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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 년 만에 가장 뜨거웠다는 올해 6월은 참 힘드셨죠. 온다, 안 온다 궁금증만 무성했던 장마가 드디어 ‘제대로’ 찾아왔습니다. 위력적으로 쏟아지는 여름비에 어울리는 음악은 무엇일까요. 의외로 클래식 음악가들의 작품에는 비와 관련된 곡이 많지 않습니다. 브람스 가곡 ‘비의 노래’, 그 노래를 주제로 사용한 바이올린 소나타 1번 ‘비의 노래’, 쇼팽 전주곡 ‘빗방울’ 작품 28-5 정도를 꼽고 나면 더 떠올릴 말이 궁해집니다. 그런데 오페라에 폭우 장면을 즐겨 집어넣은 작곡가가 있습니다. 이탈리아 작곡가 조아치노 로시니(1792∼1868)입니다. ‘세비야의 이발사’ ‘신데렐라’를 비롯한 그의 수많은 오페라 후반부에 간주곡을 겸한 관현악의 폭풍우 장면이 등장합니다. 폭풍우라고 하면 배를 뒤집고 방파제를 넘어 마을을 침수시키는 ‘태풍’을 연상하기 쉽지만, 로시니 오페라의 장면에서는 우리나라의 거센 여름비 정도를 생각하면 될 듯합니다. 관현악 연주회장에서 사랑받는 그의 ‘빌헬름 텔 서곡’에도 폭풍우 장면이 나오죠. 조금은 의아합니다. 빌헬름 텔은 스위스 독립운동을 다룬 독일 극작가 실러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오페라입니다. 스위스에 폭풍우가 그렇게 심할까요? 폭풍우 장면은 이 오페라의 4막에도 나옵니다. 한국의 태풍 정도를 연상해선 곤란하고, 루체른 호수 위에 배가 다니기 힘들 정도의 비바람이 치는 상황을 묘사한 장면입니다. 한층 흥미로운 일은 음악 신동이던 로시니가 열두 살 때 이미 폭풍우에 관심을 나타냈다는 것입니다. 그는 1804년 여섯 곡의 ‘현을 위한 소나타’를 작곡했는데, 그 끝 곡인 6번 D장조 소나타 마지막 악장에 ‘폭풍우’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열두 살짜리가 음악으로 표현한 폭풍우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링크와 QR코드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로시니 하면 폭풍이 떠오르듯이, 19세기 중반까지는 특정 장면을 편애하는 오페라 작곡가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후 이런 전통은 사라지다시피 했습니다. 새벽 장면을 묘사하기 좋아했던 20세기 초의 푸치니 정도가 예외가 되겠습니다. 장마 하면 우선 지루하고 지겹다는 생각이 앞서죠? 그래도 힘을 내십시오. 장마철이 지나면 즐거운 휴가가 있지 않습니까. ‘빌헬름 텔’ 서곡에도 폭풍우 장면이 지난 뒤에는 잉글리시호른과 플루트가 노래하는 아름다운 목가(牧歌)가 등장합니다. 그 선율처럼 아름다운 햇살을 믿고 상상해 보면 어떨까요. 유윤종 gustav@donga.com}

1980년대 초반이니 30년쯤 전의 일인가 봅니다. FM에서 차이콥스키의 ‘1812년’ 서곡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러시아가 나폴레옹군을 패퇴시킨 사건을 기념한 작품으로,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와 러시아의 행진곡 선율이 대결하다가 행진곡이 제정(帝政) 러시아의 국가와 얽히면서 장려하게 끝을 맺는 곡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못 들어본 선율이 흘러나왔습니다. ‘앗, 러시아 국가가 나와야 하는 부분인데, 선율이 완전히 바뀌었네. 그렇다면?… 아까 아나운서는 소련 국립교향악단이 연주한다고 했다. 소비에트의 관리들이 혁명 전 러시아 국가에 불쾌감을 느껴 다른 선율로 대치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건 소련 국가 아닐까?’ 등골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철의 장막’ 뒤의 많은 것이 금기시되던 때입니다. ‘라디오 PD가 곤경을 겪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 년이 흘러 88올림픽이 열리고 더이상 공산권 국가가 금기가 아닐 때 소련 국가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비에트판 ‘1812년’ 서곡에 실린 그 선율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된 걸까요. 의문은 그러고도 한참 뒤 인터넷 검색으로 풀었습니다. 그 선율은 소련 국가가 아니라 러시아 민족음악의 아버지 미하일 이바노비치 글린카(1804∼1857)의 오페라 ‘이반 수사닌’에 나오는 ‘영광송’이었습니다. 후배 작곡가인 차이콥스키의 ‘1812년’ 서곡에 자신의 선율이 한때 차용된 일을 알았다면 글린카의 기분이 어땠을까요. 더 기막힌 일은 ‘이반 수사닌’은 원제가 ‘차르에게 바친 목숨’이었을 정도로 제정 러시아에 충성을 표한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선율을 바꾸어 넣을 거면 왜 이 작품을 사용했는지 납득하기 힘듭니다. 차이콥스키가 크림전쟁 전상자 원호 연주회를 위해 작곡한 ‘슬라브 행진곡’에도 제정 러시아 국가가 들어가지만 소련 시절에는 ‘이반 수사닌’의 ‘영광송’을 넣어 연주했다고 합니다. 음악 작품도 이념에 맞춰 손발이 잘려나가는 시대였습니다. 지난해에는 프랑스를 제외한 세계 곳곳에서 ‘1812년’ 서곡이 울려 퍼졌습니다. 한 해 지났지만 우리나라에선 이달 15일 성시연 지휘로 열린 서울시향 강변음악회에서 이 곡이 축제 분위기를 돋웠습니다. 28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김대진 지휘 수원시향 ‘그레이트 컴포저 시리즈-차이콥스키’ 연주회에서는 ‘슬라브 행진곡’이 차이콥스키 교향곡 2번, 김규현이 협연하는 피아노협주곡 1번과 함께 연주될 예정입니다. 물론 원곡 그대로 ‘제정 러시아 국가 버전’입니다. 유윤종 gustav@donga.com}

올해는 음악극 역사의 두 거장인 바그너와 베르디의 탄생 200주년입니다.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항복한 5월, 유럽에서는 바그너의 신화적 세계가 히틀러의 인종주의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크고 작은 재조명이 이루어졌습니다. 바그너와 히틀러를 논하다 보면 또 다른 인물과 마주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이에른 왕국의 왕이자 바그너의 후원자였던 루트비히 2세(1845∼1886)입니다. 바그너의 청년기에 독일은 여러 왕국과 공국으로 분열된 상태였고 이 중 바이에른은 프로이센 다음으로 큰 나라였습니다. 이 나라의 왕세자는 열다섯 살 때 중세의 기사와 백조가 등장하는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보고 매료됐습니다. 3년 뒤 왕위에 올라 루트비히 2세가 된 그는 유럽을 전전하던 바그너를 초청해 전폭적인 후원을 시작합니다. 바그너가 자신의 작품만을 상연하기 위해 1876년 지은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도 막대한 왕의 자금이 투입됐습니다. 1871년 독일이 통일되면서 정치적 실권이 크게 줄어들자 루트비히 2세의 환상세계는 오히려 커져 갔고 그는 중세를 연상시키는 큰 성을 잇달아 지었습니다. 1869년 남부 퓌센에 짓기 시작한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백조를 비롯해 바그너의 음악극 장면들을 연상시키는 장식물로 치장했습니다. 디즈니랜드 ‘백설공주성’의 모델이 된 성입니다. 그러나 이런 건축사업들로 국고를 탕진하게 됐습니다. 결국 장관들은 ‘왕이 미쳤다’며 그를 감금했고, 이튿날 왕은 호수에서 의문의 익사체로 발견됐습니다. 그는 절망에 빠져 자살한 것일까요? 호수는 사람의 키보다 훨씬 얕았습니다. 그러나 왕이 평소 “나는 후대에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는 걸 보면 자살설에도 무게가 실립니다. 그의 죽음이 광기에 의한 것이고, 그 광기가 중세의 환상을 강조한 바그너의 음악극에서 영향을 받았다면, 바그너는 독일 역사상 두 지배자의 광기에 책임이 있는 셈입니다. 바그너의 음악극은 게르만 민족의 설화와 영웅담을 주요한 재료로 다뤘고, 히틀러는 그의 음악을 찬미하며 ‘독일지상주의’ 이념을 굳혔습니다. 물론 차이는 있습니다. 바그너도 히틀러처럼 유대인을 경멸했지만 그들이 유대 문화를 포기하고 독일 사회에 흡수돼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 유대인을 격리하거나 박멸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6월 13일은 127년 전 루트비히 2세가 호수에서 의문의 익사체로 발견된 바로 그 날입니다. ‘로엔그린’ 일부를 비롯한 바그너의 신화적 작품들은 다음 링크 주소와 QR코드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유윤종 gustav@donga.com}

“어떤 작곡가를 좋아하세요?” 흔히 듣는 질문입니다. 글쎄요. 좋은 작곡가가 너무 많은데 어떻게 대답할까요. 제가 어떤 자리에서 나눈 대화는 이렇습니다. “저는 사진이 남아있는 작곡가가 좋습니다. 그렇지만 넥타이 맨 사람은 별로죠.” “그러시군요. 저는 가발 쓴 작곡가가 좋은데….” 초상 사진은 1850년경 유럽의 사회적 관습이 되었습니다. 후기 낭만파 또는 민족주의 작곡가부터 사진을 남겼습니다. 오늘날 흔한 ‘포 인 핸드’형 넥타이는 1890년경 유행이 시작됐습니다. 보로딘 정도를 빼면 이런 넥타이를 맨 작곡가는 거의 ‘현대 음악가’입니다. 모차르트나 바흐의 초상화에서 볼 수 있는 가발은 17세기 프랑스 궁정에서 시작돼 18세기 전 유럽 귀족사회에 퍼져나갔다가 18세기 말 쇠락을 맞았습니다. 베토벤 이후 가발을 쓴 작곡가는 보지 못한 듯합니다. 그렇다면, 작곡가의 사진만 보고 스타일을 예측하는 것도 가능할까요? 고전파나 낭만파 대신 가발파, 초상화 비(非)가발파, 넥타이파, 사진형 비(非)넥타이파…. 얼마든지 예외가 있지만 이런 설명도 가능할 듯합니다. 가발파는 귀족사회와 교회를 위해 음악을 만들었고 그 결과 명쾌함과 형식미를 강조했습니다. ‘초상화 비가발파’는 귀족의 저택을 뛰쳐나와 돈 많은 자영업자들을 극장에 불러놓고 음악을 들려주었습니다. 처음 이들의 음악은 귀족에 반항하는 시민계급 의식에 영향을 받아 격동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시민혁명이 좌절되자 이들은 사소한 일상과 로맨스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습니다. ‘사진형 비넥타이파’는 발전하는 과학기술의 시대에 살았습니다. 큰 공장들을 세워 거부가 된 시민계층은 다시금 스스로 위대해지고자 했습니다. 이 시기에 음악가도 스케일이 컸습니다. 민족의 흥망과 신들의 투쟁이 이들이 즐겨 다룬 주제였습니다. 넥타이파는 대부분 이전까지의 음악 전통을 거부하고 각자 자신만의 음악문법을 사용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가 아는 작곡가의 이름을 대입해 볼까요? 가발파=비발디 하이든 모차르트. 초상화 비가발파=베토벤 슈베르트 슈만 멘델스존. 사진형 비넥타이파=바그너(초상화도 있음) 생상스 차이콥스키…. 생각나는 이름만 대략 꼽았습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과장됐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거친 분류입니다. 그렇지만 이 점은 기억해 두시면 좋겠습니다. 음악가 또한 ‘고독한 단독자’가 아니라 ‘시대의 아이’라는 것. 예술작품은 어쩔 수 없이 시대의 산물이란 점 말입니다. 유윤종 gustav@donga.com}

‘오월의 아름다운 날과 같이, 미풍의 입맞춤, 그리고 햇살의 애무가 깃든 날. 그러나 그 또한 지평선 너머 사라져 버리나니….’ 절명창(絶命唱) 또는 사세가(辭世歌)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을 뜨면서 부르는 노래를 뜻합니다. 보통 말하는 ‘백조의 노래’와는 다릅니다. 요동치는 시대의 한가운데 선 의기 넘치는 우국지사나 열사, 또는 사상가가 원통하게 세상을 뜨면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앞에 적은 글은 움베르토 조르다노의 오페라 ‘안드레아 셰니에’(1896년)에 나오는 주인공 셰니에의 아리아 ‘오월의 아름다운 날처럼’ 가사입니다. 이 노래 역시 우리 ‘콘셉트’로는 전형적인 절명창 또는 사세가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의 가사는 애끊는 충절을 노래하지 않습니다. 대신 지극히 탐미적인, 감각적인 지상의 아름다움을 예찬함으로써 오히려 듣는 이를 울컥하게 만들고 맙니다. 비슷한 맥락의 노래로 푸치니 ‘토스카’(1900년)에 나오는 남자주인공 카바라도시의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을 들 수 있습니다. ‘별들은 가물거렸고, 정원에는 달콤한 대기, 휘파람처럼 삐걱거리는 문소리, 모래를 스치는 발자국. 향내와 함께 내게 안겨온 그녀….’ 두 오페라의 주인공 모두 시대의 격동 속에서 목숨을 잃었지만 대단한 운동가는 아니었습니다. ‘안드레아 셰니에’의 모델인 앙드레 셰니에는 프랑스대혁명 당시 진보적 사상을 전파한 시인이었으나 급진주의자들의 공포정치에 희생됐습니다. ‘토스카’는 나폴레옹과 나폴리왕국이 로마를 두고 공방을 벌이던 19세기 초가 배경입니다. 이 오페라의 남주인공인 카바라도시도 반동정치에 대한 혐오를 표현하고 있으나 단지 도망자인 친구를 숨겨주었다는 죄목으로 ‘달콤한 대기의 향내’도 저버린 채 목숨을 잃습니다. 6월 20∼22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는 글로리아오페라단이 푸치니 ‘토스카’를 공연합니다. 날짜를 절묘하게 정한 것 같습니다. ‘토스카’의 역사적 배경을 원작자 빅토리앵 사르두는 ‘1800년 6월 18일 오후에서 19일 새벽’으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에 나오듯 대지에서 온갖 향기가 풍기는 계절입니다. 이런 계절의 하루도 안 되는 시간을 배경으로 무대 위에서는 고문과 성추행, 살인, 사형과 자살의 피비린내 나는 장면이 펼쳐집니다. ‘안드레아 셰니에’의 배경은 가사에 나와 있듯 5월입니다. 영화 ‘필라델피아’에 나오는 ‘어머니는 돌아가시고’가 이 오페라 속의 소프라노 아리아죠. 우리나라에서도 5월과 6월은 피 끓는 격동의 계절이었습니다. 유윤종 gustav@donga.com}

‘한 아이가 보았네, 들에 핀 장미꽃….’ 괴테의 시 ‘들장미’입니다. 어릴 때 배운 하인리히 베르너 작곡 ‘들장미’가 떠오릅니다. 슈베르트가 같은 가사에 곡을 붙인 ‘들장미’도 있습니다.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우리나라에선 ‘월계꽃’이란 제목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처럼 같은 가사에 다른 선율을 붙인 곡을 종종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소개한 차이콥스키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도 괴테의 시에 슈만을 비롯한 여러 작곡가가 곡을 붙였지만 유독 차이콥스키의 노래가 사랑을 받습니다. 그런데 짧으면 30분, 길면 두 시간 가까운 대곡이 같은 가사로 쓰여 있다면 어떨까요. 그것도 모차르트, 베를리오즈, 베르디를 비롯한 수많은 대작곡가가 같은 가사에 곡을 붙였다면? 가톨릭교회 미사에 사용되도록 작곡된 ‘미사곡’입니다. 미사곡에서 ‘불쌍히 여기소서(Kyrie)’ ‘영광(Gloria)’을 비롯한 다섯 개 라틴어 가사는 반드시 넣도록 되어 있어 작곡가마다 같은 가사를 어떻게 표현했는지 비교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미사곡 중 ‘레퀴엠’이라는 장르가 있습니다. 우리말로 ‘진혼곡’ 또는 ‘장송곡’이죠. 망자에게 애도를 표하며 영원한 안식을 비는 미사곡입니다. 일반 미사곡과는 가사 구성이 다르지만 역시 ‘불쌍히 여기소서’를 비롯한 몇 가지는 공통됩니다. 레퀴엠에 대부분 포함되는 부분으로 최후 심판을 묘사하는 ‘분노의 날(Dies Irae)’이 있습니다. 칼럼 끝부분의 QR코드를 찍어 베르디의 ‘분노의 날’을 들어보시면 익숙하게 느끼실 것입니다. 수많은 TV 프로그램에서 ‘분노’의 감정을 나타내는 데 사용하는 음악입니다. 모차르트의 ‘분노의 날’도 영화 ‘아마데우스’를 통해 기억하는 분이 많을 듯합니다. 둘의 차이도 흥미롭습니다. 베르디가 재난에 가까운 ‘분노’를 쏟아놓는다면, 모차르트는 쫓기는 듯한 공포와 초조감을 짙게 전달합니다. 2일 정명훈 지휘로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된 서울시립교향악단의 베르디 ‘레퀴엠’에 대한 호평이 많았습니다. 13일에도 최영철 지휘 서울오라토리오합창단·오케스트라가 같은 곳에서 이 곡을 연주했습니다. 호국의 달인 6월에도 전통적으로 ‘레퀴엠’ 연주가 많죠. 다음 달 1, 2일 LG아트센터에서는 필리프 헤레베헤 지휘 샹젤리제 오케스트라와 콜레기움 보칼레 겐트 합창단이 모차르트의 유작 ‘레퀴엠’을 선보입니다. 다음 달 7일에는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빈프리트 톨이 지휘하는 대전시립합창단·교향악단이 ‘프랑스인의 따스한 레퀴엠’으로 불리는 포레의 ‘레퀴엠’을 연주합니다. 유윤종 gustav@donga.com}

주변이 희부옇게 밝아오는 느낌에 잠에서 설핏 깨어났습니다. 창밖에는 새들의 높고 낮은 지저귐. 이어 아득히 산과 산 사이에 메아리치는 나팔 소리. 멀리서 쿵, 하고 대포 소리 같은 것이 들렸습니다. 정신이 맑아지기는커녕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이 느낌, 굉장히 익숙한데, 언젠가 경험한 것 같아.”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1번 1악장 서두에 이 모든 소리의 풍경이 차례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새소리를 묘사하는 목관, 무대 뒤에서 부는 나팔 소리, 쿵 하는 소리. 여관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쿵 하는 소리 뭐였죠?” “오늘 노동절이잖아요. 축포 소리예요.” “나팔 소리는요?” “노동절 퍼레이드의 금관 합주죠.” 바로 11년 전 5월 1일, 오스트리아의 할슈타트 호반이었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의 음악회장에서 베토벤과 맞먹는 인기를 누리는 구스타프 말러. 그는 예술적 야망이 무척 컸습니다. 그는 “교향곡은 세계를 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음악으로 표현 못할 것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 당대의 시대정신이기도 했지만, 그는 세계의 모든 것이 자신의 작품 목록에 고스란히 담겨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말러는 1번 교향곡 개정판을 발표한 1893년, 할슈타트 호에서 멀지 않은 아터 호반에 작업실을 냈습니다. 그는 높은 산과 호수가 어울리는 이 지역의 풍광을 평생 사랑했습니다. 휴일 호반의 새벽에 느낀 모든 것을 그는 교향곡 1번 서두에 집어넣었고, 우연하게도 제가 5월의 어느 날 그것과 똑같은 세계를 귀로 느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교향곡 1번의 서두 부분에서 더욱 흥미로운 것은 곡이 시작되자마자 등장하는 현악의 높은 A음입니다. 신경의학자들은 이를 “외부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을 때, 한밤중이나 새벽에 귀가 느끼는 높은 주파수의 소리”를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이 소리에 이어 아침 풍경의 묘사가 등장하는 것을 보아도 이 부분은 아무런 청각적 자극이 없는 새벽을 나타낸다는 분석은 자연스럽습니다. ‘신호 없음’까지 소리로 표현할 정도로 말러는 정밀한 세부 묘사에 집착했나 봅니다. 말러의 예술적 야망은 1000명 가까운 연주자가 등장한다고 해서 ‘천 인의 교향곡’으로 불리는 교향곡 8번에도 나타납니다. 그는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곡은 우주가 울리는 소리를 담고 있다”는 자부심을 드러냈습니다. 자기도취로선 스케일이 천문학적인 셈이죠. 그런 자존감이 오늘날 그를 숭배하는 수많은 ‘말러리안’을 낳은 것이 아닐까요. 유윤종 gustav@donga.com}

휴일 아침, 포털 검색어 1위가 ‘차이콥스키’인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무슨 일일까. 알고 보니 TV 프로그램에 “그는 동성애자였고 이를 알게 된 법률학교 동문들의 강요로 자살했다”는 내용이 나온 것입니다. 클래식 애호가에게는 ‘서프라이즈’ 하지 않은 내용입니다. 자살이 맞을까요? 죽기 직전 차이콥스키의 심리 상태를 살펴보면 단서를 얻을 수 있을 듯합니다. 그가 일기나 편지에 이를 직접 암시한 내용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비창’의 선율에 사용된 시나 ‘가사’를 알아보면 어떨까요? “농담이겠지…‘비창’은 독창이나 합창이 들어가지 않은 교향곡인데 무슨 가사가 있다고.” 맞습니다. 그러나 단서가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이 교향곡의 1악장에는 누구나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슬픈 선율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런 선율은 차이콥스키에게 새롭지 않습니다. 같은 길이의 짧은 일곱 음표가 이어지는데 그 끝이 살짝 올라갑니다. 그는 초기 가곡인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 관현악 모음곡 3번 1악장 ‘비가’(엘레지), 교향곡 4번 2악장에서 이런 선율을 썼습니다. 예부터 하행(下行)음형은 탄식, 슬픔, 애도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지만 차이콥스키의 이 음형은 특히 개성이 뚜렷합니다. 오페라 ‘예프게니 오네긴’에 나오는 렌스키의 아리아 ‘어디로 갔나, 내 아름다운 날들은’은 끝이 들리지 않고 첫 음이 살짝 긴, 변형된 형태로 등장합니다. 이제 ‘비창’과 비슷한, 이 곡들과 관련된 글귀들을 죽 병렬해 볼까요. “모든 즐거움에서 떨어져 나와, 나는 홀로.”(‘그리움을 아는 이만이’ 가사)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모든 것이 암흑 속.”(‘렌스키의 아리아’ 가사) “과거를 탄식하고 그리워하지만 새롭게 시작할 의지도 용기도 없습니다.”(차이콥스키가 교향곡 4번 2악장의 내용에 대해 후원자인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낸 편지) 어떻습니까. 비슷한 선율을 가진 작품에 대해 연관된 모든 텍스트가 “나는 과거를 그리워하며 괴롭고 출구를 찾을 수 없다”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이 같은 일련의 음형 속에서 가장 절절하고 서글픈 선율을 뽑아내 대작을 완성한 직후 차이콥스키는 갑자기 사망한 것입니다. 저는 요즘 차이콥스키의 비감한 선율을 실컷 듣고 있습니다. 동아일보와 서울시 주최로 열리고 있는 ‘LG와 함께하는 서울국제음악콩쿠르’(19∼27일)에서 유독 많은 참가자가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와 ‘렌스키의 아리아’를 예선 과제곡으로 준비했거든요. 슬퍼지냐고요? 글쎄요…. 유윤종 gustav@donga.com}

1876년 전화, 1879년 전구, 1885년 벤츠의 자동차…. 19세기 후반은 기술문명이 폭발적으로 발전하며 인간의 삶을 상상하지 못했던 단계로 이끈 시기입니다. 이 시기는 교향악의 황금시대이기도 합니다. 유럽과 미국의 명문 오케스트라 대다수가 이 시기에 창립됐습니다. 산업혁명으로 공장을 세우고 부를 축적한 시민계급이 음악회장으로 몰려갔던 것입니다. 이 시대 연주된 음악작품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당시는 바그너와 베르디, 브람스와 브루크너, 차이콥스키와 러시아 5인조의 활동기였습니다. 자연과 서정, 추억과 정열을, 아니면 신화와 전설, 영웅들의 무용담을 음악극이나 대편성 관현악곡에 쏟아 넣었습니다. 신문명이나 공학기술, 인류의 발전 같은 시대정신은 엿보이지 않는 듯합니다. 그러나 꼭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프랑스 작곡가 카미유 생상스(1835∼1921·사진)의 작품에서 우리는 과학과 진보의 당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생상스라고? ‘동물의 사육제’ 작곡가?” 그렇습니다. 작곡가 자신의 말대로 ‘심심풀이로 쓴’ 작품이 그의 대표작 취급을 받는 것은 씁쓸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작품도 생상스의 중요한 특징을 드러냅니다. 거북, 코끼리, 캥거루, 화석…. 지식이 폭발적으로 확장되던 시대,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박물지적, 만국박람회적’ 시대 분위기를 반영 또는 풍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음악 말고 생상스의 평생을 관통한 관심사는 천문학과 중동(아랍)이었습니다. 프랑스 천문학회 정회원이었던 그는 천체망원경을 직접 제작했고 신기루 같은 대기현상에 대해 강연을 열기도 했습니다. 또 그는 달 표면처럼 거친 건조지대의 풍경을 사랑했습니다. 그의 오페라 중 대표작은 팔레스타인이 무대인 ‘삼손과 델릴라’이며, 피아노협주곡 5번의 제목은 ‘이집트풍’ 입니다. 친근한 문명세계가 아니라 낯선 것, 모험, 신비의 세계가 그의 관심사였습니다. 그런 그를 저는 ‘음악계의 쥘 베른’이라고 부르겠습니다. ‘80일간의 세계일주’ ‘해저 2만 리’를 쓴 베른이 생상스와 만났다는 기록은 없지만, 두 사람은 동일한 시대정신을 소유했습니다. 17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는 김대진 지휘 수원시향이 생상스의 교향곡 3번 ‘오르간’을 연주합니다. 올해 교향악 축제 마지막 날 순서로, 대편성 오케스트라와 오르간이 어울리는 장려한 작품입니다. 황량한 사막에 넘쳐흐르는 신비의 샘물과 같은 화음을, 밤하늘에 오색 빛 찬란한 레이저를 쏘는 것 같은 장려한 음향을 느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유윤종 gustav@donga.com}

“소년은 당대 대(大)화가의 그림을 옮겨 그리며 미술을 공부했지. 얘기를 들은 화가도 소년을 찾아 격려했단다. 어느 날 화가가 갑자기 돌아가셨어. 그의 풍경화에는 ‘한낮의 반달’이 나오는 게 특징이었는데, 소년도 그를 본떠 풍경화에 한낮의 달을 그리기 시작했어. 단 선배 화가와는 달리 반달이 아니라 초승달로.” 어떤 화가의 일화냐고요? 방금 상상해낸 동화입니다.ㅎㅎ 갓 나온 프로그램 책자를 받아듭니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3번,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 미소가 지어집니다. “사제(師弟) 간 발자국이 뚜렷하군.” 동아일보사-예술의전당 주최로 개막한 ‘한화와 함께하는 교향악축제’의 11일 금노상 지휘 대전시립교향악단(피아노 협연 김태형) 순서입니다. 라흐마니노프는 차이콥스키가 초기에 교수로 활약했던 모스크바 음악원의 유망주였습니다. 차이콥스키는 서유럽에 라흐마니노프를 널리 소개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차이콥스키를 라흐마니노프는 정신적 버팀목으로 생각했습니다. 차이콥스키가 숨지자 그를 추모하는 피아노3중주곡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대전시향이 연주할 곡들을 들어봅시다. 맨 끝 부분만요.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은 ‘따따따 딴’으로 끝납니다. 세 음표가 나란히 이어진 뒤 마치는 음표가 하나 더 나옵니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3번은 ‘딴 따따 딴’입니다. QR코드나 아래 주소로 직접 들어보세요. 매우 닮았으면서도 약간 다릅니다. 지난번 간단히 언급한 일도 있지만 차이콥스키는 긴 작품이나 악장을 ‘따따따 딴’으로 끝내기를 즐겼습니다. 교향곡 6번 ‘비창’ 3악장, 발레 ‘호두까기 인형’ 1막…. 이를테면 “들었지? 이거 내 작품이야”라며 ‘발자국’을 남겨놓는 것과 같습니다. 낙관(落款)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차이콥스키를 경모했던 라흐마니노프도 이 습관을 따라했습니다. 단 똑같지는 않습니다. 셋잇단음표가 아니라 4분음표 하나에 8분음표 두 개가 이어지는 ‘딴 따따 딴’ 리듬을 주로 사용한 것입니다. “저는 차이콥스키의 정신적 제자입니다. 하지만 똑같지는 않고 저만의 개성이 있죠”라고 말하는 듯하지 않습니까. 그의 피아노협주곡 2, 3번이 모두 이 리듬으로 끝납니다. 바로 오늘(4일) 유광 지휘 청주시향이 교향악축제에서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2번은 더 재미있습니다. 차이콥스키식 마침과 라흐마니노프식 마침을 절충한 ‘딴 따따따 딴’으로 끝나거든요. ‘차이를 알겠어?’라며 씩 웃는 라흐마니노프의 미소가 보이는 듯합니다. 유윤종 gustav@donga.com}

국립오페라단이 21∼24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한 베르디 ‘팔스타프’에서는 막이 오르기에 앞서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 중 ‘님로드’가 연주됐습니다. 최근 별세한 이운형 국립오페라단 후원회장을 추모하는 연주였습니다. 제목이 왜 ‘수수께끼’ 변주곡일까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낱낱의 변주(變奏)가 작곡가의 지인들을 표현했습니다. 그 주인공들을 맞혀 보라는 게 첫 번째 수수께끼입니다. 두 번째로는 이 곡 전체에 작곡가가 숨겨놓은 비밀 또는 암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도전했지만 명쾌한 해답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엘가 코드(code)’입니다. 저도 학생 시절 이 수수께끼에 매혹됐습니다. 주제 선율을 앞뒤로 뒤집어보기도 했고, 계이름이 ‘도-라’로 시작된다는 점에서 엘가와 친분이 있었던 여인 도라 페니와 관계있는 것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엘가는 다른 대가가 내놓은 또 다른 수수께끼에 자기를 결부시킨 게 아닐까?” 순간 앗, 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베토벤은 마지막 현악4중주인 16번 작품 135의 끝악장 악보에 알쏭달쏭한 말을 적어놓았습니다. ‘그래야만 하는가(Muss es sein)?’ ‘그래야만 한다(Es muss sein)!’ 답은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습니다. 심오한 예술적 방향의 모색이라는 주장부터, 하녀의 급료를 올릴 것인지 고민한 것이라는 설까지…. 저는 그 악보를 뒤집고 비틀어 보다가 선율의 아래위를 뒤집는 ‘반전’ 기법을 이용해 봤습니다. 70년 전 바로 오늘 별세한 라흐마니노프가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제18변주에서 사용했던 수법입니다. 반음 내려가던 것은 반음 올라가는 것으로, 세 음 아래로 가던 것은 세 음 위로 가는 것으로 뒤집는 식입니다. 그 결과는? ‘수수께끼 변주곡’ 주제 처음 다섯 음의 진행을 뒤집어 보니 베토벤의 ‘그래야만 한다’ 동기 여섯 음의 진행과 똑같았습니다. 수수께끼 변주곡의 아홉 번째 변주인 ‘님로드’도 심상치 않았습니다. 첫 부분 계이름 ‘(미)-도-파-레-솔’의 앞뒤를 거꾸로(역행) 연주하면 솔-레-파-도가 됩니다. 역시 ‘그래야만 한다’ 동기의 네 음과 같습니다. 저는 수수께끼를 푼 것일까요. 여러 가설에 하나를 더 보탰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엘가의 수수께끼는 베토벤의 물음에 대한 응답으로 나왔다!” 최근 별세한 황수관 박사가 애용한 말을 빌리자면 “사실이 그렇다기보다 제 생각이 그렇다는 겁니다”. 유윤종 gustav@donga.com}

지난달 지면에 “라모의 ‘탕부랭’과 김건모가 부른 ‘짱가’ 일부가 닮았다”라는 얘기를 썼죠. 몇몇 독자와 지인들이 예민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모방했다는 건가요?” 글쎄요. 생각난 김에 모방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닮은꼴’ 선율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올해도 동아일보와 서울 예술의전당이 주최하는 ‘교향악축제’가 4월 1일 개막합니다. 3일엔 성시연 부지휘자가 지휘하는 서울시립교향악단이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신지아 협연)과 교향곡 2번을 연주합니다. 그런데 브람스 교향곡 2번 첫 악장에는 귀에 익은 선율이 등장합니다. 바로 브람스 자신의 자장가(‘잘 자라 내 아기, 내 귀여운 아기…’) 시작 부분을 닮은 선율입니다. 여기까지는 알 만한 분들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악장을 듣다 보면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선율이 또 나옵니다. 영화 ‘메리 포핀스’에 나오는 ‘침침체리’ 기억하시나요? ‘종소리’라는 우리말 제목으로 번안되기도 한 노래인데, 여기서 ‘바람결 따라 저 멀리서’ 가사 부분입니다. 계이름으로 풀면 ‘레미레 도레도 시도시 라’가 되겠습니다. 10개 음표의 진행이 같습니다. 영화음악가가 브람스를 표절한 것일까요. 어떻게 보면 빼도 박도 못할 표절 같기도 합니다. 한 옥타브에 12개 음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어지는 10개 음이 같을 확률은 12분의 1의 9제곱, 천문학적으로 낮은 확률입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요?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 언어에서 ‘버’ 다음에는 ‘스’란 음절이 나올 확률이 다른 음절보다 훨씬 높은 것처럼, 사람들의 귀에 자연스럽게 들리는 진행이 있기 마련입니다. 위 ‘침침체리’ 진행도 우연히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레-도-시-라’로 한 음씩 자연스럽게 내려가도록 한 뒤, 그 네 음 각각이 중간에 한 음씩 올라갔다가 내려오도록 ‘볼록’ 기복을 준 것에 불과합니다. 얼마든지 우연히 닮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귀 기울여 보면 고전음악 작품 사이, 고전음악과 대중음악 사이에도 묘하게 닮은 선율을 자주 발견할 수 있죠. 라벨 ‘볼레로’는 빌리 조엘의 ‘업타운 걸’과 시작 부분이 묘하게 비슷합니다. 브루크너 교향곡 4번 시작 부분에는 구노의 ‘아베 마리아’와 ‘닮아도 너∼무 닮은’ 음형이 등장합니다. 말러 교향곡 3번 첫 악장에는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의 ‘마음껏 드세요(Be our guest)’와 매우 닮은 음형이 있습니다. 궁금한가요? 궁금하면, 다음의 주소나 QR코드에서 들어보실 수 있습니다! 유윤종 gustav@donga.com}

국내 브런치 콘서트의 원조인 ‘그 남자’가 새로운 브런치 콘서트로 관객을 초대한다. 오전 11시대에 여는 브런치 콘서트는 국내에선 보기 힘든 공연 장르였지만 2004년 김용배 당시 서울 예술의전당 사장(피아니스트·추계예대 교수·사진)이 도입해 직접 해설을 맡으면서 예술의전당 인기 메뉴로 만들었다. 이후 다른 공연장들도 앞다퉈 브런치 콘서트를 개설해 자녀를 등교시킨 뒤 마음 편한 시간의 주부들에게 푸근한 예술의 향기를 선사했다. ‘그 남자’ 피아니스트 김용배의 이번 무대는 경기 안양시 갈산동 평촌아트홀이다. 이달 12일부터 매달 둘째 주 화요일(8월 제외) 오전 11시에 김 교수의 해설로 진행한다. 첫 무대인 3월 콘서트의 부제는 ‘영롱한 아침’. 봄의 생명력을 연상시키는 싱그러운 실내악을 프로그램에 올렸다. 하이든 현악4중주 ‘종달새’, 풀랑크 플루트 소나타, 체레프닌 3중주 환상곡, 몬티 차르다시를 선보인다. 피아니스트 주희성(서울대 교수), 첼리스트 이강호(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바이올리니스트 양고운(경희대 교수)을 필두로 ‘연부역강’이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은 30, 40대 연주계 대표 주자들이 무대를 채운다. 김 교수는 “음악예술의 정수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처음 들어도 즐겁게 감상할 수 있는 작품들로 프로그램을 구성했다”며 “아는 만큼 음악이 들리는, 유익한 자리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1만8000원(브런치 미포함 시 1만5000원). 031-687-0555유윤종 선임기자 gustav@donga.com}

새봄 교향악계의 대세는 베토벤 교향곡 7번입니다. 베르나르트 하이팅크가 지휘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지난달 28일 이 곡을 선보인 데 이어, 이달 14, 15일에는 정명훈 지휘 서울시향이 같은 작품을 연주합니다. 4월 내한하는 로린 마젤 지휘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도 공연 첫날인 4월 21일 프로그램에 이 곡을 넣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곡은 올해 200회 생일을 맞이하는군요. 1813년 12월 8일 빈에서 초연됐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벤트가 범상치 않습니다. 제가 지난해 한 칼럼에서 언급한 일이 있습니다만, 이번 기회에 한층 상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범상치 않다는 것은 연주에 참여한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면면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바이올린에 살리에리 마이어베어 후멜 슈포어, 첼로에 줄리아니, 더블베이스에 드라고네티라는 초호화 멤버입니다. 오늘날에도 작곡가로 ‘먹어주는’ 명장들이 한무대에 오른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당시 연주회가 나폴레옹 전쟁에서 부상 입은 병사들을 후원하기 위한 국가적 차원의 ‘보훈 음악회’였던 데 있습니다. 명분이 훌륭한 행사는 당대의 스타들을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 난민을 돕기 위한 1985년 ‘위 아 더 월드’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이 명장들을 더 상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살리에리는 영화 ‘아마데우스’의 두 번째 주연이니 거듭 설명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베토벤에게는 오페라와 칸타타 작곡법을 가르친 스승이기도 합니다. 죽기 전 혼미한 상태에서 ‘내가 모차르트를 죽였다’고 말했다고 합니다만, 그가 실제로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것은 조사 결과 부정되고 있습니다. 마이어베어는 19세기 전반 프랑스 오페라계를 장악했던 주인공입니다. ‘대관식 행진곡’이나 오페라 ‘아프리카의 여인’ 중 ‘오 낙원이여’가 즐겨 연주됩니다. 후멜은 다양한 악기를 위한 협주곡으로 인정받은 인물입니다. 베토벤의 인기를 잠식한 명피아니스트기도 했죠. 슈포어는 오늘날에도 바이올린 협주곡과 피아노 3중주가 애호받고 있습니다. 줄리아니는 첼리스트로서보다 기타리스트로 인정받았습니다. 기타를 위한 협주곡이나 변주곡들은 21세기의 클래식 기타리스트들에게도 경전과 같습니다. 드라고네티는 보테시니와 더불어 콘트라베이스라는 육중한 악기를 위해 많은 명작을 남긴 인물입니다. 이 악기를 전공하는 학생들에게는 피해갈 수 없는 명장이죠. 이 베토벤의 동시대 거장들이 남긴 작품들을 듣고 싶습니까? 여기 실린 QR코드를 찍거나 다음의 주소를 인터넷 주소창에 입력하면 들을 수 있습니다. 알고 계시죠? http://classicgam.egloos.com/194623유윤종 gustav@donga.com}

‘스토리’가 중요한 시대라고 합니다. 그런데 꽤 재미있지만 알려지지 않은 명곡의 뒷얘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슈만의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가 그렇습니다. ‘미쳐서 죽은 작곡가의 유작’ ‘후세 음악가들에게 나타난 작곡가의 유령’ ‘한 세기나 늦게 발견돼 세상에 나온 작품’…. 이미 수많은 흥미 요소를 갖춘 셈이죠. 그런데도 슈만에게 바이올린 협주곡이 있었는지조차 몰랐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슈만은 43세 때인 1853년 이 곡을 작곡해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요하임 아닙니다)에게 초연을 의뢰하며 악보를 맡겼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초 그는 정신착란으로 강물에 뛰어들고, 이후 정신병원에 입원해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악보를 훑어본 요아힘은 구성이 완벽하지 않다는 인상을 갖게 되고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에서 쓴 작품이로군. 발표하면 오히려 슈만의 명예에 누가 되겠다”라고 생각했던 듯합니다. 그는 베를린의 프러시아 국립도서관에 악보를 넘겨주고 이에 대해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슈만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세간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은 80년이 지난 1933년 3월의 일이었습니다. 요아힘의 조카손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인 옐리 다라니와 아딜라 파치리 자매가 런던에서 열린 교령회(交靈會)에 참석했다가 “슈만의 유령이 찾아왔어요. 잊혀진 바이올린 협주곡을 찾아달라네요.” “요아힘 할아버지가 그 악보는 프러시아 국립도서관에 있다고 했어요”라고 ‘헛소리’를 해댄 것입니다. 교령회란 당대에 유행했던 풍속으로 우리의 ‘굿’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진짜 슈만의 유령이 나타났는지 선뜻 납득하긴 힘들군요. TV 프로그램에 ‘논리로 풀어 달라’고 의뢰하고 싶습니다). 놀랍게도 악보는 실제 프러시아 국립도서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 조카손녀들이 어릴 때 요아힘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얘기를 무의식 속에 저장해 두었다가 떠올린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입증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작품은 1937년 11월 26일 게오르크 쿨렌캄프의 독주로 초연됐습니다. 음악 사상 가장 아름답고도 떠들썩한 사랑 끝에 결혼에 성공했던 슈만과 클라라. 그렇지만 슈만은 클라라와 아홉이나 되는 자녀를 남기고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습니다. 이후 클라라는 40년이나 더 외롭게 살아갔습니다. 오늘은 그 클라라가 남긴 피아노3중주의 느린 악장을 듣고 싶군요. 남편이 떠난 이듬해 작곡한 작품입니다. 그 서글픈 악상이 가슴을 저릿하게 합니다. 내일이면 다시 3월. 옐리와 아딜라 자매가 슈만의 잊혀진 작품에 대해 증언한 바로 그때로부터 80년이 흘렀습니다. http://classicgam.egloos.com/188736유윤종 gustav@donga.com}

오페라극장을 둘러싼 ‘얼음’이 녹고 성악가들이 기지개를 켜는 3월. 이탈리아 오페라 역사를 대표하는 두 거장의 마지막 오페라가 나란히 무대에 오른다. 국립오페라단은 3월 21∼24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베르디가 80세에 발표한 ‘팔스타프’를 공연한다. 수지오페라단은 3월 29∼31일 같은 장소에서 푸치니의 유작 ‘투란도트’를 무대에 올린다. ‘팔스타프’는 11월 솔오페라단이, ‘투란도트’는 베세토오페라단이 10월 30일부터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할 예정이어서 봄가을에 걸쳐 ‘마지막 오페라 대전’이 펼쳐지는 셈이다. 한편 국립오페라단은 베르디와 함께 올해 탄생 200주년을 맞은 바그너의 마지막 오페라 ‘파르지팔’을 10월 1일부터 같은 공간에서 공연하기로 했다.○ 베르디 만년의 변신 ‘팔스타프’ ‘팔스타프’는 장중한 비극에 장기가 있었던 베르디가 최후에 과감히 희극으로 몸을 틀어 성공을 거둔 기념비적 역작이다. 셰익스피어의 ‘윈저의 유쾌한 아낙네들’이 원작이다. 주인공은 늙은 술꾼 존 팔스타프(원작에선 폴스타프). 연애도 하고 돈도 뜯어내보자는 심산으로 동네 유부녀 여럿에게 수작을 걸지만, 아낙네들은 꾀를 내 그를 망신 준다는 줄거리다. ‘유럽판 배비장전’이라 할 만하다. 이탈리아 루카 질리오 극장 예술감독인 불가리아 출신의 줄리안 코바체프가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오스트리아 요제프 극장 감독을 지낸 헬무트 로너가 연출을 맡는다. 영국 로열오페라극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바리톤 앤서니 마이클스무어와 안양대 교수인 바리톤 한명원이 타이틀 롤을 맡는다. 오페라 평론가 유형종 씨는 “마이클스무어는 유럽에서 팔스타프 역으로 인정을 받아왔으며, 한명원도 팔스타프에 적합한 색깔을 갖춘 성악가”라며 “팔스타프는 주역 한두 명의 기량에 의존하기보다 여러 가수의 앙상블에 초점이 맞춰진 작품이므로 전체 배역진의 안정감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21, 22일 오후 7시 반, 23, 24일 오후 3시. 1만∼15만 원. 02-586-5282○ 작곡가도, 주인공도 목숨 건 ‘투란도트’ ‘투란도트’는 칼라프 왕자의 아리아 ‘잠들지 말라’의 인기에 힘입어 전 세계에 많은 팬을 지닌 작품. 심리적 서정극에 익숙했던 푸치니가 베르디 또는 바그너풍의 ‘영웅 오페라’에 도전해 성공을 거뒀지만 그의 체력을 소진시켜 유작이 됐다. 반란으로 쫓겨나 중국 베이징으로 도망쳐온 티무르 왕과 왕자 칼라프, 시녀 류. 칼라프는 중국 황제의 공주 투란도트의 아름다움에 홀려 목숨을 건 도박을 펼치는데…. 수지오페라단 측은 “성악진, 합창단, 연기자, 오케스트라까지 250여 명이 펼쳐내는 보기 힘든 대규모 무대가 될 것”이라며 “중국 전통 공예와 마임까지 곁들여 다채로운 볼거리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나폴리, 베네치아, 피렌체의 주요 오페라극장에서 지휘를 펼쳐온 잠파올로 비산티가 지휘봉을 들고 이탈리아 베르가모 도니체티 극장 예술감독 프란체스코 벨로토가 연출을 맡는다. 출연진은 슬라브세(勢)가 뚜렷하다. 러시아 마린스키 극장 주역 가수이자 2005년 런던 로열오페라하우스에서 투란도트로 출연한 벨로루시 출신 이리나 고르데이, 스페인 바르셀로나 리세우 극장에서 같은 배역을 맡은 우크라이나 소프라노 안나 샤파진스카야가 나란히 타이틀 롤을 맡는다. 시녀 류 역에는 몰도바인 소프라노 타티야나 리스닉과 성신여대 교수인 박지현이 출연한다. 칼라프 역의 이탈리아 테너 발터 프라카로는 올 1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에서 이 역을 맡았다.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에서 칼라프 역을 맡았던 안토니오 인테리자노가 같은 배역으로 출연한다. 29, 30일 오후 7시 반, 31일 오후 5시. 1만∼23만 원. 02-542-0350유윤종 선임기자 gustav@donga.com}

이탈리아 오페라의 대명사 주세페 베르디(1813∼1901)의 탄생 200주년. 그러나 극장에서 만나는 베르디는 좁은 레퍼토리에 머물러 있다.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올해 오르는 작품을 보아도 ‘중기 3거작’으로 불리는 인기작 ‘리골레토’ ‘라 트라비아타’ ‘일 트로바토레’ 외에는 ‘돈 카를로’ ‘팔스타프’가 전부다. 초기작인 ‘나부코’ ‘포스카리 가문의 두 사람’이 1980년대 서울에서 공연됐던 데 비해도 후퇴한 결과다. 그러나 실망은 잠깐, 거실에서 풀HD 화질과 서라운드 음향으로 베르디의 오페라 26곡 전부를 만날 수 있다. 클래식 영상물 제작사 유니텔클래식스가 ‘C메이저’ 레이블로 내놓은 블루레이 전집 ‘투토 베르디’(베르디의 모든 것)시리즈다. ‘오페라적 교회음악’으로 불리는 레퀴엠(장송미사곡)을 포함해 전 27개 타이틀로 구성됐으며 DVD로도 발매됐다. 2005∼2012년 실황을 담은 것으로 이 중 20장이 베르디의 고향 부세토 주변 최대 오페라극장인 파르마 레조 극장에서 공연됐다. 국내 제작사인 아울로스미디어는 전 타이틀에 한국어 자막도 입혔다. 27장 모두를 꼼꼼히 들여다본 음악 칼럼니스트 이종선 씨와 함께 전집에서 전해지는 베르디의 매력을 점검했다. 이 씨는 전집 전체의 자막 번역도 맡았다.○ 알려지지 않았던 ‘숨겨진 보석’은? 천하의 베르디도 비인기작은 비인기작인 이유가 있는 법. 그러나 전집을 감상한 결과 공연 빈도에서 최악으로 꼽히는 초기작 ‘알치라’ ‘해적’ ‘레냐노의 전투’도 매력이 느껴졌다. ‘해적’에서 하렘 장면의 이국적인 분위기나 전투 장면의 박력이 눈길을 끈다.○ 전집에서 눈에 띄는 주역 가수는? 단연 바리톤 레오 누치. ‘리골레토’의 타이틀 롤을 비롯해 7개 작품에 출연했는데, 원숙기의 농익은 노래도 노래거니와 군주의 위엄, 아버지의 사랑, 죄의식에 사로잡힌 악당 등 각 배역의 전형과도 같은 연기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테너로는 ‘일 트로바토레’의 만리코를 비롯해 두 개 배역을 노래한 마르셀로 알바레스, 소프라노로는 ‘운명의 힘’ 주역 레오노라를 위시해 네 개 작품에 출연한 디미트라 테오도시우스가 명성에 걸맞은 활약을 한 ‘수훈갑’으로 꼽을 만했다. 신인급으로는 ‘포스카리…’에서 루크레치아 역으로 풍성한 성량을 자랑한 소프라노 타티아나 세르얀이 가장 인상적.○ 눈에 띄는 연출은? 만토바 공작의 난잡한 호색 파티를 적나라하게(?) 연출한 ‘리골레토’, 그라피티(예술적 낙서)로 가득한 뒷골목을 배경으로 현대 마피아들의 암투를 묘사한 듯한 ‘도적떼(군도)’가 인상에 남는다.○ 눈에 띄는 무대장치와 비주얼은? 전집에 포함된 각 프로덕션들은 사실적이고 전통적인 무대들이 주를 이룬다. 그 결과 오히려 ‘스티펠리오’의 간결한 무대 미술이 돋보였다. 화려하고도 장대한 스케일을 살려낸 ‘가면무도회’, 작품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밝고 화사한 색채를 선보인 ‘팔스타프’도 A+.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배경으로 사용한 ‘롬바르디아인들’, 부조가 새겨진 큐빅 덩어리를 적절히 쌓아올려 각 장면에 어울리는 무대를 연출한 ‘운명의 힘’도 기억에 남았다. 전집 73만 원(온라인 가격 기준). 낱장은 블루레이 4만6800원, DVD 3만9000원. 02-922-2522유윤종 선임기자 gustav@donga.com}

브람스와 차이콥스키. 나란히 19세기 후반의 작곡 거장이지만 얼핏 함께 떠오르는 이름은 아니다. 내성적인 독일인 브람스는 건축물을 쌓아올리듯 치밀하게 작품을 써나갔고 러시아인 차이콥스키는 격정과 슬픔을 주저 없이 작품 속에 터뜨렸다. 이런 두 사람의 작품 중에서도 ‘현악사중주’에 돋보기를 들이댄 시리즈 콘서트가 열린다. 서울 종로구 신문로 금호아트홀이 3월 7일을 시작으로 9월 5일까지 세 차례 마련하는 ‘브람스&차이콥스키 현악사중주 전곡’ 연주회다. 두 사람 사이에는 남다른 공통점도 있다. 브람스가 1833년 5월 7일생. 차이콥스키는 7년 뒤 같은 날 태어났다. 차이콥스키는 1888년 독일 연주여행 중 라이프치히에 머물던 브람스를 방문하기도 했다. ‘거장끼리는 서로 알아본다’는 자의식의 발로였을까. 두 사람은 격식 차린 인사에 머물지 않고 음악작품의 구성 원리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펼쳤다고 브람스의 제자 예너는 회고했다. 음악사에 끼친 영향이나 ‘지명도’에서는 함부로 우열을 논하기 힘든 두 사람이지만 현악사중주 분야에선 분명 브람스가 앞선다. 차이콥스키는 세 곡 모두를 경력 초반에 썼고 이후 이 장르에 손대지 않았지만 그의 사중주 1번 D장조의 2악장 ‘안단테 칸타빌레’는 초연 당시 객석의 톨스토이를 ‘울린’ 작품으로 이름났고 오늘날에도 널리 사랑받고 있다. 반면 브람스는 이 장르의 ‘위대한 선배’ 베토벤을 의식해서인지 40세가 되어서야 첫 작품을 내놓았다. 세 곡 모두 대중에게 크게 어필하는 작품은 아니지만 안으로 연소하는 은은한 열정과 건축적 완결미로 인정을 받고 있다. 시리즈 첫날인 3월 7일 연주회에서는 전반부에 브람스의 마지막 현악사중주 3번 b플랫단조, 후반부에 ‘안단테 칸타빌레’가 들어간 차이콥스키의 1번 D장조를 바이올리니스트 이경선 양고운, 비올리스트 최은식, 첼리스트 이강호 씨가 연주한다. 이후 두 차례의 연주회에서는 새로운 얼굴들이 연주에 참여할 예정이다. 공연을 주최한 금호문화재단은 “두 사람은 낭만주의 전성기에 활동했던 양대 산맥이지만 브람스는 형식적인 면이, 차이콥스키는 선율적인 면이 더욱 드러나 비교의 매력을 준다. 두 사람 모두 현악사중주가 세 작품씩 있어 세 차례의 공연을 준비하게 됐다”고 밝혔다. 3만 원. 02-6303-1977유윤종 선임기자 gustav@donga.com}

베르나르트 하이팅크가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28일 내한 첫날 공연에서 마리아 주앙 피르스 협연으로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17번 G장조를 연주합니다. 이 곡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1784년 봄, 모차르트는 찌르레기 한 마리를 사왔습니다. 집에 돌아온 모차르트가 아내를 향해 “어때 콘스탄체, 새 소리 예쁘지, 하하핫”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 곡의 3악장 변주곡 주제에 이 찌르레기의 소리를 집어넣은 것입니다. 몇 개의 전타음(前打音·앞꾸밈음)이 선율을 귀엽게 장식하고 있는데, 그 소리가 ‘삐릿삐릿’ 하는 새소리처럼 들립니다. 모차르트가 아니더라도 동서고금을 통해 새소리는 숱한 음악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여러 나라 언어에서 ‘새가 노래한다’는 표현은 흔하게 찾아볼 수 있지만 다른 동물, 예를 들어 들짐승이나 곤충이 노래한다는 표현은 찾기 힘들죠. 특히 서양의 목관악기 연주법은 새소리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아예 새소리만 모아놓은 모음곡도 있습니다. 레스피기의 관현악 모음곡 ‘새’가 한 예입니다. 레스피기는 유독 새를 좋아했던지 교향시 ‘로마의 소나무’에는 아예 녹음된 나이팅게일의 소리를 틀도록 악보에 지시했습니다. 프랑스의 현대 작곡가 메시앙은 피아노 모음곡 ‘새의 카탈로그’를 작곡했습니다. 선율 진행 같은 것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아예 피아노를 이용해 새가 노래하는 소리를 정밀하게 ‘모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피아니스트 백혜선 씨는 이탈리아 코모 호숫가에 머무를 때 아침에 잠을 깨면서 창밖의 새소리를 듣고 “어머나, 정확히 ‘새의 카탈로그’에 나오는 몇 번 곡과 똑같네”라며 놀란 일도 있다고 합니다. 베토벤의 교향곡 6번 ‘전원’ 2악장에도 새소리가 등장합니다. 플루트가 꾀꼬리를, 오보에가 메추라기를 묘사한 음형에 이어 클라리넷이 누구에게나 익숙한 뻐꾹뻐꾹 소리를 내죠. 여기서 뻐-꾹 사이는 장3도, 즉 ‘미-도’ 간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음악가들에게 뻐꾸기 소리가 장3도로 들린 것은 아닙니다. 독일 민요 ‘뻐꾸기’에서는 솔-미, 즉 단3도 간격으로 묘사됩니다. 말러 교향곡 1번 1악장에서는 도-솔, 즉 완전4도 간격입니다. 제가 실제 뻐꾸기 소리를 찾아 들어봤더니 첫 음이 약간 미끄러지듯이 내려와 완전4도로도, 장3도로도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아참, 빼놓아선 안 될 곡이 있군요. 본윌리엄스의 ‘종달새의 비상’, 생각나시나요? 김연아 선수가 2007년 세계선수권대회 프리스케이팅에서 사용한 음악이라면 기억하실지 모르겠네요! classicgam.egloos.com/188735 유윤종 gustav@donga.com}

베르디와 바그너의 탄생 200주년이지만 한국 오페라계의 ‘대세’는 베르디의 45년 후배인 푸치니, 특히 그의 마지막 작품 ‘투란도트’다. 수지오페라단이 3월 29일부터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이 작품을 공연하고, 베세토오페라단도 10월 30일부터 같은 무대에 이 작품을 올릴 예정이다. 예술의전당도 이 작품을 제작해 8월 CJ토월극장에서 공연한다. ‘투란도트’는 2009년 한 조사에서 ‘한국인이 보고 싶은 오페라’ 1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사람들이 푸치니에, ‘투란도트’에 그토록 매료되는 요인은 무엇일까. 당대 오페라계의 제왕이었던 푸치니가 확고한 권위로 모든 이탈리아인의 칭송 속에 이 만년의 대작을 완성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푸치니는 평생 평론가들의 끊임없는 비판에 시달렸다. 그 상황은 음악학자 알렉산드라 윌슨의 책 ‘푸치니 문제(The Puccini Problem·2009년)’에 상세히 설명돼 있다. 책에 따르면 푸치니에 대한 비판은 한 방향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 ‘미래파’ 예술가들에게 경도된 비평가들은 그의 작법이 의고적이고 그가 다루는 소재들은 ‘눈물 짜는’ 값싼 감상주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공격했다. 반면 전통주의자들은 그가 이탈리아 성악 전통을 무시하고 바그너를 비롯한 ‘알프스 너머’의 조류에 경도됐다고 생각했다. 특히 평론가 토레프란카는 푸치니의 음악이 ‘지적으로 파산상태이고 이탈리아의 예술을 모독하는’ 것이라며 독설을 퍼부었다. 성경에 나오는 솔로몬의 판결 일화처럼, 비평가들은 반대의 방향에서 그의 작품을 잡아당기며 괴롭혔던 것이다. 푸치니의 반응은 어땠을까. 둘 다 따를 수는 없는, ‘비평을 위한 비평’이라며 무시했을까. 오히려 그는 양쪽의 요구를 처절할 정도로 고민하고 진지하게 수용하려 했다. 최신의 조류를 수용하라는 요구를 받아들여 ‘외투’처럼 새로운 수법을 담은 작품을 내놓았고 전통을 존중하라는 요구를 받아들여 ‘자니 스키키’처럼 의고적 소재를 개성적으로 다룬 작품을 썼다. 나아가 ‘투란도트’에서는 이를 종합한 ‘합(合)의 명제’를 지향했다. 이탈리아 전통 희극 형식을 극에 도입하는 한편 스트라빈스키 풍의 혁신적 관현악법을 가미했다. 여주인공은 아예 ‘미래파적’인 투란도트 공주와 ‘전통 서정극적’인 시녀 류 두 사람을 내세웠다. 이는 세대를 뛰어넘는 청중의 공감으로 이어졌다. ‘성가신’ 비평이 푸치니를 한 걸음 나아가게 한 것이다. 본보 12일자 A28면 ‘류인균의 우울증 이기기’ 칼럼에는 평단의 혹평을 받고 자살을 생각하다가 이를 극복한 피아니스트 루빈스타인과 작곡가 라흐마니노프의 이야기가 나왔다. 혹평이 없었다면 두 사람은 순조롭게 대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오히려 이를 딛고 극복한 순간 두 사람은 철통같은 개성과 견고한 기법을 지닌 거장으로 다시 태어났을 것이다. 우리 문화계를 돌아본다. ‘비평의 위기’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2000년대 초반 문학계의 주요 이슈 중 하나도 ‘주례사 비평 극복’이었다. 미술계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암호문 비평’이 문제로 지적됐다. 모두 극복됐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은 채 논란 자체가 희미해지고 있다. 최근에는 새로운 문제가 등장했다. ‘예술 저널리즘’이 위축되고 그 상당 부분을 일반 감상자들의 인터넷 블로그나 카페가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들이 쓰는 비평적 감상문에는 놀랄 만한 수준에 달하는 것도 많다. 그러나 이들에게 권위를 부여할 상위(上位)의 권위는 찾을 수 없다. 잡문과 진지한 비평의 경계가 실종된 채 글의 수준이 높아도 자신들만의 동아리에서 공유될 뿐, 비평의 대상에게는 좀처럼 다가가지 못한다. 대중과도, 시대의 조류와도 호흡하지 않는 ‘내 식대로’ 예술가가 많아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훗날 21세기 초반의 한국 예술계를 가리켜 “많은 스타가 탄생한 시대”라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많은 명작이 대중과 호흡하며 탄생한 시대”라고 하지는 않을 듯하다. 숱한 걸작을 낳았던 역사상의 여러 문화권처럼 예술가와 비평이 건강한 생태계를 형성했는가. 그 점을 살펴보면 예견할 수 있다.유윤종 문화부 선임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