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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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철희 논설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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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7~2024-04-26
칼럼100%
  • [오늘과 내일/이철희]‘중재자’ 문재인의 자격

    오늘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출국하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작년 5월 24일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악몽일 것이다. 그날 문재인은 워싱턴 방문을 마치고 새벽 서울공항에 도착했다. 미국 체류 24시간, 왕복 비행 30시간이 넘는 1박 4일의 이례적 일정이었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의 회담도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특히나 트럼프의 원맨쇼에 가까운 기자회견을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옆에 앉아 지켜보면서 느꼈을 씁쓸함이란 쉽게 씻기 어려웠을 터다. 시차 적응도 되지 않았을 그날, 문재인은 지옥과 천당을 왔다 갔다 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아침 일찍 들려온 소식은 북한의 원색적인 미국 비난 담화였다. 북한은 마이크 펜스 부통령을 ‘아둔한 얼뜨기’라고 비난하며 호기롭게 ‘핵 대결’까지 경고했다. 가뜩이나 6월 12일로 잡힌 싱가포르 북-미 회담을 두고 “열리면 좋지만 안 열려도 괜찮다”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일단 북한을 믿어보자며 설득했을 문재인으로선 불안감을 씻어내기 어려웠으리라. 이어 낮부터 들어온 소식은 잠시 그런 불안을 내려놓게 했다. 북한이 약속한 대로 풍계리 핵실험장 시설을 폭파했고, 저녁엔 북한의 공식 발표도 나왔다. 하지만 밤늦게 트럼프가 북-미 회담을 전격 취소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청와대는 발칵 뒤집어졌다. 문재인은 참모들을 관저로 긴급 소집하고 자정엔 국가안전보장회의(NSC)도 열었다. 이 모든 게 귀국한 지 24시간도 안 돼 벌어진 일이다. 다행히도 이튿날 김정은이 자세를 한껏 낮춘 담화를 내고, 트럼프가 곧장 “좋은 소식”이라고 화답하면서 한바탕 소통은 일단 진정됐다. 그 다음 날 문재인은 전격적으로 두 번째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을 열어 김정은이 그간 거부했던 북-미 협상과 남북 회담 재개 확답을 받아냈다. 하지만 북-미 사이에 낀 존재로서 한순간에 속수무책의 처지에 빠질 수 있음을 실감한 그날의 경험은 그의 뇌리에 깊이 각인됐을 것이다. 이번 1박 3일 워싱턴행(行)에도 만만찮은 복병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 하노이 결렬 이후 멈춰선 대화의 복원을 위해서지만 자칫 팽팽한 북-미 간 갈등 속에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거나 양쪽에서 뒤통수를 맞는 신세가 될 수도 있다. 이쯤해선 그간의 역할을 다시금 되짚어봐야 한다. 아슬아슬한 위기 때마다 불을 끄는 데 존재감을 발휘했지만, 한반도의 당사자로서 진정한 중재자 역할을 했는지 말이다. 양측을 한자리에 앉히는 데만 급급했을 뿐 나머지는 둘 사이에 맡겨놓고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당장의 합의만 기대했던 것은 아닌지. 줄곧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의 선순환을 얘기하면서 정작 한미 관계는 빠뜨리며 트럼프와의 만남을 거북하게 여겼던 것은 아닌지. 그러니 북-미가 뭐라도 안 풀리면 늘 닦달하거나 눈 흘기는 대상이 된 것은 아닌지…. 중재자나 촉진자 그 명칭이 뭐든 중간에 있는 사람은 늘 고달플 수밖에 없다. 아쉬우면 찾는 존재라지만 샌드백이나 쿠션 같은 ‘완충자’ 신세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손놓고 있을 수는 없다. 문재인은 어제도 “역사의 변방이 아닌 중심에 서겠다”고 했다. 사실 그런 자신감도 거슬러 올라가면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 “우리에게 가장 절박한 한반도 문제인데도 해결할 힘이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다”고 토로했던 게 재작년 하반기다. 중재자의 힘은 자신감이나 절박감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신뢰감에서 나온다. 하노이 결렬의 근본 원인도 북-미가 서로를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뿌리 깊은 불신 속에 등진 양측을 되돌려 앉히려면 적극적 중재 역할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이번 트럼프와의 만남에서 북한 비핵화의 목표부터 공유하고 중재자 자격을 확인받아야 한다. 김정은은 다음 문제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19-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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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철희]김정은의 1년짜리 워싱턴行 티켓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말, 특히 그가 날리는 트윗에선 그의 기분이나 심사를 읽어야지, 너무 꼼꼼히 따지다간 수렁에 빠지기 일쑤다. 디테일 부족은 물론이고 사실 여부마저 문제가 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트럼프는 지난주 ‘추가 대북제재를 철회하도록 지시했다’는 트윗을 올렸는데, 그 제재가 뭔지를 놓고도 아직껏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트럼프가 그런 트윗을 날릴 때마다 죽어나는 것은 아랫사람들이다. 백악관 참모들은 이번 트윗에 대해 전날 발표한 중국 해운사 2곳의 제재를 번복하는 게 아니라 조만간 나올 새로운 제재 계획을 취소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외신들은 다른 제재 계획이라곤 없었고 거짓으로 둘러댄 것이라고 전한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마저 의회 청문회에서 자기 소관이 아니라 모른다는 취지로 얼버무려야 했다. 행정부의 정책결정 절차를 뒤집어 혼란에 빠뜨리는 ‘미친 동네(crazy town)’의 수장 트럼프 밑에서 군인, 경영인 출신 참모들이 하나같이 버티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폼페이오의 건재함은 두드러진다. 대통령과 좀처럼 충돌하지 않는 폼페이오의 처신은 군인, 사업가, 하원의원을 거친 야심가인 데다 고통스러운 학습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 에피소드 하나. 트럼프는 재작년 대통령 취임 이튿날 중앙정보국(CIA)을 방문해 직원들을 향해 시종 자기 자랑과 허세 가득한 횡설수설을 늘어놓았다. 급기야 새 국장 지명자 폼페이오를 끌어들였다. “나는 올해 주간 타임 표지에 열다섯 번 나왔어요. 난 그게 깨질 기록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마이크, 어떻게 생각해요.” 폼페이오는 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죠.” 어쨌든 트럼프는 이번 제재 철회 트윗으로 김정은에게 ‘대북정책은 누가 뭐래도 내가 결정한다’는 메시지를 명확히 전달했다. 혹시라도 모자랄까 봐 대변인을 통해 “대통령은 김정은을 좋아한다”는 말까지 하도록 했다. 북한이 트럼프 참모들을 싸잡아 비난하면서도 “두 정상 간 케미스트리는 신비할 정도”라고 밝힌 대목에 화답이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과연 그것은 약효가 있었다. 미국의 제재 직후 남북연락사무소에서 전격 철수했던 북한은 인력 절반을 복귀시켰다. ‘미국의 꼭두각시’라고 맹비난하던 대남 공세 수위도 낮췄다. 기류를 보겠다는 심산이겠지만 물밑 외교의 공간을 열어둔 것이다. 이런 와중에 트럼프는 ‘러시아 스캔들’ 특검 수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오바마 케어 폐지, 국경 장벽 강행 등 묵은 과제들을 밀어붙이며 거침없는 대선 행보에 들어갔다. 대외정책도 예외일 리 없다. 특히 북핵 문제는 먹잇감을 놓치지 않는 동물적 본능을 가진 트럼프가 결코 간과할 대상이 아니다. 트럼프는 이미 김정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달 초 북한의 미사일 발사장 재건 움직임에 “약간 실망했다”면서도 “두고 보자. 1년쯤 뒤에 알게 될 거다”라고 했다. 앞으로 1년 자신의 대선 일정표에 북한도 비핵화 시간표를 맞추라는 주문이다. 하노이 담판에서 김정은에게 “더 통 크게 가자(go bigger). 다걸기(all-in) 하라”고 재촉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김정은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트럼프에게 다 걸어도 될까. 그가 재선에 성공하리란 보장도 없다. 더욱이 눈에 보이는 현물이 아니고선 성에 차지 않을 트럼프인데…. 하지만 트럼프가 아니고선 누가 애송이 불량국가 수괴와 얼굴을 맞댔겠는가. 김정은 하기에 따라선 당장 워싱턴 방문 티켓도 내밀 것이다. 시간은 많지 않다. 1년 안에 만족할 성과를 보지 못하면 트럼프는 난폭한 파괴자 본색을 드러낼 것이기에.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19-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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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철희]자유조선

    2002년 3월 탈북자 25명이 중국 베이징 주재 스페인대사관에 기습적으로 진입한 사건은 북한 인권에 대한 세계적 관심을 집중시킨 계기였다. 이들이 대사관 진입에 성공해 감격의 만세를 부르는 장면이 탈북을 지원한 비정부기구(NGO)가 찍은 영상에 담겨 방송된 이후 상하이, 선양까지 중국 내 외국 공관과 국제학교가 집단 탈북의 루트로 몸살을 앓았고, 유엔 인권이사회의 첫 대북 결의안 통과와 미국 의회의 북한인권법 제정을 촉발했다. ▷그로부터 17년, 이번엔 스페인 주재 북한대사관에서 벌어진 집단 침입 사건이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달 22일 마드리드 북한대사관에 모형 총과 벌목용 칼, 납 몽둥이를 들고 난입해 컴퓨터와 USB메모리 등을 탈취한 괴한 10명은 한국과 미국, 멕시코 국적자로 파악됐다고 스페인 정부가 26일 밝혔다. 이들은 포르투갈을 거쳐 미국으로 출국했고 미 연방수사국(FBI)에 정보를 넘기기도 했다. 그 배후를 자처한 ‘자유조선’은 “평양 정권의 전 세계 대사관들은 온갖 불법을 자행하는 전체주의 체제의 광고 수단일 뿐”이라며 반북(反北) 활동을 정당화했다. ▷자유조선은 재작년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이 암살된 뒤 그 아들 김한솔을 보호하고 있다고 밝힌 조직이다. 당초 ‘천리마민방위’로 활동하다 올해 3·1절을 계기로 이름을 바꿔 ‘북조선 인민을 대표하는 임시정부’를 선언했다. 말레이시아의 북한대사관 담장에 ‘김정은 타도’ ‘우리는 일어난다’는 낙서를 하고, 김일성 김정일 초상화를 바닥에 내던지는 퍼포먼스도 했다. 암호화폐 거래를 통해 ‘해방 이후 자유조선 방문을 위한 비자’를 팔기도 한다. ▷그동안 자유조선은 구성원 소재지 등 모든 게 미스터리였지만 이번 대사관 침입으로 실체가 드러날 수도 있다. 그 주동자는 미국에서 ‘북한자유(LiNK)’라는 NGO를 설립했던 대북 활동가라고 한다. 과거 탈북민 사회에선 망명정부를 만들고 그 구심점으로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를 모시자는 얘기도 나왔지만 한때의 아이디어에 그쳤다. 김씨 왕조의 4대 종손 김한솔의 보호자임을 내세워 전투적 행위까지 나선 반북 활동이 어디까지 진화할지 궁금하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19-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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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철희]북-미 ‘외교의 사망’

    “점진적 비핵화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완전한 해법(total solution)이 필요하다. 모든 것이 합의될 때까진 아무것도 합의된 게 아니다. 북한은 핵·미사일은 물론이고 생화학무기를 포함한 모든 대량살상무기(WMD) 제거를 약속해야 한다.” 사흘 전 스티븐 비건 미국 대북정책특별대표의 워싱턴 좌담회 발언에 대해 미 언론과 전문가들은 대북정책의 ‘극명한 코스 변경’이라고 평가했다. 초강경파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의 발언권이 커지면서 1월 말 스탠퍼드대 강연에서 ‘동시적 병행 접근’을 제시했던 협상파 비건마저 그간의 유연한 자세에서 벗어나 강경 노선으로 돌변했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비건에 그치지 않았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도 가세했다. 그는 김정은에게서 적어도 6차례 비핵화 약속을 직접 들었다며 “말이야 쉽다. 행동만이 가치가 있다”고 압박했다. 비건 말대로 ‘미국 정부의 완전한 입장 통일’을 과시하려는 모양새다. 이런 강경 기조를 두고 일부 매체는 “이제 협상은 끝장났다(doomed)”고 했다. 보수 성향의 전문가들도 “최대지향주의(maximalism)는 곧 외교의 사망이다” “김정은에게 던진 완전한 항복(total surrender) 요구다”라고 했다. 이들 말대로 협상이 종말을 고했다고 진단하기는 이르지만 북-미 간 대화의 교착상태는 당분간 지속될 수밖에 없어 보인다. 사실 비건의 두 차례 공개 발언을 꼼꼼히 살펴보면 하노이 회담 전후로 말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강조점이 달랐을 뿐이다. 그가 제시한 ‘동시적 병행 접근’이 북한이 고집하는 ‘단계적 동시 행동’과 같은 말은 아니었다. 그는 제재 완화 가능성을 내비치면서도 “실패도 선택일 수 있다”고 했었다. 하지만 유연한 접근법이 자취를 감춘 것은 분명했다. 워싱턴 좌담회에서 비건은 표현의 자유마저 잃은 듯했다. 그건 마치 내키지 않는 반성문을 읽는 듯한 모습이었다. 한 좌담회 참석자는 “북한식 자아비판을 보는 느낌이었다”고 전했다. 이렇게 미국의 협상파는 하노이 결렬의 첫 희생양이 됐고, 그들의 입지는 좁아졌다. 북한의 대미 협상라인이 혹독한 총화 과정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더 큰 문제는 그만큼 ‘외교의 공간’이 협소해졌고 갈수록 소멸돼 가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강경론 대두는 자폐(自閉) 모드로 들어간 북한의 태도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북한은 허공의 인공위성을 향해 도통 알 수 없는 무언의 메시지만 보내고 있다. 비건조차 북한의 동창리 미사일 발사장 복구 동향에 대해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북한의 수상쩍은 움직임은 미국의 경계심을 높였고 강경파의 목소리는 더 커지고 있다. 돌이켜보면 지난해 3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을 전격 수용하면서 시작된 북-미 대화 1년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1차 싱가포르 회담은 취소 사태까지 겪고서야 어렵게 성사됐고, 이후에도 양측이 한 차례씩 고위급 방문을 취소하는 등 곡절이 많았다. 그렇게 하노이까지 이어졌지만 두 정상이 낯 붉히지 않고 헤어진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지금 북-미 간에는 대화 채널이 단절된 채 서로 엇갈리는 신호만 발신하고 있다. 아직 양측의 말은 조심스럽지만 이대로 가다간 어느 쪽이 먼저랄 것도 없이 외교의 사망을 알리는 부고장을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 특히 북한엔 숙고의 시간이 좀 더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외교의 문을 닫아버릴 요량이 아니라면 오해와 불신을 낳을 행동은 금물이다. 어떤 관계에서든 사이가 가까워지는 건 시간이 걸리지만 멀어지고 갈라서는 건 순식간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19-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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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철희]트럼프의 킬러 본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하노이 담판 결렬 후에도 기자회견에서 김정은을 두고 ‘그만큼 독특한 사람도 흔치 않을 거다(quite a guy, quite a character)’라고 했다. 찬사까진 아니지만 꽤나 긍정적인 칭찬에 가깝다. 워싱턴에 돌아가선 ‘매우 영리하고 날카로우며 종잡기 어렵다(mercurial)’고도 했다. 그러면서 “어떤 사람들은 ‘그를 좋아해선 안 된다’고 하지만 나는 ‘왜 그를 좋아하지 말아야 하지?’라고 반문한다”고 덧붙였다. 이런 트럼프를 두고 전 세계 독재자들을 치켜세우는 버릇이 또 도졌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오토 웜비어 사망에 대해 김정은을 변호하는 듯한 발언으로 거센 비난도 자초했다. 하지만 트럼프의 독재자 칭찬이 그들을 동경하거나 두둔하려는 것일까. 그건 누구도 못 말리는 승부 근성에서 나온, 대단한 인물들을 상대하는 ‘나는 한 수 위’라는 셀프 칭찬이 아닐까 싶다. 트럼프는 하노이 담판에서도 승부사 본능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작은 거래를 큰 거래로 키우면서 판을 흔들었다. 그는 김정은을 향해 “더 통 크게 가자(go bigger). 다걸기(all-in) 하라”고 재촉했다. 당황한 김정은이 끝내 거부하자 다음에 보자며 악수하고 철수해 버렸다. 그래 놓고 다음 게임을 기약하자며 립서비스를 내놓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는 어려서부터 ‘킬러’로 길러졌다. 아버지 프레드 트럼프는 뉴욕의 부동산업자로 자수성가한 인물. 아들에게 루저(실패자)가 되지 않으려면 킬러가 돼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13세 아들을 혹독한 군사학교에 보냈다. 프레드는 브루클린의 험악한 동네에서 아파트 임대료를 받으러 다닐 때 아들을 데리고 다녔다. 프레드는 아들에게 문 한쪽 옆으로 비켜서 있으라고 했다. 그 이유를 묻자 답하길 “저 작자들은 때로 문을 향해 바로 총을 쏘거든”. 그렇게 자란 트럼프는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한다는 뉴욕 부동산업계의 대표주자가 됐다. 킬러는 아무도 신뢰하지 않는다. 트럼프는 아예 자신은 누구도 신뢰하지 않는다고 자랑해왔다. “최고의 능력자들을 고용하고, 그들을 신뢰하지 말라.” 그는 대통령이 돼서도 사법부든 정보기관이든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노골적인 불신을 표출했다. 김정은과의 담판을 앞두고도 트럼프는 별도의 두 개 라인을 가동시켰다. 일단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스티븐 비건 대북정책특별대표에게 전적인 협상 권한을 주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협상 테이블에 앉아서는 그동안 배제시켰던 매파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의 거친 요구안을 내밀었다. 오직 자신에 대한 충성심만 강요하는 트럼프에게 참모들 간 협력은 애초부터 아무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김정은은 플랜B를 준비하지 못했다. 폼페이오-비건 라인과 만든 합의문 초안에 트럼프까지 구슬리면 샴페인을 터뜨릴 만한 성과를 거둘 것으로 기대했으리라. 하지만 승부는 피했어야 한다. 그토록 원하던 톱다운식 담판에서 트럼프의 일격에 휘청거리는 처지가 됐다. 어쩌면 결렬이라 하기도 애매한 결말에 아직 어리둥절해 있는지도 모른다. 최선희가 전한 대로 ‘앞으로 조미 거래에 의욕을 잃지 않으시나 하는…’ 딱 그런 심정일 것이다. 옹립된 젊은 독재자는 산전수전 다 겪은 트럼프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다. 최강의 권력을 쟁취하고도 낮은 지지도와 숱한 도전 속에 분투하는 트럼프와 인민 100% 지지라는 미명 아래 권력층에 얹혀 있는 김정은이다. 국가 파워의 격차는 제쳐놓더라도 승패는 진작 정해져 있었다. 트럼프는 하노이에서 김정은이 착각했던 현실을 모질지만 은근하게 일깨워줬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19-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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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철희]美 ‘쿠데타’ 논란

    미국 드라마 ‘지정생존자’의 주요 소재는 대통령의 유고(有故)에 대비해 승계 원칙을 정한 수정헌법 25조다. 대통령 국정연설 도중 발생한 폭탄테러로 백악관과 내각, 의회 참석자 전원이 사망하면서 승계순위 말석의 주택도시개발장관이 졸지에 대통령직을 맡아 위기를 헤쳐 나가는 스토리다. 그런 그마저 아내 사망 이후 받은 심리상담 기록이 유출되면서 직무수행 능력에 의문이 제기된다. 급기야 장관들이 따로 모여 그의 직무 박탈을 논의한다. ▷미 수정헌법 25조 중 제4항은 내각 과반수가 대통령의 직무수행이 부적합하다고 결론을 내리면 의회에 통보하고 대통령이 거부하면 상·하원 3분의 2 찬성으로 직무를 박탈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조항이 실제 발동된 적도, 심각하게 거론된 적도 없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겐 예외인 듯하다. 의회의 무성한 탄핵 논의와는 별도로 지난해 9월 뉴욕타임스엔 “일군의 관료들이 수정헌법 25조를 적용하려는 속삭임이 진작부터 있었다”는 익명의 기고문이 ‘나는 트럼프 행정부 내 저항세력의 일원이다’란 제목으로 실렸다. ▷한낱 음모론으로 여겨졌던 트럼프 직무 박탈 논의가 실제 행정부 안에서 벌어졌다는 증언이 최근 나왔다. 트럼프가 2017년 러시아 스캔들을 수사하던 제임스 코미 연방수사국(FBI) 국장을 경질한 직후 로드 로즌스타인 당시 법무부 부장관이 트럼프의 직무 박탈을 위해 장관들을 설득하려 했다고 FBI 국장대행이 언론 인터뷰에서 공개했다. 직무수행 부적합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도청기로 대통령과의 대화를 녹음하는 방안도 거론됐다고 한다. ▷폭스뉴스는 이를 두고 “불법적 쿠데타 시도”라고 규정했고, 트럼프도 즉각 맞장구쳤다. 그러자 그런 논의를 과연 무력으로 정권을 전복하는 쿠데타로 볼 수 있느냐는 논란까지 낳고 있다. 이미 악성 나르시시즘, 공감능력 결핍, 경조증(輕躁症) 같은 수많은 정신의학적 의심을 받아온 트럼프다. 재작년 의회에선 트럼프에게 핵무기 버튼을 맡겨도 될지 논의하는 청문회도 열렸다. 하지만 트럼프는 끄떡없다. 논란으로 논란을 덮는 대통령을 누가 이기랴.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19-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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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철희]하노이 담판, 실패도 선택이다

    흔히 실패하는 정상회담은 없다고 하지만, 그건 잘 준비된 회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일 따름이다. 정상 간 협상이 실패하면 리스크가 매우 큰 만큼 사전 조율 없는 회담은 피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1986년 10월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두 번째 회담은 대표적인 실패 사례다.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만난 두 정상의 회담은 꼬박 이틀간 이어졌지만 어떤 합의도 이루지 못한 채 끝났다. 향후 10년간 모든 핵무기를 완전히 제거한다는 획기적 합의 직전까지 갔지만 미국의 전략방위구상(SDI)을 실험실 연구로 제한하라는 소련의 요구가 끝내 발목을 잡았다. “그 한마디 때문에 모든 걸 수포로 돌리렵니까.”(레이건) “나도 같은 말을 할 수밖에요. 나로선 할 수 있는 건 다 했습니다.”(고르바초프) 두 정상은 다시 만나겠다는 약속도 잡지 못했다.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그건 나도 모릅니다.” 황망히 회담장을 빠져나오는 두 사람의 풀 죽은 얼굴이 카메라에 그대로 잡혔다. 특히 레이건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한 측근은 이렇게 전했다. “그는 극도로 화가 나고 하도 기가 막혀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고르바초프만 남아 기자회견을 갖고 “실패가 아니다”라고 강변했지만 소용없었다. 언론은 일제히 ‘회담 실패’를 타전했다. 사실 실패는 이미 1년 전 첫 회담에서 예고된 일이었다. 1985년 11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처음 만난 미소 정상은 노변정담 같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도 연출했다. 하지만 둘의 관심사는 완전히 달랐고, SDI 문제는 전혀 견해차를 좁힐 수 없었다. 사흘간의 ‘교제’ 끝에 나온 공동성명에는 평화 정착과 군축을 위해 노력한다는 원론적 합의만 들어 있었다. 하지만 일단 출발은 좋다는 평가를 받았다. 두 정상 간엔 친필 서신이 빈번히 오가고 양국 국민을 향한 신년인사가 TV로 중계됐지만 그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실망감에 지쳐갈 즈음 고르바초프가 제안한 것이 레이캬비크 회동이었다. 의전이나 격식 없이 단둘이 만나 돌파구를 찾자는 데 레이건도 동의했다. 결과는 참담했고 한동안 상호 비난전이 이어졌다. 그러나 역사는 레이캬비크 회담을 냉전 종식의 출발점으로 기록한다. 속내를 탈탈 털어내며 막판까지 몰고 간 논쟁 덕분에 두 정상은 어디까지가 가능한 것인지 확인했다. 고르바초프는 핵 군축과 SDI 연계전략을 포기했고, 레이건도 대소 강경정책을 누그러뜨렸다. 그 결과 1년 뒤인 1987년 12월 두 정상은 미 워싱턴에서 중거리핵전력(INF) 폐기 조약에 서명했다. 북-미 하노이 정상회담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양측은 이제야 본격 실무협상을 벌인다고 한다. 지난주 평양에 다녀온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는 “갈 길이 멀다”면서도 내주엔 합의문안 조율에 들어간다고 했다. 가능한 수준에서 초안을 만들고 정상 간 담판으로 넘기겠다는 얘기다. 지난해 싱가포르 1차 회담 때와 다르지 않다. 시간은 더 촉박하다. 그래서 적당한 타협, 막판 졸속합의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1차 회담 전 “성과가 없으면 협상장을 떠나겠다”고 했지만 지금은 “잘될 것”이라며 기대감만 부추기고 있다. 물론 회담 결렬의 리스크는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두고두고 후환을 남길 불완전한 합의보다는 끝장까지 가보는 ‘눈부신 실패’가 나을 수 있다. 비건 대표도 방북 전 강연에선 “실패는 선택사항이 아니라는 진부한 말이 있지만, 실패는 결과가 아닌 선택의 문제일 수 있다”고 했다. 한낱 레토릭일 수만은 없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19-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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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철희]통일부 장관이 그리 만만한 자리인가

    설 연휴 이후 내각 개편이 예고됐다. 이번 개각은 정치인 장관들이 내년 총선 출마를 위해 당으로 복귀하고 출마를 준비할 장관들도 물러나는 만큼 꽤 큰 규모로 예상되면서 여의도에선 벌써부터 교체될 장관 자리와 후보들의 이름이 흘러나오고 있다. 그런데 유독 눈에 띄는 게 통일부 장관이다. 조명균 장관이 총선에 출마할 것도 아니고 대통령의 신뢰도 여전하다는데, 그의 교체를 전제로 하마평이 난무하고 있다. 총선 변수를 빼고 교체가 거론되는 다른 부처와 달리 통일부는 지난해 정부업무평가에서 ‘우수’ 등급을 받아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물론 장관이 잘해서 그런 것이라고 보긴 어렵다지만, 그럼에도 특별한 사유 없이 ‘우수’ 기관의 수장 교체를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는 의아스럽다. 청와대에선 북-미 정상회담 이후 한반도 정세가 새로운 국면으로 바뀌면 통일부의 역할도 달라질 것인 만큼 새로운 리더십이 긴요하다는 얘기가 나온다. 지금까진 남북 관계의 물꼬를 트는 관리형 대북 전문가가 필요했지만, 이젠 주도적으로 이끌어갈 적극적 활동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청와대가 조 장관의 고분고분한 샌님 스타일을 답답하게 여겨왔고, 조 장관 스스로도 버겁다며 몇 차례 사의를 표명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래서인지 자천타천 후보로 거론되는 이들이 죄다 정치인이다. 송영길 우상호 이인영 홍익표 등 현역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 이름도 여전히 나온다. 이들 중엔 총선 포기는 물론 의원 배지까지 던지겠다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장관 자리 마다할 사람 없을 테고 헛물켤망정 이름 석 자 올려보자는 심산도 없지 않겠지만, 왜 하필 통일부 장관일까. 이들은 모두 86세대 운동권 출신이다. 상당수는 이른바 ‘NL 주사파’로 통하던 전대협의 핵심 세력이었다. 이들에게 남북 관계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는 것은 억누르기 힘든 열정, 일종의 로망이라고 한다. 하지만 운동권 전력이 마치 북한 전문가 경력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아가 통일부 장관직을 마치 그들이 예약해 놓은 자리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다. 그들에게 낡은 이념적 잣대를 들이대자는 게 아니다. 반공(反共)이 최상의 가치이던 시절, 그들이 던진 도발적 메시지는 이념의 굴레에 갇혀 있던 우리 사회에 신선한 충격이었다. 한때 북한과의 내통 또는 북한 추종을 의심받은 그들이지만 지금도 그런 의식의 잔재가 남아 있으리라고 보지 않는다. 실제 장관을 맡으면 관료나 명망가보다 잘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남북 관계의 한 축은 남남(南南) 관계다. 남북이 더욱 가까워지면서 남남은 더욱 벌어지고 있는 게 지금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대북 성과 못지않게 우리 내부적으로 좌우, 여야를 아우르는 균형 감각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과연 지금이 86세대의 로망을 실현하겠다고 나설 때인가. 그들의 열망엔 통일부 장관직은 누구든, 아니 아무라도 할 수 있는 자리라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 아닌가 싶다. 하긴 노무현 정부 시절 통일부 장관을 맡아 반짝 퍼포먼스를 보여준 정치인은 대선주자까지 올랐으니 그들이라고 욕심을 못 낼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이후 전개된 남북 관계는 어땠는지, 나아가 그 정치인의 현재는 어떤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사가 만사다. 이 말을 자주 했다던 전직 대통령의 인사도 결코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결국 판단은 대통령의 몫이다. 통일부 장관 인사는 대통령이 남북 관계와 남남 관계에 대해 어떤 구상을 갖고 있는지 보여줄 것이다. 86세대 정치인들도 혹시나 목을 빼고 기다리기보다는 그간 세상에 보여준 자신들의 모습이 어땠는지부터 자문해야 하지 않을까.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19-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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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철희]‘C학점 트럼프’가 걱정이다

    “그는 수업에 전혀 안 들어간다. 강의계획서도, 노트도 있을 리 없다. 시험 전날 밤늦게까지 사교클럽에서 진탕 놀다 들어와선 커피를 잔뜩 마시며 남의 노트를 가능한 만큼 달달 외운다. 그러곤 아침에 나가 C학점을 받아온다. 그거면 충분하다. 그는 억만장자가 될 테니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오른팔로 불렸던 스티브 배넌 전 백악관 수석전략가가 트럼프와의 면담을 앞둔 사람들에게 “트럼프를 가르치려 하지 마라. 그는 교수들, 먹물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면서 했다는 얘기다.(밥 우드워드 ‘공포’) 지난해 6·12 북-미 싱가포르 정상회담 때도 트럼프는 그렇게 막판 벼락치기 공부를 했을 것이다. 트럼프는 “이런 일은 준비가 중요한데, 난 평생을 준비해 왔다”고 너스레를 떨었고, 백악관 측은 트럼프가 매주 10시간씩 준비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준비가 얼마나 부실했는지는 알맹이 없는 합의문과 장황한 기자회견에서 곧바로 드러났다. 이제 다시 6개월 만에 2차 북-미 정상회담이 가시권에 들어오면서 트럼프 참모들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보고서가 한 페이지만 넘어가도 질색을 한다는 대통령에게 ‘열공’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욱이 사전준비보다 임기응변이 훨씬 낫다고 믿는 ‘협상의 달인’ 트럼프다. 트럼프의 롤 모델이라는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도 디테일에 무관심하고 글보다 말을 좋아하기로 유명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옛 소련 공산당 서기장도 그런 레이건의 평판을 염두에 두고 미소(美蘇) 정상회담을 서둘렀다. 하지만 레이건은 참모들의 조언에 따라 방대한 자료를 꼼꼼히 정독했고 러시아사 전문가의 특별과외를 받기도 했다. 트럼프 참모들은 그간 철저한 사전 실무협상을 통해 대통령의 ‘본능 외교’ 리스크를 줄이려 애를 썼다. 하지만 북한은 우선 정상회담 일정부터 잡자며 사실상 실무협의 없이 정상 간 담판으로 직행할 것을 고집해 왔다. 김정은이 노리는 것도 과거 고르바초프의 속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김정은은 지난 6개월간 철저히 준비했다. 문재인 대통령을 통해 자신의 카드를 내비치며 미국의 반응을 떠봤고, 시진핑 중국 주석을 두 차례나 찾아 코치도 받았다. 지난해 북-중 간 ‘전략·전술적 협동’을 강화하기로 했던 약속대로 연초에 다시 베이징을 방문해 ‘비핵화 협상 과정을 공동으로 연구·조종하는 문제’를 심도 있게 논의했다. 북-중 간 ‘공동 연구·조종’이란 결국 북-미 협상의 로드맵, 즉 북한의 비핵화 조치와 미국의 상응조치를 놓고 주고 받으며 구체화할 이행계획을 중국과 먼저 맞춰 보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여기엔 중국 측 전략기조가 반영될 수밖에 없고, 주한미군 철수 같은 민감한 한미동맹 이슈에 중국의 입김이 작용할 게 분명하다. 1차 북-미 회담 결과를 놓고 언론과 전문가들은 실속 없다는 호된 평가를 했지만 일단 미국인이 느끼는 위협이 줄었기에 미국 내 여론은 호의적이었다. 그래서 트럼프는 이번에도 C학점이면 충분하다고 여길지 모른다. 어쩌면 매사 돈으로 따지는 계산 본능을 더욱 노골화할 수도 있다. 이미 “주한미군을 빼내고 싶다” “워게임은 엄청 비싸다”고 했던 트럼프다. 그렇게 되면 발등의 불은 우리에게 떨어진다. 문 대통령도 북-미 회담을 통한 교착상태 탈출을 기대하며 지켜만 봐선 안 된다. 물론 지금 트럼프에게 전화라도 걸라치면 당장 “방위비 분담금 협상은 어떡할 거요”라며 채근부터 할지 모른다. 그렇다고 마냥 손놓고 있다간 수습 불가능한 낭패를 볼 수 있다. 모든 뒷감당도 고스란히 우리 몫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19-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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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철희]김정은의 덫 ‘나의 정치’

    올해 김정은 신년사의 핵심은 ‘나’를 주어로 한 세 문장에 담겨 있다. 약간 줄이면 이렇다. “나는 미국과도 쌍방의 노력에 의해 좋은 결과가 꼭 만들어질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나는 지난해 6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만나 문제 해결의 빠른 방도에 대해 인식을 같이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앞으로도 언제든 또다시 마주 앉아 반드시 국제사회가 환영하는 결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에게서 받았다는 ‘멋진 친서’는 더 절절할지 모르지만 그 내용이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김정은은 “완전한 비핵화로 가려는 것은 우리 당과 공화국 정부의 불변한 입장이며 나의 확고한 의지”라면서 자신의 ‘진심’을 거듭 강조하기도 했다. 이어진 문장이 걸리긴 한다. “미국이 우리 인내심을 오판하면서 일방적으로 강요하려 들고 제재와 압박으로 나간다면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이 부득불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 난데없이 ‘새로운 길’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명백한 경고겠지만, 주어는 ‘우리’로 바뀌었고 표현도 매우 조심스럽다. 북한 매체는 이 대목을 ‘We may be compelled to find a new way’라고 번역했다. ‘다른 길을 찾도록 강요당하지 않게 해 달라’는 완곡한 어투다. 지난해 5월 트럼프를 화나게 해 정상회담 취소 소동까지 낳은 ‘조미 수뇌회담에 응하겠는가를 재고려할 수밖에 없다(We cannot but reconsider)’는 경고와는 뉘앙스가 다르다. 김정은이 2013년부터 매년 내놓은 육성 신년사의 주어는 늘 ‘우리’였다. ‘나’는 “새해 인사를 드립니다” “∼하길 축복합니다”처럼 인민이나 군대에 보내는 격려에만 제한적으로 사용했다. 변화가 나타난 것은 재작년이다. 김정은은 말미에 “나를 믿어주고 지지해주는 인민을 어떻게 더 높이 떠받들 수 있겠는가 하는 근심으로 마음이 무거워진다. 안타까움과 자책 속에 한 해를 보냈는데…”라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나는 인민의 참된 충복, 충실한 심부름꾼이 될 것을 엄숙히 맹약하는 바입니다.” 비록 악어의 눈물일지언정 ‘수령 무오류’의 독재체제에선 파격이었다. 작년에는 평창 겨울올림픽의 성공을 거론하면서 남북관계에 ‘나’를 내세웠다. “나는 올해에 북과 남에서 모든 일이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리고 올해, 김정은은 대미관계에 ‘나’를 앞세웠다. 김정은의 언어는 교묘하다. 이번 트럼프를 향한 ‘나’의 메시지엔 치명적 유혹이 숨겨져 있다. 북-미 협상을 어렵게 하는 참모진에 휘둘리지 말고 우리끼리 담판 짓자며 트럼프를 충동질한다. 옛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도 그랬다. 1988년 5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소 정상회담 막바지에 고르바초프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게 ‘평화공존(peaceful coexistence)’에 관한 문구를 공동성명에 끼워 넣자며 집요하게 몰아붙였다. 레이건이 “참모들과 협의해 보겠다”고 하는데도, 고르바초프는 “간단한 문구 하나 혼자 결정하지 못하느냐. 참모들은 치우고 우리끼리 얘기하자”고 다그쳤다. 옥신각신 험악한 분위기에서 콜린 파월 국가안보보좌관이 테이블 아래로 레이건에게 쪽지를 건넸고, 레이건은 회의장 한쪽에 참모들을 모아 협의한 뒤 “내 대답은 노(no)다”라고 분명히 했다. 그제야 고르바초프도 단념하고 레이건을 기자회견장으로 안내했다. 파월이 건넨 메모는 이랬다. “그건 앞으론 그들을 비판하지 않겠다고 동의하는 겁니다.” 트럼프라면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까. 참모들의 완강한 반대도 귓등으로 흘린다는 트럼프라서 드는 의문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19-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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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철희]북한, 자존심과 자신감 사이

    일본인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는 ‘북한의 후계자 왜 김정은인가’라는 책에서 김정은이 지금 자리에 오른 것은 타고난 승부욕 때문이라며 이런 일화를 전했다. 10대의 김정은은 농구경기가 끝나면 반드시 자기 팀에서 총화(반성회)를 했다. 잘한 선수에겐 “패스 아주 좋았어”라고 손뼉을 쳐주고, 실수한 선수에겐 잘못을 무섭게 꾸짖었다. 반면 형 김정철은 “수고했다. 해산!”이라며 바로 사라졌다고 한다. 북한 사회를 집단우울증에 빠뜨린다는 연말 사업총화가 한창인 지금, 김정은도 한 해를 결산하며 신년사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휘하 간부들은 ‘지도자 동지의 주동적 조치가 세계사에 특기할 사변적인 한 해를 만들었다’고 입을 모을 테지만, 김정은의 속내는 편치 않을 것이다. 연초부터 기세 좋게 달려왔지만 손에 쥔 것은 없고 전망도 밝지 않은 게 요즘 형국이다. 그래서 여기저기 닦달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탓인지 북한의 대외관계도 사실상 문을 닫아 건 분위기다. 미국과는 진작부터 연락을 끊었다. 스티븐 비건 미국 대북정책특별대표는 임명 4개월이 되도록 카운터파트인 최선희 외무성 부상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몇 차례 기회가 있었지만 번번이 바람맞았다. 만남을 피하기 위해 최선희가 예정에 없던 출장까지 만들었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러니 비건도 이젠 북한에 대한 답답함을 넘어 짜증까지 표출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어제 서울에 도착한 비건은 여전히 최선희와의 판문점 회동 가능성에 일말의 기대를 걸고 있지 않을까 싶다. 북한이 비건을 따돌리는 것은 무엇보다 김정은이 주장해 온 ‘독특한 방식’, 즉 정상 간 담판을 통한 톱다운 방식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두 번째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새로운 단계를 열어야지, 실무급이 만나 봐야 무슨 소용이냐는 주장이다. 6·12정상회담 때처럼 당장 회담 날짜와 장소부터 확정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리라. 껄끄러운 상대를 길들이려는 의도도 다분해 보인다. 북한은 늘 기피 인물에 대해선 극도의 거부감을 드러내거나 의도적으로 회피했다. 성과도 없지 않았다. 북한이 각각 ‘아둔한 얼뜨기’ ‘사이비 우국지사’라고 비난한 마이크 펜스 부통령과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은 북-미 협상의 뒷전으로 밀려났다. 이들은 최근엔 “북핵 리스트 신고가 정상회담의 전제조건은 아니다” “성과가 있다면 제재 해제를 검토할 수 있다”며 북한을 다독이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도 이런 기싸움엔 이골이 났다. 북한을 어떻게 다룰지 충분히 배웠다. 대북 초강경파가 유연한 태도를 보인 반면 협상을 책임진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요즘 ‘선(先)비핵화’ 원칙만 강조하며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급기야 북한은 “미 국무성이 조미관계를 불과 불이 오가던 지난해 원점상태로 되돌려 보려 기를 쓴다”며 폼페이오를 직접 겨냥했다. 당혹감의 표출일 것이다. 자존심 빼면 남는 게 없다는 북한이다. 슈퍼파워 미국을 상대하면서도 대등한 대접을 받지 못할 바엔 아예 어깃장을 놓거나 지금처럼 연락두절 자가격리에 들어가 버린다. 우리가 그간 남북 협상에서 익히 보아온 모습이다. 박항서 감독은 베트남 축구선수들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자존심은 강하지만 자신감은 떨어졌다.” 이런 자존심 과잉, 자신감 결여는 수령 독재체제의 북한에 더욱 잘 들어맞는 진단일 것이다. 문제는 거기에서 비롯된 불량한 태도다. 그것이 대외관계에서도 이어진다면 국제사회에서 북한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18-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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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철희]김일성 둘째부인 김성애 사망

    사흘 뒤면 사망 7주기를 맞는 북한 김정일은 생전에 스스로를 ‘난쟁이 똥자루’라고 비하하는 농담도 쉽게 했다지만, 그건 권력 중심에 선 승자로서의 여유였을 것이다. 김정일은 평생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렸고, 그 근저에는 이복동생 김평일(현 체코 대사)에 대한 질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김평일은 김정일보다 열세 살이나 어렸지만 고교 시절에 이미 180cm가량의 당당한 체격으로 아버지 김일성이 자신을 꼭 닮았다고 자랑한 ‘장군감’이었다. ▷김정일과 김평일은 각각 생모 김정숙과 김성애를 닮았다. 김일성이 빨치산 활동 시절 결혼한 김정숙은 몸집이 작고 미인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김정일은 주변에서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닮았다는 얘기를 들으며 자랐다. 반면 김일성의 비서 출신으로 둘째 부인이 된 김성애는 늘씬하게 키가 컸고 빼어난 미모는 아니지만 귀엽고 애교가 있다는 평을 들었다. 김정일로선 그런 계모가 자신에게 아무리 살갑게 대해도 태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김성애는 1970년대 초 김정일이 후계자 자리를 굳히기 위해 넘어서야 할 최대 라이벌이었다. 당시 김성애는 여성동맹위원장이란 직함 이상의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가정집에 김일성과 함께 김성애의 초상화가 걸리고 ‘김성애 여사께서는’이란 존칭으로 활동 소식이 크게 보도되기도 했다. 하지만 김정일을 견제하려 권력 핵심에 친척들을 앉히는 등 전횡을 부린 데다 빨치산 세대를 적으로 돌리는 실수까지 범하면서 김일성의 신뢰를 잃고 추락하고 만다. ▷김성애는 1994년 북핵 위기 때 평양을 방문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부부를 대접하는 대동강 뱃놀이에 김일성과 함께 나타난 이후 공개석상에서 사라졌다. 당시 카터는 미군 유해 송환을 요구했는데, 김성애가 ‘그 요구를 들어주는 게 어떠냐’고 권했다고 한다. 순전히 의전상 동석한 김성애가 실권자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일종의 연기를 했다는 게 정설이다. 어떻든 북한의 퍼스트레이디였던 김성애가 사망했다고 한다.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권력투쟁의 패자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고 부고 한 장 없이 지워질 뿐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18-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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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철희]대북정보 노린 이메일 피싱

    틈만 나면 친구들과 휴대전화로 수다 떨기를 좋아한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뉴욕타임스는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사적인 통화를 중국과 러시아가 모두 엿듣고 있다고 보도했다. 특히 중국은 무역전쟁과 관련해 트럼프가 누구 말에 귀 기울이는지 파악하려고 도청을 한다는 것이다. 이에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트럼프까지 나서 “엉터리 뉴스”라고 일축했지만 뉴욕타임스는 “우리 보도를 확신한다”며 굽히지 않았다. ▷트럼프는 휴대전화 3개를 쓴다. 기능을 트위터와 통화로 각각 제한한 두 개 외에 일반 아이폰 사용을 고집한다고 한다. 전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아이폰 한 개만 사용했다. 그 아이폰은 통화나 문자, 카메라, 녹음 기능도 없이 극히 제한된 사람의 이메일만 받을 수 있었다. 그는 퇴임 전 한 토크쇼에서 이렇게 털어놨다. “그야말로 최신 전화기인데, 아무것도 안 돼요. 세 살배기의 장난감 전화? 그런 거죠.” 전 세계 정보기관과 해커들의 타깃인 미국 대통령에겐 최첨단 스마트폰도 석기시대 돌도끼 수준일 뿐이다.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자유한국당 의원의 이메일 계정을 도용한 가짜 이메일이 10월 초 국방 관련 기관에 무더기로 발송된 사실이 드러났다. 올해 초부터 청와대 국정상황실장과 국가안보실 비서관, 정부 산하기관 소장을 사칭한 가짜 이메일이 나돌았지만 수법은 한층 교묘해졌다. 이번엔 국회 국방위원장이 보낸 이메일에 답신을 보내는 형태로 위장돼 첨부파일에 해킹코드가 심어진 것이었다고 한다. 누구라도 무심코 악성파일을 클릭했다면 자기 컴퓨터의 정보를 모두 털리고 말았을 것이다. ▷이런 가짜 이메일들은 민감한 대북정책 정보를 빼내려는 피싱(phishing)이면서 한미관계 이간까지 노린 고도의 심리전 형태를 띠고 있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북한이지만 그간 알려진 북한 해커부대의 막강한 사이버전쟁 능력에 비춰 보면 일견 유치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보이스피싱도 전화 수백, 수천 통에 걸려드는 한 건을 노린다. 정부 핵심기관 관계자들은 전화 한 통, 이메일 하나에도 조심 또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18-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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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철희]김정은, 불편한 손님

    1987년 9월 에리히 호네커 동독 국가평의회 의장의 서독 방문은 헬무트 콜 당시 서독 총리에겐 결코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회고록 ‘나는 조국의 통일을 원했다’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양독 간 국경의 문을 더 활짝 열기 위해 나는 호네커의 방문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호네커 방문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게 그때까지 내 입장이었기에 그 결정은 정말 어려웠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그의 방문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됐다.” 콜에게 동독은 다른 국가가 아닌 통일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런 콜이지만 일단 방문을 수용한 만큼 ‘저쪽에서 오는 손님’의 요구에 따라 국가원수에 준하는 의전으로 예우했다. 하지만 의전은 말 그대로 형식적 의례일 뿐이었다. 공항 분위기부터 싸늘했다. 호네커를 영접 나온 사람은 총리비서실장, 그리고 녹색 베레모 쓴 군인들이 전부였다. 환영 현수막도, 환호성도 없었다. 공항에서 본 시내로 가는 고속도로 표지판에는 경찰이 서둘러 지운 나치 문양과 ‘호네커 살인자’라는 얼룩이 남아 있었다. 총리실 바깥에선 기민당 우파들이 ‘독일 통일조국’이란 현수막을 펼쳐 들었다. 의장대 사열 땐 호네커와 콜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걷다가 뒤늦게 방향을 바로잡는 일도 벌어졌다. 웃음기 없는 얼굴로 악수도 하는 둥 마는 둥이었다. 외신은 ‘의전행사 내내 콜과 호네커는 각기 다른 사람이 움직이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뻣뻣했다’고 전했다. 만찬에서도 두 사람은 날을 세웠다. 콜은 분단의 고통을 강조하며 장벽의 제거를 주장했고, 호네커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불과 물처럼 결코 화해할 수 없다”고 응수했다. 방문 마지막 날, 호네커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 마을을 방문해 누이동생과 옛 이웃들을 만나고 부모의 묘지에도 참배했다. 주민들은 복잡한 감정 속에 호네커를 맞았다. 경호용 바리케이드 바깥에서 몇몇 사람은 “장벽을 철거하라”고 외쳤다. 한편에선 “에리히”를 외치며 동독 국기를 흔드는 사람도 한두 명 있었다. 서독의 차가운 대접은 호네커의 자업자득이었다. 그의 서독 방문이 콜의 우파 정부 이전인 사민당 총리 시절에 이뤄졌더라도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전임 헬무트 슈미트 총리가 1981년 12월 동독의 소도시를 방문했을 때 주민들은 난데없이 예비군훈련에 동원되거나 외출이 금지됐다. 거리는 비밀경찰 요원들로 꽉 차 있었고 “우리 서기장 만세!” 소리만 요란했다. 이런 삼류 코미디가 연출된 것은 1970년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독 방문 때 주민들이 저지선을 뚫고 들어가 “빌리, 빌리!”를 외쳤던 기억이 선명했기 때문이다. 우리와는 사정도 다르고 이미 30년이 지난 동·서독 얘기가 길어진 것은 벌써 김정은 답방 대비에 들어간 정부나 일부 찬반 세력을 제외한 많은 이가 북쪽 손님을 어떻게 맞을지 마음의 준비가 돼 있는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나 모든 국민이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을 믿는다는 대통령의 발언에 놀란 이들에게 요즘은 더없이 답답하고 수상한 시절일 것이다. 평양에서 받은 격한 환대에 감격했을 대통령으로선 그에 상응하는 환대를 준비하겠지만, 국민 상당수의 ‘북쪽 수괴’에 대한 심정적 거부감도 엄연한 현실임을 직시해야 한다. 격한 반대는 진작 예고돼 있다. 김정은도 “태극기 부대가 데모 좀 해도 괜찮다”고 했다. 물론 일부 격한 환영도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는 차분히, 어쩌면 무심한 듯 지켜볼 것이다. 그게 우리의 성숙한 자유민주주의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 식으로 응대하면 된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18-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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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철희]트럼프의 ‘키즈 사랑’, 그 대가는?

    올해 3월 20일 미국 백악관 집무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들 앞에서 전투기 미사일 전함 등 각종 무기 사진들 위에 숫자가 적힌 패널을 꺼내 들었다. “보세요. 30억 달러, 5억3300만 달러, 이거 당신에겐 껌값(peanuts)이죠. 더 늘렸어야죠. 8억8000만 달러, 6억4500만 달러, 60억 달러, 그건 호위함용이고. 8억8900만 달러, 6300만 달러, 그건 포병용이죠.” 트럼프 옆에 앉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민망한 표정으로 간간이 억지웃음을 지었다. 트럼프는 사우디가 약속한 무기 구매 액수를 줄줄이 열거한 뒤 “이건 많은 일자리를 의미한다. 미국 내 일자리 4만 개…”라고 강조했다. “우리는 진짜 멋진 관계”라며 껄끄러웠던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와 다르다는 점도 빠뜨리지 않았다. 무함마드는 ‘미스터 에브리싱(Mr. Everything)’으로 불리는 33세의 막강 실권자. 일찍부터 트럼프의 사위 재러드 쿠슈너와 절친 관계를 맺고 지난해 5월 트럼프의 첫 해외 방문지로 사우디를 선택하게 만든 인물이다. 트럼프의 사우디 방문 이후 무함마드는 사촌형에게서 왕세자 자리를 빼앗고 왕자들을 대거 구금하는 ‘왕자의 난’을 통해 권력을 굳혔다. 그의 무한질주는 결국 반정부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 사건으로 이어졌다. 트럼프는 그제 “왕세자가 이 사건에 대해 알았을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미국은 사우디의 변함없는 동반자(steadfast partner)로 남을 것이다”라고 했다. 사우디에 대한 단호한 조치를 요구하는 의회의 반발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내 편이라면 일단 감싸고 보겠다는 태도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예측 불허의 트럼프라지만 한번 꽂힌 사람에겐 시종 애정을 쏟는 일관성은 새삼 놀랍기만 하다. 이런 트럼프를 보면서 누구보다 안도할 이가 김정은일 것이다. 트럼프가 사랑에 빠졌다는, 무함마드보다 한두 살 많은 또 다른 총아(寵兒)가 김정은이다. 11·6 중간선거가 끝난 뒤에도 트럼프는 여전히 김정은과 “매우 좋은 관계”라고 했다. 북한이 비밀 미사일기지를 운영하며 ‘큰 속임수(great deception)’를 쓰고 있다는 보도에도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그런 보도를 믿지 않는다”고 했다. 사우디 왕세자의 암살 배후설에 대한 대응과 다르지 않다. 트럼프의 한없는 관대함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어려울 때 도와주면 더 큰 보상을 얻을 수 있다는 협상가의 계산법일 것이다. 사우디 왕세자에게 거는 기대는 분명하다. 사우디가 미국에 투자하기로 한 4500억 달러 가운데 계약이 확정된 것은 145억 달러로 전체의 3%에 불과하다. 트럼프는 이제 ‘고마운 후원자’ 입장에서 미수금을 챙기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우디처럼 석유 부국도, 지역 강국도 아닌 북한에 트럼프는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트럼프의 관심은 이제 온통 2020년 대통령선거에 있다. 북핵 문제 해결은 오바마를 비롯한 전임 행정부가 모두 실패했지만, 자신이 이뤄낸 위대한 외교적 성과가 될 터다. 북한을 중국 견제용 균형추로 만들 수 있다는 기대도 있을 것이다. 거기에 엄청난 돈이 드는 주한미군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자신의 오랜 주장을 관철할 기회로 보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트럼프의 너그러움이 마냥 이어지진 않을 것이다. 적어도 두 번째 정상회담이 열리면 김정은은 2년 안에 완전한 비핵화를 완료하겠다는 로드맵을 들고 와야 하고, 트럼프의 정치 일정에 맞춰 비핵화 이벤트로 조응해줘야 한다. 세상사가 모두 그렇지만 국제정치에서 무조건적 사랑은 결코 없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18-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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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철희]北에 간 제주도 귤

    찬 바람 부는 겨울밤 이불 속에서 귤을 까먹다 보면 껍질만 한 바구니 수북이 쌓이는 것은 순식간이다. 지금은 귤이 우리네 겨울 간식을 대표하는 과일이 됐지만, 예전엔 제주도에서도 매우 귀한 존재였다. 박정희 정부 시절 감귤 산업을 진흥하기 전까지 제주도에선 ‘대학나무’라고 불렸다. 흔히 농촌에서 소를 팔아 자식을 대학에 보낸다지만, 제주도에선 귤나무 한두 그루만 있으면 자식 대학 공부까지 시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청와대가 어제 평양 정상회담 때 북측의 송이버섯 선물에 대한 답례로 제주산 귤을 북한에 보냈다. 우리 군 수송기가 이틀간 네 차례에 걸쳐 제주공항에서 평양 순안공항까지 10kg짜리 상자 2만 개, 모두 200t을 실어 나른다. 북한에서도 귤은 귀한 ‘수령님 하사품’이었다. 노동당 간부나 공로자들에게, 그리고 집단체조에 동원된 학생들에게도 귤 몇 개씩을 쥐여줬다고 탈북자들은 전한다. 다만 2000년대 중반 이래 중국산 귤이 대량으로 들어오면서 장마당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청와대의 제주산 귤 답례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서울 답방, 나아가 한라산 등정까지 염두에 둔 선택으로 보인다. 평양 정상회담 때 ‘백두산 환대’를 받은 문재인 대통령은 최근 기자들과의 산행에서 “백두에서 한라까지, 이런 말도 있으니 한라산 구경도 시켜줄 수 있다”고 했고, 청와대 여야정 회동에선 한라산에 헬기장이 없어 걱정이라는 얘기도 했다. 과거 북한에 귤을 보내는 ‘비타민C 교류사업’을 했던 제주도의 기대는 한층 큰 듯하다. 원희룡 제주지사는 10일 한라산 정상을 찾아 헬기 착륙이 가능한지 살펴보기도 했다. ▷제주도와 김정은의 인연도 새삼 관심을 끈다. 김정은의 생모인 재일교포 출신 무용수 고용희의 아버지, 즉 김정은의 외조부 고경택은 제주 출신이다. 몇 해 전 고경택의 허묘(虛墓)가 제주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김정은의 서울 답방도 아직 불투명한데, 제주도 방문까지 거론하는 것은 이른 감이 있다. 경호나 일정도 문제겠지만, 김정은 자신이 백두혈통이 아니라 ‘째포(북송교포)의 자식’으로 부각되는 것을 과연 달갑게 여길지 의문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18-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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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철희]南北 ‘특수관계’란 만능의 난센스

    북한 리선권의 ‘냉면 목구멍’ 막말 논란에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공사가 “좋은 의도에서 웃자고 한 말일 수 있다. 이 정도 수준에서 정리하자”고 나선 것은 평소 그의 대북 강경론에 비춰 보면 꽤나 의외였다. 많은 이들이 ‘웬 변심(變心)이냐’며 고개를 갸웃했지만, 통일부 관계자들 사이엔 돌연 화색이 돌았다고 한다. 가뜩이나 대북 저자세 논란에 시달리던 통일부로선 예상치 못한 지원사격에 화들짝 반색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한데 태영호 주장의 핵심은 다른 데 있다. 그는 북한의 ‘센 농담’보다 진짜 ‘오만무례’를 문제 삼아야 한다고 했다. 평양 정상회담 때 공항 행사장에 인공기만 높이 띄우고 두 정상의 기념촬영 때 한반도 지도 위에 노동당 마크가 있는 배경을 사용한 것에 공식 사죄를 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적화통일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이런 행위야말로 “북남 관계를 통일로 가는 특수관계라고 합의한 기본합의서의 난폭한 유린”이라고 했다. 고위 외교관 출신 탈북자에게서 나온 ‘남북 특수관계’ 발언은 요즘 우리 정부의 사용법과는 사뭇 달랐다. 통일부가 탈북민 출신 기자를 회담 현장 취재에서 배제하면서, 북한의 몰상식과 결례를 매번 변호하면서, 그리고 청와대가 공동선언문의 국회 패싱을 놓고 무모한 법리(法理)까지 동원해 해명하면서 거론하던 그런 쓰임새는 아니었다.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에 ‘쌍방 사이의 관계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생겨나는 특수관계’라고 규정한 이래 이 특수관계론은 남북 간엔 어디든 적용될 수 있는 오묘한 존재가 됐다. 따져 보면 그건 어떤 식으로든 정의하기 어렵다는 실토와 다름없지만 어느덧 만능의 변명거리가 된 것이다. 이런 특수관계에 국가 간 관행을 적용해 보려던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1년 9·11테러 직후 금강산에서 열린 장관급회담의 수석대표는 홍순영 당시 통일부 장관이었다. 평생 외교관으로 잔뼈가 굵은 홍순영은 남북회담도 ‘국제기준’에 따라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협상에 임했고, 북한의 회담 자세에 넌더리를 내며 결렬을 선언하고 돌아왔다. ‘인내심을 갖고 합의문을 만들라’는 게 서울의 훈령이었지만 그는 수석대표의 재량권을 내세웠다. 결과는 무참한 실패였다. 야당에선 박수를 받았지만, 그는 취임한 지 불과 4개월여 만에 경질되면서 1998년 통일부가 부(部) 체제로 개편된 이래 최단명 장관으로 기록됐다. 김대중 정부의 대북관계를 주도한 임동원 당시 대통령특보의 회고에선 날 선 분기마저 읽힌다. “어렵게 성사시킨 회담을 우리가 파탄시켰으니 대통령의 상심과 분노가 클 수밖에 없었다. 통일·안보 문제는 대통령이 직접 관장해야 할 국가 중대사이며 다른 누군가가 마음대로 결정할 분야가 아니었다. 이 사건을 통해 통일 문제를 담당하는 장관이 수석대표로 협상하는 경우에도 반드시 협상자로서 상부 훈령에 따라야 한다는 원칙을 새삼 되새기게 했다.” 이 사건이 이후 남북회담에 던진 학습효과는 컸다. 똑 부러지고 강단 있는 태도는 그 누구든 회담 대표에게 권장할 미덕이 결코 아니게 됐다. 어떻게든 회담을 깨뜨리지 않고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 숙명처럼 됐다. 지금 대통령의 주문도 예나 다를 게 없다. “유리그릇 다루듯 하라.” 하지만 언제까지 남북관계를 군색하기 짝이 없는 특수관계라는 영역으로 계속 남겨둘 것인지 고민할 때가 됐다. 햇볕정책의 목표도 북한의 변화 유도인데, 그들의 태도에 변함이 없다면 그 운용방식이라도 바꿔야 한다. 리선권의 입단속부터 다짐받는 게 그 시작이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18-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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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철희]증오범죄와 트럼프

    반(反)유대주의의 뿌리는 수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신교 문명권에서 유일신을 믿는 유대인들에 대한 주변 민족의 오랜 혐오는 기독교 문명의 확산 속에서 ‘예수를 죽인 민족’에 대한 격리와 차별로 이어졌다. 유대인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해 집단학살한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는 반유대주의 악행의 정점이었다. 그런 고난의 역사를 지닌 유대인들에게 미국은 새로운 피난처였고, 그들은 미국에 안착해 사회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런 미국 땅에서 유대인들을 향한 총기난사 사건이 27일 일어났다. 극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유대인에 대한 적개심을 자주 표출해온 40대 범인은 피츠버그의 한 유대교 회당에 자동소총 1정과 권총 3정을 들고 난입해 “모든 유대인은 죽어야 한다”고 외치며 무차별 난사했다. 이로 인해 11명이 현장에서 숨지고 경찰을 포함해 6명이 다쳤다.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로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사건으로 기록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사건은 반트럼프 진영 인사들을 겨냥해 ‘폭발물 소포 테러’를 기도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열성 지지자가 체포된 지 하루 만에 벌어졌다. 범인은 SNS 자기소개란에 “유대인은 사탄의 자식들”이라고 썼고, 미국 국경으로 향하는 수천 명의 중남미 이민자 행렬인 ‘캐러밴’에 극도의 반감을 드러냈다. 그는 “트럼프가 유대인에게 둘러싸여 있다”며 친(親)유대 정책을 비판하긴 했지만, 국경 장벽 건설 등 트럼프의 강경한 반이민 정책 지지자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사건을 ‘인류에 대한 공격’이라고 규정하며 “증오를 극복하기 위해 단결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통합 메시지는 당장 반트럼프 진영의 코웃음을 사고 있다. 지난 대선 때부터 외국인 혐오와 인종차별적 언사를 남발했던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등장 이후 정신적 트라우마에 빠져 불안·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사람이 늘면서 ‘선거 후 스트레스 장애’ ‘트럼프 후 스트레스 장애’ 같은 용어까지 생겼다. 열흘도 남지 않은 투표일까지 또 어떤 증오범죄가 일어날지 미국인들은 불안에 떨고 있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18-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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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철희]드골의 길, 문재인의 길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주 유럽 순방에서 얻은 최대 성과는 “두려워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격려였을 테지만, 프랑스의 보수 일간지 르피가로에서 뜻밖의 선물도 받았다. 파리정치대 교수이기도 한 저명 언론인 르노 지라르가 쓴 ‘한국 대통령의 용기’라는 제목의 칼럼이다. 칼럼은 문 대통령의 평화 프로세스, 나아가 대북제재 완화 주장에도 전폭적인 지지를 나타냈다. “문재인은 순진한 평화주의자가 아니다. 카다피의 몰락을 지켜본 김정은이 확실한 보증 없이 하루아침에 핵무기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실용주의자 문재인은 이걸 완벽히 이해했다. 이제 그는 서방이 제재 완화를 통해 북한에 상응하는 제스처를 취하도록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그가 옳다.” 국제사회에 대북제재 완화론을 설파했지만 그다지 공감대를 얻지 못한 문 대통령에겐 큰 위안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칼럼은 이렇게 끝맺는다. “(샤를) 드골 장군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처럼, 외교에선 때때로 큰 위험을 감수할 줄 알아야 한다. 바로 문재인이 한 일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이미 역사에 들어섰다.” 프랑스의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드골 전 대통령에 견준 최고의 헌사였다. 한데, 바로 그 대목이 의미를 곱씹게 만들었다. 왜 하필 드골의 외교인가. 불굴의 전사였던 드골은 외교에서도 비타협적 강경 독자 노선을 폈다. 드골은 늘 앵글로색슨, 미국과 영국이 프랑스를 이류 국가로 취급한다고 생각했다. 독자적인 핵무기를 보유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통합지휘체계에서 탈퇴한 것도 이런 편집증 같은 인식에서 비롯됐다. 그런 ‘자존심 외교’는 국가 명성을 끌어올렸고, 이후 전통처럼 굳어졌다. 프랑스 언론의 칼럼 하나에 문 대통령이 고무됐을 리는 없겠지만, 최근 거침없는 남북관계 행보를 보면 묘하게도 드골의 ‘마이 웨이’를 연상시킨다. 유럽 순방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는 자평에서, 그리고 국회 동의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한 평양공동선언 비준에서, 자신이 옳다고 판단한 것은 끝까지 밀고 가겠다는 드골 같은 태도가 엿보인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요즘 문 대통령 심기를 이렇게 전했다. “대통령은 낙관적이다. 참모들이 걱정을 말하면 오히려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큰 틀에서 맞는 길로 가고 있다는 확신과 자신감이 있는 것 같다.” 이런 대통령의 자기 확신이 남북관계 속도전으로, 그리고 미국을 향해선 ‘이젠 잡아끄는 데 지쳤다. 먼저 갈 테니 알아서 해라. 결국 우리를 따라오겠지만…’이라는 자세로 이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연내 종전선언과 김정은 답방이라는 시간표를 짜놓은 문 대통령이나 정부로선 마냥 미적대기만 하는 듯한 미국에 답답함을 느낄 것이다. 그래선지 요즘 ‘동맹 피로감’을 거론하는 얘기가 부쩍 늘었다. 일각에선 “한국은 언제까지 한미동맹의 을(乙)이어야 하느냐”며 미국의 ‘갑질’도 거론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드골의 길’은 매력적으로 보일 것이다. 물론 문 대통령 스타일로 볼 때 드골식 외교를 펴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한국의 처지를 당시 프랑스와 비교하는 것부터가 당치 않다. 하지만 혹시라도 대통령이나 주변에서 그런 독자 노선에 끌렸다면, 드골 외교를 놓고 지금껏 이어지는 논란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드골의 NATO 이탈은 국민들로부터 엄청난 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그가 원했던 동서 진영 사이의 조정자 역할은 물론이고 서유럽 지도자로서의 역할마저 축소되는 결과를 낳았다. 콧대 높은 프랑스라는 이미지와 함께. 그리고 프랑스는 2009년 다시금 NATO에 복귀했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18-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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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철희]北 굴신과 공갈 속 ‘우리식 비핵화’

    북한의 핵신고를 미루고 영변 핵시설 폐기와 6·25 종전선언을 맞바꾸자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미국 워싱턴포스트(WP) 인터뷰는 아마도 처음으로 외교수장으로서 존재감을 드러낸 발언이 아닐까 싶다. 강 장관도 “우리 내부의 협의, 미국과의 협의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했으니, 이 발언을 두고 다시 “말이 앞섰다면 죄송하다”며 번복하는 일은 없을 듯하다. 향후 북-미 협상 결과를 두고 봐야겠지만 북한 비핵화가 신고→검증→폐기라는 일반적 절차대로 흘러갈 것 같진 않다. 당장 미국에서도 핵신고 얘기가 나오지 않는 걸 봐선 고심하는 흔적이 역력하다. 이쯤에서 북한 외교의 승리를 점쳐도 크게 무리는 아닐 것이다. 북한은 그동안 미국을 상대로 굴신(屈身)과 공갈 사이를 능수능란하게 오가며 자기네 방식을 관철해왔다. 특히 거부를 분명히 한 사안에 대해선 대화의 파탄도 불사했고, 미국이 끝내 손들게 만들었다. 백악관에서 아시아정책을 담당한 마이클 그린이 일찍이 털어놓은 그대로다. “북한은 미국의 전략을 망쳐놓는 데 불가해(不可解)한 능력을 지녔다.” 그간 미국의 대북정책에서 사라진 단어만 살펴봐도 북한의 외교 성적은 놀랍다. 5월 북-미 정상회담 취소 소동까지 야기하며 북한이 삭제 대상 목록에 올린 단어는 ‘리비아식 해법’과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 비핵화(CVID)’였다. 리비아식 해법은 진작 사라졌고, CVID도 어느덧 다소 생뚱맞은 ‘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FFVD)’로 바뀌었다. 북한은 6·12 싱가포르 정상회담이 끝나자마자 핵 신고 요구를 완강히 거부했다. 7월 초 방북한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뒤통수에 대고 “CVID요, 신고요, 검증이요 하면서 강도적인 비핵화 요구만 들고 나왔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그리고 또다시 취소 소동이 벌어진 뒤 폼페이오의 4차 방북이 이뤄진 지금, 미국 행정부 누구도 핵신고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북한은 그동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동의했다는 ‘새로운 방식’을 내세웠지만 자신들의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한 적은 없다. 다만 ‘핵개발 초기 단계였던 리비아와 엄연한 핵보유국인 북한은 다르며, 미국의 이전 행정부가 써먹다 백전백패한 케케묵은 방식은 통하지 않는다’는 북한의 일관된 주장에서 유추할 수밖에 있다. 북한은 우선 이미 보유한 핵무기고(핵탄두, 핵물질, 미사일)와 핵능력 확장수단(생산·개발시설)을 철저히 분리한다. 이미 핵무장을 완성한 이상 핵시설은 포기할 수 있지만 그 방식은 ‘주동적 폐기 이후 검증 허용’ 순서로 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핵무기는 상호 군축(軍縮) 방식으로 해결하겠다는 속셈인 듯하다. 남한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 핵사찰과 전략자산 전개 금지, 핵우산 공약 폐지, 주한미군 철수 또는 위상 조정까지 염두에 뒀으리라. 물론 각 비핵화 단계에는 종전선언과 제재 완화, 평화협정 체결, 북-미 수교 같은 상응 조치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 종전선언도 이뤄지지 않은 지금, 핵신고 요구는 대북 선제공격 목표물의 좌표를 찍어 달라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게 북한의 주장이다. 리용호 외무상이 유엔에서 수없이 ‘신뢰’를 내세우며 “일방적 핵무장 해제는 없다”고 강변한 이유다. 이런 ‘북한의, 북한에 의한, 북한을 위한 비핵화’는 먹혀들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적극 동조해 공동전선을 구축했다. 우리 정부마저 암묵적 수긍을 넘어 미국 설득에 나선 분위기다. 미국은 불만이겠지만 당장 ‘트럼프 리스크’부터 걱정이다. 북한이 내밀 이벤트에 혹하기 쉽고 주한미군도 연합훈련도 돈 문제로 여기는, 독재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대통령이니 말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18-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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