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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소형 무인기가 현실화되면서 이를 탐지할 수 있는 레이더뿐 아니라 격추 가능한 무기체계에도 관심이 쏠린다. 특히 크기가 작은 목표물의 명중률을 높이기 위해 하나의 탄에서 여러 개의 탄이 분리되는 ‘스카이실드 35 어헤드’ 포탄과 ‘3P’ 포탄이 주목받는다.○ 작은 비행체 격추에 특화된 포탄들 주목 스위스의 방위산업 업체 오리콘이 개발한 스카이실드 35 어헤드 포탄은 35mm 모탄(母彈) 안에 작은 쇠기둥 모양의 자탄(子彈)이 들어 있다. 모탄 하나에 들어 있는 자탄은 152개. 레이더가 소형 물체를 포착하고 이 레이더에 연계된 대공포가 이 탄을 쏘면 일정 고도에 다다른 뒤 물체 앞에서 자탄이 분리돼 표적을 맞히는 방식이다. 오리콘의 35mm 대공포는 이 탄을 분당 1000여 발을 쏠 수 있다. 2003년부터 7년여의 개발기간을 거친 이 포탄은 2011년부터 독일의 차세대 대공방어 시스템 ‘시스플라’의 핵심 전력으로 자리 잡았다. 미국도 이 포탄을 활용한 방공포 체계를 적용하고 있다. 현재 오리콘은 독일의 방산업체인 라인메탈이 인수했다. 영국 방산업체 보포스가 개발한 3P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두 포탄의 가장 큰 장점은 분당 15만여 개의 작은 탄(자탄)을 발사해 목표물의 명중률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가격은 포탄 1개당 100만 원대로 일반 포탄(수만 원대)의 수십 배다. 한국 육군은 2000년대 초부터 스카이실드 35 어헤드 포탄이나 3P 포탄의 도입을 주장했으나 예산문제로 무산되곤 했다. 이외에도 대표적인 저고도용 레이더로는 이스라엘 방산업체 라다가 개발한 ‘RPS-42’가 꼽힌다. 이 레이더는 이지스함에 장착돼 있는 레이더의 축소판으로 레이더가 회전하면서 물체를 탐지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의 기둥에 4개의 원판이 달려 있어 사각지대를 최대한 줄일 수 있다. 이 레이더의 정찰거리는 150m∼30km, 정찰고도는 10m∼10km로 저고도 물체 탐지에 특화돼 있다.○ 탐지 어려운 소재의 무인기에는 속수무책 하지만 이런 무기체계도 만능이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김대영 한국국방안보포럼(KODEF) 사무국장은 “이번에 발견된 무인기는 철 소재로 만든 가솔린 엔진을 사용해 저고도용 레이더로 탐지할 수 있지만 만약 철이 아닌 소재로 만든 배터리로 움직이는 무인기라면 어떤 장비라도 탐지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백령도에서 추락한 무인기는 북한의 포병 전력을 보조하기 위한 정찰수단의 성격이 강하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나중에 국지전을 감행할 경우 타격 대상이 어디에 있는지 미리 파악한다는 계산도 깔려 있다는 얘기다. 이에 한국 방산업체들은 신속하고 정확하게 원점을 파악하기 위해 정찰용 포탄(관측탄)도 개발하고 있다. 국내 방산업체인 풍산은 지난해 ‘서울 국제 항공우주 및 방위산업전시회(ADEX 2013)’에서 관측탄을 공개했다. 2011년부터 2년간 개발한 이 탄은 모탄 안에 카메라가 달린 자탄이 들어 있다. 연평도와 백령도 해병대의 주력 화력인 K-9 자주포용 포탄으로 개발됐다. K-9 포문 중 1개는 관측탄을 장착해 먼저 발사해서 적이 어디 있는지 파악한 뒤 본격적인 공격의 오차범위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K-9에서 발사된 관측탄은 낙하하다가 지상 2km 지점이 되면 포탄 뒷부분에서 자탄을 분리시킨다. 정성택 기자 neone@donga.com}
국가보훈처는 1일 국가를 위해 희생한 국가유공자의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는 ‘2014년도 보훈문예작품 공모전’을 다음 달 23일까지 연다고 밝혔다. 18회째를 맞은 공모전은 시 수필 참전수기 추모헌시 등 4개 부문으로 진행된다. 주제는 일상생활에서 보훈문화를 만들 수 있는 아이디어나 6·25참전국과의 우의 등 호국의식을 고취하는 내용이다. 자세한 내용은 공식 홈페이지(www.보훈문예물.kr) 참조.}

▼6·25 영웅 英 호커리 대장▼국가보훈처는 ‘4월의 6·25전쟁 영웅’으로 1951년 임진강 설마리 전투에 참가한 앤서니 파라 호커리 영국군 대장(1924∼2006·사진)을 선정했다고 지난달 31일 밝혔다. 설마리 전투는 1951년 4월 22일부터 25일까지 나흘간 영국 그로스터 부대가 중공군의 파상공세에 맞서 싸운 철야혈투로 유명하다. 그로스터 부대는 혼신을 다해 중공군 3개 사단의 인해전술에 맞서 싸웠고 대대원 880명 중 50여 명만이 겨우 포위망을 뚫고 살아남았다. 그러나 이 전투 때문에 중공군은 당초 계획보다 3일 이상 발이 묶였고, 그 사이 한국군과 유엔군은 수도권 북방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면서 서울을 사수할 수 있었다. 호커리 대장은 이 설마리 전투를 소재로 ‘대검의 칼날(The Edge of the Sword)’이란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연병호 선생▼국가보훈처는 대한민국청년외교단과 한국혁명당을 결성해 항일운동을 펼친 연병호 선생(1894∼1963·사진)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지난달 31일 밝혔다. 선생은 1919년 3·1운동 직후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결성한 뒤 이 단체의 외교원으로 활동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만주 독립군과의 연계활동을 펼쳤다. 이후 외교시보를 발행해 국내 인사들에게 내외정세의 동향을 알리는 등 독립운동 2세대로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1929년엔 난징(南京)에서 한국혁명당 결성에 참여했다. 1932년 한국광복동지회, 조선혁명당, 의열단, 한국독립당 등과 함께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추진했다. 만주의 한국독립당과 합당해 신한독립당으로 통합 발전시켰다. 1937년 친일파인 상해거류조선인회장 저격 사건으로 상하이에서 체포돼 징역 8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호국인물 공완택 육군병장▼전쟁기념관은 ‘4월의 호국인물’로 훈련 중 수류탄을 몸으로 덮어 동료들을 구한 공완택 육군 병장(1967∼1989·사진)을 선정했다고 지난달 31일 밝혔다. 공 병장은 경기 화성시에서 태어나 1987년 제6사단 2연대 3대대 10중대에서 군복무를 시작했다. 1989년 4월 6일 공 병장(당시 상병)은 경기도 포천 훈련장에서 실시된 대대 단위의 공지합동훈련에서 지상군으로 참가했다. 개인화기와 유탄발사기 사격훈련 과정에서 공 병장은 자신의 주변에 떨어진 수류탄을 철모로 덮고 몸으로 감싸 주위에 있던 동료 장병 4명의 목숨을 구했다. 정부는 1989년 5월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유해 안장식을 갖고 1계급 특진과 함께 보국훈장 광복장을 추서했다. 고인이 당시 수류탄을 덮었던 구멍 난 철모는 국립대전현충원 보훈미래관 1층 유품전시관에 전시돼 있다.}
북한이 31일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 해상으로 포탄 500여 발을 쐈다. 이 가운데 100여 발은 NLL 이남 해역에 떨어졌다. 이에 한국군 당국은 대응사격을 실시하고 북한의 추가 도발에 대비해 경계태세를 강화했다. 북한이 NLL 이남 해역으로 해안포 도발을 감행한 것은 2011년 8월 이후 2년 7개월여 만이다. 합동참모본부에 따르면 북한의 해안포와 방사포(다연장로켓) 500여 발 발사는 이날 낮 12시 15분부터 오후 3시 30분까지 서해 NLL 지역으로 총 13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군 당국은 백령도에 배치된 K-9 자주포로 NLL 이북 해상에 300여 발의 대응사격을 하는 한편 F-15K 전투기와 함정을 동원해 초계활동을 강화했다. 또한 백령도와 연평도 주민들에게 긴급 대피령을 내리는 한편 민간 선박의 사격 구역 접근을 금지시켰다. 앞서 북한은 오전 8시경 서남전선사령부 명의로 해군 2함대사령부에 보낸 전화통지문을 통해 서해 NLL 이북 해역 7곳에 대해 해상사격 훈련을 실시한다고 통보했다. 북한이 통보한 구역은 NLL 기준으로 한국 측 수역에 0.5마일(약 900m)까지 근접했다. 이에 합참은 북한이 NLL 이남으로 사격할 경우 강력히 대응하겠다는 방침을 북측에 통보했다. 정부는 오후 5시 반경 청와대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긴급 소집했다. 정부 관계자는 “북한이 다시 도발해 올 경우 강력 대응하겠다”고 경고했다.윤상호 군사전문기자 ysh1005@donga.com정성택 기자}

“태풍이 앗아간 터전을 되살리기 위해 한국은 이곳 필리핀까지 와줬습니다. 한국 아라우부대의 헌신적인 노력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께 감사드립니다.” 6·25전쟁에 의무병으로 참전했던 필리핀 노병 소피오 로브리고 씨(85)가 손수 쓴 편지다. 30일 한국 국방부에 따르면 로브리고 씨는 23일 이 편지를 직접 전달하기 위해 레이테 주에서 태풍피해 복구활동을 벌이고 있는 필리핀 합동지원단(아라우부대)을 찾았다. 편지엔 한국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그는 “필리핀을 위해 한국군을 파병해 준 대한민국 대통령과 국민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며 ‘대한민국 대통령께 보내는 감사편지’를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어 “발전된 대한민국의 모습에 6·25전쟁 참전용사로서 큰 자부심과 보람을 느끼며, 아라우부대의 활동도 필리핀 국민들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질 것”이라고 했다. 로브리고 씨는 지난해 11월 초대형 태풍 하이옌이 휩쓸고 간 이 지역의 참전용사 회장이다. 현재 아라우부대는 재해복구 활동의 하나로 ‘참전용사 지원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이곳의 6·25전쟁 참전용사를 돕고 있다. 무너진 집을 다시 지어주고, 정기적인 건강검진과 함께 휠체어, 보청기 지원 등도 하고 있다. 이런 도움을 받고 있는 참전용사는 현재까지 3명이다.정성택 기자 neone@donga.com}
북한이 30일 “새로운 형태의 핵실험도 배제하지 않는다”고 4차 핵실험 가능성을 주장하며 위협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독일 드레스덴 통일 구상이 나온 지 이틀 만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규탄한 데 대해 강하게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북한은 외무성 성명을 내고 “미국이 유엔 안보리를 통해 고립 압살하는 책동에 매달리는 한 다종화된 핵 억제력을 각이한(각기 다른) 중장거리 목표에 대해 각이한 타격력으로 활용하기 위한 여러 형태의 훈련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미국이 이를 도발로 걸고 드는 경우 적들이 상상도 하기 힘든 다음 단계 조치가 준비돼 있다”고 덧붙였다. 한국 국방부 관계자는 ‘새로운 형태의 핵실험’에 대해 “기존의 지하 핵실험이 아니라 핵탄두를 소형화, 경량화하는 실험을 겸해 태평양 공해상에서 핵탄두를 폭발시키거나 플루토늄과 우라늄을 혼합해 핵실험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외교부는 대변인 명의 논평을 통해 “심각한 우려를 표시한다. 북한이 핵실험을 감행하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임을 명심하라”고 경고했다. 북한은 29일에는 남북 고위급회담 북측 대표단 대변인 담화를 통해 대북 전단 살포를 비난하면서 “너절한 몇 장의 종이가 도발의 본거지를 잿더미로 만드는 불바다가 되기를 그토록 바라는가. 박근혜의 체면은 헤어날 수 없는 시궁창에 처박히게 될 것”이라고 비난했다. 지난해 11월 ‘청와대 불바다’ 위협 이후 4개월 만에 특유의 불바다 발언이 다시 나온 것이다. 이에 통일부는 30일 “북한은 대응하기조차 부끄러운 저속한 막말과 비방을 즉각 중단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밝혔다.윤완준 zeitung@donga.com·정성택 기자}

2006년 7월 무더웠던 여름. 중국 베이징 인근 시골의 한 식당 앞에 택시 한 대가 시동을 켠 채 서 있었다. 6개월 전 목숨을 걸고 북한 두만강을 건너 온 강유진 씨(당시 37세)에게는 이 택시가 ‘망망대해에서 생명을 구해 줄 구조선’이었다. 강 씨는 탈북하자마자 브로커의 손에 이끌려 허베이(河北) 지역 시골로 갔고, 한 중국동포 식당에서 식모살이를 해야 했다. 강 씨의 사정을 알게 된 한 손님이 강 씨를 탈출시켜 주려고 택시를 대기시킨 것이었다. 식당 주인이 한눈을 파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택시에 몸을 던졌다. 자신을 도와준 그 손님의 소개로 3개월 뒤 칭다오(靑島)에 있는 인형공장에 취직했다. 그랬던 강 씨가 지금은 한국에서 인형제조업체인 신원아트인형의 ‘사장님’이다. ○ 지옥을 넘어 한국에 오다 강 씨는 재일동포였던 아버지의 1남 4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강 씨의 아버지는 1960년대 북한의 체제 선전에 설득당해 귀국선인 만경봉호에 몸을 실었다. 돈벌이가 괜찮았던 자동차 부품공장을 포기하고 북한에 갔지만 현실은 암담했다. 북한에 대한 아버지의 비판이 나날이 늘어갔다. 1976년 어느 날. 새벽에 들이닥친 국가안전보위부 요원들에 의해 강 씨 가족은 함경남도 지역의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갔다. 아버지의 북한체제 비난 때문이었다. 수용소 안에서도 아버지는 따로 격리됐다. 그렇게 8년을 살았다. “수용소에서 나가는 날에야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었어요. 그렇게 기골 좋으셨던 분이 뼈만 앙상하게 남아서…. 아버지는 가족 중 가장 성격이 활달했던 저에게 ‘너만은 살아서 북한의 현실을 알려야 한다’며 탈북을 권유하셨어요.” 탈북 기회만 노리고 있던 강 씨는 2006년 1월에야 아버지가 손에 쥐여준 일본돈 2만 엔을 옷 속에 꼭꼭 숨기고 국경을 넘었다. 그러나 중국어도 몰랐던 강 씨는 중국 땅에서도 온갖 고초와 우여곡절을 겪었다. 칭다오에 있는 한국 회사(인형공장)에서 일하게 되면서 그나마 인간다운 삶이 시작됐다. 강 씨는 제일 일찍 출근해 온갖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인형에 단추 하나 다는 일도 꼼꼼히 배웠다. 한국인 사장의 신뢰를 얻기 시작했다. 중요한 중국 내 출장이 있으면 강 씨가 동행했다. “그 공장에서 모은 돈으로 한국행을 시도했어요. 2008년 8월 드디어 한국 땅을 밟았을 때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내국인’ 입국심사를 받으며 쏟아진 눈물 6개월 정착 교육을 마치고 세상에 나왔지만 먹고살 길이 막막했다. 북한에서 체육교사를 했던 경력은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기술이 필요했다. 강 씨는 ‘한국에서 내가 직접 인형을 만들어 보자’고 결심했다. 2009년 3월 ‘하나토이’란 이름의 인형업체 법인을 설립했다. 어떻게 사업을 해야 할지 몰랐던 그는 칭다오에서 도움을 받았던 한국인 사장을 찾아갔다. 사연을 듣자 발 벗고 도와주겠다고 했다. 주문 물량이 늘기 시작했다. 2011년엔 여수엑스포 마스코트 인형 50만 개 주문도 따냈다. 납품 일자를 맞추기 위해 중국 업체에 하청을 줘야 하는 경우도 잦아졌다. “첫 중국 출장을 갔다가 한국에 들어오는데 공항 직원이 제 초록색 한국 여권을 보더니 내국인 입국심사 줄에 서라고 했어요. 저도 모르게 감정이 북받쳐 화장실에 들어가 울었습니다.” 모든 사업이 그렇듯, 강 씨의 인형공장도 늘 잘되는 건 아니었다. 불황으로 하나토이를 접고 다른 인형공장에 취직해 다시 허드렛일을 해야 했다. 그땐 탈북자라는 주위의 편견에 맘고생이 더 심했다고 한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지난해 10월 ‘신원아트인형’으로 다시 사업을 시작했다. 강 사장은 지난해 11월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의 도움으로 현대자동차에서 영세업자의 자립을 돕는 ‘기프트카 캠페인’의 대상자로 뽑혔다. 기증받은 승합차(그랜드 스타렉스)로 직접 주문받은 인형 배달도 하고 있다. 강 씨는 “힘들어도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일하다 보니 주위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새로운 도전도 준비 중이다. 지난해 금천구청에서 사회적기업 학교를 수료했다. 그는 “탈북자들을 채용해 개성공단에서 나오는 납품 불량 옷의 원단 등을 원료업체에 판매하는 사회적기업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기부재단 설립해 어려운 사람 돕고 싶어요” 정부가 지원해준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는 강 씨는 이달 24일 보금자리주택에 당첨돼 올해 12월 이사를 간다. 지난 60개월간 꼬박꼬박 20만 원씩 청약통장에 돈을 모은 결실을 이룬 것이다. 그는 “아직은 갈 길이 멀지만 사업이 더 번창하게 되면 기부재단을 만들어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싶다. 나 같은 탈북자도 열심히 노력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강 씨는 통일을 위해 소통이 가장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탈북자와 한국 사람 사이의 이질감을 해소하기 위해 정부와 민간이 힘을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정성택 기자 neone@donga.com}

《 9월로 예상했던 의사시험이 11월에 시행된다는 소식에 그만 눈물이 쏟아졌다. 북에서 넘어온 55세의 만학도에겐 그만큼 하루가 아쉬웠다. 2008년 북에서 넘어 온 최석하(가명·59) 씨는 남으로 내려와 처음 눈물을 흘린 2010년의 그날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한다.(그동안 한국 언론에 공개된 적이 없는 최 씨는 북한에 남겨진 친인척을 고려해 ‘가명을 써달라’고 요청했다.) 》 그러나 그해 시험에 낙방했고 ‘의사시험 합격’의 꿈은 1년 뒤에야 이뤄졌다. 그 사이 일당 6만 원을 받는 막노동, 화장실 청소 등을 하며 주경야독(晝耕夜讀)을 했다. 그는 현재 충남 지역의 한 병원에서 제2원장(일종의 부원장 격)으로 일하며 신경외과와 정형외과 진료를 맡고 있다. 그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 남한 사람과 북한 사람 차이는 없더라”며 “부단히 노력하면 북한 사람도 얼마든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다.○ “넘어질 때도 책에서 눈 떼지 않아” 북한에서 40년간 신경외과 전문의로 일하다가 아내와 함께 한국행을 선택한 최 씨. 한국에 정착한 직후인 2008년 12월 그의 현실은 암담했다. 의사 경력을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당장 먹고살 일을 찾아야 했다. 매일같이 새벽 인력시장에 나갔다. 탈북자라는 편견 때문에 일거리도 제일 나중에야 돌아왔다. 도로의 보도블록 정비 등 어떤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소개 수수료에 교통비 빼고 나면 5만3000원 정도 손에 쥐었습니다. 적은 돈이었지만 그나마 살림에 보탤 돈을 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습니다.” 다달이 수입이 있는 직업을 찾다가 집에서 수십 km 떨어진 골프연습장에서 매달 100만 원을 받으며 화장실 청소를 했다. 불투명한 미래는 항상 그를 불안하게 했다. 안정된 직업을 갖기 위해선 기술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굴착기 운전사에 도전했다. 나이를 생각하면 쉽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주저하지 않았다. 마침내 2010년 1월 굴착기 업체에 취직했다. 신입사원 30여 명과 함께 받은 3개월 교육과정을 수석으로 마쳤다. 한국에 들어온 뒤 처음 맛본 성취였다. 도전은 계속됐다. 한국에서도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2만5000명이 넘는 탈북자 가운데 의료 경력이 있는 사람은 수백 명이었지만 이들 중 의사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그때까지 10여 명에 불과했다. 최 씨가 한국에서도 전문의가 되려면 먼저 의사시험에 합격해야 했다. 한국 의학서적을 사서 용어도 낯선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오전 4시에 일어나 공부했다. 36m²(약 11평)의 작은 집에서 그 시간에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은 화장실밖에 없었다. 동이 트면 낡은 자전거를 타고 집에서 40분 거리에 있는 도서관에 가서 오전 7시부터 오후 11시까지 책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발을 헛디뎌 넘어질 때도 책을 봤습니다. 도시락 하나를 점심과 저녁으로 나눠서 먹었죠. 힘들었지만 식당 종업원 일을 하며 뒷바라지하는 아내를 생각하면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환자가 내 부모라는 생각으로 그렇게 2010년 6월부터 공부한 지 한 달 만에 의료 경력이 있는 탈북자 대상 ‘의사고시 자격 면접시험’에 합격했다. 11월 실기시험에도 합격했지만 12월 필기시험에서 생소한 한국 의료법규 문제가 걸림돌이 됐다. 결국 탈락이었다. 포기하지 않았고 재수 끝에 합격했다. 최 씨는 아내를 부둥켜안고 한국에서의 두 번째 눈물을 흘렸다. 그 뒤 최 씨는 지방의 보훈병원에서 6개월간 인턴생활을 자처했다.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은 아니었지만 한국 의료체계에 적응하기 위해서였다. 최 씨는 “20대도 견디기 녹록지 않은 인턴생활이라지만 그 벽을 넘고 싶었다”고 말했다. 진료과목도 신경외과(북한에서의 전문 분야)에서 정형외과로 바꿔 새로운 도전을 했다. 이후 충북 진천 등에서 정형외과 의사로 일하다 홈페이지에 난 지금 병원의 제2원장 모집 광고를 보고 지원해 200 대 1의 경쟁률을 뚫었다. 최 씨의 진료시간은 매일 오전 8시 반부터 오후 6시 30분까지지만 1∼2시간 늦게 퇴근하는 경우가 많다. 환자마다 세심하게 진료하다 보니 최 원장에게 진료받고 싶어 하는 환자가 많아져서다. 점심을 거르는 날도 많았다. “환자를 내 부모와 형제라고 생각해요. 그러다 보면 하나라도 더 살펴보게 되죠.” 최 씨의 이런 노력 덕분에 3개월 만에 병원의 일일 진료환자가 250명에서 400여 명으로 늘었다고 한다.○ “죽는 순간까지 도전하고 싶다” 그는 요즘도 오전 4시에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서다. 최 씨는 “러시아어와 라틴어로 돼 있는 북한 의학용어와는 달리 남한은 영어 의학용어가 많아 공부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 전문의에 도전해 논문 등으로 남북한 의료 격차를 줄이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그는 “남한 사회는 노력만 하면 기회는 얼마든지 열려 있다”며 “죽는 순간까지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밝혔다. “높은 벽을 만날수록 더 큰 의지가 생겨난다”는 그의 눈빛은 또렷했다. “통일을 위해서는 북한의 잘못된 점을 비판하는 것뿐만 아니라 남북한 간에는 차이도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정성택 기자 neone@donga.com}

“아버지가 나라를 위해 희생한 천안함 용사라는 것에 대해 늘 자부심을 느껴요.” 낯선 기자의 질문에 말이 없던 사춘기 소년은 아버지에 대한 질문에는 또렷이 대답했다. 23일 경기 파주시 한민고에서 만난 남재민 군(15). 천안함 ‘46용사’ 중 한 명인 고 남기훈 원사의 맏아들이다. 남 군의 어머니 지영신 씨(39)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떠나보낸 기억이 상처로 남아 있을 줄 알았는데 이제 어른이 다 된 것 같다”며 의젓한 아들의 모습에 눈시울을 붉혔다. 이달 3일 개교한 한민고는 군인 및 국가유공자 자녀를 위한 최초의 기숙형 사립학교. 정원의 70% 이상을 군인·유공자 자녀로 뽑는다. 지 씨는 “일반 학교에 갔으면 재민이가 아빠 잃은 설움을 겪었을 수도 있는데 한민고에서 밝게 생활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고 말했다. ‘월 1회 외출’만 허락하는 기숙학교지만 재민 군은 25일 별도의 특별외출을 허락받았다. 천안함 폭침일(26일)을 앞두고 어머니, 두 동생들과 함께 아버지가 안장돼 있는 국립대전현충원을 가기 위해서다. 늠름했던 남 군도 이 대목에선 “현충원에 갈 때마다 슬퍼진다”며 말끝을 흐렸다. 어머니 지 씨는 “아직도 천안함 폭침에 대해서 북한의 소행이 아니라는 유언비어들이 존재하는 걸 보면서 한 번 더 가슴이 찢어진다”며 고개를 숙였다. 이어 “천안함 폭침의 실상을 교과서에도 수록해야 하고, 정부가 적극적으로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남 군의 담임교사인 신성철 교사는 “평소에 재민이한테 ‘이 학교는 재민이를 위한 학교’라고 말하며 동기부여를 해주고 있다”며 “재민이도 매사에 열심히 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남 군도 “엄마와 떨어져 있지만 학교생활이 힘들지 않고 친구들을 많이 사귀어서 재밌다”고 말했다. 태권도 3단 유단자인 남 군에게 ‘장래 희망’을 물었다. “아직 진로에 대해 구체적으로 정한 것은 없지만 아빠처럼 나라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파주=정성택 기자 neone@donga.com}

“기관총 발사!” 19일 오후 1시 53분 서해 북방한계선(NLL)에서 남쪽으로 80여 km 떨어진 해상. 천안함 ‘46용사’의 얼이 서린 ‘3·26’ 기관총이 위협적인 굉음과 함께 불을 뿜었다. 천안함과 같은 초계함(연안 해상에서 경비임무를 수행하는 군함)인 성남함(1200t급)의 3·26 기관총은 해상 표적을 향해 6∼7초 만에 60발을 발사했다. 천암함 폭침 4주기(26일)를 앞두고 진행된 이날 해상기동훈련에서 3·26 기관총 사수를 맡은 서형호 하사(24)의 눈빛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서 하사는 “3·26 기관총을 보면서 적이 또다시 도발한다면 반드시 응징한다는 각오를 되새기고 있다”고 말했다. 해군은 2011년 이 기관총을 2함대 소속 해군 초계함 9척의 배 중간 부분 좌우로 2문씩 장착했다. 3·26 기관총은 미국의 M-2 기관총을 한국이 개량해 만든 K-6 기관총으로 최대 사거리가 6700m이다. 분당 600발 정도 발사할 수 있다. 강석민 성남함 부함장(소령)은 “북한이 국지전 도발로 경비정 등을 내려 보내 근접 전투가 벌어질 때는 기관총이 가장 유용한 공격수단”이라고 말했다. 이날 성남함은 기동전단의 핵심 전력 이지스함인 세종대왕함(7600t급) 등 8척의 군함과 함께 낮 12시 45분부터 해상사격훈련을 진행했다. 2함대는 북한의 도발에 대비해 매달 이런 훈련을 실시한다. “총원 전투배치!” 변원건 함장(중령)의 명령에 승조원 110여 명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성남함 승조원들의 각오도 남다르다. 변 함장은 “군 복무 기간(23개월) 중 6개월 함정 근무를 마치면 지상근무로 돌아갈 수 있는데도 성남함 40여 명의 일반 수병 중 3분의 2 이상이 계속 함정에 남겠다고 자원했다”고 말했다. 해군은 함정근무를 계속하는 이런 수병들에게 지난해부터 ‘서해수호자’라는 배지를 달아주고 있다.:: 3·26 기관총 ::북한의 천안함 폭침 때 전사한 민평기 상사의 어머니 윤청자 씨가 아들의 사망보험금 1억 원과 성금 898여만 원을 기증해 탄생했다. 기관총의 몸통 왼편에는 천안함 폭침일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3·26 기관총’이란 글자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성남함=정성택 기자 neone@donga.com}

탈북자의 성공적인 한국 정착을 지원하는 정부 정책이 대폭 강화된다. 통일 준비의 핵심 중 하나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23일 “박근혜 대통령은 ‘북한이탈주민(탈북자)들이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은 평화통일 기반 구축 국정기조를 추진하는 데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강조해왔고 큰 관심을 갖고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이에 따라 통일부는 △탈북자가 저축하는 액수만큼 정부가 돈을 지원해 목돈 마련을 지원하는 ‘미래행복통장’을 도입하고 △탈북 여성의 취업과 양육을 지원하는 다양한 지원개선책도 내놓을 계획이다. 동아일보가 입수한 정부 통계에 따르면 기초생활보장대상자에게 지급되는 생계급여의 탈북자 수급 비율은 2007년 63.5%에서 지난해 35%로 6년 만에 절반 수준으로 뚝 떨어졌다. 학업 중도 탈락률도 2007년 7.1%에서 2013년 3.5%로 줄었다. 윤완준 zeitung@donga.com·정성택 기자}

박근혜 대통령이 23일 출국한다. 올해 두 번째 해외 순방이다. 24, 2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핵안보정상회의에 참석한 뒤 독일을 국빈 방문한다. 핵안보정상회의는 53개국 정상과 유엔, 유럽연합(EU), 국제원자력기구(IAEA), 인터폴 등 4개 국제기구 대표가 참석하는 안보 분야 최대 정상회의다. 박 대통령은 개막 세션 모두연설에서 핵 테러 방지를 위한 국제사회의 공동 책임을 강조하고 북핵 문제 공론화에 나선다. 하지만 관심은 핵안보정상회의 기간에 열릴 한미일, 한중 정상회담에 맞춰져 있다. 박 대통령이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 회담을 갖는 것은 취임 이후 처음이다. 박 대통령은 아베 총리의 왜곡된 과거사 인식을 비판하며 지금까지 일본의 구애를 뿌리쳐 왔다. 하지만 한일 간 중재에 나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요청까지 거절하기는 힘들었다. 한미일 정상회담에서는 한일 과거사 문제는 논의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외교부는 21일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북핵 및 핵 비확산 문제에 관해 의견을 나눌 것”이라고 밝혔다. 한일 양국 간 ‘뜨거운 감자’를 피한 채 북한의 도발에 맞서 한미일 공조만을 과시한다는 얘기다. 다만 오바마 대통령이 먼저 한일 간 역사 문제 해결을 촉구할 가능성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한미일 정상회담이 한일 정상회담으로 나아가려면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4월 중순 우리 측과 진지하게 협의해 나가겠다는 의사를 전달받았다”며 기대감을 표시했다. 아베 총리가 최근 국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죄한 고노 담화를 수정하지 않겠다고 밝힌 만큼 전향적으로 나올 수도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일본의 진정성에 대한 청와대의 의구심은 여전하다. 한미일 정상회담 개최 사실을 청와대가 아닌 외교부에서 처음 발표한 것도 이번 만남에 큰 비중을 두지 않기 때문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한일 관계에서는 중국도 변수다. 지난해 우리나라는 한중일 3국 정상회의의 의장국이었지만 과거사 및 영토 문제로 일본과 치열하게 대립하는 중국의 반대로 3국 정상회의를 열지 못했다. 박 대통령은 미국과의 동맹을 단단히 하고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동시에 중국과의 공조도 강화해야 하는 ‘3각 외교 시험대’에 오른 셈이다. 이미 세 차례나 만났음에도 외교적 쏠림을 피하기 위해 헤이그에서 시급히 한중 정상회담을 추진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의 정상회담은 26일 열린다. 박 대통령이 메르켈 총리를 만나는 것은 이번이 다섯 번째다. 2000년 한나라당 부총재였던 박 대통령은 재외공관 국정감사를 위해 독일을 방문하여 당시 야당인 기독교민주연합 당수인 메르켈 총리와 처음 만나 14년간 교분을 쌓아 왔다. 27일에는 1990년 독일 통일 당시 서독 외교장관을 지낸 한스 디트리히 겐셔 등 독일 통일의 주역들을 만나 한반도 통일을 위한 조언을 듣는다. 이어 지그마어 가브리엘 독일연방 부총리 겸 경제에너지부 장관을 만나 양국 간 경제협력 방안도 논의한다. 박 대통령이 내놓은 경제혁신 3개년 계획에는 중소·중견기업을 ‘히든 챔피언(숨은 강소기업)’으로 육성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독일은 히든 챔피언이 경제를 견인하는 대표적인 국가다.이재명 egija@donga.com·정성택 기자}

이봉조 전 통일부 차관(사진)이 15일 간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60세. 1980년 서강대 외교학과를 졸업한 고인은 국토통일원(현 통일부) 조사연구실에서 처음 공직에 몸담은 뒤 통일부 통일정책실장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 정책조정실장 등 통일 관련 요직을 두루 거친 ‘대북전략통’. 통일 이슈의 현안을 줄줄이 꿰고 있어 출입기자들에게 걸어 다니는 ‘통일사전’으로 불렸다.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당시 청와대 통일비서관으로 일하며 2000년 남북정상회담 성사에 기여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이었던 2004년 통일부 차관을 지낸 뒤 통일연구원장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난 고인은 이후 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 공동대표를 맡았다. 2005년 5월에는 북한 개성에서 열린 남북차관급회담 수석대표로 나서 일시 중단됐던 남북장관급회담 재개에 합의하는 등 남북관계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고인은 2012년 18대 대선 때부터 안철수 의원의 통일안보 분야 멘토로 활약해왔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인경 씨(55)와 2남이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발인은 18일 오전 8시 반. 02-3410-3151}

‘왕이 되지 못한 북한의 세조.’ 북한 김일성 주석의 동생 김영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명예부위원장(사진)이 새삼 화제가 되고 있다. 92세인 그는 최근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 체제의 첫 최고인민회의 대의원(한국의 국회의원 격) 투표에서 다시 선출됐다. 이에 한국 정부 내부에서조차 “김영주가 아직도 살아 있었구나”라는 반응이 나온다. 김영주는 이른바 백두혈통(김일성의 직계)이 아니지만, 김일성의 방계 가족까지 포괄하는 ‘만경대 가문’ 1세대의 유일한 생존자다. 1967년 당 핵심기관인 조직지도부의 수장이었던 김영주는 김일성의 마지막 남은 라이벌 파벌이던 갑산파의 박금철, 이효순, 김도만 등을 제거하는 데 ‘행동대장’ 역할을 했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발표에 앞서 한국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만나 사전 조율하는 역할도 했다. 이 성명의 이행을 위해 설치된 남북조절위원회의 북측 위원장을 맡아 북한의 실세임을 확인시켰다. 그러나 1974년 김일성이 김정일을 후계자로 지목하면서 김영주는 한직인 정무원 부총리로 밀려났다. 김정은 체제의 2인자로 부상한 최룡해 총정치국장의 아버지 최현을 비롯한 빨치산 원로들도 ‘장자계승론’을 내세우며 “갑산파 숙청 때 손에 피를 묻혀 본 김영주가 권력을 잡으면 피의 숙청이 또 일어난다”고 우려했다고 한다. 이후 김영주는 가족과 함께 자강도 강계로 유배당하자 평양을 향해 삿대질을 하고 돌멩이를 던지며 원통함을 토로했다고 한다. 그는 1993년에야 일종의 명예직인 부주석 자리로 복귀했다. 이는 ‘후계자 김정일’의 입지가 확고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김영주는 1998년부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겸 상임위 명예부위원장을 맡아왔다. 김영주가 ‘즉위하지 못한 세조’가 된 데에는 정통성의 한계 탓도 있다는 분석이 있다. 일제강점기 김일성이 항일 빨치산으로 활동한 반면 김영주는 ‘너는 살아남아서 대를 이어야 한다’는 형 김일성의 권유로 1932년 일본 괴뢰정부 만주국에 투항했다. 김영주는 일본 헌병대의 하수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성택 기자 neone@donga.com}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14일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죄한 고노 담화를 수정할 생각이 없다고 공개 석상에서 처음으로 직접 언급했다. 아베 총리는 이날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쓰라린 경험을 당한 분들을 생각하면 매우 마음이 아프다”며 “이 점에 대해서는 나도 역대 총리와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른바 고노 담화가 있다”고 전제한 뒤 “아베 내각에서 이의 수정은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아베 총리는 종전 50주년을 맞아 무라야마 담화가, 60주년을 맞아 고이즈미 담화가 나왔다고 소개한 뒤 “아베 내각은 이들 담화를 포함해 역사 인식과 관련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로서 계승한다”고 말했다. 2012년 12월 총리에 취임하기 전 언론 인터뷰에서 고노 담화 수정 의지를 밝혔던 아베 총리가 이후 공개 석상에서 고노 담화 수정 의사가 없다고 밝힌 것은 처음이다. 이는 한일 관계 개선을 강하게 요구해온 미국 정부가 고노 담화 검증과 관련해 직·간접 경로로 아베 정권에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이달 24, 2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핵안보정상회의 때 한미일 정상 회동을 성사시키기 위한 일종의 성의 표현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한편 우리 정부는 아베 총리가 공개 석상에서 처음으로 “고노 담화를 수정할 생각이 없다”고 밝힌 점에 주목하는 분위기다. 외교부 당국자는 “아베 총리가 무라야마 담화를 포함해 역대 내각의 역사인식을 계승한다고 분명히 언급한 점을 일단 평가한다. 발언의 진정성 여부는 앞으로 일본 정부와 정치지도자들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도쿄=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정성택 기자}

천안함으로 부활한 ‘천안함 용사’. ‘천안함 46용사’ 중 한 명인 고 임재엽 중사의 흉상 제막식이 12일 고인의 모교인 대전 중구 충남기계공업고등학교에서 열렸다. 이 흉상은 고인이 마지막으로 근무했던 천안함 기관실의 해수파이프 일부를 녹여 만들었다. 황기철 해군참모총장이 ‘천안함과 46용사의 혼이 영원히 함께 살아 숨쉬길 바란다’는 뜻에서 직접 제작을 지시했다. 흉상엔 77.2g의 천안함 쇳물이 녹아들었다. 이 역시 천안함 선체번호(‘PCC-772’)를 기념한 것이다. 흉상 제작의 마지막 단계인 거푸집에 쇳물을 주입하는 작업은 고인이 처음 군복을 입은 해군군수사령부 정비창에서 진행됐다. 군 관계자는 “유가족이 그렇게 해주길 원했다”고 설명했다. 1984년생인 임 중사는 해군부사관 205기로 임관했다. 2009년 11월부터 천안함 엔진의 운용과 정비를 담당하는 내기 부사관으로 근무했다. 충남기계공고 총동문회는 임 중사(38회 졸업)를 비롯한 천안함 46용사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지난해 8월부터 성금 모금을 했다. 흉상 건립추진위원장을 맡은 이원승 예비역 육군준장(8회 졸업)은 “조국 수호를 위해 헌신한 고인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되새기고 동문들과 함께 그 뜻을 영원히 기념하고자 모교에 흉상을 건립하게 됐다”고 말했다.정성택 기자 neone@donga.com}

훈련 성적이 좋은 예비군을 집에 일찍 보내주는 제도(조기퇴소제)가 더욱 강화된다. 조기퇴소 시간을 ‘1시간 일찍’에서 ‘2시간 일찍’으로 늘리고, 훈련 중간에도 성적이 좋으면 남들보다 더 많이 쉴 수 있다. 국방부는 10일 “조기퇴소제를 기존 160개 부대에서, 올해 180개 부대로 확대하고 조기퇴소자 비율도 작년의 10∼20%에서 30%로 늘리기로 했다”고 밝혔다. 예비군 훈련은 ‘시간 때우기’식으로 진행된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국방부는 지난해부터 훈련 과목에 성적을 매기고 성적이 우수한 예비군은 1시간 일찍 퇴소시키는 일종의 ‘인센티브’ 제도를 운영했다. 군 관계자는 “올해부터는 훈련 면제 시간을 2시간으로 늘린다”고 말했다. 지금까지는 훈련을 다 마치고 평가를 했지만 올해부터는 훈련 중간에 평가를 실시해 성적이 좋으면 다른 예비군들이 훈련받을 때 쉴 수 있다. 예를 들어 화생방 훈련에서 방독면 착용과 관련 임무 과제를 잘하면 50분 정규교육을 다 받지 않고 20∼30분 쉬도록 해주는 식이다. 정성택 기자 neone@donga.com}
육해공군 사관학교 문을 두드리는 여성 인재는 갈수록 늘고 있지만 선발 비율은 10년 넘게 ‘정원 10%’에 묶여 있다. 7일 군에 따르면 올해 사관학교별 여생도 경쟁률은 육사(정원 30명) 43.3 대 1, 해사(정원 16명) 65.3 대 1, 공사(정원 16명) 72.1 대 1을 기록했다. 육해공사 모두 여생도 경쟁률이 역대 최고였다. 반면 남자 생도 경쟁률은 각각 18.1 대 1, 26.6 대 1, 33.2 대 1이었다. 여생도 경쟁률이 2배 이상인 것이다. 여생도 선발은 1997년 공사가 처음 시작했고 육사(1998년), 해사(1999년)도 잇따라 도입했다. 그러나 선발 비율은 도입 당시와 똑같다. 서울대 홍두승 교수(사회학)는 “정보화전이 되면서 군에서도 여성의 강점인 섬세함 등에 대한 활용도가 높아지고 있다”며 “여생도 선발 비율을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정성택 기자 neone@donga.com}

이현옥 ㈜상훈유통 대표(75)가 2010∼2013년 추진된 ‘6·25전쟁 60주년 사업’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정홍원 국무총리는 6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이 대표를 포함해 개인 13명과 7개의 민간단체를 이 사업 관련 유공자로 인정해 정부포상을 수여했다. 이 대표가 수상자 중 가장 높은 포상을 받았다. 그는 이 사업을 위해 1억6000만 원을 기탁하는 등 국민 안보의식 고취와 참전유공자의 명예 선양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주한미군에 농산품을 납품하는 이 대표는 1968년 백마부대 부사관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한 국가유공자(5급)이기도 하다. 그는 1994년부터 사회환원활동으로 국가유공자와 자녀들을 위해 매년 기부를 해왔다. 직원 100여 명의 중소기업 대표인 그가 국가보훈을 위해 기부한 총액은 90여억 원에 이른다. 그는 2008년엔 나라사랑 큰나무 장학금을 만들어 지난해까지 국가유공자 자녀 등 1200여 명에게 8억5000만 원을 지원했다. 주한미군에도 우리 문화를 알리기 위해 연말마다 쌀 50가마니로 가래떡을 만들어 나눠주고 있다. 그래서 주한미군들 사이엔 ‘떡볶이 할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이 대표는 한미동맹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9년 주한미군사령관으로부터 ‘제7회 주한미군 좋은 이웃상’을 받기도 했다. 캐나다 참전용사 빈센트 커트니 씨(79)와 미국 참전용사 윌리엄 웨버 씨(87)는 6·25전쟁 60주년 사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워싱턴 참전비에 전사자 명비를 마련하고 6·25전쟁 관련 저서를 집필한 공로를 인정받아 이날 각각 국민훈장 동백장과 석류장을 수상했다. 참전 21개국을 순회하며 무료공연을 통해 한국을 알리는 데 기여한 리틀엔젤스 예술단과 유엔 참전용사 초청 감사행사를 주관한 경기초등학교 등이 단체표창을 받았다.정성택 기자 neone@donga.com}

“인민군 별(장성)은 똥별이다.” “김정은은 혹시 남조선이 보낸 진짜 고급 간첩 아니냐.” 6일 정통한 대북소식통에 따르면 최근 북한 군부 내에서 이런 자조 섞인 목소리가 나돌고 있다.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가 군부의 충성심 경쟁을 유도하려고 수시로 군 수뇌부의 계급장별을 뗐다 붙였다 하는 인사 조치를 반복하면서 “계급장이 고무줄이냐”라는 불만이 커지고 있다는 전언이다. 한 소식통은 “이 때문에 북한 군 계급 간 위계질서가 무너지고 상호 협조가 어려워지는 부작용이 확산되면서 ‘김정은은 북파 간첩’이란 뼈 있는 농담까지 생겨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대북소식통과 정보당국 관계자들은 김정은의 롤러코스터 같은 군 인사에도 나름 몇 가지 유형이 있다고 분석했다. 최룡해 인민군 총정치국장, 김영철 정찰총국장, 최부일 인민보안부장 같은 나름 친분이 두터운 간부들은 ‘시금치 삶기’ 인사를 폈다고 한다. 즉 뜨거운 물에 살짝 담갔다가 꺼내는 맛보기식 인사로 별을 뗐다가 금세 복권시켜 서운함을 달래주면서 충성심을 유도한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김정은의 지시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군 인사는 복권의 기회를 전혀 주지 않는다고 한다. 특히 별을 한꺼번에 2개 떼버리거나 장성급을 영관급으로 깎아 내리는 등 치욕적인 수모를 주는 방식이 애용된다고 한다. 다른 대북소식통은 “김정은의 이런 군 수뇌부 길들이기 인사는 그의 터무니없는 지시에 대해 군 간부들이 조언을 하자 ‘내가 어리다고 무시하냐’며 크게 화를 낸 뒤부터 본격화됐다는 게 정설”이라고 말했다. 일부 군 간부들은 사석에서 “김정은이 군을 자꾸 무시하면 고려시대 무신들이 문신들의 멸시를 참다못해 난을 일으킨 것처럼 북한에서 ‘제2의 정중부의 난’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말하곤 한다고 이 소식통은 전했다. 정성택 기자 neon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