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엽

조종엽 차장

동아일보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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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조종엽 차장입니다.

jjj@donga.com

취재분야

2025-11-23~2025-12-23
문학/출판29%
역사21%
문화 일반10%
사회일반10%
정치일반7%
칼럼7%
인사일반7%
검찰-법원판결3%
산업3%
만화3%
  • 드라마속 옥탑방에 반해 입국… “낭만은커녕 얼어죽을뻔”

    “서울이 내다보이는 야경은 아름답지만, 화장실은 얼어붙을 듯 춥고 집 주변에선 하수구 냄새가 진동했다.” 최근 서울 용산구의 한 옥탑방에 묵었던 외국인 관광객이 남긴 에어비앤비 후기다. 또 다른 후기에선 “경사가 짐을 끌고 오르기 힘들 정도다. 맞은편 집에서 당신이 보일지도 모른다”며 당혹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K드라마 주인공이 낭만적인 삶을 살던’ 옥탑방을 기대했거나 화려한 ‘루프톱 하우스’를 예상했다가 낭패를 본 기색이 역력하다. 한류 붐을 타고 한국 문화가 세계에 확산되면서 낳은 독특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최근 ‘한류문화사전’(이하 사전)을 발간한 이유 중엔 이런 오해를 막자는 의도도 담겼다. 표제어 443개를 선정했는데 한국 문화에 관심 깊은 외국인들이 다수 참여했다. 한국인인 우리는 당연하게 여기지만, 타인의 시선에선 흥미로운 문화는 뭐가 있을까. 사전에서 옥탑방은 ‘날씨에 민감하고 범죄 예방과 화재에 취약한 구조임에도 도시 속 낭만을 누리는 주거지로 묘사된다’고 설명했다. 집필자로 참여한 정헌목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류학전공 교수는 “드라마 등 콘텐츠에 등장하는 옥탑방은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서울의 야경을 누리는 듯한 ‘기분’을 제공하지만, 실은 열악한 주거 환경이란 사실을 은폐한다”고 했다. 블랙핑크 로제와 팝스타 브루노 마스가 부른 노래 ‘아파트(apt.)’로 관심을 모은 아파트도 마찬가지다. 사전은 ‘한국의 근대화가 낳은 독특한 산물로서 한국인의 욕망이 투영된 결과물’이라고 설명한다. 편찬 자문에 참여한 네덜란드 유튜버 바르트 판 헤뉘흐턴은 “모든 것을 갖추고 있어 떠나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 배타적인 공간”이라고 평했다.‘온수 매트’도 표제어로 등장했다. 외국에선 ‘드라마에서 배우가 바닥에 깔고 눕는데, 굉장히 아늑해 보인다’며 궁금해하기 때문이다. 표제어 선정에 참여한 한 외국인은 “한국 여행을 와서 온수 매트를 켜고 누웠을 때 온몸이 따듯해지는 느낌이 좋았다”며 “아마존에서 팔면 사고 싶다”고 했다. 사전은 ‘역사적으로 온수 매트는 한국의 온돌 난방에서 이동형으로 발전되어 개발된 취침용 매트로, 사실상 이동형 온돌’이라고 부연했다. 사전에 다수 등재된, 한국어에서 특히 발달한 맛에 관한 표현도 외국인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담백하다’는 개운하고 산뜻한 맛을 나타내는 형용사지만, 한국인은 매운탕이나 설렁탕도 지나치게 짜거나 기름지지 않으면 담백하다고 한다. 맛 표현이 사람에 대한 표현으로 확장하면 해석의 난도는 더 올라간다. 표제어 선정에 참여한 40대 외국인은 “싱거운 사람이란 대사가 드라마에 나오는데, 사람이 어떻게 싱거울 수 있냐”며 “한국어는 사람의 성격이나 행동을 묘사하는 표현이 다양한데, 특히 성격을 음식처럼 말하는 게 특이하다”고 했다. ‘시원하다’ ‘말아먹다’ 역시 마찬가지다. ‘밥 한번 먹자’가 “가까운 관계임을 표현하는 형식적인 인사”란 점도 독특하다.‘식당 앞치마’도 외국인에겐 굉장히 낯설다. K드라마를 보며 밥 먹을 때 왜 앞치마를 하는지 궁금해한다고 한다. 식당 앞치마는 고기를 굽거나 국물을 끓이기에 음식이 옷에 튈 염려가 많은 한국만의 문화다. 사전은 “한국의 독특한 외식 문화를 볼 수 있는 일면”이라고 했다. 이번 사전은 한국민속대백과 편찬 20주년을 기념해 마련된 특별판이다. 원고지 4600여 장 분량, 사진도 800장에 이른다. 민속학, 사회학 등 분야별 전문가 129명이 참여했다. 영어판 발간 등도 준비되고 있다. 장상훈 국립민속박물관장은 “사전이 ‘한국 문화 바로 알기’의 길잡이로 국내외에서 널리 활용되길 기대한다”고 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5-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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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군 침략에도 백성 먹여 살린 산림천택”

    “찰방(察訪·역참 담당 관리)은 사람을 불러다 꿩을 잡게 했다. 마침 산 중턱에 큰 노루가 풀 속에 자고 있었는데, 활 한 방으로 가슴을 뚫어 쓰러뜨렸다. 바로 잡아서 간은 날로 먹고 고기는 구워 두고 점심으로 먹었다.” 조선 중기 오희문(1539∼1613)의 일기 ‘쇄미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팔자 좋은 양반이 사냥 나들이라도 나선 것 같지만, 이 글이 쓰인 때는 임진왜란이 이어지던 1593년 4월로 오희문은 피란 중이었다. 그는 일기에 “굶주림이 점점 심해져 백성이 날마다 굶어 죽는다”며 “나도 머지않아 구렁을 메우겠지”라고 쓰기도 했다. 오희문 일가는 살아남기 위해 틈만 나면 물고기를 잡고, 꿩을 사냥하고, 나물을 뜯었다. 전란으로 농토에서 유리된 이들에게 누구의 소유도 아닌 산과 개천이 생존의 토대가 됐던 것이다. 오항녕 전주대 대학원 사학과 교수는 17일 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가 주최한 학술대회 발표문 ‘일상과 피난, 그리고 공유지’에서 조선의 공유지인 산과 숲, 개천, 연못 등 이른바 ‘산림천택(山林川澤)’의 가치를 쇄미록을 통해 들여다봤다. 오 교수는 동아일보와 전화 인터뷰에서 “특히 전쟁이 발발한 1592년에 기아가 심각했는데, 산림천택에 기대 목숨을 부지한 이들이 이듬해 농사를 짓고 의병에도 참여하면서 왜군에 반격을 가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오 교수가 쇄미록에 주목한 건 들판에서 소에게 풀을 뜯기거나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는 등 공유지에서 이뤄진 경제 활동이 통상의 사료엔 거의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전세(田稅)와 공물을 전세화한 대동세(大同稅)의 비율이 1 대 3인 것으로 미뤄 국가의 입장에서 공유지인 산림천택과 텃밭이 백성의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전답의 3배에 이른다고 봤다. 오 교수는 “전란이 아닌 평시에도 공유지는 조선 사람들의 일상을 유지하는 바탕이 됐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왕조시대엔 모든 땅이 왕토(王土)라는 관념이 있었지만, 산림천택은 왕도 사사로이 가질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관리에게 나눠줄 토지가 부족해지면 개간을 전제로 공유지를 떼어주기도 했다. 광해군 대에 들어서는 내수사(內需司·왕실 재산 관리 관청) 등의 공유지 침탈이 잦았다. 오 교수는 “조선은 인조 이후 침탈을 제어하고 숙종 때는 제한하는 등 공유지를 보호했다”며 “귀족과 국왕이 공유지를 차지한 영국의 인클로저 운동과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기존 조선의 경제 활동 연구는 사적 소유의 발달에 초점을 두고 이뤄졌기에 ‘유교 국가의 사회 안전망’이었던 공유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산림천택 같은 사회 안전망은 오늘날에도 필요하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5-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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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란에 굶주린 조선 백성들, 산·개천에 기대 목숨 부지”

    “찰방(察訪)은 사람을 불러다 꿩을 잡게 했다. 마침 산 중턱에 큰 노루가 풀 속에 자고 있었는데, 활 한 방으로 가슴을 뚫어 쓰러뜨렸다. 바로 잡아서 간은 날로 먹고 고기는 구워 두고 점심으로 먹었다.”조선 중기 양반 오희문(1539~1613)의 일기 ‘쇄미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팔자 좋은 양반이 사냥 나들이라도 나선 것 같지만 이 글이 쓰인 때는 임진왜란 중인 1593년 4월로 오희문은 피란 중이었다. 그는 일기에 “굶주림이 점점 심해져 백성이 날마다 굶어 죽는다. 나도 머지않아 구렁을 메우겠지”라고 쓰기도 했다. 오희문 일가는 살아남기 위해 틈만 나면 물고기를 잡고, 꿩을 사냥하고, 나물을 뜯었다. 전란으로 농토에서 유리된 이들에게 누구의 소유도 아닌 산과 개천이 생존의 토대가 됐던 것이다.오항녕 전주대 대학원 사학과 교수는 17일 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 주최 학술대회 발표문 ‘일상과 피난, 그리고 공유지’에서 조선의 공유지였던 산과 숲, 개천, 연못 등 이른바 ‘산림천택(山林川澤)’의 가치를 쇄미록을 통해 들여다봤다. 오 교수는 전화 통화에서 “특히 전쟁이 발발한 1592년의 기아가 심각했는데, 산림천택에 기대 목숨을 부지한 이들이 이듬해 농사를 짓고 의병도 참여하면서 왜군에 반격을 가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오 교수가 쇄미록에 주목한 건 들판에서 소에게 풀을 뜯기거나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는 등 공유지에서 이뤄진 경제 활동이 통상의 사료엔 거의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전세(田稅)와 공물을 전세화한 대동세(大同稅)의 비율이 1대 3인 것으로 미뤄 국가의 입장에서 공유지인 산림천택과 텃밭이 백성의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전답의 3배에 이른다고 봤다. 오 교수는 “전란이 아닌 평시에도 공유지는 조선 사람들의 일상의 삶을 유지하는 기반이 됐을 것”이라고 강조했다.왕조시대엔 모든 곳이 왕토(王土)라는 관념이 있었지만 산림천택은 왕도 사사로이 가질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관리에게 나눠줄 토지가 부족해지면 개간을 전제로 공유지를 떼어주기도 했다. 광해군 대에 들어서는 내수사(內需司·왕실 재산 관리 관청) 등의 공유지 침탈이 잦았다. 오 교수는 “조선은 인조 이후 침탈을 제어하고 숙종 때는 제한하는 등 공유지를 보호했다”며 “귀족과 국왕이 공유지를 차지한 영국의 인클로저 운동과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기존 조선의 경제 활동 연구는 사적 소유의 발달에 초점을 두고 이뤄졌기에 ‘유교 사회의 사회 안전망’이었던 공유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오늘날에도 산림천택 같은 안전망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5-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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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첫 노벨 과학상 반길 수 없었던 중국

    서양의 해부학이 중국에 소개됐을 때, 무엇보다 ‘뇌가 인간의 지각과 사고를 담당한다’는 생각이 주목받았다고 한다. 기존 중국적 관념에선 사유 기관으로서의 ‘심(心)’과 생명의 중심으로서의 ‘심장’을 하나로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장 따로, 마음 따로’라면 인간은 육체와 정신으로 영역이 나뉘게 된다. 이는 한의학의 토대는 물론, ‘심’을 인간 본성의 근원으로 여기는 성리학 전체를 위협하는 것이었다.서양 과학의 도입부터 최근까지의 중국의 ‘과학’에 관해 다각적으로 조명한 책이다. 과학 도입 초기 중국에서 ‘사이언스(science)’는 ‘새인사(賽因斯)’로 음역됐다. ‘새(賽)선생’은 ‘덕(德)선생’(democracy)과 함께 ‘민주’와 ‘과학’을 추구한 1919년 중국 5·4운동의 주요 구호가 됐다. 과학이 ‘공(孔) 선생’(공자)의 지위를 대체하기 시작한 것이다.오늘날 중국의 과학굴기도 다룬다. 2015년 중국의 투유유 교수가 말라리아 치료제를 개발한 공로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중국 본토 과학자가 순수하게 중국 내에서 연구한 업적으로 노벨 과학상을 수상한 건 처음이었다. 문제는 그의 연구가 절정에 달했던 때가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 1970년대였다는 점. 그는 국가 지원이나 연구 환경이 열악한 상황에서 개인의 의지와 역량만으로 뛰어난 결과를 냈다. 과학 연구에서 제도와 체제를 중시하며 집단 연구를 장려하던 중국 정부로선 그의 수상을 마냥 반길 수만은 없었다고 한다. 풍부한 도판이 이해를 돕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5-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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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조종엽]광복 80주년에도 갇혀있는 야스쿠니신사의 ‘죄수’들

    林茂雄(임무웅), 沈相鳳(심상봉), 石岡俊植(석강준식), 海本順玉(해본순옥), 豊原匡雄(풍원광웅)…. 모두 태평양전쟁 당시인 1945년 2, 3월 이오지마(硫黄島) 전투에서 숨진 조선인들의 이름이다.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된 이들의 사망 사유는 ‘옥쇄(玉碎)’로 기록됐다. 사망 당시 나이는 대부분 20대 초중반이고, 18세도 있었다. 다른 민족의 침략전쟁에 강압과 회유로 끌려가 목숨까지 잃어야 했던 청년들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한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80년이 흘렀음에도 고인들은 여전히 야스쿠니(靖國)신사에 붙잡혀 있다. 조선인 군인과 군속은 이오지마에 최소한 200명이 있었는데, 사망한 137명 중 군인 22명은 모두가 나중에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됐다. 영(靈)이란 것이 있다면 납득할 수 있을까. 생전 자신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미명 그대로 “천황을 위해 기쁘게 죽은” 이들의 일부가 돼 있다는 걸…. 야스쿠니신사 한국인 무단 합사 철회를 요구하는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들의 소송이 17일 또 최종 기각됐다. 이 신사에 한국인 2만여 명이 합사돼 있다는 걸 알게 된 유족들은 2001, 2007년 일본 법원에 합사 철회 소송을 냈지만 기각됐다. 2013년 유족 27명이 낸 세 번째 소송마저 이날 일본 최고재판소(우리의 대법원)에서 최종 패소한 것이다. 유족들은 “침략전쟁의 정신적 지주, 침략자들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에 내 아버지와 형제를 합사한 것은 우롱과 모욕일 뿐”이라며 합사 철회를 요구했다. “아들마저 일본한테 빼앗겼다고 울부짖던 할머니 모습이 생생합니다. 어째서 제 아버지를 일본을 위해서, ‘천황’을 위해서 죽은 사람으로 취급합니까.”(육군 군속으로 동원돼 팔라우에서 숨진 이낙호 씨 아들 명구 씨) “가족들이 멀쩡히 살아 있는데 사망했다는 것도 알려주지 않고 합사하겠다고 묻지도 않았다니 말이 됩니까. 지금도 식민지 시대입니까.”(해군 군속으로 동원돼 북태평양에서 숨진 동선홍 씨 아들 정남 씨) 일본 법원은 “타자의 신앙 행위에 대해 관용적이어야 한다”는 이유로 청구를 기각해 왔다. 역사의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관용’을 요구한 것이다. ‘합사 대상자의 이름이 외부에 공표되지 않아 명예가 훼손됐다고 볼 수 없다’고도 했고, 이번엔 ‘국가가 전몰자 명부를 제공한 것이 위법하지 않다’는 결론까지 냈다. 핵심을 피해 가면서 유족의 억장을 무너뜨리는 소리다. 일본 측은 최소한의 일관성도 없었다. 앞서 일본 법원은 합사된 조선인들이 ‘일본인으로서 죽었다’는 야스쿠니신사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한국인에겐 유족 원호금을 지급한 적이 없다. ‘전후 일본 국적을 잃었다’는 이유다. ‘시베리아 포로’ 보상금에서도 한국인과 대만인은 제외했다. 유골 수습 문제도 ‘나 몰라라’ 회피했다. 한국인이 자기들 좋을 때만 일본인이 될 수 있나. 침략전쟁의 중핵이었던 야스쿠니신사에 식민지 출신 사망자를 합사해 놓고 있는 건 일본이 여전히 잘못된 과거와 단절하지 못했다는 걸 보여준다. 다카하시 데쓰야 도쿄대 명예교수는 합사된 이들을 두고 “영령이란 이름의 수인(囚人)”이라고 했다. 올해는 한일 수교 60주년이다. 일본이 한 걸음이라도 미래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이들을 야스쿠니라는 감옥에서 풀어줘야 할 것이다.조종엽 문화부 차장 jjj@donga.com}

    • 2025-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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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인간이 지켜야 하는 것들의 역사

    중세 유럽의 ‘사치 금지법’은 인간의 욕망을 규칙으로 제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다. 관료들이 황금 레이스나 벨벳 장식 등의 착용을 금지하면 디자이너들은 이내 더욱 사치스러운 장식을 개발했다. 금지하는 속도가 유행이 변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지만 새로운 규칙은 끊임없이 발표됐다. 1294년 프랑스의 ‘사치 금지 조례’도 부르주아 계층이 흑담비 모피를 입는 것을 금지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조례는 오히려 출세하려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상류층을 흉내 낼 수 있는지에 관한 안내서처럼 쓰였다. 독일 막스 플랑크 과학사 연구소의 명예소장인 미국의 저명 과학사학자가 ‘규칙(rule)’의 역사를 탐구한 책이다. 측정 및 계산의 도구로서의 규칙(알고리즘), 따라야 할 모델로서의 규칙(패러다임), 사회 통제와 관련된 법률(법) 등 세 가지로 나눠 규칙의 이모저모를 살폈다. ‘규칙’의 ‘규(規)’ 자에 그림쇠(컴퍼스)라는 뜻이 있는 것처럼 규칙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 단어 ‘카논(kanon)’도 길이를 재는 도구인 ‘자’와 관계가 있다. 이 단어는 줄기가 꼿꼿해서 저울대나 막대 자로 쓰였던 식물 ‘물대’를 가리키는 셈족 언어에서 유래했다. 그래서 ‘카논’에선 수학적 정확성, 복제를 위한 모델, 법령 등 세 가지 의미가 파생됐다고 한다. 카논에 해당하는 고대 라틴어 단어 ‘레굴라(regula)’는 “유지하고 지시하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그래서 영어 단어 ‘ruler’도 ‘자’와 ‘통치자’라는 뜻을 모두 가지게 됐다. 저자는 규칙엔 예외가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규칙의 의미와 의의를 고찰하면서 시대를 가로지르며 철학과 과학, 역사 등 다양한 분야의 내용을 다룬다. 평범한 독자라면 꽤 어렵게 느낄 만한 대목이 적지 않다. 부제는 ‘규칙은 어떻게 세계를 만드는가’, 2022년 미 프린스턴대 출판 당시 원제목은 ‘Rules: A Short History of What We Live By’.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5-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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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꿈 사겠소” 조선시대 길몽 매매문서 공개

    조선 시대 길몽(吉夢)을 사고판 기록이 공개됐다. 한국국학진흥원은 순천 박씨 충청공파 문중과 진주 강씨 법전 문중이 기탁한 자료에서 ‘꿈 매매 문서’ 2점을 찾아냈다고 8일 밝혔다. 진흥원이 공개한 문서에 따르면 1814년 2월 대구에 사는 박기상은 청룡과 황룡이 웅장한 자태를 뽐내며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꿨고, 다음 달 3일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한양으로 떠나는 친척 아우 박용혁에게 이 꿈 이야기를 들려주고 팔았다. 문서(사진)엔 ‘매몽주(買夢主·꿈을 산 사람)’ 박용혁이 급제 후 관직에 오르면 ‘몽주(夢主·꿈 주인)’ 박기상에게 1000냥을 주기로 했다고 적었다. 두 사람이 수결(手決)했고, 친척 2명이 증인으로 참석했다. 1840년 2월 경북 봉화에 사는 진주 강씨 집안의 여자 하인 신씨는 청룡과 황룡이 서로 엉켜 있는 꿈을 꾸고는 주인의 친척 동생인 강만에게 청홍백 삼색실을 받고 꿈을 팔았다. 문서엔 몽주인 ‘반비(班婢) 신(辛)’과 증인으로 나선 남편 박충금의 수결이 있다. 정종섭 국학진흥원장은 “길몽을 사고파는 일은 오늘날에도 친숙한 습속”이라며 “일반적으로 구두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꿈 매매 문서는 매우 희귀한 자료”라고 밝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5-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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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요 초대석]“지성과 윤리에 어긋나는 종교적 직관, 더 빨리 파멸에 이를 뿐”

    《12·3 불법 계엄은 ‘비선’으로 지목된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이 점집을 운영한 것으로 확인돼 더 큰 충격을 줬다. 이전에도 윤석열 대통령 부부는 주변의 무속인들이 대통령실 용산 이전이나 공천 등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아 왔다. 권력 주변뿐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최근 무속의 영향력이 이전에 비해 강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비교종교학과 신비주의 전문가인 성해영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57)를 2일 만나 한국의 샤머니즘과 종교적 특징에 관해 물었다. 성 교수는 “종교적 직관 역시 이기심을 벗어나 공공성과 공적 이익을 위해 쓰여야 한다”며 “지성과 윤리를 동반하지 않으면 파멸로 귀결될 뿐”이라고 강조했다.》―최고 권력자와 정치 행위가 무속인의 점사(占辭)와 관련됐다는 의혹이 제기돼 왔다.“샤머니즘은 굉장히 원초적이고 가장 오래된 종교라고 할 수 있고, 정치와 종교는 과거에도 긴밀하게 결합했던 게 사실이다. 좋고 나쁜 걸 가르는 관건은 무엇을 지향하는가에 있다. 종교든 무속이든 공공의 선을 위해서가 아니라 개인적 이기심이나 사적 욕망 충족에 쓰이면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윤 대통령 부부 주변에 무슨 ‘도사’니 ‘법사’, ‘보살’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그들이 만약 자그마한 직관의 능력을 갖고 있었다고 가정하더라도 지적, 윤리적으로 훌륭했다면 그런 식으로 썼겠나. 종교적 직관이 발달한 사람이 지성과 윤리 영역에서 어긋나 있으면 오히려 더 위험하고 더 빨리 스스로 파멸에 이르게 된다. 또한 고위공직자는 평범한 개인과는 요구되는 공공성의 정도가 다르다. 국사(國事)에 무속이 개입됐다는 얘기가 이렇게까지 많이 나온 적이 있나 싶다.”―‘도사’들이 정작 사태가 이렇게 될 것을 몰랐다. 종교에선 미래 예측을 어떻게 바라보는지.“(기독교, 불교 등) 큰 종교의 교리에도 미래 인류 역사에 대한 예측이 담겨 있긴 하다. 그러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종교적 전통은 행동과 무관하게 개인의 미래가 결정돼 있다고 보지 않는다. 붓다는 ‘너의 미래를 알고 싶으면 너의 현재와 과거를 보라’고 했다. 과거의 흐름, 지금 하는 일이 미래를 만들어 낼 것이라는 얘기다. 성경에서 ‘뿌린 대로 거두리라’는 것도 같은 뜻이다. 누군가에게 미래에 대한 직관이 있다고 해도, 어렴풋할 뿐 명확하고 완벽한 형태로 보이는 건 아니라고들 한다.”―새해를 맞아 점을 보려는 이들이 꽤 있다.“점 보는 것 자체를 두고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 만약 어느 무속인이 ‘무슨 달에 안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했다고 치자. 언행을 조심하면 되고, 설령 나쁜 일이 닥친다 해도 마음의 준비를 잘하면 자신이 성숙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당이 부적을 사라거나 굿을 하라고 한다? 당연히 피해야 한다. 샤먼도 제대로 된 이들은 끊임없이 수행해서 맑은 사람이 돼야 무업(巫業)을 계속할 수 있다고 한다. 사(邪)가 끼어서 돈을 벌거나 유명해지거나 누구를 해코지하는 게 목적인 무당은 소위 ‘영빨’이 떨어진다고 한다. 이기심이나 개인의 욕심을 위해 혹세무민하려는 사람이 얼마나 오래 가겠나.”―‘내 말만 따르면 된다’는 무당도 있는데….“예수도 십자가 위에서 죽음 직전 회개한 강도는 구원했지만 그러지 않은 강도는 구하지 못했다. 붓다는 누군가가 많은 재물과 음식으로 천도재를 지내며 망자를 좋은 곳으로 보내 달라고 하자 ‘너희는 나무를 가라앉게 하고, 쇠를 뜨게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자기의 업(業)은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는 얘기다. 하물며 샤먼이 누군가의 삶을 책임질 수 있겠는가. 큰 종교인들이 항상 강조하는 덕목이 겸손이다. 섭리든 신의 뜻이든 미래든 개인의 삶이든 특정한 누군가가 모두 이해하거나 결정할 순 없다고 말한다.”―샤머니즘과 종교는 무엇으로 구분되나.“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고 인간의 궁극적 삶의 의미는 보이지 않는 차원과의 통합적 관계에서 나온다고 본다는 점에서 종교는 샤머니즘과 연속성이 있다. 하지만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궁금해서 점집에 가지,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찾기 위해서 가는 사람은 없다. 세계적 종교는 종교적 직관으로 알게 된 존재를 지성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며, 그 통찰을 가지고 타인과 어떻게 함께 살지를 윤리적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샤머니즘과 큰 차이가 있다.”―종교 신비주의와는 통하는 구석이 있지 않나.“의식이 변형된 상태에서 보이지 않는 차원의 직접 체험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선 상통한다. 하지만 샤먼이 거기서 그치는 데 비해 신비주의는 존재의 근본적, 궁극적 원천 혹은 실재와 하나가 돼 자신과 세계에 대한 직관적 통찰을 얻으려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런 차원의 샤머니즘은 아메리카 원주민 정도를 제외하면 찾기 어렵다.”―요즘 한국에서 샤머니즘이 전보다 더 확산했다는 의견도 있다.“원래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등 세계 종교가 강한 나라에선 샤먼이 사라진다. 세계 종교가 센데 무속도 강한 한국은 굉장히 특이한 사례다. 한데 최근 제도화된 종교가 약화했다. 점술가가 주인공인 프로그램은 십수 년 전이라면 종교인들의 항의에 지상파에서 방영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무속이 개인의 삶에 직접 다가가면서 과거 종교가 해주던 역할을 일부 대신해주고 있다. 젊은층의 실용주의적 태도도 한 원인이다. 젊을수록 무종교인이 많은데, 이들은 샤머니즘을 전통적 종교의 세계관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또 샤먼의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등 제도적 종교가 따라가지 못하는 방식으로 기동성 있게 사람들 사이로 파고드는 것도 한 이유다.”―한국인 중 무종교인이 60%에 이른다는데….“그렇다고 그 60%가 모두 유물론자냐면 또 그렇지 않다. 무종교인 가운데 8, 9할은 종교인은 아니어도 종교적 세계관을 갖고 있다고 본다. 기존엔 종교성이 제도화되고 조직화된 종교를 통해서만 구현됐지만 20세기 들어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진 않다’는 이들이 생겨났다. 특정 종교에 소속된 신도는 아니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더 큰 차원을 인식하고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줄 수 있다고 받아들이는 이들이다.”―종교와 영성이 꼭 같지는 않다는 뜻인가.“우리나라도 불자는 주는데, 템플스테이하는 사람은 늘지 않나. 가톨릭 성지인 산티아고 길을 순례하는 사람의 절반 이상은 천주교인이 아니다. 명상이 기존 종교의 맥락을 벗어나 확산하는 것도 요즘 시대의 특징이다.”―미래엔 과학의 발전과 함께 종교의 영역이 더 축소되지 않을까.“인공지능(AI)이 사람의 역할 중 많은 것을 대체한다고 가정해 보자. 사람은 유물론으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와 마음의 깊은 차원들을 발견하고 체험하는 데 더욱 집중하지 않을까. 과거엔 소수의 사람만 종교적 수행이 가능했다면 미래엔 누구나 영성을 추구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종교 간의 벽도 오늘날보다 낮아질 가능성이 있다.”―한국인의 종교적 특징은….“인간이 수행 등을 통해 깨달음 같은 비범한 종교적 체험을 하고 존재가 근본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생각을 굉장히 널리 받아들인다. 이런 경향은 세계적으로도 매우 이례적이다. 일부 종교에선 궁극적 실재와 인간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게 굉장히 위험한 주장이다.”―더 설명한다면….“한국인은 신기(神氣)가 강하다. 굿판이 벌어지면 참여자들이 집단적 엑스터시 상태에 이른다. 교회의 부흥회도 흑인과 한국인이 가장 열정적이라고 하지 않나.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음주가무’ 기록에서부터 오늘날 BTS까지, 신명 나게 노는 것도 너무 잘한다. 신기만으론 문화를 발전시키기가 어려운데 문기(文氣)도 강하다. 한쪽이 세면 한쪽이 약하게 마련인데 우리는 둘 다 세다. 팔만대장경을 만들었고, 유교 이념으로 조선 500년을 운영했다. 중국에서도 그렇게 세게 못 했다. 단군 신화부터가 천손이 강림해서 정치와 종교의 이상,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를 실행하려고 한 것 아닌가.”―그래서 갖게 된 정신적 특성이 있다면….“신기와 문기는 모두 현실의 삶과 맥락을 넘어서는 걸 지향한다. 지상의 질서를 벗어나 이상으로 나아가게 한다. 한국인만큼 개인과 공동체에 대해 높은 이상을 가진 이들도 드물다. 그래서 타협이 잘 안 되고, 갈등도 심하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이 큰 탓에 굉장히 고통스럽다는 뜻이기도 하다.”―작금의 정치 상황을 어떻게 보나.“개인의 삶도 사건이 일어난 당시엔 모르지만 나이를 먹은 뒤 더 큰 의미의 틀에서 통합이 된다. 우리 현대사가 식민지배를 겪고 외부에서 들어온 이데올로기와 관념 체계가 극단적으로 충돌하면서 분단까지 됐지만 나라가 망하진 않았다. 이번 계엄도 결국 실패했다. 억압돼 있던 트라우마가 감당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등장하는 것처럼 우리 내부의 부정적인 요소들이 분출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고통이라는 게 죽지만 않으면 인간을 성숙시키잖나. 한국이 온갖 갈등을 넘어 스스로의 세계사적 내러티브를 긍정적으로 완성할 것이라고 본다.”조종엽 문화부 차장 jjj@donga.com}

    • 2025-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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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모두가 싫어하는 이것, 알고보면 뜻밖의 보물

    ‘똥’은 본능적 혐오의 대상이다. 저자는 음성 파일을 텍스트로 바꾸는 인공지능 알고리즘마저도 ‘똥’과 같은 단어를 걸러낸다는 걸 깨닫는다. 유아도 똥은 싫어한다. 생후 2년 6개월만 돼도 음식을 두고 옆에서 ‘개똥’이라고 부르면 안 먹으려고 한다. 그런 똥이 ‘뜻밖의 보물’이라고 주장하는 책이다. 미국은 똥의 22%를 땅에 매립한다. 매립지에선 빗물이 스며들면서 고농도 유기화합물이 침출돼 주변의 토양과 물을 오염시킨다. 사람의 장(臟) 속에서 방귀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가스를 방출하기도 한다. 2019년 미국에서 인간과 관련된 모든 메탄가스 배출량의 15%가 고형폐기물 매립지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이렇게 나오는 가스는 대강 태워 없애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포집해 정제하면 에너지로 쓸 수 있다. 요리와 산업, 운송용 연료로 쓰면서 화석연료를 대체할 수도 있다. 남은 분뇨 슬러지 역시 ‘바이오숯’이란 연료로 바꾸면 삼림 벌채를 늦추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똥엔 영양분이 많다. 아프리카 케냐 나이로비에 본사를 둔 한 회사는 주민들의 똥을 수거해 활용한다. 배설물을 음식물 쓰레기와 혼합해 사료용 곤충인 ‘아메리카동애등에’ 유충에게 먹여 키우는 것이다. 이 유충은 몸무게의 40% 이상이 단백질이어서 동물 사료 보충제의 좋은 원료가 된다. 또한 물고기 먹이로도 쓸 수 있다. 최근엔 공공연히 인분을 처리해 퇴비로 쓰는 미국 도시가 늘고 있는데, 과거 똥거름을 썼던 한국에선 ‘오래된 미래’라고 할 수 있다. 의학 치료 목적으로 다른 사람의 똥을 장에 주입하기도 한다. ‘대변 미생물총이식’(FMT)이라고 부르는데, 항생제 치료가 어려운 특정 박테리아 감염을 치료하고자 장에 이로운 박테리아를 똥으로 직접 이식하는 방식이다. 요즘엔 삼중 코팅된 알약을 삼키면 된다고 한다. 이 밖에도 생태계 순환에서 똥의 역할, 똥에 대한 혐오감의 역사·문화적 배경, 건강의 지표와 질병 추적의 도구로서 똥의 가치 등을 책은 소개한다. 저자는 “지구를 지배하는 거대 동물로서 인간은 자연의 순환과 일치하는 가치의 순환을 복원할 책임이 있다”며 “똥은 그런 변화의 시작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했다.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 2025-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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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조종엽]머스크 “미국엔 과학기술 인재가 없다”

    “미국 문화는 너무 오래 탁월함보다 평범함을 중시해 왔다. …수학 올림피아드 챔피언보다 졸업 파티 여왕을, 졸업생 대표보다 운동 선수를 더 대단하게 보는 문화에선 최고의 엔지니어가 탄생하지 못한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와 함께 미국 정부효율부 수장에 지명된 기업가 출신의 비벡 라마스와미가 27일 미국의 인재 육성 문화를 비판했다. 그는 X(옛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대부분의 미국 부모는 (수학 과학 공부를 많이 시키는) 이민자 부모를 부정적으로 보고, 평범한 미국 아이들은 그런 아이들을 비웃는다”며 “(이런 식이면) 우리는 중국에 엉덩이를 걷어차이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일론 머스크 역시 미국 기업이 외국인 엔지니어를 고용할 수밖에 없다면서 “미국에는 재능이 매우 뛰어나면서 동시에 의욕이 넘치는 엔지니어가 너무 적다”고 X에 썼다. “그들(미국 기업)이 필요로 하는 전문 지식(을 갖춘 사람)이 미국에 충분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이 이 정도라니, 최근 글로벌 기술 패권 다툼 속 인재 확보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지 새삼 느껴진다. ▷두 사람은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 인공지능(AI) 수석정책고문으로 지명된 인도계 IT 전문가 스리람 크리슈난을 지원 사격하는 차원에서 해당 글을 썼다. 크리슈난은 앞서 해외 고급 두뇌들에겐 제한 없이 미국 영주권을 발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를 두고 극우 활동가 로라 루머가 “미국 학생들에게 돌아가야 할 일자리를 빼앗는 것”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고급 인력 도입 문제를 놓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기존 지지층과 머스크 등 빅테크 인사가 충돌한 모양새다. ▷미국은 경제에 이민자와 외국인의 기여가 어마어마하다. 1990∼2010년 미국 총생산성 향상의 30∼50%는 외국에서 온 과학, 기술, 공학, 수학(STEM) 근로자의 덕으로 설명된다는 분석이 있다. 미국정책재단(NFAP)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 상위 AI 기업 43곳 가운데 28곳이 이민자가 공동 설립한 회사이고, AI 관련 대학원생의 70%가 유학생이다. 프로그래머 등 전문직 취업 비자(H1B)로 외국인을 가장 많이 채용하는 회사는 아마존이고, 구글 메타 애플 IBM 등이 모두 상위 10위 안에 든다. ▷트럼프 진영 내 알력보단 우리 실정이 걱정이다. 수학 올림피아드 챔피언보다 ‘의대 합격’을 대단하게 생각하는 판국이니 부족한 STEM 인재를 해외에서라도 모셔와야 한다. 그러나 외국인 취업자가 100만 명이 넘어도 고급 인력의 비중은 미미한 게 사실이다. 한국을 글로벌 인재들이 일하고 싶은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으로 미국 시민권을 얻기 전 H1B 비자로 지내다가 세계 1위 기업을 만든 머스크 같은 사례가 우리에겐 불가능하다고 미리 한계를 지을 이유가 없다.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 2024-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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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요 초대석]“비상계엄, ‘공격성’이 부메랑처럼 돌아온 자기 파괴적 행위”

    《3일 밤 국회에 무장 군인이 들이닥치는 비현실적인 광경에 적지 않은 국민들이 불안에 시달렸다. 반헌법적 비상계엄이 준비되고 실행된 정황이 속속 드러나면서 분노도 확산되고 있다. 이렇게 받은 충격은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 과거의 것이 된 줄로만 알았던 ‘내란’이나 ‘대통령 탄핵’ 같은 단어를 우리 사회가 다시금 마주하는 데엔 무의식적 배경이 있지 않을까. 국제정신분석협회가 인증한 국내 최초의 정신분석가 정도언 서울대 명예교수(73)를 19일 만났다. 정 교수는 “분노를 추스르고 이번 사태를 우리 사회가 도약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국민의 충격이 컸습니다. ‘계엄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라는 말까지 나옵니다. “저는 3일 밤 일찍 자고 다음 날 일어나니 계엄이 일어나고 해제까지 돼 있더군요. 국민이 균일한 집단이 아니니 받아들이는 것도 달랐을 겁니다. 앞선 험난한 세월을 겪은 세대는 충격보다는 ‘안타깝다, 어리석다’는 기분이 더 크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진입하던 시대에 태어난 세대가 더 놀랐을 것이라고 봅니다.” ―‘탄핵 촉구’ 집회에선 케이팝이 불리고 응원봉이 등장했습니다. “일상에서 상상하지 못했던 이번 사태를 만나 적지 않은 이들이 불안과 분노를 겪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집회 현장을 콘서트장 같은 축제로 만들어 놀이의 형식으로 승화시키며 현명하게 충격을 극복해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이 위기를 대처하는 역량과 우리 민주주의의 밝은 미래를 확인하게 됩니다. 만약 그 분노의 에너지가 미국이나 프랑스의 시위처럼 폭력적인 방식으로 이어졌다면 우리 사회가 감당해야 할 정신적 외상의 양이 늘어나게 됐을 겁니다. 집회를 보며 저는 우리 전통문화, ‘탈춤의 해학’을 떠올렸습니다. ‘놀이’는 정신분석에서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놀 줄 모르는 사람은 변화할 수 없습니다.” ―정치적 긴장이 지속되면 국민의 정신건강엔 어떤 영향이 있을까요. “우울, 불면 같은 증상이 늘어날 가능성이 큽니다. 급성보다 만성 스트레스가 건강에 훨씬 더 해롭습니다. 정치인들이 빨리 해결을 해줘야 하는데, 오히려 그 긴장 상태를 증폭하고 만성화하는 쪽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비상계엄을 선포한 윤석열 대통령의 심리는 무엇일까요. “피분석자로 경험한 바가 없으니 대단히 조심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정신분석 이론으로 일반적인 해석을 한다면, 특정 직역에서 오래 일했던 경험에서 벗어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지난 직역(검사)에서 굳어진 판단, 행동 방식과 세상을 읽어내는 패턴이 직역과 역할이 (대통령으로) 달라진 후에도 그대로 옮겨와서 표현됐을 가능성을 짐작할 수는 있겠습니다. 이를 정신분석에서는 ‘전이(轉移) 현상’이라고 하며 정신분석이 아닌 인간관계, 사회 현상에서도 흔히 일어납니다. ‘위반자는 처단한다’는 계엄 포고령도 그런 맥락으로 읽힙니다.” ―그래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잘 안되는 면이 있습니다. “공격성은 정신분석에서 다루는 심리 현상 중에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정신의 역동(力動)으로 살펴보면 자살과 타살은 공격성의 관점에서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봅니다. 적을 공격하다가 그 공격성이 방향을 바꿔서 자신을 향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자기 파괴적 행위를 하게 됩니다. 무기를 던졌는데 다른 사람을 죽이면 타살이고 부메랑처럼 돌아와 자기가 맞으면 자살이 되는 거지요. 딱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한국은 정치 갈등이 유난히 거센 것 같습니다. “냉소적으로 들릴 수는 있겠으나 정치인에 대한 기대가 지나친 측면도 있습니다. 영국 정신분석학자 도널드 위니컷(1896∼1971)은 좋은 어머니는 완벽한 어머니가 아니라 ‘대충 괜찮은 어머니(good-enough mother)’라고 했습니다. 국민과 정치 지도자의 관계도 마찬가지인데, 현실에선 불가능한 완벽한 지도자를 꿈꾸면 낙망(落望)과 좌절을 너무 일찍, 너무 세게 느끼게 됩니다. ‘완벽한 지도자’는 환상일 뿐입니다. 심리적 거리를 적절하게 지키면서 객관적으로 ‘대충 괜찮은 지도자’를 양성하고 선택하려 하는 것이 현실적인 판단과 행동이 될 것입니다.” ―정치 지도자에 대한 기대와 열망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요. “지도자를 너무 이상화(理想化)하지 말자는 취지입니다. 어릴 적엔 ‘우리 부모가 세상에서 최고’라고 생각하지만 자라면서 결점도 알게 되고 탈(脫)이상화를 하는 게 정상적인 성장 과정입니다. 어른이 되어서까지 자신의 부모를 완벽하다고 이상화한다면 오히려 부모-자식 사이에 문제가 생깁니다. 만약 자신이 따르는 정치 지도자가 명백한 잘못을 해서 법과 시스템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생겼는데도 ‘무조건 지켜야 한다’고 생각된다면 안타깝고 고통스러워도 자신의 마음을 차분하게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정치적 양극단에서 감정적 반응과 공격이 격렬한 것 같습니다. “정신분석학의 개념으로 풀어보면 갓난아기의 마음에는 배고플 때 즉시 젖을 주는 ‘좋은 엄마’가 있고, 돌봐주지 않는 ‘나쁜 엄마’가 따로 있습니다. 그러다가 아기가 자라면서 따로 생각하던 두 사람의 엄마를 한 사람으로, ‘아, 한 엄마 속에 좋은 엄마와 나쁜 엄마가 같이 있구나’라고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통합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 아기는 어른이 돼도 세상을 흑(黑)과 백(白)으로 나누는 이분법적 세계관에 따라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사람들을 ‘아군 아니면 적’으로 나누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나 지지하는 지도자의 흠결은 못 보게 됩니다. 정신분석학에선 이러한 심리 기제를 ‘분열(splitting)’이라고 하는데,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다고 봅니다.” ―중간지대가 넓어야 좋다는 뜻인가요. “돌아가신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대한민국엔 회색분자가 많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회색조차도 짙고 묽은 정도가 수없이 다양한데, 흑백논리에 사로잡혀 회색 자체를 용납하지 않으니 싸울 수밖에 없는 세상이 됩니다. 선명하지 않으면 잘못인 것처럼 인식되는 것이 대한민국의 비극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치권이 마치 ‘흑백논리’가 선명하고 최선인 것처럼 최면을 걸어도 자신의 마음을 지키고 그 함정에 빠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집단주의 문화가 강한 탓일까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엄청나게 짧은 시간 안에 이뤘지만 심리적 측면에선 왕조시대의 집단주의에서 개인주의 사회로 넘어가질 못하고 있습니다. 사는 집에는 담장과 대문, 폐쇄회로(CC)TV를 설치하면서도 마음의 경계 침범은 쉽게 허용합니다. 그러니 ‘가짜 뉴스’나 선동에 휩쓸립니다. 사회적 갈등은 불가피한 것이지만 흑백논리에 휩쓸리면 우리가 지금껏 힘들여 쌓아 온 것들이 쉽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국방, 경제, 의료가 이미 무너지고 있잖습니까.” ―계엄군으로 투입된 이들도 정신적 외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군인은 명령을 따르도록 훈련된 이들입니다. 그럼에도 소극적으로 움직이면서 계엄의 실패를 유도한 이들이 대부분이잖아요. 외부의 비난이 있다면 멈춰야 합니다. 정신적 문제가 나타나는 이들에겐 국가가 전문적인 치료를 제대로 제공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갈등 문제를 풀기 위한 장기적 해법이 있다면…. “문해력 교육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문해력이 작가에게만 필요한 게 아닙니다. ‘자신의 세상을 읽고 쓰는 능력’은 모두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다양한 관점으로 읽을 수 있는 현상을 두고 극단적으로 분열하고 치열하게 싸우는 건 읽기가 제대로 안 되는 탓입니다. 또 상대방의 단점만 읽을 뿐 장점을 읽어내지 못하니까 합리적 통합 방안을 제안할 수 있는 여지가 없어집니다.” ―이번 사태를 도약의 기회로 삼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집단주의에 물들어 ‘투사’(投射·받아들일 수 없는 부정적인 생각 등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는 것)라는 방어기제를 사용하면서 ‘네 탓이다’, ‘누구누구 물러가라’만 외쳐선 우리가 진일보하기 어렵습니다. 양복 입은 정당인, 정치인들도 도포 입은 조선시대 당파들과 무엇으로 차별화할지를 심각하게 고민했으면 합니다. 이번 사태를 이기주의가 아닌 개인주의가 성장하는 발판으로 삼아야 합니다. 나와 생각이 달라도 상대를 억압하고 공격하기보다는 공동체 개념을 살리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시선을 안으로 돌려 자기 성찰을 하는 이들이 늘어야 시스템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고, 차세대 지도자도 그런 이들 사이에서 나와야 할 겁니다.” 정도언 서울대 명예교수·정신분석가△1976년 서울대 의과대학 졸△1985∼2017년 서울대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1999∼2003년 한국정신분석학회 회장△2004년∼ 국제정신분석협회 정회원△2009년∼ 미국정신분석협회 정회원△2009∼2017년국제정신분석협회 한국스터디그룹 창립회장△2021년 현대정신분석아카데미 공동 창립△저서: ‘프로이트의 의자’(2009년) 등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 2024-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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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가 만난 사람]“미국, 민주화 추구 ‘이상’과 안보 우선 ‘실리’ 오가는 야누스 같은 존재”

    《한국 현대 정치사 연구의 권위자이며 방대한 사료를 치밀하게 검토하는 학자로 정평이 나 있는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63)가 자신의 30년 연구를 응축한 책 ‘미국의 한국 정치 개입사 연구 1∼6’(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을 최근 완간했다. 1∼3권의 부제는 ‘박정희 제거 공작 편’, 4∼6권은 ‘전두환 제거 구상 편’이다. 경기 성남시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만난 이 교수는 “‘독재의 옹호자’나 ‘선한 후원자’라는 미국의 표상은 모두 한쪽에 치우친 허상에 불과하다”며 “미국은 어떨 때는 민주주의와 자유 인권이라는 이상을, 또 다른 때는 안보 유지라고 하는 현실을 중시하는 다면적 국가”라고 했다. 이 교수 인터뷰는 3일 낮 진행됐고, 최근 일어난 반헌법적 비상계엄 사태에 관해 5일 추가로 일부 관련 질문을 했다.》―커트 캠벨 미국 국무부 부장관은 4일 이번 계엄 사태를 두고 “매우 문제 있고 위법한 행동으로 예측할 수 없었다”며 “윤석열 대통령이 심하게 오판한 것 같다”고 했는데…. “상식적으로 미국 측이 계엄 시도를 미리 알았다면 윤 대통령을 말렸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미국 백악관은 “윤 대통령이 계엄을 해제하는 한국 국회의 표결을 존중한 것에 대해 안도한다”, “민주주의는 한미 동맹의 근간”이라고 했다. “미국이 1980년대식의 헌정 유린을 반기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지미 카터 대통령(재임 1977년 1월∼1981년 1월) 당시에도 미국은 동맹국 지도자의 반헌법적 조치로 안정이 손상될 것 같으면 지도자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교체를 고려했다.” ―과거 전두환 전 대통령도 친위 쿠데타를 계획했다고 책에서 밝혔다. “1986년 11월 직선제 개헌 요구가 거세지자 전두환이 장세동 안기부장에게 특명을 내려 계엄령을 준비했다. 11월 8일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한 뒤 밤 12시를 기해 국회 해산과 동시에 계엄을 선포할 계획이었다. 한데 11월 6∼8일 개스턴 시거 미국 국무부 차관보가 방한해 전두환과 야당 지도자들을 만난다. 시거 차관보는 ‘한국군이 병영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라고 했다.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간 정권이 종말을 맞을 것이라고 경고한 것이다. 미국이 친위 쿠데타를 막은 정황이 짙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국면에서 미국의 역할은…. “그해 2월 시거 차관보는 공개 연설에서 군부 지배를 문민화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전두환에게 7년 단임제 공약 실천을 압박하는 한편 개헌의 필요성을 지적했다. 다음 달 방한한 조지 슐츠 미국 국무장관이 군부정권 연장에 반대하지 않는 듯한 발언을 했지만 한국 국민의 저항에 직면하자 바로 정책을 뒤집었다. 군부독재를 지지하다간 반미주의가 확산할지도 모른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에 한국 정부에 민주화를 요구하고 군부의 개입을 강력히 반대했다.” ―미국은 전두환 정권을 비교적 일관되게 지지했다는 것이 통념인데…. “미국은 1979년 12·12사태의 주모자인 전두환 소장을 경원시했고, 신군부의 등장을 막으려 했다.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는 전두환의 예편을 요구했다. 1980년 초 신군부에 대항하는 역(逆)쿠데타 지원을 검토하고, 나아가 전두환을 암살하려고 했던 정황도 있다. 그러다 군(軍) 내 지지가 탄탄한 전두환을 건드려서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방침을 바꾼 것이다. 전두환은 김대중 사면과 맞바꿔 5공화국 출범 승인을 얻어냈는데, 만약 김대중을 죽였다면 권좌에서 물러나야 했을 것이다. 미국의 전두환 제거 구상은 1987년 6·29선언을 통해 우회적으로 달성됐다고 본다.” ―오랫동안 미국은 5·18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의 배후로 지목됐다. “신군부의 병력 이동을 묵인한 책임이 있는 건 맞다. 항쟁의 마지막 국면에서 당시 시민군 지도자 윤상원이 글라이스틴 대사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윤상원의 조정 능력을 믿지 못한 대사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대사는 미국이 한국인을 대신해 전두환을 막을 순 없다고 봤는데, 만약 중재 요청이 카터 대통령에게 보고됐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여지가 있다고 본다.” ―1979년 김재규의 박정희 대통령 살해에도 미국의 힘이 작용했나. “미국이 배후에서 김재규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본다. 10·26사태 한 달 전 글라이스틴 대사가 김재규를 만나 ‘정권 교체’를 논했다. 신호를 보낸 거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1999년 출간한 회고록에서 ‘미국은 자신들의 행동과 말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박 전 대통령의 몰락에 일조한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고 썼다. 미국 측 핵심 인사가 남길 수 있는 최대한의 고백이다.” ―미국이 박정희 정권을 몰락시키려고 한 까닭은…. “부마항쟁이 한 계기가 됐다. 미국은 민중봉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 북한의 남침을 불러일으킨다고 봤다. 한국이 공산주의에 넘어가면 일본이 위태롭고, 다음으로 하와이와 캘리포니아가 위태롭고, 워싱턴까지 도미노가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미국은 4·19나 6월 민주항쟁 당시에도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 민중의 편에 서서 민주화로 나아가도록 물꼬를 텄다. 미국의 대한 정책의 첫 번째 목표는 한국의 공산화를 막는 것이었지만 그런 면에서 한국민의 자유를 수호하고 민주주의를 후원했다고도 볼 수 있다.” ―한국의 민주화는 내부의 동력 덕이 아닌가. “그렇다. 힘의 원천은 한국민이다. 미국이 민주주의 편에 서지 않았다고 해도 지체됐을 뿐 민주화는 이뤄졌을 것이다. 다만 미국은 영향력을 행사해 배후에서 민주화를 앞당기는 한편 혁명적 열기가 온건한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향해 흐르도록 만들었다.” ―미국이 직접적 개입보다 은밀한 개입을 선호한 까닭은…. “노골적으로 개입했다가 민중들이 반미로 돌아서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카터 대통령이 우려했던 것도 한국이 ‘제2의 이란’이 되는 것이었다.” ―민주화 이후에도 한국 정치에 개입했나. “미국은 김영삼 대통령의 민족주의적 지향이 불편했다. 1997년 외환위기 발생 전 미국이 한국에 불과 몇억 달러를 지원해 돕지 않은 건 한국의 정권 교체를 유도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 뒤에도 역대 정권 교체 국면 등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엔 미국의 힘과 개입 정도가 과거에 비해 크게 약화되지 않았나. “미국의 절대적인 힘은 변화가 없는데, 한국의 힘이 성장하면서 상대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상하 관계에 가까웠던 동맹이 상호 의존 관계로 변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힘이 약해지면 상대적으로 주변국의 힘이 다시 강해지고, 19세기 말처럼 친중 친러 친일 등으로 분열하는 상황이 오지 말란 법이 없다.” ―앞으로의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는…. “38선을 그으며 소련과 함께 분단의 원인을 제공한 미국, 북한 남침을 후원한 소련을 계승한 러시아, 6·25전쟁 당시 멸망하던 북한을 구해준 중국, (한반도를 강점했던) 일본 등 분단을 만든 배후의 4강이 분단 체제 극복에 대체로 부정적이다. 미국과 중국이 ‘결자해지’해야 하는데 상호 갈등이 심화하고 있다. 평화 공존을 통해 장기적으로 통일로 가는 길을 열어야 한다. 한국이 미중과 남북미를 중재할 수 있는 리더십을 키워야 한다.” ―미국이 38선을 긋지 않았다면? “한반도가 통째로 소비에트연방에 편입되거나 폴란드처럼 위성국가가 됐다가 1991년에야 독립 또는 체제 전환을 했을 것이다. 해방 뒤 통일된 민족국가를 수립하는 게 최선이었겠지만 차선으로 반쪽에서라도 미국식 체제를 수립해 북한 같은 나라가 안 되게 만든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공헌이다.” ―미국의 한국 정치 개입이라는 주제를 어떻게 연구하게 됐나. “정치외교학과 79학번인데 감옥에 간 변혁주의자 친구들에게 책임감을 느꼈고, 1984년에 대학원에 들어갔다. 사회주의 체제를 대안으로 봤던 1980년대 현대사 연구는 미국을 비판적으로 보는 경향과 반미주의가 팽배했다. 우리 현대사가 민족해방(NL)파 친화적인 주제다. 하지만 1991년 소련 해체와 사회주의권 몰락을 계기로 미국을 현실 그대로 보자고 생각하게 됐다.” ―연구하며 입장이 바뀐 건가. “자주파에 공명하는 편이었는데, 현실을 보면 동맹파에서 배울 점이 있었다. 지금은 자주와 동맹의 대립을 지양하자는 주의다. 용미(用美)랄까. 미국의 정치 개입사를 밝혀 앞으로 우리 국익을 잘 챙기기 위한 교훈을 얻자는 목적으로 책을 썼다.” ―미국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 “진보 진영 일각에선 광주를 유혈 진압한 신군부의 편에서 민중이 피를 흘리게 만든 존재로 본다. 보수 일각에선 6·25전쟁에서 한국을 구하고 경제 성장을 도운 은인으로 본다. 하지만 미국은 마냥 선한 제국도 그렇다고 악당도 아니다. 국면에 따라 자국의 안보만 우선하기도 했지만 한국이 북한에 넘어갈 수 있다고 우려되면 민주주의의 편에 서기도 했다. 공산화 방지라는 현실적 목표를 위해 민주 인권 자유를 국면마다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유동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이 독재의 편이냐, 민주의 편이냐 하는 단선적 질문은 지양돼야 한다. 선악이 다 있는 야누스 같은 존재이고, 변화무쌍한 나라이므로 다이내믹하고 다층적인 시각으로 봐야 한다.”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 2024-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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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조종엽]“수업 중 컴퓨터 쓸 수 있게 하니 수업시간 40% 딴짓”

    “학생들에게 수업 중 컴퓨터를 쓸 수 있도록 허용했더니 수업 시간의 최대 40%까지 딴짓을 하더라.” 스웨덴 왕립 카롤린스카 의대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다양한 기관의 통계와 연구 결과를 종합 분석해 내놓은 ‘전국 학교 디지털화 전략 의견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노트북을 켠 학생은 켜지 않은 학생보다 수업 내용 질문에 대한 정답률도 30%가 낮았다. 디지털 도구가 주의력을 산만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컴퓨터를 많이 사용하는 나라는 수학과 독해 부문에서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 성적이 낮은 경향도 발견됐다. ▷의견서의 분석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컴퓨터로 필기하는 학생들은 종이와 펜을 사용하는 학생들보다 성적이 더 나빴다. 또 학생들에게 디지털 기기로 필요한 지식을 검색하도록 하면 깊이 있는 지식을 얻기보다 대강의 얕은 지식만 얻게 될 소지가 크다고 한다. 학생들이 콘텐츠를 종이가 아니라 화면으로 읽으면 기억을 잘 하지 못하는 현상이 관찰되기도 했다. 흥미 위주로 대강 줄거리만 파악하면 되는 웹 소설과 달리, 단어와 문장 하나하나를 음미하면서 읽어야 하는 한강 작가의 작품이 디지털 기기론 눈에 잘 안 들어오는 것이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한데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는 ‘인공지능(AI) 디지털 교과서’가 내년 초등학교 3·4학년과 중학교 1학년, 고등학교 1학년의 수학 영어 정보 수업에 전면 도입될 예정이다. 교육부는 이후 단계적으로 이를 다른 학년과 과목으로 확대할 방침이다. AI 교과서는 콘텐츠가 다양하고 기초, 심화 등 학생별 맞춤형 학습을 지원한다는 장점이 있다는 것이 교육부의 설명이다. ▷하지만 학부모들은 불안하다. 집에서도 쇼트폼 콘텐츠 등 스마트폰에 빠진 아이가 학교 수업마저 디지털 기기로 받으면 의존이 더 심각해질까 봐서다. 디지털 기기의 역사가 짧아 뇌와 어린이 청소년의 발달에 미치는 영향을 우리는 아직 정확히 모른다. 세계적으로도 디지털 교과서를 도입해 쓰는 곳은 독일과 미국의 일부 주(州) 등 소수다. 교실의 디지털 기기 사용을 의무화했던 핀란드는 유턴해 다시 종이책을 사용하고 있다. 문해력 저하 등 부작용이 있다는 평가 때문이다. ▷도입이 불과 4개월여 앞으로 다가왔는데, 아직도 AI 교과서 완성본이 공개되지 않은 점도 걱정을 키운다. 실물이 없으니 어떻게 가르칠지 아직도 감이 안 잡힌다고 말하는 교사들이 적지 않다. 구독료 등으로 2028년까지 4년 동안 2조∼7조 원의 적지 않은 예산이 들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교육부는 약 3년 동안은 기존의 서책형 교과서와 병용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부작용이 어른거리고 준비도 부족해 보이는 정책을 쫓기듯 서둘러야 하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 2024-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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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요 초대석]“많이 망해봐서일까요? 끝날 줄 알았는데, 다시 일어나더라고요”

    《“그때 거기서 어떤 늙은 남자를 봤어. 그건 바로 나였어. 그리고 난 나한테 닥칠 일이 아직도 남았다는 걸 깨달았지. 고통과 죽음.” 8일 개막하는 연극 ‘더 드레서’(서울 중구 정동극장)에서 노(老)배우인 ‘선생님(Sir)’ 역을 연기하는 송승환 씨(67·PMC프러덕션 예술총감독)는 이 대사가 무척 마음에 와닿았다고 했다. 송 씨가 8세 때인 1965년 KBS 라디오 프로그램 ‘은방울과 차돌이’로 데뷔한 지 59년이 지났다. 턱선이 살아 있었던 쇼 프로 ‘젊음의 행진’ 진행자(1981∼1984)는 이제 눈가에 주름이 잡혔고, 치아 임플란트가 필요한 나이가 됐다. 송 씨는 “앞으로도 고통과 죽음뿐 아니라 닥칠 일이 많겠지만 인생 3막은 노역(老役) 배우로 마무리하고 싶다”고 했다.》송 씨의 삶을 연극에 비한다면 인기 절정의 스타가 1985년 무작정 미국 뉴욕으로 떠나는 것에서 1막이 끝난다. 2막에서 그는 1997년 비언어극 ‘난타’를 성공시키고 2018년 평창 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을 맡으며 클라이맥스를 맞지만 갑작스레 망막색소변성증 등이 발병하며 시력을 대부분 잃는(시각장애 4급) 위기를 맞는다. 낙담해 움츠러들 법도 한데 송 씨는 다시 연극 무대에 서고 있다. 희곡 형식을 따온 이 인터뷰는 송 씨 인생의 3막 도입부에 해당한다.● 1장 “최악이라고 말할 수 있는 동안은 최악이 아니다”(‘리어왕’) [막이 열리면 1일 국군의 날 퍼레이드 직전의 소란함이 전해지는 정동극장 옥상이다. 사진기자가 송 씨의 모습을 여러 차례 촬영한 뒤 턱에 손을 가져다 댄 동작을 시연하며 “이렇게 하고 끝내자”고 말한다. 송 씨는 동작을 보지 못해 ‘바로 촬영을 끝내자’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지팡이로 더듬어 가며 폭이 좁은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이 꽤 익숙해 보인다.] 조종엽 기자 정말 잘 안 보이는구나. 얼핏 봐선 눈이 불편한 줄 잘 모르겠어. 송승환 이제 6년 됐으니 적응하면서 사는 거지. 아직도 답답할 때가 많아. 제일 무서운 게 계단이야. 조 시력이 그렇게 나쁜데 상대 배우 표정은 어떻게 읽어? 송 얼굴을 보려면 30cm까진 다가가야 하는데, 무대에선 안 되지. 그래서 연습 때 영상을 찍어. (태블릿PC를 꺼내 영상을 최대한 확대한 뒤 15cm 정도 앞까지 고개를 가져다 댄다.) 나중에 이렇게 상대 표정을 확인하는 거지. ‘여기서 노려봤구나, 웃음을 머금었구나, 빈정댔구나….’ 그 표정을 외워. 또 귀가 예전보다 민감해져서 말투로도 느껴. 조 대본은 어떻게 읽어? 송 그냥 TTS(Text to Speech·음성 합성)로 듣고 외워. SNS 메시지도 AI 스피커로 들어. 조 발병하고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싶지 않았어? 송 자료를 찾아보니 내 병의 후유증이 ‘우울증과 자살’이라고 나오더라. 난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치료법을 찾아 나섰어. 미국까지 가서 권위 있는 의사를 만났는데, ‘도저히 방법이 없다’더군. 굉장히 낙담했지. 그날 밤 호텔에 혼자 있는데 갑자기 서러워서 눈물이 났어. 그냥 시원하게 실컷 울었어. 그리고 휴대전화 문자 확인부터 하나씩 생활과 연기를 계속할 방법을 찾아온 거지. 그게 재밌고 신났어. (지팡이를 들어 보이며 손잡이에 붙은 손전등을 켠다.) 이것도 내가 개발한 거야. 전 세계에 하나밖에 없어. 밤에 특히 잘 안 보이는데, 이걸 쓰니 밤거리도 안 무서워. 자신감이 생기는 게 기분이 좋더라고. 조 도움말을 주는 사람이 없었어? 송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더라고. 메시지를 귀로 들어야 하는 사람이 내 주변에 없었으니. 조 여전히 골프를 즐긴다고? 공이 보여? 송 골프장은 넘어져도 잔디밭이니 나에겐 굉장히 안전한 공간이야. 중심 시력이 죽었고, 주변 시력은 좀 살아 있어. 그래서 (고개를 돌리며) 옆눈으로 보면 공이 솜뭉치처럼 조금 보여. 방향은 캐디와 동반자가 가르쳐주고, 그린에 올릴 때는 망원경으로 햇빛에 반짝이는 벙커나 큰 나무 같은 지형지물을 살피고 대강 감을 잡지. 재작년엔 눈이 잘 보일 때도 못 하던 홀인원을 했어. 요점은 방법을 찾아내는 거야. 조 그런 긍정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 거야? 송 생방송이나 연극을 많이 해봐서일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걸 여러 번 실감했어. 내일 도저히 막을 못 올릴 것 같았는데, 막이 오르더라고. 어렸을 때 집안이 많이 망해 봐서 경험치가 있었던 거 같아. 끝날 줄 알았는데, 안 끝나고 다시 일어나더라고.● 2장 “가슴 속이 돌로 가득 찼어”(‘더 드레서’) [젊은 송승환이 부모와 함께 사는 집에 돌아오면 채권자들이 거실을 차지하고 있다. 송승환, 트렁크에 신발과 의상을 챙겨 친구 집으로 들어간다.] 조 어릴 적부터 소년가장 격이었지? 송 드라마 ‘여로’(KBS·1972년) 할 때니 중학교 2, 3학년 때쯤이야. 원래 한 지붕 세 가족으로 주인집인 우리가 안방에 살고 건넛방 문간방은 세를 줬는데, 아버지 사업 실패로 집안이 망했어. 빚쟁이가 몰려오고 집이 넘어가 외할머니네로 들어가는데, 내줄 보증금이 없으니 문간방 세입자도 같이 이사 갔어. 그분들이 외할머니네 건넛방에 살고 우리가 문간방으로 들어갔지. 그때 내 방송국 수입이 생계에 도움이 됐으니 본의 아니게 소년가장 역할을 한 거지. 80년대 스타가 되면서 집안을 일으켰는데 집이 또 망했어. 집 2채하고 세간살이까지…번 돈을 한꺼번에 날렸어. 허무하더라고. 밖에선 화려한 스타로 아는데, 친구 집에서 몇 달 얹혀살았어. 다 그만두고 미국 뉴욕으로 가 3년 반을 지냈지. 조 생계를 위해 벼룩시장에서 시계를 팔았지? 송 500불에 중고 포드 스테이션 왜건을 샀는데, 옷이나 가방은 차에 많이 안 들어가도 시계는 작잖아. 브로드웨이 한국 도매상들에게서 떼어다 팔았지. 그때 스쿨오브비주얼아트 강의를 청강했는데, 학생들이 내는 단편영화 아이디어를 들어 보니 한국에선 몽땅 검열에 걸릴 것 같더라고. 내 머릿속에 자체 검열기관이 얼마나 강하게 자리 잡았는지 깨달았어. 돌아와서 오랜만에 한국 드라마를 보니 느낌이 북한 드라마 보는 거 같은 거야. 뉴욕에서 고정관념을 깨서 나중에 ‘난타’를 만들 수 있었던 거지. 조 ‘난타’도 코로나19로 어려웠을 거 같은데…. 송 PMC프러덕션 설립 이래 처음으로 2년 동안 60억 원쯤 적자를 봤지. 마침 대출 상환하려고 모아놨던 현금이 있어서 버틸 수 있었어. 이젠 거의 회복됐지.● 3장 “필요한 건 망각뿐이지”(‘더 드레서’) [로널드 하우드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 ‘더 드레서’는 1942년 독일군의 폭격이 이어지는 영국 런던에서 227번째 ‘리어왕’을 공연하는 노배우와 의상 담당 노먼의 이야기다.] 조 ‘에쿠우스’의 앨런(1982년 백상예술대상 연기상) 같은 강렬한 배역이 그립진 않아? 송 열정은 있는데 체력이 안 돼. 올 5월 2인극 ‘웃음의 대학’ 할 땐 왼쪽 어금니가 아파서 진통제 먹어 가며 했어. 마지막 공연 끝나고 치과에 갔더니 치근까지 상했대서 결국 뺐어. 원래 치아가 굉장히 건강했는데… 공연할 때마다 어금니를 하나씩 뽑으면 앞으로 공연을 몇 개나 할 수 있을까(웃음). 조 작품을 직접 골랐지? 송 노인이 대개 단순한 인물로 그려지는데 ‘선생님’은 입체적이라 매력적이야. 다혈질로 사람들을 괴롭히는 인물로 보이지만 배우는 그럴 수 있다 싶어. 작품의 흐름이 깨지면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지. 무대 위에서 박수받고자 하는 갈망이 나와도 닮았지. 또 ‘난타’ 시절 내가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고 배우들이 그러더라고, 난 기억이 잘 안 나는데(웃음)…. 요즘은 이빨 빠진 호랑이라고 놀려. 조 올림픽 개·폐회식을 총감독했는데, 그래도 이루고 싶은 게 남았어? 송 과분했지. 고비를 잘 넘긴 건 분명해. 하지만 배우가 좋은 건 늙어도 노인을 연기할 수 있다는 거잖아? 분장실에서 죽은 ‘선생님’은 바라던 기사 작위도 못 받았고,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다’며 허탈해하지만 굉장히 행복하게 간 거야. 셰익스피어 작품 주인공을 모두 연기했잖아. 나도 평생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았어. 노역 연기를 계속하다 간다면 그게 행복이겠지. 조 이번 연극에서 마음에 드는 대사를 꼽는다면…. 송 “필요한 건 망각뿐이지.” 나도 내후년이 칠순인데, 누구나 잊고 싶고 후회되는 일이 있는 법 아니겠어. 대부분 인간관계지. 조 그래도 조정 능력이 대단했던 것 같아. 송 언제부턴가 ‘조금 손해 보면 인생이 편하다’ 싶었어. 평창 땐 SNS를 정말 많이 했어. 회의가 끝나면 아이디어가 채택되지 못한 이들에게 다 메시지를 보냈어. ‘정말 좋은데 예산이 안 된다’ ‘날씨 때문에 위험이 있다’…. 그러니 진척이 되더라고. 과거에 나도 연출자 말에 상처받았을 때 ‘전화 한 통 해줬더라면 마음이 풀렸을 텐데’ 싶었거든. 조 최근 신춘수 오디컴퍼니 대표의 ‘위대한 개츠비’가 토니상을 받았는데 기분이 묘했을 듯? 송 그런 욕심은 눈이 나빠지면서 내려놨어. 우리 ‘심청전’ 같은 게 브로드웨이에서 성공할 만한 아이템이라고 보거든. 공양미 삼백 석에 몸을 던진 뒤 용왕을 만나는 바닷속 이야기들이 얼마나 흥미진진하겠어. ‘언더 더 시’보다 나을걸. 만들 자신은 없고 그냥 생각만 해. 조 후배가 고민 상담을 해 오면 뭐라고 해? 송 “봄에 했던 고민이 뭐였는지 크리스마스 때 기억이 나던가!”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 202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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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조종엽]폐지 줍는 노인 다닐 길이 없다

    폐지 줍는 노인이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가 끊이지 않는다. 추석 연휴 뒤인 20일 새벽에도 경기 고양시의 편도 3차로 도로에서 폐지 수거용 리어카를 끌던 60대 여성이 뒤따르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에 들이받혀 숨졌다. 이런 소식이 알려지면 ‘그러게 왜 인도를 놔두고 차도로 다니냐’며 혀를 차는 이들이 적지 않다. 리어카가 폐지나 고물을 실은 채 차도를 서행하면 ‘교통 흐름을 방해한다’며 경적을 울리거나 욕설을 하는 운전자도 없지 않다.▷하지만 리어카를 끄는 노인 대부분은 인도로 가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갈 수가 없어서 차도로 다닌다. 도로교통법상 너비 1m가 넘는 손수레는 차(車)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폐지 수집 노인의 43%가 리어카를 쓰는데, 대개 폭이 1m를 넘는다. 보도(인도)와 차도가 구분된 도로에서 이런 리어카는 차도로 통행해야 한다. 인도로 가면 자동차가 인도를 주행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과태료가 부과될 수 있다. 차도가 따로 있는 도로에서 인도로 가다가 보행자를 치기라도 하면 12대 중과실 사고에 해당돼 형사 처벌을 받게 된다. 폐지 수집 중 교통사고 경험률(6.3%)이 전체 노인 보행자 교통사고 경험률(0.7%)보다 훨씬 높은 원인 중 하나다.▷리어카로 폐지를 줍는 노인들은 상상만 해도 아찔한 위험을 감수한다. 리어카는 자전거와 마찬가지로 도로에서 맨 오른쪽 차로로 다니도록 돼 있다. 해당 차로를 불법 주차 차량이 점유한 경우엔 부득이하게 왼쪽 차로를 일부 침범하게 된다. 가로변에 버스전용차로가 있는 도로에선 전용차로 왼쪽이 지정 차로다. 이런 도로에선 왼쪽 차로의 일반 차량과 오른쪽 차로의 버스 사이를 곡예 하듯 다녀야 한다.▷동네 주택가 이면도로만 다니면 되지 않겠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모르는 소리다. 지난해 말 정부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폐지를 주로 집 근처(4km 이내)에서 수거하는 노인은 전체의 43%였고, 나머지는 그보다 훨씬 먼 거리까지 이동하며 폐지를 수집했다. 전체의 47%는 상가·사무실 지역에서 폐지를 주웠고, 주거지역과 상가 등을 가리지 않고 전 지역에서 줍는 이들도 28%였다. 그렇게까지 다니면서 폐지를 주워도 손에 쥐는 돈은 하루 평균 6000원 남짓이었다.▷일정 크기 이상의 손수레를 차로 분류하는 현행법은 소달구지와 마차가 자동차와 함께 도로를 달리던, 그래서 일반 도로의 통행 속도가 지금처럼 빠르지 않았던 과거 시대의 유산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제 도로에서 우마(牛馬)는 사라지고 폐지 줍는 노인만 덩그러니 남아 자동차에 치이는 위험을 감내하고 있다. 당장 노인 빈곤을 해소할 수 없고, 모두에게 폐지 수거보다 나은 다른 일자리를 제공하기 어렵다면 최소한 좀 더 안전하게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 2024-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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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가 만난 사람]“우리의 대화가 돌직구뿐이라면, 누군가는 멍투성이가 될 겁니다”

    《“혼자 삭이고 읊조리고 되뇌면서 말에서 타인으로 향한 폭력을 제거하는 것요.” 한국 시(詩)의 미덕을 묻는 물음에 답하는 박준 시인(41)의 말투는 자신의 시처럼 조곤조곤했다. 누구의 목소리가 큰지 경쟁하고, 귀를 어디로 향하든 아우성으로 가득하지만 오히려 소통은 어려운 시대다. 나직한 시의 목소리가 그리운 요즘, “한국어로 시를 쓰고 읽어 온 백 년의 역사가 우리에게 새겨놓은 심미적 유전형질 같은 것이 그의 시에는 있다”(신형철 평론가)고 평가받는 ‘문단계의 아이돌’ 박 시인을 15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났다. 마침 한국 현대 시의 태두로 꼽히는 김소월의 시집 ‘진달래꽃’이 1925년 출간된 지 내년이면 100주년이 된다. 신춘문예의 역사를 연 동아일보 신춘문예 공모도 마찬가지다. 박 시인은 “좀 느리더라도 에둘러 말하는 시의 화법이 필요한 시대”라고 강조했다.》―우리 시의 특질을 꼽는다면…. “말을 작게 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이 강렬하고 짙을수록 혼잣말로 하고 자신을 직설적으로 모두 드러내지 않는 것은 한국 시의 형질이면서 문학을 넘어 우리에게 남긴 공통적 정서였다. 그러다 보면 스스로 반성도 하고, ‘이 말은 필요치 않구나’ 하고 삼키게 된다. 갈등을 덜어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바짓가랑이 붙잡아도 어차피 갈 사람은 가고, 서로에게 상처가 남는다. 내가 싫어서 가는 사람에게 꽃잎을 놓아주는 것이 궁극적으론 나를 돌보는 일 아니겠나.” ―정반대로 직설 화법의 시대다. “시의 화법이 외면받는 까닭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의 대화가 돌직구, 사이다로만 이뤄진다면 누군가는 멍투성이가 될 것이다. 삼키고 삼켜도 삼켜지지 않는 것들을 마치 결정(結晶)처럼 꺼내는 것이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용건만 간단히 하는 게 미덕인데…. “편지를 쓰던 시절엔 계절 인사로 시작해 안부를 묻고, 하고자 하는 말은 한 3분의 2쯤 지나 슬며시 끼워 넣었다. 그 말을 하기 위해 얼마나 긴 길을 돌아와야 했는지, 읽는 사람은 헤아렸다. 그럴 때 언어가 두터워진다.” ―학생들의 문해력이 낮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이들을 손가락질할 문제가 아니다. 아랫세대는 많은 한자어가 낯설고, 윗세대는 범람하는 영어와 ‘펀펀(fun fun)한 축제’식의 표현이 낯설다. 20년만 지나면 중의적 낱말에 한자가 아니라 영어를 병기할 것이다. 공통으로 읽는 텍스트가 점점 없어지고 있다. 시가 꿋꿋하게 견디곤 있지만 우리 공동체가 함께 농담이나 비유에 쓸 수 있는 문장들이 적어지고, 언어가 앙상해지고 있다.” 박 시인은 “올봄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아버지 없이 첫 번째 추석을 맞는다”고 했다. 시인의 시 속에서 “비 온다니 꽃 지겠다”(‘생활과 예보’에서)던 아버지, “나이 들어 말이 어눌해진”(‘쑥국’) 아버지, “할아버지 냄새가 풍겨와 반가워서 … 아버지, 하고 울었다”(‘종암동’)던 아버지다. 이 밖에도 여러 시에 ‘당신’ 등으로 등장하는 대상 상당수가 아버지일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만큼 각별했던 아버지다. ―부고를 거의 알리지 않았다고…. “그래서 주변 사람들도 돌아가신 줄 잘 모른다. 생전 아버지가 당신 주변에도 부음을 전하지 말라고 했다. ‘특히 누구누구는 절대 부르지 말라’고도 했다. 이유를 여쭈니 ‘오면 슬퍼할 거다…’ 하시더라. 막상 돌아가시고 집안 어른께 여쭈니 ‘네가 아버지 말을 항상 그렇게 잘 들었냐’고 하셔서 아버지의 친지분들껜 알리는 것으로 타협했다.”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나. “대화에서 정보를 전달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내가 처음 중고차를 살 땐 경차는 어떻고 중형차는 어떻고가 아니라 ‘무슨 색을 사고 싶냐’고 물었다. 사랑과 걱정의 산물이라도 타인의 정보를 무차별 수용할 수는 없는 거다. 하지만 정서는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 ‘너는 배추김치의 이파리를 좋아하는구나, 난 대를 좋아하는데…’ 이런 대화를 보여주셔서 관계가 안 좋을 수가 없었다.” ―충격이 컸겠다. “한 10년 전이다. 어느 날 부르셔서 가보니 동네에 똬리를 틀고 죽은 뱀이 있었다. 아버지는 ‘이 뱀을 이틀 전에 봤을 때는 고개를 들고 있었는데, 다음 날은 고개를 숙였고, 오늘은 길의 정중앙 가장 양지바른 곳에서 갔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죽음을 준비한 것 같다. 나는 이렇게 죽겠다’고 했다. 결국 연하곤란(음식을 넘기지 못하는 것)으로 가셨다. 지금도 망연자실한 상태다. 하지만 올해 돌아가셨다고 올해만 슬퍼할 거 아니니까, 두고두고 슬퍼할 것이니까….” ‘시집은 2쇄를 찍으면 다행’이라고 할 정도인 이 시대에 박 시인의 인기는 경이롭다. 최근까지 63쇄를 찍은 첫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2012년·문학동네)는 2022년 말 기준 ‘10년 동안 가장 많이 팔린 시집’(시선집 제외)으로 꼽혔다. 두 번째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2018년·문학과지성사)는 21쇄를 찍었고,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2017년·난다)은 베트남 인도네시아 태국 대만 등에 이어 최근 중국에서도 번역 출간됐다. 박 시인은 “시의 숲 입구에서 ‘이쪽입니다’ 하고 이끄는, ‘안으로 들어가면 어마어마한 고목과 새로 자라는 아름다운 나무들이 많다’고 안내하는 이정표 같은 나무가 될 수 있다면 족하다”고 말했다. ―시가 참 다정하다. “늘 끝을 생각한다. 아버지의 죽음이든 누나의 죽음이든 털거나 씻어버리지 않고 손에 쥐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글을 써서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다 보니 내 앞에 있는 생명과 얼굴에 다정해질 수밖에 없다. 염세적으로 갈 수도 있겠지만 난 ‘그러니 일단 식기 전에 이 국을 먹자’라고 얘기하는 존재 같다.” ―음식 등 일상의 감각을 소재로 하는 시가 적지 않다. “낯설고 미학적인 것 또는 감각을 극한으로 늘리거나 응축하는 일은 내 재능이 아니고, 최대한 익숙하고 보편적인 것을 여러 결로 나눠 얘기해 보자는 정도가 지향인 것 같다. 우주와 내가 알지 못하는 힘, 사상보다 눈앞에 놓인 무짠지와 어슷하게 놓인 젓가락과 이 자리에 오지 않는 사람에 관해 얘기하는 것이 더 자신이 있다.” ―시인도 불혹을 넘겼는데, 세상일에 무뎌지나. “마흔 살이 되는 걸 동경하고 기다렸는데, 그렇지도 않더라. 얼마 전 누가 ‘자산 관리를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 왔다(웃음). 관리할 만한 자산은 딱히 없고… 글 쓰는 사람이니 기쁨이든 슬픔이든 감정을 최대한 강렬하게 만들어 놓는 게 자산 관리다. 쓰지 못하는 시간을 견디는 사람들이 작가다. 쓰지 못한 것들까지 껴안는 것이 시작(詩作)이다.” ―‘아이돌’ 별명까지 붙을 정돈데, 출판사 창비 편집·기획자 일을 11년째 병행하고 있다. “다른 분야에선 스타가 되면 삶이 변하겠지만 시인은 아니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생계도 중요하고, 또 생활이 감각과 태도를 만들지 않나. 출근길에 차를 놓치고 점심시간 인기 많은 식당에 입장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감각을 책상에 앉아 만들 순 없다. 작가는 성공만 한다. 실패한 글은 완성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실패를 하는가? 근원, 원천이 되는 생활에 뿌리를 딛고 있어야 한다.” ―시인의 직장생활은 다른가. “시인으로 출근하진 않는다. 언어에 예민하고 행간의 의미에 지나치게 집중하다 보면 직장 생활이 싫어진다. 집에 와서 책상 서랍에 숨겨두었던 시인의 탈을 꺼내 쓴다. 그래도 직장에서 한 소리 듣고 왔는데, ‘난 서정시인이니까 아름다운 시를 써야지’ 하는 건 어렵다. 그래서 최대한 다정하게 살아야 한다. 화는 내는 대로 더 오래가니 덜 내면서 살아야 한다.” 박 시인은 2008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한 뒤 첫 언론 인터뷰를 동아일보와 했다. 당시 그는 “한국 시가 서정에만 매달리는 것도 문제지만 그걸 벗어나려고 실험 일변도로 가는 것도 불편하다”며 “촌스럽더라도 작고 소외된 것을 이야기하는 시인이 되고 싶다”고 했다. ―25세 시인의 패기가 느껴진다. 잘 지켜온 것 같은지.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모르고 건방지게 뱉었구나 싶다. 촌스럽다는 얘기는 자주 듣는데, 소외된 것을 노래하는 시인이라는 얘기를 자주 듣는지는 잘 모르겠다. 문예사조를 보면 리얼리즘이든 모더니즘이든 말과 행동 중 어떤 게 먼저 나가느냐는 다르지만 둘이 반대로 가진 않는다.” ―등단 전 시절은…. “신춘문예와 문예지 공모전에 해마다 스무 군데 정도 투고했는데, 백 번 정도 떨어졌다. 모아놓은 등기우편 영수증이 그 정도 되더라. 그땐 하루에 10시간씩 시를 썼다. ‘한 번 사는데 시랑 결혼하는 거지’ ‘시인이 뭐 굳이 삼시세끼를 챙겨 먹어, 막걸리만 마셔도 되는 거지’ 싶었던 때다. 다르게 감각하고 다르게 먹고 다르게 자고 다르게 걸어야 작품에 개성이 녹아난다고 생각했다. 지나칠 정도로 자신을 몰아붙이기도 했던 것 같다.” ―과작(寡作)이다. 경력을 보면 시집이 서너 권은 있는 게 보통 아닌가. “산문 쓸 때는 ‘진실하게 써야지’라는 생각만 하는데, 시는 ‘기대보다 훨씬 더 잘 써야지’라는 강박이 있다. 또 동료들이 마음이 약해서 독촉을 잘 못한다(웃음). 내년 하반기 창비에서 새 시집이 나온다. 올겨울엔 시를 소재로 산문집을 낼 예정이다.” ―세상에 시는 왜 존재하나. “시는 삶에 대해 현명한 답을 내놓는 것보단 낯선 질문을 던지는 일에 가깝다.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때에도, 혹은 오랫동안 품어온 질문을 아프게 되뇌어야 하는 순간에도 시는 존재 곁에서 빛을 낸다.”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 2024-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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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조종엽]CEO 체포되자 꼬리 내린 시늉 하는 텔레그램

    국내에서 ‘텔레그램 망명’이 벌어진 지 이달로 딱 10년이 된다. 2014년 9월 검찰 사이버 명예훼손 전담수사팀 신설과 노동당 부대표 카카오톡 압수수색 논란으로 ‘사이버 검열’ 우려가 불거지면서 소수만 썼던 텔레그램이 순식간에 다운로드 순위 1위로 올라섰다. 요즘 텔레그램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만악(萬惡)의 온상으로 통한다. 범죄 정보와 마약, 딥페이크·성착취물, 리딩방 사기, 테러 모의, 극단주의, 불법 총기 거래…. 세계의 온갖 어둠에 텔레그램이 빠지지 않는다. ▷“사용자가 갑자기 9억5000만 명으로 늘면서 범죄자들이 악용하는 부작용이 생겼다. 이를 개선하는 것이 목표다. 내부적으로 프로세스를 시작했다.” 파벨 두로프 텔레그램 최고경영자(CEO)가 6일(현지 시간) X(옛 트위터)에 올린 성명이다. 두로프가 최근 프랑스에서 조직범죄 공모 등 혐의로 체포됐다가 보석으로 풀려나면서 ‘당국에 꼬리를 내린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렇게 보긴 성급하다. 텔레그램은 근처에 다른 사용자가 있는지 알려주는 ‘People Nearby’ 기능이 범죄에 악용될 소지가 있다며 삭제하겠다고 했지만 원래도 쓰는 사람이 별로 없는 기능이다. 핵심은 향후 텔레그램이 각국 사법당국의 요청에 응답하느냐이다. 텔레그램은 지금도 홈페이지 ‘자주 묻는 질문(FAQ)’을 통해 자랑스럽게 밝히고 있다. “현재까지 정부를 포함한 제3자에게 0바이트의 사용자 데이터를 제공했습니다.” 미국 뉴욕타임스가 전한 텔레그램 전직 직원의 증언에 따르면 ‘정부 기관 요청 이메일 함은 거의 체크되지 않는다’고 한다. ▷두로프는 성명에서 권위주의 정권으로부터 사용자를 보호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암호화키를 넘겨달라는 러시아 당국의 요구와 평화 시위대의 채널을 차단해 달라는 이란의 요구를 거절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정부 기관에도 정보를 제공하지 않겠다’는 두로프의 이상은 지나치게 순진하거나 순진한 척하는 것에 불과하다. 현실에선 혁명가를 위한 메신저가 곧 범죄자의 방패가 된다. 이란 등에선 결국 텔레그램 사용이 금지됐으니, 억압받는 이들을 위한 용도로도 빛이 바랜 셈이다. 영웅에서 피의자로 전락한 두로프의 운명은 그의 지향 자체가 가진 모순이 품은 것이다. ▷마치 초법적 존재처럼 운영돼 온 텔레그램이 각국의 법 규제에 승복하기 전까진 딥페이크 등 범죄 피해자의 고통을 끝내기 어렵다. 흔히 텔레그램은 모든 메시지를 서버에 저장하지 않는다고 오해되지만 그건 ‘비밀 대화’를 설정했을 경우이고, 기본 설정인 일반 대화나 그룹 채팅은 내용이 여러 나라에 있는 서버에 분산돼 저장된다. 범죄 메시지는 어떤 플랫폼이라도 사법당국에 정보가 제공될 수 있다는 인식이 생겨나야 범죄자들이 악용할 엄두를 못 낼 것이다.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 2024-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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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조종엽]79년 만에 받은 ‘침몰 징용 귀국선’ 조선인 명단

    일본 정부가 ‘우키시마(浮島)호 침몰과 함께 사라졌다’던 승선자 명부 일부를 기시다 후미오 총리의 방한을 하루 앞둔 5일 우리 정부에 전달했다. 1945년 8월 우키시마호가 강제 징용됐다가 귀국하려던 조선인 수천 명을 태운 채 폭침된 지 79년 만이다. 정확한 원인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일본 해군이 고의로 폭파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오랜 세월 피해자와 유족의 한(恨)을 외면해 온 일본이 이제야 달랑 명부를 가져온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는 아오모리현 오미나토항 일대를 요새화하면서 방공호와 철도 건설 등에 조선인을 대거 동원했다. 조선인은 기아와 매질, 중노동에 시달렸다. 패전을 맞아 보복이 두려웠던 일본 해군사령부는 조선인 수천 명을 부산으로 돌려보내겠다며 우키시마호에 태웠다. 그러나 8월 22일 오미나토항을 떠난 배는 이틀 뒤 교토 마이즈루항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일본 정부는 배가 기뢰를 건드렸다고 발표했지만 믿기 어려운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당시 기뢰 폭발에 나타나는 물기둥이 보이지 않았다. 9년 뒤에야 인양한 배는 선체가 안에서 밖을 향해 휘어 있었다. 내폭의 증거다. ▷해군 승조원들이 부산에 가지 않으려고 자침시켰다는 분석이 나온다. 출항 전 승조원들은 ‘전쟁이 끝났는데 조선에 가면 맞아 죽거나 포로가 될지 모른다’며 항명 사태를 일으켰다. 배엔 돌아올 연료도 없는 상태였다. 폭발 전 일부 해군이 배에서 내려 구명보트를 타는 모습을 본 생존자도 있다. 폭침이 사고를 위장해 징용 조선인을 몰살하려던 해군사령부의 계획이라는 설도 있다. 배는 처음부터 부산이 아닌 마이즈루항으로 향했다. 사령부에서 일했던 아버지로부터 ‘(사령부가) 배에 폭발물을 설치했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다는 증언이 있다.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관방장관은 6일 “인도적 관점에서 진지하게 대응해 왔으며, 이번 명부 제공도 그런 대응의 일환”이라고 했다.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다. 승선자 명부의 존재가 드러난 뒤에도 일본 정부는 이를 부인하거나 답변을 피해 왔다. 유족들이 낸 배상 청구 소송에선 명부를 ‘승선 시 작성해 배에 비치한 것’으로 정의하며 ‘침몰로 상실됐다’고 주장했다. 최근에야 일본 기자의 정보 공개 청구를 계기로 명부 75건을 보관해 온 것을 인정했다. ▷“자기네가 아쉬워서 (사람을) 갖다 썼으면 되돌려 놔야지. 노예같이 부려놓고 사람을 죽이는 게 인도적인 건가?” 우키시마호 생존자의 호소다. 일본 정부가 뒤늦게 명부를 건네려면 사과와 진상 규명 의지를 함께 표하는 것이 피해자와 유족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일본 정부가 여전히 은폐하고 있는 강제징용 피해자 명부 등 자료가 적지 않다. 총리 방한 등 이벤트에 맞춰 마치 선물 주듯 해서는 일본 정부에 대한 신뢰만 떨어뜨릴 것이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 2024-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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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가 만난 사람]“나 아니면 누가? 지금 아니면 언제? 주변에 기쁨 주며 사세요”

    《“3월이었어요. 꽃망울이 터지고 봄이 올락 말락 하는, 부활절을 기다리는 때였거든요. 막연한 불안도 있었지만 시작의 설렘이 컸지요.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게 아니라 더 넓은 사랑을 하고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애인이 되는, 이제 그 대열에 나도 끼는구나’ 싶었죠.” 1964년 수녀회의 문을 두드리던 때를 회상하던 이해인 클라우디아 수녀의 표정에선 열아홉 살 이명숙(이 수녀의 본명)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 듯했다. 1976년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부터 최근 단상집 ‘소중한 보물들’(김영사)까지 그가 50여 권의 책에 담은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는 수녀원 담장을 넘어 세상으로 퍼져나갔다. 수녀회에 입회한 지 올해로 60주년을 맞은 이 수녀를 27일 부산 수영구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원 내 ‘해인글방’에서 만났다.》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낸 이들, 극단적 선택을 고민하는 이들, 참회하는 재소자, 군인… 그동안 세상의 온갖 짐 진 이들이 이 수녀에게 희망을 갈구하는 편지를 보내오거나 수녀원으로 찾아왔다. 이 수녀는 그때마다 지치지도 않고 답장을 하고 곁을 내어줬다. 이제 삶의 황혼 녘에 이른 그는 “아프고 슬픈 눈물조차 소중한 진주로 변해 있음을 긴 세월의 선물로 받아 안는 요즘”이라고 했다. ―기록적 열대야가 이어졌는데, 어떻게 지내셨나요. “침방(寢房)에는 에어컨이 없거든요. 더울 때마다 불길 속에서 소방관들 고생하는 것 생각하며 참아요. 스스로를 길들이려고 노력하면 조금씩은 됩니다.” ―건강은 어떠십니까.(이 수녀는 2008년 직장암 3기 진단을 받고, 수십 차례의 항암 치료와 장의 일부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 “암은 동행하는 친구로 지내고 있고, 완치까진 아니고 관찰할 게 남아 있지만 일상생활엔 지장이 없어요. 5년 전엔 양쪽 무릎 수술(인공관절)을 했고, 대상포진으로 입원도 하고, 통풍도 있고… 그렇죠, 뭐.” ―수영이 건강에 좋다는데요. “우리 신분에 수영하기는 좀 어렵죠. 1960년대 예비 수녀 시절 스위스 수녀님이 수련장으로 계셨고 여긴 그냥 벌판이던 때예요. 광안리하고 송정 바다에서 사람이 거의 없는 시간에 단체 수영을 몇 번 했어요. 수영복은 야하잖아요. 가슴도 드러나고. 그래서 속에 수영복을 입고, 겉에 수녀복이나 잠옷 같은 걸 입고 갔으니, 이상한 사람들로 보였을 거예요(웃음).” ―코앞에 광안리 바다를 두고 60년을 지내셨는데, 수녀라서 수영도 못하신다니…. “그때 선생 수녀님이 호칭을 평소처럼 ‘수녀님’ ‘자매님’ ‘마리아’ 이렇게 말고 다르게 부르라고 그러셨어요. 딴 사람들에게 수녀 신분이 들키지 않도록요.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네요. 옛날 사람들의 추억이죠.” ―엄격하던 시절이네요. “축제 때 예비 수녀들이 연극에서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탕자 연기를 하면 너무 리얼하게 한다고 꾸중 듣고, 화장하는 주인공은 예쁜 얼굴 때문에 허영심을 가질까 주의를 주고… 내외적으로 본성을 부자연스러울 만큼 억제했던 시절이지요. 수녀가 되는 과정으로 받아들였지만 힘들기도 했죠. 그래도 그때 그만두고 나갔으면 오늘은 없었겠죠? 엄격함도 시대적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는 거고. 요즘은 재능도 많이 키워주고, 수도원의 문화도 많이 바뀌었어요.” ―어린 시절은 어땠는지요. “6·25전쟁 때 방공호 속에서 폭격을 피한 그런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우리 세대는 청소년기에도 세상에 태어났으면 선한 일을 해야 하고, 인류를 위해서 빛이 돼야 한다는 사명감, 갈망을 가졌어요. 인류사에 빛나는 이타적 삶을 부러워했죠.” ―수도 생활로 얻은 것은 뭔가요. “소나무를 바라보며 배운 평정심, 바다를 바라보며 배운 환희심, 도반(道伴)들과 같이 살며 배운 보리심.” ―마음에 새긴 경구가 있다면…. “윤동주 시인의 ‘서시’ ‘별을 노래하는 마음’에서 기도를,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에서 겸손을, ‘나한테 주어진 길’에서 소명을 배운 것 같습니다. 모든 이들의 마음속엔 서시처럼 ‘한 점 부끄럼 없는’ 선하고 순한 삶에 대한 갈망이 숨어 있다고 봐요.” ―찾아와 만난 독자가 셀 수 없이 많죠? “20년도 넘었네요. 한 재일 교포 남성이 부인은 택시 안에 그냥 모셔 놓고 혼자만 저에게 와서 서툰 우리말로 고백을 하는 거예요. 아내가 아닌 다른 한국 여성을 좋아하게 됐는데, 가정을 지키려고 그냥 보내주고 헤어졌던 거지요. 아픈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는데, 제 시 ‘해바라기 연가’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 사람이 생각날 때마다 몇백 번을 읽다 보니 저를 만나고 싶었대요. 그저 얘기를 들어줬을 뿐인데, 너무나 고마워하더라고요.” ―법정 스님을 비롯해 아름다운 인연도 많았습니다. “피천득 선생님(1910∼2007)은 항상 소년 같았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옛날엔 여성을 보호해야 된다… 그런 게 있었잖아요. 선생님은 제 글 전시를 보러 오시면 적지 않은 연세에도 꼭 전철 타고 저를 바래다 주셨어요. 선생님이 독일에 있는 분과 펜팔을 하셨는데, 제가 받는 분 주소까지 써서 편지 봉투를 20개인가 예쁘게 만들어드렸더니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느냐’며 정말 기뻐하셨던, 그런 장면들이 삶의 모퉁이에서 즐거운 추억으로 떠올라요.” ―수녀원 단체 생활이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교부의 가르침에 이런 게 있어요. ‘하느님을 찾았으나 뵈올 길 없고, 영혼을 찾았으나 만날 길 없어, 형제를 찾았더니 셋 다 만났네.’ 출신도 성격도 다 다른 사람과 같이 살아내야 결국 하느님도 만나는 거죠. 어느 스님 말씀처럼 감자를 통에 넣고 막 씻으면 서로 씻기듯이, 공동체에서 균형을 맞추고 사는 것이 도(道)에 이르는 길이라 믿는 거죠.” ―보통 사람은 피붙이하고 사는 일도 쉽지만은 않은데요. “이별을 앞당겨서 생각해 보세요. 가족끼리도 미워하고 애증이 얽히다가도 위급 상황이 생겨서 병원에 입원하면 난리가 나지요. 그땐 ‘이렇게 되기 전에 좀 잘할 걸’ 하는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어떤 일을 참기 힘들 때 언젠가 맞이할 내 죽음을 떠올린다”고 하셨습니다. “사랑 없는 막말이 귀에 꽂힐 때는 저도 힘들어요. 그렇다고 미운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거나 화를 내면 편해요? 아니죠. 영원히 사는 게 아니니 후회할 행동을 하지 말아야지요. 오늘 하루밖에는 없는 것처럼 살아야지요. 살아 보니 명랑함이 되게 되게 중요한 덕목이더라고요. 제가 병원에서 큰 수술을 했잖아요. 환자는 ‘내가 저 푸른 하늘을 다시 한 번 봤으면’ ‘신발을 신고 한 번 더 산책을 나갈 수 있었으면’ 싶잖아요. 그런 걸 생각하면 명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죠.” ―수도자도 죽음이 두렵습니까. “가보지 않은 세계니까. 우리는 내세를 믿지만 신앙을 떠나서, 인간이 살면 끝이 있는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간 세상에 나도 이른다고 생각하면…. 죽음 자체보단 아름답고 순하게 떠날 수 있을까 두렵죠. 인간은 이기적이고 약한 존재니까.” ―책을 쓴 게 후회될 때도 있으셨나요. “너무 힘들 땐 ‘가만히 있을 걸 괜히 책은 써 갖고’ 싶을 때도 있었지요. 수녀가 만날 신문에 나오고 하면 선생님들 눈에 곱게만 보이셨겠어요. 옛날엔 저를 이용하려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저에겐 말도 안 하고 누가 선정적인 그림을 넣어서 낭송 테이프를 만들어 팔아 다 파기하게 하고…. 1980년대 초에 눈물 콧물을 다 짠 것 같아요. 제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차서 ‘이러다가 수도 생활을 못 하는 게 아닌가’ 싶더라니까요. 조심하면서 살았죠. 아름답기 위해선 눈물이 필요하다고(웃음).” ―옛 독자 편지들을 하나하나 다 간직하고 계시네요. “수십만 통은 될 걸요. 제가 수도자가 아니라면 저에게 편지 보낸 독자들을 모아서 간담회 한번 하고 싶기도 하더라고요. 이분들이 다 중장년이 됐을 거 아녜요.” ―벽에 팔순을 축하한다는 쪽지가 눈에 띕니다. “아주 소녀 감성으로 풋풋하게 설레는 마음으로 사는데, 팔순팔순 그러지 말라고….” ―요즘은 세상이 더 각박해진 것 같습니다. “정신적으론 오히려 가난했을 때가 더 인정이 있지 않았나 해요. 6·25전쟁으로 식구들이 낯선 부산으로 피란을 와서 셋방살이를 했는데 주인집하고 관계가 정말 가족 같았어요. 어린 마음에도 부산이 그 많은 피란민들을 다 품어 안고 받아줬다는 것이 놀라웠어요. 남이 뭔가를 해주기를 바라기보다 내가 먼저 그런 역할을 할 수는 없을까요. 남 탓보다는 나부터 이기심의 감옥에서 빠져나와 남을 배려하고 이타적으로 살면 사회가 좀 나아지지 않을까요.”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 뭘까요. “순간 속의 영원을 살아야지요. 내가 아니면 누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 솔선수범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기쁨 발견 연구원’인 것처럼 함께 사는 이를 어떻게 기쁘게 할까 연구하다 보면 행복이 저절로 올 겁니다.” 인터뷰를 마친 뒤 이 수녀가 평생을 바라봤을 광안리 해변에 들렀다. 수녀의 시비(詩碑)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수녀가 수술 후 마취에서 깨어날 때 읊었다는, 수녀의 삶이 담긴 것 같기도 한, ‘파도의 말’은 어떨까. “울고 싶어도/못 우는 너를 위해/내가 대신 울어줄게/마음놓고 울어줄게//오랜 나날/네가 그토록/사랑하고 사랑받은/모든 기억들/행복했던 순간들//푸르게 푸르게/내가 대신 노래해줄게//일상이 메마르고/무디어질 땐/새로움의 포말로/무작정 달려올게” 이해인 클라우디아 수녀△1945년 강원 양구 출생△1964년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입회△1968년 수녀로 첫 서원△1970∼75년 필리핀 교리신학원, 성 루이스대 영문학과 수학·졸업△1976년 종신서원,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 출간△1985년 서강대 종교학과 대학원 졸업△1992∼97년 수녀회 총비서△2023년 제26회 가톨릭문학상 수상부산=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 2024-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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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조종엽]첫날부터 삐걱… 日후쿠시마 핵연료 잔해 880t 제거 작업

    일본 도쿄전력이 22일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에서 녹아내린 핵연료 잔해(데브리)를 시험 반출할 계획이었는데, 시작도 못 했다. 준비 작업 중 실수가 발생해 중단했다고 한다. 이날 작업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이 원전에서 사고가 일어난 지 13년 만에 처음이었다. 시험 추출하려던 양은 3g 미만이었다. 원전 내 격납 용기 안에 방사선을 방출하는 데브리가 880t가량 있는데, 작업 첫날부터 차질을 빚어 2억9000만분의 1도 못 꺼낸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 폐로(閉爐)의 최대 난관으로 꼽히는 게 데브리 반출 작업이다. 원전 사고 당시 핵반응이 일어나는 압력 용기 속 노심이 용암처럼 녹아 바닥을 뚫고 격납 용기로 흘러내렸다. 바로 아래에 곱게 쌓여 있으면 그나마 낫겠지만 다시 굳으면서 떡이 진 채 여기저기로 퍼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21년부터 반출 계획이 있었지만 3번이나 연기됐다. 이번엔 약 22m 길이의 로봇 팔에 손톱 형태의 장치를 달아 일부를 집어낸 뒤 성분을 분석하고 반출 방법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했다. ▷격납 시설 내 방사능이 워낙 강해 사람은 접근할 수 없다. 2015년 투입한 관측 로봇도 5시간 만에 고장이 났다. 2022년 2월에 이르러서야 1호기에서 처음으로 로봇이 핵연료로 보이는 퇴적물을 발견한 수준이다. 올 1월엔 원자로에 로봇 팔을 넣으려 했지만 배관이 퇴적물로 막혀 있어 실패했다. 격납 용기가 손상된 것도 꺼낼 수단을 제한한다. 수천 km 떨어진 곳에서 로봇을 이용해 수술까지 하는 세상이지만 그건 수술실이라는 완벽히 통제된 환경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데브리를 꺼내지 못하면 오염수가 계속 발생한다. 데브리는 지금도 붕괴열을 내기에 임시방편으로 격납 용기에 냉각수를 주입해 식히고 있다. 지하수도 유입된다.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은 오염된 물을 방사성 물질을 걸러내는 설비로 처리한 뒤 1년 전부터 바다에 방류하고 있다. 폐로를 2051년까지 마친다는 게 목표지만 일본 내에서도 100년 이상 걸릴 것이라는 의견이 나온다. ▷1986년 사상 최악의 원전 사고가 발생한 체르노빌 발전소는 감당을 못해 그냥 콘크리트제 석관(石棺)으로 덮었다. 그 아래 묻힌 핵연료는 250t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엔 시간이 10년 정도 흐르면 어떻게 할 수 있는 기술이 나올 거라고 기대했지만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못 하고 있다. 그저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위험이 줄어들 것을 기대할 뿐이다. 후쿠시마 원전도 차라리 석관으로 덮으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지역 복구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뿐더러 후쿠시마 원전은 아래에 지하수가 많은 탓에 물이 오염돼 유출되는 걸 막기 어렵다고 한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 2024-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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