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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제재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돈줄이 말라버린 김정은이 북한 사정이 어려워진 원인을 간부들의 정신력 탓으로 돌리며 채찍질하자, 문화예술 관련 간부들도 고민이 깊었던 듯하다. 이럴 때는 모범적인 간부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를 만들어야 하지만 지금은 영화 한 편 찍을 능력도 없다. 그래서 찾은 답이 과거의 인기 영화를 재방영하는 것이다. 문제는 김정은이 수시로 사람들을 처형하다 보니 영화에서 지워야 할 얼굴이 적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마침내 답을 찾은 듯 보인다. 올해 초 방영된 6부작 예술영화 ‘대홍단 책임비서’를 보니 주연배우 얼굴이 컴퓨터그래픽으로 수정돼 다른 배우로 바뀌었다. 1997년에 제작된 이 영화는 대홍단군 당책임비서가 어려운 고난들을 연이어 극복하면서 충성한다는 내용이다. 이 영화에는 장성택의 조카사위인 공훈배우 최웅철이 출연했다. 장성택보다 먼저 처형된 최웅철은 1990년대 가장 유명한 배우였다. 1년에 영화 몇 편 만들지 못하던 시기에 최웅철은 무려 25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최웅철의 얼굴을 지우지 못하면 옛날 선전영화의 상당수를 사장시켜야 한다. 노동당 선전선동부에는 기록영화에서 얼굴을 지우는 작업을 하는 기술팀만 100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앞으로 영화까지 재작업하려면 훨씬 더 많은 인원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컴퓨터그래픽이라도 쓰니 다행이지, 과거엔 배우가 처형되면 영화를 아예 다시 찍었다. 대표적으로 1970년대를 대표하는 미녀배우였던 우인희가 1980년 김정일의 지시로 공개 처형된 이후 그가 출연한 ‘첫 무장대오에서 있은 이야기’ ‘적후의 진달래’ 등 많은 영화가 여주인공이 바뀌어 다시 촬영됐다. ‘반동’의 얼굴을 바꾸는 데 성공한 문화예술 담당 간부들은 지난주 ‘영화예술론’이라는 김정일의 노작(勞作) 발표 50주년 기념보고회를 크게 열었다. 김정일이 31세 때 썼다는 이 저서는 지금까지도 북한에서 인류 영화사의 한 획을 그은 독창적이고 천재적인 저서라고 추앙받고 있다. 영화예술론이 발표된 지 반세기가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북한의 영화는 이 책에서 지시한 대로 제작해야 한다. 참고로 김정일은 각종 노작이란 것을 수없이 남겼는데, 예술분야만 봐도 ‘연극예술에 대하여’ ‘무용예술론’ ‘음악예술론’ ‘건축예술론’ ‘미술론’ ‘주체문학론’ 등 참견하지 않은 곳이 없다. 영화예술론이 발표됐던 시기는 김정일이 ‘피바다’ ‘꽃파는 처녀’ 등 5대 혁명가극과 5대 혁명연극을 창작한다며 바빴던 때였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 가극들의 실제 창작 책임자는 친일인사로 알려진 조명암이었다. ‘낙화유수’ ‘꿈꾸는 백마강’ 등 광복 전에만 700여 곡의 가사를 쓴 조명암은 천재적인 작사가이자 극작가, 연출가였지만 1940년대 들어 ‘아들의 혈서’ ‘지원병의 어머니’ ‘결사대의 처’ 등 군국가요를 대거 창작했다. 지금까지 확인된 노골적인 군국가요 중 3분의 2가 조명암의 가사라고 하니 그는 진심으로 친일을 했던 듯싶다. 이랬던 조명암은 1948년 월북해 조령출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면서 북한에서 숱한 작품을 남겼다. 항일 빨치산이 나오는 북한의 대표적 혁명가극이나 영화들이 알고 보면 일본군을 칭송하던 친일인사 조명암이 제작한 것이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조명암은 공로를 인정받아 김일성 상과 각종 고위 관직을 받았고 1993년 사망한 이후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주체사상 관련 저서들을 사실상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써줬음을 감안할 때 김정일이 썼다는 영화나 연극, 무용 등의 저서도 누군가 대신 써줬을 것인데 조명암이 써줬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김정일은 영화예술론에서 주체니 혁명이니 온갖 미사여구를 늘어 놓았지만, 정작 본인은 전혀 그에 맞지 않게 살았던 위선자였다. 서울에서 성장한 성혜림과 일본에서 온 고용희에게 빠졌던 이유도 북한에서 사상 교육을 받고 성장한 여인들과는 대화가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김정일이 열심히 가르쳤다는 북한의 예술은 지금 영화도 제대로 못 만드는 처지에 빠졌고, 설사 만들어도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맛본 인민에게 재미가 없어 외면 받는다. 이런 처지에서도 반세기 전 발표된 케케묵은 책을 추앙하고 교본으로 삼으니, 마치 거세된 환관이 다산(多産)의 기쁨을 노래하는 광경을 보는 듯한 괴이한 기분이 든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김성렬 씨의 10대 시절은 배고픔과 탈북, 북송, 노동의 반복이었다. 20살 되던 2005년 한국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 그의 학력은 북한에서 중학교 1학년 중퇴로 검정고시 기준 초등학교 5학년 수준이었다. 한글도 새롭게 배워야 했고, 영어는 ABCD부터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랬던 그는 16년 뒤 미국에서 사회과학계열 박사 학위를 수여받은 최초의 탈북민이 됐다. 그가 박사 학위를 받은 시라큐스대 맥스웰스쿨은 행정학 및 공공정치학 분야에서 미국 랭킹 1위로 꼽힌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맥스웰스쿨 박사 출신이다. 소년공 출신에서 바이든 대통령의 동문 박사가 되기까지 북한과 중국, 한국, 미국에서 걸어온 김 씨의 삶은 인간 승리의 드라마였다.● 북한-소년 밀가루 장사 김 씨는 1985년 북한의 북방 도시 청진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이 일찍 이혼하는 바람에 상점판매원인 어머니와 2살 터울 누나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가 살던 동네는 청진에서도 가난한 지역으로 꼽히는 나남 구역이었다. 청진은 1990년대 초반부터 배급을 제대로 주지 않았다. 어린 시절은 배고픈 기억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그가 10살 되던 때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은 ‘고난의 행군’이 닥쳐왔다. 어머니는 식료품상점 판매원이었지만, 상점에는 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어머니는 집에 하나밖에 없던 재산인 TV를 팔고, 그 돈을 밑천 삼아 밀가루 장사를 시작했다. 청진의 유명 장마당인 수남장마당에 가서 화교나 외화벌이 업체가 중국에서 들여온 밀가루를 도매가격으로 넘겨받아 나남장마당에서 팔았다. 어린 성렬이도 어머니의 장사를 열심히 도왔다. 그렇게 살았지만, 하루 세끼 다 챙겨먹기는 너무 힘들었다. 풀을 넣고 끓이다가 국수를 넣은 뒤 푹 삶아 죽처럼 먹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때는 다들 그렇게 풀국수죽을 먹고 살았다. 하지만 밀가루 장사도 2년이 지나선 어렵게 됐다. 외화벌이 업체들이 직접 나남장마당까지 와서 밀가루를 팔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그와 누나를 앉혀놓고 중국으로 가자고 했다. 마침 어머니의 먼 친척들이 중국에 살고 있었다. 성렬이는 중국이 어딘지도 몰랐다. 다만 그곳에 가면 허기진 배를 채을 수 있다는 말만 기억에 남았다. 어린 그에겐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어머니는 장사를 하다 남은 돈 3000원을 들고 탈북 길에 올랐다. 당시 쌀 50㎏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그 돈에 가족 세 명의 운명을 맡겼다. 그렇게 이들은 1997년 3월 국경 옆 무산에 와서 경비대원에게 돈을 주고 강을 넘었다. 두만강은 3월이면 얼음이 둥둥 떠다녔다. 얼음장이 깨져 목까지 차는 물에서 허우적대던 일, 떠내려가는 아들과 딸을 꽉 부둥켜안은 어머니가 강물 속에서 사투를 벌이던 일, 강을 넘었을 때 어머니의 온 몸이 얼음장에 긁혀 피투성이가 됐던 일, 맞은 편 중국 땅에 도착했을 때 옷이 금방 얼어붙던 일. 그 모든 기억들을 그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중국-15세 소년공 성렬의 가족은 연길에 있는 친척집에 연락해 그곳에서 한 달 정도 머물렀다. 어린 성렬에게 중국에 대한 가장 강렬한 기억은 TV였다. 이렇게 많은 채널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신기했다. 물론 매일 배불리 먹을 수 있어 더 좋았다. 연길은 북중 국경 옆 도시인지라 검문검색이 심했다. 이들은 헤이룽장(黑龙江)성에 사는 다른 친척들을 찾아 떠났다. 친척들은 북한에서 건너온 성렬이 가족을 놓고 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두 가지를 도와주기로 결론을 냈다. 우선 이들에게 가짜 호적이라도 만들어주고, 두 번째는 성렬의 모친을 재혼시키기로 했다. 1998년 성렬은 한족 남성과 재혼한 엄마를 따라 내륙의 허베이(河北)성으로 이사 갔다. 가짜 호구가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한족학교에 들어가 1년 정도 다녔지만, 중국말을 전혀 할 줄 모르는 그가 또래들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학교에서 적응을 못한 그는 15살에 집을 나와 안테나를 만드는 어느 공장에 취직해 기숙사에서 살았다. 누나 역시 근처 공장에서 일을 했다. 그렇지만 소년공 생활도 오래가진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기숙사에 공안들이 찾아오더니 그를 잡아 공안국으로 끌고 갔다. 가보니 어머니와 누나도 이미 잡혀와 있었다. 알고 보니 엄마와 살던 한족이 그들이 탈북자라고 공안에 고발했던 것이다. 이들은 단둥을 거쳐 신의주로 북송됐다. 보위부에선 이들에게 한국행을 시도했는지, 교회에 갔는지, 탈북 동기는 무엇인지 집중적으로 캐물었다. 15세 미성년자인 성렬은 그리 심하게 조사를 받지는 않았다. 마침 2000년 6·15 정상회담을 앞둔 김정일이 “고난의 행군 시기 배고파서 도강한 사람은 용서해주라”는 지시도 내렸다. 성렬의 가족은 보위부에서 한 달, 강제노동을 하는 집결소에서 석 달을 고생하고 석방됐다. 3년 만에 원래 살던 집으로 가보니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갈 곳은 외삼촌 집밖에 없는데, 다 같이 먹고 살기 어려운 와중에 세 식구가 함께 얹혀살 수는 없었다. 성렬은 어머니에게 혼자라도 중국에 다시 가겠다고 말했다. 2년 뒤면 군대에 입대해야 하는데, 중국의 풍족한 삶을 경험한 그는 허약환자들이 속출하는 군에 끌려가긴 싫었다. 그는 집을 나와 신의주 집결소에서 알게 된 무산 형님을 찾아갔고, 그와 함께 2000년 8월 다시 탈북했다. 중국에 와서도 갑자기 갈 곳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일하던 안테나 공장에 다시 찾아갔다. 그 사장은 그가 탈북자인 것을 알고서도 기숙사에 머물게 했기 때문에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공장에서 두 달쯤 일을 했을 때 어머니와 누나도 그의 뒤를 따라 탈북해 연길에 왔다. 어머니는 이번에는 베이징의 어느 민박에서 식모 일자리를 얻었다. 누나도 텐진(天津)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성렬은 2001년 어머니가 알게 된 조선족 전도사가 텐진에서 운영하던 국수공장으로 옮겨갔다. 중국에 다시 나왔지만 온 가족은 함께 살 수가 없었다. 2001년부터 2005년까지 이들은 중국에서 전화로 그리움을 나누면서 각자의 삶을 살았다. 성렬은 국수공장에서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연락이 왔다. 민박집에서 한국으로 탈북자들을 보내주는 브로커를 만났다는 것이다. “한국에 가면 네가 공부를 할 수 있대.” 성렬의 심장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또래 애들이 학교를 다닐 때 그는 기숙사에 숨어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빴다. 북송되지 않은 것만도 너무 감사한 일이었다. 그런데 공부를 할 수 있다니. 그는 전도사를 찾아가 한국으로 갈 수 있게 브로커 비용 3000위안만 빌려달라고 사정했다. 그 돈을 가지고 한국으로 오는 일행과 함께 몽골 사막을 넘어 2004년 9월 마침내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아들이 무사히 한국에 가자 뒤따라 어머니와 누나도 몇 달씩 사이를 두고 한국에 왔다.● 한국-꿈을 향해 달리다성렬은 하나원을 거쳐 2005년 1월 말 마침내 대한민국 주민등록증을 받게 됐다. 그의 나이 20세. 아직은 어린 나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에겐 오직 하나의 목표밖에 없었다. “이제 발편잠을 잘 수 있는 곳에 왔으니 이제부터 오직 공부만 열심히 해보자.” 하지만 그는 북한에서 한국의 초등학교 4학년까지 과정에 불과한 인민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영어는 알파벳도 몰랐고, 한글과 수학은 다시 배워야 했다. 그렇지만 그는 너무나 간절히 대학에 가고 싶었다. 탈북청소년들을 위한 대안학교인 ‘천안하늘꿈학교’에 입학한 그는 초중고 검정고시를 시작했다. 쉽지는 않았지만 1년 남짓한 기간에 모두 통과해 2007년 한동대 국제어문학부에 입학했다. 하지만 대학 생활은 검정고시와는 또 달랐다. 아무리 열심히 검정고시 준비를 했다고 해도 대학에서 배우는 영어는 너무 어려웠다. 특히 한동대는 미국 교수가 직접 수업을 하고, 학생들은 영어로 대화하는 과목이 많았다. 교재도 영어 원서 그대로 사용했다.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아 1년 동안 최선을 다 해도 역부족이었다. 그는 1년 만에 휴학을 했다. 아무래도 공부는 아닌가 싶을 때도 많았고, 남들처럼 회사에 취직해 돈을 벌고 싶은 유혹도 늘 따라다녔다. 그때마다 그는 북한과 중국을 떠올렸다. “이 좋은 나라에 와서도 주저앉으면 나는 인생을 포기한 것이 된다. 공부에 맺혔던 한을 무조건 풀고야 말겠다.” 휴학 기간 그는 학원에서 열심히 영어를 배우고 복학했다. 그러나 여전히 따라가기 힘들었다. 그는 현지에 가서 영어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기독교 단체들의 도움으로 그는 1년 8개월 동안 미국에 갈 수 있었고, 영어에 자신감을 가지게 됐다.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면서 그는 7년 만인 2015년에야 대학 졸업장을 받았다. 1년 늦게 동생을 따라 한동대에 입학한 누나는 그보다 1년 빠른 2014년에 졸업했다. 누나는 대학 졸업 이후 캐나다로 유학을 가 현지에서 석사를 딴 뒤 지금은 영주권을 받아 캐나다 정부 공무원으로 취직해 살고 있다. 셩렬의 꿈은 대학 졸업장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목표를 박사 학위로 세웠다. 박사도 한국에서가 아니라 최강대국인 미국에 가서 받고 싶었다. 강대국의 시각으로 세계를 보고 싶었다. 처음으로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소도시에 공부하러 왔을 때 느낌도 좋았다. 나무로 둘러싸인 목재 주택에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평온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대학 졸업장을 받고 나서 유학길을 찾았지만 미국으로 가기는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여러 영어권 국가 대학에도 지원서를 냈는데 스코틀랜드의 한 대학이 그에게 석사 입학 허가를 내주었다. 이제부터는 유학비용을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열심히 노력하는 자에겐 우연히 기회도 찾아오는 법이다. 탈북대학생들을 지원하던 사단복지법인 ‘따뜻한동행’이 그에게 도움의 손을 내밀었던 것이다. 따뜻한동행 이사장을 겸하고 있는 한미글로벌 김종훈 회장은 늦깎이 공부를 시작해 열심히 노력하는 그를 지켜보다가 초기 유학에 드는 비용 일부를 지원해 주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유학은 결국 비자 문제가 잘 해결이 되지 않아 물거품이 됐다. 그는 김 회장에게 찾아가 유학비를 돌려줬다. 김 씨의 성실함과 정직에 감동한 김 회장은 나중에 미국에서 공부할 때 다시 지원해줬다. 유학길은 막혔지만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이번에는 국내 대학원에도 열심히 지원서를 넣었다. 마침내 2016년 연세대 대학원 통일학 협동과정에 입학 허가를 받았다. 대학원을 다니던 중 기회는 다시 찾아왔다. 외국인의 미국 대학원 유학을 지원하는 미국 정부 장학금인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이 2018년부터 탈북민도 대학원 장학 프로그램에 지원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성렬은 이 프로그램에 선정되는 것을 목표로 열심히 노력했고 마침내 풀브라이트 장학 프로그램이 1기로 선정한 탈북민 장학생 5명 중 한 명이 됐다. 드디어 꿈을 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공부도 신이 났다. 그는 보통 5학기 과정이 필요한 석사 학위를 4학기 만에 끝내고 2018년 1월 미국으로 떠났다. ● 미국-꿈을 이루다 미국에 도착한 성렬은 프로그램이 지원하는 6개월의 선행 어학연수 기간에 시라큐스대 맥스웰스쿨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평소 국제관계학을 공부하고 싶었던 성렬은 맥스웰스쿨이 관련 분야에서 미국 대학원 랭킹 1위를 달리고 있는 것을 알고 지원서를 넣었는데 합격이 된 것이다. 2018년 가을부터 그는 죽으라고 공부만 했다. 그 결과 2020년 5월 박사 과정 코스워크를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방학 때 한국에 잠깐 왔는데 미국에서 코로나가 대유행을 하는 바람에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 기간 그는 돈을 벌기 위해 고용노동부 소속 코로나 재난 지원금 지원팀에서 2개월 동안 방역 관련 알바도 했다. 이때 학교에서 종합시험과 논문 제안서를 내라는 연락이 왔다. 논문 예비 심사에는 3명의 교수가 필요했다. 그는 대학원 코스워크를 수강했던 교수들에게 열심히 이메일을 보냈다. 처음 이메일을 보낸 교수 10명은 모두 거절했다. 그가 논문 주제로 삼고 싶었던 북미관계는 자신들이 모르기 때문에 심사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다른 교수를 찾고 이메일과 전화로 설득했다. 마침내 한국의 동학운동을 연구했던 교수와 중국을 연구했던 교수가 그의 논문을 봐주겠다고 허락했다. 화상으로 오후 7시에 시작한 예비 논문 심사는 새벽 1시가 넘어 끝났다. 성렬은 이때가 살면서 몇 안 되는 피 말리는 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교수들은 마침내 조건부로 논문 허가를 내주었다. 2020년 11월부터 성렬은 논문을 쓰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와 다시 도서관에 들어박혀 논문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이듬해 5월 논문 초고를 완성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중간 점검에서 다시 지적을 엄청 받고 대폭 수정을 해야 했다. 학위에 대한 미국의 심사는 정말 까다로웠고, 대충 넘어가는 법이 절대 없었다. 그는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며 논문을 완성시켜 나갔다. 10월에 드디어 최종심사 회의가 열렸다. 그 회의도 5명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와 화상으로 4시간 가까이 진행했다. 교수들은 “한국과 미국의 시각에 많이 편중된 것 같으니 중국과 일본 시각도 넣으라, 중국어와 일본어 논문도 찾아서 넣으라”는 등 주문을 다시 내렸다. 다시 수정을 거듭한 끝에 그는 마침내 ‘동아시아 국제정치변화가 북한의 대미정책에 미친 요인’이라는 제목의 박사 논문을 완성했다. 2021년 12월 22일은 그에게 절대 잊지 못할 날이었다. 맥스웰스쿨에서 박사 학위 증서를 받았던 것이다. 2005년 20살에 한국에 도착해 16년의 노력 끝에 마침내 미국 박사 학위까지 수여받게 된 것이다. 영어 철자부터 배우며 시작해 마침내 36세에 박사 학위를 받기까지 지나간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머리 속에 흐르며 눈물이 절로 났다. 그는 풀브라이트 장학 프로그램이 배출한 탈북민 1호 박사가 됐다. 동시에 사회과학 분야에서 미국 박사 학위를 받은 1호 탈북민이기도 하다. 미국 대학에서 탈북민이 최초로 박사 학위를 받은 것은 2016년 미국 남부 텍사스 A&M 대학원에서 핵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조셉 한 씨가 있다.● 성렬의 꿈 성렬은 태어나서 북한에서 12년, 중국에서 7년, 한국에서 14년, 미국에서 4년을 살았다. 북한은 태어난 고향이고 언젠가 돌아가야 할 땅이지만, 고통의 추억이 너무 컸던 곳이었다. 중국은 처음에는 신기했지만, 그곳에서 공안의 단속을 피해 다니며 소년공으로 사는 동안 나라 없는 설움을 뼈저리게 느꼈다. 성렬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인천공항에 내려 차를 타고 오며 도로가 너무 밝은 것에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한국 생활은 밝지만 않았다. 그는 정착 성공 여부를 대학을 포기하느냐 마냐에 두고 오로지 공부에만 매달렸다. 지금 돌아보면 그는 정착에 성공한 셈이다. 미국은 처음 갔을 때는 너무나 평온한 느낌을 받았지만, 살다보니 그 땅도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특히 아카데미 영역에선 사소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성렬은 인생에서 가장 기억이 남는 순간으로 풀브라이트 장학생에 선정돼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날아가던 때를 꼽았다. 두 번째 기억이 남는 순간은 지난해 학술지에 자신의 영문 논문이 실렸을 때였다. 최근에도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는 등 연구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얼음장을 헤치며 탈북하던 때나 북송돼 감옥에 있을 때를 떠올릴 법도 하지만, 그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였고, 그런 태도가 지금까지 그를 달려오게 만드는 원동력이 될 수 있었다. 36세에 박사 학위를 받았으면 그리 늦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는 지금이 인생 1막을 마치고 2막을 시작하는 때라고 생각한다. “학위를 받고 계속해서 연구직, 또는 대학교 강사 등의 일자리를 찾고 있습니다. 제가 잘 할 수 있는 분야에 들어가 남북한과 국제관계 관련해 계속해서 연구를 열심히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녹록치 않다. 특히 최근 남북한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지면서 이 분야를 연구하면서 살 수 있는 자리는 급격히 사라졌다. 그래서 성렬은 박사 학위를 받고 1년 반이 지난 지금도 연구 용역과 학술지 논문을 쓰며 취직 준비를 하고 있다. 최종 목표는 연구기관 연구원 또는 대학교 교수를 꿈꾸고 있지만 현실은 쉽지 않다. 그래도 그는 비관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어려운 삶을 잘 살아왔기에 앞으로 어떤 상황이 닥쳐도 잘 헤쳐갈 수 있다는 신심에 가득 차 있다. 내가 포기하지 않는 한 길은 닫혀 있지 않다는 것을 그는 지금까지 증명했다. 그는 이미 삶의 종착지도 멀리 내다보고 있다. “저는 통일이 되면 고향 청진에 돌아가 대학교를 설립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았습니다. 북한에는 인재들이 많아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습니다. 교육의 빈부격차가 심한 북한에서 저는 누구보다 공부에 한이 맺혔던 사람입니다. 결국 인재 양성이 나중에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믿고 나중에 북한에서 많은 인재들을 양성할 수 있는 대학교를 설립할 것입니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통일부가 작성한 ‘2023 북한인권보고서’가 지난달 31일 공개됐다. 이번 보고서는 지난 정부가 숨겨왔던 북한 인권 문제를 다시 정부 차원에서 공론화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하지만 솔직히 이것만 빼고는 칭찬할 게 별로 없다. 통일부에 북한인권기록센터가 생긴 지 벌써 7년째다. 기존에 북한 인권 실태를 조사하던 민간단체들의 하나원 접근 권한까지 박탈하면서 그동안 독점적으로 조사한 것이 고작 이게 다인지 의아할 따름이다. 아무런 통계도, 실명도 없는 단순 나열식의 보고서를 읽어보면서 수십 명의 공무원과 최소 수십억 원 이상의 예산을 쓰며 존재한 북한인권기록센터가 그동안 도대체 무엇을 한 것인지 의문만 든다. 다 읽은 소감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원에서 설문조사할 권한만 부여받는다면 나 혼자서도 매년 이것보단 몇 배로 더 잘 쓸 수 있다”였다. 통일부가 북한 인권 문제를 직접 조사하겠다며 팔을 걷어붙이기 전 이미 국내에선 여러 버전의 북한인권백서가 발간되고 있었다. 통일교육원, 북한인권정보센터(NKDB), 대한변호사협회 등이 백서를 매년 발간했다. 북한 인권 상황을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들에겐 통일부의 북한인권백서는 추천하지 않는다. 이번 보고서는 통일교육원 버전을 그대로 베낀 것이란 의심도 든다. 정부는 “그래도 숨겨 오던 기록을 공개한 것이 어디냐”고 변명을 하겠지만 이런 식으로 만들려면 앞으로 정부는 손을 떼고 민간단체에 맡기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통일부의 북한인권보고서는 내용의 부실함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이걸 왜 만드는지에 대한 목적 의식이 엿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북한인권보고서 발행의 목표는 북한 주민의 인권을 개선하기 위한 데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북한의 참혹한 인권 상황을 널리 알리는 것과 동시에 인권 범죄의 가해자들을 위축시켜야 한다. 그런데 통계가 전혀 없고, 증언의 구체성과 정황이 사라진 이런 보고서는 국제사회에 내놓기에도 창피한 수준이다. 단순하게 누가 죽었다더라가 아니라 “누가 무엇 때문에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어떻게” 죽었는지 자세하게 적시해야 한다. 물론 증언자의 신상 노출 우려 때문에 모든 것을 공개할 순 없겠지만 가능한 한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름을 적시하는 노력은 해야 한다. 그래야 보고서가 힘을 갖게 된다. 비유한다면 “고문기술자 이근안은 납북자 김성학을 간첩으로 만들기 위해 몽둥이 구타와 물고문은 물론이고 전기고문을 가해 척추 디스크가 녹아내렸다”고 써야 증언이 힘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보고서는 “납북자를 간첩으로 만들려고 전기 고문을 했다는 증언이 있다”는 식으로 적는 데 그쳤다. 북한에는 수많은 이근안이 존재한다. 중국과 북한에서 참혹한 인권 유린 감옥을 6개나 경험하며 고문을 받았던 필자가 그 산증인이다. 난 지금도 감옥에서 심심하다는 이유로 수시로 구금자들을 불러내 구타와 성희롱을 일삼던 자들, 새로 끌려온 여성을 끌고 나가 잔혹하게 짓밟고 성폭행을 일삼던 자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20, 30대 중반이던 그자들은 어쩌면 지금도 현직에서 저승사자로 군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무엇이 두려워 희생자와 가해자의 실명을 숨겨줘야 하는가. 북한은 소문이 빠른 사회다.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가해자들에게 누군가 “당신의 악행이 남조선 보고서에 올라 있고, 당신에게 당한 사람들이 자손대대로 꼭 복수하겠다고 벼르고 있다”고 전해준다면 그들은 어떤 충격을 받을 것인가. 우리가 북한의 참혹한 인권 현장을 손바닥처럼 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걸 좌시하지 않고 꼭 책임을 묻기 위해 낱낱이 기록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북한 인권을 기록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나중에 김정은 체제가 붕괴된 뒤 북한인권보고서는 과거사 청산을 위한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하지만 구체성이 결여되고 시늉 내기에 그친 지금의 통일부 보고서에 기초한다면 그때 가서 재조사가 불가피할 것이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라면 피해자와 가해자를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번에 공개된 통일부의 북한인권보고서는 북한의 참혹한 인권 실상에 분노할 줄 모르고 공감하지 못하는 복지부동, 무사안일주의의 공무원들에게 막중한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북한 인권 기록 작업을 지금처럼 계속 맡겨야 하는지 의문만 들게 할 뿐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한국무역보험공사(K-SURE)가 지구촌 기후위기에 대응하고 범정부 차원의 온실가스 국제 감축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공적수출신용기관 최초로 탄소배출권 투자보험을 출시한다. 다음 달 출시될 이 상품은 국제 감축 사업으로부터 발생하는 정책 변경, 협약 불이행 등의 비상 위험을 보장해 참여 기업이 감축 사업을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설계된 국제 감축 사업 전용 보험 상품이다. 2015년 체결된 ‘파리기후협약’은 기존 선진국에만 부과했던 온실가스 감축 의무를 개발도상국으로까지 확대했다. 협약 체결 이후 개발도상국이 탄소 감축 사업을 통해 획득한 탄소배출권을 우리 기업에 분배하겠다고 약속한 뒤 이를 지키지 않을 위험도 커졌다. K-SURE가 출시한 탄소배출권 투자보험은 이런 위험으로부터 기업들을 보호해 정부의 친환경 정책에 큰 기여를 할 것으로 예상된다. K-SURE는 정부가 추진하는 ‘2050년 탄소 중립 달성’ 목표를 지원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빠르게 전개하고 있다. 정부가 추진 중인 2030년 국가온실가스 감축목표(NDC)에는 국외 탄소 감축목표가 3350만 t으로 정해져 우리 기업의 해외 탄소배출권 투자가 필수적이다. K-SURE가 공적수출신용기관 중 유일하게 전용 보험 상품을 내놓으면서 만에 하나 발생할 수 있는 위험에서 기업들을 든든하게 지원할 수 있게 됐다. K-SURE는 또 지난해 국제 감축 사업 지원 시 사업성 검토 기준을 완화하거나 보험료 할인 혜택 제공 등의 내용을 담은 ‘특별 지원지침’을 수립해 감축 사업 지원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이와 함께 88개국 약 2300개 기관이 가입돼 있는 ‘기후변화 관련 재무정보 공개 협의체(TCFD)’에도 참여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환경회의’를 개최하는 등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국제사회 간 공조에도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해 1월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첫날 파리기후협약 재가입을 공식화하고 기후특사를 임명한 이후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국제사회 움직임은 크게 활발해졌다. 유럽연합(EU)도 14일 녹색산업 기업이 유럽에 투자하면 각종 혜택을 주는 ‘탄소중립산업법’과 ‘핵심원자재법’ 초안을 공개하며 글로벌 탄소 감축 움직임에 박차를 가했다. 이인호 K-SURE 사장은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지구촌의 연대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자 공적수출신용기관의 시대적 사명이다”라며 “앞으로도 대내외 공조와 정책 지원을 통해 우리 기업이 친환경 신산업 시장을 슬기롭게 개척해 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지난달 말 통일부에 북한에서 보냈다는 서신이 왔다고 한다. 내용은 남북 이산가족 상봉 협의에 나올 테니 중국 다롄(大連)항을 통해 우선 쌀 2만 t을 보내달라는 것. 북한이 보낸 것이 맞다면 남북 관계가 급진전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통일부는 서신의 진위가 의심된다고 판단해 이를 무시했다고 한다. 전문성을 가진 통일부가 그렇게 판단했을 때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서신을 장난이라고 판단하기엔 북한의 식량 사정이 심각한 것도 사실이다. “북한에서 아사자가 속출하고 있다”는 것은 대통령실과 통일부가 직접 지난달에 밝힌 내용이기도 하다. 물론 아사자 통계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다. 1990년대 중반의 ‘고난의 행군’ 때에도 북한에선 굶어 죽은 사람들이 앓아 죽은 사람들로 보고가 됐다. 자기 관할 지역에서 아사자가 발생하면 책임 추궁을 면하기 어렵기 때문에 하급 간부들부터 아사자 발생을 인정하지 않는다. 지금도 김정은이 화를 내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우니 같은 일이 반복될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요즘은 북한에서 코로나까지 돌기 때문에 아파서 죽었다고 핑계를 대기도 더 좋다. 그러니 아사자가 얼마나 발생했는지는 김정은도 정확히 모를 가능성이 높다. 북한 내부 소식통들을 통해 전해지는 소식들은 암담하기만 하다. 시장에 식량이 없어 돈이 있어도 구하기 힘들다는 것. 시장에 쌀이 없다면 아사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북한이 김정은의 참석하에 지난달 26일부터 나흘이나 식량 생산을 주제로 노동당 중앙위 전원회의 확대회의를 연 것도 내부 식량 사정이 심상치 않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그렇다면 북한은 왜 다시 아사 위기로 몰렸을까.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까닭이다. 코로나로 국경을 3년 넘게 봉쇄하다 보니 식량이나 비료가 제대로 들어가지 못한 것도 한 원인이다. 또 지난해 봄에 곡창지대가 심각한 가뭄 피해를 본 데다 장마철에 집중호우로 많은 논밭이 유실됐다. 그러나 북한 소식통들에 따르면 제일 큰 원인은 밀 농사를 망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정은은 2021년 9월 ‘옥수수에서 밀과 보리 농사 중심으로의 방향 전환’을 새로운 농업 정책으로 제시했다. 이후 지난해 전국 곳곳에서 벼나 옥수수를 심던 논밭에 밀을 심기 시작했다. 어떤 곳에선 개인들의 텃밭에도 밀을 심으라고 강제했다는 말도 있다. 그래서 작년 전체적으로 밀과 보리 재배지가 30% 정도 늘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난해 밀 농사를 시작했던 거의 모든 농장이 계획을 수행하지 못했다고 한다. 밀을 심지 않았으면 벼나 옥수수를 심어 수확을 했을 텐데, 대신 심은 밀 농사가 망한 만큼 북한 전체의 식량 생산이 줄어든 결과로 나타난다. 밀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은 비료가 없고, 기상 조건도 좋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원인은 북한 농토가 너무 산성화돼서 밀 재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밀은 산성화된 토지에 취약하다. 식량난이 현실로 다가오자 북한은 6월까지 중국을 통해 60만 t의 식량을 수입한다는 계획을 세웠고 지금까지 약 10만 t이 선박과 열차로 북한에 들어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4월까지는 식량 위기가 존재하지만 60만 t이 다 들어가면 아사자 발생은 제한적일 수도 있다. 그런데 올해는 그렇다 쳐도 내년이라고 농사가 잘된다는 보장은 없다. 앞으로 밥 대신에 빵을 먹이겠다는 김정은의 구상이 옳은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농업의 방향을 확 바꾸는 일은 충분한 검토와 시험 단계를 거치며 점차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맞다. 그런데 북한은 그럴 수가 없는 구조다. 김정은이 지시하면 온 나라가 무조건 따라야 한다. 지난해 흉작에도 불구하고 올해 북한의 밀 재배지는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농민들이 밀 농사가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해도 불만을 말하면 반동으로 몰린다. 실제로 북한은 밀 농사 확대에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는 자는 반당·반혁명 분자로 처벌하겠다는 공문도 하달했다고 한다. 김정은이 집권한 지 벌써 12년이 지났다. 그런데 김정은이 농가를 방문한 것을 본 적이 없다. 심지어 농촌을 시찰한 것도 몇 년 전인지 가물가물하다. 이런 김정은이 농업의 총사령관이 돼서 “이거 심으라, 저거 심으라”라고 지시하고, 농민들은 불만도 말하지 못한다면 그런 북한 농업엔 미래가 있을 수가 없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이달 8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열병식에서 군인들은 주석단에 오른 김주애를 향해 ‘백두혈통 결사보위’라는 구호를 열심히 외쳤다. 열병식에서 백두혈통을 결사보위하겠다는 구호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세습 체제의 노예로 전락한 청년들이 10세 어린애를 향해 충성을 맹세하는 씁쓸한 장면을 보면서 북한 땅을 인질처럼 타고 앉아 4대째 향락을 누리고 있는 지긋지긋한 ‘백두혈통’에 저주를 보내지 않을 수가 없다. 만민 평등의 사회주의를 만든다는 사기에 속아 반세기 넘게 살았더니 혈통을 결사보위하라는 노골적인 협박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백두혈통이란 것은 알고 보면 순전히 운발로 만들어진 것이다. 중국 연변에 김일성의 부대였던 항일연군 2군 6사 출신의 여영준이라는 사람이 1990년대 초반까지 살았다. 광복 후 북에 나가지 않고 고향인 연변에 남았던 항일연군 출신 중의 한 명이다. 그는 생전에 회고록도 남겼는데, 자신을 찾아온 작가에게 이런 말을 했다. “한번은 김일성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던 적이 있다. ‘김 정위(정치위원의 줄임말), 우리가 이렇게 먹을 것도 못 먹고 입을 것도 못 입으면서 일제와 싸우느라 고생하고 있는데, 언젠가 왜놈을 다 몰아내고 해방이 되면 공산당에서 우리한테 무엇을 시킬까요?’ 그랬더니 김일성이 이렇게 대답하더라. ‘나는 안도(중국 연변 백두산 인근의 현) 사람이고 안도에서 많이 활동해 왔는데 최소한 안도현장쯤이야 시켜주겠지.’ 그래서 우리 몇은 김일성의 주변에 모여 앉아 ‘너는 김 정위 밑에서 안도현의 공안국장을 하고, 나는 안도현의 위수사령관을 하마’ 하고 말장난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까지 김일성도 북조선에 돌아가 이렇게 한 나라를 세울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광복 후 안도현장이 되는 게 꿈이었던 김일성은 상관들이 전사하거나 투항하는 바람에, 또 싸우라는 지휘부의 명령을 묵살하고 맨 먼저 소련으로 도망간 덕분에 끝까지 살아남아 북한을 타고 앉았다. 광복 후 78년 동안 북한은 왕이 된 김일성과 그의 부하들, 그들의 자손들을 위한 나라였다. 운 없이 그 땅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출신성분이라는 55개의 씨실과 사회성분이라는 4개의 날실로 구성된 계급 사회에서 꼼짝달싹 못 하고 살아야 했다. ‘혁명가 가족’으로 태어나면 바보라도 간부가 됐지만 ‘지주, 자본가, 종파, 종교인’ 등의 출신성분으로 태어나면 아무리 똑똑해도 힘든 육체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농민이라는 사회성분이면 평생 농촌을 벗어날 수 없었다. 백두혈통 결사보위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운명이 성분이라는 바둑판 위에서 결정되는 이런 사회를 대대손손 목숨을 걸고 지키라는 뜻이다. 지키라는 것이 어디 백두혈통뿐인가. 김정은은 집권 이후 백두의 혁명정신을 따라 배우라며 겨울마다 사람들을 백두산에 내몰았다. 백두의 혁명정신을 내세워 수혜 본 자들은 뜨뜻한 곳에 앉아 채찍질을 하고, 노예가 된 자들이 칼바람 속에서 백두산에 오르고 또 올랐다. 영하 40도의 기록적 한파가 찾아온 지난달에도 수천 명이 깃발을 들고 무거운 배낭을 메고 며칠 동안 백두산에 오르다가 동상을 입었다. 어린애를 새 주인으로 내세운 지금 북한 사람들은 백두 혁명정신의 본질을 깨달아야 한다. 백두의 혁명정신은 노예의 정신이 아니다. 그 본질은 ‘혈통 뒤집기’ 정신이다. 백두혈통이란 것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묘지기 혈통이 나온다. 묘지기의 증손자 김일성과, 비슷한 처지의 까막눈 소작농들은 총을 잡고 타고난 팔자를 바꾸었다. 그들은 권력을 잡은 뒤 자신들이 섬기던 부자들을 죽이고, 그 자손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그리고 자기들이 부자가 돼서 80년 가까이 대대손손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 북한 사람들은 백두산에서 그런 정신을 배워 가야 한다. 콘크리트처럼 굳은 신분 세습, 계급 사회를 목숨 걸고 뒤집어 버리고 운명을 바꾸는 것이 바로 혁명이고, 백두의 혁명정신이다. 백두혈통에게 반항하면 일족을 멸족시키는 연좌제 속에서 무장투쟁이 엄두가 나지 않는다면, 탈북하는 것도 백두의 혁명정신이다. 목숨 걸고 남쪽에 온 보상으로 본인뿐만 아니라 자손들까지 노예의 굴레를 벗고 행복하게 살게 할 수 있다. 혈통이란 것을 섬기지 않고, 내가 주인이 돼 살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북한 인민이 따라 배워야 할 백두의 혁명정신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유상준 씨는 생일이 가장 슬픈 날이다. 7월 6일. 그날 마지막 혈육이던 어린 아들이 한국으로 아버지를 찾아오다 2001년 몽골 사막에서 굶주림과 탈진으로 숨졌다. 어머니와 아내, 작은 아들은 1997년 북한의 고난의 행군 때 굶어 죽었다.유 씨는 차인표가 열연한 탈북 영화 ‘크로싱’(2008년)의 실제 인물이다. 유 씨는 그 자신이 또한 군 복무 중에 방사능으로 피폭돼 지금까지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는 북한 체제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홀로 찾아온 따뜻한 남쪽 땅에서 그는 여름에도 서늘한 추위를 느끼며 살고 있다.# 조치원 의형제들유 씨는 1963년 함경북도 청진시 송평구역 근동리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둘 다 충남 조치원 사람이다. 해방전 고향에서 결혼한 부부는 일제 강점기 말기에 일자리를 찾아 청진에 와 김책제철소에서 일했다.해방이 돼 집을 팔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38선이 생겼다는 말에 주저앉았다. 이듬해 첫 아들이 태어났다. 1950년 전쟁 시기 국군이 청진까지 올라갔을 때는 부친이 아픈 데다 둘째 아들이 4월에 태어나는 바람에 또 떠나지 못했다.어머니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아침에 국군이 와서 밥을 해달라고 해서 밥을 하고 그걸 메고 부령(청진 위의 도시)까지 따라 갔는데, 오후에 다시 가야 한다면서 돌아가더라”고 했다. 실제 전쟁 때 국군은 청진에 들어가자마자 하루도 안돼 후퇴했다.청진에 눌러앉아 살게 된 부부는 남쪽 출신이란 이유로 노동 계급에서 농민 계급으로 강등돼 청진에 채소를 공급하는 농장에서 일하게 됐다. 자식도 계속 낳았는데, 유 씨는 6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태어나고 보니 맏형과 나이 차이가 17살이나 됐는데, 아래에 여동생이 하나 또 태어났다.유 씨가 크면서 보니 고향인 근동에 조치원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조치원 사람들은 북한 체제 아래서도 의형제를 맺고 교류하며 지냈다.추석날에는 딴 곳에 이사 갔던 사람들도 근동으로 왔다. 근동엔 조치원 사람들이 묻혀 있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유 씨가 탈북하기 전까지도 산소에 모여 살아가는 이야기를 했던 것이 기억 난다.유 씨의 어린 시절은 남들과 별 다를 것이 없이 평범했다. 중학교를 마치고 1979년 북한군에 입대했는데 해군에 가게 됐다.#방사선 피폭그의 군 복무는 남들과는 좀 달랐다. 그가 소속된 부대는 원산 해군사령부 소속으로 군수선박을 감독하는 일을 했다. 대다수가 군관이고, 일반병은 6명에 불과했다.부대의 임무는 조선소에서 건조하는 군함이 설계도면대로 만들어지는지를 감독하는 일이었다. 이것을 ‘군검제도’라고 하는데, 하도 민간에서 대충 만들어 군에 인계하자 김일성이 군 장비는 군이 직접 검사한 뒤 인계하라고 지시해 유 씨가 복무한 부대가 생겨났다.조선소에서 군함이 건조되면 유 씨 등 일반 병사들은 현장에 나가 감마선 단층 촬영을 보조했다. 배의 블록이 제대로 연결됐는지 보기 위해선 둥근 납덩이 안에 뚫은 연필심 굵기의 구멍에 세슘이라는 방사선 물질을 넣고 이를 검사할 위치에 붙인 필름에 쏘는데, 이를 통해 불량을 알 수 있었다. 세슘은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할 때 나오는 초강력 방사능 물질이다. 1984년 작업 중 세슘 유출 사건이 터졌다. 작업하던 군관은 몇 달 만에 얼굴이 까맣게 변해 제대했다. 옆에 있던 유씨는 동해함대사령부 병원인 ‘31호병원’에 실려 갔다. 방사선 피폭을 당했지만 뾰족히 치료할 방법이 없었다. 한 군의관이 소련에서 배운 방법이라면서 기뢰를 만들 때 들어가는 은을 구해와 미세한 조각을 만든 뒤 유 씨의 온 몸에 심었다. 효과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유 씨는 목숨은 건졌다. 지금도 유 씨 몸에는 까만 작은 점들이 잔뜩 박혀있는데, 그때 이식한 은이 변색한 것이다.7~8개월의 병원 생활을 마치고 퇴원했는데, 제대 시켜주지 않고 다시 부대로 보냈다. 이 곳에서 유씨는 1989년까지 10년 6개월 동안 근무했다. 당시는 남쪽 연고자라고 해도 군 복무를 10년 하면 노동당에 입당시켜 줬다. 그러나 농민의 자녀는 농민을 벗어날 수 없는 사회 성분이라는 굴레는 넘을 수가 없었다.제대한 유 씨는 고향인 근동으로 돌아와 농장원으로 일하게 됐다. 제대 후 몇 달 만에 군 복무 중에 알게 됐던 여성과 결혼해 1990년 맏아들 철민이가 태어났다. 농장에서 일하는 와중에도 피폭 후유증 때문인지 몸은 시름시름 계속 아팠다. # 고기 먹는 옆집유 씨는 고향에서 몇 년 동안 농민으로 일하다가 고난의 행군을 맞게 됐다. 고난의 행군은 실질적으로 1994년부터 시작됐는데, 이때 직접 식량을 생산하는 농민들도 많이 굶어죽었다.유 씨 가족은 1997년의 고비를 넘지 못했다. 이 해가 특히 어려웠다. 유 씨의 어머니, 아내, 작은 아들도 먹지 못해 굶어서 사망했다.유 씨가 일하던 근동 농장에는 농민이 600여명이 소속돼 있었는데 1997년에 이중 67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그 중 공식적으로 굶어 죽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사람이 죽으면 농장에서는 아파서 앓다가 죽었다고 보고했다.고지식한 유 씨는 “노동당원이 남들처럼 밭에서 작물을 훔쳐서야 되겠는가”라고 생각하며 살다가 가족을 다 잃고, 하나 남은 철민이까지 굶겨 죽일 지경에 몰렸다. 풀중독으로 쓰러진 맏아들을 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각오가 생겨났다.그는 도끼를 메고 산에 올랐다. 새벽부터 깊은 산골에 올라가 나무를 베어 보기 좋게 팬 뒤 수남장마당으로 메고 날랐다. 30㎏짜리 나무짐을 메고 30리가 넘는 장마당에 갔다 오면 하루가 지나갔다. 그렇게 일하니 굶어죽지 않을 수가 있었다.유 씨는 이 때부터 달라졌다. 당에서 시키는 대로 하니 죽음 밖에 없었지만, 하지 말라는 장사를 하니 먹고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과거 노동당원임을 의식해 농장에서 여는 회의에 100% 출석했지만, 그 때부터 나가지 않았다. 당시 근동 사람들은 그렇게 살았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다.유 씨가 살던 집은 긴 주택에 칸막이를 하고 여러 세대가 거주하는 일명 ‘하모니카주택’이었다. 옆집에는 철도안전원이 살았다. 철도안전원은 북에서 잘 사는 직업에 속한다. 장사를 다니는 사람들을 단속해 뇌물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제대로 된 여행증명서를 갖고 장사하려 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단속하면 돈이 들어왔다.덕분에 안전원 가족은 이밥에 고깃국을 먹고 살았다. 하지만 사방에서 굶어죽는 와중에 고기 냄새를 풍길 수는 없어 주변 눈치를 보면서 뼈도 멀리 내다 묻어야 했다. 옆집에선 사람이 굶어 죽어 가는데,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집은 고기를 먹고 산 것이다. 물론 안전원도 “다 굶어죽는데 누굴 도와주고 누굴 도와주지 말아야 하냐. 우리도 몰래 숨어 먹기가 너무 힘들었다”고 할 말은 있을 것이다.# 탈북어느 날, 그 날도 여느 때처럼 나무를 팔고 집에 돌아왔다. 같은 하모니카주택 할머니가 그를 보더니 푸념을 했다.“왜정 때도 이리 살지 않았는데, 이게 뭐요. 젊은 양반이 여기서 고생하지 말고 중국이나 가보게나. 내 조카도 중국에 갔는데, 들어보니 젊은 애들은 요새 다 거기에 간대. 중국에 가면 굶어죽을 걱정은 없대.”유 씨는 그 날 곰곰이 생각해봤다. 여기서 더 버텨봐야 철민이를 굶겨죽이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결국 그는 아들의 손목을 잡고 중국을 향해 출발했다. 더 이상 팔 재산도 없으니 미련도 남지 않았다.1998년 4월 그는 국경경비대의 눈을 피해 중국 화룡현 대동마을이란 곳으로 넘어갔다. 강을 건너 걸어가는데, 일하던 한 농부가 그를 손짓으로 불렀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조선에서 왔느냐”고 묻더니 일을 그만두고 부자를 달구지에 태워 집으로 데려갔다. 농부는 모친을 찾아 밥을 차려달라고 했는데, 쌀밥에 생선이 반찬으로 나왔다. 유 씨는 “오늘이 누구 생일인가”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그 농부는 한족이었는데, 모친이 조선족이어서 한국말을 좀 할 줄 알았다. 밥을 먹고 나자 그는 “당신은 여기 오래 있지 못하니 깊이 들어가야 살 수 있다”며 임산노동자들의 차를 불러 태워주었다. 갈 때는 아이의 옷과 도중식사까지 싸주었다.유 씨는 아직도 아무 사심도 없이 불쌍한 사람을 도와준 북중 국경의 그 농부를 잊지 못한다. 사실 대량 탈북 초기에만 해도 연변에는 “불쌍한 조선 사람들이 왔다”며 동정하고 아낌없이 도와준 한족과 조선족들이 참 많았다. 그러나 순수한 사람 못지 않게 탈북자를 이용해먹는 나쁜 인간들도 많았다. 유 씨는 중국에 좀 더 체류하면서 그걸 알게 됐다.부자를 태운 차는 “여기부턴 더 같이 가지 못한다”며 어느 초막에서 그들을 내려주었다. 그 초막에는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는데, 그 할아버지도 이들 부자를 며칠 동안 먹여주고 약도 갖다 주며 돌봐주었다. 나중엔 화룡 어느 농촌에 일자리를 소개해주었다.# 상갓집 개유 씨가 간 집은 주인 남자가 한국에서 돈을 벌고 온 집이었다. 그는 중국에선 아무리 애를 써도 1년에 6천 위안을 벌지 못하는데, 한국에 가면 매달 1만 위안을 벌 수 있었다고 했다. 한국에서 번 돈으로 고향에 돌아와 소도 20마리를 샀는데 키울 사람이 없다고 했다. 유 씨는 그의 소를 대신 키워주기로 했다.그는 나름 제 딴에는 깊이 들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좀 지나서 보니 그 마을에는 온통 탈북민들이었다. 밤에 마을로 들어오는 차량 불빛이 보이면 공안 단속이 오는 줄 알고 집집마다 사람들이 뛰쳐 나와 산으로 올랐다. 산에 올라가 보니 수십 명의 탈북민이 모였다.산에서 모인 이들은 어디에 가면 잘 숨어있을 수 있는지 정보도 교환했다. 알고 보니 이 마을에도 촌장집에서 일하던 부부가 얼마 전 잡혀 갔는데, 돈 주기 싫어 밀고한 것이라거나, 어느 집에서 일하던 부부는 남자가 북송되다 탈출해 발이 부러진 채 돌아와 보니 그새 아내를 팔았다거나 등등 흉흉한 소문들이 많았다.한 달쯤 지내는 사이 유 씨도 위기를 넘겼다. 하루는 공안이 들어와 신고가 들어왔다며 모든 집을 수색했는데, 유 씨가 있는 집만 들어오지 않았다. 그 집은 동네에서 제일 낡은 집이라 공안이 설마 이곳에 사람이 있을까 싶어 지나친 것이다.유 씨는 다시 길을 떠났다. 어느 집에서 몇 달 동안 새 집을 지어주며 얻어먹기도 하고 또 어디 가선 나무를 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농촌을 전전해서는 돈을 벌 수는 없었다. 농촌에서 탈북민은 먹여주고 재워주면 되는 공짜 노동력이었다. 또 잡혀가도 언제든 대체할 수 있는 인력이기도 했다.어느 정도 버티며 살다보니 한국 선교사도 만났다. 선교사는 아이는 자기가 맡아 공부도 시켜줄 테니 안전한 곳으로 옮겨가 자리 잡으라고 설득했다. 유 씨는 선교사 말대로 아이를 맡기고 1999년 연길로 옮겨갔다. 대도시는 좀 안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이 곳에서 그는 건축 공사장에서 일을 했는데, 사장은 몇 달 동안 돈을 주지 않았다. 하루는 용기를 내 돈을 달라고 하자 몽둥이를 든 남자들을 끌고 와 그를 마구 팼다. “조선놈이 신고하지 않은 것도 다행이지 돈까지 받을 생각을 한다”는 이유였다. 그때 갈비뼈가 금이 갔다. 나라 없는 백성은 상갓집 개보다 못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당시 탈북민들 사이에 악명이 자자했던 사람은 화룡 용소촌이라는 곳의 담배농장에 탈북민 30여명을 데리고 일 시키던 김명주라는 자였다. 그는 돈을 달라는 탈북민을 마구 구타하고, 신고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그렇게 학대를 해도 먹여만 달라며 북한에서 탈북민이 끊임없이 밀려왔기 때문이다.도시에 나가니 성과도 있었다. 탈북민 사역을 하려고 온 미국과 한국 선교사들이 도시에 많아 이들을 접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곳에서 두리하나 천기원 선교사를 만나 한국행을 제안 받았다.#한국에 도착하다2000년 12월 1일 그는 다른 탈북민 20명과 함께 몽골 국경으로 향했다.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사막에서 몽골 군인들에게 체포됐는데, 이들은 탈북민을 다시 중국에 넘기려 했다. 남성들이 나서서 안가겠다며 몽골 군인들과 싸우니 기진맥진해진 이들은 탈북민들을 싣고 어느 군부대 목욕탕에 수감시켰다. 나중에 보니 여인과 아이들, 노인들만 사라졌다. 저항하지 못하는 힘 없는 사람들만 골라 끝내 중국에 다시 보낸 것이다. 중국으로 돌려 보낸 이들은 얼마 안 돼 모두 한국으로 다 왔다. 알고 보니 노약자들만 받은 중국 군인들은 귀찮다고 이들을 가고 싶은 데로 가라며 풀어준 것이다.유 씨는 몽골을 거쳐 2000년 12월 15일 한국에 도착했다. 그 때만 해도 한국에 온 탈북민이 1000명 좀 넘을 때였다. 유 씨는 매우 빨리 온 경우에 해당한다. 이듬해 5월 그는 포항 북구에 정착했다. 어느 공장에 취직도 했는데 얼마쯤 일한 뒤 공장에 불이나 월급도 못받고 그만둬야 했다. 한국에 온 유 씨의 마음에는 온통 아들을 데려올 생각밖에 없었다. 그는 돈을 마련해 아들을 찾아 자신이 왔던 선을 이용해 데리려 오려 했다. 그런데 오던 중 불행한 일이 벌어졌다. 아들 일행이 길을 잃고 사막을 헤맸는데, 끝내 어린 철민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그는 방황했고, 다시 일어났다. 2017년 1월 기자는 유상준 씨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아래 내용이 아들을 잃은 이후 유 씨의 16년 동안 한국 정착 스토리다. 당시 썼던 ‘서울과 평양사이’ 칼럼 내용을 그대로 인용해본다.# ‘바보’ 탈북자 유상준(2017년 1월 26자 동아일보 칼럼)탈북민 유상준(54)의 첫인상은 어수룩해 보인다. 말주변도 없다. 느릿느릿 말하다 “저처럼 북에서 농사나 짓던 놈이 뭘 알겠습니까”라며 자주 수줍은 표정을 짓는다.알고 보면 그는 아주 빨랐던 사람이다. 남한으로 오는 게 아주 어려웠던 2000년 12월 남한으로 왔다. 한국 입국 탈북민 3만여 명 중 선착순 1000명 안에 들어간다.남한에서 상상했던 그의 꿈은 2001년 7월 부서졌다. 아버지를 찾아 탈북했던 하나밖에 없는 12세 아들 철민이가 몽골 국경을 넘다 굶주림과 탈진으로 숨졌다. 차인표가 열연한 탈북 영화 ‘크로싱’(2008년)의 실제 인물이 유상준이다. 아들을 잃고 1년 넘게 우울증, 자살 충동과 싸우던 그는 2003년 훌쩍 중국으로 건너갔다.“중국엔 한국으로 오는 길을 모르는 탈북민이 너무 많았고, 한국엔 혈육을 데려오지 못한 탈북민이 너무 많았습니다. 먼저 온 내가 이들을 데려와야겠다 생각했죠.”2004년 그가 첫 번째로 구출한 사람은 철민이 또래인 14세 탈북 소녀였다. 그 소녀는 지금 성균관대를 졸업한 27세 여성으로 성장했다.이듬해엔 직접 새 탈북 루트를 개척했다. 당시만 해도 탈북 브로커들은 한국으로 보내주는 대가로 수백만 원씩 받았다. 유상준은 한 푼도 받지 않았다. 한국에서 7만∼8만 원씩 일당을 받으며 몇 달 일해 돈을 벌어선 중국으로 건너가 탈북민을 구출했다. 돈이 떨어지면 다시 한국에 와서 막노동을 했다. 구출한 사람 중 몇 명이 고맙다고 자발적으로 돈 봉투를 건넬 때도 있었지만 100만 원을 주면 50만 원은 다시 돌려줬다. 그 이상은 받아본 일이 없다.유상준의 도움을 받아 한국까지 온 탈북민은 500명이 넘는다. 이 중 90여 명은 그가 직접 인솔해 몽골 국경을 넘었다. 그러던 중 2007년 7월 중국 공안에 체포돼 5개월 동안 수감 생활도 했다. 내몽골 감옥에서 여름 옷을 입고 영하 40도를 견디느라 이가 다 빠질 정도로 골병이 들었다.한국에 돌아온 뒤 그는 1년 넘게 병치레를 하면서도 세탁소 운영과 아파트 경비 일로 돈을 모았다. 그 돈을 들고 2009년 중국에 건너갔다. 다시 탈북민을 돕기 시작한 것이다.한국에서 대북전단(삐라) 풍선이 뉴스에 나오는 것을 보고 “중국에서 대북전단을 날리면 북한 깊숙이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유상준은 중국에서 풍선 가스 구매처를 찾아다녔고, 인쇄물을 찍었다. 그러다 2011년 5월 중국 국가안전국에 잡혔다. 그를 신고한 것은 다름 아닌 탈북 여성이었다.“눈을 가리고 팬티만 입은 채 24시간 동안 내내 맞았습니다. 2명씩 교대로 들어와 때렸는데 너무 맞아서 지금도 기억력이 성치 못합니다.”그는 다행히 북송되지 않고 한국으로 추방됐다. 몇 년 뒤 자신을 신고했던 여성이 서울에서 탈북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상담사로 일하는 것을 우연히 보고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며 복수를 하지 않았다.다시 중국에 갈 수 없게 된 유상준은 한국에 와서도 대북전단을 날려 보내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원통하게 숨진 아들의 한을 풀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대북전단을 보내는 곳을 몇 개월 따라다녔지만, 핵심 ‘영업 비밀’은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한다. 탈북 루트를 혼자 개척했던 10년 전처럼 그는 이번에도 혼자 시작했다.새벽에 일어나 출근 전 풍선 타이머를 연구했고, 퇴근해서도 연구에 매달렸다. 동네 재활용장에 사정을 해서 선풍기 타이머들을 모두 뜯어오기도 했다. 0.01mm 니크롬선(발열체의 일종)을 꿰느라 목 디스크가 걸렸다. 잠을 못 자며 4개월 꼬박 고생해 수천m 상공 영하의 온도에서도 작동하는 타이머를 만들어냈다.유상준은 요즘 지하철 전동차 청소 회사에서 계약직으로 일한다. 월급은 150만 원 남짓. 주거비와 교통비, 통신비, 쌀값 등을 다 합쳐 자기를 위해 쓰는 돈은 30만 원도 안 된다. 그는 임대 및 관리비가 13만 원인 임대주택에 홀로 살면서 돈이 아까워 난방도 틀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오랫동안 탈북 고아 2명을 후원했고, 지금도 탈북자 구출 후원금을 보낸다. 아들 둘을 군에서 잃고 홀로 사는 옆집 할머니를 위해선 TV와 전화기를 사주고, 눈 수술비까지 보탰다. 몇 달 월급이 모이면 남의 차를 빌려 대북전단을 조용히 북에 날린다. 그러곤 또 돈을 모은다. 필요한 사람에겐 자기가 연구한 노하우를 전부 가르쳐준다.유상준의 한국 생활 16년은 이렇게 흘렀다. 그의 인생사를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울컥해진다. 그는 자랑할 줄 모른다. 위에 쓴 유상준의 일대기는 그의 지인들에게 듣고 본인에게 확인한 것이다. 하나를 하고 열을 했다고 자랑하기 급급한 이 세상에서, 이런 ‘바보’가 탈북자 중에 소문 없이 숨어 있다는 것이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다.# 이후 이야기위의 칼럼이 나가고 다시 6년이 흘렀다. 유 씨는 이후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6년 만에 다시 만난 유 씨는 그 때보다 더 수척해 있었다. 달라진 것은 지하철 전동차 청소 회사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다가 지금은 정규직으로 전환됐다는 것이다.이제는 난방도 틀고 살아 한달 생활비가 30만 원에서 50만 원으로 올랐다. 과거엔 없어도 탈북 고아 6~7명에게 후원금부터 보내고 살았지만, 이제는 쓰고 남은 돈을 후원한다고 했다.그는 올해 은퇴할 연령이 됐는데 모아둔 돈은 전혀 없다. 그렇지만 전혀 걱정은 없다고 했다.“노인기초연금과 국민연금을 합치면 은퇴해도 매달 60만 씩은 나올 것 같은데, 지금 50만 원으로 충분히 사는데 그거면 충분하죠. 은퇴 이후에도 걱정은 없습니다.”그가 그렇게 적은 돈으로 살수 있는 이유는 그의 눈높이가 여전히 북한에서 살던 시절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북한에서 살 때 물을 길으러 500m씩 걸어갔는데 지금은 수도만 틀면 물이 나오니 얼마나 좋습니까.”유 씨는 지금까지 국내외 어느 휴양지에도 놀러 가본 적이 없다. 회사에서 2년에 한번씩 리조트 사용권이 나오지만 그것도 사용해 본 일이 없다. 놀러갈 일이 없으니 사진도 거의 찍지 않았다. 인터뷰 후에 과거 사진들을 요청하자 하나도 없다고 난감해 하더니 스스로 셀카를 찍어 보내왔다.그는 죽을 때 남은 재산이 있을까봐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있어 자신의 몸도 재산에 속했다. 그는 지갑에 늘 ‘장기기증서약서’를 갖고 다닌다. 어디에서 혹시 사고가 나도 남은 자신의 신체조차 사회에 돌려주고 가겠다는 의지 때문이다.그러나 점점 나빠지는 건강은 여전히 고민이다. 그래서 요즘은 쉬는 날이면 무조건 산에 오른다. 나무도 보고, 새가 우는 지저귐도 듣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북한 주민들에게 진실을 전하겠다는 일념으로 매달렸던 대북 전단 살포는 2000년 8월 ‘대북전단금지법’이 통과된 이후 “아무리 악법이라도 법은 지키며 살아야 하지 않겠냐”며 사실상 손을 뗐다.그럼에도 유 씨의 유일한 희망은 하루 빨리 통일이 되는 것이다. “고향에 갈 수 있다면 부모 자식 다 잃고 혼자 독하게 살아온 놈의 죄를 속죄하고, 그때 가진 재산이 있다면 고향 사람들에게 다 나눠줄 겁니다. 지금 제가 가진 것들은 제 것이 아니라고 늘 생각하며 살고 있죠.”유 씨의 마음에는 늘 잊지 못할 두 명의 은인이 자리 잡고 있다.“한 명은 두만강을 넘자마자 만났던 중국 한족 농부입니다. 몇 년 뒤에 찾아갔더니 없더군요. 은혜는 못 갚았지만 저도 그런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또 한 명은 북한에서 살 때 만났던 20대 아가씨입니다. 하루는 아들이 풀 중독이 와서 병원에 갔는데 약이 있을 리가 있습니까. 축 처진 아들을 업고 나오는데, 어떤 처녀가 나를 부르더니 손에 5원을 쥐어주더군요. 당시 페니실린 한 병이 5원이었습니다. 그때 느꼈던 고마움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제가 지금 조용히 탈북 고아들을 후원하는 것도 어쩌면 그 처녀에게 진 빚을 갚는 마음 때문일지도 모릅니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원산항에 한국 쌀이 들어오면 며칠 동안 항구 정문 앞에 화물차량들이 길게 늘어섰다. 대다수가 군용 트럭들이지만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군용 차량 번호를 대충 뻑뻑 지우고 그 위에 민간 번호를 썼다.그렇게 눈속임을 해도 쌀을 접수하러 온 사람들까지 바꿀 수는 없었다. 비록 사복 차림이긴 했지만 운전사도, 호송원도 머리를 빡빡 깎은 20대 청년들이었다.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엔 쌀이 참 많이도 들어왔다. 원산 갈마역전 앞에 주둔해 있던 강해룡 씨의 운수대대는 대북 지원 쌀이 들어오면 제일 먼저 출동하는 부대였다.강 씨는 대한민국이라고 적혀 있는 40㎏ 포대에서 처음 쌀을 꺼내본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건 쌀이 아니라 하얀 눈덩이였다. 그렇게 하얀 쌀은 처음 봤다.도정이 잘 안돼 누런 북한 쌀은 쌀함박(이남박)으로 일고 또 일어도 꼭 돌이 남았다. 그래서 북한 쌀밥은 조심스럽게 씹어야 한다. 잘못 씹었다가 이가 부서진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한국 쌀은 돌이 전혀 없었다. 밥을 안심하고 씹어 먹을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기분 좋은 일일 수가 없었다. 한국 쌀밥을 먹을 때마다 강 씨는 생각했다.“아, 한국은 정말 발전했구나.”# 잘사는 부대강 씨가 군 복무를 한 부대는 원산에 주둔한 1지구사령부(군단급) 후방사령부 직속 운수대대였다. 군단으로 공급되는 거의 모든 물자가 그의 부대 차량에 싣고 오갔다. 떡 주무르는 놈이 콩고물도 많이 먹게 되는 법이다. 그의 대대는 북한군 전체에서도 상위 1% 안에 들어갈 만큼 복무 환경이 좋았다.원래 강원도는 군에 입대하는 청년들이 가장 기피하는 곳이다. 북한에선 강원도에 가장 많은 세 가지가 ‘돌, 바람, 군대’라는 말이 있다. 돌을 열개 던지면 일곱 개가 군인 머리에 떨어진다는 말도 있다. 험한 산들이 많아 환경은 척박한데 군인들만 많다는 뜻이다. 훔쳐 먹으려고 해도 민가가 많지 않아 훔칠 곳도 없다. 그래서 강원도는 가장 가난한 집 자식들이 군 복무하려 가는 곳이자 군에 갔다가 영양실조로 제대되는 병사가 가장 많은 곳이기도 하다.하지만 강 씨의 운수대대는 훈련도 별로 세지 않고, 먹을 것도 풍족했다. 주변에는 삐쩍 마른 군인들이 많지만 그의 부대엔 그런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쌀 지원이 오면 쌀을 싣고 오다가 슬쩍 ‘조절’할 수 있었다. 북한에선 훔쳐온다는 말을 듣기 좋게 ‘조절해온다’고 표현한다.쌀 뿐만 아니라 유엔에서 들여오는 각종 약도 그의 운수대대가 날랐다. 대다수 탈북민이 북에 살 때 구경도 못했던 소고기도 실컷 먹은 기억이 있다. 2001년 유럽에서 광우병 파동이 벌어졌을 때 북한은 독일에 도살된 40만 마리를 무료로 줄 것을 요구했고, 독일 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2만t 정도 실제로 북에 보냈다. 그 소고기를 군단에 싣고 올 때 강 씨는 질릴 정도로 많이 먹었다.이렇게 좋은 부대인지라 북한에서 힘깨나 좀 쓴다는 간부들은 자식들이나 친척들을 운수부대에 보내지 못해 안달이다. 강 씨가 부대에 처음 도착했을 때 중대장의 첫 질문이 “넌 누구 부탁자냐”였다. “누구의 빽이냐”는 질문이었다.그런데 부탁을 한다고 해서 또 누구나 이 부대에 올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곳에 오려면 군 운전사양성소에서 2년 동안 차량 관련 각종 교육을 이수한 뒤에야 올 수 있었다. 운전사양성소를 졸업해도 일선 부대 포차 운전병으로 간다면 힘들게 군 복무를 해야 했다. 후방사령부 직속 운수대대는 운전병 훈련생 중에서도 빽 좋은 사람만 골라 오는 곳이었다.하지만 강 씨는 운전 교육을 받지 않고 신병으로 입대해 바로 온 몇 안 되는 사례였다. 운수대대이긴 하지만 모두가 운전병일 수는 없는 법이다. 경비나 통신병 등은 일반 신병 중에서 뽑았다. 이쯤 되면 다른 사람들의 눈엔 강 씨가 북한에서 엄청나게 힘 있는 간부집 자식처럼 보일 수가 있지만 실은 아니었다.# 행운의 병사강 씨는 1982년 함북 청진시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평범한 철도 건설 노동자였는데, 그가 15세였던 1997년에 사고로 사망했다. 군에 가기 전 그의 삶은 남들과 그리 다를 바가 없었다. 대다수 남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인민학교를 마치고 중학교를 졸업하면 군에 가야 하는 정해진 수순대로 살았다. 집안 형편이 썩 좋지 않아 대학에 갈 꿈도 꾸지 못했다.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이 닥쳐오자 그의 집도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여야 했다. 엄마는 배낭에 공업품을 메고 황해도로 나가 쌀과 바꾸어왔다. 이렇게 지역을 오가며 물건을 바꾸어 차익을 버는 사람을 북한에선 ‘달리기’ 또는 ‘행방’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도 죽도 먹기 힘든 때도 있었다.중학교를 졸업해 군대에 갈 때쯤 되니 학급 동창들의 운명도 갈렸다. 제일 살이 찐 간부집 자식들은 대학에 가겠다고 열심히 공부를 하는데, 영양실조 오기 전의 삐쩍 마른 가난한 집 아이들은 군에 가야 했다. 강 씨가 졸업해 군에 가던 2000년에만 해도 군에 가면 영양실조로 죽는다는 말이 만연해 있던 때였다.그 중에서도 강원도는 모든 학생들에게 기피 지역이었다. 강 씨도 실제로 강원도에 갔다가 실조차 없어 쇠줄로 군복을 꿰매 입고 집으로 돌아온 영양실조 환자를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가 강원도로 갈 운명을 피할 길은 없었다.그런데 그에게 결정적인 ‘빽’은 있었다. 군사동원부(병무청)에서 일하는 친척이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그는 자기가 많이 힘을 썼다고 했지만,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그는 강원도로 배치됐다. 하지만 가장 상황이 좋지 않은 최전방 1군단이나 5군단은 피하고 원산에 주둔하고 있는 1지구사령부 신병연대로 가게 된 것이다.군에 입대했을 때부터 그는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으로 변했다. 원래 신병훈련소에 들어가면서부터 배고픈 고생이 뭔지 알게 되는 것이 정상인데, 그가 2000년 8월 강원도 덕원에 위치한 신병훈련소에 도착하니 놀랍게도 배고프지 않게 먹여주었다. 알고 보니 바로 한 달 전인 7월 4일에 김정일이 부대를 시찰했다. 그 덕분에 현지시찰 ‘뽕’으로 적어도 몇 달은 부대에 대한 공급이 좋아졌다.신병훈련 기간에 그는 또 훈련소 정치부장(상좌)의 눈에 들었다. 학교에 다닐 때 강 씨는 아코디언을 배웠다. 어머니는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아들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한때 예술학원에 입학하려고도 했지만 예술을 하기엔 돈이 너무 많이 들어 그만둬야 했다. 그렇게 배웠던 아코디언이 신병훈련소에서 준비하는 예술소조 공연 때 빛을 발휘한 것이다. 정치부장은 아코디언도 잘하고, 글도 잘 쓰는 강 씨를 눈여겨 보았다. 그가 힘을 써주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는 신병훈련소를 마치고 영문도 모르고 부탁자들만 간다는 후방사령부 직속 운수대대로 배치됐다.# 배부른 병사운수대대는 일반 부대와 구성이 좀 달랐다. 대대 전체 인원이라고 해봐야 초기복무(부사관) 군인까지 포함해 120명 정도로 대다수가 운전병이었다. 차량은 러시아제 신형 지르와 중국제 둥팡(東方) 트럭이 대부분이었다.운수중대는 지구사령부 각 부대에 후방 물자를 전달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지만 물자 이송 명령이 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운전병들은 쉬는 날이면 부대 간부들의 묵인 아래 차를 끌고 나가 돈벌이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장사 물건이나 건설 자재를 날라주고 돈을 받은 뒤 간부들과 나누었다. 그러니 잘 살지 못할 리가 없었다.강 씨가 부대에 갔을 때 마침 2중대의 위생지도원(위생병)이 제대돼 자리가 비었다. 그는 신병에서 바로 위생지도원으로 발탁됐다. 위생지도원을 하려면 위생지도원 강습소를 6개월 마쳐야 했다. 주사를 놓는 법, 붕대를 감는 법 등 응급 치료에 관한 지식을 배우는 것이다. 이렇게 특별 직종에 대한 강습을 6개월 받게 되면 나름 ‘전문직 군인’으로 대접 받을 수 있었다.강 씨는 2009년 제대할 때까지 부대 위생지도원으로 있었다. 위생지도원은 알고 보니 매우 편한 자리였다. 훈련병은 정기 훈련에도 잘 참가하지 않았다. 또 젊은 군인들인 데다 잘 먹는 부대라 환자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가끔 군관 또는 부사관 가족들이 밤중에 아프면 달려가 주사를 놔주는 일 정도가 약간 번거로운 일이긴 했다. 운수부대 약품 창고도 유엔약 등으로 빵빵하게 차있었다. 운수대대는 산골짜기가 아니라 나름 번화가인 갈마역 앞 소도시 가운데 주둔해 있었다. 그래서 병사들은 부대 주변에 ‘사택’이라고 부르는 가족처럼 다니는 민가 하나씩은 꼭 끼고 있었다. 식량 등을 가져다주는 대신 밥을 얻어 먹거나 휴식을 취한다.하도 군인들이 계속 민가에 몰래 드나드니 부대 간부들은 담장을 2m 높이로 쌓고 그 위에 유리를 박거나 인분을 뿌리는 등 외출 방지 대책을 세웠다. 그런데 이런 것도 별 소용이 없었다. 젊은 군인들은 2m 높이 담장 쯤은 쉽게 타고 넘어갔다. 강 씨 역시 짬만 나면 자신의 ‘아지트’로 갔다. 배불리 먹고 필터 담배를 피우며 한국 드라마를 봤다. 당시 ‘줄리엣의 남자’ 등이 원산에 많이 퍼졌다.한국 드라마를 보았지만 화면 속 세상은 현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냥 희한한 세상이구나 싶었지 자신이 그 속에서 살 수 있을 것이란 상상은 해보지 못했다. 병사들이 흥얼거리는 노래도 한국 노래들이었다. 대개는 그것이 한국 노래인지도 모르고 불렀는데, 나중에 서울에 오고 나서야 그게 한국 노래인줄 알았다.강 씨는 약을 민가에 갖다 주어 편의를 제공받긴 했지만 제일 많이 가져다 준 것은 식량이었다. 가을이면 편한 보직인 위생병은 후배 5명 정도를 거느리고 정기적으로 안변에 있는 오리목장에 옥수수밭 경비로 차출됐다. 37정보(1정보=0.99헥타르)의 대규모 옥수수밭이었는데, 이때가 대목이었다. 밤에 옥수수를 따 자신이 다니는 사택에 수백㎏씩 날라줬다. 도둑을 막으라고 보냈는데, 경비병이 사실상 도둑인 셈이다. 간부들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무지막지한 타 부대 도둑들보단 자기 부대 병사들이 몰래 가져가는 것을 묵인했다. 경비를 나가 옥수수를 따다 날라주면 그 대가로 1년은 언제든지 그 집에 가서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옥수수 경비를 나가라는 명령을 받으면 제일 행복했다. 배불리 먹고, 옥수수를 팔아 필요한 것도 살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군대에 나오길 참 잘했구나”는 생각이 들었다.남들은 군에 나오면 집에 있을 때보다 먹지 못해 늘 굶주림으로 고생했다. 이웃에 주둔한 정예부대라는 ‘108훈련소(군단급)’만 해도 ‘배고파훈련소’라고 무시를 당했다. 하도 병사들이 먹지 못해 구걸을 다닌다고 해서 ‘백공팔’을 ‘배고파’로 바꿔서 부른 것이다.하지만 강 씨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집에 있을 때는 죽을 먹으며 배고프게 지냈는데, 군에 나와 배부르게 살 수 있었다. 같은 북한군 내에서도 빈부격차가 이렇게 심했다.강 씨는 경비에 차출돼 나갔다가 본 후방사령부 오리목장 지배인의 집을 잊을 수 없었다. 그 집에는 투명한 고강도 유리로 덮은 큰 수족관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 안변 산골에 있는 후방사령부 소속 지배인조차 오리고기와 식량을 물 쓰듯이 뿌리며 호화로운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돈만 잘 벌면 된다”어느덧 군 복무 7년쯤 지나자 그는 남들과 마찬가지로 노동당 입당 문제로 고민하게 됐다. 북한에서 군에 가서 남자들이 받아올 수 있는 가장 큰 포상이 노동당 입당이었다. 군 복무를 마치고도 입당도 하지 못하고 오면 사회에 나와서도 모자란 사람으로 손가락질을 받게 된다.입당 추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대장과 정치지도원 등 부대 간부들과의 사이도 나쁘지 않았다. 위생지도원이라 수시로 호출할 때마다 달려가 성심성의껏 돌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변에서 비슷한 또래는 입당하는데 그는 부르는 데가 없었다. 친한 간부가 그에게 가만히 귀띔해주었다.“너는 엄마와 남동생이 행방불명이 돼서 입당이 어려워.”무슨 뜻인지 이해가 됐다. 군에 나온 지 4년차인 2004년에 집에 갔던 적이 있었다. 당시 김정일이 인민군대도 두부콩 농사를 지어 병사들이 허약에 걸리는 것을 방지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부대에선 콩 종자 30㎏을 가져오면 집에 보내주겠다고 조건을 걸었다. 그는 자원해서 집에 갔다. 그 때만 해도 엄마와 동생이 집에 있었다. 친척집을 다니다가 작은 고모가 없는 것을 알게 됐다. 어머니가 그에게 가만히 이야기했다.“고모는 남조선에 갔다.”깜짝 놀라긴 했지만, 그냥 고모의 일이니 자신과 크게 상관없는 줄 알았다. 2005년에 다시 핑계를 대고 집에 갔는데 이번에는 어머니와 동생이 없었다. 친척 한 명이 그의 귀에 대고 이야기했다.“지금 엄마가 중국에 갔는데 돈을 벌어 돌아올 거야. 기다려봐.”부대로 돌아오면서 엄마는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2007년이 돼도 엄마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고향에선 엄마를 행방불명자로 문서에 등록했다. 이것이 신원조회 과정을 거치며 부대까지 통보된 것이다.가족 문제로 그가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누가 밀고했는지 가끔 부대 간부들이 찾아왔다. 군단 보위부장은 그를 불러 “장군님은 네 부모가 미국이나 중국에 가도 상관없이 너를 품어주실 것이니 딴 생각하지 말고 부대 생활 열심히 하라. 너만 잘하면 아무 문제없다”고 다독여주기까지 했다. 어느새 그는 고민하다 사고를 칠 수 있는 요시찰 인물로 등록된 것이다.제대를 몇 달 앞둔 2009년 집에 갔을 때 예전의 그 친척이 또 귀띔해주었다.“해룡아, 네 엄마와 동생은 지금 남조선에 갔다.”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이제는 입당을 하지 못할 것이 명백해졌다. 그렇게 되자 그는 스스로 위안을 했다. 노동당에 입당하는 사람들은 두꺼운 당규약집을 다 외워야 입당 심사를 통과할 수 있다. 그는 “나는 외우기를 죽어라 싫어하니 그 두꺼운 당규약을 어차피 다 외우지도 못할 건데 차라리 잘 됐다”고 자기 최면을 걸었다.제대 후 진로도 어렵지 않게 결정됐다. 사회에 나가서 손가락질 받을 바에는 엄마를 따라 남조선에 가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당시를 돌아보며 강 씨는 “입당을 했었다면 한국에 오길 망설였을 것인데, 노동당에도 받아주지 않으니 ‘여기 남아 뭐해’라는 오기가 생겨 쉽게 결심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부대에서 친하게 지내던 고위 당간부 자식이 그에게 위안이랍시고 건넨 말도 진짜로 위안이 됐다.“입당은 무슨 입당이냐. 해룡아, 사회에 나가선 돈만 잘 벌면 네가 인생 승리자야.”# 탈북2009년 5월 마침내 그는 제대명령서를 받았다. 그는 ‘무리배치자’에 포함됐다. 무리배치란 당국이 딱 정해준 힘든 탄광이나 농촌 등에 제대군인들을 집단적으로 보내는 것을 말한다. 노동당은 그를 어랑천발전소 건설장에 갈 것을 명령했다. 어랑은 그의 고향인 함경북도에 있는 곳이다.어랑천발전소란 말을 듣자 그는 놀랐다. 분명 인민학교 때부터 어랑에 발전소를 짓는다고 돈을 걷어가던 기억이 있었는데, 그가 제대될 때까지 마무리하지 못했다니 기가 막혔다. 그는 한국에 와서야 어랑천발전소가 1981년에 건설이 시작됐고, 그가 한국에 온지 13년 뒤인 2022년 8월에 완공식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제대로 가동되지 않는 발전소를 하나 짓는데 무려 41년이나 걸린 것이다. 거기에 갔으면 젊음이 증발될 뻔 했다.제대된 뒤 그는 어랑에는 가지도 않았다. 집에서 좀 쉬다가 직장에 간다는 핑계를 내걸고 친척집을 전전하며 얻어먹었다. 어차피 이 땅을 떠날 건데 눈치 볼 것이 뭐가 있을까 싶기도 했다.쭉 돌아보니 놀랍게도 많은 친척들이 그새 한국으로 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작은 고모와 엄마는 물론이고, 외삼촌 가족, 이모 가족 등이 다 슬금슬금 사라져 줄을 타고 남쪽으로 이주했다. 모두가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이모부는 첫째 아들만 한국으로 오는 데 성공했고, 이모와 둘째 아들은 탈북 과정에 체포돼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한국으로 간 친척이 많으니 엄마와 연락하는 선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국경까지 와서 산에 올라가 엄마와 통화를 했다. 엄마의 이야기가 뜻밖이었다.“엄마는 돈을 지금 벌지 못해 동사무소에서 주는 돈으로 먹고 산다. 네게 보내줄 돈이 없으니 뜸 들이지 말고 빨리 여기 와라.”“엥? 거긴 나라에서 먹고 살라고 돈도 준다고? 정말 좋은 나라네.”2009년 11월 마침내 그는 한국을 향해 떠났다. 국경 도시인 무산까지 와서 밤에 강을 넘겨줄 선을 찾아 대기하고 있는데 ,그가 도강하기로 한 날 이틀 전에 현지에서 12명을 한꺼번에 공개 총살하는 일이 있었다. 대개가 불법 월경 연관자들이었다. 그는 현장에서 그 광경을 보았다.“가다가 잡히면 나도 저렇게 되겠구나” 싶어 오금이 저렸다. 그래도 엄마를 찾아가야 한다는 마음이 공포를 눌렀다. 마침내 강을 건너기로 한 날이 왔다. 브로커가 그를 찾아와 집에 데리고 갔다. 그날 그와 함께 강을 건널 사람 6명이 그곳에 모였다.브로커의 집에는 김일성과 함께 찍은 소위 ‘1호 사진’이 5~6장이나 벽에 걸려있었다. 지방에서 김일성과 그렇게 많이 사진 찍을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그가 놀라는 눈치를 보이자 브로커는 먼저 “내가 무슨 사람인지 묻지 마”라고 선수를 쳐 입을 막았다. 브로커는 얼음(필로폰)을 뻐끔뻐끔 빨아대며 밤이 깊어지길 기다렸다. 이렇게 위험한 도강을 주선해 번 돈으로 마약을 사서 탕진하는 것 같았다.일행은 그날 밤 무사히 강을 넘었다. 여러 명이 함께 강을 건너니 어차피 잡혀 죽어도 혼자 죽지 않을 거란 생각에 조금 마음이 든든하기도 했다. 강을 건너 캄캄한 북한 땅을 건네다 보니 마음이 아팠다“총을 들고 9년을 지킨 저 땅에 살아서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연길에 들어오니 무서웠던 마음도 싹 가라앉았다. “세상에 이렇게 밝은 도시가 있을 수가 있구나.”음식들도 너무 맛이 있었다. TV를 보니 채널이 너무 많아 끝도 없어 넘겨야 했다. 점점 북한을 떠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엄마가 탈북할 루트를 잘 연결해준 덕에 그는 11월 7일 두만강을 건너 한 달 만인 12월 10일 한국에 도착했다. 탈북민 사이엔 이런 경우를 ‘초고속 직행’이라고 부른다. 이런 사람들은 부러움의 대상이다.오는 내내 마음이 들떴다. 보는 모든 게 새롭고 황홀했다. 동남아 국가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탔을 땐 “내 생애에 비행기를 다 타보는구나”싶어 너무 기뻤다. 인천공항에 내렸을 때 화장실에 들어가려다 반들거리는 대리석을 보고 “여기에 신발을 신고 들어가야 하나, 벗고 들어가야 하냐”며 고민하기도 했다. 인천공항에 내리는 순간부터 그는 “내가 여기에 오길 너무 잘했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뿌듯했다.# 다시 시작된 간호사의 삶2010년 5월 마침내 하나원을 마치고 사회로 나왔다. 그는 김포에 있는 어머니 집으로 지역을 배정받았다. 6년 만에 마침내 어머니를 만났다. 동생은 소년단 넥타이를 메고 있을 때 본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는데, 어느덧 청년으로 성장해 있었다.사회에 나왔지만 여기는 북한처럼 국가가 직장을 정해주지 않았다. 그는 한국 사회를 더 많이 체험해보겠다는 욕심으로 인력사무소에 나가 건설판도 다니고, 각종 아르바이트도 전전했다. 한국에 와서 기뻤던 마음이 힘든 일을 하면서 점점 지쳐갔다.“여긴 왜 이렇게 치열하게 살지? 여긴 왜 일이 이렇게 힘들지?”1년 정도 그렇게 살다보니 피곤에 찌든 몸으로 버스에서 꾸벅꾸벅 조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어느 날, 그날도 피곤한 몰골과 무표정한 눈빛으로 버스를 타고 가는데, 밖에 눈이 번쩍 뜨이는 광고판이 보였다. 간호조무사학원 간판이었다.“아, 내가 6개월 양성소를 졸업한 인민군 위생지도원이었지. 간호사라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광고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하자 학원에선 국비로 학비의 80%까지 지원된다고 설명해줬다.“그래, 여기서도 한번 간호사를 해보자.”한국에 와서 바로 생업 전선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는 더 오랜 시간 허둥대며 더 높은 곳을 보고 살았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힘든 육체 노동을 1년 동안 하니 그제야 간호사라는 직업도 대단하다고 느끼게 된 것이다.그는 즉시 학원에 등록해 1년 동안 다녔다. 조무사학원을 다니다보니 그제야 간호대학이 있다는 것도, 간호사와 조무사가 서로 다른 일을 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이왕 시작했던 바에야 간호사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간호조무학원을 다니면서 대학을 준비해 2012년 가천대 간호학과에 입학해 4년제 정규과정을 밟게 됐다.처음엔 나이 30세가 넘어 대학에 과연 잘 다닐 수 있을까 싶은 걱정도 들었지만 정작 가보니 그보다 더 나이 많은 사람들도 많았다. 심지어 40세 후반 학생들도 있었다. 또 “남자가 간호사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싶은 우려도 대학을 다니며 떨쳐냈다. 알고 보니 응급실 등 특수파트에는 남자 간호사가 태반이었다.간호학과 공부는 쉽지 않았다. 공부하면서 “이렇게 공부했으면 북한에선 의사가 되고도 남았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어 입학했다는 생각 때문에 4년 동안 죽기 살기로 공부를 따라갔다. 각고의 노력 결과 한 번의 휴학도 없이 4년 만에 졸업장을 받았다.졸업한 뒤 김포의 한 종합병원에 취직도 쉽게 됐다. 그 곳에서 4년 동안 일하다가 결혼 직후엔 2020년에 신혼집과 출퇴근 등을 감안해 양지병원으로 옮겼다. 김포에서 처음 들어간 것이 수술실 간호사였는데, 지금도 수술실에서 일한다.“수술실은 남자 간호사가 많아서 편해요. 그리고 말투를 알아보는 사람도 별로 없어 좋고요. 다른 간호사들은 환자들과 많이 해야 하지만, 수술 환자들은 마취를 하기 때문에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돼요.”2019년 그는 9살 연하의 탈북 출신 여성과 결혼했다. 부인의 직업도 간호사다. 각자 병원도 다르고, 통근거리도 멀며, 교대 시간도 어긋나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하지만 그래도 신혼생활을 만끽하고 있다. 부부가 열심히 일해 모은 돈으로 지난해엔 신축 아파트를 사 입주했다.“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간호사를 택한 것은 잘한 결정 같아요. 너무 만족합니다. 북한에 있었으면 지금 어랑의 깊은 산골짜기에서 ‘오늘은 뭘 훔쳐올까’ 고민이나 하고 있었을 것이 아닙니까. 제가 통일되면 뭘 할지 이런 거창한 고민을 할 나이는 아니지만, 지금은 어쨌든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입니다.”지난해 강 씨는 통일부가 주최하고 남북하나재단이 후원한 ‘제9회 정착경험사례 발표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북한군 위생병으로 9년, 한국에선 종합병원 간호사로 7년을 산 그는 시상식장에서 이렇게 말했다.“지금은 7년차 간호사로 모든 수술실의 방장을 하고 있지만, 제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든 저를 끌어안고 함께 가려 했던 팀장님들과 수술실 동료들의 관심과 도움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들이 있었지만, 그걸 통해 간절함과 절실함은 어떤 벽도 가로 막을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통일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체제가 다른 삶을 살다가 와서 이 땅에 잘 정착하는 것이야 말로 작지만 큰 의미가 있는 진정한 통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어디에 계십니까. 그리운 장군님’이란 노래를 북한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다. 김정일이 5대 혁명가극을 창작하면서 1971년에 직접 지었다고 한다. 호칭도 3대째 세습됐으니, 지금은 김정은이 장군님이다. 김정은을 자주 보면 좋을지 나쁠지 사람마다 생각은 다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요즘 김정은을 보기가 진짜 힘들다. 1월 1일 소년단 행사에 잠깐 얼굴 비치고 지금까지 자취를 감췄다. 한 달 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지도자가 한 달이나 사라져도 아무 문제가 없으니 북한은 참 기이한 곳이긴 하다. 김정은이 사라지면 남쪽 전문가들은 “중요한 결단을 두고 숙고 중”이란 판에 박힌 대답을 내놓는다. 노는지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한 달은 좀 너무한 감이 있다. 그런데 1월엔 김정은이 사라질 만한 중요한 이유가 두 가지나 생겼다. 하나는 평양의 코로나 재확산이다. 평양에 발열 환자가 급증해 25일부터 닷새간 봉쇄령이 떨어졌다는 소식은 평양 주재 러시아대사관이 공개한 북한 외무성 공지문을 통해 이미 알려졌다. 대북 소식통도 현재 평양엔 발열자가 급증하고 있다고 전해 왔다. 주변에 온통 열이 나는 환자들인데, 코로나인지 독감인지 평양 사람들도 알 방법이 없다고 한다. 검사 키트가 없기 때문이다. 또 진단을 받는다고 해도 방법도 없다. 병원에 약이 없다. 그나마 있던 약은 작년 5∼6월의 대유행 때 탈탈 털어 다 썼는데, 이후 보충했을 리도 만무하다. 가동되는 의약품 공장도 거의 없는 데다 국경 봉쇄로 수입도 못 했기 때문이다. 김정은의 처지에서 보면 이번 코로나를 특별히 무서워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지난해 8월 전국비상방역총화회의 토론에서 김여정은 “방역 전쟁의 나날 고열 속에 심히 앓으시면서도 자신이 끝까지 책임져야 하는 인민들 생각으로 한순간도 자리에 누우실 수 없었던 원수님”이라고 했다. 오빠가 발열자였다는 사실을 공식 석상에서 언급한 것인데, 5∼6월의 발열자는 사실상 모두 코로나 환자였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김여정의 말대로라면 김정은은 코로나에 걸렸다 회복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김정은처럼 초고도 비만 환자는 회복했어도 위험하다. 지난달 19일 유럽심장학회(ESC) 잡지에는 코로나 감염자 7584명과 비감염자 7만5790명을 대상으로 후유증이 얼마나 가는지 평균 18개월간 추적 관찰한 연구 결과가 실렸다. 코로나에 감염됐을 경우 완치 이후 약 3주간 심혈관 질환 발생 위험이 4.3배나 높아지고, 모든 원인으로 인한 사망률은 무려 81배나 높아졌다는 게 요지다. 코로나 감염 후 18개월이 지난 뒤에도 심혈관 질환 발생 위험은 1.4배, 모든 원인으로 인한 사망률은 5배나 높은 상태가 유지됐다. 완치된 지 6개월가량밖에 되지 않은 김정은은 지금 후유증이 강한 위험 구간에 있는 셈이다. 지난달 18일 발표된 중앙방역대책본부의 조사 결과도 주목할 만하다. 확진자 847만 명을 조사해보니 재감염자는 1회 감염자보다 치명률이 1.79배나 더 높았다.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김정은은 이미 충분히 건강이 좋지 않다. 특히 코로나가 큰 후유증을 남기는 심혈관 질환은 김씨 집안의 치명적 약점이자 가족력이다. 김일성과 김정일 모두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심근경색의 4대 위험인자는 흡연과 당뇨, 고지혈증, 고혈압이다. 김정은은 오래전부터 4대 인자 모두를 갖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사람은 심근경색 발생 위험성이 6배나 높은데 가족력까지 있으면 훨씬 더 위험하다. 여기에 코로나 재감염까지 된다면 말할 나위가 없다. 김정은이 외부 노출을 자제할 만한 두 번째 이유는 올해 북한에 23년 내 가장 심한 추위가 닥친 것이다. 심혈관 환자는 가장 더운 날과 가장 추운 날을 조심해야 한다. 김일성은 폭염 기록을 연이어 세우던 1994년 7월에 사망했다. 김정일은 매서운 한파가 들이닥쳤던 2011년 12월에 숨졌다. 심혈관 환자에게 미치는 코로나의 악영향과 후유증, 재감염자의 치명률 증가, 기록적 한파 등을 종합적으로 보면 가족력을 가진 초고도 비만환자 김정은에게 있어 1월은 참 잔인한 달일 수밖에 없다. 나 같아도 밖에 쉽게 나가진 못할 것 같다. 그런데 너무 오래 사라지면 북한 사람들은 궁금해할 것 같다. 모두 이렇게 생각할지 않을까.‘어디에 계십니까. 그리운 장군님. 안녕하십니까?’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북한에서 연초마다 벌어지는 쓸데없는 짓이 올해도 어김없이 반복되고 있다. 북한 매체들은 지난해 말에 열린 노동당 전원회의 보고문헌 학습 열풍이 전국적으로 불고 있다고 연일 보도하고 있다. 학습뿐만 아니라 각 지역과 직장에서 연일 전원회의 결정 관철 궐기대회와 군중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내가 북한에서 대학을 다니던 1990년대엔 방학을 일주일 앞당겨 학생들을 대학에 소환한 뒤 신년사를 달달 외우게 하고, 학부별로 토너먼트 경연을 진행했다. 답변을 못 해 학부 탈락의 원인을 제공하면 졸업 때까지 찍혀 고생한다. 이것이 북한에서 반세기 동안 벌어져 온 일이다. 노동력이 얼마나 낭비되는지는 더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이렇게 모두에게 작년의 자랑 찬 성과와 올해의 위대한 목표를 외우게 해 만들어진 것이 오늘의 북한이다. 신년사의 성과만 종합해도 북한은 이미 공산주의는 물론이고 세계 최강국이 돼 있어야 맞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알다시피 그동안 북한은 가난한 시궁창으로 열심히 달려갔을 뿐이다. 김정은은 신년사도 읽기 귀찮은지 4년째 전원회의 보고라는 문서를 만들어 전국에 하달하고 있다. 올해 보고에서도 “지난해에 괄목할 만한 성과와 진전이 이룩되었다”고 했지만 도대체 미사일 열심히 쏜 것 말고 괄목할 성과는 무엇이고 어디로 전진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올해에도 “12개 중요 고지들을 기본 과녁으로 정하고 점령 방도들을 구체적으로 명시했다”면서도 그게 뭔지 밝히진 않았다. 들으나 마나다. 방도는 늘 있었다. 다만 실천을 못 했을 뿐이다. 가령 “철도는 나라의 동맥”이라며 매년 방도를 내놓지만 현실은 기차가 다니는 게 신기할 정도로 동맥경화가 심각해졌다. 올해 김정은은 “다시 한번 1960, 70년대의 투쟁 정신과 기치를 높이 들고 혁명의 난국을 우리 힘으로 타개해 나가자”고 했다. 상황이 어려울 때마다 김일성 만세를 부르던 케케묵은 과거가 소환된다. 그런데 북한은 그 과거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시작부터 잘사는 방향과 정반대의 길을 택했는데, 다시 처음처럼 기운을 내 뛰어봐야 가난에만 더 가까워질 뿐이다. 북한이 과거에 잘못된 길을 택해 열심히 달린 것에 대한 책임을 김씨 3대에게만 물을 수는 없다. 1950, 60년대를 살았던 북한판 ‘김빠’ ‘개딸’들의 업보를 지금 그 자손들이 뒤집어쓰고 있다. 북한에서 1인 수령 체제를 강화하며 충성을 강요할 때마다 등장하는 표본 인물인 ‘태성할머니’가 대표적 개딸이다. 1950년대 후반 김일성의 독재가 저항에 직면했을 때 남포시 태성리의 할머니가 김일성에게 “종파놈들이 인민 생활에 대해 떠들어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무조건 수상님을 지지합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그 말에 힘을 얻고 반대파들을 단호하게 숙청했다고 한다. 북한판 “우리 성이 하고 싶은 거 다 해”였던 셈이다. 그런 ’묻지 마’ 지지자들을 업고 김일성은 하고 싶은 것 다 했다. 독재 체제도 만들고 자자손손 권력을 세습해도 반항도 못 하게 만들었다. 돌아보면 그때 반당·반혁명 종파분자라고 처형된 사람들이 진짜 애국자들이었다. 김정은이 바라는 1960년대의 투쟁 정신이란 무슨 짓을 해도 “우리 으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를 외치며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고 굶어 죽어도 반항하지 않는 맹목적 충성심일 것이다. 하지만 1960년대엔 배급이라도 주고 일을 시켰지만, 지금은 무보수 충성을 강요하니 그런 호소가 얼마나 먹혀들진 미지수다. 이젠 북한 인민도 깨달아야 한다. 설날부터 고지 점령 방도라는 의미 없는 헛소리나 외우지 말고, 시키는 대로 다 해서 어떤 사회가 됐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자신들이 어디에서 떠나 어디로 가는지, 왜 북한이 이렇게 됐는지를 고민해봐야 한다. 과거에서 찾을 것은 투쟁 정신이 아니라 맹목적 지지가 어떤 지옥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교훈이다. 올해 북한의 상황은 매우 어렵고, 굶어 죽는 사람도 많이 나올지 모른다. 그래도 김정은은 내년 전원회의 보고에서 또 어김없이 “괄목할 만한 성과와 진전이 이룩된 2023년이었다”고 할 것이다. 죽는 날까지 반복될 이 저주의 굴레를 자손들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다면, 북한 주민들도 이젠 노예 마인드에서 벗어나야 한다. 김정은이 외우라는 것을 외우지 않고, 하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하면 될 것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국내 스테인리스스틸 생산 대표 기업인 길산그룹이 이달 7일 ‘매출 1조 클럽’ 고지를 밟았다. 매출액 1조 원 이상을 기록한 기업은 지난해 기준 229개로 집계된다. 길산그룹 정길영 회장(73·사진)은 1991년 충남 논산의 허허벌판에 스테인리스스틸 파이프 공장을 세운 지 31년 만에 매출 1조 원을 달성했다. 정 회장은 “도전정신으로 모든 비전을 현실화시킨다”는 태도로 일에 매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2일 충남 계룡시 본사에서 만난 정 회장은 “국민소득이 늘어날수록 부식이 없고 깨끗한 스테인리스스틸 파이프에 대한 수요가 늘어날 것이라고 보고 시작해 한길만 묵묵히 걸어온 결과 오늘의 길산그룹이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1980년대 아파트를 짓다가 처음 스테인리스스틸 파이프를 봤다. 당시엔 한국에서 스테인리스스틸 생산이 원활하지 못했는데 그걸 보자마자 이것이 앞으로 대세가 되겠구나 하는 직감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정 회장은 26세 때부터 운송업, 건축업 등 다양한 사업을 하다 42세에 스테인리스스틸 사업에 뛰어들었다. 결코 빨리 시작했다고 볼 수 없는 나이였지만 여러 사업을 통해 익힌 시장에 대한 장기적 안목은 정확했다. 스테인리스스틸 시장은 예상대로 꾸준히 성장했고, 길산그룹도 창립 이후 지금까지 30년 넘게 한 해도 적자를 기록하지 않았다. 정 회장은 이익의 대다수를 생산 설비와 우수 인력 확보에 투자했다. 현재 길산그룹은 길산파이프와 길산스틸 등 8개의 계열사를 두고 있고, 국내 최고 수준의 파이프 제조 능력을 갖춘 기술자를 다수 확보하고 있다. 또 직경이 작은 세관 파이프부터 대구경 파이프에 이르기까지 수십 종류의 파이프를 고객의 요구에 맞게 제작할 수 있는 능력도 보유했다. 매년 길산그룹이 생산하는 스테인리스스틸 구조용 강관 제품은 건축자재나 선박, 차량에 쓰이고, 판매량은 국내 시장 수요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지금까지 꾸준히 길산그룹을 성장시킨 정 회장이지만 경기 침체로 인해 내년 실적에 대해서는 걱정이 적지 않다. 그는 “앞으로 2년 동안의 위기는 전례 없이 심각할 것으로 예상된다. 마음의 각오를 정말 단단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매출 1조 원을 달성했지만 다음 목표를 잡지 않고 내실을 다지는 데 주력하려 한다”고 했다. 길산그룹은 올해 하반기에 재고를 최대한 줄이고 주문생산체제를 도입하며 닥쳐오는 경제 침체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아울러 반도체와 2차전지 산업의 성장에 대비해 관련 파이프 설비의 투자를 늘리고 있다. 정 회장은 우리 사회에 대한 염려도 털어놨다. 그는 “앞으로 금융 비용 부담이 늘게 되면 많은 기업이 위기를 맞을 수 있다. 실업자도 많이 생길 것으로 예상된다. 이 위기를 이겨내려면 노사가 힘을 합치는 지혜가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고 했다.계룡=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김여정이 북한의 첫 군사정찰위성 시험용 사진 공개에 대한 남쪽의 보도에 발끈해 노동당 부부장 명의로 20일 담화를 발표했다. ‘주둥이에서 풍기는 구린내’를 운운한 담화문의 수준이 조악하다. 굳이 구린내가 어디서 나는지를 따지고 들고 싶진 않다. “누가 일회성 시험에 값비싼 고분해능촬영기를 설치하고 시험을 하겠는가”라는 설명도 나름의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년 4월 군사정찰위성을 발사한다니 그때 가서 선명한 사진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북한은 19일에 서울과 인천을 찍은 사진을 공개했다. 하루 뒤에 바로 담화가 나온 것을 보니 김여정이 북한의 기술력을 깎아내리는 ‘몹쓸 버릇 남조선괴뢰들(?)’에게 단단히 화가 난 것 같다. 하루 종일 한국 포털을 검색해 ‘동네 전문가’들의 발언까지 다 조사한 뒤 장문의 담화를 준비했으니 말이다. 2014년에 일본제 보급형 DSLR 카메라를 달고 날아왔다가 기지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남쪽 곳곳에 추락한 북한의 조악한 무인기들이 기억에 생생하다. 그런 북한이 8년 뒤 정찰위성까지 쏘겠다는데 별것 아니라고 폄훼하니 김여정이 화가 날지도 모르겠다. 제재 와중에 각종 첨단 부품을 힘들게 구해 만든 노력은 설명 없이도 눈물겨울 것이다. 김여정은 담화에서 “우리가 하겠다고 한 것을 못한 것이 있었는가를 돌이켜보라”고 큰소리를 쳐댔다. 그런데 이것이 북한의 문제다. 왜 북한이 기어이 지키겠다고 이를 악무는 것이 핵실험과 미사일 개발밖에 없는가. 군사정찰위성을 쏜다는 북한의 곳곳에선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살펴보자. 시계 배터리 하나 자체적으로 못 만드는 북한이다. 코로나로 수입까지 중단하니 가정과 손목에서 시계가 멈춰 섰다. 많은 사람들이 시간이 멈춰 선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성냥공장도 제대로 가동되지 못한다. 라이터돌을 수입해 오지 못하니 사람들이 아궁이에 불을 지피기도, 담배를 피우기도 힘들다. 불이 없고, 해를 보고 시간을 가늠하면 원시시대나 다름없다고 할 것이다. 원시시대는 그나마 산과 들에 먹을 것이라도 풍족했지만, 지금 북한에선 주민들이 굶주림과 싸워야 한다. 농촌진흥청은 기상 악화와 비료 부족 등의 원인으로 올해 북한 식량 수확량이 수요에 비해 100만 t가량 부족할 것으로 추산했다. 이는 500만 명이 먹을 수 있는 양이다. 이런 열악한 처지에도 아랑곳 않고 군사정찰위성을 쏜다고 자랑하니 이 무슨 기괴한 부조화인지 할 말을 잃게 된다. 솔직히 북한에 왜 군사정찰위성이 필요한지도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구글어스, 항공뷰, 거리뷰 서비스로 특정 건물 간판까지 다 볼 수 있는 세상이다. 군부대의 이동을 감시할 목적이라면 이렇게 묻고 싶다. “알면 제대로 막을 수 있을까?” 북한군은 육해공 모두 반세기 전에 생산된, 뜨고 굴러가는 것조차 신기한 고물 장비로 무장하고 있다. 남북의 군사력 격차는 알고도 막지 못할 수준에 이르렀다. 여기에 미군까지 합세하면 더 긴 설명이 필요 없다. 김여정은 “우리가 하겠다고 한 것을 못한 것이 있었는가를 돌이켜보라”라고 말했다. 굳이 그런 사례들을 일일이 설명해줘야 아는지 궁금하다. 다른 것 다 떠나 김정은이 집권 첫 연설에서 “우리 인민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겠다”고 했던 다짐은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김여정은 잊어버렸는지 몰라도 인민들은 똑똑히 기억할 것이다. 지금 북한에서 김정은 빼고 허리띠를 풀고 사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김여정은 북한에 대한 한국의 여론만 보지 말고 다른 것도 많이 검색해 봤으면 좋겠다. 가령 이달 초 응우옌쑤언푹 베트남 국가주석의 방한도 북한에 주는 시사점이 많다. 어제의 적이었던 한국과 베트남은 지금 상생의 전략적 동반자이다. 지난 10년 동안 베트남 국민총생산액은 3배 이상, 1인당 소득은 2010년 1690달러에서 2021년 3716달러로 두 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베트남 성장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이 다름 아닌 한국이다. 1988년부터 작년 말까지 외국 누적투자액 1위가 한국이다. 삼성이 215억 달러를 투자하는 등 한국 기업의 누적 투자액은 비공식 포함 900억 달러가 넘는다. 한국이 인구 1억 명의 베트남 경제를 견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궁금하다. 김여정은 악담만 퍼붓지 말고 남쪽을 향해 한번 손 내밀어 보길 바란다. 북핵만 포기한다면, 대한민국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지 않는다면 한국은 북한을 언제든 도와줄 의지와 능력이 있다.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겠다는 첫 약속부터 지켜야 인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최근 세계적으로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가(AI)가 급속히 확산되는 데 대비해 농림축산식품부가 방역 조치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미국은 올해 처음 가금농장에서 AI가 발생해 지금까지 47개 주에서 역대 최대 규모인 5054만 마리의 가금류를 살처분했다. 유럽에서도 올해 37개국 이상에서 2467건의 고병원성 AI가 발생해 약 5000만 마리의 가금이 살처분됐다고 밝혔다. 특히 영국의 경우 지난 1년간 방목 농가의 칠면조 40%가 폐사하는 등 200건 이상의 감염 사례가 보고됐고, 모든 가금류의 방사 사육이 금지됐다. 고병원성 AI는 국내에서도 심상찮게 퍼지고 있다. 10월 17일 경북 예천군 소재 종오리 농장에서 고병원성 AI가 처음 발생한 이후 이달 14일 기준 가금농장에서 총 46건이 발생했다. 올해 12월에 우리나라에서 관측된 철새 수는 지난해와 비슷한 156만 마리였지만 야생조류 고병원성 AI 검출 건수는 83건으로 작년(17건) 대비 항원 검출이 4.9배다. 올해 고병원성 AI 바이러스는 예년에 비해 병원성이 강하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특히 오리 폐사율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농식품부는 과거 사례를 고려할 때 12월은 고병원성 AI 발생 위험도가 높아 지자체와 축산농가에서 소독 조치를 예년의 2배 이상으로 늘릴 것을 요구하고 있다. 최근 집중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영산강 유역 4개 시군(나주·영암·무안·함평)과 안성 지역에서의 지역적 위험도를 고려해 추가 발생 및 확산 방지를 위해 강화된 방역 조치를 취하고 있다. 농장별 알 반출 동선 등을 파악해 관리하고 가금농장 출입 최소화 조치 및 농장별 내·외부 소독과 점검 등을 통해 산란계 농장의 차단 방역 관리를 강화하고 있다. 또 고위험 10개 하천 인근에 소독 자원을 확대 투입하는 한편 소독차량 31대를 동원해 산란계 농장 진입로 등의 소독을 기존보다 2배로 강화했다. 농식품부는 생필품인 계란 가격이 급격히 상승할 경우에 대비해 계란 수급 상황이 악화될 경우 신선란을 직접 수입 공급할 계획이다. 한편 가금류를 대량 살처분하는 상황이 와도 계란 생산 기반이 조기에 회복될 수 있도록 산란용 병아리와 종란을 수입해 살처분 농장에 우선 공급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예방적 살처분 농가에만 지원되던 긴급 경영안정자금에 고병원성 AI 발생 농가도 포함하고, 휴업 등 사유로 현재 비어 있는 산란계 농장에 새로 들어오는 농가도 지원하는 방안 등 가능한 조치를 모두 준비하고 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삼성증권이 공식 유튜브 채널 ‘Samsung POP’을 통해 ‘2023년 시장 전망’ 영상을 시리즈로 제공해 인기를 얻고 있다. 삼성증권 소속 애널리스트가 출연해 2023년 전망과 이에 따른 투자전략을 소개하는 이번 시리즈는 글로벌 경제전망에서 각 산업 섹터별 전망까지 총 20여 편이 순차적으로 업로드되고 있다. 가장 먼저 공개된 영상은 ‘2023년 글로벌 경제 전망’(사진)이다. 매크로 분석을 담당하는 허진욱 팀장이 출연해 주요 국가들의 경기 전망과 함께 글로벌 시장의 주요 이슈인 인플레이션과 통화정책에 대한 전망을 소개한다. 또 주식과 채권 등 금융시장에 대한 투자전략도 제시한다. ‘글로벌 자산배분 전망’을 주제로 한 영상도 주목받고 있다. 글로벌투자전략을 담당하는 유승민 팀장이 출연해 내년의 경기 국면은 어떻게 전개될지, 그리고 이에 따른 자산배분 전략은 어떻게 가져가야 할지 소개한다. 경기의 수축 국면이 이어질 상반기에는 주식보다는 채권을, 회복 국면에 접어드는 하반기부터는 채권보다 주식이 유망하다고 소개한다. 주요 국가별 전망과 주식, 채권 등 각 자산군별 전망, 그리고 반도체, 2차전지 등 각 산업 섹터별 전망이 차례로 올라가고 있다. 투자자들과의 공감 확대를 위해 유튜브를 적극 활용하고 있는 삼성증권은 올해 국내 최초로 가상인간을 활용한 ‘비주얼애널리스트’ 시대를 연 데 이어 다양한 방식의 투자정보를 제공해 월평균 90만 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아동권리보장원이 15일 종로구 소재 본원 대회의실에서 ‘아동 미래비전 포럼’을 열어 아동권리의 올바른 방향을 모색한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최재형, 강훈식 의원실과 공동으로 주최하는 이번 포럼에서는 ‘아동기본법’의 주체인 아동이 토론에 참여해 ‘아동기본법’의 방향을 논의한다. 어린이날 제정 100주년인 올해, 아동에 대한 정책 수립·조정 및 지원 등에 관한 기본적인 사항을 규정하고 권리보장에 대한 국가·사회·가정의 책무를 규정하는 아동기본법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아동권리보장원은 1991년 제정된 ‘청소년기본법’, 2020년에 제정된 ‘청년기본법’에 이어 다음은 아동기본법이 제정될 차례로 보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윤혜미 아동권리보장원장은 “과거의 교훈과 우리 아이들의 현재 모습은 ‘아동기본법’ 제정을 요구하고 있다”라며 “아동의 생존에서부터 발달, 보호, 참여의 권리와 책임을 국가 차원에서 규정하는 것이야말로 아동권리 실현의 기초 작업이다. 보건복지부와 아동권리보장원은 아동기본법이 조속히 제정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아동권리는 아동의 행복감에 직결되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국제적으로 비교해 보면 우리나라 아동의 행복감은 높지 않다. 2018년 조사에서 ‘거의, 전혀 행복하지 않다’고 응답한 우리나라 15세 아동의 비율은 13.3%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인 8.9% 대비 1.5배 정도 높았고, 일본(8.8%)과 미국(7.1%)에 비해서도 높았다. 2018년 한국의 아동빈곤율(12.3%)이 일본(14.0%)과 미국(21.2%)에 비해 낮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물질적 풍요가 아동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는 결과는 아동의 행복이 훨씬 포괄적인 개념임을 말해준다. 아동의 행복감은 아동 일상의 균형 및 생활의 주도성과 관련이 깊다. 즉, 아동이 자신의 권리를 충분히 누릴 수 있을 때 행복감이 높아지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아동 관련 제도와 법률은 주로 문제가 발생했을 시 이를 시급히 해결하기 위한 단편적인 대응 방안이 주를 이루고 있고, 아동권리 실현을 위한 국내법이 부재한 현실이다. 아동권리보장원 관계자는 “아동은 그 어느 대상보다도 국가의 역할과 책임이 중요한 대상이라는 점에서 아동정책의 목표와 이념을 제시하고, 아동의 존엄한 가치와 행복 추구의 권리보장을 규정할 법규의 필요성은 더욱 크다”고 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만남은 우리의 꿈이었다. 만남 이후의 삶은 그려보지 못했다. 함께 산다는 것 이상의 의미는 꿈 너머에 있었다. 만남이 너무나 간절했기에 한 번만이라도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다면 더 원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그 소원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정작 행복하지만은 않다. 아이들은 훌쩍 커버렸고, 작은 일에도 상처를 받는다.날마다 일상에 쫓기며 현재를 산다. 아이들의 마음을 다독이고 헤아리는 일에 무심했다. 우리의 만남이 지난 시간을 보상하고 상처를 치유하리라 믿었다. 가끔 아이들과의 언쟁에서, 쓸쓸한 표정에서 지난날의 상처를 발견하면 나는 한없이 무너진다. 상처는 감추어져 있을 뿐 치유되지 않았음을 느낀다. 어떻게 해야 어두운 그림자를 흔적없이 지울 수 있을까?”그는 눈물을 흘리며 자판을 두드렸다. 엄마가 겪어야 했던 굴곡의 삶을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설명해야 할까. 엄마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너희들에게 열어 보일 수 있을까.“지키기 위해 놓아야 했고, 만나기 위해 헤어져야 했던 시간을 돌아보며 의심한다. 만남은 꿈의 실현이었지만, 함께 하는 첫 시작이기도 했다. 가족이어서, 가족이기 때문에 서로의 상처를 건드리기 겁났다. 곪은 상처는 빨리 수술해야 하지만 시간이라는 약에 기댔다. 미숙했던 자신을 탓해보지만 지난날을 되돌릴 수는 없다.”그는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 지난날은 되돌릴 수 없지만 기록은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엄마의 이야기가 말이 아닌 책을 통해 아이들에게 더 잘 전달되길 바랄 뿐이었다. 짬짬이 글을 썼다. 그렇게 한 권의 책이 세상에 나왔다.지난달 출판된 저서 ‘엄마의 이별 방정식’의 저자 허옥희 씨는 한국에 입국한 3만5000여 탈북민 중 한 명이다. 그는 태어난 곳과 지도자를 잘못 만난 탓에 혈육과 헤어져 타향에서 온갖 고생을 다 하다가 운 좋게 한국에 입국한 2만 여 탈북 여성 중 한 명이다. 가족을 위해, 가족이 다시 모여 살기 위해 온 몸을 내던졌지만, 과거의 쓰린 상처는 그도, 가족들도 수시로 아프게 했다. 그러나 아프다고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치유하고 다시 일어서야 했다. 그는 어머니이기 때문이다.“우린 양반 가문이다.”허옥희 씨는 1967년 함경북도 청진 시에서 태어났다. 인민학교에 들어갈 즈음 아버지가 사회보장대상자가 됐다. 북한에서 사회보장대상자는 “나이가 많거나 병 또는 신체장애로 노동능력을 잃은 사람, 돌볼 사람이 없는 늙은이, 어린이”로 규정하고 있다. 당시 아버지의 나이는 38세에 불과했다.아버지의 아버지는 6.25전쟁 때 월남했다. 북한에선 가장 출신성분이 나쁜 계층에 속하게 된 아버지는 남들이 기피하는 청진화학섬유공장 방사직장에서 일하게 됐다. 방사직장은 실을 뽑기 전 누에고치를 삶아 가공하는 곳인데, 각종 산성물질을 쓰고 유해가스에 노출된 곳이다. 이곳에서 20년 버티는 사람은 없다.허 씨의 부친도 38세에 노동능력을 상실했다. 직장에서 나온 지 얼마 안돼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북한은 평양을 비롯한 대도시들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지방으로 보냈다. 명분은 전쟁 때 공습에서 보호한다는 것이지만 실제로 농촌에 내쫓긴 사람은 출신성분이 나쁘거나 허약한 사람들뿐이었다.허 씨네 가족은 회령 시내 인근의 한 농촌으로 이주했다. 이곳은 허 씨 어머니의 고향이었다. 허 씨의 외할아버지도 월남자 출신이었다.도시에 살던 허 씨는 매일 한 시간 넘게 농촌길을 걸어 학교에 갔다. 학급 학생 55명 중 20명이 그처럼 도시에 살다가 쫓겨서 온 애들이었다. 4남매 중 맏이인 허 씨는 동생들의 본보기가 되기 위해서 학교에도 결석 한 번 없이 열심히 다녔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자신이 할 일이 공부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아버지는 회령에 와서 공장 합숙에 불을 때주는 일을 했다. 딸이 “다른 애들 아버지들은 당원인데 아버지는 왜 당원이 아니냐”고 물었을 때 아버지는 한참을 말 못하고 있다가 “우리 허 씨는 대대로 양반 가문이다”고 대답했다. 출신성분이 뭔지 아직 모르는 딸에게 그 말밖에 해줄 말이 없었던 것이다.북한에서 월남자의 손녀에게 허락된 직업은 노동자 밖에 없었다. 허 씨는 1983년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 근처의 제지공장에 취직했다. 화약이나 시멘트 포장지를 생산하는 곳이었다. 공장에서 허 씨는 폐수를 정제해 두만강에 흘러 보내는 직장에서 7년 동안 일했다. 그동안 노동당원이 되기 위해 일도 열심히 하고, 남들이 기피하는 돌격대도 자원해 나갔지만 의미 없는 몸부림이었다.허 씨가 취직했을 때 공장은 건설된 지 1년 밖에 안 된 새 것이었지만, 나중에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을 거치며 공장은 빈껍데기만 앙상하게 남았다. 먹고 살기 어려운 노동자들이 기계는 물론이고, 유리와 못까지 몽땅 뜯어 중국에 팔았던 것이다.국군포로 시아버지어느 덧 결혼할 나이가 되자 중매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허 씨는 고향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23세 때인 1990년 회령 세천에 있는 탄광에서 목수로 일하는 남자와 결혼했다.그가 선택한 남자의 기준은 처가를 부양할 수 있는 남자였다. 맏이인 허 씨는 세 명의 동생을 자신이 돌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부모님이 연로할 때도 자기가 그 책임을 떠맡을 생각이었다. 결혼한 남자는 막내인데,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결혼식을 올리느라 세천으로 가면서 남편이 연애할 때 자신을 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썼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그가 살던 마을과 탄광 마을은 80리 떨어져 있고 통근열차가 다녔는데, 제 시간에 다닌 적이 한번도 없었다. 통근열차로 80리를 오는데 최소 반나절, 때로는 하루가 꼬박 걸렸다. 그 기차를 타고 남편은 회령에 와서 허 씨를 잠깐 보고 돌아가곤 했던 것이다.세천은 작은 분지를 빙 둘러싸고 1만 가구 정도의 작은 집들이 따닥따닥 붙어있는 곳이었다. 허 씨가 시아버지를 만나보니 말투가 이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국군포로 출신이었다.6.25전쟁 전 대구에서 딸 2명을 키우며 살던 시아버지 김성섭은 1951년 징집돼 싸우다가 포로로 잡혔다. 대다수 국군포로와 마찬가지로 김 씨도 함북의 열악한 탄광에 끌려와 노동을 했다.세천에는 국군포로들이 여럿 있었다. 허 씨가 결혼해 갔을 때 이들은 모두 은퇴한 늙은이들이었다. 하지만 국군포로끼리는 만나지 못했다. 북한 당국이 늘 감시했기 때문이었다. 길에서 마주치며 인사만 하는 정도였다.시아버지는 “우리 집 옆에 큰 목재공장이 있었는데”로 시작해 고향 이야기를 종종했다. “지금쯤이면 우리 고향엔 보리가 파랗게 자랄텐데” 또는 “서울대 법대 다니던 처남은 잘 돼 있을 거야”라는 식으로 고향을 떠올렸다.나중에 한국에 왔을 때 허 씨는 시아버지의 행적을 찾아보았다. 대전 현충원에 전사자 김성섭의 묘가 있었다. 딸들도 찾았다. 기차를 타고 부산에 도착하니 할머니가 나왔다. 아들도 40대가 넘었다.다섯 살에 아버지를 잃은 딸은 힘들게 성장했다. 가슴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가득했다. 허 씨는 자신이 갖고 간 시아버지의 사진을 넘겨주었다. 딸은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아버지 사진을 보여주었다.그 사진 속엔 키가 훤칠한 와이셔츠 차림의 젊은 남자가 환한 표정으로 있었다. 허 씨가 건넨 사진 속에는 70대가 넘은 허리 구부정한 노인이 있었다. 두 여인은 사진 속 낯선 남자를 말을 잊고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시아버지가 우리 집안에서 제일 성공했을 것이라던 처남은 6.25전쟁 때 미군 통역으로 참전했고, 이후 검사로 쭉 지내다가 사망했다고 한다.담배 장사1990년대 초반부터 함북에는 배급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다. 부업도 할 수 없는 탄광마을에선 더 이상 살기 어려웠다. 허 씨는 1991년에 태어난 어린 딸을 데리고 다시 친정집으로 내려왔다. 장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가족을 지키려면 그 길밖에 없었다. 1994년엔 둘째 딸도 태어났다.그는 처음엔 담배 장사를 하다가 이후 닥치는 대로 벌었다. 식량도 팔고 음식도 팔았다. 그래도 입에 겨우 풀칠하는 수준이었다.1990년대 중반 허 씨의 동네에는 가족이 죽지 않은 집이 없었다. 허 씨는 전쟁이 나도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죽지 않았을 거란 생각을 했다. 그의 외할머니도 자식들이 고생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던지 1996년에 스스로 곡기를 끊고 단식을 하다가 12일 만에 돌아갔다.남편도 나중에 탄광을 떠나 회령에 왔지만, 북한에서 남성은 더 엄격하게 조직생활을 해야 했다. 장사는 못하고 늘 도로닦이나 외지 파견과 같은 의미 없는 동원에만 뽑혀 다녔다.장사를 하면서 허 씨는 전혀 다른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지금까지는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고지식하게 살아왔지만, 돈을 벌지 못하면 가족을 잃게 되는 처지로 내몰리자 죽기 살기로 돈을 벌었다.1996년부터 허 씨는 담배를 만들어 파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장마당이 정착되면서 북한도 빠르게 분업화되기 시작했는데, 허 씨네 마을은 여과담배를 만들어 파는 동네가 됐다. 누구는 평양 쪽에 가서 ‘힐튼’ ‘말보로’ 등 외국 브랜드를 찍어 인쇄한 담배 포장지를 날라 오고, 누구는 중국에서 여과필터를 들여다 팔고, 누구는 독초를 사서 담배를 말았다. 손으로 여과담배를 만드는 것은 정교한 작업이 필요하다. 특히 풀칠을 잘 해야 했고 담배와 향 배합 비율도 잘 맞춰야 했다. 허 씨네 마을에선 이렇게 담배를 만들어 파는 집이 여러 집 있었는데 수공업으로 만들다보니 집집마다 만드는 담배의 맛이 달랐다.전국에서 장사꾼들이 들어와 담배를 사갔다. 이들은 담배 포장 수준만 봐도 누구네 집 담배인줄 귀신같이 알아봤다.허 씨는 처음에는 하루에 대여섯 보루밖에 만들지 못했지만, 나중에 숙련되니 열 보루 이상 만들었다. 하루 담배 2000대를 두 손으로 말고 풀로 붙인 것이다. 대량 주문을 받으면 2~3일 밤을 자지 않고 정신이 몽롱한 채로 담배를 말았다.허 씨의 담배는 점점 맛이 좋다고 소문이 났다. 장사꾼들이 끊임없이 그의 집을 찾아왔다. 허 씨는 수요를 맞추려고 사람을 쓰기 시작했다. 허 씨의 집에서 사람들이 벽을 마주보고 앉아 하루 종일 일했다. 담배를 전문적으로 마는 사람, 붙이는 사람, 포장하는 사람으로 분업화하니 능률도 올라갔다. 2000년쯤엔 허 씨는 열 명 정도를 고용해 쓰는 자본가가 됐다.열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자기 집에 불러 일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허 씨는 그때부터 담배 무게를 저울에 달아 집집마다 나눠주며 일을 시켰다. “내일까지 이걸 다 말아서 오라”고 하면 사람들이 밤을 새서 만들어 주었다.규모가 커지니 돈도 많이 벌었다. 돈을 번 뒤 집을 샀다. 처음엔 아파트를 샀는데 물도 제대로 나오지 않아 고생이 심했다. 그래서 아파트는 군대에서 제대돼 온 남동생에게 주고 단층집을 사서 따로 나왔다. 탈북장사를 해서 돈을 좀 번다는 소문이 나자 돈을 뜯어내려 찾아오는 사람도 많아졌다. 보안원이 찾아와서 “요즘 국가 담배들이 개인들에게 팔려나간다는데”라고 운을 떼기만 해도 수천 원씩 쥐어주어야 했다.누가 찾아와서 문을 두드릴 때마다 이번엔 또 누가 뜯어내려 왔을까 싶어 가슴이 떨렸다. 이중삼중의 수탈에 매일 같이 화가 났지만. 한편으로 국가에서 아무런 공급을 주지 않는 ‘미공급 시대’가 좋다는 생각도 했다. 과거엔 강냉이도 겨우 받아먹고 살았는데, 장사를 하는 시대가 되니 일한 만큼 돈을 벌고, 능력에 따라 쌀밥도 먹을 수 있고, 시장에서 금지된 책도 사볼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자신의 변화를 돌아보며 어떤 세상에서 사는가에 따라 인간의 운명도 바뀐다는 것을 체감했다.화가 나는 일이 생기면 그는 불빛이 훤한 중국을 건네다 보았다. 몰래 한국 영화도 보면서 “저긴 장사를 마음대로 할 수 있어 얼마나 좋을까” 부러워도 했다.어느 날 본 아동영화는 지금도 그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폭우가 쏟아지자 토끼들이 이사를 가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때 “토끼도 살기 어려우면 옆 동네로 이사를 가는데, 명색이 인간인 우리는 저런 자유도 없으니 얼마나 불쌍한가”고 한탄했던 것이다.2000년대 초반 그의 집을 찾던 장사꾼들의 발걸음이 점점 뜸해지기 시작했다. 나진 등 각지에 외국에서 들여온 기계로 위조담배를 전문 제조해 만드는 공장들이 많아진 것이다. 수제 담배는 더 이상 가격 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벌어들이는 액수는 줄어드는데, 설상가상 모아둔 돈마저 많지 않았다. 그동안 번 돈 중에 상당수는 남편이 탕진했다. 아내가 돈을 좀 벌기 시작한 뒤로 남편은 돈을 몰래 빼내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몇 년 만에 지독한 알코올 중독자가 돼 버렸다. 수없이 이혼 생각을 했지만, 북한에선 이혼이 사실상 금지됐다. 남편의 증세는 점점 심해졌는데, 동네에선 다들 남편이 몇 년 살지 못한다고 걱정했다. 남편은 그 몇 년도 채우지 못하고 어느 날 겨울 술에 취해 얕은 개울을 건너다 물에 빠져 죽었다.다시 가난해지는 삶에 절망하고 있던 어느 날 공부를 잘해 수재학교인 1고등중학교에 다니던 맏딸이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엄마, 나 학교 졸업하면 중국에 갈 거야. 우리 같이 가자. 가본 사람들이 말하는데 저긴 딴 세상이래. 난 무조건 갈 거야.”허 씨는 심장이 뚝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맏딸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딸은 간다고 하면 무조건 가는 애였다. 2~3년 뒤 어린 딸이 중국에 팔려가는 상상을 해봤다. 그건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허 씨는 딸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 자신도 더 이상 북한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딸에게 말했다.“우리 다 같이 가자. 그런데 함께 가면 위험하니 엄마가 먼저 가서 자리 잡고 너희를 데리고 올 거야.”허 씨는 2006년 1월 두만강을 넘었다. 맏딸에겐 간다고 말을 했지만, 둘째에겐 말도 못했다.“나를 팔아줘.”넘어갈 때 연길에 살고 있는 동네 친구를 찾아 일자리를 부탁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연길에선 감시가 심해 자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그는 다시 과거 자신의 신세를 졌던 아는 동생을 찾아 심양으로 향했다. 과거 중국에 살다 북송돼 감옥생활을 했던 그 동생은 갈 곳이 없어 한 달이나 허 씨네 집에서 머물렀었다. 심양에 가니 동생이 식당을 소개해주었다. 그는 우선 300위안을 받기로 하고 청소하는 일을 시작했다.그런데 중국은 막연하게 상상하던 그런 곳이 아니었다. 우선 말을 모르니 안전하지 못했다. 매일같이 언제 북송될지 모르는 공포에 떨어야 했다. 국경도시인 회령에 살던 그는 북송되면 어떤 처벌을 받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어느 날 그가 일하는 식당에 공안 두 명이 신고가 들어왔다며 들어왔다. 당시 그는 1층에서 청소를 하고 있었는데, 공안들은 어떤 신고를 받았는지 2층과 3층을 뒤지고 갔다. 천만다행으로 체포되지 않았지만, 여기에 더 머물 순 없었다. 그렇다고 어딜 가도 말을 모르기 때문에 발을 붙일 방법도 없었다. 집에서 기다리는 딸들에게 돈도 보내줘야 했다. 최악의 상황에 내몰린 그는 동생에게 말했다.“나를 팔아줘. 북송돼 고문 받고 짐승 취급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한족과 사는 게 낫다고 봐. 많은 탈북 여성들이 중국 시골에 팔려간다고 하는데, 나도 좀 팔아서 3000위안만 나를 주고 나머지는 네가 다 가져.”동생도 방법이 없었다. 허 씨를 데리고 있다간 자기도 더 위험해지는 것이다. 그는 북한 여성들을 파는 브로커를 찾아 데리고 왔다.브로커는 그를 차로 몇 시간 걸리는 외진 산골에 데리고 가더니 그곳에 이미 시집와 있는 어느 탈북 여성의 집에 맡기고 사라졌다. 이어 현지에서 다시 중매를 서주는 브로커가 나타났다. 그가 어떻게 말했는지 몇 시간이 되자 남자들이 하나 둘 나타나 그를 살펴보고 사라졌다. 저녁에 또 한 할머니가 와서 그를 살펴보더니 다음날 아침에 또 나타났다. 그리곤 브로커와 합의를 보았는지 그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30대 중반의 아들이 장가를 못 가자 모친이 나서서 북한 여자를 산 것이다. 집에 가보니 너무 기가 막혔다. 마을에서 가장 남루한 집이었고, 천정은 연기로 새까맣게 그슬려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심양의 브로커는 시골 브로커에게 허씨를 넘겨주고 1만 위안을 받았고, 이중 3000위안을 허 씨에게 주었다. 시골 브로커는 허 씨를 36세라고 속이고 1만6000위안을 받았다.당시 한족 동네에선 탈북 여성은 좀 살다가 말을 익히면 달아난다고 기피하는 분위기였다. 허 씨도 그 동네에서 계속 살 생각이 없었다. 말만 좀 익히면 도망가려 했다. 브로커도 허 씨에게 “도망치게 되면 나를 다시 찾으라”며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그가 도망가면 다시 딴 곳에 팔 생각이었던 것이다.사연을 알게 되면서 허 씨는 새 남편으로 인연을 맺은 한족 남성과 그의 어머니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이 가난한 집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1만6000위안을 들여 여자를 샀는데 내가 달아나면 이 사람들은 뭔 죄란 말인가.”시어머니와 남편은 그를 극진하게 대했다. 그렇지만 그는 북에 남겨둔 두 딸을 생각하며 늘 냉정해지려 마음을 가다듬었다.두 달쯤 지난 뒤 허씨는 시름시름 않기 시작했지만 신분증이 없어 병원으로 갈 수도 없었다. 시어머니가 동네 한약집에 가서 한 달 분 약을 사와서 하루 세 번 꼬박꼬박 약을 달여 주었다. 쓴 약을 삼키면 사탕을 입에 넣어주었다.허 씨는 북한에서 두 딸이 기다린다고 말했다. 남편은 두 말하지 않고 얼마나 필요하냐고 물었다. 1000위안이 든다고 하자 남편은 밖에 나가 친구에게서 그 돈을 빌려왔다. 그러나 돈을 보내는 브로커 비용 300위안이 더 필요한 허 씨는 밖에 나가 자신의 머리를 200위안에 팔았다.짧은 머리가 되어 나타난 허 씨를 보고 시어머니는 사연을 물었다. 그날 저녁 식탁에 앉은 세 사람은 아무 말도 없었다.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밥을 다 먹었을 때 시어머니가 슬그머니 100위안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일어섰다.그때 허 씨는 이런 사람들을 버리고 달아나려던 자신을 끊임없이 자책했다. 꽁꽁 얼었던 마음이 정에 서서히 녹기 시작했다. 남편은 북한에서 두 딸을 데려오면 자기가 잘 키우겠다고 말했다. 2008년 2월 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다.가족의 완성어느 날 한국에서 전화가 왔다. 심양에 살던 동생이 그동안 한국에 갔던 것이다. “언니. 거기 있지 말고 빨리 여기로 와. 내가 선을 알려 줄게.”그런데 그때는 몸이 아파 갈 형편이 못됐다. 두 번째 전화가 왔을 때는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세 번째 전화를 받았을 때 아이가 6개월 정도 됐을 때였다.허 씨는 끊임없이 고민했다. 한국에 가서 새 삶을 살 수 있는데, 이렇게 낙후된 타국의 농촌에서 평생 농사짓는 아낙네로 살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북에서 데려오려는 딸들까지 그렇게 살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떠나자고 하니 ‘마마’라고 부르며 방바닥을 기어 다니는 아들이 밟혔다.남편에게 몰래 “내가 한국에 가서 자리 잡고 당신과 아들을 데리고 오겠다”고 말하자 그는 눈물만 뚝뚝 흘리며 아무 말도 못했다. 탈북 여성들이 다 도망친다는 말을 들었는데, 드디어 자기에게도 그런 운명이 오는구나 싶었던 것이다.시어머니에겐 말도 꺼내지 못했다. 설득해서 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세 번째로 거절하면 한국으로 가는 선이 영영 막힐 것 같았다.2008년 10월 허 씨는 모질게 마음먹고 데리러 온 사람을 따라 집을 나섰다. 그를 따라 동남아 국가를 거쳐 이듬해 1월에 한국에 도착했고, 5월에 사회에 나왔다.처음 정착한 곳은 대전이었다. 그의 머리 속엔 자식들을 데려와 한 집에서 살게 하겠다는 마음 밖에 없었다.닥치는 대로 일했다. 차 부품업체에 들어가 120만 원을 받고 일했다. 반찬을 살 돈도 아까워 죽만 쒀서 먹었고, 세탁기 살 돈이 가까워 손으로 빨래를 했다.집 앞에 있는 과일 가게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탐스러운 사과를 사먹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딸을 생각하며 참았다. 나중에 그는 딸이 한국에 온 뒤에야 처음으로 그토록 사고 싶었던 사과를 사먹었다. 그렇게 악착같이 일해 6개월 만에 700만 원을 모았다. 그리고 여권이 나오자마자 주변 사람들의 돈까지 빌려 1000만 원을 들고 중국으로 향했다.처음 찾아간 곳은 시어머니와 남편이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은 물론 아들까지 두고 도망간 북한 며느리에 대한 원망이 가득 차 있었다. 기어 다니던 아들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마당에서 놀고 있다가 허 씨를 보자 아버지 품으로 숨어버렸다.허 씨가 온 진짜 목적은 이들이 아니라 북한에 남겨둔 두 딸을 데려오는 것이었다. 그는 남편과 함께 연길로 갔다. 그곳에서 브로커를 찾아 딸을 데려오는 작전을 짰다.남편이 직접 두만강에 나가 강을 건너온 두 딸을 맞았다. 첫째 딸은 강을 건너면서 신발을 잃어버렸다. 남편은 자기 신발을 벗어주고, 자신은 양말만 신고 밤새 산을 함께 넘었다. 연길에서 두 딸과 상봉할 때의 그 감격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다. 삼촌 집에 맡겨져 자란 두 딸도 엄청나게 고생했다. 3년 10개월 만에 나타난 엄마에 대한 원망이 너무나 컸다.고마운 것은 딸들이 자기들을 맞아주고 어둠 속 산길을 함께 넘었던 남자가 엄마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허 씨는 두 딸을 데리고 직접 중국 남부 도시로 향했다. 이동을 안내하는 한족 브로커들의 손에 20살과 17살 된 딸을 차마 맡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두 딸이 동남아 국가로 가는 버스를 타는 것까지 보고 그는 한국에 들어왔다.딸들도 몇 달 뒤 무사히 한국에 들어왔다. 한국에 와서야 허 씨는 딸들에게 중국에 남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맏딸이 말했다. “엄마, 난 다 받아들일 수 있어. 동생이 있으면 좋지.”허 씨는 중국의 남편과 아들도 다시 몇 달 뒤 국제결혼으로 데리고 왔다. 드디어 허 씨가 그렇게도 꿈꾸던, 한 집안에서 모여 사는 가족이 완성된 것이다.“이게 제 잘못인가요.”그러나 그 꿈은 얼마 안돼 깨졌다. 딸은 몇 달 뒤 대학 입시를 준비한다며 입시 준비학원으로 갔고, 둘째도 대안학교에 가서 공부한다며 기숙사로 나갔다. 다시 뿔뿔이 흩어진 것이다. 곧 딸들은 또래와 어울려 다니며 한국 사회에 빠르게 녹아들었다.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긴 쉽지 않았다.대학에 입학해 3년쯤 다니던 맏딸은 탈북자라는 꼬리표가 싫다며 호주로 건너가 현지에서 대학을 다닌 뒤 한 회사에 다니고 있다. 둘째도 서울에서 대학을 나와 회사에 취직해 잘 다니다가 얼마 전에 결혼했다.허 씨는 집에서 16살 된 아들과 함께 산다. 세 살 때 한국에 온 아들은 이젠 중국말을 다 잊어버리고 완전히 한국 아이가 됐다. 허 씨는 한국에 온 뒤 아들의 중국 성 씨를 자신의 성으로 바꾸었다. 자라면서 “엄마, 나는 왜 누나들과 성이 달라?” “엄마, 작은 누나 방에 있는 가족사진 속 남자는 누구야” 등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질 때면 가슴이 아팠지만, 지금은 아들도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다. 이중국적자라 몇 년 뒤 성년이 되면 자신이 직접 국적을 선택해야 하는데, 한국 국적으로 선택하라는 엄마에게 “그때 가서 보자”는 말만 해 속을 썩이고 있다.남편은 아직도 한국말을 잘 하지 못한다. 그는 한국에 오자마자 건설현장에 취직해 열심히 돈을 벌고 있다. 지금도 “내가 돈을 잘 벌지 못해 당신이 나가 돈 벌게 한다”며 자책하는 착한 마음은 그대로다.허 씨는 중국에서 딸을 데리고 온지 얼마 안돼 서울로 이사를 했다. 임대아파트를 교환하기 위해 SH공사에 찾아갔을 때 여직원이 가족관계를 적으라고 했다.한족인 남편과 아들, 탈북자인 두 딸을 적어 내자 여직원이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말하려다 말꼬리를 흐렸다. 그 눈빛과 말을 허 씨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나도 내 인생이 이렇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살다 보니 이렇게 됐는데, 이게 제 잘못인가요.”허 씨와 남편은 2019년 2500만 원을 들여 중국에 사는 시어머니에게 좋은 집을 지어주었다. 허 씨가 들어갔을 때 제일 한심했던 집이 지금은 동네에서 제일 좋은 집으로 바뀌었다.“저는 북한에 있을 때 동생 두 명에게 집을 사주었어요. 그리고 중국에도 지어주고 하니 제 인생에 집을 세 채나 가족들에게 해주었네요.”본인도 지금 서울 강동구에 새 집을 분양받아 잘 살고 있다. “우리의 잘못이 아닙니다.”서울에 올라와서 허 씨가 택한 직업은 간호조무사였다. 40세가 넘으니 취직도 안 되고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 평생 일할 수 있는 요양보호사라는 직업을 선택했다. 짬짬이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땄다. 이후 간호조무사로 2년, 요양원에서 1년 일한 뒤 2015년 1월 미사리 인근인 하남 신장동에 ‘114방문요양센터’를 만들어 센터장이 됐다. 지금은 사회복지사 1명과 요양보호사 25명이 센터에서 일하고 있다.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는 말투를 보고 보호자들이 “중국 사람이 이런 일도 하냐”며 물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그러나 이젠 말투를 많이 고쳐 물어보는 사람도 많지 않다고 한다.노인들을 상대하는 직업적 특성상 늘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다.“나는 어떤 노인으로 늙어야 하는지 계속 생각하게 돼요. 그리고 돈이 있다고 늙어서도 행복한 것은 아니더군요. 돈이 있어 더 불행한 노인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나는 어떻게 늙어야 하는지, 자식에게 어떤 엄마가 돼야 하는지 계속 생각할수록 자식들과의 관계가 계속 걸렸다.딸들을 데려왔지만, 이들은 그들의 인생을 살게 되고, 엄마도 계속 밖으로 나가 일을 하다보니 생각만큼 서로가 다가가지 못했다. 서로 간 갈등도 많았다.“엄마의 입장에선 내가 너희들과 좋은 곳에서 살기 위해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 알게 하고 싶은데, 딸들은 지금도 사춘기에 자기들을 오랫동안 두고 사라진 엄마를 원망하는 마음이 있어요. 만나고 보니 내가 북에 두고 올 때의 그 애들이 아니었어요. 둘째 같은 경우는 엄마가 갑자기 사라지고 많은 고생을 겪다보니 충격이 컸던 것 같습니다. 자식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그 애들은 엄마가 잔인하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그런데 이제 다 자라 성인이 된 딸들과 서로 마주 앉아 속을 터놓고 얘기하긴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생각한 것이 엄마의 마음을 담은 책을 내는 것이었다.“제가 한국에 와서 살아보니 정말 좋은 점이 많은 곳입니다. 북한에선 정부가 시키는 대로 해야 했지만, 여기선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뭐든지 할 수 있고, 자기 주도적으로 살 수 있어요. 여기선 나를 위해 살 수 있다는 말이죠. 저를 보면 40세가 넘어서도 배울 수 있고, 또 글을 써서 책을 내고 싶으면 이 나이에 책도 낼 수 있지 않습니까. 이곳이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의 땅이니 다른 탈북민들도 북한에서처럼 수동적으로 살지 말고 꿈을 가지고 주도적으로 인생을 살아갔으면 좋겠어요.”그가 책을 낸 동기는 또 있다.“주변에 보면 중국을 거쳐 오다보니 저와 비슷한 처지의 탈북 여성들이 꽤 많아요. 중국에서 원치 않은 삶을 살았고, 한국에 오면서 애들과 이별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삶을 두고 자신들이 큰 잘못을 한 것처럼 기를 펴지 못하고 사는데 용기를 주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우리의 잘못만은 아니거든요. 우리에게도 당당하게 살 권리가 있거든요.”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최근 북한에서 44만여 어휘가 수록된 ‘조선말대사전’ 신규 편찬 작업이 한창이라고 한다. 최신 증보판은 2017년에 발행됐지만 ‘괴뢰말찌꺼기’를 소탕하라는 김정은의 지시가 하달됨에 따라 10∼15년마다 진행하던 증보판 발행이 황급히 앞당겨질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 입수된 김정은의 2020년 6월 19일 비준 방침 ‘괴뢰들의 말투를 본따거나 흉내내는 쓰레기들을 철저히 소탕해버리기 위한 대책과 관련한 제의서’에는 김정은이 한국 말투에 어떤 분노를 느끼는지가 생생하게 드러난다. 이에 따르면 김정은은 그해 5월 13일 “청년들의 일상적인 언어생활에서 괴뢰 말투를 본뜨거나 흉내내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매우 심각한 국가적인 문제”라며 “괴뢰말찌꺼기들을 몽땅 불살라버리기 위한 저격전 추격전 수색전 소탕전을 전 당적, 전 국가적, 전 동맹적으로 강도 높이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또 “청년들 속에서 손전화로 말하거나 통보문을 주고받을 때 괴뢰들의 말투를 본뜨거나 흉내내는 현상이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런 것들을 괴뢰들의 문화에 오염된 쓰레기들로 단정하면서 시대적으로 배척당하게 만드는 것도 필요하다”고 했다. 2020년 5월은 “북한에서 한국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이 퍼지고, ‘니가 장군님이네’가 유행어로 뜨고 있다”는 보도가 한국 언론에 나올 때다. 김정은이 이걸 보고 분노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해 12월 공포된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은 한국의 영상물 도서 노래 그림 사진을 유입 유포한 경우 최대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남조선식으로 말하거나 글을 쓰고 남조선 창법으로 노래를 부르면 최대 노동교화형 2년을 언도할 수 있다. 지난해 상반기엔 긴급하게 ‘괴뢰말찌꺼기 자료’라는 것이 전국에 배포됐는데, 내용이 경악스럽다.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면 괴뢰 문화에 오염된 쓰레기가 된다. 오빠는 친인척 간에만 부를 수 있다. ‘친구, 여친, 남친’은 물론이고 기존에 잘만 쓰던 ‘정상회담, 수교’ 같은 단어도 괴뢰말찌꺼기로 분류돼 ‘최고위급회담, 외교관계 수립’ 등으로 써야 한다. ‘올케, 이례적, 파격적, 차원, 퍼센트, 전전긍긍’ 등도 괴뢰말찌꺼기로 분류됐다. ‘…세요 …게요 …거야 …드립니다’로 말을 끝맺어도 처벌 대상이 된다. 이뿐만 아니라 2000년 이후 출생자가 한국이나 중국 드라마에 나왔던 이름을 쓰면 개명하라는 지시도 내려졌다. 세나, 채린, 자영 등 수십 개의 이름이 금지됐다. 북한 사전 편찬자들은 언제 김정은의 불호령이 또 떨어질지 몰라 밤을 새워 괴뢰말찌꺼기 분리 작업을 해야 하는 처지다. 남쪽에선 민족 동질성을 회복한다며 ‘겨레말큰사전’ 편찬 작업에 18년 동안 450억 원 이상의 세금을 쓰고 있는데, 북한에선 민족 이질성을 목표로 탄압이 벌어지는 것이다. 반동사상문화배격법 발표 이후 북한 거리에는 ‘대학생규찰대’ ‘여맹규찰대’ 등 각종 규찰대들이 늘어서서 ‘손전화기(휴대전화)’ 검열을 한다. 불응하면 김정은의 방침에 불응하는 반동이 된다. 학교와 직장에서도 당 비서나 담당 보위원이 수시로 휴대전화를 검열한다. 휴대전화 검열에선 제일 먼저 주소록에 ‘오빠’라고 적힌 이름이 있는지부터 보고, 이어 ‘통보문(문자)’을 검사한다. 이제 북한에선 사생활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외부의 시선이 북한 미사일 발사나 김정은의 딸 같은 이슈에 머물러 있는 동안 북한 주민들은 2년 넘게 김정은의 화풀이를 받아내고 있다. 그런데도 김정은은 고삐를 늦출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인다. 지난달 19일부터 23일 사이 평양에선 전국 공안 기관 종사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전국보위일꾼’ 대회가 열렸다. 장성택 숙청 한 달 전인 2013년 11월에 열리고 9년 만에 다시 열리는 대회다. 북한 매체들에 따르면 대회에선 “반사회주의, 비사회주의적 행위들을 분쇄하기 위한 투쟁을 벌이는 과정에 이룩된 성과와 경험들이 소개됐다”고 한다. 공안 기관끼리 사람을 잡아들이는 방법을 공유하고, 서로 경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반동사상문화배격법에 따르면 2018년 4월 평양 수천 명의 관객 앞에서 ‘뒤늦은 후회’라는 한국 가요를 불러줄 것을 요청한 김정은부터 사형돼야 마땅하다. ‘봄이 온다’는 이름이 붙은 그 공연이 열린 뒤 북한엔 죽음의 칼바람이 부는 겨울이 왔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현대두산인프라코어와 월드비전이 함께하는 멘토링 프로그램 ‘드림스쿨’ 사업이 11년째를 맞았다. 26일에는 ‘2022 드림스쿨 홈커밍데이’가 코로나19로 3년 만에 대면행사로 열렸다. 경기 성남시 분당두산타워에서 열린 행사에는 주호민 웹툰 작가가 100여 명의 학생과 멘토 앞에서 강연을 진행했다. 주 작가는 웹툰을 그리게 된 계기와 웹툰 작가로서 겪은 다양한 경험, 상상력과 창의력을 이용해 꿈을 향해 달려 나가는 방법 등을 학생들에게 알기 쉽게 전달했고, 이들에 대한 응원과 격려로 강연을 마쳤다. 강연이 끝난 뒤 “웹툰 작가를 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자신이 가는 길이 맞지 않거나 잘못됐다는 생각으로 슬럼프에 빠지거나 힘든 적이 있었는지, 있다면 어떻게 해결했는지” 등의 다양한 질문이 쏟아졌다. 강연에 이어 학생들과 멘토들은 1년간의 활동을 돌아보고 서로의 친목을 다지는 시간도 가졌다. 아동·청소년들이 꿈을 포기하지 않고 진로를 찾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멘토링 프로그램인 ‘드림스쿨’은 현대두산인프라코어 임직원들과의 일대일 멘토링, 전문 멘토링 강연, 직업 체험, 문제해결능력 강화 프로젝트 등 진로를 구체화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제공한다. 드림스쿨은 올해 응급구조사의 심폐소생술 활동, 전문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메이크업 체험, 현대두산인프라코어 김주호 기술부장(명장)이 진행하는 드론 제작 및 조종 체험 행사를 진행했다. 코로나19의 여파로 지난 3년 동안은 대면 활동이 어려웠지만, 올해는 다행히 학생들과 멘토들이 다시 한 공간에 모여 꿈을 키워 갈 수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까지 5년간 드림스쿨 활동을 했던 정다해 학생은 “드림스쿨이 없었다면 다양한 경험을 해볼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꿈에 도전하기 힘들었을 텐데 이 프로그램을 통해 마음껏 진로와 미래를 꿈꿀 수 있었다”고 말했다. 올해로 10년째 아동들의 멘토로 활동하고 있는 양진석 멘토는 “저의 작은 관심과 시간 투자로 변화하는 학생들을 볼 수 있어 기쁘다”며 “저에게도 새로운 꿈을 꾸며 그것을 향하여 도전하는 시간이기도 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월드비전 국내사업본부 김순이 본부장은 “아동들이 올바른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 꿈은 정말 소중하고, 또 꿈을 지지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큰 힘이 된다”며 “10년 넘게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아이들의 버팀목이 되어주신 현대두산인프라코어 임직원들에게 감사드리고 월드비전 역시 아동들의 꿈 지원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최근 북한은 한류를 차단하기 위해 잇따라 상상 이상의 혹독한 처벌이 따르는 법률을 새로 제정했다. 2020년 12월에 만들어진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은 ‘남조선 영화나 록화물, 편집물, 도서를 유입, 유포한 경우 무기노동교화형 또는 사형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집단적으로 남조선 영화나 록화물, 편집물, 도서를 시청, 열람하도록 조직하였거나 조장한 경우’에도 사형이며, 단순한 시청에도 15년 로동교화형을 선고하고 있다. 2021년 9월에도 ‘청년교양보장법’을 제정해 ‘사회주의 생활양식 확립을 위한 사업에서 청년들이 하지 말아야 할 사항들과 기관·기업소·단체·공민이 하지 말아야 할 사항, 청년교양보장법의 요구를 어기는 위법행위를 했을 때 어떤 법적 책임을 지게 되는지’를 규제했다.이제 북한에선 부부 사이에 ‘오빠’라고 하거나 애인을 ‘남친’ ‘여친’이라고 부르게 되면 괴뢰말찌꺼기를 쓴다고 보위부에 끌려가 심문을 받아야 한다. 김정은은 왜 한류 열풍에 이처럼 극도의 공포감을 갖고 있는 것일까.이달 초 한국언론진흥재단 주최 ‘KPF 디플로마 베트남 전문가’ 교육 과정의 일환으로 베트남을 방문하면서, 한류가 얼마나 무서운 바람으로 번질 수 있는지를 체감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살면 한류의 위력을 실감할 수 없지만, 해외에선 일부러 의식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북한이 ‘한류’를 막겠다고 전대미문의 강력한 처벌 제도를 새로 제정하고 있는 동안, 사회주의 베트남은 한류에 홀려 있었고, 북한이 괴뢰말찌꺼기라고 혐오하는 한국어는 베트남 사람들에겐 너도나도 배우고 싶은 언어가 됐다.2021년 베트남 정부는 한국어를 제1외국어로 지정했다. 제1외국어가 되면 초중고 10년 교육 과정 내내 한국어를 배울 수 있다. 각 학년은 주당 3시간씩, 연간 105시간의 한국어를 배우게 된다. 베트남에서 제정된 제1외국어는 영어, 중국어, 일본어, 독일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6개였는데 한국어가 1외국어로 격상되면서 7개가 됐다. 내년까지 베트남의 62개교에서 1만 명이 넘는 학생들이 한국어 과정에 등록해 공부할 예정이다. 현지에서 한국어의 위상은 7번째로 지정된 제1외국어 이상이다. 베트남 국립외국어대 쩐티흐엉 한국어 및 한국문화학부 학부장은 “많은 대학에서 한국어 전공 학생 입학 점수가 항상 상위에 속해있으며 우리 대학의 경우 시험에서 만점을 받아야 들어올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베트남에선 53개 대학에서 한국어학과 및 교양 강좌를 운영하고 있다.한국어 열풍을 타고 외국에 대한 한국어 및 한국문화 보급을 위하여 설립된 특수법인인 세종학당도 베트남에서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 베트남은 전 세계에서 세종학당이 가장 많은 나라에 속한다. 현재 전 세계에서 운영되는 244개의 세종학당 중 23개가 베트남에 있다. 2011년 베트남에 3곳으로 진출한 이후 10년 만에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 세종학당을 거쳐간 수강생만 누적으로 58만 명에 이른다.베트남에서 한국어가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이유는 한류 열풍과 더불어 월급이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 쩐티흐엉 학부장은 “한국어과를 다니면 3~4학년 때 한국 기업에서 미리 찜을 해놓고 졸업 이후 취직시키는데, 취업률이 100%”라고 설명했다.이규림 베트남거점 세종학당 소장은 “현지에서 베트남어를 하면 월급이 1배, 영어를 하면 월급이 2배, 한국어를 하면 월급이 3배라는 말이 돈다”며 그만큼 한국 기업이 선망을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지 대학 교수의 월급이 300달러 좌우인데 비해 한국 기업에 취직하면 3배 정도의 월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한국어 졸업자 중 우수한 학생은 최우선적으로 한국 기업으로 가려 한다. 이 때문에 학교들에서 한국어 교사 부족 현상은 만성적인 일상이 됐다.한국 유학길에 오르는 베트남 학생들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2009년 한국 내 베트남 유학생 비중은 2.3%에 불과했지만 지난해엔 23.5%로 10배 넘게 증가했다. 이런 바람을 타고 한국에 거주하는 베트남인들의 숫자도 꾸준히 늘고 있다. 외국인정책본부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에 공식적으로 등록하고 거주하는 베트남인은 약 17만9000명으로, 한국계 중국인(15만4000여명)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외국인 비율을 차지했다.비공식적인 체류까지 더하면 국내에 거주하는 베트남 인구는 훨씬 더 늘어나게 된다. 지난달 강원도 양양국제공항을 통해 국내에 무비자로 들어온 베트남인 100여명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이 한국에서 불법 체류를 택한 이유는 베트남에서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유도 있지만, 한국에 체류하면서 한국어를 익힌다면 나중에 강제추방이 되더라도 베트남 한국 기업에 취직해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이처럼 베트남에서 한국어를 한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엄청난 기회를 얻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뿐만 아니라 한국어를 한다는 것은 베트남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는 한국 문화 콘텐츠를 남들과 다르게 소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베트남에서 강풍으로 커지고 있는 한국어 배우기 열풍은 언어가 갖는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해준다.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를 넘어 권력이자 동경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한국에 비해 모든 것이 열세인 북한은 한국어를 괴뢰말찌꺼기라는 혐오의 단어로 규정해 한국에 대한 동경과 호감을 차단하려 하는 것이다. 경제력과 문화에서 두드러지는 열등감을 혐오와 증오로 메우려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사에 사례를 찾기 힘든 무형의 언어와의 전쟁은 성공할 수 있을까. 베트남을 보니 어렵지 않게 대답을 찾을 수 있을 듯 싶다. 한국의 국력이 북한을 압도하는 한 김정은은 종전을 선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늘 전쟁 중인 나라는 언젠가는 망할 수밖에 없다.하노이·호치민=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2019년 2월 27일 북미정상회담을 위해 베트남 하노이를 방문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공식일정을 시작하기 전 트위터에 이렇게 썼다.“베트남은 지구상에서 번영하는 흔하지 않은 나라로 북한이 비핵화하면 베트남처럼 될 것이며, 그것도 매우 빠르게 될 것이다.”트럼프 대통령의 베트남 찬사는 시차를 두고 연이어 이어졌다.“베트남이 짧은 기간에 이룬 것을 본다면 김정은 위원장도 아주 빠른 시간에 북한을 경제 강국으로 만들 수 있다.”그 말을 접했을 때 기자는 머리를 갸우뚱했다.“개혁개방한지 30년 넘었는데 1인당 국민소득이 세계에서 130위권인 2000달러 남짓에 불과한 베트남이 북한의 롤모델이라고?”하지만 이달 초 한국언론진흥재단 주최 ‘KPF 디플로마 베트남 전문가’ 교육 과정의 일환으로 하노이와 호치민을 방문한 뒤 기자의 생각은 많이 바뀌었다.“사회주의 베트남이 긴 잠에서 깨어나고 있구나. 그것도 다름 아닌 수십 년 전 총부리를 맞대고 싸웠던 대한민국이 베트남 번영의 가장 중요한 동반자가 되고 있구나.”이제 김정은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대한민국이 1억 인구의 베트남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잘 지켜보길 바란다.”베트남은 1986년 ‘도이머이 정책’을 발표했지만 오랜 기간 발전이 정체돼 있었다.세계은행에 따르면 도이머이 정책 이듬해인 1987년 베트남 국민소득은 367억 달러였는데, 15년 뒤인 2002년 국민소득은 그보다도 더 떨어진 350억 달러에 불과했다. 그러나 최근 10여년 동안 베트남의 국민소득은 3배 이상 급성장했다. 2009년 1060억 달러를 기록하더니 지난해 3626억 달러에 이르렀다.1인당 국내총생산도 더불어 비약적으로 도약했다. 2010년 1690달러였지만 2021년 3716달러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이러한 성장은 한국 기업의 베트남 진출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베트남 통계청에 따르면 1988년부터 2021년 말까지 외국 기업의 누적투자액을 집계한 결과 한국(747억 달러)이 일본(644억 달러)과 싱가포르(643.6억 달러)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집계에 잡히지 않는 투자까지 포함하면 한국 기업들의 베트남 투자 금액은 900억 달러가 넘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측하고 있다.현재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기업은 9000여개에 이른다. 베트남 호치민 공항에서 나오면 길 건너 건물에서 한국 효성과 LG 광고판이 크게 보인다. 시내로 차를 타고 달리면 곳곳에 한국 기업 광고들이 붙어있다. 베트남에서 한국 기업이 차지하는 위상을 엿볼 수 있는 사례이기도 하다. 특히 미국과 중국 사이의 무역 전쟁이 확대되면서 한국 기업의 베트남 진출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2022년은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 30주년을 맞은 해이다. 지난달 중순 박진 외교부 장관은 베트남을 방문해 양국간 기존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하기로 합의했다. 베트남이 최고 수준의 대외 협력 관계인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는 중국, 러시아, 인도 등 3개국 뿐이다. 그만큼 한국은 베트남에 중요한 경제협력 대상이 됐다. 양국이 경제와 문화 등에서 끈끈한 국가로 연결되는 것은 수치로도 확인이 된다. 베트남 관세청에 따르면 2021년 베트남 수입액에서 한국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두 번째로 많다. 베트남은 한국에서 중국(1099억 달러) 다음으로 많은 562억 달러어치를 수입했는데 이는 3위인 일본(226억 달러)에 비해서도 두 배 이상 많은 액수이다.한국의 입장에서 베트남은 세계에서 3번째의 수출시장이다. 2021년 베트남 수출액은 567억 달러로 중국(1369억 달러)과 미국(959억 달러)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베트남이 한국에 있어 일본(301억 달러)보다 더 중요한 교역국이 된 것이다.양국간의 무역 규모는 최근 10년 동안 4배 이상 급성장했다. 베트남과의 교역은 한국에 엄청난 무역흑자를 가져다주고 있다. 1965년부터 2021년까지 한국은 일본과의 무역에서 누적 무역적자 6939억 달러를 기록했지만, 베트남과는 1992년부터 2021년까지 3102억 달러의 무역흑자를 기록했다.베트남에 투자하는 한국 기업 중 선두주자는 단연 삼성그룹이다. 2008년부터 올해 말까지 삼성그룹의 베트남 누적 투자액은 215억 달러에 이를 전망이다. 올해 말까지 삼성의 1, 2차 베트남 협력업체 수는 250개에 이르고 이중 1차 협력업체만 52개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밖에도 삼성전자는 50개 베트남기업의 생산역량 향상을 위해 스마트공장 전환 및 개발을 지원하고 있다.LG그룹도 베트남에 50억 달러 이상을 투자했다. 롯데그룹 신동빈 회장은 올해 9월 베트남을 방문해 2030년까지 호치민시에 대형 복합 단지를 조성하고 일자리 500만 개를 창출하겠다고 약속했다. 만약 현실화되면 재계 순위 5위의 한국 기업이 인구 1억 명의 베트남 경제를 쥐락펴락하게 된다.이렇게 한국 기업들이 베트남 고속성장의 기관차 역할을 하는 것을 보면서 북한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같은 사회주의 체제를 표방하고 있고, 과거 적으로 싸운 베트남은 한국의 경제적 투자로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는데 북한은 거꾸로 한국을 핵과 미사일로 위협하면서 점점 경제가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다.인구 2000만 명에 불과하고 1인당 국민소득이 1000달러 안팎인 북한은 한국이 마음만 먹으면 10년 안에 국민소득을 몇 배로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북한은 말도 같고, 교육 수준도 높으며, 지리적으로도 붙어있다.그러나 북한과 베트남의 근본적인 차이는 핵무기 보유 여부이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이에 따른 유엔의 대북제재로 현재는 어떤 기업도 북한에 진출할 수가 없다. 또 한국 기업의 진출로 북한이 부유하게 되면 김정은은 체제 유지를 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권력 세습과 핵무기가 북한을 어떻게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는지를 베트남에서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하노이·호치민=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