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은

이정은 부국장

동아일보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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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안보 현장을 취재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영향을 미치는 글로벌 정책의 흐름을 정확하고 빠르게 따라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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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분야

2025-06-15~2025-07-15
칼럼94%
선거3%
미국/북미3%
  • [횡설수설/이정은]‘에어마겟돈’

    이달 중순 미국 디트로이트 공항에 델타항공 9888편 비행기가 도착했다. 영국 런던발 여객기에는 승객이 한 명도 타고 있지 않았다. 대신 여행용 트렁크 1000개가 빼곡히 들어찼다. 과부하가 걸린 런던 히스로 공항의 수하물 시스템 결함으로 주인을 찾지 못한 여행가방들이었다. 전례 없는 ‘수하물 운송 작전’을 놓고 델타 측은 “독창적인 아이디어”라고 했다. 실상은 공항에 나뒹구는 분실 수하물 처리를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여름 휴가철이 시작되면서 해외 주요 공항들이 대혼란에 빠졌다. 히스로 공항에서는 인력 부족과 관제 시스템 오류 등 때문에 하루 최대 4000명의 승객이 제때 비행기를 타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네덜란드와 독일 공항에서는 길게 늘어선 승객 줄이 바깥 주차장까지 이어지면서 텐트가 등장했다. 프랑스 샤를드골 공항에서는 7월 첫 주말에만 가방 1500개가 분실됐다. 미국에서도 독립기념일 연휴에 하루 600편이 결항되고 4300편의 운항이 지연됐다. ▷“여긴 완전히 지옥이야!” SNS에는 혼잡한 터미널에 늘어선 수백 m의 줄과 켜켜이 쌓인 미처리 수하물 사진이 쏟아진다. 난장판이 된 공항은 ‘에어마겟돈(airmageddon)’으로 불린다. 공항(airport)과 종말의 대전쟁(armageddon)을 합친 조어로 외신들이 쓰기 시작했다. 히스로 공항은 결국 “하루 10만 명 이상은 수용이 어렵다”며 항공사들에 티켓 판매 중단을 요구했다. 36시간 내에 응하지 않으면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며 엄포를 놨다. 그러나 일부 항공사가 ‘용납할 수 없는 불합리한 요구’라고 반발하면서 법정 싸움까지 벌어질 판이다. ▷에어마겟돈은 2년 반 동안 코로나19 팬데믹이 이어지면서 공항 및 항공사 인력이 줄어든 게 주요 원인이다. 반면 방역조치 종료 후 ‘보복 여행’ 수요는 폭발했다. 현재 항공업계 부족 인력은 7200명으로 추산된다. 환승이 많은 주요 거점 공항들이 직면한 연쇄적 피해는 심각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하늘길에 제한이 생기면서 병목현상이 심화된 것도 영향을 미쳤다. 공항들이 낡은 시스템과 비효율성 책임을 항공사에 떠넘긴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해외 공항 대란은 초가을까지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히스로 공항이 항공권 판매 제한을 요구한 시기가 9월 11일까지다. 항공사들은 증원은커녕 닥쳐오는 파업 시즌에 기존 인력마저 더 줄어들 상황이다. 그래도 여행자들은 “최소 5시간 전에는 도착해야 한다”는 정보를 교환하며 공항에 몰려오고 있다. 코로나 변이 바이러스의 공격적인 확산세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코로나 재확산에 물가와 환율 상승까지 겹치면서 해외여행에 신중해진 한국인에게는 낯설고도 불안한 풍경이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 2022-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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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정은]코로나19 재유행 ‘비상’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이들이여, 아직은 손을 뗄 때가 아니다.” 지난달 중순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가 코로나19에 재감염됐다는 소식에 한 캐나다 언론이 내놓은 경고다. 트뤼도 총리는 올해 1월 감염된 이후 5개월 만에 다시 확진 판정을 받았다. 백신에 부스터샷까지 모두 3차례 접종을 완료했지만 재감염을 피해가지 못했다. 캐나다 전체의 일간 신규 확진자 수 또한 최근 1만 명대로 껑충 늘어났다. 한 달 전의 10배다. ▷국내외 코로나19 반등세가 심상치 않다. 국내 신규 확진자 수는 5일 1만8147명으로 40일 만에 가장 많았다. 주간 단위로 봐도 15주 만에 다시 증가세로 반등했다. 일주일 전에 비해 21% 늘어난 수치다. 방역당국은 “예측을 상회하는 수준의 재확산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해외에서도 지난달 넷째 주 신규 확진자가 428만 명(세계보건기구 집계)으로 3주 연속 증가했다. 영국, 독일, 프랑스, 이스라엘 등에서 증가세가 두드러진다. ▷백신 접종이나 감염 후 면역력은 6개월 정도 지속된다. 하루 확진자 수가 60만 명에 달했던 3월 정점을 기준으로 할 때 9월이면 면역력을 유지하는 사람이 급감하게 된다. 겨울로 접어들 즈음엔 하루 확진자 수가 20만 명대로 올라설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기존 백신은 현재 우세종이 되어가는 오미크론의 하위 변이 BA.5.에는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변이 바이러스를 타깃으로 한 업그레이드 백신은 빨라야 9월에나 나온다고 한다. 제때 개발되더라도 국내에 들어와 배포될 때까지 한동안 백신 공백기가 불가피하다. ▷반등하기 시작한 국내 확진자 수는 방역당국 집계보다 실제 더 많을 가능성이 높다. 입원, 격리 기간에 지급되던 생활지원금이 사라지고 재택치료비와 유급 휴가비 지원이 축소되면서 확진돼도 숨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치명률이 0.13%까지 낮아졌다는 점도 경계심을 누그러뜨렸다. 그러나 고령자와 감염 취약층에는 여전히 생명을 위협하는 치명적 바이러스가 코로나다. 롱코비드 같은 후유증도 문제가 될 수 있다. 갑작스러운 확진자 증가로 의료체계 혼란이 재연될 가능성도 열려 있다. ▷2020년 발병 이후 5번의 주요 변이를 일으키며 5번 확산한 코로나는 앞으로도 진화를 거듭하며 인류의 면역력을 공격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3년째를 맞는 올해 여름의 방역은 어느 때보다 느슨해져 있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끝나고 일상생활이 정상화되는 시점에 휴가지에는 인파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당장 코로나 종식을 기대하기 어렵다면 잘 넘어가는 수밖에 없다. 푹푹 찌는 폭염 속에서 마스크 속 열기까지 함께 견뎌야 하는 이유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 2022-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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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정은]의전 실수 논란

    윤석열 대통령의 나토(NATO) 정상회의 참석 기간에 불거진 외교 결례와 의전 실수 논란이 시끄럽다. 윤 대통령은 조 바이든 대통령과 눈길을 마주치지 못한 채 이른바 ‘노룩 악수’를 당했다. 나토 공식 홈페이지에는 윤 대통령이 눈을 감은 사진이 게재됐고, 나토 사무총장과의 면담은 30분 지연되다가 결국 당일 열리지 못했다. 만찬장 입장 시 윤 대통령 부부는 남성의 오른쪽에 여성이 선 다른 정상 부부들과 정반대로 섰다. “의전팀은 뭐 하고 있느냐”는 말이 나왔다. ▷아무리 작은 행사도 단체사진을 올릴 때는 참석자들의 표정을 꼼꼼히 살펴서 가장 좋은 한 장을 선택하기 마련이다. 주요 국제회의의 공식 웹사이트에 한국 정상만 눈을 감은 사진이 올라가 국내 언론까지 퍼진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노룩 악수’의 경우 원인 제공은 바이든 대통령이 했지만, 윤 대통령이 인사를 건네는 식으로 매끄럽게 대응했더라면 좋았겠다는 의견도 나온다. SNS에서는 ‘윤석열 대통령 의전 실수 모음’ 콘텐츠가 돌아다닌다. 누리꾼들은 “중세시대 기사가 왼쪽에 칼을 차고 여성은 오른쪽에 서는 유럽의 에티켓을 몰랐느냐”며 윤 대통령 내외의 위치 같은 미세한 부분까지 문제 삼고 있다. ▷대통령실은 “작은 행정상의 미스”라고 했다. ‘찰나의 사진’으로 전체를 판단하지 말라고도 했다. 다소 억울하다는 뉘앙스다. 회의 일정이 밀린 것은 스웨덴과 핀란드의 나토 가입이라는 역사적 결정을 확정짓는 협상이 길어진 탓이니 의전팀 책임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온정적인 의견도 있다. 하지만 야당은 윤 대통령의 귀국 비행기가 땅에 닿기도 전부터 “의전 실패”라며 공세를 이어가고 있다. “여행사보다 못한 의전”이라는 혹평까지 나왔다. ▷외교도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예상치 못한 의전 실수와 결례를 완전히 피해가기는 어렵다. 국기를 거꾸로 걸거나 브로슈어 자료를 잘못 표기한 사례들은 해외에서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튀르키예(터키)는 EU 정상회담에서 여성인 EU집행위원장의 좌석을 따로 마련하지 않아 성차별 논란까지 불렀다. 유독 의전이 까다로운 영국 왕실에서는 해외 정상들의 결례와 실수가 속출했다. 국내에서도 지난 몇 년간 어이없는 의전 실수가 이어지면서 외교부가 감사까지 받았다. ▷그러나 대통령이나 총리가 움직이는 외교 무대는 수많은 변수가 실시간 작용하는 예측 불가능한 전장이다. 돌발 상황까지 감안해 대응을 준비해야 하는 게 외교 현장이다. 의전 논란 때문에 윤 대통령의 나토 정상회의 참석 성과에 결과적으로 흠집이 나는 모양새가 됐다. 대통령실과 외교부는 ‘외교 행사의 꽃’이라는 의전을 얼마나 치밀하고 세심하게 챙겨야 하는지 새삼 되새겨야 할 것이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 2022-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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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제2의 낙태 전쟁[횡설수설/이정은]

    불과 60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 코네티컷주에서는 피임이 금지돼 있었다. 부부가 피임기구를 쓰거나 피임약을 먹어도 처벌받았다. “침실 생활은 프라이버시”라고 인정한 1965년 ‘그리스월드 대 코네티컷’ 판결이 나오고 나서야 법의 족쇄가 풀렸다. 법에 반대하던 산부인과 전문가가 일부러 피임약 처방을 해주고 체포된 뒤 소송을 통해 얻은 결과였다. 몸과 성(性)에 대한 자기결정권은 치열한 법정 투쟁을 거쳐 얻어진 것들이 적지 않다. ▷미 연방대법원이 여성의 낙태권을 인정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으면서 미국 전역이 들끓고 있다. 여성들이 지난한 법정 싸움을 거쳐 얻어낸 낙태권이 49년 만에 다시 법정에서 뒤집힌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여성 활동가들은 “되돌리는 데 평생이 걸릴지라도 포기할 수 없다”며 결사항전 태세다. 분노와 눈물, 한탄으로 범벅된 연방대법원 앞 반발 시위 현장에서는 “죽기 살기로 싸울 때”라는 결기 어린 목소리가 쏟아진다. ▷‘로 대 웨이드’ 판례를 지키려는 싸움은 결국 여성의 낙태권을 넘어 몸의 자유, 선택할 권리를 지키겠다는 이들의 몸부림이다. 낙태가 수정헌법 14조에 규정된 ‘사생활 권리’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본 연방대법원의 논리도 이들의 반발을 키웠다. 보수화된 대법원이 수십 년간 유지돼온 헌법의 해석을 흔들어 19세기로 돌리려 한다는 위기의식이 높다. 이번 판결 직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미국인 3명 중 2명이 이번 판결에 반대 의사를 밝혔다. ▷‘제2의 낙태 전쟁’은 정치와 사법, 민간단체, 기업 등 모든 분야에서 총력전으로 펼쳐질 것으로 보인다. 낙태권리 옹호단체들은 11월 중간선거에서 낙태를 반대하는 정치인을 낙선시키는 캠페인에 돌입했다. 최소 1억5000만 달러를 쏟아부을 계획이다. 이에 앞장서는 민주당에도 벌써부터 후원금이 쏟아지고 있다고 한다. 반면 이번 판결을 “신의 결정”이라고 반기는 종교계와 보수 공화당 인사들은 낙태가 금지되는 26개 주뿐 아니라 50개 주 전체의 낙태 시술을 막아버리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세계적 흐름과 거꾸로 가는 미국의 판결이 여성의 자기결정권 제한에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낙태를 허용해온 유럽 국가들은 낙태 조건을 완화해달라는 목소리를 되레 높이고 있다. 한국의 경우 2019년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았지만 3년이 지나도록 후속 입법이 공백 상태다. 임신중절 수술이 가능한 임신 주수 등에 대한 종교계와 여성계, 정치권의 입장이 모두 다르다. 국회가 논의조차 밀쳐놓은 사이 음지의 불법 시술과 부작용 사례만 쌓여 간다. 여성들의 외침을 외면하는 직무유기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 2022-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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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뷰]美 국무부 첫 인사 다양성책임자 “정부 조직은 인구 구성 반영해야”

    《30여 년 전 미국 국무부의 신입 직원 오리엔테이션. 젊은 흑인 여성이 검은색 바지 정장 차림으로 나타났다. 당시만 해도 여성의 복장 규정이 ‘치마 혹은 드레스’로 돼 있던 시절이었다. 국무부의 오랜 드레스 코드를 과감히 깨버린 이 여성 외교관은 이제 조직 내 성별, 인종, 학력 등의 차별과 맞서 싸우는 ‘다양성과 포용성(diversity and inclusion)’ 전담 부서의 수장이 돼 있다. 지나 애버크롬비-윈스탠리 국무부 ‘다양성·포용성 최고책임자(CDIO)’다.국무부는 지난해 4월 이 조직을 신설하며 “다양성과 포용성이 우리를 더 강하고, 똑똑하고, 창조적으로 만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 외교관과 본부 직원 등 2만4000명의 소속 공무원은 물론이고 공직사회 전체에도 파급력이 적지 않은 상징적 조치다. 미국 정부 부처의 이런 시도가 ‘서오남’ 지적을 받은 한국의 새 정부에도 시사점을 던질 수 있을까.최근 첫 방한을 한 애버크롬비-윈스탠리 다양성·포용성 최고책임자는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정부 조직에서 모든 국민이 (성별, 직종별, 지역별) 대표성을 갖는 일은 중요하다”며 “다른 관점과 생각으로 서로의 빈틈을 채워 주는 것이 성공을 위한 대안들을 넓히는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성별-직군-지역 대표성 필요”―‘다양성·포용성 최고책임자’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고 어떤 권한을 갖는가. “(성별, 인종, 직군별) 대표성을 키우고 투명성과 공정성을 증진시키기 위한 일들, 이를 위한 문화를 개선하는 일들이다. 이를 위한 예산과 인력 확보, 조직 구축 등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내 업무는 스타트업이다. 나는 (채용, 인사 관련한) 권고가 차관보 레벨에서 흐지부지되지 않을 수 있는 권한과 책임을 갖고 있다.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에게 직보한다.” ―다양성이라는 성과를 측정할 수 있을까. 특정 목표가 있는가. “(인사) 쿼터를 설정해 놓지는 않았다. 목표치 자체가 없다. 그 대신 우리는 나라 전체를 대표하는 조직을 추구한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구성을 보라. 여성이 50%라면 조직 내에서도 여성 비율이 그에 근접하게 나와야 한다. 정부 조직은 인구 구성을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다양성 증진이 결국 능력주의” ―능력주의를 다양성보다 중시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는데…. “(다양성 증진) 그 자체가 미국의 능력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내 이웃이고, 같이 있으면 편하고 서로를 잘 알고… 이런 미러링(mirroring) 수준을 넘어서고자 한다. 국가로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최대한 대표할 사람들을 찾고자 한다. 이런 선택이 때로 편하지 않은 도전일 수 있지만, 그것이 우리를 더 낫게 만든다. 일단 다양성을 확보하면 그때부터 철저히 능력과 조건에 따라 평가한다. 나와 함께 일하는 부책임자만 해도 인종과 고향, 가정환경, 교육 과정이 모두 다르다. 그는 업무에서 나와는 매우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을 내놓는다. 서로의 빈틈을 채워 줄 수 있다. 우리는 성공을 위한 대안들을 그렇게 확장시켜 나간다.” ―특정 엘리트 집단의 순혈주의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 “쉽지 않은 문제다. 사람들은 그게 나쁜 것이라는 인식조차 못 하는 경우가 많다. 일터에 오면 대다수가 비슷한 사람들이다. 평소에 보던 대로 이를 바라볼 뿐 그 자리에 여성이 있는지 없는지 인식하지 못한다. 수치 데이터를 바탕으로 문제를 지적해 주는 게 중요하다. 인구의 절반을 놓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갖도록 하는 게 해결의 첫 번째 단계다. 예를 들어 국무부에서 고위직의 84.5%가 백인이라는 수치를 들은 사람들은 충격을 받는다. 막연히 ‘많다’가 아니라 구체적인 수치가 있으면 그제야 ‘정말 많다’고 느끼는 것이다. 84.5%라는 수치가 괜찮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히스패닉이 17%이고 흑인이 14%이고 아시아인이 8%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정부를 구성할 때 다양성은 어떻게 확보해야 하나. “정부에서 다양성은 특별히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정부는 시민들을 대표하고 그들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특정 그룹만을 쓴다면 다른 그룹의 수요가 뭔지조차 알 수 없지 않겠는가. 모든 사람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그 조직이 어떻게 적합한 (국민의) 대표가 될 수 있나. (정부) 참여는 국민의 권리다.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정부의 결정, 정책에 대표자로서 각자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의 경우 새 정부에 검사 출신이 대통령실에 포진했다. 여성 장관 비율이 너무 낮다는 지적도 받았다. “우리가 다양성을 이야기할 때의 범위는 넓다. 헌법에 명시된 대로 인종, 성별, 종교 등 그 어떤 이유로도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게 근본 바탕이다. 그러나 미국도 ‘Yale, pale, male(예일대, 창백한, 남성·아이비리그 대학 출신의 백인 남성들이 요직을 독차지하는 현상을 꼬집는 조어)’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 실현이 힘들었다. 경험의 다양성과 함께 지역 다양성도 중요한 문제다. 미국의 경우 과거에는 미시시피, 테네시 같은 남부 출신 공직자가 많지 않았다. 이제는 지역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애를 쓰고 있다. 성별 대표성과 관련해서는 여성이 인구의 51%를 구성한다는 점을 다시 언급하겠다. 조 바이든 대통령의 경우 부통령을 여성으로 하겠다는 뜻이 분명했다. 그가 흑인 여성을 선택한 것은 매우 대담하고도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한국은 단일 민족으로 강한 유교주의 사상이 지배해 왔다. 탈북자, 외국인 노동자, 성소수자에 대한 포용성이 아직도 기대에 못 미친다. “한국뿐 아니라 모든 나라가 개선하려고 애쓰고 있는 문제일 것이다. 모든 국민의 기여를 이끌어내야 하는 것은 모든 국가의 과제다. 방향과 목표는 알지만 결국 어떻게 해내느냐의 문제다. ‘데이아(DEIA·다양성 공평 포용성 접근성을 의미하는 영어 첫 자를 딴 조어)의 렌즈’로 세상을 봐야 한다. 서로에게서 배워야 한다.” ―한국은 젠더 갈등도 심하다. 특히 젊은층 남녀 간의 갈등을 풀 해법을 조언한다면…. “(남녀는) 서로가 필요한 존재가 아닌가. 상호 커뮤니케이션이 제일 중요하다. 우리는 서로를 경청해야 한다. 부차적인 이슈들은 내려놓고, 관계는 강하게 유지하며, 서로가 필요하다는 전제를 단단히 해야 한다. 그렇게 해놓고 대화로 해법을 찾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젠더 갈등은 아니지만 분열이 심화돼 있다. 한국만큼 심각한 문제로, 국가에 매우 위험한 현상이다.”“주변과 연대 통해 힘 키워야” ―미국에서도 인종 갈등과 함께 아시아 혐오 범죄가 잇따랐다. 개선책은 있는가. “어느 한 그룹 혼자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는 주변과의 연대가 필요하다. 내 고향인 클리블랜드에서 아시아인을 상대로 한 증오범죄가 벌어졌을 때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나도 여기 참가했다. 흑인으로서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한다.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은 모든 그룹에 중요하다. 우리는 서로를 지지해야 한다. 그 어떤 그룹도 혼자서 완벽할 수 없다. 나는 연대의 힘을 믿는다.” ―흑인 여성 대사까지 오르는 길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여러 장벽들을 어떻게 깼나. “정말로 많은 경우에 나는 내 그룹에서 유일한 흑인, 유일한 여성이었다. 목소리를 내기가 힘들었다. 이런 경우 나를 지지해줄 우군 동료를 찾거나, 아니면 혼자서도 목소리를 낼 만큼 용감해져야 한다. 이런 경험들을 겪으면서 나는 다른 관점과 목소리들이 나오는 것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대외정책을 다루는 외교안보 분야에서도 다양성이 중요한가. “외교는 결국 전쟁을 피하는 것이다. 군사적 방법이 아닌 외교적 해법을 찾는 일에는 더 넓은 관점,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하다. 여성과 소수자는 이런 일을 잘한다. 이들은 애초부터 파워를 갖지 못한 위치에서 출발해 무언가를 억지로 강요할 힘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우군을 만들고 관계의 연결고리와 공통분모를 찾는 노력을 어렸을 때부터 계속해야 한다. 이런 훈련이 된 사람들이 일도 잘한다.”미 국무부 ‘다양성·포용성 최고책임자’ 지나 애버크롬비-윈스탠리는…조지워싱턴대를 졸업하고 존스홉킨스대에서 국제관계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85년 국무부에서 외교관 업무를 시작해 이라크, 이집트, 인도네시아, 이스라엘 등지에서 근무했다. 2004년 사우디아라비아의 미국 총영사로 재직할 당시 테러단체 알카에다의 공격에 용기 있게 대처한 공을 인정받아 공훈상을 받았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와 국방부, 상원 외교위원회 파견 근무를 거치며 중동 외교와 대테러, 입법 자문 등을 맡았다. 몰타 주재 미국대사를 지냈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 2022-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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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정은]담배꽁초 채운 젖병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려는 청소년이 돈을 내려다 “(값이) 충분치 않다”는 주인의 말에 멈칫한다. 그는 펜치를 꺼내 스스로 치아를 뽑은 뒤 이를 비용으로 치르고 담뱃갑을 받아 든다. 같은 상황에서 또 다른 10대는 얼굴 피부를 쭉 벗겨내 카운터에 올려놓는다. 2014년 미국에서 방영된 금연광고 시리즈 장면들이다. 제목은 ‘진짜로 치러야 할 대가’. 흡연이 치아와 잇몸, 피부를 손상시킨다는 경고를 담았다. ▷흡연의 위험을 경고하는 내용의 금연 캠페인은 전 세계 100여 개국에서 주기적으로 진행 중이다. 주요 국가들이 내놓는 금연 동영상 광고와 담뱃갑 위의 경고 그림 및 문구는 상당수가 섬찟하다고 생각될 정도다. 보건복지부가 어제 발표한 새 경고 그림도 일부 수위가 더 높아졌다. 그림 속 변색 치아는 더 시커멓고 누렇게 바뀌었고, 흡연으로 망가진 폐와 뇌는 상태가 심각하다. 새로 바뀐 11종의 사진 중에는 담배꽁초가 가득 찬 젖병을 빨고 있는 아기의 그림도 있다. ▷금연광고 중에는 간접흡연의 피해를 경고하는 내용도 많다. 연간 800만 명에 이르는 전 세계 흡연 사망자 중 간접흡연 피해자는 100만 명. 특히 임신부 흡연과 어린이 간접흡연은 심각한 피해로 꼽힌다. 칠레의 한 금연 캠페인은 ‘흡연은 살인’이라는 문구와 함께 어린 소년이 얼굴에 씌어진 투명 비닐봉지 속에서 숨막혀하며 울부짖는 그림을 담았다. 자세히 보면 비닐이 아닌 하얀색 연기다. 임신부가 피우는 담배 연기가 배 속 태아에게 옮겨가는 경고 그림의 제목은 ‘이동식 (살인)가스실’이었다. ▷금연 캠페인의 충격요법이 지나치게 자극적이라는 이유로 논란이 벌어지기도 한다. 미국에서는 목에 구멍이 뚫리고 발성 보조 장치에 의존해 로봇 같은 기계음을 내는 흡연 피해자들의 모습이 보는 이를 경악시켰다. 호주에서는 구강암 환자의 썩은 잇몸과 입이 TV 광고에서 적나라하게 공개됐다. ‘영상에 불편한 장면이 포함돼 있다’는 안내문이 붙는 경우도 적잖다. 한국에서 “폐암 하나 주세요” 멘트와 함께 ‘흡연은 질병’이라는 문구가 공개됐을 때는 “흡연자를 환자로 매도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각종 금연 캠페인 속에 한국의 흡연율은 꾸준히 감소하는 그래프를 그려 왔다. 그러나 가향(加香) 전자담배가 인기를 끄는 추세로 볼 때 흡연자가 줄어드는 추세가 유지될 것이라고 예단하기는 어렵다. 10여 년 전만 해도 3억 갑 미만이었던 국내 가향담배의 판매량은 2020년 14억 갑에 육박한다. 흡연자들은 자신들이 내뿜는 담배 연기가 자신의 건강은 물론 남의 건강도 해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소 섬뜩하더라도 금연 캠페인이 계속돼야 하는 이유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 2022-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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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정은]재산 빼앗기는 노인들

    미국에서는 60대 이상 노인 10명 중 1명이 가족이나 지인에게 재산을 빼앗기거나 경제적 거래, 계약 시 명의를 도용당한 경험이 있다. 포브스에 따르면 매년 피해 규모가 365억 달러에 이른다. 캐나다의 경우 이런 피해를 당한 사례가 25만 명에 달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자식에게 주택 명의를 넘겨준 뒤 쫓겨나 쉼터나 친척집을 전전하는 노부부들의 사연도 있었다. 노인들을 상대로 한 ‘경제적 학대’의 사례들이다. ▷15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노인학대 예방의 날이다. 이런 날을 제정할 필요가 있을 만큼 노인학대가 심각한 사회문제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신체적, 정서적, 성적 학대는 물론이고 경제적 학대, 유기, 방임도 노인학대에 해당한다. 한국에서도 매년 증가 추세로, 2020년 한 해에만 6259건의 학대 사례가 발생했다. 이 중 경제적 학대 피해는 연평균 400건을 넘는다. 노인 연금과 복지 지원의 규모가 커지면서 이와 관련된 사기, 절도 피해가 늘어났다. ▷자식이 부모의 연금이나 임대료를 무단으로 사용할 경우 처벌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노인복지법에 따르면 이는 벌금 혹은 징역형에까지 처해질 수 있는 ‘경제적 학대’ 행위다. 부모의 동의 없이 재산을 처분하거나 유언장을 허위로 작성하는 것도 여기에 해당한다. 올해 4월 경기 수원에서는 치매를 앓는 80대 노모의 연금보험료를 1억 원 가까이 가로채 생활비, 유흥비 등으로 쓴 50대 딸과 20대 손녀들이 유죄를 선고받았다. ▷경제적 학대의 징후들은 다양하다. 노인들이 갑자기 평소보다 큰 씀씀이를 보이거나 거액을 인출하는 경우, 강요당하듯 귀중품을 파는 경우, 재산 명의나 유언장을 변경하는 사례 등이 대표적이다. 해외 노인 복지 기관들은 “주의를 기울이라”며 이런 징후들을 상세히 나열하고 있다. 미국의 로펌과 금융회사들은 방지, 대응책을 홍보하고 세미나도 연다. 치매나 기억 감퇴 등을 겪지 않은 경우에도 피해자가 될 수 있고 가족뿐 아니라 친구, 간병인 등도 경제적 학대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2025년이면 ‘초고령사회’ 진입이 예상되는 한국에서 노인학대의 문제는 악화할 가능성이 높다. 노인 부양에 대한 전통적 가치관도 무너지고 있다. 받기는커녕 남은 돈마저 억지로 내줘야 하는 부모들의 사례도 늘어날 것이다. 60대 이상 베이비부머 세대가 “자식에게 재산을 미리 상속해 주지 말라”는 말을 자못 진지한 조언처럼 주고받는 세태에는 이런 불안이 깔려 있다. 관리할 노후 자금이라도 있으면 다행이다. 기초생활연금조차 빼앗기는 노인들의 삶은 처연하다. 한 세대를 살아낸 어르신들의 말년이 경제적 학대의 피멍으로 얼룩지고 있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 2022-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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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정은]영원한 국민 MC 송해

    “전구우우욱∼ 노래자랑!” 경쾌한 음악과 함께 시작되는 MC 송해의 오프닝 멘트는 매주 일요일 아침을 깨우는 일성이었다. 진행 횟수 1700여 회. 무대 출연자 3만 명. 관객 1000만 명. ‘국민 MC’ 송해가 향년 95세로 별세하기 전까지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며 세운 기록들이다. 스스로를 ‘딴따라’로 불렀던 그는 “어원인 프랑스어 ‘팡파르(fanfare)’는 스타의 등장을 알리는 나팔 소리”라며 자랑스러워했다. ▷송해가 이끄는 전국노래자랑 무대가 열리면 온 마을이 들썩였다. 트로트를 구성지게 부르는 꼬마부터 랩송을 부르는 어르신까지 모두가 참여하는 잔치였다. 송해는 ‘땡’ 소리에 탈락한 출연자들을 정겨운 입담으로 격려하고, 흥겨운 공연에는 어깨춤 장단을 맞췄다. 맛깔스러운 만담을 통해 출연자들의 인생 스토리에 색을 입혔다. 때로 구수한 사투리, 때로 망가지는 몸 개그를 섞은 능청스러운 진행에 객석에서는 수시로 폭소가 터졌다. 한껏 무르익은 무대 위에서 숨겨져 있던 스타들의 끼는 아낌없이 폭발하며 ‘딩동댕동’을 이끌어냈다. ▷송해는 프로그램을 진행한 34년간 한결같았다고 주변인들은 전한다. 녹화를 갈 때면 꼭 하루 전에 그 마을에 도착해 1박을 했다. 목욕탕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맛집을 찾아다니면서 동네 구석구석을 살폈다. 녹화 당일에도 3시간 전에는 행사장에 도착해 출연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멀리 지나가는 소달구지를 보고 동네 아낙을 보고 하늘도 올려다본다”고 했다. 현지 분위기에 푹 빠져들 때까지 공감과 소통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전국 팔도를 웃기고 울린 진행 솜씨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70년 가까이 현역 방송인으로 활동하며 최장수, 최고령 MC로 남은 송해의 기록은 한동안 깨지기 어려울 것 같다. 그는 “권태는 절대로 느끼지 말라. 여러분이 하는 일에서 도태되지 말라”는 조언을 자주 했다. 고령임에도 “나는 BMW(Bus, Metro, Walking)만 탄다”며 검소하게 몸을 움직였다. 코로나19로 인한 활동 중단과 건강 악화만 아니었으면 100세 MC 기록도 가능했을 것이라며 연예계 후배들은 안타까워한다. ▷6·25전쟁 당시 혈혈단신 월남한 뒤 생계에 몸부림쳤던 삶의 역정 때문이었을까. 어려운 이들에게 장학금을 쥐여주고, 늘그막의 동료들을 살뜰히 챙긴 그의 향기는 무대 뒤에서 더 짙다. 지인들은 그의 단골집이었던 종로 낙원상가 앞의 2000원짜리 국밥집을 찾고 인근 ‘송해길’을 거닐며 그를 회고한다. 고향인 황해도 재령에서 전국노래자랑을 꼭 진행하고 싶다던 그의 바람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그라면 하늘에서라도 고향 사람들과 흥겨운 한마당을 풀어내고 있을 것만 같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 2022-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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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정은]“우리는 칠면조가 아니다”

    알록달록한 열기구가 가득한 카파도키아의 하늘, 하얀 치마가 활짝 펼쳐지도록 빙글빙글 돌면서 추는 세마춤, 고대 하드리아누스 신전…. 터키 유적지와 문화가 소개될 때마다 관광객들은 “헬로 튀르키예”를 외친다. 터키 공영방송에서 방영 중인 이 1분짜리 동영상의 홍보 대상은 관광지가 아니라 ‘튀르키예’라는 이름이다. 터키의 영문 국명이 바뀌었음을 알리는 정부 캠페인이다. ▷터키 정부가 최근 영문 국호를 ‘T¨urkiye(튀르키예)’로 변경해 달라고 유엔에 요청했다. 이에 따라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 등에서는 앞으로 터키의 정식 국호를 튀르키예로 쓰게 된다. ‘터키인의 땅’이라는 뜻의 이 이름은 터키가 1923년 공화국 수립을 선포했을 때부터 써온 국호다. 문제는 영어식 국명인 ‘터키(Turkey)’가 칠면조와 스펠링이 같다는 것. 일반명사로 멍청이, 패배자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점도 터키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국가가 개명하려는 목적은 다양하다.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통용되던 ‘홀란트(Holland)’라는 이름을 폐기했다. 마리화나와 성매매가 합법화된 북홀란트 지역의 퇴폐적인 이미지가 국가 전체로 확대된다는 이유였다. 체코는 형용사 ‘Czech’에 ‘공화국’을 붙여 사용하는 국호가 너무 길다며 ‘Chechia’라는 이름을 만들어 병용하고 있다. 스리랑카는 식민지 시대에 사용됐다는 이유로 ‘실론’이라는 기존 국호를 버렸고, 스와질란드(Swaziland)는 ‘Switzerland(스위스)’와 헷갈리지 않겠다며 독립 50주년이 되던 2018년 ‘에스와티니’로 새 국호를 달았다. 이미지를 바꾸는 리브랜딩 작업이다. ▷터키의 대외 이미지 개선 시도는 외교적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움직임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우크라이나와 마주보는 터키는 러시아-우크라 간 평화협상 중재자를 자처하면서 나토(NATO) 회원국으로 목소리도 키워가는 중이다. 그런 터키로서는 추수감사절의 칠면조 요리를 연상시키는 국명이 달가울 리가 없다. 터키 정부는 영문 국호 변경으로 무역 경쟁력도 높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기업들은 수출품에 ‘메이드 인 튀르키예’ 표기를 시작했다. ▷터키 일각에서는 갑작스러운 변화가 못마땅하다는 반응도 나온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내년 선거를 앞두고 국민의 불만을 대외 캠페인으로 돌리려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2003년부터 19년째 장기 집권 중인 그는 최근 급격한 인플레이션과 환율 하락으로 난관에 봉착한 상태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국호를 바꾸면서 “문화와 문명, 국가의 가치를 가장 잘 보여준다”고 했다. 나라의 가치는 이름뿐 아니라 실제 국력과 국격이 뒷받침될 때 올라간다는 점도 함께 되새기면 좋겠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 2022-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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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초등생 별명 금지 [횡설수설/이정은]

    학창 시절 별명 하나 갖지 않은 이는 찾기 어렵다. 키가 작으면 ‘땅꼬마’, 얼굴이 사각형이면 ‘도시락’, 얼굴이 까무잡잡하면 ‘시커먼스’ 같은 별명이 따라붙었다. 장점을 추켜세우는 것보다는 외모 특징이나 신체적 약점을 잡아서 놀리는 경우가 더 많았다. 문제의식이 약했던 과거에는 장난처럼 넘어갔지만 요즘은 학교폭력으로 처벌 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다. 몇 년 전 대구에서는 동급생을 ‘진지충’, ‘설명충’이라고 불렀던 중학생이 법정에까지 섰다. ▷최근 일본 초등학교에서는 학생들끼리 별명을 부르는 것을 금지하고, 성 뒤에 존칭인 ‘상(さん)’을 붙여 부르도록 교칙을 바꾸는 사례가 늘고 있다. 뉘앙스가 다르긴 하지만 한국식으로 하자면 초등학생들끼리 서로 ‘○○ 씨’에 가까운 존칭으로 부르는 것이다. 학생들이 별명을 부르는 게 ‘이지메’(집단 따돌림)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일본 문부과학성에 따르면 2020년 전국 초등학교에서 발생한 42만여 건의 ‘이지메’ 사례 중 60%가 ‘친구들의 놀림’이었다. ▷별명 금지 교칙을 놓고 일본 내에서는 찬반 논란이 한창이다. 상대에게 모욕이나 상처를 줘서는 안 되겠지만, 별명 자체가 사라지면 학교가 너무 삭막해지는 게 아니냐는 항변이 나온다. 금지를 명문화해 놓으면 아이들이 오히려 더 별명을 부르고 싶어지는 역효과가 생길 것이라고 우려하는 교사들도 있다. 학교 밖에서 지켜질지도 의문이다. 지난해 일본의 한 리서치 회사가 진행한 여론조사에서는 별명 금지 조치에 반대하는 의견이 27.4%로 찬성(18.5%)보다 많았다. ▷집단주의 성향이 강한 일본은 과거부터 집단 따돌림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돼 왔다. 이질적인 것에 대한 거부감, 소수자에 대한 배척 현상이 두드러진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는 감염자가 나온 학교를 상대로 “불 질러 버리겠다” 같은 공격이 이어졌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한 사이버 따돌림 등으로 일본 초중학생의 자살 건수는 역대 최고치까지 늘어났다. 초등학생들에게까지 ‘상’ 존칭을 붙이도록 한 데에는 이런 상황에 대한 교육당국의 절박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한국이라고 상황이 다르지 않다. 지난해부터 다시 증가 추세인 학교 사이버폭력 중 언어폭력은 42.7%로 가장 많다. ‘이백충’(부모 월수입이 200만 원)처럼 가정형편을 가지고 놀리는 저급한 별명까지 생겨났다. 거주하는 아파트 종류나 평수를 조롱하는 별명이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도 사용되는 게 현실이다. 일본의 별명 금지 교칙을 수입해야 할 판이다. 꼭 ‘님’이나 ‘씨’ 같은 존칭을 붙일 필요도 없다. 상대의 소중한 이름을 있는 그대로 불러주는 게 존중과 존경의 시작이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 2022-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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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정은]美 10대의 총기 난사

    미국 공화당의 거물 정치인인 밋 롬니 상원의원은 최근 텍사스주 총기 난사 사건의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글을 SNS에 올렸다가 역풍을 맞았다. 마지막에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한마디 덧붙인 것이 빌미가 됐다. 총기 소유 옹호론자들이 “배은망덕하다” “겁쟁이” 같은 비난을 쏟아내며 집중포화에 나선 것. 이들은 롬니 의원이 전미총기협회(NRA)에서 지금까지 1300만 달러(약 165억 원)의 후원금을 받은 사실까지 공개했다. NRA는 총기 규제에 반대해온 미국 내 최대 총기 옹호 단체다. ▷19명의 초등학생 희생자를 낸 이번 총기 난사 사건으로 미국 사회가 또다시 발칵 뒤집혔다. 범인이 18세 청소년이라는 사실도 미국인을 경악시켰다. 얼마나 총기 규제가 느슨하면 10대 청소년까지 총을 손에 넣어 범죄에 사용하느냐는 비판이 고조되고 있다. 텍사스주에서는 21세 이상이면 전과나 법적 제한 여부에 관계없이 누구나 권총을 소지할 수 있다. 라이플총의 경우 허가증 없이도 구매가 가능하다. ▷총기 규제에 나서야 한다는 여론이 다시 들끓고 있지만 실제 전망은 어둡다. 20명의 어린이 희생자를 낸 2012년 샌디훅 초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 이후 지금까지 수차례의 총기 규제 시도가 이어졌지만 성과는 없었다. NRA가 로비력을 총동원해 의회의 총기 규제 관련 입법을 막아온 것은 이미 악명이 높다. NRA의 자금력이 최대 무기다. 2016년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당시 공화당 대선 후보에게 지원한 선거 자금만 7000만 달러에 달했다고 한다. ▷NRA만 탓하기도 어렵다. 미국에서 총기 소유는 개인의 자유이자 권리로 여겨진다. 이를 규제하는 것은 ‘무기 소유 권리는 침해될 수 없다’고 규정한 수정헌법 2조 위반이라고 보는 사람도 많다. 총기 난사 사건으로 규제 여론이 높아질 때마다 NRA로 되레 후원금이 몰리는 결과가 이를 방증한다. 뉴욕이나 시카고 같은 대도시를 제외한 상당수 교외지역에서는 아직도 야생동물의 위협이 상존하는 것도 사실이다. 인적이 드문 시골에서는 경찰 공권력이 닿기를 기다릴 틈 없이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고 주민들은 주장한다. ▷그러는 사이 미국은 사람보다 총이 더 많은 나라가 됐다. 인구 100명당 총기 수가 120.5개로 전 세계 1위다. FBI에 따르면 인구밀집지역에서 벌어진 총기 난사 사건은 지난해에만 61건. 2020년에는 교통사고가 아닌 총기 관련 사건사고가 10대와 어린이 사망 원인 1위가 됐다. 그래도 정치권은 “정신병 환자 관리를 더 강화해야 한다”는 식의 해법으로 변죽만 울리고 있다. 로비 자금에 파묻힌 워싱턴 정치의 한계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 2022-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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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정은]“대만은 미국이 지킨다”

    2020년 8월 미 국방부에서 진행된 미중 간 시뮬레이션 전쟁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가정된 상황은 대만해협에서의 무력 충돌. 펜타곤과 싱크탱크 랜드연구소의 군사작전 전문가들로 구성된 미국 쪽 ‘블루팀’은 중국 쪽 ‘레드팀’에 참패했다. 역내 가용 전함과 전투기, 잠수함, 지상병력을 모두 동원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존 하이튼 미 합참차장은 이후 한 행사에서 이 결과를 “비참한 실패”라고 불렀다.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은 미국이 가장 심각하게 인식하는 인도태평양 지역 내 안보 위협이다. 펜타곤의 고위 장성들은 2027년이 되기 전 중국이 대만을 공격할 수 있다고 경고해왔다. 미국이 대만 지원에 나선다고 해도 격퇴를 장담하기 어렵다. 중국∼대만의 거리는 불과 145km. 워게임 결과에 따르면 대만 공군은 몇 분 만에 전멸해 버린다. 극초음속 미사일 개발 등 무서운 속도로 군사력을 증강해온 중국이다. 섣불리 나섰다간 중국과의 전면전까지 각오해야 한다는 것도 미국에는 부담이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조 바이든 대통령이 중국의 대만 침공 시 군사 개입을 하겠다고 밝혔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다. 매번 중국이 강하게 반발하고, 화들짝 놀란 백악관 대변인실과 펜타곤이 부랴부랴 진화에 나서는 패턴도 반복되고 있다. 첫 발언 때만 해도 “고령의 바이든 대통령이 말실수를 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지만, 이쯤 되면 의도가 담겼다고 보는 게 맞다. 호시탐탐 대만 공격 기회를 엿보는 중국을 향해 ‘꿈도 꾸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내려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은 막상 대중 견제를 위해 출범시킨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에는 대만을 끼워주지 않았다. 중국 눈치를 보던 아세안(ASEAN) 10개 회원국 정상들은 백악관까지 불러 참여를 설득하면서 참가를 원했던 대만은 배제시켰다. ‘하나의 중국’ 원칙을 유지하는 미국이 중국과의 선을 넘지 않기 위해 마지못해 내린 결정일 것이다. 쓰린 속을 달래고 있을 대만을 향해 바이든 대통령이 말실수 형식을 통해서나마 ‘든든한 뒷배’ 역할을 자임한 것은 아닐까. ▷미국은 대만에 ‘MQ-9 리퍼’ 같은 최신무기 판매를 허용하고, 대만군의 훈련을 도우면서 대만관계법에 따라 가능한 군사적 지원도 이어가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 구축에 빠져서는 안 되는 핵심 파트너 국가의 안보 위협을 두고만 보지 않겠다는 미국의 입장은 분명하다. 이런 지원을 이끌어내는 힘은 대만이 보유한 첨단 반도체 기술력과 TSMC 같은 대만 기업들이다. 국력을 결집해 키워낸 ‘실리콘 방패’의 힘이 전투기와 탱크 못지않음을 대만이 보여주고 있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 2022-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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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정은]美中 간 선택, 이젠 한국의 몫 아니다

    한미 정상회담에서 중국과 관련된 내용과 표현 수위는 몇 년 전부터 최대 조율 과제였다. 공동성명에 ‘중국’이 명시된 적은 없지만 대만해협, 인권, 5G 기술 등 중국이 민감해하는 내용을 놓고 한미 양측은 매번 적잖은 물밑 신경전을 치렀다. “이러면 우리는 중국한테 죽는다”는 읍소부터 낯을 붉혀가며 내놓는 항의까지 한국 외교관들이 구사한 ‘밀당’ 방식은 다양했다. 공동성명에 대만해협 언급이 처음 들어간 건 지난해 5월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였다. ‘문재인 정부=친중(親中)’으로 인식하고 있던 워싱턴의 싱크탱크 인사들은 문 정부가 이에 합의했다는 점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싱가포르 선언’과 ‘판문점 선언’의 계승을 공동성명에 담는 대가로 미국의 대중(對中) 압박 동참 요구를 덥석 받아준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다. 당시 청와대와 주미대사관 인사들은 부인한다. 초안에서 미국이 요구한 내용은 훨씬 많았는데, 그나마 그 수준으로 낮췄다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첫 정상회담 공동성명에는 중국 견제의 성격을 띤 내용들이 확 늘어났다. 윤 대통령이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 화상 정상회의에 참석하는 등 공동성명에서 확인한 일부 내용은 벌써부터 실제 이행 단계로 진입했다. 경제안보 협력과 기술동맹을 통해 한미 관계를 업그레이드하겠다는 새 정부의 정책 방향에 모호함은 없어 보인다. 출범 후 11일 만에 이런 결단을 내놓기까지 주저한 흔적도 없다. “한국은 미중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국가”라는 주미대사의 발언이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게 불과 2년 전이다. 동맹인 미국을 상대하는 현장에서조차 중국의 눈치를 봤던 게 한국 외교의 실상이었다. 이제 윤 정부의 대외 지향점이 분명해진 만큼 앞으로 최소 5년간은 이런 논쟁이 재연될 가능성은 사라졌다. ‘안미경미(安美經美)’ 식의 지나친 편중은 경계해야 하겠지만, 반도체와 전기차 배터리 같은 핵심 산업 분야에서 한미가 밀착하는 만큼 ‘안미경중(安美經中)’ 노선은 존립 근거부터 약해진 게 사실이다. 중국의 보복 가능성에 대한 한국의 걱정을 미국도 모르는 게 아니다. 미 당국자들은 사석에서 “걱정 마, 우리가 지켜줄게”라며 큰소리를 치기도 한다. 구체적인 방어책이나 지원 방안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 대신 미국은 한국이 동맹 관계를 더 단단히 할수록 대중국 파워가 커질 것이라고 강조한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윤 대통령의 당선 직후 먼저 전화를 걸어온 것, 취임식에 2인자인 왕치산 국가부주석을 보낸 것을 근거로 든다. 지난해 한미 공동성명에 대만해협이 언급됐을 때 중국의 반발이 우려만큼 거칠지 않았다는 점 또한 미국이 주목하는 부분이다. 당시 한미 양국은 중국의 반응 강도가 10점 척도로 따졌을 때 3, 4점 정도에 그쳤다는 평가를 공유했다. ‘미국이냐 중국이냐’ 식의 이분법적 질문은 당초 접근법부터 틀렸던 측면이 없지 않다. 현재의 외교 진영 싸움은 특정 국가라기보다 자유, 인권, 공정 같은 가치를 앞세우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IPEF만 해도 ‘조세와 반(反)부패’ 같은 4가지 분야별로 조건을 충족시킨다면 어느 국가라도 들어올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그렇다면 이제 선택은 한국이 아닌 중국의 몫이다. 글로벌 규범과 시장경제의 룰을 지키며 국제사회의 흐름에 동참할지 여부에 대한 선택 말이다. 한국에 으름장을 놓으며 또 다른 보복에 나설 것인지, 동반성장의 공통분모를 찾아 협력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중국이 답을 내놔야 한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 2022-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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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정은]마르코스 가문의 부활

    아버지는 고문과 숙청, 살인을 일삼던 독재자. 어머니는 부패한 ‘사치의 여왕’.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의 집안 내력은 그의 정치 인생을 가로막을 거의 모든 조건을 갖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르코스 전 필리핀 대통령은 잘 몰라도 부인 이멜다의 방에서 발견됐다는 3000켤레의 구두 이야기는 안 들어본 사람이 없다. 그런데 그 아들인 마르코스 주니어가 9일 필리핀 대선에서 사실상 승리를 거뒀다. ▷‘봉봉’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마르코스 주니어는 대선 캠페인에서 줄곧 선두를 달려왔다. 60% 가까운 지지율을 확보하며 경쟁자인 레니 로브레도 부통령과의 격차를 두 배 이상 벌렸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현 대통령의 딸인 사라를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삼아 ‘현재와 미래 권력의 결합’을 과시했다. 당선이 공식 확정되면 인권탄압과 독재로 쫓겨났던 마르코스 일가가 36년 만에 다시 권력을 쥐게 되는 것이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하와이 망명 중 사망했지만, 올해 93세 이멜다는 아들과 함께 대통령궁에 복귀하게 된다. ▷혜성처럼 갑작스러운 등장도 아니었다. 1986년 부모와 함께 망명길에 올랐던 봉봉 마르코스는 5년 만에 필리핀으로 돌아온 뒤 곧바로 35세 나이에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주지사, 상원의원을 거치며 정치인으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그는 부모의 죄에 대해 “당시 너무 어렸고 상황을 몰랐다”며 책임을 부인해왔다. 틱톡 같은 소셜미디어에는 마르코스 일가의 범죄가 정적에 의해 부풀려진 허위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콘텐츠가 넘쳐난다. 과거 흑역사를 잘 모르는 젊은층 표심을 겨냥한 것들이다. ▷명망가 집안을 유독 선호하는 필리핀의 정치적, 사회적 분위기도 이번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7600개 섬으로 이뤄진, 80개가 넘는 언어가 사용되는 나라에서 정치는 늘 소수 족벌 엘리트 정치가문들의 전유물이었다. 스페인 식민통치 시절 땅을 얻어 부를 축적한 400여 개의 크고 작은 가문이 그들이다. 정치적 결속력을 갖기 어려운 필리핀인들을 향해 선거 때면 이른바 ‘3G(Guns, Goons, Gold)’가 동원된 적도 많았다. 총, 깡패, 황금의 세 가지로 표심을 위협하거나 매수한다는 의미다. ▷36년 전 마르코스 일가를 몰아냈던 필리핀의 ‘피플 파워’ 혁명은 아시아 민주주의의 상징이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의 반(反)독재 시위 도미노에도 영향을 미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오랜 경기침체와 빈곤, 정치 혼란에 필리핀인들도 지쳐가는 걸까. ‘스트롱맨’으로 포장된 권위주의 리더십에 대한 향수가 정치판에 스며들고, 민주화의 성과는 그에 밀려 빛이 바래간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 2022-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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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정은]美 낙태전쟁 재점화

    “내 몸에 대한 결정권이 없다면 민주주의도 없다. 낙태 금지는 독재적 시스템으로 가는 첫 단계다.” 미국 여성운동의 대모인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지난해 12월 언론 인터뷰에서 낙태 금지를 비판하며 한 말이다. 태아의 심장 박동이 감지되는 임신 6주부터 낙태를 금지한 텍사스주의 ‘심장박동법’ 시행을 막아달라는 소송을 연방대법원이 기각한 직후였다. ▷점점 보수화되는 대법원과 달리 미국의 여론은 낙태 허용을 지지하는 쪽이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 ‘로 대 웨이드(Roe vs Wade)’ 판결을 유지해야 한다는 답변은 54%로 뒤집어야 한다(28%)보다 두 배가량 많았다. 임신 24주까지 낙태를 허용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은 1973년 선고 후 50년 가까이 여성의 낙태권을 보장해 온 최후의 보루였다. 그런데 이 판결마저 곧 폐기된다니 미국이 발칵 뒤집힐 만하다. ▷낙태는 미국의 보수와 진보가 가장 치열하게 맞붙어 온 논쟁거리다. 보건, 의료 정책을 뛰어넘는 정치적 문화적 이슈다. 2일 유출돼 버린 대법원의 낙태 판결 초안은 당장 11월 중간선거를 뒤흔들 판이다.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 낙태권 사수 혹은 폐기를 위한 캠페인에 선거자금을 쏟아부을 것이라고 한다. 대법원장이 “최종 결정이 아니다”라고 진화에 나섰지만 “‘로 대 웨이드’ 판결은 시작부터 잘못됐다”고 맹폭한 결정이 바뀌기는 어려워 보인다. 118개의 주석이 달린 98쪽짜리 판결문 초안에 이미 9명의 대법관 중 5명이 동의했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힐 가능성은 이미 예고돼 왔다. 지난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보수 성향의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을 지명했을 때 가장 관심을 모은 것도 이 판결의 번복 여부였다. 스스로를 ‘생명 찬성(pro-life)론자’라 부르는 기독교 복음주의자와 가톨릭 신자들의 낙태 반대 목소리가 다시 커지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백악관 브리핑에서는 “가톨릭 신자인 조 바이든 대통령이 왜 낙태를 지지하느냐”고 묻는 기자와 “(남성인 당신은) 임신해 본 적도, 선택의 기로에 서 본 적도 없지 않냐”는 대변인 간에 설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르면 다음 주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선고되자마자 50개주 가운데 최소 26개주는 즉시 낙태 금지를 강화하는 법 개정에 나설 것이라고 미 언론들은 전한다. 이에 맞서 온몸에 ‘당신 것이 아니다(not your body)’라고 써 붙인 여성과 낙태 찬성론자들은 또다시 거리로 나설 준비를 하고 있다. 이미 최악 수준인 정치 양극화와 사회 분열이 더 심화될 것이라는 탄식이 나온다. 그 충돌의 파장이 3년째 낙태죄 관련 입법 공백이 지속되는 한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지켜봐야 할 일이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 2022-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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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정은]풀브라이트 장학금

    “미국이 실행한 대외 정책 가운데 가장 훌륭한 프로그램이다.” 안병만 전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풀브라이트(Fulbright) 장학금을 두고 했던 말이다. 그 자신이 풀브라이트 장학생이었던 안 전 장관은 재임 시 ‘한국형 풀브라이트 사업’을 추진할 정도로 이를 높이 평가했다. 한국에서는 한승수 전 총리와 조순 권오기 이기준 김동연 전 부총리, 한승주 전 외교부 장관, 정정길 전 대통령비서실장 등 100여 명의 주요 인사 이름이 ‘동문 저명인사’ 명단에 올라 있다. ▷김인철 교육부총리 후보자가 본인뿐 아니라 부인과 아들, 딸까지 가족 4명이 전부 이 장학금을 받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풀브라이트’라는 이름은 갑자기 동네북 신세가 되는 분위기다. 선발 과정의 공정성을 둘러싼 각종 의혹에 김 후보자 측의 거짓 해명까지 문제가 되면서 그를 향한 사퇴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풀브라이트 장학금의 명성과 신뢰까지 금이 가게 될 판이다. ▷엉겹결에 한국의 정치 검증판에 소환됐지만, 풀브라이트는 로즈 장학금과 함께 글로벌 장학금의 양대 축으로 불리는 권위 있는 장학 프로그램이다. 1946년 제임스 윌리엄 풀브라이트 미 상원의원이 창립을 주도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재건을 위한 인재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한 그는 미국의 잉여 농산물을 외국에 공매한 대금을 문화, 교육 교류에 쓸 수 있도록 하는 ‘풀브라이트법’을 만들어 재원을 조달했다. 장학생 중에서 노벨상 수상자 61명과 퓰리처상 수상자 89명, 총리 혹은 대통령 40명이 배출됐다. ▷풀브라이트 장학금은 재정, 운영에 미국 국무부 공공외교과가 관여한다. 미국에 대한 이해와 호감을 높이는 외교 프로그램으로서의 성격도 있다는 의미다. 이런 취지에 맞게 미국에 가본 적이 없거나 미국 문화에 노출되지 않았던 학생이 선발 우선권을 갖는다. 미국 생활 경험이 있는 경우, 심지어 20년 전 유아기 시절의 경험이라도 있는 지원자는 후순위로 밀리기 십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2, 3차례 미국 생활을 한 김 후보자의 아들과 딸은 장학금을 따냈다. 미 측 인사들도 뒤늦게 이 결과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풀브라이트 장학생들이 2년간 지원받는 학비와 생활비는 합쳐서 최대 15만 달러 가까이 된다. 가정 형편이 실력보다 앞설 것은 아니다. 그러나 능력이 비슷하다면 더 절실하고, 더 필요한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가는 게 장학금이다. 김 후보자의 가족과 측근들의 ‘끼리끼리’ 나눠 먹기로 인해 유학을 꿈꾸던 어느 가난한 청년의 날개가 꺾였던 것은 아닐까. 사회 지도층의 절제를 찾아보기 어려우니 국내는 물론 전 세계 160개국의 풀브라이트 장학생들 앞에서도 참 민망한 일이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 2022-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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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 정부, 패거리 정치에 정책 이용한 文정부 실패 반복 안돼” [인터뷰]

    《“오늘은 BTS 병역과 인플레이션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25일 오후 7시 윤희숙 전 미래통합당(국민의힘 전신) 의원이 스튜디오로 꾸민 서울 종로구 안국동의 한 사무실에서 유튜브 방송을 시작하자 댓글들이 주르륵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에 실시간으로 응답하고, 그래프와 도표를 보여주며 1시간 반 가까이 단독으로 방송을 끌어가는 윤 전 의원은 베테랑 유튜버처럼 보였다.부친의 땅 투기 의혹에 책임을 지겠다며 국회의원직을 던진 지 8개월. 그는 이제 동영상을 만들고 책을 쓰고 강연을 다닌다. 시각이 다양해지고 관점이 넓어졌다고 자평한다. 그만큼 현안 비판은 더 매서워졌다. ‘포퓰리즘 파이터’ ‘정책 저격수’로 불려온 그다. 그런 윤 전 의원이 보는 새 정부의 정책 방향은 어떨까.그는 이날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문재인 정부에서의 무리한 정책 시행으로 많은 문제들이 생겼다”면서도 “기계적으로 되돌리는 게 능사가 아니다”고 강조했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도 하기 전부터 일각에서 ‘문 정부 정책만 아니면 된다’(ABM·Anything But Moon)는 말이 나오는 것을 의식한 듯했다. 그는 “경제, 사회 상황이 그에 맞춰 변해 온 만큼 ‘지금 단계에서의 최선’을 찾아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새 정부도 결국 또 다른 탈레반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다음은 일문일답.》“공인에 대해서는 더 엄격해야” ―유튜브 방송 같은 대외 활동이 활발해지는 것 같다. “윤희숙TV는 국회의원으로 있을 때 시작했는데 당시 ‘여의도의 기적’이라고 불렸다. 이렇게 재미없는 TV가 어떻게 1년 만에 구독자 수를 10만 명으로 늘렸냐는 거다(웃음). 여의도를 떠난 이후에는 오히려 더 넓어진 소통의 기회가 됐다. 날것 그대로의 댓글도 많이 받는다.” ―부친의 땅 투기 의혹이 제기됐을 때 ‘책임정치’와 ‘공정’을 이야기하며 국회의원직을 던졌다. 새 정부 장관 후보자들의 의혹은 어떻게 보나. “결국 메시지의 문제다. 당시 나는 국회의원으로서 죽더라도 그 방법으로 내가 던져온 메시지들을 살릴 수 있다고 봤다. 지금도 그 선택에 전혀 후회가 없다. 위법이 아니라 하더라도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스스로 절제하는 부분이 있어야 된다. 그런 게 별로 없어 보이는 몇 분이 계신다. 공인에게는 더 엄격한 기준이 적용돼야 하며, 그 사회적 기준은 더 명확해야 한다. 국민의 눈높이에서 사람을 찾는 노력이 부족하지 않나 하는 반성 또한 있어야 한다.”“변화 감안해 ‘현재의 최선’을” ―정책적 측면에서도 공정의 가치가 흔들린 사례가 적잖았다. 특히 경제, 노동 정책에서 새 정부가 대대적인 방향 전환을 예고하고 있는데…. “문재인 정부의 가장 큰 문제는 ‘우리 편’을 챙기려는 패거리 정치를 위해서 정책을 써먹었다는 것이다. 정치적 자원화를 위해 정책 비틀기를 했다. 욕먹을 짓이다. 새 정부는 이런 마인드를 완전히 버려야 한다. 다만 잘못된 정책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보다 지금 단계에서의 최선을 찾는 게 중요하다. 그동안 상황이 변했고 국민의 삶도 바뀐 측면이 있다. 주 52시간만 해도 화이트칼라들은 좋아한다. 관건은 제도를 어떻게 유연하고 실용적으로 운영하느냐 하는 것이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같은 정책은 더 이상 추진되지 않을까. “어느 사회나 비정규직도 필요하다. 당연한 이야기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말조차 꺼내기 어려웠다는 것 자체가 이 정책이 얼마나 정치화돼 있는지를 보여준다. ‘다 정규직 시켜 줄게’ 식의 접근은 결과적으로 정규직으로의 이동 통로를 끊어버리게 된다. 정규직 고용 시 부담이 크니까 기업들이 차라리 기계를 써버리는 거지. ‘정규직화의 역설’이 아니라 그냥 당연한 결과다. 물론 우리나라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비 비정규직 비중이 높고, 정규직과의 임금 격차도 큰 것은 문제다. 이 격차를 실질적으로 줄이는 게 관건이다.” ―부동산 분야는 어떤가. 정권 교체의 원인이 될 만큼 파장이 큰 정책인데…. “국민들이 정말 화났던 이유는 문재인 정부가 부동산정책 실패 자체라기보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정책을 나쁜 의도로 썼다는 것이었다. 왜 부동산 데이터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국민을 갈라치기 하는 수단으로 써먹었느냐는 거다. 그렇다고 이를 전부 되돌리기만 하는 것 또한 능사가 아니다. 그것은 새 정부마저 또 다른 탈레반이 돼버리는 결과다. 금리가 오르고 있고, 시장도 그때와는 달라졌다. 중요한 건 지금의 상황과 데이터를 기반으로 판단하는 것. 장기적인 공급 계획에 대해 국민에게 믿음을 주고, 이후 숨고르기를 하면서 속도 조절을 해야 한다.” ―코로나19 여파에 글로벌 인플레이션까지 심해지고 있다.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모두가 굉장히 어려운 시기다. 돈이 전 세계적으로 많이 풀렸고, 공급망이 엉망이 됐는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까지 터졌다. 이럴 때에는 위기를 버텨줄 경제 체질이 중요한데 이게 문재인 정부에서 너무 나빠졌다. 상황을 뚫고 나가려면 굉장히 유능한 정책 그룹이 필요하다. 또 공약에서 지금 당장 급하지 않은 것은 미뤄야 한다. 소요 재원이 300조 원대에 가까운 공약을 지금 다 이행할 수 없다는 것을 국민에게 이해시켜야 한다.” ―새 정부는 핵심 정책 중 하나로 연금 개혁을 내걸었다. 임기 내에 가능할까. “연금 재정은 구멍 날 정도로 방만하게 운영돼 왔기 때문에 이제는 반대로 조이는 수밖에 없다. 국민들이 좋아할 수가 없는 개혁이다. 그럼에도 왜 해야 하는지, 안 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에 대해 국민에게 설명하고 소통하는 게 먼저다. 문재인 대통령처럼 ‘국민들이 싫어하니까 (논의) 끝’이라는 식으로는 영원히 못 한다. 소득 대체율이나 보험료, 연금개시 연령 같은 숫자는 결국 테크니컬(기술적)한 이야기다. 공감대가 이뤄지고 나면 이후부터는 전문가들이 그 원칙을 구현하는 방식으로 계산해내면 된다. 숫자 계산은 금방이다.” ―강한 저항이 예상된다. 과거 시도들이 정치에 발목 잡히는 사례도 많지 않았나. “‘천천히 서두른다’는 말이 있다. 시급하지만 사람들에게 소화할 시간을 줘야 한다. 전문가와 언론을 통한 공론화 과정이 중요하다. 국정추진 동력이 센 정권 초반에 시작해도 3년은 걸릴 거다. 세대 간 갈등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이런 제도가 무너짐으로써 사회 응집력이 받게 될 상처 자체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최근의 국회 움직임은 어떻게 보는지. ‘검수완박’ 법안을 놓고 여야 모두 비판에 직면해 있다. “공적 방법을 이용해 사적인 이익을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정치가 어디까지 망가졌는지를 보여준다. (국회의원) 본인 또는 특정인을 보호하기 위해 무리한 사안을 무리하게 밀어붙이는 게 아닌가. 솔직히 ‘검수완박’ 입법 과정에서 우리 정치의 가장 암적인 존재들이 자연스럽게 드러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했다. 문제의 여러 급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 급에 있는 사람들이 검은 먼지처럼 뭉쳐서 드러날 때 빗자루로 쓸어버리듯 털어내면 우리 정치가 조금은 좋아지지 않을까 했던 거다. 그런데 그 기대를 국민의힘이 (중재안 합의로) 날려버렸다. 이 먼지들이 휙 흩어져 버린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정책전문가 아닌 정치인’ 각성” ―새 정부의 총리, 부총리 등 요직에 관료 출신들이 임명됐다. 관료 출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까. “일반적인 관료의 특성이라는 게 있긴 하지만 이들 중에도 진취적인 분들이 있다. 이런 진취적인 인사들을 관료적 시스템에다 갖다 놓으면 관료처럼 돼버리는 게 문제다. 핵심은 이들이 활동할 시스템의 운영이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약속대로 청와대 중심의 제왕적 대통령제를 절제시키고, 각 부처 장관이 소신껏 비전을 펼칠 수 있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윤 전 의원은 윤 당선인이 지난해 대선 행보에 나서면서 가장 먼저 접촉한 정책 전문가였다. 대선 캠프에 합류해 정책 구상에 힘을 보탠 그를 놓고 항간에서는 입각설이 돌기도 했지만, 정작 윤 전 의원은 인수위나 내각 명단 어디에도 아직까지 이름이 없다. “쓴소리를 너무 많이 했기 때문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그저 빙그레 웃었다. “정치라는 것을 국회나 행정부에 입각해서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나 스스로 이제는 정책 전문가가 아닌 정치인이라는 각성을 오히려 국회를 떠나면서 하게 됐다”며 “한국 정치의 대안을 보여주기 위해 할 수 있는 나만의 역할을 계속할 것”이라고 덧붙였다.윤희숙 전 미래통합당 의원은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를 거쳐 제21대 국회의원(서울 서초갑)에 당선됐다. 2020년 임대차 3법의 국회 통과 직후 “저는 임차인입니다”로 시작하는 ‘5분 연설’을 통해 문제점을 비판했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 문제점을 짚은 책 ‘정책의 배신’에 이어 ‘정치의 배신’을 썼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 2022-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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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정은]김정은의 14번째 편지

    짙은 남색의 파일 위에 찍힌 금색의 북한 국무위원장 휘장. 김정은 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보낸 첫 친서의 포장은 고급스러웠다. 2018년 2월 청와대를 방문한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문 대통령에게 직접 건넨 친서를 당시 청와대는 공개하지 않았다. 비밀문서라는 김 위원장의 친서는 막상 미국이 먼저 공개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같은 해 7월 트위터에 원문을 올리면서 ‘친애하는 대통령 각하’로 시작하는 친서의 내용과 형식이 알려졌다. ▷평창 겨울올림픽을 계기로 시작된 남북한 정상 간 친서 교환은 끊길 듯 끊이지 않았다. 김 위원장이 21일 보낸 친서는 14번째이자 문 대통령의 퇴임 전 마지막 편지가 된다. 조선중앙통신은 “깊은 신뢰심의 표시”라고 했다. 북한이 최근까지도 남한을 향해 전술핵 사용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느닷없는 살가움의 표시다. 문 대통령을 향해 ‘삶은 소대가리’, ‘겁먹은 개’ 등의 표현을 써가며 비난했던 북한이지만 마무리는 잘하고 싶었던 것일까. ▷직접 쓴 편지가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강하다. 정상 간의 ‘친서 외교’는 말할 것도 없다. 김 위원장은 대외활동에 친서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왔다. 문 대통령뿐 아니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도 수차례 편지를 썼다. 트럼프는 김 위원장의 편지를 “아름다운 예술품”이라고 불렀다. 백악관 각료회의에서 친서를 꺼내드는가 하면, 오벌오피스를 찾는 손님이 있을 때면 봐달라는 듯 집무실 책상 위에 올려놨다. 대통령기록물법 위반임에도 퇴임 이후 27통의 ‘러브 레터’를 사저로 옮겨 보관하려 했다. ▷김 위원장의 친서는 북-미, 남북 관계가 악화하고 있는 시점에도 중단되지 않았다. 정상 간 소통을 위한 최소한의 끈은 놓지 않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특히 ‘브로맨스’를 과시했던 트럼프에게 공을 많이 들였다. 해리 해리스 당시 주한 미국대사가 북측으로부터 친서를 받으러 비밀리에 판문점까지 움직이기도 했다. 그러나 친서 전달 20번째가 넘어가면서는 백악관 팀도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고 한다. 실질적 내용 없이 사탕발림이나 아부성 수사가 반복됐기 때문이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아첨의 걸작”이라고 평가했다. ▷친서들은 쌓였지만 북한이 협상장에 나오거나 비핵화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할 기미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북한은 올해만 이미 13차례 미사일을 발사했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로 레드라인까지 넘어버렸다. 풍계리 핵실험장에서는 7차 핵실험을 준비하는 움직임이 한창이다. 정상 간 친분이 실질적인 진전으로 연결된 것은 끝내 없었다. 사적인 관계 과시에 그치는 친서는 영혼 없는 안부 편지처럼 공허하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 2022-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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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정은]마스크 벗어도 되나요

    “마스크 의무화 조치가 해제됐습니다. 원한다면 지금 곧바로 벗으십시오.” 미국 알래스카에어 여객기에서 기장의 안내방송이 나가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승객들은 마스크를 흔들거나 머리 위로 던지면서 환호했다. 승무원이 “마스크를∼ 벗어∼버려요”라고 노래하며 좌석마다 마스크를 수거한 비행기도 있었다. 18일 정부의 대중교통 마스크 착용 의무화 조치를 무효화하는 플로리다주 연방법원의 판결과 이에 따른 교통안전청(TSA)의 후속 조치가 나온 직후였다. ▷마스크는 코로나19 방역의 핵심이자 최후의 보루로 여겨진다. 미국의 경우 이미 대부분의 장소에서 실내외 마스크 착용 지침이 완화돼 있는데도 이번 판결에 대한 여론의 관심은 뜨거웠다. 환영과 찬성만큼 반대와 우려도 쏟아졌다. 59페이지에 이르는 판결문에서부터 판사의 신상과 얼굴 사진까지 인터넷에 도배가 됐다. 그만큼 마스크가 갖는 상징성이 크다는 의미다. 한국은 5월 초 마스크 착용 의무화에 대한 정부 결정이 나올 예정. 정부는 곧 전문가 의견수렴을 시작한다. ▷바이러스가 소멸돼서 마스크를 벗는 건 아니다. 마스크 규정이 풀리면 확진자가 다시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도 적지 않다. 스위스와 영국에서는 항공사의 기내 마스크 의무화 폐지 후 승무원과 조종사들의 잇단 확진으로 모두 600여 편의 항공편이 취소됐다. 오스트리아는 지난달 마스크 규정을 해제했다가 18일 만에 “시기상조였다”며 결정을 뒤집기도 했다. 전파력이 큰 XE 변이 바이러스에 이어 XL, XM 등이 계속 출몰하고 있다. 마스크 의무화 해제 판결이 나온 미국조차 뉴욕 등지에서는 오미크론 재확산 추세다. 조 바이든 행정부는 항소를 검토 중이다. ▷그래도 이제 실외에서는 마스크를 벗을 때가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국내에 많아지는 듯하다. 한 인터넷 투표에서는 ‘실외 마스크 의무화를 해제해야 한다’는 답변이 78%였다. 청와대 홈페이지에는 마스크를 벗게 해 달라는 청원이 올라왔다. 색조 화장품 시장이 들썩거리고 피부과와 성형외과 예약이 늘어나는 등 ‘노 마스크’ 일상을 준비하는 움직임도 벌써부터 분주하다. ▷전문가들은 마스크 의무화 해제에는 아직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쪽이다. 인수위원회도 어제 코로나19 브리핑을 열고 “섣불리 방역을 해제하지 않도록 정부에 당부드린다”고 했다. 마스크 의무화의 해제 여부와 시점은 철저히 보건의료와 국민 안전의 관점에서 과학이 결정할 일이다. 규정과는 별개로 스스로 마스크 착용을 지속하는 것은 그보다도 한 차원 높은 결정일 터다. 나와 이웃을 코로나19에서 지키는 것은 물론 감기, 독감 등 다른 바이러스를 차단하는 데에도 마스크는 유용하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 2022-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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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정은]애물단지 된 백신

    지난해 말 나이지리아의 한 대형 쓰레기처리장. 대형 덤프트럭이 뿌연 흙먼지를 날리며 구덩이 속으로 박스 수백 개를 쏟아부었다. 터져 버린 박스 속에는 코로나19 백신이 가득했다. 선진국에서 공여는 받았는데 유통기한이 지나 못 쓰게 된 100여만 회 분량이었다. 사람을 살린다는 백신들이 한순간에 쓰레기 더미에 파묻히는 장면은 씁쓸하고도 충격적이었다. 백신 접종률이 고작 5%대에도 못 미치는 저개발 국가로서는 더더욱 분통 터지는 매몰 현장이었을 것이다. ▷이유나 방식은 다르지만 한국에서도 폐기되는 백신이 급증하고 있다. 현재까지 누적 폐기량이 233만 회를 넘어섰다. 1회당 대략 20달러로 계산하면 550억 원이 넘는 분량이다. 앞으로 폐기될 처지에 놓인 백신 예약 물량은 더 많다. 올해 국내에 도입될 분량은 1억2600만 회. 쌓여 있는 재고까지 합치면 1억4000만 회분이 넘는데 맞을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불과 7, 8개월여 전 백신 한 방울이라도 놓칠세라 최소잔여형(LDS) 주사기를 구하고, 너도나도 접종 예약 ‘광클릭’을 해댔던 때와 비교하면 때 이른 격세지감이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고 하기에는 변수도 적지 않았다. 치명률은 낮고 전파력은 높은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가 팬데믹 국면을 바꿔 놓을 것으로 예상하기 어려웠다고 당국자들은 항변한다. 기존의 백신으로는 계속 진화하는 변이 바이러스를 막는 데 한계가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이스라엘에서 최근 나온 연구에 따르면 60세 이상에 대한 4차 접종 효과는 불과 8주에 그친다. 백신 부작용 우려도 예상보다 컸다. 그 탓에 5∼11세 접종률은 0.7%에 머물고 있다. ▷그래도 정부가 더 정교하게 수급 계획을 세웠어야 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팬데믹 초기 백신을 제때 구하지 못해 혼쭐이 난 정부가 뒤늦게 계약에 나서면서 예상 물량을 지나치게 잡아버린 측면이 있다. 확진자 폭증 시점에 방역 지침을 되레 완화한 것도 백신을 애물단지로 만들어 버린 셈이 됐다. 항체가 생긴 1470만 명의 확진자들은 이제 추가 접종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국내에서는 처치 곤란 신세가 됐지만 그렇다고 백신의 가치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직도 전 세계에서는 백신 접종률이 20% 미만인 저개발국이 44개국에 이른다. 백신 저장 시설과 운송, 의료인력 부족 문제가 있긴 하지만, 공여 백신의 유통기한이 두 달 반 정도만 돼도 접종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들 국가에 국내 예약 분량을 공여하는 방안을 찾으려면 서둘러야 한다. 타이밍을 놓쳤다간 소중한 생명을 위해 백신을 나누는 일이 ‘쓸모없어지니 떠넘긴다’는 식으로 폄훼될지 모른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 2022-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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