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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불멸과 작은 불멸이 있다.” 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는 소설 ‘불멸’에서 말했다. 작은 불멸이란 사람이 죽은 뒤 그를 개인적으로 알던 사람들 사이에서 추억과 회상으로 남는 불멸이다. 큰 불멸은 위대한 인물이 죽은 뒤 그를 알지 못하던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위업과 작품으로 길이 기억되는 불멸이다. 인간이 시간의 흐름과 생사를 인지하게 된 뒤 불멸의 꿈은 항상 우리와 함께했다. 생물학적 영생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 꿈은 종교적이거나 상징적인 영생의 추구로 바뀌었다. 소련과 중국 등의 사례를 따라온 북한도 두 번째의 ‘기념용 유해’를 보존하게 된 모양이다. 단지 오래도록 기억하겠다는 의지의 표현만은 아닐 수도 있다. 김정일 사망 이후 ‘새들이 며칠이나 같은 시간에 모여 울었다’는 비(非)유물론적 상징이 동원되는 나라이니 그 인민 중에는 ‘언젠가 두 영도자가 유리관에서 일어나 우리를 영원의 나라로 이끌어 갈 것이다’란 믿음을 갖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방부처리를 했다고 해서 그 모습이 영구히 보존되리라고 안심하기는 이르다. 옛 소련 독재자 스탈린은 1953년 사망한 뒤 모스크바 붉은광장의 레닌 묘에 레닌과 함께 전시됐으나 8년 뒤 인근 땅속으로 이장되는 수모를 겪었다. 수용소와 강제이주 등으로 수천만 명을 죽였다는 사람들의 ‘기억’이 그의 육신을 다시 묻어버린 것이다. 레닌도 언제까지 유리관 안에 누워 찾아오는 사람들을 맞이할지는 알 수 없다. 14년 전 처음 찾은 붉은광장은 레닌 묘 맞은편 굼백화점 입구에서 울려나오는 록 음악의 강한 비트에 묻혀 있었다. 크렘린에까지 들릴 정도의 볼륨이었다. 소련이 붕괴된 후에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레닌을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최근까지 러시아에선 몇 차례나 레닌 묘 폐쇄 논란이 일었다. 자신의 영웅을 기리고자 하는 사람이 그의 육신을 보존하고자 하는 욕망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지막’ 육신만이 꼭 길이 남아야 할 만큼 특별한 것일까. 프랑스 생화학자 앙드레 지오르당은 책 ‘내 몸의 신비’(동문선)에서 “인간은 화학적으로 1년 안에 거의 완전히 바뀐다”고 말한다. 1년 만에 만난 사람은 물질적 차원에서 지난번 만난 그와 다른 사람이다. 신경세포만은 바뀌지 않지만 그 내부 성분은 갱신된다. 지오르당에 따르면 한 개인의 진정한 ‘무덤’은 그의 욕실과 변기 배수구에 있다. 평생 그의 몸을 이루었던 물질 대부분이 이곳으로 빠져나간다. 생애 마지막 몇 달 동안 섭취한 성분이 그의 마지막 육체를 이룰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지막 몸을 생전의 형태로 보존하기보다는 죽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로마 카푸친 프란체스코회의 ‘해골 성당’이 훨씬 경건하고 사실적인 기념물이다. 그곳의 내부 장식은 수백 년 동안 수도원에서 죽은 수사들의 온갖 뼈를 엮어 만들었다. 성당 끝 쪽 해골에는 이렇게 써 있다. “우리의 과거는 당신들의 현재요, 우리의 현재는 당신들의 미래다.” 결국 세상에 미치는 선한 행위, 세상에 내놓은 위대한 업적으로 기억되는 것이 현세에서는 가장 중요하고 아름다운 ‘불멸’이요 ‘영생’이 아닐까. 연말을 맞아 ‘불멸’이란 수식어와 자주 동반되는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며 생각해본다. 나는 올해 내 주변에, 조금 욕심을 부린다면 세상에 어떤 기억할 만한 빛을 비췄는가.유윤종 문화부장 gustav@donga.com}

노근리국제평화재단(이사장 정구도)은 제3회 노근리평화상 문학부문에 소설가 강병석 씨(64·사진)를 선정했다고 8일 밝혔다. 수상작은 장편소설 ‘초록의 전설’로 군대 내의 모순과 폭력적 상황을 설득력 있게 그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강 씨는 동아일보에 재직하던 198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에 당선해 등단했다. 상금은 1000만 원. 시상식은 21일 오후 5시 반 서울 중구 플라자호텔에서 열린다.}

지난주 목요일, 시청자들은 뉴스와 드라마, 교양 프로그램 등을 가리지 않고 방영하는 새로운 TV 채널들을 만났다. 첫 주부터 전 장르에 걸쳐 균형 잡힌 편성을 선보인 채널이 있는가 하면 이미 국내에 소개됐던 영화와 해외 드라마 위주로 첫 주를 보낸 채널도 있었다. 곧 새 채널 모두 안정된 모습을 보일 것으로 기대한다. 한 주 동안 만난 사람들은 “볼 게 늘어 좋다”고 했고 일부는 “다른 나라도 이런 것(종편 채널)이 있느냐”고 물었다. 대답 삼아 소개하면 이렇다. 우리와 1인당 소득 규모가 비슷한 대만의 경우 시청률 1∼7위를 케이블 종합편성 채널이 점하고 있다. 이웃 일본은 케이블 TV가 출범하기도 전 후지TV, 니혼TV, TV아사히, TV도쿄 등이 이미 민방 다채널 시대를 이뤘다. 영국 독일 등도 위성방송, 케이블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종합편성 민방의 다채널 시대가 열려 있다. 신문사와 방송사가 계열을 이뤄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은 ‘글로벌 스탠더드’다. 2009년 미디어관계법이 국회를 통과하기 전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신문과 방송의 겸영(兼營)이 허용되지 않는 유일한 나라였다. 대만 얘기가 나왔으니 “대만은 종편사들이 해외 수입 프로그램을 마구 틀어 자국 영상제작이 후퇴했다”는 얘기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인구와 방송시장은 대만의 2배가 넘으며 아시아 전역과 유럽, 남북아메리카에까지 드라마 영화 등 영상 콘텐츠를 판매하고 있다. 새로 출범한 방송사들의 드라마도 바다를 건너 지구촌을 누빌 것이다. ‘채널A’가 개국 작품으로 마련한 드라마 ‘천상의 화원 곰배령’ ‘컬러 오브 우먼’은 작품성을 인정받아 해외에 선(先)판매됐다. 채널A는 총 규모 1236억 원에 달하는 국내 최대 글로벌 콘텐츠 펀드 ‘소빅글로벌콘텐츠투자조합’에도 참여하고 있다. 세계 시장을 겨냥한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의 제작에 집중 투자하는 펀드다. 한층 치열해진 방송시장에서 새 채널들이 건전하고 유익한 내용으로 승부할 수 있을까. 출발을 보면 안심할 만하다. ‘천상의 화원 곰배령’은 따뜻한 가족애를 그린 ‘무공해 드라마’로 찬사를 받고 있다. ‘이산가족 감동 프로젝트’를 표방한 예능 프로그램 ‘이제 만나러 갑니다’를 채널A가 방영한 4일 저녁, 광화문 일대 식당에서는 애틋한 출연진들의 사연을 지켜보며 눈가를 훔치는 사람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건강한 방송 생태계의 수립이라는 점에서도 새 방송사들의 출범은 의미가 크다. 지난해 통계를 보면 케이블 방송채널사용사업자(PP) 수만 240여 개지만 지상파 방송 3사와 드라마, 스포츠 등을 방송하는 계열PP의 수익이 지상파와 PP 전체 방송시장의 61.8%를 차지했다. 같은 콘텐츠를 반복 재생하는 3개 루프(loop)에 힘이 집중됐던 것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공영방송 사장의 진퇴를 둘러싸고 날선 공방이 벌어지는 것도 이들의 여론 독과점과 지배력이 과도하기 때문이었다. 새 채널들의 탄생은 이 같은 판을 뒤엎는 ‘미디어 빅뱅’을 불러올 계기가 될 수 있다. 새 채널들은 저마다 노력과 지혜를 짜내 시청자들의 눈길을 붙잡으려 할 것이다. 시청자들은 새로운 정보의 창구를 편견 없이 이용할 것이다. 새로운 물길(Channel)들 위에 이뤄지는 항해가 어떤 모습을 갖춰갈까. 그 흥미로운 첫 장이 열렸다.유윤종 문화부장 gustav@donga.com}

무소속 강용석 의원(사진)은 28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공영방송이 1시간 분량의 ‘강용석 특집’을 했다”며 “한 사람을 잡으려고 공영방송이 공기(公器)인 전파를 저렇게 활용할 수도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강 의원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개그콘서트 강용석 특집 시청후기’에서도 “다섯 개 코너의 10여 가지 부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저를 디스(남을 비난하거나 비꼬는 행위)했다”며 “시간도 많지 않았는데 이렇게 다양한 소재와 방식을 잡아내는 것을 보니 작가와 개그맨들의 불꽃 튀는 창작성이 대단한 것 같다”며 불편한 심정을 나타냈다.그는 통화에서 “당초 한국아나운서연합회가 나에게 청구한 위자료 지급청구 소송이 말이 안 된다는 취지에서 개그콘서트의 최효종 씨를 국회의원 집단모욕죄로 고소한 것”이라며 “24일 아나운서연합회의 지급청구 소송이 기각됐기 때문에 29일 최 씨에 대한 고소를 취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고성호 기자 sungho@donga.com}

독일 수도 베를린을 5년 만에 방문했다. 국제교류재단(이사장 김병국)과 독일의 독한포럼(회장 하르트무트 코시크 독일 재무차관)이 공동 주최한 제10차 한독포럼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한국 측 김학준 한독포럼 회장을 비롯한 양국 학자와 정관계 인사, 언론인 50여 명이 두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교류에 대해 이틀 동안 논의를 펼쳤다. 회의는 ‘제국의사당’과 부속 건물에서 열렸다. 제국의사당은 1894년 건립됐고 통일 후 연방정부가 본에서 베를린으로 천도하면서 1999년부터 독일연방공화국 의회로 쓰이고 있다. 이 건물의 원형지붕(돔)은 연방의회로 재개관하면서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투명 돔으로 바뀌었다. 2006년 월드컵 기간에는 의사당을 서너 겹으로 두른 긴 행렬 때문에 들어가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돔 꼭대기에 올라서자 의원들의 자리가 바로 아래 내려다보였다. 망원경이 있다면 의원들의 자료까지 읽을 수 있을 듯했다. 한국 국회의 ‘드잡이’가 이런 곳에서도 가능할까. 독일 연방의회를 한국에 옮겨온다면 폭력행위는 사진기자들의 카메라보다 국회 방문자들의 휴대전화에 먼저 잡혀 낱낱이 전파될 것이다. 역사학 박사인 의회도서관 연구원이 일행을 안내했다. 본회의장에서 일행 중 한 사람이 질문을 던졌다. “의원이 의사 진행을 방해하면 어떻게 됩니까?” 통역이 “여기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니 질문을 바꿔 보시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질문자는 “의원 보좌관이 의사 진행을 방해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안내자는 갸웃하더니 “보좌관은 (본회의장 아닌) 사무실에서 업무를 도울 뿐”이라고 했다. 둘째 날, 슈테판 뮐러 연방의원 등 독일 측 참가자들은 독일의 정치재단이 정치 과정의 효율성과 전문성을 높인다고 강조했다. 독일에서 정치재단은 정당과 연계해 각종 현안을 연구하고 정책을 개발한다. 사민당의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은 노사관계, 녹색당의 하인리히 뵐 재단은 환경 문제에 깊이 있는 노하우를 갖고 있다. 얘기를 들으며 올해 7월 동아일보에 실린 한국 정당 정책연구소 기사를 떠올렸다. 연구소마다 자신 있는 보고서 5개를 제출해달라고 요청하자 한 연구소는 공개할 만한 보고서가 없다고 했고 다른 곳에서 2, 3개씩 제출한 보고서도 현안을 요약한 10∼20쪽짜리에 그쳤다. 포럼은 양국 정상에게 전달하는 건의서를 채택하며 마무리됐다. 경제 분야에서는 양국이 보유한 재생에너지 분야 기술을 공유·교류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문화 분야에서는 학생과 문화전문가들의 상호 교환 프로그램을 강화해야 한다는 점에 합의했다. 현실 정책에 반영하기 앞서 각 분야 전문가들이 양국 협력에 대해 깊은 토의를 펼친 것만으로도 여러 생산적인 기회가 창출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포럼 참가자들은 18일 크리스티안 불프 대통령을 방문해 건의서를 전달했다. 숙소로 돌아온 뒤 컴퓨터를 켜고 동아닷컴 뉴스 사이트에 접속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이 야당의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점거 속에 3주째 표류하고 있다는 뉴스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이곳에서 그동안 보고 들은 것이 꿈속의 일처럼 느껴졌다. 서로가 ‘세계의 책임 있는 중강국(中强國·middle power)’이라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여러 가지를 논의했지만 독일과 한국은 아직 그만큼의 거리와 차이가 있었다. -베를린에서유윤종 문화부장 gustav@donga.com}

지난해 개봉한 영국 영화 ‘킹스 스피치’에는 말미에 영국 왕 조지 6세가 독일의 침략에 맞서 대국민 연설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배경에는 베토벤 교향곡 7번의 느린 악장이 깔린다. 연설이 끝난 뒤 자막이 오를 때 흐르는 음악도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5번의 느린 악장이다. “영국 음악에도 어울릴 게 많은데…. 엘가 ‘수수께끼 변주곡’ 중 ‘님로드’나 본 윌리엄스 ‘탈리스 주제에 의한 환상곡’은 어땠을까”라고 생각해 보았다. 제작진으로서는 더 귀에 편하게 와 닿고 설명하기도 쉬운 음악을 골랐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베토벤의 작품은 더 이상 ‘독일의 음악’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때 그것은 이미 인간의 보편적 감성에 호소하는 ‘인류의 음악’이다. 이는 18, 19세기에 독일이 인류를 위해 성취한 값진 성과이기도 하다. 그 독일의 언론이 ‘보편적 음악’을 말했다. 이달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지에 실린 ‘이것이 완벽한 물결이다’라는 제목의 기사다.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대표의 말에 부연하는 형식으로 기사는 한국의 한류가 ‘글로벌 한류’, 즉 보편적 음악으로 가고자 한다고 전했다. 기사를 읽고 1980년대 중반을 떠올렸다. 당시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구호가 지배력을 갖던 때였다. ‘지금 이 땅’에 기반을 두지 않은 서구문화에의 애착은 조롱을 받기 일쑤였다. 선배들은 외국 문화를 추종하는 것은 결국 ‘흉내’에 지나지 않는다며 연암 박지원의 말을 인용했다. “중국의 수법을 본받고 한·당의 문체를 베낀다면 그 수법이 높을수록 의취(意趣)는 비루해지고 문체가 비슷할수록 언어는 더욱 거짓됨을 볼 뿐이다.” 연암의 문제제기가 당연하게 생각된 반면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란 주장에는 저항감이 들었다. 변방인들이 세계인과 통하기 위해서는 결국 남의 눈에 독특해 보이는 걸 해야 한다는 것인가. “중심은 서구가 지배할 테니 너희는 변방에 머물러 있어라”라는 문화제국주의에 속은 결과는 아닌가…. 그 명제의 ‘출전’부터 찾고 싶었다. 인터넷의 검색 기능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그 ‘테제’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지금의 시대적 배경이 연암의 시대도, 1980년대도 아니라는 점이다. 세계 문화의 흐름을 옆에 비켜서서 전달받던 변방의 한국은 이제 세계를 향해 문화를 발신하는 ‘센터’가 됐다. 보편적인 것을 잉태한 뒤 각국에 맞게 변용할 수 있다는 지금 한류 콘텐츠 생산자들의 전략은 맞다. 하지만 걱정도 든다.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지가 인터뷰한 한류 관련 인사들은 “홍콩과 일본의 문화수출이 결국 시들어버린 전철을 밟지 않겠다”고 입을 모았다. 우리만의 확고한 색깔이 없는 ‘문화산업’이란 결국 누군가에게 따라잡힐 수 있는 ‘산업’일 뿐이다. 어디서나 적용할 수 있는 보편을 추구하면서도 고유한 색깔을 덧입혀 세계인의 문화적 입맛을 중독시키는 전략이 그래서 필요하다. 당장의 문화수출을 늘리는 것은 민간 기획자들의 일이다. 그들 역시 ‘민간에서 잘하도록 정부는 지켜봐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다른 한편 문화 상품에 우리의 고유성을 착색시키는 전략은 정부가 긴 호흡을 갖고 추진해야 할 일이다. 당장에 성과를 보려 하지 말고 차분히 여유와 시간을 갖고 착수했으면 싶다.유윤종 문화부장 gustav@donga.com}
한국신문협회(회장 김재호)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인 ‘신문 등의 진흥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회기 내에 최대한 빨리 처리해 줄 것을 28일 법사위 위원들에게 공식 요청했다. 협회는 위원들에게 전달한 문서를 통해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에서 신문지원 관련 법안 4건을 통합해 여야 합의로 9월 14일 법사위에 회부했으나 논의 일정도 잡지 못한 채 처리가 지연되고 있다”고 밝히며 “제18대 국회 회기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번 정기국회에서도 이 개정법률안이 통과되지 못할 경우 회기를 넘기면서 자동 폐기될 우려가 크다”고 지적하고 “우리 신문이 언론으로서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법률안을 이번 회기 내에 최대한 빨리 처리해 줄 것”을 요청했다. 당초 문방위에 올라온 신문지원 관련 법안은 민주당 전병헌 의원이 발의한 ‘신문 등의 지원·육성에 관한 특별법안’과 한나라당 허원제 김성동 의원, 민주당 전혜숙 의원이 각각 발의한 ‘신문 등의 진흥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안’ 등 4개 법안이었다. 법안심사소위는 8월 31일 이들 법안을 통합 조정한 ‘신문 등의 진흥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안’을 문방위 대안으로 채택한 바 있다. 개정법률안은 신문 경영 여건 개선, 신문 제작 및 유통 지원, 신문읽기 진흥, 뉴스 저작권 보호, 세제 혜택 등의 신문지원 방안을 포괄적으로 담고 있어 시행될 경우 신문산업 활성화에 도움이 클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곽민영 기자 havefun@donga.com}

한 세기 전 작곡가 말러는 당시 지나치게 혁신적이라고 평가됐던 쇤베르크의 음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의 음악을 이해하진 못하지만 그는 젊었으니 옳다.” 그 평가가 정확했는지와 별도로 최소한 그 자세만큼은 높이 쳐줄 만하다. 음악사상 수많은 원로가 새로운 음악에 눈살을 찌푸렸다. 드뷔시의 인상주의 음악을 폄하한 생상스, 젊은 세대의 바그너풍 음악을 배척한 브람스 등 헤아릴 수 없다. 어쩌면 말러는 젊었을 때 자신의 음악을 폄훼한 악단의 보수주의자들에게 ‘젊었으니 옳다’는 말로 보복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26일 서울시장 선거는 지금까지의 어떤 선거보다 세대 간 대결로 깊이 각인됐다. 여러 징후로 예고된 일이기도 했다. 조국 교수는 트위터에서 ‘부모님이 투표 못하도록 여행 보내드린다’는 어느 아들을 언급하며 ‘진짜 효자’라고 했다. 2004년 총선 당시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이 “60대 이상 70대는 투표 안 해도 괜찮다”고 말해 노년층의 분노를 불러왔을 때 이미 세대 대결은 깊이 진행 중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선거의 지역색은 엷어지고 있지만 그만큼 ‘세대 색깔’은 앞으로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흔히들 분석하듯이 나이가 많을수록 우파 후보에게 쏠리고, 젊을수록 좌파 후보에게 쏠린다면 이유는 무엇일까. ‘우파=보수=기존의 것을 지키는 것’ ‘좌파=진보=바꾸는 것’이란 도식화가 옳다고 가정한다면 골치 아플 것도 없다. 나이든 이는 지키고픈 것이 많고 젊은이는 답답한 게 많기 마련이다. 국가 사회에만 한정 지을 일도 아니다. 2008년 출간된 책 ‘타고난 반항아’(프랭크 설로웨이 지음·사이언스북스)는 한 가정에서조차 어린 형제가 더 체제 반항적이라고 설명한다. 맏이는 가족 생존을 중시하는 부모의 관점에 ‘제휴’하고, 어린 동생들은 다른 활로를 찾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집에서 막내는 계속 막내지만 사회의 막내는 언젠가 맏이가 된다. 보수적이라는 오늘날의 60대는 한일협정 반대 시위에 참여했고, 50대는 유신반대 시위를 치열하게 펼쳤다. 청년의 개혁적 열정이 장년에도 계속된다면 어떤 사회나 지금보다 훨씬 거센 개혁과 혁명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더 들여다보면 세대 갈등은 칼로 가르듯이 뚜렷한 실체가 아니라는 점도 발견하게 된다. 기득권이 안락하게 느껴지는 어른들도 자녀들이 사회 진입에 어려움을 겪는 일을 달가워할 리 없다. 세상을 바꾸고픈 청년들도 부모들이 애써 쌓은 결실이 기반을 잃었으면 할 리 없다. 다른 배경에서 형성된 서로의 관점이 답답할 뿐이다. ‘청년’과 ‘중장년’의 이해만 놓고 세대론을 강조할 경우 놓치게 되는 점도 있다. 아직 투표권이 없는 세대인 후손들의 이해는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손에 쥔 결실을 살아 있는 세대가 ‘잔치’를 열어 다 나눠 먹고 청산해 버릴 것인가. 그런 진보주의를 원하는 세대는 없다. 사회적 안전망을 고려하지 않고 후손들을 ‘정글의 법칙’에 맡겨 버릴 것인가. 그런 자유주의를 원하는 세대는 없다. 선거가 지나간 이번 주말에는 젊은이와 부모들이 함께 교외 여행이라도 많이 했으면 좋겠다. 각자가 가진 생각을 참정권으로 펼치지 못하도록 막는 여행이 아니라, 세대별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생각을 서로 털어놓고 공유할 기회까지 만드는 여행이라면 더 좋을 것이다.유윤종 문화부장 gustav@donga.com}

스티브 잡스의 삶이 비범한 것은 단지 탁월한 경영자, 개발자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기자의 딸이 어렸을 때, 아이에게 잡스는 무엇보다도 ‘토이스토리를 만든 픽사의 최고경영자(CEO)’였다. 그후 잡스에 관한 책을 읽고서는 그가 ‘PC의 아버지’였다는 데 신기해했고, 그가 스마트폰과 태블릿PC 열풍의 주역으로 떠오르자 열광했다. “어떻게 한 사람이 그렇게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죠?” 그렇다. 잡스는 초년시절부터 한 자리만을 차고앉은 정보기술(IT)계의 ‘호족’이 아니었다. 애플을 세워 성공했고, 쫓겨나 성공했고, 돌아와 또 성공했다. 후세는 PC, 컴퓨터 애니메이션, 태블릿PC의 탄생에 동일한 인물의 손길이 깃들었다는 데 경탄할 것이다. 역사상 한 인물이 상이한 과업에서 이름을 남긴 일이 없지는 않다. 태양계의 탄생에 대해 처음 설득력 있는 이론을 내놓은 사람은 ‘순수이성 비판’으로 낯익은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였다. 뉴턴의 자연역학에 큰 관심을 가졌던 그는 이를 바탕으로 태양계 생성을 설명한 ‘성운설(星雲說)’을 내놓았다. 후세에 많은 수정 보완이 가해졌지만, 지금도 이는 태양계의 기원을 설명하는 기본적인 전제가 되고 있다. 보험업의 근간이 되는 요율표(料率表)를 개발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핼리 혜성’으로 친숙한 에드먼드 핼리다. 그는 통계에 천착한 사람이었다. 혜성에 관한 기록이 특정 기간을 주기로 되풀이된다는 통계적 사실에서 그는 혜성이 태양 주위를 도는 천체라는 사실을 알아냈고, 특정 지역의 수명과 발병률 등을 명확한 수치로 환산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해 보험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처럼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성과를 이뤄낸 인물들을 우리는 ‘다빈치적 인간’이라고 부르지만 정작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 같은 분류에 꼭 들어맞는 인물이 아니었다. 동시대인에게 그의 성과는 회화 한 분야로 한정됐다. 해부학, 역학, 건축학 등에 대한 그의 깊이 있는 탐구는 그의 작업 노트에 숨어 있다가 재발견을 기다려야 했다. 오늘날 다빈치나 칸트, 핼리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깊이 있는 성과를 이뤄내기란 훨씬 힘들어졌다. 각각의 분야에 대한 지식이 너무도 크게 축적됐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잡스처럼 여러 시기에 걸쳐 다양한 분야에서 성과를 거두는 인재가 지금도 나타난다. 무엇이 비결일까. 부지런함과 견인불발(堅忍不拔)의 정신은 기본이다. 잡스는 위대한 ‘상상가’였다. “단순함은 복잡함보다 어렵다.” “뒤를 돌아보면서만 점을 연결할 수 있다. 그 점들이 미래에 어떤 식으로든 연결될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어떤 일을 하는 데 그게 상당히 괜찮다면 너무 오래 머무르지 말고 다른 놀라운 일을 해야 한다….” 그가 남긴 어록 일부다. 초경쟁으로 함축되는 오늘날 우리 사회도 잡스와 같은 르네상스적 인간을 배출할 수 있을까. 여러 대학이 ‘융복합’ ‘학제 간 교류’를 외치고 있다.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1997년 애플 CEO로 복귀한 잡스는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다르게 생각하게 된 애플은 ‘예전 것보다 나은’ 제품이 아니라 ‘예전에 보지 못한’ 제품을 내놓으며 세계 시장을 장악했다. ‘다른 생각’을 더 폭넓게 용납할 수 있을 때 우리 기업은 애플을, 우리 사회는 선발 선진국들을 따라잡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을 앞질렀다고 선언하게 될 것이다.유윤종 문화부장 gustav@donga.com}
◇동아일보 ▽편집국 △부장급 석동율(채널A 보도본부 부장급) △사회부 차장 이동영 △차장 남관수(채널A 편집부 차장) 이진구(채널A 사회부 차장) △차장급 김응수(채널A 편집부 차장급) 하임숙(채널A 경제부 차장급) ◇채널A ▽보도본부 △국제부장 윤경민 △선거방송기획팀장 겸 정치부 차장급 장기영 △선거방송그래픽팀장 손영범 ◇통일부 △장관정책보좌관 차세현 ◇문화체육관광부 ▽전보 △주한 일본국대사관 공사참사관 겸 문화원장 심동섭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 사무처장 박위진 △국무총리실 파견 정상원 △국립중앙도서관 기획연수부 사서교육문화과장 박광수 △〃 자료관리부 주제정보과장 이경애 ◇여성가족부 △권익증진국장 강월구 ◇국세청 △논산세무서장 김규상 ◇한솔교육희망재단 △상임이사 백현기 ◇한국일보 ▽독자마케팅국 마케팅2부 △마케팅2부장 이현걸 △부산지사장 우승필 △대구〃 김근식 △대전〃 이은우 △광주지사 부장 박해상 ◇서울신문 △논설위원 구본영 ◇한겨레신문사 △편집국 사진부 섹션사진팀장 이종근 ◇제주일보 ▽총무국 △경리부장대우 강경돈 ▽편집국 △부국장 함성중 김승종 △부국장대우 고경업 △사회부장대우 김재범 ▽제작국 △국장대우 김한섭 △윤전부장대우 김영종 ◇광주매일신문 △전무이사 김대종 △주필·이사 남성숙 △편집국장 박준수 △부국장 겸 사회부장 이경수 △부국장 겸 편집부장 류연주 △부국장대우 정치부장 박상원 △정치부 부장 김종민 △논설위원 오성수 ◇SBS CNBC ▽보도본부 △본부장 김용철 △산업팀장 박호식 △방송1팀장 이수연 △방송2팀장 이미연 △금융팀장 김병길 ▽대표이사 직속 △편성팀장 배동년 △경영관리팀장 나의석 ◇TV조선 ▽전략기획실 △실장 고종원 ▽보도본부 △편집에디터 김구철 △뉴스편집1부장 오창우 △뉴스편집2부장 권혁범 △시사제작부장 정한 ▽콘텐츠본부 △부본부장 겸 예능콘텐츠팀장 권오형}

“주님 일어나소서. 나의 하느님 구하여 주소서….” 교회 가득히 낭랑한 성경구절이 울려 퍼졌다. 독창자들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 다양한 언어로 한 구절씩 부르면 참석자들이 이를 받아 ‘알렐루야’를 노래했다. 지난달 29일 프랑스 파리 남동쪽으로 약 400km 떨어진 마을 테제에 있는 테제 공동체 내 ‘화해의 교회’. 나이도, 출신 국가도 각각인 순례자 500여 명이 의자도 없는 마룻바닥에 차례로 들어섰다. 참석자 대부분은 의외로 10, 20대 젊은이였다. 눈을 감은 채 기도에 빠져든 사람들 사이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는 여성도 보였다. 10분의 침묵 뒤 알로이스 원장 수사(57)의 짧은 기도와 찬송가를 끝으로 1시간의 낮 기도는 끝났다. 테제 공동체는 세계에서 수백만 명의 젊은 순례자가 찾아와 노동하고 기도하는 기독교 수행처. 1940년 창설 이후 특히 젊은 순례자들의 ‘메카’가 됐다. 매년 10만여 명이 찾고 있으며 한국 방문객은 한 해 500여 명이다. 이날 이곳에는 ‘특별한 손님’들이 모습을 보였다. 대한불교 조계종 자승 총무원장 등 스님 20여 명이 가사(袈裟) 차림으로 기도에 참석한 것. 테제 공동체의 유일한 한국인 수사인 신한열 씨(49)는 “범기독교 내 종교인들은 자주 오지만 뿌리가 다른 불교계가 종단 차원에서 참석한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신 수사는 “공동체는 기도의 양식은 간단하게 하고 순례자들, 특히 젊은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프랑스의 다른 수도원에서 2년간 수행했던 향적 스님(선본사 주지)은 “가난하지만 밝은 공동체의 모습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내 사찰과 교회는 더욱 낮은 자세로 나눔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했다. 테제에 전 세계 젊은이들이 몰리는 이유로는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개방성’이 꼽힌다. 벨기에 출신의 한 교사(45)는 “학생 30여 명과 함께 일주일 동안 머무르고 있다. 기도와 대화를 통해 ‘나의 길’이 무엇인가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테제의 순례자가 되면 하루 세 차례의 기도와 그룹별 모임, 1시간여의 노동을 하고 오후 8시 반 저녁기도 이후에는 ‘대침묵’을 지킨다. 외부 도움 없이 순례자들이 내는 35∼50유로(약 4만7800∼7만8000원·일주일 기준)로 운영된다. 알로이스 원장 수사는 “2008년 해인사를 방문했는데 독신 수행자들의 진지한 수행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자승 스님은 “템플스테이를 더욱 발전시키고자 테제 공동체에 배우러 왔다. 사람들의 순수하고 밝은 표정에서 많은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테제=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은 볼수록 선거 과정과 닮았다. 투표로 상위 진출자를 가리는 점이 그렇고, 단계를 거듭하며 약자를 떨어뜨려 나가는 점도 그렇다. 추석 연휴에 여러 지상파와 케이블 채널이 국내외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을 풍성히 방영했다. 그 덕택에 지난 추억도 떠올릴 수 있었다. 2008년, 영국 연수 중이던 기자의 가족은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X팩터’를 빼놓지 않고 보았는데 당시 결선에 올랐던 ‘걸밴드’ 멤버 티타가 한류 오디션 유럽예선에 뽑혀 MBC ‘위대한 탄생 2’에 등장한 것이다. 반가웠다. 그 시즌 X팩터는 출연자들의 남다른 ‘스토리’로 많은 화제를 낳았다. 10대에 엄마가 되어 아이들을 기르느라 잃은 청춘을 되찾겠다는 레이철, 사별한 아내가 ‘당신의 꿈을 이루라’고 했던 말을 떠올리고 출연하게 됐다는 대니얼의 이야기가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렸고 이들은 승승장구하며 결선에 진입했다. 그러나 그때쯤 여러 신문이 ‘오디션에 개인 히스토리가 너무 많다’ ‘인생유전 이야기엔 질렸다’며 비판적 기사들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그 뒤 이들의 승전보는 멈췄다. X팩터 2008년 시즌은 그렇게 마무리됐지만 서바이벌 오디션이 출연자의 남다른 사연을 강조하다 자기 함정에 빠진 사례는 많다. 2007년 영국 ‘브리튼스 갓 탤런트’에서 슈퍼스타가 된 폴 포츠는 ‘전화 외판원 출신 테너’로 화제를 모았지만 성악 레슨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져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한국에선 보육원에서 자라 껌팔이 생활까지 경험했다는 tvN ‘코리아 갓 탤런트’ 출연자 최성봉 씨가 예술고에 다녔던 사실이 방송에 나오지 않아 비판을 받았다. 왜 사실을 숨기면서까지 남다른 스토리 만들기에 힘을 쏟을까. 투표는 이성적인 행위이면서 감성적인 행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멋진 노래도 중요하지만 내 마음을 움직이려면 그 사람의 ‘이야기’가 나를 움직이는 것도 중요하다. 오디션 프로그램이 뜨는 현실과 관련이 있을까. 우리의 정치과정에도 ‘감성적 스토리텔링’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자리를 건 투표에 나서면서 눈물을 보이고, 산에서 방금 내려온 텁수룩한 수염의 후보자가 어제까지 넷심을 뒤흔들어 놓았던 경쟁자를 부둥켜안는다. 후보자의 너덜너덜한 신발이 사진작가의 카메라에 잡히면 몇 시간 내 트위터를 타고 전파된다. 정보가 실시간 전파되는 스마트 세대의 특징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대중이 새로운 얼굴과의 감성적 소통을 갈망하는 것은, 정치권이 소통을 모르고 역지사지와는 담을 쌓으며 집단이기주의에 함몰된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주의해야 한다. 오디션 프로그램과 선거는 다르다. 가수를 잘못 뽑았을 때의 불이익은 설익은 노래를 듣는 데 그친다. 국회의원을, 시장을, 대통령을 잘못 뽑았을 때의 불이익은 더욱 현실적이고 직접적이다. 서바이벌 오디션에서는 최소한 노래를 들어본 뒤 투표한다. 선거에서는 후보의 참된 실력을 알지 못한 채 투표하고, 그 결과가 몇 년이나 사회에 부담이 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어느 때보다 감동을 주는 지도자를 원한다. 단, 국민의 일꾼을 뽑는 일에는 냉철한 이성도 필요하다. 당장 감동의 이미지를 주는 인물에게 열광할 것이 아니라, 임기가 끝날 때까지 감동의 총량을 크게 안겨줄 사람이 누구인지 차가운 머리로 결정해야 할 것이다.유윤종 문화부장 gustav@donga.com}

10∼19세기 오늘날의 독일 오스트리아 지역에 있었던 신성로마제국을 당시 지식인들은 ‘비(非)신성 비로마 비제국’이라고 부르곤 했다. 고대 로마제국의 강역을 대부분 비켜갔고 선제후(選帝侯)가 선출하는 황제는 권한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름과 실체가 다른 나라는 우리 가까이에도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옛 조선왕국의 북부를 지배할 뿐 인민이 주인 행세를 하지 못하며 민주주의로 부를 정치과정도 갖지 못했다. 3대째 세습통치 과정을 밟는 그곳의 정체(政體)는 공화정보다 왕정에 가깝다. 요즘 젊은이들의 어법을 빌리면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 쓰고 독재 왕국이라고 읽어야” 할 판이다. 언어에는 마음이 없지만 이처럼 언어를 이용하는 인간은 바른 마음을 잃기 쉽다. 그러므로 특정 개념이 오용되고 오염되었을 경우 한층 엄밀한 개념을 적용하는 것이 당연하다. 최근 초중고교 역사교과서 개정방향을 담은 교육과학기술부 고시안이 ‘민주주의’ 용어를 ‘자유민주주의’로 고친 데 대해 ‘역사교육과정 개발정책 연구위원회’ 위원들이 반발하고 일부 매체가 이에 호응하면서 파장을 키웠다. 주장은 크게 두 가지다. ‘민주주의’만으로 충분하며, ‘자유민주주의’는 보수층의 입맛에만 맞는 반공민주주의라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인터넷 세상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위키피디아’를 찾아보았다. 누리꾼 누구나 내용을 만들고 바꿀 수 있는 텍스트이니 오류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처럼 보편적인 개념에서 세계 누리꾼이 지켜보는 가운데 의도적인 왜곡을 범하기란 힘들 것이다. ‘민주주의(Democracy)’ 항목을 보니 첫 페이지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민주주의’의 정의란 없다”고 전제한 뒤 “많은 사람이 ‘민주주의’라는 말을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의 줄임말로 사용하며, 이는 정치적 다원주의, 법 앞의 평등, 적법한 절차, 인권 등을 나타낸다”고 적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항목은 더욱 명확하다. 첫 두 문장은 다음과 같다. “자유민주주의는 입헌(Constitutional)민주주의로도 알려져 있으며 대의민주주의의 일반적인 형태다.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따르면 선거는 자유롭고 공정해야 하며, 정치과정은 경쟁적(Competitive)이어야 한다.” 세목으로 들어가 ‘세계의 자유민주국가’ 항목을 본다. 자유민주국가로 유럽연합 국가들과 그 외 미국, 일본, 한국, 브라질, 인도 등 17개국만을 들고 있다. 자유민주주의가 사회민주주의까지 포괄하는 개념인 점도 밝히고 있다. “‘민주주의’라는 용어만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인민민주주의나 다른 체제를 용인하려는 것이 아니니까”라면 좋다. 일상어에서는 ‘민주주의’만으로 그 뜻에 근접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교과서 고시안은 교과서에 담을 내용을 규정할 헌법과 같다. ‘민주주의’로 쓰고 다르게 읽을 수 있는 개념은 최대한 피하는 것이 마땅하다. 일부에선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1972년 유신헌법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란 표현이 등장하면서 도입돼 독재시대의 색채가 다분한 용어라고 폄하한다. 기자는 1970년대 대학생들의 유신 반대 데모를 보았던 때를 기억한다. 그들은 “자유할 때까지 자유 외쳐라”고 울부짖었다. 학생운동가에서 ‘자유’가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주사파가 득세한 1980년대 들어서였다.유윤종 문화부장 gustav@donga.com}

영국 에든버러가 13일 밤 한국의 신비한 도술(道術)에 취했다. 한국의 해학적 무대 미학으로 객석을 사로잡은 극단 목화의 연극 ‘템페스트’로 인해서다. 한국 연극으로는 처음 에든버러 페스티벌에 공식 초청돼 시내 킹스시어터에서 개막한 이 작품은 영국인들에게 너무도 익숙한 셰익스피어의 텍스트를 한국적 전통으로 풀어냈다. 마술로 폭풍우를 불러일으키는 첫 장면부터 극은 관객을 매료했다. 2층 발코니 좌우에 포진한 5인조 국악밴드의 강렬한 반주와 푸른 조명 속에 소복을 입고 등장한 배우들은 거센 파도에 흔들리는 일엽편주의 위기상황을 긴 천을 휘날리는 힘찬 군무로 풀어냈다. 이어 그 배에 불이 붙은 설상가상의 상황을 이번엔 붉은 부채춤으로 형상화했다. 숨죽이며 지켜보던 관객들은 동양의 전설 같은 이야기에 셰익스피어의 이야기가 수놓아졌음을 발견하고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원작은 밀라노를 다스리던 주인공 프로스페로가 나폴리 국왕과 결탁한 동생의 음모에 빠져 딸 미란다와 함께 절해고도에 유폐된 뒤 12년간 익힌 마법으로 복수에 나서지만 나폴리 왕자와 미란다의 결혼으로 용서와 화해를 이룬다는 내용. 극단 목화의 오태석 예술감독은 이 드라마의 배경을 5세기 가야와 신라가 지배하던 한국 남해안 섬으로 이동시켰다. 프로스페로는 가락국의 지지왕(송영광)으로, 나폴리왕 알론조는 신라 20대왕인 자비왕(정진각)으로 변신한다. 역사적 배경만 한국화한 것이 아니다. 프로스페로의 충복인 요정 에어리얼은 한국 무속신앙에서 액막이 때 쓰는 인형인 제웅(이수미)이 되고, 그 명을 수행하는 공기의 요정들은 몽당빗자루만 남겨놓고 사라지는 허재비(허수아비의 경상도 사투리)들로 등장한다. 제웅과 허재비들은 사람은 물론이고 원숭이 오리 호랑이로 해학적 변신을 거듭하며 자비왕 일행을 희롱한다. 관객들은 환상적 존재인 요정을 인간과 친숙한 존재로 형상화한 점에 큰 호응을 보였다. 이런 둔갑술은 제국주의적 시각의 산물로 비판받는 칼리반의 형상화에서 절정을 이뤘다. 칼리반은 섬의 원주민으로 외모뿐 아니라 마음까지 노예근성에 물든 인물. 오 감독은 이 칼리반을 두 개의 머리로 나뉘어 말싸움만 하는 쌍두아(조은아 이승현)로 형상화하면서 한국적인 상생의 미학을 펼쳐냈다. 1층과 2층 700여 석이 거의 꽉 찬 객석에서는 “러블리(사랑스럽다)” “매지컬(마술적이다)”이라는 감탄이 이어졌다. 지지왕이 관객들에게 직접 말을 거는 마지막 장면에서 열렬한 환호가 쏟아지면서 공연이 1분 넘게 멈췄고 커튼콜 때는 1층 객석 3분의 1가량이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에든버러 페스티벌의 조너선 밀스 예술감독은 “용서와 화해의 드라마를 셰익스피어의 시적 운율을 살리면서도 코믹함을 잃지 않고 더 풍성하게 그려냈다. 이번에 초청된 아시아 작품들의 모범”이라고 격찬했다. 극단 목화의 ‘템페스트’는 16일까지 세 차례 더 공연된다. 함께 공식 초청된 안은미무용단의 ‘프린세스 바리’는 19∼21일 에든버러 플레이하우스에서, 정명훈 씨가 이끄는 서울시향 연주회는 24일 어셔홀에서 열린다. ▼ “분단의 증오 씻는 화해의 굿판”… 오태석 감독 인터뷰 ▼“템페스트는 미움을 사랑으로 바꾸는 마법의 연극입니다. 처음엔 복수로 시작하지만 유쾌한 용서로 마무리합니다. 저는 이를 분단의 세월 속에 각박해지는 우리들(한국인들)의 이야기로 바꿔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오태석 씨(사진)는 13일 밤 첫 공연을 마치고 난 뒤 동아일보와 가진 단독 인터뷰에서 “이 연극은 셰익스피어의 한국화만 겨냥한 것이 아니라 분열과 증오로 멍든 한국인들에게 용서와 화해의 위대함을 일깨우고 싶은 마음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 작품은 외딴 섬에서 과거의 원한을 씻고 미래의 화해를 불러내는 한판 굿판을 닮았습니다. 영국 관객들에게 원작의 묘미를 새롭게 일깨워주는 동시에 미움의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의 마음을 치유해줬으면 하는 마음도 담았습니다.” 칼리반을 두 개의 머리가 계속 입씨름을 펼치는 쌍두아로 표현한 것 역시 한국의 분단현실을 염두에 둔 ‘시적 장치’였다고 설명했다. 쌍두아의 몸을 둘로 갈라주는 것도 분단의 고착화가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고 형제애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풀어냈다는 설명이다. 특히 그는 이번 공연에서 셰익스피어의 유장한 대사를 우리말이 지닌 생략과 압축의 미학으로 담아냈는데 관객들이 이를 알아봐 준 것이 가장 흡족하다고 말했다.에든버러=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러시아와 북한 국경 인근에 오랫동안 방치돼온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斷指同盟)’ 기념비가 새로 세워지고 그 주변이 공원으로 조성됐다. 새 기념비가 들어선 곳은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남쪽으로 약 350km 떨어진 크라스키노 지역에 있는 한국 기업 유니베라의 현지 농장 앞이다.광복회는 4일 낮 12시(한국 시간 오전 10시) 이곳에서 유니베라 러시아법인,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 국가보훈처 등과 함께 ‘단지동맹 기념비’ 제막식을 열었다.크라스키노는 두만강과 멀지 않은 국경지역으로, 1910년 전후 항일의병투쟁의 중심지였다. 안의사는 1908년 4월 이곳에서 러시아 내 최초의 의병조직인 동의회를 조직해 항일무장투쟁을 벌였으며 이듬해 3월 김백춘 김천화 강창두 박봉석 정원주 유치홍 조응순 백규삼 김기룡 강순기 황영길 등 동지 11명과 함께 왼손 넷째 손가락을 끊어 태극기에 ‘대한독립’ 네 글자의 혈서를 쓰며 조국의 독립을 결의했다. 안 의사는 같은해 10월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했다.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은 2001년 10월 안 의사의 단지동맹을 기념해 크라스키노 추카놉카 마을 강변에 처음으로 기념비를 세웠다. 하지만 기념비가 강물의 범람으로 자주 물에 잠기고 주민들에 의해 훼손되는 사례가 많았다. 이에 현지에서 약용작물 재배 등의 사업을 하고 있는 한국 기업 유니베라가 2006년 관리가 쉬운 농장 앞 공터로 비석을 옮겼지만 이 지역이 다시 국경지대로 편입되면서 러시아 보안당국의 허가 없이는 출입할 수 없게 됐다. 이에 따라 광복회와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 유니베라 측이 나서 국경지역을 벗어난 유니베라의 다른 농장 앞에 다시 기념비를 세우는 작업을 추진해왔다.새로 세워진 기념비는 모두 2점. 하나는 높이 4m, 폭 1m 정도의 큰 비석이고, 다른 하나는 높이와 폭이 각각 1m 정도인 작은 비석이다. 큰 비석에는 ‘1909년 3월 5일 12인이 모이다’라는 비문을, 작은 비석에는 ‘2011년 8월 4일 102년이 지난 오늘 12인을 기억하다’라는 비문을 새겼다. 기존의 기념비는 이곳으로 옮겨와 작은 기념비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웠다.단지동맹 기념비 신축 사업에 들어 간 비용은 유니베라 측이 전액 부담했다. 최재영 유니베라 러시아법인장(45)은 “역사적인 기념물을 잘 보존하는 것이 후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이라고 생각해 전액 후원을 했다”며 “더 많은 국민이 편하고 쉽게 올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박유철 광복회장은 “그동안 안 의사를 비롯한 12명의 숭고한 정신이 담긴 기념비가 훼손되는 것이 안타까웠다”면서 “구한말 항일운동의 중심지였던 크라스키노에서 그 흔적을 잘 관리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이 행사에는 송영길 인천시장, 정태근 한나라당 의원, 신낙균 민주당 의원, 변대규 휴맥스 사장 등 국내 정재계 인사와 러시아 연해주 주정부 인사 등 170여 명이 참석했다.크라스키노=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 일제에 의해 사할린으로 끌려간 후 혹독한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광복을 맞았으나 고국으로 돌아오지도 못한 채 그 땅에 버려져야 했던 강제징용자들. 동토의 땅 사할린의 슬픈 역사를 고스란히 몸으로 살아야 했던 그들도 세월과 함께 하나 둘 고난의 생애를 마감하고 있다. 한국으로의 ‘영주귀국’ 사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후손들은 러시아인으로 동화를 거듭하며 사할린의 오늘을 살아간다. 》 박수남 씨(91), 전남 고흥 출신. 1943년 11월 22세에 징용을 당해 사할린까지 끌려왔다. 질곡의 한국현대사와 함께했던 한 세기 가까운 생애를 그는 연도와 날짜까지 세세히 기억하며 들려주었다. 며칠 후면 ‘일본으로 돈 벌러 가기로’ 하고 누나 집에 가 있던 그에게 ‘빨간 딱지(징용통지서)’가 나온다. 여수항을 출발한 그의 삶은 홋카이도를 거쳐 사할린의 탄광으로 내던져진다. “사할린의 쿠시나이에 도착하니 째진 거(발가락이 갈라진 일본 작업화 지카다비) 하나씩 주데요. 그걸 신고 눈 내린 바닷가를 백 리는 걸었는데, 함바 주인이 와서 국수 한 그릇 먹이고 데리고 가데요.” 그렇게 오다스 탄광의 광원이 되었다. 1944년 조업 중지된 탄광에서 차에 실려 비행장 건설현장으로, 다시 코르사코프 항구 부근으로 끌려가 방공호를 파다가 광복을 맞는다. 고국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면서 바닷가로 나가 고기를 잡아 팔며 무국적자로 살아가던 그에게 운명처럼 한 남자가 찾아온다. ‘농편(농사짓는 데)으로 가자’는 그를 따라 브이코프 탄광지대 인근으로 와서 1년 남짓, 믿고 따랐던 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청년 박수남은 ‘꽃부리 영(英)자 쓰는 열다섯 살의 그 집 큰딸’ 영자와 결혼하면서 졸지에 어린 처남들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된다. 감자, 당근 농사를 지으며 힘들게 살았다. 나중에는 ‘장기근속으로 노력영웅 훈장도 받으며’ 철근콘크리트 공장에서 일했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그동안 고향으로 수없이 편지를 보냈으나 소식이 없었다(1976년에 처음으로 사진과 편지를 받았다는 말을 훗날 동생에게서 들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온 이 편지 때문에 한국의 가족들은 경찰서에 불려 다니며, 감시를 받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리고 그의 생애가 또 한 번 요동친다. 2000년 2월 23일, 여생을 한국에서 보내기 위해 그는 아내와 함께 영주귀국했다. 뒤따라 의사였던 처남도 한국 모 병원에 스카우트되었다며 서울에 도착했지만 공항에 나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취업사기였다. 수술실의 마취기술자였던 딸은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추진하는 와중에 직장을 잃자 ‘해 먹을 게 없어’ 서울로 온다. 월 100만 원을 받기로 하고 서울 명동의 식당에 취업했지만 그 딸마저 보름 만에 ‘나가려면 다른 사람을 구해 놓고 나가라’는 냉대 속에 겨우 15만 원을 받고 러시아로 돌아와야 했다. 조국과의 악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아내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다. 병명도 모른 채 한국의 병원을 들락거리다가 다시 찾은 사할린에서 ‘1년이나 늦었다’는 병원 판정과 함께 손도 못 써보고 아내는 세상을 떠난다. 아내의 병수발과 장례를 치르고 한국으로 돌아갔지만, 그를 기다린 것은 경기 안산시의 임대아파트 퇴거와 기초생활수급자 자격 박탈이라는 통보였다(영주귀국자는 3개월 이상 국외에 나가 있을 수 없다는 규정을 몰랐던 것이다). 차디찼던 조국의 기억을 뒤로하고 다시 사할린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2005년 5월이었다. 비극 속에 꿈틀거리는 민족사의 강줄기 위를 풀잎처럼 떠내려갈 수밖에 없었던 작고 무력했던 한 개인의 생애, 이런 삶도 있었다니…. 한 시간 넘게 차를 달려 브이코프 탄광지대 인근으로 그를 찾아갔다. 포장 공사를 하느라 흙먼지가 구름처럼 솟아오르는 길가, 조그만 버스정류장에 박 씨가 나와 있었다. 그 더운 날씨에도 양복을 입은 노인은 꼿꼿한 모습이었다. 손을 흔들며 반갑게 차에 오르자마자 노인이 내민 것은 녹슨 깡통에 비닐을 깔고 곱게 담은 딸기였다. 자신을 만나기 위해 찾아오는 손님을 위해 손수 텃밭에서 기른 딸기를 두어 움큼 따서 씻어가지고 나온 것이다. 91세 할아버지가 기른 딸기를 묵묵히 베어 물며 생각했다. 정말 이분에게 한국은 무엇일까. 조국에, 시대에, 이념에 할퀴고 찢긴 한평생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그를 비켜가기라도 한 듯이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노인은 정갈했다. 그의 우리말은 90년의 세월만큼이나 멀리 있었다. ‘한방짜리에서 사는 게 얼마나 바빠?(방 한 칸에서 사는데 얼마나 고생인가)’ ‘동삼에 먹을 거 다 절구고 말리고 단도리해야 해(한겨울에 먹을 것을 다 절이고 말리고 챙겨야 해).’ 그는 힘들다를 ‘바쁘다’라고 했고, 직장을 ‘일간’이라고 했다. 마지막 날, 사할린 남쪽 코르사코프 항구를 찾아갔다. 닥터 지바고가 걸어 나올 것만 같은 자작나무 숲이 이어지는 길을 김홍지 사할린한인연합회 회장이 동행했다. 귀국선을 타기 위해 한국인들이 몰려들었던 그 항구였다.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망향의 언덕’에는 이곳 액화천연가스(LNG) 공장 건설에 참여했던 대우건설이 성금을 모아 세운 한인 징용희생자 위령탑이 은빛으로 빛나며 푸른 하늘로 치솟아 있었다. 역사의 비극을 묻은 채 세월은 흘러갔다. 오늘 바다는 파도조차 없고, 코르사코프 항구에 정박한 배들의 침묵뿐, 기념탑 건너 아파트 앞에서 유모차를 밀고 가는 러시아 여인의 어깨 위로 7월의 햇살이 들끓고 있었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은, 오직 그것을 사랑했기 때문에 안다(everything that I know … I know only because I love)’라고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 썼다. 나 또한 사할린에 와서야 사할린 한인들이 품고 살아가는 비극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 ‘용서하라,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된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우리는 너무 많이 잊고 있다. 사할린 동포의 고난을 후세에 전하는 기념관조차 없지 않은가. 징용 당사자들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함께 사라져 버릴 것은 고난의 기억만이 아니다. 서둘러 자료의 멸실을 막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그 통한의 시대를 증언할 것인가. 역사적 책무를 생각할 때, 사할린 동포를 위한 현실적 지원 조치도 서둘러야 한다. 지난 2년 동안 4명의 국회의원이 사할린 동포들을 지원하기 위한 4개의 특별법안을 발의했지만 여전히 국회에 계류 중이다. 조속한 법안 통과는 그동안 국가가 방기해 온 피해국민에게 바치는 최소한의 예우가 될 것이다. 사할린을 떠나던 날, 활주로에서 대기 중인 비행기 창밖으로 노랗게 흔들리는 꽃들이 보였다. 지금도 사할린 공동묘지의 풀을 베며 나아가고 있을 조사원들을 생각했다. 더 늦기 전에 우리 정부가 한발 앞서 사할린 동포들의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가 아닌가. 한인 공동묘지 전수조사가 갖는 의미의 중요성도 여기에 있으리라. ▼ 한국정부 ‘2, 3세 문화 지원’ 절실 ▼현재 사할린에는 한인동포 3만여 명이 살고 있다. 사할린이산가족협회의 2010년 자료에 따르면 1945년 8월 이전 출생자로 현재 남사할린 지역에 살고 있는 한인은 631명이다. 사할린 동포들의 호소는 △희망자의 한국 영주귀국 △사할린 현지 정착 지원 △강제동원 피해 보상 및 이중징용 피해자의 생사 확인과 피해보상 △강제노역 당시의 저축금 등에 대한 일본 정부의 배상으로 요약된다. 이들은 크게 한국으로 영주귀국해 안산 고향마을 수준의 시설에 살기를 희망하는 사람과 이미 사할린에 정착한 자녀들과 헤어지기를 꺼려 귀국을 포기하고 한국이나 일본 정부에서 매월 일정 액수의 보상금 또는 생활보조비를 받기를 원하는 사람으로 구분된다. 2000년 영주귀국이 시작된 이래 2010년 3월까지 국내 19개 지역으로 사할린 한인 3762명이 영주귀국했다. 현재 전국의 20개 아파트에서 1566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일본은 한인 영주귀국사업에 지금까지 약 700억 원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일 양국 적십자사를 주체로 하는 이 사업은 사할린 동포의 영주귀국, 일시 모국 방문, 영주귀국자 역방문 등을 전적으로 일본 정부의 재정에 의존해 왔다. 올해 6월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의 사할린동포 지원 관련 법안 공청회 자료집에 따르면 2011년도 일본의 관련 지원예산은 21억6100만 원이다. 그러나 이같이 일본이 견인하는 추진이 아니라 우리 정부가 주도하는 체제로 전환하는 것이 절실하다. 사할린 동포의 영주귀국이 러시아로서는 국적 이탈이므로 외교 마찰이 일 가능성이 있다거나 다른 나라 동포와의 형평성 문제를 운운하는 발상도 문제 해결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모스크바의 대학에 유학한 후 유즈노사할린스크 시 제1부시장과 사할린 주 건설국장을 지낸 한인 2세 김홍지 회장(사할린한인연합회)이 보여주듯 한인들은 높은 교육열에 힘입어 사할린 지도층 곳곳에 진출해 있다. 그러나 러시아인으로의 동화를 거듭해 한인 2세, 3세에 대한 문화적 지원이 절실하다. 2005년 일본이 6억 엔을 지원해 건설된 ‘사할린한인문화센터’조차 문화공간으로서가 아니라 식당 등 수익사업이 우선시되는 실정으로 현재 사할린은 한국문화의 불모지에 가깝기 때문이다.한수산 작가·세종대 교수}



한밤, 헤드폰을 끼고 앰프의 볼륨을 올린다. “인간은 커다란 고통 속에 있도다(Der Mensch liegt in grosser Pein)….” 말러의 가곡 ‘원광(原光)’이 귓전을 울린다. 모처럼 안락한 시간이지만 하루 동안의 자잘한 과오와 우행(愚行), 사소한 득실이 머리를 어지럽힌다. 인간은 괴로움을 통해 비로소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인간이 어려운 시간에도 당당할 수 있다는 점은 누구에게나 한결같은 위안이다. 최근 읽은 몇 페이지의 글에서 벼락같은 힘을 얻는다. 세상의 이치를 주어와 서술어, 수식어 몇 개로 드러내는 글의 힘, 상징의 힘. 바로 문학의 힘이다. ‘꿈인지 생시인지/사람들이 정치를 하며 살고 있다/경제를 하며 살고 있다/사회를 하며 살고 있다//꿈인지 생시인지/나도 베란다에서/화분에 물을 주고 있다’(‘물 위에 씌어진 3’) 이 시를 쓴 최승자 시인은 최근 출간한 시집 ‘물 위에 씌어진’을 정신과 병동에서 썼다. 단 하나 남은 혈육인 외삼촌만이 그를 면회할 수 있다. 시인은 시집의 서문에 쓴 대로(‘하루 낮에도 천국과 지옥을 오락가락하는 게 시인이 아니더냐’) 갈피가 잡히지 않는 세계를 넘나든다. 극심한 불면증, 갑작스러운 환청과 환각이 그의 정신을 착취해 들어가고 있다고 했다. 체중은 어느새 34kg까지 줄어들었다. 그러나 그의 새 시집 ‘물 위에 씌어진’에는 고통과 고독, 생사까지도 깔고 앉은 정신의 강력함이 있다. ‘슬펐으나 기뻤으나/그래도 할 일이 없어 오른 산(山)/오른 발을 동에 두고 왼 발은 서에 두고/굽어 보고 굽어 봐도/슬펐으나 기뻤으나의 그림자들일 뿐/세상은 간 곳 없고 부풀어오르는 먼지뿐,(‘슬펐으나 기뻤으나’)이라고 말하는 그의 인생관과 존재관에는, 다윈 식으로 말하면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 또 하나의 장엄한 정신이 있다. 최승자 시인의 시집이 도착한 그날(7월 14일) 본보 지면에 실린 최인호 작가의 인터뷰를 읽는다. 항암 치료의 후유증으로 손톱이 빠지자 손가락에 골무를 끼워가며 작가는 장편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완성했다. 작가는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병(病)의 동굴에 갇혀 있지 말고 푸른 바다 위에 떠 있어라!” 단지 병뿐일까. 일상의 우울이나 무기력의 동굴에 갇혀 있을 이들에게도 두려움 없는 그의 정신은 환한 감동을 준다. 한 독자는 인터뷰를 읽고 종일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최 작가님이 빠삐용처럼 우뚝 일어나시기를 빌었습니다.” 인터뷰 끝에서 작가는 “내년 만우절에 기자회견을 열 것”이라고 했다. 자신의 암에 대해 껄껄 웃으며 소리치겠다고 했다. “뻥이야!” 그 폭소는 장엄하다. 모차르트가 삶의 마지막을 예감하는 속에서도 환한 밝음으로 써낸 마지막 교향곡 ‘주피터’의 마지막 C장조 화음만큼이나 그러하다. 생사를 앞에 놓고 이렇게 장엄하고 존엄할진대, 일상의 과오와 우행이 문제이겠는가. 두려움이 무슨 필요겠는가. 두 권의 책, 시집 ‘물 위에 씌어진’과 소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이번 휴가 트렁크에 넣으려 한다. 모처럼 머리를 쉬는 시간, 정신을 바짝 차리게 만드는 텍스트가 어울리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쉬는 시간이기에 비로소, 인간의 운명적인 괴로움과 극복에 대해 거리를 두고 음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유윤종 문화부장 gustav@donga.com}

《 국무총리 산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일제강점기 러시아 사할린으로 강제동원됐던 한인들의 묘역에 대한 실태조사를 벌이고 있다. 사업을 위탁받은 지구촌동포연대(KIN) 소속 조사원들은 7월 3일부터 조사에 나섰으며 10월 최종 보고서가 나올 예정이다. 한수산 씨(작가·세종대 교수)가 광복 후 최초로 이뤄진 이번 실태조사 현장 등을 취재하고 귀국했다. 취재기를 3회에 걸쳐 연재한다. 》 아침부터 쏟아지는 폭우에 갇혀, 사할린으로 떠나는 비행기는 1시간여를 활주로에 대기하고 있었다. 빗물이 흐르는 창에 이마를 기대며 생각했다. 어디에, 얼마나 더 많은 민족의 한과 멍울이, 과거사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가. 그러나 역사의 트라우마를 찾아 비통함 속에 떠났던 다른 취재여행과는 다르게 나는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끌려가 돌아오지 못한 채 사할린에서 숨진 한인들의 묘지를 조사해 자료를 데이터화하는 작업이 건국 이후 최초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조사는 유해를 고국으로 송환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첫 삽을 뜨는 작업이기도 하다. 질곡의 한 시대를 마감하고 희망과 약속의 뜻을 심는 그 현장을 찾아간다. 사할린 한인사의 원년이 되어, 그 기민(棄民)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는 첫걸음을 함께하는 것이다. 서울을 떠난 지 3시간, 비행기는 사할린의 주도 유즈노사할린스크 공항에 내렸다. 이 여름 사할린은 일교차가 심하다. 한낮이면 몸을 못 가누게 땀이 흐르지만 아침의 체감온도는 11월처럼 춥기까지 하다. 다음 날, 배덕호 지구촌동포연대 대표와 함께 제1묘지 작업 현장에 도착했다. 기가 질린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었던가. ▼ 잡목 쳐내자 드러난 얼굴… “귀국선이 왔는가” 말을 건네네 ▼묘지는 묘지인데, 자작나무 숲 속으로 풀이 우거져서 묘비가 보이지 않는다. 조사단이 작업을 하고 있다는 구역까지 찾아갔지만 숲 속 어디에 있는지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는다. 전화로 연락을 하고 통행로에서 기다리니 조사원들이 숲 속에서 나온다. 얼굴은 환하게 웃는데 그 모습들이 말 그대로 영화 속 특수임무를 수행 중인 요원들 모습이다. 갈색 방충복을 뒤집어쓰고 긴 장화를 신었다. 손에는 반달형의 러시아 낫이 들려 있다. 나 또한 조사원들의 뒤를 따라 풀숲을 걷고 또 걸었다. 숨 막히게 습한 열기 속으로 꽃가루처럼 모기 떼가 날아든다. 햇살이 들지 않는 자작나무 숲 속, 가슴 높이로 자라 무성한 풀, 땀으로 온몸이 젖고, 걸치고 있는 옷이 젖는다.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는 한인 묘지들, 비문을 읽지 않고도 러시아인 묘와 한인들의 묘는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 한인 묘지는 묘비를 봉분 앞에 세우는데 러시아인들은 묘비를 봉분 뒤에 세운다.○ 귀국선을 기다리며 하나둘씩 사라지다 키릴 문자로 쓴 이름 밑에 ‘리도길’이라고 한글로 적은 묘비에는 1907년에 태어나 1984년에 세상을 떠났다는 숫자뿐, 비문이 없다. 이름도 없이 오직 사진뿐인 묘비도 있다. 단지 ‘고영양남씨지묘’라는 글자만을 적은 묘비도 보인다. 故南珍希之墓(고남진희지묘)라고 시멘트 기둥에 새기고 갓을 씌운 묘비에는 묘주가 ‘모주’라고 잘못 적혀 있다. KIM이라고 새긴 묘비가 보였다. ‘아, 이것도 한인 묘지구나’ 하면서도…. 키릴 문자로 쓴 비명을 읽을 수 없는 나는 숫자만으로 그가 1985년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만을 겨우 확인한다. 광복을 맞았지만 조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이 일본에 의해 이 땅에 버려져야 했던 사람들, 귀국선을 기다리며 이들은 추위에 얼어 죽고, 굶어 죽고, 미쳐서 죽어 갔다고 했다. 냉전시대의 분단 조국도 애써 그들을 외면한 채 세월이 흘러갔다. 사할린의 과거는 과거가 아닌 현재진행형이었다. 저 비석의 사진들이 겨울을 지나며 얼어 터져서 떨어져 나갔듯이, 이제 또 과거를 미래완료형으로 묻어 두어서는 안 된다. 지난 역사는 가슴을 저리게 하는데…. 앞을 가린 자작나무는 왜 이다지도 푸르게 너울거리는가. 고개를 드니, 묘지 위 하늘을 슬픔의 조각처럼 까마귀가 떼를 지어 날고 있었다.○ 농장-학업 놓고 봉사하는 조사원들 “풀에 덮인 묘들이 어둡지요. 거길 뚫고 들어가서 나뭇가지를 쳐내고 풀을 깎고 나면 쏴아 하고 소리가 나듯이 햇살이 묘지로 비쳐 듭니다. 그때는 참 기쁘지요. 이분들에게 빛을 되찾아주고 있다는 그런 느낌일까요.” 서병철 책임조사원과 이야기를 나누며 땀 냄새가 뒤엉킨 몸으로 숙소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현관을 가득 메우고 있는 장화, 등산화가 이들의 고된 하루를 말없이 이야기한다. 조사원들은 연령도 전공도 다양하다. 자려고 누우면 눈앞에 풀들이 너울거리고 잠이 들어도 풀을 자르며 나가는 꿈을 꾸게 되더라는 이은영 씨(35·KIN 간사)는 유일한 여성조사원이다. 마음먹고 조선낫을 가지고 현장으로 떠난 김기열 씨(48)는 괴산에서 친환경농장을 운영한다. 캐야 할 감자들을 놓아두고 여기까지 와 현장을 지휘하고 있다. 다부진 체격에 수염까지 기른 윤병호 씨(36), 그의 전공 분야는 애니메이션이다. 묘지의 번호를 따라가며 사진을 찍고 주변 상황을 기록하는 이은규 조사원과 사회복지학 전공의 대학생 오민섭 조사원은 20대다. 왜 이들은 여기까지 왔는가. 세속의 꿈을 ‘나 하나’가 아닌 ‘우리 모두가 함께하는 역사’에 바친 가슴으로 모여든 사람들, 이런 정신과 의지를 묶어 조사원들은 묘지의 숲을 헤쳐 나아가고 있었다. “‘여기서 수십 년, 고향 갈 날을 기다리며 누워 계셨다 생각할 때 우리가 빠뜨리고 놓치면 기다리던 버스가 떠나버리는 격이 아닌가.’ 이런 마음으로 현장을 누비고 있습니다.” 서병철 씨의 말이다. 7월 11∼14일에는 오병주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 위원장이 현지를 찾아와 이들 조사원을 격려하고, 사할린 주정부를 방문해 묘지 실태조사에 대한 긴밀한 협의를 한 뒤 한인 동포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돌아갔다. 귀향에의 꿈이 서린 유해를 한 조각 한 조각 거두어 고국으로 모시고 돌아가는 날, 사할린에 묻힌 분들이 그렇게도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귀국선의 희망도 거기 담기리라. 이분들의 절절했던 염원을 모아 사할린 어느 언덕에 위령탑과 분향소를 세우고 한 줌의 향을 피워 올릴 그날은 언제일 것인가.○ 묘 특징 상세히 적고 GPS 좌표 확인 조사원들의 작업 진행은 고된 탐색조사부터 시작된다. 발견된 한인 묘지 안의 풀을 정리하고, 묘비 철책과 주변의 나무에 테이프를 감아 표시를 한 후 일련번호를 적는다. 이후 2차 조사에서 묘지의 사진을 찍고, 조사표에 묘비의 내용을 기록한다. 3차로 현장을 지도로 정리해 자료를 만든다. 오차범위가 1m 이내인 첨단 장비 ‘LEICA ZENO 10’을 이용해 위치를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좌표로 정리하는 것도 이때다. 전자지도에 묘지의 위치값이 실시간으로 저장된다. 유족들이 묘지를 찾을 때를 감안하여 주변 지형지물의 특성도 자세히 기록한다. 이렇게 마련되는 조사 결과를 가지고 위원회는 사할린 강제동원 관련 자료와 대조해 사망 및 행방불명 건들에 대한 판단 근거로, 궁극적으로는 유골봉환사업의 기초자료로 활용할 예정이다. 또한 이번 조사를 시작으로 5년에 걸쳐 사할린의 모든 공동묘지 21곳에 대한 전수조사가 이루어지게 된다. ▼ 일제, 패전후 한인 징용노동자 동토에 버려 ▼러시아 연해주 동쪽, 일본 홋카이도 북쪽에 위치한 러시아연방 사할린은 일본에서는 가라후토(樺太)라고 부르는 세계에서 19번째로 큰 섬이다. 면적은 8만7100km²로 남한보다 조금 작다. 1799년 일본의 에도 막부가 사할린 섬 남부의 통치를 시작했으나 1853년 러시아 제국이 영유를 선언한다. 이후 러일 양국의 ‘협동 관할지’를 거쳐 1875년에는 러시아 영토가 됐다. 그러나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 섬 남부가 일본의 통치 아래 들어가고 1918년에는 일본군이 사할린 섬 북부 전역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일본은 이후 ‘모집’ ‘관알선’ ‘징용’ 등의 이름으로 한인들을 사할린에 강제로 끌고갔으며 그 수는 1941년 5만, 1942년 11만, 1943년에는 12만 명에 이르렀다. 탄광, 벌목장 등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며 고통 속에 살아야 했던 한인들에게 1945년 8월 15일은 광복이 아니라 새로운 비극의 시작이었다. 일본의 패배에 따라 사할린을 비롯한 4개 섬이 러시아로 귀속되자 일본은 27만 명의 자국민만 본국으로 귀환시켰고, 한인들은 일본 국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할린에 방치했다. 귀국선을 기다리며 광복 후에도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이들에게, 소련과는 국교조차 없었던 조국 대한민국도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 가운데 일본인 처를 둔 일부가 일본으로 귀환했고, 더러는 러시아 대륙으로 이주하거나 북한행을 택하기도 했다.한수산 작가·세종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