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주성하 기자

동아일보 콘텐츠기획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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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관련 사이트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http://nambukstory.com)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zsh75@donga.com

취재분야

2024-03-26~2024-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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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어 하면 월급이 3배” 베트남은 한국어 열풍…北에선 ‘괴뢰말찌꺼기’라며 단속

    최근 북한은 한류를 차단하기 위해 잇따라 상상 이상의 혹독한 처벌이 따르는 법률을 새로 제정했다. 2020년 12월에 만들어진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은 ‘남조선 영화나 록화물, 편집물, 도서를 유입, 유포한 경우 무기노동교화형 또는 사형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집단적으로 남조선 영화나 록화물, 편집물, 도서를 시청, 열람하도록 조직하였거나 조장한 경우’에도 사형이며, 단순한 시청에도 15년 로동교화형을 선고하고 있다. 2021년 9월에도 ‘청년교양보장법’을 제정해 ‘사회주의 생활양식 확립을 위한 사업에서 청년들이 하지 말아야 할 사항들과 기관·기업소·단체·공민이 하지 말아야 할 사항, 청년교양보장법의 요구를 어기는 위법행위를 했을 때 어떤 법적 책임을 지게 되는지’를 규제했다.이제 북한에선 부부 사이에 ‘오빠’라고 하거나 애인을 ‘남친’ ‘여친’이라고 부르게 되면 괴뢰말찌꺼기를 쓴다고 보위부에 끌려가 심문을 받아야 한다. 김정은은 왜 한류 열풍에 이처럼 극도의 공포감을 갖고 있는 것일까.이달 초 한국언론진흥재단 주최 ‘KPF 디플로마 베트남 전문가’ 교육 과정의 일환으로 베트남을 방문하면서, 한류가 얼마나 무서운 바람으로 번질 수 있는지를 체감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살면 한류의 위력을 실감할 수 없지만, 해외에선 일부러 의식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북한이 ‘한류’를 막겠다고 전대미문의 강력한 처벌 제도를 새로 제정하고 있는 동안, 사회주의 베트남은 한류에 홀려 있었고, 북한이 괴뢰말찌꺼기라고 혐오하는 한국어는 베트남 사람들에겐 너도나도 배우고 싶은 언어가 됐다.2021년 베트남 정부는 한국어를 제1외국어로 지정했다. 제1외국어가 되면 초중고 10년 교육 과정 내내 한국어를 배울 수 있다. 각 학년은 주당 3시간씩, 연간 105시간의 한국어를 배우게 된다. 베트남에서 제정된 제1외국어는 영어, 중국어, 일본어, 독일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6개였는데 한국어가 1외국어로 격상되면서 7개가 됐다. 내년까지 베트남의 62개교에서 1만 명이 넘는 학생들이 한국어 과정에 등록해 공부할 예정이다. 현지에서 한국어의 위상은 7번째로 지정된 제1외국어 이상이다. 베트남 국립외국어대 쩐티흐엉 한국어 및 한국문화학부 학부장은 “많은 대학에서 한국어 전공 학생 입학 점수가 항상 상위에 속해있으며 우리 대학의 경우 시험에서 만점을 받아야 들어올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베트남에선 53개 대학에서 한국어학과 및 교양 강좌를 운영하고 있다.한국어 열풍을 타고 외국에 대한 한국어 및 한국문화 보급을 위하여 설립된 특수법인인 세종학당도 베트남에서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 베트남은 전 세계에서 세종학당이 가장 많은 나라에 속한다. 현재 전 세계에서 운영되는 244개의 세종학당 중 23개가 베트남에 있다. 2011년 베트남에 3곳으로 진출한 이후 10년 만에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 세종학당을 거쳐간 수강생만 누적으로 58만 명에 이른다.베트남에서 한국어가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이유는 한류 열풍과 더불어 월급이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 쩐티흐엉 학부장은 “한국어과를 다니면 3~4학년 때 한국 기업에서 미리 찜을 해놓고 졸업 이후 취직시키는데, 취업률이 100%”라고 설명했다.이규림 베트남거점 세종학당 소장은 “현지에서 베트남어를 하면 월급이 1배, 영어를 하면 월급이 2배, 한국어를 하면 월급이 3배라는 말이 돈다”며 그만큼 한국 기업이 선망을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지 대학 교수의 월급이 300달러 좌우인데 비해 한국 기업에 취직하면 3배 정도의 월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한국어 졸업자 중 우수한 학생은 최우선적으로 한국 기업으로 가려 한다. 이 때문에 학교들에서 한국어 교사 부족 현상은 만성적인 일상이 됐다.한국 유학길에 오르는 베트남 학생들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2009년 한국 내 베트남 유학생 비중은 2.3%에 불과했지만 지난해엔 23.5%로 10배 넘게 증가했다. 이런 바람을 타고 한국에 거주하는 베트남인들의 숫자도 꾸준히 늘고 있다. 외국인정책본부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에 공식적으로 등록하고 거주하는 베트남인은 약 17만9000명으로, 한국계 중국인(15만4000여명)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외국인 비율을 차지했다.비공식적인 체류까지 더하면 국내에 거주하는 베트남 인구는 훨씬 더 늘어나게 된다. 지난달 강원도 양양국제공항을 통해 국내에 무비자로 들어온 베트남인 100여명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이 한국에서 불법 체류를 택한 이유는 베트남에서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유도 있지만, 한국에 체류하면서 한국어를 익힌다면 나중에 강제추방이 되더라도 베트남 한국 기업에 취직해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이처럼 베트남에서 한국어를 한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엄청난 기회를 얻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뿐만 아니라 한국어를 한다는 것은 베트남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는 한국 문화 콘텐츠를 남들과 다르게 소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베트남에서 강풍으로 커지고 있는 한국어 배우기 열풍은 언어가 갖는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해준다.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를 넘어 권력이자 동경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한국에 비해 모든 것이 열세인 북한은 한국어를 괴뢰말찌꺼기라는 혐오의 단어로 규정해 한국에 대한 동경과 호감을 차단하려 하는 것이다. 경제력과 문화에서 두드러지는 열등감을 혐오와 증오로 메우려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사에 사례를 찾기 힘든 무형의 언어와의 전쟁은 성공할 수 있을까. 베트남을 보니 어렵지 않게 대답을 찾을 수 있을 듯 싶다. 한국의 국력이 북한을 압도하는 한 김정은은 종전을 선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늘 전쟁 중인 나라는 언젠가는 망할 수밖에 없다.하노이·호치민=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2-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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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 강국 꿈꾸는 北…‘롤모델’로 삼은 베트남이 고속성장한 이유는?

    2019년 2월 27일 북미정상회담을 위해 베트남 하노이를 방문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공식일정을 시작하기 전 트위터에 이렇게 썼다.“베트남은 지구상에서 번영하는 흔하지 않은 나라로 북한이 비핵화하면 베트남처럼 될 것이며, 그것도 매우 빠르게 될 것이다.”트럼프 대통령의 베트남 찬사는 시차를 두고 연이어 이어졌다.“베트남이 짧은 기간에 이룬 것을 본다면 김정은 위원장도 아주 빠른 시간에 북한을 경제 강국으로 만들 수 있다.”그 말을 접했을 때 기자는 머리를 갸우뚱했다.“개혁개방한지 30년 넘었는데 1인당 국민소득이 세계에서 130위권인 2000달러 남짓에 불과한 베트남이 북한의 롤모델이라고?”하지만 이달 초 한국언론진흥재단 주최 ‘KPF 디플로마 베트남 전문가’ 교육 과정의 일환으로 하노이와 호치민을 방문한 뒤 기자의 생각은 많이 바뀌었다.“사회주의 베트남이 긴 잠에서 깨어나고 있구나. 그것도 다름 아닌 수십 년 전 총부리를 맞대고 싸웠던 대한민국이 베트남 번영의 가장 중요한 동반자가 되고 있구나.”이제 김정은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대한민국이 1억 인구의 베트남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잘 지켜보길 바란다.”베트남은 1986년 ‘도이머이 정책’을 발표했지만 오랜 기간 발전이 정체돼 있었다.세계은행에 따르면 도이머이 정책 이듬해인 1987년 베트남 국민소득은 367억 달러였는데, 15년 뒤인 2002년 국민소득은 그보다도 더 떨어진 350억 달러에 불과했다. 그러나 최근 10여년 동안 베트남의 국민소득은 3배 이상 급성장했다. 2009년 1060억 달러를 기록하더니 지난해 3626억 달러에 이르렀다.1인당 국내총생산도 더불어 비약적으로 도약했다. 2010년 1690달러였지만 2021년 3716달러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이러한 성장은 한국 기업의 베트남 진출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베트남 통계청에 따르면 1988년부터 2021년 말까지 외국 기업의 누적투자액을 집계한 결과 한국(747억 달러)이 일본(644억 달러)과 싱가포르(643.6억 달러)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집계에 잡히지 않는 투자까지 포함하면 한국 기업들의 베트남 투자 금액은 900억 달러가 넘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측하고 있다.현재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기업은 9000여개에 이른다. 베트남 호치민 공항에서 나오면 길 건너 건물에서 한국 효성과 LG 광고판이 크게 보인다. 시내로 차를 타고 달리면 곳곳에 한국 기업 광고들이 붙어있다. 베트남에서 한국 기업이 차지하는 위상을 엿볼 수 있는 사례이기도 하다. 특히 미국과 중국 사이의 무역 전쟁이 확대되면서 한국 기업의 베트남 진출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2022년은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 30주년을 맞은 해이다. 지난달 중순 박진 외교부 장관은 베트남을 방문해 양국간 기존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하기로 합의했다. 베트남이 최고 수준의 대외 협력 관계인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는 중국, 러시아, 인도 등 3개국 뿐이다. 그만큼 한국은 베트남에 중요한 경제협력 대상이 됐다. 양국이 경제와 문화 등에서 끈끈한 국가로 연결되는 것은 수치로도 확인이 된다. 베트남 관세청에 따르면 2021년 베트남 수입액에서 한국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두 번째로 많다. 베트남은 한국에서 중국(1099억 달러) 다음으로 많은 562억 달러어치를 수입했는데 이는 3위인 일본(226억 달러)에 비해서도 두 배 이상 많은 액수이다.한국의 입장에서 베트남은 세계에서 3번째의 수출시장이다. 2021년 베트남 수출액은 567억 달러로 중국(1369억 달러)과 미국(959억 달러)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베트남이 한국에 있어 일본(301억 달러)보다 더 중요한 교역국이 된 것이다.양국간의 무역 규모는 최근 10년 동안 4배 이상 급성장했다. 베트남과의 교역은 한국에 엄청난 무역흑자를 가져다주고 있다. 1965년부터 2021년까지 한국은 일본과의 무역에서 누적 무역적자 6939억 달러를 기록했지만, 베트남과는 1992년부터 2021년까지 3102억 달러의 무역흑자를 기록했다.베트남에 투자하는 한국 기업 중 선두주자는 단연 삼성그룹이다. 2008년부터 올해 말까지 삼성그룹의 베트남 누적 투자액은 215억 달러에 이를 전망이다. 올해 말까지 삼성의 1, 2차 베트남 협력업체 수는 250개에 이르고 이중 1차 협력업체만 52개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밖에도 삼성전자는 50개 베트남기업의 생산역량 향상을 위해 스마트공장 전환 및 개발을 지원하고 있다.LG그룹도 베트남에 50억 달러 이상을 투자했다. 롯데그룹 신동빈 회장은 올해 9월 베트남을 방문해 2030년까지 호치민시에 대형 복합 단지를 조성하고 일자리 500만 개를 창출하겠다고 약속했다. 만약 현실화되면 재계 순위 5위의 한국 기업이 인구 1억 명의 베트남 경제를 쥐락펴락하게 된다.이렇게 한국 기업들이 베트남 고속성장의 기관차 역할을 하는 것을 보면서 북한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같은 사회주의 체제를 표방하고 있고, 과거 적으로 싸운 베트남은 한국의 경제적 투자로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는데 북한은 거꾸로 한국을 핵과 미사일로 위협하면서 점점 경제가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다.인구 2000만 명에 불과하고 1인당 국민소득이 1000달러 안팎인 북한은 한국이 마음만 먹으면 10년 안에 국민소득을 몇 배로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북한은 말도 같고, 교육 수준도 높으며, 지리적으로도 붙어있다.그러나 북한과 베트남의 근본적인 차이는 핵무기 보유 여부이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이에 따른 유엔의 대북제재로 현재는 어떤 기업도 북한에 진출할 수가 없다. 또 한국 기업의 진출로 북한이 부유하게 되면 김정은은 체제 유지를 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권력 세습과 핵무기가 북한을 어떻게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는지를 베트남에서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하노이·호치민=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2-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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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세 탈북 양로원장 정은심의 도전[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2006년 10월. 20세 꽃다운 나이의 정은심은 가냘픈 어깨 위에 너무나 무거운 짐을 메고 한국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 북한에 남은 어머니와 여동생,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까지 다 데려오려면 큰 돈이 필요했다. 당시 한 명을 한국으로 데려오려면 600만 원이 필요했다.서울 노원구에 정착한 그는 한국 사회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어느 횟집에 종업원으로 취직했다. 그때부터 새벽에 일어나 밤 10시에 들어오는 생활이 반복됐다. 식당에선 아침 10시부터 저녁 10시까지 12시간 일해야 했지만, 컴퓨터학원과 운전학원까지 다니다보니 새벽에 일어나 5시에는 나가야 했다.그가 받은 월급은 120만 원. 한 푼도 안 쓰고 모아도 어머니와 여동생을 데려오려면 1년은 벌어야 했다. 쉬는 날에는 다른 곳에 가서 알바로 일했다. 그걸 보고 횟집 사장이 “다른데 가서 일할 바에는 쉬는 날에도 식당에 출근하면 추가 수당을 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한 달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식당에서 일했다.이듬해 4월 외할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중국에 몰래 넘어와 외손녀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 그는 그때까지 벌어 모은 돈과 다음달 월급까지 다 가불해 보내주었다. 어머니와 동생을 데려오는 계획은 더욱 미뤄졌다.탈북민 관련 기사가 인터넷에 뜨면 흔히 “가족을 버리고 온 사람들”이라는 악플이 달린다. 탈북민에겐 가장 아픈 말이다. 사실 알고 보면 대다수 탈북민이야 말로 가족을 위해 목숨까지 내건 사람들이다. 탈북했다 체포돼 북송되면 목숨을 장담하기 어렵다. 가족이 함께 움직이면 더욱 위험하고, 비용도 엄청나게 들 수밖에 없다. 가족이 함께 탈북했다가 북송되면 “온 가족이 조국을 버리고 도망쳤다”며 꼼짝 못하고 정치범이 되기 쉽다. 반면 가족 중 한 명이 탈북하면, 실패해 북송이 된다고 해도 북한에 남은 가족이 구명운동을 펼 수 있고, 최악의 경우 본인만 처벌 받으면 그만이다. 그래서 보통 일가가 탈북하기 전에 그 가족 중에서 가장 젊고 용감한 사람이 먼저 탈북해 기약 없는 중국 땅에서 탈북 통로를 개척한다. 그가 성공해 한국에 오면 이후 돈을 벌어 북한 가족을 데려오는 것이다. 그런 과정에 한국에서 무사히 온 가족이 재회하는 경우도 있고, 오다가 가족이 체포돼 북송돼 영영 이별하는 비극도 발생한다.은심도 이러한 운명을 몸으로 떠안았다. 한국에 온 그의 머리 속에는 오직 가족을 데려올 생각 밖에 없었다. 하도 열심히 일하는 그를 유심히 살펴보던 김소영이라는 언니가 어느 날 그를 찾았다. “내가 10년 다니던 회사에서 퇴직해 퇴직금을 받게 되는데 그중 10분의 1을 십일조로 내려 했어. 그런데 그것보다는 사람을 살리는 게 더 낫다 싶어 그 돈을 줄 테니 가족을 데려와.”은심은 고마워 며칠을 펑펑 울었다.그 돈으로 그는 이듬해 어머니와 여동생을 데려올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 뒤 외가 식구들은 모두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는 비보를 전해 들었다.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간 외가 친척들손녀에게서 돈을 받은 외할아버지는 주거지인 양강도 혜산으로 돌아가 온 가족을 탈북시킬 준비를 했다. 북한 다른 곳에 살던 아들과 딸들에게 연락해 외손자들을 먼저 혜산으로 보내게 했다.외할아버지는 북한에서 몰래 신앙의 믿음을 지켜가던 지하교인이었다. 한국에서 기독교 신자의 집안에서 태어난 외할아버지는 어릴 적 부모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살았다. 그곳에서 성장해 가족을 꾸리고 살다가 1950년대 대기근을 피해 자식들을 데리고 북한으로 건너왔다. 북한에 넘어와서도 몰래 성경책을 구해 신앙생활을 했고 주변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전도했다.외손녀의 탈북을 계기로 더는 북한에서 살고 싶지 않았던 그는 외손자 3명과 자신이 전도했던 사람의 자식 3명을 모아 집에 데리고 있다가 브로커를 시켜 먼저 중국으로 탈북시켰다. 아이들을 먼저 보내고 어른들도 뒤따라 갈 생각이었던 것이다.하지만 동네에서 놀던 아이들이 어느 날 6명이나 사라지자 보위부가 집중 감시를 했고 어른들은 탈북하기 전에 모두 체포됐다. 보위부에선 외할아버지가 기독교인으로 주변에 전도했던 사실, 외할아버지의 딸인 은심의 어머니와 그의 자식 2명이 이미 한국에 간 사실을 밝혀냈다. 이 사건으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외삼촌과 외숙모, 이모 등이 체포돼 모두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고 이후 영영 소식이 끊겼다. 은심은 졸지에 외가를 모두 잃었다.외할아버지가 탈출시킨 아이 6명은 모두 한국에 무사히 도착했다. 이젠 20대~30대인 그들은 여러 지역에서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다.외가의 비보에 은심은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갔다. 1년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도 자지 못하고 버텼는데 육체적 한계를 느낀 것이다. 병원에선 급성심부전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한달 넘게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그는 간호사라는 직업을 간접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사람을 살리는 그 직업에 매력을 느꼈다.탈북길에 오른 여대생2008년 3월 은심은 간호조무사학원에 등록했다. 탈북하기 전 그는 함흥제1교원대학 유아교육과 2학년 학생이었다. 한국에 와서도 유아교육을 공부할까 싶은 생각이 있었지만, 간호사라는 직업이 더 끌렸다.1986년 강원도 원산에서 태어난 은심은 1990년대 중반의 ‘고난의 행군’ 기간에조차 배고픈 걱정 없이 살았다. 원산교원대학 음악교원이었던 아버지는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태어나 살다가 어릴 적 북한으로 귀국했다. 그래서 중국에 가족들이 꽤 있었는데, 중국에 남은 형제 중엔 사업으로 성공한 사람도 여럿 있었다.아버지는 일찍 중국을 드나들며 장사를 했다. 중국에서 땅콩이나 옷 등을 싣고 와 원산에 팔았다. 특히 중국제 구충제가 인기가 높았는데, 이걸 싣고 오는 날이면 원산에 살던 일본 출신 귀국자들이 은심의 집에 와서 줄을 서서 사갈 정도였다. 고난의 행군 시기 은심이 살던 교원아파트엔 먹지 못해 온 몸이 퉁퉁 부어가는 교원들이 늘어났다. 은심의 어머니는 이웃들이 불쌍해 먹을 것을 나눠주었는데 그때마다 아버지는 “제발 잘 사는 척하지 말고 우리도 배고프게 사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그러던 아버지가 1998년 어느 날 사라졌다. 삼촌들이 정치적 발언을 잘못해 끌려갔는데 본인에게도 추궁이 돌아오자 중국으로 탈출한 것이다.아버지가 실종되자 주변에서 따가운 눈초리가 날아왔다. 더는 교원아파트에서 살 수없게 됐다. 엄마는 은심과 여동생을 데리고 외가가 있는 혜산으로 이사했다. 중국에 간 아버지에게선 초기 1~2년 동안 연락도 오고 물자도 왔는데 이후 소식이 끊겼다. 아버지가 실종되자 은심의 어머니는 장마당에서 장사를 해 두 딸을 키우다가 은심이 함흥교원대학에 입학한 것을 계기로 아예 함흥으로 옮겨와 살았다.대도시로 나온 은심은 동창들과 어울리면서 ‘천국의 계단’등 당시 돌아가던 한국 드라마를 수없이 보며 한국에 대한 동경을 키웠다. 김혜연의 ‘서울 평양 반나절’이란 노래를 들으면서 남조선은 참으로 가까운데 왜 갈 수 없을까 생각도 했다. 중국에 친척도 많은데 그까짓 반나절 거리 한국에 얼마든지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계속 자라났다. 그러다 어느 날 중국으로 가는 선이 생기자 미래가 불투명한 북한 땅을 떠났다. 중국에 있는 친척들 덕분에 3국까지 수월하게 왔다. 전염병이 도는 3국 감옥에서 4개월 동안 수감돼 생전 처음으로 큰 고생을 했지만 그것도 이겨냈다. 그렇게 도착한 한국에서 그는 가족을 위해 인생 처음으로 온몸이 부셔져라 일을 해야 했다.양로원을 창업하다1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살았던 생활은 간호조무학원에 입학해서도 이어졌다. 그는 단 한번의 결석과 지각도 없이 학원 생활을 마쳤다.학원 기간 실습을 나가 환자들을 만나보니 간호원이란 직업이 너무나 적성이 잘 맞았다. 특히 양로원에서 노인들과 만나 살아온 과거를 들어주며 어울릴 때가 가장 마음이 편안했다.22살 은심은 “어르신들을 돌보는 일이 내겐 너무 잘 맞는구나. 앞으로 이 일을 쭉 하며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학원을 졸업한 뒤 그는 한 피부성형외과 병원에 취직했다. 병원 일은 적성에 맞고 재미도 있었다. 하지만 점점 1년제 교육과정을 이수한 간호조무사와 4년제 대학을 나온 간호사와의 격차를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그는 열심히 준비해 2012년 단국대 천안캠퍼스 간호학과에 입학했고 2016년 졸업했다. 대학을 다니는 기간 결혼을 했고, 졸업과 동시에 아들도 낳았다.2년 정도 육아 기간을 마친 뒤 2018년 3월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보건소에 보건진료 공무직으로 취직했다. 이곳에서도 그는 치매안심센터에 근무하면서 노인들과 어울렸다. 일을 하면 할수록 급속한 고령화를 맞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노인 돌봄 체계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는 오랜 꿈이었던 요양원을 지난해에 개업했다.사실 지난 13년 동안 그의 한국에서의 삶은 요양원 개업을 위한 오랜 준비 기간이었다. 그는 간호조무사를 할 때부터 언젠가는 요양원을 열겠다는 생각으로 돈을 악착같이 모았다. 대학을 다니면서도 쉬지 않고 알바를 했고, 보건소에서 받은 월급을 꼬박꼬박 모았다.요양원은 자기 건물이 있어야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노인들을 위한 재가센터나 주간보호센터는 월세나 전세 건물에서도 운영할 수 있지만 요양원은 반드시 원장이 해당 건물을 소유해야 하는 것이다. 입소자들의 안정적 생활을 위해 필요한 제도이지만, 아무 재산도 없이 이 땅에 정착한 은심에겐 가장 넘기 어려운 산이었다.다행히 2019년 안산에 2억을 주고 샀던 개인 명의의 집이 2년 뒤 2억6000만 원으로 오르자 그걸 팔아 안산에 실평 66평짜리 건물을 계약했고, 14인실 규모의 양로원을 오픈했다.집을 계약한 뒤에도 각종 규정에 맞춰 침대와 치료설비 등을 사느라 억대의 돈이 들었는데, 이때엔 어머니가 10년 넘게 꼬박꼬박 모았던 돈을 내놓았다. 모녀가 힘을 합쳐 개업한 양로원에 은심은 좋은 일들이 다 온다는 의미의 ‘다온양로원’이라는 이름을 지었다.탈북민 전용 요양원의 꿈양로원을 열었지만 성공적으로 자리 잡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처음 문을 열고 50일 동안엔 입소한 노인이 단 1명에 불과했다. 양로원은 간호조무사, 사회복지사, 요양보호사 등을 반드시 고용해야 한다. 이들의 월급에 더해 관리비도 만만치 않게 들었다. 괜히 시작했나 낙심해 잠을 이루는 날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아침이면 그는 어김없이 집을 나섰다. 경로당, 노인대학, 노인식당을 수시로 찾아가는 것은 물론, 직접 자전거를 타고 근처의 모든 아파트 단지들을 다 돌며 전단지를 붙였다. 얼굴이 까무잡잡하게 변하고 몸살로 수시로 쓰러졌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이런 노력 끝에 입소한 노인이 작년 12월엔 6명으로 늘어났고 지금은 19명이 입소해 있다. 장차 요양원을 100명 규모로 키우는 것이 은심의 목표다.하지만 아쉬움은 여전히 남아있다.“제가 요양원을 열 때 탈북 어르신들을 위한 요양원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아직 한 명도 없어서 안타까워요.”탈북민 복지 문제는 사실 정부의 오래된 고민이다. 지난 3개월 사이에도 생활고에 시달리던 탈북민이 매달 변사체로 발견됐다. 현재 한국에 입국해 사는 탈북민은 약 3만5000명에 이른다. 그런데 이중 가장 생활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노인이다.40세 이전에만 입국해도 한국에서 직업을 잡아 돈을 벌 수 있지만, 50세가 지나 한국에 오면 일자리도 없어 막막하다. 한국 사회에 대해 좀 알만하면 60세가 넘으니 기초생활수급자 신세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이다. 가족이 없이 홀로 온 노인 탈북민도 많아 쓸쓸하게 인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많다.은심의 꿈은 이런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탈북 노인들을 위한 요양원을 만드는 것이다.“저는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능력이 있어요. 어제 들었던 말을 오늘 또 들어도 저는 좋아요. 특히 북에서 살다 왔기에 탈북민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누구보다 잘 들어줄 수 있어요. 그리고 탈북 어르신들이 고향 음식을 먹고 싶다고 하면 다양한 북한 음식을 만들어 대접할 수 있거든요.”하지만 현재 많은 탈북 노인들은 요양원에 어떻게 입소 신청을 하는지도 모르고 지내는 것이 현실이다. 기초생활수급자의 경우 시설등급을 받으면 본인 부담금이 없이 요양원에 입소할 수 있는데, 은심이 만나본 탈북 노인들은 그런 사실도 모를뿐더러 서류를 어떻게 작성하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저부터 잘 자리 잡으면 고향 분들 많이 모셔올 겁니다. 그러자면 다온요양원이 최고라는 소문이 나야겠죠.”그런 평판을 만들기 위해 은심은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 올해 8월 요양원 윗층이 매물로 나오자 그는 지체 없이 구입해 29인실로 요양원을 늘였다. 간호조무사와 요양보호사도 규정보다 2명 더 고용해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애쓴다.코로나 시국에 활동이 제약되자 그는 옥상에 넓은 공연 공간과 테라스를 만들어 연주회 등 각종 행사를 열기도 했다.은심의 노력이 앞으로 어떤 결실을 맺을지는 아직은 알 수 없다. 사회의 고령화 속도와 비례해 전국에 각종 노인복지 시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양로원도 모두가 유지되지는 못할 것이다.그럼에도 36세의 양로원 원장 정은심의 도전이 이제 시작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직 그는 너무 젊다. 달려갈 길이 멀지만, 반대로 달릴 힘도 충분히 남아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무수한 고난의 언덕을 포기하지 않고 넘고 또 넘어간다면, 그의 꿈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게 될 것이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2-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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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스코 “수해 입은 공급사와 동반성장”

    9월 초 태풍 ‘힌남노’로 2조 원이 넘는 막대한 피해를 입은 포스코가 철강 제조 공정에 필요한 원료를 납품하는 국내 공급사들을 적극 지원해 화제다. 포스코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회생한 대표적인 기업이 SM한덕철광산업이다. 강원 정선군에서 국내 유일의 상업용 철광석 광산인 ‘신예미광산’을 운영하고 있는 SM한덕철광산업은 철광석 판매 매출의 70% 이상을 포스코에 의존해 왔다. SM한덕철광산업 김철홍 사장은 “힌남노 피해 때 포항 괴동역에 있는 화물 하역 장비 역시 침수돼 20일 넘게 철도 운송을 할 수 없었고, 9월 매출도 60% 이상 줄어 막막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런 딱한 사정을 들은 포스코는 포스코인터내셔널의 해외 네트워크를 활용해 신예미광산의 철광석을 중국에 수출할 수 있도록 적극 도왔다. 그 결과 SM한덕철광산업은 9월부터 11월까지 석 달 동안 5만5000t의 철광석을 중국에 수출해 위기를 극복했다. 이 회사가 생산하는 철광석은 철(Fe) 성분이 42%로 호주, 브라질 등지의 해외 철광석(Fe 62% 이상)보다 낮다. 생산량도 해외 광산 대비 적은 편이나 포스코는 국내 광산업계 보호를 위해 1984년부터 40여 년간 거래를 해오고 있다. 김 사장은 “품질이 우수한 해외 철광석을 구매하는 것이 더 유리함에도 오랜 기간 거래를 이어온 포스코에 감사한다”며 “자원의 불모지라 불리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상업용 철광석 광산을 운영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앞으로도 포스코와 협력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했다. 포스코는 포항제철소 태풍 피해 복구 기간 중 59개 국내 원료 공급사에 일일이 연락해 입고 중단에 따른 매출 영향을 전수 조사했다. 이어 국내산 원료 구매 비중 확대, 광양제철소로 물량 전환, 조업 정상화 전 원료 선구매, 포스코 그룹사를 활용한 해외 수출 지원, 저금리 대출 지원 등 다양한 형태의 일대일 맞춤형 피해 지원을 했다. 포스코 이주태 구매투자본부장은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말처럼 더불어 함께 발전하는 기업시민 포스코로서 공급사와 동반 성장하겠다”고 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2-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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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업비트, 자체 로그인 도입… 21일부터 카카오로 접속 안 된다

    디지털 자산거래소 업비트가 자체 로그인 시스템 ‘업비트 로그인’ 서비스를 최근 도입했다 (사진). 기존 ‘소셜 로그인’ 방식이 아닌 ‘생체 인증’과 ‘PIN 번호 입력’ 방식을 적용해 보안성을 대폭 강화했다는 것이 업비트 측 설명이다. 지금까지는 ‘카카오 계정’ 및 ‘애플 ID’를 통한 로그인을 지원해 오다가 지난달 31일부터 자체 로그인 시스템을 시작했다. 새로운 로그인 시스템은 별도 프로그램이나 애플리케이션(앱) 설치 없이 업비트 앱을 통한 간편 로그인을 지원한다. 이용자 이름(아이디)과 비밀번호(패스워드)를 사용하던 기존의 인증방식은 50년 전부터 디지털 정체성(아이덴티티)과 보안을 뒷받침하는 초석이 됐다. 그러나 온라인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과 함께 기존 인증방식에 대해 불편함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문자와 숫자, 특수기호 등을 조합해 만드는 기존 비밀번호는 보안의 중요성과 함께 길이가 늘어났다. 그러나 비밀번호 관련 기준이 웹사이트마다 다르게 적용되면서 이용자가 비밀번호를 쉽게 기억하지 못하는 현상도 함께 많아졌다. 취약한 자격증명 환경도 도마에 올랐다. 기존 비밀번호 방식은 이용자의 관리 소홀 시 계정 탈취 공격을 발발했다. 글로벌 아이덴티티 솔루션 기업 옥타에 따르면 데이터 유출 사고의 80% 이상이 비밀번호 관리 문제에서 비롯됐다. 기업은 기존 비밀번호 방식의 취약점을 극복하고자 다중요소인증(MFA) 등 별도 인증 계층을 활용했다. 보안 질문 설정, 문자메시지 전송 서비스(SMS)와 같은 2차 요소가 널리 쓰인 배경이다. 이러한 인증 방식은 비밀번호가 필요 없는 ‘패스워드 리스’ 인증에 대한 수요를 키웠다. 이용자 보호와 편리한 이용자환경(UX)을 제공하기 위해 ‘생체 인증’ 방식을 도입한 서비스도 대중화됐다. 업비트의 새 로그인 서비스도 패스워드 리스 형태다. 업비트 이용자는 본인 인증을 한 후 발급받은 6자리 PIN 번호 혹은 생체 인증(페이스 아이디·지문)을 통해 디지털자산 및 대체 불가능한 토큰(NFT)을 거래할 수 있다. 업비트뿐 아니라 시중은행, 간편결제 서비스사 등이 패스워드 리스 인증을 채택한 상태다. 업비트는 새롭게 도입한 업비트 로그인을 통해 이용자들에게 보다 편리하고 안전한 투자환경을 제공한다는 계획이다. 업비트 운영사인 ‘두나무’ 관계자는 “새로운 로그인 방식을 통해 이용자가 더 쉽고 편리하게 업비트를 이용할 수 있게 될 것”이라며 “보안도 더욱 강화돼 소중한 자산을 안전하게 거래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업비트는 이용자 혼란을 최소화하고자 11월 20일까지 기존 소셜 로그인도 병용한다. 11월 21일부터는 업비트 로그인을 통해서만 로그인이 가능하다. 업비트 로그인 서비스는 안드로이드 모바일앱 버전 1.19.1, 아이폰 모바일앱 버전 1.26.24 이상에서만 이용할 수 있다. 업비트 웹 이용자의 경우 QR코드 로그인 방식을 통해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2-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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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농협김치’ 소포장시장 공략 농업인 매출 증대 견인차

    농협중앙회는 2020년부터 ‘함께하는 100년 농협 구현’을 구호로 내걸고 유통 및 디지털 혁신으로 새로운 농협의 토대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3년째를 맞이하는 올해에는 특히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과 소비자물가 상승이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농축산물 도소매 유통 역량을 강화하는 데 힘을 쏟았다.농자재 공급망 확대 등 유통혁신에 사활농협은 지난해에 유통 자회사 통합, 김치공장 통합, 스마트 산지유통시설(APC) 개발, 스마트 농기계 보급, 온라인 채널 강화 등 유통 단계별 오랜 숙원 과제들을 해소한 데 이어 올해는 작년 성과의 적용 대상을 확대하는 데 주력했다. 한국농협김치조합공동사업법인 출범, 농자재 공급망 확대를 통한 원자재 가격 상승 대응, 하나로마트의 ‘살맛나는 가격’ 행사 등이 올해 진행된 대표 사업이다. 특히 축산경제 부문의 성과가 두드러졌다. 대표적으로 축산물 전문 온라인 쇼핑몰인 농협 ‘라이블리’를 거점으로 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B2C)와 기업 간 거래(B2B)를 동시에 공략하는 ‘양손잡이 전략’을 들 수 있다. B2C에서는 라이브커머스 전문몰을 구축해 자사 몰과 대형 라이브커머스 플랫폼 동시 중계로 단시간 공격적 마케팅을 펼쳤다. 지역 농축협 축산물 브랜드 25개가 입점된 라이블리 내 지역명품관은 구매자와 판매자 모두 반응이 좋다.농협은 직가공 및 유통 물량 확대에 대비해 부천 유휴지를 통합 물류센터로 활용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수도권 서부에 범(汎)농협 신선식품 물류센터가 생겨나는 효과가 발생된다. 부천 음성 나주 고령에 위치한 축산물유통센터를 미트센터로 바꿔 한우 부분육·소포장 공급 기지로 활용하고, 계통 매장 통합구매를 단계적으로 확대해 올해 통합구매사업 매출액을 1600억 원까지 늘리는 계획도 예정대로 추진되고 있다.농산물 유통 경로 효율화로 새 가치 창출농협은 산지유통시설(APC) 스마트화, 산지농협 온라인지역센터 구축, 스마트가축시장 보급 등 농산물 유통 경로 효율화로 새로운 가치 창출을 위해서도 적극 투자하고 있다.스마트 APC는 데이터를 활용한 정보화와 설비자동화를 중심으로 APC 운영 효율화와 농산물 상품성 제고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업이다. 농협은 올해 농협형 스마트APC 기반 조성을 위해 정보화 시스템 개발과 자동화 표준모델 구축 등을 추진한 데 이어 내년에는 데이터 연계 방식 고도화 및 거점 스마트APC를 매년 10개소씩 육성한다는 계획이다. 이는 코로나19로 인해 오프라인 매장 소비가 주를 이루던 농식품 영역까지 온라인 소비로 전환되는 상황에 맞춰 농협 또한 유통 방식의 변화를 더는 미룰 수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국내 농식품 온라인 시장은 올해 33조 원(소매 총매출 129조 원의 25.3%) 규모이지만 2025년에는 44조 원까지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농협은 산지농협의 경우 온라인 인프라와 전문인력 등이 없어 온라인 사업을 쉽게 추진하지 못하는 상황을 파악하고 지역사무소 내 촬영, 상품페이지 제작, 라이브커머스 공간 제공 등 적극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 결과 현재 전국 70개소에 온라인 지역센터가 운영되고 있다. 또한 ‘산지 온라인 지역센터’를 이끌어 갈 ‘산지 어시스턴트’를 선발해 지역 내 온라인사업을 이끌 수 있도록 온·오프라인 교육이 진행되고 있어 연말까지 100명의 온라인전문가가 탄생한다.축산부문에서는 생축거래 전 과정을 디지털화한 ‘스마트 가축시장 플랫폼’을 개발해 보급하고 있으며, 농림축산식품부와 함께 전자경매 시스템을 도입했다. 스마트 가축시장 플랫폼의 보급으로 농가가 시간과 장소의 제약 없이 스마트폰을 활용해 생축 거래에 참여할 수 있고, 생축 관련 데이터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됐다.전국 8곳 농협 참여 ‘한국농협김치’ 출범농협은 수입산 김치에 대한 위생 문제 등 식품 안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상황에서 김치종주국으로서의 위상을 높이고 안전한 먹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작년부터 김치공장 통합을 추진해 왔다.이를 위해 올해 4월 전국 8개 농협 김치공장 운영농협이 참여해 ‘한국농협김치조공법인’이 출범해 현재 ‘한국농협김치’라는 신규 브랜드가 탄생했다.김치공장 통합으로 기존에 분산돼 있던 조직, 인력, 생산 등 역량을 하나로 집중시켜 생산 원가를 낮출 수 있게 됐다. 또 농협김치의 경쟁력 강화를 통해 매출이 증가하면 농업인이 생산한 원재료 수매량이 증가하는 선순환 구조가 창출돼 농업인 소득 증대와 수급 안정의 효과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농협은 즉석김치와 학교급식 시장에 주로 진출했기 때문에 소포장 시장점유율이 높지 않았지만 소포장 및 온라인 시장 등을 집중 공략해 올해 매출 900억 원, 2026년 매출 1300억 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또한 해외 수출도 적극 추진해 세계에 농협김치를 널리 알리고 김치 종주국의 위상을 높여 나간다는 계획 아래 5월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와 협력해 뉴욕·워싱턴 ‘김치의 날’행사에 참가했다. 7월에는 한국농협김치를 일본에 처음으로 수출했다. 농협은 향후 김치 수출 국가를 호주와 유럽 등으로 확대할 계획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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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태로 이뤄가는 탈북 여사장의 꿈 [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3일째 굶었더니 하늘이 노랬다. 8월 초 삼복더위에 에어컨도, 선풍기도 없는 방에서 그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김도정 씨가 하나원을 나와 서울 양천의 한 임대주택에 도착한 것은 닷새 전인 8월 3일. 하나원에서 나올 때 초기 정착지원금 300만 원이 든 통장을 받았다.아파트에 도착해 보증금 20만 원을 내고 집에 올라왔다. 17평 임대아파트를 둘러보고 드디어 이렇게 큰 내 집이 생겼다고 기뻐한 것도 잠깐. 어떻게 알았는지 탈북 브로커가 제일 먼저 집에 찾아왔다. 브로커는 그를 차에 태우고 근처 은행에 가서 통장에 든 280만 원을 다 빼서 받은 뒤 사라졌다. 서울 생활 첫째 날에 은행에 홀로 남겨진 그는 당황했다. 차를 타고 오다보니 집을 어떻게 찾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수중에는 돈도 없었다.거리를 헤매는데 밤이 어두워졌다. 길거리에 공중전화가 보였다. 정착도우미에게 연락을 했더니 그가 와서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서울에 도착한 날과 다음 날은 정착 교육을 시킨다며 복지관에 데려가 점심은 먹여주었다. 그리고 3일째부터 그는 홀로 남겨졌다. 수중엔 한 푼도 없었다. 아는 사람 하나도 없어 돈을 빌릴 수도 없었다. 외롭게 남겨진 방에서 그는 울다 잠이 들기를 반복했다.이렇게 살다간 죽겠다싶어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며 밖으로 나섰다. 일자리를 구해야겠다 싶어 가까운 아무 식당이나 찾아 나섰다. 닷새 동안 두 끼만 먹은 터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겨우 한 식당을 찾아 들어가 일자리가 있는지 물었다. 당연히 거절당했다.밖으로 나가 이제 어디로 또 가야 할지 막막해 하늘만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돌아보니 태어나 33년 동안 이렇게 굶은 적은 처음이었다.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도 겪었고, 중국에서도 10년을 배고프지 않고 살았는데, 한국 사회에 나와 3일이나 굶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공교롭게 그는 ‘단식투쟁’을 통해 한국에 왔다. 2007년 4월 한국 언론에는 태국 수용시설에 수감된 탈북자들이 집단 단식투쟁에 돌입했다는 기사들이 나왔다. 100명 정도 수감될 수 있는 방에 340명의 여성 탈북자들이 수감돼 화장실에서까지 잠을 자야 했는데 한국행이 계속 늦춰져서 결국 단식투쟁을 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었다.그러나 그때도 감옥에서 주는 밥만 받지 않았을 뿐, 실은 그 전에 미리 먹을 것을 숨겨두어 많이 굶지는 않았다. 단식투쟁 주도자 중 한 명인 도정 씨는 그 일로 미움을 받았는지 감방에 있던 다른 사람들보다 더 늦게 한국에 왔다.다른 식당을 찾아가는데 마침 정착도우미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의 사정을 듣더니 어느 고깃집 알바 자리를 소개해주었다. 식당에 간 저녁 도정 씨는 서울에서의 세 번째 식사를 했다. 그날이 2007년 8월 7일이었다.여자축구선수였던 학창시절김도정 씨는 1974년 함북 경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1960년대 초반 군에서 1집단군 사령관이었던 오진우의 차도 몰았던 적이 있지만, 행방불명된 형 때문에 결국 군복을 벗고 고향인 경성으로 돌아왔다.형님은 6.25전쟁 전에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전쟁 때에는 모스크바와 독일로 다시 옮겨가 공부했다. 그러다가 1959년에 사라졌는데 서독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훗날 도정이 탈북하려 했을 때 부친은 딸에게 부탁했다.“내 형님의 이름은 김상봉이고, 1935년생이야. 서독에 가서 성공했다는 말이 있던데 네가 가서 꼭 찾아봐라.” 탈북한지 25년이 넘었지만 아직 도정은 큰아버지를 찾지 못했다.도정은 축구와 함께 학생시절을 보냈다. 중학교 1학년에 올라갔을 때 도에 4개만 있는 축구구락부가 경성에 생겼다. 신체조건이 또래보다 훌륭했던 도정은 여자 축구선수로 선발됐다.새벽 4시에 일어나 경성역 앞 공원에 나가 6시 반까지 훈련을 하고, 8시에 등교했다가 오후에 다시 공을 차는 일상이 5년 동안 반복됐다.당시 북한은 여자축구에 큰 힘을 쏟고 있던 터라 그는 남들이 다 가는 농촌지원을 가지 않고 훈련에만 전념할 수 있었고, 전지훈련이나 시합을 나갈 때엔 학교에서도 한 달쯤 나오지 않아도 눈을 감아주었다. 하지만 중학교 졸업이 다가오면서 프로 입문 시점이 다가오자 도정은 진로를 바꾸었다. 먼저 프로선수가 된 선배들이 해외 경기에 나가 지고 오면 노동단련대로 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는 군에 나가 노동당원이 된 뒤 장교가 되려고 결심했다.1991년 중학교 졸업과 함께 그는 도 군사동원부에 가서 신체검사를 받는 등 입대 절차를 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만 그때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지는 불행이 찾아왔다. 도정의 아래엔 학생인 남동생이 셋이나 있었고, 어머니도 건강하지 못했다. 그는 군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가정을 돌보기 위해 집에 남았다.당국이 배정한 그의 첫 직장은 아버지가 뇌출혈 전에 다녔던 경성의 종자농장 노동자였다. 종자농장에 다니는 사람들은 협동농장과 달리 농민 성분이 아닌 노동자 성분이었다. 노동자들처럼 매월 배급과 월급을 받았다. 그럼에도 하는 일은 농민과 별 다름이 없었다.농장에 첫 출근을 하게 된 날 도정은 볏단 속에 들어가 엉엉 울었다. 자신의 인생이 농사를 짓다가 끝날 것 같다는 예감 때문이었다.그래도 그는 억척스럽게 다시 일어났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이 불행하더라도 그 환경 안에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열심히 일하다보니 청년위원장도 됐고 선동원이란 직책도 얻었다. 그러나 여전히 미래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북한에 고난의 행군이 찾아와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기 시작했다. 다행히 종자농장은 그럭저럭 배급은 보장해주어 가족이 굶어죽을 형편은 되지 않았지만 살림은 나날이 어려워졌다.사상 교육을 받으며 꿈꾼 탈북1996년 10월 어느 날 친구의 언니가 찾아와 “새별에 선보러 가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북한은 선을 보러 남자들이 가지 여성들이 먼저 가는 일은 거의 없다. 함북 새별군은 아오지 탄광이 있는 두만강 옆 지역으로 경성에서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한참을 가야 했다. 도정은 이미 그 언니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대충 짐작하고 있었던 터라 그 제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챘다. 중국에 시집가지 않겠냐는 말이었던 것이었다.도정은 고민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22살. 25살만 넘기면 노처녀란 말을 듣던 북한에서 그는 몇 년 안에 농장의 어느 남자를 만나 결혼할 운명이었다.북한에서 농사를 지으며 평생 사는 인생을 떠올리니 막막했다. 반면 2년 전 봤던 불빛이 환한 중국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렸다.1994년 초 도정은 전국 왕재산답사단에 선발됐다. 왕재산은 북한의 유명한 혁명전적지인데, 1933년에 김일성이 건너와 항일무장투쟁을 국내로 확대시키는 전략을 제시한 ‘왕재산회의’를 열었다는 곳이다. 한국에서 왕재산은 2011년 적발된 간첩단 사건으로 유명해졌다.도정은 전국에서 200명을 선발하는 답사단에 경성군에서 유일하게 선발됐다. 농장 청년위원장으로 열심히 일한다고 당에서 인정해준 것이다.전국에서 모인 답사단은 함북 회령의 김정숙 동상 앞에 모여 충성 맹세를 다진 뒤 온성군에 있는 왕재산까지 며칠 동안 걸어서 행군했다. 회령에서 왕재산까지 가는 길옆으로 두만강이 흘렀다.도정은 그때 두만강을 처음 봤다. 책에서 배울 때는 아주 넓은 줄 알았는데 좁은 곳도 많았다. 중국이 이렇게 가까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밤에 보이는 중국은 어두운 북한과 달리 불이 훤했다. 낮에 건너다 봐도 모든 것이 풍족해보였고 잘 사는 곳 같았다.북한 당국은 청년들에게 사상교육을 시키기 위해 혁명전적지 답사단을 만들었는데, 도정은 이 답사 기간에 중국에 대한 동경을 품게 됐다. 그런데 2년 뒤 중국으로 가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은 것이다. 고민 끝에 그는 “미래가 없는 이 땅을 떠나 중국에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그는 언니를 따라 기차를 타고 종성까지 갔다. 맞은편은 중국 투먼(圖們)이었다. 열흘 쯤 현지에 머무르다가 브로커의 안내를 따라 강을 넘었고, 얼마 뒤 투먼에 사는 조선족 남성을 소개받았다. 국경 도시인 투먼은 경계가 삼엄했다. 그래서 그는 남자와 함께 이듬해인 1997년 연길로 들어갔다.단식투쟁 끝에 도착한 한국중국에서 만난 남자는 일을 하려 하지 않았다. 돈을 벌어 북한 가족에게 보내줘야 하는 도정은 허무하게 시간을 보낼 수가 없었다.탈북한 이듬해 23살 때부터 그는 연길 중심의 서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처음엔 고사리를 삶아 팔았고, 더덕과 완두 장사도 했다. 말을 배우지 못해 한족은 멀리하고 조선족이 자주 찾는 식품 위주로 닥치는 대로 장사를 하면서 점차 서시장의 상인이 돼갔다. 그러다가 점차 시장에 적응하면서 김치를 전문적으로 팔기 시작했다. 1999년 아들이 태어났다. 세 식구를 먹여 살리면서 북한 가족에게 돈도 보내야 했다.하지만 북한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암울했다. 그가 탈북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뇌출혈이 재발해 쓰러졌다.도정은 중국에서 상품을 구입해 북한으로 보냈는데, 언니의 남편이 이것을 보고 처제가 탈북했다고 안전부에 가서 신고를 했다. 아버지는 끌려가 20일 동안 혹독한 취조를 받던 끝에 뇌출혈로 쓰러졌다. 언니는 이혼을 했다. 북한에선 돈 쓸 일이 계속 생겨나는데, 중국에서 체포될까봐 조심히 장사해서는 돈을 크게 벌수가 없었다. 그나마 행운이었던 것은 연길의 중심시장에서 10년이나 신분을 숨기고 장사를 했지만 한 번도 체포돼 북송된 일은 없었다는 점이었다.돈을 주고 북한 여성을 사서 그 덕으로 먹고 살려는 남자와 결별하고 싶었지만 아이 때문에 선뜻 떠날 수도 없었다. 그러는 사이 마음속엔 한국에 대한 동경이 생겨났다. 조선족들은 그렇게 가고 싶어 하는 그곳에 가고 싶었지만 가는 방법을 몰랐다.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다른 곳에 살던 5촌 여조카가 먼저 한국으로 간 것이다. 그는 조카가 탈북한 줄도 몰랐는데, 한국으로 간 그가 우연히 도정이 연길에 사는 것을 알고 연락해왔다.그의 소개로 그는 한국으로 오는 선을 알았고, 주저 없이 집을 떠났다. 중국을 횡단해 태국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앞서 태국에 온 탈북민들은 한 달반이면 재판 절차를 마치고 한국으로 갔는데, 도정이 태국에 왔을 때는 4개월 반을 기다려도 뽑지 않았다. 그 사이 감옥은 탈북자들로 넘쳐났다. 100명을 수감할 수 있는 공간에 340명이 선풍기도 없이 견뎌야 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던 탈북자들은 단식이란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 전에 감옥 내 매점에서 먹을 것을 사서 미리 숨기고 감옥에서 주는 밥을 거절했다. 며칠 지나자 태국 탈북자들이 단식투쟁을 한다는 뉴스가 한국 언론에 오르내렸다. 그제야 한국 정부는 부랴부랴 서두르기 시작해 몇 십 명 단위로 한국으로 데려갔다.주모자로 몰린 도정은 다른 곳으로 끌려가 20일 넘게 더 격리돼 있다가 2007년 5월 마침내 한국에 도착했다. 그리고 조사와 하나원 생활을 마치고 8월 사회에 나왔다. 하나원 같은 기수 100명 중 20명만 받을 수 있었던 서울에도 배정을 받았다. 하지만 서울에서 그를 기다린 것은 굶주림이었다.열흘 만에 쫓겨난 첫 알바서울 생활은 녹녹치 않았다. 시급 5000원을 받기로 하고 닷새 만에 자리를 얻은 식당에선 열흘 만에 쫓겨났다. 식당 사장은 70세가 넘은 홀로 사는 노인이었는데, 며칠 지나자 자기 집에 가서 빨래를 하라고 시켰다. 한국 생활을 모르는 그가 생각하기에도 이건 아닌 것 같아 거절했다. 두 번째도 거절하자 식당 사장이 배은망덕하다며 더 나오지 말라고 했다.얼마 뒤 탈북자 지원센터가 소개해 준 휴대전화 조립회사에 다른 탈북자 3명과 함께 취직했다. 하지만 그는 한 달반을 일하고 퇴사했다.하나원에선 사회에 나가면 150만 원은 번다고 교육했는데, 당시 회사에서 준 월급이 85만 원이었다. 첫 월급을 받고 계산해보니 남는 것이 별로 없었다. 당시 탈북민은 한국 정착 초기 6개월 동안은 월 38만 원이라는 기초생활수급비를 받았고, 의료보험 1종 혜택도 받았다. 취직하면 그 모든 혜택이 사라진다. 그걸 감수하면서 하루 빨리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취직했는데, 4대 보험과 임대아파트 관리비 등을 내고 나니 열심히 일한 보람이 거의 없었다.다시 일자리를 찾은 끝에 화성시 봉담읍에 있는 환풍기 조립업체에 취직했다. 양천구에서 화성까지 출근하는 데만 1시간 40분이 걸렸다. 매일 6시에 집을 나서 지하철을 갈아타고 수원에 도착해 다시 버스를 타고 회사까지 가야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월급이 170만 원이라 더 좋은 직업을 찾을 수가 없어 3년 반이나 다녔다.직장에 다니는 과정에 그는 다섯 살 연상의 남자도 만나 결혼했고 딸도 두 명 태어났다. 2009년 중국에서 아들도 데려왔다.남편은 한국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연하게 알게 됐다. 남편은 예전에 건설 관련 개인 사업을 했는데, 어느 날 인명 피해가 발생한 큰 사고가 터졌다. 그는 갖고 있던 모든 재산을 다 피해 보상으로 내놓고 노숙까지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런 시련을 이겨내고 친구와 함께 고물상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는데, 1톤 화물트럭을 뽑은 지 20일 째에 도정을 알게 됐다.서울에 가진 것이란 임대아파트 한 채만 있는 외로운 여자와 1톤 트럭 한 대만 있는 남자는 서로의 처지에 묘하게 끌렸다. 결국 서로 의지해서 한 번 잘 살아보자고 약속하고 살림을 합쳤다. 2009년 첫 딸이 태어났을 때 중국에서 데려온 10살 위의 아들이 분유를 먹이고 기저귀를 갈면서 사실상 여동생의 보육을 맡았다. 2010년에 둘째 딸도 태어났다. 도정은 둘째를 낳고 반년쯤 회사를 더 다니다가 그만두었다. 아침 6시에 나가 밤 10시에 들어오는 일과를 하면서 애기 둘을 키우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애를 키우면서 돈을 벌 일은 찾아야했다. 그래서 찾은 것이 명태를 말려서 파는 일이었다.# 3년 연속 망한 명태사업명태 사업은 우연히 시작했다. 동해 바다 옆에서 자란 도정은 어렸을 때 많이 먹었던 황태 맛이 늘 그리웠다. 그런데 한국에서 파는 황태는 입에 맞지 않았다.그는 처음 본인이 먹으려고 경기도 가평에 있는 시댁 마당에 명태를 사서 말렸다. 주변에 나눠주니 모두 맛있다고 했다. 기회도 찾아왔다.2010년 천안함 폭침 사건이 터진 뒤 한국 정부는 북한과의 모든 교류를 중단했다. 북한산 수산물 수입도 막혔다. 북한에서 말린 황태를 수입해 한국에 팔던 사람들도 장사를 포기해야 했다. 그중에서 도정이 말려 나눠준 황태를 먹어봤던 몇 명이 명태를 사서 말려달라고 제안했다. 도정은 부산에서 동태를 구입해 말린 뒤 그들에게 갖다 주었다. 직장을 다니며 번 돈과 황태를 팔아 번 돈을 모아 집 주변에 작은 식당도 열었다. 명태를 말릴 수가 없는 여름에는 식당에서 장사를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음식점은 잘 되지 않았다. 월 임대료 고민에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간 적도 여러 번이었다.도정은 2015년쯤 황태를 말려 직접 팔기로 결심했다. 큰마음을 먹고 가평에 큰 덕장을 만들고 부산에서 한꺼번에 명태를 22톤이나 사서 널었다. 식당에서 장사를 하고, 장사가 끝난 뒤 늦은 밤에 차를 타고 가평으로 가서 명태를 가공하는 일이 반복됐다.그러나 첫해는 완전히 망했다. 날씨가 갑자기 더워져 명태가 잘 마르지 않은 것이다. 손이 떨려 차마 썩어가는 명태를 버릴 수가 없었다. 죽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시부모님들이 며느리 몰래 그 명태를 모두 버렸다.인생을 포기한 듯 쓰러져 있는 도정에게 시어머니가 소리쳤다.“당장 일어나. 빈손으로 여기에 와서 학비를 안내고 부자 되는 법은 없다. 돈 버는 일이 그리 쉬우면 한국 사람들은 다 부자가 됐을 거다. 네가 쓰러져 있으면 아이들은 누가 키울 거냐.”시어머니는 그를 일으켜 세우더니 은행으로 데려가 750만 원을 찾아 건네주었다.“내가 가진 것이 지금까지 부었던 적금이 전부인데, 이 돈을 갖고 다시 해봐라.”도정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그래, 내가 빈손으로 왔는데 다시 빈손이 됐을 뿐이고, 돈은 이제 또 벌면 되지.”그는 그 돈으로 이듬해 다시 명태를 사서 널었다. 그러나 또 망했다. 날씨가 또 더워졌고, 명태는 또 썩었다. 세 번째 해에도 오기로 빚을 내 시작했다. 또 망했다. 3년 연속 실패하다보니 빚도 1억8000만 원이나 생겨났다. 황태 말리는 비법을 찾다하지만 실패가 학비라던 시어머님의 이야기대로, 그 과정에 배운 것도 있었다.우선 좋은 명태를 고르는 법을 익혔다. 무조건 크다고 좋은 명태가 아니었다. 말렸을 때 살이 가득한 명태는 따로 있었다.둘째로 씻는 방법을 특화시켰다. 한국의 유명 황태 덕장은 수돗물에 씻었는데, 도정은 소금을 풀어 바닷물 농도로 맞추어 씻었다. 셋째로 말리는 방법을 달리했다. 그때까진 명태는 머리를 꿰어 덕장에 매달아놓는데, 도정은 꼬리를 꿰어 거꾸로 말렸다. 이렇게 하면 소금물이 살에 더 잘 스며들어 쫄깃쫄깃해지고 맛도 좋아졌다.황태는 눈을 맞고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면서 마른다. 그런데 서울 주변에 내리는 눈은 환경오염 물질이 섞여 있기 때문에 그는 덕장 위에 천정을 만들고, 더운 날씨를 극복하기 위해 선풍기로 찬 바람을 만들었다.이렇게 노력한 끝에 2018년 처음으로 상품이 나와 매출액 1억 원을 달성할 수 있었다. 자신감이 생기니 사업은 탄력이 붙었고, 2020년까지 이전 3년 동안 진 빚을 다 갚을 수 있었다. 그는 ‘해숨’이라는 회사를 만들고, ‘해숨청정명태’라는 브랜드로 온라인 판매도 시작했다. 코로나가 터져도 온라인 매출은 계속 성장했다.그러나 사업이 늘 평탄할 수는 없었다. 생각지 못한 변수는 늘 있다. 올해 터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그는 다시 위기를 맞았다. 전쟁 발발 후 3개월 동안 매출은 0을 찍었다. 러시아산 명태를 수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러시아 대통령 때문에 장사가 망할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저장고가 고장 나 보관하고 있던 황태를 버려야 하는 불행도 찾아왔다. 그런 일이 벌어져도 이제 그는 더는 낙담만하고 있지 않는다.“울어봐야 방법이 나오는 것은 아니죠. 저는 이제 어려움이 찾아오면 이건 쉬었다 가라는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항상 인생이 좋을 수만 있진 않거든요. 그래도 돌아보면 저는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다시 세운 인생 목표2015년 1월 9일 그는 박근혜 대통령 앞에서 ‘정착사례발표’를 했다. 통일부에서 주관하는 정착사례 경연에 수기를 냈는데 우수상을 받았고, 그걸 계기로 탈북민 대표로 선정돼 신년 통일준비 업무보고 자리에 초대돼 이야기를 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탈북민은 한국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성공입니다. 자유를 찾았으니 그 다음부터는 나의 몫입니다. 저는 중국에서 운이 좋게 10년 동안 북송되지 않았는데, 그것만 해도 축복받은 것이고, 한국에 와서 아내를 믿고 지지해주는 남편을 만나 가정을 꾸렸고, 할 일을 찾은 것도 축복받은 일입니다.”하나원에 들어왔을 때 그는 10년의 계획을 세웠다. “결혼을 해 내편을 만들 것이며, 이 좋은 세상에서 아이를 낳아 키울 것이며, 내 사업을 하겠다”는 3대 목표를 세웠다.지금 돌아보니 어려움이 참 많았지만 결국 원했던 것은 다 이뤘다. 요즘은 SBS에서 방영하는 ‘골 때리는 그녀들’에 북한팀을 구성해 참가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길 정도로 심적 여유도 생겼다. 향후 10년을 그려보면 더 큰 목표도 생겨났다. 우선 첫째 딸을 세계 정상의 태권도 선수로 키우는 것이다. 올해 13살인 딸은 학교 때 씨름선수였던 아버지와 축구선수였던 어머니의 유전자를 충실히 물려받았는지 벌써 키가 176㎝나 된다. 지난해 초등학교를 대상으로 한 전국 태권왕 겨루기 대회에서 우승해 자기 체급 랭킹 1위를 했다. 그러니 세계적 선수로 키우는 것은 불가능한 목표만은 아니다. 하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태권도 학원과 시합비 등으로 매달 200만원 가까이 들어간다. 올해 매출이 없어 어렵게 되자 12살 된 막내딸이 “제가 피아노를 그만둘 거니 언니를 계속 태권도하게 밀어 주세요”라고 했다. 도정은 막내를 부여잡고 펑펑 울었다.도정은 평소 자식들에게 “부모는 빈손으로 시작해 너희들에게 물려줄 것이 없다. 너희가 잘 되게 하는데 다 쓸 것이고, 혹 남게 되면 사회에 환원하고 갈 것이니 너희의 인생은 스스로 개척하라”고 교육했다. 그런 철학으로 아들이 군에 갔다 제대한 당일 이제부터 알아서 인생을 개척하라고 아들을 독립시켰다. 하지만 막내딸이 하고 싶어하는 피아노를 돈이 없어 포기하게 만들었을 때엔 자녀들에게 한 약속도 지키지 못해 너무 괴로웠다.두 번째 꿈은 가족과 해외여행을 가보는 것이다. 한국에 정착한지 15년이 됐지만 부부는 아직 해외를 가본 적이 없다.여행을 갈 돈도 없으면서 그는 설립 10년째 되는 한 탈북민 봉사단의 단장을 4년째 맡아 지금까지 이끌고 있다.“탈북민이 처음 사회에 나오면 정말 외롭잖아요. 고향의 음식도 너무 그리울 것이고. 그래서 먼저 정착한 탈북민들이 고향 음식을 만들어 새로 온 사람을 찾아가 삶의 의욕을 불어주려고 활동하기 시작했어요.”20여명의 탈북민이 매달 한 번씩 모여 코다리조림이나 명란젓, 김치, 북한식 염장무 반찬 등을 만들어 찾아간다. 음식 만드는 과정에 교류해서 좋고, 음식을 먹으며 탈북민이 기뻐하는 모습을 봐서 또 기분이 좋단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로 최근 입국하는 탈북민이 급감해 찾아갈 집이 없어졌다. 그래서 봉사단은 요즘 홀로 사는 노인이나 생활이 어려운 지역주민들을 찾아가 북한 음식을 맛보게 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었다.“북한에 사시던 부모님들이 이제는 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생각하면 항상 죄스러운 마음뿐인데, 명절 때마다 한국의 어르신을 찾아가 대접하면 위로가 됩니다.”그의 세 번째 꿈은 통일이 되면 명태라는 이름이 처음 생겨난 함북 명천에 수산물가공업체를 만드는 것이다. 꼭 돈을 벌기 위해서만은 아니다.“통일되면 고향에 가서 부모님 묘에 비석을 세우고 싶어요. 한국에 오니 여긴 묘와 비석이 얼마나 좋은지 감탄했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살면서 도움을 받은 분들을 큰 버스에 태워 제 고향인 경성에 모시고 가는 겁니다. 경성은 온천으로 유명하지만, 그 외에도 좋은 관광거리가 참 많아요. 제가 그땐 관광 가이드를 할 겁니다. 고향 근처에 회사를 만들고 일도 하면서, 부모님 묘소를 방문하고, 다른 사람들 기분 좋게 관광가이드를 하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꿈을 말할 때 그의 얼굴이 가장 빛났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 2022-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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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사일보다 더 위험한 전방의 구멍[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

    북한이 한미 연합 공중훈련 ‘비질런트 스톰’에 대응한다는 명목으로 2일부터 나흘 동안 미사일 35발을 쐈다. 단기간에 이렇게 많은 미사일을 쏜 것도 이례적이거니와 북방한계선(NLL)을 넘겨 미사일을 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이런 북한의 반응에서 강력하게 복원된 한미 연합훈련에 절대 기죽지 않겠다는 결기가 엿보이는 것과 동시에 신경질적인 짜증마저 읽힌다. 매뉴얼대로라면 한미 연합군이 공중 훈련을 하면서 비행기를 100대 띄우면 북한도 최소 동수의 비행기가 떠 맞대응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원칙은 언제부터인가 사라졌다. 북한의 경제력으론 맞대응할 능력을 상실한 것이다. 공중 훈련뿐만 다른 훈련도 마찬가지다. 연료난도 문제지만 고물 장비들이 훈련하다가 손실되면 보충할 능력도 없다. 그러니 북한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응은 남쪽에서 어떤 훈련을 해도 미사일이든 포든 계속 쏘는 것뿐이다. 그런데 쏘는 것도 결국 소모다. 인건비가 거의 공짜인 북한의 미사일 생산단가를 우리 식으로 계산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렇지만 구형 스커드 미사일과는 달리 명중률이 정확한 최신 미사일은 비싼 전자부품 덩어리다. 대북 제재와 코로나로 미사일에 쓰일 반도체를 매우 어렵게 구입해야 하는 북한으로선 미사일 발사도 큰 부담이다. 특히 끊임없이 지형을 대조하며 날아가는 순항미사일은 원리상 무인기라 할 수 있는데, 전자부품이 더 많이 든다. 2017년 한국에서 자주 발견됐던 북한의 조잡한 무인기를 떠올린다면 최근 몇 년 사이에 북한이 순항미사일을 개발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긴 하다. 하지만 반도체 수급 여건상 생산 수량은 극히 제한됐을 것이다. 이런 비싼 순항미사일을 2발이나 울산 앞바다로 쐈다는데 합참이 부인해버렸으니 북한은 알아주지 않아 섭섭한 생각마저 들지 모른다. 물론 과거 북한 행태로 보면 순항미사일을 쐈다는 말을 믿기도 어렵다. 어쨌든 북한 형편에서 나흘 새 미사일을 35발이나 쐈으면 엄청난 지출을 한 셈이다. 그런데 이번에 한미 훈련에 무리하게 대응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미의 강력한 공군력이 북한을 급습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1990년대부터 2000년 초반까지 평북 창성의 김정일 특각을 지켰던 전직 974부대원의 증언에 따르면 한국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이 시작되면 김정일은 늘 가족을 데리고 창성으로 들어와 지냈다고 한다. 이곳은 중국과 인접해 폭격이 어렵고, 여차하면 보트를 타고 순식간에 중국으로 도망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한이 핵을 보유한 뒤로는 이런 걱정은 크게 덜었다고 볼 수 있다. 핵이 없을 때도 공격하지 않았는데, 핵이 있는 지금 굳이 공격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또 경제가 거덜 난 북한을 점령해 2000만 북한 주민을 먹여 살리겠다는 의지를 가진 정치인도 없다. 이런 사실은 김정은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선제공격을 받을 두려움은 과거보다 훨씬 적을 것이다. 그럼에도 북한이 최근 대규모 군사훈련과 미사일 발사를 강행한 이유는 기 싸움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의도도 있지만 한편으론 북한도 군사력을 점검할 시점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2018년 남북이 9·19군사합의를 채택한 이후 우리도 훈련을 거의 못 했지만 북한 역시 마찬가지다. 훈련을 하지 않는 군대는 군대가 아니다. 김정은 역시 지난 4년 동안 북한군이 얼마나 해이해졌는지, 싸울 준비는 어느 정도 돼 있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미사일 부대 역시 점검이 필수다. 유사시 제공권을 단시간에 빼앗길 것이 뻔하기에 북한 미사일 부대가 쏠 수 있는 미사일 수량은 극히 한정적이다. 그러니 초기 몇 발을 불량 없이 확실히 쏠 수 있을지 파악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북한이 미사일을 좀 쐈다고 도발로 단정해 겁먹을 필요는 없다. 가뜩이나 없는 미사일을 바다에 스스로 버리는데 우리도 나쁠 것은 없다. 그렇지만 다른 도발의 가능성은 여전히 대비해야 한다. 가령 2018년 비무장지대 최전방 감시초소(GP)를 철수할 때 북한은 160여 개 중에 11개를 철수했지만 우리는 60여 개 중에 11개를 철수했다. 우리의 구멍이 훨씬 더 커진 것이다. 북한이 미사일을 몇 발 쏘는지에 신경을 쓰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당장 9·19군사합의로 구멍이 뚫린 전방부터 점검하는 것이 더 중요해 보인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2-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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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북하지 말라” 선전하던 소녀의 인생역전[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할아버지는 한국에서 아들 7명을 낳고 6.25전쟁 직전에 월북했다. 전쟁이 끝난 뒤 북한에서 제주도 해녀 출신의 젊은 여성을 만나 또 아들을 8명이나 낳았다.남로당 출신이라 황해도 농촌으로 쫓겨나 박해를 받으며 힘들게 살았지만, 남과 북에 딸은 단 1명도 없이 아들만 15명을 남겼다.그중 한 명이 김봄희 씨(33)의 부친이다. 1989년 봄희가 원산에서 태어났을 때 부친은 화물선 기관장을 지냈다. 1995년 봄희가 인민학교에 입학할 즈음 북한은 엄혹한 ‘고난의 행군’을 겪었다. 봄희의 부모들도 장사에 뛰어들었다.봄희의 부친은 매우 엄격한 사람이었다. 어린 딸과 두 살 아래의 남동생을 새벽 4~5시에 깨워 텃밭 농사를 함께 짓게 했다. 학교에 갔다 돌아오는 길엔 절대 빈손으로 오지 못하게 했고, 하다못해 토끼풀이라도 뜯어오게 했다.봄희가 7살 나던 해 아버지는 북한돈 100원을 주면서 장사를 해서 돈을 벌어오라고 했다. 어린 봄희는 그 돈으로 사탕 10알을 샀다. 그리고 주변 농촌에 나가 1개당 11원씩 팔아 10원을 남겨왔다. 어린 딸에게 부모는 간장, 된장 담구는 법부터 시작해 술을 뽑고 찌꺼기로 돼지를 키우는 법까지 각종 집안일을 가르쳤다.이렇게 엄격하게 키운 이유는 있었다. 할아버지는 남로당 출신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아들들이 북한에서 출세하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래서 아들들을 모두 기술자로 살게 했고, 세상에서 홀로 살아남으려면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게 가풍이 됐다.# “탈북하지 마세요.”봄희는 인민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뜻밖의 재능을 인정받았다. 음악선생이 “너는 노래를 참 감수성 있게 잘 부른다”고 칭찬하더니 도 보위부 반간첩기동선전대에 추천했다. 반간첩은 방첩이라는 뜻이다. 반간첩기동선전대는 5세~18세 사이의 어린 학생 13명 정도로 구성됐는데, 도의 각 지역을 다니면서 “수상한 사람을 발견하면 신고합시다”고 선전하는 활동을 했다. 그냥 구호만 외치면 재미가 없기 때문에 노래, 춤, 기악, 화술, 대화시 등을 엮어 50분 정도 공연을 했는데, 전체적인 주제는 이러이러하면 수상한 사람이니 꼭 신고를 하라는 것이었다.봄희는 탈북하기 전인 2006년까지 이 기동예술선전대에서 활동했다. 새벽에 일어나 집안일을 하고, 학교에 다녀온 뒤 오후에는 공연이나 훈련을 하고,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했다. 주말에도 근교 농촌에 장사를 떠났다. 지방에 공연 갈 때는 청어를 사서 배낭에 메고 가 공연이 끝난 뒤 1마리를 옥수수 1㎏과 바꿔 집으로 돌아왔다.2002년부터 4년 동안은 간첩을 신고하라는 공연이 ‘불법월경(탈북)을 하지 말자’와 ‘자본주의 불법 영상물을 보지 말자’는 공연으로 바뀌었다. 봄희는 한국에 환상을 품고 탈북했다가 수모를 받고 다시 조국에 돌아오는 여성의 역을 맡았다. 남조선에 간 여성은 어느 집 가정부가 됐는데 주인집 부부는 자기들은 비싼 밥을 먹으면서 탈북한 가정부가 일을 못한다며 온갖 욕설을 퍼붓고 개밥을 먹였다. 끝내 견디지 못한 여인은 천신만고 끝에 북한으로 돌아오게 된다.이런 공연을 1년 반쯤 준비해 강원도 공장, 농장, 군부대, 학교 등 수백 곳을 다니며 진행하는데, 공연 끝나면 감동해 눈물 흘리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선전대라고 특별한 보상은 없었지만 나라에서 시키는 일이니 봄희는 불만이 없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 앞에 나가 공연을 하는 것이 재미있기도 했다.# 고문으로 숨진 외할아버지봄희가 15세 때인 2004년 갑자기 원산에서 같이 살던 외할아버지가 퇴근길에 승용차에 태워져 끌려갔다. 알고 보니 평소에 친한 사람에게 김정일을 독재자라고 욕을 많이 했는데, 누군가 그걸 보위부에 신고한 것이다.봄희의 외가는 중국 출신이다. 전라도 출신의 외할아버지는 해방 전 중국으로 건너가 길림육문중학교를 졸업했다. 이곳은 김일성이 다닌 학교다. 외할머니도 중국에서 태어나 처녀시절까지 살았다. 1959년부터 1961년까지 3년간 중국에는 대기근이 닥쳐서 4500만 명이 죽었다. 이를 ‘마오의 대기근’이라고 불렀는데, 이때 많은 조선족들이 북한으로 탈출했다.외할아버지는 북한으로 넘어와 김책공대를 졸업했고, 강원도의 한 공업소 기술자로 임명됐다. 두만강을 넘어 몰래 북에 들어온 외할아버지와 달리 외할머니는 공식적으로 북에 건너와 북한 국적을 받았지만, 돌아가실 때까지 한국어보단 중국어가 더 편했다. 그래서 봄희는 외가에 갈 때마다 중국어를 들어야 했다.외할아버지가 끌려간 뒤 봄희는 동네에서 자신을 보는 눈초리가 달라짐을 느꼈다. 이웃들은 “저 집 할아버지가 잡혀갔다”고 수군거리며 거리를 두었다. 선전대에서도 봄희는 주연 자리를 빼앗기고 무대 뒤에서 다른 애의 립싱크를 해주는 역할을 맡았다.외할아버지는 몇 달 뒤 집에 돌아왔는데, 오자마자 눈을 감았다. 고문으로 다 죽게 되자 석방한 것이다.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뒤 장사를 하던 엄마마저 중국으로 넘어갔다. 중국에서 자란 부모를 둔 엄마는 중국에 외삼촌과 이모들이 많았는데, 이들을 활용해 북중 무역을 하다가 큰 사기를 당했다.자본금을 찾으려 몰래 도강했던 엄마는 친척들의 도움으로 선양(瀋陽)에 자리 잡아 재봉일을 시작했다. 어차피 북에 돌아와 빚쟁이들에게 쫓기느니 중국에서 돈을 벌어 북한 가족을 살리고 빚도 갚으려는 타산을 한 것이다. 엄마가 탈북한 이듬해인 2005년 봄희는 함북 회령에 가서 엄마에게서 돈을 받아오기도 했다. 그 돈을 가지고 장사를 시작했다. 음식장사도 하고, 감장사도 했다. 강원도 안변은 북한에서 거의 유일한 감 산지였는데, 이걸 함북 청진에 가서 팔았다. 생감을 사서 꼭지를 딴 뒤 술을 바르면 청진까지 가는 며칠 동안 팔기 좋게 숙성됐다. 장사를 하면서도 선전대가 부르면 나가서 공연도 했다.# 회창의 지하 금광아무리 7살 때부터 장사로 단련된 봄희지만 어른 사기꾼을 당할 순 없었다. 2005년 중학교를 졸업하고 몇 달 뒤 그는 사기를 당해 모든 돈을 잃었다. 눈앞이 캄캄했다.이때 누군가 평남 회창군의 금광에 가서 몇 달을 일하면 목돈을 모을 수 있다고 말했다. 봄희는 아버지에게 말도 하지 않고 회창으로 향했다.12월의 을씨년스러운 회창 장마당 앞에서 벌벌 떨며 누군가 자신을 데려가기만 기다렸다. 장마당 입구에는 12살부터 18살 사이 아이들이 10여명 있었다. 봄희와 같은 신세였다.금광에 돈을 댄 ‘돈주’는 장마당 앞에서 인부를 골라 가는데 아이들이 매우 인기가 좋았다. 몸집이 작아 좁은 굴에서 빠르게 움직일 수 있고, 시키는 대로 일도 잘하기 때문이다.이틀 만에 어떤 남자가 봄희를 불러 데려갔다. 먹여주고, 하루 북한돈 200~300원을 준다는 조건이었다. 당시 북한에서 쌀 1㎏은 800원이었으니 하루 일당이 쌀 300그램인 것이다.봄희는 어떤 갱도에 들어가 3개월 가까이 단 한번도 밖에 나오지 못했고 씻지도 못했다. 먹고, 자고 등 일상을 굴 안에서 해결했다. 시간도 알 수 없는 곳에서 좁은 굴을 기어가서 돌을 캐고 숙식을 해결하는 좀 넓은 공간에 메고 온 뒤 잘게 깬다. 그걸 수은에 넣어 걸쭉한 찌꺼기를 천으로 짜면 금을 머금은 수은찌꺼기가 남는다. 이렇게 며칠 일해 찌꺼기를 모아놓으면 그를 데려갔던 남자가 찾아와서 먹을 것을 주고 찌꺼기는 가져간다.이런 아동착취는 북한에서도 불법이다. 그래서 안전원들이 불법 금광 채취를 단속하기 위해 돌아다니긴 하지만, 모두가 굴속에 들어가 살고 있으니 쉽게 찾을 수가 없다. 회창은 지하에 따로 도시가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불법 금 캐기가 성행하는 곳이다. 땅 속 갱도가 수백 개인지, 수천 개인지, 불법 작업장은 또 얼마나 되는지 누구도 모른다. 전국에서 수천~수 만 명이 몰려와 그렇게 땅속으로 사라져 버린다.채광 지도 같은 것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냥 들어가서 아무 방향이나 뚫는데, 수시로 옆에서 폭약을 터뜨리는 소리가 꽝꽝 울렸다. 누구도 서로 누군지도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죽으면 당국에 신고도 하지 않는다. 봄희는 시신을 몇 번 보았다. 굴속에 들어간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나오지 않을뿐더러 서로를 감시한다. 누군가 잡혀 작업장이 드러나면 그동안 일한 돈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그렇게 조심했지만 어느 날 안전원이 봄희의 작업장에 쳐들어왔다. 안전부에 끌려갔더니 미성년자라며 고향에 가는 기차에 강제로 태웠다. 석 달 가까이 일한 돈은 단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아마 그를 고용한 업주는 안전원에게 막대한 뇌물을 주어야 했을 것이다.# 탈북석 달 만에 돌아오니 아버지가 아무 말도 없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돈을 사기당한 딸을 크게 혼을 냈을 것이지만, 아버지는 한숨만 쉬었다. 어머니가 탈북하고 얼마 뒤 아버지는 재혼했다. 외할아버지 사건과 어머니의 탈북으로 죄인의 집안이라고 손가락질 당하니 다른 여성과 결혼하는 것으로 세탁을 하려 한 것이다.봄희는 북중 국경에 가서 엄마한테서 돈을 받아오겠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이번에도 말리지 않았다.“살뜰한 분이 아니셨는데, 그때는 참 이상했어요. 도중에 먹으라고 콩과 강냉이를 닦아 배낭에 넣어주고, 역전까지 배웅하려 나섰어요. 떠나면서 뒤를 보는데, 아버지가 엄청 울고 있었어요. 아버지가 우는 것을 그날 처음 봤고, 그게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죠. 뭔가 예감을 했던 것 같아요.”이미 한 번 다녀왔던 경험이 있는지라, 회령에 가서 엄마와 전화 통화를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지난번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엄마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봄희야, 중국에 와서 엄마랑 살지 않겠니. 예술학교도 보내주고, 밥도 배불리 먹고,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봄희는 아버지 때문에 잠시 고민했지만, 엄마에게 가기로 결심했다. 그가 머무는 집 브로커는 자꾸만 기다리라고 하면서 선뜻 두만강을 넘겨 보내지 않았다. 그렇게 거의 한 달을 보낸 어느 날 브로커가 오늘 밤 강을 건너가라고 했다.강 건너기 전 어둠 속에서 브로커가 선심을 쓰듯 옷 보따리를 주더니 “지금 두만강에 얼음이 둥둥 떠내려 오니 강을 건넌 다음에 꽁꽁 얼 거야. 이 보따리를 꼭 들고 가서 마중 나온 사람들을 만나면 갈아입어라”고 했다. 봄희는 그의 안내를 받아 두만강을 건넜다. 그때가 2006년 3월이었다.# 뜻하지 않은 필로폰 운반강을 넘어가니 봉고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차에서 어떤 남자가 옷 보따리를 갖고 왔냐부터 물었다. 건네주자 남자는 보따리를 이리저리 뒤져 필로폰(얼음) 봉지를 찾아내더니 봄희를 매정하게 차 밖으로 밀어버리고 떠났다.그때에야 봄희는 자기가 필로폰 운반책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어둠 속에 건네받은 보따리 안에 필로폰이 숨겨져 있을 줄 꿈에도 생각 못했다.젖은 옷은 꽁꽁 얼기 시작했다.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무작정 걸었다. 몇 시간을 걷자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길을 따라 한 남자가 자전거를 타고 오고 있었다.“아저씨, 저 좀 살려주세요. 중국에 엄마가 있는데 전화 좀 하게 해주세요.” 남자는 봄희의 행색을 살펴보더니 자기 집에 데려가 옷도 주고 아침도 해주었다.“중국엔 참 착한 사람들이 사는구나” 싶어 감동했는데 얼마 뒤 남자가 엄마에게 전화해 “내가 당신 딸을 데리고 있는데, 팔아먹을 수도 있지만 안 팔고 기다릴 거니 돈 얼마를 갖고 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전화 속 엄마는 그러겠다고 했다.며칠 뒤 그 집에 정복을 입은 공안과 다른 남자 한 명이 나타났다. 그들은 남자를 잡아 “인신매매범으로 감옥에 갈거냐 아니면 그냥 입 닫고 있을거냐”고 협박했다. 엄마가 그 사이 중국의 친척 인맥을 동원해 보낸 공안이었다. 그들을 따라 봄희는 선양으로 들어왔다.# 한국 도착선양에서 어머니는 월세집에서 살면서 재봉일을 하고 있었다. 시장의 옷가게 한족 아줌마가 일감을 넘겨주면 그걸 수선하는 일이었다. 한족 아줌마는 자기가 받은 돈의 절반을 주었는데, 그 돈으로도 먹고 살만은 했다.중국에 온 봄희는 엄마를 도와 다림질을 했다. 그렇게 모녀가 열심히 일해 북한에 돈을 보내주기도 했다. 시간이 가면서 봄희는 현실을 깨달았다. 엄마는 예술학교를 보내줄 능력도 없었고, 잘못하면 체포돼 북송될 위험도 있었다. 엄마는 딸을 설득했다.“봄희야, 이제 남동생도 중국에 들어오게 할 거니 그땐 한국으로 가자. 거기서 네가 하고 싶은 공부도 하고 그렇게 살자.”재혼한 아버지는 형제가 많기 때문에 자신까지 탈북하면 많은 친척들이 피해를 본다며 탈북하길 거절했다. 대신 아들은 보내주었다.엄마는 틈틈이 한국으로 가는 방법을 찾았다. 1년 반이 지난 2007년 12월 마침내 남동생도 탈북했다. 남동생이 도착하기 직전에 엄마는 봄희를 한국으로 가는 브로커에게 인계했다.“온 식구가 같이 가다 체포되면 그냥 죽는 거야. 너 혼자 가서 이 선이 안전한지 봐. 네가 잡히면 엄마가 돈을 벌어 구할 수 있지만, 엄마까지 잡히면 우리는 죽어.”한국으로 가는 일행에 합세한 봄희는 동남아 정글을 헤쳐 도착한 태국 수용소에서 몇 달 수감생활을 한 끝에 2008년 봄 한국에 도착했다.조사기간과 하나원 생활을 마치고 사회에 나와 중국에 연락하니 엄마는 자신도 곧 따라 떠나겠다고 했다.#“연기하고 싶어요.”19세에 한국에 혈혈단신으로 온 봄희는 미성년자라 임대주택을 받지 못해 가톨릭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 맡겨졌다. 봄희는 대학에서 연기를 꼭 배우고 싶었다.이곳저곳 알아봤더니 연기학원을 다니지 않고선 연기 전공으로 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학원은 등록금만 100만 원이 넘었고, 노래 레슨비용도 15만 원이 넘었다. 미성년자라 집도 없고, 정착금도 받지 못한 그에게 돈이 있을리 만무했다. 그렇다고 대학 입시를 앞두고 포기하긴 싫었다. 그는 무작정 연기학원에 찾아갔다.“선생님. 저는 연기가 너무 하고 싶은데, 북에서 와서 돈도 없습니다. 제가 나중에 갚을 테니 저를 제발 좀 가르쳐주시면 안 될까요?”그렇게 6~7군데를 돌아다녔다. 어느 곳에서도 돈이 없으면 배울 수 없다고 하진 않았지만, 선생이 없고, 자리가 없고 등의 이유로 거절했다.“그만큼 제가 그때 무지했던거죠. 지금 그때를 돌아보면 너무 부끄럽고 창피해서 말을 못하겠어요.” 봄희에겐 가장 되돌아보기 싫은 흑역사였다.그러던 가운데 엄마와 남동생도 무사히 입국해 부천에 집을 받았다.어느 날 봄희를 쭉 지켜봤던 수녀님이 부르더니 자기가 아는 목동의 한 학원 원장을 찾아가보라고 했다. “이 애를 어떻게 도와줄 수 없냐”고 부탁했던 것이다. 원장은 다시 목동의 한 연기학원 선생에게 “이 애가 어떤지 한 번 봐주라”고 부탁했다.연기선생은 구구절절 자기소개서를 6~7매나 써서 온 봄희를 이리저리 살펴봤다. 까무잡잡한 모습에 북한 사투리가 그대로 남아있었고, 긴장돼 말도 더듬거리는 것을 보더니 “너 같은 애는 한국에서 연기를 못한다. 여기가 얼마나 치열한 곳인줄 아냐. 나가라”고 했다.봄희는 너무 슬퍼 엄마를 찾아가 펑펑 울었다. 엄마가 딸을 다독이다가 밖에 나가 꽃 한다발을 들고 학원으로 찾아가 선생에게 사정했다. 선생이 왜 마음이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봄희는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몇 달 동안 연기를 배울 수 있었다.“선생님의 성함은 황선일인데, 제가 살면서 가장 고마운 분이었습니다. 선생님 뿐 아니라 사모님까지 부부가 저를 수양딸처럼 생각하고 아껴주셨습니다. 제 삶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친 분이죠.”이러한 과정을 거쳐 봄희는 2009년 동국대 연극학부에 입학했다.# 정체성을 찾다봄희는 한국에 와서 왜 하필 꼭 연기를 하고 싶었을까.“다른 선택이 많았다는 것을 그땐 몰랐어요. 북에서 연기를 했으니 내가 여기서도 꼭 이걸로 먹고 살아야겠다는 외골수 생각만 했던 것 같습니다. 북에서 선전도구의 어린 삶을 살았지만, 한편으로 노래와 춤을 추면 박수도 많이 받으니 그게 제 인생인줄 알았던 거죠.”대학 생활은 너무 어려웠다. 봄희는 “아름다운 날치들이 바다에서 춤을 추는데, 못생긴 꼴뚜기가 끼어든 느낌이었다“고 했다.북한에서 형성된 사고방식과 사투리도 넘기 어려운 난제였다.동기들이 세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을 놓고 작품성을 논할 때 봄희는 “자본주의 탐욕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분석했고, ‘명성황후’의 비극을 논할 때 홀로 “민비는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라고도 했다. 동기들은 슬슬 이 이상한 동기를 멀리하기 시작했다.다른 탈북민들은 대학에 입학해 학년이 올라갈수록 성적이 좋아진다. 그러나 봄희는 그 반대였다. 개론을 많이 배우는 첫 학기는 열심히 외워 3.5를 받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성적이 오르지 않았다. 학년이 올라가면 실기가 점점 많아지는데, 봄희와 함께 하겠다는 동기도 없어 다른 대학에서 사정해 데리고 와야 했다.“동기들 잘못은 아니었죠. 말투나 사고방식이 너무 달랐고, 그렇다고 제가 인간관계를 잘 맺는 법을 알았던 것은 아니었죠.”그는 점점 주눅이 들어갔다. 그러다가 정부에서 국비로 미국 장학생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무작정 지원했다. 구구절절 자기소개서가 먹혔는지 그는 합격 통지를 받았다.“미국에 꼭 가고 싶었어요. 다문화 국가인 미국은 어떻게 서로 다름을 조화시키며 사는지 꼭 보고 싶었어요.”그렇게 떠난 미국에서 그는 2년을 보냈다. 그리고 자신감을 다시 찾았다.“미국에 가서 내가 무조건 한국화 돼야 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났어요. 한국에 왔으니 무조건 한국인처럼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미국인들과 어울리면서 내가 살아온 삶과 정체성 역시 중요한 것이구나. 이걸 버리기보단 잘 다듬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미국에 가기 전엔 말투도, 음식도, 옷차림도 무조건 한국식으로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다녀와선 조화시키는 법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우여곡절 끝에 봄희는 2016년 대학 졸업장을 받았다. 7년 만에 졸업한 것이다.# 40개의 아르바이트북한에서 어렸을 때부터 몸에 익혔던 부지런함은 큰 자산이 됐다. 그는 대학에 입학한 뒤부터 연극단 단장이 된 지금까지 단 하루도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은 날이 없다고 했다.지금까지 그가 했던 아르바이트만 40가지가 넘는다. 그중 으뜸 아르바이트는 2010년 대학로의 한 극단에 들어가 스텝으로 일했던 아르바이트였다.당연히 안 좋은 기억도 있다. 어느 아르바이트 때에는 딱 하루 조금 늦었는데, 사장이 “너 때문에 손해 본 것이 얼마나 되는지 아냐”고 으름장을 놓으며 즉시 해고했다. 한 달반 일한 일당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지금은 당장 노동부에 신고할 것이지만, 당시의 그는 그걸 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그 사장 덕분에 제가 배운 것도 있어요. 그때부터 열 받아서 계약서를 쓰는 법, 세금 계산서를 쓰는 법을 배우기 시작해서 지금은 혼자서 이런 것을 척척 해냅니다. 연극단 운영하면서 돈을 정산하는 일이 많은데, 저는 1원도 틀리지 않게 할 수 있어요.”대학을 졸업한 연극인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그도 대학을 졸업한 뒤 투잡을 뛰어야 했다.그가 찾은 투잡은 온라인 쇼핑몰이었다. 아는 사람이 출연하는 작품에 거의 무보수로 출연해 낮에는 열심히 연기 연습을 하고, 밤에는 동대문 옷시장에 나가 옷을 사서 온라인으로 팔았다. 손해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큰 돈이 떨어지는 일은 아니었다. 그 와중에 오디션 자리가 났다는 소리만 들으면 찾아다녔다.봄희는 2017년 대학로 어느 연극단에서 처음으로 탈북 여성의 역할로 주인공을 맡았다. 아들과 남편을 잃고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역이었다. 매일 연습시간보다 1~2시간 먼저 가서 청소를 하고, 오늘이 마지막인 듯 연습했다. 무대에 닷새 동안 오른 연극이지만, 잊지 못할 작품이었다.한국에선 연극만 해선 먹고 살 수가 없었다. 그는 인형극, 마당극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일했다. 자격증 공부도 열심히 해서 국가문화예술교육사 2급, 연극심리상담사 2급 등을 따기도 했다. 2017년 한 마당극에서 자리를 얻어 수백 건의 공연을 하게 됐다. 일이 바빠지니 온라인 쇼핑몰도 접었다.“마당극을 하면서 처음으로 삶을 돌아보게 됐어요. 주로 요양원에서 공연했는데, 수백 곳을 다니며 깨달음을 얻었어요. 그 전에는 유명해져서 김봄희라는 이름을 알리고 싶었지만, 요양원에서 황혼기의 노인들을 계속 보다보니 젊어서 얻은 명예와 부가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나는 하루하루 열심히 잘 살아야겠다, 마지막에 후회없이 가는 삶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오늘을 포기하지 말자는 생각이 들면서 그때부터 돈을 버는 일과 연애와 여행 등을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노력했어요.”생각이 바뀌니 인생의 동반자도 만났다. 남편은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해외에서 쭉 살았다. 친인척의 절반은 미국, 절반은 캐나다에서 사는 남편은 미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문스쿨을 나와 5개 외국어를 할 줄 알지만, 한국어는 매우 서툴렀다. 한국에 와서 대학을 다니던 남편과 봄희는 삶에 대한 서로의 가치관에 끌렸고, 올해 아들도 태어났다.# 전세 빼서 차린 극단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왜 한국에서 다뤄지는 탈북 여성의 이미지는 거의 똑같을까. 탈북하다 가족을 잃고, 인신매매로 팔려 다니다가, 한국에 와서도 북한 가족 때문에 불법도 저지르고, 늘 눈물 속에 사는 모습일까. 꼭 그렇지 않다는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결심이 서니 극단을 만들고 싶었다. 전세자금을 빼서 극단을 차리고 싶다고 하니 남편이 고맙게도 그렇게 하라고 했다.그렇게 2019년 극단 ‘문화잇수다’가 생겨났다.첫 작품 ‘환영의 선물’은 그가 직접 썼다. 자신의 삶에 대한 독백과 같은 내용이었다. 한국에 정착한 탈북여성이 한국인처럼 되기 위해 애쓰다가 어느 날 꿈속에서 아버지를 만난다.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북한에서 살았던 삶이 꼭 부정돼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다는 내용이다.“닷새 동안 대학로에서 공연했는데, 객석이 모두 찼어요. 그리고 다들 너무 잘 만들었다고 격려해 주셔서 굉장한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금전적으로는 적자였지만, 김봄희 개인적으로나 극단 차원에서나 굉장한 흑자라고 생각해요. 하지 않았다면 오늘이 없었을 겁니다.”두 번째 작품인 ‘소라게와 바다’는 신춘문예 당선자를 작가로 초대해 만들었다. 북한에서 온 사촌 형제 두 명이 한국에서 사는 사촌 형제 두 명을 만나 한 달 동안 함께 살면서 서로 알아간다는 이야기였다. 2021년 대학로에서 공연을 진행했다. 그가 직접 쓰고 연출하는 세 번째 작품 ‘벤 다이어그램’은 다음달 무대에 오른다. 벤 다이어그램은 합집합, 교집합, 차집합, 여집합 등의 개념을 쉽게 표현해 주는 그림을 말하는데, 봄희는 이 연극을 통해 문화가 다른 남북한 사람이 어떻게 어울려 살지를 그려내고 싶었다.# 인생의 반전지난 2년 동안은 코로나로 인해 문화예술인들이 큰 타격을 입은 시기였다. 하지만 봄희는 이 기간 극단은 적자를 보지 않았다고 했다. 비결이 무엇이냐 묻자 그는 지난 3년 동안 자신이 했던 일들을 보여주었다. 연극, 뮤지컬, 인형극, 신체극, 토론극, 청소년뮤지컬, 낭독극, 음악극, 마당극 등은 물론이고, 영화, 단편영화와 다큐영화 등 150가지 넘는 작품에 출연했다. 그가 맡은 역할도 연출과 극작, 기획부터 시작해, 배우, 예술감독, 조연출, 행정, 북한말 코치 등 다양했다. 지난해 화제가 된 드라마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에도 단역으로 잠깐 출연했다고 한다.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작품에 관여할 수 있을까 놀라웠는데, 라디오와 연극강사와 심리상담 보조강사도 한다고 했다.그는 갓난 애기가 있는 지금도 아침 7시 전에 일어나 오전 내내 행정 업무를 수행하고 1시에 연습실로 가 4시간 동안 개인 훈련을 하고, 저녁엔 다른 사람들과 공연 연습을 한 뒤 11시에 퇴근한다. 집에 와서는 기획 제안서를 3시까지 쓴다. 제안서를 100군데 넣으면 답이 오는 곳이 1~2곳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만둘 수는 없다고 한다. 애를 맡길 데도 없어 연습실로 늘 아들을 데리고 다닌다.그래도 그는 지금의 삶이 행복하다고 했다.“여기는 노력하면 능력만큼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잖아요. 힘닿는 데까지 가려 하면 앞으로 가게 되는 사회가 아닙니까. 제가 배우로 예쁜 것도 아니고, 또 인맥도 없는 곳에 와서 너무 모자람이 많은데 노력하지 않으면 어떻게 꿈을 이루겠습니까. 다행스럽게 지금까지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는 행운도 있었습니다.”그렇다고 그가 일에만 빠져 있는 것은 아니다.“저의 꿈은 50%가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이고, 50%는 좋은 엄마가 되는 것입니다. 요양원 다니면서 일이 다가 아니란 점을 깨달았으니 가정의 중요성도 알게 된 것이죠. 제 아들은 부족한 엄마처럼 좌충우돌 하지 않고 실수를 최대한 적게 하면서 살게 교육하고 싶습니다. 단 아들은 엄마가 북한에서 왔다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알고 크게 할 겁니다.”최근 전 세계에 한류 열풍이 휩쓸면서 대한민국의 예술인으로 산다는 것이 너무 자랑스럽다는 그는 자신이 처음 겪었던 어려움을 잊지 않았다. ‘문화잇수다’는 3년째 연기를 하고 싶지만 학원에 갈 능력이 되지 못하는 탈북민과 다문화 청소년들을 위해 연기를 접하고 공연까지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원하면 다른 단체와 함께 프로그램 운영도 지원한다. 매년 20명 안팎의 학생을 받아 노래와 춤, 연기를 가르치는 한편 스스로 직접 연극을 만들어 공연하게 한다. 그는 이것을 무일푼 자신을 받아 키워준 스승에게 빚을 갚는 심정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지금까지 김봄희가 체험한 한국은 어떤 사회일까.“여기는 너무나 다양한 삶이 존재하고, 그걸 또 끝없이 작품으로 시도해도 되는 사회, 해도 해도 소재가 고갈될 걱정이 없는 사회라는 점이 제일 좋습니다. 북한에 있었다면 시키는 것만 무한 반복해야 하지만, 여기선 해도 해도 끝이 없을 만큼 하고 싶은 게 많고, 작품을 만들면서 또 좋은 사람들과 만나 삶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통일이 되면 북한에 가서 창의적으로 작품을 만드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걸 가르치고 싶습니다.”그녀가 북한에서 태어나 학교를 마치고, 중국을 경험하고, 한국에 와서 대학을 나와 극단 ‘문화잇수다’ 대표까지 되는 데 33년이 걸렸다. 하지만 북한 주민들 앞에서 탈북하지 말라고 선동해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던 어린 소녀의 인생 역전은 이제부터 시작됐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2-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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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물 전투기 띄운다고 겁먹을 사람 있을까[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

    “전투기 150여 대를 동시 출격시킨 대규모 항공 공격 종합훈련이 8일 진행됐다”고 북한이 공개했을 때 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북한에 날 수 있는 전투기가 150대가 된다고? 아무리 빡빡 긁어모아도 어려울 건데…. 만약 진짜로 150대나 떴다면 그중 몇 대가 추락했을지 그게 제일 궁금해.” 이후 북한이 발표한 150여 대는 크게 과장된 것이고, 훈련에 참가한 비행기도 추락하거나 비상착륙했다는 여러 보도가 정보 소식통을 인용해 나왔다. 게다가 “북한이 사진에 같은 전투기를 복사해 여러 번 붙여 넣은 것 같다”는 독일 훔볼트엘스비어연구소 사진 분석 전문가 토르스텐 베크 박사의 분석도 나왔다. 워낙 예전에도 군사훈련 때마다 이런 사진 조작이 많았기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북한은 “합동타격훈련은 적 군사기지를 모의(가상)한 섬 목표에 대한 공군 비행대들의 중거리 공중대지상 유도폭탄 및 순항미사일 타격과 각종 근접 습격 및 폭격 비행 임무를 수행했다”고 밝혔지만 막상 공개한 사진을 보면 참담한 북한 공군의 사정이 그대로 담겨 있다. 검은 연기를 풀풀 날리는 고물 비행기들이 제2차 세계대전 때의 공습처럼 섬 상공을 저공비행하며 폭탄을 투하하고 있었다. 북한이 보유한 전투기가 중거리 공대지 미사일과 순항미사일을 탑재할 수 있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데, 그걸 찍은 사진은 없었다. 북한 매체는 김정은이 훈련 직후 “건군사에 전례 없는 대규모의 항공 공격 종합훈련에서 무비의 용감성과 불굴의 전투 정신을 발휘하며 인민 공군의 위용을 만방에 떨친” 비행사들과 만나 축하 격려를 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고작 출격 한 번 했을 뿐인데, 무비의 용감성과 불굴의 전투 정신을 운운한 것도 어처구니가 없는데, 고물 전투기들을 놓고 인민 공군의 위용을 만방에 떨쳤다니 할 말을 잃게 된다. 북한군 비행사들은 자신들이 하루살이보다 못한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을지 모르겠다. 그들을 만나면 해줄 말이 참 많지만, 하나만 고르면 1982년 6월의 ‘비까 계곡 공중전’을 설명해 주고 싶다. 역사상 가장 일방적인 공중전으로 알려진 이 공중전에선 이스라엘의 F-15, F-16 전투기와 시리아의 미그-23, 미그-25 전투기들이 격돌해 85 대 0 이라는 스코어를 냈다. 시리아 공군의 최신예 미그기 85대가 격추될 동안 이스라엘 전투기는 단 한 대의 피해도 없었다. 40년 전의 서방 전투기에도 추풍낙엽이던 러시아제 전투기들이 지금 북한 공군의 주력이다. 게다가 북한의 대다수 전투기는 환갑을 넘기거나 앞두고 있어 노후화가 심각하다. 반면 미군을 언급할 필요 없이 한국 공군의 독자적인 능력만 봐도 5세대 F-35 스텔스 전투기 40대와 4세대 전투기 수백 대를 보유하고 있다. 아무리 수천 시간 최정예 훈련을 받은 비행사라도 한 세대 차이의 전투기를 이길 수 없는데, 북한 비행사들은 항공유가 없어 지상에서 입으로 편대 훈련을 하는 수준이다.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더 암담해진다. 추가로 전투기를 사올 돈도 없지만, 설사 돈이 있어도 사기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세계 2위 군사력이라고 알려진 러시아는 북한보다 훨씬 더 좋은 전투기를 보유하고 있지만 우크라이나에서 제공권 장악에 실패했다. 이미 항공기 수백 대를 잃은 러시아가 앞으로 상당 기간 북한에 항공기를 팔 여유는 없을 것이다. 김정은은 정말 고물 전투기들을 많이 띄우면 상대가 겁을 먹을 거라 믿은 것일까. 공군에 대한 상식이 조금만 있는 사람이라면 코웃음만 칠 일이다. 외부와 단절돼 무지 속에 사는 북한 주민에게 힘을 주기 위한 내부용이라면, 진심으로 바라건대 앞으로 이런 훈련 자주 하길 바란다. 전시용 창고에 고이 보관한 항공유가 바닥이 나고 비행사들은 기량을 쌓기 전에 추락해 사라질 것이다. 대규모 훈련을 몇 번만 더 하면 그나마 남아있는 북한 공군 전력의 몇십 %는 줄지 않을까 싶다. 이런 훈련은 한미 연합군에도 더없이 고마운 훈련이다. 북한 비행사들이 백날 훈련을 해봐야 그런 고물 비행기는 별 위협이 되지 못한다. 반면 유사시 북한 항공기가 뜨면 우리는 싫든 좋든 수억∼수십억 원짜리 미사일을 쏴야 한다. 그러니 날 수 있는 것은 적을수록 좋다. 김정은이 보충하기도 어려운 항공기를 셀프로 소모만 시키면 진심으로 박수를 쳐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2-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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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에 녹는 종이테이프가 지구를 살려요”

    택배 박스를 분리 배출할 때 비닐테이프와 스티커는 따로 떼어 버려야 한다. 용해되지 않는 비닐이 붙어 있으면 박스의 종이를 재활용하기 어렵다. 그런데 박스에 붙어 있는 테이프와 스티커를 떼어 내는 것은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다. 이 때문에 최근 많은 대기업과 택배회사들이 박스와 함께 버려도 되는 종이테이프를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종이테이프는 완전한 친환경이 아니어서 여전히 박스에서 떼서 버려야 한다. 현재 한국에서 박스에 붙여 배출해도 되는 친환경 종이테이프를 생산하는 곳으로는 케이더블유씨(KWC)라는 중소기업이 있다. 여느 종이테이프와 달리 물(알칼리 용액 0.5%)에 완전히 용해되기 때문에 종이테이프를 붙인 채로 배출해도 되도록 해준다. ‘환경보호를 넘어 지구를 보호하는 사업’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친환경 종이테이프는 물론이고 친환경 인테리어 자재, 친환경 식품포장재를 생산한다. KWC의 신영수 대표이사(62)를 지난달 말 충남 천안의 공장에서 만났다. ―친환경 제품 개발에 천착한다고 들었다. “1990년에 설립된 KWC는 음료수병 등에 붙는 슈링크 라벨을 만드는 수축필름 회사다. 국내 식품 대기업인 CJ, 대상, 광동 등에 납품하고 있고, 국제 시장에서도 세계 최고 기술력을 가진 일본, 독일 제품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을 빛낸 이달의 무역인상’ ‘신지식인’ ‘천만불 수출의탑’ 등 다양한 표창도 받았다. 그런데 환갑이 지나 돌아보니 결국 내가 만든 제품은 지구에 쓰레기로 남을 것이란 가책이 들었다. 그래서 인생의 마지막은 돈이 아닌, 지구를 살릴 수 있는 일에 더 매진하고 싶었다.” ―주력 상품을 친환경 종이테이프로 정한 이유는…. “우리나라 테이프 시장이 5000억 원 정도 된다. 대다수가 중국산 비닐테이프다. 돈을 주고 쓰레기를 수입하는 셈이다. 이걸 20%만 친환경 종이테이프로 바꾸어도 1000억 원어치를 덜 수입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지금까지 필름을 생산했기 때문에 이를 응용해서 앞으로도 제일 잘할 수 있는 분야를 택한 것이다.” ―친환경 종이테이프 도입의 어려운 점은…. “많은 분들이 종이테이프가 무조건 친환경이라고 알고 있는데, 사실 수지로 코팅된 것이 대부분이다. 이런 것은 완전 해리가 불가능하고 발암물질도 섞여 있다. 그러나 우리 회사 종이테이프는 100% 종이로만 생산됐고, 제품 생산이나 해리 과정에 유기용제를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 회사의 큰 장점이자 자부심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환경인증을 담당한 한국환경산업기술원이 ‘생산 과정에 유기용제를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기준 등을 삭제하려는 개정을 검토하고 있어 걱정이다. 엄격한 환경보호 기준에서 되레 후퇴해서야 되겠나. 유기용제는 또 다른 환경오염의 주범이다.” ―친환경 종이테이프는 상대적으로 더 비싸서 소비에 제한이 있을 듯하다. “비닐테이프보다 2배 정도 비싼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2, 3번만 리사이클링을 한다면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훨씬 더 경제적이다. 박스까지 쉽게 재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더 그렇다.” ―친환경 종이테이프 외에는 어떤 제품들이 있나. “우리 회사 종이벽지는 100% 친환경 수성 점착 코팅이라 포름알데히드가 전혀 없어 아토피 피부염이 발생하지 않는다. 식품용 종이박스도 비닐코팅이 돼 있지 않아 건강에 이롭다.” ―앞으로의 계획은…. “앞으로는 친환경 제품 생산을 크게 늘리려고 한다. 최근 주식회사 GPC(대표 신효민)와 공동으로 100억 원을 들여 친환경 제품 생산설비 라인을 새로 구축했다. 환경 보존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는데 이에 맞춰 정부도 친환경 제품 생산 기업에 보다 많은 인센티브를 줘 이런 제품의 생산이 늘 수 있도록 해주기를 바란다.”천안=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2-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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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일 친위대원으로 13년, “인생의 가장 허무한 시간”[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양강도의 3월은 6시 반이면 어두워진다.강진 씨는 산에서 내려와 압록강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도로를 가로 건넜다. 이 구간은 강바닥에서부터 약 10m 높이의 석축을 쌓고 만들었기 때문에 평소에 탈북이 불가능한 곳이다. 그래서 국경경비대도 순찰만 할 뿐 고정 잠복초소를 두고 있지 않다.강 씨는 지체할 틈도 없이 도로 옆 철조망에 올라가 바로 10m 아래로 뛰어내렸다. 이곳을 택한 이유는 겨울 내내 도로를 청소하면서 버린 눈이 아래에 두텁게 쌓여 있기 때문에 뛰어내려도 중상은 입지 않을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눈 속에 몸이 푹 빠져들긴 했지만 돌이 가득한 바닥에 몸이 닿지 않았다. 그는 눈을 헤쳐 나와 얼음이 둥둥 떠내려가는 압록강에 뛰어들었다.절반쯤 건넜을 때 도로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뭐라고 소리쳤고, 경비대도 달려와 총을 겨누고 “안 서면 쏜다”고 외쳤다. 그러나 뒤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총알이 날아오면 물속에 들어가려 했지만 다행히 총성은 울리지 않았다.중국 쪽에 도착하니 이곳엔 7m 높이의 수직 석축 제방이 기다리고 있었다. 중국은 불이 훤해 강 건너 북한 쪽에서 이쪽이 훤히 건너다보인다. 제방을 따라 뛰어 내려가는데 케이블선 하나가 드리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걸 잡고 제방을 타고 올라가 중국 쪽 도로에 올라섰다. 아직도 강 건너에선 경비병들과 사람들이 고함을 질렀다.“옜다! 이거나 먹어라.”긴박한 와중에도 그는 북한에 대고 주먹질을 한 뒤 산에 올랐다. 북한에서 위험한 반역자라며 포고문까지 내걸고 인민반마다 신고하라는 강연까지 진행됐던 수배자 강진 씨가 추적을 당한지 보름 만에 탈북에 성공한 순간이었다. 김정일의 친위대이자 경호부대인 974군부대에서 13년이나 군 복무를 했던 그는 제대 후 북한을 등지고 탈출할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됐다. 강을 건넌 날은 2016년 3월 17일이었다.산에 올라가 어둠에 잠긴 북한을 건너다보니 그 땅에서 잃어버린 세월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총구 앞에서 필사적으로 건넜던 압록강은 그가 어린 시절 늘 나와 놀던 곳이었다. 김정일 친위부대원강 씨는 1973년 혜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압록강에서 불과 수백m 떨어져 있었다. 여름이면 강에 나와 헤엄을 쳤고, 겨울에는 스케이트를 탔다. 중국 아이들도 강에서 함께 놀았는데, 놀러갈 때 북한 애들은 다리미와 명태, 숟가락을 가져가 중국 애들이 가져온 주패(플레잉 카드)나 담복(운동복)과 바꾸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혜산에는 5㎞에 경비대 초소 하나만 있을 정도로 국경경비가 허술했다. 탈북은 상상도 못할 때였다. 국경경비대원들도 강에 나와 아이들과 함께 스케이트를 타며 놀았다.강 씨의 인민학교와 중학교 시절은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평범하게 흘렀다. 그런데 졸업할 때 그는 중앙당 5과에 선발돼 김정일의 친위부대인 974부대에 입대하게 됐다. 한국에는 5과가 김정일의 기쁨조를 뽑는 부서로 알려졌지만, 기쁨조 뿐만 아니라 김정일의 경호부대와 별장 관리인 등도 5과에서 뽑는다. 강 씨는 아버지가 도당 간부이긴 했지만 친위부대에 갈 정도로 출신성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런 그가 5과에 뽑힌 것은 김일성의 사촌여동생과 결혼한 이용무 때문이었다. 이용무는 김일성의 친척임을 등에 업고 1973년에 북한군 총정치국장이 된 인물이었지만, 1977년 말에 숙청돼 양강도 농근맹위원장으로 강등됐다. 총정치국장 시절 자신과 밤을 보낸 군 예술단 여성들에게 김일성 명함시계를 하사하는 등 부화방탕하게 살던 것이 적발됐다. 자신의 권력 장악에 방해되는 김일성의 친인척을 가뜩이나 곱게 보지 않았던 김정일은 마침이다 싶어 그를 멀리 양강도에 쫓아버렸다.끈이 떨어진 그는 양강도에서 외롭게 살던 중 강 씨의 부친과 술친구가 됐다. 집에 와서 술만 마시면 “이건 수령님(김일성)이 주신 담배 물주리(파이프), 이건 수령님이 주신 금테안경, 이건 수령님이 해준 금이빨”이라며 말끝마다 자랑하던 이용무를 강 씨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용무는 술만 마시면 자기가 김정일 때문에 이 모양이 됐다고 원망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수령님이 10년 지나면 불러준다고 했다”고 손꼽아 날짜를 셌다.과연 그는 1988년 사회안전부 총정치국장이 됐고, 이후 북한 검열위원회 위원장, 북한군 차수,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등 승승장구하다가 올해 1월 97세로 사망했는데, 장례식장에 김정은이 직접 조문을 오기도 했다. 이용무는 술을 얻어먹은 대가로 “당신 아들은 꼭 5과에 뽑히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나중에 약속을 지켰다. 당시엔 김정일의 친위대가 되면 가문의 영광이라고 하던 때였다.1990년 강 씨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 양강도 도당에 모인 5과 후보생은 모두 500명이었다. 남자는 주로 김정일 경호부대로 뽑았는데 키가 170~180㎝은 돼야 했다. 키가 160대 중반밖에 되지 않는 강 씨는 500명 중 마지막으로 세 번째로 키가 작았지만 이용무의 빽으로 최종 31명 안에 포함됐다.기차역에서 도당 주재의 거대한 환송식이 진행됐고, 남자 31명과 여성 2명으로 구성된 양강도 5과 합격생들은 보위부의 호위를 받으며 전용 특별 차량에 앉아 평양으로 갔다. 도시락도 도당에서 마련해주었다.427초소평양역에 내리니 플랫폼까지 버스들이 나와 그들을 마중했다. 이후 용성구역 명호동에 있는 16과로 불리는 974부대 신병훈련소에 가서 두 달 동안 사격, 격술, 경비 등 기초교육을 받았다. 교육기간 ‘대통령 암살 미수 자작극’ ‘영국 땅에서의 격전’이라는 제목의 외국 영화도 5~6개 보여주었는데 모두 대통령 암살 사건 관련이었다.신병훈련소에 입소한 인원은 모두 700명이었는데, 강 씨는 그중 자신이 제일 작았다고 했다. 훈련 도중 3명이 탈락했다. 탈락자들은 대중 앞에서 재판을 진행한 뒤 외진 광산 노동자로 쫓아냈다.군관이 앞에서 “우리 974부대는 충신이 아니면 역적 두 가지 선택만 있다”며 탈락자들은 훈련을 게을리 해 역적의 길에 들어섰다고 소리쳤다. 훈련생들은 “충신은 못돼도 역적이 돼 집안까지 망하게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비슷한 시기 55과로 불리는 다른 974부대 신병훈련소에서 1400여명이 훈련을 받고 있었다. 55과는 평양에서 근무하는 부대원으로 전원 지방 인원으로 구성됐는데 강 씨가 있었던 16과는 지방에서 근무하는 대원을 훈련시키는 곳으로 절반 정도가 평양 출신자들이었다. 평양에서 뽑힌 대원은 평양에서 복무시키지 않는 것이 974부대의 원칙이었다. 지방 출신인 강 씨가 왜 16과에 갔는지는 본인도 알지 못했다.김정일 친위대로 알려진 974부대 소속은 인구 통계에서 빠질 정도로 철저히 베일에 감춰져 있는데, 13년을 근무한 강 씨는 대략 인원을 알고 있었다. 장교를 포함해 모두 2만5000명 규모로 전국에서 매년 신병을 2000명 정도 뽑았다.두 달 신병교육이 끝나고 김정일 경호책임자였던 김경옥 소장 앞에서 입대 선서를 했다. 김경옥은 김정일이 사망하기 전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을 역임하는 등 실세로 올라섰다가 김정은 등장 이후 언론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2018년 생사는 확인됐지만 밀려난 것으로 보인다.입대 선서 이후 각 훈련병의 이름과 배속 부대가 정해졌다.“강진. 427초소”그는 427초소가 어딘지 몰랐다. 974부대는 소속 부대 대호를 초소로 부른다. 427초소는 4월 27일에 창설된 부대라는 뜻이다.부대가 정해지고 차량이 들어왔다. 트럭에는 병원차로 위장하기 위해 적십자가 크게 붙어있었다. 옆 친구는 426초소로 간다고 했는데 특별열차를 타고 간다고 했다. 강진은 그가 부러웠다.강 씨가 2016년 한국에 입국하자 조사요원이 “김정일 경호부대인 974부대 출신으로는 당신이 세 번째”라고 말해주었다. 2005년경에 한 명, 2010년경에 한 명이 왔다는 것이다. 강 씨는 한국에 자기가 김정일 경호부대 출신이라고 거짓 증언을 하는 탈북민도 있지만 “몇 초소에 근무했냐”만 물어봐도 바로 거짓인지 진실인지 구분할 수 있다고 했다.“사회는 완벽하게 잊어라”그가 탄 트럭은 몇 시간을 달려 차단 초소 3개를 통과한 뒤 멈춰 섰다. 그때는 어딘지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원산 특각이었다.들어가자 마자 신병을 모아놓고 교육이 시작됐다.첫 번째 원칙은 “여기가 어딘지 알지도 묻지도 말라. 사회의 일은 절대 얘기하지 말라”였다. 사회에서 살던 이야기를 하면 자본주의 사상이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실제 13년 군복무 기간 강 씨는 다른 대원과 입대 전의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었고, 다른 대원들도 그 원칙을 잘 지켰다고 했다. 6개월은 보초 대원 옆에 보조로 서서 근무서는 훈련을 받는 ‘봉초근무’를 했다. 원산 특각을 경호하는 974부대는 8개 중대에 2500명 정도 됐다. 일과는 간단했다. 매일 5교대로 2시간씩 보초를 섰다. 보초는 김정일이 특각에 있을 때인 ‘행사근무’ 시엔 25m, 없을 때는 50m 간격으로 섰다. 원산에선 거의 매일 행사근무 시스템이었다. 강 씨는 김정일이 평양에 있는 날보다 원산에 있는 날이 훨씬 더 많았다고 회상했다.근무에 나가면 무조건 똑바로 서있어야 했는데, 벌이 쏘아도 절대 움직이면 안 된다고 교육을 받았다. 서로가 감시를 하는 시스템이라 움직이면 생활총화시간에 비판을 받고 처벌도 했다.보초 이외엔 정신교육 2시간, 사격훈련 2시간, 격술훈련 1시간이 매일 반복되는 일과였다. 일요일에는 보초만 서면 됐다.강 씨는 이중 사격훈련이 제일 힘들었다고 했다. 이틀에 한 번 서서 1발, 꿇어앉아 1발, 엎으려 1발씩 실탄사격을 했는데, 100m에서 25점 이상 맞춰야 ‘우’를 받고 합격이었다. 꿇어앉아 사격이 제일 명중하기 어려웠다. 25점을 받지 못하면 20㎏ 모래배낭을 메고 4㎞를 뛰어갔다 와서 다시 사격한다. 25점 이상 받을 때까지 이 코스가 무한 반복인데, 근무시간이 되면 2시간 보초를 서고 다시 와서 잠도 안 재우고 또 사격을 반복시킨다. 그리고 대원들 앞에서 “나는 왜 사격을 잘 하지 못했나”를 주제로 자아비판을 한다. 이런 훈련을 13년 동안 거르지 않고 진행했다. 하사로 진급하면 기관총 사격 훈련도 받는다.먹을 것은 잘 주었다. 북한은 지위에 따라 공급이 달라진다. 974부대원은 ‘중앙당 6호 노르마’를 공급받았다. 1일 쌀 900g, 간식 100g, 돼지고기 115g, 생선 300g, 계란 3알, 기름, 설탕, 간장 30g이 6호 노르마 대상이었다. 이 때문에 아침이면 밥 위에 설탕을 듬뿍 뿌려주었고, 점심엔 무조건 돼지고기 국이나 요리였는데 주로 중국산 돼지였다. 저녁에는 생선이 나왔다. 근무를 서고 오면 이름이 붙은 당과류가 놓여있었는데, 근무 중엔 절대 먹지 못하게 했다.김정일 최측근 경호원974부대는 오직 김정일만 알도록 교육했다. 김일성의 지시보다 김정일의 지시가 우선이었다. 1992년 974부대가 창설 10주년을 맞아 충성맹세를 올려 보냈는데 김정일이 답장을 써서 하달했다. 강 씨는 지금도 그 내용을 토씨 하나 빼지 않고 외우고 있다.“최고사령관의 호위 전사로 싸우다가 최고사령관의 품속에서 순직하는 충신이 되겠다고 하는데, 좋습니다. 나에게는 그와 같은 충신이 필요합니다.” 김정일은 974부대원을 ‘나의 아이들’이라고 불렀다.974부대에서 5년 이상 복무한 군인 중 우수한 사람은 김정일을 최측근에서 경호하는 호위소대로 차출된다. 2018년 4월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정은의 차량을 호위하며 달렸던 키가 큰 경호원들이 호위소대 대원들이었다.40명이 정원인 호위소대는 두 개 있는데, 20~30대로 구성된 소대와 30~50세로 구성된 소대가 있었다. 5년 동안 974부대에 근무한 대원 중 키 180㎝ 이상, 사격과 근무평점이 우수한 사람이 뽑혔다. 호위소대에 들어가면 곧바로 군관이 되며, 매년 승진해 대위까지 올라간다. 30대 이상은 소좌부터 시작해 대좌까지 받는다. 호위소대원은 노동당 조직부 부원 증명서를 갖고 다녀 사복을 입고 있어도 검열을 무사통과한다.974부대원의 목표는 이 호위소대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키가 작은 강 씨는 어차피 뽑히지 않을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런 꿈은 꾸지 않았다.김정일과 젊은 여성 원산에서 근무할 때 강 씨는 키가 작아 계속 불이익을 당했다. 대표적으로 근무 위치를 정할 때 김 씨 일가가 자주 다니는 길목에는 늘 키가 큰 대원을 보냈고, 강 씨는 잘 안 보이는 곳에 보냈다. 그럼에도 강 씨는 김정일을 수십m 앞에서 볼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그때마다 젊은 여성이 김정일의 팔을 잡고 다녔다.원산 특각은 규모가 매우 큰 편이었는데, 5세부터 17세로 보이는 아이들이 늘 30명 정도 있었다. 아이들은 여름에는 물오토바이(수상스키)를 타고 놀았고, 토요타 또는 스즈끼 로고가 붙은 전기차를 타고 경주도 했다.강 씨가 근무 설 때도 아이들은 그 앞에서 “야, 빨리 타” “따라와”라고 소리치며 차를 몰고 다녔다. 나중에 김정은의 위대성 교육 교재엔 그가 7세에 차를 몰고, 외국의 전문가와 수상스키 경쟁을 해서 이겼다는 구절도 나왔는데, 강 씨는 그때 자기 앞에서 놀던 애들 중에 김정남, 김정철, 김정은이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당시엔 그들이 누군지 알지도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바다 앞에서 근무했지만, 정작 바다에 들어가 수영을 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 바다는 김정일 것이기 때문이다.야한 공연에 받은 충격 1992년 4월 974부대 창설 10주년이 되자 김정일은 “나의 아이들에게 선물을 해주겠다”며 당시에 최고 인기였던 보천보전자악단과 왕재산경음악단 공연을 보게 했다. 이는 강 씨가 친위대에 있으면서 받았던 가장 큰 충격이었다.근무를 서야 했기 때문에 대원들은 5개조로 나누어 공연을 보게 됐다. 원산 특각의 ‘센터’라고 불리는 건물에 대원들이 400여명 정도씩 들어갔다. 이 센터는 김정일이 연회 때 사용하는 것인데, 2조에 뽑힌 강 씨는 그날 처음 그 건물에 들어가 봤다.공연이 시작되자 가슴골을 훤히 드러내고, 팬티 차림의 여성들이 춤을 추었는데, 북한에서 그렇게 야한 공연을 처음 봤다. 한국에도 김정일 기쁨조 공연이라는 제목으로 구글에 영상이 올라와 있는데, 이는 실제로 북한에서 김정일의 지시가 있을 때마다 특정인들을 대상으로 비공개로 하는 공연이다.먼저 들어가 본 대원들이 그 충격을 아직 못 본 대원들에게 이야기했고, 다른 대원들도 내 차례가 빨리 오길 기다렸다.그런데 2조까지 진행되고 공연이 중단됐다. 좀 있더니 “군인들이 위생규칙을 잘 지켜야 하겠습니다”라는 김정일의 지시가 전달됐다.알고 보니 수백 명의 군인들이 김정일의 연회 공간에 들어갔더니 발 냄새가 배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들어갈 때 몸을 씻고, 발도 씻고, 덧신까지 신고 들어갔는데도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졸지에 공연을 보지 못하게 된 3~5조는 두고두고 아쉬워했다.사살하면 인생 역전974부대는 근무지에 접근하는 사람은 무조건 사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한 번은 원산 특각 수리를 위해 왔던, 북한에선 소속없는 부대로 알려진 1여단 군인이 총에 맞아 죽었다. 특각 안에선 절대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했는데, 담배를 너무 피우고 싶었던 군인이 몰래 담을 넘어가 피우고 다시 넘어 오다가 사살된 것이다.974부대원은 사살할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쏴죽이면 어떤 처벌도 없는 대신, 전사영예훈장 1급을 주고, 화선입당을 시키며, 군관학교까지 보내준다.강 씨가 복무하는 기간 5명 정도의 1여단 군인이 이렇게 사살됐다. 그래서 974부대와 1여단은 사이가 좋지 않다. 1여단은 “우리가 특각 수리 들어간 것을 다 알면서 어떻게 총을 쏠 수가 있냐”고 분노하지만, 974부대는 “장군님의 경호에는 사소한 틈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로 응수했다.실제 974부대에 입대한 순간부터 대원들에게 “죽은 자만이 비밀을 지킨다”고 한 김정일의 ‘말씀’을 금과옥조로 받아들이게 한다.하지만 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원산 특각 강 건너편이 송도원국제야영소인데, 간혹 이곳에 놀려온 외국 학생들이 술을 먹고 절대 가면 안 된다고 교육을 받은 특각 쪽 다리로 오는 것이다. 이때마다 3개의 차단선 중 맨 바깥인 3선 초소에서 잡히긴 하지만, 외국 아이들이라 총을 쏘진 못하고 억류했다 풀어준다. 김정일의 별장들974부대는 한번 부대가 정해지면 제대될 때까지 다른 곳에 갈 수 없다. 옮겨 다니면 비밀이 새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 씨는 13년 동안 4개의 특각을 옮겨 다녔다. 1990년 이후 김정일은 아버지의 특각을 하나하나 자기 것으로 가져오기 시작했고, 특히 김일성이 사망한 1994년부터는 모든 특각을 차지했다. 그러다보니 경비 병력이 모자랐다. 원래 김일성 특각을 근무하는 경호부대는 따로 있었지만, 김정일은 그들을 믿지 않았다.애초 1982년 김정일만을 위한 부대인 974부대가 창설된 이후부터 전국 초모생 중 가장 뛰어난 후보는 먼저 974부대에서 받았다. 그리고 그 나머지 중에서 김일성 호위부대를 뽑았다. 974부대는 70%가 당원이다. 일반 부대는 10년 복무해도 노동당에 입당할지 말지 장담하기 어렵다. 하지만 974부대는 입대 3년 뒤부터 노동당원이 된다.김일성이 사망한 뒤 그의 경호부대 대원 중 가장 우수한 대원들이 974부대로 이동돼 왔다. 이들은 자신들은 10년 복무해야 가능한 노동당 입당이 974부대는 3년 뒤에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974부대원들은 옮겨온 전직 김일성 경호부대원들을 혼혈인이라는 의미의 ‘아이노크’라고 불렀다. 아이노크들은 훈련 상태도 한심해서 974부대의 규율을 따라가기 어려워했다.강 씨는 1992년 평남 송암 특각으로 옮겨갔다. 이곳은 김정일의 낚시터였는데, 1년에 3~4번 와서 2~3시간만 낚시를 하고 갔기 때문에 경비 병력은 70여명 정도였다. 낚시터엔 쏘가리, 백년어, 기념어, 가물치, 잉어, 붕어 못이 따로 있었다. 김정일은 쏘가리 낚시를 제일 좋아했다. 고기를 인공적으로 키우기 때문에 먹이만 주면 물 반, 고기반이 됐다.이곳에서 6개월 정도 근무했는데 갑자기 압록강 옆의 평북 창성 특각이 규모가 커지면서 그곳으로 옮겨가 9년을 근무했다. 이후 제대 전 2년은 황해북도 사리원 인근의 정방 특각에서 근무했다. 정방 특각은 가로세로가 5m인 화강암으로 10m 높게 쌓고 그 위에 성을 만들었다. 직접 보면 규모에 입이 벌어질 지경이라고 한다.정방 특각에는 김정일이 1년에 3~4번 왔는데, 올 때마다 중앙당 부부장 이상급 간부들과 함께 왔다. 또 고위 간부 중에 부부가 함께 와서 거기서 눌러앉아 사는 경우도 있었다.강 씨는 장성택 숙청이 발표된 뒤 정방 특각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런 곳에 장성택이나 김경희를 살게 하면 외부에선 절대 알 수도 없고, 허락 없이 나갈 수도 없다는 것이다.창성 특각에서 본 김정일창성 특각은 원산보다 더 많은 3000명의 병력이 호위를 섰다. 이곳에서 9년을 근무하면서 김정일과 김옥을 수없이 봤다. 그는 김정일의 팔짱을 끼고 늘 다니는 김옥이 정식 부인인 줄 알았다.창성 특각도 중간에 센터 건물이 있고, 그 외 본각이 따로 있다. 김정일이 센터에서 연회를 하는 동안 김정일의 가족은 그런 행사에 관여하지 못하게 본각에서 머물게 했다. 창성 특각은 건물이 10호동까지 있었다.정세가 긴장되면 김정일은 가족을 데리고 무조건 창성에 왔다. 유사시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도주하기 용이하기 때문이다.김정일이 들어오면 간부들의 고급 승용차들도 따라 들어오는데, 보통 새벽 2시까지 연회가 진행된다. 술을 마시다 김정일이 바람 쐬려 나오면 수십 명의 간부들이 따라 나온다. 창성은 산 속에 있어 밤이면 소리가 확성기 소리처럼 크게 들린다. 김정일이 담배를 피우며 “야, 아무개 노래 잘 하더라” “아무개 춤 잘 추더라”고 하는 말소리가 보초병들에게도 잘 들렸다.새벽에 연회가 끝나도 김정일은 8~9시 사이에 일어나 마당에 나왔다. 그리고 확성기를 들고 사방에 대고 “야, 너네 아직도 자나. 빨리 나와서 운동하라”고 소리쳤다. 정작 김정일은 산책밖에 하지 않았다.창성은 추운 지역이고 눈도 많이 온다. 눈이 오면 부대원은 무조건 나와 살얼음이지지 않게 끝이 없이 눈을 친다. 그런데 눈이 내리면 젊은 여성들이 특각 건물에서 우르르 나와 눈싸움을 하곤 했다. TV에서 보던 보천보, 왕재산 악단 가수도 있고, 모르는 여인들도 있었는데 모두 미모가 뛰어났다. 김정일 특각마다 5과로 뽑힌 여성 관리원들도 많이 있었는데, 이들 역시 미모가 출중한 젊은 여성들이었다. 여성 관리원은 5년만 근무하면 대위 계급을 주었는데, 이들 중 김정일의 눈에 들면 관리원을 그만두고 기쁨조로 옮겨간다.가끔 김정일도 여인들과 함께 마당에 같이 나와 눈싸움도 하며 놀기도 했는데, 이럴 때는 군인들을 철수시켰다. 그래도 “장군님, 장군님”하며 아양을 떠는 여인들의 목소리는 보초 서는 곳까지 잘 들렸다. 그런 것을 보면서도 강 씨는 별 생각이 없었다. 그때는 장군님께 기쁨을 드리는 행사성원들이라 생각했지, 그들이 노리개였다는 생각은 전혀 못했다고 한다.창성 특각에는 김정남도 자주 와서 말을 탔는데, 멀리에서 봐도 김정일을 닮아 그가 아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머지 아이들은 누가 누군지 몰랐다.창성 특각에서 1년 넘게 머무는 외국인들도 있었다. 백인도 있고 흑인도 있었는데 강 씨는 이들이 누군지 알지 못했다. 이들에겐 미모의 젊은 북한 부인이 있었는데, 이런 여성은 중앙당 5과에서 선발해 그들에게 붙여준 경우다.13년 만의 제대강 씨가 974부대에 입대할 때만해도 복무 기간이 10년이었다. 그러다가 1994년에 13년으로 늘었다. 1994년 김일성이 죽자 갑자기 경비 병력이 더 많이 필요했는데, 엄격하게 골라 뽑는 974부대원을 크게 늘이기 쉽지 않자 근무기간을 더 늘였던 것이다. 3년 뒤 일반 군부대도 군복무가 3년 늘어나 13년이 됐다.강 씨는 제대 직전에 사관장이 됐다. 중대에 한 명 있는 사관장은 일반 병사 중 가장 계급이 높아 병사들이 누구나 되고 싶어 하는 자리였다.974부대는 제대할 때 100% 원하는 대학에 보내준다. 3지망까지 적게 하는데, 사관장은 무조건 우선 순위였다. 그는 가겠다고 하면 김일성대에 당연히 입학을 할 수 있었다.하지만 제대 전에 받는 사회적응 교육 시간에 생각을 바꾸었다. 974부대는 제대 직전의 군인들을 모아놓고 2달 동안 사회적응 교육이라는 것을 시켰다. 이때 강사가 나와 “사회가 지금 정말 어려우니 집이 있는 곳 대학에 가는 것이 제일 좋다”고 선전했다. 평양 대학에 가면 기숙사 생활을 또 해야 하는 것도 싫었다. 집을 떠나 13년 동안 지냈는데 고향에 가고 싶은 마음이 커서 그는 양강도에서 제일 좋은 대학인 김정숙사범대학에 가겠다고 했다.2003년 강 씨는 제대증을 받고 고향으로 가는 특별기차에 올랐다. 974부대에 입대하는 순간부터 사회와는 격리되기 때문에 부모님이 살아 계신지가 가장 큰 걱정이었다.부대에선 고향에 가서 양복을 해 입으라며 양복지 한 벌 어치와 부모님께 부어드릴 술 2병, 사탕과자 1㎏를 주었고, 13년 어치의 월급도 주었다.강 씨는 13년 만에 처음 돈을 보았다. 무려 2만3000원이나 됐다. 입대할 때 부친의 월급이 90원도 안됐던 것을 떠올리며 이거면 아버지의 20년 치 월급이니 엄청 큰 돈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일반 군부대 병사들의 월급은 5원에 불과했다. 함께 제대돼 양강도로 가는 974입대 동기들은 20명 정도였다. 올 때는 31명이 왔는데 군관으로 빠진 사람 등을 빼니 그 정도가 남았다.가는 도중 다른 제대군인들은 부모님께 주라는 술을 까서 마셨다. 강 씨도 13년 동안 처음 술을 마셔봤다. 역하고 못 먹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 병은 남겼다.집에 와서 받은 충격혜산역에 도착했을 때는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 시간에 버스가 마중 나와 있었다. 974부대에만 해당되는 환대였다. 버스는 이들을 태우고 도당 건물로 들어갔다. 강당에 들어가니 수백 명이 이들을 기다리며 환영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각 지역 노동당 조직비서 등 간부들도 다 참가했다. 고위 간부가 나와 연설했다.“장군님의 호위 전사로 살아온 여러분들께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평생을 그런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이러저런 연설을 끝내고 나니 새벽 2시가 넘었다. 이후 각 제대군인들에게 비로소 집 주소를 알려주었다. 13년 복무하는 동안 이사한 집도 많았지만, 강 씨의 집 주소는 입대할 때 그대로였다.도당에선 버스로 제대군인들을 집 앞까지 태워다주었다. 그러나 강 씨의 집은 걸어서 40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그는 버스를 만류했다. 그동안 보지 못한 고향을 걷고 싶었다.고향 거리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전기가 없어 깜깜한 것도 그대로인데, 오히려 더 더러워졌다. 그런데 머리 들어 압록강 건너편을 보니 너무 밝아 깜짝 놀랐다. 그곳은 그가 입대할 때와 비교할 수 없이 천지개벽을 했다.드디어 집 문 앞에 도착했다. 대문이 달라진 것이 눈에 띄었다. 문을 두드렸다. 한참을 두드리니 안에서 촛불 같은 것이 켜지고 “누구시오”라는 말소리가 울렸다. 아버지였다. “아직 살아 계시구나”라는 생각에 너무 기뻤다.“아버지 막내 강진이 왔습니다.”“뭐라고…” 어머니 소리도 들렸다. 부모님이 급히 나오는데, 안에서 열쇠를 3개나 열며 나왔다. 도둑이 많아 당시 혜산 집들은 3중으로 자물쇠를 채웠다.눈앞에 나타난 아버지는 백발이 돼 있었다. 눈물이 왈칵 났다. 집 안에 들어간 그는 갖고 온 술을 붓고 절을 드렸다.한참 회포를 푸는데, 어느 순간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네가 왔다고 쌀 구하러 갔나 보다.”“아니, 있는 걸 갖고 먹으면 되죠.”강 씨는 부엌에 나갔다. 밥사발 두 개가 보였다. 뚜껑을 열어보니 풀죽이 있었다. 처음에 그는 그게 뭔지 몰랐다.“아버지, 이게 먹는 거 맞아요?” 대답이 없었다. 그는 억장이 무너졌다. “아니, 지금까지 이런 것을 먹고 있었단 말인가요?”아버지는 “나라가 힘들다. 네가 이제 사회생활을 하면 알게 된다”고 중얼거렸다.쌀 가지러 나간 어머니는 한 시간 넘게 들어오지 않았다. 새벽에 어디 가서 쌀을 구한다는 말이냐 싶어 강 씨는 어머니를 마중 나가겠다고 문 밖에 나섰다. 그런데 복도에서 빈 보자기를 든 어머니가 홀로 울고 있었다.“엄마, 이렇게 살았어요?” 모자는 또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엄마, 제가 돈 많이 갖고 왔어요. 이걸로 쌀과 고기를 사고, 내일부터 선생님들과 친구들도 불러 회포를 나눕시다.”“남조선 쌀을 먹고 살다니.” 어스름이 걷힌 아침 5시 반에 강 씨는 월급 배낭을 메고 엄마와 함께 시장에 나갔다. 그때 벌써 사람들이 하나 둘 나와 장사할 쌀 포대를 펴고 있었다.쌀 가격을 보니 1㎏에 520원부터 시작됐다. 강 씨는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대한민국이란 글씨가 적혀 있는 눈에 익은 노란 쌀 마대가 보였다. 그가 근무할 때 늘 먹던 쌀 마대였는데, 가격이 580원으로 제일 비쌌다.“엄마, 이 쌀은 내가 부대에서 늘 먹던 건데 왜 이리 비싸요?”“그게 남조선 쌀인데, 제일 좋은 쌀이란다. 너는 장군님 배려로 정말 좋은 쌀을 먹고 살았구나.”강 씨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부대에서 늘 그 쌀을 먹으면서도 대한민국이 대만인줄 알았지 남조선인줄 전혀 몰랐다.“우리가 조국통일을 하자고 하면서 남조선 쌀을 먹고 있었단 말인가.”부대 생활할 때 성조기가 붙은 미국 쌀도 한 달 먹은 적이 있었다. 성조기는 북한 사람들이 다 안다. 그래서 군인들에게 주는 영향이 좋지 않다고 그 이후 대한민국 쌀을 먹었던 것이다.시장에서 돼지고기 약간과 술, 부식물을 사고 남은 돈으로 쌀을 23㎏ 살 수 있었다. 그가 13년 동안 모은 돈이 장마당에서 1시간도 안 돼 사라졌다. 고향에 와서 몇 시간도 되지 않아 그는 여러 차례 충격과 허무감을 느꼈다.쌀은 1주일도 되지 않아 다 떨어졌다. 집의 한 방에 물건이 가득 쌓여있었다. 부모님이 장사하는 물건이었다. 쌀이 떨어지자 어머니가 장사하려 나가야 한다고 했다.“아니, 아버지 어머니, 당원이 당 규율을 어기며 장사하면 됩니까. 지금 당에서 제일 하지 말라는 게 장사인데, 그렇게 살면 어떻게 합니까.”부모님은 한숨만 쉬더니 주저앉았다. 그렇게 부모가 장사를 하러 갈 때마다 말려 1주일 동안 못나가게 했더니 친척들이 찾아왔다.“이봐, 진이야. 네가 지금 피우는 담배가 1갑에 500원이야. 그거면 쌀 1㎏을 살 수 있어. 네가 매일 담배를 피우면서 부모님이 돈 못 벌게 하니 아버지 엄마는 지금 너무 힘들어 해.”“그럼 제가 담배를 끊겠어요.”실제로 그는 그때 담배를 끊어 대학 졸업할 때까지 5년 동안 피우지 않았다. 담배 때문에 장마당에 나가는 것은 당을 배신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세상과 단절돼 13년 동안 974부대에서 세뇌된 영향은 너무 컸다.나중에 그는 어머니와 함께 장마당에 나가 돌아보고 충격을 받았다.“이게 무슨 세상이지. 인민이 이렇게 어려운데 당은 그동안 뭘 한거지?”아내의 죽음강 씨는 김정숙사범대학 혁명역사 학부에 입학했다. 제대돼서 오니 나이가 30세라 부모님들은 괜찮은 며느리를 찾느라 서둘렀다.어느 날 학교 담임선생이 찾아와 어떤 여자를 원하냐고 물었다.“제대군인 출신 당원이면 무조건 합격입니다. 다른 조건은 필요 없어요.”그의 포부는 노동당이나 보위부 간부였다. 부인도 군인 출신 당원이면 훨씬 잘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담임선생이 얼마 있지 않아 제대군인 출신 당원이라는 한 여성을 소개시켜주었다. 얼굴도 마음도 착해 보여 선을 본 날 살겠다고 말했다.6개월쯤 지난 2004년 그는 결혼했고 아들도 태어났다. 그런데 출산하고 3~4개월 뒤 아내가 쓰러졌다. 열이 나고 기침이 계속 터져 처음엔 기관지염인줄 알았는데, 병원에 데려 가보니 개방성 결핵이라는 진단을 받았다.알고 보니 아내는 군 복무 5년 만에 영양부족으로 결핵에 걸렸었다. 집에 와서 8개월 치료를 받고 입당을 하겠다고 다시 부대에 복귀했는데, 나은 줄 알았던 결핵이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재발한 것이다.그때부터 강 씨는 대학을 다니면서 아내와 아이를 먹여 살려야 했다. 장사는 당에서 하지 말라는 부정한 행위라고 생각했던 그는 이제 사라졌다.강 씨는 대학 내내 오전엔 학교에 가고 오후엔 나무 장사를 했다. 농촌에 가서 나무를 날라 와 혜산 장마당에서 판 것이다. 그렇게 노력해도 형편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매일 아내에게 들어가는 약값과 링겔 주사를 놓는 비용이 쌀 2㎏ 비용이었다. 그는 직접 아내 팔에 주사바늘을 찔렀다. 그렇게 4년 넘게 매일 하다보니 눈을 감고도 핏줄을 찾아 바늘을 넣을 수 있게 됐다.어느 날 큰맘을 먹고 나무 판 돈을 모아 염소 한 마리를 잡아 염소 엿을 만들었다. 어린 아들이 퍼먹으려 할 때마다 “엄마 먹는 거니 먹지 말라”고 소리 질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자기가 대학에 나간 뒤 아내는 아들에게 그 엿을 계속 먹였다.그는 지금도 엿을 먹겠다는 아들을 욕한 것이 마음에 넘어가지 않는다.그는 점점 초췌하게 변해갔다. 살이 빠지고 뼈만 남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아내를 살리지 못하는 자신의 능력에 환멸이 느껴졌다.2008년 그가 대학 졸업반 때 아내는 끝내 눈을 감았다. 그 역시 세상에 더는 미련이 없어졌다. 아들은 혼자 키울 수 없어 부모님 집에 보냈다.“남조선은 얼마나 잘 사나.”2009년 그는 마침내 대학을 졸업했다. 974부대 제대군인, 당원에 대학까지 졸업한 그는 북한에서 간부가 될 수 있는 완벽한 조건을 갖추었다. 그래서 졸업 후 보위부에 가서 권력을 쥐면 먹고 살기 좀 쉬워질 줄 알았다. 974부대원 출신은 보위부 입대 1순위이니 걱정도 없었다. 그런데 입대가 거부됐다. 알고 보니 자신이 군 복무하던 도중 5촌 고모가 탈북했다는 것이다. 친인척 중에 탈북자가 있으면 보위부에 들어갈 수 없었다.그는 중학교 혁명역사 교원으로 임명됐다. 아내도 죽고, 원하는 곳에도 가지 못했으니 이제 인생에 더 미련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그는 돈을 벌기로 마음먹었다.“내가 가정도 지키지 못했는데 무슨 충성을 한단 말인가.”혁명역사 교원으로 있는 것도 괴로웠다. 김정일의 사생활을 13년 동안 지켜봤는데, 학생들에겐 인민을 위해 쪽잠에 주먹밥을 먹으며 매일 현지지도하면서 산다는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양심이 허락지 않았다.그는 ‘충성의 외화벌이’를 한다면서 산간오지로 자원해 가기도 했다. 매달 금 1.15g만 바치면 됐는데 오지로 가니 또 장사를 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2년 정도 교원을 하다가 혜산의 일반 국영기업으로 옮겨갔다. 그래도 974부대 출신이라고 세포비서로 임명됐다. 비서가 되니 자유롭게 장사할 수가 없었다.이번엔 돌격대로 자원해 나갔다. 양강도 백암군에 집단배치를 한 제대군인들을 위해 집 500채를 짓는 돌격대에 나갔다. 돌격대에서 자재참모라는 직책을 맡았다. 이때부터 장사를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자재를 구한다며 전국을 다니면서 나르는 자재 중에 동을 수백 ㎏씩 숨겨 혜산에 갖고 왔다. 이걸 중국에 넘기면서 자연스럽게 밀수를 시작했다. 중국에 아는 사람이 생기니 한국에 간 5촌 고모와도 연결됐다.“고모 때문에 제 인생을 망쳤어요. 어떻게 책임질 거예요?”고모가 미안하다며 한국돈 200만 원을 보내주었는데, 당시 중국돈으로 1만 위안 정도 됐다. 그거면 1년을 먹고 살 수 있었는데 그때까지 그렇게 큰 돈을 만진 적이 없었다. 강 씨는 또 한번 놀랐다. “도대체 남조선은 얼마나 잘 산단 말인가.”“위험한 역적을 체포하라!”장사밑천까지 생기니 밀수판은 점점 커졌다. 돈도 많이 벌었다. 그가 중국을 드나드는 것을 알고 주변에서 중국에 보내달라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그렇게 6명을 보내주었는데, 그들은 모두 한국에 와서 잘 살고 있다.어느 날 한국에서 부탁이 왔다. 황해북도 사리원에 살다가 탈북해 한국에 간 엄마가 20년 전 3살 때 헤어진 아들을 찾는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10번 넘게 찾으려 시도했는데 다 실패했다면서 찾으면 5만 위안을 주겠다고 했다. 엄청난 거액이었다.그는 사리원에 사람을 보냈는데 마침 23살 된 아들을 운 좋게 찾아냈다. 그 아들은 꽃제비로 역전을 떠돌고 있었다. 그를 데리고 혜산에 데려와 엄마와 통화를 시켜주었다. 아들인지 확인하려고 아버지, 엄마, 할아버지 이름까지 물어보던 엄마는 펑펑 울면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부탁대로 아들을 중국에 넘겨 보내주니 5만 위안을 보내주었다.엄마는 연길로 날아와 아들과 함께 보름을 지낸 뒤 한국으로 오는 브로커에게 아들을 맡겼다. 그런데 그 아들이 버스를 타고 가다 일행 중 유일하게 체포됐다. 어느 역전에 도착해 담배를 피우는데, 그곳이 하필 금연구역이었다. 단속원이 와서 말을 걸었는데, 중국어를 할 줄 모르자 체포한 것이다. 아들은 한 달 뒤 신의주 감옥으로 북송됐다. 그는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자기를 넘겨준 강 씨의 이름을 불었다. 그때가 2016년 2월이었다.그때까지만 해도 강 씨는 아들이 체포된 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국의 엄마가 중국을 통해 연락을 했다. 아들이 잡혔다는 것이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무조건 숨어야했다. 먼 지인의 집에 은신하고 있는데, 얼마 안 돼 신의주에서 보위원들이 직접 와서 친인척의 집을 수색하기 시작했다.수색망은 점점 좁혀왔다. 어느 오후 그가 은신한 집에 보위원 4명이 찾아왔다. 집 밖을 나서 도망가는 순간 보위원의 눈에 띄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뛰었다. 13년 동안 모래배낭을 메고 뛴 그를 쉽게 따라오진 못했다. 하지만 상대는 4명. 20리 넘게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마침내 인파가 번잡한 혜산 장마당 여성 화장실에 들어가 추적을 피했다. 그를 놓친 뒤 보위부는 그가 중국으로 도주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974부대 출신인 그가 탈북하면 김정일 관련 비밀이 새어나갈 수밖에 없다. 이는 북한에선 제일 용납할 수 없는 역적 행위이다. 이 때문에 보위부에선 시내 곳곳에 그의 사진이 붙은 포고문을 붙이고 인민반마다 그를 찾으면 신고하라고 지시도 하달했다. 북에선 더 있을 곳이 없었다. 보름 동안 추운 산을 헤매며 추적을 피하다가 결국 중국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과거 밀수를 하면서 알던 경비대나 지인도 믿을 수 없었다. 그는 홀로 강을 넘겠다고 결심했다. 어느 저녁 압록강 인근 야산에 접근해 기회를 노리던 그는 마침내 10m 높이의 옹벽을 뛰어내렸다.영하 수십 도의 추운 날에 압록강 얼음 물결을 헤칠 때 그는 “내가 이렇게 말로만 들었던 민족 비운의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눈물 젖은 두만강’이란 노래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고 했다. 죽을지언정 절대로 고향을 떠나지 않겠다던 강 씨의 다짐은 한 순간에 무너져 압록강 얼음물과 함께 떠내려갔다. 압록강을 넘은 순간부터 그는 북한 당국에게 있어서 역적이 돼버리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절대로 당을 배신하지 말라”고 당부하던 부모님과 형제들의 부탁을 저버린 불효자가 된 셈이었다.한국의 첫 인상중국에 와서 5촌 고모를 찾으니 그가 한국행 브로커를 알려주었다. 그 선을 타고 탈북 두 달 뒤인 2016년 5월 한국에 입국했고, 10월 마침내 서울에 정착했다.임대주택에 들어간 첫날 그는 한참을 펑펑 울었다. 저녁이 되어서 밖으로 나왔다. 여기는 어떤 곳인지 궁금했다.제일 놀란 것은 운동하는 사람들이었다. 북에선 먹고 살기 힘들어 저녁엔 힘이 쭉 빠져 쓰러지는데, 여긴 강아지까지 데리고 나와 뛰어다니니 참 별세계인 것 같긴 했다.좀 더 걸음을 옮기는 이번엔 고기 굽는 냄새가 확 풍겼다. 가서 보니 야외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는데, 상추에 싸서 먹는 게 이상했다. “왜 고기를 풀에 싸서 먹지” 신기하기도 하고, 배도 고파 그도 식당에 가서 고기를 주문해 똑같이 먹어보았는데 더 맛있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렇게 밤 12시가 넘도록 거리를 다니다가 돌아가려니 그만 내 집이 어딘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보이는 건 다 똑같아 보이는 아파트였다.3시간을 돌아도 끝내 집을 찾지 못했다. 사회 정착의 첫 날을 밖에서 떨다가 아침에 정착 도우미에게 전화해 물어봤다. 알고 보니 집을 100m 정도 앞에 두고 온밤 헤맨 것이다.첫 해는 안보 강사를 하면서 먹고 살았다. 2018년 아는 탈북 동생과 함께 지인의 소개로 처음 취직을 했다.오물 소각을 하는 보일러의 재를 터는 일인데 3일 만에 쫓겨났다. 3일째 되는 날 일을 끝낸 그는 회사 부사장이 모는 포터 트럭을 타고 옷을 갈아입으러 가고 있었다. 운전석 옆 좌석에 앉은 동생이 무료해서 유튜브를 보기 시작했는데, 그가 본 영상이 박근혜 탄핵 반대 시위 영상이었다.갑자기 부사장이 차를 세우더니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왜 이따위 영상을 봐. 이따위 영상이나 보고 있으니 정착을 하겠어. 당장 내려. 그리고 내일부터 나오지 마.”“아니, 우리야 신기해서 좀 봤는데 보면 안 돼요?”부사장은 막무가내였다. 그럼 차를 타고 가서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가면 안 되겠냐고 했더니 그것도 안 된다면서 그냥 혼자 가버렸다.3일 동안 일한 임금도 주지 않았다. 그래도 동생은 고용노동부를 찾아다니며 이악하게 투쟁해 3일치 임금을 받아냈다.강 씨는 그때의 충격이 너무 컸다. 다시는 어디 고용돼 일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는 혼자 할 수 있는 마트 배달을 시작했다. 2020년부터는 쿠팡 배달기사로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숭의동지회장의 꿈2019년 7월 그에게 제안이 왔다. 숭의동지회 회장직을 맡아주면 안 되냐는 것이었다.숭의동지회는 1980년에 생긴, 탈북민 단체 중 역사가 가장 오랜 단체다. 회원도 8000명이나 된다.과거엔 정부의 보조금을 받아 사무실도 유지했고, 몇 명 임원 월급도 나왔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들어 숭의동지회 뿐만 아니라 모든 탈북단체들에 대한 지원이 끊겼다. 당장 사무실도 없는 상황이 되자, 회장을 하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역사가 오랜 단체를 없애버릴 수도 없으니 그에게까지 제안이 온 것이다.세상 물정을 잘 몰랐던 그는 승낙했다. 회장이 돼 보니 참 어려운 일들이 많았지만, 지금까지 회장직을 맡아 단체를 유지하고 있다.탈북단체장이면 정부 보조금을 받을 사업을 골라 일을 하면서 그것만 전업할 수도 있지만, 그는 숭의동지회 회장직을 유지하면서 매일 배달을 한다. 저녁 9시에 나가 아침 9시에 들어오고, 낮 시간에는 단체의 이러저러한 일들을 처리하면 너무 힘들다. 그는 13년 군복무한 정신력으로 버틴다며 웃었다.그가 6년 산 한국은 살기가 쉬운 세상은 아니었지만, 대신 노력하지 않으면 내 삶도 바꾸지 못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좀 더 일찍 와서 살았다면 편했을 것이란 후회도 있다.“지금 돌아보면 김정일 친위전사라는 허황된 이름으로 살았던 13년이 제 인생에서 가장 허무한 시간이었어요. 17살부터 30살까지 젊음을 도둑맞고, 노예로 살았던 것이죠. 내 아이들 세대엔 이런 비극이 없어야 되는데, 저는 그런 날들을 위해 노력할 뿐입니다.”만약 조금이라도 기력이 남았을 때 통일되면 그는 북에 가서 할 일이 있다고 한다.“북에 가서 김 씨 일가의 업적이란 것부터 뿌리 뽑고 싶습니다. 북한 인민을 세뇌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고, 또 그들이 80년 가까이 김 씨 일가에게 당했던 아픔을 치료하고 싶습니다.”각오가 담긴 그의 눈을 보니, 북한의 어떠한 세뇌도 진실의 힘 앞에선 봄날의 눈석임처럼 힘없이 사라질 허상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2-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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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남도당 해산, 간부 300여 명 숙청[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

    지난달 초 기상관측 사상 최다 시간당 및 일일 강우량을 기록한 강남은 물난리로 큰 피해를 입었다. 이때 북한이라고 무사했던 것은 아니다. 평양 역시 대동강물이 인도까지 넘쳐나 낮은 지대가 물에 잠겼다. 북한 중앙TV에선 300∼400mm 국지성 호우를 예고하며 홍수를 철저히 방지하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가난한 북한은 홍수를 피해갈 능력이 없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가장 큰 피해를 본 지역은 평양 인근의 탄광, 광산이었다. 북한 소식통에 의하면 평안남도 북창군 득장탄광과 회창군 회창광산 등이 침수돼 광산 노동자와 주민 등 500여 명이 사망·실종됐다고 한다. 이 지역은 7월 말 호우에도 수많은 갱도가 물에 잠긴 것으로 알려졌다. 득장탄광은 북창화력발전소에 석탄을 대는 핵심 탄광인데, 이곳이 침수되자 평양 전기 사정이 급격히 나빠졌다. 당장 탄광을 살려내라는 불호령이 떨어지면서 숱한 인력이 동원돼 복구 작업을 진행했는데, 그 와중에 기록적 호우까지 겹치면서 막대한 인명피해를 낸 것이다. 이 사실이 보고가 되면 간부들이 무사할 리가 없었다. 평안남도당 간부들은 처벌을 피하기 위해 피해 상황을 축소해 보고했다. 하지만 이게 김정은의 ‘조사장악선’에 의해 발각됐다. 아래 간부들의 보고를 신뢰할 수 없는 김정은은 ‘조사장악선’이라는 암행어사 역할을 하는 비밀 조직을 가동하고 있는데 북한의 대다수 간부들은 이런 것을 잘 모른다. 화가 불같이 난 김정은은 즉시 평안남도 시·군당일군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장에서 평안남도 최고 책임자인 도당 책임비서와 2인자인 조직비서, 선전비서 등이 체포돼 끌려갔다. 피해지역 책임간부들까지 포함해 회의가 끝났을 때 체포된 간부가 무려 300여 명이나 됐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김정은은 평안남도 당위원회를 해산시키고 중앙과 각 지방당 조직에서 간부를 선발해 새 도당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지시했다. 회의 도중 김정은의 각별한 신임을 받고 있는, 노동당의 2인자 조용원 조직비서가 통솔하는 조직지도부 역시 산하 당 기관에 대한 통제를 제대로 못했다는 이유로 호된 비판을 받았다. 조용원 조직비서는 김정은을 대신해 각종 회의를 주재하는 등 북한에서 김정은 패밀리를 제외하면 최고의 권력을 갖고 있지만, 결국 집사 신세일 뿐이다. 다행히 그는 해임되진 않았다. 이어 이달 4∼5일 이틀 동안 평양에선 국가재해방지사업총화회의가 열렸다. 김정은이 직접 참석했다. 북한 TV가 방영한 영상 속에서 김정은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앉아 있었다. 하지만 김정은이 아무리 격노하고, 인재가 발생할 때마다 숱한 간부들을 체포한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북한의 자연재해는 경제난이 만든 인재이기 때문이다. 수십 년 동안 북한의 강하천 관리는 사실상 방치됐다. 하천 관리 기업소들이 보유한 차량과 굴착기 등 장비는 장부에만 올라 있는 고물이 태반이다. 김정은이 매년 거창하게 벌여 놓는 평양 건설 등 각종 공사판에 동원할 장비와 연료, 인력이 부족한데, 강하천 관리에 투자할 간부가 있을 리 만무하다. 뙈기밭 때문에 벌거숭이가 된 산은 비만 조금 와도 무너져 내린다. 이 때문에 북한은 폭우 때마다 막대한 피해를 피할 수 없다. 2년 전 태풍 ‘마이삭’이 북한을 통과했을 때도 함남 검덕지구에선 수천 채의 집이 홍수로 사라졌다. 강원도 김화군에선 임남저수지가 붕괴될 위기에 처해 긴급 방류를 시작했는데, 수천 명의 김화읍 사람들이 이를 피하려 뒷산에 올라갔다가 무게를 견디지 못한 민둥산이 붕괴되는 바람에 1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수천 명이 사망하고 10만 명 이상의 이재민이 발생한 2016년 함북 북부 지역 홍수, 수천 채의 집이 파괴된 2015년 나선시 홍수 등 북한의 폭우 피해 사례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국가재해방지사업총화회의 직후인 8일 김정은은 동서해 연결 대운하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이명박 정부의 ‘한반도 대운하’ 구상처럼 강바닥을 파내 평양의 홍수까지 막겠다는 일석이조 구상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운하 건설이 오히려 더 큰 홍수를 부른 사례도 많다. 북한의 우물 안 수리학계 수준도 미덥지 않지만, 김정은의 의도에 반해 말할 수 있는 과학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운하를 건설할 힘이 남아 있는지는 더 큰 의문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2-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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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예종 입학 1호 탈북 기타리스트의 꿈[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아버지는 정전으로 깜깜해진 함흥역에서 클래식 기타의 선율에 혼을 빼앗겼다. 마침 북한군 협주단이 지방공연을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연착된 기차를 기다리다 무료해지자 한 여성단원이 기타를 꺼내든 것이다. 가느다란 기타줄 6개의 떨림이 악다구니로 가득 찼던 역사를 조용하게 만들었다. 군복을 입은 여성 기타리스트 주변에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기 시작했다. “우리 딸도 꼭 저런 멋진 기타리스트로 키워야지….”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8살 어린 둘째 딸을 불렀다. “너 이제부터 무용을 그만두고 기타를 배워.” 1994년 인민학교 1학년생이던 유은지는 그렇게 기타와 인연을 맺었다. 사실 그는 무용을 하고 싶었다. 3살 때 세 살 터울의 언니를 따라 유치원에 갔다가 선생님의 눈에 들어 무용을 시작했다. 그 유치원 선생님은 어린 유치원생에게 무용을 가르쳐 TV에 잘 내보내기로 유명했다. 언니 뒤를 따라 온 3살 꼬마에게 무슨 재능을 발견했는지 부모를 설득해 1년 먼저 유치원에 입학하게 했다. 은지는 3살부터 회초리를 맞으며 무용을 시작했다. 그렇게 몇 년을 훈련을 하니 수시로 함흥대극장에 가 공연을 하게 됐고 박수를 받았다. 함흥대극장은 평양대극장보다 무려 1.7배나 더 큰, 북한의 지방 극장 중 가장 큰 극장이었다. 은지는 아직도 5년 동안 무용을 배웠던 첫 선생님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내가 지금까지 만난 여성 중 가장 예뻤어요. 결혼도 안하고 제자들 키우는 데만 빠져 있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들으니 그 선생님도 탈북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중국에서 체포돼 북송됐는데 지금은 살아있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은지의 무용 경력은 아버지의 변심으로 중단됐다. 아버지라고 딸의 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겠지만, 무용보다는 음악으로 평생을 살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기타와의 첫 인연은지의 집은 함흥에서 도보로 2시간 정도 떨어진 군수공장 지역에 있었다. 출입문 위엔 ‘모범가정’이라고 쓴 액자가 붙어있었다. 선정 기준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을에서 모범이 되는 가정을 선정해 현관 위에 붙여준다. 은지의 아버지는 기술 관련 4년제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철학과 한문을 가르치는 선생이었다. 어머니는 결혼 전에 바이올린을 전공한 예술인이었다. 그래서인지 부모는 은지의 언니에겐 유치원 때부터 바이올린을 전공하게 했다. 은지가 인민학교에서 기타를 배우게 되면서 두 자매는 함께 사이좋게 학교 ‘음악소조’를 다녔다. “자라면서 부모님이 큰소리치는 것도, 욕을 하는 것도, 싸우는 것도 한 번도 본 일이 없어요. 그래서 우리 자매도 다툼 없이 자랐어요. 언니는 정말 착해서 늘 저에게 양보만 했어요. 언니랑 음악소조에 함께 다닐 때 정말 행복했어요.” 인민학교에서 기타를 시작했지만, 북한에선 주니어용 기타를 구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은지는 어른들이 치는 통기타로 연습을 시작했다. 처음엔 손가락이 너무 아파 계속 울었다. 못하겠다고 하면 부모님이 뭘 사준다고 계속 달래며 포기하지 못하게 했다. 힘들어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은지도 언니랑 함께 음악소조에 다니는 것이 너무 좋았고, 또 음악시간이 제일 재미있었다. 학교 음악선생이라고 기타를 전공한 것은 아니어서, 기타 실력이 뛰어나진 않았다. 4학년이 되니 선생은 음악소조 아이들의 기타 연주는 은지에게 가르치라고 했다.#언니의 희생은지의 인민학교(초등학교) 4년 과정은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 시절과 겹친다. 1995년~1998년 사이 북한에선 굶주림으로 많은 아사자가 생겨났다. 공업도시 함흥은 특히 사정이 어려웠다. 은지의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식량이 없어 나물을 뜯어와 죽을 쑤어먹을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굶지 않고 지낼 수 있었던 이유는 아버지가 대학 교무과장을 지냈기 때문이다. 교무과장은 이런저런 이유로 뇌물을 받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뇌물에 거부감을 가지던 아버지도 점점 상황이 나빠지자 스스럼없이 학생들이 주는 쌀이나 술을 받아 집에 갖고 왔다. 당시 북에서 최고의 대학이라고 자부하는 김일성대까지 포함해 교육자들이 모두 그렇게 살았다. 배급도 월급도 없는 상황에서 학생들이 가져다주는 것까지 받지 않으면 굶어죽거나 또는 학교를 나가 장사를 하는 길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뇌물로 식구가 풍족히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집에서 밀주를 만들어 팔고 돼지를 키웠다. 아무리 고난의 행군 시절이라고 해도 잘 사는 집은 잘 살았다. 그리고 있는 집 자식들이 음악소조에 들어왔다. 은지는 음악소조에서 가장 가난한 축에 속했다. 은지의 부모는 딸을 둘 다 뒷바라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모는 논의 끝에 첫째 딸에게 바이올린을 그만두게 했다. 아무래도 둘째가 좀 더 재능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6년 넘게 훈련했던 바이올린을 그만두라고 했을 때 ‘천사’ 언니는 아무 말 없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둘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해했고, 동생을 위해 언니인 자기가 양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 것이다. 부모는 둘째 딸이 기가 죽지 말라고 없는 살림에도 쌀을 구해 밥솥 구석에 따로 안쳤다. 밤늦게까지 훈련을 해야 하는 음악소조는 도시락을 싸가지고 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 저는 어렸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어요. 부모님을 실망시켜드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언니 대신 나는 무조건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집은 비록 가난하지만 실력은 최고로 쌓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훈련을 했다. 시끄럽지 않게 부엌에 나가 훈련했고, 시끄럽다는 동네 민원이 들어오면 외진 창고에 가서 훈련을 했다. 깊은 밤중에 외진 어두운 창고에 들어가는 것은 10살 안팎의 어린 여자애에겐 너무 무서운 일이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밤에 어두운 곳에서 계속 훈련을 하다보니 학교에 가서 훈련을 할 때 눈을 뜨고 기타를 잘 치지 못했어요. 습관이 되어 눈을 감고 쳐야 더 잘 됐어요.” 그렇게 갈고 닦은 실력 덕분에 은지는 가난했지만 음악소조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인민학교 시절을 보내고 11살 때인 1998년 은지는 고등중학교에 진학했다. 그런데 중학교에는 은지에게 더 이상 기타를 가르쳐줄만한 선생이 없었다.#일본에서 온 기타 선생님어느 날 집에 아버지의 동료 선생이 찾아왔다. 배울 데가 없어 기타 실력이 더 늘어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듣자 그가 “우리 동네에 기타를 귀신같이 잘 치는 일본 태생 젊은 귀국자 여성이 살고 있다”며 함께 가보자고 했다. 동네에선 그 여성이 기타를 치는 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명절에 딱 한 번 남편 동료들을 위해 기타를 들었는데 모두 넋을 잃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들으니 그 여성은 일본 명문대에서 기타를 전공했고, 영화배우처럼 잘 생긴 남편도 그 기타 연주에 반해 청혼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함흥에 온 뒤로 여성은 기타를 절대 잡지 않았다. 은지는 그 선생과 함께 함흥의 중심부 동흥산구역에 있는 귀국자 여성의 집으로 찾아갔다. 얼굴이 유난히 흰 젊은 여성이 나왔다. 그녀는 “이 애를 제자로 좀 받아주라”는 제안에 손사래를 쳤다. “내가 기타를 치는 것을 알리고 싶지도 않고, 제자를 키울 생각도 전혀 없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친구는 끈질겼다. 그래도 2시간이나 자전거 뒤에 앉아 온 애인데 기타 치는 것을 짧게라도 보여주면 안 되겠냐고 사정했다. 그 청까진 거절하기 어려웠던지 여인은 방에 들어가 기타를 들고 나왔다. 그때 은지는 제대로 된 클래식 기타를 처음 보았다. 여인의 시범연주는 딱 1분에 그쳤다. 그 1분은 은지에겐 새로운 세계였다. “제가 지금까지 했던 것은 기타도 아니더라고요. 우선 기타에서 얼마나 예쁘고 따뜻한 소리가 나는지 정말 그때 느낀 감정은 뭐라 설명하기 어려워요. 그리고 몸과 기타가 하나가 된다는 것이 뭔지 느꼈어요. 어린 아이에게 짧게 보여주는 것임에도 그 분은 온 정성과 마음을 들여 기타를 연주하더군요.” 기타 연주까지 들으니 집에 그냥 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료 교수와 함께 은지는 제발 좀 가르쳐 달라고 매달렸다. 그녀는 잠깐 생각하더니 웃으면서 “애가 이렇게 원하니 제가 선뜻 거절은 못하겠지만 대신 6개월짜리 숙제를 내줄테니 그걸 해 오면 가르칠게요”라고 말했다. 그녀가 내준 숙제는 클래식기타 기본자세를 잡기 위한 반음계스케일 연습이었다. 간단하게 말하면 자세 교정으로 기타의 왼손, 오른손의 모양과 각도, 줄 높이와의 거리, 손톱 모양 등 자세한 테크닉 연습 방법이었다. 이걸 못하면 기타를 정확하게 칠 수가 없다면서 시범을 보여준 뒤 6개월 동안 훈련해 교정하고 와야 한다고 했다. 얼핏 간단한 숙제였지만, 같은 동작과 한 자세를 매일 반복해야 하는 매우 지겨운 숙제이기도 했다. 은지는 집에 돌아와 그녀가 보여준 시범대로 몸을 익히기 위해 노력했다. 쉽진 않았지만 꼭 그녀에게 선택을 받아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6개월 뒤에 다시 찾아갔을 때 여인은 놀랐다. “아니. 어린 애가 이렇게 지겨운 연습을 해서 올 줄은 몰랐네요. 해올 거라 생각하진 않았는데…. 이제부터 1주일에 한 번씩 오세요.” 그때부터 중학교 6년 내내 은지는 여인의 집에 매주 빠지지 않고 찾아가, 갈 때마다 2시간씩 레슨을 받았다. 자전거로 2시간이나 걸리는 먼 거리여서 아버지가 꼬박꼬박 자전거 뒤에 딸을 태우고 다녔다. 포장도로가 아니어서 엉덩이가 너무 아팠지만 은지는 참고 참았다. 없는 살림이지만 쌀이나 돈을 들고 찾아가 레슨비를 대신했다. 6년 동안 은지는 평생의 기초가 될 자세를 바로 잡았고 실력도 크게 향상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한계도 분명했다. 선생은 북한에서 공식 출판된 교재 이상을 절대 넘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가 없지만 일본에서 귀국한 이후 허용되지 않은 기타 연주 때문에 큰 고초를 겪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었다. 은지는 6년 동안 중학교 음악소조에선 기타반을 책임졌고, 함흥대극장에서 학교를 대신해 독주회도 여러 번 가졌다. 음악에 전념하면서도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아 최우등으로 중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아버지의 구속중학교를 졸업하면 예술대학에 가는 것이 은지의 목표였다. 그가 예술대학에 진학했다면 서울에서 그를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상대로 흘러가는 인생은 없는 법이다. 그런 예측불허가 수시로 가져오는 좌절과 극복의 인생사 덕분에 인생은 빛나기도 하고, 또는 나락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삶을 마무리하기도 하는 것이다. 은지의 경우 하필 중학교 졸업 몇 달 전에 최악의 운명과 마주쳤다. 아버지가 보위부에 체포돼 끌려갔던 것. 당시 대학에 새 컴퓨터가 대량으로 들어왔는데, 그 컴퓨터로 학생들과 함께 한국 드라마를 본 것을 누군가 밀고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보위부에서 취조를 받는 동안 대학에 보위부 ‘검열그루빠(검열단)’가 들이닥쳤다. 그들은 아버지의 과거 행적을 탈탈 털어 별 것을 다 걸고 들었다. 한국 드라마를 본 것은 감옥에 갈 죄였지만, 천만다행으로 아버지는 몇 달쯤 있다가 풀려났다. 아버지는 노동당에서 관리하는 통일 대비용 예비 간부였기 때문이었다. 은지의 할아버지는 충청남도 당진 출신이었다. 작은 할아버지, 고모할머니 모두 남쪽에 살고 있었다. 은지의 아버지는 노동당에서 발행하는 충청남도 교육부 고위간부 임명장을 갖고 있었다. 북한은 남한 연고자 중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 통일되면 남쪽에 파견해 활동할 수 있는 임명장을 오래 전에 수여했다. 가령 충청남도의 경우 북한에 사는 충남 출신의 누군가가 충남 도당책임비서, 충남 인민위원회 위원장, 충남 보안서장, 충남 교육비서 등의 임명장을 이미 받아놓고 사는 것이다. 정치적 처벌은 면했지만 그걸로 끝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벌금형과 함께 동격조동이라는 조치로 전문학교 교장으로 옮겨갔다. 은지 집에 부과된 벌금은 집을 다 팔아도 모자라는 액수였다. 여기저기 돈을 빌려 내다보니 빚만 가득 지게 됐다. 전문학교는 함흥 시내에 있었다. 은지 부모는 집을 팔고 함흥 시내로 이사와 작은 집에서 동거살이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명색이 교장이긴 했지만 뇌물을 받을 수 있는 학교가 아니었다. 얼마쯤 뒤부터 빚 독촉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시장에 나가 음료수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취업했던 언니도 직장을 그만두고 어머니를 도와 시장 장사를 시작했다. 이런 환경에서 은지는 예술대학을 갈 수가 없었다. #유치원 음악선생님세상은 꼭 죽으란 법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날 아버지의 친구가 찾아와 솔깃한 제안을 했다. 당시 함흥에는 유치원 음악교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교원양성소에 음악교사 양성을 위한 1년 반짜리 단기 속성반이 생겨났다. 원래 유치원 교사가 되려면 4년제 교원대학을 졸업해야 하지만, 음악교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1년 반만 가르치고 유치원 교사 자격을 수여하기로 한 것이다. 속성반에 입학하려면 유치원 원장의 추천이 절대적으로 중요한데, 자기가 어느 원장을 잘 아니 소개해 주겠다는 것이다. 북한에서 유치원 교사, 특히 음악교사는 젊은 여성들에겐 꿈의 직업이다. 중학교나 초등학교 선생보다 유치원 음악교사가 훨씬 인기가 좋았다. 북한에선 돈이 있는 집 자식들은 거의 대다수 어릴 때부터 음악을 하게 한다. 즉 유치원 시절인데, 부모들은 아이의 재능을 키우기 위해, 또는 파악하기 위해 음악 선생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다. 과외는 필수고, 자식을 잘 봐달라는 뇌물의 액수도 엄청나다. 게다가 유치원은 2년 만에 졸업시킨다. 2년 뒤면 다시 새로운 학생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북에선 유치원 음악교사 2년이면 시집갈 준비를 끝낸다는 말이 있다. 은지가 모 원장의 추천을 받아 강습소 입학시험을 치러 갔더니 입학 정원은 20명인데, 함흥에서 음악을 전공한 중학교 졸업 학년 여학생들은 다 온 듯했다. 은지는 당당하게 합격했다. 집이 좁아 추천해 준 유치원의 기숙사에서 살며 학교를 다녔다. 동창생들은 모두 달러를 용돈으로 쓰는, 잘 사는 집 딸들이었다. 악기나 옷, 화장품은 당연히 수준차이가 컸다. 이번에도 은지는 실력을 키우는 것밖에 내세울 것이 없었다. 1년 반을 피타게 연습만 하다가 졸업시험을 치게 됐다. 전공 연주 외에 발풍금(피아노), 무용, 동화읽기가 졸업시험 과목이었다. 은지는 일등으로 졸업했다. 연주가 자신 있었던 것도 있었지만, 어렸을 때 5년 동안 무용을 했던 것도 큰 도움이 됐다. 그가 최우수 점수를 받게 되자 함흥에서 제일 큰 유치원 원장이 그에게 스카웃 제안을 했다. 하지만 은지는 자신을 추천해주고 기숙사까지 내준 유치원을 택했다. 2005년 은지는 만 18세에 유치원 음악선생이 됐다. 주변에서 모두 부러워했다. 유치원 선생이 되니 왜 이 직업이 그렇게 선망 받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처음 맡은 음악반 학생이 10명이었는데, 학부모들의 직업은 무역하는 집, 장사하는 집, 간부집 등으로 다양했지만, 한마디로 함흥에서 잘 나가는 돈 있는 집 자식들이었다. 학부모들이 자녀를 잘 부탁한다며 경쟁적으로 찾아와서 용돈을 찔러주고, 좋은 화장품과 옷을 사왔다. 매일 선생님 도시락까지 사오는 아이들만 7~8명이었다. 은지는 이 도시락을 들고 집에 가서 가족을 먹여 살렸다. 하지만 좋았던 것도 잠시. 점점 유치원 선생일이 질리기 시작했다. 예전에 배울 때는 몰랐지만, 선생이 돼서 말귀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과 씨름하는 것이 너무 싫었다. 게다가 교수안을 밤새 써서 내야 했다. 오전에는 담임을 맡은 반 아이들을 가르치고, 오후에는 음악을 가르치고 밤에는 손으로 교수안을 작성하는 일이 이어졌다.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음악을 연주할 기회가 사라진 것이다.#탈북교사로 임명돼 반년쯤 지난 어느 날. 중국을 오가며 무역을 하는 학부형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아니, 선생님은 할아버지 가족이 다 한국에 있다면서요. 중국 가서 할아버지 친척을 찾아 도움을 받으면 금방 부자가 될 텐데, 왜 이러고 있어요. 내가 중국까지 안전하게 가서 친척을 찾게 도와줄게요.” 은지의 할아버지는 자식들에게 틈만 나면 ‘충청남도 당진군 면천면 율사리 ○○번지, 남동생 유 아무개, 여동생 유 아무개’를 외우게 했다. 자신이 못가면 너희라도 가서 자신의 형제를 꼭 찾으라는 당부였다. 할아버지는 손녀가 유치원 선생이 된 것을 보지 못하고 이산의 한을 남긴 채 숨을 거두었다. 은지는 마음이 흔들렸다. 그때 이미 한국 드라마나 중국 드라마를 봤던 터라 외부 세계에 대한 환상이 가득 차 있었다. 아버지가 중국에 가서 삼촌과 고모를 찾으면 좋겠지만 이미 보위부에 잡혀 혼이 나고, 교장이란 현직에도 있어 절대 가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몰래 가서 할아버지를 찾아 가족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지.” 은지는 학부형에게 중국에 가겠다고 약속했다. 학부형은 자기 회사 회계원으로 꾸며 국경까지 갈 수 있는 여행증을 만들어왔다. 2006년 3월 어느 날 수업이 끝난 뒤 은지는 아무 말도 없이, 가족에게도 중국으로 간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길을 나섰다. 떠날 때는 한두 달이면 돌아올 줄 알았다. 북중 국경까지 어렵지 않게 도착했다. 도착하니 국경경비대 장교가 마중 나와 밤에 강을 건네주었고, 허리까지 오는 강을 건너니 중국에서 차가 마중 나와 그를 태우고 연길로 들어갔다. 모두 학부형이 만들어준 루트였다. 연길까지 도착하는 동안 19세 은지는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드디어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 행복했다. 행복은 연길에 들어가자마자 깨졌다. 차에서 내려 어느 집에 들어가니 단칸방이었다. 그 집에서 40대 중후반 부부와 은지보다 한 살 많은 딸이 살고 있었다. 잠시 이 집에서 머물다 다른 곳에 가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 집에서 한국 친척을 찾아준다는 것이었다. 도착했을 때 집주인 여인이 반찬 몇 개와 밥을 내왔는데, 양이 몇 숟가락 정도에 불과했다. 순식간에 다 먹으니 또 그만큼 내왔다. 그렇게 무려 다섯 번 밥을 퍼오니 장난하는 줄 알았다. 중국은 잘 살고, 기름진 음식에 배불리 먹는 줄 알았는데 정작 와보니 그게 아니었다. 환상이 깨졌다. 자유를 얻었다고 좋아했는데 하루 종일 단칸방에 머물며 살아야 했다. 집 주인은 한국과 연락하며 친척을 찾느라 열심히 노력했지만 계속 실패했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났다.#한국을 꿈꾸다그동안 은지는 컴퓨터도 배우고, 채팅도 배우고 살았는데, 두 달 넘게 친척을 못 찾으니 집주인들에게 눈치가 보였다. 그렇다고 북한에 빈손으로 돌아가긴 싫었다. 길지 않은 동안 은지는 많은 것을 알게 됐다. 중국에 탈북자가 엄청 많이 숨어살고, 연길 주변 산에도 탈북자들이 가득 숨어있다는 것, 중국에서 체포돼 북한으로 끌려가면 큰 고초를 겪게 된다는 것도 다 처음 알았다. 처음엔 거짓말인줄 알았지만, 나중엔 내가 북한을 너무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처음 중국에 갔을 때 집주인들이 “김일성, 김정일이 나쁜 놈”이라고 해서 너무 가슴이 떨렸는데 두 달쯤 지나니 대수롭지 않게 듣게 됐다. 마침 머물던 집에는 한국 위성방송이 설치돼 있어 한국TV도 계속 보게 됐다. 처음 듣는 서울말은 귀에 살살 녹았다. 한국의 거리는 화려했다. 왜 조선족들이 그렇게 기를 쓰고 한국에 가겠다고 하는지도 이해됐다. 기타를 사서 한국 음악방송을 들으며 악보를 적은 뒤 따라 치기도 했다. 한국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 그 집에서 계속 머물기도 눈치가 보였다. 두 달이 넘자 그는 집 주변 어느 식당에 찾아갔다. “북한에서 왔는데 알바를 하게 해달라”고 말했다. 사장이 어이없이 쳐다보더니 “오자마자 자기 입으로 북에서 왔다는 여자는 처음 봤다”며 “신변보호는 못해주겠는데 일하겠으면 해보라”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식당은 현지에서 유명한 식당이었다. 공안도 오고, 북한 사람도 왔다. 종업원은 모두 한족이었고 단 한 명만 조선족이었다. 은지는 머물던 집에서 나와 그 조선족과 함께 한 방에서 살았다. 하지만 이런 생활은 한달도 가지 못했다. 손님들이 와서 웃으며 “너 연변 사람 아니지” “어디서 왔냐”고 자꾸 물었다. 은지의 정체를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그런 것이다. 누가 신고라도 하면 잡혀간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함께 있던 종업원이 제안했다. 자기 친구가 커피숍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다른 대도시로 옮겨갈 생각이니 그곳에 가서 일하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커피숍 사장이 발이 넓고 공안도 다 친해서 잡혀가진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은지는 커피숍으로 옮겼다. 몇 달만 일할 생각이었는데 그곳에서 무려 4년이나 있게 됐다. 커피숍 사장은 총각이었다. 형제들도 다 연변에서 잘 나갔다. 사장은 은지에게 함께 살자며 중국 신분증까지 다 해주겠다고 했다.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다. 사장은 약속을 지켰다. 중국 신분증을 만들어주었다. 가짜가 아닌 진짜였다. 지금은 중국도 전자 등록 체계가 잘 돼 있어 불가능하지만, 당시엔 누가 사망하면 사망 신고를 하지 않고 호구를 팔았고, 그 호구를 사서 사진만 바꾼 뒤 그 사람의 이름으로 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면 잡힐 일이 없었다. 신분도 안정되고, 사랑해주는 남자도 만나 모든 것이 다 잘 풀린 듯 했지만, 은지는 그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음악을 계속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견딜 수 없었다. 한국이 자석처럼 계속 끌었다. 그는 애인을 계속 설득했고, 마침내 애인도 한국으로 가라고 승낙했다.#“노력하면 된다면서요.”2010년 10월 은지는 중국 여권을 가지고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도착했다. 조사를 받고 2011년 3월 사회에 나왔다. 서울에 정착하고 싶었지만, 하나원 추첨에서 떨어져 어디에 붙었는지도 모를 대구에 가게 됐다. 한국에 온 이유가 음악 공부를 더 하고 싶었던 것이었던 것만큼 어느 정도 자리 잡자마자 음악 공부를 할 수 있는 대학을 찾았다. 서울로 가서 좋은 대학에 다니고 싶었지만, 돈도 없고, 집도 없어 불가능해보였다. 2012년 그는 대구에 있는 계명문화대 실용음악학부에 입학해 2년 뒤 졸업했다. 일단 남쪽의 음악 세계에 부딪쳐 보고 싶은 욕망이 컸다. “실제로 입학해 수업을 접하니 북한과 음악 이론은 별로 차이가 없었는데 남북의 음악 용어가 다르게 사용되기 때문에 처음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외래어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정말 생소했습니다.” 전문대에 입학해 한국 음악에 입문했지만 여전히 목마르는 갈증은 남아있었다. 계명대는 일렉 기타를 전공으로 했다. 원래는 클래식 기타를 공부하고 싶었지만 한국에 와서 보니 음악에 다양한 장르가 있다는 게 놀라워서 재즈를 선택했다. 일렉 기타는 은지가 지금까지 배워 온 클래식 기타와는 전혀 다른 장르, 즉 기타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구기 종목으로 치면 배구와 축구의 차이만큼이나 완전히 다른 장르다. 계명대를 졸업한 뒤 클래식 기타도 더 파고들고자 알아보니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가 최고라고 했다. “그래,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이왕이면 저기에 입학해 공부하자. 아버지 때문에 평양의 예술대학엔 가지 못했지만 서울에 와선 한국 최고의 예술대학엔 가야겠다.” 그러기까지 넘어야 할 산은 많았다. 일단 한예종은 탈북민 특례입학이 없다. 그런 이유로 지금까지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 3만5000여 명 중 한예종 입학생도 전무했다. 한예종의 클래식 기타 전공은 매년 70~80명이 지원해 3~4명만 입학한다. 학교 때부터 그곳만 목표로 기타를 열심히 공부한 학생들도 이곳에 지원해 입학할 확률이 5%도 안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알게 되니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오랜 고민 끝에 그는 한예종을 목표로 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온 이유를 증명하고 싶었고, 또 이곳은 누구나 노력하면 된다고 하는데 과연 되는지 내 한계에 도전하고 싶기도 했어요.” 두 번째 어려움은 서울에 정착할 수 있는 돈이었다. 정부에서 대구의 임대주택을 서울로 바꿔주지 않아 그는 서울의 반지하 주택을 월세로 얻었다. 2015년 서울로 올라온 은지는 처음 1년은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예종 입학을 위해선 수많은 시간을 연습에 투자해야 하는데 연습하는 동안 먹고 살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첫 일자리는 쿠팡 물류센터에서 박스를 포장하는 일이었다. 일은 힘들었지만 일당이 높았다. 그러나 몇 달 해보니 손가락에 무리가 왔다. 연주자에게 손가락은 생명이나 다름없었다. 손에 무리가 가지 않으면서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찾았다. 그래서 냉동 창고에서 식품 나르는 일을 얻었다. 한여름에도 고드름이 지는 냉동실에서 두꺼운 옷을 입고 작업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박스 포장보다는 손에 무리가 가지 않았다.이후에도 이마트, 호텔 서빙 등 각종 알바 자리를 찾아 몸이 부서져라 일을 했다. 그의 눈에는 오직 한예종 밖에 보이지 않았다.#탈북민 최초의 한예종 입학2016년 그는 한예종 시험에 도전했다. 실패였다. 떨어진 이유를 분석해봤다. 돈을 버느라 연습을 못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다른 지원자들은 하루 종일 연주만 훈련해 오는데 그가 낼 수 있는 훈련 시간은 고작 하루에 몇 시간뿐이었다. 둘째는 시험 정보도 없고, 레슨을 받지 못했던 이유 때문이었다. 어떤 선생을 만나 배우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특히 한예종에 입학하려면 최고 수준의 레슨 선생을 만나는 것이 중요한데 그는 맨땅에 헤딩한 셈이다. 다른 지원자들은 훌륭한 레슨 선생을 만나 그 아래서 비슷한 수준의 학생들이 모여 하루 종일 고강도 연습을 하다보니 실력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은지는 1차 시험에서 떨어졌지만 여전히 레슨을 받을 상황이 못 됐다. 돈을 벌어야했고, 그러다보니 시간도 낼 수 없었다. 그렇지만 연습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서울에선 기타 연습을 집에서 할 수 없었다. 연습실이 없어서 여름이면 모기에 뜯기며 공원에서 연습을 했고, 겨울이면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먼 곳의 연주실을 찾아다녔다. 남쪽에 왔지만 어두운 창고 안에서 연습을 하던 10살 때보다 별로 환경이 나아지지 않았다. 한 시간이라도 더 연습 시간을 짜내려고 일자리를 최대한 집 근처에서 찾았고,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뛰어서 돌아왔다. 나름 최선을 다해 준비해 이듬해 다시 시험을 쳤다. 1차에 70여명이 지원했는데 은지는 10명만 뽑는 2차 시험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이번에도 최종 3명 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3차 시험에서는 피아노 연주를 듣고 악보에 옮겨 적는 청음과, 음악이론 시험이 나온다. 은지는 이건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2차 시험인데, 이번에 떨어진 것은 연습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결론 냈다. 그는 2차 시험에 떨어진 뒤 친구에게서 800만 원을 빌렸다. 일하러 다니지 않고 집중적으로 연습만 하기 위해서였다. 말 그대로 올인한 것이다. 2018년 세 번째 시험에서도 순조롭게 1차 시험을 통과했다. 두 번째 시험의 연주를 마치고 나오는데 느낌이 좋았다. “그 이전까진 항상 연주를 마치고 나오면 아쉬움이 있었어요. 긴장돼 나를 다 보여주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았죠. 그런데 그날엔 나를 다 보여주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왔어요. 심사위원들의 표정을 보니 이번엔 붙겠다는 생각이 딱 들더군요.” 그의 생각대로 합격자 명단엔 유은지라는 이름이 올라 있었다. 5%의 확률을 3번 만에 통과한 것이다. 동시에 그는 한예종에 입학한 첫 탈북민이 됐다.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자신의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그는 몇 시간을 펑펑 울었다. 북한과 중국, 남쪽에서 쌓이고 쌓인 오랜 마음의 응어리를 눈물에 실어 날려버렸다.#평양의 클래식 기타 선생님2019년 3월 첫 학기를 시작했다. 3년 동안 열심히 바라보고 달린 결과를 얻었지만, 대학 생활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의 나이 만 32세. 동창들은 띠동갑이었고, 대학 전체로 봐도 가장 나이가 많은 학생이었다. 거기에 한국 최고의 예술학교답게 교육 수준도 너무 높았다. “여기서 공부하니 북한에서 배운 클래식은 클래식도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계음악사 등의 이론도 그에겐 넘기 쉬운 과목이 아니었다. “여유가 있는 집 학생들은 학점에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실기에만 집중해 원없이 연습만 하는데, 그게 참 부러워요, 저는 그럴 형편이 못돼요. 학점을 잘 받아야 장학금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2학기부터 코로나 사태가 터지면서 대학에서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지 못한 것도 진한 아쉬움이다. 그럼에도 나이 많은 자신을 ‘왕따’시키지 않고 함께 놀아주는 동창들이 참 고맙다. 한예종 학생이 되니 과외를 할 수 있는 것도 좋은 점이다. 학원 타임 강사로 레슨을 해줄 수 있으니 이제 더는 물류센터에 가서 포장을 하거나 얼음 창고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어느 덧 은지는 대학 생활의 마지막 학기를 맞고 있다. 졸업해도 진로에 대한 고민은 남아있다. 내년에 졸업하면 36세인데 무엇을 하고 싶을까. “욕심만 같아선 미국이나 유럽에 가서 세계적인 음악을 더 배우고 싶어요. 한예종을 다니니 또 줄리아드 음대에 가고 싶기도 해요. 물론 지금은 언감생심, 그럴 형편이 아닌 것은 잘 압니다만, 꿈이야 크게 가져야죠. 아버지는 늘 긍정적 성격이었어요. 당장 먹을 것이 없어도 ‘괜찮아 굶어죽진 않을거니’ 라는 태도였는데, 제가 아버지 성격을 물려받은 것 같아요. 저도 지금까지 걸어온 인생을 보면 말이 되는 게 없었지만 그래도 이만큼 왔으니 앞으로도 잘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꿈은 이루어진다를 증명하고 싶습니다.” 그에게 기타는 절대 버릴 수 없는 운명과 같은 친구다. 기타만 쥐면 외로움도 사라지고, 배고픔도 사라지고, 두려움도 사라진다. 특히 클래식 기타는 그에겐 우주 자체다. “베토벤은 클래식 기타는 작은 오케스트라라고 했어요. 현악기 중에 클래식 기타만큼 어려운 악기는 없지만, 또 이것만큼 음색이나 화음 등을 다양하게 표현하는 악기는 없습니다. 클래식 기타는 죽을 때까지 완전히 익혔다는 말을 할 수 없어요. 세계적 대가들도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연습을 해요. 하루 연습을 건너뛰면 바로 티가 나요. 이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클래식 기타를 시작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그는 기타의 바다에 빠져 헤어 나올 수 없는 운명을 살고 있는 듯 보였다. 그렇게 열심히 배워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일까. “통일이 되면 저는 평양음악무용대학에 가서 클래식 기타를 제대로 배워주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제가 거길 가고 싶었지만 못 갔잖아요. 지금 보면 오히려 더 잘된 거죠. 나중에 평양에 가서 ‘얘들아 선생님이 세상으로 일찍 나가 그래도 열심히 많이 공부하고 왔다. 클래식은 이런 거다’고 가르치고 싶죠.” 유은지 교수가 북한 음악대학에서 학생들에게 “클래식은 이런거다”고 말하는 장면을 상상해봤다. 참 많은 곡절을 넘었지만 그는 지금 평균 수명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35세에 불과하다. 훗날 어느 날인가 평양음악무용대학에서 그런 일이 분명 일어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2-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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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 아세안홀’ 15일 개관

    제주 중문관광단지 내 국제평화센터에 15일 ‘제주 아세안홀’이 새로 개관했다. 제주 아세안홀은 한국과 아세안 10개국 정부 간 경제 및 사회·문화 분야 협력 증진을 위해 만들어진 국제기구 한-아세안센터(사무총장 김해용)와 제주특별자치도, 국제평화재단이 함께 운영하게 된다. 개관식에는 박진 외교부 장관, 오영훈 제주도지사, 아세안 10개국 대사들이 참석했다. ‘함께-잇는-가치’라는 주제로 개최되는 개관 전시는 아세안 10개국과 제주의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문화예술품 외에도 한국과 아세안 사람들의 삶의 가치를 엿볼 수 있는 사진과 영상을 전시한다. 총 네 개의 세션으로 구분된 이번 전시는 한국과 아세안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함께 미래를 만들어 나아가는 ‘연대’의 가치를 느낄 수 있도록 기획됐다. 대표 전시물로는 꽃잎과 넝쿨무늬 등 크메르 문명의 특징이 조각된 캄보디아의 구리 수공예 용기, 2020 엑스포에서 선보인 싱가포르 파빌리온에서 영감을 받아 싱가포르의 다양한 식물종을 그려낸 ‘눈부신 싱가포르’ 실크스카프, 베트남의 문화적 정체성과 철학을 표현한 추 다우 도자기, 제주 감물염색 직물 등을 꼽을 수 있다. 개관과 함께 18일까지 4일간 운영된 ‘아세안 관광홍보차량’은 제주 전역을 돌며 아세안을 국내 대중에게 소개했다. 차량은 새별오름, 동문재래시장, 성산일출봉 등 주요 관광지와 제주대, 중문중 등에도 정차해 관광객들과 학생들에게 아세안 여행에 대한 최신 정보를 제공했고, 포토존 및 설문조사 이벤트를 비롯한 다양한 퀴즈를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2-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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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론 머스크가 만든 김정은의 최대 위기[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숨은 주역 중 한 명이다. 러시아는 개전 초 우크라이나 통신시설을 주요 목표로 삼고 미사일과 폭탄을 퍼부었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 통신 인프라는 대거 파괴됐다. 위기 상황에서 미하일로 페도로프 우크라이나 부총리는 머스크에게 ‘스타링크’를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스타링크는 머스크가 설립한 우주기업 스페이스X의 위성인터넷 서비스다. 머스크는 스타링크 단말기를 대거 우크라이나에 보냈다. 6월까지 1만5000대 이상의 단말기가 우크라이나에 들어갔는데, 이것이 전쟁 판도를 바꿨다. 지구 저궤도를 돌고 있는 2800여 개의 위성이 제공하는 스타링크 덕분에 우크라이나는 통신 마비라는 최악의 상황을 면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러시아군의 진격을 며칠 동안 멈추게 한 드론 공격과 실시간 포사격 좌표 제공, 러시아의 자존심인 모스크바함 격침 등 군사작전에도 스타링크가 활용됐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세계를 향해 여론전을 펼 수 있었던 것도, 러시아의 학살이 만천하에 알려진 것도, 전황이 생생하게 중계된 것도 모두 스타링크 덕분이다. 러시아는 해킹과 전파 방해 등을 동원해 스타링크를 공격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스타링크의 안정성도 뛰어나다는 의미다. 우크라이나에서 검증된 스타링크 서비스가 북한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김정은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북한 인민이 진실을 아는 것이다. 북한 주민이 인터넷을 하고, 외부와 통화도 할 수 있다면, 자신들이 굶주릴 때 김씨 일가가 얼마나 호화롭게 살았는지 등 당국의 거짓말을 모두 알게 된다. 진실의 힘은 북한 체제가 쌓은 거짓의 성을 순식간에 허물어버릴 수 있다. 마침 2년 전 코로나 대유행이 시작되자 북한과 중국은 북-중 국경에 뚫기 어려운 높은 철조망과 촘촘한 감시 카메라로 군사분계선 못지않은 장벽을 만들었다. 과거 사람이 오가며 북한에 유입되던 정보의 흐름이 거의 막혔다. 하지만 땅을 막을 순 있어도 하늘까지 막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아직은 우크라이나에서 위력을 발휘한 스타링크가 북한에선 활용되기 어렵다. 이를 사용하려면 위성 안테나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비록 안테나의 크기가 직경이 수십 cm 수준으로 줄어들었지만, 그럼에도 보위부가 가택을 수색하면 적발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8월 말 머스크 CEO는 위성 안테나가 필요 없는 서비스를 내년부터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다시 말해 위성과 휴대전화가 직접 연결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 위성 안테나가 필요한 이유는 295kg의 소형 위성이 쏘는 전파가 휴대전화로 받기엔 충분히 강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머스크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휴대전화가 직접 수신할 수 있는 강력한 신호를 내쏘는 위성을 개발했다. 위성에는 한 변이 5m, 전체 면적이 25m²인 강력한 안테나가 장착된다. 이미 실험은 성공했다. 내년부터 미국 내 점유율 2위 이동통신사인 티모바일(T-Mobile)과 제휴해 2023년 베타 테스트를, 2024년에 상용화한다는 계획이다. 올해 6월 스타링크는 내년부터 한국을 서비스 지역에 포함한다고 발표했다. 인터넷 강국인 한국에서는 스타링크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전문가도 많다. 그러나 북한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반도 상공에서 스타링크 위성들이 휴대전화로 수신할 수 있는 신호를 내쏜다면 엄청난 일이다. 이젠 북한도 위성 안테나가 필요 없게 된다. 북한 당국이 이미 보급된 500만 대 이상의 휴대전화가 위성 신호를 받지 못하게 할 수 있을진 몰라도 휴대전화를 외부에서 몰래 들여가면 막기 어려울 것이다. 스타링크를 막기 위한 전파 방해와 해킹은 러시아도 성공하지 못했다. 과거 북한과의 통화는 중국 휴대전화 신호가 잡히는 북-중 국경의 제한된 지역에서만 가능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스타링크 수신이 가능한 휴대전화만 있으면 평양을 비롯해 어느 지역에서도 외부와의 통화는 물론이고 사진과 동영상까지 주고받을 수 있게 된다. 당장 내년부터 가능한 시나리오다. 휴대전화는 몰래 숨기면 찾기도 매우 어렵다. 김정은은 엄청난 위기를 맞게 됐다. 설사 스타링크를 막는 데 성공한다 해도 몇 년 뒤 또 어떤 기술이 나올지 모른다. 김정은의 버티기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머스크는 북한 인민에게 구세주가 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2-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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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박사가 된 소년 꽃제비[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김혁의 소년 시절은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청진에서 수십㎞ 떨어진 고무산에서 태어난 그가 처음 집을 뛰쳐나올 때의 나이는 7살. 이후 5년 동안 꽃제비로 북한을 떠돌았다. 아버지는 굶어죽고, 형은 북한 교화소에서 죽었다. 김혁 역시 18살에 악명 높은 전거리교화소의 최연소 수감자로 끌려가 죽기 직전에 석방됐다. 석방 전에 함께 입소한 23명 중 21명이 죽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무덤도 없이 소각되는 22번째 주검이 될 운명이었지만, 하늘이 그의 죽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차인표 주연의 영화 ‘크로싱’의 11세 소년 ‘준이’의 실제 인물은 몽골 사막에서 김혁이 업고 오던 중 숨진 유철민이다. 올해 40살이 된 김혁은 한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공공기관의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한 인간이 얼마나 많은 생사의 굴곡을 넘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다.# 장마당의 ‘덮치개’ 김혁이 함경북도 청진시 수남구역 말음인민학교 2학년을 다니던 1989년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그를 2살 위 형이 불렀다. “혁이야. 우리 집 나가자. 우리 엄마도 아니잖아.” 혁의 친엄마는 그가 4살 때인 1986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다. 1년 뒤 아버지는 재혼을 했다. 새엄마가 형제들에게 아주 못되게 놀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형은 그녀를 너무 미워했다. 혁이도 그녀가 친엄마가 아니란 사실을 깨달은 뒤부터 정을 붙이지 못했다. 두 형제는 집을 나와 청진역으로 갔다. 그때부터 구걸하는 삶이 시작됐다. 역에는 그들과 비슷한 처지의 구걸하는 청소년들이 있었다. 북한 꽃제비라고 하면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1990년대 중반에 생겨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은 그 이전부터 기차역에서 빌어먹는 아이들이 있었다. 당시 청진역은 ‘청룡파’ 구역이었다. 집을 뛰쳐나온 아이들은 소매치기 전문 조직인 청룡파에 소속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어린 형제를 받아줄 리가 만무했다. 형제는 구걸로 먹고 살았다. 당시만 해도 인심이 그럭저럭 괜찮았다. 기차를 기다리며 밥을 먹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먹을 것을 좀 달라고 하면 “부모 없냐”고 물었다. “다 죽었다”고 대답하면 사람들이 짐을 열고 도중식사(도중에 먹을 도시락)를 나눠주었다. 하지만 청진역은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가끔 안전원(경찰)들이 나타나 구걸하는 아이들을 잡아다 집을 묻고 돌려보냈다. 그들도 자주 잡혔다. 그때마다 아버지가 와서 이들을 데리고 갔다. 집에 가면 호되게 맞고 다시는 가출하지 않겠다고 서약하고는 며칠 뒤 다시 도망치는 삶이 반복됐다. 1년쯤 지나자 청진 역전분주소(역전파출소) 안전원들은 누구나 이들 형제를 알아보았다. 그가 8살 때 형이 “안 되겠다. 우리 여길 떠서 평양에 가자”고 제안했다. 형제는 평양행 열차에 몰래 올라탔다. 열차검열원들을 속이며 그럭저럭 평양 직전의 간리역까지는 갔지만 도무지 검열과 통제가 심해 평양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이 다시 청진으로 오는 기차를 타고 오다가 함북 길주역에 내려 농민시장에서 구걸을 시작했다. 그때 함경북도와 양강도로 가는 기차의 분기점인 길주에는 꽃제비들이 많았다. 안전원이 쫓아오면 도주하는 삶이 이어졌다. 정신없이 도망치다가 갈라지면 약속 장소를 정해 다시 만났고, 며칠 동안 떨어져 소식을 정 모를 때면 다시 몇 시간을 기차를 타고 청진으로 와서 만났다. 청진역 대합실에 있는 영예군인방 스팀관 뒤가 형제가 최종으로 만나는 약속 장소였다. 그렇게 그들은 4년을 전국을 떠돌며 살았다. 1993년이 되자 상황이 변했다. 이때엔 전국 곳곳에서 배급을 제대로 주지 않는 지역이 생겨났다. 기차역에 꽃제비가 갑자기 많아졌다. 인심도 박해져 더는 빌어도 잘 주지 않았다. 그나마 먹을 것을 주는 사람들은 군인들이었다고 김혁은 회상했다. 빌어먹기 어려워지자 꽃제비들은 훔쳐 먹기 시작했다. 마침 이때부터 농민시장으로 존재하던 장마당이 번창하기 시작했고, 시내 곳곳에 골목장도 많아졌다. 꽃제비들은 음식장사꾼을 노렸다. 장사꾼들도 파는 음식을 덮쳐 달아나는 꽃제비가 많아지자 대책을 세웠다. 음식 그릇 위에 그물을 씌우고, 또 비닐까지 씌운 것. 훔쳐야 먹고 살 수 있는 꽃제비들도 여럿이 모여 역할 분담을 하는 식으로 전술을 바꾸었다. 힘 좋고, 빨리 달리는 애는 ‘파장꾼’이 됐다. 이들은 음식 그릇을 통째로 바닥에 뒤집어 버리고 도망가면 ‘덮치개’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땅에 떨어진 음식을 두 손으로 쓸어 담아 도망친다. 이렇게 획득한 음식을 약속된 골목에서 나눠먹었다.# 바람잡이가 되다 1994년 설날이었다. 명절은 꽃제비들에겐 가장 배고픈 날이다. 장마당은 문을 닫고, 기차역도 조용하다. 이날도 김혁은 청진역 대합실 의자에 배고픔을 달래며 누워있었다. 이때쯤 그는 형과 헤어졌다. 14살이 된 형은 키도 커졌고, 달리기도 빨랐다. 안전원이 쫓아오면 형은 늘 도망을 치는 데 성공했지만, 키가 작은 혁은 자주 잡혔다. 그가 잡혀가면 형은 그 사이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는데, 그런 일상이 이어지다보니 어느새 각자 알아서 사는 삶이 된 것이다. 형은 전국구로 떠돌았는데, 가끔 기차를 타고 지나가다 청진역에 내려 동생이 잘 있나 살펴봤다. 이날도 혹시 형이 돈을 가지고 청진역에 나타나지 않을까 기대하며 누워있는데 또래로 보이는 한 아이가 다가 왔다. 옷도 잘 입고 있었다. 혁을 유심히 보던 그는 “야, 세면장 가서 얼굴 씻고 오면 맛있는 거 사줄게”라고 제안했다. 역전 화장실 세면장의 얼음을 깨고 얼굴을 씻고 오자 그 애가 역전 앞 식당에 데리고 들어갔다. 비싼 메뉴도 척척 시켰고, 밥을 먹은 뒤 ‘555’라는 브랜드의 고급 담배도 건네주었다. “너 이제부터 나랑 다니지 않겠니?” 그렇게 그들은 친구가 됐다. 알고 보니 그 애는 그 바닥에선 소문난 소매치기였다. 당시 여행하는 사람들은 소매치기를 피하기 위해 배낭 안에 돈을 숨기고 다니는 일이 많았는데, 그 애는 어느 쌀 배낭 가운데 돈이 숨겨져 있는지를 척척 알아냈다. 개찰구에서 서로 먼저 들어가겠다고 밀고 당기고 북새통이 벌어지면 이들은 작업에 들어갔다. 그가 혁에게 접근한 것도 ‘바람잡이’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돈을 훔치면 이들은 며칠 잘 먹었다. 돈이 떨어지면 다시 작업하려 나왔다. 친구는 혁이랑 비슷하게 일찍부터 집을 나와 소매치기가 됐다.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가 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친구는 가끔 큰 돈이 생기면 집에 가서 앓는 어머니에게 주고 왔다. 그러나 이들의 동행은 반년 만에 끝났다. 친구가 군부대 군관의 트렁크를 훔치고 튀었는데 갑자기 안전원들이 총동원돼 그 애를 색출해 잡았던 것이다. 그 트렁크에 군사비밀이 있었다는 소리도 있었고, 권총이 있었다는 소리도 있었다. 그렇게 끌려간 친구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반년 동안의 행복한 시절이 끝났다. # 김일성의 죽음 1994년 6월 혁은 청진역에서 또 안전원에게 잡혔다. 또 아버지가 분주소로 혁을 찾으려 왔다. 집에 가보니 언제 잡혀 왔는지 형도 있었다.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다가 “새 엄마가 그렇게 싫냐”고 물었다. 형제는 합창하듯이 “싫어”라고 대답했다. “왜 싫어?” “가짜 엄마니까 싫지.” 아버지는 옆방으로 들어갔다. 몰래 보니 아버지가 울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서럽게 우는 모습은 처음 봤다. 형이 말했다. “이제부터 우리 나가지 말자.” 당시 아버지는 531군부대 외화벌이 회사에 다녔다. 집안 사정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7월 8일 아버지는 이들에게 먹이겠다고 생태를 가득 싣고 집에 왔다. 다음날 형이 눈짓을 했다. 둘은 명태 40마리를 몰래 둘러메고 수남장마당에 나왔다. 장사꾼에게 팔아 더 맛있는 것을 사먹을 생각이었다. 애들을 보고 장사꾼들은 가격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팔 곳을 찾지 못하고 시장을 서성이는데 갑자기 장마당 관리사무소 사람이 나와 “중대방송이 있으니 당장 와서 TV를 함께 시청해야 한다”고 소리쳤다. 그렇게 떠밀려 TV를 보러 갔더니 김일성이 죽었다는 부고가 방영됐다. 사람들이 울고불고 난리가 벌어졌다. “오늘은 명태 팔기 틀렸구나.” 형제는 배낭을 들고 집으로 가려 돌아섰다. 그때 한 장사꾼이 그들 옆에 와서 속삭였다. “그거 마리당 9원에 살게.” 아까는 3원에 사겠다고 하더니 김일성이 죽었다고 하니 9원을 불렀다. 9원에 명태를 팔고, 장사를 오랫동안 못할 것을 직감한 다른 장사꾼이 떨이로 팔고 가는 월병을 사서 집에 돌아와 오랫동안 숨겨놓고 먹었다. 혁이의 기억 속 김일성 사망일은 명태를 9원에 팔고 월병을 싸게 산 운 좋은 날이었다.# 아버지의 죽음 형제가 집으로 들어온 뒤로 아버지는 더는 때리지 않았다. 1995년 1월 아버지는 외화벌이 회사를 그만두고, 청진에서 차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어촌마을 부업지로 두 형제와 함께 옮겼다. 자식을 위해 새엄마와 떨어져 살기로 마음먹었던 것 그들은 이곳에서 1년 동안 살았다. 집이 없어 우사를 개조한 허름한 곳에서 살았지만, 이때가 혁의 기억 속에서 가족과 함께 했던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염소도 기르고, 소도 방목하고, 농사도 했으며 인근 호수에서 잉어도 잡았다. 마을에는 해군 공기부양정 7~8대와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부대 군인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다. 혁의 부친은 젊었을 때 전연군단(전방군단)의 정찰부대 교관을 지냈다고 한다. 대남침투도 했다고 하는데, 어린 혁이는 아버지의 공적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몰랐다. 다만 아버지에겐 김일성 이름이 새겨진 시계가 있었다. 북한에서 명함시계가 있다는 것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엄청 대단한 사람이란 것을 의미한다. 혁이는 어렸을 때 분주소에 잡혀온 형제를 데리러 온 아버지가 일부러 명함시계를 차고 오자 안전원들이 아버지 앞에서 굽실대며 태도가 변했던 것을 보았다. 아버지가 해군 부대에 가서 군인들에게 격술 시범동작을 가르치자 군인들은 접근 금지 구역까지 이들 형제에게 개방해주었다. 혁은 가끔 바다에서 문어를 잡아 시내에 나가 팔았다. 그렇게 돈을 벌어 아버지에게 술을 사다 드리면 아버지는 너무 행복해 했다. 형제는 그렇게 오래 살줄 알았다. 그러나 당시는 고난의 행군으로 자고 나면 사람들이 죽어나가던 때였다. 아무리 외진 어촌마을이라 하지만 먹을 것이 부족하긴 마찬가지였다. 그해 12월 도저히 형제를 기를 능력이 되지 않았던 아버지는 그들을 함북 온성군에 있는 종성고아원에 보냈다. 그 다음해 봄 아버지는 새엄마와 이혼했다. 친자식들을 고아원에 버렸다는 생각 때문에 힘들어했다고 나중에 마을 사람들이 말해주었다. 아버지는 시내에 있는 집을 팔아 일부는 새엄마에게 주고, 나머지 돈으로 수남장마당 뒤쪽의 작은 집을 샀다. 1996년 여름 방학에 집에 갔을 때 아버지는 뼈에 가죽만 씌운 모습이었다. 180㎝가 넘는 장대한 기골이었는데, 걸음도 겨우 걸었다. 그래도 아들들이 왔다고 집에 있던 마지막 옥수수 가루를 탈탈 털어 죽을 쑤었다. “서로 때리지 말고, 싸우지 말고, 훔치지 말고 살아라.” 혁이 기억하는 아버지 마지막 당부였다. 아버지가 형제가 방학이 끝나 고아원으로 돌아간 지 몇 달 안돼 굶어죽었다. 너무 고지식하고 노동당에 대한 충성 밖에 몰랐던 아버지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자 간부들이 공공 자산을 몰래 훔쳐 팔아먹는 것을 참지 못했다. 간부들과 다투다 결국 직장도 쫓겨났고, 당의 방침과 어긋나는 일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국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결국 굶어죽을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죽기 전에 아버지는 말음1동 동사무소 당비서를 찾아가 당증과 명함시계, 예비역 군관 자격증을 당에 바쳤다. 혁이는 나중에 형과 함께 아버지가 가장 애지중지했던 시계를 찾으려 당비서가 있는 동사무소를 찾아갔다. 하지만 찾지 못했다. 당비서도 굶어죽었던 것이다. #종성고아원 형제가 처음 갔을 때 고아원에는 200여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점차 숫자가 줄어들었다. 원래 방침대로라면 고아원엔 우선적으로 식량이 공급돼야 했다. 하지만 비상창고에도 없는 식량을 간부들이 만들어 줄 순 없었다. 고아원에선 옥수수를 털어내고 남은 ‘송치’와 벼 뿌리를 가루내 여기에 약간의 옥수수 가루를 섞어 죽을 만들어주었다. 큰 애들은 도망을 쳤다. 선생들도 눈을 감아주었다. 하지만 어린 애들은 갈 곳도 없었다. 가뜩이나 영양실조에 걸린 상태에서 파라티푸스, 장티푸스, 콜레라, 옴 등의 질병이 쉬지 않고 퍼졌다. 1997년 여름방학 때 집에 갔다 고아원에 돌아오니 70여명 밖에 남지 않은 학생 중에 20여명이 그새 죽어 있었다. 죽은 애들은 고아원 뒷산의 살구나무 밭에 봉분도 묘비도 없이 묻었다. 고아원에 간 뒤로 형은 계속 도망쳐 떠돌아 다녔다. 혁이도 자주 도망쳐 어떤 식으로든 먹고 살다가 고아원에 다시 돌아가는 일이 반복됐다. 그런 가운데서도 시간은 흘러 형은 1997년 졸업해 종성식료공장 원료기지라는 곳에 배치를 받았다. 형은 몇 달도 있지 않고 사라졌다. 혁이 역시 만 15세인 이듬해 졸업해 무산군 임업사업소 종성지부 풍계리 작업장에 배치됐다. 산에 올라가 갱목으로 쓸 나무를 베는 것이 그에게 맡겨진 혁명과업이었다. 자라면서 전국을 떠돌던 그에게 깊은 산속에서 해야 하는 힘든 일이 맞을 리가 없었다. 몇 달 있다가 도망쳐 다시 학원으로 돌아갔다. 거기에서 그는 고아원 교직원의 개인 밭 경비자리를 얻었다. 거기서 알게 된 10여살 많은 누나가 두만강 건너 중국에 가면 옥수수가 지천에 널려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는 야간 경비를 서려 나왔다가 맞은 편 강을 넘어 중국에 갔다. 정말 밭에 옥수수가 엄청 많았고, 경비도 없었다. 그는 배낭에 옥수수를 잔뜩 따서 넣고 다시 두만강을 넘어왔다. 그게 혁의 첫 도강이었다. 당시엔 국경경비대도 많지 않았고, 종성에서 살았던 혁을 의심하던 사람도 없었다. 누나는 가끔 중국 주소를 알려주며 그곳에 가서 물건을 받아달라고 부탁했다. 그 약속도 잘 들어주었다. 어느새 그는 두만강을 어렵지 않게 넘나드는 도강꾼이 됐다. 한번은 형이 찾아왔다. 중국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이후 소식이 없어졌다. 중국으로 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삶은 오래가지 못했다. 1998년 11월 혁은 보위부에 체포됐다. 중국을 오가며 사귄 조선족 청년들이 청진이란 도시에 대해 몹시 궁금해 했다. 혁은 겁도 없이 여럿 데리고 나와 청진을 구경시켜주다 잡혔다. 중국 청년들은 혼을 내서 다시 중국에 돌려보냈지만 혁은 수감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를 신고한 사람은 중국을 처음 알려준 그 누나였다. 안전부에선 그녀를 잡으려 오랫동안 주시를 해왔는데, 그녀는 자기가 살기 위해 보위부에 자수하면서 혁을 제물로 바친 것이다. 그렇지만 누나가 산 것은 아니다. 그녀도 6년형을 선고 받고 감옥에서 죽었다.#3년형을 선고받다 그는 군 안전부에 끌려가 재판을 받은 이듬해 9월까지 무려 10개월 동안 구류장에서 보냈다. 체포될 때 그의 나이는 만 16세였다. 이듬해 판결을 받을 때 “저는 형법에 규정한 처벌 나이인 만 17세도 안됐는데 왜 형을 받아야 하냐”고 묻자 안전원이 “만 14세 이상이면 누구나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1999년 9월에 17세였던 혁은 비법월경죄 1년, 화폐매매죄 1년, 밀수죄 1년을 더해 합계 3년형을 선고받았다. 다음달 그는 판결을 받은 7명과 함께 온성 안전부 구류장을 나와 전거리교화소로 끌려갔다. 그런데 교화소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허약환자를 받아줄 순 없다는 것이다. 10개월 구류장에서 지내다보니 그는 영양실조에 걸려 있었다. 함께 호송된 7명 중 2명만 교화소 입소에 ‘합격’하고 허약에 걸려 죽을 날이 멀지 않았다고 판단된 나머지 5명은 다시 온성 구류장으로 재송환됐다. 온성 구류장에서 전거리까지 기차로 몇 시간이면 갈 수 있었지만, 당시엔 기차도 제대로 다니지 않아 오가는 데 며칠 걸렸다. 5명 중 2명은 돌아오던 길에 열차 안에서 죽었다. 감옥에 와서 다시 한 명은 희망이 보이지 않아 그냥 먹지 않고 삶을 포기했다. 다른 한 명은 돈 많은 친척들을 둔 재중 교포 출신이었는데, 온성으로 돌아오자 뇌물을 잔뜩 써서 석방됐다. 그런데 그는 집에 돌아가서 죽었다. 감옥에서 굶주리다 집에 간 뒤 음식 조절을 못해 죽은 것이다. 혁이 돌아오자 온성 안전부도 골치가 아프게 됐다. 언제까지 가둬둘 수는 없는 일. 그래서 안전원들은 다른 수감자 가족이 면회를 오면 그 음식을 빼앗아 혁이에게 먹였다. 그는 12월에 다시 전거리로 향했다. 이번엔 합격이었다. 그가 들어가던 날 온성과 무산군에서 호송돼 온 23명이 함께 전거리교화소에 입소했다.#전거리교화소 교화소에 입소하면 제일 먼저 신입반에 배정된다. 교화소에선 가뜩이나 부실한 음식을 다시 급수별로 나눠주는데, 신입반은 제일 양이 적은 4급 밥을 준다. 끌려오기 전에 오랜 감방 생활로 몸이 망가진 상태에서, 4급 밥을 먹으며 혹독한 강제노동에 시달리게 되면 견디기 어렵다. 그래서 신입반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죽는다. 2000년 8월까지 그와 함께 입소한 23명 중 21명이 8개월 안에 죽었다. 죽으면 ‘불망산’이라 불리는 교화소 내부 산에 대충 묻어버린다. 가족에겐 통보도 되지 않는다. 신입반을 마치고 그는 상하차반에 배치됐다.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해오면 그걸 싣고 부리는 일이었다. 나이가 어린 탓인지 그는 감시병 임무를 맡았다. 산에 올라가면 도망을 칠 우려 때문에 나무를 베는 와중에도 5분마다 번호를 부르게 하는데, 그 번호를 부르게 하고, 종합해서 계호원에게 알려주는 역할이었다. 그렇다고 그것만 하는 것이 아니고 나무도 함께 벌목했다. 한번은 늦게 내려오다 개머리판에 맞아 정신을 잃은 일도 있었다. 눈을 떠보니 탈출 의심자로 독방에 끌려갔는데, 5일 정도 있더니 그래도 내려오긴 내려왔기 때문이라며 석방했다. 8개월 뒤 혁은 더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석방 뒤 몸무게는 대략 35㎏ 정도였다. 뼈와 가죽밖에 남지 않아 백 걸음을 걸을 수가 없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그해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55주년을 맞아 김정일이 광폭적인 대사면을 해주라고 지시한 것. 혁은 사면 대상자가 돼 7월 6일에 석방됐다. 그는 나오자마자 중국으로 건너갔다. 2000년 8월 11일이었다. 중국에 가서 청진으로 데려갔던 친구의 집에 가서 의탁해 몸을 회복시켰다. 한 달 정도 있다가 연길로 들어가 농사하는 집에서 일감을 찾았다. 그곳에서 일하고 있을 때 형이 찾아왔다. 형은 벌써 중국에 자리 잡고 있었다. 형은 어느 교회 사역장에 들어가 성경 공부를 하고 있는데, 가끔 한국 사람들도 찾아와서 돈을 준다고 했다. 하지만 하루 종일 방에서 성경을 읽는 것이 오금이 쑤셔 큰 도시로 가겠다고 말했다. 그것이 형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형의 죽음 중국에 살던 중 혁은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데려간다는 사람을 만났다. 혼자만 갈 순 없었다. 형에게 연락해 오게 했다. 그들이 출발하기로 된 날은 2001년 7월 1일이었다. 그런데 직전에 큰 사건이 벌어졌다. 장길수 가족이 6월 26일 베이징 주재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사무소에 진입해 한국행을 요구한 것. 그들 가족은 무사히 한국에 왔지만, 그런 큰 사건이 하나씩 터질 때마다 숱한 탈북민이 피해를 본다. 2002년 3월 탈북자 25명이 베이징 주재 스페인대사관에 집단 진입했을 때도 북중 국경에선 검거선풍이 벌어져 수천 명의 탈북자들이 체포돼 북송됐다. 세계적 주목을 받는 탈북자 집단 진입을 기획한 한국인들은 그것을 내세워 인권운동가로 자처하며 서울에서 살지만, 그 뒤엔 그런 사건 여파로 영문도 모르고 잡혀 비명도 없이 죽어간 수많은 탈북민이 생겨나는 것이다. 장길수 가족의 진입 직후에도 공안은 대대적인 탈북자 색출에 나섰다. 아무 것도 모르고 6월 28일 형을 데리러 갔던 혁은 이틀 전에 형이 공안에 체포됐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한국에 와서도 형의 소식을 수소문했는데, 전거리교화소에 끌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9살 때부터 전국을 누비며 그 어떤 척박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았던 형이지만, 교화소에서 죽음을 피할 순 없었다. 앞서 전거리교화소에서 지옥을 경험했던 혁은 형이 왜 죽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형은 저랑 달리 키도 크고 체격이 좋았어요. 그런 곳에선 체격 좋은 사람이 살아남기 힘들어요.” 아마 형이 끌려갔던 시기엔 정주년을 맞은 기념일도 없어 사면령도 내려지지 않았던 이유도 있을 것이다. 형이 체포됐다고 해서 일행이 모두 지체할 순 없었다. 혁은 7월 1일 몽골 국경을 향해 떠났다.# 철민의 죽음 몽골 국경과 인접한 도시에 갔는데, 사고가 터졌다. 안내해 주기로 한 사람이 전날 체포된 것. 당시 체포된 안내자였던 김권능 씨의 스토리는 2020년 9월 18일자 동아일보에 라는 제목으로 소개됐다. ☞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해당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안내자를 잃은 이들은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왕 여기까지 온 바에 국경을 넘자고 결심했다. 일행은 모두 5명이었다. 혁이와 11살 철민이. 2살짜리 아이를 업은 젊은 여성과 다른 젊은 탈북 남성이었다. 나중에 한국에 와서 여성과 남성은 결혼해 또 애를 낳았다. 그러나 여성은 2015년경 사망했다. 도색을 하는 일자리에서 오랫동안 일했는데, 독성에 중독된 것이다. 일행은 몽골 국경을 향해 사막에 들어섰다. 아무리 걸어도 국경 철조망이 나오지 않았다. 7월 5일 밤 8시에 출발해서 새벽 6시까지 10시간쯤 걸으니 집이 나왔다. 들어가 보니 한족 집이었다. 급히 도망쳤는데 한참을 가서 보니 신고를 받은 공안이 출동했다. 일행은 다음날 아침이 되자 해를 보고 방향을 정한 뒤 다시 사막을 걸었다. 마침내 철조망이 나왔다. 상당한 간격을 두고 철조망이 모두 4개나 있었다. 이걸 다 넘자 탈진할 지경에 이르렀다. 7월의 몽골 사막은 익어죽을 정도로 뜨거웠다. 그 더위에 신기루까지 나타났다. 집인 줄 알고 한참을 갔지만 그냥 바위였고, 철길이 보여 갔는데 역시 그냥 사막이었다. 몽골국경을 넘어 사막에서 헤매기를 몇 시간째. 그의 손을 잡고 잘 따라오던 철민이 끝내 어느 바위 밑에 쓰러졌다. 신발을 잃어버려 옷을 벗어 발을 감싸주며 데려왔는데 어린 나이에 끝내 한계를 넘은 것이다. 일행도 더는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이대로 죽는가 싶어 쓰러져 있던 찰나 혁의 눈에 멀리 집 같은 것이 보였다. 다른 방향에는 오아시스도 있는 것 같았다. 이번에도 헛것이 보였나 싶었지만, 포기 할 수는 없는 일. 혁이 나섰다. “다 같이 갈 필요가 없으니 젊은 내가 먼저 가보고 올게요. 여기서 기다려요.” 정신을 겨우 가다듬고 몸을 질질 끌고 먼저 집을 향해 내려와 보니 기적적으로 비닐하우스 같은 것이 나타났고, 그 옆에 빈집(게르)이 있었다. 그곳은 몽골 국경수비대 초소였다. 초소 안에는 돌 항아리에 담긴 물과 보온병도 있었다. 혁은 빈 병에 물을 채우고 일행에게 돌아왔다. 물을 마시니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다. “그럼 저쪽 오아시스엔 내가 가볼게.” 이번엔 여성이 오아시스로 내려갔다. 오아시스에 다다른 여인은 손을 흔들었다. 물이 맞다는 신호였다. 혁과 남성은 애기와 철민을 데리고 오아시스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철민이 자꾸 주저앉았다. “애기를 먼저 데리고 내려 가고, 내가 다시 올라와 철민이를 업고 갈게.” 혁과 남자, 애기가 먼저 오아시스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도중 여성이 적신 옷을 들고 올라왔다. “철민이는요?” “힘들어 저기 누워있어. 적신 옷을 씌워주고 기다려. 내가 다시 올라갈게.” 오아시스에 이른 혁은 애기를 돌보고, 형이 다시 철민이를 데리려 올라갔다. 한참 있다가 형이 철민을 업고 내려왔다. 그런데 손이 축 늘어져 있었다. 주저 앉아있던 사이 숨을 거둔 것이다. 오아시스에서 이들은 철민의 몸을 물로 씻어주고 그 옆에 쓰러졌다. 더 갈 힘이 없었던 것이고, 여기에 있다 보면 몽골 수비대가 나타날 것이란 희망이 있었기 때문. 실제로 오후 5시쯤 됐을 때 군인들이 나타났다. 몽골 군인들이 장례를 몽골식으로 할 건지 한국식으로 할 건지 물었다. 그들은 한국식으로 하겠다고 대답했다. 수비대 병실 근처에 철민을 묻었다. 흰 백포에 철민을 싸서 묻고 봉분을 만들었고, 술도 부었다. 다음날 이들은 수도 울란바토르로 향했다. 그러나 곧바로 오진 못했다. 도중에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그걸 조사하느라 두 달이나 더 걸렸던 것이다.# 노래 때문에 정착한 부여 2001년 9월 13일 마침내 혁은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도착하니 공항에 총을 든 군인들이 잔뜩 깔려 있었다. 이틀 전 미국에서 9.11테러가 발생했던 것이다. 국정원 조사와 하나원을 거쳐 12월 12일 그는 충남 부여에 정착했다. 하나원 시절 “어디로 가고 싶냐”는 질문에 한국의 지리를 전혀 모르는 그는 답변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북한에서 봤던 ‘민족과 운명’이란 영화가 생각났다. 그 영화에서 ‘부여’라는 이름의 작자 미상의 노래가 나오는데, 백마강이라고 보여주는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기억에 남았다. “따뜻한 봄날에 동무들과 / 백제의 옛 서울 찾았더니 / 무심한 구름은 오락가락 / 바람은 예대로 부는구나”라는 가사를 불러주니 그게 부여라며 부여로 보내주었다. 부여로 가자마자 한국을 실컷 구경하려고 3개월을 떠돌아 다녔다. 다녀보니 정착금으로 받은 1000만 원이 금방 사라졌다. 돈을 벌기 위해 아이스크림 유통업체에 들어갔다. 새벽 4시반부터 오후 6시까지 일해 한 달에 60만 원을 벌었다. 8개월 열심히 일했더니 병을 만나 병원에 입원까지 했다. 그때 그는 깨달음을 얻었다. “돈 쓰긴 쉬워도 벌기는 너무 어렵구나.”#박사가 되다 한국에선 아무 기술도 없이 살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혁은 충남 직업전문학교에 입학해 자동차학과를 1년 동안 다녔고, 마침내 정비기능사 자격증을 땄다. 이후 부여 자동차정비업체에 취직해 1년 반을 다녔는데, 주변에서 “젊었으니 대학에서 공부하라”는 권유를 많이 받았다. 2006년 그는 상경해 카톨릭대 인문학부에 입학했다. 그러나 혁은 평생 공부를 해본 일이 거의 없었다. 나름 머리를 싸매고 열심히 공부했지만, 1학년 성적은 1.87이 나왔다. 통일부에선 이런 성적이면 장학금을 끊겠다고 했다. “애기가 어떻게 옥수수밥을 먹겠습니까. 제발 한 번만 봐주십시오.” 사정사정해서 1년을 더 지원받기로 했다. 2학년 성적은 장학금을 계속 받을 수 있는 기준인 2.5를 넘었다. 기숙사에 살면서 돈도 벌어야 했다. 강남에 가서 식당 알바도 하면서 용돈을 충당했다. 4학년 때 그는 4.5점 만점에 3.75를 받았다. 한 교수가 “가장 부족한 상황에서 입학해 가장 많이 발전한 사람”이라고 소개해주었을 때 성취감으로 뿌듯했다. 2010년 마침내 그는 대학 졸업생이 됐다. 대학 시절 만난 서강대 김영수 교수가 그가 걸어온 삶을 듣더니 자기 대학에 와서 대학원까지 공부하라고 권했다. 그는 내친 김에 대학원에 들어갔다. 공부는 쉽지 않았다. 낮에는 일반대학원 수업을 듣고, 밤엔 특수대학원 수업을 들으며 이를 악물고 공부한 끝에 2012년 석사과정을 졸업할 수 있었다. 대학원을 마친 그는 충남 통일교육센터 전문 강사로 취직했다. 각종 학회를 다니며 열심히 참가했더니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완범 교수가 박사 과정을 제안했다. 그는 2014년 한국학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박사학위는 쉽지는 않았다. 치아까지 녹아내려 임플란트를 심을 정도로 열심히 준비했다. 2019년 마침내 ‘북한 꽃제비 형성과정과 체제로부터 이탈’이란 제목의 박사 논문이 통과됐다. 북한에서 꽃제비로 살던 그가 한국에서 마침내 박사가 된 것. 졸업 이후 경남연구원에 취직해 남북교류협력센터장을 지냈고, 2년 계약 기간이 끝난 뒤 2021년 한국농어촌공사 연구원으로 취직해 지금은 북한 농업기반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2019년 그는 통일교육센터에서 일할 때 간사로 만난 여성과 7년간의 열애 끝에 결혼을 했고, 올해 딸을 얻었다. 박사 논문을 쓰는 내내 곁에서 기다려준 아내가 지금도 너무 고맙기만 하다. #함북 지사의 꿈 지금까지 한국에서 살면서 그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학문의 길로 이끌어준 김영수 교수와 이완범 교수는 그가 꼽는 가장 큰 은인이었다. 아무 연고가 없을 때 자동차정비회사에서 만난 장명기 형도 잊지 못할 은인이다. “그 형을 만나 제가 입에 달고 있던 쌍욕을 끊었어요. 자기 잘못도 아닌데 고객들 앞에서 머리 숙여 사과하고, 분해서 씩씩거릴 때면 뒤에 가서 다독여주었죠.” 그의 결혼식 때 엄마가 앉는 자리에 장명기 형의 엄마가 대신 앉았다고 한다. 기름값이 아까워 떨고 있을 때 자기 집에 와서 살라고 하던 분이었다고 했다. 북한인권시민연합의 김영자 사무국장도 자신에게 인권의 개념을 처음 심어준 엄마 같은 분이라고 했다. 혁이에게 아동인권의 가장 큰 피해자임을 인식시켜주고, 당당하게 한국에서 살 수 있도록 지금까지 이끌어주고 있다는 것. 가톨릭 동창들도 잊을 수 없다. “김수현이란 여자 동기가 있어요. 부모가 장애인이고, 공부하는 와중에 동생들 용돈도 자기가 아르바이트해서 벌어 주어야 하는 정말 어려운 가정환경이었죠. 그런데 그런 친구가 월드비전에 고아를 지원하라고 기부하고 있더라니까요. 충격을 받았죠.” 그걸 보고 김혁도 2006년에 월드비전에 가입해 지금까지 몽골 아동을 후원하고 있다. “제가 몽골이 아니면 여기 올 수 없었잖아요.” 지옥 같은 북한의 삶을 끊어내고 한국에서 얻은 새 삶은 만족스러울까. “여기도 너무 빡세요. 북에선 먹을 것만 고민하고, 생존이 곧 먹을 것을 얻기 위한 것이었는데, 여긴 무엇을 하고,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할지 스스로 만들어야 하죠. 그런 선택이 저에겐 너무 힘들어요. 아마 모든 탈북민들이 같은 고민일 겁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내린 선택이 쌓여 오늘의 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한국은 선택은 어렵지만 노력만 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사회죠.” 그래도 가정을 가진 지금은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집이 충청남도에 있어 전남 나주를 오가는 주말부부로 살지만 딸까지 태어나니 가족에 대한 무한한 책임감이 생긴다고 했다. 통일되면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묻자 그는 대뜸 “함경북도 도지사요”라고 대답했다. 고향에 돌아가 고향 사람들을 잘 살게 만드는 것이 그의 평생의 목표이다. “정말 고생 많이 하고 살았지만, 이게 끝인가 하면 또 저게 나타나고, 저걸 넘으면 그게 또 시작이더군요. 그렇지만 어떻게 온 길입니까. 늘 버티고 버티자 마음 속 다짐을 하고 그렇게 평생 살아갈 겁니다.” 북한에서 7살 때부터 꽃제비가 돼 지옥 같은 삶을 살다가 다른 체제에서 박사까지 이뤘으면 남들이 평생 오르기 힘든 산에 올랐을 법도 하지만, 그의 나이는 이제 겨우 40살이다. 인생을 절반 밖에 살지 않은 것이다. 그가 앞으로 목표라는 산의 어디까지 오를지 알 수는 없다. 산의 정상 어디쯤에서 함북도지사라는 꿈과 만나는 날은 올 수 있을까.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2-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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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호선 기관사가 된 탈북 병사의 꿈[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1995년 초겨울. 북한 강원도 금강군과 김화군 사이에 있는 우두산(948m) 정상의 진지에서 북한군 병사들이 남쪽에서 날아온 삐라 한 장을 놓고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삐라에는 ‘대한민국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 자동차 등록대수 1000만 대 이상. 4명 중 1명이 자동차를 소유’라는 글이 사진과 함께 적혀 있었다. 자동차 1000만 대는 알겠는데, 1만 달러가 도대체 어느 정도 액수인지 가늠할 수 있는 군인이 없었다. “어이, 상등병 한용수 여기 오라. 너는 집에서 달러를 좀 만져봤다니 1만 달러면 어느 정도 액수인지 알 수 있갔지?” 1990년대 초반만 해도 북한에선 달러를 구경해본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산이 많고 먹을 것이 없어 악명 높은 강원도 주둔 1군단과 5군단엔 북한에서도 가장 가난한 집 자식들이 많이 복무했다. 금강군 주둔 1군단 13사 소속 한용수 상등병은 그런 부대 환경 속에서 달러의 가치를 아는, 많지 않은 병사 중 한 명이었다. 그가 입대하기 전 살았던 함흥의 외화상점 앞에선 1달러가 북한 돈 100원으로 암거래됐다. 당시 평범한 노동자 월급이 100원 정도였으니 이는 곧 1달러가 노동자 한 달 월급과 맞먹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1만 달러는 우리 돈으로 바꾸면 100만 원이고, 노동자 1만 개월 치 월급이니까 830년쯤 일해서 꼬박 모아야 되는 돈입니다.” 상상이 안돼 눈을 끔뻑거리는 고참들에게 한 마디 더 했다. “제가 입대하기 전에 함흥에서 아파트를 1만5000원이면 샀는데, 1만 달러면 아파트 70채 정도 사겠네요.” “야 임마, 후라이까지 말라우. 저 남조선 아새끼들이 일년에 그렇게 많이 번다고? 거짓말도 그럴 듯해야 믿지.” 고참들은 도통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한 씨 역시 남조선이 그렇게 잘 산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탈북을 꿈꾸다한 씨가 근무하는 곳에선 한국의 화천댐이 멀리 보였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그 댐을 기준으로 한국군 7사와 21사가 북한군을 경계하고 있었다. 남쪽이 얼마나 잘 사는지는 몰라도 북한군보단 낫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몇 가지 증거는 발견할 수 있었다. 우선 아무리 적진을 살펴봐도 한국군은 삽질과 곡괭이질을 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북한군은 근무 시간을 빼곤 진지 정리니, 철조망 정리니, 길 정비니 하며 삽과 곡괭이를 메고 다녔다. 또 북한군은 물자를 등짐으로 메고 2시간 동안 고지로 올라오는데 비해 한국군 진지엔 헬기로 물자를 싣고 오고 그걸 차로 다시 싣고 갔다. 쌍안경을 통해 본 한국군의 영양 상태 역시 아주 좋아보였다. 남조선은 헐벗고 굶주리는 사회라고 교육을 받았는데, 그건 북한군에 해당되는 말 같았다. 당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북한군에선 무리로 영양실조 환자들이 발생했다. 1992년 8월 입대한 한 씨의 동기들은 입대 후 1년 동안 신병 훈련을 한다는 핑계로 병영 공사만 시켰다. 강원도 그 엄동설한 강추위에도 12월에야 겨울 동복을 지급받기도 했다. 군인들이 영양실조로 픽픽 쓰러져갔지만 아버지 직업에 따라 처리도 달랐다. 그의 입대 동기 중엔 평양의 노동당출판사 문헌국장 아들도 있었다. 평양외국어학원을 나와 입당하기 위해 어려운 곳으로 자원입대했지만 한 달도 버티지 못했다. 그가 영양실조에 걸리자 아버지가 내려와 아들을 데리고 갔다. 그 동기는 다시 볼 수 없었다. 반면 가난한 집 자식들은 죽어도 너무 외진 곳에 부대가 있어 집에서 시신을 찾으러 오지도 못했다. 이걸 보며 그는 생각했다. “아니, 간부 집 자식일수록 당과 수령에게 더 충성해야 하는데 자기들은 먼저 도망치고 쉬운 곳에 가다니. 그리고 이런 특혜를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군과 사회가 문제가 아닌가.” 한 씨는 남쪽을 바라보며 “저기는 어떤 곳일까, 저기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됐다. 경계 근무를 서러 나가서는 “내가 간첩이라면 어디로 침투할까. 내 눈에 안 보이는 그런 곳이 도망가기도 좋은 곳이 아니겠나” 싶어 주변 지형을 계속 유심히 관찰해보는 습관도 생겼다.탈북을 실행하다1995년 6월 12일. 드디어 기회가 왔다. 북한군 최전방 경계는 3인1조 또는 2인1조로 이동한다. 이런 까닭에 도망을 치면 즉시 발각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달엔 갑자기 진지 방어공사와 내무반 공사가 겹쳤다. 병사들은 야간잠복에서 철수하면 낮엔 공사를 해야 했다. 일과표대로라면 낮엔 낮잠을 자야 하지만 일과가 제대로 지켜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고참이 불렀다. “한용수, 오늘은 산에 올라가 나물을 뜯어와.” 부식물이 없어 병사들이 교대로 올라가 산에서 나물을 뜯어 활용했는데, 이것도 평소라면 조를 짜서 이동해야 했지만 작업 인원이 부족해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는 점심용 쌀이 든 배낭을 메고 오전 9시쯤 혼자 산에 올랐다. 최전방은 나물을 뜯을 때도 총과 수류탄 등 완전무장으로 움직여야 했다. 산에 오르며 생각해보니 입대 후 3년 동안 혼자 병영을 나온 것이 처음이었다. 나물 캐러 갔으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누가 찾지도 않을 것이다. 이런 기회는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발걸음이 저도 모르게 전방 철책 쪽으로 향했다. 철책 근처에서 그는 남쪽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탈북을 하려면 경계가 해이해지는 낮이 훨씬 안전했다. 야간엔 경계 근무를 서는 병사들의 신경이 훨씬 날카로워진다. 그의 입대 동기는 동료들의 총에 맞아죽기도 했다. 경계근무를 서던 중 용변을 보려고 잠시 자리를 이탈했다가 돌아오던 중이었는데, 밤에 간첩으로 오인 받았던 것이다. 배고파 쌀을 꺼내 군용 밥통에 밥을 해먹으며 계속 생각을 해봤지만 쉽게 결단이 서지 않았다. 갑자기 골짜기에 대남방송 확성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오후 3시였다. 시계가 없어 시간을 알 수가 없는 전방에선 대남방송이 곧 시계 역할도 했다. 그 소리를 듣자 그는 더는 지체할 여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평소 봐두었던 골짜기로 내려갔다. 장마 때 철조망이 휩쓸려 내려가기 때문에 계곡 개울 위 철책은 일정한 높이를 두고 들려있었다. 철조망을 통과하면 지뢰밭이 나타난다. 그는 강가의 돌 위로 조심스럽게 걸었다. 혹시 몰라 갈대도 꺾어들었다. 언젠가 고참이 갈대를 먼저 휘두르면 말뚝지뢰를 연결한 선에서 기타줄 소리가 난다고 알려준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튕’하는 소리가 울리면 조심히 줄을 찾아 넘어갔다. 한참을 계곡을 따라 내려가자 최전방 민경 초소와 경계 근무를 서는 병사가 보였다. 민경 초소는 200m 정도 빙 에돌아 통과했다. 마침내 북한강 앞에서 마지막 철조망을 만났다. 장마에 쓰러져 있는 채로 보수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 앞에서 그는 다시 30분 정도 앉아있었다. 이제 강을 헤엄쳐 넘으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 가족 생각이 무거운 돌덩이처럼 그를 안고 놓아주지 않았다.점심은 북에서, 저녁은 서울에서한 씨는 함경북도 연사군 신양노동자구에서 태어났다. 주변을 둘러봐도 산밖에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대다수 사람들은 임업에 종사했다. 그렇지만 그의 부모는 북한에서 좋은 대학을 나온 엘리트였다. 부친은 평양의대를 졸업했고, 모친은 만경대혁명학원을 거쳐 원산농업대학을 나왔다. 이들 부부는 어렵고 힘든 곳에 청년들이 지원해야 한다는 노동당의 방침에 호응해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산골로 자원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산골마을 치과의사였고, 어머니는 중학교 생물 선생이었다. 한 씨가 5살 때인 1980년에 당국에서 리비아에 파견할 의사를 모집했다. 부친은 여기에 지원해 1987년까지 리비아에 의사로 나가 있었다. 그동안 모친 홀로 누나와 형, 그와 남동생 4남매를 키웠다. 한 씨가 12살 나던 1987년 아버지가 귀국했다. 귀국하면서 함흥구강예방원 의사라는 직업을 얻은 뒤 가족을 불렀다. 한 씨 가족은 대도시 함흥에서 살게 됐다. 아버지가 벌어온 외화 덕분에 식구는 나름 풍족하게 살았다. 달러를 들고 외화상점에 가서 외국제 물건을 사오기도 했다. 한 씨는 아버지가 들려주는 리비아 이야기를 들으며 바깥세상엔 잘 사는 나라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어머니 역시 6.25전쟁 때 만경대혁명학원을 다니다 중국으로 피난을 가 1957년까지 살았는데, 중국에서 살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추억했다. 한 씨의 학교엔 부모가 다 외국 경험을 해본 학생은 없었다. 부모의 영향으로 한 씨는 자라면서 외국에 대한 동경을 품게 됐다. 1992년 중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가게 됐을 때 집에선 군사동원부(병무청)에 별다른 로비를 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돈이 좀 있는 집은 뇌물을 써서 자식을 군 복무하기 편한 곳에 보내려하지만 한 씨 부모들은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다. 한 씨는 돌을 열 개 던지면 일곱 개가 군인 머리에 떨어진다는 강원도 1군단에 가게 됐다. 그리고 입대 3년 만에 자유의 세상을 향해 부대를 탈출한 것이다. 강 앞에서 가족 때문에 30분을 머뭇거렸지만 다시 돌아가자니 그것도 불가능해보였다. 지뢰밭을 다시 통과해 부대까지 가기도 너무 어려웠고, 또 발각이라도 되면 인생이 끝장날 수밖에 없었다. “에이, 까짓 거. 그냥 가지 뭐” 한 씨는 메고 왔던 총과 수류탄을 강가에 벗었다. 여기까지 올 동안엔 혹시 있을 모를 교전을 각오하며 무기를 휴대했지만 강을 넘어 남쪽에 도착하면 무기를 갖고 있다는 이유로 총알이 날아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비무장 상태라면 훨씬 안전할 것 같았다. 강을 헤엄치기엔 총이 무거운 이유도 있었다. 한국군 초소에 도착하면 흰 면내의를 벗어 흔들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는 북한강에 뛰어들었다. 강을 무사히 건너 한국군 최전방 감시초소(GP)를 향해 골짜기를 타고 올라갔다. 남쪽은 지뢰밭이 어디 있는지 몰라 그냥 정신없이 올라만 갔다. 한국군 초소에 도착했는데 사람이 없었다. 문 앞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기다렸는데도 사람이 나올 기미가 없었다. 그는 돌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군인 한 명이 문을 열었다.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던 군인은 안에다 뭐라고 소리쳤고, 그제야 병사들이 우르르 나왔다. 그는 병사들과 함께 내무반에 들어갔다. 포박하지도 않았다. 젖은 옷을 벗게 하고 운동복을 주며 입으라 했다. 그때가 저녁 6시경이었다. 좀 있더니 헬기가 날아왔다. 그가 북한군 초소에서 늘 보며 부러워하던 헬기였다. 막상 헬기를 타니 좋을 줄 알았는데 시끄럽다는 생각만 들었다. 헬기가 향한 곳은 경기도 성남의 비행장이었다. 서울 상공에 이르렀을 때 정훈장교가 물어봤다. “서울 상공이 멋있죠?” “평양도 이래요.” 그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나중에 차로 63빌딩 앞을 지날 때 조사기관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빌딩이라고 설명하자 그는 “평양에도 105층이 있어요”라고 대답했다. 대답해 놓고 보니 북한이 싫어서 왔는데, 그 와중에 북한을 편드는 듯한 말을 하는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았다. 성남에서 내린 뒤 서울 동작구에 있는 조사기관까지 도착하니 밤 9시가 됐다. 그제야 기다리던 밥이 나왔다. 점심은 북한에서 먹고 저녁은 서울에서 먹게 된 것이다. 하지만 밥이 조그마한 공기에 쪼끔 나왔다. 식판을 보며 그는 생각했다. “유치원생도 아니고, 요것만 주다니. 배고파 죽겠네.”지하철공사에 취직하다조사 과정은 무려 7개월이나 걸렸다. 그때는 한국에 오는 탈북민도 거의 없을 때라 북한군에서 근무한 사람은 조사기관에 오래 붙들어두고 정보를 캐물었다. 가끔 국정원이나 국군, 미군부대에 가서 물어보는 것들을 대답하기도 했다. 그렇게 오래 조사를 받은 뒤 1996년 1월 사회로 나오게 됐다. 지금은 탈북민이 하나원이라는 정착 지원 교육기관을 거치지만 그때는 그런 것이 없었다. 어느 지역에 가고 싶냐고 묻자 한 씨는 “서울만 빼고 아무데나 보내주세요”라고 대답했다. 그가 7개월 경험한 서울은 너무 시끄러웠다. 하지만 정작 그에게 배정된 것은 서울 강서구 가양동의 임대아파트였다. 조사기관을 나올 때 주소지가 서울 방배동으로 돼 있어서 신변 보호는 방배경찰서가 담당했다. 처음 마주 앉았을 때 담당형사는 “이제 대한민국 국민이 됐으니 취직해 돈을 벌고 살아야지. 어떤 일을 제일 잘 하냐”고 물었다. 마침 둘이 만났던 건물 밖에 고가도로가 건설되고 있었다. 공사장을 바라보다가 한 씨는 “삽질, 곡괭이질 잘 합니다”고 대답했다. 실제로 북한군에 입대해서 탈북하기 전까지 가장 많이 했던 일이기도 했다. 담당형사는 그를 데리고 고가도로 현장소장에게 찾아갔다. 현장소장은 처음엔 안 된다고 했지만 쉬는 시간마다 형사가 찾아가 사정하니 와서 일을 하라고 했다. 일단 ‘노가다’ 자리는 얻었지만 이걸 평생 할 수는 없었다. 마침 방배 관할지역에 서울지하철공사(현 서울교통공사) 본사가 있었다. 형사는 이번엔 공사를 찾아가 공사 시험 때 서류를 내라는 답변을 받았다. 시험을 치고 5개월 기다린 끝에 마침내 한 씨는 서울지하철공사 2호선 역무원으로 입사하게 됐다. 첫 업무는 매표소에서 일하며 표를 팔거나 기기를 수리하는 것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21살이었다. 입사할 때 공사 간부가 그에게 말했다. “우리 공사 직원이 1만2000명인데, 당신이 그중에서 제일 어려요.” 실제로 그랬다. 한 씨는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등록금이 비싸 포기했다. 주변 사람들이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고 했지만 자존심이 내키지 않았다. “교회는 하나님 믿으려 가는 곳이지 도움 받으려 교회 다니면 부끄러운 일이죠. 내가 거지도 아니고.” 그는 그렇게 노동을 선택했다. 그는 북에서 사회 경험이 없었다는 것이 어쩌면 다행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제부터 배우는 것이 곧 그가 겪어야 할 사회 생활이기 때문이다.350원짜리 눈물의 딸기우유한국 정착은 쉽지 않았다. 돈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것이 제일 문제였다. 사회에 나올 때 정착금 2500만 원이 든 통장을 받았지만, 돈을 허투로 쓸 것 같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통째로 맡겼다. 그러고 나니 수중에 돈이 하나도 없어 일해서 벌어야 했다. 한 번은 사회에서 알게 된 친구가 손가락을 다쳤는데 수술비가 없다고 했다. 그때 그의 월급이 100만 원이었는데, 수술비는 250만 원이나 됐다. 그는 선뜻 사채를 빌려 수술비를 마련해줬다. 그런데 이게 문제가 됐다. 이자가 무섭게 늘어나더니 계속 사채업자가 찾아와 독촉했다.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몰리자 그는 직접 사채업자 사무실로 찾아갔다. “난 귀순 병사인데, 돈이 하나도 없습니다. 갚을 정도의 이자를 받아야지 이렇게 하면 나를 때려 죽여도 돈을 갚지 못 합니다.” 사장이 그를 어이없이 쳐다보다 생각하더니 “너 이 돈이 어떤 돈인 줄 알고 썼냐. 앞으로 사채는 절대 쓰지 마라. 그리고 빌려간 돈은 매달 나눠서 원금만 갚으라”고 했다. 사무실을 나오며 그는 “사채업자는 조폭인줄 알았더니 이런 사람도 있네”라고 생각했다. 그 돈은 10개월에 걸쳐 다 갚았다. 북한에서 온 형도 알게 됐다. 의지할 데 없었던 그들은 형제처럼 가까워졌다. 형이 어느 날 사업을 한다고 해 2000만 원을 빌려줬다. 하지만 그 형의 사업은 망했고, 그는 감옥에 갔다. 출소해 나온 그의 몰골을 보고 마음이 아파 또 500만 원을 주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한강에 돌 던지기였다. 이후에도 계속 사업을 한다며 그에게 돈을 빌려 쓰곤 또 감옥을 가는 일이 반복되던 형은 결국 끝내 외국으로 도주했다. 나중에 그에게 빌려준 돈을 계산해봤더니 1억2000만 원이나 됐다. 돈을 빌려줄 정도로 여유 있게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직장에 다니기 시작한지 1년 뒤 외환 위기가 찾아왔다. 1998년 어느 날 월급이 나올 때까지는 1주일이 남았는데 주머니에 2000원 밖에 없었다. 2000원을 들고 그는 1주일을 어떻게 살지 생각했다. 퇴근할 때 당산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가양동 집까지 가야 했다. 당시 버스요금이 350원이었다. 그런데 버스를 타고 가면 먹을 것을 살 돈이 없다. 고민 끝에 그는 슈퍼에서 350원에 파는 딸기우유를 샀다. 매일 딸기우유 1팩을 먹는 대신 당산에서 가양 집까지는 걸어가기로 했다. 주변에서 돈을 좀 빌려 그 위기를 극복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남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말을 죽어도 못하는 성격이었다. 지금까지도 그는 남에게 돈을 빌려본 일이 없다.26년 동안 2호선에서만 근무하다한 씨는 1996년 서울지하철공사에 입사해 지금까지 26년째 한 직장에서 근무하고 있다. 역무원 시절에도 구로공단역을 시작으로 방배역, 잠실역 등을 옮겨 다니며 근무했지만 2호선을 벗어난 적이 없다. 2000년 공사에 순환보직제가 도입됐다. 외환위기 때 구조조정을 한 까닭에 인력이 모자라자 역무원인 운수사무직도 운전직에 지원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는 철도의 꽃은 기관사라고 생각해 운전직에 지원했다. 2003년 마침내 차장으로 발탁됐다. 차장은 맨 뒤 기관실에 타고 있다가 승객들이 다 오르면 기관사에게 출발 신호를 보내는 일을 한다. 차장을 하면서 열심히 공부를 해 기관사 자격을 땄고, 2017년 마침내 2호선 기관사 보직을 부여받았다. 2호선은 노선을 한바퀴 도는데 1시간 반이 걸린다. 그는 매일 출근해 3바퀴를 운전한다. 2호선 기관차만 20년 가까이 타다보니 이젠 터널 위에 박힌 벽돌 위치까지 기억할 정도다. 기관사에겐 운전하다가 뭔가 새롭다는 느낌이 들면 그건 뭔가 잘못됐다는 의미다. 항상 같은 풍경을 보며 어두운 터널을 도는 일이 지겨울 법도 하지만 2호선에 대한 그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2호선의 하루 수송 인구는 200만 명이 넘어요. 단일 노선으로 이렇게 많은 승객을 수송하는 지하철은 도쿄 지하철에 이어 세계 2위일 겁니다. 2호선에서 기관사를 하면 전 세계 어딜 가서도 기관사를 할 수 있어요. 서울교통공사가 적자라고 하지만 2호선만 떼어내 보면 흑자 기업입니다. 우리가 공사를 먹여 살린다는 자부심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딴 노선에 옮겨간 사람들이 여기가 편하다고 오라고 해도 이런 자부심 때문에 그는 2호선을 계속 지키고 있다.기관차를 몰고 북으로한국에 처음 왔을 때 그는 군인이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조사 과정에 그 이야기를 하자 조사요원이 “너 또 도망가면 어떻게 하냐”며 웃었다. 탈북한 북한 병사가 한국군에 복무할 규정도 없었다. 그래서 꿈을 접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 그 꿈은 딸에게 옮겨갔다. 한 씨는 2000년 같은 탈북민 출신의 여성을 만나 가정을 이뤘다. 2002년 유일한 자식인 딸이 태어났다. 지금 그 딸은 대학 2학년으로 성장했다. 군사학과를 다니며 부사관 임용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한 씨는 아버지의 꿈을 딸이라도 이룰 수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처음 정착했을 때 학연, 지연, 혈연 등으로 연결된 한국 사람들이 너무 부러웠다. 그때마다 그는 혀를 깨물었다. “이런 사람들과 경쟁하려면 내가 조금 더 잘하는 것으론 안 되겠구나. 더 열심히 살아야겠군.” 회사에 다니며 생활이 안정됐지만 항상 마음엔 대학에 다니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원하던 보직도 얻었고, 가정도 꾸렸고, 집도 샀지만 한국에서 배우고 싶은 열망은 점점 더 커졌다. 마침내 그는 2010년 명지전문대 철도전기학부 전기과에 입학했다. 서울교통공사와 명지전문대가 서로 교육협약 관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2년 반을 다녀 졸업한 뒤 내친김에 전공심화 과정을 2년 더 다녀 학사 자격을 얻었다. 학사 자격을 딴 뒤 한양대 철도시스템 대학원에 입학해 2017년 석사학위도 받았다. 그의 배움에 대한 꿈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020년엔 동양대 경영학 박사과정에 입학해 지금 3학기 째 다니고 있다. 굳이 기관사를 하면서 박사까지 획득하려는 이유가 뭘까. “생활이 안정되니 내가 여기에 밥만 먹고 살려 왔냐는 생각이 들었죠. 목숨 걸고 온 길인데 의미 없이 살면 안 된다고 늘 생각했고, 제가 기관사다보니 그 의미를 철도에서 찾게 됐습니다. 지금도 남북 간에 회담을 하면 철도 연결 문제가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철길을 연결한다고 열차가 바로 운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운영 시스템까지 통합해야 하는데, 만약 통일 이전에 남북 철도가 연결된다고 하면 그 일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남북 정치 상황이 나빠져 서로 왕래가 단절돼도 철도는 멈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그런 시스템을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사실 그의 진짜 꿈은 기관차를 끌고 북에 올라가는 것이다. 탈북민이 한국의 기관사로 기차를 몰고 북한 땅을 다시 밟아보는 것이 희망인 것이다. “제가 기관차를 몰고 북에 가는 것이 전혀 실현 불가능하다고 보진 않습니다. 어쨌든 그러려면 남북 철도가 우선 연결돼야겠죠. 그런 작업부터 참여하고 싶어 박사까지 공부하며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습니다.” 2호선은 매일 수백 만 명의 사람들로 북적인다. 수많은 꿈을 싣고 열차는 빙빙 돌고 또 돈다. 한 씨의 꿈도 오늘 어느 열차에 함께 타고 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2-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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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북관계 패러다임을 바꿀 때다[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

    윤석열 대통령이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6개 항목으로 구성된 ‘담대한 구상’을 대북정책으로 제안했다. 사실 담대함을 따지자면 과거 보수 정부들이 훨씬 더 담대했다.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3000’은 북한의 평균 소득이 3000달러에 이를 때까지 지원해 주겠다고 했고 항목도 6개에 국한시키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시베리아횡단철도(TSR)와 중국횡단철도(TCR)의 연결, 남-북-러 가스관 부설, 송전망 구축 사업 등을 통해 중국과 러시아까지 참여시키려 했다. 인프라도 송배선에 국한시키지 않고, 전력·교통·통신을 다 포괄했다. 남북교류협력사무소 설치, 개성공단 국제화, 지하자원 공동개발, 국제금융기구 가입 주선 및 국제투자 유치 지원 등도 포함됐다. 그러나 대북 제안이 담대한지 소극적인지 하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아무리 좋은 제안을 해도 북한이 거부하면 의미가 없다. 과거 보수 정권 시절 남북관계가 작명과는 오히려 반대로 흘러갔던 것도 제안에 담긴 당근이 작았기 때문은 아니다. 윤 정부의 제안은 ‘북한이 실질적인 비핵화로 전환한다면’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지금 북한은 6차례의 핵실험을 통해 핵무기의 소형화와 수소탄 개발까지 선언한 상태다. 북한이 생각하는 핵무기 가격이 훌쩍 뛰었다는 뜻이다. 훨씬 더 북한에 호의적이었던 문재인 정부에도 상욕을 퍼붓던 북한이 비핵화 대화를 전제로 한 윤 정부의 ‘당근’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짐작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우려할 필요는 없다. 한국 정부가 비핵화를 대북정책의 전제로 내거는 한 아무리 파격적 지원을 해준다 해도 북한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북한은 핵 협상에 있어서 철저히 미국하고만 상대하고 있다. 비핵화와 대북정책을 연계시키는 정책은 진보·보수 정부를 막론하고 성공하지 못했다. 심지어 문재인 정부는 세 번씩이나 김정은과 마주 앉아 회담을 하고도 성공하지 못했다. 이런 관계를 깨달았다면 비핵화와 대북 지원을 연계한 전임 정권들의 접근법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객관적으로 보면 윤석열 정부는 그 어느 정권보다 당당한 대북정책을 펼 수 있는 조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과거 정부의 유산이 없다. 이명박 정부는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은 물론 매년 식량 약 40만 t, 비료 10만 t을 지원하던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이어받았다. 북한은 이명박 정부에 쌀 10만 t, 옥수수 10만 t, 비료 30만 t, 아스팔트용 피치 1억 달러어치를 당당하게 요구했다. 이를 거절하고 옥수수 1만 t을 주겠다고 하자 북한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불과 4개월 뒤 천안함을 공격했고 이어 거리낌 없이 연평도까지 포격했다. 박근혜 정부는 북한의 4차 핵실험 이후 개성공단을 폐쇄시켰다. 이제 남북 간에는 계승할 것이 없다. 원래 줬다 빼앗기가 제일 어려운 법이다. 이제 북한이 문재인 정부도 못 해준 것을 윤 정부에 해내라고 할 일도 없다. 둘째, 코로나가 터진 이후로 북한은 지금까지 셀프 봉쇄를 단행하고 있다. 남북이 서로 마주 앉지 못하는 것은 북한 때문이지 한국 때문은 아니다. 셋째, 한국은 훨씬 부유해졌고, 북한은 훨씬 가난해졌다. 가장 강력한 유엔 대북제재에 이어 코로나 봉쇄까지 겹쳐 북한의 금고와 창고는 이미 텅텅 비었다. 국방력에 있어 한국은 국토가 포격 받아도 소극적 대응밖에 못 했던 과거와 다르다. 반면 북한은 연료와 식량 부족으로 몇 년째 연례 군사훈련도 못 하고 있다. 이젠 남북관계의 패러다임을 유연하게 바꿀 필요가 있다. 왜 항상 우리가 욕설을 퍼붓는 북한에 먼저 다가가야 하는가. 미국과 비핵화 협상을 하겠다면 적극 중재할 의향이 있다고만 밝히면 된다. 코로나 봉쇄를 풀고 경제교류를 할 의향이 있다면, 언제든 만나 북한의 요구를 외면하지 않겠다고만 하면 된다. 먼저 뭘 해주겠다고 말빚을 질 필요도 없고, 북한이 필요한 것을 제시하면 하는 것 봐서 파격적으로 지원해 준다고 해도 충분하다. 끝으로 북한의 도발엔 남북관계 단절을 각오하고 과거 경험해 보지 못한 강력한 반격으로 대응한다는 의지와 대비 태세를 보여줘야 한다. 지금은 남북관계가 단절되면 괴로운 것은 북한일 뿐이다. 시간도 북한 편이 아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2-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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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이자 지급식 채권 불티… 삼성證, 이달 1000억 판매

    삼성증권이 만기 1∼3년의 월이자 지급식 여신전문금융회사채(카드채+캐피털채)를 8월에 1000억 원어치 판매했다고 16일 밝혔다. 월이자 지급식 채권은 매월 정해진 이자를 지급하는 채권으로 최근 금리 인상에 따른 상대적으로 높은 이자를 매월 지급받을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삼성증권이 8월에 판매한 현대카드·현대캐피탈 채권은 신용등급 AA등급의 높은 안정성을 갖춘 선순위채권이고 수익률은 세전 연 3.7∼4%에 이른다. 금리뿐만 아니라 투자원금의 안정성이 높은 채권이라는 점 때문에 입소문이 나면서 투자자들이 몰렸다. 삼성증권이 1일 판매했던 ‘현대카드852’는 만기 1년에 세전 이율이 연 4.00%다. 1억 원을 투자한 고객은 9월 1일부터 매월 세후 약 30만 원의 이자를 1년간 수령할 수 있다. 삼성증권이 판매한 월이자 지급식 채권은 삼성증권 모바일 앱인 엠팝(mPOP), 지점, 고객센터를 통해 상담과 매수가 가능하다. 삼성증권은 1년 만기 상품의 완판에 힘입어 1.5년, 2년, 2.5년, 3년까지 다양한 만기의 월이자 지급식 채권을 출시해 판매상품 다양화에도 나서고 있다. 이달 중에는 400억 원을 추가 판매할 예정이며 매월 2000억 원 규모의 유사한 조건을 가진 월이자 지급식 채권을 꾸준히 공급할 계획이다. 삼성증권 사재훈 채널영업부문장(부사장)은 “단순히 이자 수익률을 높이는 차원에서의 금융 상품 제공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형태의 금리형 상품을 발굴해 개인투자자의 금융 자산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할 것”이라고 밝혔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2-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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