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언

김태언 기자

동아일보 문화부

구독 104

추천

안녕하세요. 김태언 기자입니다.

beborn@donga.com

취재분야

2026-01-09~2026-02-08
문화 일반73%
인사일반18%
문학/출판9%
  • “소규모 공사의 문화재 발굴 비용 국가가 전면지원 추진”

    소규모 건축물 공사에 한해 건축 목적과 상관없이 국가가 문화재 발굴 조사 비용을 전면 지원하는 방안이 추진된다. 김현모 문화재청장은 취임 3개월을 앞두고 18일 동아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소규모 (건설공사) 사업자에 대해선 정부가 발굴 비용을 부담하는 게 맞다”며 “소규모 사업에서 졸속 발굴이 많이 나오기에 정부가 직접 나서 빠르게 정리해주는 게 좋다. 이 부분에 대해선 ‘발굴 공영화’가 확립돼야 한다”고 밝혔다. 현행 매장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공사에 앞서 실시하는 지표조사에서 문화재가 땅에 묻혀 있을 가능성이 제기되면 시굴 혹은 정밀 발굴에 들어가야 한다. 이 중 일정 면적 이하의 개인주택이나 농어업 시설물, 공장 건설공사에 한해서만 발굴조사 비용을 정부로부터 지원받을 수 있다. 김 청장의 방침은 소규모 공사의 경우 이 같은 정부 지원 조건을 아예 풀어 개인이나 영세 사업자의 비용 부담을 줄임으로써 매장 문화재를 보호하려는 취지다. 이를 위해 문화재청은 산하 한국문화재재단의 발굴사업단 인력을 확대할 방침이다. 김 청장은 “재단 발굴사업단을 확대해 소규모 발굴부터 지표조사까지 맡겨 국민 부담을 줄이고 공공성을 강화하겠다”고 했다. 단, 민간 발굴기관의 업무와 중복되지 않도록 수익성이 낮은 소규모 발굴에 집중할 계획이다. 김 청장은 “20여 년 만에 문화재청에 다시 돌아와 보니 조직은 커졌지만 시대 변화에 맞는 패러다임이 아직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며 “국민들은 문화재가 생활에 불편을 준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왜 보존이 필요한지 국민들을 설득하고, 절박한 게 아니라면 과감히 (규제를) 풀어주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행정고시 34회 출신인 김 청장은 1994∼1997년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의 전신) 사무관을 거쳐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문화정책과장, 정책기획관 등을 지냈다. 문화재청으로는 2018년 차장으로 돌아와 지난해 12월 청장(차관급)으로 승진했다. 앞서 김종진 전 청장을 제외하고는 교수, 언론인 등 외부 전문가들이 문화재청장에 주로 발탁됐다. 그는 특히 경주 월성(月城) 같은 대규모 국책 발굴사업에서 장기적 시각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50년 넘게 발굴이 이뤄지고 있는 일본 나라(奈良)의 헤이조쿄(平城京) 발굴처럼 유적이 파괴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 앞서 박근혜 정부 시절 문화재 당국이 월성 발굴 성과에 급급해 속도전으로 밀어붙였다는 비판이 고고학계에서 제기된 바 있다. 김 청장은 “월성 발굴은 학계 비판이 아주 많다”며 “월성 발굴을 조금 더 장기적으로 추진했다면 훨씬 좋은 성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고 했다. 최근 문화예술계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문화재 및 미술품 물납제(소장품으로 세금을 대신 납부하는 제도)에 대해선 조속한 도입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 청장은 “이 제도는 장롱 속에 숨겨진 문화재를 양지로 끄집어내는 것으로 반드시 필요하다”며 “문체부와 법제화를 협의하고 있다. 단, 증여세법과 상속세법 개정이 선행돼야 한다”고 덧붙였다.김상운 sukim@donga.com·김태언 기자}

    • 2021-03-23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악령… 재난… 청춘물… 새봄 안방극장 ‘드라마 만발’

    악령, 변종인간, 재난, 청춘…. 봄철 다채로운 드라마들이 펼쳐진다. 영화나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오리지널 콘텐츠 못지않은 소재와 장르를 안방에서도 볼 수 있다. 눈에 띄는 건 한국형 오컬트 드라마들이다. 22일 시작하는 SBS의 ‘조선구마사’(사진)는 인간의 욕망을 이용해 조선을 집어삼키려는 악령과 백성을 지키려 맞서는 인간들의 혈투를 그렸다. 시작 전부터 드라마 팬들 사이에서는 “제2의 킹덤(넷플릭스)이 될 것인가” “지상파에서 색다른 시도를 하고 있어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는 등의 반응을 끌며 기대를 사고 있다. 특히 극본을 맡은 박계옥 작가의 전작 ‘철인왕후’가 흥행에 성공한 만큼 조선구마사가 그 바통을 이어받을지 주목을 받고 있다. 연출은 ‘육룡이 나르샤’ ‘녹두꽃’의 신경수 PD가 맡았다. KBS도 퇴마물을 내놓는다. 다음 달 14일 시작하는 ‘대박부동산’은 공인중개사 퇴마사가 퇴마 사기꾼과 한 팀이 돼 흉가에서 지박령을 퇴치하고 기구한 사연을 풀어주는 내용이다. 주로 영화 소재로 쓰이는 재난 상황을 다룬 드라마도 나온다. 다음 달 24일부터 방영하는 OCN의 ‘다크홀’은 싱크홀에서 나온 검은 연기를 마신 변종인간과 그 사이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처절한 생존기를 다룬다. ‘영화 같은 드라마’를 표방한 OCN은 이번 작품에 영화 제작진들을 투입했다. ‘악인전’ ‘범죄도시’ 등을 제작한 키위미디어그룹의 첫 드라마이며, ‘돌연변이’ 등을 제작한 영화사 우상이 참여했다. 스릴러 영화 ‘더 폰’으로 입봉한 김봉주 감독과 스릴러 드라마 ‘구해줘’ ‘타인은 지옥이다’를 집필한 정이도 작가의 합작이라서 마니아층을 끌어들일 것으로 예상된다. 장르물만 있는 건 아니다. 22일 방영되는 tvN의 ‘나빌레라’는 청춘 기록 드라마다. 뒤늦게 꿈을 찾아 발레를 시작한 70대와 스물셋 꿈 앞에서 방황하는 발레리노의 이야기로 2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시청자층을 노린다. 동명의 다음 웹툰 원작은 2016년 첫 연재를 시작한 이래 별점 만점을 기록했으며, 배우 송강 박인환이 드라마 주연을 맡아 높은 싱크로율을 자랑한다.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1-03-22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책의 향기]로봇에 감성을 가르치는 여자

    운전자와 탑승객이 언쟁을 벌이면 자동으로 주행권을 가져가는 차량을 상상해보자. 운전자의 감정이 격해져 사고를 일으킬 가능성을 막을 수 있다. 영화에나 나올 법하지만 자동차업계는 감성 인공지능(AI) 기술을 탑재한 이런 차량을 현재 개발하고 있다. 저자는 감성 AI 기술의 선두 기업 ‘어펙티바’의 창업자다. 기계에 감정을 가르치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인간의 감정에 대해서도 전문가일까. 저자는 한때 자기 감정을 파악하는 게 코딩보다 힘들었다고 회고한다. 그는 착한 이집트 소녀였다. 아버지에게 절대 거역하지 않았고 이성과 어울리지도 않았다. 오로지 학업에만 열중했고, 스무 살도 채 되기 전에 석사과정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첫 데이트를 한 남자친구와 결혼해 유부녀가 됐다. 오로지 ‘이웃들은 날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런 삶은 유학을 계기로 바뀌었다. 신혼 시절 그는 영국 케임브리지 연구소 박사과정에 합격했다. 그러나 그의 부모님은 진학에 반대했다. 착한 이집트 소녀는 갈등했다. 그러나 몇 번의 기도와 울음 끝에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유학을 결행했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의 감정을 본격적으로 들여다봤다. 그의 사생활은 일과 불가분의 관계였다. 로절린드 피카드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가 쓴 ‘감성 컴퓨팅’도 그의 삶에 전환점이 됐다. ‘건전한 결정을 내리는 데 감정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책 내용에 놀랐다. 냉정하고 계산된 논리가 가장 좋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감정 지능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크고 작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결혼생활은 파탄이 났고, 일자리를 유지할 수도 없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컴퓨터에도 감정을 심어줄 순 없을지를 고민했다. 우뚝 선 그의 야망은 끝이 없다. 저자는 파킨슨병 징후를 미리 포착해 진료 예약을 잡아주는 로봇, 자살 징후를 감지하는 애플리케이션 등 인간 생명과 직결된 사례를 제시한다. 저자는 연민과 이해심으로 가득 찬 미래, 기술로 소통하지만 인간성은 잃지 않는 세상을 그린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1-03-20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아동학대… 청부살해… ‘19금’ 잔혹 드라마 판친다

    3일 밤 12시 무렵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한 키워드가 쏟아져 나왔다. 이날 첫 회를 선보인 tvN 드라마 ‘마우스’였다. 일부 시청자들이 “너무 잔인해 채널을 수시로 돌려가며 봤다” “아역 배우들이 걱정된다”는 반응을 SNS에 올린 것. 첫 회에서 극중 연쇄살인마 한서준(안재욱)은 목이 잘린 시체를 들고 다니는가 하면 어린아이를 폭행했다. 한서준의 아들로 사이코패스 성향이 있는 재훈(김강훈)은 동물을 학대하고 어린 동생까지 생매장하려 했다. 드라마는 초반부터 ‘19세 이상 시청 가’(19금)로 편성됐다. 올 들어 잔혹 드라마들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19일 시작한 SBS ‘펜트하우스’ 시즌2는 살인, 청부살해, ‘왕따’ 등 온갖 폭력 장면이 적나라하게 묘사됐다. 첫 회에서만 무려 세 건의 자살 또는 살인 사건이 나왔다. 맞바람을 포함해 20∼40대 여성들의 다양한 연애 행태를 담은 MBC의 ‘러브씬넘버’는 모든 회차가 19금이고, 이 중 일부는 ‘웨이브’에만 공개됐다. JTBC ‘괴물’은 잘린 손가락이 드러난 살인 장면 등이 19금으로 편성된 1, 2회에 등장했다. 누구나 볼 수 있는 안방극장에 폭력이나 선정성이 높은 장면이 그대로 노출됨에 따라 우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SBS 시청자 게시판에는 펜트하우스의 폭력성을 지적하는 글들이 계속 올라오고 있다. 5일 글을 올린 한 시청자는 “미성년자가 살인을 저지르는 모습이 아주 많이 잔인하게 노출됐다. 심의 규정은 없는 건가. 방송에 내놓을지 말지는 구분해줬으면 한다”고 썼다. 이날 방송에선 천서진(김소연)의 딸 은별(최예빈)이 트로피로 라이벌인 로나(김현수)의 목을 공격한 뒤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게 하는 장면이 나왔다. 해당 회차엔 19금이 붙긴 했지만, 청소년이 접근하기 쉬운 지상파 방송의 황금 시간대(오후 10시)에 방영됐다. 최근 이런 현상이 빈발하는 건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의 공백도 영향을 미친다는 지적이 있다. 올 1월 29일 방심위 4기 위원들의 임기가 끝난 후 5기 위원에 대한 임명이 늦어지면서 방송 심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데 따른 것이다. 방심위 공백으로 인해 가장 최근에 ‘주의’ 조치를 받은 드라마는 1월 4일의 펜트하우스 시즌1이었다. 이후 자극적인 드라마가 쏟아지고 있는데도 두 달 넘게 조치가 없는 상태다. 한 지상파 드라마 PD는 “펜트하우스의 경우 19금을 달고 필요 이상으로 자극적인 장면을 지속적으로 노출시키고 있다”며 “방심위원들이 공백인 데다 제재도 사후처방이라 문제 있는 장면을 걸러내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일각에선 잔인한 폭력 묘사는 드라마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필요한 장치라는 시각도 있다. 불륜이나 폭력 소재를 자주 다루는 해외시장에서 경쟁력을 갖기 위한 요소라는 의견도 있다. 세계적으로 흥행한 ‘킹덤’ ‘인간수업’은 모두 청소년 관람 불가였지만 성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웰메이드 콘텐츠’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이 콘텐츠들은 넷플릭스 등 유료 플랫폼에서 성인 인증을 거쳐야 시청할 수 있는 반면에 지상파 등의 드라마는 무방비로 노출된다는 차이가 있다. 정덕현 드라마평론가는 “과거 지상파에선 19금 프로그램이 주로 선정적인 수준 위주였지만 지금은 그 법칙이 깨졌다”며 “시청자도 TV에서 각자만의 플랫폼으로 이동하는 상황에서 표현 자체를 막기보다는 각 콘텐츠를 소화할 연령대를 어떻게 정하고 합리적으로 내보낼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1-03-19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신라 옥적’ 빼돌리려 한 日… 조선인들이 막았다

    1909년 4월 경북 경주군(현 경주시) 현장 시찰에 나선 소네 아라스케(曾(니,이)荒助) 통감부(統監府·조선총독부의 전신) 부통감 일행은 나흘간 조선시대 관아(官衙)를 뒤졌다. 천장은 물론 마루까지 뜯어 샅샅이 살폈지만 원하던 물건을 찾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조선시대 관기(官妓)를 관리하던 건물의 땔감 창고에서 새까맣게 변색된 목재함 하나를 발견했다.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4중으로 된 함 안에는 이들이 그토록 찾아 헤맨 ‘신라 옥적(玉笛·옥으로 만든 피리)’이 들어 있었다. 신라 옥적은 신라 신문왕 때 만들어져 왕실 창고(천존고)에 보관됐으나 한동안 종적을 감췄다. 조선 후기인 17세기 경주 동경관에서 다시 발견됐다. 일각에선 이 피리가 삼국유사에 나라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해결해준다는 전설의 피리,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소네가 찾아낸 신라 옥적은 이듬해인 1910년 경성으로 반출돼 이왕가박물관에 보관됐다. 이로부터 13년이 지난 1923년 옥적은 원래의 자리인 경주로 반환됐다. 어떻게 된 걸까. 아라키 준(荒木潤) 경북대 인문학술원 연구원은 최근 국립중앙박물관 고고학지에 발표한 논문(‘일제강점기 경주의 유물 반출·훼손과 조선인의 대응’)에서 구한말 조선인들이 일제에 맞서 문화재를 보호한 사례로 신라 옥적을 들었다. 그는 “국가 보물인 옥적이 기생건물 창고에서 발견된 건 석연치 않다”며 “당시 어느 조선인이 일본인들의 약탈을 막기 위해 일부러 격에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 옮겨둔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신라 옥적의 제자리 찾기에도 경주 주민들의 숨은 공이 컸다. 1921년 9월 경주 노서리 언덕에서 공사 도중 우연히 신라 왕릉인 금관총(金冠塚)이 발견됐다. 총독부는 금관총 출토 유물을 경성의 총독부박물관으로 옮기려고 했지만, 이에 반대하는 주민 여론에 밀려 포기했다. 당시 경주 유지인 조선인과 일본인 19명이 총독부에 제출한 청원서(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 따르면 이들은 금관총 출토품과 더불어 신라 옥적도 경주에 돌려놓을 것을 요구했다. 아라키 연구원에 따르면 이들은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장을 지내는 등 총독부와 끈이 있던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를 이용하기도 했다. 모로가는 경주에서 온갖 고분을 도굴하고 유물을 빼돌린 자다. 그는 지역 유지로서 자신의 명성을 드높이기 위해 경주 주민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여러 사람들이 애쓴 덕에 1923년 금관총 출토 유물과 신라 옥적이 경주박물관에 보관될 수 있었다. 경주 주민들의 문화재 사랑은 이후에도 꾸준히 이어졌다. 1937년 일제는 조선시대 경주 부윤(府尹)의 직무 공간이던 일승각(一勝閣)을 헐고 이 자리에 근대식 건물의 세무서를 짓는 방안을 추진했다. 앞서 1935년 경주 관아 중 하나인 월성아문이 헐린 상황이었다. 이에 경주 주민들은 ‘경주박물관 확장 운동’을 벌여 박물관에서 약 10m 떨어진 일승각을 박물관 경계 안으로 넣어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라키 연구원은 “일제강점기 경주박물관은 일본인이 운영했기에 총독부 동의를 얻기가 상대적으로 쉽다는 점을 이용하려 한 것”이라고 말했다. 재정난으로 인해 박물관 확장 운동은 실패했지만 일승각은 결국 보존될 수 있었다. 한 조선인이 경매로 나온 일승각을 사들여 경주읍성 남쪽으로 건물을 해체 이전했기 때문이다. 현재 이 건물은 불교 사찰로 쓰이고 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1-03-18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14년 만에 주연… “세상에 막 첫발 내디딘 느낌이에요”

    “엄청 떨려요. ‘개봉일에 조조로 혼자 영화관 가서 볼까?’ 생각 중이에요.” 14년 차 배우의 현재 고민이다. 임성미(35). 이 낯선 이름이 극장 스크린에 ‘주연’으로 오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18일 개봉하는 영화 ‘파이터’는 잘 여문 그의 연기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윤재호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는 힘겹게 살아가는 탈북민 진아가 복싱을 시작하면서 세상 밖으로 나오는 과정을 담았다. 경계심이 강한 진아는 복싱 관장(오광록)과 코치(백서빈)를 만나며 조금씩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간다. 영화의 분위기를 끌고 가는 진아, 임성미를 11일 만났다. 그는 “세상에 막 첫발을 내디딘 느낌”이라고 했다. 파이터는 임성미가 극장 개봉하는 장편 영화에서 첫 주연을 맡은 작품이다. 그는 파이터로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배우에게 주는 최고의 상인 ‘올해의 배우상’을 받았다. 어릴 적 개그맨을 꿈꿨던 임성미는 중3 때 콩트를 보다가 연기를 접했다. 고교 시절 생애 처음 영화관에서 가서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2003년)를 본 뒤 연기자의 꿈은 커졌다. 이후 청소년 연극제에 참가한 것을 시작으로 장르와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활동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기과 재학 시절 정희재 감독의 단편 ‘복자’(2008년)에 출연해 주목받았고, 봉준호 감독의 ‘마더’(2009년)에서 여고생 흉터(이미도)의 친구 역으로 장편 영화에 본격적으로 데뷔했다. 이후 연극 ‘헤다 가블러’(2012년),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2019년) ‘스타트업’(2020년) 등 다양한 장르를 오갔다. 하지만 빼곡한 필모그래피에도 빈칸은 있었다. 2010년 연기를 그만두려 했다. “연기를 할 때는 살아 있는 느낌이 들었지만 연기를 하지 않을 땐 뭘 할지 몰라 연락도 모두 끊고 술만 마셨어요. ‘이렇게 평생 살 수 있을까?’ 생각이 들어 무서웠어요.” 다시 털고 일어났지만 3년 뒤 무용에 빠져 무용원 진학을 고민하기도 했다. 흔들리는 자신을 잡아준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첫 위기였던 2010년, 그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800km를 걸었다. 두 달을 홀로 걸으면서 자존감을 키웠다. 진로가 헷갈릴 때는 스스로 물었다. ‘무용을 시작한 건 춤을 위한 것이었나, 연기를 위한 것이었나.’ 그는 “세 보이지만 전형적인 ‘외강내유’형”이라면서 “아마 죽을 때까지 흔들릴 것”이라며 웃었다. 파이터에서 임성미는 진아 그 자체다. 영화는 복싱 대회를 준비하며 감정 표현이 서툴던 진아가 차츰 마음을 여는 과정에 초점을 맞춰 몰입도를 높인다. 그는 “이방인이던 진아의 감정에 순간순간 이입하려 했다”고 했다. 그는 억척스러운 진아에게 어울릴 만한 의상도 스스로 선택했다. “체육관에 버려져 있던 복싱화가 눈에 들어왔는데 마침 딱 맞았어요. 신기해 기념으로 가지고 있어요.” 그는 한 달 넘게 ‘체육인’으로 살며 복싱 실력을 키웠다. 옌볜 출신이자 극 중 부동산 매니저로 나오는 이문빈 배우에게 북한말을 집중 지도받았다. “나이 드는 게 재밌어지려 한다”는 그는 다양한 플랫폼과 장르에 도전하고 싶다고 했다. “경주마 같은 배우는 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제 작품을 보고 어떤 감정을 하나 안고 가셨으면 해요. 그러곤 ‘이 배우, 자기만의 길을 가고 있네’ 하고 지켜봐주시면 좋겠어요.”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1-03-16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체르노빌 사고, 정부는 오만했고 국민은 용감했다 [책의 향기]

    1986년 4월 25일 금요일 오후, 소비에트연방 우크라이나의 프리피야트는 화창하고 따뜻했다. 다들 주말부터 노동절(5월 1일)로 이어지는 긴 연휴를 고대하며 들떠 있었다. 26일 오전 1시 24분. 프리피야트에서 3km 정도 떨어진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원자로 4호기에서 정기 점검을 하던 중 엄청난 굉음이 울렸다. 14명의 당직 소방대원은 대기실에서 눈을 붙이고 있다가 창문과 바닥이 흔들리자 벌떡 일어났다. 폭발 후 2분 뒤, 발전소장 빅토르는 전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전화를 받은 빅토르는 직감했다. “나는 감옥행일 거야.” 올해는 체르노빌 사고 35주년이다. 사고 후 체르노빌은 ‘방사능 공포’ ‘전 세계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린 지역’의 대명사가 됐다. 그러나 정작 사고 자체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영국 출신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10년 이상 취재에 매달렸다. 당시 사람들의 일기와 편지부터 과학자들의 조사 보고서, 사고 직후 방사능 정찰 부대가 사용했던 지도까지 여러 자료를 뒤져 생생하게 묘사했다. 소련의 당시 정치·사회적 배경 설명도 사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1970년대 소련 당국은 급증하는 전력 수요를 충당하고 서구를 따라잡기 위해 대대적인 원전 건설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1980년대에 가속화됐는데, 인력과 자재가 부족하다 보니 크고 작은 건설상 결함이 많았다. 하지만 기술을 무한 신뢰하고 대중에게 정보를 공개하지 않은 채 과학계는 무모한 실험들을 강행했다. 문제는 사고 이후에도 계속됐다. 진실을 덮으려는 자들의 움직임은 이어졌다. 사고 후인 5월 1일 오전 10시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 중심가에서 열린 노동절 퍼레이드는 2시간 동안 열렸고 2000여 명의 구경꾼이 도로에 가득 찼다. 당시 우크라이나 당 제1서기인 셰르비츠키는 행사를 강행하라는 명령이 모스크바에서 내려왔다고 했다. 행사로 사람들을 안심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추가 폭발을 막기 위해 동원된 사람들도 많았다. 하룻밤 사이 급히 소집된 예비군인 ‘제731 특별부대’는 안전복은 물론이고 헝겊 방독면조차 없이 투입돼 폭심에 모래, 납 등을 떨어뜨렸다. 로봇도 시도했는데, 세 대 모두 버티지 못하고 고장이 났다. 결국 납 앞치마를 두른 젊은이들이 방사능을 내뿜는 파편들을 삽으로 퍼서 옥상까지 갖고 간 뒤 4호기 폐허 위로 던졌다. 3분, 2분, 40초…. 시간이 다 되면 사이렌이 울렸다. 하고 나면 눈이 아프고 입이 마비돼 치아의 감각을 느낄 수 없었다. 발로 뛰어 모은 방대한 사실을 현장감 넘치는 글로 정리해 흡인력 있는 긴 드라마 한 편을 보는 느낌이다. 그래서 더 마음 아프다. 끔찍한 사고 후 삶을 이어 나가는 피해자들을 되돌아보게 만든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1-03-13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드라마 같았던 드라마 작가 데뷔

    웹툰, 웹소설을 기반으로 만든 드라마의 비율이 크게 늘고 있다. 문득 ‘그 많던 드라마 작가들은 다 어디에 있는 걸까’ 궁금해진다. 여기 반가운 얼굴이 있다. tvN 단막극 프로젝트 ‘드라마 스테이지 2021’에 이름을 올린 10명의 신인 작가들이다. CJ ENM의 신인 스토리텔러 지원사업 ‘오펜(O’PEN)’ 공모전에서 당선된 10개 작품은 3일부터 다음 달 21일까지 매주 1∼3회씩 공개되고 있다. 이 공모전은 2017년 시작해 매년 열린다. 3일 방송된 ‘민트컨디션’의 방소민 작가(36·여)와 24일 선보이는 ‘러브스포일러’의 홍은주 작가(36·여)를 서면으로 만났다. “합격입니다.” 지난해 봄 방소민, 홍은주가 작가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집에서 양치하다 전화를 받은 방 작가는 입에 거품을 문 채 흐느꼈다. 홍 작가는 카페에서 소식을 듣곤 손님들이 모두 쳐다볼 정도로 엉엉 울었다. 드라마 작가는 ‘지망생’이 ‘신인’이 되기까지 문이 매우 좁다. 업계에 인맥이 있거나 명성이 높지 않은 이상 등단할 방법은 각 방송사 공모전뿐이다. 육아 중이던 방 작가는 2019년 공모전에만 매달렸다. 합격 전까지 3개의 공모전에 도전했지만 모두 탈락했다. ‘당선작 없음’이라는 발표를 보면 허탈했다. 홍 작가는 2015년부터 공모전에 지원했고 보조 작가로 일했다. 홍 작가는 “단막도 ‘팔리는 스토리’를 고민하지만, 평소에 제가 궁금하고 아무도 안 써본 걸 써보려고 했다. 사랑의 유통기한을 알기 위해 유전자 검사를 하는 등 소재에 변주를 줬다”고 말했다. 이들은 합격 후 두세 달 동안 수상작을 수정했다. 지난해 9월 말 정형건 감독과 첫 미팅을 하고 촬영에 들어갔던 올해 1월까지 방 작가는 30분짜리 3부작으로 기획했던 대본을 1회 분량 드라마로 줄였다. 홍 작가는 드라마 ‘모범형사’를 보며 차래형 배우를 눈여겨본 뒤 캐스팅했다. 홍 작가는 “차 배우에게 반한 스태프가 많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참 좋았다”고 했다. 단막극 공모전은 귀한 기회다. 또 단막극은 정규 드라마보다 분량이 적고 주요 편성 시간에 비껴 있어 색다른 실험도 할 수 있다. 현재 tvN 외 단막극은 KBS 드라마스페셜, JTBC 드라마페스타가 있다. 방 작가는 “당선된 시트콤 분야는 오펜에만 있다. 시트콤은 예능 작가 출신이 많기에 코미디 드라마 작가를 공모전으로 뽑는 건 화제였다”고 말했다. 오펜 공모전에 합격하면 1년여간 창작금 500만 원, 개인 집필실, 멘토링, 제작사와 연결해주는 지원을 받는다. 방 작가는 “단순히 작가를 ‘뽑는다’기보다 가능성 있는 지망생을 발굴해 작가로 성장하는 과정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힘겹게 데뷔전을 치렀지만 이들의 앞날은 아직 물음표다. 단막 데뷔 후에도 정규 드라마의 작가가 되기까지는 평균 3∼5년 정도가 걸리는 데다 그 기회가 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청자를 설레게 하는 기발한 드라마들은 갖은 고난의 시기를 겪은 작가들을 통해 세상에 나왔다. “최악의 하루를 보낸 누군가가 제 드라마로 불쾌한 감정들을 털어냈으면 좋겠어요.”(방 작가) “답을 주진 못해도 ‘같이 생각해 봐요’ 하며 어깨를 톡톡 쳐주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어요.”(홍 작가)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1-03-12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부산에는 영험한 ‘할매신’이 산다

    100명 넘는 마을 주민들이 한 제사상 앞에 모였다. 이들은 ‘할매신’을 모신다. 마을에서 신성시하는 산에 모여 “이고을 골매기 할매당산신 산왕대신님(이 마을 액을 막아주는 할매당산신 산신님)”을 왼다. 옛날 얘기가 아니다. 바로 2021년 ‘대한민국 제2의 수도’ 부산에서 열린 일이다. 매년 음력 12월 14일(올해 1월 26일) 부산 사상구 감전동에서는 할매신에게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낸다. 감전동은 일제강점기 때 만든 위패를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7년간 제문을 읽어 온 이는 부산에서 나고 자란 심인택 감전동 당산제 보존회장(67). 심 회장은 “이날을 위해 한 달 전부터 집 기둥에 새끼줄을 매달아 부정을 쫓고 마을의 애경사에 모두 참석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올해 ‘부산 민속 문화의 해’를 맞아 2019년부터 2년간 부산 16개 구군 전 지역의 마을 신앙에 대해 조사했다. 부산은 155곳에서 마을제가 열리고 있다. 가장 많이 전승되는 곳은 기장군과 강서구, 해운대구다. 비교적 최근에 개발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손정수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원(38)은 “부산은 광역지자체 중에서 마을제가 가장 많이 전승되고 있다”며 “동해안과 남해안 해안 마을은 생업 때문에 신앙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 마을제가 많이 남아 있는데, 부산이 이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들이 보편적으로 모시는 신은 서낭신(할매신 할배신), 산신, 용신, 장승(솟대)이다. 특히 “○씨 할매” “골매기 할매”로 불리는 할매신을 주신으로 모시는 제당이 130곳으로 가장 많았다. 이 가운데 할매와 할배를 같이 모시는 제당은 29곳으로, 이는 남녀신이 부부관계를 맺어야 마을이 풍요롭다는 주술적 믿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마을제를 주관하는 ‘제주(제관)’는 주로 이장이다. 예로부터 마을제를 지내기 전 마을 회의에서 부정이 없는 높은 연배의 인물을 선정해왔다. 그러나 마을에 사고가 발생하면 제관이 지탄을 받게 되는 탓에 주민들이 제관이 되기를 꺼리면서 주로 이장이 맡게 됐다. 최근에는 제주가 고령이어서 절에 제를 맡기는 등 의례의 불교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1-03-09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한국판 ‘비밀의 정원’ 구례 쌍산재에 빠지다

    5일 전남 구례군 상사마을 쌍산재 입구. 여기저기서 “애걔?” “생각보다 작네” 하는 말이 들렸다. 보통 대갓집 하면 떠올리게 되는 웅장함은 없었다. 대문 앞에 서면 한옥 3채의 기와만 보였다. ‘작은 한옥인가’ 하는 생각은 열 걸음쯤 떼자 바로 사라졌다. 하늘 높이 솟은 대나무 숲과 그 너머로 펼쳐진 뜰과 한옥. 들어가 보지 않으면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고택이 펼쳐졌다. 매년 이곳에 오는 이는 3만 명이 넘는다. 지난해 9∼12월 휴원했음에도 3만6000여 명이 방문했고, 이 중 10%가량은 외국인이었다. 2008년 KBS ‘1박2일’, 올해 tvN ‘윤스테이’의 촬영지로 소문나면서 관람객은 더 늘고 있다. 약 200년 전에 만들어진 쌍산재는 현 운영자인 오경영 씨(56)의 고조부 호 ‘쌍산(雙山)’을 따 이름이 붙여졌다. 쌍산재의 당몰샘은 고려 이전부터 있었다고 알려진다. 이 샘물을 마시면 젊어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오 씨의 선조는 이를 주민들에게 개방하기 위해 담장을 샘 뒤편으로 물렸다고 한다. 오 씨 가문은 출세보다는 산사에 묻혀 한학을 공부하며 풍류를 즐기던 유학자의 집안이었다. 일제강점기 때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는 등 참선비의 모습을 고수했다. 쌍산재가 지내온 시간은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한국에서만 자라는 식물이자 멸종위기 야생식물인 히어리를 포함해 100여 종의 수목이 있다. 2018년 10월에는 전남도 제5호 민간정원으로 등재돼 전국 31개 민간정원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임세웅 전남문화관광해설사협회 문화관광해설사(54)는 “한옥과 한옥 사이를 메우는 넓은 마당과 숲, 한국의 자연 문화자원이 공존하는 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여유가 있다”고 말했다. 쌍산재 내 한옥은 9채가 있지만 총면적은 1만6000m²에 달할 정도로 여백이 많다. 대나무 숲을 중심으로 아랫동네, 윗동네가 나뉘는 미로 같은 공간 디자인도 방문자에게 큰 즐거움을 준다. 아랫동네로 불리는 공간은 대문 오른쪽에 놓인 안채, 바깥채, 사랑채다. 안채는 할머니, 어머니 등 여성들이 주로 생활했던 살림 공간이다. 춘궁기에 곡식을 채워두고 어려운 이웃에게 빌려주던 ‘나눔의 뒤주’도 있다. 안채 옆에는 운영자 오 씨가 태어나고 자랐다는 바깥채가, 그 옆에는 손님들이 묵었던 사랑채가 있다. 돌계단을 따라 대나무 숲을 거닐면 비밀의 문 ‘동백나무 터널’이 나온다. 터널을 지나면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듯 탁 트인 정원과 하늘이 드러난다. 쭉 뻗은 길을 따라 걷다가 오른쪽을 보면 가정문(嘉貞門)이 나온다. 쌍산재에서 가장 깊게 자리한 서당채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길 양쪽에 놓인 흰색 돌들은 달이 뜨면 빛이 반사돼 이정표가 된다. 길 끝에서 굽어 있는 사철나무는 고풍스럽다. 서당채는 집안 아이들이 모여 글공부를 하던 곳으로, 상사마을에는 그때 글 읽는 소리를 듣고 찾아왔던 동네 아이들이 이제는 노인이 되어 여전히 살고 있다. 서당채 옆 건물인 경암당(絅菴堂)과 서당채 사이에는 작은 연못 청원당(淸遠塘)이 있다. 네모 형태의 연못 안에 둥근 섬이 있는 구조인데 네모는 땅(음)을, 원은 하늘(양)을 의미한다. 음양사상이 드러나는 구간이다. 놀라움은 마지막까지 끝나지 않는다. 경암당 바로 옆에 놓인 영벽문(暎碧門)은 쌍산재의 정수라고 불린다. 네모난 문 밖으로 펼쳐진 옥빛 사도저수지와 지리산은 액자에 걸린 그림 같다. 저수지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작은 계곡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화엄사 종소리가 계곡을 타고 들려온다고 해 ‘종골’이라 불렸다. 한두 시간 정도 쌍산재를 거닐면 이곳이 사랑받는 이유를 절로 알게 된다. 오 씨는 “집이란 무릇 사람이 드나들어야 한다고 생각해 2004년 관람 및 숙박 운영을 시작했다”며 “아궁이 같은 한옥만의 특징과 온기가 느껴지는 분위기를 젊은이와 외국인들도 온전히 즐기는 것 같아 기쁘다”고 말했다. 쌍산재는 ‘윤스테이’ 촬영 후 내부를 수리한 뒤 지난달 26일 재개관했다. 다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재정비로 아직은 관람만 할 수 있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입장 가능하며 입장료는 1만 원. 숙박 재개일은 추후 공지할 예정이다. 숙박비는 15만∼35만 원으로 홈페이지에서 예약할 수 있다. 구례=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1-03-08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책의 향기]정의를 찾아가는 79가지 질문

    미국의 한 의학전문대학원 입학시험에서 거의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은 학생 ‘휴’가 있다. 그에게는 18세 때 신나치 패거리에 가담했다가 총격전에서 상대 패거리 한 명을 죽인 과거가 있다. 15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그는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한다. 휴는 응시원서에서 이제는 백인우월주의와 완전히 손을 끊었다고 해명한다. 여러 질문이 떠오른다. ‘학교가 범죄자 출신 학생의 과거를 환자들에게 알려야 할까?’ ‘만약 살인이 아니라 금융사기범이라면?’ ‘음주운전자는?’ 저자는 생명과 정의에 관한 79가지 딜레마를 던진다. 의료계 종사자는 물론이고, 의학드라마를 즐겨보는 일반인 모두가 흥미로울 만하다. 20년간 윤리 강의를 해온 생명윤리학자이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저자의 경력이 드러나는 주제들이다. 지금 당장 생각할 만한 질문도 있다. 치명적이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바이러스가 미국의 한 대도시에서 발견됐다. 이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보균자는 단 한 사람. 의사들은 치료법이 개발될 때까지 보균자 ‘샌드라’를 무기한 격리하길 바란다.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샌드라를 영원히 격리하는 건 윤리적일까. 접촉 감염성이 매우 높은 사람을 단기 격리하는 데는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조금 다르다. 무기한 격리됐던 유명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장티푸스 무증상 보균자였던 메리 맬런은 뉴욕시 이스트강의 노스브러더섬에서 무려 23년간 강제 격리됐다. 저자는 샌드라에게 격리를 요구하려면, 치료법을 찾고자 상당한 자원을 쏟아야 할 윤리적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다만 그를 격리함으로써 아낄 수 있는 의료비 모두를 치료법을 찾는 데 사용할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낮다고 봤다. 책은 명확한 답변을 내주지 않는다. 그 대신 저명한 생명윤리학자와 정책 입안자들의 주장을 소개한다. 읽다보면 ‘나라면 어떻게 할까’ 하는 질문이 절로 생긴다. 환자가 상담 도중 고백한 범죄를 알려야 하는지, 체외수정으로 만들어진 배아의 소유자는 아빠인지 엄마인지, 만만찮은 질문이 넘쳐난다. 우리는 자유롭게 생각하고 토론하면 된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1-03-06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액션장면, 무술인들 연기 촬영한뒤 움직임 만들어”

    황량한 사막을 혼자 달린다. 방해자를 만나면 끈질기게 추격한다. 치마 대신 망토와 바지를 입고, 발차기를 한다. 자신의 키보다 큰 검을 휘두르기도 한다. 4일 개봉한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의 주인공 라야다. 디즈니의 13번째 공주는 여러모로 색다르다. 디즈니가 최초로 내세운 동남아시아인이자, 전투력이 가장 뛰어나다. 제작에 참여한 최영재 애니메이터(51·사진)는 지난달 26일 화상 인터뷰에서 라야를 “디즈니 공주 캐릭터 중 가장 척박한 환경에서 자란 강인한 전사”라고 표현했다. 애니메이터는 컴퓨터그래픽(CG) 캐릭터의 근육과 관절을 조절해 표정과 움직임으로 감정을 전달한다. 그는 디즈니에서 14년간 ‘겨울왕국’ ‘주토피아’ ‘모아나’ 등 다수의 작품에 참여했다. 라야는 어둠의 세력에 의해 분열된 땅 쿠만드라 왕국을 구하기 위해 전설의 마지막 드래곤 시수를 찾아 모험을 펼친다. 라야는 엘사처럼 마법을 부리진 못한다. 책임감 하나로 스스로 무술을 익혔다. 이번 작품은 이전 디즈니 영화들과 달리 뮤지컬이 아닌 액션 장르다. 최 애니메이터는 캐릭터의 움직임에 특히 많은 공을 들였고, 액션 장면에 만족감을 표했다. 영화 후반부쯤 라야와 라이벌 나마리는 결투를 벌인다. 이때 라야가 공중돌기를 두 번 한 뒤, 손에 쥔 칼끝으로 땅을 짚고 단상 위에 올라선다. 나머지 한 손으로는 다시 공격을 한다. 그는 “무술 장면은 동남아시아 무예인 무아이타이, 킥복싱, 펜착실랏 등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했다”며 “무술인들이 스튜디오에 와 장면별로 연기를 하면 카메라로 촬영한 뒤 참조해 움직임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라야와 함께 훌륭한 ‘케미’를 보이는 시수도 흥미로운 캐릭터다. 용이라지만 외형은 뱀에 가깝다. 전설적인 캐릭터지만 시종일관 유쾌하고 때론 지나치게 솔직하다. 센스 넘치는 랩을 선보이기도 하고, 때로 덫에 걸리는 등 실수도 한다. 전지전능해 모든 걸 해결하는 신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과 똑같이 실수하며 성장해 나가는 반전 매력이 있다. 이는 동남아시아 문화를 고려한 제작진의 의도였다. 시수는 동남아시아 물의 신 ‘나가’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 나가는 몸통이 크고 날개가 있는 서양의 용이 아닌, 길쭉한 몸통을 가졌다. 동양에서 용은 희망과 불굴의 용기를 의미하고, 사람들은 용을 사랑하고 아끼기에 시수는 숭배받는 강력한 존재지만, 용에 대한 기대를 뒤집는 캐릭터로 설정했다. 최 애니메이터는 “라야가 황량한 풍경, 풍성한 색감으로 가득 찬 배경에서 역동적인 액션을 펼치는 모습이 특히 볼만하다”며 “디즈니는 매 작품 새로운 시도를 하며 도전하기에 즐거운 자극을 받으며 작업하고 있다”고 말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1-03-05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아카데미 여우조연상外 작품-남녀주연상 ‘기대’

    ‘미나리’가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거머쥐면서 4월 25일로 예정된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에도 한 발짝 다가섰다는 예측이 나온다. 골든글로브는 ‘미리 보는 아카데미’라고 불린다.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의 후보들이 상당수 겹치기 때문이다. 골든글로브 시상식 이후 아카데미 회원들의 투표가 진행되기 때문에 골든글로브 수상이 회원들의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문라이트’(2016년), ‘노예 12년’(2013년), ‘아르고’(2012년)는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에서 동시에 수상한 작품이다. 지난해 ‘기생충’의 경우 주로 봉준호 감독에게 관심이 집중됐던 반면 ‘미나리’는 배우들의 수상 행진까지 이어지면서 기대감은 더 커지고 있다. 미국 4대 비평가협회상(전미비평가위원회·워싱턴비평가협회·LA비평가협회·시카고비평가협회)을 기준으로 보면 ‘기생충’은 외국어영화상, 작품상, 감독상이 주를 이룬다. 배우들의 수상으로는 송강호가 LA비평가협회상, 피닉스비평가협회상, 시카고인디비평가협회상, 도리안어워즈 4개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했고, 조여정이 뉴멕시코비평가협회상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반면 ‘미나리’는 윤여정이 미국 4대 비평가협회상 중 시상식이 끝난 3곳에서 여우조연상을 차지했고, 아직 시상이 진행되지 않은 시카고비평가협회에도 여우조연상 후보로 올라 있다. 윤여정이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을 26개나 휩쓸면서 미국 연예매체 ‘버라이어티’ 등은 그를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자로도 꼽고 있다. 기생충 때는 볼 수 없었던 양상이다. 다른 배우들의 활약도 기대할 만하다. 스티븐 연은 골드 리스트, 덴버영화제, 노스텍사스비평가협회에서 남우주연상을, 한예리는 골드 리스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미국 영화 전문지 ‘콜라이더’는 올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로 메릴 스트리프, 에이미 애덤스 등과 함께 한예리를 꼽았다. 할리우드 시상식 예측을 전하는 미국 연예매체 ‘골드더비’는 스티븐 연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 예측 5위에 올랐다고 밝혔다. 외신들은 미나리의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도 점치고 있다. 골든글로브는 규정상 영화 대사의 50% 이상이 영어가 아니면 외국어영화로 분류한다. 반면 아카데미는 대사가 영어가 아닌 영화에도 작품상을 수여해왔다. 모든 대사가 한국어인 기생충도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다. 아카데미 후보는 3월 15일 발표될 예정이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1-03-02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지상파 예능 위협하는 ‘거물 유튜버들’

    “게임 일수 14일. 상금 4억8104만 원. 당신은 얼마를 벌어서 나갈 수 있습니까?” 참가자 8명이 아무것도 없는 방에 갇힌다. 이들은 버튼을 눌러 물건을 살 수 있다. 다만 시중 가격의 100배. 2000원짜리 커피라면 이곳에선 20만 원을 내야 한다. 이렇게 8명이 2주간 쓴 돈은 상금 4억8104만 원에서 차감된다. 남은 돈을 8명이 공평하게 나눠 가지면 게임은 끝난다. 이 희한한 프로젝트는 두 달 전 유튜브 ‘진용진’ 채널에 올라온 참가자 모집공고다. 구독자 208만 명을 보유한 유튜버 진용진 씨(29)는 웹툰 ‘머니게임’의 룰을 자신의 채널에 적용했다. 촬영은 올 1월 13일부터 27일까지 진행됐다. 진 씨는 이달 초부터 약 1시간짜리 영상을 5, 6회에 걸쳐 업로드할 예정이다. 대형 유튜브 채널을 중심으로 TV 예능 프로그램 스케일에 맞먹는 ‘웹 예능’이 제작되고 있다. 지난해 유명 유튜버 ‘피지컬 갤러리’의 ‘가짜사나이’ 시리즈가 큰 성공을 거둔 뒤 생긴 트렌드다. 가짜사나이는 유튜버들이 해군 특수전전단 훈련과정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이다. 최근 극장판으로 제작돼 지난달 27일 상영되기도 했다. 가짜사나이에서 교관으로 이름을 알린 유튜버 ‘에이전트H’는 카레이싱 도전기를 담은 ‘영광의 레이서’를 현대자동차와 함께 제작해 ‘미션 파서블’ 채널에 올렸다. 카레이싱 훈련부터 대회 출전까지 전 과정을 6개의 에피소드에 담았다. 이 영상에는 “영상미나 편집, 연출이 TV 프로그램 수준으로 높아졌다”는 댓글이 잇달아 달렸다. 크리에이터 각자의 개성이 웹 예능을 통해 극대화되기도 한다. 구독자 133만 명의 ‘승우아빠’ 채널은 믹스커피, 껌, 콜라 등 기존 공산품을 힘겹게 직접 만드는 ‘○○은 사드세요 제발’ 시리즈로 독특한 캐릭터를 구축했다. 그가 새로 내놓은 웹 예능 ‘쇼미더오븐’은 토너먼트 형식의 요리 콘테스트. 16명의 요리 유튜버들이 대결을 펼친다. 셰프 에드워드 권, 개그우먼 김민경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해 차기 콘텐츠를 함께 만들 우승자를 뽑았다. 유튜버 간 협업도 속속 이뤄지고 있다. 웹 예능 ‘체인지업(業)’에는 유튜버 ‘도티TV’ ‘Raon Lee’ ‘피식대학’ ‘진자림’ ‘HIPchillin현석’ 등이 힘을 모았다. 뮤지션과 크리에이터들이 서로의 일을 경험하는 모습을 담은 관찰 예능이다. 뮤지션 강남, 크라잉넛, 던밀스, 유키카, 미노이가 출연해 유튜버들과 5곡의 음원을 제작하고 비대면 콘서트를 열 예정이다. 유튜버 기획사인 샌드박스네트워크 김태욱 선임 매니저는 “이제는 콘텐츠 경계가 유튜브에 한정되지 않고 영화나 케이블TV로도 진출할 수 있다”며 “채널의 경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 매력적인 콘텐츠를 만들어 유튜브와 케이블에 동시 공개하는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1-03-02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책의 향기]그 소설의 결말, 나만 궁금했던 게 아니었구나

    손원평의 소설 ‘아몬드’(2017년)에는 몇몇 끔찍한 장면이 묘사돼 있다. 그중에서도 크리스마스이브에 벌어진 한 남성의 살인사건 장면은 책장을 덮은 뒤에도 생각이 난다고 하는 독자들이 많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16세 소년인 주인공 선윤재는 이 일로 자신에게 지극한 사랑을 준 엄마와 할머니를 잃는다. 참혹한 장면을 목격하고 홀로 남겨진 윤재를, 우리와 같은 시선에서 바라본 소설 속 인물은 없었을까. 작가는 사고 현장에서 스무 걸음쯤 떨어져 있던 한 남자를 주목한다. 그에게는 어린아이를 구해주다 트럭에 깔려 만신창이가 된 형이 있다. 남자는 형을 보면서 ‘절대로 나와 상관없는 일에 뛰어들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한다. 크리스마스이브 사건 때 그가 나서지 않은 이유다. 손원평은 그랬던 그가 한 소녀의 선의를 마주하며 바뀌는 내용을 별도의 단편소설로 내놓았다. 이 단편 소설집은 기존 발표 작품에서 주인공이 아닌 주변 인물의 시선에서 본 새로운 세계를 담았다. 어떤 소설의 결말은 너무 소중해 다음을 생각할 수 없다지만, 독자로선 내심 마음 쓰이던 인물의 안부가 그리울 때도 있다. 이 책은 이런 아쉬움을 해소해준다. 이현의 ‘1945, 철원’(2012년) ‘그 여름의 서울’(2020년), 김종미의 ‘모두 깜언’(2015년), 구병모의 ‘버드 스트라이크’(2019년), 이희영의 ‘페인트’(2019년), 백온유의 ‘유원’(2020년) 등 8개 작품의 뒷이야기를 엮었다. 이 책은 창비청소년문학 100권째 발간을 기념한 기획이기도 하다. 이름을 올린 작가들은 ‘창비청소년문학상’이나 ‘좋은 어린이책’ 공모전 대상 수상자들이다. 김려령의 ‘우아한 거짓말’(2009년) 독자들도 등장인물들과 오랜만에 반가운 인사를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 ‘남은 사람들은 잘 살까?’라는 질문을 되뇌었을 법하다. 우아한 거짓말에는 엄마 현숙과 언니 만지, 막내 천지가 나왔다. 셋 중 가장 밝았던 천지가 갑작스레 극단적인 선택을 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됐다. 만지는 우연히 천지가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사실을 알게 됐다. 천지는 죽기 전 5명에게 편지를 남겼는데, 등장인물들의 회상과 천지의 독백으로 과거의 일이 서서히 밝혀졌다. 김려령은 이번 책에서 ‘언니의 무게’를 통해 동생 천지가 죽은 뒤 남겨진 언니 만지의 안부를 전한다. 만지는 동생이 겪은 괴롭힘을 막아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빠져 산다. 천지를 괴롭힌 아이에게까지 마음을 쓰는 언니로서의 무게가 가슴 시리게 담겼다. 만지에게 엄마 현숙이 전하는 “너는 너로만 살라”는 위로 한마디는 묵직하게 다가온다. 원작을 읽어야만 즐길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원작 속 세상 이전 혹은 이후의 새로운 주인공을 내세우기도 했다. 미래세대의 새로운 생명을 그린 소설 ‘싱커’(2010년)의 저자 배미주는 한 역학조사관이 기후변화로 물에 잠긴 옛 서울로 파견되는 이야기를 그렸다. 완성도 높은 신작 소설집이자, 원작으로 이끄는 매력을 갖췄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문득 세 번째, 네 번째 엔딩을 그리게 된다. 작품 속에서 스쳐지나간 인물이라도 모든 삶은 조명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첫 번째, 두 번째 작품에서 주인공이 아니었던 인물들도 모두 행복하기를 바라본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1-02-27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박신우 PD “다른 인생 훔쳐보는 재미 살리려 형식 바꿔”

    “길거리에서 친구를 기다리다가 커플이 싸움하는 걸 직관하는 기분이다.” 최근 종영한 카카오TV 드라마 ‘도시남녀의 사랑법’을 지켜본 시청자들은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것 같지 않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자연스러운 연기와 더불어 인터뷰 형식의 ‘페이크 다큐’식 연출이 합쳐져 시청자들의 몰입도를 높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주인공들의 러브스토리도 상당한 공감을 샀다. 이은오(김지원 분)는 자신을 ‘윤선아’라는 인물로 속인 채 박재원(지창욱)과 사랑하다가 잠수를 탄다. 서린이(소주연)와 최경준(김민석)은 오랜 커플이 현실적인 이유로 헤어지는 이야기를 다뤘다. 특히 주인공 모두 자신 안에 다른 자아를 품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청춘인 만큼 2030 시청자들의 관심이 높다. 종영 이후에도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플랫폼 넷플릭스에서 TV 프로그램 순위 10위 이내를 유지하고 있다. 이 드라마를 연출한 박신우 PD(사진)를 25일 인터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인터뷰 형식을 드라마 전면에 적용한 이유는…. “대본을 받고 형식을 고민했다. 남의 인생을 훔쳐보는 재미를 드라마의 매력이라고 하지 않나. 그 즐거움을 형식적으로 많이 끌어올리려고 했다. 배우들에게도 최대한 자연스러운 스타일을 살려 평상시 본인의 모습으로 촬영할 것을 주문했다.” ―애드리브도 많이 허용했겠다. “신(scene)의 일부로서 늘 있었다. 배우들의 습관이 그대로 드러난다. 13회에서 비 내리는 날 재원이 은오를 데려다주려다가 차 안에서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 갑자기 재원이 선루프를 만지작거리는데 원래라면 뜬금없어 편집했겠지만 ‘페이크 다큐’ 형식이라서 살렸다.” ―형식적인 자유로움을 추구하기 위해 OTT 플랫폼을 선택했나. “반대다. OTT 플랫폼의 미드폼(회당 20∼30분 분량) 드라마를 만드는데 어떻게 템포를 올릴지 고민하다 보니 화법에 다양한 변주를 줬다. 인터뷰 장면을 보면 격식을 차려 카메라를 응시한 채 답하거나 자기 일을 하면서 말하기도 한다. 주인공의 일상을 카메라가 무작정 따라다니는 인상을 주고 싶었다. 뛰는 느낌이 나도록 카메라 워킹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럼 인터뷰어는 누군가. “개인적으로 만든 세계관에서 인터뷰어는 인터뷰 애플리케이션(앱) 제작진이다. 주인공들이 인터뷰에 참가하며 앱을 사용하는 거다. 앱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내용을 텍스트로 전달받을 수 있다. 다만 모든 내용이 올라가는 건 아니다.” ―OST도 이를 의식해 만든 건가. “맞다. 이 세계관에서 히트곡들이 따로 있을 것 같았다. 남혜승 음악감독과 함께 록 밴드 ‘롤링 스톤스’를 표방한 새 밴드와 노래를 만들었다. 뮤직비디오도 새로 촬영해 쿠키 영상으로 내보냈다.” ―재원과 은오는 첫 만남 장소인 강원 양양과 서울에서의 캐릭터가 다르다. 그렇게 만든 이유가 있나. “사실 이 드라마는 설정이 다큐이기에 과거였던 양양 부분이 영상화되는 건 불가능하다. 이 부분은 둘의 회고이고, 그래서 미화가 있다. 우리가 과거 연애담을 이야기할 때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 이미 아름답게 기억하는 것처럼 말이다. 또 과거가 되레 아름답게 정물처럼 표현됐을 때 현재 모습이 더 생동감이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1-02-26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현실 커플 다툼 보는 듯”…‘도시남녀 사랑법’ 시청자 사로잡은 비결

    “길거리에서 친구를 기다리다 커플이 싸움하는 걸 직관하는 기분이다.” 최근 종영한 카카오TV 드라마 ‘도시남녀 사랑법’을 지켜본 시청자들은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것 같지 않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자연스런 연기와 더불어 인터뷰 형식의 ‘페이크 다큐’식 연출이 합쳐져 시청자들의 몰입도를 높이는데 성공한 것이다. 주인공들의 러브스토리도 상당한 공감을 샀다. 이은오(김지원 분)는 자신을 ‘윤선아’라는 인물로 속인 채 박재원(지창욱)과 사랑하다가 잠수를 탄다. 서린이(소주연)와 최경준(김민석)은 오랜 커플이 현실적인 이유로 헤어지는 이야기를, 오선영(한지은)과 강건(류경수)은 확실히 끝맺지 않은 커플의 일화를 다뤘다. 특히 주인공 모두 자신 안에 다른 자아를 품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청춘인 만큼 2030 시청자들의 관심이 높다. 종영 이후에도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플랫폼 넷플릭스에서 TV프로그램 순위 10위 이내를 유지하고 있다. 내용이나 표현법에서 ‘리얼 로맨스’라는 평가를 받은 이 드라마의 연출자 박신우 PD를 25일 인터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인터뷰 형식을 드라마 전면에 적용한 이유는. “대본을 받고 형식을 고민했다. 남의 인생을 훔쳐보는 재미를 드라마의 매력이라고 하지 않나. 그 즐거움을 형식적으로 많이 끌어올리려고 했다. 배우들에게도 최대한 자연스런 스타일을 살려 평상시 본인의 모습으로 촬영할 것을 주문했다.”―애드리브도 많이 허용됐겠다. “신(scene)의 일부로서는 늘 있었다. 배우들의 습관이 그대로 드러난다. 13회에서 비 내리는 날 재원이 은오를 데려다주려다 차 안에서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 갑자기 재원이 선루프를 만지작거리는데 원래라면 뜬금없어 편집했겠지만 ‘페이크 다큐’ 형식이라서 살렸다.”―형식적인 자유로움을 추구하기 위해 OTT 플랫폼을 선택했나. “반대다. OTT 플랫폼의 미드폼(회당 20~30분 분량) 드라마를 만드는데 어떻게 템포를 올릴지 고민하다보니 화법에 다양한 변주를 줬다. 인터뷰를 봐도 앉아서도, 일하면서도 한다. 정해지지 않은 형식으로 주인공의 일상을 카메라가 따라다니는 인상을 주고 싶었다. 뛰는 느낌이 나도록 카메라 워킹을 시도하기도 했다.”―그럼 인터뷰어는 누군가. “개인적으로 만든 세계관에서 인터뷰어는 인터뷰 애플리케이션(앱) 제작진이다. 주인공들이 인터뷰에 참가하며 앱을 사용하는 거다. 앱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내용을 텍스트로 전달받을 수 있다. 다만 모든 내용이 올라가는 건 아니다.”―OST도 이를 의식해 만든 건가. “맞다. 이 세계관에서 히트곡들이 따로 있을 것 같았다. 남혜승 음악감독과 함께 록 밴드 ‘롤링 스톤스’를 표방한 새 노래를 만들었다. 밴드 이름과 뮤직비디오를 새로 촬영해 쿠키 영상으로도 내보냈다.”―재원과 은오는 첫 만남 장소인 강원 양양과 서울에서 캐릭터가 다르다. 그렇게 설정한 이유가 있나. “사실 이 드라마는 설정이 다큐이기에 과거였던 양양 부분이 영상화되는 건 불가능하다. 이 부분은 둘의 회고이고, 그래서 미화가 있다. 우리가 과거 연애담을 이야기할 때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 이미 아름답게 기억하는 것처럼 말이다. 또 과거가 되레 아름답게 정물처럼 표현됐을 때 현재 모습이 더 생동감이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1-02-25
    • 좋아요
    • 코멘트
  • [단독]적십자 활동한 그들, 항일무장투쟁도 벌였다

    1920년 3월. 러시아어가 유창했던 조선인 청년 박영빈의 요청으로 체코군 군의관 베리코프가 연해주(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총 60정을 샀다. 한 달 뒤엔 박영빈이 직접 총 300정을 사들였다. 박영빈 뒤에는 당시 러시아 지역 대한적십자회 대표였던 박처후(1883∼?)가 있었다. 미국 한인소년병학교장이기도 했던 박처후는 항일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무기 구매와 간호사 양성에 적극 나섰다. 일제강점기 대한적십자회에서 활동한 박처후와 채계복(1900∼?·여)이 다음 달 1일 열리는 3·1절 102주년 기념식에서 정부 독립유공자 훈장(애족장) 수여자로 선정됐다. 대한적십자회 활동을 주요 공적으로 정부 훈장이 수여되는 건 이들이 처음이다.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수여된 몽양 여운형이나 198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안정근(안중근 의사의 동생)은 일제강점기 대한적십자회 총재를 지낸 적이 있지만, 이 활동을 주요 공적으로 인정받은 건 아니었다. 1919년 7월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부 총장이던 안창호 등이 세운 대한적십자회는 그동안 구호사업 등 인도주의 활동으로만 일반에 각인됐었다. 그러나 최근 박환 수원대 사학과 교수의 연구 결과 대한적십자회는 1920년 2월 독립전쟁에 대비한 ‘간호원 양성소’를 설치하는 등 항일 투쟁에 적극 나선 것으로 확인됐다. 국제적십자사연맹에 가입해 임시정부가 국제적 승인을 받을 수 있도록 교섭한 것도 이들 노력이었다. 평화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적십자회가 무장 투쟁에도 적극 나섰던 것이다. 1883년 평북 순천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박처후는 24세 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1905년 6월 제국신문에 “자유와 권리란 학식이 있는 자만이 아는 것이며, 학식이 있으려면 교육과 외국 유람이 중요하다”는 글을 남겼다. 이어 1908년 6월 공립신보에 ‘미주 유학생 박처후’라는 필명으로 “완전한 독립국, 완전한 자유국을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실었다. 1909년 9월에는 신한민보에 “동포들은 탄식만 할 게 아니라 무기를 구입하고 전 국민이 군사훈련을 받아 나라를 다시 찾고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항일 무장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1920년 1월 이승만에게 편지를 보내 연해주에서 양성한 간호사가 미국적십자사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알리기도 했다. 대한적십자회에선 여성 독립운동가들도 대거 활약했다. 이 중 채계복은 러시아 지역에서 대한적십자회를 조직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한 인물이다. 함남 문천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채성하의 맏딸인 그는 아버지의 독립운동 기록에도 수차례 등장한다. 대한적십자회 간호사였던 그는 1919년 12월 중국 간도에서 12명의 간호사가 미국적십자사로부터 간호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했다. 이른바 ‘간도 15만 원 사건’ 기록에도 그의 이름이 나온다. 이 사건은 독립군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철혈광복단이 일제의 조선은행 자금을 탈취한 것이다. 채계복은 당시 거사에서 핵심 인물이던 독립운동가 최봉설의 총상을 치료해줬다. 이후에도 채계복으로부터 많은 후원을 받은 최봉설은 훗날 그의 이름 중간 글자를 따 ‘최계립’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박환 교수는 “대한민국 육군의 정통성이 신흥무관학교에 있다고 보듯, 국군간호사관학교의 정신적 모태는 대한적십자에 있다”고 말했다.전채은 chan2@donga.com·김태언 기자}

    • 2021-02-25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디딜방아-맷돌소리… 한국 전통의 소리는 좋은 것이여!

    “쓱싹 쓱싹” 메밀을 키질(키로 곡식을 까부르는 것)하는 소리가 정적을 가른다. “사부작” 대더니 이어 “덜그럭 덜그럭” 소리가 뒤따른다. 메밀이 맷돌에 갈리고 있다. 이어 갈린 메밀가루를 “끼익 쿵” 소리와 함께 디딜방아로 찧는다. 이윽고 한 그릇의 메밀국수가 소복이 마련된다. 옛 방식으로 국수 한 그릇을 내기까지 발생하는 소리는 그 자체로 힐링 ASMR(뇌를 자극해 심리적인 안정을 유도하는 것)이다.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재단은 최근 유튜브 ‘문화유산채널’에 메밀국수 만드는 과정을 담은 ASMR 콘텐츠 ‘메밀꽃 필 무렵’을 선보였다. ‘K-ASMR’라는 타이틀로 다양한 전통의 소리를 담아낸 콘텐츠 중 하나다. 앞서 지난해 2월 업로드한 ‘국가무형문화재 제87호 명주짜기’ ASMR편은 23일 기준 250만 회가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메밀국수 동영상에서 “오늘은 메밀국수나 한 그릇 해먹지?”라고 운을 떼는 주인공은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1호 정선아리랑 보유자인 김남기 옹(80). 그는 영상 중간중간 구성진 목소리를 선보인다. “이리 오게/저리 오게/내옆으로 오게/석삼년 그립던/손목을 잡아나 보세.” “늙지 말아라/인삼 녹용주 매일 장복했는데/원수 같은 홍안에/백발이 머리끝에 왔구나.” 사랑하는 이에 대한 그리움과 늙음을 한탄한 가사에 맞춰 김 옹이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장면이 겹친다. 하나의 소리만 극대화해 표현하는 일반 ASMR와 달리 이 영상에는 “빨리 (맷돌) 돌리면 안 되지”와 같은 일상의 대화도 자연스레 녹아 있다. 음향과 영상을 총괄한 이진원 미디어하마 대표는 “역사는 진행되는 것이다. 노동을 하면서 끊임없이 하는 말들도 하나의 역사이며 우리가 아련히 기억하는 정서를 건드릴 수 있다”고 했다. 메밀국수 만들기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돼 있는 건 아니다. 이 대표는 “지정문화재만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게 아니다. 흘러가는 생활 자체도 문화재일 수 있다”며 “메밀은 구황작물로서 한국사회에서 차지하는 특수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역문화 포털 ‘지역N문화’에 따르면 메밀은 흉년에도 어느 정도의 수확량을 거둘 수 있는 작물로, 강원도 산골에서 많이 재배해왔다. 총 17분 분량의 메밀국수 영상을 촬영하는 데 걸린 시간은 꼬박 일주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우려로 제작 인원을 당초 계획의 절반인 5명으로 줄여 촬영한 데 따른 것이다. 강원도 산골은 해가 빨리 지는 데다 비행기 소리 같은 소음을 피하기 위해 특정 시간대(오전 11시∼오후 3시)에만 촬영한 것도 영향을 끼쳤다. 제작진은 샷건 마이크(현장음)와 와이어리스 마이크(말소리)를 이용해 생생한 현장음을 잡아내기 위해 공을 들였다. 문화재재단은 메밀국수를 비롯해 고즈넉한 산사에서 차 만드는 과정을 담은 ‘제다’, 장인의 열정을 느낄 수 있는 ‘장 담그기’ ‘옹기장’ ‘나전장’ 등을 다음 달부터 매달 한 편씩 순차 공개할 예정이다. 김한태 문화재재단 콘텐츠기획팀장은 “시청각적으로 편안한 한국의 자연과 무형유산이 ASMR 재료로서 독보적인 역할을 했다”며 “유튜브 플랫폼을 통해 다양한 세대가 우리 문화유산의 가치를 누렸으면 한다”고 말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1-02-24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책의 향기]유명 작가는 펜만 잡으면 글이 술술? 천만의 말씀!

    “쓸 수 없는 날에는 아무리 해도 글이 써지지 않는다. 나는 집 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화장실 안이다. 아니, 볼일도 없는데 여긴 뭐 하러 들어왔지.” 유명 작가들은 펜만 들면 글이 술술 풀리는 줄 알았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마감 시간을 목전에 놓고도 쓰지 못하는 괴로움에 사무친다. 생전 40편이 넘는 작품을 쓴 일본 모더니즘 문학의 선구자 요코미쓰 리이치(1898∼1947)도 마감 압박에 시달렸다. 그런데 이런 애타는 감정이 담긴 한 편 한 편 역시 또 하나의 명문이다. 이 책은 글 잘 쓰기로 유명한 일본 저명 작가들의 ‘마감 분투기’를 모았다. “이건 아니야. 저것도 아니야”라며 원고지를 벅벅 찢는 주인공은 다자이 오사무(1909∼1948). 이 책의 첫 장을 여는 그는 소설 ‘사양’과 ‘인간실격’의 저자다. 다자이는 1940년 미야코신문에 연재한 글에서 10장짜리 원고를 쓰느라 나흘 동안 끙끙댄 자신을 그렸다. 결국 술집으로 향한 그는 대작가의 차분함을 흉내 내며 조용히 술을 마시는가 싶더니 취기가 올라 형편없이 망가진다.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소설 ‘낡은 집의 춘추’로 최고 권위 문학상인 나오키상을 수상한 우메자키 하루오(1915∼1965)는 잡지 ‘신조’ 신년호 마감에 시달리던 어느 날 독감으로 앓아누웠다. 원고 독촉 전화를 건 편집자에게 열이 38.5도나 된다고 했건만 편집자는 꾀병을 의심한다. 이튿날 열이 37.2도로 내려갔는데 마침 편집자가 사나운 발소리를 내며 작가를 찾아왔다. 우메자키는 “체온이 38.7도나 된다”며 가냘픈 목소리를 짜내 마감 독촉을 면했다. 작가는 “사실대로 말하면 당장 일어나 글을 강요할 게 뻔했다”며 그날을 회상한다. 일본의 대문호로 꼽히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1892∼1927)마저 “글쓰기라는 천벌을 받은 것 같다”며 고통을 토로한다. 마키노 신이치(1896∼1939)는 도무지 써지지 않아 냉수욕을 하고 홧술을 들이켠다. 애초 마감을 지킬 마음이 없거나, 자기혐오에 빠지는 등 작가들의 인품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들을 바라보는 편집자도 괴로운 건 매한가지. 원고를 기다리는 편집자는 애간장이 녹는다. 아쿠타가와의 친구 무로 사이세이의 글을 보면 작가와 편집자의 씨름은 실로 살벌하다. 아쿠타가와는 여느 작가들과는 달리 “도저히 쓸 수 없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편집자도 물러서지 않는다. “원래 당신 소설은 짧으니 두 장이라도 괜찮은 소설이 된다”고 설득했다. 한참의 입씨름 끝에 다음 호에는 글을 쓰겠다는 확약을 받고서야 편집자는 자리를 떴다. 작가와 편집자의 치열한 샅바싸움의 결실이 바로 우리 주변의 책들이다. 대문호로 평가받는 작가들이 마감을 앞두고 벌이는 기발하고 엉뚱한 모습을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아마도 우리 역시 저마다의 마감에 쫓기며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직장인, 주부, 프리랜서, 아르바이트 등 모든 직역에는 각자의 마감 시간이 있다. 그래서 이런 책은 모두에게 위안이 된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1-02-20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