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철희]트럼프 마음 사기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1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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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논설위원
이철희 논설위원
2002년 2월 20일 오후 김대중(DJ) 대통령은 도라산역에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을 맞았다. 비무장지대(DMZ) 철책선에서 불과 50m 떨어진 곳이었다. 남북 철도연결공사 현황을 브리핑 받은 부시는 철도침목에 ‘이 철도가 한민족을 하나로 묶기를 기원한다’고 기념서명을 했다. 이어 전 세계로 생중계된 연설에서 “철조망과 공포 속에 분단된 한반도가 아니라 협력과 교역을 통해 언젠가 통일될 한반도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부시는 오전 한미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에선 “햇볕정책을 적극 지지한다” “북한을 침공하거나 공격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불과 3주 전 연두 국정연설에서 이라크, 이란과 함께 북한을 ‘악의 축’으로 부르며 “선제공격으로 정권을 교체해야 할 대상”이라고 선언했던 부시다. 그랬던 부시가 한 달도 안 돼 태도를 바꾼 셈이다.

DJ의 성공한 ‘부시 설득’

당시 미국은 9·11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탈레반 정권을 붕괴시키고 내친김에 이라크 침공까지 군불을 때고 있었다. 북한은 ‘그 다음이 우리란 말이냐’며 강력 반발했다. DJ는 간곡하고 집요한 설득으로 부시의 마음을 돌려놓고 갈등과 대결의 현장인 DMZ 대신 화해협력의 현장인 도라산역에서 평화 이벤트를 만들어냈다.

문재인 대통령도 이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이 그런 계기가 되길 희망했을 것이다. 유엔 연설에서 ‘북한 완전 파괴’까지 경고한 트럼프를 어떻게든 설득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이었으리라. 그래서 사흘 동안 공식 일정 없이 정상회담 준비에 몰두했고, 비록 불발됐지만 트럼프와의 DMZ 동반 방문을 위해 먼저 현장에 가서 30분이나 기다렸다.

하지만 트럼프는 설득됐을까. 문 대통령은 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고 했다.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는 외교적 표현이다. 욕심 같아선 북한 정권교체, 정권붕괴, 흡수통일, 침공은 없다는 이른바 ‘4노(NO) 원칙’을 트럼프가 직접 밝혀주길 바랐을 테지만 언감생심이었다. 트럼프의 어조가 많이 누그러졌고 호전적 언사는 없었다는 것에 위안을 삼아야 할 듯하다.

세계를 선악 이분법으로 바라보는 네오콘 세력에 둘러싸여 있던 부시는 오직 이익이냐 아니냐는 이분법으로 보는 트럼프보다 오히려 설득이 쉬웠는지도 모른다. DJ는 부시가 존경한다는 로널드 레이건이 ‘악의 제국’ 소련과 협상한 얘기로 설득했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 부시의 종교적 감성까지 두드려 마음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트럼프는 다르다. ‘협상의 달인’임을 자랑스러워하는 부동산 재벌이다. 외교에서도 자신의 본능에 충실하다. 1990년 성인잡지 플레이보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협상에선 살인자도, 착한 녀석도, 그 어떤 사람도 돼야 한다. 때론 치열하고, 때론 달콤하고, 때론 무자비해야 한다. 이건 배운다고 되는 게 아니다.”

트럼프는 ‘본능적 인간’이다


그러기에 헨리 키신저의 예측대로 트럼프는 여태껏 본 적이 없는 본능적 외교를 하고 있다. 위신이나 평판을 위해 손해를 감수하는 일은 없다. 그의 사전에 일관성이란 단어는 없다. 그렇다고 머리에 한 번 박힌 생각을 바꾸는 일도 없다. 본능적으로 튀어나온다.

“우리는 일본 같은 부자 동맹국을 지키려고 엄청난 돈을 쓰면서 세계의 조롱을 사고 있다. 그들은 미국을 엿 먹이고 있는데….” “나는 늘 핵전쟁을 생각한다. 사람들은 핵전쟁이 얼마나 파괴적인데 누가 핵무기를 사용하겠느냐고, 그래서 핵전쟁은 일어날 리 없다는 헛소리를 믿는다. 그것만큼 멍청한 일도 없다.” 모두 27년 전에 한 말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헨리 키신저의 예측#트럼프의 본능적 외교#협상의 달인#나는 늘 핵전쟁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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