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엽

조종엽 차장

동아일보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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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조종엽 차장입니다.

jjj@donga.com

취재분야

2026-03-03~2026-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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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야 사학자들은 사이비” 주류 소장학자들의 반격

    ‘식민사학’ ‘동북공정 추종’과 같은 재야 사학계의 비판에 거의 대응하지 않던 강단(주류) 사학계의 소장 학자들이 최근 계간지 ‘역사비평’(역사문제연구소)에서 일부 재야 사학자 등을 ‘사이비’로 명명하며 반격에 나서 파문이 예상된다. ‘역사비평’ 2016년 봄호에는 ‘한국 고대사와 사이비 역사학 비판’이라는 기획 발표문이 3편 실렸다. 발표문 ‘사이비 역사학과 역사 파시즘’(기경량 강원대 강사)은 “1970년대 초중반까지 ‘아마추어의 과잉 민족주의’로 이해됐던 사이비 역사학자들은 이후 학계에 대한 모함과 비난을 무차별적으로 쏟아냈다”며 “최소한의 학문성마저 상실했다”고 밝혔다. 이 발표문은 ‘상고사 연구 관련, 과거 국가의 국력과 영토에 이상(異常) 집착하는 비합리적 행위’를 사이비 역사학으로 정의했다. 사이비 역사학자로는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 등을 낸 재야 사학자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뿐 아니라 복기대 인하대 융합고고학 교수, 윤내현 단국대 명예교수 등 강단 내 비주류 사학자의 실명을 거론했다. 또 다른 발표문 ‘한사군 한반도설은 식민사학의 산물인가’(위가야 성균관대 박사 수료)는 재야 사학계가 식민사관이라고 비난하는 한사군 한반도설이 조선 전기 서책부터 유득공 정약용 등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연구까지 오랜 기간 타당성을 인정받은 것이라고 밝혔다. 또 ‘오늘날의 낙랑군 연구’(안정준 연세대 박사 수료)는 광복 이후 북한에서 발굴된 낙랑고분이 2600여 기에 이른다는 점 등을 들며 낙랑군이 중국 요서지역에 있었다는 재야 사학계의 주장을 비판했다. 민족주의를 표방한 재야 사학이 오히려 일제의 식민사학을 닮아 있다는 비판도 나왔다. 기 박사는 “한국 고대사가 전개된 공간을 대륙에서 찾으려는 이들의 노력은 ‘반도의 역사는 열등하다’는 식민사학의 그릇된 명제를 수용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복기대 교수는 7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학문 용어에서(학문에 대해) ‘사이비’라는 말이 쓰이는 것이 걱정되고 개탄스럽다”며 “발표문을 읽어 본 뒤 내 입장에 관한 논문을 낼 것인지, 학회에서 논의할 것인지, 언론 기고를 통해 의견을 제시할 것인지 정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이덕일 소장은 책 ‘우리 안의 식민사관’에서 김현구 고려대 명예교수의 저술을 식민사관이라고 평가했다가 최근 1심 법정에서 명예훼손으로 징역 6개월(집행유예 2년)의 유죄를 선고받았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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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이 책, 이 저자]“맹자는 ‘폭군 방벌’ 주장한 혁명가”

    이번에는 맹자다. 중년층에 논어 읽기 열풍을 일으켰던 책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을 2011년 내놨던 저자(51)가 맹자의 유적을 찾아 가는 여정과 맹자의 사상을 쉽게 소개한 글을 버무려 새 책을 냈다.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교수로 유학대학장을 맡고 있는 저자는 3일 전화 통화에서 “이번 책은 공자의 큰 그늘에 가린 맹자의 사상사적 의의를 대중적으로 알리려 했다”고 말했다. 신 교수에 따르면 맹자는 동아시아 사상사에서 ‘마음’을 철학의 주제로 설정한 최초의 인물이다. 신 교수는 “맹자 이전까지는 선악의 근본이 행동에 달려 있다고 봤지만 맹자는 마음에 있다고 봤다”며 “맹자에 따르면 개인적 도덕뿐 아니라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를 세우는 출발점도 우리들이 선한 마음의 씨앗을 큰 나무로 키워 내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공자에 이은 성인으로 추앙받는 맹자가 ‘과격하고 이단적’이라는 평가를 두고두고 받았다는 것은 의외다. 맹자의 사상이 신분제 사회에선 금기에 가까운 내용을 담았기 때문이다. 맹자 이전에는 왕권은 하늘이 점지해주는 것이었지만 맹자는 폭군을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쫓아내는 것이 정당하다고 봤다. 이에 따라 송나라 대 주희가 맹자를 높이 평가한 뒤인 명나라 대에 들어서도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고, 군주가 가장 가볍다(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는 구절을 비롯해 혁명을 옹호하는 내용을 담은 여러 구절이 삭제된 채 서적이 발간됐다고 한다. 신 교수는 “신분과 지위를 하늘이 내린 것이라고 인식했던 시대에서 이 같은 사고는 혁명적이었다”며 “맹자는 오늘날의 시민 불복종 운동처럼 부조리한 질서에 대한 저항의 사상적 근거를 마련했다”라고 말했다. 책은 신 교수가 중국 산둥(山東) 성 쩌우청(鄒城) 시의 맹자 유적지를 샅샅이 뒤지는 여정을 소개한다. 그는 “이번에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의 일화와 관련된 무덤, 시장, 서원을 비롯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맹자 관련 유적지를 하나하나 찾아갔다”며 “책을 통해 맹자가 자라며 생각하고 느낀 바를 독자들이 따라 느낄 수 있도록 이끌려 했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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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술∼술 이책]기억나지 않음, 형사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증세가 있는 홍콩의 형사 주선율은 어느 날 아침 주차장의 차 안에서 깨어난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지만 치정살인 사건을 수사하고 있었다는 기억이 난다. 경찰서에 출근한 그는 오늘이 자신이 생각한 2003년이 아니라 6년이 더 흐른 2009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일까. 저자는 지난해 말 한 국내 인터넷 서점의 ‘올해의 장르소설’ 투표에서 ‘마션’에 이어 2위에 올랐던 미스터리물 ‘13.67’의 작가다. 현재와 과거가 뒤섞인 작가 특유의 구성, 진범을 찾아냈다고 생각되는 순간에 또다시 일어나는 반전이 흥미롭다. 1만2800원.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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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병마와의 싸움서도 굳건한 우리 시대 ‘지성의 참모총장’

    《 혹자는 방을 밝히는 전구가 갑자기 나가는 것에 비유하고, 또 다른 이는 끝 모를 어둠을 헤매는 것과 같을 것이라고 상상하기도 한다. 철학자, 시인으로 100권이 넘는 저서를 내며 우리 시대 ‘지성의 참모총장’이 되려 했던 사상가 박이문 포스텍 명예교수(86)가 지난해 6월부터 노인요양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햇살이 좋았던 지난달 26일 그의 부인 유영숙 씨(73)와 경기 고양시의 요양원을 찾았다. 》“마침내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더니/막다른 골목/뒤돌아서니 별안간 아찔하게 깊은/낭떠러지 … 가도 가도 험악한 함정만 같은/빠져나오면 더 빠져들어가는/시궁창 같은/삶의 깨어나지 않는 악몽을 꾼다.”(박이문 ‘악몽’ 중) 가는 차 안에서 기자는 박 교수의 병세가 그의 시와 같지 않기를 바랐다. 황혼. 자신이 쌓은 거대한 지성의 성채 꼭대기에 첨탑을 또 세우려 들 수도, 성벽 위에서 느긋하게 저무는 해를 바라볼 수도 있는 시간이다. 요양원은 깨끗했다. 박 교수는 환자복 위에 조끼를 입고 있었다. 볼이 아주 홀쭉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오만한 느낌까지 줬던 과거 사진 속 위풍당당한 모습과는 달랐다. “동아일보 기자예요! 교수님 전집(미다스북스)이 이번에 10권으로 나와서 찾아뵀어요!” “아, 동아일보….” “여보, 생일 축하해요!” 부인과 기자는 함께 축하 노래를 불렀다. 박 교수는 “해피 벌쓰데이”라고 말했지만 초를 불지 않았다. 기자는 박 교수가 예전에 쓴 시를 소리내 읽었다. “4월, 아직 오후는 서늘하고/숲에도 초록빛이 들지 않았다/연못가에는 젊은이와 노인 몇이/낚싯대를 연못에 드리운 채/말없이 고요히 물결만 바라보고 있었다/얼마나 잡힐지 신경 쓰는 친구는 없어 보였다.”(‘월든 호수에서’ 중) “여보, ‘walden pond’ 기억나요? 좋아했었잖아요?” 박 교수는 1982년 망막박리라는 병으로 오른쪽 시력을 사실상 잃었다. 그해 유 씨와 결혼했고 이듬해 미국 하버드대 교육대학원 선임연구원이 됐다. “나도 보스턴은 처음이었거든요. 내가 자동차 조수석에 앉자마자 남편이 학교 약도를 저에게 준 뒤 ‘(길) 알지?’, 그러는 거예요. 원래도 현실적인 일상의 일은 잘하시는 편이 아니거든요.” 부부는 미국 하버드대 시절 자연의 일부가 되는 삶을 예찬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 호수’가 태어난 곳에 종종 함께 놀러갔다. 재작년 가을까지만 해도 박 교수의 병세는 지금처럼 나쁘지 않았다. 박 교수는 책을 읽고 글을 쓰기도 했다. 헌데 썼던 글을 또 쓰는 일이 많아지자 유 씨가 ‘이제 그만 쓰라’고 했다. “50년전 떠났던 고향/그때보다도 더 초라해 시골 마을/한적한 동네 한복판/궁전같이 크기만 했던 기와집은/아버지가 태어나고/그리고 또/우리 형제자매가 태어나서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랐던 곳.”(‘남이 살고 있는 고향집’ 중) 이 시를 읽자 박 교수의 눈이 촉촉해졌다. 하지만 자신의 시라는 것을 알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줌니, 떡 갖고 왔시유∼!” 이때 박 교수 집의 가사를 오래 도와준 아주머니가 옆에서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로 말했다. 박 교수의 얼굴이 밝아지며 “아산…”이라고 했다. 시 몇 수를 더 읽었다. 기자의 손을 잡고 있던 박 교수가 양손으로 자신의 전집을 펼쳤다. 손의 모양새에서 오랜 독서가의 ‘각’이 엄연했다. 당당한 왕년의 사진 속 표정이 되살아났지만 잠시였다. “예전에 남편한테 다시 태어나면 뭘 하겠느냐고 물은 적이 있어요.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공부를 다시 하겠다’고 하더군요. 대학 다닐 때가 전란 중이어서 엉터리로 지나갔다며. 그래도 운이 좋아서 행복하게 살았다고 했어요.”사실 부인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만큼 여러 병을 앓고 있다. 문병을 마친 뒤 귀가한 그는 자택에서 30분가량 침대에 누워 말하는 것도 힘겨워 보였다. “살면서 항상 겉과 속이 같은 분이었어요. 물론 현실적이지 않아서 남편한테 기대고 싶은데 그렇지 못할 때는 화가 난 적도 있었죠. 그래도 남편은 살면서 화를 한 번도 안 냈어요. 아기 같았어요.” 유 씨와 헤어진 뒤 요양원의 부부 모습이 떠올랐다. 한 시를 읽자 부인은 끝내 고개를 숙였다. “우리들의 육체는 먼지/우리들의 삶은 꿈/우리들의 사랑은 환상/우리들의 행복은 바람/그래서/우리들의 실체는 이 먼지뿐/우리들의 꽃은 사랑뿐/우리들의 영원은 이 바람뿐/우리들의 천당은 여기뿐/고통과 슬픔에 가득 찬/여기, 지금뿐/지금 느끼는/이 느낌뿐/쓰고 단.”(박이문 ‘우리들의 천당은’ 중)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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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의 눈/조종엽]인터넷 검색만 해봐도 알 일을…

    지금 광화문에 걸린 현판은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光化門(광화문)’이 쓰여 있다. 그러나 1865년 경복궁 중건 당시 광화문 현판은 그와 반대로 바탕이 검은색, 글씨는 흰색 등 밝은색이었다. 본보와 채널A가 단독 보도한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의 광화문 사진(1893년 이전 촬영)을 보면 분명히 드러난다. 광화문 현판은 적지 않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문화재청은 2005년 광화문을 원형 복원한다면서 당시 한글 현판을 뜬금없이 조선 정조의 글씨를 집자해 바꾸려다가 반발에 부닥쳤다. 결국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당시 현판 글씨체로 2010년 복원했다. 그러나 현판은 복원 석 달도 안돼 균열이 발견됐고, 이를 다시 제작하는 과정에서도 글씨와 규격을 둘러싼 논란이 지속됐다. 문화재청은 이처럼 현판과 관련해 여러 논쟁과 사건을 겪었는데도 기본적인 현판 색깔 고증에 실패했다. 본보 보도 뒤 문화재청은 “스미스소니언박물관 사진의 존재를 몰랐다”며 “자문위원들에게 조언을 구하겠다”고 했다. 문화재 복원은 정확한 고증이 ‘생명’이다. 기자는 검색을 통해 스미스소니언 자료와 동일한 사진이 2009년 한 중국 웹사이트에 올라온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중국어로 된 이 게시물 제목은 ‘100년 전의 조선 사진’. 문화재청이 2010년 광화문 복원 전 이른바 ‘구글링’만 했어도 현판 바탕색이 검은 광화문 사진을 찾는 것이 가능했다는 얘기다. 스미스소니언박물관 사진을 찾은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 대표는 2014년 책까지 내며 현판 문제를 지적했다. 하지만 문화재청은 같은 해 “다방면의 신중한 검토 결과 흰색 바탕의 검은색 글씨임을 재차 확인했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도쿄대 소장 사진을 분석해 내놓은 결론이지만 이번 사진 발견으로 섣불렀다는 게 드러났다. 문화재 복원 전통이 깊은 나라들에서는 무너진 건물 등 훼손 문화재 복원 시 고증과 실제 작업에 10년씩 투자하는 일이 드물지 않다. 반면 우리는 광화문 복원을 2006년 12월부터 2010년 8월까지 3년여 만에 해치웠다. 광화문 현판의 바탕색을 흰색으로 정한 것은 2010년 7월 1일 문화재위 소위원회지만, 당시 위원회 의결서를 보면 그렇게 정한 근거마저 안 나와 있다. 광화문은 서울의 얼굴이고, 현판은 그 눈동자라고 할 수 있다. 현판 색이 바뀌었다면 초상화에서 검은 눈동자를 하얀색으로 칠한 것이나 다름없다.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복원을 위한 작업에 나서야 할 때다.조종엽·문화부 jjj@donga.com}

    • 2016-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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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광화문 현판, 원래는 검은 바탕-흰 글씨였다”

    흰 바탕에 검은색 글씨로 2010년 최종 복원된 광화문 현판이 원래 검은색 바탕에 흰 글씨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진이 새로 발견됐다. 문화재청은 광화문 복원 당시 ‘바탕색과 글씨 색이 바뀌었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에도 현판을 지금처럼 복원해 ‘부실 고증’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본명 김영준) 대표는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국가 인류학 자료보관소’에서 1893년 9월 이전에 촬영된 광화문 사진을 최근 찾아 동아일보에 29일 공개했다. 사진은 박물관 홈페이지(collections.si.edu)에서 ‘korea palace gate’로 검색하면 찾아 볼 수 있다. 발견된 사진은 3장이며 이 중 동일한 2장의 사진에서 뚜렷하게 광화문 현판을 식별할 수 있다. 이 현판의 글씨는 1865년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당시 훈련대장 임태영이 썼다. 사진 속 광화문 현판의 바탕색은 검정에 가까운 어두운 색이다. 사진 오른쪽 아래 중절모를 쓴 서양인의 검은색 옷 색깔과 비슷하다. 바탕색보다 밝게 보이는 글씨(光化門)는 흰색 혹은 금색 등으로 추정된다. 한국사진학회장인 양종훈 상명대 영상학부 교수는 사진 속 현판이 현재의 현판처럼 흰 바탕에 검은 글씨는 절대 아니라고 밝혔다. 그는 “사진 속 건물 처마 밑 단청과 비교했을 때 현판 바탕색이 검정이라는 것은 명확하다”며 “누각 밑의 벽면이 흰색에 가까웠을 텐데, 사진 변색에 따른 벽면의 색 변화를 감안하면 현판 글씨도 흰색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광화문은 1927년 조선총독부가 해체해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졌다. 6·25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됐다가 1968년 철근콘크리트로 복원됐고 2010년 위치 등을 바로잡아 지금 상태로 재복원됐다. 문화재청은 2005년 현판 복원에 착수할 당시 1900년대 초 촬영한 유리원판 사진을 디지털 분석해 현판의 원래 한자 글씨체는 찾아냈지만 바탕색과 글씨 색은 정확하게 확인하지 못했다. 당시에도 대부분의 궁궐 문 현판이 검정 바탕에 흰 글씨를 썼고,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의 품격 등을 고려할 때 ‘검정 바탕에 희거나 금색 글씨’가 옳다는 문화재 전문가들의 지적이 이어졌다. 문화재청은 논란이 계속되자 2014년 6월 자료를 내고 “전통건축 사진 서예 등 전문가로 구성된 자문회의에서 국립중앙박물관과 일본 도쿄대 소장 유리원판 사진을 분석한 결과 바탕색보다 글씨 부분과 이음부가 더 검거나 어두워 흰색 바탕에 검은색 글씨임을 재차 확인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수년간 광화문 현판의 원래 모습이 담긴 사진을 추적해 온 혜문 대표는 “뚜렷한 사진이 발견된 이상 광화문 현판을 다시 제작해 걸어야 한다”며 “광복 70년이 넘은 지금에도 일제가 훼손한 광화문의 옛 모습을 되찾지 못한 현실이 답답할 뿐”이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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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오늘 3·1절… ‘1920년 경신참변’ 새로운 사진들 공개

    1920년 만주 간도대학살(경신참변) 때 자행된 일본군의 학살 실태를 보여주는 사진들이 대거 새로 공개됐다. 30여 년간 간도지역 사료 7000여 점을 수집한 김재홍 규암김약연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은 최근 함경북도 회령에 주둔했던 일본군 19사단 보병 75연대가 독립군과 양민을 학살한 장면 등이 담긴 사진 수십 장을 공개했다. 김 사무총장은 1899년 북간도에 명동촌을 세운 선구자 중 한 명인 규암 김약연(1868∼1942)의 증손자다. 이번에 공개된 사진들은 김 사무총장이 2006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살았던 맹우열 씨로부터 구한 사진첩에 담긴 것으로 김 사무총장이 수년 전 그 존재를 일부 세상에 알렸을 당시에도 공개되지 않았던 것들이다. 75연대는 1920년 봉오동 전투에 투입됐다 홍범도 장군 등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에 대패한 부대다. 75연대를 비롯한 일본군은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서 대패한 뒤 ‘독립군 토벌’을 빌미로 수개월에 걸쳐 간도의 조선인을 무차별 보복 학살한 경신참변을 일으켰다. 사진 속 일본군의 학살 광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다. 시신 옆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비무장의 두 양민, 손이 뒤로 묶인 채 일본군에게 참수를 당한 시신의 모습 등이 그대로 담겼다. 특히 땅바닥에 널브러진 주검들을 구경하는 일본 군인들 옆에 간도 주민들이 서 있는 사진도 있다. 이들은 일본군에 의해 학살 장면을 보도록 강제로 끌려나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독립군에 대패한 일본군, 무차별 보복학살 사진첩 만들어 제대군인에게 전리품으로▼사진첩에는 1920년, 1921년임을 알 수 있는 글이 포함돼 간도대학살 당시 사진임을 알 수 있다. 10여 구의 주검을 찍은 한 사진 아래에는 ‘하바롭스크 정거장 부근 적 사체(哈府停車場附近敵死體)’라는 설명이 달렸다. ‘시마코후카(현 헤이룽장 성과 지린 성에 걸친 일부 지역) 북방에서 우리(일본) 장갑차를 폭파한 빨치산의 운명’이라는 설명이 달린 주검 사진도 있다. 일본군은 이 사진첩을 만들어 제대 군인에게 전리품처럼 챙겨준 것으로 보인다. 사진첩에는 조선인 여성의 모습이 담긴 사진도 여러 장 있다. 한복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한문 서예를 하는 여성, 물동이를 인 여인, 댕기머리를 한 처녀의 사진, 조선 미인(鮮美人)이라는 글씨가 쓰인 사진도 있다. 사진첩이 전리품 성격임을 감안할 때 섬뜩한 느낌마저 준다. 김 사무총장은 이와 함께 만주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간도 명동촌, 룽징(龍井) 시의 1910, 20년대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도 다수 공개했다. 경신참변 시 일본군 방화로 불에 탔다가 재건된 명동학교, 조선은행 등 거리 풍경, 조선 독립운동가를 감시했던 일본총영사관 건물 등이다. 사진 외에 주요 사료도 여럿 공개됐다. 김약연이 당시 미주 대한인국민회 회장인 도산 안창호에게 하와이 군사학교의 훈련 매뉴얼과 교과서를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친필 서신, 명동학교에 많은 애국지사와 청년들이 몰려들어 공간이 부족해지자 증축을 위해 재정 지원을 요청하는 건축 의연금 위원 임명장 등이다. 김 사무총장은 그간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국가보훈처와 함께 북간도 독립운동에 관한 역사 자료집 간행 작업을 최근 시작했다. 그는 “우리 후손들도 민족의 정체성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독립운동의 피맺힌 역사를 객관적 자료에 근거해 계속 알려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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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 현판, 검정색 바탕에 흰 글씨” 증거 사진 발견…부실고증 논란

    흰 바탕에 검정색 글씨로 2010년 최종 복원된 광화문 현판이 원래 검정색 바탕에 흰 글씨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진이 새로 발견됐다. 문화재청은 광화문 복원 당시 ‘바탕색과 글씨 색이 바뀌었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에도 현판을 지금처럼 복원해 ‘부실 고증’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 대표(본명 김영준)는 미국 스미소니언박물관의 국가 인류학 자료보관소(National Anthropological Archives)에서 1893년 9월 이전에 촬영된 광화문 사진을 최근 찾아 동아일보에 29일 공개했다. 사진은 박물관 홈페이지(collections.si.edu)에서 ‘korea palace gate’로 검색하면 찾아 볼 수 있다. 발견된 사진은 3장이며 이중 동일한 2장의 사진에서 뚜렷하게 광화문 현판을 식별할 수 있다. 이 현판의 글씨는 1865년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당시 훈련대장 임태영이 썼다. 사진 속 광화문 현판의 바탕색은 검정에 가까운 어두운 색이다. 사진 오른쪽 아래 중절모를 쓴 서양인의 검정색 옷 색깔과 비슷하다. 바탕색보다 밝게 보이는 글씨(光化門)는 흰색 혹은 금색 등으로 추정된다. 한국사진학회장인 양종훈 상명대 영상학부 교수는 사진 속 현판이 현재의 현판처럼 흰 바탕에 검은 글씨는 절대 아니라고 밝혔다. 그는 “사진 속 건물 처마 밑 단청과 비교했을 때 현판 바탕색이 검정이라는 것은 명확하다”며 “누각 밑의 벽면이 흰색에 가까웠을 텐데, 사진 변색에 따른 벽면의 색 변화를 감안하면 현판 글씨도 흰색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광화문은 1927년 조선총독부가 해체해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졌다. 6·25 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됐다가 1968년 철근콘크리트로 복원됐고, 2010년 위치 등을 바로잡아 지금 상태로 재복원됐다. 문화재청은 2005년 현판 복원에 착수할 당시 1900년대 초 촬영한 유리원판 사진을 디지털 분석해 현판의 원래 한자 글씨체는 찾아냈지만 바탕과 글씨색은 정확하게 확인하지 못했다. 당시에도 대부분의 궁궐 문 현판이 검정 바탕에 흰 글씨를 썼고,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의 품격 등을 고려할 때 ‘검정 바탕에 희거나 금색 글씨’가 옳다는 문화재 전문가들의 지적이 이어졌다. 문화재청은 논란이 계속되자 2014년 6월 자료를 내고 “전통건축 사진 서예 등 전문가로 구성된 자문회의에서 국립중앙박물관과 일본 도쿄대 소장 유리원판 사진을 분석한 결과, 바탕색보다 글씨 부분과 이음부가 더 검거나 어두워 흰색 바탕에 검정색 글씨임을 재차 확인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수년 간 광화문 현판의 원래 모습이 담긴 사진을 추적해 온 혜문은 “뚜렷한 사진이 발견된 이상 광화문 현판을 다시 제작해 걸어야 한다”며 “광복 70년이 넘은 지금에도 일제가 훼손한 광화문의 옛 모습을 되찾지 못한 현실이 답답할 뿐”이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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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군과 양민을 처참하게…‘간도대학살’ 경신참변 당시 사진 대거 공개

    1920년 만주 간도의 경신참변 때 자행된 일본군의 학살 실태를 보여주는 사진들이 대거 새로 공개됐다. 30여 년간 간도 지역 사료 7000여 점을 수집한 김재홍 규암김약연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은 최근 함경북도 회령에 주둔했던 일본군 19사단 보병 75연대가 독립군과 양민을 학살한 장면 등이 담긴 사진 수십 장을 공개했다. 김 사무총장은 1899년 북간도에 명동촌을 세운 선구자 중 한 명인 규얌 김약연(1868~1942)의 증손자다. 이번에 공개된 사진들은 김 사무총장이 2006년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살았던 맹우열 씨로부터 구한 사진첩에 담긴 것으로 김 사무총장이 수년 전 그 존재를 일부 세상에 알렸을 당시에도 공개되지 않았던 것들이다. 75연대는 1920년 봉오동 전투에 투입됐다 홍범도 장군 등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에 대패한 부대다. 75연대를 비롯한 일본군은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서 대패한 뒤 ‘독립군 토벌’을 빌미로 수개월에 걸쳐 간도의 조선인을 무차별 보복 학살한 경신참변을 일으켰다. 사진 속 일본군의 학살 광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다. 시신 옆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비무장의 두 양민, 손이 뒤로 묶인 채 일본군에 참수를 당한 시신의 모습 등이 그대로 담겼다. 특히 땅바닥에 널브러진 주검들을 구경하는 일본 군인들 옆에 간도 주민들이 서 있는 사진도 있다. 이들은 일본군에 의해 학살 장면을 보도록 강제로 끌려나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첩에는 1920년, 1921년임을 알 수 있는 글이 포함돼 경신참변 당시 사진임을 알 수 있다. 10여구의 주검을 찍은 한 사진 아래에는 ‘하바로프스크 정거장 부근 적 사체’(哈府停車場附近敵死體)라는 설명이 달렸다. ‘시마코후카(현 헤이룽장성과 지린성에 걸친 일부 지역) 북방에서 우리(일본) 장갑차를 폭파한 빨치산의 운명’이라는 설명이 달린 주검 사진도 있다. 일본군은 이 사진첩을 만들어 제대 군인에게 전리품처럼 챙겨준 것으로 보인다. 사진첩에는 조선인 여성의 모습이 담긴 사진도 여러 장 있다. 한복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한문 서예를 하는 여성, 물동이를 인 여인, 댕기머리를 한 처녀의 사진, 조선 미인(鮮美人)이라는 글씨가 쓰인 사진도 있다. 사진첩이 전리품 성격임을 감안할 때 섬뜩한 느낌마저 준다. 김 사무총장은 이와 함께 만주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간도 명동촌, 용정시의 1910~1920년대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도 다수 공개했다. 경신참변 시 일본군 방화로 불에 탔다가 재건된 명동학교, 조선은행 등 거리 풍경, 조선 독립운동가를 감시했던 일본총영사관 건물 등이다. 사진 외에 주요 사료들도 여럿 공개됐다. 김약연이 당시 미주 대한인국민회 회장인 도산 안창호에게 하와이 군사학교의 훈련 매뉴얼과 교과서를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친필 서신, 명동학교에 많은 애국지사와 청년들이 몰려들어 공간이 부족해지자 증축을 위해 재정 지원을 요청하는 건축 의연금 위원 임명장 등이다. 김 사무총장은 그간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국가보훈처와 함께 북간도 독립운동에 관한 역사서 편찬 작업을 최근 시작했다. 그는 “우리 후손들도 민족의 정체성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독립운동의 피맺힌 역사를 객관적 자료에 근거해 계속 알려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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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구-이승만은 각각 광복과 건국의 큰 어른”

    “김구 선생과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각각 광복과 건국의 큰 어른으로 예우하며 서로 보완적인 관계로 보는 것이 대한민국 정체성 확립에 바람직합니다.” 지난달 14일 ‘이승만 전 대통령 국부(國父)’ 발언으로 더불어민주당의 공격을 받았던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국민의당 공동창당준비위원장)가 3월 2일 서울대 강의를 통해 이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와 광복 및 건국 논란에 대한 의견을 밝힌다. 한 교수는 서울대 사회학과 인권강좌 ‘과거 극복의 정의―3·1절 기념 공개강의’에서 ‘3·1독립운동과 대한민국의 정체성―광복과 건국의 관계’를 발표할 예정이다. 미리 공개한 발표문에서 그는 이 전 대통령을 높게 평가해야 한다는 의견을 다시금 강조했다. 그는 “이 전 대통령은 부정선거 등 많은 오점을 남겼지만 대한민국의 기본 궤도를 옳은 방향으로 진입시켜 민주주의 발전에 미친 기여가 결코 작지 않다”고 밝혔다. 그는 또 8·15를 광복절 혹은 건국절 중 어느 쪽으로 기념할 것인지에 대해선 “광복은 건국에 선행할 뿐 아니라 본원적이고 포괄적”이라며 “따라서 8·15는 광복절로 기념하는 것이 지혜롭다”고 밝혔다. 한 교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이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의 ‘규범적 토대’가 됐고, 1948년 헌법 제정과 정부 수립으로 대한민국은 주권국가로서 ‘실효적 통치’를 하게 됐다”고 밝혔다. 광복을 ‘주권을 되찾는다’는 뜻을 넘어 ‘민족의 역사와 문화에서 발원한 이상의 실현’을 포함하는 의미로 보면서 건국을 포용하는 뜻으로 정립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날 강의에는 건국절 제정을 주장하는 뉴라이트 이론가 이영훈 서울대 교수와 1919년 대한민국이 건국됐다는 한시준 단국대 교수가 토론자로 나올 예정이어서 주목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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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100년 만에 받은 선물… 중력파, 우주의 窓을 열다

    미국 ‘라이고(LIGO·레이저 간섭계 중력파 관측소)’가 중력파를 지난해 직접 검출했다고 이달 12일 발표하자 전 세계가 떠들썩했다. 아인슈타인이 1915년 일반상대성이론에서 중력파를 예견한 지 100년 만에 확인한 이번 검출은 노벨상급으로 평가받는 업적이다. 한국중력파연구협력단 총무간사로 라이고 실험에 참여하고 있는 저자가 중력파 검출의 의미와 수십 년에 걸친 과학자들의 노력을 풀어 썼다. 연못에 돌을 던지면 물결의 일렁임이 연못가까지 미친다. 중력파도 비슷하다. 질량을 가진 물체가 가속운동을 하면 중력파가 생기고, 시공간의 일렁임이 멀리까지 미친다. 그 일렁임에 따라 멀리 떨어진 물체도 길이가 잠시 변하는데, 이를 재면 중력파를 검출한 것이다. 문제는 중력파가 아주 미약하다는 것. 일상에서는 의미가 없는 수준이다. 양끝에 각각 1t 무게의 원반이 달린 2m 길이 역기를 초당 1000번 빙빙 돌린다고 할 때 중력파의 세기는 대략 9×10-³9이 된다. 양자역학이 허용하는 최소 길이가 10-³5m임을 감안하면 너무도 미약하다. 그래서 우주에서 서로를 돌고 있는 두 개의 별(쌍성계)이나 두 개의 블랙홀이 합쳐질 때 나오는 비교적 큰 중력파를 잰다. 크다고? 우리 은하에서 가장 가까운 처녀자리 성단에서 고밀도의 중성자별 두 개가 1km 간격으로 돌면서 합쳐지는 중이라면 중력파의 크기는 대략 10-²¹ 정도가 된다. 이는 태양 크기 물체가 수소원자 반지름만큼 늘거나 줄어드는 정도에 불과하다. 이를 어떻게 재나? 오랜 도전 끝에 마침내 성공한 것은 대형 레이저 간섭계다. 레이저 빛의 경로를 나눴다가 다시 합쳤을 때 생기는 간섭무늬의 변화를 통해 중력파로 인한 길이 변화를 알아내는 원리다. 미국 루이지애나 주 리빙스턴에 건설된 라이고 검출기의 초기 모델도 수백 km 떨어진 뉴올리언스 해안에서 치는 파도를 감지할 수 있는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각종 최첨단 기술을 활용해 정밀도를 더욱 높였다. 지난달 6일 북한의 핵실험 정도는 당연히 감지할 수 있지만 당시 점검 중이었다고 한다. 한데 역설적으로 높은 감지도가 검출을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과학자들은 지진, 번개, 트럭이나 복도를 걷는 사람의 진동, 기기 자체의 잡음 등 수많은 노이즈를 걸러내고 순수한 중력파를 가려내야 한다.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연구진 몰래 중력파처럼 생긴 파형을 입력하고 이를 찾아내는지 확인하는 ‘암맹 주입 테스트’는 악명이 높다. 연구진들은 두 번이나 중력파형을 발견하고 진짜 중력파 검출인지 몰라 가슴 졸이며 반년에서 1년 반 동안 논문까지 준비했지만 연례총회에서 ‘인위적으로 주입된 것’이라는 통보를 들었다. 책은 중력파 검출을 둘러싼 과학자들의 드라마틱한 도전을 소개한다. 검출 실험의 선구자이자 한때 검출에 성공했다고 평가받았던 미국 메릴랜드대 조지프 웨버 교수(1919∼2000)가 잘못된 실험 결과를 옳다고 고집하다가 학계에서 사라졌던 일화는 안타깝다. 저자는 중력파 검출 전 원고를 완성했다가 출판사에 원고를 넘기고 닷새 뒤인 지난해 9월 14일 라이고로부터 중력파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신호가 검출됐다는 e메일을 받고 내용을 수정했다고 한다. 평소 현대물리학에 관심이 있다면 내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쓴 것이 큰 장점이다. 저자는 “전자기파 발견 뒤 전파 천문학의 시대가 열린 것처럼 이번 중력파 검출로 우주를 바라보는 새로운 창문이 열렸다”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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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술∼술 이책]살인자의 딸

    피오나는 19년 전 아버지가 살인을 저지른 뒤 ‘살인자의 딸’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깊은 상처와 분노를 간직한 채 살아왔다. 어느 날 “난 살인자가 아니야”라는 아버지의 유언이 피오나에게 전해진다. 석연치 않은 아버지의 죽음과 불행한 기억 속에서 피오나는 19년 전의 아버지와 마주하게 된다. 피오나는 그날의 사건을 파헤치고, 서서히 드러나는 음모와 비밀의 조각들을 맞춰 나간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반전을 거듭하는 구성과 인간의 욕망 묘사가 매력적인 미스터리 스릴러다. 1만5000원.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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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3·1운동후 남미서도 독립운동’ 입증 자료 첫 발견

    1919년 3·1운동 뒤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이 페루 등 남미에서까지 진행됐음을 입증하는 자료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미주 독립운동가 홍언(본명 홍종표·1880∼1951·사진)이 육필로 쓴 한시(漢詩)집 ‘동해시초(東海詩초)’를 최근 발견했다. 이 시집은 홍언이 1910년대 후반부터 쓴 한시를 1932년에 모은 것으로 1921∼22년 페루와 칠레, 에콰도르 등 남미 국가를 순행하며 경제력이 있는 화교(중국인)들을 상대로 독립자금을 모금할 당시 쓴 한시가 포함돼 있다. 시집에 담긴 한시 96수 중 페루에서 쓴 것은 17수다. 홍언이 페루 수도 리마 북쪽 우아초에서 현지 독립기념관을 둘러보고 감회를 적은 시도 있다. 김도형 독립기념관 국외사적지팀장은 “홍언이 남미 화교 사회를 순방하면서 벌인 구체적인 활동은 알려진 게 별로 없었는데 ‘동해시초’가 이를 뒷받침하는 최초 자료”라며 “중국 러시아 동남아 미국 유럽 등 거의 전 세계를 무대로 벌어진 독립운동이 남미에서도 이뤄졌음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동해시초’는 독립유공자 정두옥의 가족이 1995년 독립기념관에 기증한 것으로 그동안 수장고에 보관돼 있었으나 최근 연구소가 시집에 쓰인 필명 ‘동해수부(東海水夫)’가 홍언의 아호라는 것을 확인해 그 가치가 뒤늦게 드러났다. 홍언은 서울에서 태어나 1904년 미국 하와이로 이민했다. 1911년 이후 40여 년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기관지인 신한민보의 주필 등으로 일한 언론인이자 문필가다. 중국어와 한문에 능통해 3·1운동 이후 중국인 위주의 모금 활동을 벌였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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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서 칠레까지… 애국열정 불태운 각고의 여정

    “태평한 이제는 오가는 사람조차 없어/지는 낙엽 푸른 이끼 속 사립문만 반쯤 닫혔네.” 미주 독립운동가 홍언이 1919년 3·1운동 뒤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며 남미를 순행하다 1922년 페루 리마 북쪽 우아초에 있는 페루 독립기념관을 방문해 남긴 한시 중 일부다. 이 시는 이번에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확인한 동해시초(東海詩초)에 담겨 있다. 시와 함께 쓴 해설을 보면 홍언은 페루의 늦가을인 3월 말 이곳을 방문했다. 페루의 독립기념관이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한인 독립운동가의 감회가 드러나 있다. 동아일보가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가로 14cm 세로 21.5cm 크기의 동해시초에는 34쪽에 걸쳐 홍언의 한시 96수가 38제(題)로 나뉘어 담겼다. 페루 독립기념관을 소재로 한 3수, 페루의 수도 리마의 성당을 소재로 한 ‘리마 천주교사’ 2수, 리마의 풍경과 역사에 대한 시 등 남미 순방 경험과 감회가 담겨 있다. 연구소는 동해시초와 미주 한인신문 ‘신한민보’ 기사, 이승만 전 대통령이 주도한 구미위원부에 홍언이 보낸 편지 등을 분석해 홍언이 미국에서 칠레까지 아메리카 대륙을 종횡하며 모금 활동을 벌인 사실과 그 행적을 구체적으로 밝혀냈다. 3·1운동 소식이 1919년 3월 9일 미주에 전해지자 한인단체인 대한인국민회(국민회) 중앙총회는 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자금 마련에 나선다. 국민회는 이민 역사가 오래돼 자본력이 있던 화교(중국인)도 모금 대상에 포함시키기로 그해 4월 결의한다. 미주 한인이 당시 1만여 명에 불과하고, 대부분 가난해 모금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공부한 적이 있어 중국어와 한문에 능통했던 홍언 등 3명이 화교위원으로 임명됐다. 홍언은 중화회관 회장과 중국인신문사의 소개장을 가지고 미국 로키 산맥 서부 지역에서 모금 활동을 벌였다. 홍언은 1921년 6월 초부터 1년여에 걸쳐 남미 순행을 시작한다. 김도형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책임연구위원(국외사적지팀장)은 “당시 중남미 화교들에게 고려인삼을 팔던 한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남미에서도 자금을 거둘 수 있겠다고 판단한 듯하다”고 설명했다. 홍언은 미국 뉴욕에서 배를 타고 파나마와 에콰도르 과야킬을 거쳐 8월 초 리마에 도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순행 초반에는 모금 성과가 비교적 좋았다. 리마에서 화교들은 홍언을 ‘한국지사 홍언’으로 부르며 환영했고 중국 국민당 지부는 100원을 냈다. 홍언은 현지 중국어 신문에 한국의 참상에 관한 기고도 했다. 신한민보는 홍언의 활동에 대해 “중국인들이 동정을 보이며 의연금을 냈다”고 보도했다. 9월 리마를 떠나 12월 칠레 북부에 도착한 홍언은 중국 국민당 이키케 분부(分部)에서 칠레 은으로 8000원을 받았고, 공채 판매를 통해 2000원을 모금하는 데 성공한다. 당시 화폐가치에 대한 연구는 추가적으로 필요하다는 게 김 책임연구위원의 말이다. 홍언은 이후 안토파가스타와 발파라이소를 거쳐 칠레 중부에 있는 수도 산티아고까지 가는 도중에는 모금 성과가 썩 좋지 않았다. 홍언은 각지 화인(華人)의 생활이 심히 곤란하여 모금 경비도 부족하다는 취지의 보고를 구미위원부에 올렸다. 당시 쑨원(孫文)의 국민당이 북벌을 위한 군자금을 모으고 있던 것도 영향을 줬던 것으로 분석된다. 홍언은 이듬해인 1922년 1월 12일 다시 페루 리마로 돌아오고,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모금하다가 페루독립기념관이 있는 우아초를 거친다. 페루 독립기념관을 다룬 한시는 이때 쓴 것이다. 홍언은 4월 초순 에콰도르 과야킬에서 마지막 힘을 쏟는다. 그는 “과야킬은 화인이 약 3000명이며 부상(富商)이 많다고 하니 최후의 성적을 이곳에 희망을 둔다”라고 보고했다. 이후 홍언은 멕시코 등을 거쳐 미국에 온 것으로 추정된다. 김 책임연구위원은 “당시 미주 지역에서 막대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해 미주 지역을 ‘독립운동의 젖줄’이라고 불렀다”며 “홍언이 모금한 돈도 대한인국민회, 구미위원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였다”고 설명했다. 동해시초에는 윤봉길 의사와 이봉창 열사를 기린 시도 10수씩 담겨 있다. 또 ‘나라 없이 이십 년이 되는 섣달 그믐날 저녁에 회포를 쓰다’라는 제목의 연작시 24수 중 제11수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와 3·1운동을 소재로 했다. “하북에서는 정거(停車)한 이등박문을 척살하였건만/한양에서는 선언서를 전한 소녀의 양손이 잘렸네/영용(英勇)에는 애초부터 묵적(墨跡)의 오염은 없나니/천추 두고 그의 주검 유해마저 향기롭네.” 홍언은 이후 북미 지역 국민회 총무·부회장 등으로 일하며 한중 합작을 통한 항일 투쟁에 힘썼고 주미외교위원부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며 1951년 3월 미국에서 사망했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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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운의 조선 왕자’ 의친왕 이강 젊은 날 사진 발견

    고종의 다섯째 아들로 황족 중 항일운동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의친왕 이강(1877∼1955)의 젊은 시절 사진이 새로 발견됐다. 이 사진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신문 ‘노보예 브레먀’(새 시대) 1903년 11월 1일자에 실린 것으로 “일본에 살다가 현재 미국에서 수학 중인 조선의 왕자”라는 설명이 달렸다. 정자관(程子冠)을 쓰고 한복을 차려입은 모습으로 미뤄볼 때 의친왕이 1897년 미국으로 가기 전 한국이나 일본에서 촬영한 사진을 게재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을 공개한 김영수 동북아역사재단 독도동해연구실장은 “노보예 브레먀는 러시아 황제가 구독하고 관료들이 현안 보고서를 작성할 때 자료로 활용한 신문”이라며 “러일전쟁 직전 러시아가 고종의 뒤를 이을 가능성이 있는 왕자로 의친왕을 주목했던 것으로 보인다”라고 설명했다. 의친왕은 1895년 영국 미국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을 특파대사 자격으로 방문했으며, 이후 미국 오하이오 주 웨슬리언대와 버지니아 주 로어노크대에서 공부했다. 3·1운동 이후인 1919년 11월 항일단체인 대동단(단장 전협) 간부들과 함께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망명을 시도했다. 변장을 한 채 중국 안둥(현 단둥)까지 갔으나 그곳에서 일본 경찰에 발각돼 실패했다. 그는 망명 실패 이후 “임시정부에 합류해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죽음을 복수하고 조국의 독립과 세계평화에 헌신하겠다”는 편지를 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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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바일로 부활하는 古典

    “야ㅋ예의는 팍씨. 뭐 ‘부모까지 엄벌에 처해’? 너 왕이야? 와 이거 ×××?” 네이버 웹툰 ‘조선왕조실톡’ 속에 등장하는 조선 정조의 대사다. 한성부(서울시)의 관리가 왕명을 빙자해 아이들의 정월대보름 놀이를 금지하자 정조가 관리를 처벌한다는 내용을 다룬 에피소드다. 조선왕조실록 속 인물들이 요즘 입말로 대화하는 형식을 빌린 이 웹툰은 주 2회 연재 때마다 조회 수가 상위권을 기록한다. 고전(古典)은 시간의 풍화를 견딘 가치 있는 책들이지만 좀처럼 손이 가지 않는 게 사실이다. 스마트폰의 대중화로 독서 인구가 줄어든 요즘에는 더하다. 그러나 최근 모바일 디바이스에 맞게 짧고 흥미롭게 손질된 고전 콘텐츠가 인기를 모으고 있다. 고전의 부활이 가장 활발한 분야는 웹툰이다. 조선왕조실톡의 무적핑크 작가(27)는 “조선왕조실록은 이야기와 캐릭터의 보따리”라며 “모바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대화창 형식으로 그렸더니 독자들이 친근하게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정조는 입이 험했다’는 실록의 기사를 바탕으로 대사를 쓰는 등 자료에 충실하게 캐릭터를 만든다고 한다. 서유기의 내러티브를 충실하게 반영하면서 현대적 유머코드인 ‘병맛’으로 탈바꿈시킨 ‘이말년 서유기’(이말년)도 인기다. 웹툰 ‘죽음에 관하여’에서 공자의 논어(論語)를 모티브로 한 회를 구성했던 시니 작가는 “독자들이 논어의 구절을 자신의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하는 게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동서양 고전을 짧은 영상으로 압축한 ‘동영상 고전’도 모바일에서 꾸준한 반응을 얻고 있다. 지난해 7월 카카오페이지에서 서비스를 시작한 ‘고전5미닛’은 ‘1984’(조지 오웰), ‘군주론’(마키아벨리), ‘대학(大學)’ 등 고전 400여 편을 5분짜리 동영상으로 만든 것이다. 구독자는 약 18만 명으로, 2014년 베스트셀러 순위 소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요나스 요나손)의 e북 구독자(약 20만 명)와 비슷한 수준이다. 영상 200여 편을 봤다는 조근호 변호사는 “5분 영상에 방대한 고전의 핵심을 담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보고 난 뒤 예전에 읽고도 몰랐던 지식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고전5미닛’을 제작한 콘텐츠 기업 ‘모네상스’의 강신장 대표는 “스마트폰이 오히려 독자를 두꺼운 고전으로 이끄는 다리가 돼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창작자들이 고전 속 이야기를 새로운 콘텐츠를 만드는 데 활용하도록 아카이브를 만드는 일도 진행되고 있다. 한국고전번역원은 지난달 ‘전통창작소재 자료집-국역 대동야승’을 발간했다. 조선의 야사 540여 개를 시공간 배경, 신분 성격 용모 행실 등 인물 특징, 관련 풍속에 따라 분류해 키워드별로 검색할 수 있도록 만든 것. 이 작업을 한 김풍기 강원대 교수는 “전통 고전 콘텐츠는 우리 문화적 토대를 이루기에 접근성만 높이면 새로운 서사로 재창조되는 일이 더욱 활발해질 것”이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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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영원한 다거, 성룡

    청룽(성룡)이 스티븐 스필버그에게 ‘쥬라기 공원’에서 사람과 공룡이 함께 나오는 장면의 특수효과를 어떻게 찍었는지 물었다. “간단해요. 버튼, 버튼(을 계속 누르면 되죠)”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스필버그가 청룽 당신은 그 위험한 액션들을 어떻게 찍었느냐고 물었다. “간단해요. 롤링(구르고), 액션(몸놀림하고), 점프(뛰고), 컷(끝나면), 호스피털(병원 가죠)!” 영화 속 청룽은 악당들에게 여기저기 얻어터지면서 간신히 정의를 실현하는 평범한 사람이다. ‘몸으로 때우는’ 그의 액션은 우아하지 않고 항상 아슬아슬한 가운데 코믹하다. 이 책은 인간 청룽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자서전이다. 청룽과 영화사 홍보 직원이었던 주모(주묵)가 함께 썼다. 1954년 홍콩. 청룽은 전 국민당 군인으로 상하이 부두의 깡패를 거쳐 외국 영사관에서 요리사로 일하는 아버지와 역시 전 상하이 암흑가의 여걸로 영사관에서 가정부로 일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5.5kg의 우량아로 태어난다. 제왕절개 수술비를 내기 어려웠던 부모는 집도의로부터 입양 보내라는 제안을 받기도 한다. 청룽은 소학교 1학년 때 낙제를 하고 장난을 많이 쳐 퇴학을 당한 뒤 일곱 살 무렵 ‘중국희극학원’에 보내진다. “팔려가는 것과 다름없었지만 부모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죠.” 그것으로 청룽의 유년기는 사실상 끝이었다. 이후 10년 동안 청룽은 매일 잠을 6시간만 잤고 눈을 뜨고 있는 동안에는 쿵푸 훈련을 받았다. 영화 속에서 언제나 재빠른 그의 달리기는 당시 학원의 대사형 훙진바오(홍금보)가 때리는 것을 피하려 도망치다 보니 늘었다고 한다. 영화판에 나온 뒤에는 단역 무술배우로 시체 역할을 하고 무술감독도 거절한 위험한 장면을 연기하겠다고 나서는 등 애쓰지만 주목을 받지 못했다. 부모님이 살던 호주로 가 1년 동안 허드렛일을 하기도 했다. 이후 ‘사형도수’ ‘취권’ ‘소권괴초’ 등 3편의 영화가 연달아 대성공을 거두며 대스타로 발돋움한다. 청룽의 이야기는 솔직하다. 20대에 천만장자가 돼 볼썽사납게 거들먹거렸던 일, 자신의 아이를 낳은 아내 린펑자오(임봉교) 모르게 재산을 빼돌렸던 일, 혼외자가 있는 게 세상에 드러나자 아내에게 잘못을 빌기보다 이혼을 먼저 생각했던 일 등을 담백하게 말한다. 감출 수도 있는 속생각까지 털어놓는다. 책 속 그는 마음이 약해서 잘 거절할 줄을 모르고 사기도 잘 당하고 실수도 잦지만, 그래서 인간적이다. 청룽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에서 청룽은 액션 연기를 하다가 다친 뒤에도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일어나 웃지만, 실제로는 촬영 당시 목숨이 왔다 갔다 했던 적도 많다. 그 상황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가 자서전을 낸다고 하자 영화계 동료와 명사 149명이 추천사를 보내왔다. 훙진바오는 “자네는… 쉽지 않아! 늙을 수 있다면 그것만도 다행이지”라고 썼다. 아마 머리부터 발끝까지 안 다친 곳이 없는 그의 건강을 염려한 것이리라. 청룽은 평소에도 걷다가 복사뼈와 발이 탈골되면 본인이나 비서가 끼운다. 무릎 연골이 마모돼 지금은 잘 달리기 어렵다. 책에는 그가 다친 곳을 일람한 ‘전신 부상 지도’가 실렸다. 그의 기부는 유명하다. 이미 15년 전 자신의 재산 절반을 기부했다. 자신이 죽을 때 통장 잔액이 ‘0’이기를 소망한다고. 그는 거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처럼 보인다. 전생에 나라라도 구했을까. 책을 읽다 보면 그가 이생에 스스로를 구한 것임을 느끼게 된다. 지면을 빌려 그를 한번 불러보자. “다거(大哥·‘형님’)!”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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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술∼술 이책]심연

    빅터는 미국 뉴욕의 교외에서 작은 출판사를 운영하며 평범하게 사는 30대 중반의 남자다. 문제는 아내의 바람기가 넘쳐난다는 것. 아내에게 무시당하고 부정마저 묵인하던 빅터는 아내의 애인들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해 자신이 아내의 전 애인을 죽였다는 소문을 퍼뜨린다. 작가는 1955년 작 ‘재능 있는 리플리’를 통해 영웅적이면서도 악마적인 면을 동시에 가진 캐릭터를 만드는 데 빼어난 재능을 보여줬다. 이 소설에서도 평범한 남자의 사이코패스적 면모를 실감나게 드러냈다. 인간의 양면성에 대한 담담한 묘사가 일품이다. 1만2000원.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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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 高入시험에 ‘독도는 일본땅’ 문제

    일본 시마네 현 교육위원회가 고교 입학 학력시험에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취지를 담은 시험 문제를 낸 사실이 확인됐다. 남상구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18일 “시마네 현 ‘제3기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 명칭) 문제 연구회 최종 보고서’에서 이 같은 사실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2014년 일본 시마네 현 공립고등학교 입학생 선발 학력 검사에 “다케시마는 일본 고유의 영토지만 현재는 한국이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다. 일본이 주장하고 있는 일본과 한국의 배타적경제수역(EEZ)의 경계선으로 가장 적당한 것을 지도에서 하나를 골라 기호로 답하시오”라는 문제가 출제됐다. 남 연구위원은 “울릉도와 독도 사이의 점선이 정답으로 채점됐고, 정답률은 93.3%로 보고됐다”며 “독도 주변을 일본 영해로, 인근 해역을 일본의 EEZ로 표시한 지도가 일본 교과서에서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고 밝혔다. 독도는 1998년 한일 어업협정에 따른 ‘중간 수역’ 안에 있고, 특히 주변 12해리는 우리 영해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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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EA 지도자대회]소외된 이웃-약자 섬기는 사회구원에 앞장

    테러, 일자리, 북핵 문제 등 다양한 사회 이슈에 적극 대처저출산 문제 해결에도 노력한기총은 2016년 복음화와 다양한 사회적 이슈에 적극 대처하면서 한국 교회의 변화를 이끌어나갈 계획이다. 이영훈 한기총 대표회장은 “1907년 평양 대 부흥운동(1907년 평양을 중심으로 일어나 전국 교회로 확산된 한국 교회의 대표적 부흥운동)처럼 나라와 민족을 새롭게 만들 회개 운동, 기도 운동, 성령 운동을 전개해 한국교회가 새롭게 변화되고 개혁되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기총은 먼저 복음주의적인 신앙 전통을 계승해 개인 구원과 함께 소외된 이웃과 약자를 섬기는 사회 구원 사역에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다문화가정과 홀몸노인 등 소외된 계층을 섬기는 데 헌신할 계획이다. 한기총은 또 테러 방지, 경제 살리기, 일자리 창출, 북한 핵 포기 및 핵개발 저지, 세월호 문제 해결 등을 비롯한 사회적 이슈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 교회와 개신교 단체의 힘을 모을 방침이다. 저출산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것도 그 일환이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경우 교회가 자체적으로 2012년부터 출산 장려금을 주고 있는데 2010년 118명이던 영아부가 지난해 말 595명으로 늘어나는 등 변화가 생겼다는 게 교회의 설명이다. 지난해 한기총은 ‘저출산 극복을 위한 생명존중과 대한민국의 미래선언’을 통해 양육, 불임부부 지원, 입양, 미혼모 자녀 등에 대한 대책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 같은 사업에는 개신교 근본 가치의 하나인 생명 존중이 바탕에 깔려 있다. 한기총은 또 역사 교과서 속에서 교회가 한국사에 끼친 영향에 대한 서술을 제대로 담아낼 수 있도록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도 펼친다. 한국 교회가 구한말 개화기부터 정치 교육 의료 문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준 만큼, 교과서에도 비중 있게 다뤄지도록 힘쓰겠다는 것이다. ‘통일을 준비하는 한국 교회’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도 올해의 과제다. 한기총은 먼저 소속 교회들을 대상으로 매년 예산의 1%를 통일기금으로 적립하는 운동을 전개한다. 한기총은 올 6월에 ‘동성애조장금지 입법청원과 국가인권위원회법 개정’을 위한 집회를 열 계획이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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