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유윤종]‘자유민주주의’라 쓰고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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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8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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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윤종 문화부장
유윤종 문화부장
10∼19세기 오늘날의 독일 오스트리아 지역에 있었던 신성로마제국을 당시 지식인들은 ‘비(非)신성 비로마 비제국’이라고 부르곤 했다. 고대 로마제국의 강역을 대부분 비켜갔고 선제후(選帝侯)가 선출하는 황제는 권한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름과 실체가 다른 나라는 우리 가까이에도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옛 조선왕국의 북부를 지배할 뿐 인민이 주인 행세를 하지 못하며 민주주의로 부를 정치과정도 갖지 못했다. 3대째 세습통치 과정을 밟는 그곳의 정체(政體)는 공화정보다 왕정에 가깝다. 요즘 젊은이들의 어법을 빌리면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 쓰고 독재 왕국이라고 읽어야” 할 판이다.

언어에는 마음이 없지만 이처럼 언어를 이용하는 인간은 바른 마음을 잃기 쉽다. 그러므로 특정 개념이 오용되고 오염되었을 경우 한층 엄밀한 개념을 적용하는 것이 당연하다.

최근 초중고교 역사교과서 개정방향을 담은 교육과학기술부 고시안이 ‘민주주의’ 용어를 ‘자유민주주의’로 고친 데 대해 ‘역사교육과정 개발정책 연구위원회’ 위원들이 반발하고 일부 매체가 이에 호응하면서 파장을 키웠다. 주장은 크게 두 가지다. ‘민주주의’만으로 충분하며, ‘자유민주주의’는 보수층의 입맛에만 맞는 반공민주주의라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인터넷 세상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위키피디아’를 찾아보았다. 누리꾼 누구나 내용을 만들고 바꿀 수 있는 텍스트이니 오류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처럼 보편적인 개념에서 세계 누리꾼이 지켜보는 가운데 의도적인 왜곡을 범하기란 힘들 것이다.

‘민주주의(Democracy)’ 항목을 보니 첫 페이지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민주주의’의 정의란 없다”고 전제한 뒤 “많은 사람이 ‘민주주의’라는 말을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의 줄임말로 사용하며, 이는 정치적 다원주의, 법 앞의 평등, 적법한 절차, 인권 등을 나타낸다”고 적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항목은 더욱 명확하다. 첫 두 문장은 다음과 같다. “자유민주주의는 입헌(Constitutional)민주주의로도 알려져 있으며 대의민주주의의 일반적인 형태다.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따르면 선거는 자유롭고 공정해야 하며, 정치과정은 경쟁적(Competitive)이어야 한다.”

세목으로 들어가 ‘세계의 자유민주국가’ 항목을 본다. 자유민주국가로 유럽연합 국가들과 그 외 미국, 일본, 한국, 브라질, 인도 등 17개국만을 들고 있다. 자유민주주의가 사회민주주의까지 포괄하는 개념인 점도 밝히고 있다.

“‘민주주의’라는 용어만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인민민주주의나 다른 체제를 용인하려는 것이 아니니까”라면 좋다. 일상어에서는 ‘민주주의’만으로 그 뜻에 근접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교과서 고시안은 교과서에 담을 내용을 규정할 헌법과 같다. ‘민주주의’로 쓰고 다르게 읽을 수 있는 개념은 최대한 피하는 것이 마땅하다.

일부에선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1972년 유신헌법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란 표현이 등장하면서 도입돼 독재시대의 색채가 다분한 용어라고 폄하한다. 기자는 1970년대 대학생들의 유신 반대 데모를 보았던 때를 기억한다. 그들은 “자유할 때까지 자유 외쳐라”고 울부짖었다. 학생운동가에서 ‘자유’가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주사파가 득세한 1980년대 들어서였다.

유윤종 문화부장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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