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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초 기상관측 사상 최다 시간당 및 일일 강우량을 기록한 강남은 물난리로 큰 피해를 입었다. 이때 북한이라고 무사했던 것은 아니다. 평양 역시 대동강물이 인도까지 넘쳐나 낮은 지대가 물에 잠겼다. 북한 중앙TV에선 300∼400mm 국지성 호우를 예고하며 홍수를 철저히 방지하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가난한 북한은 홍수를 피해갈 능력이 없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가장 큰 피해를 본 지역은 평양 인근의 탄광, 광산이었다. 북한 소식통에 의하면 평안남도 북창군 득장탄광과 회창군 회창광산 등이 침수돼 광산 노동자와 주민 등 500여 명이 사망·실종됐다고 한다. 이 지역은 7월 말 호우에도 수많은 갱도가 물에 잠긴 것으로 알려졌다. 득장탄광은 북창화력발전소에 석탄을 대는 핵심 탄광인데, 이곳이 침수되자 평양 전기 사정이 급격히 나빠졌다. 당장 탄광을 살려내라는 불호령이 떨어지면서 숱한 인력이 동원돼 복구 작업을 진행했는데, 그 와중에 기록적 호우까지 겹치면서 막대한 인명피해를 낸 것이다. 이 사실이 보고가 되면 간부들이 무사할 리가 없었다. 평안남도당 간부들은 처벌을 피하기 위해 피해 상황을 축소해 보고했다. 하지만 이게 김정은의 ‘조사장악선’에 의해 발각됐다. 아래 간부들의 보고를 신뢰할 수 없는 김정은은 ‘조사장악선’이라는 암행어사 역할을 하는 비밀 조직을 가동하고 있는데 북한의 대다수 간부들은 이런 것을 잘 모른다. 화가 불같이 난 김정은은 즉시 평안남도 시·군당일군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장에서 평안남도 최고 책임자인 도당 책임비서와 2인자인 조직비서, 선전비서 등이 체포돼 끌려갔다. 피해지역 책임간부들까지 포함해 회의가 끝났을 때 체포된 간부가 무려 300여 명이나 됐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김정은은 평안남도 당위원회를 해산시키고 중앙과 각 지방당 조직에서 간부를 선발해 새 도당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지시했다. 회의 도중 김정은의 각별한 신임을 받고 있는, 노동당의 2인자 조용원 조직비서가 통솔하는 조직지도부 역시 산하 당 기관에 대한 통제를 제대로 못했다는 이유로 호된 비판을 받았다. 조용원 조직비서는 김정은을 대신해 각종 회의를 주재하는 등 북한에서 김정은 패밀리를 제외하면 최고의 권력을 갖고 있지만, 결국 집사 신세일 뿐이다. 다행히 그는 해임되진 않았다. 이어 이달 4∼5일 이틀 동안 평양에선 국가재해방지사업총화회의가 열렸다. 김정은이 직접 참석했다. 북한 TV가 방영한 영상 속에서 김정은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앉아 있었다. 하지만 김정은이 아무리 격노하고, 인재가 발생할 때마다 숱한 간부들을 체포한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북한의 자연재해는 경제난이 만든 인재이기 때문이다. 수십 년 동안 북한의 강하천 관리는 사실상 방치됐다. 하천 관리 기업소들이 보유한 차량과 굴착기 등 장비는 장부에만 올라 있는 고물이 태반이다. 김정은이 매년 거창하게 벌여 놓는 평양 건설 등 각종 공사판에 동원할 장비와 연료, 인력이 부족한데, 강하천 관리에 투자할 간부가 있을 리 만무하다. 뙈기밭 때문에 벌거숭이가 된 산은 비만 조금 와도 무너져 내린다. 이 때문에 북한은 폭우 때마다 막대한 피해를 피할 수 없다. 2년 전 태풍 ‘마이삭’이 북한을 통과했을 때도 함남 검덕지구에선 수천 채의 집이 홍수로 사라졌다. 강원도 김화군에선 임남저수지가 붕괴될 위기에 처해 긴급 방류를 시작했는데, 수천 명의 김화읍 사람들이 이를 피하려 뒷산에 올라갔다가 무게를 견디지 못한 민둥산이 붕괴되는 바람에 1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수천 명이 사망하고 10만 명 이상의 이재민이 발생한 2016년 함북 북부 지역 홍수, 수천 채의 집이 파괴된 2015년 나선시 홍수 등 북한의 폭우 피해 사례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국가재해방지사업총화회의 직후인 8일 김정은은 동서해 연결 대운하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이명박 정부의 ‘한반도 대운하’ 구상처럼 강바닥을 파내 평양의 홍수까지 막겠다는 일석이조 구상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운하 건설이 오히려 더 큰 홍수를 부른 사례도 많다. 북한의 우물 안 수리학계 수준도 미덥지 않지만, 김정은의 의도에 반해 말할 수 있는 과학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운하를 건설할 힘이 남아 있는지는 더 큰 의문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아버지는 정전으로 깜깜해진 함흥역에서 클래식 기타의 선율에 혼을 빼앗겼다. 마침 북한군 협주단이 지방공연을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연착된 기차를 기다리다 무료해지자 한 여성단원이 기타를 꺼내든 것이다. 가느다란 기타줄 6개의 떨림이 악다구니로 가득 찼던 역사를 조용하게 만들었다. 군복을 입은 여성 기타리스트 주변에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기 시작했다. “우리 딸도 꼭 저런 멋진 기타리스트로 키워야지….”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8살 어린 둘째 딸을 불렀다. “너 이제부터 무용을 그만두고 기타를 배워.” 1994년 인민학교 1학년생이던 유은지는 그렇게 기타와 인연을 맺었다. 사실 그는 무용을 하고 싶었다. 3살 때 세 살 터울의 언니를 따라 유치원에 갔다가 선생님의 눈에 들어 무용을 시작했다. 그 유치원 선생님은 어린 유치원생에게 무용을 가르쳐 TV에 잘 내보내기로 유명했다. 언니 뒤를 따라 온 3살 꼬마에게 무슨 재능을 발견했는지 부모를 설득해 1년 먼저 유치원에 입학하게 했다. 은지는 3살부터 회초리를 맞으며 무용을 시작했다. 그렇게 몇 년을 훈련을 하니 수시로 함흥대극장에 가 공연을 하게 됐고 박수를 받았다. 함흥대극장은 평양대극장보다 무려 1.7배나 더 큰, 북한의 지방 극장 중 가장 큰 극장이었다. 은지는 아직도 5년 동안 무용을 배웠던 첫 선생님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내가 지금까지 만난 여성 중 가장 예뻤어요. 결혼도 안하고 제자들 키우는 데만 빠져 있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들으니 그 선생님도 탈북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중국에서 체포돼 북송됐는데 지금은 살아있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은지의 무용 경력은 아버지의 변심으로 중단됐다. 아버지라고 딸의 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겠지만, 무용보다는 음악으로 평생을 살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기타와의 첫 인연은지의 집은 함흥에서 도보로 2시간 정도 떨어진 군수공장 지역에 있었다. 출입문 위엔 ‘모범가정’이라고 쓴 액자가 붙어있었다. 선정 기준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을에서 모범이 되는 가정을 선정해 현관 위에 붙여준다. 은지의 아버지는 기술 관련 4년제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철학과 한문을 가르치는 선생이었다. 어머니는 결혼 전에 바이올린을 전공한 예술인이었다. 그래서인지 부모는 은지의 언니에겐 유치원 때부터 바이올린을 전공하게 했다. 은지가 인민학교에서 기타를 배우게 되면서 두 자매는 함께 사이좋게 학교 ‘음악소조’를 다녔다. “자라면서 부모님이 큰소리치는 것도, 욕을 하는 것도, 싸우는 것도 한 번도 본 일이 없어요. 그래서 우리 자매도 다툼 없이 자랐어요. 언니는 정말 착해서 늘 저에게 양보만 했어요. 언니랑 음악소조에 함께 다닐 때 정말 행복했어요.” 인민학교에서 기타를 시작했지만, 북한에선 주니어용 기타를 구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은지는 어른들이 치는 통기타로 연습을 시작했다. 처음엔 손가락이 너무 아파 계속 울었다. 못하겠다고 하면 부모님이 뭘 사준다고 계속 달래며 포기하지 못하게 했다. 힘들어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은지도 언니랑 함께 음악소조에 다니는 것이 너무 좋았고, 또 음악시간이 제일 재미있었다. 학교 음악선생이라고 기타를 전공한 것은 아니어서, 기타 실력이 뛰어나진 않았다. 4학년이 되니 선생은 음악소조 아이들의 기타 연주는 은지에게 가르치라고 했다.#언니의 희생은지의 인민학교(초등학교) 4년 과정은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 시절과 겹친다. 1995년~1998년 사이 북한에선 굶주림으로 많은 아사자가 생겨났다. 공업도시 함흥은 특히 사정이 어려웠다. 은지의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식량이 없어 나물을 뜯어와 죽을 쑤어먹을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굶지 않고 지낼 수 있었던 이유는 아버지가 대학 교무과장을 지냈기 때문이다. 교무과장은 이런저런 이유로 뇌물을 받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뇌물에 거부감을 가지던 아버지도 점점 상황이 나빠지자 스스럼없이 학생들이 주는 쌀이나 술을 받아 집에 갖고 왔다. 당시 북에서 최고의 대학이라고 자부하는 김일성대까지 포함해 교육자들이 모두 그렇게 살았다. 배급도 월급도 없는 상황에서 학생들이 가져다주는 것까지 받지 않으면 굶어죽거나 또는 학교를 나가 장사를 하는 길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뇌물로 식구가 풍족히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집에서 밀주를 만들어 팔고 돼지를 키웠다. 아무리 고난의 행군 시절이라고 해도 잘 사는 집은 잘 살았다. 그리고 있는 집 자식들이 음악소조에 들어왔다. 은지는 음악소조에서 가장 가난한 축에 속했다. 은지의 부모는 딸을 둘 다 뒷바라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모는 논의 끝에 첫째 딸에게 바이올린을 그만두게 했다. 아무래도 둘째가 좀 더 재능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6년 넘게 훈련했던 바이올린을 그만두라고 했을 때 ‘천사’ 언니는 아무 말 없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둘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해했고, 동생을 위해 언니인 자기가 양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 것이다. 부모는 둘째 딸이 기가 죽지 말라고 없는 살림에도 쌀을 구해 밥솥 구석에 따로 안쳤다. 밤늦게까지 훈련을 해야 하는 음악소조는 도시락을 싸가지고 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 저는 어렸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어요. 부모님을 실망시켜드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언니 대신 나는 무조건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집은 비록 가난하지만 실력은 최고로 쌓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훈련을 했다. 시끄럽지 않게 부엌에 나가 훈련했고, 시끄럽다는 동네 민원이 들어오면 외진 창고에 가서 훈련을 했다. 깊은 밤중에 외진 어두운 창고에 들어가는 것은 10살 안팎의 어린 여자애에겐 너무 무서운 일이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밤에 어두운 곳에서 계속 훈련을 하다보니 학교에 가서 훈련을 할 때 눈을 뜨고 기타를 잘 치지 못했어요. 습관이 되어 눈을 감고 쳐야 더 잘 됐어요.” 그렇게 갈고 닦은 실력 덕분에 은지는 가난했지만 음악소조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인민학교 시절을 보내고 11살 때인 1998년 은지는 고등중학교에 진학했다. 그런데 중학교에는 은지에게 더 이상 기타를 가르쳐줄만한 선생이 없었다.#일본에서 온 기타 선생님어느 날 집에 아버지의 동료 선생이 찾아왔다. 배울 데가 없어 기타 실력이 더 늘어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듣자 그가 “우리 동네에 기타를 귀신같이 잘 치는 일본 태생 젊은 귀국자 여성이 살고 있다”며 함께 가보자고 했다. 동네에선 그 여성이 기타를 치는 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명절에 딱 한 번 남편 동료들을 위해 기타를 들었는데 모두 넋을 잃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들으니 그 여성은 일본 명문대에서 기타를 전공했고, 영화배우처럼 잘 생긴 남편도 그 기타 연주에 반해 청혼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함흥에 온 뒤로 여성은 기타를 절대 잡지 않았다. 은지는 그 선생과 함께 함흥의 중심부 동흥산구역에 있는 귀국자 여성의 집으로 찾아갔다. 얼굴이 유난히 흰 젊은 여성이 나왔다. 그녀는 “이 애를 제자로 좀 받아주라”는 제안에 손사래를 쳤다. “내가 기타를 치는 것을 알리고 싶지도 않고, 제자를 키울 생각도 전혀 없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친구는 끈질겼다. 그래도 2시간이나 자전거 뒤에 앉아 온 애인데 기타 치는 것을 짧게라도 보여주면 안 되겠냐고 사정했다. 그 청까진 거절하기 어려웠던지 여인은 방에 들어가 기타를 들고 나왔다. 그때 은지는 제대로 된 클래식 기타를 처음 보았다. 여인의 시범연주는 딱 1분에 그쳤다. 그 1분은 은지에겐 새로운 세계였다. “제가 지금까지 했던 것은 기타도 아니더라고요. 우선 기타에서 얼마나 예쁘고 따뜻한 소리가 나는지 정말 그때 느낀 감정은 뭐라 설명하기 어려워요. 그리고 몸과 기타가 하나가 된다는 것이 뭔지 느꼈어요. 어린 아이에게 짧게 보여주는 것임에도 그 분은 온 정성과 마음을 들여 기타를 연주하더군요.” 기타 연주까지 들으니 집에 그냥 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료 교수와 함께 은지는 제발 좀 가르쳐 달라고 매달렸다. 그녀는 잠깐 생각하더니 웃으면서 “애가 이렇게 원하니 제가 선뜻 거절은 못하겠지만 대신 6개월짜리 숙제를 내줄테니 그걸 해 오면 가르칠게요”라고 말했다. 그녀가 내준 숙제는 클래식기타 기본자세를 잡기 위한 반음계스케일 연습이었다. 간단하게 말하면 자세 교정으로 기타의 왼손, 오른손의 모양과 각도, 줄 높이와의 거리, 손톱 모양 등 자세한 테크닉 연습 방법이었다. 이걸 못하면 기타를 정확하게 칠 수가 없다면서 시범을 보여준 뒤 6개월 동안 훈련해 교정하고 와야 한다고 했다. 얼핏 간단한 숙제였지만, 같은 동작과 한 자세를 매일 반복해야 하는 매우 지겨운 숙제이기도 했다. 은지는 집에 돌아와 그녀가 보여준 시범대로 몸을 익히기 위해 노력했다. 쉽진 않았지만 꼭 그녀에게 선택을 받아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6개월 뒤에 다시 찾아갔을 때 여인은 놀랐다. “아니. 어린 애가 이렇게 지겨운 연습을 해서 올 줄은 몰랐네요. 해올 거라 생각하진 않았는데…. 이제부터 1주일에 한 번씩 오세요.” 그때부터 중학교 6년 내내 은지는 여인의 집에 매주 빠지지 않고 찾아가, 갈 때마다 2시간씩 레슨을 받았다. 자전거로 2시간이나 걸리는 먼 거리여서 아버지가 꼬박꼬박 자전거 뒤에 딸을 태우고 다녔다. 포장도로가 아니어서 엉덩이가 너무 아팠지만 은지는 참고 참았다. 없는 살림이지만 쌀이나 돈을 들고 찾아가 레슨비를 대신했다. 6년 동안 은지는 평생의 기초가 될 자세를 바로 잡았고 실력도 크게 향상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한계도 분명했다. 선생은 북한에서 공식 출판된 교재 이상을 절대 넘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가 없지만 일본에서 귀국한 이후 허용되지 않은 기타 연주 때문에 큰 고초를 겪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었다. 은지는 6년 동안 중학교 음악소조에선 기타반을 책임졌고, 함흥대극장에서 학교를 대신해 독주회도 여러 번 가졌다. 음악에 전념하면서도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아 최우등으로 중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아버지의 구속중학교를 졸업하면 예술대학에 가는 것이 은지의 목표였다. 그가 예술대학에 진학했다면 서울에서 그를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상대로 흘러가는 인생은 없는 법이다. 그런 예측불허가 수시로 가져오는 좌절과 극복의 인생사 덕분에 인생은 빛나기도 하고, 또는 나락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삶을 마무리하기도 하는 것이다. 은지의 경우 하필 중학교 졸업 몇 달 전에 최악의 운명과 마주쳤다. 아버지가 보위부에 체포돼 끌려갔던 것. 당시 대학에 새 컴퓨터가 대량으로 들어왔는데, 그 컴퓨터로 학생들과 함께 한국 드라마를 본 것을 누군가 밀고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보위부에서 취조를 받는 동안 대학에 보위부 ‘검열그루빠(검열단)’가 들이닥쳤다. 그들은 아버지의 과거 행적을 탈탈 털어 별 것을 다 걸고 들었다. 한국 드라마를 본 것은 감옥에 갈 죄였지만, 천만다행으로 아버지는 몇 달쯤 있다가 풀려났다. 아버지는 노동당에서 관리하는 통일 대비용 예비 간부였기 때문이었다. 은지의 할아버지는 충청남도 당진 출신이었다. 작은 할아버지, 고모할머니 모두 남쪽에 살고 있었다. 은지의 아버지는 노동당에서 발행하는 충청남도 교육부 고위간부 임명장을 갖고 있었다. 북한은 남한 연고자 중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 통일되면 남쪽에 파견해 활동할 수 있는 임명장을 오래 전에 수여했다. 가령 충청남도의 경우 북한에 사는 충남 출신의 누군가가 충남 도당책임비서, 충남 인민위원회 위원장, 충남 보안서장, 충남 교육비서 등의 임명장을 이미 받아놓고 사는 것이다. 정치적 처벌은 면했지만 그걸로 끝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벌금형과 함께 동격조동이라는 조치로 전문학교 교장으로 옮겨갔다. 은지 집에 부과된 벌금은 집을 다 팔아도 모자라는 액수였다. 여기저기 돈을 빌려 내다보니 빚만 가득 지게 됐다. 전문학교는 함흥 시내에 있었다. 은지 부모는 집을 팔고 함흥 시내로 이사와 작은 집에서 동거살이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명색이 교장이긴 했지만 뇌물을 받을 수 있는 학교가 아니었다. 얼마쯤 뒤부터 빚 독촉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시장에 나가 음료수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취업했던 언니도 직장을 그만두고 어머니를 도와 시장 장사를 시작했다. 이런 환경에서 은지는 예술대학을 갈 수가 없었다. #유치원 음악선생님세상은 꼭 죽으란 법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날 아버지의 친구가 찾아와 솔깃한 제안을 했다. 당시 함흥에는 유치원 음악교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교원양성소에 음악교사 양성을 위한 1년 반짜리 단기 속성반이 생겨났다. 원래 유치원 교사가 되려면 4년제 교원대학을 졸업해야 하지만, 음악교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1년 반만 가르치고 유치원 교사 자격을 수여하기로 한 것이다. 속성반에 입학하려면 유치원 원장의 추천이 절대적으로 중요한데, 자기가 어느 원장을 잘 아니 소개해 주겠다는 것이다. 북한에서 유치원 교사, 특히 음악교사는 젊은 여성들에겐 꿈의 직업이다. 중학교나 초등학교 선생보다 유치원 음악교사가 훨씬 인기가 좋았다. 북한에선 돈이 있는 집 자식들은 거의 대다수 어릴 때부터 음악을 하게 한다. 즉 유치원 시절인데, 부모들은 아이의 재능을 키우기 위해, 또는 파악하기 위해 음악 선생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다. 과외는 필수고, 자식을 잘 봐달라는 뇌물의 액수도 엄청나다. 게다가 유치원은 2년 만에 졸업시킨다. 2년 뒤면 다시 새로운 학생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북에선 유치원 음악교사 2년이면 시집갈 준비를 끝낸다는 말이 있다. 은지가 모 원장의 추천을 받아 강습소 입학시험을 치러 갔더니 입학 정원은 20명인데, 함흥에서 음악을 전공한 중학교 졸업 학년 여학생들은 다 온 듯했다. 은지는 당당하게 합격했다. 집이 좁아 추천해 준 유치원의 기숙사에서 살며 학교를 다녔다. 동창생들은 모두 달러를 용돈으로 쓰는, 잘 사는 집 딸들이었다. 악기나 옷, 화장품은 당연히 수준차이가 컸다. 이번에도 은지는 실력을 키우는 것밖에 내세울 것이 없었다. 1년 반을 피타게 연습만 하다가 졸업시험을 치게 됐다. 전공 연주 외에 발풍금(피아노), 무용, 동화읽기가 졸업시험 과목이었다. 은지는 일등으로 졸업했다. 연주가 자신 있었던 것도 있었지만, 어렸을 때 5년 동안 무용을 했던 것도 큰 도움이 됐다. 그가 최우수 점수를 받게 되자 함흥에서 제일 큰 유치원 원장이 그에게 스카웃 제안을 했다. 하지만 은지는 자신을 추천해주고 기숙사까지 내준 유치원을 택했다. 2005년 은지는 만 18세에 유치원 음악선생이 됐다. 주변에서 모두 부러워했다. 유치원 선생이 되니 왜 이 직업이 그렇게 선망 받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처음 맡은 음악반 학생이 10명이었는데, 학부모들의 직업은 무역하는 집, 장사하는 집, 간부집 등으로 다양했지만, 한마디로 함흥에서 잘 나가는 돈 있는 집 자식들이었다. 학부모들이 자녀를 잘 부탁한다며 경쟁적으로 찾아와서 용돈을 찔러주고, 좋은 화장품과 옷을 사왔다. 매일 선생님 도시락까지 사오는 아이들만 7~8명이었다. 은지는 이 도시락을 들고 집에 가서 가족을 먹여 살렸다. 하지만 좋았던 것도 잠시. 점점 유치원 선생일이 질리기 시작했다. 예전에 배울 때는 몰랐지만, 선생이 돼서 말귀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과 씨름하는 것이 너무 싫었다. 게다가 교수안을 밤새 써서 내야 했다. 오전에는 담임을 맡은 반 아이들을 가르치고, 오후에는 음악을 가르치고 밤에는 손으로 교수안을 작성하는 일이 이어졌다.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음악을 연주할 기회가 사라진 것이다.#탈북교사로 임명돼 반년쯤 지난 어느 날. 중국을 오가며 무역을 하는 학부형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아니, 선생님은 할아버지 가족이 다 한국에 있다면서요. 중국 가서 할아버지 친척을 찾아 도움을 받으면 금방 부자가 될 텐데, 왜 이러고 있어요. 내가 중국까지 안전하게 가서 친척을 찾게 도와줄게요.” 은지의 할아버지는 자식들에게 틈만 나면 ‘충청남도 당진군 면천면 율사리 ○○번지, 남동생 유 아무개, 여동생 유 아무개’를 외우게 했다. 자신이 못가면 너희라도 가서 자신의 형제를 꼭 찾으라는 당부였다. 할아버지는 손녀가 유치원 선생이 된 것을 보지 못하고 이산의 한을 남긴 채 숨을 거두었다. 은지는 마음이 흔들렸다. 그때 이미 한국 드라마나 중국 드라마를 봤던 터라 외부 세계에 대한 환상이 가득 차 있었다. 아버지가 중국에 가서 삼촌과 고모를 찾으면 좋겠지만 이미 보위부에 잡혀 혼이 나고, 교장이란 현직에도 있어 절대 가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몰래 가서 할아버지를 찾아 가족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지.” 은지는 학부형에게 중국에 가겠다고 약속했다. 학부형은 자기 회사 회계원으로 꾸며 국경까지 갈 수 있는 여행증을 만들어왔다. 2006년 3월 어느 날 수업이 끝난 뒤 은지는 아무 말도 없이, 가족에게도 중국으로 간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길을 나섰다. 떠날 때는 한두 달이면 돌아올 줄 알았다. 북중 국경까지 어렵지 않게 도착했다. 도착하니 국경경비대 장교가 마중 나와 밤에 강을 건네주었고, 허리까지 오는 강을 건너니 중국에서 차가 마중 나와 그를 태우고 연길로 들어갔다. 모두 학부형이 만들어준 루트였다. 연길까지 도착하는 동안 19세 은지는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드디어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 행복했다. 행복은 연길에 들어가자마자 깨졌다. 차에서 내려 어느 집에 들어가니 단칸방이었다. 그 집에서 40대 중후반 부부와 은지보다 한 살 많은 딸이 살고 있었다. 잠시 이 집에서 머물다 다른 곳에 가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 집에서 한국 친척을 찾아준다는 것이었다. 도착했을 때 집주인 여인이 반찬 몇 개와 밥을 내왔는데, 양이 몇 숟가락 정도에 불과했다. 순식간에 다 먹으니 또 그만큼 내왔다. 그렇게 무려 다섯 번 밥을 퍼오니 장난하는 줄 알았다. 중국은 잘 살고, 기름진 음식에 배불리 먹는 줄 알았는데 정작 와보니 그게 아니었다. 환상이 깨졌다. 자유를 얻었다고 좋아했는데 하루 종일 단칸방에 머물며 살아야 했다. 집 주인은 한국과 연락하며 친척을 찾느라 열심히 노력했지만 계속 실패했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났다.#한국을 꿈꾸다그동안 은지는 컴퓨터도 배우고, 채팅도 배우고 살았는데, 두 달 넘게 친척을 못 찾으니 집주인들에게 눈치가 보였다. 그렇다고 북한에 빈손으로 돌아가긴 싫었다. 길지 않은 동안 은지는 많은 것을 알게 됐다. 중국에 탈북자가 엄청 많이 숨어살고, 연길 주변 산에도 탈북자들이 가득 숨어있다는 것, 중국에서 체포돼 북한으로 끌려가면 큰 고초를 겪게 된다는 것도 다 처음 알았다. 처음엔 거짓말인줄 알았지만, 나중엔 내가 북한을 너무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처음 중국에 갔을 때 집주인들이 “김일성, 김정일이 나쁜 놈”이라고 해서 너무 가슴이 떨렸는데 두 달쯤 지나니 대수롭지 않게 듣게 됐다. 마침 머물던 집에는 한국 위성방송이 설치돼 있어 한국TV도 계속 보게 됐다. 처음 듣는 서울말은 귀에 살살 녹았다. 한국의 거리는 화려했다. 왜 조선족들이 그렇게 기를 쓰고 한국에 가겠다고 하는지도 이해됐다. 기타를 사서 한국 음악방송을 들으며 악보를 적은 뒤 따라 치기도 했다. 한국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 그 집에서 계속 머물기도 눈치가 보였다. 두 달이 넘자 그는 집 주변 어느 식당에 찾아갔다. “북한에서 왔는데 알바를 하게 해달라”고 말했다. 사장이 어이없이 쳐다보더니 “오자마자 자기 입으로 북에서 왔다는 여자는 처음 봤다”며 “신변보호는 못해주겠는데 일하겠으면 해보라”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식당은 현지에서 유명한 식당이었다. 공안도 오고, 북한 사람도 왔다. 종업원은 모두 한족이었고 단 한 명만 조선족이었다. 은지는 머물던 집에서 나와 그 조선족과 함께 한 방에서 살았다. 하지만 이런 생활은 한달도 가지 못했다. 손님들이 와서 웃으며 “너 연변 사람 아니지” “어디서 왔냐”고 자꾸 물었다. 은지의 정체를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그런 것이다. 누가 신고라도 하면 잡혀간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함께 있던 종업원이 제안했다. 자기 친구가 커피숍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다른 대도시로 옮겨갈 생각이니 그곳에 가서 일하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커피숍 사장이 발이 넓고 공안도 다 친해서 잡혀가진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은지는 커피숍으로 옮겼다. 몇 달만 일할 생각이었는데 그곳에서 무려 4년이나 있게 됐다. 커피숍 사장은 총각이었다. 형제들도 다 연변에서 잘 나갔다. 사장은 은지에게 함께 살자며 중국 신분증까지 다 해주겠다고 했다.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다. 사장은 약속을 지켰다. 중국 신분증을 만들어주었다. 가짜가 아닌 진짜였다. 지금은 중국도 전자 등록 체계가 잘 돼 있어 불가능하지만, 당시엔 누가 사망하면 사망 신고를 하지 않고 호구를 팔았고, 그 호구를 사서 사진만 바꾼 뒤 그 사람의 이름으로 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면 잡힐 일이 없었다. 신분도 안정되고, 사랑해주는 남자도 만나 모든 것이 다 잘 풀린 듯 했지만, 은지는 그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음악을 계속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견딜 수 없었다. 한국이 자석처럼 계속 끌었다. 그는 애인을 계속 설득했고, 마침내 애인도 한국으로 가라고 승낙했다.#“노력하면 된다면서요.”2010년 10월 은지는 중국 여권을 가지고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도착했다. 조사를 받고 2011년 3월 사회에 나왔다. 서울에 정착하고 싶었지만, 하나원 추첨에서 떨어져 어디에 붙었는지도 모를 대구에 가게 됐다. 한국에 온 이유가 음악 공부를 더 하고 싶었던 것이었던 것만큼 어느 정도 자리 잡자마자 음악 공부를 할 수 있는 대학을 찾았다. 서울로 가서 좋은 대학에 다니고 싶었지만, 돈도 없고, 집도 없어 불가능해보였다. 2012년 그는 대구에 있는 계명문화대 실용음악학부에 입학해 2년 뒤 졸업했다. 일단 남쪽의 음악 세계에 부딪쳐 보고 싶은 욕망이 컸다. “실제로 입학해 수업을 접하니 북한과 음악 이론은 별로 차이가 없었는데 남북의 음악 용어가 다르게 사용되기 때문에 처음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외래어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정말 생소했습니다.” 전문대에 입학해 한국 음악에 입문했지만 여전히 목마르는 갈증은 남아있었다. 계명대는 일렉 기타를 전공으로 했다. 원래는 클래식 기타를 공부하고 싶었지만 한국에 와서 보니 음악에 다양한 장르가 있다는 게 놀라워서 재즈를 선택했다. 일렉 기타는 은지가 지금까지 배워 온 클래식 기타와는 전혀 다른 장르, 즉 기타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구기 종목으로 치면 배구와 축구의 차이만큼이나 완전히 다른 장르다. 계명대를 졸업한 뒤 클래식 기타도 더 파고들고자 알아보니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가 최고라고 했다. “그래,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이왕이면 저기에 입학해 공부하자. 아버지 때문에 평양의 예술대학엔 가지 못했지만 서울에 와선 한국 최고의 예술대학엔 가야겠다.” 그러기까지 넘어야 할 산은 많았다. 일단 한예종은 탈북민 특례입학이 없다. 그런 이유로 지금까지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 3만5000여 명 중 한예종 입학생도 전무했다. 한예종의 클래식 기타 전공은 매년 70~80명이 지원해 3~4명만 입학한다. 학교 때부터 그곳만 목표로 기타를 열심히 공부한 학생들도 이곳에 지원해 입학할 확률이 5%도 안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알게 되니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오랜 고민 끝에 그는 한예종을 목표로 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온 이유를 증명하고 싶었고, 또 이곳은 누구나 노력하면 된다고 하는데 과연 되는지 내 한계에 도전하고 싶기도 했어요.” 두 번째 어려움은 서울에 정착할 수 있는 돈이었다. 정부에서 대구의 임대주택을 서울로 바꿔주지 않아 그는 서울의 반지하 주택을 월세로 얻었다. 2015년 서울로 올라온 은지는 처음 1년은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예종 입학을 위해선 수많은 시간을 연습에 투자해야 하는데 연습하는 동안 먹고 살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첫 일자리는 쿠팡 물류센터에서 박스를 포장하는 일이었다. 일은 힘들었지만 일당이 높았다. 그러나 몇 달 해보니 손가락에 무리가 왔다. 연주자에게 손가락은 생명이나 다름없었다. 손에 무리가 가지 않으면서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찾았다. 그래서 냉동 창고에서 식품 나르는 일을 얻었다. 한여름에도 고드름이 지는 냉동실에서 두꺼운 옷을 입고 작업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박스 포장보다는 손에 무리가 가지 않았다.이후에도 이마트, 호텔 서빙 등 각종 알바 자리를 찾아 몸이 부서져라 일을 했다. 그의 눈에는 오직 한예종 밖에 보이지 않았다.#탈북민 최초의 한예종 입학2016년 그는 한예종 시험에 도전했다. 실패였다. 떨어진 이유를 분석해봤다. 돈을 버느라 연습을 못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다른 지원자들은 하루 종일 연주만 훈련해 오는데 그가 낼 수 있는 훈련 시간은 고작 하루에 몇 시간뿐이었다. 둘째는 시험 정보도 없고, 레슨을 받지 못했던 이유 때문이었다. 어떤 선생을 만나 배우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특히 한예종에 입학하려면 최고 수준의 레슨 선생을 만나는 것이 중요한데 그는 맨땅에 헤딩한 셈이다. 다른 지원자들은 훌륭한 레슨 선생을 만나 그 아래서 비슷한 수준의 학생들이 모여 하루 종일 고강도 연습을 하다보니 실력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은지는 1차 시험에서 떨어졌지만 여전히 레슨을 받을 상황이 못 됐다. 돈을 벌어야했고, 그러다보니 시간도 낼 수 없었다. 그렇지만 연습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서울에선 기타 연습을 집에서 할 수 없었다. 연습실이 없어서 여름이면 모기에 뜯기며 공원에서 연습을 했고, 겨울이면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먼 곳의 연주실을 찾아다녔다. 남쪽에 왔지만 어두운 창고 안에서 연습을 하던 10살 때보다 별로 환경이 나아지지 않았다. 한 시간이라도 더 연습 시간을 짜내려고 일자리를 최대한 집 근처에서 찾았고,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뛰어서 돌아왔다. 나름 최선을 다해 준비해 이듬해 다시 시험을 쳤다. 1차에 70여명이 지원했는데 은지는 10명만 뽑는 2차 시험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이번에도 최종 3명 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3차 시험에서는 피아노 연주를 듣고 악보에 옮겨 적는 청음과, 음악이론 시험이 나온다. 은지는 이건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2차 시험인데, 이번에 떨어진 것은 연습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결론 냈다. 그는 2차 시험에 떨어진 뒤 친구에게서 800만 원을 빌렸다. 일하러 다니지 않고 집중적으로 연습만 하기 위해서였다. 말 그대로 올인한 것이다. 2018년 세 번째 시험에서도 순조롭게 1차 시험을 통과했다. 두 번째 시험의 연주를 마치고 나오는데 느낌이 좋았다. “그 이전까진 항상 연주를 마치고 나오면 아쉬움이 있었어요. 긴장돼 나를 다 보여주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았죠. 그런데 그날엔 나를 다 보여주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왔어요. 심사위원들의 표정을 보니 이번엔 붙겠다는 생각이 딱 들더군요.” 그의 생각대로 합격자 명단엔 유은지라는 이름이 올라 있었다. 5%의 확률을 3번 만에 통과한 것이다. 동시에 그는 한예종에 입학한 첫 탈북민이 됐다.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자신의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그는 몇 시간을 펑펑 울었다. 북한과 중국, 남쪽에서 쌓이고 쌓인 오랜 마음의 응어리를 눈물에 실어 날려버렸다.#평양의 클래식 기타 선생님2019년 3월 첫 학기를 시작했다. 3년 동안 열심히 바라보고 달린 결과를 얻었지만, 대학 생활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의 나이 만 32세. 동창들은 띠동갑이었고, 대학 전체로 봐도 가장 나이가 많은 학생이었다. 거기에 한국 최고의 예술학교답게 교육 수준도 너무 높았다. “여기서 공부하니 북한에서 배운 클래식은 클래식도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계음악사 등의 이론도 그에겐 넘기 쉬운 과목이 아니었다. “여유가 있는 집 학생들은 학점에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실기에만 집중해 원없이 연습만 하는데, 그게 참 부러워요, 저는 그럴 형편이 못돼요. 학점을 잘 받아야 장학금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2학기부터 코로나 사태가 터지면서 대학에서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지 못한 것도 진한 아쉬움이다. 그럼에도 나이 많은 자신을 ‘왕따’시키지 않고 함께 놀아주는 동창들이 참 고맙다. 한예종 학생이 되니 과외를 할 수 있는 것도 좋은 점이다. 학원 타임 강사로 레슨을 해줄 수 있으니 이제 더는 물류센터에 가서 포장을 하거나 얼음 창고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어느 덧 은지는 대학 생활의 마지막 학기를 맞고 있다. 졸업해도 진로에 대한 고민은 남아있다. 내년에 졸업하면 36세인데 무엇을 하고 싶을까. “욕심만 같아선 미국이나 유럽에 가서 세계적인 음악을 더 배우고 싶어요. 한예종을 다니니 또 줄리아드 음대에 가고 싶기도 해요. 물론 지금은 언감생심, 그럴 형편이 아닌 것은 잘 압니다만, 꿈이야 크게 가져야죠. 아버지는 늘 긍정적 성격이었어요. 당장 먹을 것이 없어도 ‘괜찮아 굶어죽진 않을거니’ 라는 태도였는데, 제가 아버지 성격을 물려받은 것 같아요. 저도 지금까지 걸어온 인생을 보면 말이 되는 게 없었지만 그래도 이만큼 왔으니 앞으로도 잘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꿈은 이루어진다를 증명하고 싶습니다.” 그에게 기타는 절대 버릴 수 없는 운명과 같은 친구다. 기타만 쥐면 외로움도 사라지고, 배고픔도 사라지고, 두려움도 사라진다. 특히 클래식 기타는 그에겐 우주 자체다. “베토벤은 클래식 기타는 작은 오케스트라라고 했어요. 현악기 중에 클래식 기타만큼 어려운 악기는 없지만, 또 이것만큼 음색이나 화음 등을 다양하게 표현하는 악기는 없습니다. 클래식 기타는 죽을 때까지 완전히 익혔다는 말을 할 수 없어요. 세계적 대가들도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연습을 해요. 하루 연습을 건너뛰면 바로 티가 나요. 이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클래식 기타를 시작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그는 기타의 바다에 빠져 헤어 나올 수 없는 운명을 살고 있는 듯 보였다. 그렇게 열심히 배워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일까. “통일이 되면 저는 평양음악무용대학에 가서 클래식 기타를 제대로 배워주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제가 거길 가고 싶었지만 못 갔잖아요. 지금 보면 오히려 더 잘된 거죠. 나중에 평양에 가서 ‘얘들아 선생님이 세상으로 일찍 나가 그래도 열심히 많이 공부하고 왔다. 클래식은 이런 거다’고 가르치고 싶죠.” 유은지 교수가 북한 음악대학에서 학생들에게 “클래식은 이런거다”고 말하는 장면을 상상해봤다. 참 많은 곡절을 넘었지만 그는 지금 평균 수명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35세에 불과하다. 훗날 어느 날인가 평양음악무용대학에서 그런 일이 분명 일어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제주 중문관광단지 내 국제평화센터에 15일 ‘제주 아세안홀’이 새로 개관했다. 제주 아세안홀은 한국과 아세안 10개국 정부 간 경제 및 사회·문화 분야 협력 증진을 위해 만들어진 국제기구 한-아세안센터(사무총장 김해용)와 제주특별자치도, 국제평화재단이 함께 운영하게 된다. 개관식에는 박진 외교부 장관, 오영훈 제주도지사, 아세안 10개국 대사들이 참석했다. ‘함께-잇는-가치’라는 주제로 개최되는 개관 전시는 아세안 10개국과 제주의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문화예술품 외에도 한국과 아세안 사람들의 삶의 가치를 엿볼 수 있는 사진과 영상을 전시한다. 총 네 개의 세션으로 구분된 이번 전시는 한국과 아세안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함께 미래를 만들어 나아가는 ‘연대’의 가치를 느낄 수 있도록 기획됐다. 대표 전시물로는 꽃잎과 넝쿨무늬 등 크메르 문명의 특징이 조각된 캄보디아의 구리 수공예 용기, 2020 엑스포에서 선보인 싱가포르 파빌리온에서 영감을 받아 싱가포르의 다양한 식물종을 그려낸 ‘눈부신 싱가포르’ 실크스카프, 베트남의 문화적 정체성과 철학을 표현한 추 다우 도자기, 제주 감물염색 직물 등을 꼽을 수 있다. 개관과 함께 18일까지 4일간 운영된 ‘아세안 관광홍보차량’은 제주 전역을 돌며 아세안을 국내 대중에게 소개했다. 차량은 새별오름, 동문재래시장, 성산일출봉 등 주요 관광지와 제주대, 중문중 등에도 정차해 관광객들과 학생들에게 아세안 여행에 대한 최신 정보를 제공했고, 포토존 및 설문조사 이벤트를 비롯한 다양한 퀴즈를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숨은 주역 중 한 명이다. 러시아는 개전 초 우크라이나 통신시설을 주요 목표로 삼고 미사일과 폭탄을 퍼부었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 통신 인프라는 대거 파괴됐다. 위기 상황에서 미하일로 페도로프 우크라이나 부총리는 머스크에게 ‘스타링크’를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스타링크는 머스크가 설립한 우주기업 스페이스X의 위성인터넷 서비스다. 머스크는 스타링크 단말기를 대거 우크라이나에 보냈다. 6월까지 1만5000대 이상의 단말기가 우크라이나에 들어갔는데, 이것이 전쟁 판도를 바꿨다. 지구 저궤도를 돌고 있는 2800여 개의 위성이 제공하는 스타링크 덕분에 우크라이나는 통신 마비라는 최악의 상황을 면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러시아군의 진격을 며칠 동안 멈추게 한 드론 공격과 실시간 포사격 좌표 제공, 러시아의 자존심인 모스크바함 격침 등 군사작전에도 스타링크가 활용됐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세계를 향해 여론전을 펼 수 있었던 것도, 러시아의 학살이 만천하에 알려진 것도, 전황이 생생하게 중계된 것도 모두 스타링크 덕분이다. 러시아는 해킹과 전파 방해 등을 동원해 스타링크를 공격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스타링크의 안정성도 뛰어나다는 의미다. 우크라이나에서 검증된 스타링크 서비스가 북한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김정은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북한 인민이 진실을 아는 것이다. 북한 주민이 인터넷을 하고, 외부와 통화도 할 수 있다면, 자신들이 굶주릴 때 김씨 일가가 얼마나 호화롭게 살았는지 등 당국의 거짓말을 모두 알게 된다. 진실의 힘은 북한 체제가 쌓은 거짓의 성을 순식간에 허물어버릴 수 있다. 마침 2년 전 코로나 대유행이 시작되자 북한과 중국은 북-중 국경에 뚫기 어려운 높은 철조망과 촘촘한 감시 카메라로 군사분계선 못지않은 장벽을 만들었다. 과거 사람이 오가며 북한에 유입되던 정보의 흐름이 거의 막혔다. 하지만 땅을 막을 순 있어도 하늘까지 막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아직은 우크라이나에서 위력을 발휘한 스타링크가 북한에선 활용되기 어렵다. 이를 사용하려면 위성 안테나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비록 안테나의 크기가 직경이 수십 cm 수준으로 줄어들었지만, 그럼에도 보위부가 가택을 수색하면 적발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8월 말 머스크 CEO는 위성 안테나가 필요 없는 서비스를 내년부터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다시 말해 위성과 휴대전화가 직접 연결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 위성 안테나가 필요한 이유는 295kg의 소형 위성이 쏘는 전파가 휴대전화로 받기엔 충분히 강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머스크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휴대전화가 직접 수신할 수 있는 강력한 신호를 내쏘는 위성을 개발했다. 위성에는 한 변이 5m, 전체 면적이 25m²인 강력한 안테나가 장착된다. 이미 실험은 성공했다. 내년부터 미국 내 점유율 2위 이동통신사인 티모바일(T-Mobile)과 제휴해 2023년 베타 테스트를, 2024년에 상용화한다는 계획이다. 올해 6월 스타링크는 내년부터 한국을 서비스 지역에 포함한다고 발표했다. 인터넷 강국인 한국에서는 스타링크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전문가도 많다. 그러나 북한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반도 상공에서 스타링크 위성들이 휴대전화로 수신할 수 있는 신호를 내쏜다면 엄청난 일이다. 이젠 북한도 위성 안테나가 필요 없게 된다. 북한 당국이 이미 보급된 500만 대 이상의 휴대전화가 위성 신호를 받지 못하게 할 수 있을진 몰라도 휴대전화를 외부에서 몰래 들여가면 막기 어려울 것이다. 스타링크를 막기 위한 전파 방해와 해킹은 러시아도 성공하지 못했다. 과거 북한과의 통화는 중국 휴대전화 신호가 잡히는 북-중 국경의 제한된 지역에서만 가능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스타링크 수신이 가능한 휴대전화만 있으면 평양을 비롯해 어느 지역에서도 외부와의 통화는 물론이고 사진과 동영상까지 주고받을 수 있게 된다. 당장 내년부터 가능한 시나리오다. 휴대전화는 몰래 숨기면 찾기도 매우 어렵다. 김정은은 엄청난 위기를 맞게 됐다. 설사 스타링크를 막는 데 성공한다 해도 몇 년 뒤 또 어떤 기술이 나올지 모른다. 김정은의 버티기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머스크는 북한 인민에게 구세주가 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김혁의 소년 시절은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청진에서 수십㎞ 떨어진 고무산에서 태어난 그가 처음 집을 뛰쳐나올 때의 나이는 7살. 이후 5년 동안 꽃제비로 북한을 떠돌았다. 아버지는 굶어죽고, 형은 북한 교화소에서 죽었다. 김혁 역시 18살에 악명 높은 전거리교화소의 최연소 수감자로 끌려가 죽기 직전에 석방됐다. 석방 전에 함께 입소한 23명 중 21명이 죽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무덤도 없이 소각되는 22번째 주검이 될 운명이었지만, 하늘이 그의 죽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차인표 주연의 영화 ‘크로싱’의 11세 소년 ‘준이’의 실제 인물은 몽골 사막에서 김혁이 업고 오던 중 숨진 유철민이다. 올해 40살이 된 김혁은 한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공공기관의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한 인간이 얼마나 많은 생사의 굴곡을 넘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다.# 장마당의 ‘덮치개’ 김혁이 함경북도 청진시 수남구역 말음인민학교 2학년을 다니던 1989년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그를 2살 위 형이 불렀다. “혁이야. 우리 집 나가자. 우리 엄마도 아니잖아.” 혁의 친엄마는 그가 4살 때인 1986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다. 1년 뒤 아버지는 재혼을 했다. 새엄마가 형제들에게 아주 못되게 놀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형은 그녀를 너무 미워했다. 혁이도 그녀가 친엄마가 아니란 사실을 깨달은 뒤부터 정을 붙이지 못했다. 두 형제는 집을 나와 청진역으로 갔다. 그때부터 구걸하는 삶이 시작됐다. 역에는 그들과 비슷한 처지의 구걸하는 청소년들이 있었다. 북한 꽃제비라고 하면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1990년대 중반에 생겨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은 그 이전부터 기차역에서 빌어먹는 아이들이 있었다. 당시 청진역은 ‘청룡파’ 구역이었다. 집을 뛰쳐나온 아이들은 소매치기 전문 조직인 청룡파에 소속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어린 형제를 받아줄 리가 만무했다. 형제는 구걸로 먹고 살았다. 당시만 해도 인심이 그럭저럭 괜찮았다. 기차를 기다리며 밥을 먹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먹을 것을 좀 달라고 하면 “부모 없냐”고 물었다. “다 죽었다”고 대답하면 사람들이 짐을 열고 도중식사(도중에 먹을 도시락)를 나눠주었다. 하지만 청진역은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가끔 안전원(경찰)들이 나타나 구걸하는 아이들을 잡아다 집을 묻고 돌려보냈다. 그들도 자주 잡혔다. 그때마다 아버지가 와서 이들을 데리고 갔다. 집에 가면 호되게 맞고 다시는 가출하지 않겠다고 서약하고는 며칠 뒤 다시 도망치는 삶이 반복됐다. 1년쯤 지나자 청진 역전분주소(역전파출소) 안전원들은 누구나 이들 형제를 알아보았다. 그가 8살 때 형이 “안 되겠다. 우리 여길 떠서 평양에 가자”고 제안했다. 형제는 평양행 열차에 몰래 올라탔다. 열차검열원들을 속이며 그럭저럭 평양 직전의 간리역까지는 갔지만 도무지 검열과 통제가 심해 평양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이 다시 청진으로 오는 기차를 타고 오다가 함북 길주역에 내려 농민시장에서 구걸을 시작했다. 그때 함경북도와 양강도로 가는 기차의 분기점인 길주에는 꽃제비들이 많았다. 안전원이 쫓아오면 도주하는 삶이 이어졌다. 정신없이 도망치다가 갈라지면 약속 장소를 정해 다시 만났고, 며칠 동안 떨어져 소식을 정 모를 때면 다시 몇 시간을 기차를 타고 청진으로 와서 만났다. 청진역 대합실에 있는 영예군인방 스팀관 뒤가 형제가 최종으로 만나는 약속 장소였다. 그렇게 그들은 4년을 전국을 떠돌며 살았다. 1993년이 되자 상황이 변했다. 이때엔 전국 곳곳에서 배급을 제대로 주지 않는 지역이 생겨났다. 기차역에 꽃제비가 갑자기 많아졌다. 인심도 박해져 더는 빌어도 잘 주지 않았다. 그나마 먹을 것을 주는 사람들은 군인들이었다고 김혁은 회상했다. 빌어먹기 어려워지자 꽃제비들은 훔쳐 먹기 시작했다. 마침 이때부터 농민시장으로 존재하던 장마당이 번창하기 시작했고, 시내 곳곳에 골목장도 많아졌다. 꽃제비들은 음식장사꾼을 노렸다. 장사꾼들도 파는 음식을 덮쳐 달아나는 꽃제비가 많아지자 대책을 세웠다. 음식 그릇 위에 그물을 씌우고, 또 비닐까지 씌운 것. 훔쳐야 먹고 살 수 있는 꽃제비들도 여럿이 모여 역할 분담을 하는 식으로 전술을 바꾸었다. 힘 좋고, 빨리 달리는 애는 ‘파장꾼’이 됐다. 이들은 음식 그릇을 통째로 바닥에 뒤집어 버리고 도망가면 ‘덮치개’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땅에 떨어진 음식을 두 손으로 쓸어 담아 도망친다. 이렇게 획득한 음식을 약속된 골목에서 나눠먹었다.# 바람잡이가 되다 1994년 설날이었다. 명절은 꽃제비들에겐 가장 배고픈 날이다. 장마당은 문을 닫고, 기차역도 조용하다. 이날도 김혁은 청진역 대합실 의자에 배고픔을 달래며 누워있었다. 이때쯤 그는 형과 헤어졌다. 14살이 된 형은 키도 커졌고, 달리기도 빨랐다. 안전원이 쫓아오면 형은 늘 도망을 치는 데 성공했지만, 키가 작은 혁은 자주 잡혔다. 그가 잡혀가면 형은 그 사이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는데, 그런 일상이 이어지다보니 어느새 각자 알아서 사는 삶이 된 것이다. 형은 전국구로 떠돌았는데, 가끔 기차를 타고 지나가다 청진역에 내려 동생이 잘 있나 살펴봤다. 이날도 혹시 형이 돈을 가지고 청진역에 나타나지 않을까 기대하며 누워있는데 또래로 보이는 한 아이가 다가 왔다. 옷도 잘 입고 있었다. 혁을 유심히 보던 그는 “야, 세면장 가서 얼굴 씻고 오면 맛있는 거 사줄게”라고 제안했다. 역전 화장실 세면장의 얼음을 깨고 얼굴을 씻고 오자 그 애가 역전 앞 식당에 데리고 들어갔다. 비싼 메뉴도 척척 시켰고, 밥을 먹은 뒤 ‘555’라는 브랜드의 고급 담배도 건네주었다. “너 이제부터 나랑 다니지 않겠니?” 그렇게 그들은 친구가 됐다. 알고 보니 그 애는 그 바닥에선 소문난 소매치기였다. 당시 여행하는 사람들은 소매치기를 피하기 위해 배낭 안에 돈을 숨기고 다니는 일이 많았는데, 그 애는 어느 쌀 배낭 가운데 돈이 숨겨져 있는지를 척척 알아냈다. 개찰구에서 서로 먼저 들어가겠다고 밀고 당기고 북새통이 벌어지면 이들은 작업에 들어갔다. 그가 혁에게 접근한 것도 ‘바람잡이’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돈을 훔치면 이들은 며칠 잘 먹었다. 돈이 떨어지면 다시 작업하려 나왔다. 친구는 혁이랑 비슷하게 일찍부터 집을 나와 소매치기가 됐다.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가 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친구는 가끔 큰 돈이 생기면 집에 가서 앓는 어머니에게 주고 왔다. 그러나 이들의 동행은 반년 만에 끝났다. 친구가 군부대 군관의 트렁크를 훔치고 튀었는데 갑자기 안전원들이 총동원돼 그 애를 색출해 잡았던 것이다. 그 트렁크에 군사비밀이 있었다는 소리도 있었고, 권총이 있었다는 소리도 있었다. 그렇게 끌려간 친구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반년 동안의 행복한 시절이 끝났다. # 김일성의 죽음 1994년 6월 혁은 청진역에서 또 안전원에게 잡혔다. 또 아버지가 분주소로 혁을 찾으려 왔다. 집에 가보니 언제 잡혀 왔는지 형도 있었다.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다가 “새 엄마가 그렇게 싫냐”고 물었다. 형제는 합창하듯이 “싫어”라고 대답했다. “왜 싫어?” “가짜 엄마니까 싫지.” 아버지는 옆방으로 들어갔다. 몰래 보니 아버지가 울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서럽게 우는 모습은 처음 봤다. 형이 말했다. “이제부터 우리 나가지 말자.” 당시 아버지는 531군부대 외화벌이 회사에 다녔다. 집안 사정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7월 8일 아버지는 이들에게 먹이겠다고 생태를 가득 싣고 집에 왔다. 다음날 형이 눈짓을 했다. 둘은 명태 40마리를 몰래 둘러메고 수남장마당에 나왔다. 장사꾼에게 팔아 더 맛있는 것을 사먹을 생각이었다. 애들을 보고 장사꾼들은 가격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팔 곳을 찾지 못하고 시장을 서성이는데 갑자기 장마당 관리사무소 사람이 나와 “중대방송이 있으니 당장 와서 TV를 함께 시청해야 한다”고 소리쳤다. 그렇게 떠밀려 TV를 보러 갔더니 김일성이 죽었다는 부고가 방영됐다. 사람들이 울고불고 난리가 벌어졌다. “오늘은 명태 팔기 틀렸구나.” 형제는 배낭을 들고 집으로 가려 돌아섰다. 그때 한 장사꾼이 그들 옆에 와서 속삭였다. “그거 마리당 9원에 살게.” 아까는 3원에 사겠다고 하더니 김일성이 죽었다고 하니 9원을 불렀다. 9원에 명태를 팔고, 장사를 오랫동안 못할 것을 직감한 다른 장사꾼이 떨이로 팔고 가는 월병을 사서 집에 돌아와 오랫동안 숨겨놓고 먹었다. 혁이의 기억 속 김일성 사망일은 명태를 9원에 팔고 월병을 싸게 산 운 좋은 날이었다.# 아버지의 죽음 형제가 집으로 들어온 뒤로 아버지는 더는 때리지 않았다. 1995년 1월 아버지는 외화벌이 회사를 그만두고, 청진에서 차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어촌마을 부업지로 두 형제와 함께 옮겼다. 자식을 위해 새엄마와 떨어져 살기로 마음먹었던 것 그들은 이곳에서 1년 동안 살았다. 집이 없어 우사를 개조한 허름한 곳에서 살았지만, 이때가 혁의 기억 속에서 가족과 함께 했던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염소도 기르고, 소도 방목하고, 농사도 했으며 인근 호수에서 잉어도 잡았다. 마을에는 해군 공기부양정 7~8대와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부대 군인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다. 혁의 부친은 젊었을 때 전연군단(전방군단)의 정찰부대 교관을 지냈다고 한다. 대남침투도 했다고 하는데, 어린 혁이는 아버지의 공적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몰랐다. 다만 아버지에겐 김일성 이름이 새겨진 시계가 있었다. 북한에서 명함시계가 있다는 것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엄청 대단한 사람이란 것을 의미한다. 혁이는 어렸을 때 분주소에 잡혀온 형제를 데리러 온 아버지가 일부러 명함시계를 차고 오자 안전원들이 아버지 앞에서 굽실대며 태도가 변했던 것을 보았다. 아버지가 해군 부대에 가서 군인들에게 격술 시범동작을 가르치자 군인들은 접근 금지 구역까지 이들 형제에게 개방해주었다. 혁은 가끔 바다에서 문어를 잡아 시내에 나가 팔았다. 그렇게 돈을 벌어 아버지에게 술을 사다 드리면 아버지는 너무 행복해 했다. 형제는 그렇게 오래 살줄 알았다. 그러나 당시는 고난의 행군으로 자고 나면 사람들이 죽어나가던 때였다. 아무리 외진 어촌마을이라 하지만 먹을 것이 부족하긴 마찬가지였다. 그해 12월 도저히 형제를 기를 능력이 되지 않았던 아버지는 그들을 함북 온성군에 있는 종성고아원에 보냈다. 그 다음해 봄 아버지는 새엄마와 이혼했다. 친자식들을 고아원에 버렸다는 생각 때문에 힘들어했다고 나중에 마을 사람들이 말해주었다. 아버지는 시내에 있는 집을 팔아 일부는 새엄마에게 주고, 나머지 돈으로 수남장마당 뒤쪽의 작은 집을 샀다. 1996년 여름 방학에 집에 갔을 때 아버지는 뼈에 가죽만 씌운 모습이었다. 180㎝가 넘는 장대한 기골이었는데, 걸음도 겨우 걸었다. 그래도 아들들이 왔다고 집에 있던 마지막 옥수수 가루를 탈탈 털어 죽을 쑤었다. “서로 때리지 말고, 싸우지 말고, 훔치지 말고 살아라.” 혁이 기억하는 아버지 마지막 당부였다. 아버지가 형제가 방학이 끝나 고아원으로 돌아간 지 몇 달 안돼 굶어죽었다. 너무 고지식하고 노동당에 대한 충성 밖에 몰랐던 아버지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자 간부들이 공공 자산을 몰래 훔쳐 팔아먹는 것을 참지 못했다. 간부들과 다투다 결국 직장도 쫓겨났고, 당의 방침과 어긋나는 일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국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결국 굶어죽을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죽기 전에 아버지는 말음1동 동사무소 당비서를 찾아가 당증과 명함시계, 예비역 군관 자격증을 당에 바쳤다. 혁이는 나중에 형과 함께 아버지가 가장 애지중지했던 시계를 찾으려 당비서가 있는 동사무소를 찾아갔다. 하지만 찾지 못했다. 당비서도 굶어죽었던 것이다. #종성고아원 형제가 처음 갔을 때 고아원에는 200여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점차 숫자가 줄어들었다. 원래 방침대로라면 고아원엔 우선적으로 식량이 공급돼야 했다. 하지만 비상창고에도 없는 식량을 간부들이 만들어 줄 순 없었다. 고아원에선 옥수수를 털어내고 남은 ‘송치’와 벼 뿌리를 가루내 여기에 약간의 옥수수 가루를 섞어 죽을 만들어주었다. 큰 애들은 도망을 쳤다. 선생들도 눈을 감아주었다. 하지만 어린 애들은 갈 곳도 없었다. 가뜩이나 영양실조에 걸린 상태에서 파라티푸스, 장티푸스, 콜레라, 옴 등의 질병이 쉬지 않고 퍼졌다. 1997년 여름방학 때 집에 갔다 고아원에 돌아오니 70여명 밖에 남지 않은 학생 중에 20여명이 그새 죽어 있었다. 죽은 애들은 고아원 뒷산의 살구나무 밭에 봉분도 묘비도 없이 묻었다. 고아원에 간 뒤로 형은 계속 도망쳐 떠돌아 다녔다. 혁이도 자주 도망쳐 어떤 식으로든 먹고 살다가 고아원에 다시 돌아가는 일이 반복됐다. 그런 가운데서도 시간은 흘러 형은 1997년 졸업해 종성식료공장 원료기지라는 곳에 배치를 받았다. 형은 몇 달도 있지 않고 사라졌다. 혁이 역시 만 15세인 이듬해 졸업해 무산군 임업사업소 종성지부 풍계리 작업장에 배치됐다. 산에 올라가 갱목으로 쓸 나무를 베는 것이 그에게 맡겨진 혁명과업이었다. 자라면서 전국을 떠돌던 그에게 깊은 산속에서 해야 하는 힘든 일이 맞을 리가 없었다. 몇 달 있다가 도망쳐 다시 학원으로 돌아갔다. 거기에서 그는 고아원 교직원의 개인 밭 경비자리를 얻었다. 거기서 알게 된 10여살 많은 누나가 두만강 건너 중국에 가면 옥수수가 지천에 널려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는 야간 경비를 서려 나왔다가 맞은 편 강을 넘어 중국에 갔다. 정말 밭에 옥수수가 엄청 많았고, 경비도 없었다. 그는 배낭에 옥수수를 잔뜩 따서 넣고 다시 두만강을 넘어왔다. 그게 혁의 첫 도강이었다. 당시엔 국경경비대도 많지 않았고, 종성에서 살았던 혁을 의심하던 사람도 없었다. 누나는 가끔 중국 주소를 알려주며 그곳에 가서 물건을 받아달라고 부탁했다. 그 약속도 잘 들어주었다. 어느새 그는 두만강을 어렵지 않게 넘나드는 도강꾼이 됐다. 한번은 형이 찾아왔다. 중국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이후 소식이 없어졌다. 중국으로 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삶은 오래가지 못했다. 1998년 11월 혁은 보위부에 체포됐다. 중국을 오가며 사귄 조선족 청년들이 청진이란 도시에 대해 몹시 궁금해 했다. 혁은 겁도 없이 여럿 데리고 나와 청진을 구경시켜주다 잡혔다. 중국 청년들은 혼을 내서 다시 중국에 돌려보냈지만 혁은 수감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를 신고한 사람은 중국을 처음 알려준 그 누나였다. 안전부에선 그녀를 잡으려 오랫동안 주시를 해왔는데, 그녀는 자기가 살기 위해 보위부에 자수하면서 혁을 제물로 바친 것이다. 그렇지만 누나가 산 것은 아니다. 그녀도 6년형을 선고 받고 감옥에서 죽었다.#3년형을 선고받다 그는 군 안전부에 끌려가 재판을 받은 이듬해 9월까지 무려 10개월 동안 구류장에서 보냈다. 체포될 때 그의 나이는 만 16세였다. 이듬해 판결을 받을 때 “저는 형법에 규정한 처벌 나이인 만 17세도 안됐는데 왜 형을 받아야 하냐”고 묻자 안전원이 “만 14세 이상이면 누구나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1999년 9월에 17세였던 혁은 비법월경죄 1년, 화폐매매죄 1년, 밀수죄 1년을 더해 합계 3년형을 선고받았다. 다음달 그는 판결을 받은 7명과 함께 온성 안전부 구류장을 나와 전거리교화소로 끌려갔다. 그런데 교화소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허약환자를 받아줄 순 없다는 것이다. 10개월 구류장에서 지내다보니 그는 영양실조에 걸려 있었다. 함께 호송된 7명 중 2명만 교화소 입소에 ‘합격’하고 허약에 걸려 죽을 날이 멀지 않았다고 판단된 나머지 5명은 다시 온성 구류장으로 재송환됐다. 온성 구류장에서 전거리까지 기차로 몇 시간이면 갈 수 있었지만, 당시엔 기차도 제대로 다니지 않아 오가는 데 며칠 걸렸다. 5명 중 2명은 돌아오던 길에 열차 안에서 죽었다. 감옥에 와서 다시 한 명은 희망이 보이지 않아 그냥 먹지 않고 삶을 포기했다. 다른 한 명은 돈 많은 친척들을 둔 재중 교포 출신이었는데, 온성으로 돌아오자 뇌물을 잔뜩 써서 석방됐다. 그런데 그는 집에 돌아가서 죽었다. 감옥에서 굶주리다 집에 간 뒤 음식 조절을 못해 죽은 것이다. 혁이 돌아오자 온성 안전부도 골치가 아프게 됐다. 언제까지 가둬둘 수는 없는 일. 그래서 안전원들은 다른 수감자 가족이 면회를 오면 그 음식을 빼앗아 혁이에게 먹였다. 그는 12월에 다시 전거리로 향했다. 이번엔 합격이었다. 그가 들어가던 날 온성과 무산군에서 호송돼 온 23명이 함께 전거리교화소에 입소했다.#전거리교화소 교화소에 입소하면 제일 먼저 신입반에 배정된다. 교화소에선 가뜩이나 부실한 음식을 다시 급수별로 나눠주는데, 신입반은 제일 양이 적은 4급 밥을 준다. 끌려오기 전에 오랜 감방 생활로 몸이 망가진 상태에서, 4급 밥을 먹으며 혹독한 강제노동에 시달리게 되면 견디기 어렵다. 그래서 신입반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죽는다. 2000년 8월까지 그와 함께 입소한 23명 중 21명이 8개월 안에 죽었다. 죽으면 ‘불망산’이라 불리는 교화소 내부 산에 대충 묻어버린다. 가족에겐 통보도 되지 않는다. 신입반을 마치고 그는 상하차반에 배치됐다.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해오면 그걸 싣고 부리는 일이었다. 나이가 어린 탓인지 그는 감시병 임무를 맡았다. 산에 올라가면 도망을 칠 우려 때문에 나무를 베는 와중에도 5분마다 번호를 부르게 하는데, 그 번호를 부르게 하고, 종합해서 계호원에게 알려주는 역할이었다. 그렇다고 그것만 하는 것이 아니고 나무도 함께 벌목했다. 한번은 늦게 내려오다 개머리판에 맞아 정신을 잃은 일도 있었다. 눈을 떠보니 탈출 의심자로 독방에 끌려갔는데, 5일 정도 있더니 그래도 내려오긴 내려왔기 때문이라며 석방했다. 8개월 뒤 혁은 더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석방 뒤 몸무게는 대략 35㎏ 정도였다. 뼈와 가죽밖에 남지 않아 백 걸음을 걸을 수가 없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그해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55주년을 맞아 김정일이 광폭적인 대사면을 해주라고 지시한 것. 혁은 사면 대상자가 돼 7월 6일에 석방됐다. 그는 나오자마자 중국으로 건너갔다. 2000년 8월 11일이었다. 중국에 가서 청진으로 데려갔던 친구의 집에 가서 의탁해 몸을 회복시켰다. 한 달 정도 있다가 연길로 들어가 농사하는 집에서 일감을 찾았다. 그곳에서 일하고 있을 때 형이 찾아왔다. 형은 벌써 중국에 자리 잡고 있었다. 형은 어느 교회 사역장에 들어가 성경 공부를 하고 있는데, 가끔 한국 사람들도 찾아와서 돈을 준다고 했다. 하지만 하루 종일 방에서 성경을 읽는 것이 오금이 쑤셔 큰 도시로 가겠다고 말했다. 그것이 형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형의 죽음 중국에 살던 중 혁은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데려간다는 사람을 만났다. 혼자만 갈 순 없었다. 형에게 연락해 오게 했다. 그들이 출발하기로 된 날은 2001년 7월 1일이었다. 그런데 직전에 큰 사건이 벌어졌다. 장길수 가족이 6월 26일 베이징 주재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사무소에 진입해 한국행을 요구한 것. 그들 가족은 무사히 한국에 왔지만, 그런 큰 사건이 하나씩 터질 때마다 숱한 탈북민이 피해를 본다. 2002년 3월 탈북자 25명이 베이징 주재 스페인대사관에 집단 진입했을 때도 북중 국경에선 검거선풍이 벌어져 수천 명의 탈북자들이 체포돼 북송됐다. 세계적 주목을 받는 탈북자 집단 진입을 기획한 한국인들은 그것을 내세워 인권운동가로 자처하며 서울에서 살지만, 그 뒤엔 그런 사건 여파로 영문도 모르고 잡혀 비명도 없이 죽어간 수많은 탈북민이 생겨나는 것이다. 장길수 가족의 진입 직후에도 공안은 대대적인 탈북자 색출에 나섰다. 아무 것도 모르고 6월 28일 형을 데리러 갔던 혁은 이틀 전에 형이 공안에 체포됐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한국에 와서도 형의 소식을 수소문했는데, 전거리교화소에 끌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9살 때부터 전국을 누비며 그 어떤 척박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았던 형이지만, 교화소에서 죽음을 피할 순 없었다. 앞서 전거리교화소에서 지옥을 경험했던 혁은 형이 왜 죽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형은 저랑 달리 키도 크고 체격이 좋았어요. 그런 곳에선 체격 좋은 사람이 살아남기 힘들어요.” 아마 형이 끌려갔던 시기엔 정주년을 맞은 기념일도 없어 사면령도 내려지지 않았던 이유도 있을 것이다. 형이 체포됐다고 해서 일행이 모두 지체할 순 없었다. 혁은 7월 1일 몽골 국경을 향해 떠났다.# 철민의 죽음 몽골 국경과 인접한 도시에 갔는데, 사고가 터졌다. 안내해 주기로 한 사람이 전날 체포된 것. 당시 체포된 안내자였던 김권능 씨의 스토리는 2020년 9월 18일자 동아일보에 라는 제목으로 소개됐다. ☞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해당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안내자를 잃은 이들은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왕 여기까지 온 바에 국경을 넘자고 결심했다. 일행은 모두 5명이었다. 혁이와 11살 철민이. 2살짜리 아이를 업은 젊은 여성과 다른 젊은 탈북 남성이었다. 나중에 한국에 와서 여성과 남성은 결혼해 또 애를 낳았다. 그러나 여성은 2015년경 사망했다. 도색을 하는 일자리에서 오랫동안 일했는데, 독성에 중독된 것이다. 일행은 몽골 국경을 향해 사막에 들어섰다. 아무리 걸어도 국경 철조망이 나오지 않았다. 7월 5일 밤 8시에 출발해서 새벽 6시까지 10시간쯤 걸으니 집이 나왔다. 들어가 보니 한족 집이었다. 급히 도망쳤는데 한참을 가서 보니 신고를 받은 공안이 출동했다. 일행은 다음날 아침이 되자 해를 보고 방향을 정한 뒤 다시 사막을 걸었다. 마침내 철조망이 나왔다. 상당한 간격을 두고 철조망이 모두 4개나 있었다. 이걸 다 넘자 탈진할 지경에 이르렀다. 7월의 몽골 사막은 익어죽을 정도로 뜨거웠다. 그 더위에 신기루까지 나타났다. 집인 줄 알고 한참을 갔지만 그냥 바위였고, 철길이 보여 갔는데 역시 그냥 사막이었다. 몽골국경을 넘어 사막에서 헤매기를 몇 시간째. 그의 손을 잡고 잘 따라오던 철민이 끝내 어느 바위 밑에 쓰러졌다. 신발을 잃어버려 옷을 벗어 발을 감싸주며 데려왔는데 어린 나이에 끝내 한계를 넘은 것이다. 일행도 더는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이대로 죽는가 싶어 쓰러져 있던 찰나 혁의 눈에 멀리 집 같은 것이 보였다. 다른 방향에는 오아시스도 있는 것 같았다. 이번에도 헛것이 보였나 싶었지만, 포기 할 수는 없는 일. 혁이 나섰다. “다 같이 갈 필요가 없으니 젊은 내가 먼저 가보고 올게요. 여기서 기다려요.” 정신을 겨우 가다듬고 몸을 질질 끌고 먼저 집을 향해 내려와 보니 기적적으로 비닐하우스 같은 것이 나타났고, 그 옆에 빈집(게르)이 있었다. 그곳은 몽골 국경수비대 초소였다. 초소 안에는 돌 항아리에 담긴 물과 보온병도 있었다. 혁은 빈 병에 물을 채우고 일행에게 돌아왔다. 물을 마시니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다. “그럼 저쪽 오아시스엔 내가 가볼게.” 이번엔 여성이 오아시스로 내려갔다. 오아시스에 다다른 여인은 손을 흔들었다. 물이 맞다는 신호였다. 혁과 남성은 애기와 철민을 데리고 오아시스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철민이 자꾸 주저앉았다. “애기를 먼저 데리고 내려 가고, 내가 다시 올라와 철민이를 업고 갈게.” 혁과 남자, 애기가 먼저 오아시스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도중 여성이 적신 옷을 들고 올라왔다. “철민이는요?” “힘들어 저기 누워있어. 적신 옷을 씌워주고 기다려. 내가 다시 올라갈게.” 오아시스에 이른 혁은 애기를 돌보고, 형이 다시 철민이를 데리려 올라갔다. 한참 있다가 형이 철민을 업고 내려왔다. 그런데 손이 축 늘어져 있었다. 주저 앉아있던 사이 숨을 거둔 것이다. 오아시스에서 이들은 철민의 몸을 물로 씻어주고 그 옆에 쓰러졌다. 더 갈 힘이 없었던 것이고, 여기에 있다 보면 몽골 수비대가 나타날 것이란 희망이 있었기 때문. 실제로 오후 5시쯤 됐을 때 군인들이 나타났다. 몽골 군인들이 장례를 몽골식으로 할 건지 한국식으로 할 건지 물었다. 그들은 한국식으로 하겠다고 대답했다. 수비대 병실 근처에 철민을 묻었다. 흰 백포에 철민을 싸서 묻고 봉분을 만들었고, 술도 부었다. 다음날 이들은 수도 울란바토르로 향했다. 그러나 곧바로 오진 못했다. 도중에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그걸 조사하느라 두 달이나 더 걸렸던 것이다.# 노래 때문에 정착한 부여 2001년 9월 13일 마침내 혁은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도착하니 공항에 총을 든 군인들이 잔뜩 깔려 있었다. 이틀 전 미국에서 9.11테러가 발생했던 것이다. 국정원 조사와 하나원을 거쳐 12월 12일 그는 충남 부여에 정착했다. 하나원 시절 “어디로 가고 싶냐”는 질문에 한국의 지리를 전혀 모르는 그는 답변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북한에서 봤던 ‘민족과 운명’이란 영화가 생각났다. 그 영화에서 ‘부여’라는 이름의 작자 미상의 노래가 나오는데, 백마강이라고 보여주는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기억에 남았다. “따뜻한 봄날에 동무들과 / 백제의 옛 서울 찾았더니 / 무심한 구름은 오락가락 / 바람은 예대로 부는구나”라는 가사를 불러주니 그게 부여라며 부여로 보내주었다. 부여로 가자마자 한국을 실컷 구경하려고 3개월을 떠돌아 다녔다. 다녀보니 정착금으로 받은 1000만 원이 금방 사라졌다. 돈을 벌기 위해 아이스크림 유통업체에 들어갔다. 새벽 4시반부터 오후 6시까지 일해 한 달에 60만 원을 벌었다. 8개월 열심히 일했더니 병을 만나 병원에 입원까지 했다. 그때 그는 깨달음을 얻었다. “돈 쓰긴 쉬워도 벌기는 너무 어렵구나.”#박사가 되다 한국에선 아무 기술도 없이 살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혁은 충남 직업전문학교에 입학해 자동차학과를 1년 동안 다녔고, 마침내 정비기능사 자격증을 땄다. 이후 부여 자동차정비업체에 취직해 1년 반을 다녔는데, 주변에서 “젊었으니 대학에서 공부하라”는 권유를 많이 받았다. 2006년 그는 상경해 카톨릭대 인문학부에 입학했다. 그러나 혁은 평생 공부를 해본 일이 거의 없었다. 나름 머리를 싸매고 열심히 공부했지만, 1학년 성적은 1.87이 나왔다. 통일부에선 이런 성적이면 장학금을 끊겠다고 했다. “애기가 어떻게 옥수수밥을 먹겠습니까. 제발 한 번만 봐주십시오.” 사정사정해서 1년을 더 지원받기로 했다. 2학년 성적은 장학금을 계속 받을 수 있는 기준인 2.5를 넘었다. 기숙사에 살면서 돈도 벌어야 했다. 강남에 가서 식당 알바도 하면서 용돈을 충당했다. 4학년 때 그는 4.5점 만점에 3.75를 받았다. 한 교수가 “가장 부족한 상황에서 입학해 가장 많이 발전한 사람”이라고 소개해주었을 때 성취감으로 뿌듯했다. 2010년 마침내 그는 대학 졸업생이 됐다. 대학 시절 만난 서강대 김영수 교수가 그가 걸어온 삶을 듣더니 자기 대학에 와서 대학원까지 공부하라고 권했다. 그는 내친 김에 대학원에 들어갔다. 공부는 쉽지 않았다. 낮에는 일반대학원 수업을 듣고, 밤엔 특수대학원 수업을 들으며 이를 악물고 공부한 끝에 2012년 석사과정을 졸업할 수 있었다. 대학원을 마친 그는 충남 통일교육센터 전문 강사로 취직했다. 각종 학회를 다니며 열심히 참가했더니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완범 교수가 박사 과정을 제안했다. 그는 2014년 한국학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박사학위는 쉽지는 않았다. 치아까지 녹아내려 임플란트를 심을 정도로 열심히 준비했다. 2019년 마침내 ‘북한 꽃제비 형성과정과 체제로부터 이탈’이란 제목의 박사 논문이 통과됐다. 북한에서 꽃제비로 살던 그가 한국에서 마침내 박사가 된 것. 졸업 이후 경남연구원에 취직해 남북교류협력센터장을 지냈고, 2년 계약 기간이 끝난 뒤 2021년 한국농어촌공사 연구원으로 취직해 지금은 북한 농업기반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2019년 그는 통일교육센터에서 일할 때 간사로 만난 여성과 7년간의 열애 끝에 결혼을 했고, 올해 딸을 얻었다. 박사 논문을 쓰는 내내 곁에서 기다려준 아내가 지금도 너무 고맙기만 하다. #함북 지사의 꿈 지금까지 한국에서 살면서 그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학문의 길로 이끌어준 김영수 교수와 이완범 교수는 그가 꼽는 가장 큰 은인이었다. 아무 연고가 없을 때 자동차정비회사에서 만난 장명기 형도 잊지 못할 은인이다. “그 형을 만나 제가 입에 달고 있던 쌍욕을 끊었어요. 자기 잘못도 아닌데 고객들 앞에서 머리 숙여 사과하고, 분해서 씩씩거릴 때면 뒤에 가서 다독여주었죠.” 그의 결혼식 때 엄마가 앉는 자리에 장명기 형의 엄마가 대신 앉았다고 한다. 기름값이 아까워 떨고 있을 때 자기 집에 와서 살라고 하던 분이었다고 했다. 북한인권시민연합의 김영자 사무국장도 자신에게 인권의 개념을 처음 심어준 엄마 같은 분이라고 했다. 혁이에게 아동인권의 가장 큰 피해자임을 인식시켜주고, 당당하게 한국에서 살 수 있도록 지금까지 이끌어주고 있다는 것. 가톨릭 동창들도 잊을 수 없다. “김수현이란 여자 동기가 있어요. 부모가 장애인이고, 공부하는 와중에 동생들 용돈도 자기가 아르바이트해서 벌어 주어야 하는 정말 어려운 가정환경이었죠. 그런데 그런 친구가 월드비전에 고아를 지원하라고 기부하고 있더라니까요. 충격을 받았죠.” 그걸 보고 김혁도 2006년에 월드비전에 가입해 지금까지 몽골 아동을 후원하고 있다. “제가 몽골이 아니면 여기 올 수 없었잖아요.” 지옥 같은 북한의 삶을 끊어내고 한국에서 얻은 새 삶은 만족스러울까. “여기도 너무 빡세요. 북에선 먹을 것만 고민하고, 생존이 곧 먹을 것을 얻기 위한 것이었는데, 여긴 무엇을 하고,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할지 스스로 만들어야 하죠. 그런 선택이 저에겐 너무 힘들어요. 아마 모든 탈북민들이 같은 고민일 겁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내린 선택이 쌓여 오늘의 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한국은 선택은 어렵지만 노력만 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사회죠.” 그래도 가정을 가진 지금은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집이 충청남도에 있어 전남 나주를 오가는 주말부부로 살지만 딸까지 태어나니 가족에 대한 무한한 책임감이 생긴다고 했다. 통일되면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묻자 그는 대뜸 “함경북도 도지사요”라고 대답했다. 고향에 돌아가 고향 사람들을 잘 살게 만드는 것이 그의 평생의 목표이다. “정말 고생 많이 하고 살았지만, 이게 끝인가 하면 또 저게 나타나고, 저걸 넘으면 그게 또 시작이더군요. 그렇지만 어떻게 온 길입니까. 늘 버티고 버티자 마음 속 다짐을 하고 그렇게 평생 살아갈 겁니다.” 북한에서 7살 때부터 꽃제비가 돼 지옥 같은 삶을 살다가 다른 체제에서 박사까지 이뤘으면 남들이 평생 오르기 힘든 산에 올랐을 법도 하지만, 그의 나이는 이제 겨우 40살이다. 인생을 절반 밖에 살지 않은 것이다. 그가 앞으로 목표라는 산의 어디까지 오를지 알 수는 없다. 산의 정상 어디쯤에서 함북도지사라는 꿈과 만나는 날은 올 수 있을까.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1995년 초겨울. 북한 강원도 금강군과 김화군 사이에 있는 우두산(948m) 정상의 진지에서 북한군 병사들이 남쪽에서 날아온 삐라 한 장을 놓고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삐라에는 ‘대한민국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 자동차 등록대수 1000만 대 이상. 4명 중 1명이 자동차를 소유’라는 글이 사진과 함께 적혀 있었다. 자동차 1000만 대는 알겠는데, 1만 달러가 도대체 어느 정도 액수인지 가늠할 수 있는 군인이 없었다. “어이, 상등병 한용수 여기 오라. 너는 집에서 달러를 좀 만져봤다니 1만 달러면 어느 정도 액수인지 알 수 있갔지?” 1990년대 초반만 해도 북한에선 달러를 구경해본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산이 많고 먹을 것이 없어 악명 높은 강원도 주둔 1군단과 5군단엔 북한에서도 가장 가난한 집 자식들이 많이 복무했다. 금강군 주둔 1군단 13사 소속 한용수 상등병은 그런 부대 환경 속에서 달러의 가치를 아는, 많지 않은 병사 중 한 명이었다. 그가 입대하기 전 살았던 함흥의 외화상점 앞에선 1달러가 북한 돈 100원으로 암거래됐다. 당시 평범한 노동자 월급이 100원 정도였으니 이는 곧 1달러가 노동자 한 달 월급과 맞먹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1만 달러는 우리 돈으로 바꾸면 100만 원이고, 노동자 1만 개월 치 월급이니까 830년쯤 일해서 꼬박 모아야 되는 돈입니다.” 상상이 안돼 눈을 끔뻑거리는 고참들에게 한 마디 더 했다. “제가 입대하기 전에 함흥에서 아파트를 1만5000원이면 샀는데, 1만 달러면 아파트 70채 정도 사겠네요.” “야 임마, 후라이까지 말라우. 저 남조선 아새끼들이 일년에 그렇게 많이 번다고? 거짓말도 그럴 듯해야 믿지.” 고참들은 도통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한 씨 역시 남조선이 그렇게 잘 산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탈북을 꿈꾸다한 씨가 근무하는 곳에선 한국의 화천댐이 멀리 보였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그 댐을 기준으로 한국군 7사와 21사가 북한군을 경계하고 있었다. 남쪽이 얼마나 잘 사는지는 몰라도 북한군보단 낫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몇 가지 증거는 발견할 수 있었다. 우선 아무리 적진을 살펴봐도 한국군은 삽질과 곡괭이질을 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북한군은 근무 시간을 빼곤 진지 정리니, 철조망 정리니, 길 정비니 하며 삽과 곡괭이를 메고 다녔다. 또 북한군은 물자를 등짐으로 메고 2시간 동안 고지로 올라오는데 비해 한국군 진지엔 헬기로 물자를 싣고 오고 그걸 차로 다시 싣고 갔다. 쌍안경을 통해 본 한국군의 영양 상태 역시 아주 좋아보였다. 남조선은 헐벗고 굶주리는 사회라고 교육을 받았는데, 그건 북한군에 해당되는 말 같았다. 당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북한군에선 무리로 영양실조 환자들이 발생했다. 1992년 8월 입대한 한 씨의 동기들은 입대 후 1년 동안 신병 훈련을 한다는 핑계로 병영 공사만 시켰다. 강원도 그 엄동설한 강추위에도 12월에야 겨울 동복을 지급받기도 했다. 군인들이 영양실조로 픽픽 쓰러져갔지만 아버지 직업에 따라 처리도 달랐다. 그의 입대 동기 중엔 평양의 노동당출판사 문헌국장 아들도 있었다. 평양외국어학원을 나와 입당하기 위해 어려운 곳으로 자원입대했지만 한 달도 버티지 못했다. 그가 영양실조에 걸리자 아버지가 내려와 아들을 데리고 갔다. 그 동기는 다시 볼 수 없었다. 반면 가난한 집 자식들은 죽어도 너무 외진 곳에 부대가 있어 집에서 시신을 찾으러 오지도 못했다. 이걸 보며 그는 생각했다. “아니, 간부 집 자식일수록 당과 수령에게 더 충성해야 하는데 자기들은 먼저 도망치고 쉬운 곳에 가다니. 그리고 이런 특혜를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군과 사회가 문제가 아닌가.” 한 씨는 남쪽을 바라보며 “저기는 어떤 곳일까, 저기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됐다. 경계 근무를 서러 나가서는 “내가 간첩이라면 어디로 침투할까. 내 눈에 안 보이는 그런 곳이 도망가기도 좋은 곳이 아니겠나” 싶어 주변 지형을 계속 유심히 관찰해보는 습관도 생겼다.탈북을 실행하다1995년 6월 12일. 드디어 기회가 왔다. 북한군 최전방 경계는 3인1조 또는 2인1조로 이동한다. 이런 까닭에 도망을 치면 즉시 발각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달엔 갑자기 진지 방어공사와 내무반 공사가 겹쳤다. 병사들은 야간잠복에서 철수하면 낮엔 공사를 해야 했다. 일과표대로라면 낮엔 낮잠을 자야 하지만 일과가 제대로 지켜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고참이 불렀다. “한용수, 오늘은 산에 올라가 나물을 뜯어와.” 부식물이 없어 병사들이 교대로 올라가 산에서 나물을 뜯어 활용했는데, 이것도 평소라면 조를 짜서 이동해야 했지만 작업 인원이 부족해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는 점심용 쌀이 든 배낭을 메고 오전 9시쯤 혼자 산에 올랐다. 최전방은 나물을 뜯을 때도 총과 수류탄 등 완전무장으로 움직여야 했다. 산에 오르며 생각해보니 입대 후 3년 동안 혼자 병영을 나온 것이 처음이었다. 나물 캐러 갔으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누가 찾지도 않을 것이다. 이런 기회는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발걸음이 저도 모르게 전방 철책 쪽으로 향했다. 철책 근처에서 그는 남쪽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탈북을 하려면 경계가 해이해지는 낮이 훨씬 안전했다. 야간엔 경계 근무를 서는 병사들의 신경이 훨씬 날카로워진다. 그의 입대 동기는 동료들의 총에 맞아죽기도 했다. 경계근무를 서던 중 용변을 보려고 잠시 자리를 이탈했다가 돌아오던 중이었는데, 밤에 간첩으로 오인 받았던 것이다. 배고파 쌀을 꺼내 군용 밥통에 밥을 해먹으며 계속 생각을 해봤지만 쉽게 결단이 서지 않았다. 갑자기 골짜기에 대남방송 확성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오후 3시였다. 시계가 없어 시간을 알 수가 없는 전방에선 대남방송이 곧 시계 역할도 했다. 그 소리를 듣자 그는 더는 지체할 여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평소 봐두었던 골짜기로 내려갔다. 장마 때 철조망이 휩쓸려 내려가기 때문에 계곡 개울 위 철책은 일정한 높이를 두고 들려있었다. 철조망을 통과하면 지뢰밭이 나타난다. 그는 강가의 돌 위로 조심스럽게 걸었다. 혹시 몰라 갈대도 꺾어들었다. 언젠가 고참이 갈대를 먼저 휘두르면 말뚝지뢰를 연결한 선에서 기타줄 소리가 난다고 알려준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튕’하는 소리가 울리면 조심히 줄을 찾아 넘어갔다. 한참을 계곡을 따라 내려가자 최전방 민경 초소와 경계 근무를 서는 병사가 보였다. 민경 초소는 200m 정도 빙 에돌아 통과했다. 마침내 북한강 앞에서 마지막 철조망을 만났다. 장마에 쓰러져 있는 채로 보수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 앞에서 그는 다시 30분 정도 앉아있었다. 이제 강을 헤엄쳐 넘으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 가족 생각이 무거운 돌덩이처럼 그를 안고 놓아주지 않았다.점심은 북에서, 저녁은 서울에서한 씨는 함경북도 연사군 신양노동자구에서 태어났다. 주변을 둘러봐도 산밖에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대다수 사람들은 임업에 종사했다. 그렇지만 그의 부모는 북한에서 좋은 대학을 나온 엘리트였다. 부친은 평양의대를 졸업했고, 모친은 만경대혁명학원을 거쳐 원산농업대학을 나왔다. 이들 부부는 어렵고 힘든 곳에 청년들이 지원해야 한다는 노동당의 방침에 호응해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산골로 자원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산골마을 치과의사였고, 어머니는 중학교 생물 선생이었다. 한 씨가 5살 때인 1980년에 당국에서 리비아에 파견할 의사를 모집했다. 부친은 여기에 지원해 1987년까지 리비아에 의사로 나가 있었다. 그동안 모친 홀로 누나와 형, 그와 남동생 4남매를 키웠다. 한 씨가 12살 나던 1987년 아버지가 귀국했다. 귀국하면서 함흥구강예방원 의사라는 직업을 얻은 뒤 가족을 불렀다. 한 씨 가족은 대도시 함흥에서 살게 됐다. 아버지가 벌어온 외화 덕분에 식구는 나름 풍족하게 살았다. 달러를 들고 외화상점에 가서 외국제 물건을 사오기도 했다. 한 씨는 아버지가 들려주는 리비아 이야기를 들으며 바깥세상엔 잘 사는 나라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어머니 역시 6.25전쟁 때 만경대혁명학원을 다니다 중국으로 피난을 가 1957년까지 살았는데, 중국에서 살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추억했다. 한 씨의 학교엔 부모가 다 외국 경험을 해본 학생은 없었다. 부모의 영향으로 한 씨는 자라면서 외국에 대한 동경을 품게 됐다. 1992년 중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가게 됐을 때 집에선 군사동원부(병무청)에 별다른 로비를 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돈이 좀 있는 집은 뇌물을 써서 자식을 군 복무하기 편한 곳에 보내려하지만 한 씨 부모들은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다. 한 씨는 돌을 열 개 던지면 일곱 개가 군인 머리에 떨어진다는 강원도 1군단에 가게 됐다. 그리고 입대 3년 만에 자유의 세상을 향해 부대를 탈출한 것이다. 강 앞에서 가족 때문에 30분을 머뭇거렸지만 다시 돌아가자니 그것도 불가능해보였다. 지뢰밭을 다시 통과해 부대까지 가기도 너무 어려웠고, 또 발각이라도 되면 인생이 끝장날 수밖에 없었다. “에이, 까짓 거. 그냥 가지 뭐” 한 씨는 메고 왔던 총과 수류탄을 강가에 벗었다. 여기까지 올 동안엔 혹시 있을 모를 교전을 각오하며 무기를 휴대했지만 강을 넘어 남쪽에 도착하면 무기를 갖고 있다는 이유로 총알이 날아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비무장 상태라면 훨씬 안전할 것 같았다. 강을 헤엄치기엔 총이 무거운 이유도 있었다. 한국군 초소에 도착하면 흰 면내의를 벗어 흔들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는 북한강에 뛰어들었다. 강을 무사히 건너 한국군 최전방 감시초소(GP)를 향해 골짜기를 타고 올라갔다. 남쪽은 지뢰밭이 어디 있는지 몰라 그냥 정신없이 올라만 갔다. 한국군 초소에 도착했는데 사람이 없었다. 문 앞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기다렸는데도 사람이 나올 기미가 없었다. 그는 돌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군인 한 명이 문을 열었다.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던 군인은 안에다 뭐라고 소리쳤고, 그제야 병사들이 우르르 나왔다. 그는 병사들과 함께 내무반에 들어갔다. 포박하지도 않았다. 젖은 옷을 벗게 하고 운동복을 주며 입으라 했다. 그때가 저녁 6시경이었다. 좀 있더니 헬기가 날아왔다. 그가 북한군 초소에서 늘 보며 부러워하던 헬기였다. 막상 헬기를 타니 좋을 줄 알았는데 시끄럽다는 생각만 들었다. 헬기가 향한 곳은 경기도 성남의 비행장이었다. 서울 상공에 이르렀을 때 정훈장교가 물어봤다. “서울 상공이 멋있죠?” “평양도 이래요.” 그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나중에 차로 63빌딩 앞을 지날 때 조사기관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빌딩이라고 설명하자 그는 “평양에도 105층이 있어요”라고 대답했다. 대답해 놓고 보니 북한이 싫어서 왔는데, 그 와중에 북한을 편드는 듯한 말을 하는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았다. 성남에서 내린 뒤 서울 동작구에 있는 조사기관까지 도착하니 밤 9시가 됐다. 그제야 기다리던 밥이 나왔다. 점심은 북한에서 먹고 저녁은 서울에서 먹게 된 것이다. 하지만 밥이 조그마한 공기에 쪼끔 나왔다. 식판을 보며 그는 생각했다. “유치원생도 아니고, 요것만 주다니. 배고파 죽겠네.”지하철공사에 취직하다조사 과정은 무려 7개월이나 걸렸다. 그때는 한국에 오는 탈북민도 거의 없을 때라 북한군에서 근무한 사람은 조사기관에 오래 붙들어두고 정보를 캐물었다. 가끔 국정원이나 국군, 미군부대에 가서 물어보는 것들을 대답하기도 했다. 그렇게 오래 조사를 받은 뒤 1996년 1월 사회로 나오게 됐다. 지금은 탈북민이 하나원이라는 정착 지원 교육기관을 거치지만 그때는 그런 것이 없었다. 어느 지역에 가고 싶냐고 묻자 한 씨는 “서울만 빼고 아무데나 보내주세요”라고 대답했다. 그가 7개월 경험한 서울은 너무 시끄러웠다. 하지만 정작 그에게 배정된 것은 서울 강서구 가양동의 임대아파트였다. 조사기관을 나올 때 주소지가 서울 방배동으로 돼 있어서 신변 보호는 방배경찰서가 담당했다. 처음 마주 앉았을 때 담당형사는 “이제 대한민국 국민이 됐으니 취직해 돈을 벌고 살아야지. 어떤 일을 제일 잘 하냐”고 물었다. 마침 둘이 만났던 건물 밖에 고가도로가 건설되고 있었다. 공사장을 바라보다가 한 씨는 “삽질, 곡괭이질 잘 합니다”고 대답했다. 실제로 북한군에 입대해서 탈북하기 전까지 가장 많이 했던 일이기도 했다. 담당형사는 그를 데리고 고가도로 현장소장에게 찾아갔다. 현장소장은 처음엔 안 된다고 했지만 쉬는 시간마다 형사가 찾아가 사정하니 와서 일을 하라고 했다. 일단 ‘노가다’ 자리는 얻었지만 이걸 평생 할 수는 없었다. 마침 방배 관할지역에 서울지하철공사(현 서울교통공사) 본사가 있었다. 형사는 이번엔 공사를 찾아가 공사 시험 때 서류를 내라는 답변을 받았다. 시험을 치고 5개월 기다린 끝에 마침내 한 씨는 서울지하철공사 2호선 역무원으로 입사하게 됐다. 첫 업무는 매표소에서 일하며 표를 팔거나 기기를 수리하는 것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21살이었다. 입사할 때 공사 간부가 그에게 말했다. “우리 공사 직원이 1만2000명인데, 당신이 그중에서 제일 어려요.” 실제로 그랬다. 한 씨는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등록금이 비싸 포기했다. 주변 사람들이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고 했지만 자존심이 내키지 않았다. “교회는 하나님 믿으려 가는 곳이지 도움 받으려 교회 다니면 부끄러운 일이죠. 내가 거지도 아니고.” 그는 그렇게 노동을 선택했다. 그는 북에서 사회 경험이 없었다는 것이 어쩌면 다행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제부터 배우는 것이 곧 그가 겪어야 할 사회 생활이기 때문이다.350원짜리 눈물의 딸기우유한국 정착은 쉽지 않았다. 돈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것이 제일 문제였다. 사회에 나올 때 정착금 2500만 원이 든 통장을 받았지만, 돈을 허투로 쓸 것 같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통째로 맡겼다. 그러고 나니 수중에 돈이 하나도 없어 일해서 벌어야 했다. 한 번은 사회에서 알게 된 친구가 손가락을 다쳤는데 수술비가 없다고 했다. 그때 그의 월급이 100만 원이었는데, 수술비는 250만 원이나 됐다. 그는 선뜻 사채를 빌려 수술비를 마련해줬다. 그런데 이게 문제가 됐다. 이자가 무섭게 늘어나더니 계속 사채업자가 찾아와 독촉했다.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몰리자 그는 직접 사채업자 사무실로 찾아갔다. “난 귀순 병사인데, 돈이 하나도 없습니다. 갚을 정도의 이자를 받아야지 이렇게 하면 나를 때려 죽여도 돈을 갚지 못 합니다.” 사장이 그를 어이없이 쳐다보다 생각하더니 “너 이 돈이 어떤 돈인 줄 알고 썼냐. 앞으로 사채는 절대 쓰지 마라. 그리고 빌려간 돈은 매달 나눠서 원금만 갚으라”고 했다. 사무실을 나오며 그는 “사채업자는 조폭인줄 알았더니 이런 사람도 있네”라고 생각했다. 그 돈은 10개월에 걸쳐 다 갚았다. 북한에서 온 형도 알게 됐다. 의지할 데 없었던 그들은 형제처럼 가까워졌다. 형이 어느 날 사업을 한다고 해 2000만 원을 빌려줬다. 하지만 그 형의 사업은 망했고, 그는 감옥에 갔다. 출소해 나온 그의 몰골을 보고 마음이 아파 또 500만 원을 주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한강에 돌 던지기였다. 이후에도 계속 사업을 한다며 그에게 돈을 빌려 쓰곤 또 감옥을 가는 일이 반복되던 형은 결국 끝내 외국으로 도주했다. 나중에 그에게 빌려준 돈을 계산해봤더니 1억2000만 원이나 됐다. 돈을 빌려줄 정도로 여유 있게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직장에 다니기 시작한지 1년 뒤 외환 위기가 찾아왔다. 1998년 어느 날 월급이 나올 때까지는 1주일이 남았는데 주머니에 2000원 밖에 없었다. 2000원을 들고 그는 1주일을 어떻게 살지 생각했다. 퇴근할 때 당산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가양동 집까지 가야 했다. 당시 버스요금이 350원이었다. 그런데 버스를 타고 가면 먹을 것을 살 돈이 없다. 고민 끝에 그는 슈퍼에서 350원에 파는 딸기우유를 샀다. 매일 딸기우유 1팩을 먹는 대신 당산에서 가양 집까지는 걸어가기로 했다. 주변에서 돈을 좀 빌려 그 위기를 극복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남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말을 죽어도 못하는 성격이었다. 지금까지도 그는 남에게 돈을 빌려본 일이 없다.26년 동안 2호선에서만 근무하다한 씨는 1996년 서울지하철공사에 입사해 지금까지 26년째 한 직장에서 근무하고 있다. 역무원 시절에도 구로공단역을 시작으로 방배역, 잠실역 등을 옮겨 다니며 근무했지만 2호선을 벗어난 적이 없다. 2000년 공사에 순환보직제가 도입됐다. 외환위기 때 구조조정을 한 까닭에 인력이 모자라자 역무원인 운수사무직도 운전직에 지원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는 철도의 꽃은 기관사라고 생각해 운전직에 지원했다. 2003년 마침내 차장으로 발탁됐다. 차장은 맨 뒤 기관실에 타고 있다가 승객들이 다 오르면 기관사에게 출발 신호를 보내는 일을 한다. 차장을 하면서 열심히 공부를 해 기관사 자격을 땄고, 2017년 마침내 2호선 기관사 보직을 부여받았다. 2호선은 노선을 한바퀴 도는데 1시간 반이 걸린다. 그는 매일 출근해 3바퀴를 운전한다. 2호선 기관차만 20년 가까이 타다보니 이젠 터널 위에 박힌 벽돌 위치까지 기억할 정도다. 기관사에겐 운전하다가 뭔가 새롭다는 느낌이 들면 그건 뭔가 잘못됐다는 의미다. 항상 같은 풍경을 보며 어두운 터널을 도는 일이 지겨울 법도 하지만 2호선에 대한 그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2호선의 하루 수송 인구는 200만 명이 넘어요. 단일 노선으로 이렇게 많은 승객을 수송하는 지하철은 도쿄 지하철에 이어 세계 2위일 겁니다. 2호선에서 기관사를 하면 전 세계 어딜 가서도 기관사를 할 수 있어요. 서울교통공사가 적자라고 하지만 2호선만 떼어내 보면 흑자 기업입니다. 우리가 공사를 먹여 살린다는 자부심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딴 노선에 옮겨간 사람들이 여기가 편하다고 오라고 해도 이런 자부심 때문에 그는 2호선을 계속 지키고 있다.기관차를 몰고 북으로한국에 처음 왔을 때 그는 군인이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조사 과정에 그 이야기를 하자 조사요원이 “너 또 도망가면 어떻게 하냐”며 웃었다. 탈북한 북한 병사가 한국군에 복무할 규정도 없었다. 그래서 꿈을 접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 그 꿈은 딸에게 옮겨갔다. 한 씨는 2000년 같은 탈북민 출신의 여성을 만나 가정을 이뤘다. 2002년 유일한 자식인 딸이 태어났다. 지금 그 딸은 대학 2학년으로 성장했다. 군사학과를 다니며 부사관 임용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한 씨는 아버지의 꿈을 딸이라도 이룰 수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처음 정착했을 때 학연, 지연, 혈연 등으로 연결된 한국 사람들이 너무 부러웠다. 그때마다 그는 혀를 깨물었다. “이런 사람들과 경쟁하려면 내가 조금 더 잘하는 것으론 안 되겠구나. 더 열심히 살아야겠군.” 회사에 다니며 생활이 안정됐지만 항상 마음엔 대학에 다니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원하던 보직도 얻었고, 가정도 꾸렸고, 집도 샀지만 한국에서 배우고 싶은 열망은 점점 더 커졌다. 마침내 그는 2010년 명지전문대 철도전기학부 전기과에 입학했다. 서울교통공사와 명지전문대가 서로 교육협약 관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2년 반을 다녀 졸업한 뒤 내친김에 전공심화 과정을 2년 더 다녀 학사 자격을 얻었다. 학사 자격을 딴 뒤 한양대 철도시스템 대학원에 입학해 2017년 석사학위도 받았다. 그의 배움에 대한 꿈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020년엔 동양대 경영학 박사과정에 입학해 지금 3학기 째 다니고 있다. 굳이 기관사를 하면서 박사까지 획득하려는 이유가 뭘까. “생활이 안정되니 내가 여기에 밥만 먹고 살려 왔냐는 생각이 들었죠. 목숨 걸고 온 길인데 의미 없이 살면 안 된다고 늘 생각했고, 제가 기관사다보니 그 의미를 철도에서 찾게 됐습니다. 지금도 남북 간에 회담을 하면 철도 연결 문제가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철길을 연결한다고 열차가 바로 운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운영 시스템까지 통합해야 하는데, 만약 통일 이전에 남북 철도가 연결된다고 하면 그 일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남북 정치 상황이 나빠져 서로 왕래가 단절돼도 철도는 멈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그런 시스템을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사실 그의 진짜 꿈은 기관차를 끌고 북에 올라가는 것이다. 탈북민이 한국의 기관사로 기차를 몰고 북한 땅을 다시 밟아보는 것이 희망인 것이다. “제가 기관차를 몰고 북에 가는 것이 전혀 실현 불가능하다고 보진 않습니다. 어쨌든 그러려면 남북 철도가 우선 연결돼야겠죠. 그런 작업부터 참여하고 싶어 박사까지 공부하며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습니다.” 2호선은 매일 수백 만 명의 사람들로 북적인다. 수많은 꿈을 싣고 열차는 빙빙 돌고 또 돈다. 한 씨의 꿈도 오늘 어느 열차에 함께 타고 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윤석열 대통령이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6개 항목으로 구성된 ‘담대한 구상’을 대북정책으로 제안했다. 사실 담대함을 따지자면 과거 보수 정부들이 훨씬 더 담대했다.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3000’은 북한의 평균 소득이 3000달러에 이를 때까지 지원해 주겠다고 했고 항목도 6개에 국한시키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시베리아횡단철도(TSR)와 중국횡단철도(TCR)의 연결, 남-북-러 가스관 부설, 송전망 구축 사업 등을 통해 중국과 러시아까지 참여시키려 했다. 인프라도 송배선에 국한시키지 않고, 전력·교통·통신을 다 포괄했다. 남북교류협력사무소 설치, 개성공단 국제화, 지하자원 공동개발, 국제금융기구 가입 주선 및 국제투자 유치 지원 등도 포함됐다. 그러나 대북 제안이 담대한지 소극적인지 하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아무리 좋은 제안을 해도 북한이 거부하면 의미가 없다. 과거 보수 정권 시절 남북관계가 작명과는 오히려 반대로 흘러갔던 것도 제안에 담긴 당근이 작았기 때문은 아니다. 윤 정부의 제안은 ‘북한이 실질적인 비핵화로 전환한다면’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지금 북한은 6차례의 핵실험을 통해 핵무기의 소형화와 수소탄 개발까지 선언한 상태다. 북한이 생각하는 핵무기 가격이 훌쩍 뛰었다는 뜻이다. 훨씬 더 북한에 호의적이었던 문재인 정부에도 상욕을 퍼붓던 북한이 비핵화 대화를 전제로 한 윤 정부의 ‘당근’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짐작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우려할 필요는 없다. 한국 정부가 비핵화를 대북정책의 전제로 내거는 한 아무리 파격적 지원을 해준다 해도 북한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북한은 핵 협상에 있어서 철저히 미국하고만 상대하고 있다. 비핵화와 대북정책을 연계시키는 정책은 진보·보수 정부를 막론하고 성공하지 못했다. 심지어 문재인 정부는 세 번씩이나 김정은과 마주 앉아 회담을 하고도 성공하지 못했다. 이런 관계를 깨달았다면 비핵화와 대북 지원을 연계한 전임 정권들의 접근법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객관적으로 보면 윤석열 정부는 그 어느 정권보다 당당한 대북정책을 펼 수 있는 조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과거 정부의 유산이 없다. 이명박 정부는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은 물론 매년 식량 약 40만 t, 비료 10만 t을 지원하던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이어받았다. 북한은 이명박 정부에 쌀 10만 t, 옥수수 10만 t, 비료 30만 t, 아스팔트용 피치 1억 달러어치를 당당하게 요구했다. 이를 거절하고 옥수수 1만 t을 주겠다고 하자 북한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불과 4개월 뒤 천안함을 공격했고 이어 거리낌 없이 연평도까지 포격했다. 박근혜 정부는 북한의 4차 핵실험 이후 개성공단을 폐쇄시켰다. 이제 남북 간에는 계승할 것이 없다. 원래 줬다 빼앗기가 제일 어려운 법이다. 이제 북한이 문재인 정부도 못 해준 것을 윤 정부에 해내라고 할 일도 없다. 둘째, 코로나가 터진 이후로 북한은 지금까지 셀프 봉쇄를 단행하고 있다. 남북이 서로 마주 앉지 못하는 것은 북한 때문이지 한국 때문은 아니다. 셋째, 한국은 훨씬 부유해졌고, 북한은 훨씬 가난해졌다. 가장 강력한 유엔 대북제재에 이어 코로나 봉쇄까지 겹쳐 북한의 금고와 창고는 이미 텅텅 비었다. 국방력에 있어 한국은 국토가 포격 받아도 소극적 대응밖에 못 했던 과거와 다르다. 반면 북한은 연료와 식량 부족으로 몇 년째 연례 군사훈련도 못 하고 있다. 이젠 남북관계의 패러다임을 유연하게 바꿀 필요가 있다. 왜 항상 우리가 욕설을 퍼붓는 북한에 먼저 다가가야 하는가. 미국과 비핵화 협상을 하겠다면 적극 중재할 의향이 있다고만 밝히면 된다. 코로나 봉쇄를 풀고 경제교류를 할 의향이 있다면, 언제든 만나 북한의 요구를 외면하지 않겠다고만 하면 된다. 먼저 뭘 해주겠다고 말빚을 질 필요도 없고, 북한이 필요한 것을 제시하면 하는 것 봐서 파격적으로 지원해 준다고 해도 충분하다. 끝으로 북한의 도발엔 남북관계 단절을 각오하고 과거 경험해 보지 못한 강력한 반격으로 대응한다는 의지와 대비 태세를 보여줘야 한다. 지금은 남북관계가 단절되면 괴로운 것은 북한일 뿐이다. 시간도 북한 편이 아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삼성증권이 만기 1∼3년의 월이자 지급식 여신전문금융회사채(카드채+캐피털채)를 8월에 1000억 원어치 판매했다고 16일 밝혔다. 월이자 지급식 채권은 매월 정해진 이자를 지급하는 채권으로 최근 금리 인상에 따른 상대적으로 높은 이자를 매월 지급받을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삼성증권이 8월에 판매한 현대카드·현대캐피탈 채권은 신용등급 AA등급의 높은 안정성을 갖춘 선순위채권이고 수익률은 세전 연 3.7∼4%에 이른다. 금리뿐만 아니라 투자원금의 안정성이 높은 채권이라는 점 때문에 입소문이 나면서 투자자들이 몰렸다. 삼성증권이 1일 판매했던 ‘현대카드852’는 만기 1년에 세전 이율이 연 4.00%다. 1억 원을 투자한 고객은 9월 1일부터 매월 세후 약 30만 원의 이자를 1년간 수령할 수 있다. 삼성증권이 판매한 월이자 지급식 채권은 삼성증권 모바일 앱인 엠팝(mPOP), 지점, 고객센터를 통해 상담과 매수가 가능하다. 삼성증권은 1년 만기 상품의 완판에 힘입어 1.5년, 2년, 2.5년, 3년까지 다양한 만기의 월이자 지급식 채권을 출시해 판매상품 다양화에도 나서고 있다. 이달 중에는 400억 원을 추가 판매할 예정이며 매월 2000억 원 규모의 유사한 조건을 가진 월이자 지급식 채권을 꾸준히 공급할 계획이다. 삼성증권 사재훈 채널영업부문장(부사장)은 “단순히 이자 수익률을 높이는 차원에서의 금융 상품 제공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형태의 금리형 상품을 발굴해 개인투자자의 금융 자산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할 것”이라고 밝혔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요리 훈련병 “이제부터 동무들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배려로 조선인민군의 식사를 책임지는 요리사로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일장연설을 하는 소좌 앞에 트럭에서 내린 10대 후반 청소년들은 차렷 자세로 바짝 긴장한 채로 서있었다. 입소식이 끝나고 군복으로 갈아입은 뒤부터 이들은 손에 칼을 들고 맹훈련에 돌입했다. 당시 만 16세 소녀 안영자 씨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1983년 평안남도 은산군 수양역 인근의 북한군 후방총국 기지에서 이들은 무려 2년 동안 스파르타식으로 각종 요리를 하는 훈련만 받았다. 군부 소속이라 식재료는 풍족하게 공급됐다. 평양상업대학에서 파견된 교수들이 학생들을 대상으로 1대1로 요리 교육을 해주었다. 교육생들은 군인 신분이라 가끔 총을 메고 달리는 훈련도 받았고, 무거운 마대를 메고 고지를 오르내리기도 했다. 유사시 요리사들도 음식을 메고 전장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처음 입소했을 때 교육생은 남자 6명, 여자 42명으로 모두 48명이었는데, 2년 과정을 버티고 졸업한 사람은 26명에 불과했다. 2년 교육 과정이 끝나자 신의주비행장과 순안비행장에 파견돼 6개월 실습과정도 거쳤다. 실습 과정을 거치자 이들에겐 평양상업대학 졸업생 자격과 함께 1급 요리사 자격증도 함께 주어졌다. 북한군은 일반 부대엔 요리사가 따로 있지 않다. 그러나 각종 장성급 초대소(별장)와 특수 임무를 수행하는 초대소에 전문 요리사를 배치할 필요가 있어 당시 군부 직속 요리사를 특별히 키워낸 것이다. 졸업과 동시에 안 씨는 군복을 입고 1986년 공군사령부 소속 함경북도 경성군 온포초대소 요리사로 파견됐다. 그곳은 그녀의 고향이기도 했다.#1호 행사 요리사 안 씨는 경성에서 나름 잘 나가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임업대학을 졸업하고 현지 임산사업소 기사장을 했고, 어머니는 인민학교 교사였다. 그녀에겐 오빠 두 명과 남동생 1명이 있었는데, 4남매 중 유일한 딸이라 부모의 사랑도 독차지했다. 그녀는 공부도 곧 잘했다. 중학교 졸업하기 전 그의 포부는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방인 경성에선 의학대학에 추천받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결국 졸업하는 해 평양상업대학에 시험을 칠 자격을 얻게 됐다. 평양상업대학도 북한에선 여성들에겐 매우 선망 받는 대학으로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하지만 시험 치러 가기 전 아버지가 찾았다. “영자야, 요즘 군에서 요리사를 뽑고 있는데, 평양에서 공부하기보단 거기에 가는 게 나을 것 같다. 평양상업대학 졸업 자격도 주고, 입당도 빨리 되고, 물자도 풍부한 좋은 초대소에서 복무할 수 있다고 하더구나. 고향에 돌아올 수도 있고…. 평양에서 상업대학 나와도 이런 곳에 들어가기 어렵다.” 16세 소녀는 당연하게 아버지 권고를 따랐다. 북에서 요리사란 직업은 한국과 달리 매우 귀한 직업이다. 당시엔 지방의 어느 군에 가봐야 식당이 서너 개 정도에 불과했다. 도시도 마찬가지. 식당은 출장을 다니는 사람들이나 가는 곳으로 인식되던 때였다. 요리사가 되려면 대학을 나와서 국가에서 임명장을 받아야 가능했다. 먹을 것을 다루는 요리사는 배급에 의존해 살지 않아도 되니 여성들에게 특히 인기가 있었다. 어느 날 집에 한 군관이 찾아와 안 씨를 만나 면담을 하고 돌아갔다. 신원조회 과정은 6개월이나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집에 찾아온 소좌와 함께 열차를 탔다. 소위 ‘1호차’로 불리는 고급 열차였다. 평양으로 가는 줄 알고 들떴으나 평양역에서 수십㎞ 떨어진 수양역에서 내려 깊은 산골에서 훈련을 받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래도 졸업하자마자 병사 중에선 가장 계급이 높은 특무상사 견장을 받고 고향에 있는 공군 초대소로 돌아올 수 있어 다행이었다. 함경북도 경성비행장은 북한군 공군 조종사를 키워내는 주요 기지이다. 북한군 비행사들은 조종사 과정 중 1년 동안은 이곳에 와서 비행기를 탄다. 안 씨가 배치를 받은 온포초대소는 유명한 주을온천 곁에 있는 경치 좋은 곳이었는데, 가보니 이곳엔 아프리카인들이 정말 많았다. 당시 아프리카 외교에 힘을 기울이던 김일성은 군사 원조의 하나로 아프리카 각국에서 선발된 군인들을 북에 불러 비행사로 양성하고 있었다. 짐바브웨, 탄자니아, 잠비아, 레소토 등 아프리카 각국에서 흑인 청년들이 몰려왔다. 안 씨의 첫 임무는 이들에게 요리를 해주는 것이었다. 아프리카인들의 주식은 빵과 우유, 버터였지만, 요리도 잘 먹었다. 가장 많이 사용하는 식재료는 돼지고기와 닭고기, 감자와 토마토였다. 감자는 푹 삶아 육류와 섞어 각종 요리를 만들었다. 돼지고기와 토마토를 함께 볶은 요리도 매우 인기가 있었다. 가끔 평양에 차출돼 갈 때도 있었다. 1980년대 짐바브웨 대통령, 레소토 총리 등 아프리카 귀빈들이 북한을 찾아와 김일성을 만나는 ‘1호 행사’를 할 때면 평양에 가서 연회장 만찬 요리를 함께 만든 적도 있다.#행복과 불행은 종잇장 차이안 씨가 군 요리사로 성장할 동안 집안엔 좋은 일도 많이 생겼다. 우선 1986년에 아버지가 대외경제위원회로 자리를 옮겨 외화벌이를 하려 어머니와 함께 외국에 파견된 것이다. 처음 소련에 근무하다가 나중에 루마니아에 가서 노동당 자금을 마련하는 일을 맡았다. 북한에서 부모 모두 외국에 갈 수 있는 자격은 출신성분이 좋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 안 씨는 아버지의 출신성분이 얼마나 좋았는지는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오빠들도 출신성분이 좋아야 가는 위치에서 빠르게 승진했던 것을 보면 나쁘지 않은 출신성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 오빠는 큰 병원의 원장까지 지냈고, 둘째 오빠는 호위국 소좌로 있었다. 부모가 보내주는 돈으로 형제들도 풍족하게 살았다. 안 씨는 1994년 함경남도 마전에 있는 대남연락소 교관과 결혼했다. 남편의 아버지는 보위부 고위 간부였고, 북한에서 최고의 출신 성분으로 꼽는 항일투사 가문이기도 했다. 결혼 직후 마전으로 옮겨 그곳 초대소 요리사를 지냈다. 남편을 따라 이사를 다니며 원산과 간리 초대소 등 남파 간첩들이 주로 사용하는 초대소에서 요리사를 지냈다. 결혼 생활은 그리 행복하진 않았다. 남편은 한번 나가면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고, 둘 사이에 아이도 없었다. 그래도 잘 나가는 남자와 결혼했다고 주변에서 부러워했다. 그러나 해외에 파견된 부모를 둔 유복한 생활, 잘 나가는 오빠들을 두었던 안 씨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1997년 남동생의 사망과 더불어 그의 집은 풍지박살이 나기 시작했다. 두 살 어린 남동생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부모와 헤어졌다. 부모가 해외에서 돈을 벌고 형들도 누나도 다 집을 떠난 뒤라 통제를 할 사람도 없어졌다. 부모가 보내주는 돈으로 동생은 일본 귀국자 출신 등 부유한 청년들과 어울리며 지냈다. 이들은 틈만 나면 북한에서 허용되지 않은 불법 해외 비디오를 돌려보며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는데, 당시 북한에서 돈 많은 청년들이 살았던 전형적인 일상이었다. 하지만 북한은 그런 식으론 절대로 안정적으로 살 수 없는 곳이다. 늘 생각지 못한 변수와 위험이 순식간에 찾아오기 때문이다. 동생도 그랬다. 1991년 12월 소련이 붕괴되는 것에 충격을 받은 김정일은 “썩어빠진 자본주의 날라리 현상을 철저히 뿌리 뽑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전국에서 무시무시한 검거선풍이 벌어졌고, 남동생도 체포됐다. 함께 금지된 영상을 보았던 친구가 체포돼 그가 주모자라고 고발한 것이었다. 동생은 1992년 5년형을 선고받고 악명 높은 함북 전거리교화소에 끌려갔다. 그렇지만 5년을 끝내 버티지 못하고 28살에 폐렴으로 사망했다. 북한에서는 감옥에서 수감 생활을 하는 것과 수감 중에 죽은 것은 하늘땅 차이이다. 형기를 마치고 풀려나면 죄를 씻었다고 보지만, 형기 중 사망하면 공화국의 법에 의해 심판을 받다가 죽었다고 평가해 온 가족의 출신성분이 반동 가족으로 바뀐다. 형기 중 사망하면 시신을 가족에게 돌려주지 않고 교화소 내에서 소각하며,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도 함구한다. 동생이 전거리수용소에서 수감됐을 때 안 씨의 형제들은 외국에 나간 부모들에게 이런 소식을 알리지 않았고, 동생과 연락이 되지 않는 이유를 거짓말로 둘러댔다. 부모가 걱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 당국도 마찬가지이다. 심경에 변화를 일으켜 도망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안 씨의 부모는 아들이 감옥에 끌려간 줄도 모르고 해외에서 지냈다. 하지만 동생이 사망하고, 1997년 황장엽 망명사건까지 터지자 북한 당국은 안 씨의 부모를 북으로 소환시켰다. 집에 돌아와서야 비로소 막내아들이 감옥에 끌려가 죽은 것을 알게 된 부모는 큰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는 비통해 하던 끝에 뇌출혈로 쓰러졌다. 의사였던 첫째 오빠는 병원에서 계속 일할 수 있었지만, 둘째 오빠는 군복을 벗어야 했다. 안 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1997년 그는 남편과 강제 이혼을 하고, 군복도 벗어야 했다. 집으로 와보니 그토록 자랑스럽던 아버지는 반신불수가 되어 쓰러져 있었고, 엄마도 병에 걸렸다. 그동안 벌어놓은 재산을 팔아 약값은 겨우 충당했지만, 점점 돈이 말라갔다. 당시는 국가에서 배급도 나오지 않았던 고난의 행군 시기라 먹을 것조차 점점 없어져갔다. 아버지를 살리려면 사향배꼽이 특효라는 말을 들었지만, 당시 가격이 1만 달러나 돼 도무지 살 수가 없었다.#탈북 보다 못한 그는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선 중국의 친척집에 가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그는 1998년 처음으로 두만강을 몰래 넘어 중국으로 갔다. 그런데 친척이 그런 거액을 줄 리가 없었다. 그는 중국에서 몇 달 있으면서 바느질 등 온갖 잡일을 하며 돈을 벌어 북에 돌아갔다. 당연히 사향배꼽은 살 수가 없었다. 이듬해 아버지는 끝내 숨을 거두었다. 제대된 그에게 양강도 혜산에 사령부가 있는 9군단 요리사 제안이 왔다. 특별한 사람들만 신원조회를 거쳐 들어가는 초대소 요리사에서 민간인 중에 뽑아 들어가는 일반 군부 요리사로 신분이 바뀐 것이다. 혜산에 들어온 그는 군부 식당 요리사로 있다가 이후 여러 식당을 옮겨 다녔다. 졸지에 아버지와 남동생을 잃고, 남편과 이혼당한 뒤 안정적이고 풍족한 직업까지 잃은 그는 북한에선 더 이상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다. 한번 다녀온 풍요로운 중국 생각이 계속 머리에 떠올라 일상생활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2001년 또다시 직장을 옮길 기회를 만나 중국에 넘어갔다. 중국에서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하며 돈을 벌어 다시 북에 갔다. 그러다가 2005년엔 살던 집까지 팔고 아예 중국으로 넘어왔다. 중국에서 알았던 탈북한 친척 중 몇 명이 한국에 도착해 “북에서 살지 말고 남쪽으로 오라”고 전화를 했던 것이다. 그리곤 그들의 안내를 받아 한국으로 오는 브로커와 접선해 그해 9월 다른 탈북민 8명과 함께 일행을 이루어 한국으로 향했다. 몽골을 거쳐 한국으로 오는 루트였다. # 생사가 갈린 몽골 국경몽골 국경까지 이들을 인솔한 안내자는 헤어지기 전에 “계속 가면 철조망이 나오는데, 여기서부터 시작해 동쪽 방향으로 철조망 여러 개를 차례로 넘어 계속 가면 마을이 나온다”고 알려주고 돌아갔다. 몽골은 광활한 사막의 나라다. 자칫 길을 잃으면 목숨을 잃기도 하고, 몽골 내륙으로 들어가는 방향 감각을 상실하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일행은 다행히 중국으로 돌아가진 않았지만 사막에서 무려 엿새나 헤맸다. 낮에는 얼굴을 찌르는 듯한 태양열에 피부가 타들어갔고, 저녁엔 추워서 온 몸이 덜덜 떨렸다. 각자 9병씩 배낭에 넣고 떠난 물은 너무 일찍 바닥이 났고, 식량으로 준비한 빵은 도무지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8일 동안 얼굴이 4번 벗겨졌어요. 하루 종일 동물 뼈밖에 나오지 않는 모래사막을 헤매다가 갑자기 푹푹 빠져드는 진흙탕이 나오기도 해요. 그래도 거기에 물기라도 있으면 그 더러운 물을 허겁지겁 마셨죠.” 닷새째 되는 날 일행이 갈라졌다. 동쪽으로 향해 계속 가야 한다는 의견과 다른 방향으로 가야 된다는 의견이 갈라진 것이다. 논쟁할 힘도, 강제할 힘도 없었다. 결국 30대 중반 두 여성은 일행과 떨어져 다른 방향으로 갔다. 엿새째 저녁 안 씨의 일행은 사막에서 말라 죽은 나무 가지 3개를 발견했다. 더는 갈 힘도 없어 죽기 전에 불이라도 피우고 죽자고 의견을 모았다. 불을 피우고 일행은 빙 둘러 쓰러졌다. 몇 시간 지났을까. 갑자기 말소리가 들렸다. 몽골군 기마병 5~6명이 나타난 것이다. 이들은 일행에게 안대를 씌우더니 군 초소로 데리고 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잠시 뒤 트럭이 나타났고, 이들은 수감시설로 옮겨졌다. 소금과 밥이 나왔다. 다른 방향으로 향했던 두 여성은 불운했다. 그들도 한참을 가다가 나무를 발견해 불을 피웠다. 그런데 그들을 찾아온 군인들은 중국 군인들이었다. 한 명은 체포되자 자살하려고 정통편이라는 중국 감기약을 24알이나 한꺼번에 삼켰다. 거품 물고 쓰러지자 중국 군인들이 그를 병원으로 옮겼다. 그녀는 입원했던 병상에서 도망치는데 성공했다. 이후 여러 시련이 있었지만 그녀 역시 결국 한국에 왔다. 하지만 다른 여성은 북으로 끌려갔다. 일행 중 제일 아름다웠던 여인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북에서 온 사람들을 통해 그녀가 북송된 뒤 여러 차례 탈북했다는 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고 전해 들었다. 북에서 종신형은 곧 사형이나 마찬가지다.# 재단사가 된 요리사 2006년 3월 안 씨는 하나원을 거쳐 경기도 부천에 집을 받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지만, 북에서 계속했던 요리는 하고 싶지 않았다. 북에 있을 때 그녀의 꿈은 남들처럼 화려한 옷을 입는 것이었다. 군 요리사로 근무하다보니 16살 때부터 줄곧 특무상사 견장이 달린 군복만 입고 살았던 것이다. 그는 서울 종로 5가의 한 양복점에 취직했다. 그렇게 옷을 디자인하는 법을 배우고 재단과 봉제 기술을 익혀나갔다. 가끔 그가 만든 요리를 먹어보곤 “정말 맛있다”며 식당을 차리라고 권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무시했다. 한국에 온지 얼마 안돼 한국 출신 남성과 결혼도 했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평범한 며느리이자, 옷 만드는 데 열심인 여성으로 살았다. 그런데 운명은 그를 재단사로 사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2014년 한식대첩이라는 TV프로그램에서 경연에 참가할 북한 출신 요리사를 찾다가 그녀에게 연락이 온 것이다. 처음엔 거부를 했는데 집에 계속 찾아오는 바람에 응하게 됐다. 그는 북한팀으로 경연에 참가했는데, 프로그램에서 최종 5위를 했다. “떡에서 떨어졌는데, 아무래도 북한식과 한국식은 음식이 많이 차이가 나죠.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정말 중요한 프로그램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는 그게 뭔지 모르니 그냥 대충했는데…” 한식대첩 출연 이후 사방에서 그녀를 찾는 전화가 왔고, 강연과 방송 출연 요청이 이어졌다. 탈북민 중에 북에서 요리를 했다는 사람은 많지만, 정규 교육을 이수하고 국가가 인정하는 정식 요리사로 있다 온 사람은 많지 않다. 안 씨는 강연을 준비하느라 머리 속에 들어있는 북한 요리 레시피를 120개나 정리해 자료로 만들었다. 북에서 제대로 요리사로 훈련받고, 현직에 있던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인 것이다. 얼떨결에 얻은 인기로 여기저기 강연도 다니고 TV에도 나가다보니 같이 사업을 하자는 제안도 들어왔다. 처음에 일산에서 ‘장수각’이라는 식당을 동업으로 경영하다가 2020년 8월 서울 강서구 마곡에 ‘안영자면옥’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식당을 개업했다.#탈북 요리사의 꿈 안영자면옥은 평양냉면을 기본 메뉴로 하고, 그외 여러 음식을 곁들인다. ‘돼지발쪽양념장찜’이라는 그녀의 고유 메뉴도 여기에서만 먹을 수 있다. 평양냉면 만드는 방법은 어디서 배웠냐고 묻자 “예전 군에서 요리사 교육을 받을 때 냉면 만드는 방법도 당연히 배우고, 옥류관에도 보름동안 실습을 갔다 오기도 했다”고 대답했다. “서울에선 옥류관 냉면 맛을 만들 수가 없어요. 재료가 벌써 다르거든요. 비슷하게 만들려면 물냉면 한 그릇 가격을 지금보다 두 배 더 받아야 하는데, 그럼 팔리지 않아요.” 제일 자신 있는 북한 요리가 무엇이냐고 묻자 ‘추포탕’이라는 처음 들어보는 요리 이름을 말했다. 1년 미만의 소 애기집으로 만드는 요리라고 한다. 북한에서 그런 귀한 재료를 가려서 쓰냐고 묻자 그는 “북한 최고위급 간부들이 먹는 재료는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이 좋은 재료를 쓴다”고 했다. 대다수 인민들은 옥수수밥도 없어 먹지 못하지만, 극소수 특권층은 재료의 미세한 맛까지 가려 먹는다는 것. 한국 음식과 북한 음식의 차이를 묻자 그는 “한국 요리는 재료 맛을 잘 살리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달고, 맵고, 차고 이런 강한 맛이 위주인데 북한은 재료 맛을 그대로 살리는 데 특화돼 있다. 대신 북한은 전통 밖에 쓸만한 것이 없지만, 현대 요리와 음식 문화의 다양성은 북한이 절대 한국을 따라갈 수가 없다”고 대답했다. 그가 문을 연 안영자면옥은 알음알음 입소문을 거쳐 찾아온 손님들 덕분에 코로나 와중에도 적자를 보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는 조만간 강남에 2호점을 낼 꿈도 가지고 있다. 성공한 사업가가 꿈이냐고 묻자 그녀는 손사래를 쳤다. “탈북자 이미지를 가지고는 대박을 쳐도 무섭고, 장사가 안돼도 무서워요. 적당하게 가계 월세 내고 직원들 월급을 주고 남은 것으로 내가 먹고 살 수만 있으면 만족입니다.” 정작 그녀의 꿈은 북에서 온 탈북민 중에 요리에 재능이 있는 사람을 찾아 요리사로 키우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자신이 나이가 들어 은퇴한 뒤에도 북한 요리 방법이 계속 전수돼 한국에서 또 하나의 음식 문화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제 어엿한 식당 사장도 됐고, 음식점도 잘 자리 잡았으니 행복한 인생이 아니냐고 하자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는 듯,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힘들게 입을 열었다. “평생 편안한 때가 없이 힘들었어요. 북에서도 힘들었고, 한국에 와서도 너무 힘들었고, 지금도 힘들어요.” 철없던 시절 아버지 때문에 시작한 요리사라는 굴레는 전혀 다른 체제에 와서도 여전히 그녀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윤석열 정부는 ‘탈원전 정책 폐기 및 원자력산업 생태계 강화’를 중요 국정과제로 제시했다. 출범 직후 신한울원전 3·4호기 건설 재개를 발표하고 산업부에 원전수출전략추진단을 설립했다. 하지만 원전 확대를 위한 선결 과제이자 마지막 퍼즐은 방사성 폐기물 처리다. 이미 우리나라 고준위 방사성폐기물(방폐물) 임시 저장시설은 줄줄이 포화를 앞두고 있다. 정부도 폐기물 처리의 중요성을 인지해 지난달 ‘고준위 방폐물 연구개발(R&D) 로드맵’을 발표하고 2060년까지 1조4000억 원을 투입하는 방폐물 기술 확보전에 본격 돌입했다. 고준위 방폐물 처리 정책과 일정 등을 구체적으로 듣기 위해 박일준 산업통상자원부 2차관을 9일 서면 인터뷰했다. ―지난달 20일 정부가 최초로 발표한 ‘고준위 방폐물 연구개발(R&D) 로드맵’의 의미는 뭔가. “원자력 정책의 기본전제는 ‘안전’이다. 고준위 방폐물의 안전한 관리는 국민 신뢰 확보와 정책 수용성 제고를 위해 필수적이다. 7월 20일 초안을 공개한 ‘고준위 방폐물 R&D 기술로드맵’은 지난해 12월에 수립한 ‘제2차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 기본계획’의 후속 조치로 부지 선정 착수에서 부지 확정, 중간저장시설, 처분시설 건설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를 과학적 합리성과 기술적 타당성을 기반으로 추진함으로써 국민의 신뢰를 제고할 수 있다는 데 의미가 있다.” ―R&D 로드맵은 어디에 중점을 두고 있나. “부지 선정 절차 착수 이후 37년 내 영구처분시설을 확보할 수 있도록 부지 평가, 방폐물 운반·저장, 처분에 이르는 모든 단계에 필요한 기술의 적시 확보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는 전문가 35명으로 구성된 각 분야 검토그룹이 올해 3월부터 23회의 전체 및 분과별 회의와 13회의 외부 자문가 회의 등을 거쳐 결정한 것이다.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의 안전관리에 필요한 핵심기술로 104개 요소기술과 이를 구체화한 343개 세부 기술을 도출했다. 기술 확보를 위한 방법·일정·재원까지 구체화했다. 분야별로는 고준위 방폐물 관리의 4대 핵심 분야인 부지, 운반, 저장, 처분을 위한 요소기술, 국내 기술 수준, 기술 확보 일정·방법, 소요 재원 등을 포함하고 있다. 10월경 원자력진흥위원회 안건으로 상정해 로드맵을 최종 확정할 예정이다.” ―기술 확보 위한 투자 규모와 재원 조달 방안은…. “연구개발(R&D) 부문에서는 향후 5년간 1226억 원을 포함해 총 9002억 원을 투자할 예정이다. 분야별로는 처분에 5226억 원을 투자하는 것을 비롯해 운반 223억 원, 저장 1240억 원, 부지 2314억 원을 투자할 방침이다. 인프라 부문에서는 원자력환경공단이 4936억 원의 예산을 확보해 연구용 지하연구시설을 짓는 것이 있다. 전체 투자 규모는 1조4000억 원 정도로 예상한다. R&D 재원은 방사성폐기물관리기금을 통해 조달할 예정이다.” ―R&D 로드맵 이외에도 고준위 방폐물 관리 기본계획에 따라 관리 대책이 추진 중인 것으로 안다.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은 현재 1만8000t이 저장돼 있다. 박근혜, 문재인 정부에서 광범위한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쳐 지난해 12월 처분장 확보 일정과 절차 등을 담은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 기본계획을 수립했다. 또 장기 프로젝트를 일관되고 책임 있게 추진하기 위해 기본계획의 핵심 사항을 담은 특별법 제정을 추진 중이다.” ―조기 포화가 예상되는 고준위 방폐물의 원전 부지 내 한시적 저장을 위해 건식 저장시설을 추진할 예정인 것으로 알고 있다. “2030년경부터는 원전의 순차적인 포화가 예상되는 만큼 그 기간 동안에는 고준위 방폐물을 안전하게 관리하기 위해 원전 내 건식저장시설을 한시적으로 확충하는 것이 필요하다. 건식저장기술은 전원 공급과 무관하게 냉각기능이 유지되고, 용기별로 격납되는 구조여서 각종 재해 상황에서도 안전한 기술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임철(33)은 떨리는 심장을 부둥켜안고 컴퓨터 앞에 마주 앉았다. 11살 때인 1998년 겨울 두만강을 넘어 탈북한 이후 이렇게 떨렸던 적이 언제 있었나 싶었다. 숨을 깊게 내쉬고 법무부 제11회 변호사시험 합격자 명단을 확인하기 위해 사이트에 접속했다. 그런데 서버가 다운돼 접속이 되지 않았다.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쳐지나갔다. 임철에겐 이번이 다섯 번째, 즉 마지막 시험 기회였다. 로스쿨 변호사 응시 시험은 5년 내 5회로 제한된다. 앞서 두 차례 시험에서 아쉬운 점수 차로 탈락했는데, 이번까지 떨어지면 그는 법조인의 꿈을 접어야 했다. 그때 카톡 알람이 떴다. “철아, 합격 축하해.” 처음엔 믿기지 않았다. 놀리는 문자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차를 두고 4~5명의 축하 문자가 연속으로 날아왔다. 그제야 임철은 자신이 합격했다는 사실을 서서히 실감할 수 있었다. 마비됐던 서버는 40분이 지나서야 열렸다. 합격자 이름은 가나다순으로 배열돼 있었다. ‘ㅇ’에서 다시 커서를 내려 임철이란 이름을 찾은 순간 쿵쿵대던 심장이 멎는 듯 했다. 임철은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 3만5000여명 가운데서 두 번째로 변호사 자격을 받았다. 시험 합격 소식이 전해 진 뒤 기자는 임철과 마주 앉았다. 그는 “통일에 이바지하는 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통일이 되면 제일 먼저 무엇을 하고 싶냐고 거듭 물었다. “어머니 무덤 찾아야 해요. 묘지를 찾지 못할까봐. 계속 그 생각만 떠올라요….” 울먹울먹하던 임철은 머리를 숙였다.# 고난의 행군 1990년대 수많은 아사자를 초래한 ‘고난의 행군’ 시기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탄광과 광산, 군수공장 종사자들이었다. 도시 사람들은 장사라도 할 수 있었고, 농촌 사람들은 농사라도 지을 수 있었지만, 견장을 달고 엄격한 통제를 받던 광부들과 군부 소속 군수공장 노동자들은 함부로 직장을 이탈할 수 없었다. 함경북도 은덕군(아오지가 위치한 곳)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함경남도 남쪽 금야군의 한 탄광으로 이사해 성장한 임철은 철도 들기 전에 배고픔과 싸워야 했다. 임철의 부친은 석탄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였고, 어머니도 함경북도 예술단에서 사회를 보던 예술인 출신이었다. 탄광에서 배급이 나올 땐 임철도 나름 학교도 열심히 다녔고 성적도 우수했다. 세 살 아래 여동생 수련(가명)이도 노래와 춤을 좋아해 온 식구의 귀여움을 받았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가세는 급격히 내리막길에 들어섰다. 탄광에서 배급이 나오지 않자 임철의 부모는 신발 수리소를 차렸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루 종일 신발을 수리하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원정 수리까지 했지만, 그래 봤자 옥수수밥이나 겨우 먹고 살 수 있을 뿐이었다. 거기에 타지에서 살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까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딸의 집을 찾아와 얹혀서 살기 시작했다. 밥상엔 옥수수밥 대신 풀죽이 오르기 시작했고, 이것도 없어 굶을 때가 많아졌다. 임철이 10살 때인 1997년 5월 아버지가 식량을 구해오겠다며 집을 나섰다. 엄마는 눈물을 흘리며 배낭에 마른 풀떡 몇 개를 넣어주며 배웅했다. 아버지가 없자 가세는 더욱 기울었다. 엄마 혼자 아무리 열심히 일해 봐야 버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엄마는 신발 수리를 끝낸 뒤 10리 정도 떨어진 탄광에 올라가 석탄을 주어 배낭에 메고 어둑어둑한 저녁에 돌아왔다. 그렇게 모질게 살아갔지만 굶주려 누워 있던 외할아버지는 끝내 눈을 감았다. 젊은 사람들도 먹지 못해 굶어죽는 와중에 힘없고 영양실조까지 온 노인이 더 버티지 못한 것이다. 외할아버지까지 돌아가자 집안에 남자는 10살 밖에 안 되는 임철 하나만 남게 됐다. 먹을 것이 생기면 부모와 자식에게 양보하고, 늘 힘이 없는 모습으로 신발을 수리하고 석탄을 가져오는 엄마를 보다 못해 임철이 나섰다. “엄마, 제가 석탄을 가져오겠어요.” 엄마는 처음엔 만류했지만, 임철의 고집에 그럼 한번 갔다 오라고 승인했다. 10리길을 걸어서 탄광마을에 도착하자 숱한 사람들이 탄광에서 버린 버력더미에 달라붙어 석탄을 찾아 배낭에 담고 있었다. 임철도 그들 틈에 끼워 열심히 까만 돌을 찾아 배낭에 담고 집에 돌아왔다. 하지만 첫 걸음은 실패였다. 엄마가 말했다. “이건 석탄이 아니란다.” 임철은 다음날 호미를 가지고 다시 탄광으로 올라갔다. 이번엔 진짜 석탄을 찾아 갖고 올 수 있었다. 저녁에 엄마는 빨갛게 벗겨진 아들의 어깨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엄마의 죽음 가족을 부양할 짐을 걸머진 엄마는 하루 몇 시간도 자지 못하고 계속 일했다. 그러다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병원을 찾아가니 ‘늑막염’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그러나 풀죽도 먹기 힘든 집에 약을 살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휴식을 할 수도 없었다. 엄마가 쓰러지면 온 집안이 굶어죽을 판이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간 지 얼마 뒤 외할머니도 낮에 누워 있다가 숨을 거두었다. 잘 먹지 못해 결핵으로 사망한 것이다. 외할머니가 돌아갔지만, 임철의 집엔 관을 만들 나무도 없었다. 결국 집 앞의 창고를 허물어 썩은 판자로 가까스로 관을 만들어 할아버지 산소 옆에 묻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간 뒤 엄마의 병세는 급격히 악화됐다. 식량을 구하려 간다고 떠난 아버지에게선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10살, 7살 밖에 안 된 아들딸을 두고 누워있을 수는 없었던 엄마는 아무리 아파도 계속 나가 일을 해야 했다. 임철도 석탄을 계속 메고 왔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임철을 부르더니 병원에 가서 의사를 불러오라고 시켰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임철은 쏜살같이 병원에 달려가 엄마가 많이 아프니 빨리 집에 좀 와달라고 말하고 다시 혼자 집에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니 엄마는 숨을 가쁘게 쉬고 있었다. “엄마, 엄마 왜 그래”라고 소리쳐봐야 엄마는 손을 힘없이 내저을 뿐이었다. 갑자기 엄마의 손이 축 처졌다. 가쁜 숨소리도 멎었다. 임철과 수련이 엉엉 울며 매달렸지만 엄마는 눈을 뜬 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어린 오누이의 울음소리에 동네 사람들이 달려왔다. 그러나 이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다음날 마을 사람들이 관을 구하기 위해 온 마을을 헤맸지만, 곳곳에서 죽어나가는 상황이라 관을 구할 수가 없었다. 겨우 썩은 판자들을 다시 구해와 엄마가 시집올 때 가져온 이불을 덮어 안장할 수 있었다. 먹을 것이 없는 동네에서 변변한 제사도 치르지 못하고 마을사람들과 함께 엄마의 관을 싣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옆에 묻었다. 엄마의 나이는 겨우 30대 중반. 아버지가 집을 떠나고 불과 1년 사이에 임철 오누이에게 닥쳐온 운명이었다. 이제 10살과 7살 난 오누이만이 척박한 탄광 마을에 남겨졌다.# 탈북 엄마가 돌아가자 먹고 사는 일이 오누이의 어깨로 넘어왔다. 임철은 어린 여동생과 산에 풀을 뜯으려 다녔다. 때로는 둘이 탄광에 올라가 석탄을 캐서 메고 오기도 했다. 그렇지만 배고픔을 면하긴 어려웠다. 배고플 때는 동생과 함께 장마당에 나갔다. 옆집 아저씨의 도움으로 집안의 가구들을 하나씩 팔면서 장마당에서 조금의 음식을 구할 수 있었다. 탄광 마을에선 하루가 멀다하게 사람이 죽어나갔다. 임철이 다닌 인민학교 4학년도 인원이 3개 학급에 90명이었지만, 나중에 1개 학급 20명으로 줄었다. 굶지 않고 학교에 다닐 수 있었던 인원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탄광 간부들이 찾아와 집을 내놓으라고 말했다. 국가 집이기 때문에 너희는 고아원에 가고 이 집은 바쳐야 한다는 것. 옆집 아저씨가 보다 못해 할머니를 찾으라고 말해주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북중 국경인 함북 새별(경원)에 살고 있었다. 오누이는 어떻게 할아버지를 찾아가야 할지 몰랐다. 옆집 아저씨가 전보를 세 번이나 보냈다. 당시엔 전기 사정도 열악해 새별에서 금야까지 열차가 오려면 닷새 넘게 걸렸다. 열차 안에 들어갈 수 없어 지붕에도 사람들이 빼곡하게 앉아가던 시절이었다. 그런 어려움에도 전보가 도착했는지, 몇 달 뒤 할머니가 마침내 집에 도착했다. 임철은 고향을 떠나기 전 장마당에서 옥수수 국수 한 그릇을 사서 엄마 묘에 올라갔다. “엄마 잘 있어. 꼭 다시 올게. 기다려. 수련이는 내가 잘 봐줄게.” 그렇게 그들은 할머니 손에 이끌려 고향을 떠났다. 할머니 집이라고 풍족하게 사는 것은 아니었다. 아오지 옆 동네인 경원 역시 탄광마을인데, 할아버지는 신발 수리를 해주고 근근이 먹고 살았다. 임철의 삼촌과 고모들도 같은 동네에서 살고 있었다. 새별의 형편 역시 금야와 별 차이가 없었다. 이곳에는 아예 학교 다니는 애들이 거의 없었다. 아이들은 장마당 주변에서 놀다가 기회만 되면 먹을 것을 훔쳐 달아났다. 임철 역시 다시 꽃제비들과 어울리며 살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사라졌다가 열흘쯤 지나 다시 나타났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때 임철의 고모가 탈북해 중국에 숨어있었던 것이다. 먼 친척도 중국에 산다고 했다. 중국에 다녀온 할아버지는 눈에 띄지 않게 집 재산을 팔기 시작했다. 중국으로 탈북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마침내 할아버지와 할머니, 임철 오누이, 중국에 간 고모의 2살 된 딸 현미(가명), 이렇게 5명이 탈북길에 올랐다. 새별 옆을 흐르는 두만강은 너무 깊어 어린 애들이 건너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기차로 열 시간 넘게 이동해 강이 비교적 얕은 온성군 삼봉으로 탈북하게 됐다. 마을에서 한꺼번에 빠져나오면 의심을 받을 까봐 기차역까진 따로따로 이동했다. 삼봉에서 미리 강을 건네주기로 약속한 사람 집에 숨어 이틀을 있다가 마침내 두만강에 들어섰다. 아무리 깊지 않다고 해도 11살, 8살 어린 애가 건너기엔 무리가 있었다. 목까지 물이 차오를 때가 있었지만, 임철은 비명을 지르지 않고 견뎌냈다. 현미는 할머니 등에 업혔지만, 수련이는 오빠 손을 잡고 건너야 했다. 모두들 상황을 아는지 이를 악물고 강을 건넜다. 그때는 11월이었다. 강을 건너자 온 몸이 추위로 덜덜 떨렸지만, 불을 피울 수도 없었다. 할아버지가 앞장서 길을 이끌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 마을에 도착하자 할아버지가 여기에 먼 친척이 산다며 어느 집으로 들어갔다. 도착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밥을 먹는 것이었다. 자라며 구경도 못해 본 쌀밥이 나왔고, 기름진 반찬도 가득했다. 밥을 먹은 뒤 중국옷으로 갈아입고, 따뜻한 구들에 누우니 지옥에서 천국으로 온 것 같았다.# 아버지와의 상봉 아침이 되자 할머니가 말했다. “철이야, 아버지가 여기로 온다는구나.” “할머니 거짓말하지 마세요. 아버지가 왜 여기 있어요?” 하지만 얼마 안 돼 문이 열리더니 웬 사람이 들어왔다. 눈을 비비고 찬찬히 살펴보니 아버지가 맞았다. 정작 만나고 보니 인사만 했을 뿐 눈물은 나지 않았다. 여동생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아버지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엄마가 돌아간 이야기를 하니 아버지는 너무 슬퍼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버지는 식량을 구하러 떠났다가 도무지 구할 방법이 없자 중국에서 돈을 벌어오려고 탈북한 것이었다. 하지만 중국에서 숨어 사느라 집과 연락을 하지 못해, 자신이 떠난 뒤 어떤 비극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지냈던 것이다. 몇 시간 동안 회포를 나누었을까. 아버지가 일어나더니 떠나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는 국경 부근에 살지 않고 헤이룽장(黑龍江) 어느 농촌에 자리를 잡고 지내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하루 종일 이동했다. 마침내 어느 역전에 내리니 웬 여자가 마중 나왔다. 다가가서 보니 고모였다. 고모는 어린 현미를 보더니 “이게 내 딸이야”라고 물었다. 너무나 어린 나이에 엄마와 헤어진 현미는 엄마를 알아보지 못하고 피하기만 했다. 기차에서 내려 다시 차를 타고 한참을 달려 어느 집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이제 살아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를 찾았지만 중국에서의 삶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여느 탈북자들이 다 그랬던 것처럼 살던 곳에서 신분이 들킨 것 같으면 재빨리 다른 집을 구해 이사를 가야 했다. 몇 달에 한번씩 거처를 옮기며 사는 불안한 생활이 이어졌다. 아버지는 한국으로 갈 결심을 했다. 하지만 당시엔 한국으로 오는 길이 위조여권을 만들어 취업으로 가는 방법 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열심히 돈을 모았고(어떻게 벌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마침내 위조여권과 취업비자를 마련했다. 임철 일행이 도착한 이듬해 아버지는 마침내 한국으로 갔다. 몇 달간의 조사를 마치고 나온 뒤 아버지는 돈을 마련해 다시 고모의 비자를 만들어 한국으로 데리고 갔다. 고모가 떠나기 전 할아버지가 중풍에 걸려 돌아갔다. 할아버지는 숨을 거두기 전 “너희들은 꼭 한국으로 가라”고 유언을 남겼다. 이제 중국엔 할머니와 임철 오누이, 현미만 남았다.# 한국 도착 2000년 11월 말 마침내 아버지가 한국으로 오는 루트를 찾아냈다.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임철 가족 4명은 헤이룽장에서 북중 국경인 투먼(圖們)까지 다시 기차를 타고 갔다. 거기엔 이미 많은 탈북민이 한국으로 가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는데, 임철 일행까지 포함해 모두 15명이었다. 투먼에서 일행은 기차를 타고 베이징(北京)으로 떠났다. 베이징에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몽골 국경으로 갔다. 가는 도중에 다른 탈북민들이 합세해 몽골 국경에 내렸을 땐 모두 20명이나 됐다. 당시엔 탈북민이 중국에서 한국으로 오는 통로가 없을 때였다. 그러다가 이즈음부터 몽골을 통해 한국으로 오는 통로가 최초로 개통됐다. 나중에 동남아 쪽으로 탈북 루트가 개척됐는데, 2008년까지도 몽골을 통해 오는 탈북민이 많았다. 임철 일행은 몽골을 통해 한국에 온 최초의 탈북민들에 속했다고 할 수 있었다. 임철 일행은 추운 12월의 어느 밤 철조망 5개를 넘어 몽골로 넘어갔다. 사막을 헤매다가 불빛을 발견했을 때 군인들이 다가왔다. 이들은 감옥에 수감됐다. 며칠 동안 감옥생활을 한 끝에 버스 2대가 와서 이들을 태웠다. 그런데 알고 보니 몽골 군인들이 중국에 다시 돌려보내는 것이 아닌가. 나중엔 몽골 국경경비대도 지침을 받아 국경을 넘어 온 탈북민은 수도로 보냈는데, 당시만 해도 제대로 된 탈북민 처리 방침이 없었던 듯 하다. 끌려 나가는 탈북민들은 통곡을 했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중국에 도착해 중국 군인들에게 인계됐을 때 실신하는 사람도 나왔다. 중국에서 체포되면 북송을 면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기적이 일어났다. 한 중국군 장교가 오더니 “당신들이 잡혀 가면 감옥에 가는 걸 뻔히 아는데, 왜 보내겠냐. 원하는 곳에 데려다 주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중국에는 탈북민을 동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장교의 약속은 사실이었다. 중국군 호송차에 일행을 태우고 기차역으로 가더니 가겠다고 말하는 지역까지 차표까지 끊어주었던 것이다. 임철의 가족은 장춘(長春)으로 갔다. 거기서 다시 아버지가 소개한 사람을 만나 투먼으로 갔다. 한 달 만에 떠난 곳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투먼도 안전하지 못해 그 옆 훈춘(琿春)으로 가서 숨어 2001년 설날을 맞았다. 설 다음날 집에 누군가가 왔다. 그는 앞서 몽골로 가다 체포돼 뿔뿔이 흩어졌던 일행이 다시 몽골로 들어가 이번엔 무사히 한국에 도착했다고 알려주었다. 용기를 얻은 임철 일행은 다시 길을 나섰다. 지난번처럼 투먼에서 기차를 타고 베이징에 도착해 몽골 국경까지 가는 코스였다. 베이징에 도착하자 지난번에 안내해 준 사람이 다시 나타났다. 이번 일행은 모두 11명. 다섯 개의 철조망을 헤치고 몽골로 다시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군인들에게 체포됐다. 이번엔 묶지도 않고 눈을 싸매지도 않았다. 호송차가 달리기 시작했을 때 이번에도 중국으로 보낼지 몰라 몹시 조마조마했지만, 다행이 이번엔 울란바토르로 향했다. 이곳에서 임철 일행은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2001년 1월 13살 임철은 드디어 한국에 도착했다. 이들의 이야기는 당시 한국의 한 월간지에 소개돼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법을 공부해야겠다.” 합심 조사는 석 달이나 걸렸다. 이후 다시 3개월의 하나원 생활을 거쳐 임철은 2001년 7월 사회에 나왔다. 마침내 서울 양천에 아버지와 함께 식구가 모여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임철은 중학교 1학년에 올라갈 나이이지만, 공부를 못했기 때문에 초등학교 6학년에 입학했다. 거기서 반 년 정도 공부한 뒤 중학교 과정은 검정고시를 쳐서 통과했다. 2003년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2006년 재외국민 특별전형으로 고려대 법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왜 법대를 선택했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북한의 사회제도 때문에 엄마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생각해요. 제도를 바꾸어야 사람이 살 수 있는데, 제도를 어떻게 바꿀까 생각해보니 법대가 떠올랐어요. 법치주의를 세워야 독재가 나오지 않을 수가 있지 않을까요.” 대학 과정은 쉽지 않았다. 도중에 방황하던 기간도 있었고, 휴학도 했고, 알바도 하면서 돈을 벌어야 했다. 또 사법고시를 보기 위해 1년 정도 대학을 다니지 않아 2013년 8월에야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3년 더 대학을 다닌 것이다. 2008년 로스쿨이 도입됐지만, 거기에 갈 돈이 없었다. 법조인이 되려면 사시를 통과해야 되는 줄만 알았다. 2012년쯤 되니 로스쿨에도 각종 장학제도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목표를 사시에서 로스쿨로 변경했고,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인 2014년 서울대 로스쿨에 입학할 수 있었다. 로스쿨에 입학하여 변호사가 되기까지의 여정도 결코 쉽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로스쿨의 장학금 제도가 잘 되어 있었고 교수님들의 관심과 지도가 큰 힘이 되었다. 하지만 졸업 후 변호사 시험에 쉽게 통과하지 못하면서 임철의 자신감은 점점 떨어져만 갔다. 설상가상으로 변호사 시험이 점점 어려워지면서 해가 갈수록 시험에 붙는 확률도 낮아졌다. 연거푸 시험에서 떨어져 의기소침해질 때마다 옆에서 힘을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서울대 법대 졸업생 멘토들은 낙방할 때마다 보양식을 사주면서 다음에는 꼭 합격할 거라고 힘을 북돋아 주었다.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남북하나재단을 비롯한 여러 재단들의 교재비 등 수험료 지원도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다. 2022년 11회 로스쿨은 임철에게 마지막 기회였다. 로스쿨 졸업생 3400명이 시험을 쳐서 절반 정도인 1700명이 변호사 자격을 받았다. 그중엔 임철도 포함됐다. 그는 한국 사회의 뜻있는 분들의 따뜻한 관심과 지원이 있었기에 변호사가 될 수 있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임철은 변호사 시험 통과 후 서울 서초의 한 법무법인에서 수습 기간을 밟고 있다가 최근 서울대 공익법률센터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사회 소수자들의 법적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하기 위해서다. 특히 앞으로 다가올 통일을 대비하기 위한 통일법의 연구와 탈북민들의 법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힘쓰겠다고 말했다. “저희는 무사히 한국에 왔지만, 지금도 중국에는 많은 탈북민이 코로나 때문에 오도 가도 못하고 숨어살고 있습니다. 법적으로 난민 지위를 받으면 저렇게 살지 않아도 되는데. 제가 법조인이 됐으니 앞으로 탈북민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고, 또 김정은 체제가 붕괴된 뒤에 북한 법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도 연구할 생각입니다.” # 마음에 묻은 엄마 임철과 함께 입국한 수련이도 연세대를 나와 한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다. 동생을 생각하면 항상 7살 때 손을 잡고 두만강을 넘던 일이 떠오른다. 옛날 북한에서 함께 공부하던 탄광마을 동창들, 배고파서 학교도 다닐 수 없었던 그들은 그 엄혹한 고난의 행군에서 살아남았다 해도 북한에서 성공할 수가 없는 출신이다. 탈북한 아버지 덕분에 서울에 와서 변호사까지 된 임철은 단연 그들 중 가장 성공한 경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북한 사람들에게 어머니를 묻을 관조차 없어 서럽게 울던 탄광마을 어린 소년이 서울에서 변호사가 됐다는 소식을 전해주는 것만으로도 그는 이미 충분히 의미있는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임철은 한국에 와서 행복했던 순간으로 고려대에 입학했을 때, 로스쿨에 붙었을 때, 변호사 시험에 붙었을 때를 꼽았다. 그러나 지금 그는 겨우 33살 청년일 뿐이다. 앞으로 인생에서 행복한 순간은 계속 생겨날 것이다. 하지만 그 어느 날, 가장 기쁜 순간에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마음에 묻은 엄마 생각이다. 그토록 고왔다는 엄마는 지옥의 땅에서 태어난 죄로 지금의 임철의 나이에 꽃다운 삶을 마감해야 했다. 10살, 7살 오누이를 두고 세상을 떠날 때 엄마의 심정은 과연 어땠을까. 이제 임철은 그 심정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엄마 묘지에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고 떠날 때가 벌써 23년 전입니다. 누구도 돌보는 사람이 없으니 지금쯤 흔적이라도 남아있을지 모르겠어요. 제가 고향에 돌아가는 날이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마음은 항상 엄마 묘에 가 있어요.” 몸은 서울에 살고 있지만, 임철의 마음은 여전히 11살 때 벗어난 지옥과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에 머물고 있다. 그 땅에서 태어난 죄로 그가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굴레는 아닐까.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올해 상반기 입국한 탈북민은 19명에 불과했다. 지난해 상반기엔 36명, 2021년 전체로 63명밖에 입국하지 않았는데, 올해는 그보다도 더 줄어들 것이다. 지난해 입국자 중 북한을 떠나 한국으로 입국하는 통상 경로인 중국과 동남아를 거쳐 온 탈북민은 한 명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입국자 대다수는 유럽이나 아프리카에서 근로자로 일하다가 온 사람들이라고 한다. 올해 역시 사정은 비슷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을 거쳐 탈북민이 오지 않는 이유는 우선 탈북이 막혔기 때문이다. 북한은 코로나가 시작되자 국경 1∼2km 구간을 접근금지 구간으로 정하고 밤에 접근하면 사살하도록 국경경비대에 지시했다. 철조망도 새로 세웠고 지뢰까지 매설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그걸 넘어 중국 땅에 도착해도 이번에는 더 넘기 어려운 철조망이 기다린다. 땅을 파지 못하게 콘크리트로 기초를 만들고 굵은 철사로 촘촘히 엮은 높은 울타리를 세운 뒤 그 위에 다시 원형 철조망을 쳤다. 차로 일산 자유로를 따라 달리다가 한강 옆에서 보게 되는 군 경계용 철조망과 똑같다. 폐쇄회로(CC)TV도 1∼2km 간격으로 달아 철조망 앞에서 조금만 시간을 지체하면 바로 중국 변방대가 출동한다. 그렇게 잡혀 끌려가면, 코로나 기간에 탈북했다는 죄로 살아남기 어렵다. 목숨을 여분으로 몇 개 가지고 있지 않는 한 탈북할 엄두도 못 내는 것이다. 북중 국경이 봉쇄되면 코로나 이전에 탈북해 중국에 숨어 살고 있던 탈북민이라도 한국에 와야 하는데 이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우선 지금까지도 한국에 오는 길이 없어 중국에 사는 탈북민 수가 많지 않다. 고작해야 수천 명 정도로 추산된다. 또한 코로나 통제로 지역 간 이동이 철저히 차단됐거나 검문이 엄격해져 신분증이 없는 탈북민은 이동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걸 뚫고 기존의 탈북 통로인 동남아 국경까지 와도 또다시 높은 장벽이 막아선다. 외신들에 따르면 중국은 코로나 방역을 이유로 남부와 동남아 국경 사이에 길이가 4800km에 이르는 철조망을 쳤다고 한다. 사실상 남부의 ‘만리장성’이 된 이 철조망 역시 북중 국경의 철조망과 비슷하게 최대 3.6m의 높이로 설치됐고, 감시카메라와 센서로 주야간 감시된다. 2000년대 초반 탈북민들이 사용하던 몽골행 루트에도 철조망이 대거 보강됐다. 결국 탈북해 한국까지 오려면 북중 국경을 넘을 때 목숨을 두 번 걸면서 철조망을 넘고, 검문을 피해 그 넓은 중국을 가로질러야 하며, 다시 남부에서 목숨 걸고 또 철조망을 넘어야 한다. 지난해엔 이 어려운 미션에 성공한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알려졌다. 올해에도 있을 것 같지 않다. 사실상 북한이 탈출이 불가능한 감옥으로 알려진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앨커트래즈처럼 변하고 있는 셈이다. 그토록 원하던 탈북 제로를 달성했다고 기뻐할진 모르겠지만, 이러한 상황의 변화는 사실 최근 20일째 자취를 감춘 김정은에게도 좋은 일은 아니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이 닥쳐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을 때, 북중 국경 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중국으로 탈북했다. 당시엔 국경에 철조망도 없었고, 경비대 숫자도 훨씬 적었다. 김정일 시대엔 중국에서 체포돼 북송돼도 정말 굶어 죽을 형편에서 탈북한 것이라는 것이 인정되면 이를 감안해 강제노동 몇 달 시키고 풀어주었다. 지금처럼 탈북을 곧 반역이라고 간주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결과 약 20만 명이 중국으로 탈북한 것으로 추산되며, 이들이 보내준 돈으로 북한에 남은 많은 가족들도 살았다. 그러나 이젠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이 다시 시작돼도 도망 갈 길조차 없어 앉아서 굶어 죽어야 한다. 쌓여가는 그 수많은 시체와 원망을 김정은이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지금 북한 내부 경제 상황은 매우 좋지 않다. 코로나 봉쇄로 2년 반 동안 수출입이 차단된 데다 비상용 창고도 다 바닥이 난 지 오래다. 이렇게 버틸 여력이 사라진 상태에서 올해 들어 연이어 닥친 극심한 가뭄과 홍수로 흉작이 오면 대량 아사는 현실이 된다. 벌써 황해도에선 전염병과 굶주림으로 사람이 죽어 간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얼마 전 수해로 떠내려 온 북한 주민으로 추정되는 시신 4구가 임진강 하구에서 발견됐다. 슬픈 비극의 전조처럼 느껴졌다. 이제는 죽어서라도 그 땅을 벗어나면 다행인 걸까.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지난달 중순 북한 매체들은 김정은이 가정 상비약품을 본부 당위원회에 기부했다고 보도했다. 이틀 뒤 김정은을 따라 김여정과 현송월 등 노동당 간부들도 가정의약품을 급성 장내성 전염병이 퍼진 황해남도에 보내는 사진들이 노동신문에 나왔다. 북한 매체들은 사랑의 불사약이라고 선전했지만 이면을 보면 최악의 상황에 직면한 북한의 사정이 여실히 드러난다. 우선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에 창궐했던 급성 장내성 전염병이 다시 퍼지기 시작했다. 이는 콜레라 장티푸스 이질 등을 말하는데, 약이 없으면 코로나보다 치사율이 훨씬 더 높다. 둘째, 통치자의 가정 상비약품까지 털어야 할 정도로 북한 창고들이 텅텅 비었다. 4월 말부터 퍼진 코로나로 약품은 물론이고 격리된 주민에게 공급할 식량까지 바닥났을 것이다. 셋째, 북한 식량 생산량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최대 곡창지대 황해남도가 지금 큰 위기를 맞았다. 코로나와 콜레라 등 전염병도 문제지만 이에 못지않은 위기는 자연 재해다. 북한은 올봄 황해남도에 기상 관측 이래 두 번째로 꼽히는 극심한 가뭄 현상이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가뭄에 코로나까지 겹쳐 노력 동원에 의존하는 모내기가 큰 차질을 빚었다. 올봄 극심한 가뭄은 북한 식량 생산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황해도, 평안도 지역이 똑같이 겪었다. 봄 농사를 망쳐 굶어죽는 사람들이 생긴다는 말이 들려올 즈음 황해남도에 급성 장내성 전염병이 퍼지기 시작했다고 북한이 발표했다. 하늘도 올해는 북한을 전혀 봐주지 않기로 한 듯하다. 극심한 가뭄에 이어 6월 말∼7월 초에 폭우가 황해도와 평안도에 쏟아졌다. 단 며칠 동안 300mm 이상 폭우가 내려 겨우 모내기를 마친 논밭들이 침수됐다. 3년째 비료도 제대로 수입하지 못한 상황에서 자연 재해까지 겹쳤으니 올가을 북한의 작황은 안 봐도 뻔하다. 흉작이 들면 식량을 수입이라도 해야 하는데, 중국이 코로나 방역을 이유로 지금 북-중 무역을 완전히 차단했다. 예비 식량마저 없으니 이제 굶주리는 일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거기에 각종 전염병까지 돌게 되면 고난의 행군의 재현이다. 김정은은 집권 이후 최악의 위기에 맞닥뜨렸다. 문제는 지금이 7월 초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농사에 가장 큰 피해를 주는 태풍은 아직 오지도 않았다. 올해는 이상 기후로 세계 곳곳이 고온 현상에 시달리는데, 이러면 태풍의 위력이 커진다. 만약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북한에 올여름 강력한 태풍이라도 덮치면 치명타를 입게 된다. 태풍이 아니라 극심한 가뭄이나 고온 현상이 올 수도 있다. 이는 북한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될지는 오롯이 하늘에 달렸다는 의미다. 북한에서 대량 아사가 발생해도 국제사회가 도와줄 여력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수많은 나라들이 식량 부족에 직면했고, 원유를 비롯한 모든 물가가 상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지금 어떤 심정일까. 위의 상황을 김정은 시점에서 다시 정리하면 이렇다. “나라 창고가 텅텅 비었다. 비었으면 채워야 하는데, 자연재해로 불가능해 보인다. 전염병까지 창궐하고 있다. 외부에 손을 내밀려니 최대 우방국인 중국이 코로나 방역을 이유로 국경을 봉쇄했다. 러시아도 전쟁을 치르느라 제 코가 석 자다. 게다가 오랜 대북제재로 돈도 없는 데다 세계 물가가 너무 뛰었다. 집권 첫 일성으로 더 이상 인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게 하겠다고 했는데, 다시 고난의 행군에 직면해 주민이 무리로 굶어죽게 되면 체제의 내구성에 큰 균열이 생긴다.” 더욱 허탈한 일은 위의 위기가 김정은의 노력으로 극복할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노력을 할 생각도 없어 보인다. 서쪽, 북쪽 국경이 막혔으면 남쪽을 활용해 대책을 찾아도 모자랄 처지에서 북한은 여전히 한국 정부에 악담을 퍼붓고 있다. 북한이 고작 찾은 위기 극복 대책은 케케묵은 정신력 타령을 다시 꺼낸 것이다. 노동신문은 1일 “상반년 기간 우리가 건국 이래 일찍이 없었던 시련과 난관을 겪었다고 하지만 하반 년에 들어선 지금 형편은 더 어렵다. 최우선 중시해야 할 사업은 대중의 정신력을 총 폭발시키기 위한 사상 사업”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정신력의 한계는 북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제일 잘 안다. 영양실조 환자가 정신력을 총 폭발하면 죽을 날이 더 빨라질 뿐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글로벌 아동권리 전문 비정부기구(NGO) 굿네이버스가 개발도상국을 포함한 국내외 청소년들이 지구촌 현안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국제교류 프로그램 ‘글로벌 유스 네트워크’를 열었다. 나이, 인종, 국적에 상관없이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함께 만들어갈 수 있도록 돕자는 취지로 기획된 세계시민교육 프로그램의 일환이다. 그동안 국제사회 무대에서 아이들이 주체가 되어 기후위기에 대해 논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특히 개발도상국 아동은 소외되기 쉬웠다. 굿네이버스의 글로벌 유스 네트워크 프로그램을 통해 기후위기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창구가 생겨난 셈이다. 이달 17일 온라인으로 개최된 글로벌 유스 네트워크 발대식에는 아시아 9개국(한국 몽골 방글라데시 베트남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키르기스공화국 필리핀 타지키스탄)과 아프리카 7개국(르완다 말라위 모잠비크 에티오피아 우간다 잠비아 케냐)의 50여 개 학교 청소년 약 360명이 한데 모였다. 국내외 참여 청소년들은 상호 다양성을 존중하며 지속가능한 지구촌을 만들기 위해 협력할 것을 다짐했다. 제주 탐라중학교 채수민 학생(15)은 아시아, 아프리카 청소년 360여 명 앞에서 “기후위기는 전 세계가 당면한 공동의 과제이며 모두가 함께 실천하면 어떤 문제라도 하나씩 해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필리핀의 로렐린 학생(16)은 “나이, 성별, 인종, 언어, 국적과 상관없이 우리는 모두 지구를 지킬 수 있다”며 “누군가 대신 문제를 해결해주길 기다린다면 아무런 변화도 없을 것이다”라고 발표했다. 잠비아의 루스 학생(16)도 “다른 나라와 기후위기 상황을 공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며 “비록 작은 행동일지라도 우리의 실천이 지역사회와 지구촌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이번 발대식을 시작으로 16개국 청소년들은 7월까지 총 6회의 모임을 통해 기후위기 해결을 위한 다양한 활동에 나선다. 지속가능발전목표(SDGs)와 기후위기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일상 속 환경보호 활동을 직접 기획하고 실천할 예정이다.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실시간 교류 활동을 통해 국가별 기후변화 상황과 실천 활동의 성과도 공유한다. 프로그램 마지막 순서인 클로징 세리머니에서는 360여 명의 청소년이 한자리에 모여 기후위기를 막기 위한 공동 성명서를 발표한다. 지난해 사이언스지에 발표된 벨기에 브뤼셀자유대(VUB) 연구에 따르면 2020년에 태어난 아동은 조부모 세대인 1960년생보다 평생 6.8배 더 많은 폭염에 노출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뭄은 2.6배, 홍수는 2.8배가량 더 경험할 것으로 예측됐다. 이처럼 기후위기의 최대 피해자는 아동이다. 이상기후로 미래세대 삶의 터전이 파괴되고 있으며, 각종 환경성 질환은 아동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 김중곤 굿네이버스 사무총장은 “작년부터 글로벌 유스 네트워크를 통해 국내외 청소년들이 지구 반대편 나라 친구들과 국제사회 이슈에 대해 토론하고 함께 실천하며 책임감 있는 세계시민으로 성장하도록 돕고 있다”고 밝혔다. 이 행사는 지난해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지난해 진행된 글로벌 유스 네트워크 1기에는 한국 말라위 케냐의 13개 학교 청소년 총 104명이 참여했다. ‘We Connect, We Change’라는 슬로건 아래 쓰레기 청소, 가두 캠페인 등 기후위기를 막기 위한 다양한 실천 활동에 도전하고 실시간 교류를 통해 성과를 공유했다. 올해 10월에는 글로벌 유스 네트워크 3기 활동이 진행된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우리 인민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며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게 하자는 것이 우리 당의 확고한 결심입니다.” 2012년 4월 김일성광장 열병식에서 김정은은 이렇게 말했다. 그의 첫 연설이자 인민을 향한 첫 약속이었다. 10년이 지나 돌아보니 북에선 김정은만 허리띠를 조이지 않고 살아온 것 같다. 연설 당시 90kg으로 추정되던 몸무게는 140kg으로까지 늘었다. 작년에 20∼30kg 정도 뺀 것으로 보였지만 최근 요요 현상이 온 듯 다시 살이 부쩍 쪘다. 북한 인민들은 김정은과 정반대로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삶을 살고 있다. 2017년 이후 강력한 유엔 대북제재로 북한 외화소득의 90% 이상이 줄었다. 코로나 발생 이후 자발적 셀프 봉쇄로 남았던 10%도 벌지 못하게 됐다. 북한은 농경 왕조 사회로 회귀했다. 시간이 갈수록 외화와 예비물자 창고는 고갈되고 인민의 영양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4월 말부터 시작된 코로나 대량 확산은 북한에 또다시 결정타를 안겼다. 격리 조치로 주민들은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가고 있다. 약이 가득 진열된 북한 선전매체들의 평양 약국 사진과 달리 지방 사람들은 약이 없어 고열을 그대로 견뎌야 한다. 장마당에서 그나마 팔리던 해열제는 코로나가 퍼지자마자 씨가 말랐다. 나라 곳곳에서 죽어간다는 아우성밖에 없다. 올해 김정은은 삼재(三災)를 만났다. 코로나가 갑자기 휩쓸면서 민심이 흔들리고, 나라 곳간이 텅텅 비었다. 방역에 실패한 김에 무역을 재개하려니 이번엔 중국이 문을 닫았다. 중국이 단둥 주민들에게 “남풍이 불면 창문을 닫으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외신 보도가 현재 북-중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교역이 막히면 농사라도 잘돼야 하는데 올봄 심각한 가뭄과 고온이 북한을 덮쳤다. 비료 생산과 수입도 제대로 되지 않으니 작황이 좋을 수가 없다. 여기에 또 다른 무서운 재앙이 다가오고 있다. 바로 코로나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촉발한 스태그플레이션이다. 경기 불황과 물가 상승이 동시에 발생하는 것이다. 세계은행은 6월 발행한 ‘세계경제전망’ 보고서를 통해 올해 세계 경제성장률 전망을 2.9%로 대폭 하향 수정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80여 년 만에 최악의 경제 침체가 예상된다고 발표했다. 스태그플레이션은 북한과 어떻게 연관이 될까. 에너지 시장의 가격 급등 및 불안정성 심화, 농산물 가격 상승이 이뤄지면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쪽이 가난한 나라들이다. 이미 ‘인도양의 진주’로 불리던 스리랑카는 지난달 19일 부채 510억 달러를 갚지 못해 국가부도를 선언했다. 스리랑카의 인구는 2157만 명으로 북한과 비슷하다. 이렇게 국가가 부도날 정도가 되면 부패한 지도층을 향한 대중의 분노가 커지게 된다. 스리랑카에서도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대는 오랜 기간 족벌정치를 해온 마힌다 라자팍사 총리의 관저에 난입해 불을 질렀다. 결국 라자팍사 총리는 지난달 사임을 발표한 뒤 헬기를 타고 가족과 함께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해군기지로 도피했다. 역사는 반복된다. 2010년 북아프리카와 중동을 휩쓴 ‘아랍의 봄’ 혁명도 경제난과 물가 인상을 견디지 못한 민중들이 폭발한 것이다. 철옹성 같던 장기집권 독재 국가들이 줄줄이 무너졌다. 2003년부터 동유럽과 중앙아시아를 휩쓸어 독재 정권들을 줄줄이 무너뜨린 ‘색깔혁명’도 같은 이유로 촉발됐다. 스태그플레이션은 가난한 독재 국가들엔 독약이다. 북한은 가난한 독재국가 순위에선 선두를 달린다. 스스로 세계 왕따를 자처하며 자력갱생으로 살겠다고 하지만 원유와 부족한 식량까지 자체 해결할 순 없다. 중국과 러시아가 얼마나 도와줄지는 몰라도 세계적인 물가 상승은 북한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물론 북한은 정보 유통을 철저히 차단하고 연좌제라는 21세기 유일무이한 극악한 반(反)인륜적 공포 독재를 펴고 있기에 수십만, 수백만 명이 죽어도 시위가 벌어질지는 장담할 수가 없다. 그러나 치솟는 물가와 대량 아사자는 북한의 내구성에 심각한 균열을 만들어내고 수십 년의 상처를 만들 수 있다. 화려한 쇼에 집착하고 인민의 주머니를 털어 대규모 공사판을 벌여 놓고 있는 김정은이 올해의 삼재는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국제구호개발 비정부기구(NGO)인 월드비전(회장 조명환)이 우간다 북부 지역에서 2025년까지 80만 명의 난민과 수용 공동체 주민을 지원한다는 목표로 현지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월드비전은 보호 및 교육 서비스 개선, 지속 가능한 생계 및 회복력 강화, 포용적 식수 위생 서비스 접근성 강화를 위해 현재 9개 난민 수용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작년 7월부터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코이카)의 인도적 지원 민관협력 사업을 통해 우간다 나일강 서부 지역에 위치한 임베피 난민정착촌에서 사회경제적 회복력 강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난민정착촌에서 사는 남수단 난민들이 생계 기반을 마련하고 생계 역량을 강화하도록 돕고, 이 과정에 지역 주민들이 함께 참여해 난민들과 수용 공동체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방법을 찾아간다. 월드비전이 우간다 북부에 역점을 기울이는 이유는 이 지역이 우간다 내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낙후된 지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우간다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많은 난민을 수용하고 있다. 현재 150만 명의 난민 및 망명 신청자가 거주하고 있다. 특히 2013년 발생한 남수단 내전으로 우간다 북부에 95만 명의 난민이 유입되면서 이곳에 대규모 난민정착촌들이 만들어졌다. 난민의 대량 유입으로 한정된 자원을 둘러싸고 원주민들과 갈등도 생겨나고 있다. 근래에는 코로나19와 물가 상승이 주민들의 생계 활동에 지장을 초래해 사회경제적 취약성이 더욱 높아졌다. 현지 월드비전의 코이카 프로젝트를 통해 도움을 받고 있는 지역 주민과 난민으로 구성된 농민그룹은 200개에 이른다. 각 그룹은 지방정부와 월드비전의 도움으로 무상으로 토지를 임차하고 지역 환경에 가장 적합한 작물을 선정해 공동 경작하고 수익을 함께 나누는 협약을 올해 초 맺었다. 이를 통해 한정된 자원과 서비스를 둘러싸고 갈등하던 현지 주민들과 난민들은 하나의 공동체가 돼 지속 가능한 생계 역량 강화를 위해 협동하고 있다. 지난해 7월부터 우간다 임베피 마을에서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월드비전 국제구호·취약지역사업팀 노경후 프로젝트 매니저는 “현장에서 난민들과 주민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필요와 어려움을 파악해 가고 있다”며 “앞으로 계속해서 농업 생산량을 늘려 나가 갈등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고 난민과 지역 주민들이 한마음으로 삶의 터전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월드비전의 도움으로 우간다 현지인 6명, 정착촌 남수단 난민 19명으로 구성된 그룹을 만들고 책임자로 있는 사이먼 씨는 “한마음으로 농사일을 하면서 서로를 더욱 이해해 가고 있다”며 “이제는 한 마을 이웃인 만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사이먼 씨의 그룹은 작물 선정, 경작 방법, 수확 관리 등의 교육을 받고 올해 첫 파종 시기에 전문가의 지도 아래 고구마와 비슷한 작물인 카사바를 선정해 공동 경작지에 심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국제구호개발 비정부기구(NGO) ‘월드비전’이 7월부터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학교 밖 위기 청소년’들의 꿈을 지원하는 사업을 시작한다. 경제적 상황과 가정 상황 등 다양한 이유로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가정형위(Wee)센터에 입소한 청소년들이 스스로 자신의 진로와 적성을 발견하고 꿈을 향해 노력해 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업이다. 월드비전은 지난달 30일 전국가정형위(Wee)센터협의회와 협약을 맺고 2024년까지 3년간 꿈 지원 사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월드비전은 2019년부터 학교 밖 청소년 꿈 지원 사업을 주도적으로 진행했지만 올해부터는 전국가정형위(Wee)센터협의회에서 이끌어 나가고 월드비전에서는 사업비를 지원하는 형태로 진행된다. 올해부터 시작되는 아동 꿈 지원 사업인 ‘드림윙(Dream-W-ing)’은 전국 13개 기관에서 169명이 참여하며 그중 44명은 개별 꿈 지원 집중 대상자로 선정한다. 사업은 크게 참여자들 개별 맞춤형 진로 지원과 전체 입소 청소년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나눠 진행된다. 참여자들에게 각각 100만 원의 꿈 지원금을 전달해 자신의 진로와 관련된 영역에 해당하는 모든 활동에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2021년 기준 꿈 지원 사업을 받았던 청소년의 경우 100% 학업을 유지하고 있는 등 참가자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전국가정형위(Wee)센터협의회 신세균 회장은 “가정폭력, 가정불화, 학대와 방임 등으로 일반적인 청소년에 비해 절대적으로 긍정적 경험과 그 기회가 적은 위기 청소년들은 삶의 동기를 찾지 못하고 학교를 등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며 “위기 청소년들에게는 기존의 돌봄 상담 교육을 넘어 학생별로 개별 맞춤형 진로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지난 3년간의 지원으로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난 만큼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지원을 이어가서 복합적 위기를 겪고 있는 아이들이 마음껏 꿈꿀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사업 이름처럼 청소년들의 꿈에 날개가 되어주길 기대한다”고 전했다. 월드비전 국내사업본부 김순이 본부장은 “학교로부터 배제되고 공교육 체계의 최후의 안전망인 가정형위(Wee)센터에 입소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그들도 꿈꿀 권리가 있다는 배경에서 월드비전은 2019년부터 사업을 진행해 왔다”고 말했다. 그는 “공교육 체계 안에 있기 때문에 오히려 사각지대이고 열악한 환경에 놓인 청소년들을 위해 꿈 지원 사업을 제공해 학교에 재적응할 수 있도록, 또 스스로 원하는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고자 한다”고 밝혔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1997년 남파 간첩에게 피살된 이한영은 생전 ‘김정일 로열패밀리’라는 수기를 남겼다. 수기는 김일성의 사생아 김현의 존재를 처음 밝혔다. 이에 따르면 김현은 1971년에 김일성과 제갈 성씨의 전담 안마사 사이에 태어났다. 같은 해 5월 10일 성혜림도 김정남을 출산했으니 환갑인 김일성과 갓 서른에 접어든 아들 김정일이 거의 동시에 아들을 얻은 것이다. 김현은 이후 ‘장현’이라는 이름으로 장성택의 호적에 올랐다. 1979년 김현은 생모와 함께 모스크바로 가 동갑내기이자 조카인 김정남과 함께 살았다. 김현은 생모를 이모라고 불렀다. 성혜림의 조카인 이한영은 김정일의 저택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의 증언은 상당히 신뢰가 있었고, 아직까지도 그의 증언에서 거짓은 없다. 이한영이 1982년 한국에 망명했기 때문에 김현에 대한 증언은 모스크바 생활에서 끝난다. 지난해 5월 기자는 미출간된 김정일 회고록을 입수했다. 김일성 90주년 생일을 맞아 김정일이 아버지를 회상하는 내용이 위주였는데, 여기에 김일성이 아주 허물없이 대했다는 마사지 담당 간호사가 두 차례나 상당한 분량으로 언급돼 있다. 일개 간호사를 김정일이 자세하게 소개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회고록에 나오는 김일성 담당 간호사의 이름은 순복이였고, 1962년부터 등장한다. 회고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현지지도를 마치고 돌아오면 으레 담당 간호원을 친딸처럼 정답게 찾으며 다리를 주무르게 했다고 한다. 김정일이 “수령님의 건강은 동무의 손에 달려 있다”고 고무하자 간호사가 열심히 손을 단련해 남자 이상으로 손아귀 힘을 키웠다고 한다. 김일성은 늘 “네가 제일이다. 네 덕에 잠을 잘 잔다. 네가 나라의 복을 만든다”고 치하하곤 했다는데, 이 간호사가 김현의 생모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최근 신뢰할 수 있는 한 소식통으로부터 김현의 이후 운명에 대해 들었다. 김현은 북한에 돌아와 평양 중심부 서재동초대소에서 살았다. 보통강 인근의 초대소는 1988년 9월 건설됐는데 경치가 매우 좋다. 2000년경 방북했던 한국의 일부 인사들과 기자들도 이 초대소에 머물렀다. 서재동초대소는 150∼170평 규모의 독립식 빌라 21채로 구성됐고, 각 빌라엔 침실이 3개 있다. 김현은 초대소 구내의 한 빌라가 아니라 입구에서 갈라져 들어간 단독 빌라에서 살았다. 2014년 북한은 서재동초대소 옆에 위성관제종합지휘소를 지었는데, 소식통은 그 자리가 김현이 살던 빌라 자리였을 것이라고 했다. 지휘소 옆은 김정일의 본처 김영숙이 살던 서장동초대소다. 김현은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김정일의 지시였을 것이다. 김일성의 서자인 것이 드러날까 봐 그런 것도 있겠지만, 배다른 동생이니 위협 인물이라 생각해서 무식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컸을 것 같다. 심지어 결혼도 못 하게 했다. 씨를 더 잇지 못하게 한 것이다. 김현은 키가 175cm 정도로 북한에선 큰 키였고, 김일성의 젊은 모습을 빼닮았다고 한다. 김현은 대신 왕족의 대우는 받았다. 최고급 초대소에서 풍족하게 살았고, 차량 번호가 216으로 시작되는 벤츠도 갖고 있었다. 216 번호판은 북한 최고위 간부만 받는 특혜다. 운전수도 있었고, 요리사도 있었다. 물론 감시원들이었을 것이다. 김정일은 김현을 한두 번쯤 현지시찰에도 데리고 다녔다. 위협이 될 존재인지 알아보기 위한 목적이 컸을 것이다. 백수 신세가 된 김현은 난봉꾼으로 변해 벤츠를 끌고 나가 여성 교통안전원들을 유혹하는 데 재미를 붙였다. 김일성을 닮은 젊은 남자가 216 벤츠를 타고 다니는 데다 경비가 삼엄한 최고급 저택에서 사니 여성들도 반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김일성이 죽은 뒤 김현은 김정일에겐 짐이었을 뿐이었다. 나중에 쿠데타라도 일어나 김일성의 핏줄이라며 김현을 옹위하는 일도 벌어질 수 있었다.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주기로 한 김정일은 결국 2007년 김현을 조용히 죽였다고 한다. 김현은 김일성의 사생아로 태어나 36년을 잘 살고 죽은 것이다. 이렇게 핏줄 정리, 북한말로 ‘곁가지 정리’에 들어가니 김현과 모스크바에서 함께 큰 김정남이 가장 공포를 크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정남 역시 2017년 2월 말레이시아에서 독살됐다. 외국을 전전하며 동생의 마수를 피하려 했지만, 김씨 왕조에는 자비가 없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5월 25일 세계 실종의 날을 맞아 보건복지부가 주최하고 아동권리보장원이 주관한 ‘유전자 검사로 만드는 만남의 기적’ 행사가 오늘 진행된다. 행사에 참석하는 장기실종 아동의 가족들은 “길게는 몇십 년간 잃어버린 아이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다. 이제는 아이가 우리를 찾아오는 길뿐”이라며 실종 아동 유전자 등록에 대한 관심을 촉구할 예정이다. 최근에는 폐쇄회로(CC)TV 설치, 지문사전등록제도 등이 잘 구축돼 장기 실종이 발생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과거 미아, 유괴 등의 사유로 장기 실종된 사례는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4월 말 기준 1년 이상 장기 실종된 아동은 871명, 이 가운데 장애인은 180명이다. 아동의 95%, 장애인의 69%가 10년 이상 실종된 상태다. 실종 기간이 길어질수록 기억이 왜곡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어린 나이에 실종됐다면 성인이 된 지금의 모습을 예측하기 어렵다. 게다가 실종 당시 장소와 환경도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장기 실종 아동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2004년부터 가족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유전자 검사 제도가 실종 아동 찾기에 도입됐다. 유전자 검사 제도는 ‘실종 아동’과 ‘실종 아동 등을 찾는 보호자’를 대상으로 진행된다. 실종 신고, 구강세포 등 검체 채취, 유전자 정보 검사 및 대조의 과정을 거친다. 아동권리보장원의 실종아동 업무 시스템에는 작년 한 해 동안 740건의 유전자 검체가 접수됐다. 4월 말 기준 유전자 검체 접수의 누적 건수 중 실종 아동과 장애인은 3만4370건, 실종 아동 등을 찾는 보호자가 4008건이다. 유전자 검사를 통해 해마다 30∼40건의 가족 상봉이 이뤄지고 있으며, 4월 말 기준 총 675건의 가족 상봉이 성사됐다. 현재 보호시설에서 생활하는 무연고자는 실종아동법에 따라 유전자를 등록할 수 있다. 하지만 제도 도입 전 유전자 검사를 하지 않고 시설에서의 보호가 종료된 무연고 아동(현재는 성인)의 경우 본인이 실종 아동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채 아직까지 유전자 검사를 하지 않고 있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가족 상봉이 이뤄진 사례를 보면 본인이 실종 아동이라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우연한 기회에 가족을 찾게 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한 사례로 본인이 실종 아동인지 모른 채 아동보호 시설에서 생활했던 A 씨는 2020년 추석에 CU 편의점을 찾았다가 포스(POS)기에 송출되고 있는 실종아동 찾기 캠페인에서 본인의 어린 시절 사진을 발견하고 캠페인 주관 기관인 아동권리보장원에 연락해 본인은 실종아동이 아니라며 정보 정정을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담당자의 설득에 따라 A 씨는 유전자 검사를 진행했다가 진짜 가족을 찾게 됐다. 유전자는 외모나 기억, 환경과는 달리 변하지 않는 정보로 장기실종 아동 찾기에 필수불가결한 정보이다. 그러나 실종 아동과 보호자 모두 유전자를 등록해야 상봉이 가능한 구조여서 적극적인 참여가 중요하다. 아울러 유전자 등록 제도에 대한 홍보 활동과 국민적인 관심도 꾸준히 이어지는 것이 필요하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북한 노동신문이 1일 노동절 기념 1면 사설에서 “오직 사회주의만이 온갖 형태의 지배와 예속, 사회적 불평등을 없애고 인민들을 모든 것의 주인으로 내세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게 북한 매체의 특성이긴 하지만, 이런 철면피한 선전을 접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욕이 나온다.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계급 제도가 철저하게 고착된 곳이 바로 북한이기 때문이다. 계급 제도 하면 인도 카스트 제도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겠지만, 인도의 계급 제도는 현대에 점점 소멸되고 있다. 반면 북한은 1960년대 만든 계급 제도가 여전히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다. 북한의 출신성분 제도는 많이 알려져 있다. 북한에서 태어나면 기본군중, 복잡한 군중, 적대계급 잔여분자라는 3대 계층으로 구분되고, 이 3대 계층은 상위 혁명가 성분부터 하위 지주, 자본가, 일제관리 자손까지 56개로 자세히 분류된다. 이 출신성분의 굴레를 벗어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 출신성분만 알면 북한을 절반만 아는 것이다. 출신성분이 가로의 씨실이라면, 세로의 날실에 해당하는 사회성분이라는 것이 또 존재한다. 북한을 좀 안다는 사람들도 사회성분에 대해선 모른다. 워낙 철저히 비밀리에 가동되기 때문이다. 사회성분은 노동자, 군인, 사무원, 농민이라는 4개 계급으로 구성된다. 태어날 당시 부친의 직업으로 자녀의 사회성분이 결정된다. 사회성분은 직업상의 신분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사회성분은 수평적이지 않다. 우대 순서로 따지면 첫 번째가 노동자, 이와 비슷한 레벨의 두 번째가 군인, 세 번째가 사무원, 네 번째가 농민이다. 농민은 상위로 올라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농민의 자식은 90% 이상 농민이 된다. 10년 군 복무를 마치고도 다시 농민으로 보낸다. 대학도 주로 사범대학에 보내 졸업 후 농촌학교 교사로 보내는 등 이 굴레는 철저하게 작용한다. 수재인 경우 아주 희박한 확률로 굴레를 벗어날 수는 있다. 좋은 대학을 졸업해 도시 대학 교원이나 연구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경우에도 자신의 사회성분은 여전히 농민이며, 과오 없이 은퇴해야 자식이 사무원의 사회성분을 얻는다. 군 장교로 발탁되는 경우도 마찬가지로 자식부터 군인으로 바뀐다. 농촌에서 태어난 남성이 자녀의 사회성분을 바꿀 확률은 5%도 안 된다. 특히 농민은 노동자 성분으로 바뀌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자녀가 아버지의 농민 직업을 물려받기 때문에 농촌 여성은 다른 사회성분의 남성과 결혼하려 애쓴다. 농민 중 출신성분이 좋으면 농촌 간부가 된다. 지금 노동당엔 사회성분이 농민인 간부는 아마 없을 것이다. 사무원은 외교관, 학자, 의사 등이 될 수 있어 농민보다는 훨씬 좋은 성분이다. 군인 역시 세습이다. 현재 북한군 장성의 대다수가 사회성분상 군인이라고 한다. 충성도를 검증받은 장성의 아들이 대를 이어 장성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노동자는 상위 계급이지만, 분포도가 매우 넓기도 하다. 진짜 노동자도 있고, 중앙당 간부도 있다. 이는 출신성분에서 갈렸기 때문이다. 즉, 날실은 좋은데 씨실이 안 좋아서 출세를 못 한 것이다. 북에서 살면 내가 가로와 세로의 어디쯤에 놓여있는지 대충 짐작은 할 수 있지만,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성분 서류는 간부부와 노동부 담당자 몇몇만 볼 수 있는 최상위 기밀서류이기 때문이다. 농민은 대를 잇는 노비인데, 왜 이런 신세가 됐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일설에 따르면 토지개혁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김일성이 광복 후 토지개혁 한다면서 농민들에게 땅을 나눠 주었다가 1950년대 후반 협동농장을 만든다며 다시 뺏었는데 농민들이 격렬히 저항했다. 그래서 김일성이 농민들은 이기주의자라며 치를 떨어 노비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반면 노동자들에겐 줬다 뺏은 일이 없어 반항할 이유가 없었다. 농민이 노비라면 사무원은 흔들리는 갈대로 취급한다. 북한에서 사회성분을 거슬러 올라가긴 매우 어렵지만, 위에 있다가 김씨 일가의 눈 밖에 나서 노비로 전락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예속과 불평등이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3대를 이어 혁명을 한다는 북한의 진실은 바로 이렇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내가 북한에서 태어났다면 운명이 정해진 바둑판 위 어느 지점에 서있을지,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 한 번쯤 상상해 봤으면 좋겠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