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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 로봇장비를 투입해 조선시대 선박에 대한 대대적인 수중 발굴을 벌인다. 아직 시험단계여서 출토작업이 아닌 수중촬영에 동원될 계획이지만 수중발굴에 로봇을 활용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23일 충남 태안군 마도해역에서 개수제(開水祭)를 올리고, 지난해 10월 발견된 조선시대 선박 ‘마도 4호선’에 대한 발굴조사를 시작한다. 이번에 투입될 ‘크랩스터(Crabster) CR200’ 해저로봇은 해저에서 유물을 건져 올리거나, 초음파 카메라와 수중 음파탐지기로 탐사를 벌일 수 있다. 가로, 세로 각 2.4m에 높이가 1.3m 정도인 이 로봇은 무게가 650㎏가량 된다. 물건을 집어들 수 있는 집게발 2개를 포함해 총 6개의 발로 바다 속에서 초당 0.25.m의 속도로 움직일 수 있다. 해양문화재연구소와 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가 공동 개발한 이 로봇은 수심이 깊거나 조류가 빠른 위험한 곳에서 사람 대신 작업을 해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연구소는 다음달 중순까지 1개월간 마도 4호선 발굴현장에서 로봇에 대한 현장 적용시험을 진행할 예정이다. 신종국 해양문화재연구소 연구관은 “마도 4호선은 조선 백자의 해상 유통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첫 사례”라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자 가장 오래된 국내 한의서인 ‘동의보감’이 국보로 승격된다. 문화재청은 현재 보물인 동의보감 3건을 국보로 승격하기로 했다고 20일 밝혔다. 어의였던 허준(1546∼1615)이 1613년(광해군 5년) 간행한 동의보감에는 임상 경험과 당시 조선, 중국 의서들의 내용이 망라돼 있다. 내의원(內醫院)에서 목판활자로 찍어낸 최초 간행본은 총 25권 25책으로 구성됐다. 한의학 백과사전으로 불리는 동의보감은 오늘날에도 두루 인용될 정도로 높은 의학수준을 보여줬다. 또 중국 의학의 일방적 수용에서 벗어나 우리 실정에 맞는 의학체계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중국과 일본에도 수출돼 수차례 현지에서 간행됐다. 2009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2002년 1월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은 미국에 대한 세계인들의 인식을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냉전 이후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이 본격적인 제국주의로 치닫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쏟아졌다. 실제로 이 발언 이후 악의 축으로 지목된 이라크와 리비아가 정권 붕괴의 길을 걸었다. 현재 미국은 150개국에 걸쳐 700개 이상의 군사기지와 25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다. 그렇다면 미국은 실제 제국주의 국가인가. 이 책은 한때 제국으로 불린 로마와 몽골,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미국의 사례를 풍부하게 검토한 뒤 제국과 제국주의는 분명 다르다고 결론을 내린다. 결정적인 차이점은 주변부에 대한 시각과 군사력에 대한 의존도다. 제국주의 정책을 구사하는 나라는 주변부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힌 나머지 군대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 역사에서 제국은 주변부에 대한 시각이 유연하고, 군사력보다 정치, 경제, 문화적 파워를 더 중시한다. 압도적인 문화적 매력으로 주변국들의 존경을 받고 심지어 이민족의 자발적인 복속까지 이끈 로마제국의 ‘팍스 로마나’가 대표적인 사례다. 20세기 초반 제국주의 침략에 나선 독일과 일본, 이탈리아처럼 주변부에 대한 군사적 억압은 늘 자멸이라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왔다. 반면 군사력에 들어가는 낭비를 최소화하고 주변부를 적절히 통제한 로마는 1000년이나 존속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현대제국 미국의 딜레마가 숨어 있다. 주변부의 존경을 이끌어내는 것은 다름 아닌 제국의 역사적 사명인데 민주주의 수호 같은 제국의 사명을 수호하기 위해선 군사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리기 때문이다. 최근 시리아 사태를 놓고 인도주의적 개입과 현실주의적 방관 사이에서 미국이 갈팡질팡한 게 극명한 사례다. 동아시아에 있는 우리도 제국과 마냥 무관할 수는 없다. 새로운 제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을 코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반(反)중국 연합을 형성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강력한 이웃 중국과 좋은 관계를 맺을 것인가? 제국의 역할과 활동에 대한 질문은 한국 독자들에게 현재의 정치적 관심의 대상이기도 하다’고 적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가야 무덤에 순장한 말머리 유물이 일반에 처음 공개된다. 국립대구박물관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된 ‘고령 지산동 대가야 고분군’ 특별전을 6월 14일까지 연다. 대구박물관은 지산동 고분군 가운데 최근 발굴된 73, 74, 75호분의 주요 유물 500여 점을 선보인다. 700여 기의 무덤으로 구성된 지산동 고분군에는 대가야 연맹의 맹주였던 대가야의 왕과 왕족들이 묻혀 있다. 이곳에서는 가야의 여러 소국들 중 유일하게 금동관이 출토됐다. 특히 이번에 전시하는 73호분 유물 중에는 무덤 주인과 더불어 순장된 8명의 사람과 말머리가 눈길을 끈다. 다른 고대국가에 비해 순장자 수가 많은 것이 대가야 무덤의 특징이다. 이 밖에 대가야 왕을 지칭하는 대왕(大王) 새김 긴목항아리, 굽다리접시, 금귀고리 등도 전시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일본 비구니 사찰의 효시가 된 백제의 절터는 과연 어디에 있나?’ 학계의 오랜 숙제였던 백제 비구니 사찰에 대한 실마리 하나가 풀렸다. 충남 부여군 동남리사지(東南里寺址)에 대한 국립부여박물관의 최근 유물 조사를 통해서다. 그동안 학자들은 신라와 왜(倭)에서 확인된 여승들의 수행 공간 ‘비구니 사찰’이 백제에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백제가 두 나라에 불교를 처음 전했고, 일본서기에 ‘서기 577년 백제국 왕이 돌아가는 사신 대별왕에게 부처경론 몇 권과 율사, 선사, 비구니, 주금사, 조불공, 조사공의 6명을 보냈다’는 기록이 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제의 비구니 사찰이 구체적으로 어디였는지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비구니 사찰인 신라 영흥사나 일본 도유라데라(豊浦寺)와 달리 백제는 관련 사료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국립부여박물관은 동남리사지에 대한 재조사 보고서를 발간하면서 이곳이 비구니 사찰이며, 인근 비구 사찰인 군수리사지와 더불어 하나의 묶음 관계였을 것이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동남리사지는 이미 일제강점기인 1939년 첫 발굴이 이뤄졌으나 제대로 된 발굴보고서가 없어 이번에 당시 출토 유물에 대한 전면조사가 진행됐다. 동남리사지는 다른 사찰과 달리 불탑이 전혀 발견되지 않아 귀족이 자신의 집에 세우는 사택사원이나 사신을 접대하는 영빈시설 혹은 제의용 시설일 것이라는 갖가지 추측만 난무했다. 그런데 이번 조사에서 1939년과 1993년에 출토된 기와 총 741점의 무늬와 제작기법을 전수 조사한 결과 국가사찰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전체 기와의 약 64%를 차지하는 474점이 백제시대 관영(官營) 공방이던 ‘정암리 요지’에서 생산된 것으로 조사됐기 때문이다. 정암리 요지에서 만들어진 기와가 사택 사원에 대량으로 공급됐다고 보기는 힘들다. 게다가 부처가 태어났을 때의 모습인 탄생불(誕生佛)로 추정되는 동제(銅製) 불상 파편이 나왔기 때문에 이곳이 영빈 혹은 제의 시설일 가능성을 일축한다. 부여박물관은 보고서에서 “파편의 크기와 두상 형태, 왼쪽 어깨가 약간 올라간 자세 등으로 미뤄볼 때 탄생불일 가능성이 있다”며 “만약 탄생불이 맞는다면 백제 지역에서 확인된 유일한 사례일 것”이라고 밝혔다. 재밌는 것은 동남리사지에서 발굴된 기와의 96%를 차지하는 무늬가 근처 군수리사지에서도 고스란히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직선거리로 50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두 사찰이 정암리 요지에서 같은 종류의 기와를 공급받은 셈이다. 두 사찰이 뭔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리라는 것을 추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병호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탑이 없는 동남리사지는 금당과 목탑을 모두 갖춘 군수리사지의 변형으로 볼 수 있다”며 “군수리사지가 동남리사지보다 약간 먼저 지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일본의 비구 사찰인 고쿠분지(國分寺) 옆에 조성된 비구니 사찰 고쿠분니지(國分尼寺)에도 탑이 세워지지 않은 사실이 눈길을 끈다. 실제로 승려가 지켜야 하는 계율을 규정한 사분율(四分律)에는 비구니가 탑을 세우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구일회 국립부여박물관장은 “고쿠분지-고쿠분니지의 세트관계가 군수리사지-동남리사지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가능하다”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소재가 진도에서 돌아오자 갑자기 선학(禪學)을 해서 퇴계가 크게 놀랐다. 그와 변론할 수가 없어 퇴계가 때때로 시구(詩句)를 통해 자극을 주었지만 소재의 응답 또한 심히 준열했다.” 조선후기 성리학자 택당 이식이 자신의 문집에서 소재 노수신(1515∼1590)을 평가한 글이다. 택당은 “도학자들 사이에서 선학을 하는 풍조를 소재가 열었다. 마치 주자 당시에 육상산이 갑자기 출현한 것과 같았다”고도 했다. 육상산은 주자와 학문적으로 대립한 중국 남송시대 유학자로 양명학을 태동시킨 인물이다. 결국 택당은 주자 성리학에서 이단으로 배척한 상산학 혹은 양명학을 소재가 신봉했다고 비판한 것이다. 올해는 소재가 태어난 지 500주년이 되는 해다. 소재는 16세기에 활동한 조선시대 대학자로 퇴계 이황, 회재 이언적 등과 교류하며 영의정까지 오른 인물이다. 당파 싸움에 밀려 진도에서 19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많은 제자를 키우고 주옥같은 한시를 남겼다. 소재는 당대에는 퇴계나 율곡 못지않은 거학으로 이름을 떨쳤지만 조선후기로 갈수록 사상사에서 점차 잊혀졌다. 최진덕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소재 노수신의 인심도심설에 대한 재해석: 주자학 속에 숨은 양명학’ 논문에서 소재가 조선후기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이유를 양명학 연구에서 찾았다. 이 논문은 24일 고려대 백주년기념관에서 열리는 ‘소재 노수신 선생 탄생 5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발표될 예정이다. 이와 관련해 ‘소재 노수신 선생 학술문화 진흥회’는 다음 달 6일 소재의 고향인 경북 상주시에서 시비 제막식과 강연회를 잇달아 연다. 최 교수에 따르면 택당의 지적처럼 소재는 양명학에 경도된 취향을 문집이 아닌 한시를 통해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주자 성리학만 정학(正學)으로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이단시한 조선사회에서 소재가 문집에서 이런 성향을 대놓고 드러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후대 조선 성리학자들이 이를 읽어내고 소재의 학문적 성과를 폄하했다는 것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소재가 진도에서 돌아오자 갑자기 선학(禪學)을 해서 퇴계가 크게 놀랐다. 그와 변론할 수가 없어 퇴계가 때때로 시구(詩句)를 통해 자극을 주었지만 소재의 응답 또한 심히 준열했다.” 조선후기 성리학자 택당 이식이 자신의 문집에서 소재 노수신(1515~1590)을 평가한 글이다. 택당은 “도학자들 사이에서 선학을 하는 풍조를 소재가 열었다. 마치 주자 당시에 육상산이 갑자기 출현한 것과 같았다”고도 했다. 육상산은 주자와 학문적으로 대립한 중국 남송시대 유학자로 양명학을 태동시킨 인물이다. 결국 택당은 주자 성리학에서 이단으로 배척한 상산학 혹은 양명학을 소재가 신봉했다고 비판한 것이다. 올해는 소재가 태어난 지 500주년이 되는 해다. 소재는 16세기에 활동한 조선시대 대학자로 퇴계 이황, 회재 이언적 등과 교류하며 영의정까지 오른 인물이다. 당파 싸움에 밀려 진도에서 19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많은 제자를 키우고 주옥같은 한시를 남겼다. 소재는 당대에는 퇴계나 율곡 못지않은 거학으로 이름을 떨쳤지만, 조선후기로 갈수록 사상사에서 점차 잊혀졌다. 최진덕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소재 노수신의 인심도심설에 대한 재해석: 주자학 속에 숨은 양명학’ 논문에서 소재가 조선후기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이유를 양명학 연구에서 찾았다. 이 논문은 24일 고려대 백주년기념관에서 열리는 ‘소재 노수신 선생 탄생 5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발표될 예정이다. 이와 관련 ‘소재 노수신 선생 학술문화 진흥회’는 다음달 6일 소재의 고향인 경북 상주시에서 시비 제막식과 강연회를 잇달아 연다. 최 교수에 따르면 택당의 지적처럼 소재는 양명학에 경도된 취향을 문집이 아닌 한시를 통해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주자 성리학만 정학(正學)으로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이단시 한 조선사회에서 소재가 문집에서 이런 성향을 내놓고 드러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후대 조선 성리학자들이 이를 읽어내고 소재의 학문적 성과를 폄하했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소재는 주자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천지만물이 본래 하나임을 깨닫고 주자학의 한계를 넘고 보완하기 위해 양명학을 연구했다”고 말했다.김상운 기자sukim@donga.com}

‘추위를 무릅쓰고 매화 꽃송이 함께하여/밤을 비추는 구슬의 광채와 빛을 다툰다/넘실넘실 환한 빛의 바다 배를 띄울 만하고/ 맑디맑은 푸른 물결 갓끈을 씻을 만하네.’ 조선 후기 유명 문인화가 이윤영(1714∼1759)이 ‘빙등조매(氷燈照梅)’를 경험하며 지은 한시다. 18세기 사대부들의 매화 사랑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빙등조매’는 즐기는 과정부터 흥미롭다. 마음이 맞는 지인들과 서재에 모인 추운 겨울밤, 물을 부은 백자사발을 밖에 내놓는다. 잠시 후 언 사발을 가져와 얼음을 파낸 뒤 불 밝힌 초 하나를 가운데 세운다. 얼음을 뚫고 영롱한 빛을 쏟아내는 빙등 옆에 매화를 놓으면 은은한 달빛을 머금은 매화를 보는 것 같다. 선비들은 이를 지켜보며 시를 짓고 술을 마셨다. 이 책은 조선시대 사대부의 매화 감상법을 살펴보고 이들이 지은 시를 통해 내면까지 들여다본 역작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한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저자는 18세기 들어 매화 감상법이 다양해진 현상을 주목했다. ―조선 사대부들이 매화에 집착한 이유가 무엇인가. “옛사람들은 매화가 꽃망울을 틔우며 봄을 알리는 존재라고 여겼다. 성리학에서 봄을 알리는 것은 만물이 음기에서 양기로 순환하는 생생지심(生生之心)의 상징으로 중시된다. 겨울 추위를 이겨 낸 매화꽃을 세상의 탁류에 휩쓸리지 않고 초심을 지키는 절개처럼 여긴 측면도 있다. 선비들이 설중매(雪中梅)를 보려고 눈길을 헤치며 산에 힘겹게 오른 이유이기도 하다. 퇴계 이황은 절명하는 순간까지도 ‘매화에 물을 주라’고 하지 않았던가.” ―개인적으로도 매화와 인연이 있나. “부모님이 전남 함평에서 30년 동안 매실을 재배하셨다. 나도 20년 넘게 집에서 매화를 키웠다. 올해는 2월 초쯤 꽃이 피어서 그달 하순쯤 졌는데 거실까지 매화 향이 그윽하더라. 매실주와 함께 즐기면 그만이다.” ―선비들의 매화 감상법이 무척 다양했던데…. “빙등조매뿐만 아니라 화분에 넣고 곁에 두는 분매(盆梅), 별도 공간에 놓고 감상하는 감매(龕梅), 땅에 뿌리를 박고 있는 자연 상태의 모습을 즐기는 지매(地梅), 밀랍으로 매화 모양을 만들어 즐기는 윤회매(輪廻梅)까지 다채로웠다. 이 중 빙등조매와 윤회매는 18세기에 생겨 그 시대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특성인가. “영·정조 시대 당시 상품 화폐 경제의 발전으로 사대부들의 취향과 기호가 다양해지면서 매화를 향유하는 방식도 풍성해졌다. 또 신분의 장벽이 조선 초기보다 낮아져 사대부와 중인이 교유하게 된 것도 영향을 끼쳤다. 예컨대 경화세족(서울에 살면서 세도가 높았던 최상류층) 조재호는 서얼 출신 시인들과 ‘매사(梅社)’를 조직하고 매화에 대한 감상 시 200수를 짓기도 했다.”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나. “자연을 가까이하면서 마음까지 수양한 선조들의 지혜를 본받았으면 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을 앞세운 일본 정부의 고대사 도발이 독도와 위안부 문제로 얼어붙은 한일 관계에 새로운 뇌관이 되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은 일제의 한반도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일본이 고대에도 임나일본부라는 기관을 설치해 한반도 남부를 식민 지배했다는 주장으로 일본 문화청은 홈페이지에서 용 무늬가 새겨진 금장식 칼 등 8개의 삼국시대 유물을 설명하면서 ‘임나시대’에 ‘임나’ 지역에서 출토됐다고 명기해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일본 정부가 이번에 검정 통과시킨 중학교 역사 교과서 대부분에도 ‘임나’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하지만 임나일본부설은 이미 일본 주류 학계에서조차 힘을 잃은 상황이다. 용어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된 일본서기는 임나일본부가 4∼6세기경 존재했다고 주장하지만, ‘일본’이라는 국호가 8세기 이후 생겼기 때문이다. 2010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에서 양국 학자들은 임나일본부라는 용어를 쓰지 않기로 합의까지 했다. 실제로 일본서기의 관련 내용이 어떻게 왜곡된 것인지를 밝히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신공황후가 신라를 정벌했다는 일본서기 내용은 왜가 백제 부흥군을 일으킨 사실을 토대로 지어낸 허구라는 것이다. 또 630년까지 임나가 존재해 야마토 조정에 조공을 했다는 기록도 마지막 가야왕국인 대가야가 562년 신라에 병합된 역사적 사실과 명확히 배치되는 것이다. 학계 일각에서는 임나일본부가 통치했다는 한반도 내 10개 가라(가야)국이 오히려 일본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는 “진실이 명백히 드러난 만큼 일본 문화청은 식민사관에 입각한 임나 표기를 즉각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문화청 미술학예과 당국자는 9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해명을 늘어놓았다. “일본 정부가 1936년 이들 유물을 중요 문화재로 지정할 당시 ‘임나’라는 표기를 사용했고, 그것을 그대로 홈페이지에 실었을 뿐”이라며 “홈페이지는 10여 년 전 개설했으며 개설 당시부터 임나라는 표기가 그대로 올라 있었다. 최근 표기를 바꾼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수정할 의사는 없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보도가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 사실관계를 파악 중이다. 아직 관련 논의는 없다”고 답했다. 일본 문화청의 도발은 이뿐만이 아니다. 일본 중요문화재로 지정돼 있는 동조여래입상은 ‘아스카 또는 삼국시대’ 유물로 표기돼 있다. 하지만 입상은 고대 한반도 유물이라는 게 한국은 물론이고 일본 학계에서도 정설로 굳어져 있다. 입상은 원래 ‘아스카 시대’ 유물로만 표기돼 있었으나 2011년 한국 언론이 문제를 지적하면서 그나마 병기하는 수준으로 슬그머니 변경한 것이다. 일본 문화청 홈페이지의 한국 문화재 출처에 오류도 많았다. ‘금착수렵문동통(金錯狩獵文銅筒)’ 문화재의 경우 한반도와 중국에 중복 등장했다. 한반도 항목에선 고려 유물로 기재돼 있고, 중국 항목에선 ‘1∼2세기 후한(後漢) 시대’라고 표기돼 있다.도쿄=배극인 bae2150@donga.com·박형준 특파원 / 김상운 기자}

20대 남성이 순장(殉葬)된 신라 여성 귀족의 무덤이 경주에서 발견됐다. 여자가 주인인 신라 무덤에 젊은 남성이 나란히 묻힌 게 발굴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문화재청은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이 경북 경주 황남동에서 20, 30대로 추정되는 남녀 유골과 금은 장신구, 말갖춤(마구·馬具) 등 신라시대 유물을 출토했다”고 9일 밝혔다. 유골이 발견된 무덤은 서기 3∼4세기경 축조된 돌무지덧널무덤으로 비슷한 크기의 고분이 바로 옆에 조성돼 있다. 발굴팀에 따르면 하늘을 바라보고 똑바로 누워 있는 피장자는 허벅지 뼈가 얇고 두개골의 귓바퀴 뒤쪽 뼈가 여성의 해부학적 특징을 보이고 있다. 또 다리뼈의 근육선과 치아 크기, 마모도 등으로 미뤄 볼 때 근육이 발달한 30대 여성으로 추정된다. 시신은 금귀고리와 더불어 금박으로 장식된 허리띠를 착용하고 있었다. 금관이 발견되지 않았고 무덤 규모나 유물 수준이 왕릉급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여성은 귀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이번에 발견된 무덤이 첨성대와 황남대총과 가깝다는 점에서 진골 이상의 왕족이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온다. 여성 시신을 바라보며 옆으로 나란히 누운 유골은 종아리뼈의 가자미근선과 넓적다리뼈 두께, 치아 등을 고려할 때 20대 남성으로 추정됐다. 이 유골은 삐딱하게 누운 데다 착장한 유물이 없어 무덤 주인이 아닌 순장자로 보인다. 김권일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조사팀장은 “보통 남성 순장자는 아동이나 50대 이상의 고령층인 경우가 많다”며 “젊은 20대 남성이 여성 시신과 주곽 안에 나란히 묻힌 것은 전례가 없다”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순장 풍습은 고구려와 백제, 신라, 가야 무덤 등에서 모두 확인됐다. 재밌는 것은 남성 유골의 치아가 여성의 오른쪽 어깨 부근에서 발견됐고, 다리뼈가 여성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비스듬히 겹쳐져 있었다는 점이다. 일부에서는 이를 두고 남녀가 교합(交合)하는 자세로 매장됐다고 주장하지만 발굴팀은 부인했다. 무덤에서는 금귀고리와 은허리띠를 비롯해 비취색 곡옥과 청구슬을 꿰어 만든 목걸이가 출토됐다. 은허리띠는 띠고리와 장식, 30여 개의 띠꾸미개로 구성돼 있는데 고리 부분에 용을 형상화한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이번 발굴은 단독주택을 새로 짓는 과정에서 이뤄졌으며 현재까지 움무덤 3기, 덧널무덤 11기, 돌무지덧널무덤 7기, 독무덤 1기 등 24기의 신라무덤이 나왔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경주 시내에서 신라초기 덧널무덤이 발굴된 사례가 드물어 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20대 남성이 순장(殉葬)된 신라 여성귀족의 무덤이 경주에서 발견됐다. 여자가 주인인 신라 무덤에 젊은 남성이 나란히 묻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문화재청은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이 경북 경주 황남동에서 20~30대로 추정되는 남녀 유골과 금·은 장신구, 말갖춤(馬具) 등 신라시대 유물이 출토됐다”고 9일 밝혔다. 유골이 발견된 무덤은 서기 3~4세기경 축조된 돌무지덧널무덤으로 비슷한 크기의 고분이 바로 옆에 조성돼 있다. 발굴팀에 따르면 하늘을 바라보고 똑바로 누워있는 피장자는 허벅지 뼈가 얇고 두개골의 귓바퀴 뒤쪽 뼈가 여성의 해부학적 특징을 보이고 있다. 또 다리뼈의 근육선과 치아 크기, 마모도 등을 미뤄볼 때 근육이 발달한 30대 여성으로 추정된다. 시신은 금귀고리와 더불어 금박으로 장식된 허리띠를 착용하고 있었다. 금관이 발견되지 않았고 무덤 규모나 유물 수준이 왕릉급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여성은 귀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이번에 발견된 무덤이 첨성대와 황남대총과 가깝다는 점에서 진골 이상의 왕족이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온다. 여성 시신을 바라보며 옆으로 나란히 누운 유골은 종아리뼈의 가자미근선과 넓적다리뼈 두께, 치아 등을 고려할 때 20대 남성으로 추정됐다. 이 유골은 삐딱하게 누운 데다 착장한 유물이 없어 무덤 주인이 아닌 순장자로 보인다. 김권일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조사팀장은 “보통 남성 순장자는 아동이나 50대 이상의 고령층인 경우가 많다”며 “젊은 20대 남성이 여성 시신과 주곽 안에 나란히 묻힌 것은 전례가 없다”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순장 풍습은 고구려와 백제, 신라, 가야 무덤 등에서 모두 확인됐다. 재밌는 것은 남성 유골의 치아가 여성의 오른쪽 어깨 부근에서 발견됐고, 다리뼈가 여성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비스듬히 겹쳐져 있었다는 점이다. 일부에서는 이를 두고 남녀가 교합(交合)하는 자세로 매장됐다고 주장하지만 발굴팀은 부인했다. 무덤에서는 금귀고리와 은 허리띠를 비롯해 비취색 곡옥과 청구슬을 꿰어 만든 목걸이가 출토됐다. 은 허리띠는 띠고리와 장식, 30여 개의 띠꾸미개로 구성돼 있는데 고리부분에 용을 형상화한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이번 발굴은 단독주택을 새로 짓는 과정에서 이뤄졌으며 현재까지 움무덤 3기, 덧널무덤 11기, 돌무지덧널무덤 7기, 독무덤 1기 등 24기의 신라무덤이 나왔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경주 시내에서 신라초기 덧널무덤이 발굴된 사례가 드물어 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했다.김상운 기자sukim@donga.com}

1456년 11월 14일 세조는 왕위에 오른 지 2년 차를 맞아 집권에 힘쓴 공신과 그 자손을 소집한 단합대회(회맹·會盟)를 열었다. 총 226명이 모인 이날 회맹에서 참가자들은 구리 쟁반에 담긴 피를 나눠 마시고 세세로 충성할 것을 다짐했다. 사망한 공신이 있으면 그 적장자가 대신 참석해 자리를 메웠다. 세조는 그 자리에서 일종의 충성 서약서인 ‘오공신회맹축(五功臣會盟軸)’을 만들었다. 여기엔 무려 8m에 이르는 거대한 두루마리에 세자와 왕족, 공신 등 157명의 서명(署名)이 빼곡히 적혀 있다. 이 때문에 ‘오공신회맹축’은 조선시대 서명 연구자들 사이에서 보고(寶庫)로 통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은 전주 이씨 장천군(長川君) 이보생(李普生) 후손가로부터 ‘오공신회맹축’을 최근 기탁받았다고 8일 밝혔다. 이를 보면 이 시대 서명은 이름의 한자를 파자(破字)하는 방식이 많이 쓰였다. 예컨대 양녕대군은 자신의 이름인 ‘제(제)’를 ‘의(衣)’와 ‘시(是)’로 나눠 위아래로 나란히 서명했다. 효령대군도 이름인 ‘보(補)’를 ‘의(衣)’와 ‘보(甫)’자로 나눠 서명했다. 당시 권력 실세들이 빠짐없이 모여 서명한 ‘오공신회맹축’에 세조의 최측근이던 한명회의 서명이 빠진 사실이 흥미롭다. 주군과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굳이 살필 필요가 없을 정도로 권력이 막강했다는 방증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참석자 중에는 훗날 덕종에 추존된 세자 이장(李暲)을 비롯해 공신 정인지 신숙주 권람 등이 포함돼 있었다. 세조가 200여 명의 왕족과 공신을 총동원하면서 일종의 정치 이벤트를 벌인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회맹을 계획할 당시엔 조카 단종을 내쫓고 김종서 황보인 등 반대 세력을 숙청한 세조에 대한 비난 여론이 거셌다. 김학수 한중연 국학자료연구실장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친위 세력을 규합해 정권을 지켜야 한다는 세조의 위기의식이 오공신회맹축에 반영됐고 충성 서명까지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국가기관이 주도하는 첫 독립운동 인명사전이 나온다. 독립기념관 산하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편찬위원회’를 8일 출범시켰다. 올해부터 4년간 30권에 걸쳐 1만6000명에 달하는 독립운동가의 생애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예정이다. 앞서 독립기념관은 1996년 한국독립운동사사전 총론 편과 2004년 독립운동 단체 편을 발간했다. 인명사전에는 독립운동가들의 성장 과정과 사상, 운동 성격, 역사적 의미 등이 수록된다. 윤봉길 의사의 손녀인 윤주경 독립기념관장은 “광복 70주년인 올해부터 인명사전 편찬을 시작해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2019년까지 완간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국가기관이 주도한 첫 독립운동가 인명사전이 나온다. 독립기념관 산하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편찬위원회’를 8일 출범시켰다. 올해부터 4년간 30권에 걸쳐 1만6000명에 달하는 독립운동가의 생애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예정이다. 앞서 독립기념관은 1996년 한국독립운동사사전 총론편과 2004년 독립운동 단체편을 발간했다. 인명사전에는 독립운동가들의 성장과정과 사상, 운동 성격, 역사적 의미 등이 수록된다. 윤봉길 의사의 손녀인 윤주경 독립기념관장은 “광복 70주년인 올해부터 인명사전 편찬을 시작해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2019년까지 완간할 것”이라고 밝혔다. 독립기념관 측은 여운형 등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도 대한민국에 대한 적대행위를 하지 않았다면 인명사전에 포함시킬 것이라는 뜻을 밝혔다. 편찬위원장을 맡은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는 “여운형 등은 정부의 공훈 심사를 통과한 분들로 인명사전에도 들어갈 것”이라며 “그러나 6·25전쟁에 참전한 뒤 김일성에 의해 숙청된 연안파 등은 추후 편찬위원회 심사를 거쳐 수록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편찬위원회는 총 116명의 학계 인사들로 구성됐다. 이 사업엔 2019년까지 정부 예산 62억 원이 투입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문화재청은 봄을 맞아 경복궁과 창경궁에서 야간 특별 관람을 5월 2∼14일 진행한다. 관람 시간은 오후 7∼10시(입장마감 오후 9시)로 인근 국립고궁박물관도 오후 10시까지 연장 운영된다. 이 기간 중에는 ‘궁중문화축전’도 함께 열려 도심 속 고궁의 야경과 더불어 다양한 볼거리를 즐길 수 있다. 경복궁에서는 흥례문을 배경으로 음악과 빛의 향연이 펼쳐지는 ‘미디어 파사드(입면)’ 공연도 열린다. 창경궁에서는 궁중 속 혜경궁 홍씨의 이야기를 그림자극으로 재현한 ‘통명전 그림자극’이 준비됐다. 하루 최대 관람인원은 경복궁과 창경궁 각각 2200명으로 1인당 2장으로 관람권 구입이 제한된다. 일반인은 인터넷 예매만 가능하며, 만 65세 이상은 현장 구매 혹은 전화 예매도 할 수 있다. 외국인은 현장 구매만 가능하다. 경복궁 02-3700-3900, 창경궁 02-762-9515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경남 김해시 조개무지(貝塚·패총)에 3세기 말 일본인 거상(巨商)이 묻혔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오가며 중개 무역에 종사한 이 사람이 세상을 떠나자 지인들은 평소 사용하던 필기도구를 한꺼번에 무덤에 부장했다. 국립김해박물관이 최근 발표한 ‘김해 회현리 패총’ 학술조사 보고서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재구성한 옹관 주인공의 모습이다. 김해박물관은 일제강점기 발굴된 회현리 패총 자료를 재조사한 결과 D지구 3호 옹관에서 발견된 7점의 동사(銅사)가 각기 다른 방향에서 갈린 흔적을 최근 발견했다. 한 무덤에서 7점의 동사가 한꺼번에 출토된 것은 회현리 패총이 유일하다. 동사란 끌이나 커터처럼 앞부분을 간 청동기로, 학계에서는 용도를 놓고 지우개와 조각칼, 소형 창 등으로 의견이 엇갈린다. 종이가 귀한 옛날에는 나무로 된 목간(木簡)에 문자를 새겼기 때문에 마치 지우개처럼 잘못 쓴 글자를 동사로 지웠을 것이라는 견해에 힘이 실리고 있다. 진시황릉 병마용에서 출토된 문인상의 허리춤에 동사와 유사한 도구가 달려 있는 것도 이런 견해를 뒷받침한다. 그런데 이번 재조사 과정에서 동사 여러 개의 끝 부분이 왼쪽 혹은 오른쪽만 집중적으로 닳아 있는 사실이 새로 밝혀졌다. 보고서를 작성한 이양수 김해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동사가 마연된 위치와 각도가 모두 다른 걸 감안할 때 각각 오른손잡이, 왼손잡이인 사람들이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자신이 쓰던 동사를 무덤에 넣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고대 목간은 책은 물론이고 운송하는 물건의 꼬리표 역할도 했기 때문에 동사를 묻은 사람들은 학자나 상인이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을 장례식에 한꺼번에 불러들인 옹관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우선 이 옹관이 한반도가 아닌 고대 일본 규슈 지방의 옹관과 같은 종류라는 점에서 일본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옹관이 있던 장소가 2000년 전에는 바다와 연접한 이른바 명당이었고 옹관의 부장품이 어느 정도 격을 갖추고 있음을 고려하면 상당한 사회적 지위를 누렸던 인물로 보인다. 학계는 경남 김해와 고령 일대가 고대 한반도의 주요 철광석 산지였고, 왜가 이를 수입한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철을 매개로 중개 무역에 종사한 양측 상인들이 상대국에 무리를 이뤄 거주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결국 옹관 주인은 철을 중개한 일본인 거상으로 한반도의 일본인 거주민들 사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해박물관은 조사를 마친 옹관과 출토 유물들을 지난달 31일부터 대외교류 상설전시실에서 선보이고 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충무공 이순신의 종가가 보관하다 분실한 ‘장계(狀啓)별책’이 국립해양박물관에 소장된 것으로 확인됐다. 장계별책은 충무공이 임진왜란 당시 전장의 상황을 왕에게 보고한 문건들을 모은 것이다.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은 “해양박물관이 2년 전 구입한 ‘충민공계초(忠愍公啓草)’가 장계별책과 같은 서책인 것으로 파악됐다”고 6일 밝혔다. 일제강점기인 1928년 촬영된 장계별책 사진을 충민공계초와 비교한 결과다. 이 책은 충무공이 숨진 뒤인 1662년 작성된 필사본으로 총 68편의 보고서가 들어 있다. 언제, 어떻게 종가에서 외부로 반출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책 제목인 충민공계초는 충무공을 기리기 위해 1601년 전남 여수에 건립된 사당 충민사(忠愍祠)에서 따온 것이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문화재청은 봄을 맞아 경복궁과 창경궁에서 야간 특별관람을 5월 2~14일 진행한다. 관람 시간은 오후 7시~10시까지(입장마감 오후 9시까지)로 인근 국립고궁박물관도 오후 10시까지 연장 운영된다. 이 기간 중에는 ‘궁중문화축전’도 함께 열려 도심 속 고궁의 야경과 더불어 다양한 볼거리를 즐길 수 있다. 경복궁에서는 흥례문을 배경으로 음악과 빛의 향연이 펼쳐지는 ‘미디어 파사드(입면)’ 공연도 열린다. 창경궁에서는 궁중 속 혜경궁 홍씨의 이야기를 그림자극으로 재현한 ‘통명전 그림자극’이 준비됐다. 하루 최대 관람인원은 경복궁과 창경궁 각각 2200명으로 1인당 2매로 관람권 구입이 제한된다. 일반인은 인터넷 예매만 가능하며, 만 65세 이상은 현장구매 혹은 전화예매도 할 수 있다. 외국인은 현장구매만 가능하다. 경복궁 02-3700-3900, 창경궁 02-762-9515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선화공주와 서동의 러브스토리가 역사적 팩트일 가능성을 제기한 동아일보의 3일자 단독 보도에 독자들의 관심이 뜨겁다. 단순히 설로만 주장한 게 아니라 익산 쌍릉에서 출토된 유물 증거를 최초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이 기사를 실은 포털사이트에는 순식간에 150여 개의 댓글이 달렸다. 우리나라 역사에 재밌는 스토리텔링이 숨어 있는지 몰랐다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 한정된 지면 때문에 미처 쓰지 못한 선화공주 이야기를 추가로 풀어본다. 우선 선화공주가 실존 인물이라면 그가 의자왕의 어머니인가라는 의문부터 시작해 보자. 지금까지 확인된 문헌사료와 유물만 놓고 보면 의자왕의 어머니는 선화공주 혹은 사택왕후일 것이다. 그러나 알려지지 않은 의자왕의 생년(生年)을 추정해 보면 의외의 추론이 가능해진다. 그의 넷째 아들인 융이 서기 682년 68세의 나이로 중국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기록을 근거로 의자왕이 태어난 해를 역산해 보면 대략 595년 전후로 추산된다. 이때 아버지 무왕은 왕으로 즉위하기 이전의 한미한 신분이었다. 삼국유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를 캐는 아이(薯童·서동)’로 불렸던 시절이다. 세도가에 의해 일약 왕으로 등극하기 이전까지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던 조선시대 철종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이 대목에서 일부 학자들은 무왕이 당시 자신의 활동무대였던 익산에서 신붓감을 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왕족과 고위 귀족들이 모여 사는 수도 사비성(현 부여) 출신의 여성을 신부로 맞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노중국 계명대 명예교수는 “의자왕의 모친은 사택왕후나 선화공주가 아닌 제3의 인물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익산 쌍릉으로 돌아가 보자. 선화공주가 묻힌 것으로 보이는 쌍릉 소왕묘는 그의 남편 무왕에 의해 조성됐다. 무왕 이전 백제 왕들은 그들의 왕릉을 수도 사비성이 있는 부여 능산리에 세웠다. 그렇다면 왜 굳이 수도에서 떨어진 익산에 왕릉을 지었을까. 실마리는 쌍릉 주변에 함께 조성된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에 있다. 익산 왕궁리 유적에는 왕성 터는 물론이고 정원이 꾸며져 있는 기와집과 대규모 수세식 화장실 등 당시로선 첨단 시설물이 들어서 있다. 미륵사는 면적이 8만2644m²(약 2만5000평)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다. 이를 두고 학계는 무왕이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들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천도(遷都)를 계획한 것으로 본다. 이병호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무왕이 쌍릉 소왕묘를 익산에 세운 것도 이곳을 키우겠다는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두 달 뒤면 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을 테마로 한 ‘익산 서동축제’가 열린다. 올해로 12년째인 지역축제다. 축제를 본 많은 사람들은 서동요의 러브스토리가 단순히 허구가 아니라는 사실, 아직도 규명돼야 할 미스터리가 많다는 사실에 짜릿한 흥분마저 느낄지도 모르겠다.김상운 문화부 기자 sukim@donga.com}

‘친숙한 것 잊기 어려움은 예로부터 걱정거리/욕망을 이기려면 마음 모질게 가져야지/이제부터 남방서 온 담배를 끊으려고 하니/이십 년 세월 동안 피운 것이 잘못이다.’ 조선 후기 대학자 남당 한원진(1682∼1751)이 담배를 끊기 위해 지은 한시다. 스스로 세운 굳은 다짐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금연이 얼마나 어려운지 절절하게 다가온다. 조선시대 금연의 동기는 다양했다. 지금처럼 건강을 염려하기도 했지만 담뱃값이 급등해 어쩔 수 없이 끊거나 가법(家法)으로 금한 경우도 있었다. 두릉 정각선(1650∼1720)은 “우리 종중의 가법은 담배를 통렬히 금지했다. 만약 담배를 피우는 자손이 나타나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증조부와 종조부는 지위가 삼정승에 이른 뒤에야 담배를 즐기신 적이 있다. 우리가 그분처럼 할 수 있다면 피워도 좋으리.’” 이 책은 조선 중기 이후 최고의 기호품으로 각광받은 담배를 통해 한 시대를 훑은 역작이다. 인용된 한문 문집만 해도 총 100여 편에 이른다. 저자는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로 2만 권가량 팔린 ‘정조의 비밀편지’와 ‘벽광나치오’를 펴낸 인문학계의 대표적인 파워라이터다. 한문 고전을 대중의 시선에 맞춰 풀어내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가가 나서서 흡연자를 만만한 세원(稅源) 대상으로 삼는 것도 모자라 미개인 취급을 하는 요즘 사회 분위기를 생각하면 뜬금없는 책일 수도 있겠다. 저자도 이 점을 의식한 때문인지 “최근의 금연정책은 흡연자를 고상하지 못하고 덜 진보한 인류로 몰아가는 폭력적인 방법을 구사하고 있다”며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참고로 저자는 30여 년 전인 대학 3학년 때 담배를 끊은 비흡연자다. 담배가 17세기 초반 이후 절대 다수의 기호품이었으며 경제의 블루오션이자 일상의 가장 중요한 물질이었다는 사실은 흡연사를 연구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정조가 1796년 11월 18일 쓴 ‘남령초(南靈草·담배의 별칭) 책문(策問·시험문제)’이 대표적인 사례다. 규장각 초계문신에게 출제한 이 유쾌 발랄한 시험지는 “온갖 식물 가운데 이롭게 쓰이고 사람에게 유익한 물건으로 남령초보다 나은 게 없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면 모든 백성에게 담배를 피우게 할 것인지 대책을 제시하라는 데까지 이른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군주가 나서 담배를 백성들에게 보급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전례가 없다. 심지어 정조는 담배 소비에 세금을 물려야 한다는 주장도 물리쳤다. 애연 군주로서 손색이 없다. 저자는 정조의 책문이 그가 경계한 패관문학류의 가벼운 글이라는 모순이 있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기호품을 모든 백성이 누리도록 하고 싶다는 여민락(與民樂)의 순수성을 보여준다고 평가한다. 금욕적인 도덕군자인 체하면서 홀로 즐길 수도 있었는데 오히려 흡연의 쾌락을 솔직하게 드러냈다는 것이다. 기생들도 정조 못지않게 흡연의 욕구에 솔직했다. 춘향전에서 이몽룡을 방으로 맞아들인 춘향이 제일 처음 한 것은 섬섬옥수로 담배를 권한 것이었다. 춘향이 직접 장죽을 빨아 불을 붙인 뒤 사랑하는 낭군에게 전하는 장면은 에로틱하기까지 하다. 저자는 “사회질서 밖에 존재한 기생은 섹스와 음주, 흡연, 옷차림, 가무 등에서 특별한 자유를 누렸다”며 “기생과 장죽은 뗄 수 없을 만큼 고착된 이미지였다”고 말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