히 드러났다. 당내 강경파와 국민의당은 당장 ‘영리병원 불가’를 주장하며 반발했다. 이런 발상으로는 산업 구조조정으로 쏟아져 나올 실업자나 청년 구직자들에게 새 일자리를 만들어 줄 수 없다. 야권이 ‘성장담론 부재’란 오랜 비판에서 벗어나 수권세력이 되고 싶다면 먼저 라면시장 성장에 대해 공부할 필요가 있다.박중현 소비자경제부장 sanjuck@donga.com}

1966년 8월 18일 중국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광장에는 흥분한 수백만 명의 중국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단상 위에서 마오쩌둥(毛澤東)이 인민복에 붉은 완장을 찬 홍위병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3개월 전인 5월 16일 중국공산당 정치국 확대회의가 당정군 및 문화계의 자산계급 대표 인물에 대한 공격 등을 지시한 그의 통지문을 통과시킨 여파였다. 중국을 광기로 들끓게 한 문화대혁명은 이렇게 시작됐다. 수천만 명의 아사(餓死)를 부른 1950년대 말 대약진운동 때문에 비판받으며 뒷전으로 밀려 있던 마오쩌둥은 문혁을 통해 권력을 회복했다. 공산당 내 반대파와 지식인, 지주 등 수백만 명이 홍위병들에게 끌려다니며 모욕, 구타를 당하고 목숨을 잃거나 구금됐다. 중국의 농업, 공업 생산은 급감했다. 훗날 중국의 개혁, 개방을 이끈 덩샤오핑(鄧小平), 현재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도 지방으로 쫓겨났다. 문혁이 발발 50주년을 맞았다. 마오쩌둥이 타계한 1976년까지 10년간 지속된 문혁은 중국 현대사의 암흑기다. 이 사건은 나비효과처럼 한국 경제에 놀라운 영향을 미쳤다. 바로 세계사에서 선례를 찾아보기 힘든 고속성장이었다. 진념 전 경제부총리는 마오쩌둥을 한국 경제발전의 최고 공신 중 하나로 꼽는다. “마오쩌둥이 문혁으로 중국의 개혁, 개방을 늦추지 않았으면 한국은 경제성장의 기회를 잡지 못했을 것”이란 설명이다. 한국의 경제개발사를 들여다보면 문혁의 영향이 더욱 뚜렷해진다. 5·16군사정변 직후인 1962년에 군사정부가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내놨지만 첫 5년의 성과는 신통치 않았다. 본격적 경제개발은 문혁 발발 이듬해인 1967년부터 5년간 진행된 2차 계획 때부터였다. 이때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고 경부고속도로가 뚫렸으며 포항제철(현 포스코)이 착공됐다. 3차 계획(1972∼76년) 중엔 중화학공업이 집중 육성됐고, 4차 계획 첫해이자 문혁 종료 다음 해인 1977년에 수출 100억 달러 목표를 달성했다. 문혁 발생부터 종료까지 10여 년 동안 한국 경제의 수출주도형 성장모델이 완성된 것이다. 문혁 후 재집권한 덩샤오핑 등은 조금씩 경제개혁을 시작했다. 하지만 고속성장의 궤도에 올라탄 한국은 빠르게 달아났다. 1980년대에 우리 경제는 연평균 10%씩 성장했다. 1990년대 초 중국의 본격 개방은 한국에 또 한 번의 기회가 됐다. 기술 격차를 벌린 상태에서 세계의 공장으로 떠오른 중국이 한국산 부품, 중간재의 최대 수출국이 된 것이다. 하지만 중국이 일본을 제치고 경제규모 세계 2위에 올라선 2010년 이후 분위기가 급변했다. 대부분의 분야에서 중국은 기술 격차를 바짝 좁혔고, 가격경쟁력을 앞세워 금방이라도 한국을 추월할 기세다. 올해 3월 세계 선박 수주량의 69%를 중국이 싹쓸이할 때 세계 1위를 자랑하던 한국의 조선업계는 6% 수주하는 데 그쳤다. 어쩌면 선진국 문턱까지 도달한 한국 경제는 ‘중국의 지체(遲滯)’란 특수 조건이 만든 우연의 산물일 수 있다. 문제는 중국이 경제에 눈뜨기 전 수출 중심으로 이뤄진 한국 대기업들의 투자가 한순간에 과잉투자가 돼버렸다는 점이다. 첨단 제조업, 고급 서비스업을 집중 육성하며 부실 부문을 털어내는 과감한 산업 구조조정 외에 미래세대의 일자리를 지킬 수 있는 대안은 있을 수 없다. 정부와 함께 이런 심각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20대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가 닷새 남았다. 새누리당의 한국형 양적완화 방안 정도를 빼면 온통 청년, 고령자, 지역 유권자에게 ‘뭘 더 준다’는 선심성 공약들뿐이다. 문혁 같은 일이 다시 터지길 바랄 수도 없다. 가슴이 답답해진다. 박중현 소비자경제부장 sanjuc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