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우리 특사단의 방북 결과 발표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대목은 김정은이 4월 초 실시되는 한미 연합 군사훈련에 대해 ‘이해한다’는 뜻을 밝혔다는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의 전언이었다. 정 실장이 읽은 발표문에는 포함되지 않은 내용이었다. 북한 매체의 카메라에 찍힌 정 실장의 수첩에 ‘연합훈련으로 남북 관계가 단절되는 일은 없어야…’라고 적힌 메모를 두고 김정은의 대남 협박 발언을 받아쓴 것 아니냐는 논란이 일자 해명하면서 나온 이야기다. 이 메모는 혹시라도 북측이 한미 연합 훈련에 문제를 제기할 것에 대비해 우리 측 대응논리를 적어놓은 일종의 ‘커닝 페이퍼’였고, 오히려 김정은은 연합훈련을 용인한다는 전향적 태도를 보였다는 게 정 실장의 설명이었다. 그 메모가 노출되지 않았으면 김정은의 발언은 공개되지 않았을까. 어쨌든 이 발언이 전해지면서 ‘4월 한반도 위기 재연’ 걱정은 금세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 김정일이 2000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대중(DJ) 대통령에게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도 동의했던 점에 비춰보면 그리 놀랄 만한 발언은 아니다. 김정일은 DJ에게 “제가 비밀사항을 말씀드리겠다”며 이렇게 말했다. “1992년 초에 김용순 비서를 미국에 특사로 보내 ‘남과 북이 싸움 안 하기로 했다. 그러니 미군이 계속 남아서 남과 북이 전쟁을 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해 달라’고 요청했댔습니다.” 김일성 생전인 1991년 말 남북 기본합의서에 합의한 직후 미국에 관계 개선 메시지를 전하며 ‘미군이 계속 주둔하되 북한에 적대적인 군대가 아니라 평화유지군 같은 역할을 해주기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북한 매체에선 계속 미군 철수를 주장하느냐는 DJ의 질문에 김정일은 “우리 인민들의 감정을 달래기 위한 것이니 이해해주기 바란다”고 답했다고 한다.(임동원 ‘피스메이커’) 김정일은 DJ에게 이런 뜻을 미국에 전해달라고 부탁했고, 이는 뒤이은 ‘북-미 코뮈니케’ 합의와 특사 교환, 성사 직전까지 갔던 빌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 계획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사실 김정일의 말은 국제정치학적 현실주의에 따른 흠잡을 데 없는 논리적 결론이기도 했다. 주한미군은 한미동맹의 굳건함을 보여주는 존재다. 하지만 공동의 위협인 북한과의 적대관계가 청산되면 한미동맹의 의의도, 주한미군의 역할도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북한은 한 발짝 더 나가 미국의 민감한 전략적 포인트까지 건드렸다. 다가올 미국과 중국 간 패권경쟁의 한복판에 선 북한의 역할을 가늠해 보라며 상상력까지 자극한 것이다. 이번에 김정은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냈다는 메시지도 이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일찍이 헨리 키신저가 진단한 대로 ‘본능에 의해 움직이는’ 트럼프 대통령이라면 뭔가 대단한 결과를 낼 엄청난 기회로 여길 것이라고 판단했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북한 수뇌부의 속내가 늘 전언에만 머물고 어디에도 문서화되지도, 공표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엊그제도 북한 매체는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불청객인 미제 침략군의 무조건적인 철수”를 주장했다. 그러니 달콤한 입발림 술책으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이번 남북, 북-미 정상회담은 김정은의 본심을 확인할 기회다. 공동발표문 또는 김정은 입에서 언명(言明)으로 나와야 진짜 ‘주한미군 철수는 없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북한 김정은이 신년사에서 “분위기와 환경이 마련되는 데 따라 최고위급 회담도 못 할 이유가 없다”고 했을 때 문재인 대통령의 평양 초청은 예고된 것이었다. 문 대통령은 김여정이 가져온 초청장을 받아들고 “여건을 만들어 성사시키자”고 정답을 내놓았다. 그런데 문 대통령이 빠뜨린 게 있다. “이번엔 귀측에서 서울로 올 차례 아닌가”라고 반문했어야 한다.늘 한 수 접어주는 對北 자세 2000년 제1차 남북 정상회담 합의문인 6·15공동선언에는 ‘김대중(DJ)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도록 정중히 초청하였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앞으로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고 박혀 있다. “나이 많은 내가 먼저 평양에 왔는데 김 위원장이 서울에 안 오면 되겠느냐”는 DJ의 설득에 김정일이 마지못해 받아들인 문구라곤 하지만 엄연한 정상 간 합의였다. 하지만 2007년 노무현 대통령도 김정일의 서울 답방을 받아내지 못하고 평양을 방문함으로써 남북 정상회담은 으레 평양에서 하는 것으로 굳어져 버렸다. 10·4정상선언에는 ‘남과 북은 남북 관계 발전을 위해 정상들이 수시로 만나 현안 문제들을 협의하기로 하였다’고만 돼 있다. 앞서 1994년 김일성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불발된 정상회담도 김영삼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문 대통령이 이번 정상회담은 서울에서 열자고 해도 북측이 받아들이진 않았을 것이다.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한 번쯤 짚고는 넘어갔어야 한다. 언제부턴가 남북 관계에선 우리가 북한에 한 수 접어주는 게 관성처럼 돼버렸다. 과거 북-미 대화에 참여했던 미국 전문가는 북한과의 협상을 ‘포크와 나이프 사용을 거부하는 어린애와 함께 식사하는 것’에 비유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엉망진창인 테이블을 그대로 둘 수는 없다. 조금씩이라도 바꿔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북측의 김영철 파견 통보가 오자마자 우리 정부가 덥석 받아들인 것도 이런 ‘당연시’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정부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잠시 망설인 기색도 없이 수용했다. 이러니 김영철을 둘러싸고 남남(南南) 갈등 사달이 날 수밖에 없다. 수용이 불가피했다면, 천안함 희생 장병 유족들에게 먼저 알리고 이해를 구하는 게 순서가 아니었을까. 유족들이 받아들이진 않았겠지만 그렇게까지 격한 반응은 안 나왔을 수도 있다. 정부의 김영철 파견 수용 이후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통일대교로 몰려갔다. ‘처죽일 작자’를 육탄으로 저지하겠다며 아스팔트에 드러누운 야당 의원들의 거친 언동과 이벤트성 시위는 볼썽사나웠지만, 응당 북측에 왜 하필 김영철이냐고 물었어야 하지 않은가. 이런 반발이 없었다면 김영철은 능수능란한 처신으로 다시 국민의 불편한 속을 뒤집어놨을지 모른다. 과거 남북회담에서 김영철과 대면했던 예비역 장성들은 이렇게 말한다. “똘똘하고 약삭빠르기가 타고난 협상꾼이다.” “목청을 높이다가도 구걸하다시피 하는, 변화무쌍한 모사꾼이다.” 이런 인물을 호텔에 34시간이나 꼼짝없이 묶어뒀다.野 ‘서울회담’ 제안한다면 보수세력 반발은 우리의 대북 협상력을 강화해주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한국당은 아예 청와대를 ‘주사파 소굴’로 몰아붙이며 ‘체제 전쟁’까지 선포했다. 역시나 대북 협상에 기댔던 보수 정부 시절 자신들의 과거는 돌아볼 생각도 없다. 일부 보수단체는 미국을 향해 “북한을 폭격하라. 우린 죽어도 상관없다”고 외친다. 이런 막무가내 주장으로는 답이 없다. “김정은을 환영하긴 어렵지만 정상회담은 서울에서 하라”는 얘기가 야당에선 나올 수 없을까.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그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연두 국정연설을 보면서 혹시 프롬프터가 고장 난 것 아닌가 했다. 트럼프가 시종 왼쪽만 바라보고 연설문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는 기립 박수를 쏟아내는 공화당 의원 쪽으로 아예 몸을 틀어 함께 박수 치고 손짓하기까지 했다. 사안에 따라 일부 박수 소리도 나왔지만 냉담하기만 한 민주당 의원 쪽은 차라리 무시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아니, 트럼프라면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자연스러운 행동일 것이다.○On-Off뿐인 ‘트럼프 머신’ 트럼프의 정신건강 논란을 낳은 화제의 책 ‘화염과 분노’(마이클 울프)에는 과대망상과 집중력 장애, 공감능력 결핍, 심지어 독살에 대한 공포까지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충격적인 에피소드들로 가득하다. 국정 운영 경험이라곤 전혀 없는 트럼프지만 보고서를 읽는 것도 브리핑을 듣는 것도 질색한다. 거기에 같은 말, 같은 표현을 수없이 되풀이한다니 치매 증세 아니냐는 논란이 불거질 만도 하다. 한때 트럼프의 복심이었던 스티브 배넌 전 백악관 수석전략가는 트럼프를 ‘온(On)-오프(Off) 두 기능만 있는 아주 단순한 기계’라고 묘사한다. 온 스위치가 켜지면 어떤 굴욕도 마다하지 않는 최상급 아부가 넘쳐흐르고, 오프 스위치에선 격렬히 분개하며 중상모략을 쏟아 놓는다는 것이다. 이익이 될 것 같다면 어떤 칭찬도 아끼지 않고, 그게 아니라면 온갖 경멸과 함께 소송도 불사하는 장사꾼 기질에서 비롯됐으리라. 하지만 이런 트럼프의 단순 이분법 사고방식은 지난 대선에서 탁월한 선거 전략으로 위력을 발휘했다. 공화-민주 양당 대결구도에서 ‘미국 최우선’을 외치며 백인 중하층의 불만을 건드렸고 열광적 지지를 이끌어냈다. 뻔히 예상되는 패배에 ‘승리를 도둑맞았다’고 외칠 준비만 하고 있던 트럼프 진영엔 난데없는 승리라는 기적이 일어났지만, 트럼프는 금세 ‘이건 기적이 아니라 내가 이룬 성취’라는 자기최면에 빠져들었다. 흔히 대업을 이룬 대통령의 선거전을 보면 우선 당내 경선에선 자신의 이념적 지향을 분명히 드러내며 차이를 강조한다. 핵심 지지층을 다지기 위해서다. 하지만 일단 후보가 되면 지지 기반을 넓히기 위해 좀 더 중간지대로 다가가고, 선거 승리 후엔 사회 통합과 단결을 추구한다. 그러다 보면 집권 후 핵심 지지층 사이에서도 볼멘소리가 나오기 마련이다. 물론 트럼프 역시 나름 변신의 제스처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뼛속까지 ‘나는 트럼프일 뿐’인 그가 대통령이 됐다고 해서 달라질 수는 없었다. ‘이익 아니면 손해’ ‘친구 아니면 적’이라는 트럼프 정치는 그대로 이어졌다. 그러니 그가 국정연설에서 “차이점은 접어두고 공통점을 모색하자”며 초당적 협치를 외친들 야당이 호응할 리 없다.○‘촛불’ 기대는 文은 다른가 우리라고 다른가. 문재인 정부는 출범 이후 국민통합을 내세웠지만 여전히 대선 때 내건 공약 기조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고 있다. 비정규직, 저임금, 청년실업 등 노동시장 개혁 같은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해법이 필요한 사안들마저 비정규직 제로화, 최저임금 인상, 공무원 증원 등 단기적인 대증요법으로 풀려 한다. 자연 곳곳에서 불만의 소리가 나온다. 그러자 정부는 다시 핵심 지지층에 기댄다. 남북 해빙 기류에 역풍이 불자 문재인 대통령은 “바람 앞에 촛불을 지키듯 남북대화를 지키고 키우는 데 힘을 모아 달라”고 호소했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싶기도 하지만 과했다. 남북관계마저 박수 치는 한쪽만 바라봐선 안 된다. 미국 정치의 분열과 혼란, 남의 일이 아니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1998년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은 두 차례에 걸쳐 소 1001마리를 트럭에 싣고 판문점을 넘는 웅장한 이벤트를 만들어냈다. 이를 두고 프랑스의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은 ‘20세기 최후의 전위예술’이라고 했다. 김정은이 평창 올림픽을 앞두고 펴는 통 큰 공세도 20년 전 소 떼 방북 같은 대작(大作)을 연출하려는 또 다른 욕심이 아닐지 모르겠다. 지난 며칠 사이 세 차례 회담에서 남북은 일사천리로 합의를 이끌어냈다. 비공개 회담인지라 막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는 없지만 북측과의 회담에서 이처럼 순조로운 합의는 이례적인 것만은 분명하다. 신년사에서 평창 올림픽의 성공을 “진심으로 바란다”고 했던 수령의 특별한 교시가 없었다면 보기 힘든 상황이리라.“쇼가 곧 시작됩니다” 남북 합의에 따라 이달 말부터 휴전선 남쪽과 북쪽에선 잇단 대형 이벤트가 펼쳐진다. 남북 선발대의 왕래를 시작으로 막혀 있던 육로가 다시 열린다. 남쪽에선 북측 예술단과 태권도시범단의 현란한 공연, 미녀 응원단의 독특한 율동을 보게 될 것이고, 북쪽 금강산에선 남북 합동 문화행사까지 열린다. 여기에 남북 선수단 공동입장,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경기까지 쉴 새 없이 다채로운 볼거리와 얘깃거리를 제공할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어차피 한 판의 쇼다. 어쩌면 식상할 수도 있다. 이미 한두 차례 본 적 있는 장면들에 과거 같은 감동이나 열광은 없을 것이다. 혀를 차거나 넌더리를 내는 이도, 또 속는 것 아니냐며 분노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벌써부터 남북 회담 결과를 두고 우리 사회 내부의 논란이 크지만 이번 쇼는 남북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성사된 거래다. 지난해 한껏 무력시위를 벌인 북한은 이젠 한숨 쉬어가며 이미지 관리를 할 때가 됐고, 우리로서도 북한의 올림픽 참가로 흥행에 적지 않은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계산이 있다. 북한도 우리를 이용하고, 우리도 북한을 이용한다. 특히 전쟁 위기 속 불안한 올림픽이 아닌, 평화 분위기 속 안전한 올림픽이 치러진다면 우리로서는 꽤나 수지맞는 장사로 볼 수도 있다. 그러니 쇼는 쇼대로 구경하면 된다. 다 차려놓은 잔칫상을 뒤엎겠다는 옆집 불량배를 담 건너 불안하게 지켜보는 것보다는 일단 불러다 앉혀놓는 편이 낫다. 꼴불견 손님도 쫓아내기보다는 달래는 것이 낫다. 주인 행세를 하는 식객에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겠지만 잔치를 잘 마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혹자는 북한의 선전선동에 휘말릴 수 있다고 우려하지만, 거기에 혹할 우리 국민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관람료는 후불입니다” 문제는 쇼가 끝난 뒤다. 당장 북한은 ‘공짜 쇼가 어디 있느냐’며 청구서를 내밀 것이다. 이미 일부는 내놓았다. 한미 연합훈련의 완전 중단과 미국 전략자산 전개 중지 요구다. 회담 과정에서 ‘비핵화’는 입도 뻥끗하지 못하도록 한 것은 향후 미국 편을 들어선 곤란하다는 엄포일 것이다. 청구서는 미국에서도 날아올 수 있다. 남북회담 성사가 자신의 강경한 태도 덕분이라고 자화자찬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향후 북-미 대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기대감을 한껏 부풀렸다. 당장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는 덕담이겠지만 뜻대로 굴러가지 않으면 남북 모두 각오해야 할 것이라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한바탕 쇼가 끝나면 한반도는 북-미 결전의 장으로 돌아갈 가능성도 여전히 높다. 그땐 모두가 냉정하게 정산을 다시 할 것이다. 쇼 계약이 마무리된 지금, 우리가 책잡히는 일은 없었는지 점검할 때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다음 주 개봉하는 영화 ‘1987’은 많은 사람들을 새삼 깊은 감회에 젖게 만들 것이다. 영화가 그린 그곳, 그 순간 하나하나는 누구나 가슴 한편에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대학생이 물고문을 받아, 최루탄에 맞아 죽어가던 가혹한 시대였다. 국민의 분노가 무지막지한 권력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는 데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렇게 거리로 나선 국민의 힘은 끝내 권력을 무릎 꿇게 만들었다. 여기까지는 영화 속 이야기다.국가大事 올림픽의 역설 1987년 6월 전두환 정권은 시위진압을 위한 군 병력 출동 준비까지 마친 상태였다. 7년 전 광주의 비극을 통해 권력을 잡은 군사정권이다. 그런데 시위대에 굴복했다.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병력 출동 준비는 극한 세력에게 경고를 보내는 동시에 노태우에게 대통령직선제 수용을 촉구하는 양동전술 차원이었을 뿐 애초부터 위수령이나 계엄령 같은 비상수단을 쓸 생각이 없었다고 강변했다. 과연 그럴까. 그가 병력 출동 중지 지시를 내린 것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를 휴대한 주한 미국대사를 만난 직후였다. 미국 외에도 국제사회의 압박은 전두환 정권이 무자비한 시위 진압을 자제할 수밖에 없도록 했다. 당시 전 세계의 이목은 온통 한국에 쏠려 있었다. 이듬해 열릴 서울 올림픽 때문이었다. 끓어오르던 민심에 기름을 부은 4·13 호헌 조치의 구실도 ‘서울 올림픽이라는 국가 대사’를 앞두고 있어서였고, 그것을 철회한 이유도 서울올림픽의 성공을 위해서였다. 이미 국제사회에선 올림픽 개최지를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아예 취소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상황이었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중재로 북한의 올림픽 참가, 아니 공동개최 협상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북한은 개최 종목의 동등한 배분과 TV중계료 수입 배분까지 요구했다. 동서 진영의 보이콧으로 두 차례나 반쪽으로 치러진 올림픽의 온전한 개최를 위한, 테러의 위협으로부터 대회를 보존하기 위한 협상이었다. 보이콧을 선동하는 북한을 가능한 한 오래 붙잡아두며 돌출행동을 막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결국 2년여에 걸친 실랑이 끝에 북한은 철저히 고립됐고, 서울 올림픽은 160개국이 참여한 역대 최대 규모로 치러졌다. 한국 입장에선 서울 올림픽은 성공 그 이상이었다.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이 확연히 달라졌고, 특히 남북 간 체제 경쟁에서 북한을 완전히 따돌렸다. 노태우의 북방정책도 그 시작은 서울 올림픽이었다. 올림픽 개막 나흘 전 발표된 헝가리와의 외교관계 수립을 시작으로 공산권 국가와의 수교가 이어졌다. 한편으로 서울 올림픽은 북-미 간 직접 대화가 처음으로 이뤄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위기관리에 成敗 달렸다한국에서 다시 올림픽이 열린다. 30년 전과는 확연히 다른 상황이지만 여전히 북한은 평창 올림픽의 큰 장애물이다. 우리 정부가 그렇게도 애원하다시피 하지만 북한은 참가도, 불참도 밝히지 않은 채 밀고 당기기를 계속하고 있다.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북한은 더욱 기고만장해졌고, 미국은 ‘강제적 비핵화’를 내세워 북한을 더욱 몰아붙이고 있다. 미국이 북핵 해결의 데드라인으로 잡았다는 내년 3월, 평창 패럴림픽이 끝날 때까지 한반도는 순간순간 위기의 연속일 수 있다. 한국은 엄청난 중압감 속에 선택을 강요당할 것이다.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위기의 순간을 잘 관리해야 한다. 평창의 성공은 여기에 달렸다. 그래서 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위기는 어느덧 기회로 바뀌어 있을 수도 있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책임 있는 핵강국이며 평화애호국가로서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수호하기 위한 숭고한 목적의 실현을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 기울일 것이다.” 북한이 지난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5형 도발 직후 발표한 성명의 한 대목이다. ‘평화애호’라니? 마치 “전쟁은 평화, 자유는 굴종, 무지는 힘”이라는 조지 오웰의 ‘1984’식 세뇌언어 같다. 하지만 김정은의 ‘핵무력 완성’ 선포 이후 나온 다짐인 만큼 애써 말 그대로 본다면 앞으로 북한의 태도에 뭔가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예고처럼 보이기도 한다. 국제사회에서 핵무기 보유는 완장이자 문신이다. 아무래도 우쭐거리게 만드는 완장보다는 ‘차카게 살자’ 같은 문신에 가깝겠지만 어느 쪽이건 핵 완성 이전과 이후의 북한은 분명 다를 것이다.스윙 커질 核무장 북한 과거 미소 냉전구도의 바깥에서 핵무장을 한 국가들도 그랬다. 중국이 대표적이다. 중국의 핵무장은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선언이었다. 마오쩌둥은 핵을 보유한 히틀러처럼 행동할 것이란 걱정을 낳았지만 중국의 처신은 매우 신중했다. 중국은 핵보유 그 자체로 많은 것을 얻었다. 미국의 베트남전쟁 확대도, 소련과의 영토전쟁도 막을 수 있었다. 인도도 마찬가지였다. 인도의 핵무기는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는 비동맹 외교의 바탕이 됐다. 중국과 인도는 핵을 주로 정치적 무기로 사용했다. 인도의 핵은 파키스탄의 핵을 낳았다. 1974년 인도의 첫 핵실험 이후 집요하게 핵개발에 매달린 파키스탄은 1998년 인도의 5차례 추가 핵실험에 6차례 연쇄 핵실험으로 맞서 핵무장 대열에 합류했다. 이스라엘은 지금껏 핵실험을 한 번도 하지 않은 핵보유국이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1966년 핵무장에 성공한 이래 중동에서 모든 전쟁의 규모를 일방적으로 결정할 힘을 가졌다. 아랍 국가의 공격에 이스라엘은 핵무기는 그 존재조차 입에 담지 않으면서 질적으로 월등한 재래식 무기를 사용해 10배, 100배의 보복으로 돌려줬다. 이들 핵무장 국가는 주변국과의 분쟁에 훨씬 신중하고 침착해졌다. 그러면서도 일단 행동에 나서면 대담하고 거침이 없었다. 마치 홈런을 맛본 야구 선수의 스윙이 커지는 것처럼. 핵무장이 주는 심리적 자신감 때문일 것이다. 핵을 가진 북한도 광기에 가까운 언행은 누그러질지 모른다. 조만간 평화공세를 펴며 여유를 부릴 수도 있다. 하지만 북한엔 구제불능의 허점이 있다. 핵개발 올인(다걸기)으로 인해 극도로 열악해진 재래식 전력이다. 재래식 전력은 위기를 진정시키고 핵전쟁을 막는 완충 작용을 하지만 이게 취약하면 우발 상황도 곧장 핵 대결 게임으로 치달을 위험성이 다분하다. 이젠 중국도 통제하기 어려워진 북한이다. 핵을 들먹이는 객기는 한층 심각해질 것이다. 파키스탄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재래식 전력이 취약한 파키스탄은 핵무기의 양에 집착하며 상시 긴급발사 체제에 의존한다. 지휘통제 체계는 특히 우려스럽다. 핵무기를 통제하는 국가통수기구(NCA)가 있다지만 참수작전에 취약한 만큼 비밀사령부를 두고 현장 지휘관에게 발사권도 위임했을 가능성마저 있다. 북한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더럽다고 피할 순 없다 이제 우리는 북한의 핵 포기 문제가 아닌, ‘평화애호 핵무장국’ 북한을 다뤄야 하는 게 아닐까. 사실 북핵은 무서워서가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 측면이 있었다. 그러다 어느덧 핵 가진 북한, 핵북(核北)이 외면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왔다. 으르든 달래든 핵북을 길들이기 위한 로드맵부터 만들어야 한다. 한국과 미국, 나아가 국제사회가 시급히 함께해야 할 일이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1990년 9월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교장관은 이틀간 북한 방문을 마치고 떠나는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내 평생 가장 끔찍했던 경험”이라며 치를 떨었다. 한소 수교를 앞두고 김일성 주석에게 소련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 방북한 그는 김일성을 만나지도 못한 채 김영남 외교부장에게서 소련의 배신에 대한 격렬한 비난과 함께 북한도 핵개발을 하겠다는 협박 성명만 듣고 돌아와야 했다. 치욕스러운 방북에 따른 불쾌감 때문이었을까. 얼마 뒤 셰바르드나제는 한소 수교를 앞당기자는 한국 측 제안을 곧바로 수락한 뒤 공동발표회장에서 펜을 꺼내 준비된 발표문에 명시된 정식 수교일에 줄을 긋고 3개월 앞당긴 날짜를 적어 넣었다. 그러면서 수행원들이 다 들을 만한 목소리로 “이것으로 북한 친구들도 정신을 차리겠지”라고 중얼거렸다. “황제 칙사 박대한 ×배짱”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과의 관계를 이렇게 끝낸 김일성이지만 2년 뒤 똑같은 목적으로 방문한 첸치천 중국 외교부장에겐 훨씬 누그러진 태도를 보였다. 전례 없이 짧았지만 만남 자체를 거부하진 않았다. 한중 수교를 추진할 수밖에 없다는 장쩌민 주석의 구두메시지를 전해 들은 김일성은 “우리는 자주노선을 걷겠다”고 짤막하게 통고했다. 그제 김정은이 시진핑 주석의 특사 쑹타오를 만나주지 않은 것을 두고 한 북한 연구자는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놀랐다. 시진핑이 누구냐. 당 대회를 통해 사실상 황제급에 등극한 최고지도자 아니냐. 황제의 칙서까지 직접 수령을 거부하다니 일단 그 ×배짱은 대단하다.” 무슨 시대착오적 해석이냐고 웃어넘길 수만은 없다. 어느 시대, 어떤 관계에서나 가장 중요한 것은 힘의 우열이고, 그 어디보다 적나라하게 표출되는 게 국제정치 현장이다. 이런 현실에서 김정은의 배짱 또는 건방은 어디에서 왔을까. 김정은의 특사 면담 거부는 핵무력의 완성, 즉 핵탄두를 실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완성은 결코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분명한 메시지일 것이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김일성의 불가피한 선택이 핵무기 개발이었다면, 손자 김정은에겐 ICBM 완성이기 때문이다. 2011년 말 권좌에 오른 김정은이 가장 먼저 내린 결단은 이듬해 북-미 간 ‘2·29합의’의 파기였다. 대북 영양 공급과 북핵·미사일 활동 중단을 맞바꾼 2·29합의는 북한이 유례없이 신속하게 움직이면서 이뤄진 합의였다. 김정은은 아버지 사망 직후 떼밀리듯 합의를 승인했을 테지만 불과 보름 만에 ‘인공위성’ 발사를 결정함으로써 합의문을 찢어버렸다. 그게 대포든, 미사일이든, 인공위성이든 ‘쏘아 올리는 것’은 김정은의 후계 정통성과 직결된 사안이다. 실제로 김정은이 2010년 9월 ‘인민군 대장’ 칭호를 받으며 공식 후계자로 등극한 이래 북한은 그가 김일성군사종합대 포병병과 출신임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2개월 뒤 대남 조준사격을 감행한 연평도 포격도발도 바로 청년대장의 작품이라는 게 정설이다. 중국은 오히려 홀가분하다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초강경 드라이브와 김정은의 비타협적 핵폭주가 맞부딪치면서 한반도는 다시 아슬아슬한 긴장에 빠질 수 있다. 그러니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대화 국면을 손꼽아 기다려온 우리나라다. 당장 평창 겨울올림픽을 두 달 반 앞두고 안보태세 관리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판이다. 중국은 비록 김정은의 무례에 불쾌했겠지만 오히려 홀가분해졌을 수 있다. 사실 김정은의 마지막 자존심을 세워준 만큼 부담을 덜고 한결 자유롭게 됐기 때문이다. 마치 이별 통보를 하자 ‘내가 걷어찬 걸로 하자’는 애인에겐 오만 정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한국 사람은 누구인가. 중국이나 일본 사람과 어떻게 다른가. 언어인가. 그렇다면 한국말 못하는 재외동포는 한국 사람이 아닌가. 종교도 아니다. 한국 사회는 종교의 백화점이다. 혈통이라면 귀화한 외국인, 다문화가정 출신은 어떻게 되나. 과연 한국 사람의 정체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함재봉 아산정책연구원장(59)이 최근 출간한 ‘한국 사람 만들기 Ⅰ’(아산서원·사진)은 이런 의문을 정치사상사적 측면에서 탐구한 책이다. 그 정체성의 연원을 찾기 위해 그는 100여 년 전 우리 지식인들의 삶과 생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두 5권으로 나올 시리즈의 제1권에 이어 제2권이 곧 나오고, 현재 제3권을 집필 중이다.》 함 원장의 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이자 개신교 목사였던 함태영 전 부통령, 아버지는 학자이자 외교관으로 1983년 아웅산 폭탄테러사건 때 순직한 함병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이다. 함 원장도 아버지의 유학 시절 미국에서 태어났고 고교 이후 미국에서 공부했다. 연세대 교수, 유네스코본부 사회국장, 랜드연구소 선임연구원을 거치는 동안 인생의 절반을 외국에서 살았다. 그는 ‘한국 사람 만들기’ 시리즈에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형성한 5개 담론(친중 위정척사파, 친일 개화파, 친미 기독교파, 친소 공산주의파, 인종적 민족주의파)을 우리 근대사에서 추적한다. 이 구분에 따르면 그는 친미 기독교파의 뿌리가 깊은 사람이다. ―‘한국 사람’ 함재봉은 누구인가. “태생적으로 정체성을 고민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았다. 특히 아버지는 외교관으로서 한국 상황을 대변하고 합리화 정당화하는 자리에 있었다. 한국의 문화적 역사적 차이를 설명하며 외국 사람을 설득하는 것을 지켜봤다. 나 스스로 전형적인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어려서부터 한국 사람이 누구인지 고민해 왔다. 어쩌면 한국 문화로부터 소외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한데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원래 소외됐을 때 시작되는 것이다.” ―연구는 언제부터 시작한 건가. “고민은 이미 미국에서 학교 다니던 시절 시작됐다. 서양의 고대 중세 근대 탈근대, 그리고 동양 정치철학·사상을 공부하면서 역사적, 시대적 맥락을 모르고서는 그 사상을 알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도 좌익이든 우익이든 사상가들의 주장은 잘 아는데 그게 나온 역사적 맥락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우리 역사뿐 아니라 최소한 우리를 둘러싼 4강 역사를 알아야 하고 그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책이 좀 커졌다.” ―한국인 의식구조의 뿌리를 다섯 가지 담론으로 나눴는데, 좀 도식적인 느낌이다. “100여 년 전 조선이 망하고 그 정체성마저 무너지면서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시대적 고민이 시작됐다. 새로운 사람 찾기에 나선 것이다. 그래서 가장 먼저 기존 우리 것을 지켜야 한다고 나선 것이 이항로 최익현의 위정척사파다. 그들은 그 기원을 병자호란 이후 형성된 친명반청(親明反淸) 소중화(小中華) 의식에서 찾았다. 그리고 일본에 가 본 김옥균 유길준 등이 이렇게 세상이 변했는데 안 따라갈 수 있느냐며 제기한 것이 친일 개화파이고, 이들이 결국 실패하면서 미국 기독교에서 대안을 찾은 이들이 윤치호 서재필 이승만 등 친미 기독교파다. 그 다음이 볼셰비키혁명 이후 반제국주의·반자본주의를 조선 독립의 최고 이념으로 받아들인 이동휘 같은 친소 공산주의파다. 1920년대 가장 뒤늦게 들어온 게 민족주의다. 나라를 뺏기고 이념도 종교도 다르지만 어디에서 살든 결국 엮어주는 것은 피, 혈통이라는 매력적인 민족 신화를 만들어낸 신채호 같은 인종적 민주주의파다.” “롯데 앞 시위는 親中 사대주의” ―결국 새로운 한국 사람의 정체성을 모두 외부에서 찾고 있다. “정체성이란 게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제1권도 ‘조선 사람 만들기’로 시작한다. 한국 사람 이전의 조선 사람은 누구였나. 고려 사람과는 180도 다른 사람이었다. 조선 사람 만들기를 보면 얼마나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다. 고려의 불교문화를 주자성리학의 종법제도라는 완전 이질적이고 외래적인 것으로 바꿨다. 고려는 모계사회였다. 율곡 이이도 외가 오죽헌에서 자랐는데, 오죽헌 역시 사임당의 친가가 아닌 외가였다. 이를 부계사회로 만든 게 바로 세종의 혁명이었다. 이것도 17, 18세기가 돼서야 뿌리내렸다.” ―굳이 친○라고 앞에 붙일 필요가 있었나. “친중, 친일, 친미 등을 일부러 썼다. 약간 비꼬고 싶어서 그랬다. 물론 대놓고 친일한 사람도 있지만 당시 개화파는 일본을 그야말로 제대로 아는 사람들이었다. 지금 우리가 아는 주변국에 대한 이해나 지식이 과연 100여 년 전 위정자나 지식인의 것보다 더 나은지 회의적이다. 지금 같은 표피적인 수준의 이해가 아니었다. 그들의 고민과 뉘앙스를 제대로 안다면 지금 잣대로 친일, 친미, 친소라고 한마디로 매도해선 안 된다.” ―결국 한국인 의식구조 저변의 뿌리, 즉 계보만 찾다 끝내고 마는 것 아닌가. “막스 베버가 말한 이념형(ideal type)을 찾으려는 것이다. 가령 친일 개화파가 일본에서 뭘 배웠고 어떻게 수용해서 한국을 어떻게 고치려 했는지, 먼저 그 원형을 보자는 것이다.” ―친일 개화파에 대해 ‘한국 사람의 가장 큰 심리적 콤플렉스’라고 했다. 문재인 정부가 청산하겠다는 ‘적폐’도 그 뿌리는 친일파로 시작해 독재체제로 이어졌다고 본다. 일본과의 관계는 여전히 논란이다. “역사는 역사고 안보는 안보다. 복잡할 것이 없는데, 그걸 섞어 버린 것이 문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은 중국 속국이었다고 했는데, 아무도 중국대사관에 가서 시위를 벌이지 않는다. 중국이 (사드 문제로) 저렇게 못되게 구는데도 반중 정서도 없고 반중 데모도 없다. 어떻게 중국대사관이 아닌 롯데 앞에서 데모를 할 수 있나. 그건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가 아닌가.” ―그런 분위기의 저변에는 친중 위정척사파의 영향이 깔린 것인가. “그렇다. 위정척사 사상은 반미, 반자본주의를 표방하는 한국 좌파의 이념적 기저를 형성하고 있다. 북한은 가장 지독한 친중 위정척사와 인종적 민족주의가 합해진 것이다.” ―그러면 우파는 어떤가. “우파는 친일 개화파와 친미 기독교파가 섞인 것이다. 친미 기독교파는 오늘 한국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윤치호는 뿌리 깊은 인종차별주의 본산인 미국 남부의 핵심 중 핵심인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공부했다. 거기서 백인 인종주의를 겪었고 미국에 갔던 사람 대부분처럼 차라리 일본이 낫다고 했다. 그런 뼈아픈 경험에서 윤치호도 결국 친일파가 된다.” ―함 원장도 20년 넘게 미국에서 살았다. “미국을 알면 알수록 한국이 편하다. 미국을 모르는 사람일수록 미국 백인의 인종차별주의를 잘 모른다.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그런 사람은 내가 고등학교, 대학교 다닐 때 늘 보던 사람이다. 새로운 사람이 아니다. 말투나 생각이 너무 익숙하다. 금발의 장신에 부잣집에서 태어난 잘난 이들, 전형적 미국 백인이다. 지난 대선에서 그들이 주류가 됐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대표적인 친미 기독교파, 박정희 전 대통령은 친일 개화파의 영향이 크다고 보면 되나. “이승만은 친미 기독교파다. 그렇다고 이승만이 맹목적으로 미국을 추종하지는 않았다. 이승만이 나중에 미국에서 어떻게 원조를 끌어내고 방위조약을 받아냈는지 보면 안다. 박정희는 일본이 만주국을 만드는 놀라운 실험을 눈으로 지켜봤고, 그것을 한국에 이식해 산업화 근대화를 시작했다. 전두환, 노태우는 좀 특이하다. 육사 11기로 미국 군사학교로 유학해 미국 영향을 받았고 베트남전쟁에도 참전하면서 군대로 상징되는 근대를 겪은 이들이다.”“우파는 親日개화·親美기독교 섞여”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어떤가. “박정희 이후의 대통령들은 사실 미국이나 일본 등 직접적 외국 경험이 없는 이들이다. 윤보선, 장택상처럼 영국에서 제국의 특권층 교육을 받은 굉장히 특이한 이들 밑에서 정치적으로 출발했다. 그러면서도 직접적 외국 경험은 없다. 하지만 국내의 보편적 정서를 잘 대변한 이들이다.” ―산업화 세력 대 민주화 세력의 갈등은 어떻게 보나. “그 뿌리를 찾기 시작하면 모든 게 엉키게 된다. 다만 한쪽은 민주화를 추진했고, 한쪽은 근대화 산업화를 일으켰다. 좌파는 산업화에 대한 굉장한 반감이 있는 게 사실이다. 우파는 적어도 국민소득이 4만 달러는 돼야 한다고 하지만, 좌파는 이 정도 산업화면 됐지 더 해야 하느냐, 그보다는 서로 나눠야 하는 것 아니냐고 본다. 목표 자체가 다른 것 같다.” ―한국 사람 만들기가 시작된 지 100년이 넘었다. 이제 그 정체성이 생겨날 때가 되지 않았나. “어렴풋이는 보인다고 생각한다. 사실 정체성이란 것은 내부적으로 자기가 규정하는 것도 있지만 외부에서 규정하는 부분이 크다. 나를 스스로 보는 것보다 다른 사람이 날 보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 정체성이다. 1960년대 한국은 중국, 일본의 아류였을 뿐 정체불명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 전 세계가 한류에 열광하고, 다들 한국에 가고 싶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다섯 가지 담론이 서로 다투고 있는 형편 아닌가. “물론 그 다섯 가지 담론이 중첩돼 있고 그것이 부딪칠 때는 참 이해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것들이 상호적이지 배타적이진 않다. 어떤 식으로 선택을 하든지 천천히 풀어가야 한다.”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가. “한국 사람이 공유하는 리추얼(ritual), 의식·예법 같은 것이 만들어져야 한다. 국적 불명인 결혼식 입학식 같은 의식도 있겠지만 정말 작은 데서, 가령 길거리 리추얼 같은 것을 찾아가야 한다. 한국인은 아는 사람에겐 예의바른데, 모르는 사람에겐 그렇게 무례할 수 없다. 친소관계에 갇혀 시민, 국민까지 못 간다. 언제까지 혈연·지연·학연에 매달려 살 수는 없지 않은가.”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2002년 2월 20일 오후 김대중(DJ) 대통령은 도라산역에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을 맞았다. 비무장지대(DMZ) 철책선에서 불과 50m 떨어진 곳이었다. 남북 철도연결공사 현황을 브리핑 받은 부시는 철도침목에 ‘이 철도가 한민족을 하나로 묶기를 기원한다’고 기념서명을 했다. 이어 전 세계로 생중계된 연설에서 “철조망과 공포 속에 분단된 한반도가 아니라 협력과 교역을 통해 언젠가 통일될 한반도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부시는 오전 한미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에선 “햇볕정책을 적극 지지한다” “북한을 침공하거나 공격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불과 3주 전 연두 국정연설에서 이라크, 이란과 함께 북한을 ‘악의 축’으로 부르며 “선제공격으로 정권을 교체해야 할 대상”이라고 선언했던 부시다. 그랬던 부시가 한 달도 안 돼 태도를 바꾼 셈이다.DJ의 성공한 ‘부시 설득’ 당시 미국은 9·11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탈레반 정권을 붕괴시키고 내친김에 이라크 침공까지 군불을 때고 있었다. 북한은 ‘그 다음이 우리란 말이냐’며 강력 반발했다. DJ는 간곡하고 집요한 설득으로 부시의 마음을 돌려놓고 갈등과 대결의 현장인 DMZ 대신 화해협력의 현장인 도라산역에서 평화 이벤트를 만들어냈다. 문재인 대통령도 이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이 그런 계기가 되길 희망했을 것이다. 유엔 연설에서 ‘북한 완전 파괴’까지 경고한 트럼프를 어떻게든 설득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이었으리라. 그래서 사흘 동안 공식 일정 없이 정상회담 준비에 몰두했고, 비록 불발됐지만 트럼프와의 DMZ 동반 방문을 위해 먼저 현장에 가서 30분이나 기다렸다. 하지만 트럼프는 설득됐을까. 문 대통령은 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고 했다.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는 외교적 표현이다. 욕심 같아선 북한 정권교체, 정권붕괴, 흡수통일, 침공은 없다는 이른바 ‘4노(NO) 원칙’을 트럼프가 직접 밝혀주길 바랐을 테지만 언감생심이었다. 트럼프의 어조가 많이 누그러졌고 호전적 언사는 없었다는 것에 위안을 삼아야 할 듯하다. 세계를 선악 이분법으로 바라보는 네오콘 세력에 둘러싸여 있던 부시는 오직 이익이냐 아니냐는 이분법으로 보는 트럼프보다 오히려 설득이 쉬웠는지도 모른다. DJ는 부시가 존경한다는 로널드 레이건이 ‘악의 제국’ 소련과 협상한 얘기로 설득했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 부시의 종교적 감성까지 두드려 마음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트럼프는 다르다. ‘협상의 달인’임을 자랑스러워하는 부동산 재벌이다. 외교에서도 자신의 본능에 충실하다. 1990년 성인잡지 플레이보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협상에선 살인자도, 착한 녀석도, 그 어떤 사람도 돼야 한다. 때론 치열하고, 때론 달콤하고, 때론 무자비해야 한다. 이건 배운다고 되는 게 아니다.”트럼프는 ‘본능적 인간’이다 그러기에 헨리 키신저의 예측대로 트럼프는 여태껏 본 적이 없는 본능적 외교를 하고 있다. 위신이나 평판을 위해 손해를 감수하는 일은 없다. 그의 사전에 일관성이란 단어는 없다. 그렇다고 머리에 한 번 박힌 생각을 바꾸는 일도 없다. 본능적으로 튀어나온다. “우리는 일본 같은 부자 동맹국을 지키려고 엄청난 돈을 쓰면서 세계의 조롱을 사고 있다. 그들은 미국을 엿 먹이고 있는데….” “나는 늘 핵전쟁을 생각한다. 사람들은 핵전쟁이 얼마나 파괴적인데 누가 핵무기를 사용하겠느냐고, 그래서 핵전쟁은 일어날 리 없다는 헛소리를 믿는다. 그것만큼 멍청한 일도 없다.” 모두 27년 전에 한 말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영화 ‘아이 캔 스피크’는 2007년 2월 미국 하원 청문회에서 위안부 피해 할머니가 일본군의 만행을 증언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할머니들께 누가 될까 봐 죽기 살기로 준비했다”는 노배우의 열연에다, 묵직한 주제를 코믹하게 풀어내 버겁지 않게 만든 덕분인지 흥행에도 성공했다고 한다. 하지만 재미와 감동의 뒤끝에 작금의 일본을 떠올리면서 많은 생각이 몰려왔다. 영화의 통쾌한 마무리처럼 청문회 증언 후 5개월 만에 미 하원은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요구하는 결의 121호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국제사회에선 일본의 뻔뻔한 역사인식에 대한 거센 비난이 비등했고, 미 행정부까지 나서 일본을 강하게 압박했다. 당시가 아베 신조 1차 정권 시절이었다. 아베에겐 치욕적인 패배이자 절치부심의 계기였다.위안부결의 이후 日 ‘설욕외교’ 그리고 10년이 지나면서, 특히 아베 2차 정권이 이어지면서 미국 조야(朝野)의 여론은 180도 달라졌다. 아베는 여전히 강제연행과 법적 책임을 부인하고 있는데도 미국은 어느새 일본에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외교참사’로 비판받는 2015년 12·28 위안부 합의가 나온 배경에도 일본이 아닌, 한국에 대한 미국의 거센 압박이 있었다. 그해 초 웬디 셔먼 국무부 차관은 “과거의 적을 비난함으로써 값싼 박수를 받기는 쉽다”며 한국을 대놓고 비난했다. 아베의 ‘전후 70주년 담화’는 교묘한 작문(作文)으로 식민지배 사과를 회피했는데도 미국은 “흠잡을 데 없다”고 했다. 위안부 합의 직후 아베가 “털끝만치도 생각이 없다”며 직접 사과를 거부한 것도 이런 미국의 지지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베가 이렇게 분위기를 역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의도를 정확하게 읽고 거기에 맞춰 대미 외교에 매진하면서 국내 우경화를 주도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집단자위권 행사는 중국의 부상에 맞서기 위해 일본의 역할이 필요한 미국이 요구해온 것이었다. 역대 정권은 평화헌법상의 제약을 들어 ‘행사 불가’ 입장을 견지했지만 아베 정권은 달랐다. 그렇다고 서두르지는 않았다. 먼저 헌법 해석을 변경하는 ‘해석 개헌’부터 시작해 미일동맹을 ‘지역동맹’에서 ‘글로벌동맹’으로 바꾸고 안보법제를 정비하기까지 몇 년에 걸쳐 차근차근 마무리했다. 아소 다로 부총리가 진작 예언처럼 말했듯이. “어느 날 정신을 차려 보니 바이마르 헌법이 나치의 헌법이 돼 버렸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바뀌었다.” 아베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을 기세다. 중의원 선거에서 압승한 아베는 개헌 추진을 공식화했고, 측근은 “천운의 기회”라며 환호했다. 첨단 로켓과 핵기술 개발을 통해 ‘은폐된 억지’ 전략을 추구해온 일본은 핵무장 군사대국으로 달려갈 수도 있다.여우같은 아베의 성공 처세술 “문재인 대통령이 골프를 안 친다고 해서 무척 아쉬웠습니다.” 지난달 미국 워싱턴에서 만난 한반도 정책 담당자가 한미 지도자 간 케미스트리(궁합)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농담 삼아 덧붙인 한마디다. 웃고 넘겼지만 씁쓸했다. 일본과 비교되는 한국 외교에 대한 답답함을 에둘러 내비친 것이기에. 다음 주말 아시아 순방에 나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곧장 아베와 골프장으로 향한다. 서로 ‘론’과 ‘야스’라고 부르던 레이건-나카소네 시절을 뛰어넘는 밀월을 뽐낼 것이다. 그에 비해 문재인-트럼프의 만남은 서먹해 보일지 모른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지만, 어쩔 수 없다. 아베라고 유치하다는 주변의 손가락질을 모를까. 그럼에도 자신을 낮춰 실속을 챙기는 현실주의 외교는 자고이래 성공적 처세와 국가 경영의 전범이었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프로이센 육군은 근대 육군의 원형으로 일컬어진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유럽을 휩쓸자 큰 위기감에 빠진 프로이센은 귀족 중심의 군대에 평민이 참여하는 의무병역제를 도입하고 병참 중심의 참모본부를 설립하는 등 현대식 군제 개혁을 이뤄냈다. 그 결과 독일 통일의 과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프랑스를 벤치마킹했던 일본 육군도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의 대승을 보고 서둘러 독일식으로 개편했다. ▷우리 육군사관학교 생도가 처음 파견된 해외 사관학교도 독일 육사였다. 독일 육사 위탁교육은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의 서독 방문에 대한 독일 측 선물이었다. 서독의 군사원조로 이듬해 육사 24기 생도 2명이 유학길에 올랐다. 이후 지금까지 50여 명이 독일 육사를 거쳤고, 이들 중에서 국방부 장관도 2명(김태영 김관진)이나 나왔다. 이들은 독일 군사철학과 전략·전술을 한국군에 전파하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현장 지휘관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임무형 지휘’와 자유·민주주의·법치의 원칙을 군에 정착시킨 ‘내적 지휘’ 개념이 대표적이다. ▷박근혜 정부 초기인 2013년 8월 국군기무사령부가 김관진 장관의 독일 육사 후배들에 대한 인사 특혜를 고발한 청와대 직보 문건이 공개됐다. 문건에 따르면 독일 육사 출신은 흠이 있거나 역량이 떨어져도 진급시켜 요직에 임명했으며, 육사 35∼42기 독일 육사 출신 7명 중 교수·무관을 제외한 5명이 1, 2계급씩 진급했다고 한다. 거기엔 얼마 전 ‘공관병 갑질’ 논란을 빚다가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된 박찬주 육군 대장(육사 37기)도 당연히 포함됐을 것이다. ▷기무사의 청와대 직보 여파는 컸다. 2개월 뒤 군 인사에서 사령관을 비롯한 기무사 서열 1·2·3위가 모두 경질되는 ‘기무사 집단학살’ 사태가 벌어졌다. 그렇게 눌러진 독일 육사 출신 우대 논란은 어느덧 ‘독사파(獨士派)’라는 사조직 또는 파벌 냄새가 나는 이름으로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게 됐다. 하지만 독사파라는 게 극소수 유학 기회를 잡은 군 인재들의 출세에 대한 질시와 모함에서 나온, 실체 없는 유령집단은 아닌지 모르겠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올해 노벨평화상이 핵무기의 전면 폐기를 주창하는 핵무기폐기국제운동(ICAN)에 돌아갔다는 소식에 새삼 2005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토머스 셸링이 떠올랐다. 게임이론의 대가 셸링의 노벨상 강연 ‘놀라운 60년: 히로시마의 유산’은 이렇게 시작한다. “지난 반세기 동안 가장 눈부신 사건은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다. 우리는 핵무기 폭발 없이 60년을 누렸다. 얼마나 기막힌 성취, 혹 성취가 아니라면, 얼마나 기막힌 행운인가.” 셸링은 냉전시대 수많은 핵전쟁 가상 워게임에 참여했다.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이후 이어진 불발(不發)의 사건을 그는 이런 감탄의 수사들로 경축하며 위태로웠던 지난 60년을 회고했다. 그것이 성취인지, 행운인지는 셸링도 장담하진 못했지만 그 이후에도 ‘경이로운 불발’은 12년이나 이어졌다.위태로운 ‘2차 핵시대’ 오늘날 핵무기 사용은 세계적인 터부(금기)가 됐다. 하지만 미국이 먼저 그 환상적 파괴력의 유혹에서 벗어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6·25전쟁이 발발해 미국에서 핵무기 사용 가능성이 거론되자 영국 총리가 급거 미국을 방문해 자제를 권고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선 공공연하게 “핵무기가 재래식 탄약과 다를 게 뭐냐”는 얘기들이 나왔다. 이런 ‘위험천만한 19년’이 지나 1964년에야 린든 존슨 미 대통령은 “단언컨대 ‘재래식 핵무기’ 같은 것은 없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핵무기는 사실상 ‘무용(無用)의 무기’로 굳어졌다. 하지만 핵무기는 사용되지 않을 뿐 쓸모없는 무기는 아니다. 그 진가는 ‘무용의 쓰임새’, 즉 억지력(deterrence)에 있다. 적이 공격을 통해 얻는 이익보다 보복으로 입게 되는 손해가 크다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 도발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적의 선제공격(제1격)에도 살아남아 치명적 손해를 줄 수 있는 보복능력(제2격)을 갖춰야 한다. 1950년대 보복 가능한 차세대 미사일이 등장했을 때 핵무장 해제를 주장하는 군비축소(disarmament) 주창자들은 이것이 핵무기 증강만을 낳을 것이라며 반대했다. 반면 셸링 같은 군비통제(arms control) 주창자들은 이 미사일이 제1격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라며 찬성했다. 결국 군비통제론에 따라 핵미사일은 방어설비가 대폭 강화된 지하 사일로에 배치됐다. 비록 핵무기의 수는 증가했지만 핵전쟁 가능성은 확연히 낮아졌다. 냉전이 끝나면서 핵무기는 지구상에서 완전히 퇴장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냉전 초기 ‘위험천만한 19년’보다 훨씬 위태로운 ‘제2차 핵 시대’가 도래했다. 공인된 핵클럽 5개국 외에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에 이어 북한까지 핵무기를 보유했다. 특히 북한은 냉전시대에도 전혀 없던 ‘핵 협박’을 하며 미국과 위태로운 핵 게임을 벌이고 있다. 이제 세계는 ‘핵 억지력이 여전히 유효할 것인가’라는 심각한 질문에 직면해 있다.核 시간은 거꾸로 간다 전 세계 비정부기구(NGO) 연합체인 ICAN의 홈페이지는 101개국에 걸친 468개 파트너를 소개하고 있다. 한국도 반전반핵 활동가 단체와 함께 핵전쟁방지국제의사회(IPPNW) 한국지부로 보이는 단체 ‘Korean Physicians for Peace’가 올라 있다. 링크된 주소로 e메일을 보냈더니 ‘메일 주소가 존재하지 않거나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휴면상태입니다’라는 답만 돌아왔다. ICAN은 핵무기 전면 폐기와 개발 금지로 ‘핵무기 없는 세계’를 꿈꾼다. 하지만 현실 국제정치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 핵보유국은 갈수록 늘고 있고 핵무기 사용 위험은 더욱 커지고 있다. 그 어둡고 섬뜩한 현실의 가장 중심엔 북한이 있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트위터 글이 또다시 한국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일부 언론이 ‘기름을 구하려 늘어선 행렬(gas lines)’을 ‘(남북한과 러시아를 잇는) 가스관’으로 오역해 문재인 대통령의 가스관 사업 구상을 겨냥한 것으로 해석한 때문이다. 두고두고 회자될 오보 참사일 것이다. 청와대로선 복장이 터질 노릇이었으리라. 청와대 관계자는 “여러분 머릿속에 뭔가 ‘프레임’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고 서운함을 토로하기까지 했다. 트럼프가 이미 문 대통령의 대북정책을 ‘유화책(appeasement)’이라고 비판했던지라 지레 한국을 비판했을 것이라는 무의식적 선입견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 논란을 접하고 솔직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실 영어사전을 찾아보면 ‘gas line’에는 ‘천연가스 수송에 사용되는 관(pipeline)’이란 의미도 들어있으니 나라고 서툰 영어실력에 오역의 함정을 피할 수 있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더욱이 지난주 미국 방문에서 접한 워싱턴 분위기로 인해 바로 청와대가 말한 그 ‘프레임’에서 헤어나지 못한 상태이기도 하다.“한국, 대화 집중-압박 시늉”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최근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은 미국인의 대북 인식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고 입을 모았다. 북핵 위협을 얘기할 때면 늘 ‘전대미문의’라는 수식어를 붙이며 “한국은 미국의 심리 상태를 이해하지 못한다”고도 했다. 그러니 대북 군사옵션은 과거엔 생각할 수 없는(unthinkable) 것이었지만 이젠 검토 가능한(conceivable) 현실이 됐다는 설명이다. 나아가 한미 정부 간 인식의 차이, 정책적 엇박자를 걱정하는 목소리로 이어졌다. “미국의 입장은 분명하게 압박, 압박, 압박이다. 그런데 한국은 좀 다르다. 계속 대화 재개를 모색하고 (대화 신호에) 귀 기울이면서 압박을 얘기한다.” 문재인 정부가 계속 대화를 강조하다 압박은 시늉만 낸다는 노골적인 불만의 토로였다. 일례로 한국 정부는 남북 적십자회담과 군사당국회담을 제의하기 이틀 전에야 미국에 알렸다고 한다. “이웃과 공유하는 나무가 있는데, 지저분하니 이틀 뒤 사람 불러 자르기로 했다고 이웃에 말한다면 그건 협의가 아니라 통보다.” 한 전문가는 “문 대통령이 운전자 역할을 하겠다고 하지만, 길이 없는 곳에서 빙판길을 운전하는 상황이 될 것”이라고도 했다. 한국 탓만 하진 않았다. 지금 한미관계는 노무현-조지 W 부시 시절과 닮았다며 “차이라면 그땐 노무현이 돌발 변수였지만 지금은 트럼프가 돌발 변수”라고 했다. 트럼프의 트윗에도 놀라지 말라고 했다. “트럼프를 왕이라 생각하라. 아침에 일어나 이런저런 생각을 얘기하고 트윗을 날린다. 그러면 신하들은 ‘어떡하지? 뭘 해야 은총을 입지?’ 고민한다. 그의 트윗은 정책이 아니다.” ‘보스 DNA’ 케미로 허물라 워싱턴의 기류를 접하면서 슈퍼파워 미국의 숨기지 못하는 ‘보스 DNA’를 새삼 절감했다. 거기에 ‘마초 DNA’까지 지닌 트럼프에게 문 대통령이 느낄 무력감은 더욱 클 것이다. 하지만 미국을 움직이지 않고선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게 한반도 문제다. 북한마저 “주제넘게 끼지 말라”는 형국이니. 전문가들은 결국 한미 당국자들이 자주 만나 ‘케미스트리(궁합)’를 맞추고 동맹의 끈을 단단히 조이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오역 사태를 두고 “우리는 언론인들이 문 대통령보다 다른 나라 정상이나 언론을 더 신뢰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미국 사람을 더 믿기 때문이 아니라 미국의 생각은 알아야 하기에 그들의 얘기를 전한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유발 하라리가 신작 ‘호모 데우스’에서 그린 인류의 미래는 무섭도록 기이하다. 인류사적 통찰을 토대로 논리적 상상력을 끝없이 밀어붙이는 도저한 사유의 힘에 감탄하다가도 그가 펼친 미래의 섬뜩한 풍경엔 등골이 서늘해진다. 솔직히 한국어판 서문부터 살펴보곤 이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하나 망설였다. 하지만 어느덧 일독을 마치고 다시 읽은 서문 ‘다시,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한층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다. 하라리가 먼저 제시한 북한의 미래는 사실 누구나 점치는 뻔한 시나리오다. 이미 정보기술에서 뒤떨어진 북한은 인공지능시대에 더욱 경제·군사적으로 약해지고 이웃 나라들을 공갈 협박하다 결국 붕괴할 것이라는…. 하지만 이어지는 그의 뻔하지 않은 시나리오는 무시무시하다.하라리의 예언 ‘1984 북한’ 가령 북한은 모든 차량이 자율주행하는 세계 최초의 국가가 된다. 남한에서는 인간의 운전을 금지하면 자가용 소유주, 택시·버스기사, 심지어 교통경찰까지 들고일어날 테지만 북한에선 어느 날 김정은의 펜 놀림 한 번으로 모두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북한은 조지 오웰이 ‘1984’에서 그린 세계 최초의 전체주의적 디스토피아가 될 수 있다. 모든 주민에게 생체측정기기를 착용시켜 말과 행동, 생각까지 읽어내는 철저한 감시사회를 구현한다. 최근 북한의 미사일 도발과 6차 핵실험은 하라리식 예측이 그저 상상력 끝자락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라는 불길한 예감을 떨치기 어렵게 한다. 더욱 어둡게 덧칠된 ‘김정은의 나라’는 하라리의 시나리오보다 더욱 기괴한 초현실 사회가 될 수 있다. 김정은은 최근 화학재료연구소와 핵무기연구소를 방문해 ‘주체탄’의 기술력을 전 세계에 자랑했다. 김정은이 가리키거나 배경 삼아 찍은 미사일과 핵탄두 사진은 전 세계 정보당국과 연구기관의 비상한 관심을 집중시켰다. 전문가들은 ‘뻥’과 ‘레알’ 사이의 논쟁 속에서 대체로 기가 차다는 반응을 내놓는다. 어떻게 저런 수준으로 그런 기술적 도약을 이뤄내는지 놀라울 따름이라는 것이다. 4년여 전 서해에서 건져 올린 장거리 로켓 은하3호의 잔해를 분석한 전문가들의 반응도 그랬다. 중국 등 5개국에서 수입한 부품들이 군데군데 섞인 로켓엔진·연료통의 배선과 용접 상태는 너무 조악해 어떻게 지구 궤도에 올렸는지 신기할 정도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깡통미사일이든, 깡통폭탄이든 태평양을 건널 만큼 높이 올랐고 한반도 북부를 흔들었다. 그것이 현실이다. 김정은이 결심하면 죽기 살기로 만들어내야만 하는 나라이기에 뻥은 레알이 된다.‘멋진 核국가’가 폭주하면… 김정은 집권 이후 북한의 ‘핵-경제 병진노선’은 국가 브랜드가 됐다. 핵 보유로 안보 위협에서 벗어나야 경제 건설에 매진할 수 있다는 ‘핵개발 올인(다걸기)’ 노선이다. 김정은의 병진노선은 최근 좋아진 경제 사정으로 그 정당성이 입증됐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토록 염원하는 ‘핵무력 완성 이후’ 김정은은 북한을 어디로 이끌까. 김정은이 얌전히 인민경제에 힘을 쏟지도 않겠지만 국제적 외톨이 신세여서 그럴 수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더욱 거침없이 폭주할 가능성이 높다. 이미 50년 전 할아버지 김일성의 ‘국방-경제 병진노선’이 북한 경제를 파탄 낸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하라리의 시나리오는 우리를 더욱 두렵게 만든다. 북한은 대외적으론 위협과 공갈, 가짜뉴스, 사이버 파괴·교란공작까지 결합한 ‘하이브리드 전쟁’의 무법자가 될 것이다. 대내적으론 어설픈 인공지능 기술로라도 북한을 빈틈없는 감시·통제의 ‘멋진 신세계’로 바꾸려 할 것이다. 이 모든 게 김정은의 삐딱한 날림체 서명이면 가능한 북한이기에.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북-미 간 공갈 게임에서 북한 김정은은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졌다. 기세 싸움에서 밀린 셈이다. 김정은이 ‘8월 중순’까지 괌 포위사격 여부를 결심하겠다고 위협하자 트럼프는 ‘8월 15일’로 날짜를 콕 집어 “그때 두고 보라”라며 응징을 별렀다. 아니나 다를까. 김정은은 14일 보고를 받고 “미국 놈들의 행태를 좀 더 지켜보겠다”고 했다. 북한 매체는 이를 15일 아침 보도했다. 트럼프가 정한 시한 직전에 꼬리를 내린 것이다. 북한 전략군사령부가 8, 9일 잇달아 괌 포위사격 방안을 “심중히 검토하고 있다”고 했을 때부터 트럼프는 북한의 ‘공갈’임을 간파했고, 자기가 정한 날짜에 답을 내놓도록 몰아붙였다. 그러고는 “김정은이 현명한 결정을 내렸다”며 자신의 승리를 기정사실화했다. 거친 반격으로 불확실성을 높이고 자기 스케줄대로 상대방을, 나아가 주변의 관전자까지 움직이게 만들었다. 게임의 고수답다.트럼프 1勝… 조율된 승패? 그렇다고 김정은이 완패한 것은 아니다. 일단 한발 물러섰지만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것 같다. 김정은의 괌 타격 유보 결정이 북한 매체에 공개되기 직전 미국 국무장관과 국방장관이 이례적으로 미국 신문에 낸 공동 기고문을 통해 북한 정권교체, 정권붕괴, 흡수통일, 38선 침공은 없다는 이른바 ‘4노(No) 원칙’을 거듭 확인한 것이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공개 석상에 일주일 만에야 나타난 김정은은 이제 미국을 향해 협박하는 대신 미사일 연구소를 찾아 생산능력을 은근히 과시했다. 마치 협상을 앞두고 몸값을 올리겠다는 듯한 행보다. 자극적 언사를 자제하던 트럼프도 급기야 ‘김정은의 미국 존중을 존중한다’는 묘한 말과 함께 “뭔가 긍정적인 게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진한 여운을 남겼다. 북-미 간 비밀 접촉이 깊숙이 이뤄지고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지금은 한미 연합 을지프리덤가디언(UFG) 훈련이 벌어지는 예민한 시기인데도 일촉즉발의 팽팽했던 긴장감은 언제 그랬나 싶게 누그러졌다. 별 탈 없이 UFG 훈련이 끝나면 북-미는 머지않아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 양측은 테이블에 앉기 전 막판 밀고 당기기에 한창인 듯하다. 트럼프가 두 차례나 쓴 ‘존중(respect)’이란 단어가 주목되는 이유다. 대화의 시작은 상호 ‘존중’에 있기 때문이다. 김정은이 지금 가장 원하는 것은 트럼프의 입에서 나오는 체제 보장 ‘4 No’ 약속일 것이다. 아버지 김정일이 그랬던 것처럼. 김정일은 미국 대통령들에게서 줄줄이 안전보장을 약속받았다. 대통령 3명의 친서도 받았다. 빌 클린턴은 서한에서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일 각하(His Excellency Kim Jong Il, Supreme Leader of the DPRK)’라고 칭했고, 조지 W 부시는 ‘친애하는 위원장 선생(Dear Mr. Chairman)’이라 불렀다(버락 오바마는 내용 공개를 거부했다).절실한, 너무 절실한 ‘보장’ 북한의 요구가 트럼프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정권 기반이 취약한 나이 어린 김정은에겐 더욱 절실할 것이다. 트럼프도 조금씩 움직이는 듯하다. 지난달 초 “이 친구(this guy)는 할 일이 그렇게 없나”라고 했던 트럼프지만 일주일 전 트윗에선 ‘북한의 김정은(Kim Jong Un of North Korea)’이라고 칭했다. 물론 트럼프는 역주행이나 다른 길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다. 북한 체제, 나아가 김씨 일가에 대한 안전보장을 토대로 만들어진 수많은 합의가 예외 없이 실패로 끝난 사실을 타고난 협상가 트럼프가 간과할 리 없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국제정치학계에서 ‘공격적 현실주의’로 유명한 존 미어샤이머 미국 시카고대 교수는 특이한 경력을 가졌다. 웨스트포인트 육사를 졸업하고 공군 장교로 5년간 근무했다(미국에는 교차 임관 제도가 있다). 비록 군 생활은 만족스럽지 못했다지만 군사 문제에 대한 전문적 식견은 그의 이론적 토대가 됐다. 국가는 단순히 생존이 아닌 패권을 추구하게 마련이라는 그의 냉혹한 국제정치 현실론도 군 경력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미어샤이머는 국가의 힘이란 대체로 국가가 보유한 군사력이고, 지금 세계에서 가장 압도적인 형태의 군사력은 단연코 육군이라고 강조한다. 전쟁 승리의 가장 중요한 군사력이 무엇이냐를 둘러싼 오랜 논쟁 과정에서 앨프리드 머핸의 ‘독립해군론’, 줄리오 두에의 ‘전략공군론’도 나왔지만 미어샤이머는 둘 다 틀렸다고 단언한다. 국가의 힘은 공군과 해군의 보조를 받는 육군력에 근거한다는 것이다.(‘강대국 국제정치의 비극’) 8일 새 정부 첫 군 수뇌부 인사는 한국 육군엔 또 하나의 ‘육치일(陸恥日·육군 치욕의 날)’로 기록될지 모르겠다. 해군 출신 국방부 장관에 이어 군 서열 1위인 합참의장에 공군 대장이 지명됐다. 여기에 육군 야전사령관 2명은 육사 대신 3사와 학군 출신이 임명됐다. 콧대 높은 육사 출신은 접시 물에 코 박아야 하는 신세가 됐다. 사실 육사로 대표되는 육군의 추락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김영삼 정부 출범과 함께 전광석화처럼 단행된 하나회 숙군은 그 시작이었다. 대통령 왈 “니들도 많이 놀랐제?” 실제로 청와대 수석들조차 깜짝 놀랐다. 하나회 척결이 없었다면 김대중 노무현 정부도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군의 중심은 대구경북(TK)에서 부산경남(PK)으로 넘어갔다. 충청도 출신 공군 대장을 합참의장, 국방부 장관에 기용하기도 했지만 여전한 육군 기세에 맥을 못 췄다. 김대중 대통령 취임은 호남 장교들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억눌린 지역의 한을 푼 것일 뿐이라지만 군의 정치권 줄 대기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뒤 이은 노무현 대통령의 육군, 특히 육사 불신은 컸다. 첫 국방부 장관으로 갑종장교 출신을, 두 번째 장관으로 해군 출신을 기용했다. 청와대의 인사 개입은 더욱 노골화했고 육군총장이 항명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명박 정부 들어 육군은 패권을 되찾았다. 해·공군의 득세를 바로잡겠다고 나섰다. 영남 편중도 심해졌다. 육·해·공 3군 총장이 모두 영남 출신으로 채워지는 일도 벌어졌다. 이런 기조는 박근혜 정부로 이어졌다. 세간에서 ‘누나회’로 불린 하나회의 막내 기수이자 대통령 동생의 동기에서 중장 8명, 대장 3명이 나왔다. 바로 며칠 전 전면 퇴장당한 육사 37기다. 잠시 주춤했던 육군의 추락은 이제 다시 시작됐을 뿐이다. 수뇌부에 이은 후속 인사가 이어지면서 수모는 계속될 것이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30년간 폭압통치로 군림했다는 원죄(原罪) 딱지에다 태극기 집회에 등장한 육사 마크 깃발로 ‘적폐’ 이미지까지 덧씌워졌다. 이제 ‘닥치고 충성’만 있을 뿐이다. 육군에선 “전임 해·공군 출신 장관·의장 시절을 돌아보라. 앞으로 한국군 꼴이 어떨지 보면 안다”는 얘기가 나온다. 여전히 엘리트 패권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고지만 기우만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육군 출신 장관이 군 대비태세 같은 합참 업무까지 일일이 챙기며 타군 출신 의장을 ‘보좌’하는 일도 있었다. 한국군 전체 병력의 80%가 넘고 각 군 배분 예산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육군이다. 한국 군사력의 핵심 중추가 언제까지 날개 없는 추락만 계속할 수는 없다. 해·공군 출신 수뇌부가 불안하다면 더욱 잘 뒷받침해서 성공시키는 게 육군의 살길이자 한국군이 사는 길이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좋게 말하면 천진난만하고 나쁘게 말하면 절망적이다.” 북한 태권도 시범단을 이끌고 방한했던 장웅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 이달 초 돌아가면서 한 말이다. 키가 190cm에 가까운 팔순의 스포츠계 거물은 스포츠로 남북관계의 물꼬를 트자는 문재인 대통령의 기대를 매몰차게 깎아내렸다. 말본새가 참 고약했다. 문 대통령의 ‘7·6 베를린 구상’ 발표 아흐레 만에 나온 북한 노동신문의 반응은 한술 더 떴다. “잠꼬대 같은 궤변” “철면피하고 누추하다”는 막말에 “맥도 모르고 침통 빼드는 얼치기 의생”에 비유했다.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온갖 상스러운 언사를 내뱉던 북한이다. 문 대통령에겐 ‘남조선의 집권자’라고 칭하니 이 정도면 양반이다.무늬만 같은 두 ‘伯林 연설’ 북한은 문 대통령의 대화 제의에 일언반구 대꾸도 없다. 시쳇말로 ‘개무시’다. 그러면서 미국엔 “핵미사일 선제타격” 운운하며 도발 카드를 만지작거린다. 이에 미국은 초강력 대북제재로 맞서고 있다. 문제는 이런 ‘도발 대 제재’의 대결 국면에서 태어난 베를린 구상의 운명, 즉 사주팔자가 기구하다는 점이다. 사실 베를린 구상은 그 원조 격인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과 비교하면 조산으로 태어난 미숙아라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2000년 3월 9일 DJ가 베를린자유대에서 연설을 하던 바로 그 시각, 싱가포르에선 박지원-송호경 간 남북 비밀접촉이 이뤄지고 있었다. 베를린 선언은 남북 간 사전 정지작업과 교감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1998년 2월 취임 직후 남북 대화에 나섰다가 실패를 맛본 DJ 정부는 우선 햇볕정책에 대한 미국의 전폭적인 지지를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그해 6월 첫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제 한반도 문제는 김 대통령이 핸들을 잡아 운전하고 나는 옆자리로 옮겨 보조적 역할을 하겠다”며 DJ에게 운전석을 권유했다(임동원 ‘피스메이커’). 하지만 DJ가 실제로 운전석에 앉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당장 평안북도 금창리의 큰 지하땅굴이 비밀 핵시설이라는 의혹이 제기됐고, 대포동 1호 미사일까지 발사되면서 한반도는 위기에 휩싸였다. 그때 미국 대북정책조정관에 임명된 인물은 1994년 1차 북핵 위기 때 북폭(北爆)을 주장했던 강경파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이었다. 이후 과정은 문 대통령의 6·15 남북정상회담 기념식 축사에, 특히 사전 배포된 원고에 연설 직전 추가된 한 대목에 잘 요약돼 있다. “김 대통령은 이런 위기를 극복하고 미국 클린턴 행정부를 설득하면서 남북관계가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주도적으로 닦았다.” 미국 동의나 양해 없이 남북관계는 한 치도 진전될 수 없음을 문 대통령도 알고 있는 셈이다.‘대화 vs 도발’ 다른 일정표 그런데 지금 문 대통령은 단 한 차례의 한미 정상회담으로 운전석을 확보했다고 믿는 것 같다. 당장 호응은 없어도 일관성을 보여주면 김정은 정권의 태도도 바뀔 것이라는 기대 아래 7·27 정전일, 8·15 광복절, 10·4 기념일로 이어지는 대북 제안 일정표를 고수할 생각인 듯하다. 하지만 북한이 ‘핵 무기화 일정표’를 양보할 가능성은 있을까. 이러다 미국마저 베를린 구상을 한낱 몽상으로 치부하는 건 아닌지, 그게 걱정이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6일 한중 정상회담에서 “(우리는) 북한과 혈맹의 관계를 맺어왔고…”라고 말했다는 대목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도발 직후에도 ‘혈맹’이라며 감싸다니…. 더욱이 최고지도자가? 전문가들은 “최근 북한 공식매체가 중국을 거명하며 비난해서 중국조차 경악하는 상황인데…”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10일 국회에서 “(시진핑이) 혈맹이란 단어를 썼지만 그것은 지금이 아닌 과거 북-중 관계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했다는 데서 의문이 다소 풀릴 것도 같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귀에 대고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라고 각인시킨 시진핑이니 그런 얘기도 할 법하겠다고 넘기려 했다. 한데, 그것도 아니란다. 혈맹, 폐기된 구시대 용어 정상회담 배석자에 따르면 ‘혈맹’이란 말은 아예 나오지 않았다. 시진핑이 과거 북-중 간 역사적 특수관계를 설명하며 그렇게 해석할 만한 언급은 했지만 혈맹이란 말은 없었다고 한다. 중국 측은 이미 비공식 경로로 ‘허위 보도’를 바로잡아줄 것을 요구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작년 여름 더불어민주당 초선 의원들이 방중해 벌인 중국 학자들과의 토론회에서 ‘혈맹’ 발언이 있었느니 없었느니 논란이 벌어졌던 것과 판박이인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중국에서 과거 북-중 관계를 표현했던 ‘혈맹’은 1990년대 초 한중 수교와 김일성 사망 이후 공식 폐기됐다. 2003년 방중한 조명록 북한군 차수가 북-중 관계를 ‘피와 탄환’으로 표현하자 후진타오 주석은 ‘전통적 우의관계’라고 정정하기도 했다. 과거 역사를 얘기할 때 ‘피를 나눈’ ‘피로 맺은’ 같은 표현을 쓰긴 한다. 중국 권력서열 5위 류윈산도 재작년 방북 때 “피를 뒤집어쓰며 싸운 역사”를 거론했지만 ‘혈맹’이라곤 하지 않았다. 혹자는 피로 맺은 역사가 혈맹과 뭐가 다르냐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중국이 그렇게도 그 말을 쓰기 싫어하는 것은 더는 북한과 엮이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중국 학자들도 “강대국과 약소국 간 비대칭 동맹이었던 중조(中朝) 관계에선 개 꼬리가 개의 몸통을 흔드는 ‘미파요구(尾巴搖狗)’ 현상까지 나타난 미성숙한 국가관계였다”며 정상적 국가관계로 전환해야 한다고 촉구한다.(선즈화 ‘최후의 천조’) 사정이 이런데도 한국은 죽은 ‘혈맹’을 끄집어냈다. 북-중 관계를 벌려놔도 시원찮을 판에 국제사회가 두 나라를 더욱 끈끈한 관계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당장 동북아엔 ‘한미일 대 북중러’ 대결 구도가 재연되는 것 아니냐는 해설이 뒤를 잇고 있다.‘미담’ 둔갑한 외교 事故 청와대는 며칠 전 ‘대통령 순방 뒷이야기’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냈다. 그중엔 이런 내용도 있다. ‘한중 정상회담이 끝났을 때 김현철 경제보좌관이 크게 박수를 침. 이에 시진핑 주석이 깜짝 놀라고 문재인 대통령도 놀라서 바라봄. 김 보좌관은 중국과의 관계가 풀려가는 것을 보고 경제문제도 풀리겠다는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고 밝힘. 정상회담장에서 수행원이 박수를 친 건 처음.’ 정상외교의 현장에서 벌어진 이해하지 못할 해프닝도 자랑스럽게 홍보하는 모양새다. 자료가 배포된 건 문 대통령이 “우리에게 가장 절박한 한반도 문제인데도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해결할 힘이 없다”며 극도의 무력감을 표시한 바로 그날이었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참석차 독일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어제 취임 후 처음으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어 독일 쾨르버재단 초청 연설에서 북한을 향해 6·15선언과 10·4선언으로의 복귀를 촉구하는 ‘베를린 구상’을 발표했다. 문 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 “지금까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중국의 역할을 평가하지만 앞으로 중국이 더 많은 기여를 해줄 것을 요망한다”며 ‘중국 역할론’을 강조했으나 시 주석의 동의를 얻어내지는 못했다. 시 주석은 북한과 혈맹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라면서 “충분히 노력을 하고 있는데 국제사회가 중국의 노력 부족을 비난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특히 시 주석은 미국의 책임론을 강하게 주장했다. 시 주석은 “북핵 문제는 한국과 북한의 문제가 아니라 북한과 미국의 문제로 파악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북한의 주장과 같은 맥락이다.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도발로 한반도 안보 패러다임이 바뀌었지만 중국의 주장은 예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다. 지난해 9월 북한의 5차 핵실험 이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2321호)로 대북 제재가 훨씬 강화됐지만 올해 1∼5월 북-중 무역은 지난해보다 되레 늘었다. 시 주석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문제에 대해선 “중국의 정당한 우려를 중시하고 적절히 처리하기 바란다”며 배치 철회를 압박하기도 했다. 5일(현지 시간) 열린 유엔 안보리에서 중국과 러시아는 “무력 사용은 옵션이 아니다”며 미국의 강경 대응책에 반발하기도 했다. 미국은 중국에 대북 원유 공급 중단을 비롯한 대북 교역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북한 무역의 90%를 차지하는 중국을 통한 경제 봉쇄를 요구하며 이를 어긴 중국 기업에 대한 제재(세컨더리 보이콧)도 불사하겠다는 자세다. 중국의 근본적 태도 변화 없이는 기고만장한 북한의 도발을 막기는 어렵다. 이런 가운데 문 대통령은 베를린 연설에서 북한의 ICBM 도발에 실망감을 표시했다. “북한이 핵 도발을 중단하지 않으면 더욱 강한 제재와 압박 외엔 다른 선택이 없다”며 북한의 안전도 보장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완수라는 목표 아래 다양한 남북 교류 제안을 내놓았다. 당장 7·27 정전협정 체결일에 적대행위 중단을 선언하고 8·15 광복절에 민간 공동행사를 재개하며, 10·4선언 10주년이자 추석 명절에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내년 2월 평창 겨울올림픽 참가를 제안했다. 북한의 도발로 연설문을 대폭 수정했다지만 크게 바뀐 것 같지 않다. “언제 어디서든 김정은을 만날 용의가 있다”며 3차 남북 정상회담 개최에 대한 의지도 피력했다. 비슷한 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북한의 나쁜 행동에는 반드시 결과가 있을 것”이라며 북한을 향해 ‘매우 혹독한 조치’를 경고했다. 앞서 니키 헤일리 주유엔 미국대사는 “필요하다면 군사수단도 동원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북한의 ICBM 도발 직후 나온 문 대통령의 ‘베를린 구상’이 자칫 동맹국인 미국과 국제사회에 잘못된 메시지를 던지는 것 아닌지 우려스럽다. 향후 대북 압박을 둘러싼 ‘한미일 대(對) 중러’ 간 대치전선이 형성된다면 북한은 이를 틈타 추가 도발을 감행할 가능성도 높다. ‘주도적 역할’을 자임한 문 대통령은 이런 고난도 외교전쟁의 조정자 역할을 제대로 해내야 한다. 그 시작은 동맹국과의 긴밀한 공조일 것이다. 문 대통령의 ‘베를린 구상’이 미국은 물론이고 북한에서도 환영받지 못할 공허한 수사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첫 만남의 의례적 악수 하나로 상대를 놀라게 하거나 민망하게 만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재주라면 참 별난 재주다.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문재인 대통령이 “뭐 악수만 잘하면…”이라고 했다지만 그 농담 속엔 긴장감도 담겼으리라. 하긴 정상회담장에 큰 개를 풀어놓은 러시아 대통령도 있으니 그에 비하면 약과일 수도 있겠다. 트럼프보다 버거웠던 부시14년 전 노무현 대통령에겐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트럼프 못지않게 버거운 사람이었다. 40세 나이에 거듭 태어난(born again) 기독교 신자인 데다 선과 악의 이분법적 세계관을 가진 네오콘(신보수주의) 세력에 둘러싸인 부시였다. 아무리 ‘Mr. 예측불가’라 해도 비즈니스맨 출신 트럼프와는 딜(거래)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북한을 극도로 혐오한다는 신념의 근본주의자 부시를 상대하기란 쉽지 않았다. 2003년 5월 노무현-부시 첫 만남은 다행히 나쁘지 않았다. 이미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부시와의 회담에서 크게 데었던 탓에 노무현은 북한의 학정을 비판하는 부시에게 “나도 김정일을 생각하면 짜증이 난다”고 맞장구를 치기도 했다. 부시도 친근감을 강조하기 위해 노무현을 ‘대화하기 쉬운 사람(easy man to talk with)’이라고 했다가 국내에선 “대체 얼마나 양보했기에 ‘만만한 사람’이란 소리를 듣느냐”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한승주 ‘외교의 길’)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마냥 순탄할 리 없었다. 노무현은 부시의 심사를 건드리는 말도 거침없이 쏟아놓았다. 정상회담을 앞두고 “핵무기 개발이 방어용이라는 북한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는 폭탄 발언을 했다가 부시를 만나 해명하는 일도 있었다. 그럼에도 부시를 끈질기게 채근해 앞으론 언론에 ‘Mr. 김정일’로 호칭하겠다는 마지못한 약속을 받아내기도 했다. 최악의 만남은 2005년 북핵 6자회담이 미국의 방코델타아시아(BDA) 금융제재로 벽에 부딪힌 이후 열린 회담이었다. 두 정상은 굳은 얼굴로 험한 논쟁을 벌였다. 노무현은 “각하는 북한에 대한 전략적 고려나 전술적 접근보다는 철학적으로 김정일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 같다”고 던졌고, 부시는 “맞다. 나는 싫다면 싫다. 둘러대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응수했다. 이후 노무현은 부시와의 회담을 극도로 꺼렸다. “만나봐야 서로 말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거리만 더 멀어질 것이다”라며 거부했다. 송민순 당시 청와대 안보실장의 거듭된 건의에도 “왜 자꾸 대통령을 갋으려 하느냐”고 짜증을 냈다. 결국 “귀찮아서 안 되겠다”며 수락했고, 10개월 만에 이뤄진 재회동은 성공적이었다.(송민순 ‘빙하는 움직인다’) 노무현은 미국인을 만나면 자신의 성향에 대한 ‘오해’를 풀려고 애를 썼다. 임기 말엔 “나는 요구가 많은 친미주의자”라고 스스로를 규정했다. 이라크 파병, 주한미군 재배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같은 굵직한 친미적 정책이 모두 그의 재임 시절 이뤄졌으니 억울할 만도 했다. 미국 없이 北 못 움직인다하지만 “반미면 어떠냐”던 그가 친미를 자처한 진짜 이유는 미국을 통하지 않고서는 북한을 한 치도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6자회담에서 북한은 오직 미국만 상대하려 했다. 사정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문재인표 대북정책도 미국 없이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