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욱

변영욱 기자

동아일보 사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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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변영욱 기자입니다.

cu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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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14~2025-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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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수의 비결… 100년 전 고령자들 이야기 [청계천 옆 사진관]

    오늘(2025년 3월 1일)은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3.1절 의거가 일어난 지 106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100년 전 신문 기준으로는 6주년이 되는 날이었는데, 당시 신문에서는 그날을 기념할 수 있었을까 궁금했습니다. 1925년 신문을 찾아보니 일본 도쿄와 중국 상하이에서 동포들이 기념식을 했다는 소식이 3월 2일자 동아일보 지면에 실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서울에서는 기념 행사를 했다는 소식은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미묘하게 의미를 담고 있는 사진이 하나 있었습니다. 같은 날 2면 상단에 실린 종로 거리 풍경 사진입니다. 배경으로 보아 종로2가 탑골공원 부근으로 추정됩니다. 사진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눈비 맞은 쓸쓸한 종로거리 - 어제 3월 1일은 마침 첫 공휴일이므로 종로 큰 거리에도 집집마다 문을 닫아 걸어 음산한 기운이 한량없이 돌았는데 부실부실 내리는 눈송이는 공중에서부터 비가 되어 새 봄을 맞이하는 탑동공원 남산공원 창경원 등의 나뭇가지에는 물에 젖은 눈송이가 힘없이 매달렸더라.비록 3.1절을 직접적으로 기념하지는 못했지만, 상징적인 장소와 설명을 통해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봤습니다.● 100년 전 신문 속 세 명의 고령자 이야기오늘 100년 사진이 고른 사진은 100세 가까운 노인들의 얼굴입니다. 1925년 2월 26일, 27일, 28일자 신문에는 90세를 넘긴 노인 세 명의 이야기가 실려 있었습니다.고령자 생활 상태(1)●12살에 시집가 62살에 과부가 되다-음식을 가리지 않고 외출을 즐기는 96세 할머니, 69세 된 며느리의 이야기서울 수송동 공립보통학교 왼쪽 길로 들어서서 왼편으로 꺾어지는 골목 끝에 위치한 청진동 206번지. 그곳의 대문을 지나 행랑채 단칸방에 사는 김씨 할머니(96세)는 엄성오(61세)의 어머니다.방문을 열고 들어서니, 창문도 없는 어두운 단칸방이었다. 낡고 누렇게 변색된 신문지가 이곳저곳 붙어 있고, 대나무 발에는 붉은 빈대약이 칠해져 있었다. 방 한쪽에는 검은 때가 묻은 화로가 놓여 있고, 그 옆에 새하얗게 센 머리를 드러낸 김씨 할머니가 누워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그녀는 슬며시 일어나 앉으며 빙긋 웃었지만, 숨이 찬 듯 가쁜 숨소리를 내뱉었다. 그녀가 바로 올해 아흔여섯을 맞은 김씨 할머니였다.●귀가 어두워도 건강한 몸, 서양식 옷을 두려워하다몸이 불편해 보이기에 “누워 계세요”라고 권했지만, 그녀는 다시 한 번 빙긋 웃고는 아무 말 없이 거친 숨을 내쉬었다. 아들 엄성오 씨에게 누우시라고 권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어머니는 아주 건강하십니다. 다만,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을 보면 무서워서 숨을 거칠게 쉬십니다. 귀가 잘 안 들리셔서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시지만, 몸은 튼튼하십니다.”그는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다시 그녀의 나이를 확인하고자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라고 묻자, 김씨 할머니는 “나는 글을 몰라서 육십갑자를 세지 못하지만, 아흔여섯은 분명하다”고 대답했다. 아들 엄성오 씨는 올해 예순하나라고 하며 주름 하나 없는 얼굴로 다시 웃음을 지었다.●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나, 세 아들을 낳다김씨 할머니는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나 85년 전, 열두 살 때 서울로 시집왔다. 남편은 당시 스물두 살로, 원래 가난한 집안에서 살다가 서울로 이사 와 광화문 주석골에서 살았다고 한다. 남편은 42년 전, 예순두 살에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자녀로는 원래 살아 있었다면 올해 일흔여덟이 될 맏아들, 그리고 현재 함께 사는 둘째 아들 엄성오(61세), 그리고 쉰두 살 된 셋째 아들이 있다. 셋째는 현재 하와이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고 한다.●근면하고 성실했던 조상, 69세 며느리의 이야기엄성오 씨의 아내, 올해 예순아홉인 며느리는 자리에 앉을 공간이 부족해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다.“어머니께서는 5년 전까지만 해도 하루 종일 나무하러 다니셨지만, 몇 해 전부터 기력이 쇠해 외출을 못 하게 되셨어요. 그래도 나가고 싶어 하셔서 더운 날에는 혼자 자꾸 밖에 나가려 하시죠. 그래서 대문을 꼭 걸어 두고 있어요.드시기야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저희와 함께 식사하시지만, 어린아이처럼 화장실을 자주 들락거리세요. 요즘은 선산에 가는 것도 마다하시는데, 이번 한식에는 꼭 가고 싶다고 하시네요. 밤낮으로 조상 이야기를 하시지만, 워낙 형편이 어려워 차려 드릴 떡 한 조각도 못 사드리고 있어요.“●손자는 상업통신사에 취직 준비 중나는 “생계를 위해 어떤 일을 하십니까?”라고 묻자, 엄성오 씨는 이렇게 대답했다.“서점과 석탄가게 일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도, 제 아내도 모두 김해 김씨인데, 김해 김씨라서 가난한가 봅니다.”마침 밖에서 젊은 청년이 들어오자 그는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이 아이가 우리 아들 운학입니다. 올해 스물한 살인데 보성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동야학을 다녔어요. 앞으로 상업통신사에 다닐 계획입니다.”고령자 생활 상태 (2)●91세의 홍안 노파, 30년간 채식하며 살아온 삶서울 수창동 59번지 내수사 옆에 사는 김성문(66) 씨의 집에는 올해 91세가 된 정송(鄭松)이라는 노파가 살고 있다. 그녀는 김성문 씨의 장모로, 기자가 찾아갔을 때 딸과 함께 콩나물 머리를 다듬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녀의 머리에는 아직도 검은 머리카락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고, 분홍 저고리를 입고 있어 마치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었다.●남편과의 이별, 그리고 다섯 딸과의 생이별정송 노파는 열다섯 살 때, 자신보다 다섯 살 연상인 남편 이원일(李元一)과 수원에서 결혼했다. 이후 다섯 딸을 낳고 가정을 꾸렸으나, 그녀가 서른아홉이 되던 해 남편은 길을 떠난 뒤 돌아오지 않았다.그녀는 다섯 딸을 모두 시집보냈으나, 임오년(壬午年) 군요(軍擾) 때 각자 피난을 가면서 소식을 잃고 말았다. 이후 딸들의 생사를 찾아 헤맸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삼십여 년 전, 갑신년에 서울로 시집간 막내딸과 연락이 닿아 현재까지 함께 지내고 있다.●74세가 되었을 장녀, 그리고 긴 한숨기자가 “고향이 어디세요?”라고 묻자, 그녀는 머리를 숙이며 “남양 땅 언창에서 살았습니다”라고 또렷이 대답했다. “따님들의 소식을 전혀 모르시나요?”라는 질문에는, 손을 멈추고 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맏딸이 살아 있다면 이제 일흔넷이지요. 하지만 어디에서 죽었는지, 삼십여 년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도 없습니다.”자식들의 생사를 모른 채 90세가 넘도록 살아온 그녀의 마음속 깊은 한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30년간 채식하며 살아온 강인한 삶정송 노파의 사위 김성문 씨는 긴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이분은 삼십여 년 전부터 고기를 전혀 드시지 않고 채식만 하십니다. 세월이 흘러 얼굴은 쪼그라들고 살점이 빠졌지만, 몸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아직도 눈과 귀가 밝고 말도 또렷하시죠. 다만 다리에 힘이 빠져 몇 해 전부터는 바깥 출입을 못 하고 계십니다.”●사진 촬영을 앞두고 터진 웃음기자가 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사를 부르겠다고 하자, 딸이 농담 삼아 “어머니도 화장을 좀 하셔야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정송 노파는 “아이고, 부끄럽네”라며 호탕하게 웃었다.문 앞에서 기자가 그녀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묻자, 그녀는 의심스러운 듯 바라보며 다시 되물었다. “신문사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하자, 그녀는 “나이가 몇이오?”라고 다시 묻더니 또 한 번 호호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어찌나 우스운지, 옆에서 놀던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도 따라 웃었고, 기자 역시 웃음을 터뜨리며 밖으로 나왔다.고령자 생활 상태 (3)● 95세의 동안 노파, 70세 넘은 자녀와 함께 생활: 건강이 좋아 먹고 싶은 음식은 마음껏,젊어서 고생한 덕에 오히려 건강95세 동안(童顔) 노파70세 넘은 남매, 정성껏 봉양서울 혜화동 57번지, 동소문 안쪽 초가집에는 95세 된 박씨 노파가 살고 있다. 그는 이 집의 가장인 이원식(75세)의 어머니이며, 함께 사는 누나는 70세가 넘은 과부다. 즉, 일흔이 넘은 남매가 100세에 가까운 어머니를 정성껏 모시며 살고 있는 것이다.장수자의 집을 묻자, 동네 사람들이 술집을 가리켜눈이 소복이 쌓이는 저녁, 기자는 신선한 바깥공기를 마시며 동소문 안 이 집을 찾아갔다. 길에서 만난 몇몇 사람에게 “95세 된 노인이 사는 곳이 어디냐?”고 묻자, 모두가 한목소리로 “저기 보이는 술집입니다”라며 친절히 알려주었다. 이 노인은 동네 사람들의 자랑거리인 듯했다. 도시에서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를 만큼 개인주의적인데, 이곳은 농촌 같은 정이 느껴지는 마을이었다.●남편은 늙은 총각, 자녀는 아들 하나와 딸 하나박씨는 70여 년 전, 19살 되던 해 임오년에 이씨 집안으로 시집왔다. 남편 이석근은 스물다섯 살의 늙은 총각이었다. 결혼 후 4년 만에 첫아들 이원식을 낳고, 3년 뒤 딸을 얻었다. 그러나 40세가 되던 해 과부가 되었고, 이후로는 아들과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딸과 함께 살았다.●과거 덕수궁에서 일했던 아들, 지금은 약술 장사아들 이원식은 한때 덕수궁에서 일하며 홀어머니를 모셨고, 딸은 들어와 술장사를 하며 어머니를 봉양했다. 장성한 손자는 구두 장인으로 돈을 잘 벌어 살림이 넉넉했다. 박씨 노파는 젊어서 고생한 덕에 몸이 튼튼했고, 동네를 돌아다닐 만큼 건강했다. 눈과 귀도 좋고, 먹고 싶은 음식은 가리지 않았다. 피곤하면 며칠 동안 방에 누워 쉬기도 했지만, 대체로 건강하게 지냈다.●노년에도 고생스러운 삶, 왼손엔 은가락지기자가 “한번 뵐 수 있을까요?” 묻자, 안에서 대화를 엿듣던 노파가 문을 열고 머리에 조바위를 쓴 채 얼굴을 내밀었다. “이렇게 늙도록 살아서 고생이지요. 호호.” 그는 환하게 웃으며 농담했다. 그 모습은 매우 건강해 보였다.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는 은가락지 한 쌍이 반짝였고, 허리춤에는 붉은 주머니가 달려 있었다.●100년 전 노인들의 삶, 그리고 우리의 미래1925년 당시 조선에서 100세 이상 인구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당시 평균수명은 40대 중반에 불과했고, 의료 기술과 생활 환경이 열악했기 때문에 100세 이상 인구는 극히 드물었을 것입니다.1925년 2월 21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경성부 90세 이상의 고령자 10명’이라는 기사에 따르면 당시 조선인 8명, 일본인 2명이 있었고 최고령자는 98세의 조선 할머니였습니다. 그러나 요즘 노령 인구는 급격히 늘고 있고 100세를 넘는 고령층도 두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2024년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100세 이상 인구는 2019년 4,874명에서 2023년 7,634명으로 56.63% 증가했습니다. 특히 여성 노인이 남성보다 4.8배 많습니다.100년 전 김씨, 정씨, 박씨 할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 노인들이 겪었던 현실을 엿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가족과 함께 지내면서도 경제적 어려움과 신체적 쇠약으로 인해 고단한 삶을 살아갔다. 사랑하는 이를 전란으로 잃거나 먼 곳에 떠나보내고도 다시 만나지 못하는 비극도 흔했습니다.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건강을 유지하며 살았던 할머니들의 적응력과 회복력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김씨 할머니는 음식을 가리지 않고 외출을 즐기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정송 노파는 30년간 채식을 하며 건강을 유지했습니다. 박씨 할머니는 젊어서 했던 육체 노동이 오히려 건강의 기초가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방식으로 건강을 유지할 계획이신가요?오늘은 100년 전 어려운 상황에서도 100세에 가까운 나이까지 생존했던 할머니 세 분의 사진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점이 느껴지셨나요? 좋은 댓글 부탁드립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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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럼프식 언론 개혁, 피격 순간을 촬영한 사진기자는 어떻게 될까[청계천 옆 사진관]

    ● 미국 트럼프의 언론 개혁(?) 시작필자는 한국의 사진기자이다. 최근 미국 백악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진 취재 방식의 변화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기자들의 취재 방식을 바꾸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중동 분쟁을 정리하는 방식과 우방국을 포함한 외국 제품의 수입 관세 분야에 이어 미국 내 취재 시스템에 대해서도 트럼프식(式)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캐롤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은 25일(현지 시간) 브리핑에서 “수십년간 워싱턴 DC에 기반을 둔 백악관 출입기자단이 백악관 집무실 등의 공간에서 질문할 수 있는 풀(pool) 기자로 누가 참여할지를 결정했으나 더는 아니다”라면서 “일부 언론이 백악관 출입 특권을 독점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미국 백악관 취재 규범(norm)의 변화는 미국의 독자들이 걱정할 이슈인 것은 맞다. 하지만 한국의 사진기자로 바라보는 미국 트럼프 백악관의 변화는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태평양 너머 미국의 민주주의를 걱정할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미국 백악관 취재 시스템이 한국 대통령실 취재 시스템의 모태이기 때문이다. 백악관 취재를 담당하는 취재기자의 경우, 어쩌면 큰 변화가 없을 수도 있다. 질문을 할 수 있는 우선권을 갖지 않더라도 대통령 또는 대변인의 말을 잘 기록해 사후에 분석해 맥락을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사진의 경우는 다르다. 접근이 되지 않는다면 사진을 찍을 수 없기 때문이다. ● 풀 (Pool) 취재의 방식백악관 대변인이 언급한 풀 기자는 한국에서도 사용하는 용어다. 풀은 카 풀(car pool)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풀 취재는 차를 함께 타듯이 취재를 함께 한다는 의미이고 풀 기자는 해당 취재를 담당하는 대표 기자를 말한다. 보통 기자단이 꾸려지면 가나다 순 또는 별도의 풀 순서에 따라 풀 취재 당번이 결정된다. 한국의 경우 현재 대통령실 출입사진기자단에 9개의 매체가 소속되어 있다. 근무와 출장 여력이 있는 회사들이 포함되어 있고 1983년대부터 이어져 오고 있는 시스템이다. 백악관출입사진기자단을 본 딴 조직이다. 미국 백악관 출입사진기자단 (WHNPA·White House News Photographers Association)은 1921년 6월 13일 정식 출범했다. 2024년 말 기준 미국 백악관 사진기자협회에는 약 250명의 회원이 있다. 이들이 모두 백악관으로 출근하는 것은 아니며 하루 평균 10명의 사진기자들이 백악관에서 대통령을 취재하고 있으며, 프레스 룸 옆에 사진기자들이 대기하는 사진기자실 공간이 따로 있다. 2016년 대통령 취재를 위해 방문했을 때 이곳 기자실에 들어간 적이 있는데 약 6개 책상이 있었다. AP통신과 뉴욕타임즈 등 유력 매체의 기자들만이 상주하고 있었다. 우리가 흔히 보는 미국 백악관 대변인의 브리핑 장면 바로 앞부분에 기자들 의자가 있고 그 뒤쪽으로 사진기자실이 있었다. 백악관을 출입했던 사진기자 경력 35년의 로이터 통신 사진기자는 필자에게 이메일로 다음 내용을 알려주었다. 외국 지도자가 방문하는 등 백악관에 중요한 이벤트가 있는 날에는 최대 25-30명의 스틸 사진기자들이 동시에 모인다. 백악관을 정기적으로 취재하고 백악관 “하드 패스(hard pass)”를 소지한 스틸 사진기자의 총 인원 수는 약 50명 정도인데 하드 패스를 소지하면 언제든지 백악관 경내와 프레스룸에 출입할 수 있다. 미국 대통령을 취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점은 집무실인 오벌 오피스(Oval Office)에서 진행되는 이벤트와 대통령의 해외 순방 때는 “타이트 풀(tight pool)”로만 취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타이트 풀의 가장 작은 형태는 대통령과 함께 에어포스 원(Air Force One)을 타고 국내 및 해외여행을 함께하는 12명의 취재진으로 구성된다. 이 풀은 3명의 통신사 취재 기자, 1명의 신문 풀 취재 기자, 3명의 TV 네트워크 팀(카메라맨 포함), 1명의 라디오 기자, 그리고 4명의 스틸 사진기자(AP, 로이터, AFP, 뉴욕타임스에서 각 1명)로 구성된다. 스틸 사진기자의 경우 이 4개의 조직 외에는 다른 스틸 사진기자가 대통령과 함께 에어포스 원을 타고 여행하지 않는다. 이들 4개 조직은 자신들의 클라이언트와 구독자 외에는 이미지 공유를 하지 않는다. 이는 TV 네트워크가 한 명의 카메라맨이 모든 네트워크와 공유하는 것과는 다르다. 백악관 내부 행사를 취재하는 풀에도 동일한 4명의 스틸 사진기자가 항상 있지만, 게티(Getty)와 워싱턴 포스트(Washington Post)도 사진기자가 추가로 포함될 수 있다. 또한, ISP(Independent Stills Pool)라는 작은 조직의 그룹도 매일 한 명의 사진기자를 풀에 포함시켜 다른 ISP 조직과 이미지를 공유한다. ● 총탄 맞는 트럼프 대통령의 모습을 촬영한 AP 사진기자는 어떻게 될까?2024년 7월 미국 대선을 4개월 앞두고 미국 공화당 후보였던 트럼프가 피격 당하는 현장에서 성조기를 배경으로 피를 흘리며 손을 들어 보이는 트럼프 사진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사진기자가 있다. AP통신의 에반 부치(Evan Vucci)기자다. 20년 이상 미국 백악관 등 정치 현장과 스포츠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베테랑 사진기자이다. 총성이 들리자 마자 몸을 숨기는 게 아니라 오히려 트럼프 후보쪽으로 달려가 특종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트럼프는 이 사진으로 지지자들 사이에서 강력한 지도자의 이미지를 더 강화할 수 있었고 선거 유세 기간 동안 상징처럼 사용하기도 했다. 트럼프 지지자인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사건 직후 이 사진을 자신의 엑스(X·옛 트위터)에 올려 공유했었다. 에반 부치는 현재 미국 백악관 출입 AP 사진기자인데 최근 벌어지는 백악관과 AP 통신 사이의 갈등 속에 난처한 상황에 빠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필자가 소속된 동아일보를 비롯한 언론사로 송출되어 들어오는 AP 사진 속에 에반 부치의 이름은 계속 나오지만 트럼프를 직접 찍은 사진은 최근 사라졌다. 기자실에서 대변인의 모습 정도만 사진으로 찍어 보도하고 있다. 정확히 어떤 제한 조치를 받았는지는 확인 중이지만 변화는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 언론과 권력의 갈등미국 AP 통신과 백악관의 갈등이 첨예화된 것은 트럼프 행정부가 ‘멕시코만’의 이름을 ‘미국만’으로 바꾸었지만 AP 통신이 그 용어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밝혀서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직후 멕시코만을 미국만으로, 알래스카주의 북미 최고봉인 데날리산을 매킨리산으로 바꾸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후 AP통신은 자체 스타일북 표기법에 따라 원래 지명인 ‘멕시코만’을 계속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2025년 2월 11일 트럼프 대통령이 연방 공무원 대폭 감축 지시를 담은 행정명령에 서명하는 행사를 취재하려던 AP기자가 행사 출입이 거부되었다는 사실을 AP 통신이 기사화하면서 외부에 알려졌다. 취재 기자는 출입이 거부되었지만 AP 사진기자는 백악관 행사에 출입을 허용받았다는 기사도 있지만 최근 트럼프 특종 기자의 사진이 브리핑룸 스케치 정도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앞으로 미국 트럼프 사진의 취재 방식은 어떤 변화를 겪을까사진은 카메라 앞에 있는 피사체를 있는 그대로 촬영해서 독자에게 보여준다는 일종의 신화를 갖고 있다. 보도사진이 존중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치의 영역에서 사진은 100% 객관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무대를 세팅하는 참모들과 피사체인 대통령과 정치인들이 카메라를 인식하고 사전에 준비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최종 선택 과정에서 편견과 입장에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훈련되고 독립된 사진기자가 촬영하는 사진은 한계가 덜한 편이다. 대통령이 인사권을 갖고 있는 전속 카메라맨이 촬영한 사진과 언론사에서 월급을 받는 사진기자가 촬영한 사진은 아주 미묘하더라도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권력자들은 자신을 우호적으로 생각하는 카메라만 옆에 있기를 원한다. 미국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트럼프를 최소한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영웅으로 확실하게 만들어 준 피격 순간 사진을 찍었던 AP의 사진기자는 앞으로도 독립적인 활동을 보장받을 수 있을까? 미국 민주주의와 언론 자유의 바로미터가 될 것 같다. ● 당사자의 입장 표명이 글을 쓰면서 한국시각 27일 오전 에반 부치 기자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DM을 보냈다. 한국 언론에 나온 미국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풀 취재 계획에 관한 보도를 보여주면서 “혹시 AP 통신 백악관 출입 사진기자로서의 당신의 역할에 변화가 있느냐?”는 질문을 했다. 아마 전세계 많은 포토저널리스트들과 기자들도 비슷한 질문을 했을 것이다. 에반 부치 기자는 개별 답변 대신 인스타그램에 한국 시간 28일 오전 다음과 같은 포스팅을 올렸다. “메시지를 보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트럼프)행정부는 내가 백악관 사진취재하는 것을 금지 시켰다. 이유는 AP 기사 표기 스타일을 둘러싼 분쟁 때문이다. 희망하건데 빨리 이 사태가 끝나서 역사를 기록하는 내 역할로 돌아가고 싶다. 관심 가져줘서 고맙다”는 짧은 입장문이다. 현재 미국 백악관 사진은 AP망을 통해 한국으로 들어오곤 있다. 그러나 사진의 촬영자 정보에는 기자 개인의 이름이 빠져있다. 풀 취재를 통한 사진이라는 표시만 있다. 미국 언론의 취재 범위에 변화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걱정스런 마음으로 지켜볼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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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학 졸업식, 이젠 플래카드 보는 재미! [청계천 옆 사진관]

    마지막 추위가 기승을 부린 24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에서 졸업식이 열렸습니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각 단과대학별로 강당이나 강의실에서 조촐한 졸업식이 진행되었죠. 다만 코로나19 이후 자리 잡은 변화인지, 대학 졸업이 끝이 아니라는 공감대 때문인지 예전처럼 친척들이 대규모로 몰려와 함께 축하하는 풍경은 많이 줄어든 모습이었습니다. 가끔 부모님이나 형제자매와 함께 참석하는 졸업생들이 눈에 띄었지만, 대부분은 친구들과 함께하는 모습이었습니다.백양로를 따라 걷다 보면 졸업생과 후배들이 설치한 플래카드가 곳곳에 걸려 있는 광경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후배들은 졸업하는 선배들의 이름과 얼굴을 정성껏 넣어 플래카드를 제작하고, 졸업식 당일에도 부지런히 새로운 현수막을 다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졸업생들 또한 스스로를 표현하는 문구를 준비해 학교 곳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습니다.이러한 플래카드 속에는 요즘 대학생들의 관심사와 문화가 그대로 녹아 있었습니다. 넷플릭스, 웹툰, 유튜브가 주요한 문화 코드가 된 시대를 반영해, 인기 드라마나 웹툰 대사에서 착안한 졸업 축하 문구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또한, 청춘들의 고민과 스트레스 속에서도 빛나는 유머 감각이 돋보였습니다. “이제 진짜 어른이 되는 걸까?”라는 막연한 두려움과 “이제 겨우 시작이다!”라는 기대가 공존하는 순간. 그 속에서 2025년 2월 졸업생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대학 생활을 마무리하고 있었습니다. 24일 서울 연세대 졸업식장 주변 플래카드를 몇 장의 사진으로 소개드립니다. 그리고 사진 속 졸업생들의 멋진 청춘을 응원합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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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봄을 부르는 한 방울

    지붕 처마에 매달린 고드름이 햇볕에 한 방울씩 녹아내리고 있습니다. 막바지 강추위도 뚫고 곧 봄이 올 것이라는 듯. ―인천 부평구 부평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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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말 잘하는 사람의 시대, 웅변대회는 왜 사라졌을까? [청계천 옆 사진관]

    ● 청중 앞에서 연설하는 남자지난 100년간 우리나라 신문에 실린 이미지의 변천과 의미를 찾아가는 ‘백년사진’ 코너입니다. 오늘 소개할 사진은 1925년 2월 16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한 장의 사진입니다.검은 외투를 입고 짧은 머리를 한 청년이 연단에 올라 아래를 향해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연단 아래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연사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웅변대회가 열렸던 순간입니다.● 웅변대회의 소멸동아일보 DB에서 ‘웅변’이라는 키워드로 사진을 검색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1960년대 이후 디지털화된 이미지 데이터베이스에서 단 113장만 검색되었습니다. 그중 한국인이 등장하는 사진은 극히 적었습니다.의외입니다. 1970, 80년대 학교를 다니셨던 독자라면 반공 웅변대회, 불조심 웅변대회 등 다양한 웅변대회를 기억하실 텐데 말이죠. 그런데 남아 있는 사진의 절반 이상이 북한 사람들이 웅변하는 모습이고, 나머지는 주한 미군의 웅변대회 사진이었습니다. 정작 한국의 초·중·고교에서 열리던 웅변대회는 사진으로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이는 웅변대회가 뉴스로 취급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웅변대회 자체가 점차 사라지고 있기 때문 아닐까요? 돌이켜보면 2000년대 이후 초·중·고생이 웅변대회에 나간다는 이야기를 거의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가끔 영어 웅변대회 홍보물을 본 기억은 있지만, 과거처럼 전국적인 대회로 주목받는 일은 드뭅니다.엄혹한 시대에는 ‘스피커’를 응원하고 격려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큰 목소리로 군중을 설득하는 것보다 각자의 분야에서 실력을 쌓는 것이 개인과 사회 전체에 더 유익하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존재하는 듯합니다. 정치는 분야별 전문가인 대표자들에게 맡기고 말입니다.●아직도 큰 목소리가 필요한 시대일까그런데 2024년 12월 이후, 우리는 너무 많은 ‘웅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윤석열 대통령이 쏘아 올린 계엄이라는 화살이 국회 탄핵 결의와 헌법재판소 변론 과정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온 국민이 법조인들의 화법과 논리를 영상으로 직접 접하고 있습니다. 유튜브에는 좌우 진영을 겨냥한 중계방송과 해설방송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헌법재판소와 집회 현장에서는 차마 옮기기 힘든 욕설이 들립니다높은 톤의 목소리, 주장 전달을 위한 단어 선택, 강조를 위한 반복. 초등학교 시절 접했던 웅변대회의 형식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말 잘하는 사람의 시대입니다. 말로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이를 통해 큰돈을 벌었고, 어떤 이는 돈을 포기하고 뜻을 택했다고 말합니다. 과거 자신이 했던 말을 이제 와서 부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그런데 걱정이 듭니다. 사람은 시대를 닮아간다고 합니다. 지금처럼 양극단으로 나뉜 목소리 속에서,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는 전쟁터 같은 언어를 듣고 자란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지난 두 달 동안 쏟아진 수만 개의 영상 속에서, 저는 2025년 2월 19일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탄핵 심판 1차 변론기일에 출석한 한덕수 국무총리의 ‘웅변’에 가장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그는 톤을 높이지 않았고,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 반복하지도 않았습니다. 정치가 타협과 희생의 가치를 지키지 못하고 뒤로 빠지면서 우리 내부의 갈등이 광장과 연단으로 넘어간 2025년 대한민국에서, 누군가는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하지만 앞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저만 그런가요?오늘은 100년 전 조선의 발전을 염원하며 열렸던 웅변대회 사진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진에서 무엇을 보셨나요? 여러분의 생각을 댓글로 남겨주세요.혹시 당시 웅변대회 기사가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아래에 기사를 첨부합니다.평양에서 개최된 전조선 웅변대회 - 2천여 명의 청중이 운집, 연사의 열변과 장내의 긴장평양청년회 주최, 조선일보 및 본사(동아일보) 평양지국 후원으로 제1회 전조선 청년·학생 현상 웅변대회의 첫날 일정이 예정대로 13일 밤 평양 설암리 천도교당에서 개최되었다.평양에서 처음 열린 대회였던 만큼, 시민들의 관심이 뜨거웠다. 초저녁부터 군중이 몰려들어 약 2천여 명이 운집하며 대성황을 이루었다. 오후 7시 30분경, 평양청년회장 정두현 씨의 개회사로 웅변대회의 막이 올랐다.첫 연사로 용강 기독청년 대표 이두록 군이 ‘나는 맹수 같은 청년이 되자’라는 주제로 연설했다. 그는 “우리 청년들은 비굴한 존재가 되지 말고, 천병만마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사자 같은 청년이 되자”는 요지의 열변을 토했다.이어 광성고보 기독청년 대표 김대성 군이 ‘우리의 환경’이라는 주제로 연단에 올랐다. 그는 “모든 것은 환경에 지배된다. 지금 우리의 환경을 보라. 안으로 들어와서는 살 수 없고, 밖으로 나가서도 활동할 여지가 없다”고 하며, 조선의 역경과 영토 문제를 언급했다. 특히 “조상이 물려준 국토를 팔아먹지 말자”라고 강조하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다음으로 평양 불교청년회 대표 김광수 군이 ‘살길을 찾자’라는 주제로 연설했다. 그는 “사람은 먹고 살아야 한다. 배부른 세상을 원하느냐, 배고픈 세상을 원하느냐?”라고 질문하며, 국토를 팔아먹고 혹독한 북풍한설 속에서 살아가는 조선인의 현실을 꼬집었다. 또한 재해민 문제를 거론하며 “죽음의 공포가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고 말한 후, 민족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금전, 지식, 단결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금주·금연의 필요성을 역설했다.잠시 독창 공연이 있은 후, 숭대 기독청년회 장애경은 ‘우리 사회의 활로’라는 주제로 연설했다. 그는 “나는 평등주의 사회조직을 원하며, 모든 사람이 자기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길 바란다. 도리가 없는 사회는 멸망한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조선의 수많은 빈민의 참상을 이야기한 후, 천도교 신도의 준동(蠢動)을 비판하고 산업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강조했다.이어 광성고보 학우회 대표 곽주홍 군이 ‘역경에 분투하자’라는 주제로 연설했다. 그는 “우리에게는 건강한 몸과 정신이 있을 뿐이다. 스스로 노력해 진보와 발전을 이루자”고 주장했지만, 일부 청중들의 야유와 냉소적인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신의주 제2교회 청년회 대표 이예용 군은 ‘오직 참이 있어야 한다’라는 주제로 연설하며, “우리는 오직 진실을 추구하고 허위를 배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회개혁가 러셀의 말을 인용하며 기독교적 이상을 설파했다.다음으로 평양 동명학우회 대표 이덕산 군이 연단에 올라 ‘새봄을 맞이한 우리’라는 주제로 현 사회 조직의 불합리성과 계급투쟁을 논했으나, 논리적인 요지를 잡기 어려웠고 조롱과 야유가 끊이지 않았다.이어 평양 유정 엡웟청년회 대표 박기석 군이 ‘조선 청년의 사명’이라는 주제로 연설했다. 그는 “조선의 모든 현실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청년의 사명이 막중하다. 무산 계층의 비참한 현실을 보다 나은 환경으로 이끄는 것이 청년의 임무이다. 형제들이여, 미래를 낙관하자”고 주장하며 생활문화 향상에 대해 역설했다.잠시 음악 연주가 있은 후, 성천청년회 김병욱 군이 ‘사람의 근본 문제’라는 주제로 연설했다. 그는 “사람이란 원칙적으로 평등하다. 그런데 오늘 밤 연설자들은 ‘내 민족, 내 민족’이라고만 외치고 있다. 그러면 세계 16억 인구 중 조선 민족만 잘살겠다는 말인가?”라고 반문하며,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를 주장했다. 또한 “사람의 근본 문제는 교육에 있다”라고 결론지었다.다음으로 평양 경창문외 예수교 청년회 대표 이홍현 군이 ‘우리의 활로 실천’이라는 주제로 연설했다. 그는 “국제연맹이 우리 민족을 구해줄 것인가? 아니면 코쟁이 백인들이 우리를 구해줄 것인가?”라고 묻고, 절망적 현실 속에서도 유일한 희망은 실천뿐이라며 실천주의를 역설했다.이어 평양 연화동 청년회 대표 오희수 군이 ‘우리 사회 단결의 필요’라는 주제로 연설하며, “우리의 급선무는 경제, 교육, 사상보다도 단결이다. 우리 2천만 민족이 단결만 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조선인의 단결력 부족을 개탄하며 연설을 마쳤다.마지막으로 보성전문 학생친목회 대표 주병서 군이 ‘조선의 현상과 청년의 사명’이라는 주제로 연설했다. 그는 “청년은 사회의 모든 현실을 파괴할 수도, 건설할 수도 있다. 러시아 제국도 청년들에게 주의 사상이 스며들자 붕괴되었다”고 주장하며, 프랑스 혁명을 예로 들어 조선 청년의 사명을 열변했다.이처럼 뜨거운 열기 속에서 첫날의 웅변대회가 마무리되었다.1925년 2월 16일 동아일보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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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아낌없이 주는 북어

    북어 대가리 꾸러미를 겨울볕에 말리고 있습니다. 요즘 보기 드문 광경인데 ‘경로당’ 팻말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절약만이 생존 방식이었던 세대의 풍경이네요. ―서울 종로구 이화동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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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단의 DMZ 사진작가, 사랑과 평화를 담은 꽃 사진의 세계로 초대하다[청계천 옆 사진관]

    당신이 몹시도 그리워 창문 앞에 피어나고개를 내밀고 바라보다가 지쳐 떨어져 죽는 그 순간까지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 [복사꽃의 애절한 사랑 노래], 96쪽한반도에서 피는 꽃을 1월부터 12월까지 종류별로 기록한 사진집 “꽃 따라 세월 따라”을 낸 최병관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건 2010년이다. 군인이 아닌 민간인 신분으로는 처음으로 육군의 지원을 받아 DMZ 155마일을 동쪽부터 서쪽까지 도보로 3번 횡단하며 사진으로 기록한 작품들을 내가 속한 회사(동아일보)와 함께 뉴욕 UN 본부에서 전시하는 일이 있었다. 그는 DMZ 사진을 찍은 다큐멘터리로 이름을 알려 왔지만 원래 시인에 가까운 사진작가였다. 인생과 자연에 초점을 집중해 찍은 사진으로 사진집 20권 이외에 포토에세이 5권, 포토 시집 2권을 이미 펴냈다. 70이 넘은 나이지만 그는 지금도 인천대공원과 시흥 관곡지에 가면 만날 수 있다(250쪽). 새벽 시간이거나 간밤에 비가 왔거나 눈이 왔으면 좀더 오래 그곳에 머문다. 유행이 한참 지난데다 단종된 니콘 카메라를 고집하고 렌즈는 중간 크기 하나만 사용한다. 달랑 카메라 가방 하나만 들고 다닐 뿐(30쪽) 삼각대나 플래시도 없다. 렌즈 앞에는 필터도 없다. 얼마 전부터는 건강에 좋다는 걸 경험한 후 맨발로 다닌다. “꽃 따라 세월 따라”는 한반도에서 1월에 눈 속에 피는 복수초부터 12월 눈 속에 묻힌 국화까지 우리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 꽃에 대한 기록(?)이다. 지난 10년간 촬영한 사진 299장이 실렸다. 기록이라고 하기엔 그의 사진은 무척 독특하다. 맥락을 보여주는데 관심이 많은 신문사 사진기자라서 그런지 내가 보는 그의 사진은 그림에 가깝다. 주제만 남고 여백이 많은 사진 그리고 거기에 붙은 짧은 감상들. 조선시대 채색수묵화 같다. 아이 사진을 잘 찍으려면 아이의 눈 높이로 카메라가 내려가야 한다. 눈이 맞아야 제대로 된 감정이 표현되니까. 땅에 붙어 있는 작은 꽃들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땅에 배를 깔고 찍어야 한다. 그래서 때론 미끄러지고 절벽에서 떨어질 뻔한 아찔한 순간을 맞기도 한다(20쪽). 생각지도 않게 작은, 하얀 노루귀를 뭉개는 실수를 저질러 가슴이 아프기도 한다. 작가가 생각하기에 사진을 잘 찍고 못 찍고는 “주제를 찾는 데 있다. 또한 빛의 강약, 각도, 시간, 위치, 자세에 따라서 남다르게 찍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 공부를 집중적으로 한다면 더 빠르게 더 좋은 사진을 찍을 수가 있다.”그는 평소에 이발소에 갈 때도 카메라를 메고 걸어간다(80쪽). 그래서 그의 하루는 무척 고단하지만(42쪽), 봄을 가슴에 품기 위해 몸살이 나도록 꽃을 찾아 다닌다(40쪽). 그러다보면 누구나 봤지만 아무도 본 적이 없을 것 같은, 줄기 하나에 세 송이 코스모스가 달린 모습의 사진을 찍기도 한다(294쪽).작가는 접시꽃은 일부러 찾아다니지 않는다. 보이면 찍는다(220쪽). 가슴이 두근거려 쫓아다니며 찍는 꽃은 양귀비다. 320쪽에 달하는 책의 표지에는 부천 원미산의 진달래꽃이 실렸다. 누구나 찍을 것 같은 평범한 사진이다. 황홀하고 요염해서 작가가 매료된 양귀비(172쪽) 대신에 왜 이 사진을 대표 사진으로 생각했을까 헤아려 본다. “원미산에는 사랑의 노랫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어린아이들부터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 할아버지들, 바람 소리마저 사랑으로 가득하다. 요즘 원미산은 사람들과 진달래꽃, 봄바람이 하나 되어 기쁨으로 넘치는 세상을 만들고 있다. 또한 오래도록 쌓여있던 마음속 상처마저도 사라지게 하는 곳이 바로 원미산 진달래 동산이다”라는 작가의 시(詩)에서 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월남전 참전용사이자 누구보다 우리의 역사와 땅을 사랑하는 작가는 세상이 평화롭고 안전하길 바란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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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헌법재판소 왜 사진취재 불허하나…100년전 법정과 비교해보니[청계천 옆 사진관]

    이번 주 ‘백년사진’에서 선택한 사진은 1925년 2월 13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법정 사진입니다. 재판을 받는 피의자의 얼굴과 재판을 방청하기 위해 줄을 선 시민들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사진 위에는 피의자가 직접 쓴 붓글씨 이름이 붙어있습니다. ● 헌법재판소 제공 사진의 의미최근 온 국민이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는 재판과 관련하여, 어제(2025년 2월 14일) 동아일보 1면에 실린 사진을 먼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서울 일부 지역에서는 늦은 오후에 열린 겨울아시안게임 여자 피겨에서 금메달을 딴 김채연선수의 사진이 1면을 장식했지만, 전국판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이 헌법재판소 문형배 소장 권한대행에게 오른손을 들어 ‘괜찮다’는 제스처를 취하면서 동시에 왼손으로는 항의하는 변호사를 만류하는 순간이 포착된 사진이 실렸습니다. 해당 사진의 출처는 ‘헌법재판소 제공’으로 표기되었습니다.이와 관련해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헌법재판소에는 이렇게 완벽한 보도사진을 촬영하는 전담 사진가가 따로 있는 것일까요? 혹은 윤 대통령의 얼굴이 다소 부어 보인다는 이유로 부적절한 사진을 선정했다는 비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설명을 드리겠습니다.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헌법재판소 내부에서 실시간으로 촬영하는 사진기자는 없습니다. 헌법재판소는 고정형 카메라를 통해 변론 과정을 녹화하고 있으며, 언론사는 이 영상 파일을 웹하드에서 다운로드한 뒤, 필요한 장면을 캡처하여 보도에 활용하는 방식입니다. 따라서 ‘헌법재판소 제공’이라는 출처가 붙게 됩니다. 그런데 영상을 캡처해서 만드는 사진은 사진기자가 스틸 카메라로 포착하는 현장 사진에 비해 덜 또렷합니다. 대통령과 변호사의 얼굴이 부은 것처럼 보이는 이유입니다. ●사진은 풀로 취재. 사진기자협회에서 4명. 일종의 포토 타임 포토세션에만 촬영그렇다면 신문사에 소속된 사진기자들은 재판을 직접 촬영할 수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진기자들은 헌법재판소와 사전 협의를 통해 ‘POOL(집단 취재)’ 형식으로 변론 장면을 촬영할 수 있습니다. 한국사진기자협회 및 인터넷 언론에 소속된 사진기자들이 매번 변론이 열릴 때마다 4명씩 들어가 취재합니다. 다만, 전체 변론 과정을 촬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재판 시작 후 약 3분~5분 정도 허용되는 ‘포토 세션(photo session)’ 동안만 촬영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실제 공방 과정은 카메라로 기록할 수 없습니다. 헌법재판소는 변론이 끝나면 동영상 파일을 웹하드에 올려놓습니다.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공유받은 언론사들이 영상을 다운받은 후 캡처 프로그램을 이용해 장면 장면을 사진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의미있는 순간을 사용하게 됩니다. 이런 방식이 이번 2025년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을 보도하는 신문사들의 방식입니다. 물론 풀 취재를 통해 확보된 고해상도의 사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만 워낙 초반부에만 촬영한 장면들이라 뉴스의 흐름을 보여주기 어렵습니다. 과거 탄핵 심판 당시에는 헌법재판소가 변론 과정을 영상으로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POOL 취재 사진이 더 많이 사용되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다릅니다. 게다가 최근 동영상 해상도가 향상되고 캡처 프로그램이 발전하면서, 작업이 더욱 용이해진 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100년 전 재판 보도의 방식이번에 소개하는 1925년 동아일보 속 재판 보도 역시 흥미로운 점이 많습니다. 이완용 암살을 기도한 이동수의 공판이 열린 장면이었으며, 방청을 위해 500~600명의 시민이 몰려들어 법원 앞이 혼잡을 이루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동수의 모습뿐만 아니라 그의 필적(서명)까지 함께 실렸는데, 이는 필체를 통해 피의자의 성격이나 심리를 파악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당시 재판부는 ‘공안에 해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방청을 금지한다고 발표하였고, 이에 변호인단은 재판이 공공 질서에 미칠 영향이 없으므로 공개하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하다고 주장하며 방청 금지 조치를 철회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재판을 취재하던 신문 기자들은 이러한 조치에 반발하며, 재판 방청 금지가 과도한 결정임을 지적했습니다. 특히 법정 내에서 사진 촬영을 금지한 조치에 대해서도 반대 의견을 제시하며, 당시 동아일보 김동진 기자 조선일보 박팔양 기자, 시대일보 강호 기자 등이 직접 법원장을 만나 교섭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법원은 기존 방침을 유지하였고, 기자들의 촬영은 결국 허가되지 않았습니다.오늘은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재판과 관련한 피의자 사진과 방청객의 사진을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헌법재판소가 고정 카메라로 촬영 후 익명처리가 필요한 부분만 드러내고 언론과 국민에게 동영상을 공개하는 현재 상황도 살펴보았습니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재판의 공개 수준은 사회적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법정 내 촬영 및 보도 방식이 어떤 방향으로 변화할지 지켜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을 느끼셨나요? 좋은 댓글 부탁드립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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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목공 도구부터 예술

    톱, 펜치, 먹줄, 롤러 등 각종 목공 도구 모양의 장식이 벽에 붙어 있습니다. 젊은 공예가들을 위한 공간이라고 합니다. ―서울 중구 신당창작아케이드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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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손대면 톡! 하고”

    잘 포장된 과일을 만지지 말고 눈으로만 봐달라는 안내문이 붙었습니다.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대∼’라는 노랫말이 생각납니다.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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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각기 다른 색

    각기 다른 색깔의 재봉실이 벽면에 나란히 걸려 있습니다. 아름다운 옷을 만드는 데 저마다 역할을 하겠지요? ―서울 중구 신당지하상가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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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들의 모임 -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청계천 옆 사진관]

    ● 사회부 기자들이 일반 시민들을 상대로 강연회를 열다백년사진 99번째 포스팅입니다. 오늘은 개인 소회를 먼저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백년사진이라는 코너를 시작한 지 2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가능한 1주일에 한 번씩 사진 관련 얘기를 올리려고 했습니다. 다음 주 토요일이면 100회가 됩니다. 아무도 해보지 않은 포맷의 글이라 서툴기도 하고 이 방법이 독자들에게 유용한 콘텐츠인지에 대해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아시겠지만 이 글을 쓰는 저는 동아일보 사진기자입니다. 졸업 후 현재까지 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몇 번의 고민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후회보다는 만족이 큰 직업입니다.현장기자와 에디터 역할을 하면서, 한국의 사진기자들이 지금 찍고 지면과 인터넷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되는 사진이 제대로 길을 잡고 가는 것인지, 혹시 또 다른 방법은 없는지를 생각하다가 ‘온고지신’의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100년 전 근대 신문이 처음 만들어지고 사진기자들이 일을 시작하면서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일을 카메라로 기록하기 시작했던 방식은, 우리가 지금 찍고 유통시키는 이미지의 원류 같은 것일 겁니다. 100년 전 사진기자들이 세상을 기록하기 시작한 방식은 지금까지 변하기도 하고 변하지 않기도 하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많은 연구와 고민이 있었을 겁니다. 미국이나 유럽 사진기자들의 현실 재현 방식이 차용되기도 하고, 미술이나 그래픽의 소통 방식이 사진에 응용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분단 사회라는 특수함과 군부 독재와 민주화의 과정도 우리 사진에는 특징으로 녹아 있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오늘의 신문 사진 형식이 만들어지지는 않았을 거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런 이유로 옛날 사진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래야 더 적절하고 좋은 사진을 신문 지면과 인터넷에 남길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백년사진은 그런 점에서 신문 사진의 답을 구하기 위한 저의 자구책일 수도 있겠습니다. 오늘 고른 사진은 1925년 2월 7일 자 동아일보 지면에 실린 “기자들 모임” 사진입니다. 철필 클럽이라고 하는 사회부 기자들의 모임인데 한국 신문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진일 수 있겠습니다. 아래 여자 토론 사진은 기자들 강연과 관계없는, 조선 여자학원 주최로 천도교 기념관에서 열린 신춘 남녀토론회 모습입니다. 기사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신문 강연 성황이미 보도한 바와 같이 서울 안 각 신문사 사회부 기자로 조직된 철필(鐵筆) 구락부(club)에서 주최한 신문강연회(新聞講演會)는 조선에 아직 이 종류의 강연이 처음이었음과 또 연사가 일반 사회에 날마다 ‘뉴스’를 제공하는 신문 꾸미는 기자이었으므로 정각 전부터 청중이 답지하여 근래에 처음 보는 성황을 이루었는데 이제 그 경과를 자세히 보도하면 정각에 동아(東亞)의 김동진(金東進)씨의 간단한 개회사가 끝나자 뒤이어 조선의 민태원(閔泰瑗)씨의 광장설이 있고 그 다음 동아의 최원순(崔元淳)씨 조선의 리서구(李瑞求)씨 매신(每申.매일신보)의 홍승구(洪承耉)씨 등 여러 변사의 장시간 강연이 끝나자 그다음 자유 등단이 되어 계속하여 조선의 리석(李奭)씨와 동아의 최긍(崔兢)씨의 강연이 있어 청중에게 많은 감흥을 주고 10시 경에 산회하였는데 예정한 변사 동아의 송진우 (宋鎭禹)씨가 사고에 의하여 미참석하였음은 섭섭한 일이었으며 더욱 이번은 전부 사회부 근무 기자로써 한 강연이므로 조선 신문사 역사상에 영원히 기록을 끼쳤다더라.게재지 동아일보 저작권게재일 1925-02-07● 1924년 겨울 결성된 사회부 기자들의 모임 사회부 기자는 사건 사고를 담당합니다. 경찰서 담당 기자, 법원과 검찰청 담당 기자, 시청과 구청 담당 기자 등이 있습니다. 100년 전에도 그랬지만 현재 한국 사회에서도 가장 힘들고 바쁜 기자들입니다. 2024년 말 전남 무안공항에 추락한 제주항공 여객기 사고와 윤석열 대통령 계엄 발표 이후 이어지고 있는 시위와 헌법재판소 변론, 법원에서의 공방 등이 사회부 기자들의 취재 몫입니다. 그런 사회부 기자들이 100년 전 일반 시민들을 상대로 강연을 연 것입니다. 철필 구락부가 어떻게 구성되었던 조직인지 기사를 좀 더 찾아보았습니다. 강연을 열기 3개월 전인 1924년 11월에 관련 기사가 있었습니다. 사회부 기자 중에서 일본인을 제외하고 조선인 기자들만 가입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전에 있던 동우클럽의 후신이라는 설명도 있습니다. 철필 구락 조직 - 각 신문 사회부 기자로 기자단체 조직부내 4군데의 조선문 신문사 사회부 기자 (社會部記者) 20여 명은 그저께 오후 5시경부터 부외 청량리 (淸凉里永導寺)에 모여 철필 구락부 (鐵筆俱樂部)라는 신문기자 단체를 조직하였는데부원의 자격은 어떤 신문사를 물론하고 부내에 있는 신문사에 재근하는 조선인 사회부 기자에 한한다하며 취지는 서로 친목하며 결속하여서 기자생활의 향상을 도모한다는 것인데 형식은 이번에 새로 조직한 것이나 그 전부터 있던 동우구락부(同友俱樂部)의 후신이라더라게재지 동아일보 저작권게재일 1924-11-21 게재여부 게재 [석간]판/면 0 / X2강연이 끝난 후 철픽 클럽이라는 기자협회는 일본인 기자까지 포함하는 조직으로 재편됩니다. 1926년 11월 기사입니다. 사회부 기자단 - 각 사 사회부 기자단체경성(京城)시내에 있는 각 신문 통신사 (新聞通信社) 사회부 기자로 발기한 경성 사회부기자단 (京城社會部記者團)은 그제 3일 오후 5시 반에 시내 돈의동 (敦義洞) 명월관(明月舘)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는데 조선사람 일본사람을 합하여 참가자가 24명이었으며 『신문통신기자 본령(本領)을 본받아 정의(正義)에 입각하여 사회의 순정(純正)한 발달을 기함』이란 강령과 5개조의 규약을 통과하고 간사 5인을 아래와 같이 선거한 후 만찬과 여흥이 있은 후 동 10시 반에 산회하였더라.▲徐範錫(朝鮮日報)▲秋山(京城日報)▲栗原(朝鮮新聞)▲吉浦(電報通信)▲柳志永 (東亞日報)게재지 동아일보 저작권게재일 1926-11-05● 기자들의 모임 - 변한 것, 변하지 않은 것오후 5시를 조금 넘겨 만나서 10시 반쯤 회의와 식사를 마무리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생활 습관 같습니다. 현재 기자들이 소속된 단체가 몇 가지 있습니다. 한국기자협회는 취재기자, 편집기자, 사진기자 등을 포괄합니다. 관훈클럽은 중견 취재기자들 모임입니다. 편집기자협회와 사진기자협회, 어문기자협회 등은 신문사의 직능이 동일한 기자들끼지의 친목 단체입니다. 여기자협회도 따로 존재합니다. 방송사 기자들의 경우 한국기자협회와 함께 방송기자, 영상기자협회에 별도로 가입합니다. 인터넷 언론사의 경우도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단체들을 단체의 공식 홈페이지 내용을 참고해서 설명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기자협회는 전국의 신문·방송·통신사 소속 현직 기자들 1만 3천여명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대한민국 최대의 언론단체입니다.언론자유 수호의 기치를 내걸고 1964년 8월 17일 창립된 한국기자협회는 당시 군사정권이 추진하던 비민주적 악법인 언론윤리위원회법 저지를 위한 투쟁의 구심체로 창립되었습니다.언론자유수호, 기자 자질향상, 기자권익옹호, 조국의 평화통일, 국제교류 강화 등 5대강령을 표방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출처: 한국기자협회()-관훈클럽은 언론 연구와 친목 도모를 위해 1957년 1월 11일 창립한 언론인들의 모임입니다. 창립회원 18명의 작은 모임으로 출범한 관훈클럽은 가장 오래된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한국의 대표적 언론단체로 성장하며 한국의 언론 발전을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현재 회원은 전현직 언론인 1,000여명입니다. - 한국사진기자협회는 사진기자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취재 환경 개선을 통한 언론 문화의 발전과 보도사진의 지속적 연구를 목적으로 지난 1964년 4월 24일 한국사진기자단으로 출발했습니다. 한국사진기자협회 ● 개인적인 기자협회 활동사진기자인 저는 한국기자협회에 회비를 내고 사진기자협회에도 회비를 냅니다. 요즘처럼 좌파와 우파의 갈등이 심한 상황에서는 기자들에 대한 비판 정도가 높아집니다. 안타깝지만 카메라를 메고 있기 때문에 신분을 속이기 어려운 사진기자들에게 집회나 행사 현장에서 따지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기자협회가 언론노조 산하에 있다고 해서 기자들이 민주노총의 지시를 받는다고 단순화해서 말하기도 합니다. 저는 기자단체에 얼마나 참여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매년 열리는 기자협회 축구대회는 10년 전까지는 참가했었고 그 외의 행사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고 있습니다. 가끔 언론의 미래에 관한 세미나 안내가 오면 관심을 갖기는 합니다. 사진기자협회 체육대회는 매년 참가하고 협회 부회장과 감사 역할도 몇 년간 하기도 했습니다. 사진기자협회 회원 중에 국회에 출입하는 기자들은 기자실을 같이 사용하면서 국회사진기자단이라는 임의 단체를 만들어 두고 있습니다. 기자실에서 노트북을 펴놓고 대기하고 있다가 일정이 생기면 국회 내외부에서 사진취재를 합니다. 대통령실출입사진기자단도 있습니다. 이들은 회비를 걷어 기자실 사무용품과 간식비 등을 충당하지만 홈페이지가 따로 있지는 않습니다. 헌법재판소와 서울구치소, 법원 취재 등을 하는 사진기자들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고 그날 그날 인원 배치를 하는 에디터들의 결정에 따라 움직입니다. 사회부 기자들의 경우 경찰청 출입기자단과 검찰청 출입기자단, 법원출입기자단 등이 있지만 홈페이지를 만들어 운영하지는 않습니다.오늘은 100년 전 사회부 기자들의 강연을 기록한 사진을 통해 요즘 기자들 단체에 대해 대략 살펴보았습니다. 이해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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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한때는 다이버!

    한때 다이빙 선수였는데 육지에 올라와서 포즈를 취하려니 영 어색하네요. 손님의 요청에 상인이 굴비를 말리는 중이랍니다. ―서울 중구 서울중앙시장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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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각양각색

    고기를 굽는 불판 모양이 다양하네요. 맛도 조금씩 다르겠죠? ―서울 중구 서울중앙시장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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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흙바닥에서 세계로: 전통 놀이의 놀라운 부활”[청계천 옆 사진관]

    색동옷을 차려입고 머리를 곱게 땋은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무언가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땅바닥에 어떤 물건이 있는지, 어린이들이 무얼 하고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어떤 놀이인지 무척이나 궁금합니다. 공기놀이를 하는 걸까요? 팽이를 돌리는 걸까요? 당시 사진기자는 아이들이 즐기던 놀이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나 봅니다. 어떤 놀이인지 사진설명이 부족합니다. 하지만 사진 설명과 함께 아이들의 옷과 몸에 드리운 그림자는 반대편에 따뜻한 태양이 비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각자 따로 추운 겨울 바깥에 나와 햇볕을 쬐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과 놀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보입니다.매주 토요일 한 주간 실렸던 백년 전 사진을 살펴보는 이번주 ‘백년 사진’에서 고른 사진은 1925년 1월 29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입니다. 귀여운 모습입니다. 내친 김에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어릴 적 놀이를 동아일보 DB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아래 사진이 익숙하시다면 여러분은 아마 나이가 50은 넘으셨을 겁니다. 그 놀이를 하러 나간다고 할 때, 그리고 늦게까지 놀다 들어왔을 때 여러분의 부모님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셨나요? 최근 한국의 드라마 제작자들은 사라졌던 전통 놀이를 스토리텔링에 접목하고 있습니다. 각종 전통 놀이가 생존 게임으로 바뀌면서 글로벌 흥행에 성공했습니다. 시즌 2까지 흥행에 성공한 넷플릭스의 <오징어 게임>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딱지치기 한 판으로 승패를 가르는 장면은 시청자들에게 예상치 못한 긴장감을 선사합니다. 구슬치기의 묘미는 긴박한 심리전으로 재구성되고, 팽이치기는 화려한 특수 효과를 더해 액션 장면으로 변모합니다. ‘둥글게 둥글게’가 생과 사를 가를 수 있는 인생사의 한 장면이라는 것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어릴 적 놀던 놀이가 요즘 드라마의 소재로 활용되고 그게 전 세계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현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는 말을 붙여도 이제는 어색하지 않은 시대가 된 걸까요? 한때 딱지와 구슬에 모든 것을 걸었던 유년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잘 논다는 것이 지금의 개념으로는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게임 또는 핫플레이스를 여기저기 둘러보는 것이라면 옛날에는 팽이치기, 공기놀이, 고무줄 놀이, 딱지치기 뭐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제 유년시절이라고 해 봐야 지금으로부터 40여년 전이니 사실 전통 놀이에 사용할 노리개들을 문방구점에서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노리개의 양과 질에서 선수(?)별로 차이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딱지치기를 한다치면, 신문지로 만든 딱지보다는 마분지 재질의 딴딴한 과자 박스로 만든 딱지의 경쟁력이 높았습니다. 구슬도 개수를 많이 갖고 있는 아이가 베팅이나 경기 참여 횟수가 많기 때문에 더 많은 구슬을 딸 확률이 높았습니다. 팽이도 가격대별로 크기와 회전 안전성에 차이기 있었습니다. 물론 팽이를 완벽하게 만드는 삼촌이 있다면 그 친구는 놀이터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놀이 도구를 준비하는데 드는 비용은 아주 크지 않았고 일단 준비가 끝나면 도구가 주는 변별력은 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집중력과 기술이 중요했고 그 능력은 노는데 투입한 시간에 비례했습니다. 나름 공정한 게임이 펼쳐졌었습니다. 서로의 얼굴을 보며 즐기는 놀이였기에 소통과 상호작용을 배우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전통 놀이는 이제 세대를 넘어 공감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되었습니다. 중장년층에게는 잊고 있던 추억을, 젊은 세대에게는 신선한 경험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놀이들이 콘텐츠로 진화하며 한국적인 정서를 전 세계에 알리는 매개체가 되고 있기도 합니다. 오늘은 100년 전 설날 즈음 흙바닥에 앉아 놀고 있는 어린이들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에서 시작해, 잊혀질 뻔했다 오히려 세계인의 주목을 받을 수도 있는 우리의 전통 놀이 사진을 한번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이 보이시나요? 그리고 댓글로 여러분의 경험을 공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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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연휴 남사당 묘기 보다 박수가 절로

    설 연휴 마지막 날인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공연마당에서 열린 ‘버나돌리기’ 공연을 시민들이 박수를 치며 관람하고 있다. 버나돌리기는 남사당패의 두 번째 재주로 대접과 쳇바퀴 등을 앵두나무 막대기로 돌리는 놀이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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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지켜보고 있다!

    건물 주차장 입구의 나무에 인형이 올려져 있습니다. 마치 외부 차량이 주차하러 들어오는지 지켜보는 듯하네요. ―서울 종로구 동숭동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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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날이 공휴일이 아니던 시절의 고향 방문 풍경[청계천 옆 사진관]

    설 연휴가 시작되었습니다. 백년 전 풍경사진을 하나 골라보았습니다. 1925년 1월 25일자 동아일보 지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색동옷을 비롯한 설빔을 입고 세배를 다니는 소녀들 모습입니다. 가운데 자그마한 어린이는 기쁨이 온 얼굴에 묻어있습니다. 세뱃돈을 받는 즐거움 때문일까요? 앞의 네 명 뒤로 흐릿하게 한복을 입은 어린이들 무리가 보입니다. 지금은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지만 설을 보내던 옛날 한국의 모습입니다. 사진 오른쪽의 흰 무명저고리를 입은 사람은 엄마일수도 있지만 맏언니일 수도 있겠습니다. 형제자매가 많던 시절이라 맏딸들이 어린 동생들을 보살피는 것이 자연스런 모습이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러고보니 같은 설명절이지만 신문에 실리는 사진에는 변화가 있습니다. 도심을 활보하는 사람들보다는 이제는 긴 연휴를 맞아 해외로 나가는 인파로 가득한 인천공항 출국장 풍경이 2025년 설 풍경이 아닐까 싶습니다. 동아일보 DB에 접속해서 옛날 설 풍경 사진을 찾아보다가 재미있는 사진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저 어린이들 사진이 나온 후 50년이 조금 넘은, 지금으로부터 50년이 조금 안되는 중간 쯤 되는 1978년도 사진입니다.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질서 유지를 위해 누군가가 사람들 머리 위로 긴 나무 막대를 휘두르고 있습니다. 어깨에 계급장이 있고 목에 털이 달린 점퍼를 입고 있습니다. 경찰인지 아니면 질서유지를 위한 별도의 공무원인지 제가 과문해서 정확하게 모릅니다. 그 앞에 있는 사람들은 고향으로 가는 차표 예매를 위해 줄을 서 있는 시민들입니다. 지금의 인권 기준으로 보면 있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왜 저런 풍경이 벌어졌을까요? 기를 써서라도 고향을 가려고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하늘이 두쪽 나는 일이 있어도, 집에 누가 큰 병을 앓거나 죽는 일이 아니라면 추석과 설에는 고향에 가서 어른들에게 인사를 해야 하는 시절이었습니다. 문제는 연휴가 길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지금으로서는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설날은 1989년 이전까지 정부와 기업이 인정하는 공식 휴일이 아니었습니다. 개인 휴가에서 제하는 방식이었을테니 휴가가 짧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1989년부터 설날이 공휴일로 지정되었고 설날 전날, 당일, 다음 날까지 총 3일이 연휴로 확정되었습니다. 중간에 휴일이 낄 경우 하루를 더 쉬는 대체 공휴일 제도는 2013년에 처음 도입되었습니다. 대체 공휴일과 주5일제 정착으로 1주일 가까운 휴가가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고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새마을호 무궁화호 같은 철도가 편하기 하지만 인원 제한이 있었을 것이고 기차가 가지 않는 지역은 고속버스가 유일한 교통 수단이었습니다. 물론 지금처럼 모든 가정에 자가용이 있는 시대도 아니다보니 고속버스 터미널은 명절 때면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많은 인원이 몰리다보니 공권력이 질서 유지를 위해 시민들에게 큰 막대기를 휘두르는 사진까지 등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은 사라진, 그러나 여러분들과 부모님들이 주인공이었던 우리의 설날 전후 풍경 사진 몇 장을 함께 감상하시면서 행복한 연휴 보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 설날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으신가요? 댓글로 여러분의 추억을 나눠주세요.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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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쓸쓸할 때 더 잘 보이는 것

    나뭇잎이 무성하던 계절에는 보이지 않던 담벼락 타일이 보입니다. 누군가 남긴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가 쓸쓸한 겨울이 돼서야 비로소 눈에 들어옵니다. ―서울 종로구 이화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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