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운

김상운 기자

동아일보 국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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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학술 분야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단행본 ‘국보를 캐는 사람들’(글항아리)을 냈고, 고고학 유튜브 채널 ‘발굴왕’을 제작했습니다. 동아시아 역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sukim@donga.com

취재분야

2025-06-26~2025-07-26
칼럼32%
문학/출판20%
역사13%
문화 일반10%
미술10%
국제일반3%
중동3%
미국/북미3%
국제정세3%
대통령3%
  • [책의 향기]1차 세계대전이 현대예술에 새긴 흔적

    “아내는 ‘볼리 부인의 고양이가 새를 잡아먹었네’, ‘크램프 부인 여동생의 새 드레스가 어떻네’ 하는 시시콜콜한 소식을 들려주느라 바빴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휴가차 잠시 고향을 찾은 영국인 병사는 “전장에서 내가 겪은 얘기를 아내에게 꺼낼 기회조차 없었다”고 친구에게 말했다. 거대한 참호 사이에서 포탄이 작렬하고 살인가스가 퍼지는 전장의 비극은 이해의 범위를 한참 넘어섰다. 1916년 3월 휴가를 나온 프랑스 병사 루이 메레가 평소와 같은 일상을 보내는 동네 이웃들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은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대량 살육전의 효시였던 제1차 세계대전은 가족은 물론이고 사회와 세계로부터 참전용사들을 철저히 소외시켰다. 당시를 겪은 예술인들이 과거의 전통과 권위를 철저히 배격하고 자아에 침잠한 아방가르드 사조에 빠져든 배경이다. 독일 현대사를 연구한 캐나다 역사학자인 저자는 이 책에서 1차대전이 현대인의 의식과 예술에 끼친 영향을 면밀히 추적하고 있다. 거대 담론을 늘어놓는 데 그치지 않고, 병사들의 실질적 체험을 살펴봄으로써 전쟁이 개인에게 남긴 궤적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저자가 머리말에 “아방가르드와 나치돌격대(SA) 사이에 친연성이 있을 수 있다”고 쓴 대로 얼핏 전혀 상관없을 것처럼 보이는 두 개념이 깊숙이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묘파한 후반부가 특히 인상적이다. 젊은 시절 화가를 지망한 히틀러가 1차대전으로 깊은 상처를 입은 독일인들을 동원할 수 있었던 건 이성과 철학이 아닌 감성과 예술이었다. 게르만족을 위한 레벤스라움(생존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죽음의 제전인 전쟁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했다. 처녀를 제물로 바치는 내용의 파격적인 발레 작품 ‘봄의 제전’을 책 제목으로 붙인 이유다. 이 작품을 통해 선율에서 리듬으로 음악의 중심축을 뒤흔든 스트라빈스키의 도발은 어떤 면에서는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2-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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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윤두서가 파격적인 자화상 그린 이유는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의 한국화 전시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을 꼽으라면 추성부도(秋聲賦圖)와 세한도(歲寒圖)다. 단원 김홍도(1745∼1806)가 그린 추성부도는 하얀 달과 앙상한 나무, 흔들리는 낙엽이 어우러져 처연한 느낌을 준다.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제주 유배 시절 그린 세한도는 엄동설한 속 소나무와 외딴집이 갈필(渴筆)로 그려졌다. 둘 다 전체적으로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팬데믹 시대를 맞아 인생무상을 새삼 느낀 때문인지 유독 마음에 남았던 듯하다. 이 책 저자는 세한도 속 소나무가 변함없이 사제의 의리를 지킨 제자를 상징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추사 자신을 투영한 것이라고 말한다. 거친 겨울바람에도 힘찬 가지를 뻗는 소나무를 통해 어떤 어려움도 헤쳐 나가겠다는 의지를 다진 거라는 얘기다. 국문과를 나와 미술사를 전공한 저자는 이 책에서 서양화에 비해 정적으로 인식돼 온 고전 한국화를 운치 있게 해설하고 있다. 제목처럼 그림에서 순간의 장면을 포착해 이에 대한 감상을 흥미롭게 풀어낸다. 마치 시를 읽는 듯이 감칠맛 나는 표현이 고루한 미술사 책들과 차별화된다. 밤에 보면 왠지 무서울 것 같은 그로테스크한 그림, 공재 윤두서(1668∼1715)의 ‘자화상’ 해석도 눈길을 끈다. 몸통 없이 두툼한 얼굴과 세필(細筆)로 그려진 수염만 등장하는 그림은 그 자체로 파격적이다. 더구나 당시에는 초상화는 자주 그렸어도 자화상은 거의 그리지 않았다. 이에 대해 저자는 숙종 때 당파 싸움에서 밀려 출사의 기회를 잃은 화가의 상황에 주목한다. 평생 학문과 그림으로 시간을 보낸 윤두서가 사회적 신분을 상징하는 의관을 생략한 채 자신의 얼굴과 표정, 눈빛에만 집중했다는 것이다. 인물을 그릴 때 외양뿐 아니라 인격 같은 내면세계까지 담아야 한다는 전신사조(傳神寫照)의 원칙이 이 작품에서 빛을 발한 게 아닐까.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2-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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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한중 관계 600년, 냉엄한 역사의 교훈

    “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이 공산주의 독재체제 중국보다 일본을 더 견제하는 건 난센스다.” 민주주의 국가끼리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민주평화론’을 지지하는 자유주의 국제정치학자들은 동아시아 국제관계에 대해 늘 의문을 제기한다. 지역패권을 노리는 중국에 맞서 한국과 일본이 연대해 세력 균형을 추구하지 않는 건 현실주의 시각에서도 의아하다는 것이다. 이런 의문의 배경에는 당연히 ‘역사’라는 변수가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수천 년에 걸친 중국과의 교류와 19세기 말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 말이다. 전작 ‘냉전의 지구사’(에코리브르)로 세계적인 냉전사 연구자로 이름을 알린 저자는 이 책에서 한중 관계 600년을 돌아보며 양국 관계의 특수성에 주목하고 있다. 특히 제목에도 나오는 의(義)는 수직적 질서를 통한 바름을 추구하는 성리학 개념으로 한중 관계에서 ‘복합 주권’을 낳았다는 것. 복합 주권이란 수직적 조공 질서로 종주국에 대한 예를 강조하되, 내치(內治)에서는 철저한 자주권을 보장받았음을 뜻한다. 이는 19세기 이전까지 수백 년에 걸쳐 동아시아에 평화를 가져온 핵심 요인이었다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 문제는 양국의 국력이 강해지고 근대 민족주의가 강화됨에 따라 이 같은 협력 체제가 작동하기 힘들어졌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북핵 위기가 이어지는 국면에서 미중 갈등마저 격화돼 한반도 안보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저자는 북한 체제 붕괴와 같은 급변 사태에서 중국이 한반도에 전통적으로 품어온 가부장적 인식이 작동할 수 있다고 말한다. 중국이 북-중 접경지에서 완충지대를 확보하기 위해 군사적으로 개입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옛 조공 질서로 절대 회귀할 수 없는 21세기 한국이 나아갈 방향은 무얼까. 저자는 중국인에 비해 청 제국을 더 정확히 파악하고 있던 조선 엘리트들의 인식에 주목하고 있다. 결국 무조건적 반중(反中) 혹은 반일(反日)을 넘어 이웃 국가들의 의도를 명확히 파악하는 게 우선 아닐까.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2-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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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잔혹했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탄압사

    러시아의 침공 위협을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궁금증으로 꺼내든 책이다. 현대사 서술에 이르러선 한국 식민지배사와 겹치는 인상을 받았다. 러시아제국과 소련 지배를 거치며 가혹해진 탄압사는 읽을수록 안타까울 정도다. 저자는 우크라이나에서 근무한 일본 외교관 출신이다. 리투아니아, 폴란드, 오스트리아에 이어 18세기 러시아제국에 병합된 우크라이나는 적화(赤化)의 최대 피해자였다. 어찌 보면 소련의 심장부였던 러시아에 비해 더 큰 사회주의 폐해를 겪어야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20∼1921년 우크라이나 대기근. 소련 공산당이 우크라이나 곡창지대의 수확물을 무리하게 징발해 러시아 본토로 보내는 과정에서 발생한 인재였다. 이는 사회주의자들이 몰려있던 도시에 비해 우크라이나 전통이 잘 보존된 농촌지역에서 민족주의가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시련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철권의 독재자 스탈린은 1927년 집권 후 민족주의를 철저히 배격했다. 우크라이나 농민들의 민족주의를 눈엣가시처럼 여긴 스탈린은 1928년 ‘농업 집단화’를 추진했다. 농민들로부터 토지를 빼앗고 집단농장으로 보내는 조치가 이뤄지자, 절망한 농민들은 자포자기에 빠진다. 이들은 자기 소유 가축의 절반 이상을 잡아먹거나 팔아 버렸다. 여기에 소련 공산당의 수확물 강제 할당과 흉년이 겹치면서 1932∼1933년 최대 600만 명의 우크라이나인이 사망한 대기근이 다시 벌어졌다. 러시아 중심부는 멀쩡한 채 유럽 최대 곡창지대에서만 대규모 아사자가 발생한 것이다. 스탈린은 기근의 책임을 우크라이나 공산당원들에게 떠넘겨 약 10만 명이 숙청됐다. 학계에서 이 시기를 유대인 홀로코스트에 필적하는 제노사이드로 규정하는 이유다. 냉전시대 수많은 사람이 희생됐지만 여전히 전쟁 위협을 떠안고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 한국과 우크라이나는 동병상련의 처지 아닐까.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2-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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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김상운]중국몽, 악몽이 되는 순간…140년 전 임오군란의 교훈

    수년 전 중국 지린(吉林)성 류허(柳河)현 신흥무관학교 터를 여럿이 답사했을 때의 일이다. 한적한 시골 벌판에서 학교 흔적을 찾고 있는데, 낯선 중국인이 이쪽을 한참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다가와 이곳에 왜 왔는지, 무엇을 찾는지를 집요하게 캐물었다. 당시 일행 중 한 교수가 지안(集安) 광개토대왕릉비 답사 때 중국 공안이 계속 따라다니며 자신을 감시한 경험을 들려줬다. 신흥무관학교는 이회영 안창호 신채호 등이 1911년 설립한 항일투쟁 기지로, 3500명의 독립투사를 양성한 곳이다. 중국이 소수민족 동향에 민감하다고 하지만, 민간 학술조사까지 감시하는 행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국가와, 사회 전반에 노골적인 감시체제가 작동하는 국가 사이에는 거대한 심연(深淵)이 자리 잡고 있는 게 아닐까. 제2차 세계대전의 변곡점이 된 1941년 나치의 소련 침공 당시 스탈린이 보낸 지원열차가 여전히 독일을 향하고 있었다. 독소 불가침 조약에 집착한 스탈린이 나치의 침공 가능성이 높다는 소련 정보당국의 보고를 끝까지 무시했기 때문이다. 미 국무장관을 지낸 헨리 키신저는 저서 ‘외교(diplomacy·1994년)’에서 대독 유화책으로 대응한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와 스탈린 모두 히틀러의 본성과 의도를 오판해 피해를 키웠다고 지적한다. 그만큼 전환기 국제관계에서는 기존의 판을 바꾸려고 시도하는 국가의 진의(眞意)를 정확히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이는 동아시아 지역정세의 판도를 바꾸려는 중국에도 해당되는 얘기다. 최근 베이징 겨울올림픽에서 반중 정서를 계기로 ‘중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논의가 다시 불붙고 있다. 중국의 부상이 한국을 포함한 주변국에 위협이 될지에 대해선 학계에 상반된 시각이 존재한다. 예컨대 국제정치학자 데이비드 강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 교수는 과거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조공질서가 안정적으로 운영됐음을 상기시키며, 부상하는 중국과 주변국의 협력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중국은 이미 19세기 청나라 때부터 동아시아에서 팽창주의로 돌변했다는 시각도 있다. 김기혁 전 미국 데이비스 캘리포니아대(UC데이비스) 교수는 지난달 국내에 번역 출간된 ‘동아시아 세계질서의 종막’에서 19세기 후반 청은 종주국으로서 의례적 권한만 행사할 뿐, 조공국 내정에 간여하지 않는 조공체제 전통을 어기고 팽창주의를 추구했다고 썼다. 아편전쟁 후 서구 열강에 침략당한 중국이 일본, 러시아에 맞서 조선을 확보하기 위해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조선 내정에 깊이 개입했다는 것. 이홍장(李鴻章)은 임오군란 직후 청군 파병과 대원군 납치를 주도하며 수도 베이징과 가까운 한반도는 자국 안보에서 ‘핵심 완충국’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이로부터 68년 후 6·25전쟁 때 주변 참모들의 반대에도 마오쩌둥(毛澤東)이 참전을 결정한 이유와 정확히 같다. 국가안보를 위한 한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에 경제보복으로 응수하는 중국의 행태는 주변국에 신뢰는커녕 불안만 안겨줄 뿐이다. 중국몽의 이면에 도사린 진의에 경각심을 갖고, 끊임없이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다.김상운 문화부 차장 sukim@donga.com}

    • 2022-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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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조선 개항 이끈 중국 팽창주의 속내는

    1882년 6월 조선 군사들이 궁궐에 난입한 직후 일본과 청은 즉각 출병에 나선다. 일본이 군함과 300명의 병력을 제물포로 보낸 데 이어 청이 광둥(廣東) 주둔군을 중심으로 3000명의 병력을 남양만에 상륙시킨다. 일촉즉발의 위기에 양국 간 교섭이 시작되고, 청군은 군란의 배후에 있던 대원군을 톈진(天津)으로 납치하기에 이른다. 미국 캘리포니아 데이비스대(UC데이비스) 교수로 동아시아 근대사를 연구한 저자는 이 책에서 19세기 후반 한중일 3국 간 국제관계가 근대 세계질서로 편입되는 과정을 추적했다. 저자는 특히 중국 중심의 조공 체제가 와해된 역사적 사건으로 임오군란을 바라보고 있다. 당시 청은 군란을 진압한 후에도 한반도에 군대를 계속 주둔시키며 조선 내정에 깊이 간여했다. 이는 유교 질서에 따라 종주국으로서 의례적 권한만 행사할 뿐, 조공국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 조공 체제 전통과 어긋나는 행태였다. 중국이 이처럼 팽창주의로 기운 건 당시 일본, 러시아의 동아시아 침투가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북중국은 물론 수도 베이징과도 멀지 않은 한반도는 자국 안보에 있어 핵심 완충국이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건 아편전쟁 이후 서구 열강과 굴욕적 외교 조약을 맺은 청이 조선에 열강과의 조약을 통한 개항을 요구한 점이다. 이는 서구 열강들을 끌어들여 일본,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이른바 변형된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조선이 대등한 주권국 간의 외교 행위를 근간으로 하는 ‘근대 세계질서’에 편입되는 걸 의미했다. 다시 말해 이 책 제목이 암시하듯 종주국을 정점으로 한 동아시아 세계질서가 사라지는 종막(終幕)이었던 셈이다. 최근 베이징 겨울올림픽 판정 논란으로 반중 정서가 팽배한 가운데 중국을 어떻게 볼 것이냐가 화두가 되고 있다. 6·25전쟁의 분수령이 된 마오쩌둥의 참전 결정 이전에 19세기 청의 팽창주의가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 세계질서를 바꾼 한 축이었음은 의미하는 바가 적지 않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2-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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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군부 시절 서울올림픽 포기한 전두환 찾아가 설득”

    “서슬 퍼런 신군부 시절이니만큼 대통령 지시를 거스른다는 게 사실 부담스러웠죠.” 올해 구순을 맞은 장충식 단국대 명예이사장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전두환 정권의 서울올림픽 유치 포기 지시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최근 기자와 만난 그는 신작 에세이 ‘학연가연’(노스보스)에서 약 50년간 단국대 총장과 이사장을 지내며 만난 정치인, 학자, 예술인과의 인연을 맛깔나게 풀어냈다. 장 명예이사장은 베이징 아시아경기 한국선수단장, 남북체육회담 한국대표,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역임한 스포츠 외교 전문가다. 제5공화국 초기인 1981년 2월 청와대는 박정희 정부가 추진한 서울올림픽 유치 프로젝트를 포기하기로 결정한다. 과도한 개최비용 때문에 경제개발에 부담이 된다는 게 이유였다. 당시 이상주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이 대한체육회 부회장을 맡고 있던 그를 불러 “대통령 지시이니 유치 사업을 포기하는 결의를 해 달라”고 통보했다. 하지만 그는 이 자리에서 이를 따를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체육인으로서 올림픽 유치가 국가발전에 끼치는 막대한 영향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통령을 찾아가 올림픽 유치 약속을 이제 와서 깨면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신뢰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설득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비장의 카드’를 썼다. 대학시절 함께 땀을 흘리며 친해진 동갑내기 노태우 전 대통령(당시 정무 제2장관)에게 SOS를 친 것. 그와 노 전 대통령은 각각 서울대와 육군사관학교 럭비부 선수 출신이다. 그의 논리적인 설득과 실세 장관의 도움이 합쳐져 결국 전두환 정권은 서울올림픽 유치로 방향을 틀었다. 그 후 그는 정부 인사들과 작전을 짰다. 개최지 결정에서 영향력이 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주요 인사들을 단국대로 초청해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하는 등 수완을 발휘했다. 그의 스포츠 외교는 남북관계와 한중수교에도 기여했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아경기를 앞두고 장바이파(張百發) 전 베이징시 부시장이 평소 친분이 있던 그에게 “각국 선수단장과 임원들이 이용할 차량 500여 대를 지원해줄 수 있느냐”는 요청을 해왔다. 당시 중국에는 변변한 자동차 생산 공장이 없을 때였다. 장 명예이사장은 대한체육회 활동으로 친해진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에게 부탁해 차량 제공 약속을 받아냈다. 이후 한국선수단의 민원은 1순위로 해결됐다. 그는 “당시 남북 갈등을 우려해 주최 측이 양측 선수단 숙소를 일부러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았다”며 “같은 민족끼리 자주 봐야 한다는 생각에 숙소를 근처로 옮겨달라고 중국 측에 요청했다. 남북한 선수들이 숙소를 드나들며 자주 마주치다보니 나중에는 서로 친해졌다”고 말했다. 베이징 아시아경기 준비 과정에서 돈독해진 한중관계는 2년 후 한중수교에도 도움이 됐다. 구순에도 에세이와 더불어 소설 ‘눈물’(노스보스)을 최근 발표한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봤다. “50년 동안 학교 일을 하고서 자리를 내놓고 나니 허전했어요. 이제는 소설가로 변신하려고 합니다. 정치인이 등장하는 소설을 쓰고 싶어요.”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2-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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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린이 책]슬퍼하지 말자, 설날은 내년에도 돌아오니까!

    여자 아이 자오디는 매년 그렇듯 춘제(春節)를 맞아 식구들이 사는 중국 산시(山西)성 농촌 마을을 찾는다. 화약놀이로 온 동네가 시끌벅적할 무렵 외삼촌이 만들어준 초롱불을 켜고 친구들과 어울린다. 이곳에서는 옛적부터 외삼촌이 어린 조카에게 춘제에 쓸 초롱과 초를 보내주는 풍속이 있다. 수박, 소똥, 연꽃 모양 등 형형색색의 초롱불을 밝히며 아이들은 한껏 들떠 있다. 그렇게 즐거웠던 춘제 연휴는 정월대보름에 끝난다. 이날 아이들은 초롱을 서로 부딪치며 한데 모아 불태운다. 초롱이 아까워 태우지 않으면 사랑하는 외삼촌이 눈병을 앓는다는 속언이 있단다. 자오디는 불타는 초롱을 보며 슬퍼하지만 그날 밤 꿈속에서 초롱의 따스함을 느끼며 말한다. “내년에도 설날은 돌아올 거야!” 작가의 어린 시절이 담긴 이 책은 정월 초하루부터 대보름에 이르는 중국 농촌의 설 풍경을 정감 어린 색채로 표현했다. 우리와 다른 중국의 새해 풍속을 통해 문화 다양성을 체험할 수 있는 그림책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2-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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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미국이 독립전쟁에서 이긴 비결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이 군사전략가로 크게 성장한 계기는 영국과 프랑스가 아메리카 대륙의 패권을 놓고 벌인 프렌치 인디언 전쟁(1754∼1763년)이었다. 당시 영국군 장교로 복무한 그의 경험이 아이러니하게도 영국에 맞선 독립전쟁에서 빛을 발하게 된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 초기 영국은 굴욕적인 패배를 맛보게 되는데, 이때 워싱턴이 정보전의 중요성에 눈을 뜨게 되었다는 게 영국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앤드루의 주장이다. 최근 번역 출간된 그의 저서 ‘스파이 세계사’(한울)에 따르면 워싱턴은 독립전쟁에서 적극적으로 스파이를 활용하며 지구전으로 버틴 끝에 세계 최강 영국군을 이길 수 있었다. 미국 역사학자로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를 지낸 저자는 미국 건국 과정을 추적한 이 책에서 아메리카인들의 ‘대의’가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분석한다. 원서 제목 ‘위대한 대의(Glorious Cause)’가 상징하는 무도한 권력으로부터의 자유가 식민지인들의 단합을 이뤄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아메리카 대륙과 4800km나 떨어져 신속한 보급이 불가능했던 영국이 원정군을 동원한 전격전을 선호한 반면, 아메리카군은 대규모 징집군 중심의 전쟁을 수행한 사실에 주목한다. 이런 국민개병제 형태의 식민지군에서는 징집된 시민들의 전투 의지를 어떻게 고취시키느냐가 관건이었다. 그런데 당시 영국 정부는 식민지 의회와 상의도 없이 아메리카에 별도 과세를 강압적으로 부과하는 우를 범했다. 사유재산권 행사를 자유의 근본으로 본 아메리카인들이 워싱턴이 부르짖은 대의에 호응하게 된 배경이다. 퓰리처상 후보에 오른 원서를 세 권으로 나눠 번역한 이 책은 ‘옥스퍼드 미국사’ 시리즈의 첫 책이기도 하다. 시리즈의 책임편집자가 책 끝부분에 밝힌 대로(“저자들은 일반 교양인이 읽기 쉬운 텍스트를 써내야 한다”) 인물 이야기 중심으로 미국 초기사를 흥미롭게 풀어냈다. 독립전쟁 당시 점령지 현황과 병력 이동 루트 등 다양한 컬러 도판을 곁들여 읽는 맛을 살렸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2-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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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속주민 목숨 건 충성 비결은 로마 시민권

    “막시무스 자네에게 로마는 뭔가?” “제가 봐왔던 세상은 잔혹함과 암흑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로마는 달랐습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2000년) 중 주인공 막시무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대화다. 로마 변경 히스파니아(스페인 및 포르투갈) 출신의 장군 막시무스가 가족을 떠나 게르마니아 정복전쟁에 나선 건 오로지 로마의 영광을 위해서였다. 로마 점령 직후 어쩌면 노예가 됐을지 모를 속주민 출신이 ‘팍스 로마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충성한 것이다. 이유가 뭘까. 그것은 3세기 무렵 모든 속주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 정책과 관련이 깊다. 재판을 거치지 않고는 공권력에 의한 처벌을 금지한 시민권의 확대는 로마제국 성립에 필수였다. 역사학, 법학, 문학, 건축학 등을 전공한 8명의 학자가 공저한 이 책은 그리스, 로마시대 시민의 의미를 다각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단순히 공자 왈 맹자 왈만 하는 게 아니라 고대 시민의 개념이 자유민주주의를 구가하는 현대에 어떻게 재해석될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 저자에 따르면 고대 아테나이(아테네)에서 가장 핵심적인 시민의 권리는 누구나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는 뜻의 ‘파레시아(parrhesia)’였다. 현대 개념으로는 언론의 자유에 가까운 파레시아는 정치, 경제, 법률, 복지 등 모든 사회영역에서 개인의 권리를 확보하는 데 필요한 기본권이었다. 문제는 플라톤의 지적대로 악한 시민이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파레시아를 행사할 때 사회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기원전 415년∼기원전 413년 아테네가 시켈리아 원정을 놓고 의견 대립이 벌어졌을 때가 대표적이다. 아테네의 유명 정치가였던 알키비아데스는 선제공격의 이점을 들어 원정을 주장한 반면 니키아스는 위험성을 이유로 반대했다. 결국 알키비아데스의 주장대로 아테네군은 원정에 나서지만 정작 사령관을 맡은 그는 적국 스파르타로 넘어간다. 본국에서 제기된 재판도 원인이었지만 나중에 페르시아로 다시 망명해 그리스 전역에 해를 끼친 행위로 미뤄볼 때 그의 파레시아는 진정 공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게 저자의 결론이다. 권력을 얻기 위해 포퓰리즘 연설을 쏟아내는 21세기 정치인들도 마찬가지 아닐까.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2-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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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김상운]미접종자 차별과 자유민주주의 위기

    “제2차 세계대전 때 게토지역 유대인들이 가슴에 단 노란 별이 떠오른다.” 최근 한 대형 커피전문점이 손님 중 미접종자의 컵에 노란색 스티커를 붙여 논란이 됐다. 이 소식을 접한 이들은 미접종자에 대한 조치가 독일 나치의 인종차별을 연상시킨다는 반응을 보였다. 해당 기업은 “방역패스를 제대로 확인하려는 의도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출입구에서 QR코드를 스캔할 때마다 “접종 완료자입니다” 혹은 ‘딩동’ 소리(미접종자)가 울리는 것도 공공장소에서의 개인정보 노출이라는 지적이 있다. 방역이라는 공공 가치를 달성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는 하지만, 개인의 기본권이 필요 이상으로 제한되고 있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14일 서울행정법원이 서울시내 대형마트와 백화점에 대한 방역패스 효력을 정지시킨 것도 이 같은 지적을 일정 부분 수용한 결과다. 역사적으로 전쟁이나 자연재해, 팬데믹 같은 비상 상황에서 이른바 ‘비상대권(非常大權)’이 발동된 사례를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대권이 정치권력에 악용되곤 했다. 예컨대 1793년 프랑스 혁명정부는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논객들을 무더기로 체포하는 등 프랑스혁명의 핵심 가치인 표현의 자유를 말살하는 모순을 저질렀다. 공화제에 반대하는 오스트리아, 영국,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면서 이들과 연계된 ‘반혁명분자’를 일소하기 위한 조치라는 게 그 이유였다. 우리 시대의 석학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최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우려한 ‘생명정치 현상’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 전 장관은 “독재자를 피해선 도망갈 수 있지만 지금은 도망가면 백신도 맞을 수 없다”며 “각국 지도자들이 백신을 배급해 생명을 살려주는 신과 같은 존재로 군림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사실 자유민주주의의 후퇴는 팬데믹 이전부터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탈냉전 이후 자유주의의 승리를 예상했지만, 미국과 갈등 중인 중국, 러시아에 이어 동유럽 민주주의 모범국으로 불린 헝가리, 폴란드마저 권위주의 체제로 퇴행했다. 국내 상황도 이와 무관치 않다. 지난해 여당이 언론중재법 개정안 입법을 추진하자 세계신문협회는 “개정안이 그대로 처리되면 한국 정부는 자유롭고 비판적인 논의를 억제하는 최악의 권위주의 정권에 속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비상 상황이라도 기본권을 과도하게 침해하는 건 용납될 수 없다는 게 자유민주주의의 근본 원칙이다. 이 원칙은 저절로 지켜지지 않는다. 로버트 케이건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최근 국내에 번역 출간된 ‘밀림의 귀환’(김앤김북스)에서 정원을 끊임없이 가꾸듯 자유주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자유에 대한 갈망 이상으로 통제와 질서에 복종하려는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민주정체는 언제든 권위주의 독재 체제로 회귀할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헝가리, 폴란드 사례가 대표적이다. 팬데믹 장기화로 사회 전체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한국 자유민주주의의 민낯이 드러나는 시험대가 될 것이다.김상운 문화부 차장 sukim@donga.com}

    • 2022-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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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역사에 길이 남은 탐험가들의 스케치

    험준한 산맥 앞으로 펼쳐진 드넓은 설원. 등짐을 진 두 명의 티베트인이 하얀 눈밭에 발자국을 새긴 채 종종걸음을 친다. 이들 옆으로 거센 바람에 날아가는 걸 막으려는 듯 돌들로 고정한 누런 천막이 서 있다. 그 안에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두 명의 탐험가들. 이 광막한 자연 앞에 선 두 사람은 어떤 대화를 하고 있을까. 이 책에 소개된 스웨덴 지리학자 스벤 헤딘(1865∼1952)의 1908년 현장 스케치다. 그 자체로 한 폭의 광활한 풍경화인 이 스케치는 아마추어 화가가 현장에서 슥슥 그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중앙아시아 실크로드 탐사로 유명한 헤딘은 로프노르 호수와 인더스강의 수원(水源)을 발견한 데 이어 신장지역에 잔존한 만리장성 유적을 찾아냈다. 그런 그가 그린 중앙아시아, 티베트의 자연과 유적 스케치에는 이곳에 목숨을 건 한 탐험가의 벅찬 감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스마트폰이나 노트북이 아닌 종이와 펜이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영국 역사가와 출판인 부부가 공저한 이 책은 극지부터 열대지역에 이르기까지 세계 오지들을 찾아 헤맨 탐험가 75명의 스케치를 소개한다. 이를 통해 탐험가들의 생생한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 마치 스케치북처럼 일반책보다 긴 가로 크기(30cm)에 넉넉히 실린 그림들은 탐험가들의 실제 노트를 넘겨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찰스 다윈(1809∼1882)이 1830년대 방문한 칠레 티에라아마릴라 해안 스케치도 눈길을 끈다. 사선과 가로줄로 이어진 지층 단면들을 채색까지 해가며 파노라마식으로 그린 그림이다. 진화론을 창시한 그가 생물학뿐 아니라 지질학 곤충학 광물학 등 다양한 자연과학 분야에 관심을 기울였음을 보여준다. 저자는 5년간 영국 해군조사선 비글호를 타고 남미 각지를 둘러보고 기록한 다윈의 노트가 역사적 저작 ‘종의 기원’의 원천이 됐다고 말한다. 탐험가들의 순간적 감상이나 아이디어를 빠르게 담아낸 스케치를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이유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2-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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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왕건의 만부교 사건… 자주냐, 실리냐

    “태조의 뜻은 옛 고구려 땅을 대대로 전해온 보배로 생각하고 석권하려 한 것이다.”(충선왕) “거란 사신을 정성으로 접대해 동맹을 맺는 게 나라를 보호하는 방책이었다.”(유계) 만부교 사건에 대한 고려시대 충선왕(1275∼1325)과 조선시대 유계(1607∼1664)의 역사적 평가는 이처럼 극과 극이었다. 만부교 사건이란 942년 태조 왕건이 거란 사신들을 유배에 처하고, 이들이 가져온 낙타 50필을 만부교 아래 묶어 놓아 굶겨 죽인 사건이다. 당시 발해를 멸망시키고 중원으로 뻗어나가던 거란을 상대로 한 왕건의 외교 행태는 두고두고 논란이 됐다. 충선왕을 비롯한 고려인들은 왕건의 강경 대응을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북진정책’으로 보고 높게 평가했다. 이는 변태섭 등 현대 사가들도 공유하는 시각이다. 반면 사대교린(事大交隣)을 외교의 근본으로 여긴 조선 전기 역사가들은 왕건의 대응이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했다며 비판했다. 실제로 이후 고려는 세 차례에 걸친 거란 침입을 받아 1011년(현종 2년) 수도 개경이 함락당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조선인들의 꽉 막힌 성리학 사변주의로만 치부하기 힘든 대목이다. 이 책은 고려시대의 다양한 인물을 당대인과 조선인의 시각에서 비교 재평가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여기에 현대 역사학계의 시각도 곁들여 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어떤 변천을 겪는지 한눈에 보여준다.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로 고려 왕권을 단단히 다진 인물로 여겨지는 광종에 대한 평가도 큰 변화를 겪었다. 예컨대 광종 재위 기간 고위 관료였던 최승로와 서필은 광종이 지방호족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피를 흘리게 했다며 비판적이었다. 반면 조선 후기 문인 이종휘는 “쌍기 같은 외국인까지 중용하는 등 재능 있는 인재를 널리 구했다”며 광종을 칭찬했다. 한 인물을 둘러싼 상반된 평가들을 보고 있노라면 삶의 궤적을 재단하는 시도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2-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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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1930년대 위기로 회귀한 국제질서, 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위협부터 중국의 대만 수복 위협까지 요즘 세계 정세는 70여 년 전으로 되돌아간 인상을 주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더불어 영토를 둘러싼 ‘땅따먹기’식 국가 갈등은 해묵은 유물이 됐다고 봤다. 그러나 얄궂게도 인류는 진보의 방향으로만 나아가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미국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인 저자는 이 책에서 위기에 처한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경찰국가로서 미국의 책임이 느슨해진 틈을 타 중국, 러시아 같은 권위주의 독재국가들이 부상하고 있는 현 국제 질서는 마치 2차대전 직전의 1930년대로 회귀한 양상이라고 분석한다. 이라크전쟁, 아프간전쟁 등으로 개입주의에 염증을 느낀 미국인들의 고립주의 성향은 이런 흐름을 부추기고 있다. 문제는 민주정체와 자유무역을 큰 축으로 삼고 있는 자유주의 국제 질서가 세계사에서 지극히 예외적 상황이라는 점이다. 저자가 볼 때 자유에 대한 갈망 이상으로 통제와 질서에 복종하려는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민주정체는 언제든 권위주의 독재체제로 돌아갈 위험을 내재하고 있다. 1차대전 직후 독일에서 민주정치를 꽃피웠던 바이마르 공화국이 나치에 의해 전복된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에 저자는 밀림에 뒤덮이지 않도록 아름다운 정원을 끊임없이 가꿔야 하듯 자유주의 국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 노력의 핵심은 결국 미국이 세계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는 게 저자의 결론이다. 구체적으로는 브렉시트나 유로존 위기 등에 미국이 적극 개입하고,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 같은 악수를 반복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압도적 군사력을 확보해 중국 등 위협 국가를 철저히 억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얼핏 우리나라와 무관해 보이는 얘기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동아시아에서 지역 패권을 추구하는 중국 때문이다. 저자는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자유주의 질서를 계속 수호할 의지가 없다고 중국 지도자들이 판단할 때 한국 등의 운명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고 단언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2-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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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도한 정치권 개입, 수백 년 기록유산 망친다 [광화문에서/김상운]

    강원 평창군 월정사는 전나무 숲길로 유명하다. 사찰 입구에서 일주문에 이르는 산책로는 울창한 나무들을 가까이에서 감상할 수 있어 인산인해다. 반대 방향의 상원사로 가는 산책로는 상대적으로 관광객들이 적은 편이다. 그런데 바로 이 길 중간 외진 곳에 중요한 역사 현장이 감춰져 있다. 흔히 ‘오대산 사고(史庫)’로 불리는 사각(史閣)과 선원보각(璿源寶閣)이다. 화려한 단청의 2층짜리 전각인 두 건물(6·25전쟁으로 불타 1992년 복원)에 조선왕조실록과 의궤 등이 약 300년간 보관돼 있었다. 임진왜란에 상당수 실록을 잃은 조선왕실이 선조 39년(1606년) 삼재(三災)를 막을 수 있는 최고의 길지로 이곳을 낙점했다. 그러나 풍수지리도 일제 약탈을 피할 수는 없었다. 1913년 총독부에 의해 오대산본 실록이 도쿄제국대로 옮겨졌다가 2006년에야 고국으로 환수됐다. 최근 오대산본 실록과 의궤가 정치권 및 문화재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인 더불어민주당 이광재 의원이 현재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오대산본을 원래 있던 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며 23일 국회에 결의안을 제출한 것. 결의안에는 강원도를 지역구로 둔 여야 국회의원 등 63명이 서명했다. 앞서 17일 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가 이 의원 등과 함께 월정사를 방문해 주지 정념 스님과 면담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민주당 정청래 의원이 사찰의 문화재 관람료 징수를 ‘봉이 김선달’에 비유해 불교계가 거세게 반발하자, 여당이 대선을 앞두고 불심 달래기에 나선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사실 문화재가 오랜 세월 터 잡은 장소의 역사성을 무시하기는 힘들다. 실록을 전란과 재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오대산 깊은 산중에 사고를 세운 선인들의 정성을 감안하면 더 그렇다. 그러나 국보에 이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귀중한 문화재를 제대로 보존, 관리할 수 있느냐는 현실적인 문제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월정사와 강원도 등 지방자치단체는 사찰 경내 설립된 왕조실록의궤박물관에서 보존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문화재청과 평창군에 따르면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설치된 수장고 밀폐장(외부 공기를 차단해 화재로 인한 소실을 막는 장치)이 왕조실록의궤박물관에는 없다. 또 실록이나 의궤 특성상 전시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이를 다른 문헌과 대조하며 조사 연구하는 기능도 중요하다. 24명의 학예직 공무원으로 구성된 국립고궁박물관은 오대산본에 대한 연구논문집을 2011년에 펴냈다. 문화재계에서는 오대산본의 왕조실록의궤박물관 대여전시를 대안으로 거론하고 있다. 무엇보다 우려되는 건 전문성이 요구되는 문화재 분야에 대한 정치권의 과도한 개입이다. 여당 일각에선 임기가 5개월밖에 남지 않은 현 정부에서 오대산본 이전을 마무리 짓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 기간에 전문가나 주무관청과 제대로 된 협의를 거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우리는 과거 정부에서 정치권의 입김으로 경주 월성 발굴이 ‘속도전’으로 치달아 문제가 된 전례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김상운 문화부 차장 sukim@donga.com}

    • 2021-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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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치 앞이 궁금한 인간, 미래를 점쳤네[책의 향기]

    영화 ‘테넷’과 ‘백투더퓨처’, ‘터미네이터’의 공통점. 미래를 미리 내다볼 수만 있다면 온전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는 믿음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샤머니즘의 존재에도 투영돼 있다. 샤먼들은 춤이나 환각제 등을 통해 일상의식을 벗어난 상태에서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고 여겨졌다. 별이나 동물의 뼈, 장기 모양을 보고 점을 치는 행위도 마찬가지. 현대에 들어서는 샤먼이나 점쟁이의 역할을 과학자나 인공지능(AI)이 대신하고 있다. 과연 미래를 예측하는 건 가능할까? 그리고 바람직할까? 전쟁사학자로 이스라엘 히브리대 교수인 저자는 이 책에서 미래를 예측하고자 한 인류의 다양한 시도를 들여다보고 있다. 그에 따르면 미래를 내다보는 방법은 역사가 순환 반복된다는 관점과 그렇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관점으로 크게 나뉜다. 예컨대 사마천 사기 등 동서양 고전들에서 현재와 유사했던 과거를 찾아 해답을 구하는 방식이 전자에 해당한다. 과거와 현재에 이르는 추세를 연구하고 이를 미래에 적용하는 ‘외삽법’이나, 모순을 통한 정반합의 변화를 추적하는 ‘변증법’은 후자에 속한다. 진화심리학자 스티븐 핑커는 일종의 외삽법을 이용해 인간의 폭력성이 갈수록 줄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인류 미래를 긍정적으로 전망한다. 반면 헤겔의 변증법 전통을 이어받은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모순이 불러올 계급투쟁의 혼란을 예언했다. 그런데 문제는 샤머니즘 등에 비해 훨씬 과학적이라는 예측법들도 객관성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추세나 변화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에 각자의 감정이 개입될 수밖에 없어서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생각 자체는 그저 감정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니체의 말을 인용한다.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첨단 AI가 제공하는 확률 데이터도 미래 예측에는 허점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와 이를 확장한 ‘관찰자 효과’가 그 이유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아원자 수준에서 소립자의 위치와 운동량 중 하나는 측정할 수 있지만, 두 개를 동시에 파악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를 미래예측에 대입해 보면 무언가를 관찰하려는 시도 자체가 나비 효과처럼 결과에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관찰자 효과)이다. 그러니 애초부터 어떠한 최첨단 기법을 동원해도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는 건 불가능한 셈이다. 그렇다면 예측 행위는 무용하기만 한 걸까. 이에 대해 저자는 미래를 예측하고자 하는 행위는 인간성의 본질에 해당한다고 강조한다. 실효성 여부를 떠나 시간의 강력한 제약을 받는 인간이 희구할 수밖에 없는 욕망이라는 얘기다. 9·11테러나 동일본 대지진, 나치 인종학살 같은 이른바 ‘블랙 스완(black swan·통계학적으로 발생할 수 없지만 결국 일어나는 사건)’이 존재하는 한 미래를 내다보고 비극을 막고자 노력하는 시도는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1-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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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동아일보 ‘올해의 책’… 팬데믹 시대 위로의 한권

    《코로나에 부동산 급등까지 모두의 어려움이 큰 한 해였습니다. 그래선지 출판인, 학자, 의료인 등 35명이 꼽은 ‘2021년 동아일보 올해의 책’은 유독 공동체나 연대를 다룬 양서들이 많습니다. 선정위원별로 3권씩 추천을 받은 결과, 1표 이상 얻은 책은 총 92권. 이 중 상위 10권을 추려 소개합니다. 독자 여러분께 위로와 격려를 전하는 작은 이정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동아일보 문화부 출판학술팀 》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브라이언 헤어 등 지음·이민아 옮김·396쪽·디플롯각계 전문가들은 올해 ‘최고의 책’으로 소통과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2권을 택했다. 각 4표로 공동 1위. 팬데믹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혐오를 넘어 연대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는 집단 무의식이 책 선정에도 영향을 끼친 게 아닐까. 진화인류학 책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다윈의 적자생존 이론을 새로운 관점으로 접근한다. 저자는 육체, 정신적 힘이 아닌 친화력이 인류 생존과 진화의 열쇠라고 강조한다. 호모사피엔스가 자신들보다 몸집이 크고 힘이 셌던 고인류 네안데르탈인을 멸종시키고 살아남은 게 대표적이다. 연구에 따르면 100명 이상이 함께 모여 산 호모사피엔스와 달리 네안데르탈인은 기껏해야 10∼15명이 한 무리를 이뤄 수적 열세를 보였다. 이는 호모사피엔스가 같은 집단의 동료들과 정서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사람들 사이가 막힌 지금, 소통과 연대의 능력은 더 각별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을 추천한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북방고고학)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사람들은 논리와 이성 대신 감성과 친화력으로 향한다. 이 책은 나의 ‘논리’가 아닌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평했다. “최악의 상황에도 우리는 언제나 희망을 꿈꾼다. 이 책은 모든 살아있는 것에 대해 기꺼이 다정한 마음 품기를 포기하지 않도록 북돋운다”(주연선 은행나무 대표)는 평도 있었다.작별하지 않는다한강 지음·332쪽·문학동네 2016년 영국 맨부커상 수상 작가이자 2019년 인촌상 수상자인 한강이 5년 만에 내놓은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역시 연대와 사랑을 말한다. 주인공 경하가 제주도에서 태어난 친구를 환영처럼 만나 1948년 4·3사건의 고통을 공유하는 이야기다. 한강은 올 9월 출간 후 인터뷰에서 “사랑이든 애도든 끝까지 끌어안고 나아가겠다는 결의를 제목에 담았다”고 말했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는 “소설 속 세 여성은 역사 속 사람들과 살아남은 사람들이 전하는 사랑을 잊지 말자고 말한다. ‘내가 올해 잊고 산 것은 무엇일까. 작별할 수 없는 것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를 생각하게 하는 책”이라는 평을 남겼다. 작가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쓰고 악몽에 시달리는 경하에게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다. 실제로 한강은 5·18 소재의 소설 ‘소년이 온다’(창비·2014년)를 쓰고 악몽을 꿨다고 밝혔다. 비극적 현대사가 남긴 상처는 작가 자신을 뛰어넘어 독자들에게도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어둠에 묻힌 상처를 기억하는 자는 폭력에 길들지 않는다. 그들처럼 우리 또한 한순간 어이없이 거기 누울 수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장은수 출판평론가)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마이클 셸런버거 지음·노정태 옮김·664쪽·부키 “지구 환경과 기후위기에 대한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뒤엎는다. 책을 읽고 나면 환경 문제에 대한 생각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주연선 은행나무 대표) 환경운동에 30년간 투신한 저자가 기술과 경제발전이 오히려 환경을 지켜줄 수 있다는 도발적인 주장을 펼친다. 환경운동이 오히려 지구를 망치고 있다는 것. 권은희 까치글방 편집팀장은 “과학적 증거를 토대로 자연보호에 대한 기존 관념을 뒤집는다. 환경을 위한다고 생각한 재생에너지와 생활 속 실천이 의도와는 다른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는 점을 일깨우는 책”이라고 평했다. ■일본의 굴레태가트 머피 지음·윤영수 등 옮김·660쪽·글항아리“일본에 대해 안다고 생각한 많은 것들이 이 책을 읽으며 해체되고 재조립됐다.”(김형보 어크로스 대표) 40년간 일본에서 산 미국인 저자가 외부자로서의 시각과 내부자로서의 이해 사이를 절묘하게 줄타기하며 일본 사회를 연구한다. 굴욕적일 만큼 친절한 서비스, 불평할 만한 일이 생겨도 침묵으로 일관하는 일본인의 모습 뒤에 숨겨진 참모습을 깊게 파고들었다. 박정재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는 “포괄적이면서도 전문적인 내용의 충실함은 말할 것도 없고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며 “한국과 일본의 상황이 너무도 유사해 책 속에서 우리 사회의 거울을 보는 느낌”이라고 했다. ■지구의 짧은 역사앤드루 H 놀 지음·이한음 옮김·304쪽·다산사이언스“지구 역사를 짧고 쉽게 압축해 설명하는 훌륭한 입문서다. 현재의 지구를 살아가는 인간의 역할에 대해 의문을 남긴다.”(권은희 까치글방 편집팀장) 미국 하버드대 자연사 교수가 장구한 지구 역사를 보기 쉽게 압축한 교양 과학서. 최신 연구 성과를 담고 있으면서도 어려운 개념을 유머로 쉽게 풀어내 높은 점수를 받았다. 지구과학자들이 어떻게 조사, 연구하는지 과정을 생생히 보여준다. 올해 이보다 읽기 쉬운 자연사 책이 있었나 싶을 정도. ■한국의 능력주의박권일 지음·344쪽·이데아“한국 사회에서 첨예한 능력주의 문제를 제대로 짚었다. 정치, 경제, 젠더 등 양극화하는 사회문제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준다.”(조성웅 유유출판사 대표) 능력주의에 열광하는 한국인의 심리를 파고든 사회과학서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시험에 합격하지 않거나 일정 조건에 부합하지 않은 사람이 보상을 받는 데 대해 유독 분개한다. 불평등은 참아도 불공정은 못 참는 한국 사회와 한국인에 대한 심층 보고서다. ■전국축제자랑김혼비 등 지음·320쪽·민음사충남 예산부터 경남 산청까지 전국 방방곡곡 지역축제들의 이모저모를 한 권에 담았다. “아무도 관심 없고 있는지조차 몰랐던 지자체 축제들임에도 하루 빨리 일상이 회복돼 가보고 싶게 만든다.”(조재은 양철북 대표) 전작들을 통해 독자층이 탄탄한 저자들인 만큼 말맛이 좋다. 황혜숙 창비 출판1본부장은 “쏟아져 나오는 에세이 중 절반 이상 읽지 못하는 책이 적지 않은데 이 책만큼 공들여 낄낄대며 읽은 경험이 드물다”고 했다. 현장을 답사한 뒤 쓴 여행기라 생생하다. “유쾌하고 정감 넘치며, 때로 우악스럽기도 했던 축제의 현장으로 우리를 옮겨 놓는 책”(박성열 사이드웨이 대표)이라는 평이다.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조던 스콧 글·시드니 스미스 그림·김지은 옮김·52쪽·책읽는곰이례적으로 그림책이 선정됐다. 캐나다 시인의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말을 더듬는 아이가 쉼 없이 흐르는 강물과 마주하며 내면의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을 그렸다. 선정위원들은 어린아이뿐 아니라 어른에게도 선물하고 싶은 책이라고 평했다. “타인과의 다름이 틀림이나 나쁨이 아니라 자신만의 고유함이고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나지막하게 이야기하는 책”(최은영 소설가)이기 때문.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는 “나는 무엇에 갇혀 있는지 고민하게 한다. 자신만의 숨겨진 단단한 내면을 발견하게 되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그림책”이라고 호평했다.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임지현 지음·640쪽·휴머니스트거의 모든 민족들이 스스로를 희생자로 규정하는 시대다. 예컨대 폴란드인들이 2차대전 당시 예드바브네에서 벌어진 자국민들의 유대인 학살을 외면한 채 자신들이 나치 피해자임을 강조하는 식. 박윤우 부키 대표는 “자신을 희생자로 포장하는 피해자 간 기억의 전쟁은 21세기 민족주의가 어떤 리스크를 짊어지게 할지 경고한다”고 말했다. “이론과 실례를 잘 버무린 책을 요즘 만나기 힘든 탓에 더 귀한 책”(설혜심 연세대 사학과 교수)이라는 평이다. ■불편한 편의점김호연 지음·268쪽·나무옆의자서울 용산구 청파동 골목의 작은 편의점을 무대로 힘겹게 살아가는 이웃들의 희로애락을 따뜻하고 유머러스한 시선으로 담았다. 서울역에서 노숙을 하던 남자가 70대 할머니의 지갑을 주워주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후 남자는 할머니가 운영하는 편의점에서 야간 알바를 뛴다. 이구용 KL매니지먼트 대표는 “평범한 이웃들의 삶을 통해 그들의 애환을 다정한 시선으로 다룬 작품이다. 팬데믹으로 힘겨운 나날을 견디고 있는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책”이라고 말했다. 달라진 일상… 아픔이 새로운 길이 되길팬데믹 시대, 마음을 위로하는 한 권의 책 장기화된 팬데믹에 대처할 혜안과 위로를 책에서 구할 방법은 없을까. 이와 관련해 동아일보는 감염병 전문의를 포함한 전문가들로부터 유용한 책들을 별도로 추천받았다. 감염병 전문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은 ‘병원의 밥’(세미콜론)을 추천했다. 흉부외과 의사인 저자가 의사와 환자들이 먹는 밥을 소재로 긴박한 의료현장을 생생히 그린 에세이다. 이 이사장은 “미음에서 죽으로, 죽에서 밥으로 회복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환자들의 이야기가 팬데믹 속에서 고통 받는 우리에게 작은 위안을 준다”고 평했다. ‘바이러스를 이기는 새로운 습관’(프리뷰)은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코로나 시대의 대처법을 담았다. 미국 의학전문기자인 저자는 감염병에 대해 불필요한 공포를 가져오는 가짜뉴스를 구별하는 방법과 운동량이 줄어든 상황에서 당분과 탄수화물 섭취량을 줄이는 식습관을 전한다. 질병관리본부장을 지낸 정기석 한림대성심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는 “식이, 운동, 수면 등 신체건강뿐 아니라 정신건강까지 챙길 수 있는 유용한 정보를 담았다”고 말했다. 인간 본성의 따뜻함을 통해 팬데믹에 지친 이들을 위로하는 책도 선정됐다. 네덜란드 언론인이 쓴 ‘휴먼카인드’(인플루엔셜)는 인간 본성이 이기적이라는 건 오해라고 주장하며 타이타닉 침몰, 9·11테러 등 과거 재난 상황에서 사람들이 서로 도운 증거들을 제시한다. 박정재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는 “인간의 선한 본성에 대한 저자의 믿음을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논리적으로 뒷받침한 이 책은 독자에게 희망을 준다”고 평했다. 팬데믹 이후 바뀔 일상공간에 대한 예측을 담은 책도 포함됐다. 건축가 유현준이 쓴 ‘공간의 미래’(을유문화사)는 온라인 수업, 재택근무 등으로 공간의 의미가 변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에 따라 마당 같은 발코니가 있는 아파트나 회사로 나가지 않고도 업무를 볼 수 있는 ‘거점 오피스’ 등이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 책은 “미래 우리 사회가 시민 다수를 행복하게 할 공간을 어떻게 기획해야 할 것인지 새로운 담론거리를 제시했다”(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평을 받았다.선정위원(35명·가나다순) 강성민(글항아리 대표) 강인욱(경희대 사학과 교수) 권은희(까치글방 편집팀장) 김민정(난다 대표) 김영민(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김형보(어크로스 대표) 김홍민(북스피어 대표) 김효형(눌와 대표) 박상준(민음사 대표) 박성열(사이드웨이 대표) 박윤우(부키 대표) 박정재(서울대 지리학과 교수) 설혜심(연세대 사학과 교수) 심채경(한국천문연구원 선임연구원) 안대회(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안병현(교보문고 대표) 윤범모(국립현대미술관장) 이구용(KL매니지먼트 대표) 이기진(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이병훈(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이왕준(명지병원 이사장) 이종화(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임형주(팝페라 테너) 장강명(소설가) 장은수(출판평론가) 정기석(한림대성심병원 호흡기내과 교수) 정은숙(마음산책 대표) 조성웅(유유출판사 대표) 조재은(양철북 대표) 주연선(은행나무 대표) 최은영(소설가) 표정훈(출판평론가) 한성봉(동아시아 대표) 황서현(휴머니스트 주간) 황혜숙(창비 출판1본부장)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이호재 기자 hoho@donga.com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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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위기의 ‘자유주의 국제질서’ 구하려면

    “동맹국들이 수년간 미국에 바가지를 씌우고 있다. 우리를 벗겨 먹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8월 대통령 선거운동 당시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꺼낸 얘기다. 무역수지나 방위비 분담 등에서 동맹국들이 미국을 이용해먹고 있다는 그의 비난은 미국의 전통적인 동맹외교 원칙에 핵 펀치를 날리는 것이었다. 실제로 트럼프는 한미 방위비 협상에서 잠정 합의된 13% 인상안을 거부하고 50% 인상을 무리하게 밀어붙여 양국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 책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위기의 실태를 진단하고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란 공통의 국제규범과 제도를 통해 국가 간 상호 의존이 심화되면 윈윈할 수 있다는 시각으로, 제로섬의 자국이익 추구를 중심에 놓는 현실주의와 대비된다. 저자에 따르면 탈냉전 이후 미국 리더십의 쇠퇴와 중국 러시아 등 권위주의 국가들의 부상, 트럼피즘으로 대표되는 배타적 민족주의, 세계적 불평등 심화 등이 맞물려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 흥미로운 건 국제정치학에서 자유주의를 대변해온 저자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미국 패권 추구에 이용됐음을 반성한 대목이다. 미국 정부가 외교정책의 우선순위로 삼는 이른바 ‘인권 외교’가 국익에 따라 선택적으로 적용된 사례들이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기후위기와 최근의 팬데믹 사태에 이르기까지 국가들의 상호협력이 절실해지는 상황에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를 포기할 수는 없다고 강조한다. 다만 자유주의를 지키는 방식에서 과거보다 덜 공세적인 자세로 바꿀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최근 아프가니스탄 내전 등에서 확인되었듯 미국의 자유주의 가치를 다른 나라에 이식하려는 공세적 시도는 더 이상 성공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책장을 덮는 순간, 미국 입장에서 합리적인 결론이라는 생각과 더불어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건데?”라는 현실주의 관점에서의 비판이 스멀스멀 밀려오는 건 어쩔 수 없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1-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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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뉴턴은 왜 복잡한 기하학으로 책을 썼나

    고전 물리학의 정수로 통하는 아이작 뉴턴의 ‘프린키피아’ 원서는 타원, 직선, 원 등 온갖 도형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온갖 수식들로 채워진 요즘 물리학 책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뉴턴이 도형으로 설명한 물리학 이론들은 간단한 수식들로 대체할 수 있다. ‘수학 천재’ 뉴턴이 굳이 대수가 아닌 기하로 프린키피아를 저술한 이유는 무얼까. 이 책을 쓴 김민형 영국 에든버러대 석좌교수(수리과학)는 이 단순한 질문을 통해 1571년 ‘레판토 해전’ 이후 이슬람권과 분리된 유럽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논하고 있다. 김 교수는 서울대 수학과를 조기 졸업하고 한국인 최초로 옥스퍼드대 수학과 교수를 지낸 세계적 수학자다. 그에 따르면 대수학은 이슬람, 기하학은 고대 그리스에서 각각 융성했다. 예컨대 이슬람권에서는 로마 숫자보다 곱하기에 훨씬 편리한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해 11세기에 이미 3차 방정식 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립했다. 이에 비해 고대 그리스에서는 기원전 6세기의 피타고라스 정리처럼 기하학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뤘다. 유럽은 중세 말 이슬람권을 통해 대수학과 고대 그리스 기하학을 수용하며 14세기 르네상스 시대를 예비했다. 그런데 1453년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함락에 이어 1571년 레판토 해전을 거치며 지중해 동서를 이슬람과 유럽이 양분하는 상황에 이른다. 15, 16세기 이후 동서 문명의 분기가 본격화된 것. 이에 따라 이슬람에서 습득한 대수학보다 고대 그리스 문명에서 사용한 기하학을 강조하는 흐름이 뉴턴의 프린키피아에 반영됐다는 게 저자의 견해다. 그는 “사회 문화적 요구가 과학의 진화에 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결국 수학의 진화 방식을 연구하면 유럽의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밝혀낼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언뜻 서로 무관해 보이는 수학과 역사학이 긴밀한 접점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1-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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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린이 책]뭐든 척척 만들던 만능 손 우리 아빠

    1970년대 말 동인천역 근처의 한 동네. 여덟 살 정도 돼 보이는 여자아이가 수업을 마치고 아빠 가게로 신나게 뛰어간다. 그의 아빠는 ‘간판장이’. 페인트와 붓, 연필, 자 등이 수북이 쌓인 작업실 안은 아빠의 땀 냄새와 뒤섞여 추억의 공감각을 자아낸다. 영화 포스터부터 이발소 간판, 광고 전단, 식당 메뉴판까지 형형색색의 물건들이 아빠의 만능 손에서 만들어진다. 홍콩영화 간판을 지켜보던 아이는 쌍절곤을 쥔 이소룡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아 놀라기도 한다. 수십 년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된 딸은 이제는 세상에 없는 아빠와 그의 작업실을 낡은 사진첩으로나마 접한다. ‘만약 아빠가 살아계시면 지금 무얼 하실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내 작업실에서 놀고 계실지 모르지….’ 이 그림책은 딸에게 생전 할아버지의 모습을 들려주는 형식으로 구성돼 있다. 아이에게 이 책을 읽어주는 부모가 있다면 책장을 덮을 때쯤 애잔함과 그리움에 빠진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1-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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