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경신참변(간도대학살) 당시 일본군에게 살해당할 위기에 놓은 두 양민. 1920년 봉오동 전투에서 대패한 일본군 19사단 보병 75연대의 사진첩에 담긴 것으로 처음 공개됐다. (김재홍 규암김약연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제공)
일본군 19사단 보병 75연대의 사진첩에서 발견된 사진으로 땅바닥의 시신은 독립군이나 1920년 경신참변 때 일제에 의해 학살된 조선 양민으로 추정된다. (김재홍 규암김약연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제공)
주검 모습 아래 일본어로 ‘시마코후카(현 헤이룽장성과 지린성에 걸친 일부 지역) 북방에서 우리(일본) 장갑차를 폭파한 빨치산의 운명’이라는 사진 설명이 달렸다. 일본군 19사단 보병 75연대의 사진첩에 담겼다. (김재홍 규암김약연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제공)
즐비한 독립군의 시신들 모습. ‘하바로프스크 정거장 부근 적 사체’(哈府停車場附近敵死體)라는 사진 설명이 달렸다. 일본군 19사단 보병 75연대의 사진첩에 담겼다. (김재홍 규암김약연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제공)
일장기를 들고 부대로 들어가는 일본군 19사단 보병 75연대 병사들.(김재홍 규암김약연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제공)
1919년 3월 13일 만주 용정의 독립만세 시위 부상자들을 치료했던 제창병원의 외경. 당시 시위는 2만 명이 참가해 17명이 숨질 정도로 격렬했다.(김재홍 규암김약연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제공)
1919년 3월 13일 만주 용정의 독립만세 시위 부상자들을 치료했던 제창병원의 의사와 간호사들. 당시 시위는 2만 명이 참가해 17명이 숨질 정도로 격렬했다. (김재홍 규암김약연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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