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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작가 캐서린 안홀트(67)의 개인전 ‘러브 레터스(Love Letters)’가 서울 종로구 초이앤초이 갤러리에서 23일까지 열린다. 이번 전시에서는 안홀트 작가가 딸을 갑작스럽게 떠나보낸 뒤, 그를 기억하고 추모하며 그린 연작 ‘러브 레터’를 공개한다. 이 연작과 함께 ‘사랑하는 이들에게 보낸 편지들’, ‘사랑과 아픔’ 등의 작품 등도 선보였다. 작가가 딸에게 보내는 절절한 편지이자 예술적 헌사이며, 같은 상처를 지닌 이들에게 보내는 위로와 공감의 메시지다. 안홀트 작가는 30여 년간 남편과 함께 동화책 200여 권을 제작하며 삽화가로도 활동해 왔다. 모성애와 가족, 자연 등을 주제로 자신의 삶과 예술적 여정을 작품에 담아내고 있다. 2년 전 한국에서 사랑과 인생, 상실 등 인간의 보편적 정서를 조망한 ‘삶, 인생, 상실(Love, Life, Loss)’전을 개최한 바 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16세기 이탈리아 우르비노 공국 공작의 아들은 베네치아 최고 화가였던 티치아노의 작업실을 방문합니다. 티치아노에게 초상화를 의뢰했기 때문입니다. 초상화를 위해 모델을 서고 있던 공작 아들, 작업실에 놓인 그림 한 점이 그의 눈에 들어옵니다. 모델을 마치고 작업실을 떠난 그는 어머니와 주고받은 편지에서 이런 말을 남깁니다. “그 ‘여자 누드(donna nuda)’를 꼭 갖고 싶은데, 티치아노가 다른 사람한테 팔아 버리면 어떡하죠?” 노심초사하던 공작 아들은 수개월 뒤 공작의 지위를 물려받고 마침내 그 그림을 손에 넣게 됩니다. 이 그림은 티치아노의 대표작이자 이탈리아 우피치 미술관 하면 많은 사람이 떠올리는 작품, ‘우르비노의 비너스’입니다.직선 속 부드러움의 극치 우르비노의 공작은 이 그림에서 무엇을 보고 반한 걸까요. 우선 진주 귀걸이를 하고 곱슬곱슬한 금발을 풀어 헤친 여인의 아름다움에 매료됐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여인의 외모가 예쁘다고 모든 그림이 아름다워 보일 수 있는 건 아니죠. 티치아노는 그림 속 몇 가지 장치를 통해 여인의 관능적인 모습을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흰 시트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는 여인의 몸이 만들어내는 곡선입니다. 이 곡선에 빼앗겼던 시선을 전체 그림의 구도로 옮겨 보면, 그림의 다른 곳은 똑바로 그은 직선이 지배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를테면 침대 뒤로 펼쳐진 바닥에 그려진 격자무늬와 수납장, 벽지, 창문에 있는 기둥이 그러합니다. 이런 여러 개의 직선 가운데 그려진 몸의 커다란 곡선은 혼자 굽이치고 있으니 더 눈에 띌 수밖에 없습니다. 이 곡선과 맞닿은 직선 중 가장 강렬한 것은 뒤편 녹색 파티션이 만드는 선입니다. 이 파티션의 직선은 그림을 마치 절반으로 뚝 자른 듯 그려져, 여인의 얼굴과 상반신을 관객만 보는 것 같은 사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킵니다. 게다가 커다란 곡선인 여인의 몸을 티치아노는 얇은 물감층을 겹겹이 쌓아 올려 반투명으로 티 없이 반짝이는 도자기처럼 그려내고 있습니다. 꽃무늬가 그려진 푹신한 매트리스와 바삭거리는 흰색 시트, 그 위에 포근하게 꼬리를 말고 누워 있는 강아지와 매끈하게 묘사된 여성의 피부는 경직된 그림의 선들을 가로지르며 부드러운 느낌을 극대화합니다.수줍지 않은 비너스 이 여인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몇 가지 단서를 통해 고대 신화 속 ‘비너스’를 표현했다는 해석이 제기되고, 그 덕분에 이 그림은 ‘우르비노의 비너스’라는 이름을 갖게 됐습니다. 그 단서 중 하나는 여인이 들고 있는 붉은 꽃, 장미입니다. 장미는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사랑의 여신 비너스’를 뜻하는 주요 상징입니다. 열정적인 사랑, 쾌락, 육체미를 뜻하죠. 또 창가에 놓여 있는 머틀(myrtle) 화분 역시 고대부터 비너스와 연결되는 식물로 불멸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또 다른 단서는 포즈입니다. 그림 속 여인은 왼손으로 자신의 몸을 가리고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고대 그리스 조각에서 자주 묘사된 자세로 ‘비너스 푸디카(Venus pudica)’라고 부릅니다. 비너스 푸디카는 ‘수줍은 비너스’라는 의미인데, 여자가 자신의 몸을 가리는 모습을 표현해서 겸손, 순결, 부끄러움의 미덕을 상징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그림 속 여인은 수줍기는커녕 관객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앞으로 쏟아질 듯 과감한 포즈를 취하고 있습니다. ‘수줍은 비너스’에서 모티프를 따왔지만 ‘수줍지 않은 비너스’인 것입니다.엘리트를 위한 핀업(pin-up)? 이런 과감함 때문에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언제나 역사 속에서 주목받는 그림이었습니다. 당대에는 아름다운 누드로 공작이 탐내는 그림이었고, 디에고 벨라스케스 같은 후대 화가들이 이 그림을 변형해 또 다른 과감한 시도를 해내기도 했죠. 18세기까지만 해도 감각적인 아름다움으로 주목받던 이 그림은 현대로 오면서 점차 다른 해석이 더해지게 됩니다.그중 하나는 ‘우르비노의 비너스’가 우르비노 공작 같은 소수 엘리트의 관음증적인 욕망을 위한 ‘핀업’(벽에 붙이는 매혹적인, 때로는 선정적인 여성의 이미지)이라는 해석입니다. 영국의 미술사가이자 베네치아 화파 전문가인 찰스 호프는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고전 신화나 심오한 의미를 담은 것이 아니라 ‘상류층 남성의 사적 공간에 거는 세련된 나체 이미지’라는 견해를 밝힌 바 있습니다. 19세기 유명 예술가도 이런 시각을 그림으로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바로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모티프로 해서 ‘올랭피아’를 그린 에두아르 마네입니다. 마네는 신화 속 여인을 가장한 비너스 대신 파리의 유명했던 고급 창부인 올랭피아의 누드를 그려 미술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죠. 마네는 ‘올랭피아’를 통해 고전으로 여겨지는 르네상스 시대 비너스 그림이 사실은 관음증과 욕망에 관한 것이 아닌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16세기 베네치아의 상황을 바탕으로, 티치아노의 표현이 오히려 여성의 주체적 시선을 표현했다는 해석도 나옵니다. ‘비너스 푸디카’의 수동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며 관객을 똑바로 쳐다보는 ‘수줍지 않은 비너스’가 시대를 앞선 표현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노골적인 시선의 대상, 아니면 매력을 과감하게 뽐내는 사람. 독자 여러분의 눈에는 ‘우르비노의 비너스’가 어떻게 보이나요?※뉴스레터 ‘영감 한 스푼’은 매주 목요일 오전 7시에 발송됩니다. QR코드를 통해 구독 신청을 하시면 e메일로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김민 문화부 기자 kimmin@donga.com}

분홍색 배경에 그려진 남자의 얼굴은 주먹으로 한 대 얻어맞은 듯 일그러진 모습을 하고 있다. 남자의 얼굴 오른쪽 손처럼 보이는 형상의 한가운데엔 어두운 구멍이 동그랗게 그려져 있고, 그 손에 닿은 볼은 움푹 패어 있다. 또 남자의 입과 코는 멍이 든 것처럼 보라색, 분홍색, 오렌지색이 덩어리처럼 얽혀 칠해졌다. 영국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1909∼1992)이 1967년에 그린 이 초상화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베이컨은 초상화를 그릴 때 친구나 연인, 또 자신이 자주 드나들던 런던 소호의 인물들을 자주 그렸다. 베이컨은 이들의 외형을 단순히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이 가진 감정이나 불안의 파동을 시각적으로 드러냈다. 베이컨은 이 그림에서도 보이듯 신체 일부를 흔들리듯 번지게 하거나, 때로는 비명을 지르듯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을 그려 넣어서 긴장감을 극대화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을 변형해서 그린 ‘비명을 지르는 교황’은 교황이 가진 권위와 내면의 절망이 교차하는 듯한 이미지를 통해 20세기의 시대적 불안과 갈등을 드러내 베이컨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그림을 직접 보면 베이컨의 뛰어난 색채 감각이 그가 그리는 소재의 폭력성이 불러일으키는 거부감을 덜어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배경의 핑크와 어울리는 회색빛이 도는 검은색, 얼굴의 파스텔톤 보라색과 셔츠 깃에 칠한 파란색이 눈에 띈다. 베이컨은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나 1929년부터 실내 장식과 가구 디자인으로 돈을 벌기 시작해 런던 생활을 시작했다. 상업적으로 성공할 만큼 세련된 감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감각을 넘어 베이컨의 회화에서는 인물의 얼굴 너머로 보이는 존재의 흔들림, 삶의 진실을 순간적으로 포착하려는 노력이 드러난다. 베이컨은 실제 인물뿐 아니라 신문에서 볼 수 있는 이미지나 사진을 조합하고 자신만의 즉흥적인 붓질로 역동성을 그림에 부여했다. 자화상에도 몰두하며 노화와 고독, 상실의 감정을 진솔하게 표현했다. 베이컨을 비롯해 서양미술사 주요 명작들을 만날 수 있는 서울 세종미술관 전시 ‘모네에서 앤디 워홀까지’는 1일 전국 누적 관람객 30만 명을 돌파했다. 이 전시는 경주예술의전당에서 시작해 부산문화회관, 제주현대미술관을 거쳐 서울로 순회전을 열고 있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작품 143점은 31일 전시가 종료되면 원래 소장처인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로 돌아갈 예정이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55인치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스크린 88대로 이뤄진 대형 화면에 살덩이 같은 형체들이 꾸물거리며 움직인다. 추수 작가가 ‘살의 정령’이라고 이름 붙인 이 형체들은 물속으로 퐁당 빠지거나 피부와 촉수를 서로 맞대며 미끄러진다. 눈으로만 보기에도 촉감이 생생히 느껴져 실물을 카메라로 촬영한 것 같은 착각이 들지만 사실은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만든 3차원(3D) 그래픽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박스에서 열리는 프로젝트 ‘MMCA×LG OLED’ 시리즈의 첫 주인공 추수 작가의 전시 ‘아가몬 대백과: 외부 유출본’의 모습이다. 이 전시에는 미디어 작품뿐 아니라 영상 속 그래픽과 비슷한 형태의 조각 ‘아가몬’이 한가운데 놓여 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실물 조각보다 영상 속 형체가 오감을 더욱 일깨운다. 시골 벌판에서 듣는 장작불 소리보다 고성능 마이크로 녹음한 장작불 ASMR이 더 실감 나게 귀에 꽂히는 것처럼….● 캔버스는 스크린, 붓은 마우스영상이 더 실감 나는 데엔 이유가 있다. 1992년생인 추수 작가는 현실보다 온라인이 더 익숙한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다. 작가는 “어릴 때부터 게임을 즐겨 하고 홈페이지를 만들어 그림을 올리던 내게 디지털 매체는 모국어와 같다”고 했다. 작가는 작업을 시작할 땐 손으로 그림과 글을 쓰지만, 작품을 제작할 땐 전부 3D 프로그램을 사용한다. 스크린이 캔버스고 붓은 마우스인 셈이다. 화가가 사다리를 놓고 큰 캔버스와 씨름하거나, 조각가가 땀 흘리며 돌을 깎는 모습에 비교하면 책상과 모니터, 컴퓨터가 놓여 있는 미디어 작가들의 작업실은 건조하기 짝이 없다. 그렇지만 노동 강도는 전통 매체 작업보다 덜하지 않다. 추수 작가는 “컴퓨터 앞에 앉아 계속 작업을 하다 보니 어깨, 손목부터 골반까지 무리가 가서 차에 앉아 있는 것도 힘들거나 치아가 두 개 빠진 적도 있다”고 했다.미디어 작품들이 이렇게 정교한 노동과 기술을 더해 가면서, 세계적인 작가들이 원하는 색감과 움직임을 구현하는 ‘좋은 캔버스’를 마련하러 한국의 기술을 찾는 경우도 생긴다. 영국의 영상 예술 거장으로 기사 작위를 받은 존 아콤프라는 지난해 베니스비엔날레 영국관 전시를 준비하며 LG전자에 OLED 스크린을 사용하고 싶다고 먼저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OLED 기술은 자체적으로 빛을 내는 ‘셀플릿’ 입자 소자로 만들어 완전한 검은색과 미세한 그러데이션까지 표현이 가능하다. 아콤프라는 어두운 색감이나 흑백 영상을 자주 쓰기 때문에 ‘최대한 OLED 스크린을 많이 쓸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는 후문이다. OLED 스크린은 애니시 커푸어, 데이미언 허스트 같은 유명 현대 미술가들도 자주 사용한다. 오혜원 LG전자 MS경험마케팅 상무는 “예술가들이 좋은 기술에 대한 수요가 있다는 점에 착안해 ‘미디어 아티스트의 캔버스’로 LG OLED 스크린을 작가들에게 후원하고 있다”며 “미국 구겐하임 미술관이나 MMCA, 프리즈 아트페어 등 국내외 미술 기관과의 협업을 수년 전부터 확대하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미디어 아트 기술, 보존 연구는 숙제 미디어 작품은 아날로그 매체에 비하면 제작 과정이나 전시, 보존 과정이 더욱 복잡하다. 유명 작가인 아콤프라가 한국 기업의 문을 두드렸던 것처럼, 스크린을 찾는 과정은 물론 작품을 소장하고 관리하는 데에도 비용과 에너지가 든다. 이를테면 ‘미디어 아트 창시자’ 백남준은 브라운관 모니터를 사용했는데, 기술 발전으로 더 이상 브라운관이 생산되지 않아 전시가 열리면 큐레이터들이 브라운관을 찾는 데 애를 먹는다. 2019년 영국 테이트모던 미술관 회고전에서도 담당 큐레이터가 영국 전역 고물상에 전화를 돌리고 이베이까지 뒤져 모니터를 찾아냈다. 전문가들은 수백 년 동안 사용된 물감과 캔버스에 대한 수복, 보존 연구가 이어진 것처럼 미디어 아트 작품에 사용되는 기술에 대해서도 기록과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남희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은 “유화 물감의 경우 1600년대 개발이 되어서 1800년대에 정점을 찍고 그 후 200년간 보존 복원 연구가 활발히 이뤄졌다”며 “이에 비하면 기술 매체는 변화 속도가 무척 빨라 고정된 매뉴얼을 만들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백남준도 이런 상황을 예측하고 ‘내 작품은 영상 내용이 중요하니 모니터는 교체해도 된다’는 등의 의견을 남긴 바 있다”며 “현대 작가도 작품 전시 방식 등에 대한 기록을 꼼꼼히 남기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분홍색 배경에 그려진 남자의 얼굴은 주먹으로 한 대 얻어맞은 듯 일그러진 모습을 하고 있다. 남자의 얼굴 오른쪽 손처럼 보이는 형상의 한가운데엔 어두운 구멍이 동그랗게 그려져 있고, 그 손에 닿은 볼은 움푹 패어 있다. 또 남자의 입과 코는 멍이 든 것처럼 보라색, 분홍색, 오렌지색이 덩어리처럼 얽혀 칠해졌다.영국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1909~1992)이 1967년에 그린 이 초상화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베이컨은 초상화를 그릴 때 친구나 연인, 또 자신이 자주 드나들던 런던 소호의 인물들을 자주 그렸다. 베이컨은 이들의 외형을 단순히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이 가진 감정이나 불안의 파동을 시각적으로 드러냈다.베이컨은 이 그림에서도 보이듯 신체 일부를 흔들리듯 번지게 하거나, 때로는 비명을 지르듯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을 그려 넣어서 긴장감을 극대화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을 변형해서 그린 ‘비명을 지르는 교황’은 교황이 가진 권위와 내면의 절망이 교차하는 듯한 이미지를 통해 20세기의 시대적 불안과 갈등을 드러내 베이컨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그림을 직접 보면 베이컨의 뛰어난 색채 감각이 그가 그리는 소재의 폭력성이 불러일으키는 거부감을 덜어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배경의 핑크와 어울리는 회색빛이 도는 검은색, 얼굴의 파스텔톤 보라색과 셔츠 깃에 칠한 파란색이 눈에 띈다. 베이컨은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나 1929년부터 실내 장식과 가구 디자인으로 돈을 벌기 시작해 런던 생활을 시작했다. 상업적으로 성공할 만큼 세련된 감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이런 감각을 넘어 베이컨의 회화에서는 인물의 얼굴 너머로 보이는 존재의 흔들림, 삶의 진실을 순간적으로 포착하려는 노력이 드러난다. 베이컨은 실제 인물뿐 아니라 신문에서 볼 수 있는 이미지나 사진을 조합하고 자신만의 즉흥적인 붓질로 역동성을 그림에 부여했다. 자화상에도 몰두하며 노화와 고독, 상실의 감정을 진솔하게 표현했다.베이컨을 비롯해 서양미술사 주요 명작들을 만날 수 있는 서울 세종미술관 전시 ‘모네에서 앤디 워홀까지’는 1일 전국 누적 관람객 30만 명을 돌파했다. 이 전시는 경주예술의전당에서 시작해 부산문화회관, 제주현대미술관을 거쳐 서울로 순회전을 열고 있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작품 143점은 31일 전시가 종료되면 원래 소장처인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로 돌아갈 예정이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55인치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스크린 88대로 이뤄진 대형 화면에 살덩이 같은 형체들이 꾸물거리며 움직인다. 추수 작가가 ‘살의 정령’이라고 이름 붙인 이 형체들은 물속으로 퐁당 빠지거나 피부와 촉수를 서로 맞대며 미끄러진다. 눈으로만 보기에도 촉감이 생생히 느껴져 실물을 카메라로 촬영한 것 같은 착각이 들지만 사실은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만든 3D 그래픽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박스에서 열리는 프로젝트 ‘MMCA X LG OLED’ 시리즈의 첫 주인공 추수 작가의 전시 ‘아가몬 대백과: 외부 유출본’의 모습이다. 이 전시에는 미디어 작품뿐 아니라 영상 속 그래픽과 비슷한 형태의 조각 ‘아가몬’이 한 가운데 놓여 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실물 조각보다 영상 속 형체가 오감을 더욱 일깨운다. 시골 벌판에서 듣는 장작불 소리보다 고성능 마이크로 녹음한 장작불 ASMR이 더 실감 나게 귀에 꽂히는 것처럼….● 캔버스는 스크린, 붓은 마우스영상이 더 실감 나는 데엔 이유가 있다. 1992년생인 추수 작가는 현실보다 온라인이 더 익숙한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다. 작가는 “어릴 때부터 게임을 즐겨 하고 홈페이지를 만들어 그림을 올리던 내게 디지털 매체는 모국어와 같다”고 했다. 작가는 작업을 시작할 땐 손으로 그림과 글을 쓰지만, 작품을 제작할 땐 전부 3D 프로그램을 사용한다. 스크린이 캔버스고 붓은 마우스인 셈이다.화가가 사다리를 놓고 큰 캔버스와 씨름하거나, 조각가가 땀 흘리며 돌을 깎는 모습에 비교하면, 책상과 모니터, 컴퓨터가 놓여 있는 미디어 작가들의 작업실은 건조하기 짝이 없다. 그렇지만 노동 강도는 전통 매체 작업보다 덜하지 않다. 추수 작가는 “컴퓨터 앞에 앉아 계속 작업을 하다 보니 어깨 손목부터 골반까지 무리가 가서 차에 앉아있는 것도 힘들거나 치아가 두 개 빠진 적도 있다”고 했다.미디어 작품들이 이렇게 정교한 노동과 기술을 더해가면서, 세계적인 작가들이 원하는 색감과 움직임을 구현하는 ‘좋은 캔버스’를 마련하러 한국의 기술을 찾는 경우도 생긴다. 영국의 영상 예술 거장으로 기사 작위를 받은 존 아캄프라는 지난해 베니스비엔날레 영국관 전시를 준비하며 LG전자에 OLED 스크린을 사용하고 싶다고 먼저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OLED 기술은 자체적으로 빛을 내는 ‘셀플릿’ 입자 소자로 만들어 완전한 검은색과 미세한 그러데이션까지 표현이 가능하다. 아캄프라는 어두운 색감이나 흑백 영상을 자주 쓰기 때문에 ‘최대한 OLED 스크린을 많이 쓸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는 후문이다. OLED 스크린은 아니시 카푸어, 데이미언 허스트 같은 유명 현대 미술가들도 자주 사용한다.오혜원 LG전자 MS경험마케팅 상무는 “예술가들이 좋은 기술에 대한 수요가 있다는 점에서 착안해 ‘미디어 아티스트의 캔버스’로 LG OLED 스크린을 작가들에게 후원하고 있다”며 “미국 구겐하임 미술관이나 MMCA, 프리즈 아트페어 등 국내외 미술 기관과 협업을 수년 전부터 확대하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미디어 아트 기술, 보존 연구는 숙제미디어 작품은 아날로그 매체에 비하면 제작 과정이나 전시, 보존 과정이 더욱 복잡하다. 유명 작가인 아캄프라가 한국 기업의 문을 두드렸던 것처럼, 스크린을 찾는 과정은 물론 작품을 소장하고 관리하는 데에도 비용과 에너지가 든다.이를테면 ‘미디어 아트 창시자’ 백남준은 브라운관 모니터를 사용했는데, 기술 발전으로 더 이상 브라운관이 생산되지 않아 전시가 열리면 큐레이터들이 브라운관을 찾는 데 애를 먹는다. 2019년 영국 테이트모던 미술관 회고전에서도 담당 큐레이터가 영국 전역 고물상에 전화를 돌리고 이베이까지 뒤져 모니터를 찾아냈다.전문가들은 수백 년 동안 사용된 물감과 캔버스에 대한 수복, 보존 연구가 이어진 것처럼 미디어 아트 작품에 사용되는 기술에 대해서도 기록과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남희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은 “유화 물감의 경우 1600년대 개발이 되어서 1800년대에 정점을 찍고 그 후 200년간 보존 복원 연구가 활발히 이뤄졌다”며 “이에 비하면 기술 매체는 변화 속도가 무척 빨라 고정된 매뉴얼을 만들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백남준도 이런 상황을 예측하고 ‘내 작품은 영상 내용이 중요하니 모니터는 교체해도 된다’는 등의 의견을 남긴 바 있다”며 “현대 작가도 작품 전시 방식 등에 대한 기록을 꼼꼼히 남기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우리는 인류의 조상이 호모 사피엔스라고 흔히 이해하고 있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한 점에서 여러 인종이 방사선처럼 일직선으로 뻗어 나가는 형태가 인류 진화의 과정이라고. 그런데 이런 가정이 틀릴 수 있음을 입증하는 증거가 나타났다. 2013년 깊은 동굴에 묻혀 있던 새로운 인류 종, ‘호모 날레디’가 바로 그것이다. 책은 고인류학자이자 ‘호모 날레디’를 발견한 주역들인 저자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동굴에서 신인류를 발굴하게 된 프로젝트를 들려준다. 이야기는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였던 저자 리 버거가 지휘본부의 컴퓨터 화면으로 발굴 과정을 지켜보기만 하다가 8년 만에 디날레디 동굴로 직접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강연에서 ‘좁은 동굴에 들어가기엔 내가 너무 크지 않느냐’는 농담을 해왔던 버거는 25kg을 감량하는 혹독한 다이어트 끝에 동굴로 향한다. 동굴 내부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해 모든 탐사대원이 손전등과 장비에 의존해야 하고, 일부 구간은 18cm도 채 안 되는 틈으로 네발로 기어가거나 몸을 비틀어야만 통과할 수 있다. 피곤과 공포가 교차하는 상황에서 탐사대원들은 곳곳에 뼈와 유골이 흩어진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것이 1500개 이상의 뼛조각과 최소 15명의 고인류 개체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이 화석들의 배열과 환경을 분석한 결과 25만 년 전 존재했던 ‘호모 날레디’가 일부러 시신을 동굴 깊은 곳에 매장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발견된 유구들은 단순히 던져지거나, 흙이나 퇴적물에 휩쓸려 동굴 깊숙한 곳에 온 것이 아니라 망자를 다루는 일관된 패턴이 드러나 ‘매장’된 것으로 추정된 것이다. 또 어린이 유골의 손 근처에서는 도구(돌멩이)가 발견된다.호모 날레디는 인간과 흡사한 외형을 가졌지만 두뇌는 침팬지보다 약간 큰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불을 사용하거나 장례를 치르는 등 호모 사피엔스만의 것으로 여겨졌던 행동을 한 것이다. 동굴에 들어간 저자와 팀원들은 벽에 새겨진 무늬를 보고 “작은 뇌의 고인류가 인간의 행동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고 감탄한다. 탐사대원들의 발굴기는 단순한 모험담을 넘어 인류 진화의 모델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기존의 진화 모델이 한 점에서 여러 가지가 뻗어 나가는 ‘나무(계통수)’ 모델이었다면, 이제는 호모 사피엔스, 호모 날레디 등 여러 종이 무작위로 등장하고 사라지면서 진화를 거듭하는 ‘덤불(bush)’ 모델로 진화사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책은 진화 이론에 대한 이야기이면서도 딱딱한 연구서와 달리 동굴 속 흙먼지, 패닉과 땀 냄새 가득한 인간적인 목소리를 생생히 담았다. 팀원 중 한 명인 스티브가 암벽에서 셀카를 찍으려다 실수로 좁은 틈에 발을 헛디뎌 동굴을 발견한 이야기나 몇 시간 동안 눕지도 앉지도 못한 채 돌 틈을 지나가야 하는 극악한 상황 등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이 과정을 영상으로 제작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언노운: 뼈 동굴’의 원작이기도 하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경주, 부산, 제주를 거쳐 서울 세종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모네에서 앤디워홀까지’ 전시가 누적 관람객 30만 명을 돌파했다. 전시를 공동 주최한 세종문화회관과 가우디움어소시에이츠는 1일 ‘모네에서 앤디워홀’ 서울 전시 관람객이 10만 명을 넘어, 경주예술의전당, 부산문화회관, 제주현대미술관을 순회한 전시의 전체 관람객이 30만 명을 넘겼다고 밝혔다.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작품 143점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있는 요하네스버그 아트 갤러리 소장품으로, 11월 남아공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담 기념 특별전을 위해 이달 말 서울 전시를 마치면 본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모네에서 앤디 워홀까지’전은 흥행 성과를 넘어 경주를 시작으로 국공립 미술관을 중심으로 18개월간 이어진 순회 전시를 통해 서울 중심의 문화 소비를 지역으로 확장한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또 국내 1호 도슨트 김찬용 전시해설가가 이번 전시 공식 오디오 해설을 맡아 관람객이 작품의 맥락을 쉽고 흥미롭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왔다. 서울 전시 현장에서는 김찬용 해설가의 도슨트 투어에 매 회차 100명 이상이 참여하며 뜨거운 반응이 이어졌다. 전시해설은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와 박우찬 미술 평론가가 집필했으며, 100만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버 밀라논나가 서울 전시 앰배서더로 참여했다. ‘모네에서 앤디워홀까지’ 전은 31일까지 열린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1990년대 30대였던 미국의 늦깎이 미대생 마크 브래드퍼드가 교수에게 작품 비평을 받을 때였다. 브래드퍼드는 평면 위에 미용실에서 쓰는 ‘파마지’를 붙이고 이렇게 말했다. “전 이게 회화라고 생각해요.” 교수는 브래드퍼드의 작품을 한 번 내려다보고 “그럴 수도 있겠네” 하더니 “그런데 이 길로 가면 네 커리어는 끝날 거야”라고 했다. 당시 추상 회화는 잭슨 폴록 같은 백인 남성 작가의 전유물이었고, 흑인이나 여성 작가는 자기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퍼포먼스나 설치 작품을 해야 한다고 사람들은 여겼다. 브래드퍼드는 생각했다. ‘왜 회화를 피해? 흑인은 추상을 하면 안 되나? 회화가 죽었다고? 그러면 뱀파이어가 되지 뭐!’ 미술사의 중심에 뛰어들어 크고 아름다운 추상화를 만든 브래드퍼드는 오늘날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 됐다. 2017년 베니스비엔날레 미국관 대표 작가, 2019년 미국 예술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지명된 브래드퍼드의 개인전이 1일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개막한다. 방한한 작가를 지난달 30일 만났다.이번 ‘마크 브래드퍼드: 킵 워킹(Keep Walking)’전은 회화, 영상, 설치 등 40여 점을 선보인다. 화려한 색 띠가 바닥에 깔린 설치 작품 ‘떠오르다(Float)’와 미용실 파마지로 만든 회화 연작, 길거리 전단지를 모아 만든 ‘명백한 운명’ 등을 볼 수 있다. 이 작품들은 멀리서 보면 색감이 감각적이고 아름답지만, 가까이 가면 두껍게 쌓아 올린 재료를 깎고 불태우고, 뜯어낸 흔적이 너덜너덜하게 보인다. 브래드퍼드는 이를 두고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고군분투”라고 했다. “제가 미용사였잖아요. 곱슬머리 흑인이 찰랑이는 생머리를 가지려면 엄청난 노동과 고통이 필요해요. 손님한테 나무 조각을 입에 물게 하고 머리카락을 죽을힘을 다해 당겨야죠. 어떤 사람은 ‘원래 곱슬머리도 예쁜데 왜 그래?’라고 해요. 저는 ‘아니, 하고 싶으면 해야지!’라는 사람입니다.” 주어진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원하는 바를 이루는 것이 곧 브래드퍼드의 삶이었다. 로스앤젤레스(LA) 싱글맘의 아들로 태어난 브래드퍼드는 어머니와 함께 미용실을 운영한 소상공인이었다. 손님들의 옷에 적힌 대학 이름을 보고 학교를 알았고, 거기 가면 교사라도 할 수 있을까 싶어 미대에 입학했다. “예술가라는 꿈을 갖는 건 중산층이나 할 수 있는 사치였다”는 브래드퍼드에게 “그런 사람이 어떻게 추상화로 승부한다는 야심 찬 생각을 했느냐”고 물었다. “나는 권력이 사람들을 억누를 때 화가 나요. 가난하고 아버지가 없는 나는 늘 변두리에 밀려났지만, 절대 순응하지 않았죠. 중심에 비집고 들어가 버티는 거예요. ‘왜, 난 여기 앉으면 안 돼?’ 하면서요. 전 모두가 그래야 한다 생각해요.” 이런 행동은 변화를 일으키게 마련이다. 브래드퍼드가 한국 전시를 위해 만든 신작 ‘폭풍이 몰려온다’(2025년)는 허리케인 카트리나 사태와 미국 최초의 드래그 퀸인 윌리엄 도시 스완(1860∼1925)의 삶을 모티브로 활용했다. 스완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누명을 쓰고 사회적 핍박을 받았지만 굴하지 않았던 인물. 무언가를 억지로 덮고 가리면 그것은 더 큰 힘으로 되돌아온다는 메시지를 회화 연작과 벽면 설치에 담았다. “이 작품을 뉴욕에서 하면 훨씬 쉬웠을 거예요. 처음엔 문화가 다른 한국에서 어떨까 걱정했지만, 폭풍은 예상 못 한 곳에서 부는 거니까. 카트리나, 스완, 그리고 나 마크가 서울에 폭풍을 가져올 수 있기를!” 전시는 내년 1월 25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광주 정신’과 ‘예향’이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광주의 지역적 특색을 더욱 예술적으로 승화시키겠습니다.” 윤범모 신임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사진)가 28일 서울 중구의 한 식당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그동안 광주비엔날레가 비엔날레 문화 정착과 국제 무대 진입에 방점을 찍었다면 이제부턴 우리 미술 문화의 정체성 구축에 힘써야 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지낸 윤 대표는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미술평론으로 등단해 평론가, 전시 기획자 등으로 활동했다. 1995년 광주비엔날레 창립 집행위원이자 특별전 큐레이터 등을 맡았다. 윤 대표는 광주비엔날레의 지난 30년간의 자료를 정리해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광주가 가진 지역적 특성을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았다”며 “앞으로 광주비엔날레는 세계 현대미술의 흐름에 적극 동참하면서 우리의 비엔날레 문화로 차별화하는 ‘성격 있는 비엔날레’로 우뚝 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광주비엔날레는 4월 싱가포르 출신 예술가 호추니엔을 ‘2026 제16회 광주비엔날레’ 감독으로 선임한 바 있다. 광주비엔날레재단은 올해부터 ‘2025 광주디자인비엔날레’까지 맡아 해마다 비엔날레를 열게 됐다. 디자인비엔날레를 다시 주최하는 것은 2013년 이후 약 12년 만이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모네에서 앤디 워홀까지’전에서 최고 인기작인 클로드 모네의 ‘봄’을 비롯해 인상파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 있는 전시실을 빠져나오면 후기 인상주의 작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는 방이 나온다. 그 방에 피에르 보나르의 ‘봄의 일몰’이 있다. 로댕의 조각을 보러 빠른 발걸음으로 움직이면 자칫 놓칠 수 있는 크기이지만, 무심코 벽면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춤을 추듯 일렁이는 나무의 검고 굵은 선이 단숨에 시선을 끌어당기는 그림이다. 인상파 화가들이 도심 속 자연이나 사람들의 일상을 보이는 대로 그리고자 노력했다면, 그다음 세대인 폴 고갱, 빈센트 반 고흐, 보나르는 눈에 보이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자신만의 해석을 보여줬다. 이를테면 고갱은 브르타뉴의 들판을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오렌지색으로 칠했고, 고흐는 밤하늘을 파도가 휘몰아치는 바다처럼 표현했다. 이 작가들이 보여준 것은 자신의 마음속에 보이는 풍경이다. 보나르 역시 눈에 보이는 풍경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했는데, 상반되는 색채나 사물의 배치를 활용해서 그림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테크닉이 뛰어났다. ‘봄의 일몰’은 아직 새순이 돋아나기 전인 듯 어두운 색의 나뭇가지들이 그림에 깊은 무게를 더하고 있다. 검은 가지들이 흐드러지면서 화면을 흔들고, 그 아래로 비친 옅은 회색 직선의 그림자가 그림에 중심을 잡아준다. 나뭇가지에 빼앗긴 시선을 차분히 주변으로 돌려보면 오른쪽 구석에 그려진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처음 볼 땐 사람이 없는 풍경 같았는데, 여자를 발견하면서 관객은 완전히 다른 그림을 만난 느낌을 받는다. 이 여자는 의자에 앉아 있지만, 몸의 절반이 캔버스 밖으로 빠져나와 있다. 보통 여자가 앉아 있는 풍경을 그린다고 하면, 풍경은 물론이고 사람도 온전한 모습으로 그리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보나르는 여자가 앉아 있는 부분이 거의 바닥에 깔린 카펫처럼 납작하고 흐릿하게, 심지어 전신 중 일부만 그림 속에 들어온 상태로 그렸다. 이런 과감한 선택 덕분에 무거운 나뭇가지로 향했던 관객의 시선은 오른쪽으로 자연스럽게 빠져나갈 수 있게 되며, 그림은 답답하지 않고 열려 있는 느낌을 자아낸다. 보나르는 빛이 가득한 실내나 정물, 가족 혹은 친구들과의 일상적이고 소탈한 순간을 자주 그려 ‘앵티미스트(intimiste)’로도 불렸다. 법학을 공부해 잠시 변호사로 일하다가 화가가 됐고, 색채를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해 20세기 초 색채를 가장 잘 쓴 화가 중 한 명으로도 꼽힌다. 회화뿐 아니라 삽화, 무대 디자인, 가구와 직물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광주 정신’과 ‘예향’이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광주의 지역적 특색을 더욱 예술적으로 승화시키겠습니다.”윤범모 신임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가 28일 서울 중구의 한 식당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그동안 광주비엔날레가 비엔날레 문화 정착과 국제 무대 진입에 방점을 찍었다면 이제부턴 우리 미술 문화의 정체성 구축에 힘써야 한다”며 이같이 밝혔다.국립현대미술관장을 지낸 윤 대표는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미술평론으로 등단해 평론가, 전시 기획자 등으로 활동했다. 1995년 광주비엔날레 창립 집행위원이자 특별전 큐레이터 등을 맡았다.윤 대표는 광주비엔날레의 지난 30년간의 자료를 정리해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광주가 가진 지역적 특성을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았다”며 “앞으로 광주비엔날레는 세계 현대미술의 흐름에 적극 동참하면서 우리의 비엔날레 문화로 차별화하는 ‘성격 있는 비엔날레’로 우뚝 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광주비엔날레는 4월 싱가포르 출신 예술가 호추니엔을 ‘2026 제16회 광주비엔날레’ 감독으로 선임한 바 있다.광주비엔날레재단은 올해부터 ‘2025 광주디자인비엔날레’까지 맡아 해마다 비엔날레를 열게됐다. 디자인비엔날레를 다시 주최하는 것은 2013년 이후 약 12년 만이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물감 대신 실로 회화와 조각, 설치 작품을 만들어 온 일본 출신 작가 시오타 지하루(塩田千春)의 개인전 ‘리턴 투 어스(Return to Earth)’가 서울 종로구 가나아트센터에서 25일 개막했다. 이번 전시는 일본 오사카 나카노시마 미술관에서 선보였던 연작 ‘타인 안의 자아(The Self in Others)’(2024년), ‘리턴 투 어스’(2025년) 등 대규모 작품들과 그의 최근작, 젊은 시절 유화 3점 등을 공개한다. ‘타인 안의 자아’ 연작은 시오타 작가가 의료용 인체 모형을 보고 “나의 신체와 같은 구조임에도 이질적”이라고 느낀 감각에서 출발한 작업이다. 작가는 고국인 일본을 떠나 독일 베를린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문득 자신이 이방인으로, 예전과 전혀 다른 존재로 변해 간다는 감각에 젖을 때가 있다고 한다. 이 감정을 시각화하기 위해 작가는 분리된 신체 조각 모형들을 각기 다른 크기의 틀 속에 넣고 검정과 하양, 빨강 실로 빽빽하게 엮었다. 백골이나 장기 모형들은 누구나 갖고 있는 몸의 일부임에도 낯선 감각을 자아낸다. ‘세포(Cell)’ 연작은 2017년 항암 치료를 받으며 죽음과 마주했던 작가의 경험에서 나왔다. 장기를 연상시키는 덩어리 모양의 유리 조각 위에 철사와 실을 핏줄처럼 칭칭 감았다. 생명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인 세포조차 비정상적으로 증식해 자신을 파괴하는 암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 생명이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로 향하는가를 작품은 묻는다. 이번 전시의 핵심 작품인 제3전시장의 ‘리턴 투 어스’는 천장에서 흙을 깐 바닥까지 검은 실들이 내려오도록 설치됐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비롯돼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다는 순환의 개념이 담긴 작품이다. 작가가 “(언젠가) 내 몸은 흙이 되고, 숨결은 공기가 되며, 내 영혼은 분자 단위로 쪼개져 세상을 떠돌 것이다”라고 작가 노트에 밝힌 것처럼, 인간은 언제나 자연의 일부라는 생각을 담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유화 3점은 작가가 20대 시절 마지막으로 물감으로 그린 것이다. 작가는 원래 유화를 좋아했지만 어느 순간 ‘그림을 위한 그림’을 멈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후 주로 실을 재료로 작업해 왔다. 작가는 “예전에 그린 유화 3점을 한자리에서 선보이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며 “회화를 계속할 수 없었던 당시 나의 마음부터 최근의 설치 작품으로 오기까지의 과정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9월 7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그룹 블랙핑크의 신곡 ‘뛰어(JUMP)’ 뮤직비디오 조회수가 1억 회를 돌파했다. 27일 YG엔터테인먼트에 따르면 블랙핑크 ‘뛰어’ 뮤직비디오는 11일 공개된 뒤 15일 만인 26일 유튜브 조회수가 1억 회를 넘었다. 그룹 통산 49번째 억대 뷰 영상이다. 이 뮤직비디오는 공개 직후 유튜브에서 ‘24시간 동안 가장 많이 본 동영상’이 됐으며, 8일 연속 유튜브 글로벌 일간 차트 1위를 했다. ‘뛰어’ 뮤직비디오는 그래미 어워드에서 최고 뮤직비디오상을 받았던 데이브 마이어스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마이어스 감독 특유의 감각적인 카메라 움직임으로 판타지와 현실을 오가면서 대담하고 독특한 장면을 담아냈다. 특히 음악에 열광해 좀비처럼 무아지경으로 춤을 추는 군중의 모습이나, 관중의 머리 혹은 입 안에 블랙핑크 멤버가 들어가 있는 기이한 컴퓨터그래픽(CG) 장면들은 실험적이고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마이어스 감독은 유튜브에 공개된 비하인드 장면 영상에서 “블랙핑크가 다시 그룹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에 팬들의 머릿속이 블랙핑크로 가득 차 있는 짜릿하고 흥분되는 순간을 생각했다”고 했다. 영상에서 ‘식당’ ‘부동산’ ‘도배’ ‘페인트칠’ 같은 한글 간판이 달린 골목길이 등장하는 것에 대해 마이어스 감독은 한국 길거리가 나오는 장면을 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같은 영상에서 “야외 장소를 찾아봐달라는 나의 요청에 한국 제작팀이 골목길 한 블록을 섭외해 주었다”며 “질감이 정말 멋있다”고 했다. ‘뛰어’는 테디와 디플로 등 세계적 히트곡을 만든 작곡가와 프로듀서가 제작했다. 서부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기타 리프, 후렴 구간 에너지를 분출하는 중독성 강한 비트가 특징으로 하드스타일(테크노 등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전자 음악 장르), 댄스 팝, EDM 등 여러 장르의 느낌을 강렬하게 담았다. ‘뛰어’는 24일(현지시간) 발표된 스포티파이 글로벌 주간 차트에서 5위를 기록했다. 같은 날 영국 오피셜 싱글 차트 톱100에서는 31위, 미국 빌보드 메인 차트인 핫100에선 28위를 차지했다. 블랙핑크는 6일 경기 고양종합운동장 주경기장 공연을 시작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시카고, 캐나다 토론토와 프랑스 파리 등 세계 16개 도시를 순회하는 월드 투어 ‘데드라인(DEADLINE)’ 공연을 하고 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그룹 블랙핑크의 신곡 ‘뛰어(JUMP)’ 뮤직비디오 조회수가 1억 회를 돌파했다. 27일 YG엔터테인먼트에 따르면 블랙핑크 뛰어 뮤직비디오는 11일 공개된 뒤 15일 만인 26일 유튜브 조회수 1억 회가 넘었다. 그룹 통산 49번째 억대 뷰 영상이다. 이 뮤직비디오는 공개 직후 유튜브에서 ‘24시간 동안 가장 많이 본 동영상’이 됐으며, 8일 연속 유튜브 글로벌 일간 차트 1위를 했다.‘뛰어’ 뮤직비디오는 그래미 어워드에서 최고 뮤직비디오상을 받았던 데이브 마이어스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마이어스 감독 특유의 감각적인 카메라 움직임으로 판타지와 현실을 오가면서 대담하고 독특한 장면을 담아냈다.특히 음악에 열광해 좀비처럼 무아지경으로 춤을 추는 군중의 모습이나, 관중의 머리 혹은 입 안에 블랙핑크 멤버가 들어가 있는 기이한 컴퓨터그래픽(CG) 장면들은 실험적이고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마이어스 감독은 유튜브에 공개된 비하인드 장면 영상에서 “블랙핑크가 다시 그룹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에 팬들의 머릿속이 블랙핑크로 가득 차 있는 짜릿하고 흥분되는 순간을 생각했다”고 했다.영상에서 ‘식당’, ‘부동산’, ‘도배’, ‘페인트칠’ 같은 한글 간판이 달린 골목길이 등장하는 것에 대해 마이어스 감독은 한국 길거리가 나오는 장면을 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같은 영상에서 “야외 장소를 찾아봐달라는 나의 요청에 한국 제작팀이 골목길 한 블럭을 섭외해 주었다”며 “질감이 정말 멋있다”고 했다.‘뛰어’는 테디와 디플로 등 세계적 히트곡을 만든 작곡가와 프로듀서가 제작했다. 서부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기타 리프, 후렴 구간 에너지를 분출하는 중독성 강한 비트가 특징으로 하드스타일(테크노 등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전자 음악 장르)∙댄스 팝∙EDM 등 여러 장르의 느낌을 강렬하게 담았다. ‘뛰어’는 24일(현지시간) 발표된 스포티파이 글로벌 주간 차트에서 5위를 기록했다. 같은날 영국 오피셜 싱글 차트 톱100에서는 31위, 미국 빌보드 메인 차트인 핫100에선 28위를 차지했다.블랙핑크는 6일 경기 고양종합운동장 주경기장 공연을 시작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시카고, 캐나다 토론토와 프랑스 파리 등 세계 16개 도시를 순회하는 월드 투어 ‘데드라인’(DEADLINE)을 공연하고 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물감 대신 실로 회화와 조각, 설치 작품을 만들어 온 일본 출신 작가 시오타 지하루(塩田千春)의 개인전 ‘리턴 투 어스(Return to Earth)’가 서울 종로구 가나아트센터에서 25일 개막했다. 이번 전시는 일본 오사카 나카노시마 미술관에서 선보였던 연작 ‘타인 안의 자아(The Self in Others)’(2024년), ‘리턴 투 어스’(2025년) 등 대규모 작품들과 그의 최근작, 젊은 시절 유화 3점 등을 공개한다.‘타인 안의 자아’ 연작은 시오타 작가가 의료용 인체 모형을 보고 “나의 신체와 같은 구조임에도 이질적”이라고 느낀 감각에서 출발한 작업이다. 작가는 고국인 일본을 떠나 독일 베를린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문득 자신이 이방인으로, 예전과 전혀 다른 존재로 변해간다는 감각에 젖을 때가 있다고 한다.이 감정을 시각화하기 위해 작가는 분리된 신체 조각 모형들을 각기 다른 크기의 틀 속에 넣고 검정과 하양, 빨강 실로 빽빽하게 엮었다. 백골이나 장기 모형들은 누구나 갖고 있는 몸의 일부임에도 낯선 감각을 자아낸다.‘세포(Cell)’ 연작은 2017년 항암 치료를 받으며 죽음과 마주했던 작가의 경험에서 나왔다. 장기를 연상시키는 덩어리 모양의 유리 조각 위에 철사와 실을 핏줄처럼 칭칭 감았다. 생명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인 세포조차 비정상적으로 증식해 자신을 파괴하는 암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 생명이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로 향하는가를 작품은 묻는다.이번 전시의 핵심 작품인 제3전시장의 ‘리턴 투 어스’는 천장에서 흙을 깐 바닥까지 검은 실들이 내려오도록 설치됐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비롯돼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다는 순환의 개념이 담긴 작품이다. 작가가 “(언젠가) 내 몸은 흙이 되고, 숨결은 공기가 되며, 내 영혼은 분자 단위로 쪼개져 세상을 떠돌 것이다”라고 작가 노트에 밝힌 것처럼, 인간은 언제나 자연의 일부라는 생각을 담고 있다.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유화 3점은 작가가 20대 시절 마지막으로 물감으로 그린 것이다. 작가는 원래 유화를 좋아했지만 어느 순간 ‘그림을 위한 그림’을 멈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후 주로 실을 재료로 작업해 왔다. 작가는 “예전에 그린 유화 3점을 한 자리에 선보이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며 “회화를 계속할 수 없었던 당시 나의 마음부터 최근의 설치 작품으로 오기까지 과정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9월 7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인근의 무더운 사막 데스밸리에서 캠핑하던 저자 김하늬 씨는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보며 ‘이 아름다움을 혼자만 보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친구 김지영, 윤명해 씨와 함께 자연 속으로 떠날 동료를 찾기 시작했다. 예상외로 많은 여성들이 모험을 갈망한다는 사실을 안 뒤, 세 친구는 2021년 ‘우먼스베이스캠프(WBC)’를 설립했다.최근 무엇인가를 배우고, 자연을 경험하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일이 상당 부분 온라인으로 대체되고 있다. 직접 몸으로 부딪치는 경험은 점점 더 낯설고 얻기 어려운 게 돼 간다. 역사적으로 바깥 활동에 제약이 많았던 여성들에겐 더욱 진입장벽이 높다. 이들이 야외 활동을 하는 ‘모험 공동체’를 결성한 이유다.‘들판에 텐트 치는 여자들’은 세 명의 저자가 번갈아 가며 WBC를 운영하면서 겪은 고민과 에피소드를 에세이 형식으로 진솔하게 전한다. 그들은 “사회에서 정해진 길이 아닌, 내가 진짜 원하는 길”을 걷는다. 불안과 두려움을 자연 앞에서 함께 나눴던 순간, 변화무쌍한 날씨로 원했던 설산을 보지 못했더라도 완벽한 경치보다 서로의 긍정적인 태도가 더욱 오래 기억에 남았던 경험 등을 털어놓는다.산에서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걷는 ‘하중 훈련’에 대한 생각도 흥미롭다. 헬스클럽에서 정확한 무게를 확인하며 하는 운동과 달리 수치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언제든 필요한 만큼 자연을 누빌 수 있게 해주는 진짜 힘이 몸 곳곳에 쌓인다”고 한다. 힘들여 능선을 오르고 정상에 도착하면 몸 안의 힘이 자연에서 자신을 먹이고 재우며 생활하는 에너지가 된다는 것을 배운다.책 마지막 부분에선 처음엔 2030 여성들이 중심이 됐던 모임이 다양한 세대를 아우르며 확장된 과정을 담았다. ‘엄마가 돼도 모험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아이들을 데려오는 캠핑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10대 여고생이 친구를 데려오거나, 딸이 나이 든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함께 마이산 아래의 마을로 걸어오는 모습을 보면서, 저자들은 마음에 커다란 울림을 느꼈다고 한다. 그 울림이 읽는 이에게도 전해져 온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프랑스 서부 해안에 있는 작은 항구 도시인 라로셸(La Rochelle). 매일 아침 배 수백 척이 햇살을 머금고 흔들리는 이곳 풍경을, 어느 화가는 캔버스에 콕콕 찍은 점으로 표현했다. 제목도 그림을 그린 도시의 이름을 딴 ‘라로셸’인 이 작품은 점묘파 화가 폴 시냐크(1863∼1935)의 1912년 작품이다. 시냐크는 1911년 라로셸을 처음 발견하고, 이곳만의 활기와 다양성에 깊이 매료돼 여러 차례 그림을 그렸다. 라로셸은 중세 시대부터 있었던 도시인지라 오래된 탑과 고풍스러운 선박, 형형색색의 깃발들이 이곳을 배경으로 한 그림들에 자주 등장한다. 시냐크는 항구의 분주함과 눈부신 태양빛, 고풍스러운 건축물들을 직접 보고 수채화로 남긴 다음 유화로 그렸다. 세종미술관 ‘모네에서 앤디워홀까지’전에서 소개되고 있는 ‘라로셸, 항구를 떠나며’(사진)는 그런 의미에서 생동감으로 가득한 작품이다. 바닷가의 오래된 탑과 물길을 가르며 움직이는 배는 물론이고 선박이 바닷물에 비친 잔상까지 담겼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마치 작은 직사각형 모양의 스티커를 붙인 듯한 크고 작은 색면들이다. 붓을 꾹꾹 눌러 찍은 색면들은 가까이서 보면 파랑, 초록, 분홍의 점들이 모자이크처럼 보인다. 그런데 멀리서 보면 이 색점들이 서로 부딪치면서 배와 바다, 깃발 같은 형체를 이룬다. 이 형체들은 색점 덕분에 진동하는 것처럼 보이고, 이 효과가 물에 반사된 빛으로 반짝이는 항구 도시로 관객들을 이끌고 간다. 시냐크는 18세에 클로드 모네의 그림을 보고 감동받아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어린 시절 예술가들이 많은 동네인 파리 몽마르트르 인근 피갈 광장에서 자라면서 많은 예술가와 교류했다. 그러다 1884년 조르주 쇠라를 만나 그의 점묘파 작업 방식과 색채 이론에 큰 충격을 받고 점묘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점묘파는 프랑스 미술사에서 신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움직임 중 하나. ‘라로셸, 항구를 떠나며’는 아프리카 대륙 내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몇 안되는 신인상주의 작가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시냐크는 1905년에는 독립 예술가 전시회에서 앙리 마티스를 만나기도 했다. 그와 함께 생트로페에서 여름을 보내며 색채 이론에 대한 생각을 주고받았다. 빈센트 반 고흐도 정기적으로 만나 파리 외곽의 풍경과 카페를 함께 그렸다고 한다. 요트 애호가이기도 했던 시냐크는 프랑스 해안 도시를 따라 요트 여행을 하면서 여러 점의 스케치를 남긴 것으로도 알려졌다. 라로셸에선 항구의 분주함과 햇살, 물결의 리듬에 매료됐다. 시냐크는 “이곳의 빛은 음악처럼 춤춘다”고 했으며, “다채로운 선박과 돛의 색 때문에 라로셸을 계속 찾게 된다”고 말할 정도로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숨겨진 뜻이 있는 기호로 보이는 독특한 형체와 선, 숫자들이 담긴 대형 추상화. 색색의 피라미드가 태양을 향해 솟아 있는 기하학적인 그림. 20세기 초 추상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 피터르 몬드리안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스웨덴 화가 힐마 아프 클린트(1862∼1944)의 작품이 한국을 찾았다. 칸딘스키가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한 관심으로 추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던 것처럼, 클린트 역시 영적 혹은 초월적 세계에 심취해 신비로운 그림을 그렸다. 1905년 그린 대형 추상 연작은 칸딘스키보다도 5년가량 앞선다. 하지만 힐마 아프 클린트란 이름은 아직 대중에겐 다소 낯설다. 그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이다. 특히 2018년 미국 구겐하임 미술관 회고전에 관객 60만 명이 몰리며 큰 화제를 모았다. 이후 영국 테이트모던 순회전 등이 열리며 영미권에서 재조명받고 있다. 그런 클린트의 작품들이 일본 도쿄국립근대미술관을 거쳐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 사하구 부산현대미술관에서 19일 개막한 전시 ‘힐마 아프 클린트: 적절한 소환’은 작가의 주요 회화 연작과 드로잉, 기록 등 139점을 소개한다. 전시는 그의 생애와 작업 흐름에 따라 구성됐다. 스웨덴 스톡홀름 왕립미술아카데미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클린트가 미술학교 재학 시절 그린 초기작부터 대담한 추상 연작, 말년의 조용한 수채화와 작가가 남긴 일기 등도 만날 수 있다.대표작 ‘10점의 대형 회화’는 높이 3m, 폭 2m가 넘는 추상화 연작으로 클린트의 사유를 집약한 작품이다. 클린트는 영적 존재의 계시에 따라 초월적 세계와 인간의 정신적 진화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려 했다. ‘10점의 대형 회화’는 그 일환으로 인간의 삶을 네 단계로 나눠 그렸다. 순서대로 1·2번은 유년기, 3·4번은 청년기, 5∼8번은 장년기, 9·10번은 노년기에 해당한다. 유년의 순수함, 청년기 에너지의 분출, 성숙해지는 장년기, 영적 완성을 이룬다는 노년기를 담은 작품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 1917년에 그린 ‘원자’ 연작은 당시 과학계에서 발견한 ‘원자’를 영적인 차원의 상징으로 해석한 독특한 시각이 담겼다. 클린트는 원자를 “우주의 질서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 만물과 인간을 연결하는 영적 매개체”라고 해석했다. 그림에선 물리적인 ‘원자’와 보이지 않는 물질적 에너지인 ‘이서(에테르·ether)’가 상호작용하는 모습을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했다. 클린트가 미술계에서 뒤늦게 주목받게 된 건 나름 이유가 있다. 그는 1890년대부터 신지학(Theosophy·19세기 후반 미국에서 시작한 영적 운동)과 심령주의에 관심을 가졌다. 여성 예술가 모임 ‘다섯 명(De Fem)’을 결성해 강신회(영혼과 교신을 시도하는 모임)를 열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자신의 예술은 ‘높은 영적 존재의 지시에 따라 탄생했다’고 믿었다고 한다. 하지만 세상이 자신의 예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며 “사후 20년 동안 내 작품을 공개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클린트가 1944년 세상을 떠난 뒤 작품 1200여 점은 조카에게 맡겨져 비밀리에 보관됐다. 이후 1986년에야 미 로스앤젤레스카운티 미술관에서 열린 ‘예술 속 영성: 추상회화(1890∼1985)’ 특별전에서 처음 소개가 됐지만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미술계에서 여성 미술가나 비주류 작가를 발굴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클린트의 대규모 회고전이 연달아 열렸다. 이번 국내 전시에선 할리나 디어슈카 감독의 다큐멘터리 ‘힐마 아프 클린트―미래를 위한 그림’도 상영된다. 10월 26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바느질! 바느질! 바느질!/가난과 굶주림, 더러움 속에서/나는 두 겹 실로/셔츠와 수의를 꿰매고 있네.” 산업혁명이 일어난 뒤인 19세기 영국, 수많은 여성과 어린이들은 저임금으로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1970, 80년대 한국 여공들의 고단한 삶을 담은 노래 ‘사계’가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라고 한탄했듯, 영국 시인 토머스 후드는 끊임없이 바느질하며 노동에 지쳐 수의를 꿰맬 지경이라는 내용을 담은 ‘셔츠의 노래’를 1843년 익명으로 발표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1829∼1896)는 이 시에서 영감을 얻어 ‘한 땀! 한 땀!’(1876년)을 그렸다. 이 그림은 밀레이의 대표작과 스타일이 매우 다르다. 밀레이는 비극적 죽음을 맞은 햄릿의 연인을 그린 ‘오필리아’로 잘 알려져 있다. 그가 1851∼1852년 그린 ‘오필리아’는 당시 영국 화가들이 시작했던 ‘라파엘 전파 운동’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 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오필리아’에는 실성해 물에 빠져 익사한 오필리아의 모습이 알록달록한 꽃과 함께 로맨틱하게 그려져 있다. ‘라파엘 전파’의 화가들은 그리스신화나 역사를 그리는 고전주의에 반발해 중세와 초기 르네상스 미술로 돌아가자는 복고주의를 표방했다.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가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얻은 ‘축복받은 베아트리체’도 라파엘 전파의 대표작이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분위기가 대체로 두드러진다. 그런데 ‘한 땀! 한 땀!’은 과거가 아닌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주제로 했다. 1870년대에 들어서면서 밀레이는 라파엘 전파와 거리를 두며 이런 스타일의 그림을 자주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평론가들로부터 상업적인 그림 양식에 무릎을 꿇었다는 비난도 받았지만, 이런 풍속화와 초상화를 그리면서 밀레이는 동시대에 가장 높은 보수를 받는 화가가 됐다. 비록 밀레이가 ‘셔츠의 노래’에서 영감을 얻었다고는 하지만, 그림 속 바느질하는 여인은 평온하고 낭만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림을 마주하면 전성기 스타일보다 색채는 매우 절제됐지만, 물감을 두껍게 겹겹이 쌓아 올려 붓 터치가 그대로 보이기 때문에 장식적인 느낌이 강하다. ‘모네에서 앤디워홀까지’ 전시장에선 비슷한 스타일을 하고 있는 밀레이의 후기 작품 ‘뻐꾹’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두 그림을 통해 19세기 영국의 컬렉터들은 어떤 작품을 좋아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