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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은행에 왜 돈을 넣어요? 금리가 15%밖에 안 되는데….” 최근 인기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보다 새삼 놀랐던 대사다. 바둑기사 택이의 우승 상금을 어디에 투자할지를 놓고 이웃들이 한마디씩 거드는 장면에서 나온다. 금리 1% 시대인 요즘 도무지 상상하기 힘든 고금리인데도 28년 전엔 상황이 전혀 달랐던 것이다. 이른바 3저(저금리, 저유가, 저환율) 호황이 빚은 당시 사회풍경이다. #2. “금수저가 여기 있었구먼.” 초등학생 아이를 둔 대학동창 모임에서 은행을 다니는 친구가 최근 셋째를 가졌다고 했다. 자녀 1∼2명이 대부분인 동창들은 이구동성으로 금수저, 흙수저를 운운했다. 셋째를 낳는 게 마치 부의 상징처럼 돼 버린 시대에 우린 살고 있다. 흔히 한국 경제의 미래를 내다보려면 일본 경제를 공부하라고 한다. 인구구조나 경제시스템이 서로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에 가려진 인구절벽의 심각성을 실증적으로 파헤치고 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 파란색 알약을 선택하는 네오처럼, 저자는 경제성장이 주는 환상에서 깨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른바 ‘낙수효과’로 인구감소에 따른 생산감소를 상쇄할 수 있다는 것은 허구라는 주장이다. 부의 분배가 제대로 이뤄지는지 여부를 차치하고도 경제성장이 소비감소→내수침체→소비감소의 악순환을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 각지의 소매 판매액이나 신차 판매대수, 화물 운송량 등은 잃어버린 10년 동안 오히려 상승세였지만 거시경제가 호전된 2000년대 들어 꺾이기 시작했다. 국내총생산(GDP) 등 거시경제 지표와 각 개인의 실질 소비활동이 따로 놀고 있는 셈이다. 이 현상들의 원인은 고령화에 따른 생산가능 인구의 감소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인구감소 흐름은 이미 일본 사회 곳곳을 크게 변화시키고 있다. 주거수요 자체가 줄다 보니 한국처럼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통했던 부동산의 가치가 크게 떨어졌다. 부동산이 투자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면서 이를 대신해 미술품이나 고급차, 명주(名酒), 음반 등 빈티지 라벨이 붙는 사치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저자는 “일본 사회에서 문화와 디자인이 차지하는 지위가 해마다 높아질 것”이라고 예상한다. 인구절벽의 거대한 흐름에 맞서 경기침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해결책은 없을까. 저자는 고령의 부유층에서 젊은층으로 소득을 이전시켜 소비 위축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구감소를 막을 수 없다면 개개인의 씀씀이라도 늘려서 벌충해야 한다는 논리다. 특히 출산이 가능한데 당장 자산이 부족한 젊은이를 지원해야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예컨대 연공서열에 따른 급료 체계를 억제하고, 자녀를 키우는 젊은 직원들에 대한 기본급을 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소비의 질을 개선한다는 차원에서 방향은 맞지만 당장 원가절감에 급급한 기업들이 이를 수용할지는 미지수다. 저자도 이 점을 감안한 듯 기업 입장에서 젊은 직원의 소득을 늘려 소비를 촉진시키는 게 장기적으로 이득이기 때문에 이를 깨닫고 실행에 옮기라고 주문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동북아역사지도 폐기 논란이 법정 다툼으로 비화될 조짐이다. 교육부 산하기관인 동북아역사재단은 서강대 산학협력단과 동북아역사지도 편찬위원회의 최종보고서 재심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12일 양측에 통보했다. 이에 따라 서강대 협력단은 법무법인을 통해 재단 측의 연구비 회수 조치에 대한 소송과 최종보고서 접수 거부가 부당한 행정행위임을 주장하는 행정소송을 검토하고 있다고 13일 밝혔다. 편찬위원장인 윤병남 서강대 교수(사학)는 “재단의 12일 공문을 일종의 파이널(마지막 통보)로 보고 있다”며 “이제 남은 것은 법적 절차밖에 없다”고 말했다. 재단은 곧바로 소송에 나서기보다 상급기관인 교육부를 통한 압박에 나설 방침이다. 김호섭 재단 이사장은 “25일부터 시작되는 교육부 감사에서 동북아역사지도 관련 사항이 다뤄질 것”이라며 “서강대 협력단이 연구비 회수 조치에 응하지 않으면 교육부가 협력단에 제재를 가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앞서 재단은 8년 동안 47억 원의 국가 예산이 투입된 동북아역사지도에 대해 “지도학적 기본을 갖추지 못했다”며 부실 판정을 내리고 연구비 회수를 결정했다. 반면 협력단과 편찬위는 이 같은 재단 결정에 불복해 지난해 12월 30일 재심을 요청했다. 이와 관련해 협력단과 재단의 상반된 주장은 진실게임으로 번지고 있다. 협력단 측은 투영법과 축척, 지명 표기 등에서 지도의 기본 요건이 충족되지 않았다는 재단 주장에 “편찬 과정에서 지리학자들의 조언을 받았으며 지도를 폐기할 정도의 부실은 없다”는 입장이다. 연구비 부정 사용에 대한 주장도 엇갈린다. 재단은 “협력단 측이 책임연구원 수당을 부정 지급하는 등 연구비 사용 규정을 위반한 사실이 다수 발견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협력단과 편찬위는 “회계 처리는 규정에 따라 적법하게 이뤄졌다”고 반박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경북 울진 성류굴에서 발견된 신라시대 명문이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명문은 성류굴 출구 위쪽 석회암에 새겨진 38자로 한 글자의 크기는 대략 가로 3cm, 세로 4cm가량 된다. 해서체로 석회암이 흘러내려 30여 자만 대략적인 판독이 가능한 상황이다. 금석문 전공 학자들은 ‘신라 진흥왕 4년 3월 8일 대나마(大奈麻·신라 관등)가 울진 성류굴에 다녀왔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성류굴은 고려 말기 이곡이 쓴 탐방기와 조선시대 김시습의 시, 겸재 정선의 그림 등 오랜 세월 문인과 예술가들의 창작 소재가 됐다. 이 명문을 발견한 박홍국 위덕대 박물관장은 “성류굴 입구 주변 암벽에는 이번에 발견된 명문 외에도 종유석에 덮여 있는 문자들이 여럿 보인다”며 “이에 대한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2년 전 취재차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출장을 갔을 때 일이다. 전형적인 대학도시인 버클리 시 곳곳에서 유독 도요타 프리우스가 눈에 많이 띄었다. GM이나 포드, 크라이슬러와 같은 미국 빅3 차량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미국인들은 통상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등 큰 차를 선호하는 편인데 상대적으로 왜소한 프리우스가 버클리에 많은 이유가 궁금했다. 현지에서 만난 한국인 교직원은 “버클리 시민들은 한국의 이른바 ‘강남 좌파’와 비슷한 성향을 갖고 있다”며 “자신들의 높은 환경 의식을 뽐내려고 같은 배기량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싼 프리우스를 사는 게 유행”이라고 말했다. 이 책은 미국 대중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자동차들을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자동차 전문기자답게 각 차량의 개발 뒷이야기와 당대 미국인들의 반응 등을 맛깔나게 정리했다. 차가 단순한 상품에 그치지 않는 것은 자동차 대중화가 자본주의 대량소비 문화를 열어젖힌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런 관점에서 20세기를 대표하는 자동차로 포드의 모델 T를 꼽는다. 헨리 포드의 대표작인 모델 T는 자동차는 사치품이라는 대중의 인식을 처음 깨뜨렸다. 포드 시스템이라는 독창적인 생산 방식을 통해 1924년 대당 260달러까지 가격을 낮춘 게 결정적이었다. 부품 교환 시스템을 혁신해 자동차 수리비도 확 낮췄다. 이 과정에서 포드는 고급차 개발을 요구하는 주주들과 결별하고 편법으로 자신의 회사 지분을 크게 늘리는 모험을 감행했다. 비싸게 팔아야 이윤이 많이 남는다는 상식에 구애받지 않은 포드의 독특한 판매 철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저자는 “모델 T에 의해 미국은 이동성 사회로 탈바꿈했고 중산층이 형성될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도요타 프리우스 개발 과정도 눈길을 끈다. 도요타는 1990년대 초반 세계 최대 자동차 시장인 미국에서 SUV가 각광을 받을 때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도요타는 후발주자가 되는 길을 택하지 않고 친환경차 개발이라는 역발상으로 승부를 띄웠다. 특히 고정관념에서 탈피하기 위해 소음을 줄이는 연구만 주로 하고 신차 개발 경험이 전무했던 엔지니어 우치야마다 다케시에게 개발 책임을 맡기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한 것도 주효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수컷 육식공룡들이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구애 행위를 벌인 흔적이 처음 발견됐다. 문화재청 산하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중생대 백악기 육식공룡인 아크로칸토사우루스가 짝짓기를 위해 땅을 긁는 구애 행위의 흔적이 담긴 화석을 미국 콜로라도주 델타시 국가보존지역에서 발견했다”고 7일 밝혔다. 이 화석은 국립문화재연구소와 미국 콜로라도대 공동연구팀이 2012년 6월 발견했다. 연구팀은 4년 동안 화석의 생성 원인을 집중 연구해 네이처 자매지인 사이언티픽 리포트(Scientific Reports)에 7일(미국 현지시간) 논문을 게재했다. 구애 행위 화석은 1억 년 전 중생대 백악기 지층에서 발견됐다. 연구소는 이번 발견이 수컷 공룡의 구애 행위를 비교해 암컷이 상대를 선택하는 진화론의 ‘성적 선택(sexual selection)’을 보여주는 세계 최초의 근거임을 강조하고 있다. 얼핏 땅을 긁은 흔적으로만 보이는 이 화석을 구애 행위로 보는 결정적인 근거는 해당 지역에서만 50여 개의 유사한 흔적이 무더기로 발견됐다는 점이다. 통상 공룡과 진화론적으로 유사성이 있는 조류에서도 바다오리 등이 땅을 긁어 가짜 둥지를 짓는 식의 짝짓기 행태를 보인다. 연구팀은 이 화석이 둥지나 영토표시 수단일 가능성도 검토했지만, 알이나 오줌 흔적 등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이번 연구를 추진한 것은 경남 고성 등 국내 공룡화석 산지의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등재를 위한 포석이다. 우리나라는 남해안 공룡화석 산지들에 대해 2009년 등재 신청서를 냈지만, 발자국 화석은 공룡 뼈에 비해 보존가치가 떨어진다는 지적이 제기돼 중간에 신청을 철회했다. 이에 따라 지표에 남겨진 발자국 등 흔적화석도 높은 학술적 가치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미국 콜로라도대에 공동연구를 제안했다. 이번 연구를 주도한 임종덕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은 “이번 연구는 우리나라의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등재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8년간 70여 명의 중견 학자가 참여해 완성한 동북아역사지도가 폐기 수순을 밟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교육부 산하기관인 동북아역사재단(이하 재단)은 지난달 18일 동북아역사지도 편찬 연구 용역을 수행한 서강대 산학협력단에 “지도에 하자가 있다”며 최종 보고서 접수를 거부한 것으로 최근 확인됐다. 이와 함께 재단은 연구 용역비 잔금 1억5000만 원을 지불할 수 없으며, 지난해 이미 지급된 3억5000만 원을 모두 회수하겠다고 통보했다.》동북아역사지도는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응하기 위해 고대부터 근대까지 한민족의 역사 강역을 시대별로 표기한 것이다. 2008년부터 총 47억 원의 국가 예산이 투입됐다. 서강대 산학협력단은 “재단의 일방적인 조치를 수용할 수 없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산학협력단은 역사·고고학계 교수 72명으로 구성된 동북아역사지도 편찬위원회를 구성해 지도를 제작해 왔다. 협력단은 또 최종 보고서에 대한 재심사를 지난해 12월 30일 재단에 요구했으나 양측 입장 차가 뚜렷해 보고서가 통과될 가능성은 낮다. 재단이 산학협력단에 통보한 동북아역사지도 하자 이유는 △옛 지명에서 한글 표기가 빠져 있고 △동북아 전도(全圖)에서 한국이 부각되지 않은 점 △부적합한 투영법 등 지도 제작기법상의 지적 사항이 대부분이다. 장석호 재단 역사연구실장은 “지리학을 전공한 전문가들이 따로 심사한 결과 기술적으로 만족할 수준의 지도가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다”며 “지도의 역사적 내용과는 무관한 결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산학협력단은 역사지도의 핵심인 역사적 사실 혹은 강역 등에 오류가 있다면 수용할 수 있지만, 지도 제작기법상의 이유로 8년의 연구 성과를 폐기하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동북아역사지도 편찬위원장을 맡은 윤병남 서강대 교수(사학)는 “재단의 지적 사항은 오류 차원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들”이라며 “지엽적인 문제를 갖고 내린 극단적인 결정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학계는 국회에서 불거진 한사군(漢四郡) 위치 논란이 재단 결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고 있다. 한사군은 기원전 108년 중국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킨 뒤 설치한 통치기구. 동북아역사지도 최종본에는 사학계의 통설에 따라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에 표기돼 있다. 앞서 지난해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을 비롯한 재야 사학계는 “한사군은 요서 지방에 있었다”며 “한사군을 한반도 북부에 표기하는 것은 일제 식민사학을 계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난해 4월 열린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위에서도 여야 정치인들이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했다. 한사군을 둘러싼 논쟁이 정치권까지 비화되자 김호섭 재단 이사장은 지난해 11월 열린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위에서 “동북아역사지도 검토 과정에서 고조선 영역이나 한군현 위치 등이 문제로 지적됐다”며 “한사군 한반도 북부설과 요서설을 모두 소화하도록 연구 중”이라고 했다. 그러나 산학협력단에 참여한 학자들을 비롯한 주류 학계는 재야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한사군 요서설은 학술적 근거가 희박하다고 본다. 특히 평양에서 일제강점기부터 낙랑군 고분과 목간 등이 무더기로 발굴되는 등 명확한 고고학적 증거를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노중국 계명대 명예교수는 “한사군 논란이 문제라면 공개적인 학술 토론을 벌이면 될 일”이라며 “학자들의 오랜 연구 성과를 식민사학으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기다란 총을 어깨에 걸친 일본군 병사가 위압적인 자세로 정문을 지키고 있다. 고풍스러운 한옥 기둥에 한자로 또렷하게 ‘한국주차군사령부’라고 새긴 현판이 걸려 있다. 대한제국 시기 미국인 윌러드 스트레이트가 1904년경 찍은 대관정(大觀亭·현 서울 중구 소공동) 정문 풍경이다. 당시 일본군이 점령했던 대관정 정문 사진이 공개된 건 처음이다. 일본군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 체결을 앞두고 대한제국 영빈관이던 대관정을 점령했다. 고종이 거주한 함녕전을 내려다보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는 위치에 대관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파대사 신분으로 한국에 온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와 함께 대관정에 머물면서 조약 체결을 진두지휘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1904∼1905년 로이터통신 특파원과 미국 부영사를 지낸 스트레이트가 찍거나 수집한 사진 174점을 모아 ‘코넬대 도서관 소장 윌러드 스트레이트의 서울 사진’ 도록을 최근 발간했다. 스트레이트는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직후 특파원으로 한국을 처음 찾았다. 그는 1905년 6월 미국공사관 부영사로 부임해 당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의 방한을 준비했다. 스트레이트는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서울 풍경을 사진으로 담고 엽서와 보고서, 일기 등을 자료로 남겼다. 이번에 발간된 도록에는 1905년 촬영한 덕수궁 수옥헌(漱玉軒·현 중명전)의 측면 사진도 포함돼 있다. 미국공사관 앞뜰에서 서쪽 방향으로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수옥헌의 정면 사진만 전할 뿐 측면 모습이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수옥헌은 복원을 거쳐 현재 전시관으로 쓰이고 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기다란 총을 어깨에 둘러 맨 일본군 병사가 위압적인 자세로 정문을 지키고 있다. 고풍스런 한옥 기둥에 한자로 또렷하게 ‘한국주차군사령부’라고 새긴 현판이 걸려있다. 대한제국 시기 미국인 윌러드 스트레이트가 1904년경 찍은 대관정(大觀亭·현 서울 중구 소공동) 정문 풍경이다. 당시 일본군이 점령했던 대관정 정문 사진이 공개된 건 처음이다. 일본군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 체결을 앞두고 대한제국 영빈관이던 대관정을 점령했다. 고종이 거주한 함녕전을 내려다보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는 위치에 대관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파대사 신분으로 한국에 온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와 함께 대관정에 머물면서 조약 체결을 진두지휘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1904~1905년 로이터통신 특파원과 미국 부영사를 지낸 윌러드 스트레이트가 찍거나 수집한 사진 174점을 모아 ‘코넬대학교 도서관 소장 윌러드 스트레이트의 서울 사진’ 도록을 최근 발간했다. 스트레이트는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직후 특파원으로 한국을 처음 찾았다. 그는 1905년 6월 미국공사관 부영사로 부임해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의 방한을 준비했다. 스트레이트는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서울 풍경을 사진으로 담고 엽서와 보고서, 일기 등을 자료로 남겼다. 이번에 발간된 도록에는 1905년 촬영한 덕수궁 수옥헌(漱玉軒·현 중명전)의 측면 사진도 포함돼 있다. 미국공사관 앞뜰에서 서쪽 방향으로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수옥헌의 정면 사진만 전할 뿐 측면 모습이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수옥헌은 복원을 거쳐 현재 전시관으로 쓰이고 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1. 소나무에 걸터앉은 고승에게 불경을 손수 바치는 원숭이. 털이 수북한 짐승이지만 무릎을 꿇고 경을 올리는 자세가 사뭇 경건하다. 조선 말기 화단을 주름잡은 오원 장승업이 그린 ‘송하고승도(松下高僧圖)’다. #2.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까. 마치 벌을 서는 아이처럼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머리 위로 뻗어 올린 원숭이가 재밌다. 짙은 눈썹에 동그란 눈망울이 귀여우면서도 연민을 유발한다. 청자로 제작한 원숭이상 아래는 사각형의 도장이 붙어 있다. 12세기 고려시대 제작된 ‘원숭이 모양 청자 인장(靑磁 猿形印章·호림박물관 소장)’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이 병신년(丙申年) 원숭이의 해를 맞아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특별전을 열고 있다. 원숭이가 등장하는 옛 회화작품과 도자기, 탈, 벼루 등 총 70여 점을 선보인다. 우리 전통문화에서 때론 재주꾼으로, 때론 길상(吉祥)의 동물로 여겨진 원숭이의 다양한 의미를 조명했다. ‘1부 여러 이름 원숭이’에서는 신체의 특징에 따라 다른 명칭으로 불린 원숭이를 알아본다. ‘2부 십이지동물 원숭이’에선 조선 후기 벼루인 ‘석제음각십이지문사각연(石製陰刻十二支文四角硯·호림박물관 소장)’을 통해 십이지 동물로서 원숭이의 의미를 짚어본다. ‘3부 길상동물 원숭이’는 송하고승도와 안하이갑도(眼下二甲圖) 등 회화 작품과 각종 공예품을 통해 출세와 장수, 모성애, 벽사((벽,피)邪) 등을 상징한 원숭이를 만날 수 있다. 다음 달 22일까지. 02-3704-3155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한때 방송사로 파견돼 취재기자로 일하면서 궁금한 게 하나 있었다. ‘이미지와 텍스트가 대중에게 어떻게 전달되는가.’ 확실히 사건의 뒷이야기는 1분 30초짜리 방송 리포트로 생생하게 전달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대형 참사 현장은 장문의 글보다 팬(pan·카메라를 고정시킨 상태에서 좌우로 돌려가면서 촬영하는 기법) 영상을 한 번 보여주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이 책은 시각 이미지가 사회, 문화의 맥락에서 어떻게 형성되고 이용되는지를 보여준다. 시각이 단순히 지각하는 차원을 뛰어넘어 한 사회의 문화적 스펙트럼에 의해 규정된다는 사실을 그림, 영화, 사진 등 다양한 이미지를 통해 규명한다. 저자는 사람들이 이미지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데 별 거리낌이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미지는 텍스트 등 다른 매체에 비해 인위적으로 가공됐다는 느낌을 배제하는 힘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이미지를 통해 믿는 대상이 실은 외부에서 주어진 산물일 수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대표적인 사례로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중세 회화인 ‘일곱 가지 대죄와 네 가지 종말’을 들고 있다. 이 그림에서 분노와 교만, 음욕, 나태, 탐식, 인색, 금전 탐닉, 질투의 일곱 가지 죄악이 수난의 그리스도를 원을 그리며 둘러싸고 있다. 그림 밑에는 ‘나는 그들에게서 나의 얼굴을 감추고 그들의 끝이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리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저자는 “이 그림에서 그리스도의 시선은 관람객을 종교적으로 규율하는 힘을 지녔다”고 해석한다. 이미지가 사회적 신념이나 관습, 대상, 의례와 직결돼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벼랑 위의 잿빛 원숭이가 소나무 가지를 꺾어 게를 향해 내밀고 있다.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영장류답게 가지로 게를 잡으려는 속셈이다. 수묵화로 그린 원숭이의 움직임이 생생하다. 조선 후기 회화 작품인 ‘안하이갑도(眼下二甲圖·고려대박물관 소장)’의 한 장면이다. 민물이나 바다에서 사는 게를 절벽 위의 원숭이가 사냥하는 설정이 다소 뜬금없기까지 하다. 조선시대 사대부가에서는 과거를 준비하는 자손들에게 게를 잡는 원숭이 그림을 자주 선물했다. 나름의 독특한 축원의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해석은 이렇다. 한자로 원숭이 후(후)는 제후 후(侯)자와 음과 획이 비슷해 높은 관직을 뜻한다. 여기에 게를 지칭하는 갑(甲)자는 과거에서 1등(장원)을 가리킨다. 결국 원숭이가 게를 잡는 것은 과거에서 장원 급제해 높은 벼슬에 오르라는 기원인 셈이다. 이처럼 원숭이는 우리 전통문화에서 재주가 많고 영리한 영물(靈物)로 통했다. 각종 그림과 문방구, 도자기 등에 등장하는 원숭이는 출세 혹은 벽사((벽,피)邪)를 상징한다. 설화와 가면극에서 원숭이는 재주꾼으로 등장한다. 원숭이의 해인 내년 병신년(丙申年)을 앞두고 천진기 국립민속박물관장이 ‘한국 문화에 나타난 원숭이의 상징성’ 논문을 최근 발표했다. 이 논문에 따르면 12간지에서 아홉 번째인 원숭이는 선사시대부터 친숙한 동물이었다. 실제 평양 상원군 검은모루 동굴과 충북 청원군 두루봉, 제천 점말 동굴 등에서 원숭이 뼈가 발견됐다. 신라시대 무덤에 원숭이 토우(土偶·사람이나 동물, 기물 등을 흙으로 빚은 것)가 부장될 정도로 원숭이는 유사 이래 길상(吉祥)의 상징물로 받아들여졌다. 신라 토기 파편에 붙어 있는 원숭이는 얼굴과 몸체를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해 눈길을 끈다. 가야금을 타는 원숭이 토우도 재주꾼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원숭이는 부모 자식 간의 깊은 사랑을 표현할 때도 자주 애용된 소재다. 고려시대 청자나 연자 등에는 원숭이 모자상이 유독 많이 보인다. 예컨대 12세기 고려시대 청자원형연적(靑磁猿形硯滴·간송미술관 소장)이나 청자모자원형서체(靑磁母子猿形緖締)는 어미 원숭이가 새끼를 품에 안고 있는 형상을 담아냈다. 흔히 창자가 끊어지는 커다란 슬픔을 뜻하는 단장(斷腸)도 새끼 원숭이를 잃고 애통한 나머지 목숨을 잃은 어미 원숭이를 다룬 중국 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원숭이의 유별난 새끼 사랑이나 공동체 의식은 동물학적으로도 근거가 있다. 마다가스카르에 서식하는 링테일여우원숭이는 새끼가 태어나면 온 무리가 흥분 상태로 돌입하면서 앞다퉈 새끼를 안아주거나 혀로 핥아주는 행위를 한다. 털 다듬기 등 애무 빈도를 측정한 친밀도 조사에서도 어미와 새끼의 수치가 가장 높게 나타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열쇠구멍 무덤이 고대 한일 문화교류의 미스터리를 푸는 열쇠가 될까?’ 한 해를 불과 이틀 남긴 29일 국립경주박물관. 연휴 직후 세밑인데도 한일 고대사 전공자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기념한 ‘일본의 고훈(古墳·고분의 일본어 발음) 문화’ 특별전에 이례적으로 일본 국보 29점과 중요문화재(한국의 보물급) 197점 등 총 380점이 모습을 드러낸 것. 전시장 곳곳에는 나라(奈良) 현, 시가(滋賀)현, 오사카(大阪) 등 일본 방방곡곡에 산재된 열쇠구멍 모양의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사진이 여럿 걸려 있었다. 전방후원분은 이름 그대로 앞쪽은 사다리꼴, 뒤쪽은 원형으로 만들어진 무덤을 말한다. 우리나라 삼국시대와 겹치는 서기 4∼6세기 일본 고훈 시대에 성행했다. 일본 열도에서만 수천 기의 전방후원분이 발견돼 일본 고유의 독특한 묘제로 분류된다. 그런데 우리나라 전남 일원에서도 소수이지만 비슷한 형태의 무덤이 1980년대부터 속속 확인되고 있다. 광주 월계동(月桂洞) 1, 2호분과 전남 영암군 자라봉 고분 등으로 한국 학자들은 전통악기의 모양을 빗대 장고형(長鼓形) 고분으로 부른다. 성낙준 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장은 “전남 지역 장고형 무덤과 여기 부장된 분구 장식 토기는 일본 열도의 전방후원분을 연상케 한다”며 “서로 연관성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1. 한 쌍의 금빛 봉황이 긴 꼬리를 치켜세우며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가로 9.7cm, 세로 13.4cm의 금동(金銅) 판에 새긴 봉황은 볏부터 발톱까지 정교하게 묘사돼 한 폭의 아름다운 자수를 방불케 한다. 봉황 장식 상단의 고리 부분을 신라 금 세공품에서 흔히 보이는 심엽형(心葉形·하트 모양) 장식으로 꾸몄다. 이것은 일본 나라 현 후지노키 무덤에서 출토된 말띠드리개(행엽·杏葉)다. #2. 마치 두 개의 산이 서 있는 것처럼 금동관의 세움 장식(立飾) 한 쌍이 금빛을 뿜어낸다. 관테와 장식을 온통 뒤덮은 꽃잎 모양의 달개는 신라 금관을 떠올리게 한다. 후지노키 무덤에서 발견된 금동관을 복원한 것이다. 이번 특별전에서 가장 화려한 부장품으로 관람객들의 이목을 사로잡은 것은 단연 6세기 후반 조성된 후지노키 무덤의 말갖춤(마구·馬具) 유물들이다. 모두 일본 국보로 지정됐다. 재밌는 건 일본인들은 기원후 3세기까지 말을 기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저 화려한 금빛 말갖춤 유물들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고고학자들은 고훈 시대 중기인 5세기부터 일본 열도에 말이 보급되기 시작했으며, 이 무렵 말갖춤은 가야와 백제, 신라 등에서 들여온 것으로 본다. 따라서 후지노키 무덤의 말갖춤 유물도 한반도, 이 중에서도 특히 신라와 백제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분석된다. 일본 열도에서 한반도로 전해진 게 전방후원분이라면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건너간 문물은 후지노키 무덤에서 빛을 발한 셈이다. 내년 2월 21일까지. 054-740-7542경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벼랑 위의 잿빛 원숭이가 소나무 가지를 꺾어 게를 향해 내밀고 있다.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영장류답게 가지로 게를 잡으려는 속셈이다. 수묵화로 그린 원숭이의 움직임이 생생하다. 조선후기 회화 작품인 ‘안하이갑도(眼下二甲圖·고려대박물관 소장)’의 한 장면이다. 민물이나 바다에서 사는 게를 절벽 위의 원숭이가 사냥하는 설정이 다소 뜬금없기까지 하다. 조선시대 사대부가에서는 과거를 준비하는 자손들에게 게를 잡는 원숭이 그림을 자주 선물했다. 나름의 독특한 축원의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해석은 이렇다. 한자로 원숭이 후(猴)는 제후 후(侯)자와 음과 획이 비슷해 높은 관직을 뜻한다. 여기에 게를 지칭하는 갑(甲)자는 과거에서 1등(장원)을 가리킨다. 결국 원숭이가 게를 잡는 것은 과거에 장원 급제해 높은 벼슬에 오르라는 기원인 셈이다. 이처럼 원숭이는 우리 전통문화에서 재주가 많고 영리한 영물(靈物)로 통했다. 각종 그림과 문방구, 도자기 등에 등장하는 원숭이는 출세 혹은 벽사(辟邪)를 상징한다. 설화와 가면극에서 원숭이는 재주꾼으로 등장한다. 원숭이의 해인 내년 병신년(丙申年)을 앞두고 천진기 국립민속박물관장이 ‘한국 문화에 나타난 원숭이의 상징성’ 논문을 최근 발표했다. 이 논문에 따르면 12간지에서 아홉 번째 인 원숭이는 선사시대부터 친숙한 동물이었다. 실제 평양 상원군 검은모루 동굴과 충북 청원군 두루봉, 제천 점말 동굴 등에서 원숭이 뼈가 발견됐다. 신라시대 무덤에 원숭이 토우(土偶·사람이나 동물, 기물 등을 흙으로 빚은 것)가 부장될 정도로 원숭이는 유사 이래 길상(吉祥)의 상징물로 받아들여졌다. 신라 토기 파편에 붙어있는 원숭이는 얼굴과 몸체를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해 눈길을 끈다. 가야금을 타는 원숭이 토우도 재주꾼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원숭이는 부모 자식 간의 깊은 사랑을 표현할 때도 자주 애용된 소재다. 고려시대 청자나 연자 등에는 원숭이 모자상이 유독 많이 보인다. 예컨대 12세기 고려시대 청자원형연적(靑磁猿形硯滴·간송미술관 소장)이나 청자모자원형서체(靑磁母子猿形緖締)는 어미 원숭이가 새끼를 품에 안고 있는 형상을 담아냈다. 흔히 창자가 끊어지는 커다란 슬픔을 뜻하는 단장(斷腸)도 새끼 원숭이를 잃고 애통한 나머지 목숨을 잃은 어미 원숭이를 다룬 중국 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원숭이의 유별난 새끼사랑이나 공동체 의식은 동물학적으로도 근거가 있다. 마다가스카르에 서식하는 링테일여우원숭이는 새끼가 태어나면 온 무리가 흥분상태로 돌입하면서 앞 다퉈 새끼를 안아주거나 혀로 핥아주는 행위를 한다. 털 다듬기 등 애무 빈도를 측정한 친밀도 조사에서도 어미와 새끼의 수치가 가장 높게 나타난다.김상운 기자sukim@donga.com}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은 내년 2월 21일까지 ‘강진 사당리 고려청자’ 테마전을 연다. 이 전시에서는 ‘청자 참외 모양 병’ 등 총 200점의 고려청자 유물을 선보이고 있다. 1부 ‘발굴의 실마리, 청자 기와’에서는 사당리 가마터 발굴의 계기가 된 청자 기와를 조명한다. 수키와와 암키와, 수막새, 암막새, 상감 청자판(靑磁板) 등은 당시 고려청자가 건축분야에서 폭넓게 쓰였음을 보여준다. 2부 ‘색, 형, 무늬의 향연’에서는 당대 중국에서도 높게 평가한 고려청자의 오묘한 비색(翡色)의 신비를 파헤친다. 3부 ‘흑과 백, 화려한 장식’에선 상감, 철화, 철채 등 고려청자의 다양한 제작기법을 소개한다. 02-2077-9522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한때 취재원들과 술을 자주 마신 적이 있다. 그때 술에 대한 심리가 ‘스톡홀름 신드롬’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평소 술에 약한 체질이라 다음 날이면 남들보다 더 고약한 숙취에 시달렸다. 급기야 건강검진 때 지방간 수치를 확인하면서 긴장하게 됐다. 술이 원수다 싶었지만 어느 순간 오랫동안 술을 마시지 않으면 뭔가 아쉬운 마음에 집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가해자를 원망하다 결국 그와 심리적으로 공감하고 유대감을 이루는 인질처럼 말이다. “술집에서 보내는 시간은 우리 몸과 뇌의 행동을 이해하는 결정적 지점”이라는 저자의 지적은 이 점에서 일리가 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술을 마시는 게 결코 단순한 행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술을 빚는 단계부터 이를 마시고 숙취에 이르는 과정 전반을 생물학과 화학, 의학, 심리학 등 과학을 동원해 흥미롭게 풀어낸다. 술의 발효를 일으키는 효모의 발견이 생화학의 등장으로 이어진 과정이 특히 눈길을 끈다. 곡식이 발효를 거쳐 알코올 성분으로 변한다는 사실은 수천 년 전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효모의 존재는 불과 100여 년 전에야 확인됐다. 재밌는 것은 당시 효모의 작용 기제를 놓고 화학자와 생물학자가 상대방을 비방하며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는 사실이다. 실험실에서 인공적으로 물질을 합성해 내는 데 골몰한 화학자들은 효모가 살아있는 생물이라는 주장을 마치 사이비 과학처럼 여겼다. 하지만 물리학에서 빛의 입자론과 파동론 논쟁처럼 효모 논쟁도 두 시각이 모두 옳았음이 결국 드러났다. 살아있는 효모 세포 안에 들어 있는 특정한 화학물질이 발효를 일으키는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효모 세포 안 화학물질이 어떤 작용을 일으키는지 규명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과학 분야인 생화학이 태동했다. 효모가 술을 만드는 과정은 진화론 관점에서도 의미 있는 고찰이 가능하다. 마치 사람 손에 길들여져 늑대와 구분되는 유전 변이를 일으킨 개처럼 효모도 끊임없는 개량을 거쳤다는 것이다. 예컨대 덴마크 유명 맥주회사인 칼스버그는 맛있는 라거 맥주가 담긴 술통의 효모를 추출하는 데 지속적으로 공을 들였다. 양조 과정은 비교적 과학적으로 규명됐지만 숙취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숙취의 원인이 아직 밝혀지지 않다 보니 해소법도 확실치 않다. 술을 깨는 데 헛개나무나 콩나물이 좋다는 식의 구전만 분분할 뿐이다. 단, 해장술의 효과는 어느 정도 과학적 근거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술에 포함된 극히 소량의 메탄올이 포름알데히드와 같은 유해물질로 분해되기 전에 또 다른 술이 몸에 들어가면 소변을 통해 메탄올 성분을 그대로 배출시킬 수 있다는 설명이다. 술꾼들의 아침 해장술이 경험에서 우러난 삶의 지혜일 수도 있는 셈이다. 물론 아침 해장술만 믿고 계속 술을 마시다간 더 큰 해악에 시달릴 수 있다는 걸 저자는 분명히 경고한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고대 일본인들은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신라를 ‘눈부신 금은의 나라’로 묘사했다. 흔히 황금의 나라 신라를 상징하는 유물로 화려한 금관(金冠)이 손꼽힌다. 하지만 신라 금관은 마립간(왕)이 살아있을 때 머리에 쓰던 것인지, 아니면 이집트 투탕카멘 무덤에서 발견된 ‘데스마스크’에 가까웠는지조차 규명되지 않을 정도로 관련 사실들이 베일에 싸여 있다. 최근 발표된 논문에서 신라 금관의 오랜 미스터리를 풀어줄 실마리 하나가 발견됐다. 신용비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신라 금관의 성분조성 분석’ 논문에서 신라시대 금관의 금 순도가 후기로 갈수록 떨어진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현존하는 신라 금관 6개의 금 함량 비율을 모두 조사한 것은 처음이다. 신라 금관은 금과 은의 합금으로 구성돼 있다. 이 논문에 따르면 가장 이른 시기인 5세기 중엽 제작된 교동 금관의 ‘세움 장식(입식·立飾)’ 금 순도가 89.2%로 제일 높았다. 가장 늦은 6세기 초반에 제작된 천마총(83.5%)과 금령총(82.8%), 서봉총 금관(80.3%)의 순도는 이보다 낮았다. 공교롭게도 늦게 만들어진 금관일수록 금의 순도가 낮아지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이다.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분석된다. 하나는 5세기 이후 신라가 가야 등 주변국에 대한 정벌에 나서면서 정복지의 지배층을 회유하는 수단으로 금 장식품을 대거 하사한 결과라는 것이다. 즉, 이 시기 금에 대한 수요가 높아져 금이 귀해지자 은을 더 많이 첨가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5세기 후반부터 가야 멸망 직전까지 신라는 국력의 한계로 지방관을 직접 정복지에 파견하지 못했다”며 “지방 지배층의 충성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금귀고리나 금제 허리띠 등을 내려보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의견은 금관 제작 양식 자체의 변화에서 원인을 찾는다. 후기로 갈수록 신라 금관의 크기가 커지면서 무게를 줄이는 동시에 강도를 높이기 위해 은을 더 많이 넣었다는 주장이다. 흔히 금-은 합금에서 은의 비율이 높아지면 순금에 비해 강도가 더 높아진다. 함순섭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순금으로만 제작된 금관은 자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휘어지기 쉽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것은 금관의 부위별로 금 순도가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예컨대 금관 밑에 달리는 금귀고리에서 중심고리(주환·主環)의 금 순도는 100%에 가까운 반면, 서봉총 금관의 머리 부분을 감싸는 반구형 십자(十字) 장식은 73∼74%에 불과하다. 학계 일각에선 중심고리는 금을 동그랗게 말아야 하기 때문에 순도를 높여야 하지만, 반구형 장식은 머리에 직접 닿는 부분으로 강도를 높이기 위해 순도를 낮춘 것으로 본다. 여기서 신라 금관의 생전 사용설과 ‘데스마스크’설이 경합한다. 서봉총 금관의 반구형 장식이 십자로 길게 교차하는 이유를 놓고 해석이 제각각인 것이다. 함순섭 학예연구관은 “상투를 튼 머리를 감안해 반구형 장식을 길게 뽑은 것”이라며 “다른 신라 금관들도 안쪽에 비단이나 가죽을 덧대 생전에 머리 위에 썼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이한상 교수는 “서봉총 발굴 보고서를 보면 발굴 당시 금관 아랫부분과 목걸이 윗부분이 겹쳐 놓여 있었다”며 “이것은 마치 ‘데스마스크’처럼 시신이 금관을 머리 아래로 내려 썼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서울 풍납토성 발굴조사에서 해자(垓子)가 처음 발견됐다. 해자는 성벽 주위를 고랑으로 둘러싼 일종의 방어시설이다. 이번에 발견된 해자는 한성 백제 시대인 서기 3∼4세기경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 동쪽 성벽 외곽 발굴조사에서 해자가 처음 발견됐다”고 21일 밝혔다. 학계는 풍납토성을 백제시대 왕성(王城)으로 보고 있다. 고대 왕성의 구조상 해자의 존재는 일찍부터 추정됐지만 구체적인 실체가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전체적으로 역사다리꼴 모양의 해자는 윗부분의 폭이 13.8m, 아래 폭 5.3m, 깊이 2.3m 규모다. 해자는 풍납토성 외벽 아래의 동서 10m 길이의 펄층에서 발견됐다. 이곳에서는 3세기 후반∼4세기 초반 제작된 토기 편이 여럿 출토돼 풍납토성 구조와 축조 시기를 밝혀낼 단서를 얻을 수 있게 됐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일제강점기에 활동하면서 전통 회화의 맥을 이은 의재 허백련(1891∼1977)의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전시회가 내년 2월 21일까지 국립광주박물관에서 열린다. 의재는 추사 김정희와 소치 허련, 미산 허형을 잇는 대표적인 남종화가로 사회교육가로도 활동했다. 산수화는 물론이고 사군자와 서예 등에 두루 능한 화가였다. 이번 전시에서는 1부 ‘가계와 생애’에서 의재의 가계와 성장배경 등을 조명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 한학과 서화를 익힌 뒤 일본에서 그림을 배웠다. 2부 ‘사승과 교유’에선 의재의 학문과 교유 관계를 설명했다. 3부 ‘예술세계’에서는 산수화 등 그의 여러 대표작을 소개한다. 062-570-7031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신라 황금문화의 영광을 보여줄 국립춘천박물관의 ‘신라의 황금문화’ 특별전이 최근 개막돼 내년 1월 24일까지 이어진다. 문화재계에서 호평을 받았던 국립경주박물관의 ‘신라의 황금문화와 불교미술’ 특별전 전시 유물과 강원지역 신라 금동관, 불상 등을 함께 선보인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국보 제87호로 지정된 금관총 금관을 비롯해 천마총, 황남대총 등에서 발굴된 국보, 보물급 유물 등 총 200여 점이 전시된다. 신라 황금문화를 상징하는 금관총 출토 금제 허리띠와 천마총 출토 금제관모(사진), 금제관식도 소개된다. 1부 ‘황금의 나라 신라’에서는 신라의 활발한 국제교류를 보여주는 이국적인 유물을 선보이고, 2부 ‘불국토의 나라 신라’에서는 경주와 지방에서 융성했던 불교문화의 흔적을 보여준다. 이어 3부 ‘신라의 황금문화, 그 후’에서는 한동안 잊혀졌으나 일제강점기 발굴로 다시 빛을 본 신라 고분과 유물을 조명한다. 033-260-1537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올해 문화재계의 가장 큰 이슈 중 하나는 경주 월성 발굴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후 방문한 첫 발굴 현장으로 월성을 택했다. 월성 발굴은 한국 고고학계의 해묵은 숙제와도 같았다. 앞서 박정희 대통령 재임 시절 수립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 월성 발굴이 이미 포함돼 있었지만, 당시 역량으로는 무리라는 지적이 제기돼 여태 미뤄진 것. 특히 월성 발굴은 광복 70주년과 맞물려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21년 금관총, 1926년 서봉총 발굴 등 초기에 일본 학자들이 주도한 신라 고분과는 달리 온전히 우리 학계의 역량이 동원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증도가자 진위 논란은 하반기 문화재계의 뜨거운 이슈였다. 현존 최고 금속활자인 직지심체요절보다 증도가자가 최소 138년 이상 앞선다는 주장이 2010년 나왔지만, 출처가 불분명하다는 지적이 학계에서 잇달아 제기됐다. 게다가 올 10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증도가자와 고려활자로 분류된 청주 고인쇄박물관 소장 금속활자 7개가 모두 가짜라는 검증 결과를 내놓으면서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이어 남권희 경북대 교수가 증도가자가 맞다는 증거로 제시한 성분분석에서 자연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Tc(테크네튬)이 검출된 사실도 드러났다. 논란이 커지자, 현재 문화재청은 국립문화재연구소 연구보고서에서 증도가자와 고려활자로 각각 판정한 102개 금속활자에 대해 재조사를 진행 중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