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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자기 것만 챙기고 손톱만큼도 손해 안 보려고 해요. 그런데 하는 일마다 다 잘돼요. 자식들까지 명문대에 척척 붙었다니까요.” 지인이 회사 동료에 대해 말했다. 이어 “그러고 보면 선하게 살아야만 하는 건 아닌 것 같다”며 씁쓸해했다. 그렇다. 인생은 공덕과 비례하지 않는다. 소설, 영화, 드라마에서 숱하게 변주되는 ‘권선징악’에 열광하는 건 일종의 판타지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7개의 단편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특별한 잘못이 없는데도 고통 속에 내던져진다. 화자의 시이모는 남동생이 빚 때문에 감옥에 갈 처지가 되자 대기업을 그만두고 퇴직금으로 빚을 갚아야 했다. 이후 어머니가 몰래 자신의 이름으로 남동생의 보증을 서 빚더미에 휘말린다(‘이모’). ‘봄밤’의 수환은 어떤가. 스무 살부터 쇳일을 시작해 철공소를 차리지만 거래처의 횡포로 부도를 맞고, 재산을 빼돌린 아내는 잠적한다. 교사였던 영경은 전남편에게 아이를 뺏긴 후 알코올의존증 환자가 된다. 수환과 영경은 우연히 만나 부부가 되지만 수환의 류머티즘 관절염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다. “사진을 배워서 찍고 싶어.” 관주는 여자친구 문정의 말에 카메라를 사주겠노라고 약속한다. 카메라는 문정의 손에 쥐어지지만 관주가 치러야 할 대가는 가혹했다(‘카메라’). 이들의 곁을 지키는 건 술이다. 커피 잔에 소주를 따라 마시고, 맥주 한 캔에 소주 두 병을 조금씩 섞어 30분도 안 돼 마셔 버린다. 보드카, 와인, 위스키까지. 술병은 뻥뻥 열린다. 꾸역꾸역 살아가게 만드는 숨구멍처럼. 제목 ‘안녕 주정뱅이’는 이들을 향한 위로처럼 들린다. 사소한 말 한마디가, 무심코 보아버린 한 장면이 인간을 꼬꾸라뜨리는 모습에 가슴이 서늘해진다. 애처롭지만 축축 처지지는 않는다. ‘이모’ ‘카메라’ ‘층’ ‘역광’ 등은 반전을 지닌 탄탄한 구조로, 책장을 넘기는 데 가속도가 붙는다. 술자리에서 먼저 일어선 적이 없다는 작가의 술 사랑도 찐득하게 스며 있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한정된 시간은 삶을 곱씹어 보게 만든다. 지난해 82세로 세상을 떠난 신경과 전문의 올리버 색스가 생의 막바지에 남긴 에세이 4편을 담은 ‘고맙습니다’(원제 ‘Gratitude’·김명남 옮김·알마)는 자서전 ‘온 더 무브’를 64쪽으로 압축한 듯하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등 10여 권의 베스트셀러를 내고 신경 장애 환자를 몸과 마음을 다해 치료하며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지만 모국어 외에 다른 언어를 할 줄 모르고 다른 문화를 폭넓게 경험하지 않은 점이 아쉽단다. 원소주기율표를 사랑한 그는 수수한 회색 금속 비스무트(83번 원소)를 특히 좋아했지만 83이라는 나이는 끝내 맞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가장 강하게 느낀 감정은 고마움이었다.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 지각 있는 존재이자 생각하는 동물로 살았다.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특권이자 모험이었다.” 읽을 때마다 매번 가슴이 묵직해지는 말이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첫 페이지를 펼친 순간 화들짝 놀랐다. 이비인후과 의사가 두 다리를 쫙 벌려 진료받는 여성의 무릎에 성기를 갖다 댄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이럴 수가. 오래전 기자가 겪은 상황과 똑같았다. ‘재수가 없어 별 희한하게 성추행하는 변태를 만났다’고 여겼는데 지구 반대편 프랑스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시대와 국경을 초월하는 성폭력의 ‘어처구니없는 보편성’이라니…. 프랑스의 남성 만화가인 저자는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의 사례를 고스란히 그림으로 옮겼다. 길에서 여성에게 치근덕거리다 무시당하자 저속한 욕설을 퍼붓고, 수영장에서 잠수하는 여성 앞에서 수영복을 벗는가 하면 골목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여성의 은밀한 곳을 불쑥 만지는 등 50여 개 에피소드가 담겼다. 친구들이 거실에 있는데도 욕실에서 양치하는 여자친구와 강제로 성관계하는 사례도 있다. 남성은 초록색 악어로 그렸다. 여성만 인간의 모습이다. 남성이 보기에 불편할 수 있지만 피해자인 여성과 동일시함으로써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장치다. 성폭력 대처 방법도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도와주세요”보다 “불이야”라고 소리치는 게 효과적이고, 휴대전화로 가해자의 얼굴이 나오게 사진을 찍으라고 조언한다. 급한 경우 주변 자동차를 발로 차(차 주인에게는 미안하지만) 도난 경보장치가 울리게 만들 수 있다. 책은 2014년 프랑스에서 열린 ‘세계 여성 폭력 추방의 날’ 기념 전시회에 초청됐지만 한 정치인이 “저속하고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해 초청이 취소됐다. 이 사실이 주요 언론에 보도되면서 프랑스 사회가 들끓었다. 책에 묘사된 성폭력의 행태는 적나라하다. 길, 직장, 카페, 버스는 물론이고 집까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문제는 그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라는 사실이다. 여성들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여기 ‘인형이 가득한 방 안’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인형은 어떤 모양인가요?” 27일 서울 강남구 한국문학번역원 강의실. 번역아카데미 정규과정(2년) 수강생 6명이 소설가 성석제 씨(56)에게 단편소설집 ‘이 인간이 정말’에 나온 ‘홀린 영혼’에 대해 물었다. 미국, 영국, 캐나다에서 온 외국인과 한국인 수강생들이 작품을 영어로 번역한 후 작가와 논의하는 시간이었다. ‘홀린 영혼’은 허풍과 거짓으로 점철된 친구 이주선의 삶을 화자의 시선으로 좇는 작품이다. 성 씨가 “인형은 곰, 개구리 등 다양한 모습이죠”라고 답하자 “영어권에서는 ‘doll’이라고 하면 대개 사람 모양의 인형을 떠올리거든요”라는 설명이 돌아왔다. 성 씨는 미처 몰랐다는 듯 “아…, 그렇군요”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말의 맛, 생활상 집요하게 분석 한강 씨의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을 한 데에는 뛰어난 작품성과 함께 데버러 스미스 씨의 번역도 한몫했다. 스미스 씨처럼 한국어를 배운 원어민 번역가에게 관심이 쏠리고 있다. 번역아카데미는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 7개 언어권별로 수업을 진행한다. 이날 수강생들은 단어의 의미부터, 문맥은 물론이고 소설의 배경인 1960, 70년대 주택가와 다방, 기차역 구조까지 파고들었다. “주선의 아버지가 ‘우리 주선이 많이 사랑해주고’라고 말하는 대목은 영어로 그대로 옮기면 동성애 분위기가 난다”는 질문도 나왔다. 성 씨가 답했다. “한국의 어떤 아버지도, 설사 자신이 동성애자라 하더라도 그런 부탁은 안 하죠. ‘잘 돌봐 달라’는 의미를 문어체적으로 쓴 거예요.” 수강생들은 “‘노가리꾼, 똥방위 말년’…. 또 ‘똘똘이 목욕시켜준 지 얼마나 됐냐’는 어떻고요”라며 흘러간 은어의 말맛을 살리는 것이 특히 어려웠다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 문화, 관습 완벽히 이해해야 이들은 가축시장, 상설시장이 구체적으로 어떤 시장인지, 고유명사인지도 궁금해했다. “한국의 시장에 대해 알아야 하는데…. 5일장은 아세요? 닷새에 한 번 열리는 시장이에요. 가축시장은 5일장에서 열리고요. 상설시장은 계속 영업하는 시장이죠. 일반명사예요.”(성 씨) 동네 어른이 주선에게 “김 사장 아들 아니냐”고 묻자 이 씨인 주선이 고개를 끄덕이는 대목에서도 수강생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 씨를 김 씨라고 하고, 당사자도 부인하지 않는 게 의아하다는 것. 성 씨는 감탄하며 설명을 이어갔다. “한국에서는 흔한 게 ‘김 사장’이에요. 사람들은 실은 서로에 대해 정확히 몰라요. 주선도 굳이 이 씨라고 말하지 않죠. 피상적으로 알고 지내는 모습을 묘사한 장치인데 예리하게 집어내네요!” 영국에서 만난 한국인 친구를 통해 자연스레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팀 홈 씨(32)는 “재미있을 것 같아 번역에 도전했다”며 “그림책을 번역하고 싶다”고 말했다. 미국인인 캐리 미들디치 씨(27·여)는 “김중혁 작가의 ‘미스터 모노레일’은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재미있는 작품이라 꼭 번역하고 싶다”고 말했다. 두 시간 반의 수업이 끝난 후 성 씨는 말했다. “번역이 굉장히 정교한 작업이네요! 소년 시절 읽은 세계문학전집은 영혼의 자양분이었어요. 낯선 세계가 주는 즐거움 속에서 위로를 얻고 각성도 했죠. 국경을 넘어 단 한 명의 소년이라도 나와 같은 경험을 한다면 소설을 쓴 보람이 있습니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의 작품들이 여전히 강세다. 수상작인 ‘채식주의자’는 지난주 교보문고와 예스24, 알라딘, 인터파크에서 모두 종합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다. 예스24에서는 2주 연속 1위를 이어갔다. ‘기대보다 더 괜찮았다’, ‘구입과 동시에 단숨에 읽어 버렸다’ 등 책을 읽은 독자들의 후기도 인터넷에 속속 올라오며 열기를 더하고 있다. 5·18민주화운동을 여러 인물의 시선을 통해 입체적으로 그린 ‘소년이 온다’도 동반 상승세다. 지난주 예스24와 알라딘, 인터파크에서는 2위, 교보문고에서는 6위에 각각 올랐다. 작가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새 작품으로도 이어졌다. 더럽혀지지 않은 흰 것들에 관한 이야기 65개를 시처럼 빚어낸 신작 소설 ‘흰’도 단숨에 상위권에 진입했다. 알라딘(4위)과 인터파크(5위), 예스24(9위)에서 10위 안에 들었다. ‘7년의 밤’ ‘28’ 등 화제작을 쓴 정유정의 신작 ‘종의 기원’의 기세도 만만치 않다. 교보문고와 예스24, 알라딘에서 지난주 모두 3위에 오르는 저력을 보였다. 인터파크에서는 4위였다. 출판계에서는 침체됐던 한국 문학에 모처럼 활기가 돌고 있다며 반색하는 분위기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초등학교가 ‘국민학교’였던 시절, 해마다 기생충 검사를 위해 집에서 채취한 대변을 내던 날, 아이들은 닿기만 해도 터지는 폭탄처럼 채취 봉투를 수거 봉지에 냅다 집어던졌다. 얼마 후 담임선생님이 한 명씩 이름을 불렀다. 호명되지 않은 아이들은 가슴을 쓸어내렸고, 교탁 앞으로 불려나간 아이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구충제를 삼켜야 했다. 꽤 오랜 기간 ‘구충대장’이라는 놀림에 시달려야 했던 건 물론이다. 기생충 학자로 잘 알려진 저자(단국대 의대 교수)가 특유의 입담으로 발랄하게 풀어낸 이야기는 유년 시절의 기억 한 토막을 끄집어냈다. 이 책은 전작인 ‘서민의 기생충 열전’에 나오지 않은 기생충을 다뤘다. 책장을 펼치면 드라마틱하고 놀라운 기생충의 세계가 펼쳐진다. 시모토아 엑시구아는 물고기의 혀가 떨어져 나가게 한 후 물고기가 죽을 때까지 혀 노릇을 대신한다. 질편모충은 남녀를 차별한다. 남성의 몸에서는 열흘도 못 견디지만 여성의 몸에서는 수년씩 살며 고통을 주고 에이즈 감염률까지 높인단다. 암세포로 돌변하기도 하는 왜소조충은 좀 무시무시하다. 어떤 병이든 없는 자에게 더 가혹한 법. 기생충도 마찬가지다. 제3세계 사람들이 피부로 들어오는 구충에 자주 감염되는 건 신발이 없어 맨발로 다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빈대를 통해 전파되는 크루스파동편모충은 어릴 때 사람 몸에 들어와 잠복해 있다 중년 무렵 심장마비를 일으켜 순식간에 숨지게 만든다. 중남미에는 감염자만 500만∼600만 명에 달하고 해마다 수만 명이 목숨을 잃지만 아직 치료제는 없다. 부자 나라의 흔한 질병이라면 진작 약을 개발했겠지만, 서글픈 현실은 사람의 목숨에 값을 매긴다. 저자는 제약회사가 아플 때 잠깐 먹는 약보다 고혈압이나 콜레스테롤 저하제처럼 평생 동안 먹는 약을 선호한다고 꼬집는다. 온갖 먹거리가 국경을 넘나들고 지구 곳곳을 여행하는 이가 늘어나는 요즘, 기생충은 남의 나라 이야기만은 아니다. 미국에서는 과테말라에서 재배된 라즈베리, 멕시코에서 키운 고수로 인해 원포자충에 감염돼 집단으로 설사에 시달리는 사례가 잇따랐다. 사람 몸 안을 돌아다니다 드물게는 뇌출혈도 일으키는 유극악구충은 날생선을 통해 주로 감염되는데 태국, 미얀마, 중국, 일본, 남미에서 꾸준히 환자가 발생한다. 어느 순간 출장, 여행으로 다녔던 나라를 되짚어보며 뭘 먹었는지를 꼽아보는 자신을 발견했다. 연구를 위해 앞뒤 안 재고 돌진하는 저자의 엉뚱하면서도 열정적인 모습에는 웃음이 터진다. 사람과 동물의 눈에 사는 동양안충 유충을 배양하는 데 연거푸 실패하자 홧김에 유충 두 마리를 자기 눈에 집어넣는다. 논문 때문에 급한 마음에 눈을 보려고 개를 껴안은 채 뒹굴고, 군인 4명이 다리 한 짝씩 잡은 군견 셰퍼드의 눈에서 동양안충을 꺼내는 장면은 한 편의 시트콤 같다. 기생충은 박멸해야만 하는 대상은 아니다. 구충은 알레르기나 자가면역질환치료제로 쓰이고, 친환경적 항응고제를 만드는 데도 활용될 수 있다. 기생충에 감염되지 않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단다. 날달팽이, 자라 피 등 남들이 잘 안 먹는 건 먹지 않기, 면역력이 약할수록 기생충에 취약한 유기농 식품을 먹을 때 주의하기, 숙련된 요리사가 뜬 신선한 회를 먹기…. 모르면 무섭지, 알고 나면 두려움은 줄어든다. 기생충이라는 작디작은 생명체를 통해 세상살이의 지혜를 함께 선사한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오늘 회사에서 즐거우셨나요?” 이렇게 질문하는 순간 온갖 욕설이 날아들지 모르겠다. “얼마나 힘드셨나요”라고 물으면 여기저기서 방언이 터진 것처럼 이야기를 쏟아내겠지만. 회사 생활의 고충을 담은 책이 늘어나고 있다. ‘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히노 에이타로 지음·이소담 옮김·오우아)는 불합리한 업무 구조에 돌직구를 날린다. “오늘은 볼일이 있어서 정시에 퇴근하겠습니다”라고 말해야 할 정도로 야근이 당연시된다고 비판한다. 장래 희망을, 살고 싶은 방식이 아니라 특정 직업인이 되는 것으로 교육하고 좁디좁은 취업문 때문에 뽑아준 회사에 몸 바쳐 일하게 만드는 구조가 한몫한다고 분석한다. 회사를 ‘거래처’로 생각하고 괴로우면 언제든 도망쳐도 된다는 조언은 딱히 신통치는 않다. “회사는 전쟁터지만 회사 밖은 지옥”이라는 ‘미생’의 유명한 대사가 자꾸 떠오르는 걸 보면.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민음사가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아 ‘세계시인선’을 재단장해 최근 15권을 출간했다. 세계시인선은 ‘오늘의 시인총서’와 함께 민음사가 문학 출판사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된 시리즈다. 1973년 이백과 두보의 작품을 실은 ‘당시선’,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검은 고양이’, 로버트 프로스트의 ‘불과 얼음’ 등 4권으로 시작됐다. 당시에는 일본어판을 재번역한 책이 대부분이었는데, 원전 번역과 원문을 함께 실어 큰 주목을 받았다. 1차로 모두 80권이 나왔다. 1994년부터 2차로 개정판 63권을 냈다. 민음사는 이번에 3차로 재단장한 책 15권을 시작으로 처음 낼 당시 목표했던 100권을 낼 계획이다. 일단 내년까지 50권이 나올 예정이다. 새로 나온 세계시인선에는 국내 초역한 책 5권이 포함됐다. 소설가로 인기 있는 찰스 부코스키의 대표작 ‘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를 비롯해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거물들의 춤’, 시대의 불안을 끌어안은 프랑스 시인인 프랑수아 비용의 ‘유언의 노래’가 있다. 로마 시인인 호라티우스의 ‘카르페 디엠’과 ‘소박함의 지혜’도 만날 수 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김수영의 문학성도 재조명했다. 극작가 브레히트의 ‘검은 토요일에 부르는 노래’에는 초기 작품인 ‘가정기도서’가 담겨 시인의 면모를 볼 수 있다. ‘꽃잎’은 현실 참여 작가로 알려진 김수영이 꽃에 대해 노래한 작품을 소개한다. 히브리 시문학의 정수로 꼽히는 ‘욥의 노래’는 고결한 품성을 지닌 욥이 재산과 자식을 모두 잃고 극심한 병까지 얻지만 그 누구도 고통을 위로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을 그린 서사시다. 죄 없는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모티브는 빅토르 위고에게 영감을 줘 ‘레 미제라블’의 장 발장을 창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시인들은 세계시인선이 영혼의 자양분이 됐다고 말한다. 김경주 시인은 “시가 지닌 고유한 넋을 폭넓고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는 기회였다”고 돌아봤다. 허연 시인은 “세계시인선을 읽으며 어른이 됐고, 시인이 됐다”고 회고했고, 최승호 시인은 “세계시인선을 읽으며 상상력을 키웠다”고 말했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멕시코와 쿠바를 여행하다 매료된 친구가 선언했다. “스페인어 배울 거야!”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정말로 스페인어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 나라에 끌리면 자연스레 언어에 관심을 가진다는 사실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한강 씨가 맨부커상을 수상하자 한국책을 잘 번역할 외국인을 확보하려면 한국의 매력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미국인인 이만열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21세기북스)에서 재미있는 방법을 제안한다. 미국 아이들의 비밀 코드로 한글을 소개한다는 것. 가령 ‘Meet me at school’(학교에서 만나)을 소리나는대로 한글로 ‘미트 미 앳 스쿨’이라고 쓰면 부모는 읽을 수 없는 자신들만의 비밀 메시지 작성법이 된다. 이렇게 한글과 놀다 보면 친숙해질 거라고 상상했다. 뭐든 재미있어야 푹 빠진다. 한국 문화와 언어에 흥미를 느끼게 만들 참신한 방법을 찾아 나설 때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기회야, 인생아, 나는 늘 늦게 깨닫지만, 그래서 후회도 많이 하지만, 가끔은 너희들의 뒤통수를 보며 웃기도 한단다. 안 잡을게. 그러니 뒤통수에 머리 길러도 괜찮아.” 지난달 경기 파주출판도시에 자리한 교보문고 본사 회의실. 김연수의 산문집 ‘지지 않는다는 말’의 한 구절이 울려 퍼졌다. 여기저기서 “오, 좋은데요” “통과, 통과!”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특정 주제에 맞춰 책과 소품을 소개하는 큐레이션 코너인 ‘편집샵: K’의 5차 회의. 모바일인터넷영업팀 과장 대리 사원 등 1∼10년 차 직원 10명이 모여 ‘청춘’을 주제로 각자 골라온 책 속 문장 88개 가운데 30개를 골라내고 있었다. 낱권의 책이 아니라 주제별로 좋은 책 여러 권을 추천받고 싶어 하는 독자들의 요구가 커지는 현상을 반영한 것. 최근 서점가에서는 독자가 관심 있는 주제를 깊이 있게 파고들 수 있고, 서점은 책을 여러 권 판매할 수 있어 큐레이션에 공을 들이는 추세다. 편집샵: K가 탄생한 것도 이 때문이다. 온라인에서 운영하는 편집샵: K는 책 내용이나 저자가 아니라 문장을 먼저 보여 준 뒤 책을 소개한다. 호기심을 자극해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겠다는 전략이다. 올해 3월 ‘처음’을 주제로 시작됐다. 페이지뷰는 하루 평균 3000건에 달했다. 주제는 두 달 만에 업데이트된다. 이달 18일 공개된 두 번째 주제가 바로 ‘청춘’이다. 이날 회의는 한 사람씩 문장을 낭송하고 다 같이 평가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익재 과장이 “결국 강조하는 메시지는 ‘당신은 지금도 청춘입니다’라는 겁니다. 여기에서 벗어난 건 뺍시다”라고 설명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끝이 어딜까/너의 잠재력.” 하상욱의 시집 ‘서울 시’에 나온 구절이 낭송되자 곧바로 “오케이” “확 와 닿아요”라는 반응이 나왔다. 황은정 과장이 “제목이 ‘치약’이라는 걸 알면 더 재미있을 텐데요”라고 말하자 ‘와하하’ 웃음이 터졌다. 문장을 고른 뒤 ‘청춘’과 어울리는 소품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소품은 책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책을 매개로 한 복합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한다는 의미가 있다. 파격, 불안, 여행, 연애 등 네 가지 ‘청춘’ 관련 테마에 맞춰 스니커즈, 여권지갑, 스케이트보드 등 아이디어가 쏟아졌다. 주제부터 최종 문구와 소품을 정해 온라인에 올리기까지 10여 차례의 회의를 거친다. 이 과장은 “도서정가제 시행으로 가격 유인책이 약화돼 책 자체의 매력을 ‘핫하게’ 알리는 게 더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예스24는 ‘기획’이라는 꼭지로 일주일에 두 번씩 주제별 책을 소개한다. 이달에는 ‘기억해야 할 5·18민주화운동’ ‘지도 보고, 역사 보고!’ ‘온 가족이 함께 읽는 그림책&동화책’을 주제로 한 책을 선보이고 있다. 알라딘은 독자 개개인의 구매 성향을 분석해 좋아할 만한 책을 추천하는 ‘추천마법사’를 2010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빅 데이터를 돌려 선정하는데 갈수록 기법이 정교해져 독자들 사이에서 “꽤 용하다”는 말이 나온다. 파주=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노벨 문학상 다음으로 권위 있는 문학상을 받았다.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강 씨의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에 한국인은 환호했다. 출판 관계자들도 놀라움과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채식주의자’는 17, 18일 단 이틀 만에 교보문고, 예스24, 알라딘, 인터파크에서 모두 3만 권이 훌쩍 넘게 팔렸다. 종이책이 동나자 독자들은 전자책으로 몰리고 있다. ‘채식주의자’를 출간한 창비는 그야말로 수상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한데 정작 창비는 영국 런던 시상식장에 직원을 한 명도 보내지 않았다. 창비는 수상 소식이 이미 다 알려진 17일 오전 11시경에야 수상 내용과 한 씨, 번역자 데버러 스미스 씨의 약력 등이 간단히 적힌 자료를 냈을 뿐이다. 창비 관계자는 “수상 가능성은 높게 봤다. 하지만 한 씨가 시상식에 요란하게 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 스타일이어서 직원을 보내지 않았다”며 “시상식 초청장을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 씨의 일정은 영국 출판사인 포르토벨로가 챙겼다. 맨부커상 수상은 침체된 한국 문학계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이미 독자들은 뜨겁게 반응하고 있다. 그러나 창비의 행보를 보면 너무 소극적이란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현장에 직원을 한 명이라도 파견해야 했다는 건 ‘작가를 모시라’는 뜻이 아니다. 세계적인 문학상을 받는 현장을 지켜보고 해외 언론의 분위기와 독자들의 반응을 확인하라는 것이다. 이는 국제적 감각을 높일 수 있는 귀중한 경험이고 출판사로서도 큰 자산이 된다. 한국 작가가 앞으로도 큰 상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독자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좋을지를 런던 현장에서 발견할 수도 있다. 설사 한 씨가 상을 못 탔어도 이런 적극성을 갖고 임할 필요가 있었다. 출판계는 독자들이 줄고 있다며 지원을 호소한다. 지원과 격려를 받으려면 그에 합당한 책임을 다해야 한다. 하지만 정작 출판계의 빅이벤트가 떠올랐는데도 소극적 행보에 그치고 있는 창비의 모습을 보노라면 아쉽기만 하다. 한국 문학의 세계 진출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는 요즘, 출판사들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다시 한번 고민해 보길 바란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한강 씨의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은 한국 문학의 세계적 위상을 확인시켰다. 조정래 은희경 이승우 신경숙 정유정 등 여러 작가의 작품이 해외로 진출했다. 한국문학번역원은 2001년부터 문학을 포함해 인문 아동 분야에서 모두 863종의 책이 30개 언어로 번역돼 출간됐다고 18일 밝혔다. 하지만 한국 문학의 해외 진출은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한국 문학이 국경을 넘어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려면 풀어야 하는 과제를 관련 전문가 10명에게 물었다.》○ 수준 높은 ‘메신저’를 찾아라 이들은 수준 높은 번역자를 확보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꼽았다. 한 씨의 맨부커상 수상에 데버러 스미스 씨의 정교하고 매혹적인 번역이 일등공신 역할을 한 것이 이를 입증한다. 능력 있는 번역자를 양성하려면 한국 문화의 매력을 널리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견(5명·복수 응답)이 많았다. 소설가 이승우 씨는 “한국인이 외국의 정서와 문화적 감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외국인이 한국 문학을 공부하게 하려면 문화의 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실제 각종 통계에 따르면 유럽에서 아시아에 대해 공부하는 학생의 경우 선택하는 나라는 중국이 60%, 일본이 30%이고 한국은 소수에 그친다. 주일우 문학과지성사 대표는 “한국 문화를 좋아해 문학에 관심을 갖는 외국인이 수만 명이 되면 그중에서 훌륭한 번역자가 나올 여지가 커지지 않겠느냐”고 했다. 학위를 주는 번역대학원을 설립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한국문학번역원은 7개의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2년 과정의 번역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이를 학위를 수여하는 대학원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는 것. 해외의 한국학 대학을 지원하는 방법도 제안했다.○ 다양하면서도 탄탄한 콘텐츠 발굴 훌륭한 번역자가 있어도 탄탄한 콘텐츠가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법. 흥미로운 작품을 탄생시키려면 한국에서만 존재하는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는 의견(4명)이 적지 않았다. 김성곤 한국문학번역원장은 “독자들은 ‘장미의 이름’ ‘다빈치 코드’ ‘반지의 제왕’처럼 지적이고 재미있는 작품을 원하는데 한국에서는 추리소설이나 판타지소설을 열등하게 여겨 재능 있는 작가들이 도전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반지의 제왕’을 쓴 존 로널드 톨킨은 옥스퍼드대 교수였고, ‘나니아 연대기’의 저자인 클라이브 스테이플스 루이스는 케임브리지대 교수였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형용사와 부사를 중시하는 작법에서 벗어나 스토리를 짜임새 있게 구성하는 훈련도 요구된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채식주의자’는 폭력과 자유라는 인간 본연의 문제를 거식증과 채식이라는 현대적인 소재로 풀며 인간이 나무로 변한다는 신화적 해석을 담았다”며 “외국인에게 익숙하고도 낯선 이야기를 접하는 경험을 선사했다”고 말했다. 단편 중심의 국내 문학을 장편으로 변화시키는 것도 관건이다. ○ 해외 교류와 독자의 애정이 세계화의 자양분 국내외 작가와 출판사 간의 교류도 확대돼야 한다. 세계 문인과 출판사들과 자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눠야 세계 문학의 흐름을 파악하고 국제적 감각을 키울 수 있다는 것. 소설가 김중혁 씨는 “한국에 어떤 작가가 있는지 해외 출판 에이전시나 출판사 등이 알아야 작품도 알려질 수 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든든한 버팀목은 독자들의 관심이다. 곽효환 대산문화재단 상무는 “문학의 세계화는 한국의 정신과 삶의 체계가 세계로 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독자들이 문학을 가까이 하는 것이 한국 문학의 세계화에 밑바탕이 된다”고 당부했다. 손효림 aryssong@donga.com·조종엽 기자 }

한강 씨(46)의 맨부커상 수상에 대해 문학계와 독자들은 한국 문학의 위상을 높인 쾌거라며 기뻐했다. 세계적으로 한국 문학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질 것이라는 기대도 드러냈다. 김성곤 한국문학번역원장은 “드라마, 팝 등 대중문화로 형성된 한류의 물줄기에 문학도 동참하게 됐다. 한국 작가가 해외에 수월하게 진출할 디딤돌이 생겼다”고 말했다. 실제 영국과 미국에서는 ‘채식주의자’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과거에는 외국에 한국 작가를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최근에는 한국 작가를 소개해 달라며 각국 출판사들이 문을 두드리고 있다. 김 원장은 “미국 영국 프랑스는 물론이고 러시아 체코 폴란드 등의 출판사에서 실력 있는 작가의 책을 내고 싶다는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윤철호 한국출판인회의 회장은 “한국 작가도 세계 독자를 사로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줬다”며 “문학에서 이룬 성취가 인문, 사회과학 등으로도 이어져 세계적인 책이 나오는 출발점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침체된 문학계에 활기를 불어넣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채식주의자’의 판권을 수출한 KL매니지먼트의 이구용 대표는 “한국 작가가 세계적인 작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며 “많은 작가가 해외에 적극 진출하고 독자들의 관심도 높아지면 국내 문학계에 활력이 더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독자들도 수상을 축하하는 글을 올리고 있다. 인터넷에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오르한 파무크를 제치고 상을 받다니. 어찌나 기쁘던지 눈물이 핑 돌더라”, “소설은 잘 안 읽지만 기념 삼아, 축하 삼아 ‘채식주의자’는 한 권 사야겠다” 등 축하 글이 이어지고 있다. 한 독일 교포는 “김정은 소식이 1면을 장식하던 독일 신문들 속에서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 소식이 가득 보여 참 반갑다”고 썼다. ‘채식주의자’ 판매도 급증하고 있다. 교보문고에서는 17일 하루 만에 4500여 권이 판매돼 전국 지점의 책이 모두 동났다. 책을 사고 싶다는 고객의 문의도 빗발쳤다. ‘소년이 온다’ ‘바람이 분다, 가라’ 등 한 씨의 다른 작품도 800여 권이 나갔다. ‘채식주의자’는 온라인서점 예스24에서 6900권 넘게 팔렸다. 판매량이 전날의 38배로 급증한 것. 알라딘에서도 하루 만에 3500여 권이 판매됐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문학은 언어의 장벽을 넘을 수 없잖아요. 번역이 그 장벽을 넘게 해주죠. 번역 작업을 지켜볼 때마다 경이로워요.” 한강 씨(46)는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데버러 스미스 씨(29)에 대한 고마움을 이렇게 표현했다. ‘채식주의자’의 해외 진출과 수상에는 스미스 씨의 공이 컸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그는 문학 번역가가 되고 싶어 21세에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영국에 한국어 전문 번역가가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틈새시장을 개척한 것. 하지만 한국인을 만나거나 한국 음식을 먹어본 적도 없었던 그는 “한국어를 선택한 것은 스스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미스터리”라고 했다. 그는 런던대에서 한국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스미스 씨는 자발적으로 ‘채식주의자’ 20쪽을 번역해 영국의 유명 출판사인 포르토벨로에 보냈다. 이 작품에 매료된 이유에 대해 “사회 금기에 도전하는 잔혹하고도 지극히 시적인 작품”이라고 말했다. 8년간 한국어를 공부해 예술적이고 세련되게 번역을 할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서는 영문학을 전공하며 강도 높게 읽고 쓰는 훈련을 한 것이 밑바탕이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를 지켜본 이들은 문학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것 같다고 말한다. 그의 한국어 말하기 실력은 아주 능숙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출판사 역시 작품성을 알아봤다. 섬세하게 번역된 ‘채식주의자’를 본 순간 맥스 포터 포르토벨로 수석편집자는 “완벽하게 설득당해 성공을 확신했다”고 술회했다. 시인이기도 한 포터 씨는 영국의 대표적 시인의 이름을 딴 딜런 토머스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스미스 씨는 5·18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한 한 씨의 소설 ‘소년이 온다’도 번역해 올해 초 영국에서 출간했다. 외국인이 5·18민주화운동을 잘 모른다는 점을 고려해 이 운동의 정치 사회적 배경을 설명하는 역자 서문을 실어 작품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했다. 스미스 씨는 번역 문학책을 내는 전문 출판사 틸티드 액시스를 최근 설립했다. 안도현 씨의 ‘연어’를 비롯해 배수아 씨의 ‘에세이스트의 책상’ ‘올빼미의 없음’ ‘서울의 낮은 언덕들’도 번역했다. 다음 달 열리는 서울 국제도서전에 참석한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테러, 석유, 난민, 여성 억압…. ‘아랍’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떠올리기 쉬운 말들이다. 아랍은 파편화된 이미지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아랍의 현재가 어떻게 탄생했고 왜 이렇게 복잡다단한 정치 지형을 갖게 됐는지 찬찬히 들여다보길 원하는 이에게 딱 맞는 책이 나왔다. 레바논 베이루트와 이집트 카이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하버드대에서 중동 역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저자는 아랍이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 1516년부터 2011년 아랍 혁명까지를 다룬다. 서구 중심이 아니라 아랍인의 시각에서 역사를 서술하려 애썼다. 오스만 제국에 이어 영국, 프랑스 등 서구의 지배를 받게 된 아랍인들은 강력 저항하지만 신식 무기와 강력한 군대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힘없던 아랍인에게 새로운 무기로 떠오른 건 석유였다. 아랍이 국제무대에서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슬람의 힘을 믿는 정치 세력이 강해지면서 이슬람주의 테러 세력이 형성됐다. 영국과 프랑스가 물러났지만 독재에 신음하던 아랍인들은 2011년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등에서 억압에 맞서 일어났다. 오랜 기간 무력감에 젖어 있던 아랍인들이 인권과 안전, 경제 성장을 누리려면 스스로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랍의 봄’은 그렇게 왔다. 대규모 전투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얼굴을 가리지 않은 매춘부가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하던 18세기의 풍경 등이 풍성하게 펼쳐져 당시 시대상을 폭넓게 이해할 수 있다. 영국에 맞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던 여성, 최초의 이집트 페미니스트 등 가려져 있던 여성들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이슬람이 출현한 후 7세기부터 다섯 세기 동안 아랍인은 세계의 주역이었다. 이는 이슬람 신앙을 가장 잘 실천했을 때 아랍인이 최고였다고 주장하는 이슬람주의자들에게 큰 의미를 가진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아랍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대목이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오래전 런던의 한 박물관에서 돌 조각상을 손으로 가만가만 만지는 시각장애인 소녀를 봤다. 또 다른 소녀는 조각상을 설명하고 있었다. 작품을 이렇게도 감상할 수 있구나! 놀라웠다. ‘슈베르트와 나무’(고규홍 지음·휴머니스트)는 나무 인문학자와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 김예지 씨가 1년간 나무를 만지고, 냄새 맡고, 잎사귀를 스쳐온 바람을 느끼는 시간을 담았다. 나무로 만든 정교한 악기를 연주하는 이와 나무 전문가의 만남은 그 자체로 절묘했다. 김 씨는 목련 꽃봉오리를 손가락으로 느끼며 말한다. “한 생애를 마친 열매는 아주 단단해요. 새로 다음 생애를 시작하려는 꽃봉오리는 말랑말랑하네요. 꽃봉오리 안쪽에는 틈이 많은가 봐요. 새 생명을 탄생시키려면 그런 틈, 여유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뭇잎이 푸른 요즘 촉각과 후각, 청각을 통해 만난 세상에 대한 깊은 사유를 선물처럼 받았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그리스 도시 테베에는 동성애자 부대가 있었다고 해요. … ‘화랑세기’에 보면 신라 시대 화랑들도 서로 동성애적인 관계를 맺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장면이 많이 등장합니다. 물론 ‘화랑세기’ 자체가 소설에 가깝지만요.” 바로 옆에서 이야기해 주듯 한국적 시각에서 서양미술사를 정리한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이야기(난처한 미술이야기)’ 1, 2권이 나왔다. ‘상인과 미술’ ‘그림값의 비밀’ 등을 낸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49·사진)가 썼다. 1권은 원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미술을, 2권은 그리스·로마 문명과 미술을 각각 다뤘다. 모두 8권 시리즈를 낼 예정이다. 양 교수는 사회평론 출판사 편집자들을 대상으로 4년 가까이 강의해 이를 구어체로 정리했다. 강연 내용을 책으로 내는 경우는 많지만 책을 위해 장기간 별도의 강의를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양 교수는 “쉽게 읽히면서도 입문서를 넘어서는 깊이를 담으려 애썼다”고 말했다. 책은 한국 미술이 세계 미술과 어떻게 조우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원시 미술 이야기를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 유물인 빗살무늬 토기로 시작하고, 인도 동쪽에는 주먹도끼를 만들 능력이 없었다는 학설을 뒤집어 세계를 놀라게 한 경기 연천의 주먹도끼도 다룬다.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이 독일 명예의 전당인 발할라, 미국 링컨 기념관, 백악관은 물론이고 덕수궁 석조전에까지 영향을 미친 점을 짚어냈다. 그는 “석조전은 시대적 과업이었던 근대화를 건축적으로 구현해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과 비전을 담았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3권 ‘기독교 미술’은 올해 12월에, 4권 ‘르네상스 미술’은 내년 6월에 나올 예정이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방우영 조선일보 상임고문(사진)이 8일 오전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8세. 방 고문은 올해 초 심근경색으로 혈관 이식 수술을 받은 뒤 회복하던 중 합병증이 갑자기 악화됐다. 1928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일제강점기 조선일보를 인수해 사장을 지낸 계초 방응모 선생의 손자이자 방일영 전 회장의 동생이다. 서울 경신고, 연희전문학교(연세대의 전신) 상과를 졸업했다. 1952년 조선일보 공무국 견습생으로 입사해 8년간 사회부, 경제부 기자로 일했다. 1970년 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으며 1993년 회장이 됐다. 2003년 명예회장에 이어 2010년 상임고문으로 추대됐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선영 여사와 아들 성훈 스포츠조선 대표이사 발행인 겸 조선일보 이사, 딸 혜성 윤미 혜신 씨, 사위 서영배 태평양개발 회장, 정연욱 경남에너지 대표이사 부회장이 있다. 방상훈 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은 고인의 조카다. 빈소는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됐으며 영결예배는 12일 오전 8시 병원 영결식장에서 열린다. 장지는 경기 의정부시 입석로 선영. 문의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02-2227-7550, 조선일보사 02-724-5114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8일 별세한 방우영 상임고문(88)은 조선일보 사장과 회장을 지내며 조선일보의 성장을 이뤄낸 신문경영인이었다. 고인은 스스로를 “언론인이 아니라 신문인”이라며 “좋은 신문을 만들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일꾼”이라고 말했다. 1952년 조선일보에 입사한 후 사회부, 경제부 기자를 지냈으며 1960년 조선일보 계열사인 아카데미극장 대표를 맡았다. 1962년 조선일보 상무로 복귀해 발행인을 거쳐 전무 대표이사가 됐고 1970년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하며 성장의 초석을 다졌다. 고인은 제호 빼고는 모두 바꾸라며 개혁을 단행했고, 1960년대 초반 10만 부를 밑돌던 조선일보 발행부수는 가파르게 늘어났다. 고인은 재정 독립을 못 하면 언론 자유를 누릴 수 없다고 강조했다. 또 1980년 월간조선을, 1990년에는 스포츠조선을 각각 창간해 매체 다각화에 나섰다. 스스로 다양한 특집기사, 연재소설, 인터뷰 등 아이디어를 내 지면의 변화를 시도했다. 1983년 시작해 23년간 6702회 게재되며 한국 언론 사상 최장 칼럼 기록을 세운 ‘이규태 코너’도 고인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일본 출장을 다녀올 때면 수십 권씩 책을 사다 주며 칼럼 집필을 독려하는 등 용인술도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1993년 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 자리를 형 방일영 전 회장의 장남이자 조카인 방상훈 씨에게 물려주고 고인은 대표이사 회장이 됐다. 2008년 팔순 기념으로 언론계 생활을 담은 회고록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를 펴냈다. 고인은 “밤새 전쟁을 치르듯 만든 신문이 전해지는 매일 아침, 신문을 펼치는 독자들이 우리 신문에 만족할지 언제나 가슴이 떨렸다”고 회고했다. 고인이 논설위원들에게 비판 정신을 강조하며 던진 “욕먹을 각오하라우”라는 말은 유명하다. 올해 1월에는 미수(米壽)를 기념해 ‘신문인 방우영’을 펴냈다. 또 다른 저서로는 ‘조선일보와 45년’(1998년)이 있다. 국민훈장 모란장·무궁화장,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독일 1등십자공로훈장 등을 받았고 고당조만식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 연세대 재단 이사장, 대한골프협회 명예회장 등을 지냈다. 영결예배는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영결식장에서 12일 오전 8시에 치러진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병원에서 나오는데 봄꽃이 활짝 피었더라고요. 진짜 화사하게요. 갑자기 너무 속상해서 그만 주저앉고 싶데요….” 쓰러진 남편을 입원시킨 여인은 멍한 눈으로 말했다. 굳세게 버텨 왔는데…. 꽃은 그런 거다. 우리 곁에서 축복과 위안을 주는 동시에 눈부신 아름다움 때문에 고통을 너무도 또렷하게 대비시키는 존재.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에서 생물학을 전공하고 곤충학 박사 학위를 받은 저자는 그야말로 꽃의 모든 것을 담고자 애썼다. 꽃의 기원을 다룬 초반부에 겉씨식물, 속씨식물, 씨방, 수분 등이 등장한다. 학창 시절 생물 수업의 기억을, 먼지 쌓인 다락방에서 끄집어내듯 되살린다. 생물학적 지식을 열정적으로 전달하는 부분을 지나면 비로소 꽃과 관련된 역사, 문화, 예술의 세계가 펼쳐진다. 조지 워싱턴은 독립전쟁 중에도 편지를 써서 정원사에게 단풍나무, 월계수, 사시나무를 심으라고 지시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정원에서 농작물과 곡류로 실험을 거듭했고, 토머스 제퍼슨의 채소밭에는 호박, 양배추가 늘 자리 잡고 있었다. 꽃과 벌은 뗄 수 없는 사이. 꿀벌을 길러 아침마다 구운 토스트에 걸쭉한 꿀을 발라 먹는 저자는 칸쿤, 메리다 등이 있는 멕시코 남부 지역에 가면 세계에서 가장 맛 좋은(본인 기준이다) 꿀 ‘수난카브’를 만날 수 있다고 소개한다. 문학, 미술 작품에 등장한 꽃은 셀 수 없을 정도다. ‘햄릿’에서는 자살한 오필리아의 무덤에 제비꽃이 피어나길 축원한다. 당시엔 좋은 사람의 무덤엔 제비꽃이 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세계화는 화훼산업도 비켜가지 않았다. 매년 항공기나 트럭을 통해 운반되는 꽃은 150억 송이에 달한다. 미국인이 밸런타인데이에 연인에게 선물하는 꽃은 대부분 콜롬비아, 에콰도르, 코스타리카에서 재배된다. 꽃은 향수의 주재료이기도 하다. 에스티로더의 향수 ‘뷰티풀’에는 꽃을 포함해 무려 700여 개의 성분이 들어 있다! 의외의 사실도 적잖다. 성행위 체위를 다룬 인도의 책 ‘카마수트라’에는 화관 만드는 법, 꽃으로 침상을 장식하는 법도 나온다. 1997년 뉴질랜드에서 여성을 성폭행한 용의자는 사건 현장 지역에만 있는 웜우드(쑥의 일종)의 꽃가루가 옷에서 대량으로 발견돼 결국 8년형을 선고받았다. 이처럼 강력사건 해결의 열쇠가 되기도 하는 꽃가루는 잘 부패되지 않아 수백만 년 전의 암석에서도 채취된다. 낯설고 새로운 이름의 꽃들과 생물학적인 구조, 수많은 지역과 곤충의 역할 등 방대한 지식을 꼼꼼하게 읽어내려면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꽃을 전방위로 추적해온 저자의 안내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의 삶 속에 꽃이 이토록 깊게 뿌리내리고 있었나 싶어 새삼 주위를 돌아보게 된다. 보라색 라벤더 꽃이 펼쳐진 들판으로 유명한 미국 애리조나 레드록 라벤더 농장, 연분홍색 로즈드메가 가득한 그리스 근교의 장미 재배지를 묘사한 대목을 보노라면 그곳으로 훌쩍 떠나고 싶다. 저자가 직접 찍은 꽃 사진들은 원서에도 흑백으로 처리돼 실제 색감이 어떤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원제는 ‘The Reason for Flowers’.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