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엽

조종엽 차장

동아일보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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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조종엽 차장입니다.

jjj@donga.com

취재분야

2025-11-25~2025-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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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유럽의 승리’는 우연? 승패는 19세기에 갈렸다

    서구를 기준으로 중동(미들 이스트)과 극동(파 이스트)이라는 명칭은 있지만 반대로 ‘중서’(미들 웨스트)와 ‘극서’(파 웨스트)라는 지리 관념은 없다. 서구, 동양은 지리적 지칭이지만 사실상 우열 관계를 함축한다. 유럽은 ‘대항해 시대’와 산업혁명을 거친 뒤 한때 동아시아 일부를 포함한 세계 각지를 식민 지배했다. 왜 유럽이 승리했고 동양은 ‘먹잇감’이 되었나. ‘대(大)분기’, 즉 번영의 승패가 크게 갈라진 건 언제이고 무엇 때문일까. 유럽의 시각이 반영된 정통적 주장은 서구가 여러 면에서 일찍부터 내부에 우월한 조건을 갖고 있었고, 번영은 필연이었다고 설명한다. 유럽은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오래 전부터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동양보다 높았고, 시장경제와 사유재산권을 확립했으며, 노동자의 임금이 비교적 높아 기계에 투자할 요인이 있었고, 대규모 자본을 조달하는 제도를 만들어 냈고, 헬레니즘 전통을 르네상스로 이어받아 과학혁명을 했고, 민주정치를 확립해 상업을 억눌렀던 동양과는 달랐다는 등의 주장이다. 2000년 출간되자마자 세계 학계의 주목을 받은 이 책은 이 같은 주장을 반박한다. 유럽의 번영은 우연에 가깝고, 내부 요인보다 외부의 자원 확보 덕이며, ‘대분기’는 기존 학설보다 훨씬 늦은 19세기에 이뤄졌다는 것이다. 시카고대 교수로 경제사 분야의 수정주의를 대표하는 캘리포니아학파의 주요 학자인 저자는 1750년경 영국과 중국의 주요 지역은 경제 수준에 별다른 격차가 없었다고 설명한다. 농촌의 생산력과 공업, 시장의 효율성, 사람들의 열량 섭취량, 기대수명 등에서 우열이 없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1인당 연료 공급량은 중국이 유럽보다 많았다. 그러나 19세기 들어서 동아시아는 인구 압력을 견뎌 내지 못해 생태적 위기를 맞았다. 인구가 급증하자 숲이 파괴됐고 토양이 침식됐다. 양쯔 강 삼각주 지역은 경제적으로 가장 발달한 곳이었지만 자원 부족을 화석 에너지원 사용으로 해결하기에는 석탄 매장량이 적었고, 채굴 비용도 비쌌다. 반면 영국은 달랐다. 같은 위기에 처했지만 값싸게 캘 수 있는 노천 탄광이 널려 있었다. 이런 자연조건은 필연이 아니라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영국은 신대륙에서 식량과 자원을 수급해 생태적 압박을 이겨 냈다. 중국은 그와 같은 배후지를 만들지 못했다. 책은 서유럽과 중국, 영국과 중국의 양쯔 강 삼각주 지역을 비교한다. 발전 정도가 다양한 유럽 전체와 중국이라는 국가 하나, 유럽의 국가 하나와 동아시아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발전했던 특정 지역을 비교하는 것이 온당치 않다는 반론도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18세기 중국 강남 지방은 러시아를 제외한 다른 유럽 국가보다 인구가 많았고, 경제적 기능은 유럽에서의 영국 역할과 비교할 수 있다고 말한다. ‘16∼18세기 아시아가 유럽 못지않은 경제 발전 과정에 있었다’는 이 책의 요지는 일단 기분 좋다. 그러나 서구의 ‘내재적 발전론’(유럽 중심주의)을 비판하며 아시아의 ‘자본주의 맹아’를 주장하는 듯한 저자의 연구는 여전히 서구적 발전론의 틀 안에 있다. 경제사 연구자로서는 당연한 것일 수 있겠다. 내용이 방대하고 다소 복잡해 책장이 넘어가는 데 오래 걸리지만 세계적 주목을 받은 저작을 공들여 읽는 일에는 그만한 쾌감이 있겠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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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쁨-평화가 온세상에 가득하길”… 염수정 추기경 부활절 메시지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인 염수정 추기경(사진)은 부활절(27일)을 앞둔 21일 ‘희망과 사랑의 빛을 세상에 비추자’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염 추기경은 “부활의 빛과 기쁨, 평화가 한반도 방방곡곡과 북녘의 동포들, 나아가 온 세상 곳곳에 가득하기를 바란다”며 “북한의 핵 문제가 잘 해결되고, 남북 관계도 소통과 협력 관계로 변화돼 한반도에 평화가 넘치길 기도드린다”고 밝혔다. 개신교계도 이날 잇달아 메시지를 발표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김영주 총무 명의의 입장에서 “이 시대 주님의 양은 누구이며, 부활하신 예수께서 가장 먼저 찾아가신 갈릴리가 어디인지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대표회장인 이영훈 목사는 “우리의 삶 속에서 부활의 생명이 나타나야 한다”며 “우리 주변의 약한 자, 소외된 자, 고통 속에 있는 자를 사랑으로 품어야 한다”고 촉구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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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대적 소명 다한 내재적 발전론, 식민사학과 쌍둥이”

    《 한국사학계가 한국사학의 ‘50년 기둥뿌리’를 스스로 뒤흔들고 있다. ‘내재적 발전론’ 얘기다. ‘세계사 발전의 보편성 속에서 한국사·민족사의 발전 양상을 체계화한다’는 내재적 발전론은 1960년대 이후 식민사학 극복의 일관된 방법론이었고 사실상 근현대사뿐 아니라 전체 한국사 연구와 서술의 근간이 돼 왔다. 국내 최대 규모 한국사 연구단체인 한국역사연구회는 계간지 ‘역사와 현실’ 100호 기념 기획발표회 ‘한국 역사학의 위기-진단과 모색’을 19일 열었다. 최종석 동덕여대 교수는 이날 발표에서 “내재적 발전론을 토대로 한 연구 성과의 한계와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한국사학계가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밝혔다. 》○ 역사적 소명 다해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비판은 10여 년 전부터 종종 제기돼 왔다. 한국역사연구회가 이번 발표회를 통해 전면적인 문제 제기에 나선 것은 식민지 근대화론이나 재야학계의 낙랑군 요서설 등 상고사학, 고교 국사 교과서의 국정화 논란 등 위기에 몰린 한국사학계에 돌파구가 필요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내재적 발전론은 식민사학 극복이라는 과제에서 비롯됐다. 일제의 식민사학은 반도 국가인 조선의 운명이 외부에서 결정된다는 ‘타율성론’과 조선은 고대부터 발전 없이 정체된 사회라는 ‘정체성론’으로 요약된다. 한국사학계는 1960년 4·19혁명이 촉발한 민족주의 바람 속에서 식민사학 극복을 과제로 내세웠고 조선 후기 경영형 부농이 등장해 자본주의 이행의 싹이 생겼다는 ‘조선후기농업경제사’(김용섭)를 비롯해 새로운 연구 결과가 줄을 이었다. 내재적 발전론은 이후 1980년대 민중적 민족주의와 결합하며 민중사학으로도 이어졌다.○ 목적론 한계 넘어서야 최 교수는 내재적 발전론의 ‘내재’와 ‘발전’이 모두 비판의 대상이라고 지적했다. ‘내재’는 한국사에서 외부 충격과 영향, 문화 교류를 소홀하게 취급했다. ‘발전’에 대한 비판은 더 근본적이다. 내재적 발전론이 식민사관의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을 반대로 뒤집어놓았을 뿐 인식의 틀은 같다는 비판이다. 일본인들이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을 수용해 조선을 식민화하면서 적용한 목적론, 즉 근대 국민국가로의 발전이 역사의 방향이라는 인식에 여전히 갇혀 있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내재적 발전론은 역사의 주체를 ‘네이션’(민족, 국가)으로 한정하고 근대적 가치를 과거 역사에 투영시킨 문제가 있다”며 “서구적 발전론을 탈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한민족이 과거 만주와 중국 북부에 거대하고 강력한 국가를 이뤘다는 상고사 인식도 이 같은 인식과 무관치 않다고 분석한다. 그는 “민족의 발전 정도와 주체성에 집착하는 인식 틀에서는 과거에도 일류 민족이었다고 해야 열등감이 소멸된다”며 “상고사에서 일류 민족을 찾으려는 열망이 분출된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역사연구회 회장인 이지원 대림대 교수는 “1990년대 세계화와 지역화를 조화시키는 문제가 대두됐지만 국사학계가 (민족, 국가의 틀에 갇혀) 갈 길을 못 잡은 게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 지역사 등 대안 제시 내재적 발전론 ‘이후’에 대한 방향 모색은 이제 시작 단계다. 토론자로 나선 하일식 연세대 교수는 “연구자의 가치와 희망을 과도하게 투영하거나, 새로운 사료를 통해 변화를 보면 너무 쉽게 발전이라고 규정하는 데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며 “변화하지 않는 것의 이유와 구조적 배경을 질문하는 등의 방법론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태우 서울대 HK연구교수는 “내재적 발전론이 시대적 맥락에서 주목받은 것처럼 생태, 평화, 소수자 인권 등의 가치를 역사학이 수용하고 연구 성과로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발표자로 참여한 신주백 연세대 교수는 ‘지역사’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는 “국가 대신 지역을 중심으로 시대와 주제를 구분하고, 그 시야 속에서 동아시아 등의 역사를 보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회를 맡은 이익주 서울시립대 교수는 “대학 역사교육의 커리큘럼을 재검토하는 공동 연구를 제안한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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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모호한 경계… 어디까지가 사이보그인가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이긴 지 얼마 안 된 요즘 ‘포스트휴먼 시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이 책의 부제는 심상치 않게 다가온다. 최근 가장 유명한 사이보그는 가슴 중앙에 아크 원자로를 심은 영화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일 게다. 거리에 아이언맨이 나다니는 세상은 아직 아닌 이상 ‘탈인간시대’를 고민하는 것은 호들갑 아닐까? 저자가 말하는 사이보그의 범주는 생각보다 넓다. 책은 사이보그를 ‘자연적 요소와 인공적 요소를 하나의 시스템 안에 결합시킨 자가 조절 유기체’로 정의한다. 저자에 따르면 낙마사고를 당해 전동침대와 휠체어 등 기계장치의 도움을 받아 살았던 영화배우 크리스토퍼 리브(‘슈퍼맨’의 그 배우다)는 사이보그다. 심장 질환을 앓는 환자가 심장박동 조절장치를 이식받았다면 그도 사이보그다. 저자는 이 같은 정의를 바탕으로 사이보그가 가져올 수 있는 정치, 윤리, 문화적 문제를 고민한다. 미래 사이보그의 시민권 문제도 그중 하나다. 저자는 ‘튜링 테스트’(기계가 인간과 비슷한 수준으로 대화할 수 있느냐를 기준으로 지능을 가졌는지 판별하는 실험)를 거쳐 정치 공동체의 담론에 참여할 수 있다면 사이보그를 시민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너무 앞서 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시민권 문제도 그렇다. 훼손된 신체 기능을 보완한 정도의 인간이라면 시민권이 있는 게 당연하고, 자의식이 있고 시민권을 논의할 정도로 지능이 높은 기계 중심 사이보그라면 아직 영화 속의 일이다. 사이보그를 너무 폭넓게 정의한 것부터가 문제다. 저자의 논지대로라면 독감 백신을 맞아도 사이보그이고, 라식 수술을 받았어도 사이보그다. 책은 사이보그라는 명명에 너무 신경 쓰지 않고 읽을 때 오히려 재미있는 부분이 많다. 향정신성 약물의 증가, 인공 달팽이관이나 음경을 비롯한 각종 인공 장기 이식, 이종 장기 이식, 인공수정, 유전공학 치료 등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았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생물과 무생물, 사람과 기계의 경계가 점차 허물어지고 있다. 저자는 “우리 사회가 어떤 도구 기계 사이보그를 보유해야 하며, 어떤 것을 축출하고 또 만들지 않아야 할지 판단해야 한다”고 말한다. 책을 읽다 보면 저자의 캐릭터가 떠오를 때가 있다. 저자는 아마 다소 수다스럽고, 본인이 위트가 넘친다고 생각하는 사람일 것 같다. 저자는 ‘감사의 글’에 “모든 오류가 다 나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세가 나의 것이므로, 당연히 그 책임은 내가 질 것이다”라고 썼다. 책에 종종 등장하는 이런 말투가 영어로는 재미있을 수도 있겠다. 문장이 매끄럽게 읽히지 않는 것은 아쉽다. 번역 탓이라기보다 저자의 원래 글이 다소 산만한 편인 것 같다. 이 주제에 관심이 있지만 바쁜 이라면 책 앞부분 해제를 꼼꼼히 읽어봐도 좋을 것 같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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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술∼술 이책]당신이 남겨두고 간 소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에 점령당한 프랑스의 작은 마을. 호텔을 운영하던 소피 르페브르 부인은 독일 장교들의 저녁을 준비하는 일을 떠맡게 된다. 독일군과 싸우고 있는 남편의 소식은 거의 들리지 않는 상황에서 남편이 그려준 자신의 초상화에 새로 부임한 점령군 사령관이 매력을 느낀다. 마을 사람들을 위해 독일군 몰래 돼지 키우는 일을 사령관에게 들키지만 사령관은 왠지 이를 눈감아준다. 저자는 영화로도 제작된 소설 ‘미 비포 유’의 작가다. 로맨스에 추리적 요소가 섞였고, 긴장감 있는 장면 묘사와 군데군데 숨은 위트가 매력적이다. 1만5000원.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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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요판 커버스토리]“알파고, 나랑 붙자!”

    프로기사인 손근기 5단(29)은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결이 한창일 때 어머니에게서 깜짝 놀랄 만한 부탁을 받았다. 바둑을 가르쳐줄 수 없느냐는 얘기였다. “제가 바둑 배운 지 20년이 넘었고 입단한 지 13년이 됐는데 그동안 바둑 두는 아들에겐 정성을 쏟으셔도 바둑 자체에는 한 번도 관심을 보인 적이 없는 어머니가 처음으로 그런 말씀을 하는 걸 보고 놀랐습니다. 세돌이 형과 알파고 대결이 큰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인간과 인공지능의 대결 덕에 바야흐로 바둑 붐이 일고 있다. 바둑을 전혀 몰랐던 사람들은 바둑을 알고 싶어 하고, 바둑을 조금이라도 알던 사람들은 다시 바둑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번 대결 5국은 지상파 3사를 비롯해 방송사 10곳이 생중계를 했으며 승부의 고비였던 오후 4시 반경 한 포털사이트의 동시접속자 수는 45만 명을 넘었다. 이쯤 되면 올림픽이나 월드컵 못지않은 열기다. 바둑 책과 사이트, 학원 등 모든 분야에서 폭발적인 관심 증가가 피부로 느껴진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9∼16일 바둑 책 판매량은 전주보다 97% 상승했고 특히 이 9단의 자서전 ‘판을 엎어라’는 대결 초기엔 하루 200∼300권 나가다가 최근엔 1000권씩 팔리고 있다. ▼ “바둑의 매력 재발견!”… 학원 강습문의 10배로 늘어 ▼바둑 붐이 인 것은 70년 한국 현대바둑사에서 두 차례 있었다. 1980년 일본에서 조치훈 9단이 명인을 쟁취했을 때와 1989년 조훈현 9단이 녜웨이핑 9단을 3-2로 물리치고 응씨배에서 우승함과 동시에 이창호 9단이 혜성같이 등장했을 때였다. 조훈현 9단이 응씨배에서 우승한 뒤 귀국했을 때는 김포공항부터 한국기원(당시 서울 종로구 관철동)까지 카퍼레이드를 하기도 했다. 바둑계는 이번이 앞선 두 번보다 더 강한 ‘세 번째 바둑 열풍’이라고 반기고 있다. 이세돌 9단-알파고의 최종 대국이 끝난 다음 날인 16일 찾은 서울 성동구 왕십리로에 있는 ‘이세돌 바둑연구소’(연구소)는 바둑 열기로 뜨거웠다. “학원 강습 문의가 평소보다 10배는 많은 것 같아요.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연구소 김정열 대표(53)는 전화를 받느라 바빴다. 그는 이번 대국으로 바둑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게 피부로 느껴진다고 했다. 연구소에는 이 9단과 형 이상훈 9단이 이사로 있다. 형제는 바둑도장을 오래 꾸려온 김 대표와 함께 2014년 12월 문을 열었다. 연구소 원생은 50여 명으로 대부분 프로기사 지망생들이다. 이세돌 9단은 경기가 없을 때면 주 1∼3번 예고 없이 연구소에 온다. 연구소 사범인 류동완 3단(27)은 “이 9단이 바둑판 앞에 앉을 때면 원생 수십 명이 몰려들어 그를 둘러싸고 한마디 한마디를 경청한다”고 말했다. 형 이상훈 9단은 보통 오후 1시부터 연구소에 나와 끝날 때까지 원생들을 지도한다. 그는 “어린이들이 컴퓨터 게임에 빠졌다고 걱정하는 부모가 많은데, 바둑은 3개월만 배우면 게임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재미있어 한다”고 했다. 일반인에게 바둑을 가르치는 학원에 대한 관심도 크게 늘었다. ‘꽃보다 바둑’은 여성 프로기사인 이다혜 4단, 문도원 배윤진 김미리 3단, 김혜림 2단이 일반인을 대상으로 문을 연 바둑 학원이다. 이 4단은 “최근 전화와 블로그를 통해 바둑을 배우고 싶다는 문의가 10배쯤 늘었다고 보면 된다”며 “특히 젊은 여성의 문의가 많다”고 말했다. 바둑은 보통 남성들의 오락으로 알려졌지만 ‘꽃보다 바둑’이 최근 새로 만들 예정인 입문반엔 정원 12명 중 11명이 여성이다. 이 4단은 “지난해 드라마 ‘미생’과 올해 극중 바둑 천재 최택(박보검)이 나온 ‘응답하라 1988’을 통해 젊은 여성들의 바둑 관심도가 서서히 높아지고 있었는데 이번 대결로 폭발한 것 같다”며 “인터넷에서 ‘수읽기에 집중하는 이 9단의 표정이 섹시하다’ 등의 글을 많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바둑 사이트도 접속자가 폭주하고 있다. ‘사이버오로’의 경우 하루 평균 동시접속자 수가 대결 전보다 40% 가까이 늘었고 회원 가입도 3배 이상 늘었다. 타이젬의 경우도 동시접속자와 회원 가입이 큰 폭으로 늘었을 뿐 아니라 추가 서비스인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은별’의 이용자도 크게 늘었다. 이 같은 열풍에 한국 바둑의 핵심 축인 한국기원과 대한바둑협회는 고무된 상태다. 대한바둑협회 박장우 사무처장은 “유치원 바둑 강의 지원 사업, 초등학교 방과 후 교실의 바둑 수업 개설, 바둑 특성화고 추가 설립 등 지원책을 실행하고 있으며 바둑 인구 확충에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바둑 관계자들은 바둑 중흥을 위한 인프라가 현재 너무 부족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우선 이번 대결 이후 바둑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아졌지만 딱히 적절한 대답을 해주기가 쉽지 않을 정도다. 최근 일부 프로기사들이 세운 학원 외에는 성인이 바둑을 배울 곳이 마땅치 않다. 요즘 세대에 맞는 바둑용 교재나 전문적인 바둑 강사도 부족하다. 김만수 8단은 “바둑은 배우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어서 초반에 잘 이끌어주는 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며 “재미있는 동영상이나 게임 등을 통해 바둑에 흥미를 느끼도록 하는 교재, 강의 등을 시급히 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기원이 그동안 프로 기전과 아마 고수 대회 위주의 행정을 펼치다 보니 아마 바둑계 전반의 진흥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 바둑 인구는 계속 감소하는 추세다. 한때 1000만 명까지 헤아리던 바둑 인구는 현재 5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바둑계 내부에선 실제 바둑에 관심 있는 인구를 200만 명 정도로 본다. 특히 1997년 체스에서 딥블루가 세계 1인자 가리 카스파로프에게 이긴 뒤 잠시 체스 붐이 불었지만 이후 체스 인기가 크게 떨어진 점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수현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는 “한국기원이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각오로 바둑 붐을 타고 바둑 인구의 저변을 넓힐 수 있는 전략을 짜야 한다”며 “바둑에 대한 해외의 관심도 높아진 만큼 바둑을 한류 상품으로 키우는 것도 생각해볼 때”라고 말했다.서정보 suhchoi@donga.com·조종엽 기자}

    • 2016-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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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서까지 읽고 쓰고… “우리 고전 세계에 알리고 싶어요”

    한문 고전과 스무 살 꽃처녀. 통념으로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대학원생 등 전문 고전번역자가 되려는 30∼50대 학생이 대부분인 한국고전번역교육원에 지난달 김소은 씨(20)가 역대 최연소로 입학했다. 최근 서울 은평구 은평로 고전번역교육원에서 만난 그는 “한문은 압축적이어서 매력적”이라며 “더 빨리 많이 배워서 즐길 수 있는 수준에 이르고 싶다”고 말했다. 고려대 한문학과 2학년인 그는 흘려 쓴 글씨체인 초서(草書)를 어느 정도 읽고 쓰는 실력을 이미 지녔다. 묵향이 은은한 집에서 그는 성장했다. 김 씨의 부친은 2010년 제1회 원곡서예학술상을 받은 서예가 김병기 전북대 중문과 교수(61)다. 김 씨는 아버지가 한문 서예를 하느라고 바닥에 펼쳐 놓은 종이 위에서 공기놀이를 하며 자랐다. 김 교수는 통화에서 “썩 잘 쓴 작품이 망가져도 아이들이 한자와 고전에 관심을 갖도록 내버려뒀다”고 했다. 딸은 그런 아버지가 초서를 쓸 때 “붓이 휘청휘청하는 게 정말 멋있다”며 자연스레 심미안도 생겼다고 했다. 김 교수는 “학교 공부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사람이 되고, 스스로 하는 공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며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사자소학이나 명심보감만이라도 읽히고 고전의 맛을 느끼게 해 주면 아마 생활지도를 따로 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집안 분위기 때문인지 김 씨의 언니는 중국어 교사, 오빠는 동양 고미술품 경매 관련 일을 한다. 김 씨가 좋아하는 우리 고전은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다. 그는 “문장이 담담한데도 나라에 대한 진심 어린 걱정이 뭉클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김 씨가 고전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초등학교 4, 5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서 살면서 우리 문화를 중국의 아류라고 생각하는 중국 학생들을 보고 나서다. 김 씨는 “한문을 잘 읽어야 고전 속에서 우리만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아직 아는 게 부족하지만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이 담긴 고전을 번역해 중국과 세계에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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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문가 3人이 본 ‘알파고 이후’

    《 ‘인간보다 뛰어난 인공지능(AI)는 우리를 지배하게 될까. 아이들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지난 일주일간 구글의 AI인 알파고는 한국 사회에 이 같은 수많은 질문을 던졌다. 이른바 ‘알파고 쇼크’로부터 인간과 AI가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국내 석학들로부터 들어봤다. 》 ○ 정재승 KAIST 교수 “이세돌 1승은 인간지성의 위대함… 뇌과학이 AI연구 큰 흐름될 것”“알파고의 결과값대로 무표정하게 바둑돌을 놓는 아자 황의 모습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정재승 KAIST 바이오뇌공학과 교수(사진)는 15일 동아일보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인간의 뇌를 모방한 알파고가 인간과 맞대결을 펼치는 걸 넘어서 마치 인간을 조종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며 소회를 밝혔다. 정 교수는 “인간보다 뛰어난 기계의 등장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라며 운을 뗐다. 이미 자동차나 굴착기 등이 인간의 느린 속도나 부족한 힘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도구에 불과했고 인간이 통제권을 쥐고 있었다. “이번에 알파고는 통제권의 대부분을 쥐고 있었어요. 오히려 인간을 가르치는 듯한 장면도 연출됐죠. ‘실수’라고 했던 수들이 이후 묘수로 밝혀진 사례처럼 말입니다.” 정 교수는 인간의 뇌에서 실마리를 찾은 것이 알파고의 우승 비결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뇌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데미스 허사비스 구글 딥마인드 최고경영자(CEO)가 알파고에 인간의 직관과 추론 능력을 더했다. 이 시도는 21세기 AI 연구를 지배하는 흐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정 교수는 “이세돌 9단이 거둔 1승에서 AI의 미래를 발견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 9단은 불과 세 경기 만에 상대를 파악하고 허점을 간파했다. 인간 지성의 위대함이다”라고 말했다. ○ 배철현 서울대 교수 “인공지능이 일부 일자리 대체… 무한한 도전은 여전히 사람몫”“인간은 도구를 만들고 불을 사용하고 농업을 하고 문자를 사용하면서 오늘날까지 왔습니다. 이런 도전과 혁신이 인간을 오늘날의 인간으로 만들었습니다. 인공지능도 그러한 혁신의 계기가 될 겁니다.” 신과 인간의 존재를 성찰한 ‘신의 위대한 질문’ ‘인간의 위대한 질문’을 최근 낸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54·사진)는 15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인공지능이 수많은 전통적 일자리를 대체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인간의 노동과 직업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배 교수는 인간의 창의성을 강조했다. 그는 “불가능에 대한 도전과 창조가 인간을 인간이게 만든다. 이는 인공지능은 하지 못하는 일”이라며 “앞으로 인간은 창의적인 일에 집중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배 교수는 또 “이미 기계가 신체 기능 일부를 대체하는 등 기계와 공존하는 시대에 들어섰다”면서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은 한국 사회가 기존의 것을 잘 적용하는 데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길로 나아가는 일을 고민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다만 배 교수는 인공지능에 대한 최근의 공포는 다소 지나친 면이 있다고 했다. 그는 “알파고는 아직 경우의 수를 잘 따지는 성능 좋은 전자계산기일 뿐”이라고 말했다. ○ 송해덕 중앙대 교수 “현 교육체계로는 창의성 못키워… 교과 중심서 역량위주로 바꿔야”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결 이후 현재의 교육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송해덕 중앙대 교육학과 교수(47·사진)는 15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이 9단에게는 창의력, 융합능력, 실패에도 포기하지 않는 반성적 사고가 있었다”며 “현재의 교육 시스템에서는 학생들에게 이러한 역량을 길러줄 수 없다”고 진단했다. 송 교수는 교육과정을 교과 중심에서 역량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는 대안을 제시했다. 현 교육과정은 학생이 국어 영어 수학 등을 배우면 나중에 창의력, 협동심, 소통능력 같은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송 교수는 “‘어떤 역량을 키우기 위해 A과목의 무슨 영역을 배워야 한다’는 식으로 교육과정을 바꿔야 한다”며 “핀란드도 창의성, 비판적 사고, 협동심, 커뮤니케이션 능력 등 네 가지 역량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바꿨다”고 설명했다. 직업의 전문성 개념이 바뀔 것이라고도 전망했다. 송 교수는 “약사 자격증이 있다고 무조건 전문가라고 할 수 없는 시대가 올 것”이라며 “조제 능력 외에 환자와 교감할 줄 아는 능력도 키워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단순 반복 업무를 인공지능이 대체한다면 인간에게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 공감 능력 등 인성이 중요시될 것”이라고 강조했다.이재웅 동아사이언스 기자 ilju2@donga.com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최예나 기자 yena@donga.com}

    • 2016-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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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룸/조종엽]AI에게 외교를 묻는다면

    연재 중인 네이버 웹툰 ‘나이트런’은 인간들이 우주를 배경으로 괴수의 공격에 맞서는 얘기다. 괴수와 싸웠던 ‘기사단’ 체제가 혼란에 빠지자 ‘신(新)연맹’이 떠오르고, 두 세력은 세계대전을 벌인다. 그림체에 대한 호불호는 갈리겠지만 거대 서사와 공상과학(SF)물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자신 있게 권할 만한 작품이다. 흥미로운 것은 만화에 등장하는 어마어마한 능력을 갖춘 인공지능 무기 ‘스퀘어 오브젝트’다. 공리주의에 바탕을 두고 작동하는 이 인공지능은 최종 피해 규모 최소화를 목표로 민간인이 죽더라도 괴수를 향해 폭탄을 날리도록 설계됐다. 기상 예보, 행성 개조에 활용될 뿐 아니라 정책 제안 능력까지 가졌다. 만화 속 인공지능에 미국 중국의 지역 내 경쟁, 식민 지배를 제대로 반성하지 않고 재군비에 나서려는 일본 사이에서 우리가 취할 외교정책을 물어보면 뭐라고 답할까? 피도 눈물도 없는 이 인공지능이라면 아마 현실주의적 입장에 가까우리라. 최근 발간된 책 ‘외교 상상력’(김정섭 지음·MID)은 “일본의 정치군사적 역할 확대에는 긍정적 측면도 있다”고 말한다. 동북아 안보의 최대 불확실성은 존재감이 커진 중국이고, 일본의 역할 확대가 지역 내 힘의 균형을 맞출 수 있다는 얘기다. 책은 “다만 한일 안보 협력이 중국 대(對) 미일의 견제구도에 종속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중국 전국시대의 합종연횡책(合從連橫策)과 비교하면 이해가 쉽겠다. 대체로 진나라가 급부상한 상황에서 나머지 여섯 나라가 세로 방향으로 연합해 진나라에 맞서자는 게 합종책이고, 진나라와 가로 방향으로 힘을 합쳐 다른 나라를 공격하자는 게 연횡책이다. 합종책이 실패하자 나머지 국가들은 진나라에 의해 멸망당한다. 국제정치학의 동맹 이론도 연횡보다 합종 쪽으로 기운다. 강국이 등장하면 비교적 약한 주변국들이 뭉쳐 견제하며 ‘세력균형(밸런싱)’을 이루는 게 자연스럽다는 얘기다. 강국에 영합하는 ‘편승(밴드왜거닝)’ 전략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나중에 강국의 전횡에 대처할 수 없는 상황이 올 수 있는 탓이다. 지난해 말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를 인터뷰했을 때 그는 “동북아 평화를 위해 한일 간 안전 보장과 군사적 협력을 포함한 큰 평화 시스템의 구축을 생각해봐야 한다”고 했다. ‘아시아여성기금’ 이사로 일해 논란도 있는 인물이지만 평화주의자로 살아온 그의 입에서 일본의 군사적 역할을 강조하는 듯한 얘기가 나왔을 때는 좀 의아했다. 아마 이 같은 맥락에서 한 말일 것이다. 만화 ‘나이트런’의 주인공은 인공지능 무기를 두고 “저건 기계일 뿐 사용하는 것은 인간이야. 나아지기 위해 변해야 하는 것도 (인간이야)”라고 말한다. 만화 속 인공지능이 실재한다고 해도 일제의 포학을 겪은 한국인의 역사와 감정을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실리와 역사적 정의의 실현을 조화시키는 것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리라. 조종엽 문화부 기자 jjj@donga.com}

    • 2016-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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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술∼술 이책]삶의 끝에서

    “저는 지금 길을 떠나려 합니다. … 여러분이 지금 어디 사는지, 혹시 내게 하룻밤 소파를 내어줄 수 있는지 알려주세요.” 미국 마이애미에서 영어교사로 일하다 2006년 가을 뇌종양 선고를 받고 투병하던 저자는 2012년 이 같은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자신이 제자들을 잘 키워온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틀 만에 50개 도시에 사는 제자들이 답해 왔고 저자는 101일간 미국 전역에 흩어져 사는 75명의 옛 제자를 찾아가 만난다. “숨이 멎는 그날까지, 나는 사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저자의 마지막 모습은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도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웅변하는 듯하다. 1만3800원.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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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격동의 근현대사, 관류하는 6개의 키워드는?

    사과라는 이름이 없다 해도 사과라는 과일은 존재하지만 민주주의라는 개념 없이 민주주의 제도가 운영될 수 있을까? 비교적 안정적 질서를 구가하다가 19세기부터 모든 분야의 급변을 겪은 동아시아에서 각종 정치, 철학적 ‘개념’의 실체를 따지는 일은 중요하다. 책은 이용후생, 철학, 자강, 공화, 민주주의 등 6가지 개념이 우리 사회에서 어떤 맥락으로 사용돼 왔는지 추적한다. 역사학자 6명이 개념 하나씩을 맡아 썼다. ‘이용후생’ 하면 흔히 박지원 등 북학파 실학자를 떠올리지만 연원은 유교 경전인 서경(書經)이다. 신하 우(禹)가 순(舜)임금에게 “정치를 잘하고(선정·善政) 백성을 잘 기르면(양민·養民) 백성들의 도덕심이 높아지고(정덕·正德) 물화가 넉넉해지며(이용·利用) 삶이 윤택해진다(후생·厚生)”고 아뢴다. 서경에는 이용, 후생과 정덕이 같은 범주에 놓여 있다. 성리학은 정덕을 기본에 뒀지만 실학자들은 이용과 후생을 묶어 강조했다. 정조 때가 지나며 사용이 뜸했던 이용후생은 대내외 격변을 맞은 고종 때 다시 등장하고, 20세기 들어 ‘주체성 있는 근대’의 싹으로 다시 조명됐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 ‘민족적 근대’를 우리 역사에서 실증하려던 학자들의 활약에 힘입은 것. 저자는 “박지원이 살아 있다면 정덕 개념을 불러내 이용후생만을 강조하는 현대를 비판할 것 같다”고 말한다. 헌법 제1조 제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이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제정한 임시헌장 제1조를 계승한 것. 한일강제병합으로 대한제국이 사라진 지 불과 9년 지난 시점에 ‘대한제국 망명정부’가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생긴 것은 사실 놀라운 일이다. 3·1운동 당시 여러 전단에 등장하는 임시정부안도 모두 공화제를 전제로 했다. 학자들은 1907년 안창호 등이 결성한 신민회에서 그 뿌리를 찾는다. 독립협회까지만 해도 대체로 군주권 제한과 의회 설립을 골자로 하는 입헌군주제를 지향했다. 신민회는 공화제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국민국가’와 ‘국민주권’을 주장했다. 이후 1911년 중국에서 청 왕조를 무너뜨린 신해혁명, 1917년 해외 독립운동 세력의 ‘대동단결선언’ 등을 거치며 공화제가 대세가 된다. ‘아메리카’가 여타 개념에 병렬돼 한 장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저자는 미국이 ‘우리가 누구인지 말해주는 상상의 거울’이라고 말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너머 아스라이 존재하는 모호한 나라였던 미국이 광복을 맞은 뒤 조선의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 됐다는 것. 저자는 해방군 미군에 대한 환호, 군정의 실정에 대한 절망, 6·25전쟁의 혈맹, 공중 폭격으로 인한 공포, 물질문명에 대한 양면적 인식 등 미국이 한국인의 내면에 맺은 심상의 변화를 좇는다. ‘개념’이라는 말 때문에 얼핏 딱딱한 내용일 것 같지만 저자들이 대중 교양강좌를 바탕으로 쉽게 쓰겠다고 마음먹고 낸 책이어서 책장이 쉽게 넘어간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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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국 교수 “내 主관심은 형법 연구… 정치에 참여할 뿐 전업은 없다”

    《 평소 억울할 것 같아서 만나자고 했고, 만나 보니 억울해 보였다.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51) 얘기다. 2003년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학문으로 평가받고 싶다”고 했던 그는 여전히 적극적인 정치 참여와 외모로 더 회자된다. 4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연구실에서 그를 만났다. 》―어떻게 지내나. “법철학자 아이리스 영의 ‘정의와 차이의 정치학’을 번역 중이고, 책 ‘위법수집증거 배제법칙’의 개정판을 준비하고 있다.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로스쿨이 내 박사학위 논문을 출판하겠다고 해 보완 중이다. 박사과정 학생 13명을 지도하고 있다. 벌여 놓은 게 많다.” ―일과는…. “오전 9시부터 오후 8, 9시까지 강의가 없으면 연구실에서 논문과 책을 읽고 쓴다. 단순한 삶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하루에 얼마나 하나. “한 30분? 짬짬이 한다. 트위터는 1년에 반 정도는 쉰다. 요즘은 페이스북에 별생각 없이 쓴 글도 기사화되니 조심스럽다. 나도 공개 일기장 같은 공간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남 욕도 하고.” ―페이스북에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계도 민주주의’를 하고 있다고 썼다. “비상 상황에서 정당에 계몽 절대군주가 영입돼 비상한 정치효과를 내고 있다. 정상은 아니다.” ―본인 연구로 뭔가 달라졌나. “2005년 ‘위법수집…’ 내고, 2007년 위법수집 증거를 배제하는 대법원 판례가 나왔다. 2000년 ‘남편의 아내 강간이 성립한다’는 논문을 냈고, 2013년 이를 인정하는 대법원 판례가 나왔다. 내 연구 방법론은 헌법 정신, 사회과학, 국제인권법에 기반을 두고 형법을 재해석하는 것이다. 소수의견을 내고 5, 10년 뒤 법과 판례가 바뀌는 일이 적지 않았다.” ―아예 국회의원이 돼서 법을 바꾸는 게 빠르지 않나. “선출되는 사람은 유권자를 고려하기 때문에 자기 발언을 규제할 수밖에 없다. (선거에 나가면) 학문적 소신을 부분적으로 접어야 한다.” ―소신을 안 접으면 되지 않나. “맞는 말인데, 당선되면 달라진다. 정치의 주 관심은 내 형법 연구 같은 게 아니다. 나도 전업(정치)을 하게 되면 관심이 달라질 것이다. 형법 연구가 내 역할이다. 대학 연구실과 여의도는 협업이 필요하지만 분리될 필요도 있다. 정치는 중요하지만 다는 아니라는 게 소신이다.” ―지난해 쓴 책에서 “(선거에서) 후보로 거론될 때마다 전혀 준비가 돼 있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분명히 거절했다”고 했다. 준비되면 출마할 수 있다는 뜻인가. “2017년 대선에서 정권 교체를 위해 다시 정치에 개입할 것이다. 나는 정치 참여를 해 왔고, 앞으로도 할 거다. 그러나 전업(정치인)할 생각은 없다. 정치인은 조기축구회, 초중고 동창회 가고, 하루저녁에 약속 5, 6개 잡으면서 사람을 만나야 한다. 사람들과 벌거벗고 호흡하는 것을 좋아하고 잘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나중에 정치인의 능력이 생겼다고 생각하게 될 수도 있지 않나. “그럴 확률은 0.001%도 아니고 0%다.” ―출마는 영원히 안 한다는 얘긴가. “그리 생각해도 상관없다.” ―대중을 만나는 게 문제라면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하면 되지 않나. “비례대표도 출마다. 나는 그 위에 올라탈 생각이 없다.” ―폴리페서라는 지적은 어떻게 받아들이나. “교수의 정당 가입과 정치활동은 법으로 보장된다. 나는 당원도 아니고 휴직도 안 했다. 새정치민주연합 혁신위원은 방학 때 했다.” 조 교수가 참여적 지식인인지, 폴리페서인지는 보는 이에 따라 다르다. 다만 한 조사에서 2002∼2012년 그의 발표 논문 인용횟수는 법학분야 1위였다. 조 교수는 “바깥의 환호에 빨려들기보다 내면의 동력과 호기심에 충실해야 성공한다고 본다”고 했다.:: 조국 교수 약력 ::1986년 서울대 법대 졸업1993년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사건 관련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국제사면위원회 양심수 선정1997년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법학박사2001년 서울대 법대 교수2007년 국가인권위 비상임위원, 대법원 양형위원2012년 ‘정권교체와 새 정치를 위한 국민연대’ 상임대표2015년 새정치민주연합 혁신위원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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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야 사학자들은 사이비” 주류 소장학자들의 반격

    ‘식민사학’ ‘동북공정 추종’과 같은 재야 사학계의 비판에 거의 대응하지 않던 강단(주류) 사학계의 소장 학자들이 최근 계간지 ‘역사비평’(역사문제연구소)에서 일부 재야 사학자 등을 ‘사이비’로 명명하며 반격에 나서 파문이 예상된다. ‘역사비평’ 2016년 봄호에는 ‘한국 고대사와 사이비 역사학 비판’이라는 기획 발표문이 3편 실렸다. 발표문 ‘사이비 역사학과 역사 파시즘’(기경량 강원대 강사)은 “1970년대 초중반까지 ‘아마추어의 과잉 민족주의’로 이해됐던 사이비 역사학자들은 이후 학계에 대한 모함과 비난을 무차별적으로 쏟아냈다”며 “최소한의 학문성마저 상실했다”고 밝혔다. 이 발표문은 ‘상고사 연구 관련, 과거 국가의 국력과 영토에 이상(異常) 집착하는 비합리적 행위’를 사이비 역사학으로 정의했다. 사이비 역사학자로는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 등을 낸 재야 사학자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뿐 아니라 복기대 인하대 융합고고학 교수, 윤내현 단국대 명예교수 등 강단 내 비주류 사학자의 실명을 거론했다. 또 다른 발표문 ‘한사군 한반도설은 식민사학의 산물인가’(위가야 성균관대 박사 수료)는 재야 사학계가 식민사관이라고 비난하는 한사군 한반도설이 조선 전기 서책부터 유득공 정약용 등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연구까지 오랜 기간 타당성을 인정받은 것이라고 밝혔다. 또 ‘오늘날의 낙랑군 연구’(안정준 연세대 박사 수료)는 광복 이후 북한에서 발굴된 낙랑고분이 2600여 기에 이른다는 점 등을 들며 낙랑군이 중국 요서지역에 있었다는 재야 사학계의 주장을 비판했다. 민족주의를 표방한 재야 사학이 오히려 일제의 식민사학을 닮아 있다는 비판도 나왔다. 기 박사는 “한국 고대사가 전개된 공간을 대륙에서 찾으려는 이들의 노력은 ‘반도의 역사는 열등하다’는 식민사학의 그릇된 명제를 수용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복기대 교수는 7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학문 용어에서(학문에 대해) ‘사이비’라는 말이 쓰이는 것이 걱정되고 개탄스럽다”며 “발표문을 읽어 본 뒤 내 입장에 관한 논문을 낼 것인지, 학회에서 논의할 것인지, 언론 기고를 통해 의견을 제시할 것인지 정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이덕일 소장은 책 ‘우리 안의 식민사관’에서 김현구 고려대 명예교수의 저술을 식민사관이라고 평가했다가 최근 1심 법정에서 명예훼손으로 징역 6개월(집행유예 2년)의 유죄를 선고받았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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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이 책, 이 저자]“맹자는 ‘폭군 방벌’ 주장한 혁명가”

    이번에는 맹자다. 중년층에 논어 읽기 열풍을 일으켰던 책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을 2011년 내놨던 저자(51)가 맹자의 유적을 찾아 가는 여정과 맹자의 사상을 쉽게 소개한 글을 버무려 새 책을 냈다.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교수로 유학대학장을 맡고 있는 저자는 3일 전화 통화에서 “이번 책은 공자의 큰 그늘에 가린 맹자의 사상사적 의의를 대중적으로 알리려 했다”고 말했다. 신 교수에 따르면 맹자는 동아시아 사상사에서 ‘마음’을 철학의 주제로 설정한 최초의 인물이다. 신 교수는 “맹자 이전까지는 선악의 근본이 행동에 달려 있다고 봤지만 맹자는 마음에 있다고 봤다”며 “맹자에 따르면 개인적 도덕뿐 아니라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를 세우는 출발점도 우리들이 선한 마음의 씨앗을 큰 나무로 키워 내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공자에 이은 성인으로 추앙받는 맹자가 ‘과격하고 이단적’이라는 평가를 두고두고 받았다는 것은 의외다. 맹자의 사상이 신분제 사회에선 금기에 가까운 내용을 담았기 때문이다. 맹자 이전에는 왕권은 하늘이 점지해주는 것이었지만 맹자는 폭군을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쫓아내는 것이 정당하다고 봤다. 이에 따라 송나라 대 주희가 맹자를 높이 평가한 뒤인 명나라 대에 들어서도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고, 군주가 가장 가볍다(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는 구절을 비롯해 혁명을 옹호하는 내용을 담은 여러 구절이 삭제된 채 서적이 발간됐다고 한다. 신 교수는 “신분과 지위를 하늘이 내린 것이라고 인식했던 시대에서 이 같은 사고는 혁명적이었다”며 “맹자는 오늘날의 시민 불복종 운동처럼 부조리한 질서에 대한 저항의 사상적 근거를 마련했다”라고 말했다. 책은 신 교수가 중국 산둥(山東) 성 쩌우청(鄒城) 시의 맹자 유적지를 샅샅이 뒤지는 여정을 소개한다. 그는 “이번에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의 일화와 관련된 무덤, 시장, 서원을 비롯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맹자 관련 유적지를 하나하나 찾아갔다”며 “책을 통해 맹자가 자라며 생각하고 느낀 바를 독자들이 따라 느낄 수 있도록 이끌려 했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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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술∼술 이책]기억나지 않음, 형사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증세가 있는 홍콩의 형사 주선율은 어느 날 아침 주차장의 차 안에서 깨어난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지만 치정살인 사건을 수사하고 있었다는 기억이 난다. 경찰서에 출근한 그는 오늘이 자신이 생각한 2003년이 아니라 6년이 더 흐른 2009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일까. 저자는 지난해 말 한 국내 인터넷 서점의 ‘올해의 장르소설’ 투표에서 ‘마션’에 이어 2위에 올랐던 미스터리물 ‘13.67’의 작가다. 현재와 과거가 뒤섞인 작가 특유의 구성, 진범을 찾아냈다고 생각되는 순간에 또다시 일어나는 반전이 흥미롭다. 1만2800원.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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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병마와의 싸움서도 굳건한 우리 시대 ‘지성의 참모총장’

    《 혹자는 방을 밝히는 전구가 갑자기 나가는 것에 비유하고, 또 다른 이는 끝 모를 어둠을 헤매는 것과 같을 것이라고 상상하기도 한다. 철학자, 시인으로 100권이 넘는 저서를 내며 우리 시대 ‘지성의 참모총장’이 되려 했던 사상가 박이문 포스텍 명예교수(86)가 지난해 6월부터 노인요양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햇살이 좋았던 지난달 26일 그의 부인 유영숙 씨(73)와 경기 고양시의 요양원을 찾았다. 》“마침내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더니/막다른 골목/뒤돌아서니 별안간 아찔하게 깊은/낭떠러지 … 가도 가도 험악한 함정만 같은/빠져나오면 더 빠져들어가는/시궁창 같은/삶의 깨어나지 않는 악몽을 꾼다.”(박이문 ‘악몽’ 중) 가는 차 안에서 기자는 박 교수의 병세가 그의 시와 같지 않기를 바랐다. 황혼. 자신이 쌓은 거대한 지성의 성채 꼭대기에 첨탑을 또 세우려 들 수도, 성벽 위에서 느긋하게 저무는 해를 바라볼 수도 있는 시간이다. 요양원은 깨끗했다. 박 교수는 환자복 위에 조끼를 입고 있었다. 볼이 아주 홀쭉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오만한 느낌까지 줬던 과거 사진 속 위풍당당한 모습과는 달랐다. “동아일보 기자예요! 교수님 전집(미다스북스)이 이번에 10권으로 나와서 찾아뵀어요!” “아, 동아일보….” “여보, 생일 축하해요!” 부인과 기자는 함께 축하 노래를 불렀다. 박 교수는 “해피 벌쓰데이”라고 말했지만 초를 불지 않았다. 기자는 박 교수가 예전에 쓴 시를 소리내 읽었다. “4월, 아직 오후는 서늘하고/숲에도 초록빛이 들지 않았다/연못가에는 젊은이와 노인 몇이/낚싯대를 연못에 드리운 채/말없이 고요히 물결만 바라보고 있었다/얼마나 잡힐지 신경 쓰는 친구는 없어 보였다.”(‘월든 호수에서’ 중) “여보, ‘walden pond’ 기억나요? 좋아했었잖아요?” 박 교수는 1982년 망막박리라는 병으로 오른쪽 시력을 사실상 잃었다. 그해 유 씨와 결혼했고 이듬해 미국 하버드대 교육대학원 선임연구원이 됐다. “나도 보스턴은 처음이었거든요. 내가 자동차 조수석에 앉자마자 남편이 학교 약도를 저에게 준 뒤 ‘(길) 알지?’, 그러는 거예요. 원래도 현실적인 일상의 일은 잘하시는 편이 아니거든요.” 부부는 미국 하버드대 시절 자연의 일부가 되는 삶을 예찬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 호수’가 태어난 곳에 종종 함께 놀러갔다. 재작년 가을까지만 해도 박 교수의 병세는 지금처럼 나쁘지 않았다. 박 교수는 책을 읽고 글을 쓰기도 했다. 헌데 썼던 글을 또 쓰는 일이 많아지자 유 씨가 ‘이제 그만 쓰라’고 했다. “50년전 떠났던 고향/그때보다도 더 초라해 시골 마을/한적한 동네 한복판/궁전같이 크기만 했던 기와집은/아버지가 태어나고/그리고 또/우리 형제자매가 태어나서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랐던 곳.”(‘남이 살고 있는 고향집’ 중) 이 시를 읽자 박 교수의 눈이 촉촉해졌다. 하지만 자신의 시라는 것을 알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줌니, 떡 갖고 왔시유∼!” 이때 박 교수 집의 가사를 오래 도와준 아주머니가 옆에서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로 말했다. 박 교수의 얼굴이 밝아지며 “아산…”이라고 했다. 시 몇 수를 더 읽었다. 기자의 손을 잡고 있던 박 교수가 양손으로 자신의 전집을 펼쳤다. 손의 모양새에서 오랜 독서가의 ‘각’이 엄연했다. 당당한 왕년의 사진 속 표정이 되살아났지만 잠시였다. “예전에 남편한테 다시 태어나면 뭘 하겠느냐고 물은 적이 있어요.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공부를 다시 하겠다’고 하더군요. 대학 다닐 때가 전란 중이어서 엉터리로 지나갔다며. 그래도 운이 좋아서 행복하게 살았다고 했어요.”사실 부인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만큼 여러 병을 앓고 있다. 문병을 마친 뒤 귀가한 그는 자택에서 30분가량 침대에 누워 말하는 것도 힘겨워 보였다. “살면서 항상 겉과 속이 같은 분이었어요. 물론 현실적이지 않아서 남편한테 기대고 싶은데 그렇지 못할 때는 화가 난 적도 있었죠. 그래도 남편은 살면서 화를 한 번도 안 냈어요. 아기 같았어요.” 유 씨와 헤어진 뒤 요양원의 부부 모습이 떠올랐다. 한 시를 읽자 부인은 끝내 고개를 숙였다. “우리들의 육체는 먼지/우리들의 삶은 꿈/우리들의 사랑은 환상/우리들의 행복은 바람/그래서/우리들의 실체는 이 먼지뿐/우리들의 꽃은 사랑뿐/우리들의 영원은 이 바람뿐/우리들의 천당은 여기뿐/고통과 슬픔에 가득 찬/여기, 지금뿐/지금 느끼는/이 느낌뿐/쓰고 단.”(박이문 ‘우리들의 천당은’ 중)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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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의 눈/조종엽]인터넷 검색만 해봐도 알 일을…

    지금 광화문에 걸린 현판은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光化門(광화문)’이 쓰여 있다. 그러나 1865년 경복궁 중건 당시 광화문 현판은 그와 반대로 바탕이 검은색, 글씨는 흰색 등 밝은색이었다. 본보와 채널A가 단독 보도한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의 광화문 사진(1893년 이전 촬영)을 보면 분명히 드러난다. 광화문 현판은 적지 않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문화재청은 2005년 광화문을 원형 복원한다면서 당시 한글 현판을 뜬금없이 조선 정조의 글씨를 집자해 바꾸려다가 반발에 부닥쳤다. 결국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당시 현판 글씨체로 2010년 복원했다. 그러나 현판은 복원 석 달도 안돼 균열이 발견됐고, 이를 다시 제작하는 과정에서도 글씨와 규격을 둘러싼 논란이 지속됐다. 문화재청은 이처럼 현판과 관련해 여러 논쟁과 사건을 겪었는데도 기본적인 현판 색깔 고증에 실패했다. 본보 보도 뒤 문화재청은 “스미스소니언박물관 사진의 존재를 몰랐다”며 “자문위원들에게 조언을 구하겠다”고 했다. 문화재 복원은 정확한 고증이 ‘생명’이다. 기자는 검색을 통해 스미스소니언 자료와 동일한 사진이 2009년 한 중국 웹사이트에 올라온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중국어로 된 이 게시물 제목은 ‘100년 전의 조선 사진’. 문화재청이 2010년 광화문 복원 전 이른바 ‘구글링’만 했어도 현판 바탕색이 검은 광화문 사진을 찾는 것이 가능했다는 얘기다. 스미스소니언박물관 사진을 찾은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 대표는 2014년 책까지 내며 현판 문제를 지적했다. 하지만 문화재청은 같은 해 “다방면의 신중한 검토 결과 흰색 바탕의 검은색 글씨임을 재차 확인했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도쿄대 소장 사진을 분석해 내놓은 결론이지만 이번 사진 발견으로 섣불렀다는 게 드러났다. 문화재 복원 전통이 깊은 나라들에서는 무너진 건물 등 훼손 문화재 복원 시 고증과 실제 작업에 10년씩 투자하는 일이 드물지 않다. 반면 우리는 광화문 복원을 2006년 12월부터 2010년 8월까지 3년여 만에 해치웠다. 광화문 현판의 바탕색을 흰색으로 정한 것은 2010년 7월 1일 문화재위 소위원회지만, 당시 위원회 의결서를 보면 그렇게 정한 근거마저 안 나와 있다. 광화문은 서울의 얼굴이고, 현판은 그 눈동자라고 할 수 있다. 현판 색이 바뀌었다면 초상화에서 검은 눈동자를 하얀색으로 칠한 것이나 다름없다.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복원을 위한 작업에 나서야 할 때다.조종엽·문화부 jjj@donga.com}

    • 2016-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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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광화문 현판, 원래는 검은 바탕-흰 글씨였다”

    흰 바탕에 검은색 글씨로 2010년 최종 복원된 광화문 현판이 원래 검은색 바탕에 흰 글씨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진이 새로 발견됐다. 문화재청은 광화문 복원 당시 ‘바탕색과 글씨 색이 바뀌었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에도 현판을 지금처럼 복원해 ‘부실 고증’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본명 김영준) 대표는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국가 인류학 자료보관소’에서 1893년 9월 이전에 촬영된 광화문 사진을 최근 찾아 동아일보에 29일 공개했다. 사진은 박물관 홈페이지(collections.si.edu)에서 ‘korea palace gate’로 검색하면 찾아 볼 수 있다. 발견된 사진은 3장이며 이 중 동일한 2장의 사진에서 뚜렷하게 광화문 현판을 식별할 수 있다. 이 현판의 글씨는 1865년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당시 훈련대장 임태영이 썼다. 사진 속 광화문 현판의 바탕색은 검정에 가까운 어두운 색이다. 사진 오른쪽 아래 중절모를 쓴 서양인의 검은색 옷 색깔과 비슷하다. 바탕색보다 밝게 보이는 글씨(光化門)는 흰색 혹은 금색 등으로 추정된다. 한국사진학회장인 양종훈 상명대 영상학부 교수는 사진 속 현판이 현재의 현판처럼 흰 바탕에 검은 글씨는 절대 아니라고 밝혔다. 그는 “사진 속 건물 처마 밑 단청과 비교했을 때 현판 바탕색이 검정이라는 것은 명확하다”며 “누각 밑의 벽면이 흰색에 가까웠을 텐데, 사진 변색에 따른 벽면의 색 변화를 감안하면 현판 글씨도 흰색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광화문은 1927년 조선총독부가 해체해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졌다. 6·25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됐다가 1968년 철근콘크리트로 복원됐고 2010년 위치 등을 바로잡아 지금 상태로 재복원됐다. 문화재청은 2005년 현판 복원에 착수할 당시 1900년대 초 촬영한 유리원판 사진을 디지털 분석해 현판의 원래 한자 글씨체는 찾아냈지만 바탕색과 글씨 색은 정확하게 확인하지 못했다. 당시에도 대부분의 궁궐 문 현판이 검정 바탕에 흰 글씨를 썼고,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의 품격 등을 고려할 때 ‘검정 바탕에 희거나 금색 글씨’가 옳다는 문화재 전문가들의 지적이 이어졌다. 문화재청은 논란이 계속되자 2014년 6월 자료를 내고 “전통건축 사진 서예 등 전문가로 구성된 자문회의에서 국립중앙박물관과 일본 도쿄대 소장 유리원판 사진을 분석한 결과 바탕색보다 글씨 부분과 이음부가 더 검거나 어두워 흰색 바탕에 검은색 글씨임을 재차 확인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수년간 광화문 현판의 원래 모습이 담긴 사진을 추적해 온 혜문 대표는 “뚜렷한 사진이 발견된 이상 광화문 현판을 다시 제작해 걸어야 한다”며 “광복 70년이 넘은 지금에도 일제가 훼손한 광화문의 옛 모습을 되찾지 못한 현실이 답답할 뿐”이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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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오늘 3·1절… ‘1920년 경신참변’ 새로운 사진들 공개

    1920년 만주 간도대학살(경신참변) 때 자행된 일본군의 학살 실태를 보여주는 사진들이 대거 새로 공개됐다. 30여 년간 간도지역 사료 7000여 점을 수집한 김재홍 규암김약연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은 최근 함경북도 회령에 주둔했던 일본군 19사단 보병 75연대가 독립군과 양민을 학살한 장면 등이 담긴 사진 수십 장을 공개했다. 김 사무총장은 1899년 북간도에 명동촌을 세운 선구자 중 한 명인 규암 김약연(1868∼1942)의 증손자다. 이번에 공개된 사진들은 김 사무총장이 2006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살았던 맹우열 씨로부터 구한 사진첩에 담긴 것으로 김 사무총장이 수년 전 그 존재를 일부 세상에 알렸을 당시에도 공개되지 않았던 것들이다. 75연대는 1920년 봉오동 전투에 투입됐다 홍범도 장군 등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에 대패한 부대다. 75연대를 비롯한 일본군은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서 대패한 뒤 ‘독립군 토벌’을 빌미로 수개월에 걸쳐 간도의 조선인을 무차별 보복 학살한 경신참변을 일으켰다. 사진 속 일본군의 학살 광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다. 시신 옆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비무장의 두 양민, 손이 뒤로 묶인 채 일본군에게 참수를 당한 시신의 모습 등이 그대로 담겼다. 특히 땅바닥에 널브러진 주검들을 구경하는 일본 군인들 옆에 간도 주민들이 서 있는 사진도 있다. 이들은 일본군에 의해 학살 장면을 보도록 강제로 끌려나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독립군에 대패한 일본군, 무차별 보복학살 사진첩 만들어 제대군인에게 전리품으로▼사진첩에는 1920년, 1921년임을 알 수 있는 글이 포함돼 간도대학살 당시 사진임을 알 수 있다. 10여 구의 주검을 찍은 한 사진 아래에는 ‘하바롭스크 정거장 부근 적 사체(哈府停車場附近敵死體)’라는 설명이 달렸다. ‘시마코후카(현 헤이룽장 성과 지린 성에 걸친 일부 지역) 북방에서 우리(일본) 장갑차를 폭파한 빨치산의 운명’이라는 설명이 달린 주검 사진도 있다. 일본군은 이 사진첩을 만들어 제대 군인에게 전리품처럼 챙겨준 것으로 보인다. 사진첩에는 조선인 여성의 모습이 담긴 사진도 여러 장 있다. 한복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한문 서예를 하는 여성, 물동이를 인 여인, 댕기머리를 한 처녀의 사진, 조선 미인(鮮美人)이라는 글씨가 쓰인 사진도 있다. 사진첩이 전리품 성격임을 감안할 때 섬뜩한 느낌마저 준다. 김 사무총장은 이와 함께 만주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간도 명동촌, 룽징(龍井) 시의 1910, 20년대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도 다수 공개했다. 경신참변 시 일본군 방화로 불에 탔다가 재건된 명동학교, 조선은행 등 거리 풍경, 조선 독립운동가를 감시했던 일본총영사관 건물 등이다. 사진 외에 주요 사료도 여럿 공개됐다. 김약연이 당시 미주 대한인국민회 회장인 도산 안창호에게 하와이 군사학교의 훈련 매뉴얼과 교과서를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친필 서신, 명동학교에 많은 애국지사와 청년들이 몰려들어 공간이 부족해지자 증축을 위해 재정 지원을 요청하는 건축 의연금 위원 임명장 등이다. 김 사무총장은 그간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국가보훈처와 함께 북간도 독립운동에 관한 역사 자료집 간행 작업을 최근 시작했다. 그는 “우리 후손들도 민족의 정체성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독립운동의 피맺힌 역사를 객관적 자료에 근거해 계속 알려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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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 현판, 검정색 바탕에 흰 글씨” 증거 사진 발견…부실고증 논란

    흰 바탕에 검정색 글씨로 2010년 최종 복원된 광화문 현판이 원래 검정색 바탕에 흰 글씨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진이 새로 발견됐다. 문화재청은 광화문 복원 당시 ‘바탕색과 글씨 색이 바뀌었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에도 현판을 지금처럼 복원해 ‘부실 고증’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 대표(본명 김영준)는 미국 스미소니언박물관의 국가 인류학 자료보관소(National Anthropological Archives)에서 1893년 9월 이전에 촬영된 광화문 사진을 최근 찾아 동아일보에 29일 공개했다. 사진은 박물관 홈페이지(collections.si.edu)에서 ‘korea palace gate’로 검색하면 찾아 볼 수 있다. 발견된 사진은 3장이며 이중 동일한 2장의 사진에서 뚜렷하게 광화문 현판을 식별할 수 있다. 이 현판의 글씨는 1865년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당시 훈련대장 임태영이 썼다. 사진 속 광화문 현판의 바탕색은 검정에 가까운 어두운 색이다. 사진 오른쪽 아래 중절모를 쓴 서양인의 검정색 옷 색깔과 비슷하다. 바탕색보다 밝게 보이는 글씨(光化門)는 흰색 혹은 금색 등으로 추정된다. 한국사진학회장인 양종훈 상명대 영상학부 교수는 사진 속 현판이 현재의 현판처럼 흰 바탕에 검은 글씨는 절대 아니라고 밝혔다. 그는 “사진 속 건물 처마 밑 단청과 비교했을 때 현판 바탕색이 검정이라는 것은 명확하다”며 “누각 밑의 벽면이 흰색에 가까웠을 텐데, 사진 변색에 따른 벽면의 색 변화를 감안하면 현판 글씨도 흰색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광화문은 1927년 조선총독부가 해체해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졌다. 6·25 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됐다가 1968년 철근콘크리트로 복원됐고, 2010년 위치 등을 바로잡아 지금 상태로 재복원됐다. 문화재청은 2005년 현판 복원에 착수할 당시 1900년대 초 촬영한 유리원판 사진을 디지털 분석해 현판의 원래 한자 글씨체는 찾아냈지만 바탕과 글씨색은 정확하게 확인하지 못했다. 당시에도 대부분의 궁궐 문 현판이 검정 바탕에 흰 글씨를 썼고,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의 품격 등을 고려할 때 ‘검정 바탕에 희거나 금색 글씨’가 옳다는 문화재 전문가들의 지적이 이어졌다. 문화재청은 논란이 계속되자 2014년 6월 자료를 내고 “전통건축 사진 서예 등 전문가로 구성된 자문회의에서 국립중앙박물관과 일본 도쿄대 소장 유리원판 사진을 분석한 결과, 바탕색보다 글씨 부분과 이음부가 더 검거나 어두워 흰색 바탕에 검정색 글씨임을 재차 확인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수년 간 광화문 현판의 원래 모습이 담긴 사진을 추적해 온 혜문은 “뚜렷한 사진이 발견된 이상 광화문 현판을 다시 제작해 걸어야 한다”며 “광복 70년이 넘은 지금에도 일제가 훼손한 광화문의 옛 모습을 되찾지 못한 현실이 답답할 뿐”이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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