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엽

조종엽 차장

동아일보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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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조종엽 차장입니다.

jjj@donga.com

취재분야

2025-11-25~2025-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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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스 혁명사’ 집필 주명철 명예교수 “민주주의는 ‘설득과 합의’”

    정년을 맞아 은퇴한 대학 교수가 프랑스 혁명사를 10부작으로 쓰고 있다. 책 한 권이 대략 200자 원고지 1200장 분량이라고 치면 10부작은 원고지 1만2000장에 이른다. 최근 1부 ‘대서사의 서막’과 2부 ‘평등을 잉태한 자유의 원년’을 발간한 주명철 한국교원대 명예교수(65)를 전화로 만나봤다. “프랑스 혁명 당시 민중들이 흘린 피가 역사의 추진력으로 작동했지만 새로운 체제는 폭력만으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민주주의는 결국 ‘설득과 합의’겠지요.” 주 교수는 “프랑스 혁명은 헌정질서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며 “입법가들이 의회 내에서 서로를 설득하는 의회활동을 중심으로 혁명사를 짚어가려 한다”고 말했다. 그 무기는 사료다. ‘1787년부터 1860년까지 의회기록’ ‘프랑스 혁명기 의회의 역사’를 비롯한 수많은 프랑스어 사료에 근거를 뒀다. 앙시앵레짐(구체제)에 대한 오해도 고치고 싶다고 했다. 흔히 앙시앵레짐(구체제)을 혁명이 극복해낸 모순 덩어리로만 보지만 절대 왕정이 후원하는 여러 아카데미에서 활발하게 학술 토론이 벌어지는 등 근대화에 긍정적인 역할도 했다는 것이다. 그는 “앙시앵레짐이 사실은 혁명을 품어 낳은 면이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 혁명 도중인 1790년 제정된 법 중에 ‘성직자 민사 기본법’(Civil Constitution of Clergy)이라고 번역된 것이 있다. 마치 성직자의 민사 소송 절차를 정한 법 같지만 사실은 구체제에서 제1신분이었던 성직자를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포함시키고 재산과 직위 임명 등을 통제하는 법이라고 한다. “원래 ‘성직자 시민 헌법’이 맞는 표현입니다. 일본 학자들이 잘못 번역한 것을 그대로 옮겨 쓴 거죠. 또 ‘공안위원회’는 나라를 구한다는 의미의 ‘구국위원회’가 맞아요.” 주 교수는 “혁명 기구와 법률 등에 뜻이 모호한 번역이나 오역이 꽤 있는데 이번 기회에 고치려고 한다”고 말했다. 주 교수에게 프랑스 혁명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물었더니 “마음이 약해서 (피 흘리는 혁명 과정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답이 돌아왔다. “혁명은 고통스럽고, 말조심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이어서 행복한 사람이 많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도 민주주의를 향한 몸부림의 가장 극적인 순간은 1792년 8월 10일 민중들이 국왕이 있는 튈르리 궁으로 진격해 입헌군주정을 사실상 끝낸 ‘제2의 혁명’ 순간이라고 봅니다.” 주 교수는 프랑스 혁명이 주는 교훈에 대해 “민주주의는 매우 어렵게 도달한 것이고, 그만큼 소중한 가치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주 교수는 수년 전 원로 서양사학자인 이광주 인제대 명예교수의 권유로 책 집필을 시작했지만 미뤄두다가 올해 정년을 맞았다고 한다. 탈고한 3, 4권은 내년에 출간될 예정이고 현재 5권 째의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앞으로 매년 1권 씩 쓸 생각이라고 하니 10부작을 모두 끝내려면 6년은 더 걸릴 예정이다. “마라톤처럼 느껴지지만 어쨌든 골인 지점은 조금씩 다가오지 않겠습니까. 이걸 끝내야 마음이 편해질 거 같아요.”조종엽기자 jjj@donga.com}

    • 2015-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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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우주의 신비와 과학의 미래를 밝혀라

    둘레가 27km에 이르는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거대강입자가속기(LHC)가 2008년 가동되기 전 “이 시설에서 생길 수 있는 블랙홀이 지구를 삼켜버릴 수 있다”는 주장이 적지 않았다. 그 때문에 두 사람의 물리학자가 반박 논문까지 내야 했다. 엄청난 질량이 존재하는 우주가 아니라 지구의 실험실에서 블랙홀이 생긴다는 주장은 황당한 소리에 불과한 것일까. 미국 하버드대 물리학과 교수인 저자에 따르면 그 가능성은 낮지만 분명 존재한다. 심지어 고차원 우주의 존재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있다. 물론 LHC에서 생긴 블랙홀은 크기가 아주 작을 것이고, 순식간에 에너지를 방출하고 사라질 것이니 걱정할 것은 없다. 저자는 ‘비틀린 여분 차원’이란 새로운 개념을 통해 최신 우주론인 ‘끈’ 이론의 일부를 실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현대 우주론과 양자역학 이론을 다룬 책은 대중서라고 해도 기본 개념 이해부터 쉽지 않다. 이 책도 그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여분 차원’에서의 중력은 매우 강하지만 우리는 그 힘의 아주 일부만 느낄 뿐인데, LHC에서 중력자가 1조 배 정도 강하게 상호 작용하는 상태가 관측되면 ‘여분 차원’의 증거가 될 것이라는 저자의 이론은 아무리 되새겨 읽어도 알쏭달쏭하다. 그래도 저자는 입자 가속의 원리를 “그네에 탄 아이의 등을 밀어 더 높이 올라가게 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는 등 비교적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현대 물리학의 최전선에서 벌어지는 일을 전하는 책의 제목으로 밥 딜런의 유명한 노래 ‘Knockin‘ On Heaven’s Door’를 빌려온 것도 반어적인 위트로 보인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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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강산 금동아미타삼존불은 ‘매불신앙’ 확인할 진품”

    조선 초기 신앙의 목적으로 금강산에 묻혀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삼존불상이 16일 처음으로 공개됐다.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한국미술사연구소장)는 이날 불상을 공개하고 “1450년경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국내에서는 유일한 금강산 매립 불상”이라며 “감정 결과 금강산 은정골에서 출토돼 북한 평양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10여 점의 금동불상과 같은 티베트계 명나라 양식의 금동아미타삼존불상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문 교수에 따르면 매불(埋佛) 신앙은 고려 말부터 당대 사람들이 불국토라고 생각한 금강산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이번에 공개된 불상은 본존 아미타불상, 좌협시 관음보살상, 우협시 지장보살상으로 전체 크기는 12∼13cm, 대좌를 제외한 부처님의 크기는 7.5∼8.2cm다. 문 교수는 “가슴이 나오고 허리가 가늘며 두 손이 유난히 크고 긴 전형적인 티베트계 명나라 양식의 불상”이라고 밝혔다. 문 교수는 불상이 올해 중국 지안(集安) 시를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왔고,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고 밝혔다. 불상의 가치 등에 관한 학계의 추가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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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리장성이 평양까지 이르렀다는 건 사료 작성 시기 착오 탓”

    ‘낙랑군 수성현 갈석산에서 (진·秦) 장성(長城)이 시작된다.’ 사기색은(史記索隱)과 통전(通典) 등 각종 중국 사서에 나오는 기록이다. 학계 통설에 따르면 낙랑군의 위치는 현재 평양과 그 인근. 이 사서들의 기록을 근거로 1910년 일본인 학자 이나바 이와키치는 만리장성이 평양까지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1982년 발간된 ‘중국역사지도집’과 최근의 동북공정, 2012년 12월 공개된 미 의회 조사국 보고서 등에도 반영됐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사료가 만들어진 시기를 잘못 해석한 것이라는 연구가 나왔다. 12일 한국고대사학회 학술발표회에서 공석구 한밭대 교양학부 교수는 “해당 기록이 처음 등장했고 이후 사서들이 인용하는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는 낙랑군이 한반도 평양에 있던 때가 아니라 313년 고구려에 의해 축출돼 요서지방으로 교치(僑置·땅 이름을 다른 곳으로 옮김)된 뒤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밝혔다. 진 장성이 시작되는 낙랑군은 한반도에 있던 낙랑군이 아니라 요서지방의 낙랑군이라는 얘기다. 공 교수는 ‘진 장성 동단과 낙랑군 수성현 관련기록 고찰’이라는 발표문에서 “자치통감 등이 인용한 태강지리지에는 동진(東晉) 원제(재위 318∼323년)나 북위(北魏·386∼534) 시대에 일어난 일과 용어가 등장한다”며 “낙랑군과 장성 기록도 낙랑군 축출 이후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공 교수는 태강지리지 다음으로 낙랑군 수성현과 장성에 대해 기록한 사서인 진서(晉書)의 서술 역시 갈석산이 요서에 있었다는 방증으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이 책은 당 태종의 명령으로 648년 완성된 책이다. 태강지리지가 진 장성 동단과 관련해 ‘갈석산’을 언급하고 있는 데 반해 진서에는 갈석산이 빠져 있다. 공 교수는 “진서의 편찬자들은 요동에 대한 영토의식을 기반으로 한반도 일부 지역까지 아우르는 낙랑군을 설명하려 했다”며 “갈석산이 요서에 있는 것을 설명하기 어렵자 편찬자들이 이를 빼버린 것으로 해석된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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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신, 인간에게 묻다 “나와 함께 갈 준비가 되었는가”

    현대의 성서는 모두 번역서다. 구약성서는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신약성서는 그리스어로 쓰였다. 이후 라틴어로 옮겨진 성서가 공인된 권위를 얻었고 다시 영어와 한국어를 비롯한 다양한 언어로 번역됐다. 번역은 운명적으로 유사한 단어로의 대체나 축약과 같은 의미 변화를 겪는다. 성서 번역에는 그런 일이 없었을까.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인 저자는 미국 하버드대에서 셈족어와 인도·이란어 고전문헌학을 동시에 전공하는 등 다양한 고대 언어를 연구한 고전문헌학자다. 저자는 번역되며 변형된 성서의 원래 의미를 복원해내고, 역자들의 의도까지 추측해낸다. “내가 이 아이와 저리로 가서, 예배를 드리고….”(창세기 22장 5절) 구약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 이삭을 신에게 바치려는 순간이다. 책에 따르면 히브리어 성서 원문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지칭한 단어는 ‘이 아이’가 아니라 ‘건장한 청년’을 뜻하는 단어였다. 그런데 기원전 3세기 그리스어 번역인 ‘칠십인역’과 기원후 5세기 라틴어 번역인 ‘불가타’에서는 ‘이 아이’가 됐다. 저자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칭송하기 위해 당대 역자들이 일부러 오역한 것”이라며 “성서의 이 부분은 아브라함이 약 37세 정도인 아들 이삭에게 영적인 권위를 넘기는 이야기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과일을 따 먹은 나무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아니라 ‘모든 지식의 나무’가 원래 의미에 가깝다고 한다. 저자는 “이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는 상징은 인간의 오만과 원죄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책은 성서의 풍부한 의미를 살려냈다. 예수는 빌라도 총독에게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말한다. ‘증언하다’는 그리스어 ‘마르튀레오(martyreo)’인데 ‘죽을 각오를 하고 실행에 옮기겠다고 말하다’이고, 예수가 사용한 아람어로는 ‘샤하다(shahada)’인데 ‘순교하다’라는 뜻도 담겨 있다. 얼핏 난해할 것 같은 책이지만 이야기에서 교훈을 이끌어내는 식으로 구성돼 쉽게 읽힌다. 저자는 신의 질문에 주목한다. ‘신의 위대한 질문’은 구약, ‘인간의 위대한 질문’은 신약에 나오는 물음이 화두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주는 땅으로 가거라.”(창세기 12장 1절) 구약에서 신은 아브람(신으로부터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받기 전의 이름)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향을 떠날 수 있는가’를 묻는다. 히브리어 원문의 첫마디는 ‘레크 르카(lek lka)’다. ‘레크’에는 ‘버리다’라는 의미가 있고 ‘르카’는 ‘너를 위해서’라는 뜻이다. 저자는 “신이 우리가 일생을 통해 일군 안전장치나 기득권을 버리고 신과 동행할 준비가 돼 있는지를 물은 것”이라며 “신의 명령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다”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이 사막에서 왕처럼 대접한 낯선 이는 사실 신이었다. 저자는 “‘거룩함’이라는 뜻인 히브리어 ‘카도쉬(kadosh)’의 원래 의미는 ‘다름’”이라며 “낯선 타자를 성찰의 기회로 삼고 섬김의 대상으로 만들 때 그 ‘다름’이 바로 신이 된다”고 말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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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진보가 가야할 방향 제시한 故김기원 교수의 유고집

    “You can‘t have your cake and eat it, too(케이크를 먹어치우면서 그대로 간직할 수는 없다).” 진보적 입장에서 현실적 대안을 추구하다 지난해 12월 세상을 뜬 김기원 한국방송통신대 경제학과 교수가 고교 영어 수업 시간에 배웠다며 지난해 3월 자신의 블로그에 인용한 속담이다. ‘복지는 좋지만 세금을 더 내고 싶지는 않다’는 게 보통 사람들의 솔직한 심정일 테다. 그러나 김 교수는 평소 그런 일은 이뤄질 수 없다고 꼬집었다. 이 책은 난무하는 헛된 구호들의 텅 빈 알맹이를 따지고 들며 ‘개혁적 진보’를 설파했던 그의 1주기를 맞아 나온 유고집이다. 2011∼2014년 그가 동명 블로그에 올린 글들을 뽑아 주제별로 엮었다. 책은 진보적인 입장에 있으면서도 진보의 경직성을 탈피하려 했던 그의 고민을 경제민주화, 노동, 한국 정치, 통일 등 4개의 범주로 묶어 담았다. 그는 참여연대의 재벌 개혁 운동을 통해 재벌 비판을 시작했는가 하면 대기업 노동조합들의 ‘노동귀족적’ 운동에 대해서도 뼈아픈 비판을 했던 인물이다. 자본과 노동 사이의 모순은 그 존재를 인정하면서 첨예해지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찾는 수밖에 없다는 게 지론이었다. 책에 묶인 글은 학술 연구를 목적으로 쓰인 글이 아니라 시사적인 문제들에 관해서 비교적 자유롭게 생각을 정리한 글인지라 그만큼 더 직설적이다. 그는 재벌의 폐해를 바로잡고 복지를 강화해 거대 기업 노동자와 종소기업 노동자의 실질적 생활 격차를 줄여야 한다고 했다. 돈만 있으면 안 될 게 없다는 ‘소비자의 편리’도 희생해야 한다고 했다. 김 교수는 갑작스럽게 암 판정을 받은 뒤에도 타계 직전까지 블로그에 글을 올릴 정도로 연구와 집필에 전념했다. 그의 아내는 책 말미 발문에서 “독일에서 돌아오며 ‘이제 겨우 내가 바라는 통일 경제 연구의 방향이 잡혀 가는데…’라고 말하던 목소리가 아직도 들려온다”고 썼다. 책장이 한 장씩 넘어갈 때마다 아쉬움도 쌓인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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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 사회공헌]전도-봉사 날개 삼아 ‘낮은 곳, 더 낮은 곳’ 살피고 보듬어

    ‘낮은 곳 더 낮은 곳으로.’ 이웃과 함께하는 교회가 되기 위한 온누리교회의 표어다. 전도와 사회 참여 및 봉사는 새의 두 날개와 같다고 보기 때문이다. 온누리교회는 소외된 이웃을 돕기 위한 다양한 사회 봉사 활동을 벌이고 있다. 교회는 서울 영등포 지역 노숙자들을 위해 교회 겸 노숙자 쉼터인 마태복음교회에 쌀과 부식, 월세 등을 지원하고 있다. 서울 남대문 쪽방촌 주민에게도 매주 점심식사 등을 대접한다. 불우 이웃에게 사랑의 쌀을 모아 전하고, 질병이나 갑작스러운 생활고를 겪는 80여 가정에게 매년 약 1억 원을 지원하고 있다. 서울 관악구에 있는 나눔센터 ‘프렌즈’를 통해 무료 급식을 하는 한편 무허가 건물에서 사는 주민들의 주거 복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 돕는 사업 교회는 ‘사랑의 열린 나눔장터’를 열어 의류와 생활용품, 유아용품 등을 기부받아 물품이나 판매금을 사회적 약자에게 전달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위탁 아동과 노숙자, 독거노인 등을 위한 헌금과 바자 및 선물 전달, 판자촌에 연탄 쌀 김치 배달하기 등도 수시로 진행되고 있다. 신자들이 지역 내 도움이 필요한 이웃과 일대일로 관계를 맺는 ‘한 다락방 한 사역’ 사업, 지역사회 자원봉사기관 찾아가기, 어려운 사람들 빚 줄여 주기, 필요 이상의 유산 안 물려주기 등의 캠페인도 벌이고 있다. 북한이탈주민의 정착도 돕고 있다. 탈북 청소년을 위한 ‘미래홈 공부방’을 운영하고 있고 여성 탈북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다문화가정을 위한 가족캠프나 문화체험 행사도 수시로 연다. 청년에게 비전 제시 온누리교회는 새롭게 부각되는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다. 청년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 희망을 주기 위한 프로그램이 그 대표적 사례다. 사회선교본부와 CEO포럼은 청년 실업과 양극화에 대한 대안으로 청년들의 사회적 기업 창업을 장려하기 위해 올 6∼11월 ‘러빙 유 청년 벤처대회’를 열었다. 청년들로 구성된 59개 팀이 ‘게임 중독 아이들과 부모를 위한 프로그램’ ‘외국인 근로자를 위한 온라인 한국어 교육 플랫폼’ ‘감사 메시지 전달 앱’ 등의 아이템을 갖고 참여했다. 그중 3팀이 상금을 받았고, 향후 1년 동안 경영 컨설팅도 받게 됐다. 과도한 부채에 시달리는 청년들을 위해서는 ‘청년 부채 해결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전문 기관과 빚을 진 청년을 연결해 상담을 통해 해결책을 제시하고 사후관리를 하도록 했다. 부채해결뿐 아니라 위축된 심리도 회복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장애인이 함께 하는 교회 온누리교회는 발달장애 등의 장애인으로 구성된 합창단과 체임버 오케스트라를 운영하는 등 장애인이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2011년 창단된 ‘온사랑 합창단’은 음악가 12명과 단원 등 약 40명이 있다. 처음에는 화음 연습도 어려웠던 발달장애인들이 함께 연습을 반복하면서 각종 대회에서 여러 차례 상을 받았다. 1999년 시작된 ‘온누리 사랑 챔버’는 80여 명의 단원이 복지관과 노인회관, 병원, 소년원 등에서 연평균 50여 회의 연주 활동을 하고 있다. 2013년 평창 동계스페셜올림픽에서도 초청공연을 했다. 전문 연주자 40여 명으로 구성된 ‘사랑 플러스’가 이들을 지도하고 있다. 온누리교회의 각 지역 성전에서는 장애인들을 위한 예배 공동체 ‘사랑부’를 운영하고 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모든 성도가 선교사 ‘하나’되어 이웃사랑 실천 ▼이재훈 담임목사 온누리교회는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태어난 교회입니다. 선교사 파송과 후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선교사 직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땅끝’뿐만 아니라 우리가 속해 있는 지역사회도 선교 현장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교의 목적은 교회 자체의 확장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구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사회 속으로 들어가 섬기기 위해 정한 표어는 ‘낮은 곳 더 낮은 곳으로’입니다. 예수께서 삶으로 보여 주셨듯이 우리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고통 받는 자들을 찾아가 그들을 위해 애쓰고 필요를 채워 줌으로써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돼야 합니다. 슬로건은 ‘Loving U’입니다. 이는 ‘Uncomfortable’ ‘Unfamiliar’ ‘Unsafe’를 사랑하기, 즉 ‘행복한 불편함’ ‘따스한 시선’ ‘손해 보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교회의 사회 참여는 세 가지 원칙 아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첫째, 모든 성도가 함께 참여합니다. 어린이부터 청소년, 대학생과 청년, 장년층과 어르신 세대에 이르기까지 동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교회는 부분적으로 움직이는 데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몸이 되어 움직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기존의 사회봉사를 지속하며 새로운 영역의 봉사를 개발하고 실행합니다. 온누리 성도들의 사회봉사정신을 고취할 수 있도록 회복적 정의, 생명과 환경, 청지기 사역에 관한 세미나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구제 봉사와 긍휼의 대상들을 찾아가 돕는 기존 봉사활동을 지속하는 한편 새로운 봉사를 개발하여 실천하고 있습니다. 취업이 어려워진 청년들에게 비전을 주기 위해 연 ‘러빙유 청년 벤처 대회’, 청년 부채 해결 방안을 제시하고자 하는 ‘러빙유 청년부채해결 프로그램’, 장애 청소년과 청년들을 위한 ‘사랑챔버’와 ‘온사랑합창단’ 운영 및 전 세계 투어 공연, 그리고 독거노인 탈북민 다문화가정과 이웃이 되기 위한 다양한 사역들을 구상하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셋째, 교회 외부의 사회봉사 시설·단체와의 연계 및 신설을 통해 교회와 사회의 연결고리를 만듭니다. 교회는 ‘온누리복지재단’을 설립해 복지사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자체 시설로 경기 군포시 청소년 쉼터 하나로, 온누리요양센터, 온누리농업실습지(남한산성, 경기 안성)를 운영하고 있고 정부 수탁시설로 시립동부노인전문요양센터, 시립용산노인종합복지관, 청파노인복지센터, 번동코이노니아(장애인보호작업장)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 2015-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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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환곡 둘러싼 백성-관원 간 갈등, 살인까지

    “고을에서 환곡을 갚지 않는 양하진의 백성 가족을 저에게 모조리 잡아오라고 했습니다. (중략) 용천에 도착하여 허의척과 실랑이가 붙었는데 그때 허의척의 아비가 머리로 저를 받았으므로 제가 철편을 휘둘러서 의도치 않게 머리에 상처를 입혔습니다. 그러나 이는 손이 가는 대로 휘두른 일이고 죽이려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평안도 의주의 포교인 박창일이 관의 지시로 환곡을 독촉하러 갔다가 저항하는 백성을 살해했다는 일성록(日省錄·사진)의 정조 19년(1795년) 9월 7일 기사다. 정조 17년 기사에는 반대로 경기도 광주에 사는 함봉련이라는 이가 환곡 대신에 소를 빼앗아간 관리를 우발적으로 살해한 사건도 실려 있다. 당시 환곡을 둘러싼 백성과 관리 간의 갈등이 극심했음을 알려준다. 일성록은 영조 28년(1752년)부터 1910년 국권을 잃기까지 국정의 제반 사항을 기록한 것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한국고전번역원은 1998년부터 일성록 번역을 시작해 올해 정조 대를 완역했다. 최근 열린 기념 학술대회에서 김성재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은 발표문 ‘일성록 소재 형사 사건의 사료적 가치’를 통해 일성록의 형옥(刑獄)에 관한 기사를 분석했다. 이에 따르면 일성록에는 이미 양반과 상민의 신분제가 흔들리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건 기록이 적지 않다. “저는 시골의 우매한 백성으로 윤상(倫常)과 명분이 엄격하다는 걸 모르고 며느리를 들이려는 욕심을 냈습니다. (중략) 갈수록 마음이 급해져서 더럽고 추잡한 소문을 냈습니다.” 1795년 경기도 가평에서 돈 많은 상민이 몰락한 양반의 딸을 억지로 며느리로 들이려고 추잡한 소문을 냈는데, 양반의 딸이 수치심에 목숨을 끊은 사건이다. 같은 해 전라도 고부에서 한 상민이 ‘돈 1전 4푼을 훔쳤다’며 양반을 때려 살해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처럼 상민이 양반을 넘보거나 가난한 양반을 함부로 대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얘기다. 일성록에는 정조 대 953건, 순조 대 1046건, 헌종 대 377건, 철종 대 477건의 살인사건이 실려 있다. 승정원일기 등 다른 사료에는 없고 일성록에만 기록된 것이 많다. 김성재 번역위원은 “일성록에는 사건의 피고와 피해자 가족, 증인 등의 진술이 그대로 담겨 있어 당시 백성의 생활상을 알 수 있다”며 “또 범죄를 국왕에게 보고하는 과정, 심리와 재판, 형조의 법 적용, 대신들의 토의까지 담겨 있어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말했다. 한국고전번역원은 내년 상반기 안에 번역된 일성록 정조 대를 185책으로 출판할 예정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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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년 평양 장충성당에 사제 파견해 미사 봉헌”

    부활절 등 가톨릭 축일에 남한 측 사제를 평양에 파견해 미사를 봉헌하는 방안이 추진된다. 최근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천주교주교회의 민족화해주교특별위원회 방북단은 7일 기자회견을 열고 “매년 4, 5차례 가톨릭의 주요 대축일에 서울대교구가 평양 장충성당에 사제를 파견해 미사 봉헌이 이뤄질 수 있도록 북한 조선가톨릭교협회와 협력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주교회의 의장이자 방북단장을 맡은 김희중 대주교는 “방북단의 제안에 북측 관계자들은 ‘언제든지 오시면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답했다”며 “파견 미사가 성사되면 북측과의 만남을 정례화하는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이번 방북단은 김 대주교와 대구대교구장인 조환길 대주교를 포함해 주교 5명과 수행신부 등 17명으로 구성됐으며 북한 조선가톨릭교협회 초청으로 1∼4일 방북했다. 방북단에 따르면 정기적인 사제 파견이 성사될지는 북한 당국의 허가와 남북관계에 달려 있다. 김 대주교는 “북측 관계자는 ‘당국자 간에 이변이 없는 한’이라는 단서를 달았다”며 “남북관계가 경색될 만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 협력하겠다는 취지였다”고 했다. 사제 파견이 성사된다면 2016년 3월 부활절부터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김 대주교는 북한의 사제 양성을 돕는 문제에 대해서는 “정기적인 사제 파견이 이뤄진다면 그런 문제도 논의할 수 있겠지만 지금 얘기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고 말했다. 김 대주교는 또 “‘북측이 교황님을 초청했으면 좋겠다’고 가볍게 말했는데 북측에서는 ‘그렇게 되면 좋죠’라고 답했다”며 “북한의 신자들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보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고 전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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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친고죄로 도입된 간통죄, 처음부터 사기-협박등에 악용돼”

    《 “최원택과 조구담은 1908년 결혼해 살다가 1923년 3월 최원택은 (아내) 조구담을 지금의 조구담 남편인 안재익에게 금 60원에 팔아서 30원은 그때 받고 나머지 30원은 언제든지 호적 수속을 마칠 때 받는다는 계약을 하고 … 속히 주지 않는다고 호적에는 아직 내 계집이라고 작년 9월 2일 조구담을 상대로 안재익과의 간통죄로 고소를 제기하는 동시에….” 1927년 대구에서 열린 재판을 다룬 그해 2월 2일자 동아일보 기사다. 돈을 받고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팔아넘긴 한 남자가 나머지 돈을 받아내기 위해 아내를 고소한 것이다. 최원택은 결국 패소했지만 이런 파렴치한 소송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일제가 도입했던 간통죄가 있었다. 》○ 시작부터 사기 협박에 악용돼 간통죄는 올 2월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이후에도 “여성과 자녀를 보호하기 위해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계속 나온다.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가 4일 개최한 학술대회 ‘성(聖·性)스러운 국민: 국가, 법, 젠더·섹슈얼리티’에서 홍양희 한양대 HK연구교수는 “‘포스트 간통죄’ 시대 이 문제에 제대로 접근하려면 간통죄가 근대 형법에서 어떻게 규율되기 시작했는지를 봐야 한다”고 말했다. 간통죄가 대한민국 형법에 제정된 것은 1953년이지만 일제강점기 처음 도입된 것은 1912년 공포된 ‘조선 형사령’이다. 홍 교수의 발표문 ‘선량한 풍속을 위하여: 식민지 시기 형법과 성(sexuality) 통제’에 따르면 당시에도 간통죄를 악용한 사기와 협박 사건이 자주 벌어졌다. 1930년 황해도 해주에서는 젊은 아내를 동네 부자 아들과 간통하게 한 뒤 남편이 돈을 뜯어낸 사건이 있었다. 1929년 서울에서는 딸을 첩으로 부자에게 시집보낸 뒤 돈을 목적으로 남자를 간통으로 고소한 사건 등도 벌어졌다. 간통죄는 또 며느리와 처를 학대하거나 보복성으로 고소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홍 교수는 “이 같은 문제는 간통죄가 피해자가 고소해야 공소할 수 있는 친고죄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유부녀만 처벌 간통죄가 친고죄가 된 이유는 “피해자인 남편이 자신의 ‘명예와 이해’를 위해 간통 사실을 세상에 알리지 않으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또 간통죄 도입 당시 처벌 대상은 ‘유부(有夫)의 부(婦)’, 즉 결혼한 여성으로 한정됐다. 남편은 바람을 피워도 혼인의 평화를 해치지 않을 수 있다는 논리로 처벌받지 않았다. 기혼 여성의 성을 부권(夫權)의 관점에서 다뤘던 것이다. 간통죄 규정 개정 주장은 도입 초기부터 나온다. 1926년 법 개정을 위한 회의 자료에는 “간통죄를 처벌해 재판 기록을 남기면 자손이 혈통을 의심하게 돼 조상과 자손의 명예를 더럽힌다”며 처벌하지 말자는 주장도 나온다. 홍 교수는 “이는 일본 정책 당국이 ‘일본 민족의 순혈 혈통 보존’에 강박적으로 집착했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전근대사회에서 성 통제의 대상은 주로 상층 신분 여성에 한정됐지만 일제의 간통죄 도입으로 기혼의 모든 여성의 성을 국가가 통제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1950년대 퀴어 장의 변동: 여성혐오의 전이와 동성애의 범죄화’ ‘나라를 위해 죽을 권리: 병역법과 남성적 국민 만들기’ ‘탈식민 국가의 ‘국민’ 경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후 ‘내선결혼(內鮮結婚)’ 가족의 법적 지위’ 등의 주제가 발표됐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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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인은 신체적으로 日人보다 우월하며 밝고 친절”

    “조선은 산이 많은 나라입니다. … 지하자원이 많으며 특히 사금이 산재해 있으나 정부는 외국인의 광산 개발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조선인은 신체적으로 일본 사람보다 우월하며, 청나라 사람들보다 열등하지 않습니다. 민족적 기질은 밝고 쾌활하며, 격식을 차리지 않습니다.” 조선 주재 영국 부영사로 일했던 C W 캠벨이 1892년 영국 에든버러에서 열린 영국학술협회에서 조선을 묘사한 대목이다. 한승훈 고려대 BK21플러스한국사학사업단 연구교수는 5일 열린 조선시대사학회 월례발표회에서 “영국 외교관들이 1882∼1894년 조선을 여행하며 느낀 조선인들의 첫인상은 ‘친절함’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영국 외교관의 여행기를 통해 본 조선’이라는 발표문에서 영국외교문서, 의회문서, 왕립지리학회지 등을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당초 조선의 쇄국정책과 임오군란에 대해 알고 있던 영국 외교관들은 조선인들이 자신들을 부정적으로 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이 여행하는 중 조선인들은 호기심과 호감이 섞인 가운데 영국인들 주변에 모여들었다. 서해안 탐사를 했던 영국 해군 대위 존 매클레어는 “조선인들은 예의 바르고 정직하며 종종 탐사를 도와줬다”고 적었다. 청나라 사람들 같은 반외세 성향이 조선인들에게는 없다는 기록도 있다. 한 교수는 “청나라는 일찍부터 영국의 정치, 군사적 침략을 받았지만 조선은 그런 경험이 당시까지 적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조선 관리들이 국제 정세에 관한 최신 정보를 알고 있었다는 기록도 나온다. 초대 조선 주재 영국총영사를 지낸 W G 애스턴은 1882년 동래부사 김선근을 만난 뒤 “김 부사는 최근 이집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영국에 있어 수에즈 운하의 중요성, 파나마 운하 건설이 제안됐다는 등의 일을 잘 알고 있어 놀랐다”고 기록했다. 외교관들은 조선 전통 가옥의 내부와 온돌 구조, 지역 간 이동거리 등을 꼼꼼히 기록했다. 조선 관리의 부정부패와 농업 체계의 후진성을 묘사한 부정적인 언급도 있었다. 한 교수는 “외교관들은 영국 상인들의 무역을 도울 수 있는 정보를 얻기 위해 여행했다”며 “이후 이 여행기는 영국 신문에 보도되고 왕립학회에서도 발표됐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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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惡은 싹튼다, 일상적 무관심 속에

    “여전히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 전체에 유일한 화두는 먹고사는 것뿐이라는 점이다. 이것을 우리가 정치 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까?” 진태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가 계간 ‘황해문화’ 올 겨울호에 쓴 ‘몫 없는 이들의 몫-을의 민주주의를 위하여’에서 던진 질문이다. 그는 우리가 ‘인터레그넘’의 시기에 있다고 본다. 인터레그넘은 이탈리아 정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제기한 것으로 왕이 죽었는데 새로운 왕은 즉위하기 전의 공백 상태를 말한다. 한국이 딱 그렇다. 민주화와 산업화 세력이 경쟁하던 거인들의 시대는 갔다. 그 시대에는 국민 건강을 위해 의료보험을 도입하는 것과 같은 대규모의 기획이 가능했다. 지금은? 한국 정부의 금융정책보다 미국의 금리인상이 대다수 한국인의 삶이 곤두박질칠지 아닐지에 더 큰 영향을 준다. ‘참여’ ‘실용’에 이어 대통령의 이름을 딴 정부까지 들어섰지만 새로운 시대는 오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저자인 지그문트 바우만은 1989년 지은 ‘현대성과 홀로코스트’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폴란드 출신의 영국 사회학자다. 공저자인 레오니다스 돈스키스는 철학자이자 정치이론가로, 유럽의회 의원을 지낸 리투아니아 ISM경제경영대 교수다. 이들은 책에서 우리에게는 비교적 낯선 서양의 현대 사상가와 소설가, 비평가 등을 종횡으로 오가며 대담을 벌이며 거인들의 시대처럼 분명한 드라마, 꿈, 선악의 행위자들이 있던 시대는 오히려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저자들에 따르면 우리들은 기존의 구조, 제도, 풍속, 도덕이 해체되면서 불확실성이 커진, 이른바 ‘유동적(액체) 근대’를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에 악은 이슬람국가(IS) 테러리스트의 총 끝이나 북한 김정은 독재와 같은 특정 장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악은 평범한 이웃의 얼굴을 하고 있다. 타자를 일부러 잊는 것, 우리 곁에서 무언가 옳은 것을 하거나 말하는 사람들을 물리치는 것, 다른 종류의 인간을 인지하고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장벽에서 자라난다. 감수성의 상실이 곧 ‘도덕적 불감증’이다. 책은 “사랑, 우정, 충성 그리고 창조의 정신을 통해 인간다운 삶의 조건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진정한 소통이 가능한 것처럼 회자되는 인터넷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도 다르지 않다. 일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누군가의 죽음을 조롱하는 일이 ‘놀이’처럼 벌어진다. 페이스북에는 난민이나 전쟁 등으로 기아 상태에 놓인 비참한 이들을 다룬 게시물이 적지 않다. 여기에 ‘좋아요’를 누르는 것만으로 이들의 처지가 나아지지 않는다는 비판이 많다. 책의 저자들은 “SNS가 우리를 대신해 민주주의와 인권을 전진시키지 않는다”고 말한다. 저자들은 학살과 같은 범죄뿐 아니라 그것을 망각하는 것도 악으로 본다. 기억만큼 윤리와 직결된 것도 없다. 저자들은 “역사는 어떤 정치적 신조에 봉사하는 정권의 소유물이 아니기에 정치가들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라며 “역사가들이 그들의 일을 하도록 놔 둬야 한다”고 말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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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국어원 “한국어 교원자격과정 실습 강화”… 인강업체 “온라인 교육기관 배제 의도” 반발

    국립국어원이 한국어 교원 자격 획득 과정에서 수강생의 강의 실습 부분을 강화하겠다고 나서자 한국어 교원을 양성하는 온라인 교육기관들이 “사실상 온라인 교육기관을 교원 양성에서 배제하는 조치”라며 반발하고 있다. 한국어 교원 자격을 관할하는 국립국어원은 3일 서울 서초구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공청회를 열고 “한국어 교육 실습의 내실화를 위해 수강생이 실제 한국어 교육 현장을 참관하고, 모의 수업도 담당 교수가 (현장에서) 참관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운영 지침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국어 교원 자격증을 얻으려면 시험을 치르기 전 교육기관에서 120시간 이상 교육을 받아야 하며, 이 중 20시간은 강의를 참관하고 모의로 수업해보는 등의 실습 과정이다. 그러나 수강자가 한국어 수업 동영상을 시청하고 모의 수업 동영상을 만들어 올리는 것으로 실습 과정을 대체하는 온라인 교육기관이 많았다. 해외나 국내 오지에서 한국어 교육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현장 실습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아서다. 국립국어원이 이 실습 과정을 현실화하겠다는 게 이날 공청회의 요지였다. 김정숙 고려대 교수(한국어교원자격심사위원장)는 “실습 과목 운영이 부실하다는 지적이 수년간 반복돼 내실화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온라인 교육기관들은 이 지침에 반대하고 있다. 김종범 서울대 평생교육원 팀장은 “해외 수강자에게 실습 과정을 이수하기 위해 한국에 들어오라는 얘기인가”라며 “한류로 늘어나는 외국의 한국어 교원 수요를 외면하는 조치”라고 말했다. 국립국어원 관계자는 “수업을 참관할 수 있는 해외 교육 인프라를 확대하는 방안을 포함해 개선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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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줄다리기’ 유네스코 무형유산 등재… 한국 18번째

    한국의 전통 세시풍속인 줄다리기가 유네스코 인류 무형문화유산에 2일 등재됐다. 문화재청은 이날 나미비아의 수도 빈트후크에서 열린 제10차 유네스코 무형유산 보호협약 정부간위원회에서 한국 베트남 캄보디아 필리핀 등 4개국이 공동 신청한 줄다리기를 무형유산으로 등재키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벼농사 문화권에서 널리 행해지는 줄다리기는 풍작을 기원하고 공동체의 화합을 도모하는 한편 농사가 시작됨을 알리는 의미가 있다는 점과 4개국이 공동 신청한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번에 등재된 한국의 줄다리기에는 국가 지정 무형문화재인 영산줄다리기(제26호), 기지시줄다리기(제75호)와 삼척기줄다리기(강원) 감내게줄당기기 의령큰줄땡기기 남해선구줄끗기(이상 경남) 등 시도 지정 4개 무형문화재가 포함됐다. 한국은 2001년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을 시작으로 줄다리기까지 모두 18건의 무형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제주 해녀 문화 등재는 내년에 결정된다. 한편 유네스코는 이날 북한이 신청한 김치담그기도 인류 무형유산으로 등재키로 결정했다. 한국 김장 문화는 2013년 등재됐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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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전번역 50년… 한류 콘텐츠의 마르지않는 샘

    “민족이 쇠퇴하면 그 나라의 학술과 예술은 위축되어 그 빛이 쇠미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에 찬연한 문화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불행했던 근대의 암흑기는 민족문화의 말살을 당했고 (…).” 1965년 11월 6일 서울대 의과대 강당에서 열린 ‘민족문화추진회(민추)’의 창립총회에서 역사소설가 월탄 박종화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국사학자 이병도가 임시 의장으로 회의를 진행했고,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가 경과 보고를 했다. 일제 강점과 6·25전쟁 등 격동의 현대사를 겪으며 제대로 돌볼 여유가 없었던 전통 정신문화의 맥박이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민추 결성 이후 본격 시작된 고전 번역이 이달로 50년을 맞았다. 민추와 2007년 그를 계승해 정부 산하 기관으로 설립된 한국고전번역원은 현재까지 227종 1931책에 이르는 한문 고전을 번역했다. 4700만 자에 이르는 ‘조선왕조실록’의 번역에 1971년 착수해 22년 만에 완역한 것이 대표적인 성과다. 영조 28년(1752년)부터 1910년 국권을 잃기까지 국정의 제반 사항을 낱낱이 기록한 ‘일성록’도 최근 정조 시절을 완역했다. 번역된 고전들은 드라마 ‘대장금’,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등 수많은 한류 콘텐츠의 밑바탕이 됐다. 그러나 민추 시절에는 재정적인 어려움이 컸다. 1986년부터 쓰고 있는 서울 종로구 비봉길 사무실로 이전하기까지 이사만 10번을 다녔다. 1970년대 잠시 사용했던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 사무실은 위층이 카바레여서 낮에도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1977년부터 민추에서 일한 성백효 고전번역원 명예교수는 “민추 시절 월급은 초중고 교사보다 적었지만 제자가 강의 시간에 늦으면 쉬는 시간까지 문밖에서 기다리다가 강의실에 들어갈 정도로 사제 간에 예절이 엄격했다”고 회상했다. 향후 해결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먼저 인력 부족으로 인한 더딘 번역 작업 속도다. ‘승정원일기’는 1994년 번역에 착수했지만 번역률이 17%에 머무르고 있다. 고전번역원에 따르면 2012년 문집 1259종을 정리해 원본 그대로 출간한 한국문집총간(500책)도 번역률이 10% 정도다. 이 역시 완역에 최소한 45년이 더 걸릴 것으로 보인다. 번역을 위한 인재 양성도 녹록지 않다. 지금은 일반 대학원에서 관련 공부를 한 뒤 다시 3∼7년 동안 고전번역교육원 등에서 전문 번역 교육을 받아야 번역자로서의 몫을 제대로 할 수 있다. 학위와 비학위 과정을 이중으로 이수하는 셈이다. 이명학 한국고전번역원장은 “이 같은 낭비를 줄이기 위해 석박사 학위 과정인 ‘고전번역대학원대학교’의 설립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고전번역원은 ‘한국고전번역 50년 기념식’을 30일 오전 10시 반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연다. 정태현 고전번역원 명예교수, 이계황 전통문화연구회 회장에게 공로패를 수여한다. 다음 달 4일에는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 600주년기념관에서 정조대 일성록 완역 기념 학술대회가 열린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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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생명은 꽃핀다, 또 다른 생명의 빛으로

    몽골에서는 한때 풍장(風葬)을 했고, 티베트에서는 지금도 조장(鳥葬)을 한다. 우연히 여행자가 찍어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조장의 모습은 솔직히 태연히 바라보기 어려웠다. 저자는 야생동물이나 곤충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것으로 정평이 난 생물학자다. 미국 메인 주의 통나무집에서 살며 책을 쓰는 그에게 중병에 걸린 친구 빌이 편지를 보내온다. 자신이 죽으면 주검을 저자가 소유한 숲 속의 공터에 방치해 큰 까마귀들에게 내어 줄 수 있겠느냐는 것. 저자는 이 편지를 계기로 오래 관심을 가져왔던 주제 ‘생명의 존재와 순환’에 대해 더욱 파고든다. 책의 시작은 송장벌레다. 이 벌레는 그리스어로 ‘죽음’을 뜻하는 ‘네크로스’와 ‘사랑’을 뜻하는 ‘필로스’에서 비롯된 학명 ‘니크로포루스’를 갖고 있다. 송장벌레는 생쥐 같은 동물의 시체를 땅에 묻어두었다가 유충에게 먹인다. 각종 사체를 처리하는 청소동물을 지켜보는 저자의 시선은 집요하다. 고래의 사체를 통해 심해 생물들의 생태계가 유지되는 모습은 장엄하기까지 하다. 저자의 주장처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은 다른 생명에서 오고, 다른 생명을 섭취하면서 유지된다. 생명 활동이 멈춘 사체가 다른 생명이 살아가는 데 쓰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리라. 자연 분해가 쉬운 재료로 시신을 감싸고 그 위에 묘목을 결합시킨, 변형된 수목장의 디자인을 최근 봤다. 이 방식은 화장을 하지 않아 연료가 들지 않고, 이산화탄소도 나오지 않는다. 살아 있다는 감각은 이 계절의 제주 감귤 같은 것. 손자에게 줄 감귤이 자랄 나무 아래에 묻히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듯하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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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唐 포로 된 고구려 무장 묘지명 첫 발견

    당나라와 싸우다 포로가 된 고구려 유민의 묘지명(墓誌銘·죽은 사람의 공로를 돌에 새겨 무덤에 묻은 글)이 처음으로 발견됐다. 유민의 이름은 고을덕(高乙德)으로 고구려 귀단성(貴端城) 성주였다가 당나라에서는 절충도위(折衝都尉·정4∼5품)까지 올랐다.○ 고구려 귀족의 기구한 운명 이성제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계간지 ‘중국고중세사 연구’ 38호에 실릴 예정인 논문 ‘어느 고구려 무장의 가계와 일대기’에서 최근 발견된 ‘고을덕 묘지’를 번역하고 분석했다. 이 논문에 따르면 고을덕은 고구려 최고 귀족인 5부 중 순노부 출신으로 618년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와 조부가 영류왕, 보장왕 2대에 걸쳐 왕실 재정을 맡았던 권력자 집안이었다. 고을덕도 귀단성 도사(道史·성주)가 되지만 당나라와 싸우다 43세 때 포로가 돼 끌려간다. 이 연구위원은 “현재까지 발굴된 고구려 유민 묘지들은 자발적으로 당나라에 귀부(歸附)한 이들 또는 그 후손들의 것”이라며 “당에 대항하다 끌려간 유민의 묘지명은 고을덕 묘지명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고을덕의 운명은 기구했다. 당으로부터 무관직을 받아 번장(蕃將·이민족 장수)이 된 그는 고구려 멸망 뒤 고구려 부흥군이 일어나자 이를 토벌하는 당나라 군대에 종군하기도 했다. 그는 699년 81세로 사망한다. 묘지명에는 고구려 멸망을 “동방의 땅이 천명을 당나라에 되돌렸다(東土歸命西朝)”라고 표현해 고구려를 ‘동토’, 당나라를 ‘서조’로 대비했다. 이 박사는 “묘지 역시 장사지내는 과정에서 주변인들이 다 볼 수 있는 것으로 고구려 유민이라는 의식이 있었다고 해도 그를 드러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을덕은 중국 산시 성 시안 시 두릉(杜陵) 북쪽에 묻혔다고 돼 있으나 묘지명의 출토 경위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중국 뤄양(洛陽) 주변 고미술상 등이 갖고 있는 묘지 자료를 조사해 정리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8월 방한해 고을덕 묘지명 탁본을 처음 소개한 거지융(葛繼勇) 중국 정저우대 외국어대 교수는 “올 3월 묘지명이 발견됐다는 정보를 입수해 7월 탁본을 보게 됐다”며 “지개(誌蓋·묘지명의 덮개)가 전서가 아닌 해서로 쓰인 것이 이례적이지만 제작된 시대에 맞게 측천문자(則天文字·당 측천무후가 일부를 바꾼 한자)가 사용됐고, 궐자(闕字·황제 등에게 존경을 표하기 위해 글자를 띄움)도 당대의 율령에 부합한다”고 말했다.○ 고구려 말까지 ‘태왕(太王)’ 호칭 “조부 과(과)는 건무태왕(建武太王)에게서 중리소형(中裏小兄)의 관등을 받아….” 고을덕 묘지명에는 건무태왕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건무왕은 연개소문에게 시해당한 영류왕(?∼642)으로 살아 있을 당시 건무를 왕호로 사용했을 것이라고 추정돼 왔는데 그 실례(實例)가 등장한 것이다. 특히 건무 ‘왕’이 아니라 ‘태왕’이라고 표현한 것이 주목된다. 태왕이라는 표현은 4세기 재위한 고국원왕을 국강상성태왕(國岡上聖太王)으로 지칭한 모두루묘지(牟豆婁墓誌)에서 처음 등장했는데 이번 고을덕 묘지명을 통해 고구려 말기까지 사용됐다는 것이 확인됐다. 이 연구위원은 “태왕이 여러 왕호 형식 중 하나인지, 왕을 높여 부른 것인지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묘지명은 고구려 지방제도 연구에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연구위원은 “묘지에 고을덕의 부친과 조부가 요부도독(遼府都督), 해곡부도독(海谷府都督)을 지냈다고 나오는데 이는 고구려 최상위 지방관인 ‘욕살’”이라며 “고구려 지방 편제 연구에 관해서도 중요한 자료”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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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선사시대를 엿볼 수 있는 것은 말과 말 덕분이다

    대규모 핵전쟁이 일어나 한국인의 일부만 살아남았다고 치자. 수천 년 뒤 후손들은 선조들에 대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한 가지 유력한 방법은 비교언어학이다. 후손들은 당대의 다양한 민족이 사용하는 언어를 비교해 공통의 어근을 발견해내는 방식으로 공통 조어(祖語·친족 관계에 있는 여러 언어들이 갈려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원언어)인 한국어의 단어들을 추정할 수 있다. 당대 다양한 민족들이 ‘정보가 담긴 매체’라는 의미로 ‘씬문’이나 ‘친문’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고 하자(물론 음운 변화 법칙과는 무관한 예시다). 후손들은 공통 조어에 ‘신문’이 있었고 선조(우리)들이 매일 정보를 제공받는 시스템 속에서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나무’ ‘명태’ 등 공통 조어에 등장하는 동식물명과 기후 등 환경조건, 추정되는 각 민족 언어의 분기 시점 등을 종합하면 자신들의 조상이 한반도에 살았다는 것까지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영어에서 힌디어까지 전 세계에서 약 30억 명이 인도·유럽어족의 언어를 쓴다. 인도·유럽어족의 공통 조어를 쓰던 옛날 사람들에 대해서도 같은 방법으로 여러 가지를 알아낼 수 있다. 이들은 기원전 4500년부터 기원전 2500년까지 흑해 카스피해 연안의 초원에서 소와 양을 치고, 꿀벌로부터 꿀을 모으고, 네 바퀴 수레를 몰고, 양털로 직물을 만들었다. 또 권리와 의무를 부계로 상속했고, 결혼 뒤에는 시집에서 살았으며, 제도화한 군대를 보유하고, 소와 말을 잡아 희생의식을 행했다. 책은 언어학과 고고학, 동식물학, 지질학 등을 동원해 유라시아 초원의 선사시대를 복원해낸다. 인도·유럽 공통조어 사용자들은 수레와 말을 교통·운송수단으로 쓰기 시작하면서 급격히 사방으로 퍼져 나갔고, 유라시아 초원은 교통·상업·문화적 교환이 벌어지는 회랑(回廊)이 됐다. 고구려 벽화에도 나오는 파르티아 사법(射法)에 관한 분석도 한 대목 나온다. 철기시대 이전의 활은 길어서 말 위에서 쓰기 불편했고, 화살대를 쪼개 촉을 박는 식이어서 강도도 떨어졌다. 그러나 기원전 1000년경 짧은 이중 만곡(彎曲)형 복합궁이 발명돼 강도가 높아지면서 기수가 뒤쪽으로 화살을 강하게 날릴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저자는 미국 하트윅대 인류학 교수로 수많은 유라시아 유적 발굴에 참여했다고 한다. 고대 말뼈의 치아 마모 흔적을 통해 기마를 위해 재갈을 물렸던 말인지를 알아내는 솜씨가 놀랍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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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을사늑약은 국제법상 무효’ 하버드보고서 작성자 찾았다

    국제연맹이 ‘을사늑약은 국제법상 무효’라고 밝혔던 이른바 ‘하버드 보고서’를 작성한 인물이 밝혀졌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국사학)는 20일 한국역사연구원 주최 ‘을사조약 110년 국제학술회의-1905년 ‘보호조약’, 그 세계사적 조명’에서 ‘한국 병합 무효화 운동과 구미(歐美)의 언론과 학계: 1907∼1936’을 발표한다. 이 교수는 이 주제 발표문에서 1935년 국제연맹의 ‘하버드 보고서’를 쓴 인물이 제임스 가너 미국 일리노이주립대 교수라고 밝혔다. 국제연맹은 1935년 ‘조약법(Law of Treaties)에 관한 보고서’를 내면서 역사상 효력이 없는 조약 3개 중 하나로 을사늑약을 꼽았다. 나머지 2개는 1773년 러시아군이 폴란드 의회를 포위하고 분할을 강요했던 조약, 1915년 미군이 아이티 의회를 점령하고 승인받은 보호조약이다. 이 보고서는 국제연맹의 ‘국제협약 법전화 사업’의 일환으로 나왔고, 맨리 허드슨 교수가 이끄는 하버드대 법대 교수단이 주축이 돼 만들어졌기 때문에 ‘하버드 보고서’라고도 불린다. 제임스 가너 교수는 1932년 국제연맹 자문단의 일원이 돼 국제협약 법전화 프로젝트 중 조약법에 관한 연구를 맡았다. 가너 교수는 국제법과 세계대전을 연구한 저명 학자로 프랑스 정부의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던 인물이다. 이 교수는 “가너 교수는 프랑스 학계와의 접촉이 잦았고, 을사조약 체결 직후인 1906년 프랑스의 국제법학자 프랑시스 레이가 조약은 무효라고 한 논문을 주요 근거로 들어 보고서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프랑시스 레이는 1919년 파리강화회의 때 프랑스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여했던 법률가다. 이 교수는 국제연맹의 이 보고서가 나오는 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노력이 직간접으로 효과를 냈다고도 분석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 대표부는 1919년 3월부터 파리평화회의를 상대로 한국 독립 청원 운동을 벌이지만 그해 6월 28일 “한국 문제는 평화회의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답을 받는다. 이 교수는 “대표들은 이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국제회의에서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했다”며 “국제연맹의 공식적 의견 표명은 한국의 청원에 대한 회답의 성격을 띤다”라고 말했다. 국제연맹의 이 보고서는 1963년 유엔 국제법위원회(ILC)의 “강제나 협박에 의한 조약의 비준 승인 수용 등은 무효”라는 보고서로 계승됐다. 이 교수는 “국제연맹과 국제연합의 국제법 관련 조직은 1905년 ‘보호조약’과 1910년 ‘병합조약’은 무효(null and void)라는 주장에 손을 들어 준 것이 확실하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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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낙랑군 위치 평양이냐 요서냐… 한군현 놓고 ‘맞짱’

    《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뒤 설치한 한군현의 위치를 둘러싼 상고사(上古史)의 진실은 무엇일까. 학계 통설은 한군현의 중심인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것이지만 재야 사학자들은 요서 지역에 있었다며 주류 학계를 ‘식민사관’이라고 비난한다. 가장 오래 존속했던 낙랑군의 위치를 정하면 나머지 군의 위치는 그에 따라 결정된다.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위는 16일 ‘한국 상고사 대토론회, 한군현 및 패수 위치 비정(比定)에 관한 논의’를 열었다. 》○ 중국 사료가 요서설 지지 vs 주석에 불과 통설을 지지하는 공석구 한밭대 교양학부 교수(고구려발해학회장)는 한반도에 있던 낙랑군이 멸망하면서 유민들이 요서로 옮겨감에 따라 혼돈이 생겼다고 지적했다. 그는 “313년 고구려가 평양의 낙랑군을 멸한 뒤 낙랑 유민이 요서로 옮겨가면서 낙랑군이 요서에 새로 만들어졌다”며 “요서로 교치(僑置·땅 이름을 옮김)된 이후를 설명한 사료에 근거한 해석은 잘못됐다”고 말했다. 진나라 영역이 평양까지 이르렀다는 중국 동북공정의 주장이나, 낙랑군이 처음부터 요서에 있었다는 재야 사학계의 주장 모두가 틀렸다는 것이다. 반면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갈석산을 지나면 조선’(‘회남자’) ‘낙랑군은 옛 조선국이다. 요동에 있다’(‘후한서’) 등을 비롯해 한군현 존재 당시의 중국 사료에 한결같이 낙랑군이 지금의 허베이 성 갈석산 부근에 있었다고 나온다”고 말했다. 낙랑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윤용구 인천도시공사 문화재담당 부장은 “한서의 해당 부분과 후한서 등은 후대에 주석을 달아 당나라 때 만들어진 자료에 불과하다”고 반박했다. 중국 지리지에 언급되는 낙랑군의 급격한 인구 변화가 평양설을 뒷받침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공 교수는 “한서, 후한서 지리지에는 낙랑군 호수가 6만2000호 안팎이라고 나오지만 진서 지리지에는 3700호로 급감한다”며 “그러나 요서 갈석산 지역에서는 인구가 급감할 정치적 상황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인구 감소는 고구려 공격 때문이다. 고구려가 지금의 베이징 부근까지 공격했다는 기록도 있다”고 했지만 공 교수는 “(인구 감소 기록이 나온) 당시 고구려가 갈석산 지역까지 공격했다는 기록은 사료에 전혀 없다”고 반박, 재반박했다.○ 고고학적 증거와 삼국사기 기록도 논란 윤 부장은 광복 이후 평양과 인근에서 발굴된 낙랑고분 3000여 기와 1990년 평양에서 발견된 낙랑목간(낙랑의 25개 속현 호구 상황을 정리한 기록)을 평양설의 근거로 제시했다. 그러나 비주류 학설을 지지하는 복기대 인하대 융합고고학전공 교수는 “일본에서 중국식 동경(銅鏡)이 출토됐다고 일본이 중국 영토였던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삼국지 위서의 관련 기록도 공방 소재가 됐다. 이 소장은 “공손씨가 낙랑군 아래 대방군을 세웠다고 나오는데,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면 공손씨가 고구려를 지나 황해도에 대방군을 설치했다는 얘기인가”라고 말했다. 반면 윤 부장은 “공손씨는 요동반도를 중심으로 한반도 서북과 산둥 반도를 포괄하는 해상왕 같은 지위였다”며 “4군 평정은 수도가 무너지면서 통치권이 바뀌었다는 뜻”이라고 주장했다. 삼국사기 기록에 대한 해석도 달랐다. 복 교수가 “낙랑이 평양에 있어 백제와 400년간 붙어 있었다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왜 4, 5번밖에 등장하지 않나”라고 묻자 공 교수는 “44년 고구려가 낙랑을 취해 살수 이남을 얻었고, 304년 백제가 낙랑의 서쪽 현을 빼앗고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 왕이 죽었다는 내용 등 많은 기록이 있다”며 반박했다. 이날 양측 학자들은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았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게 진정한 애국” “동북공정을 반박하는 게 진정한 학자의 자세”라는 아슬아슬한 수위의 발언이 나오기도 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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