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주성하 기자

동아일보 콘텐츠기획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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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관련 사이트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http://nambukstory.com)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zsh75@donga.com

취재분야

2025-06-23~2025-07-23
칼럼41%
남북한 관계40%
경제일반10%
산업3%
여행3%
기타3%
  • 평양 호위사령부 출신의 서울 자율방범대 대장[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서울 강서구 가양3동 자율방범대 대장 강윤철. 그의 경력은 특이하다. 북한 호위사령부 경보대대 군인 출신이다. 평양에서 김 씨 일가의 안전을 지키던 그는 지금은 30명의 대원을 이끌고 저녁에 2~3시간씩 순찰을 하며 서울 시민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강서구 의용소방대 대원으로 각종 소화기 점검을 도맡아하고 있다. 동 주민자치회 회원도 겸하고 있다. 이런 일들은 모두 자원봉사다. 그의 실제 직업은 공공기관 차량 담당 공무원이다. 호위사령부 군인 출신인 강 씨가 15명을 데리고 한국까지 탈북해 오기까지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그가 태어난 세상 강 씨는 1983년 북한 양강도 혜산에서 태어났다. 집안과 출신 성분은 매우 좋았다. 할아버지 형제 중 한 명은 북한에서 최상위 출신 성분인 항일 열사였다. 외가도 좋았다. 양강도 풍산 혁명박물관에 가면 강 씨의 친가나 외가 가족사진이 많이 걸려 있다고 한다. 그가 태어났을 때 집안에는 중앙당 고위 간부로 있는 친척도 많았다. 부친의 이모부는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 산하의 주체사상연구소 책임간부였다. 황 전 비서와 가장 많이 싸웠다는 이유로 망명 사건이 있은 후에도 건재했다. 큰 외삼촌은 해군대학 학장이었고, 다른 외삼촌 한 명도 도당 책임비서 사위였다. 강 씨의 할아버지는 은행 지배인, 아버지는 군수공장 휴양소 소장을 지냈다. 이런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고난의 행군은 그의 집안을 빗겨가지 않았다. 전적으로 국가 배급에 의존해 살았던 그의 집도 쌀이 떨어졌다. 어머니가 잘 사는 친척집을 다니며 쌀을 구해 집으로 가져왔다. 어린 강 씨도 가끔 어머니와 함께 쌀 구하러 갔는데, 이 과정에서 역전에 뒹구는 시신도 많이 보았다. 그러나 그의 어린 시절을 지배하는 기억은 역전에서 강도를 당했던 일이다. 엄마와 길을 떠난 어느 날 다리에 배낭끈을 묶고 대합실 의자에서 잠깐 잠이 든 사이 누군가 끈을 자르고 도시락 등이 든 배낭을 훔쳐간 것이다. 망연자실해 있는데 어떤 남자가 잃어버린 배낭을 메고 앞으로 왔다갔다 했다. 엄마와 함께 벌떡 일어나 배낭을 찾으러 가려는 찰나 옆에 앉아 있던 낯선 사람이 이들을 잡았다. “저건 일부러 저러는 거다. 배낭 찾아 열어보면 너네 짐은 이미 없다. 그럼 저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도둑 누명을 씌웠다고 끌고 가 때리고 옷까지 다 벗겨간다.” 그 말을 듣고 관찰해보니 패거리로 보이는 일행 여럿이 힐끗힐끗 쳐다보고 있었다. 눈앞에서 자기 배낭을 보고도 찾지 못한 것이다. 열차가 도착해 좁은 개찰구로 나가며 아수라장이 됐을 때, 아까 배낭을 훔쳐간 일당들이 이번엔 이쪽으로 옮겨왔다. 강 씨 눈앞에 있는 한 여인의 배낭 바닥을 면도칼로 쫙 긋자 통강냉이가 쏟아져 내렸다. 다른 강도가 마대를 받쳐 들고 잽싸게 그걸 담았다. 강 씨가 놀라 여인에게 알려주려 소리치려는 순간 엄마의 손이 그의 입을 막았다. 도둑 무리는 이들 모자를 내려다보며 비웃었다. 이날의 기억은 강 씨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게 내가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구나.”● 윤이상 특각 호위대원 출신 성분이 좋은 강 씨는 2002년 호위사령부에 입대했다. 2000년에 중학교를 졸업한 뒤 2년 군사전문학교를 더 다녔다. 군사전문학교는 군 입대 경력으로 쳐주기 때문에 힘 있는 집은 자식을 2년 더 끼고 있다가 군에 보낸다. 17살에 입대해 군에서 배를 곯는 것과 19살에 입대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2년만 집에서 더 잘 먹여도 키가 쑥쑥 자란다. 엄마는 아들을 해군에 보내고 싶어 했다. 외삼촌이 해군학장으로 있으니 미래를 보장해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들은 평양에서 살고 싶어 호위사령부를 지망했다. 엄마는 아들이 떠날 때 “그래도 평양에 가면 나무를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라며 안심했다. 양강도에 주둔하는 군인들은 나무를 하다가 다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강 씨는 신병훈련소에 입소한 첫 날 목이 가느다란 군인들이 큰 통나무를 메고 나르는 것을 보고 놀랐다. 평양의 호위사령부도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어 화목으로 썼다. 군사전문학교를 졸업한 덕분에 신병교육은 속성으로 마쳤다. 이후 호위사령부(963군부대) 642여단 2대대 소속으로 배치를 받았다. 그가 맡은 첫 임무는 평양 근교의 특각(초대소)들을 경비하는 일이었다. 그의 중대 경비 대상은 윤이상각과 노로돔 시하누크각이었다. 북한은 김일성과 친분을 가지고 북한을 수시로 드나든 한국 출신의 음악가 윤이상과 실각한 캄보디아 국왕 노로돔 시하누크를 위해 경치 좋은 곳에 전용별장을 특별히 지어줬다. 풍광 좋은 호수를 끼고 이런 특각들이 멀찍멀찍 자리 잡고 있었다. 관리인도 따로 있었고, 호위사령부에 뽑아온 수백 명의 젊은 청년들이 외부인이 접근하지 못하게 별장 경호를 했다. 가끔 오는 윤이상의 아내에게서 간식을 얻어먹었다는 구대원들의 경험담을 듣기도 했지만, 강 씨가 경비 설 때는 이 특각들은 텅텅 비어 있었다. 수백 명이 빈 집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는 몇 달 있지 못했다. 여단에 새로 창설한 경보대대로 옮겨갔던 것이다.● 군기 빠진 호위사령부 새 중대에 옮겨간 첫 날 아침 점검 시간부터 경악했다. 중대 병사 중 최고 직책인 사관장이 새 소대장이 왔다며 다 나오라고 소리쳤는데도 분대장들이 하나같이 아프다고 나오지 않았다. 한 병사를 보냈더니 좀 있다가 수염이 꺼먼 1분대장이 군복을 잘라 셀프로 만든 반바지에 슬리퍼처럼 변한 군화를 질질 끌고 나왔다. 화가 잔뜩 난 표정의 그의 손에는 권투 글러브 2개가 들려있었는데, 글러브 하나를 사관장 앞에 던지더니 “오늘 점검은 너랑 나랑 한판 해서 결판내자”고 소리쳤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분대장들은 입대 13년차였고, 사관장은 11년차였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군 병력 충원이 제대로 되지 않자 김정일은 북한군 복무 기간을 10년에서 13년으로 올렸다. 복무 기간을 마치고도 3년을 더 근무하게 된 군인들의 분노 앞에선 어떤 군기도 먹히지 않았다. 아침 점검을 해도 분대장들은 침대에 누워 나오지 않았고, 훈련에도 불참했다. 김정일을 지키는 정예부대라는 호위사령부의 군기가 그랬다. 그런 속에서도 강 씨는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천리 행군’, ‘2천리 행군’ 등을 거치며 군인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그의 군 복무는 5년 만에 중단됐다. 가을 농촌지원 때 감기 기운이 있어 아스피린을 먹었는데, 갑자기 배가 참을 수 없이 아파오더니 정신을 잃을 지경까지 됐다. 호위사령부 병원으로 옮겨 수술을 했다. 아스피린이 위궤양이 있는 자리에 붙었다며 위를 잘라냈다. 그리곤 이런 상태로는 군 복무를 더 할 수 없다며 감정제대(의가사제대)를 시켜 집으로 보냈다.● 김정은 전용 전화선 관리원 집에 돌아와 얻은 직장은 ‘921호 관리소’ 산하 75호 중계소였다. 이곳은 김정일의 전용 전화선을 관리하는 것이 임무였다. 북한은 전국에 김정일을 위한 전화선을 따로 묻고 관리했다. 혜산의 75호 중계소에만 25명이 근무했다. 김 씨 일가의 전화선 하나를 위해 전국에서 수많은 인력이 낭비되는 것이다. 전화선뿐만 아니라 김 씨 일가만 다닐 수 있는 전용도로, 비행장 등도 전국에 만들어졌다. 강 씨가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집도 강제 철거됐다. 김정일 전용 ‘1호 도로’를 건설해야 하는 구간에 있다는 이유였다. 921호는 좋은 직장이었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배급을 꼬박꼬박 줬고, 각종 사회동원에도 빠졌다. 그가 하는 일은 매일 8㎞ 담당 구간을 순찰하는 것이었다. 전화선은 땅속 1.5~3m 깊이에 묻혀 있었는데 누가 판 흔적은 없는지, 장마 때문에 흙이 유실된 것은 없는지 살펴보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이 일은 너무 무료했고, 시간을 내기도 어려웠다. 강 씨는 2008년 혜산예술극장 보위대로 이직했다. 시내 깨끗한 곳에서 근무할 수 있고, 밤에 근무를 하기 때문에 낮에는 자기 시간을 낼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었다. 혜산예술극장은 1999년에 화재로 전소된 뒤 새로 지은 신축 건물이었다. 반동들이 노린다며 예술극장 하나에도 보위대 겸 소방대 명목으로 20여명이 근무했다. 온 나라에 인력이 남아도는 것 같았다. 보위대는 원래 총을 들고 경비를 서야 한다. 하지만 예술극장만은 무기를 메고 경비를 서지 않았다. 예술인들이 무기를 보면 공포를 느껴 기량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군에 갔다 돌아오니 그새 혜산도 많이 변했다. 돈이 없으면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학교 동창들도 돈 있고 권력 있는 친구들끼리만 어울려 다녔다. 돈을 벌어야 했다.● 목숨 내건 동 장사 마침 그때 친구의 형이 동 장사를 하자고 제안했다. 동은 국가전략물자로 구분되기 때문에 밀수하다 걸리면 총살까지 당할 수 있는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남는 돈이 많았다. 당시 함흥에서 적동은 1㎏에 6위안, 황동은 4위안에 거래됐는데 혜산까지 가져오면 적동은 12위안, 황동은 10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친구 형은 아빠가 철도 경무부 간부였다. 철도 경무부는 여행하는 군인들을 단속하는 철도 헌병대라고 할 수 있다. 강 씨가 단속에 걸리지 않는 방법은 간단했다. 기차에 탈 때 군복을 갈아입는 것이었다. 철도 경무부가 군인 단속을 맡았기 때문에, 민간인들을 담당하는 안전원들은 군인을 단속할 수 없다. 뇌물을 미리 받은 경무원도 이들을 단속하지 않았으니 무사통과가 가능했다. 동을 가지고 혜산역에 내리면 경무원이 압수 물품이라며 기차에서 직접 내려 경무부 창고에 넣었다가 밤에 돌려주었다. 그렇다고 위험 부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가장 무서운 사람들은 함흥의 거래처 동 장사꾼들이었다. 강 씨가 처음 함흥에 가서 만난 동 장사꾼은 이들을 자기 집 지하실로 데리고 갔다. 강 씨는 지하실에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각종 동이 5톤 가량 쌓여 있었다. 자세히 보니 동으로 만든 부품도 있고, 전화선도 있고, 그릇도 있었다. ‘충성의 꼬마계획’ 과제를 통째로 그 지하실에 옮겨온 듯 싶었다. 북한은 학생들에게 매년 1인당 폐동 몇 ㎏, 폐철 몇 ㎏, 토끼가족 몇 개 하는 식으로 과제를 준다. 이것을 충성의 꼬마계획이라고 부른다. 선생들이 학생들을 끊임없이 닦달질해 받아내면 간부들이 그걸 빼내서 동 장사꾼들에게 팔아먹는 것이다. 강 씨와 형 친구는 지하실에서 하루 종일 교대로 함마를 휘둘렀다. 모양이 다른 동 쪼가리들을 두드려 40~45㎏짜리 네모 모양으로 압착한 뒤 그걸 박스에 담았다. 둘이 보통 두 박스, 80~90㎏를 나른다. 한 번 거래한 집은 다시 가지 않는다는 것이 이들의 원칙이었다. 동 장사꾼은 동을 팔아먹은 뒤 뇌물을 준 안전원을 시켜 이들을 잡게 한다. 안전원은 뇌물 먹어 좋고, 불법 동 밀수꾼을 잡아 실적도 올려 좋다. 동 장사꾼은 동을 다시 돌려받아 다른 곳에 판다. 이런 사기 수법을 북한에선 ‘창 맞는다’고 한다. 강 씨도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이럴 경우를 대비해 똑같은 박스 4개를 준비한 뒤 작업을 마치자마자 미리 현지에서 섭외한 두 명에게 진짜 동 박스를 넘겨주었다. 그리고 자신들은 가짜 박스를 자전거에 싣고 출발했다. 아니나 다를까 안전원이 추격해 오더니 이들을 잡았다. 박스를 여니 다른 물건만 나왔다. 안전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2만 위안짜리 철도 안전원 동을 날라 오는 일은 1년 정도밖에 하지 못했다. 그들의 뒤를 봐주던 경무원들이 다른 사건에 휘말려 하나둘 사법처리가 됐다. 1년을 날라보니 뇌물이 많이 들어 생각보다 남는 것도 없었다. 소속 기관이 각기 다른 단속원들의 통제도 점점 심해졌다. 당시엔 정복을 입는 자리도 돈만 주면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었다. 철도 안전원이 제일 비쌌다. 각종 불법 이송을 눈감아주고 뇌물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자리여서 2만 위안을 뇌물로 줘야 했다. 단점은 자주 중앙 검열에 적발돼 수명이 길진 않았다. 혜산 안전부 소속 기동타격대에 입대하려면 1만 위안을 뇌물로 줘야 했다. 기동타격대는 폭동에 대비해 만든 조직인데, 역전을 포위하고 물건을 뺏는 일도 했다. 이들에게 잡히면 물건의 절반을 내놓아야 했다. 안전원(경찰)은 5000위안이었고, 보위부는 가격이 제일 싼데 2000~3000위안만 뇌물을 주어도 입대가 가능했다. 정치범을 잡는 조직이다 보니 뇌물을 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설령 정치범을 잡아도, 이런 죄는 뇌물을 받고 석방을 시킬 수도 없었다. 물론 보위부 반탐과는 밀수꾼을 잡기 때문에 이런 곳에 들어가면 엄청난 돈을 챙길 수 있지만, 이런 곳은 워낙 힘 센 사람들이 선점하고 있어 뇌물로 살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이런 사람들이 입대할 때 들인 뇌물을 뽑으려고 쌍심지를 켜다보니 점점 동 운반도 위험부담이 너무 커졌다. 동을 날라와 밀수꾼들에게 넘기다보니 언제부턴가 밀수하는 사람들과도 친해졌다. 강 씨는 밀수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런데 혜산은 이미 그가 낄 데가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밀수망이 형성돼 있었다. 그는 혜산 아래에 붙은 김형직군으로 갔다.● ‘종합 예술’ 밀수에 뛰어들다 김형직군에서 그는 물건을 받아 중국에 넘겼다. 북한에서 밀수는 종합 예술에 비유된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밀수를 위해선 물건을 날라 오는 철도 안전원, 기관사 등을 포섭해야 하고 단속 통제를 담당한 보위부, 안전부에도 연줄이 깊어야 한다. 또 국경경비대 장교들을 장악하는 것뿐만 아니라 중국의 대방들에게도 신뢰를 얻어야 한다. 물론 그의 포섭 대상인 직업도 살기가 만만치는 않다. 특히 신뢰할 수 있고 배신하지 않는 밀수선을 몇 개 아는냐에 따라 받는 뇌물 액수가 달라진다. 국경경비대 장교는 중국 대방 2~3개는 확보해야 밀수꾼들에게서 신뢰를 받을 수 있다. 강 씨가 처음 한 일은 기름개구리 등 농수산물을 받아 넘기고 쓰던 마대를 받아오는 일이었다. 이미 사용한 사료마대, 비료마대 등을 몇 만개씩 중국에서 받아왔다. 이걸 다 씻어서 북한 내륙으로 들여보내면 장마당에서 잘 팔렸다. 물건을 넘겨 보내는 양에 따라 중국 대방은 보너스도 주었다. 밤에 배로 1톤가량 넘기면 자전거 한 대 정도가 보너스로 왔다. 강 씨는 이 일을 2년 정도 했다. 돈도 많이 벌었다. 어느 날 중앙당에서 국경경비대에 집중 검열을 나왔는데, 그 시기엔 밀수를 할 수 없었다. 그걸 계기로 그는 혜산으로 다시 돌아왔다. 언제까지 직장을 다니지 않을 수가 없어 혜산광산 보위대로 옮겨가려고 생각했다. 혜산광산 보위대 입대는 2000~3000위안짜리였다. 당시 혜산광산에선 아연 등 희귀광물들이 생산됐는데 노동자들은 이걸 품에 차고 나온다. 비싼 것을 차고 나오면 50위안도 벌 수 있었다. 이걸 잡는 것이 보위대였다. 물론 뇌물을 받고 눈감아줄 때가 더 많다. 그런데 사람을 잡아내는 것도 할 짓은 아니었다. 그래서 보위대는 직접 광산 안에 들어가 싸게 희귀광물을 사서 밀수꾼들에게 비싸게 넘겼다. 자신들이 경비를 책임졌기 때문에 광산에서 갖고 나오다 단속될 염려는 없었다. 보위대도 총을 드는 직업인지라 신원조회가 필요하다. 북한에서 신원조회는 전산조회로 하지 않는다. 사람이 전국을 돌면서 서류에 기입된 8촌까지 직접 찾아가 행적을 파악해 갖고 온다. 그러다 보니 신원조회에만 보통 반년 이상 걸린다. 뇌물을 주지 않으면 신원조회 기간은 훨씬 더 길어진다.● 중국의 북한 벌목공들 보위대에 서류를 제출하고 집에서 쉬고 있는데, 친구가 중국에 돈벌러 가자고 제안했다. 중국에 넘어가 들쭉을 따도 되고, 통나무 한 대를 날라도 1위안씩 받는데 하루에 50위안 넘게 받는다고 했다. 2013년경에는 북한 사람들이 들쭉을 따러 중국에 우르르 넘어가던 때였다. 친구 2명을 따라 삼지연군에 가니 딴 세상이었다. 매일 밤 압록강 바로 옆 동네 주민 수십 명이 국경경비대에게 뇌물을 주고 강을 넘었다. 경비대 군인들이 와서 먹고 자는 집은 뇌물을 주지 않고 중국에 출퇴근하듯 넘어갔다 올 수 있었다. 그렇게 둘쭉철에 눈을 감아준 대가로 경비대원은 1년 내내 민가에 드나들며 배고프지 않게 살 수 있었다. 중국에 가는 일행들은 바케쯔(양동이)를 등에 거꾸로 메고 줄을 지어 강을 건넌다. 거꾸로 멘 이유는 강에서 넘어지면 양동이에 물이 차면서 손 쓸 틈이 없이 하류로 떠내려가기 때문이다. 건너간 사람들은 며칠 산에서 살면서 들쭉을 따서 도로에서 기다리는 중국 상인에게 판 뒤 다시 북한으로 넘어왔다. 들쭉 1㎏을 따면 5위안을 벌었다. 강 씨 일행 3명은 이틀 동안 들쭉을 따서 80위안을 벌었다. 하지만 그 정도의 벌이에 성이 차지 않아 주변 벌목장을 찾아갔다. 벌목장에 가니 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가 간 작업장에는 한족 로반(사장) 1명에 북한 사람 17명이 있었다. 북한 사람 20~30명 규모의 그런 작업장이 백두산 기슭에 셀 수 없이 많다고 했다. 강 씨는 그렇게 많은 북한 사람들이 넘어와 일을 하는 줄 몰랐다. 움막에 합세하니 거긴 한국과 마찬가지였다. 한국 영화나 드라마 CD가 가득 쌓여 있었다. 다 돈을 주고 사온 것이라 했다. 벽에 붙여놓은 라디오에선 한국 방송이 24시간 나왔다. 북한에서 한국 드라마를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단속 공포 없이 편하게 누워 한국 영화를 보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가 갔을 때는 벌목일은 하지 않았다. 대신 산에 올라가 작은 나무를 베어내는 일을 했다. 하루 일당이 30위안쯤 됐다. 그런데 그게 다 자기 돈은 아니었다. 밥 한 끼에 5위안씩 공제했다. 비 오는 등 날씨가 험해 일을 나가지 못하면 식대만 하루에 15위안씩 깎였다. 작업복이나 장비도 자기 돈으로 사야 했고, 고기나 술을 먹으려면 돈을 모아 추가로 내야 했다. 먹을 것은 한족 로반이 날라 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산의 주인은 따로 있었고 로반은 관리를 위탁받은 사람이었다. 날씨가 추워진 뒤엔 벌목을 시작했다. 벌목을 하고, 말과 소, 트럭을 이용해 통나무를 산에서 끌어내려 온 뒤 4m 길이로 다듬고 자르는 작업이었다. 이때는 40위안을 받았다. 몇 달 지나고 보니 로반은 관리만 하면서도 일당은 200위안씩 받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강 씨는 이것이 너무나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로반에게 두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첫째는 일당을 50위안으로 올릴 것. 둘째는 아파서 일 나가지 못하면 식대를 떼지 말 것을 요구했다. “돈을 벌려고 온 사람이 식대가 깎이면서도 꾀병을 앓겠나. 정말 아프니까 못 나가는데, 식대까지 떼는 것은 너무하다. 요구 조건을 들어주지 않으면 갈 데도 많은데 딴 데 가서 일하겠다.” 결국 로반이 조건을 다 들어주었다. 강 씨는 주변 작업장에 자신들이 얻은 성과를 알려주었다. 그래서 300~400명이나 되는 그 지역 북한 노동자들이 다 일당을 높게 받았다. 사실상 노조가 생긴 것과 마찬가지 효과였다. 그런 리더십 덕분에 강 씨는 얼마쯤 지나 작업장 책임자로 추대됐다. 책임자는 로반과 만나 하루 과제를 받고 또 노동자들과 로반 사이 협상도 담당하는 자리였다. 물론 책임자라고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일당을 받으려면 그도 일을 해야 했다. 그가 책임자로 있을 때 가끔 공안 단속에 걸리는 작업장도 생겼다. 강 씨는 또 발 벗고 나섰다. “꺼내려면 수천 위안의 뇌물이 든다는데, 우리 모아서 도와줍시다. 우리가 잡히는 경우도 있을 것 아닙니까.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게 최선이죠.” 점점 그 구역 내에서 강 씨의 권위가 올라갔고 따르는 동생들도 생겼다. ● 돈으로 목숨을 사는 세상 강 씨는 어느 정도 돈이 모이자 친구들과 함께 다시 압록강을 넘었다. 번 돈을 집에 갖다 주기 위해서였다. 매달 평균 800~1000위안씩 모았으니 액수가 꽤 됐다. 집에서 시간을 좀 보내고 다시 중국에 넘어왔다. 벌목장의 생활은 너무 좋았다. 북한 사람들과 어울려 살다 보니 여기가 북한인지 중국인지 실감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고기도 먹을 수 있었고, 눈치 보지 않고 한국 영화도 보고, 마음 놓고 오락회도 열 수 있었다. 보위대에 가서 조직생활을 하기보단 중국이 훨씬 나은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벌고, 오고를 반복하다가 끝내 보위부에 체포됐다. 누군가 그가 중국에서 일한다고 신고했다. 잡히니 “한국 사람은 만났나. 교회엔 갔나. 한국 방송을 들었나”를 꼬치꼬치 캐물었다. 아니라고 부인해도, 보위부는 이미 중국 작업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고 있었다. 감옥에서 한 달을 버틴 끝에 가족이 큰 뇌물을 주어 석방될 수 있었다. 감옥에 있는 기간 체포된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한 젊은 남성은 일곱 가족, 수십 명을 한국까지 가도록 도와준 죄로 체포됐다. 이를 ‘유도안내죄’라고 했다. 한 명을 넘기는데 1만2000위안씩 받았는데, 경비대에 5000위안씩 뇌물을 주고 본인은 7000위안씩 받았다고 한다. 그 돈으로 6살 아들을 예술학원에 보내 영재로 키울 꿈을 꾸던 남성이었다. “남들은 그렇게 많이 한국에 보내면서 왜 본인은 가지 않았냐”고 묻자 그는 “조국을 배반하진 않겠다”고 대답했다. 진심인지, 강 씨를 믿지 못해 그런지 알 수는 없었다. “몇 년 형을 받을 것 같냐”고 물으니 “20~30년 받지 않을까”라고 대답했다. 나중에 들으니 그는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갔다고 한다. 다른 한 명은 얼음이라고 불리는 필로폰 2㎏과 사람 3명을 중국에 넘기려다 체포됐다. 마약 밀수는 중범죄이지만 그동안 벌어놓은 돈이 있었는지 보위부 고위직을 움직여 1년 형만 받고 교화소에 갔다고 했다. 돈만 있으면 죽지 않는 세상이었다. 감옥에서 나오니 보위원이 매일 찾아와 감시했다. 체포되는 바람에 보위대 입대도 무산됐다. 결국 그는 중국으로 다시 가서 돌아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2015년 9월 그는 마지막으로 압록강을 넘었다.● 15명을 이끌고 탈북하다 벌목장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한국에 대해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상대하는 중국 로반들이 북한 노동자들을 통해 기회만 되면 말을 열심히 배우는 모습이었다. 한국에 가서 벌면 한 달에 1만 위안 이상 번다며 가족이 다 갔다고 자랑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중국인들은 “너희들은 한국에 얼마든지 갈 수 있고, 국적도 주는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냐”며 답답해하기도 했다. 한 달에 1000위안도 벌기 힘든 처지의 강 씨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한국을 상상했다. 그런데 가족들 때문에 용단을 내리진 못했다. 다시 북한으로 가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강을 건넌 뒤엔 한국으로 못 갈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때 마침 한국에서 전화가 왔다. 먼저 탈북해 중국 내륙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여인이었는데, 가끔 인력이 필요할 때마다 벌목장에 전화해서 좀 보내달라고 했던 인연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1년쯤 소식이 끊겼다가 다시 전화가 온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한국에 왔다며 오는 선도 알려주겠다고 했다. 강 씨는 벌목장에서 한국에 먼저 간 탈북민이 출연하는 라디오를 많이 들었다. 그들의 북한 생활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 사람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한국 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믿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으로 가는 길까지 소개받으니 다른 사람들이 마음에 걸렸다. 그는 3년 동안 일하면서 친해졌던 동생들부터 찾아다녔다. 이런 이야기는 전화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다른 작업장을 가다가 얼어 죽을 뻔하기도 했다. 반나절 넘게 아무리 가도 작업장을 찾을 수 없었는데 밤에 기온이 크게 떨어지며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이렇게 죽는가 싶었는데, 마침 그 작업장으로 들어가는 일행에게 발견돼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렇게 작업장을 찾아다니며 모은 일행이 15명이나 됐다. 처음에는 그들에게 한국에 가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내륙에 엄청 좋은 일자리가 있는데 가지 않겠나. 거기 가면 치료를 받을 수 있다.” 벌목장에서 치료를 받는다는 말은 엄청난 힘을 가진다. 그만큼 다치는 사람이 많았지만, 신분 때문에 중국 병원에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살아야 했다. “정말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거 맞나? 그런데 형은 가나?” “응, 나도 간다. 단 조건이 있다. 거긴 한번 가면 북한 고향으론 다신 못 간다.” 그가 속내를 터놓았던 15명 모두가 따라나섰다. 심양에 도착해서야 강 씨는 “사실 한국으로 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절반 정도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고 했고, 나머지도 놀란 눈치지만 계속 그를 따라가겠다고 했다. 심양에서 딱 한 명이 북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북한에 가서 조카를 데리고 같이 가야지 혼자는 못 간다는 것이다. 나중에 들으니 그는 잡혀서 교화소에 갔다고 했다. 한국에 간 탈북 여성이 소개한 한국행 선은 교회가 주선하는 루트였다. 브로커 비용은 받지 않는 대신 중국에서 성경 공부를 3개월 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15명은 여러 처소에 나눠서 성경을 공부했다. 한국에 보내준다는데 못할 일이 없었다.● 꿈을 이뤄가는 삶 강 씨는 2016년 5월 마침내 일행과 함께 한국에 도착했다. 그는 한국행 비행기를 탈 때 스스로 자신과의 약속을 하나 만들었다. “한국에 가면 절대 담배를 피우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벌목장에선 담배가 없이 살 수가 없었지만, 담배 끊을 각오도 없이 한국에서 첫 시작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그해 10월 그는 서울 강서구에 임대주택을 받고 하나원을 졸업했다. 서울에 가겠다는 희망자들이 많아 추첨을 해야 했는데 운 좋게도 그는 당첨됐다. 그는 북에 있을 때부터 수도에 가보고 싶어 외삼촌이 해군대학 총장으로 있었음에도 해군을 마다하고 호위사령부로 갔다. 서울에 와서도 꼭 수도에서 살고 싶었는데 마침내 그 꿈을 이뤘다. 뜨거운 물이 나오는 수도꼭지를 부여잡고 눈물을 흘렸다. 고향의 부모는 추운 겨울에 압록강에 물을 길으려 다니고 있을 것이란 생각에 울음을 참기 어려웠다. 뜨거운 난방을 틀어놓고는 찬 바람이 마구 스며드는 벌목장의 움막이 생각나 또 울었다. 세탁기를 돌리며 얼음을 깨고 옷을 빨던 과거가 생각나 또 눈시울을 적셔야 했다. “어떻게 온 땅인데, 최선을 다해 살아야 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그는 정착한 직후 다른 동생들과 함께 막노동 현장을 누비며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런데 몸이 편해져서인지, 아니면 긴장이 풀려서인지 얼마 안 가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통나무를 메고 나르던 몸이 눈에 띄게 여위어갔다. 강 씨는 1년 반이나 병원을 다녔다. 2018년에야 어느 정도 몸이 회복돼 광명에 있는 한 회사에 취직할 수 있었다. 월 150만 원을 받고 회사 출퇴근 차량 운전을 했는데 그 일을 하면서 운전 실력을 키웠다. 2020년 그는 그동안 모은 돈으로 1톤짜리 용달 트럭을 샀다. 개인 용달을 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일이 안정적이진 않았기 때문에 일을 하면서 틈틈이 안정적인 직장을 찾았다. 여러 곳에 지원서를 냈는데 올해 초에 마침내 강서구시설관리공단에 운전기사 겸 차량 담당 정규직으로 입사할 수 있었다. 월급은 200만 원으로 개인용달 때보다는 많이 적지만 공공기관에서 60세까지 일할 수 있다는 안정성과 저녁이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조건을 더 높이 샀다. 서울에서 그는 고향 출신의 여성과 만나 결혼을 했다. 아이도 둘을 키우면서 북한에서 배인 가부장적인 습관을 내려놓고, 다정다감한 남편이자 아빠로 살기 위해 노력한다. “한국에 가서 이루고자 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이루고 있습니다. 서울에 살고 싶은 소원도 이뤘고,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소원도 이뤘습니다. 공공기관에 취직한 것도 돈보다는 행복에 더 가치를 두었기 때문입니다.” 행복에 더 가치를 두었다고 하지만, 사실 그의 저녁은 가족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퇴근 후 2~3시간씩 동네 순찰을 돈다.● 봉사로 기여하는 삶 그는 한국에서의 삶이 너무 좋다. 그가 경험한 한국은 본인이 노력한 것만큼 삶의 질이 결정되는 행복한 사회였다. 자신에게 이런 삶을 선물한 대한민국에 보답하고 싶었다. 그래서 각종 봉사활동에 적극적이다. “저는 돈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진 것이 몸밖에 없으니, 몸으로 기여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서울에 자리를 잡은 지 3개월 뒤부터 동네 자율방범대에 가입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막노동을 하면서 주 3회씩 저녁마다 2~3시간 순찰을 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강 씨는 지금까지 7년 동안 꼬박꼬박 자기 역할을 해왔다. 성실함을 인정받아 지난해부터는 가양3동 자율방범대 대장으로 추대됐다. 그뿐만 아니라 강서구 의용소방대에도 가입해 4년째 소화기 점검과 같은 일을 돕고 있고 동 주민자치회 회원으로도 활동한다. 이렇게 정신없이 살면서도 강 씨는 자신이 봉사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도움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와 함께 봉사활동을 하시는 분들 중에는 정말 인품이 훌륭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저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래서 정착도 더 빨리 잘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처럼 한국 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탈북민은 동네에서 봉사를 하면서 지역 사회에 녹아들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지역봉사 활동뿐만 아니라 그는 다른 탈북민들을 돕고 어울리기 위해서도 노력한다. 지난해 말까지 북한군 출신 탈북민 단체인 숭의동지회 부회장을 맡아 활동했고, 지금도 주말마다 강서구에서 탈북한 사람들끼리 모여 족구 동호회 활동을 하며 화합을 다지고 있다. “통일이 언제 될지는 모릅니다. 저는 통일로 가는 과정에 주춧돌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좀 더 욕심을 내면 이 땅에 처음 온 탈북민들에게 열심히 사는 본보기가 되고 싶기도 하고요. 그렇게 열심히 살다가 어느 순간 통일이 오면 고향에 가서 남과 북의 화합을 위한 중재자 역할도 하고 싶습니다. 거창하게 살고 싶진 않지만, 열심히 사는 오늘이 모여 더 나은 내일이 되고, 계속 발전해가는 저라면 내일에는 더 큰 일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남들은 평생 겪지 못할 수많은 고비를 넘기며 살아왔지만 강 씨는 이제 겨우 40세이다. 그의 인생 후반전은 어떤 삶의 스토리들로 채워지게 될까.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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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평통, 정부 대북기조 발맞춰 통일·안보·北인권 캠페인 진행

    국내외 청년 300여명이 5일부터 2박3일간 북한 접경지역인 경기도 파주시에 모여 현 정부의 통일 비전과 안보 인식을 공유하기 위한 행사를 진행한다. 정전 70주년과 한미동맹 70주년을 계기로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민주평통)가 주관해 열리는 이 행사에는 민주평통의 국내 및 해외 청년자문 위원들이 참가한다.눈길을 끄는 점은 윤석열 대통령이 2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통일’을 내세우며 통일부의 역할 변화를 주문한 직후 대통령 직속의 자문기구인 민주평통이 재빠르게 변화된 정책 기조에 발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청년! 통일로 한 걸음 2023’이라고 명명된 이 행사에선 북한 인권 증진, 청년 안보의식 고취 등이 주요 토론 주제로 다뤄진다. 초청 기조강연 연사로 최원일 전 천안함 함장이 초대된 것도 이러한 변화를 보여준다.전임 정권 시기 민주평통은 종전 70주년을 맞아 ‘한반도 정전 평화 캠페인’을 주요 역점 사업으로 추진했지만, 윤 정부 출범 이후 이러한 기조는 사실상 폐기됐다. 특히 지난해 윤 대통령의 서울대 법대 동기인 석동현 변호사가 사무처장으로 부임한 이후 민주평통은 다양한 방면에서 변화를 추구해왔다. 이번 윤 대통령의 ‘변화 주문’ 이후 통일부의 기조도 기존의 대화·교류 역할에서 한반도 번영과 북한인권 중시로 바뀔 것으로 예상된다.왕효근 민주평통 청년부의장은 “‘청년! 통일로 한 걸음 2023’에 참가한 청년들은 열쇠전망대, 백마고지 등 분단현장 답사와 한반도통일미래센터 통일미래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통일과 안보에 대한 실천 의지를 다지는 시간도 갖는다”며 “미래를 떠맡아야 할 청년들이 통일과 안보, 북한 인권분야에서 선구적 역할을 하겠다”고 말했다.행사 마지막 날에 채택될 예정인 ‘청년 통일·안보 활동방안 결의문’에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주도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내용이 중요하게 부각될 예정이다. 또 “북녘 동포들의 인권 증진이 한반도에 사는 모든 이들의 자유와 행복을 실현하는 일임을 인식하고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한 노력에 동참한다”는 선언도 함께 담길 것으로 알려졌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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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북한 국군포로의 손녀, 서울에서 패션 디자이너가 되다 [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안녕하세요. 저는 북에서 온 권봄이라고 합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동네에선 ‘패션여왕’이었어요. 학교에서 교복을 제일 먼저 고쳐 입은 사람이 바로 저였다니까요. 그런데 옷을 고칠 때마다 비판무대에 오르고, 강제노동까지 하고 너무 고초를 많이 겪었어요. 하지만 전 굴복하지 않았어요. 마침내 학교도 저에게만 예외를 인정하고 포기할 정도였답니다. 학교를 졸업할 때 생각해보니 북한이란 곳은 저에게 너무 맞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고등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탈북했습니다. 지금은 서울에서 패션 디자이너로 제가 원하는 바로 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제가 살아온 인생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국군포로의 손녀 저는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한 그 해에 북한의 북부 국경 한 소도시에서 태어났어요. 태어나보니, 저의 출신성분은 아주 꽝이던데요. 제가 국군포로의 손녀였던 것이죠. 할아버지는 충북 제천에서 살다가 1951년 국군 8사단에 입대해 백마고지 전투, 금화지구 전투 등에서 용감히 싸웠다고 해요. 하지만 불행하게도 정전협정이 체결되기 한 달 전에 포로로 잡혔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북한은 할아버지와 같은 국군포로들을 북부 지방의 탄광에 보냈습니다. 저는 할아버지 얼굴도 몰라요. 1970년대 말에 탄광에서 탄차 사고로 사망했다고 해요. 포로들은 언제 죽어도 되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가장 위험한 곳에서 일을 시켰다고 합니다. 할아버지 때문에 아빠는 북한에서 제대로 된 직장도 가져본 적이 없어요. 반동의 아들인데다, 아빠 친척들은 다 남쪽에 살고 있으니 어려서부터 주먹을 쓰면서 방황했나 봅니다. 하지만 제가 태어나보니 우리 집은 동네에서 제일 잘 사는 부자이기도 했어요. 왜냐하면 엄마가 일찍 장사를 시작해 돈을 많이 벌었기 때문이죠. 엄마의 친척들이 중국에 많았는데, 거기서 물건을 가져다 북한에서 팔았어요. 엄마는 아버지가 싸울 때 돌려차기 하는 모습에 반했다고 하네요. 흐흐. 엄마는 키가 작았는데, 아빠는 키도 훤칠하고 잘 생겼는데다 돌려차기까지 기막히게 잘 했나 봅니다. 결혼한 이후에도 아빠는 안 좋은 성분 때문에 주로 집안일을 하고, 대신 엄마가 밖에 나가 장사를 했어요. 저는 7살에 인민학교에 입학했는데 그 이전 기억은 별로 나지 않아요. 두 가지는 아직 생생한데, 하나는 유치원에서 신발을 계속 잃어버렸어요. 제가 우리 유치원에서 제일 좋은 신발을 신었는데, 누가 자꾸 훔쳐가 팔았던 거죠. 그리고 어느 날 장마당 앞을 지나다 바닥에 갓난아기가 버려진 것을 보고 데려가자고 엄마에게 떼를 썼던 기억이 나요. 그때 병원이랑 장마당에 아이를 버리고 가는 일들이 종종 있었어요. 저는 북한에서 사람들이 굶어죽었다는 ‘고난의 행군’에 대한 기억은 없어요. 엄마가 장사를 잘 한 덕분에 집에 없는 게 없었고, 밥투정을 하면서 살았거든요. 2001년에 인민학교에 들어갔는데, 제가 그때 학년에서 키가 제일 컸어요. 그래서 무용소조에 뽑혀서 춤을 추었어요. 4학년 때엔 선생님과 다른 아이 2명과 함께 평양 무용축전에도 갔어요. TV로만 보고 말로만 듣던 평양에 도착해서 어느 여관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얼굴부터 온 몸이 다 새까맣게 됐어요. 살펴보니 이불을 언제 빨았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더러웠어요. 선생님이 기겁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여관 주변 개인집에 돈을 더 주면서 숙박했어요. 그런데 집주인 아주머니가 밥을 너무 조금만 줘서 배고프다고 선생님께 일러 선생님과 집주인이 대판 싸우는 웃픈 해프닝도 있었어요. 그때 축전 기간 한 달 반을 평양에 머물면서 그 유명한 옥류관도 가보고 놀이동산도 갈 수 있어 좋았는데, 아쉽게 등수에는 들지 못했어요. 그래도 좋은 경험이었고, 추억이라 생각해요. 중학교 올라가서도 저는 무용소조란 이유로 농촌동원도 가지 않았고, 보름동안 군사훈련을 받는 붉은 청년근위대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학생소년회관에서 15살까지 계속 춤을 췄는데, 그 덕은 요즘 좀 봅니다. 패션 콘텐츠를 다루려고 만든 유튜브에 요즘 댄스 챌린지 영상을 올리고 있거든요. 구독자는 아직 많지 않지만, ‘봄패션TV’를 찾아보면 제가 춤을 추는 영상이 많아요. 어릴 적 배운 춤이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은 몰랐네요.● 한국 패션에 빠지다 저는 중학교 때 안 본 한국 드라마가 없는 것 같아요. 집이 잘 살았다고 했잖아요. 동네에서 DVD 플레이어를 제일 먼저 산 것도 우리 집이었어요. 동네 사람들이 한국 드라마 CD를 구하면 우리 집에 다들 보려 왔던 기억이 나요. 창문은 불빛이 새나가지 못하게 늘 담요로 가려져 있었고요. 제가 열 살 때인가 한번 단속에 걸리긴 했지만, 그 이후로도 계속 봤어요. 단속받던 때의 일은 충격이었어요. 안전원이 신발을 신고 집에 들어와서 엄마를 마구 때렸거든요. 엄마가 매를 맞는 걸 보면서 어린 저는 무서워서 그냥 울 수밖에 없었어요. 아침 저녁으로 한국 드라마만 보다 보니 그만 제가 사는 세계의 기준이 한국이 돼버렸어요. 한국 배우들의 옷과 패션에 늘 관심이 갔어요. 몸은 북한에 있지만, 마음과 생각은 북한 밖에 늘 머물러 있었어요. 13살 때인가 교복을 받았는데, 너무 치마가 길어요. 그래서 치마를 다 뜯어서 몸에 맞게 짧게 고쳐 입고 학교에 갔는데 난리가 난거죠. 학교에서 교복 고쳐 입고 온 학생이 제가 처음이라는 거예요. 그날 엄청 욕을 먹고 학교 청소를 저녁 늦게까지 해야 했어요. 그런데 반발심이 생기더라고요. 큰 걸 내 몸에 맞게 고쳤을 뿐인데 그게 왜 이리 야단맞을 일인가 싶었어요. 사춘기까지 찾아오니 반항심이 더 커졌죠. 학교에서 머리를 제일 기른 것도, 손톱을 기르고 매니큐어를 처음 바른 것도, 귀걸이 하느라 귀에 구멍을 뚫은 것도 저였어요. 다 제가 선구자였어요. 하하. 제가 하는 건 다 한국 드라마에서 본 것이었죠. 우리 학교에서 제가 인기 짱이었어요. 남학생들이 계속 쫓아다녔고, 여학생들도 저를 부럽게 쳐다봤어요. 그들은 용기가 없으니 주는 교복을 그대로 입고 다니는 거죠. 대신 대가는 컸죠. 학교에서 제일 많이 욕을 먹고, 길거리 걸어가도 규찰대가 가만 두지 않았어요. 잡혀가서 욕을 먹고 청소하는 게 일상이었죠. 그때마다 학교에 안 간다고 선포했어요. 몇 년 뒤엔 학교에서도 포기했죠. 선생님이 찾아와서 너만 머리 기르는 것을 특별히 허락할 테니 학교에선 머리를 묶고 다니란 조건을 내걸었어요. 저는 북한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잠 들 때였어요. 한국 드라마를 보고 ‘여주인공들이 입은 저 옷을 내가 입으면 어떨까. 너무 행복할거야’ 이런 상상을 하면서 잠들었거든요. ‘북한은 왜 이리 개성이 없는 곳일까, 한국은 누구나 예쁜 옷들을 입을 수 있는데 왜 북한은 예쁜 옷을 입을 자유도 없을까’하고 원망도 많이 했고요. 제가 왜 패션에 이렇게 집착했는지 생각해보면 그건 유전인 것 같아요. 엄마가 그랬어요. 한 겨울에도 롱코트에 롱부츠를 신고 거리를 다니는 멋쟁이였어요. 엄마는 무슨 옷을 사면 늘 ‘어떻게 하면 이 옷을 북에 없는 스타일로 만들까’ 그런 고민을 했고, 뜯어 고치는 것이 취미였어요. 저도 어렸을 때 엄마가 카라가 있는 옷을 사와서 뜯어낸 뒤 다시 만들어낸 옷을 입고 다녔고요. 한국 드라마와 패션 감각이 남달랐던 엄마 덕분에 저도 크면 무조건 옷을 만드는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북한에선 제 패션에 대한 열정과 자유가 너무나 통제되고, 늘 비판 대상이었죠. 학교를 졸업하면 무조건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자유로운 세상으로 가서 저만의 옷을 마음 껏 만들고 싶었어요.● 부모에게도 알리지 않은 탈북 2011년 마침내 중고등학교를 졸업했어요. 그때가 17살이었죠. 졸업해서 몇 달 뒤에 저는 탈북했지요. 부모님도 제가 한국으로 가려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언제 갈지는 몰랐어요. 우리 동네엔 중국으로 몰래 사람을 넘겨주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저는 부모님에게 말도 하지 않고 길을 떠났어요. 말하면 못가게 했을 겁니다. 저는 두만강을 넘어 연길 친척집에 찾아갔어요. 거기서 한국에 보내달라고 했지요. 한국행 선을 찾는데 시간이 좀 걸렸어요. 거의 1년을 기다렸거든요. 연길은 참 큰 도시였어요. 도로가 뻥 뚫리고 차도 참 많았죠. 연길에 가서 바나나가 노란 색이란 것을 처음 알았어요. 북한 장마당에도 바나나를 팔긴 했는데 다 새까만 색이었거든요. 연길 사람들의 패션은 별로 인상적이지 않았어요. 제 눈높이가 한국에 맞춰져 있어서 그랬나 봐요. 그러다가도 가끔 길거리에서 멋있게 입고 다니는 아가씨들을 보면 ‘그래 이 정도는 입고 다녀야 패션스타지’하는 생각을 했죠. 2012년에 드디어 한국으로 떠났어요. 일행은 8명이었는데 동남아에 와서 산을 넘을 때면 제가 앞장섰어요. 무용을 해서인지 체력이 좋은 편이거든요. 그런데 산에 갈 때도 저는 패션이 중요해요. 한국에 와서 산행을 종종 하는데, 저번 겨울에 관악산에도 가죽 재킷에 요가 바지를 입고, 롱부츠를 신고 올라갔거든요. 하하. 등산화가 예쁘지 않아서 안 신어요. 이 정도면 정말 패션에 미친 것이 맞겠죠. 태국 감옥에 몇 달 있다가 꿈에도 그리던 한국에 2012년 9월에 왔고, 2013년 1월 마침내 대한민국 주민등록증을 받고 사회에 나왔어요. ● 디자인 전공 대학에 입학하다 사회에 나왔는데 저는 어려서인지 집을 주지 않더군요. 그래서 서울에 있는, 먼저 탈북해 살고 있는 엄마 친구네 집에 들어갔어요. 거기서 한 반 년 살다가 쫓겨났어요. 제가 철이 너무 없었거든요. 멋 부리고, 이모 화장품 잔뜩 바르고 외출할 생각이나 했지, 청소할 줄도, 밥을 할 줄도 몰랐어요. 이모가 ‘너 이렇게 살면 절대 철이 들지 않는다. 나가 혼자 살면서 사회를 경험해보라’고 하더군요. 돈이 없으니 금천구에 8평짜리 반지하방을 월세로 얻었는데 너무 눈물이 났어요. 집이 작아서 변기 위에서 샤워해야 했죠. 그런 생활을 하면서 ‘자유로운 삶을 살려면 여기서도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죠. 혼자 살 때 할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어요. 할아버지가 포로가 될 때 나이가 20살 때인가 됐거든요. ‘그 어린 나이에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고향과 제일 멀리 떨어진 북단의 탄광으로 끌려 와서 혼자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반동분자 성분에다가 탄광의 가장 위험한 막장에서 다시 갈 수 없는 고향과 보고 싶은 가족을 그리며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셨을까’하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군에 입대하던 때 나이와 비슷한 나이에 저는 홀로 북에서 남으로 와서 다시 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고 있잖아요. 하지만 온갖 차별과 멸시를 받으며 살았던 할아버지에 비하면 저의 삶은 너무나 행복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저 자신이 너무 철이 없다고 느껴졌어요. 그래서 독하게 살기로 마음먹고, 대안학교에 입학해 기숙사에 들어갔어요. 목표를 홍익대 패션디자인학과로 높게 잡았는데, 그동안 공부를 많이 못해서 많은 준비가 필요했어요. 검정고시를 치고 대학에 갈 수도 있었지만, ‘패션계의 여왕’이 되려면 이왕 제대로 공부하고 대학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죠. 4년 가까이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고등학교 과정을 다시 다녔어요. 1년은 미술학원에서 전문적으로 그림을 배웠고요. 지금 돌아보면 그때 기숙사 사감 선생님이 참 무섭게 저를 잘 잡아주어서 고마워요. 2017년에 마침내 홍익대 미술대학 섬유미술패션디자인과에 입학했어요. 실기 시험 때 작가의 그림을 내걸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려 교수님들 앞에서 발표하는 시험이 인상적이었어요. 작가의 의도는 무엇이고, 나는 왜 이 그림을 이렇게 각색했는지 설명하는 것이었는데, 창의력과 이해력을 보려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이런 것은 자신이 있어요. 대학에 가서도 공부는 어렵지 않았어요. 저는 패션에 살고 죽는 아이니까 정말 열심히 공부했죠. 교수님의 칭찬에 살고, 질타에 울면서 대학을 다녔어요. ‘네 작품이 창의적이다’고 칭찬 받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행복했고요, ‘작품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는 식의 평가를 받으면 온 밤 자지 않고 ‘문제점이 뭘까’ 고민했습니다. 그렇게 대학을 다니다 보니 전공과목은 올 A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전공만 집중적으로 공부했더니 교양과목 성적은 좀 별로예요. 묻지 마세요. 대학 다니면서 저는 탈북민이란 얘기를 절대 하지 않았어요. 가까운 친구들도 제가 충북 제천 출신인 줄로 알아요. 할아버지 고향이 제천이거든요. 또래보다 나이가 많은 것은 ‘춤 쪽으로 가려다가 안 돼서 공부하러 왔다’고 둘러댔어요. 이 기사 나가면 다들 놀랄 걸 생각하니 걱정이예요. 사정이 있었던 걸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요. 탈북민임을 숨기고 살다보니 장학금은 하나도 받지 못했어요. 대신 많은 알바를 뛰면서 생활비를 충당하느라 고생했어요.● 회사에서 배운 술의 쓴 맛 저는 2022년 2월에 졸업했는데, 재학 중에 조기 취직해서 올해로 3년차가 되었어요. 처음 동대문에 있는 중소기업 디자이너로 들어갔는데, 1년 버티고 나왔어요. 여초 직장이라 그런지 군기가 엄청 센데, 제가 막내라 온갖 잡다한 일들은 다 제 몫이었죠. 술의 쓴 맛을 회사에 들어가 처음 알았어요. 대학 때는 술을 아예 마실 줄도 모르지만, 알바로 돈을 벌다 보니 술 살 돈이 아까워서 사 마신 적이 없어요. 그런데 회사 생활이 너무 힘들어 하루는 퇴근하면서 소주 한 병을 사들고 들어가 딱 한 잔하고 정신 잃고 잠들었답니다. 하하. 회사 생활은 대학 때와 전혀 달랐어요. 대학 다닐 때 저는 내내 삶이 신나고 늘 행복했어요. 제가 직접 피팅을 하고 옷을 만드는 걸 상상만 해도 그렇게 신날 수 없고, 세상에 없는 나만의 옷이 완성됐을 때를 생각하면 행복해서 잠을 잘 수가 없었거든요. 3학년 때 저는 제 패션이 가야 할 방향과 가치관을 정했어요. ‘패션에 역사를 입히자’고 결심한 거죠. 저는 이 땅에서 이방인처럼 살고 있지만, 역사는 남과 북이 다 같이 공유할 수 있는 거잖아요. ‘한국의 역사를 새로운 차원에서 발전시키는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것이 제 삶의 목표입니다. 말이 거창해서 이해가 되지 않으시죠. 심플하게 말하면 그냥 전통의상에 현대를 입히는 것이 제 패션의 철학입니다. 좀 더 짧게 말하면 퓨전 한복이죠. 한복을 모티브로 해서 그 요소들을 현대 의상에 구현하는 겁니다. 한복은 전 세계가 아는 옷이긴 하지만, 일상에서 입고 다니기엔 거추장스러워서 잘 입지는 않죠. 저는 일상에서 입고 다니는 간편한 한복을 제작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회사에 들어가니 꿈이 다 뭐예요. 늘 욕을 먹고 수습하느라 밤을 새고, ‘드라마 미생에 나오는 것처럼, 신입 회사원 생활이 이런 거구나’를 뼈저리게 배웠죠. 1년쯤 일하다가 다른 중소기업에 경력직 정직원으로 이직했습니다. 지금 2년째 일하고 있는데, 이 회사는 첫 직장보다 좀 더 큰 중견기업입니다. 자체 브랜드도 3개나 있고요. 저는 그중 한 브랜드의 패션디자이너로 일하고 있고 마케팅도 담당하고 있어 좀 바쁘지만, 나름 재밌게 잘 다니고 있어요. 저는 한국에 와서 거의 10년 만에 패션 디자이너의 꿈을 이뤘답니다. ● 탈북 디자이너의 소원 지난달 중순에 저는 홍대와 사당, 성신여대 사거리에서 3일 동안 그림판을 들고 서 있었어요. 왜냐면요. 제가 제 브랜드를 내건 첫 작품을 만들었거든요. 브랜드는 제 이름 첫 글자를 따서 ‘GB‘로 지었습니다. 대학시절부터 지금까지 과정은 아이디어와 디자이너 경험을 쌓는 과정이었고, 이젠 드디어 그걸 다 녹여서 세상에 처음 제 작품을 공개하는거죠. 길거리에서 이 옷에 대한 평가를 해달라고 부탁했더니 많은 분들이 좋은 평가를 남겨주었어요. ‘독특하고 기발하다, 편안해 보인다, 참신하다’ 등 이런 평가를 받으니 너무 기분이 좋았어요. 저는 제 작품을 클라우드 펀딩 사이트인 ‘텀블벅’에 올렸어요. 제가 직접 모델로 나섰고요. 이건 제게 정말 중요한 일이거든요. 그런데 결과가 좋지 않아 너무 고민입니다. 이달 7일까지 목표 금액을 300만 원으로 세웠는데, 지금까지 목표의 8%밖에 달성하지 못했어요. 한 벌이 12만8000원이고, 커플 세트가 25만6000원인데, 지금 딱 한 세트만 팔렸어요. 15세트는 팔아야 하는데 큰 일이예요. 기자님, 제 작품 사이트 꼭 좀 소개시켜 줄 거죠?(※권봄 디자이너 작품 링크 → ) 저는 퓨전 한복이 대중화됐으면 좋겠어요. 우리의 역사가 담긴 한복은 지금 너무 한복스럽게, 딱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요. 저는 한복적인 요소를 담은 옷을 창작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퓨전한복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요.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면 꼭 판문점에서 ‘통일 패션쇼’를 열거에요. 남과 북의 모델을 써서요. 상상만 해도 너무 행복해요. 그런 날이 꼭 오겠죠? 그리고 통일이 되면 제일 먼저 고향에 묻힌 할아버지 유해를 고향에 모셔오고 싶어요. 남쪽에 와서 할아버지 자료를 보니 전사자로는 기록돼 있는데, 현충원엔 묘가 없어요. 할아버지 묘비 앞에서 ‘할아버지가 목숨 바쳐 대한민국을 지켜주신 덕분에 손녀가 꿈을 이뤘어요’라고 말하고 싶어요. 제 꿈이 너무 거창한가요. 사실 소박하지만 꼭 이루고 싶은 꿈도 또 있어요. 그게 뭐냐면 유재석, 조세호 씨에게 제가 만든 세계에서 유일한 디자인의 한복 정장을 선물하고 싶어요. 제가 유키즈 광팬이거든요.”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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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농림부, 안전한 복합 영농기반 조성 10년 계획 수립

    농림축산식품부(장관 정황근, 이하 농식품부)는 26일 ‘2023-2032 농업생산기반 정비계획(이하 정비계획)’을 수립하고, 안전하고 편리한 농업생산 기반정비 지원을 위한 복합영농, 물 이용, 물 안전, 물 환경 등 4대 분야 세부 추진과제를 발표했다. 정비계획은 ‘농어촌정비법’ 제7조에 따라 10년마다 수립하는 법정계획이다. 쌀 수급 불균형 해소, 논에 타 작물 재배 확대, 스마트팜 확산, 디지털화 등 농정방향 전환과 기후변화 위기와 같은 대내외 여건 변화에 맞추어 수립된다. 복합영농 기반 구축을 위해선 밭작물 재배지역 배수개선 대상지를 현행 30만3000㏊에서 32만 ㏊로 늘리고, 2027년까지 농경지 침수위험 지도도 제작할 예정이다. 간척지에 쌀 이외 다양한 작물 재배를 유도하기 위해 2023년부터 타 작물 재배구역 단지를 지정 운영하고 새만금 농생명용지는 2025년까지 세부적인 활용계획을 수립해 첨단영농이 가능한 기반으로 조성해 나간다. 물이용의 효율화를 위해선 한국농어촌공사가 관리하는 전체 수로 10만4000㎞에 대해 내년까지 디지털 계통도를 작성하며, 수리시설물의 원격 자동 제어 관리를 도입한다. 수위계, 유속계 등 저수지 용수공급량 계측장치도 현재 1470개소에서 2032년까지 2148개소로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물 안전 확보를 위해서는 제방 붕괴 시 하류 피해 위험이 높은 500만 t 이상 대규모 저수지를 2025년까지 재정비하는 등 모든 규모의 저수지들의 재해 대응 능력을 높여 나간다. 저수지, 방조제, 양배수장 등이 지진에도 끄떡 없도록 재구축과 시설물 보강 등을 2030년까지 완료한다는 계획이다. 물 환경 개선 분야에서는 전국 주요 975개 저수지 및 담수호에 대한 수질측정망 조사 횟수를 연 4회에서 7회로 확대해 수질 안전성을 더 촘촘히 확인한다. 수질조사 결과를 반영해 인공습지, 침강지 설치 등 저수지 수질개선사업 대상지를 현재 50개소에서 2032년까지 113개소로 확대한다. 이밖에 수로 생태 블록 설치, 야생동물의 추락과 익사 방지를 위한 경사로와 탈출로도 지속적으로 정비하게 된다. 김정희 농식품부 식량정책실장은 26일 “기후변화 위기와 쌀 수급 불균형 해소, 스마트팜 확산, 디지털화와 같은 농정방향 전환에 맞추어 미래 농업생산 기반 마련을 추진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김 실장은 “과거에 논은 주로 쌀을 생산했으나 최근에는 시설원예나 밭작물 재배가 늘고 있다”며 “논에 스마트팜이 들어오고 다양한 작물 재배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배수시설 확충이 제일 중요하며, 시설원예나 밭작물에 맞는 맞춤형 용수 공급도 새롭게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중장기 대책은 기후변화 위기와 쌀생산 중심에서 다양한 작물로 전환하는 농업환경 변화에 부응한 대책”이라며 “농업인들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영농할 수 있도록 기반을 정비해 나가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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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北정찰위성 발사 실패가 남긴 교훈[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

    예상은 한 치도 빗나가지 않았다. 김정은은 지난달 31일 정찰위성 발사 실패를 또 부하들 탓으로 돌렸다. 지난주 열린 노동당 중앙위원회 8차 전원회의에선 “최근의 가장 엄중한 결함은 우주개발 부문에서 중대한 전략적 사업인 군사정찰위성 발사에서 실패한 것”이라고 명시했다. 조선중앙통신은 “위성 발사 준비 사업을 책임지고 추진한 일꾼들의 무책임성이 신랄하게 비판됐다”고 전했다. 김정은은 회의장에 인상을 잔뜩 쓰고 앉아 있었다. 사진을 엄선해서 공개했을 텐데도 웃는 표정은 없었다. 얼굴은 심하게 붓고 눈 주위엔 짙은 다크서클이, 왼쪽 볼에는 큰 뾰루지가 생겼다. 요즘 심기가 내내 불편하다는 방증이다. 당 전원회의에서 김정은이 연설을 하지 않은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이쯤 되면 회의장 분위기는 안 봐도 뻔하다. 참석자들은 숨소리도 못 내고 있었을 것이다. 군인들이 무책임하다고 추궁당한 간부들을 끌고 나갔을지도 모른다. 이번 실패는 그냥 폭발로 끝난 것도 아니고 2단 로켓을 한국에 헌납한 치욕스러운 실패이기도 하다. 정찰위성 발사 실패 소식을 들은 날 나는 책임 소재를 어떻게 따질지가 제일 궁금했다. 김정은이 용서해 주는 결말도 살짝 기대했다. 기술과 경험을 갖고 있는 간부들을 처벌하면 북한의 위성 개발은 그만큼 후퇴한다. 새로 임명된 후임들은 더 위축돼 제대로 일하지 못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오히려 격려해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번에도 충성심이 부족한 간부들의 무책임성이 실패의 원인으로 지목됐다. 이건 담당자들의 충성심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무책임해서도 아니다. 정찰위성 발사가 실패할 줄은 서울에 앉아있는 나도 예측할 수 있었다. 지난달 15일 칼럼에서 “흑연전극 하나 못 만들면서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한 정찰위성을 어떻게 성공시킬 수 있냐”며 “과학기술 분야를 시간을 정한 내기처럼 호언장담하며 접근하는 태도에 한숨이 나온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과학기술은 때려죽여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라는 교훈을 배우길 바란다”고 썼다. 정찰위성은 지금까지 북한이 시도한 과학기술적 도전 중에서 가장 고난도에 속한다. 정확한 고도에서 정확한 힘과 각도로 위성을 분리시켜야 하는 위성 발사체는 대륙간탄도미사일보다 훨씬 더 복잡한 기술이 필요하다. 반도체 강대국인 한국도 위성을 궤도에 안착시키는 데 12년 3개월이 걸렸다. 지난달 성공한 국산 발사체 누리호를 궤도에 안착시키는 데 300개가 넘는 내로라하는 기업이 참가했다. 자동차 한 대에 부품이 2만 개 들어가고, 항공기 한 대에 부품이 20만 개가 들어간다. 누리호에는 무려 37만 개가 들어갔다. 한국은 세계적인 현대차도 있고, 세계 8번째로 초음속 전투기도 개발한 나라이지만 위성 발사 로켓은 지난달에 완성시켰다. 여러 차례 발사체 엔진이 폭발했고, 엔진 설계만 20번 넘게 바꾸었고, 엔진 연소 실험은 184번이나 거쳤다. 북한은 승용차도 자체로 만들지 못하고, 항공기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엔진 연소 실험을 어쩌다 한 것을 신문에 대서특필하며 자랑하는 북한이 위성을 단번에 성공시키지 못했다고 실무자들을 처벌하니 참 황당하다. 사실 처벌의 1순위는 김정은, 김여정 오누이임을 그 자리에 참가한 간부들은 다 알고 있다. 발단은 지난해 12월 20일 김여정이 정찰위성 개발을 헐뜯는다고 한국을 향해 막말 성명을 발표하면서 “우리가 하겠다고 한 것을 못한 것이 있었는가”라고 호언장담한 데서 시작됐다. 발사를 약속한 4월이 되자 김정은은 국가우주개발국에 찾아가 비상설 위성발사 준비위원회를 만들게 하고 계획된 시일 내에 발사하라고 지시했다. 기한에 쫓겨 발사한 위성은 결국 실패했다. 북한은 위성을 이른 시일 안에 재발사한다고 밝혔지만, 성공 가능성이 이번이라고 더 높아지는 것도 아니다. 간부들을 거듭 처벌하고, 없는 외화를 탕진해 넣어봐야 자존심만 점점 더 구겨질 것이다. 위성은 북한이 호언장담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다. 정찰위성 실패를 통해 북한이 무엇보다 배워야 할 것은 하겠다고 해도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교훈이다. 역사를 훑어보고, 주변을 둘러봐도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남 탓만 하는 사람은 절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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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려, 남쪽에서 작가가 되다 [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이달 초 서울 종로구 혜화아트센터에서 탈북화가 심수진 전시회 ‘자유의 땅에서 내 꿈의 여행’이 열렸다. 지금까지 탈북민 사회에서 심수진이란 이름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기에 어떤 작가인지 궁금해서 찾아가봤다. 솔직히 큰 기대는 없었다. 하지만 전시실에 들어선 순간 뭔가 색다름이 확 와 닿았다. 작품들을 둘러보며 그 색다름의 실체를 깨달았다. 그건 섬세함이었다. 미술을 잘 모르지만, 종종 인사동에서 열리는 전시회들을 관람하면서 현대 미술에서 사라져가는 섬세함에 늘 아쉬웠고 목마름을 느꼈다. 작가 심수진의 작품들에는 칼끝의 섬세함이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그는 단풍나무잎 하나를 놓고 한 달 동안 칼질을 하며 작품을 완성한다. 그의 작품들은 방식과 재료를 가리지 않았다. 유화도 있고 수채화, 아크릴화에 심지어 도자기도 있었다. 재료도 낙엽뿐만 아니라 모래, 보리대 등 다양했다. 하지만 작품들에 들어있는 공통된 특징은 섬세함이었다. 어떤 인내가 배어있어야 이런 작품 창작이 가능할까. 그는 왜 한국에 와서 작가의 길을 택했을까. 많은 궁금함을 안고 그녀와 마주 앉았다. 자유의 땅을 밟기까지 그는 너무나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중국에서 북송되는 과정에서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려 피투성이가 돼 정신을 잃었던 순간도 있었다. 자유의 땅이라 믿고 필사적으로 찾아왔지만, 그에겐 육체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다. 불과 3년 전까지 그녀는 죽을 날만 기다리며 살아가는 시한부 환자였다. 이 땅에 ‘작가 심수진’이란 이름으로 삶의 흔적을 남기겠다는 절박함이 그녀의 작품에 녹아있었다. 그는 어떤 길을 걸어 오늘에 이르렀을까.● 서예 재능을 타고난 소녀 심수진은 1978년 함경남도 단천에서 평범한 노동자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기계공장 선반공이었고, 어머니는 상점 판매원이었다. 1995년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의 삶은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남달랐던 점은 학교에서 글씨를 제일 잘 썼다는 것이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것은 사범대학 미술학부에서 서예를 전공한 학교 사로청지도원이었다. 학생들이 쓴 글 중에서 범상치 않은 글씨체를 발견한 여성 지도원은 14살 수진을 지도원방에 불렀다. 그러더니 붓으로 글씨를 써보게 했다. “내가 볼 때 너는 타고난 능력이 있는 것 같다. 이제부터 내가 서예를 가르쳐줄 건데, 배워볼 생각이 있어?” 수진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13살에 어머니가 사망하고, 계모 밑에서 사는 수진에게 서예는 너무나 호기심이 가득한 새로운 세계였다. 그때부터 사로청지도원은 수업이 끝나면 수진을 불러 서예를 가르쳤다. 농촌동원과 화목동원에서도 빼주고, 토끼가족이니, 폐동이니 등을 내야 하는 ‘꼬마과제’도 전부 면제해주었다. 대신 수진은 학교 벽보를 도맡아 만들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재미있었다. 졸업반에 올라가선 교장에게 발탁돼 김일성 생일 등 명절 때마다 학교에서 중앙에 올려 보내는 ‘충성의 편지’나 학생기록자료 등을 써야 했다. 졸업할 때까지 학교의 각종 필사와 붓글씨는 전부 그의 몫이었다. 1995년 졸업과 동시에 그는 속도전청년돌격대에 입대했다. 한시라도 빨리 계모의 손을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속도전청년돌격대 9여단에 들어갔는데 당시 부대는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벼농사를 짓고 있었다. 원래 속도전청년돌격대는 건설을 도맡아하는 부대였는데, 당시엔 고난의 행군 시기라 자재가 없어 건설할 곳이 마땅치 않으니 농촌에 보낸 것이다. 고난의 행군으로 도처에서 아사자가 나오면서 사회의 기강은 걷잡을 수 없이 흐트러졌다. 속도전청년돌격대도 예외가 아니었다. 1년쯤 지나니 그와 함께 단천시에서 입대한 대원 20명 중 18명이 도망갔다. 각종 핑계를 내걸고 집에 갔다가 복귀하지 않은 것인데, 기차를 타고 며칠씩 걸려 집에 찾으러 가도 부모들이 “여기 오지 않았다”고 하면 그만인 때였다. 수진도 저녁에 열린 생활총화 시간에 화장실에 간다고 하고 평양 친척집으로 도망갔다. 거기서 여비를 빌려 집으로 갔는데 계모는 당장 부대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래서 함북 청진에 사는 외삼촌 집에 가서 머물며 장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과를 파는 장사를 하다가 나중엔 동 장사를 시작했다. 동을 사서 혜산에 들여가면 산 가격의 두 배를 받았는데, 그 돈으로 다시 중국산 담배를 사서 나오면 또 두 배가 떨어졌다. 대신 동은 잘못 걸리면 사형까지 처하는 국가 전략 자산이기 때문에 기차를 타고 다닐 때 목숨을 걸어야 했다. 혜산역에 내리면 사람들이 검열을 피해 나가기 위해 3m나 되는 담장에 새까맣게 매달렸다.● 18세에 인신매매범에게 걸려들다 그의 탈북은 우연히 이뤄졌다. 인신매매범의 마수에 걸린 것이다. 1996년 11월 그는 열흘 넘게 혜산역에서 노숙을 하는 신세가 됐다. 동을 팔고 담배를 사서 돌아가려는데, 전기가 없어 기차가 열흘째 오진 않았다. 할 수 없이 담배를 다시 팔아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행색도 남루하기 그지없었다. 그때 어떤 아줌마가 그에게 다가왔다. 산에 벌목을 다니는 사람들에게 밥을 지어주는 일을 석 달쯤 해주면 큰 돈을 만지게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제안도 솔깃했지만, 돈도 떨어져가는 터라 당장 밥을 먹는 것이 급했다. 그녀를 따라 어떤 집에 가니 중국산 쌀이 무려 다섯 포대나 쌓여있었다. 당시에 그 정도 쌀을 갖고 있는 집은 드물었다. 저녁이 되니 인근 국경 경비대원들이 몰려와 밥을 먹고 갔다. 알고 보니 벌목이 아니라 밀수를 전문으로 하는 집이었다. 물건을 나르는 사람들이 밥을 먹고 갔고 이들을 봐주는 군인들도 밥을 먹고 갔다. 이 집에서 한달쯤 일했을 때, 그 아줌마가 또 제안했다. 강을 건너가 물건을 좀 받아갖고 오라는 것. 저녁마다 압록강을 넘어가고 넘어오는 사람들을 봤던 터라 수진은 돈을 많이 준다는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날 밤 그녀와 함께 다른 여성 두 명도 함께 강을 넘었다. 강을 건너니 중국에서 차가 마중 나와 있었다. 물건을 실으러 가야 된다며 이들을 싣고 몇 시간을 달려 어느 집에 내려놓았다. 집은 컸는데 담장 위엔 철조망을 쳐서 도망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집 주인이 나오더니 처음에는 물건이 오려면 기다려야 한다며 먹을 것도 풍족하게 주고 새 옷도 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은 지린(吉林) 성 퉁화(通化) 시에 소속된 메이화구(梅河口) 시였다. 연변과는 차로 열 시간 넘게 떨어진 곳이었고, 장백에서도 차로 남쪽으로 몇 시간 와야 하는 곳으로, 북한 자강도 만포시 건너편에 위치해 있었다. 며칠쯤 지나 북한 여성들은 자신들이 인신매매의 희생양이 된 것을 알았다. 그러나 철조망을 친 집을 벗어나 도망가도 주변이 온통 한족이라 나가자마자 잡힐 것이 뻔했다. 보름쯤 지났을 때 어떤 남자가 나타났다. 주인은 저 남자를 따라가 밥을 해주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고, 집에 돈도 보낼 수 있다고 설득했다. 집에 보내달라고 하자 “너를 데려오느라 돈을 많이 써서 보낼 수 없다”고 노골적으로 협박했다. 수진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차피 생지옥처럼 변한 북한에 남은 미련도 없었다. 중국에 와서 지내보니 먹을 것도 풍족하고 살 만한 세상이었다. 남들은 돈을 써서 넘어오기도 힘든데, 이왕 이렇게 된 바에 중국에서 결혼해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장춘의 첫 탈북 여성 1997년 1월에 남자를 따라가보니 장춘이었다. 그를 산 남자는 일본뇌염 후유증으로 짜증을 달고 사는 30세 조선족이었다. 그는 장가가기 위해 4000위안을 내고 수진을 샀다. 당시 4000위안이면 500달러 정도 됐다. 북한 아줌마가 그들을 얼마나 팔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고난의 행군 시기에 북한 처녀들은 단돈 100달러에 팔렸다. 1999년 한국 영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영화 ‘쉬리’에서 북한군 특수 8군단 소좌 박무영(최민식 역)은 국정원 요원 중원(한석규 역)에게 침을 튀기며 이렇게 울부짖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니들이 한가롭게 그 노래를 부르고 있을 이 순간에도 우리 북녘의 인민들은 못 먹고 병들어서 길바닥에 쓰러져 죽어가고 있어. 나무껍데기에 풀뿌리도 모자라서 이젠 흙까지 파먹고 있어. 새파란 우리 인민의 아들딸들이 국경 넘어 매춘부에 그것도 단돈 100달러에 개 팔리듯 팔리고 있어. 굶어죽은 지 새끼의 인육마저 뜯어먹는 그 에미, 그 애비를 너는 본 적이 있어? 썩은 치즈에 콜라 햄버거를 먹고 자란 니들이 그걸 알 리 없지.” 기자는 탈북해 연변에 숨어있던 2000년에 그 영화를 봤다. 북한 여성들이 단돈 100달러에 팔려 다니는 현장에서 내가 느꼈던 울분과 분노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여성들 속에 심수진도 있었다. 수진은 한국에 온 뒤 자신을 팔았던 북한 아줌마가 한국에 와서 탈북민으로 살고 있는 것을 보게 됐다. 그녀를 보자 마음속 감정이 복잡해졌다. 거짓말하고 자신을 팔아먹은 것은 용서하기 힘들었지만, 한편으로 저 여자 때문에 내가 목숨을 건져 한국까지 오게 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면서 고마운 생각도 들었다. 그는 그 아줌마를 용서하기로 했다. 수진은 장춘에 팔려온 첫 북한 여성이었다. 1년쯤 지나니 여기저기서 북한 여성들이 하나둘 장춘에 와서 살기 시작했다. 10년이 지난 2007년 그가 살던 마을에는 탈북 여성이 20명이 넘게 시집와서 살았다. 하지만 수진이 한국에 먼저 온 뒤 친했던 사람에게 한국행 루트를 알려주자 몇 명씩 줄 지어 한국으로 왔다. 얼마쯤 지나니 그 마을의 탈북 여성들은 모두 사라졌다. 이런 일은 중국 지린 성이나 흑룡강 성의 수많은 마을에서 벌어졌다. 중국 조선족들은 탈북 여성들을 “갈데없는 거지같은 신세를 걷어주고 먹여 살렸더니 애까지 낳고는 다 달아나는 배은망덕한 여자들”이라고 욕한다. 하지만 탈북 여성들은 아무리 애를 낳고 살았다고 해도 언제 북송될지 모르는 처지에서 불안에 떨어야 했고, 원치 않은 남자에게 팔려와 온갖 학대를 감내하고 살아야 했다. 한국에 온다는 것은 그들에겐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 조선족들이 입장을 바꾸어 그들의 처지라고 해도 도망가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수진은 수많은 탈북여성들의 삶을 대표하는 표본이기도 했다. 팔려와 1년쯤 살게 되니 아들이 태어났다. 아들이 태어나자 감시도 약해지고 밖에 나가 일을 할 수 있게 허락해주었다. 그는 장춘 시내에서 호텔과 식당을 옮겨 다니며 일을 했다. 월급날이면 시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업고 나타나 돈을 받아갔다. 씨받이 역할을 마쳤으니 그 다음은 아들을 인질로 잡힌 돈 버는 노예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리다 수많은 탈북민이 경험했던 북송의 위기가 수진에게 찾아왔다. 2001년 식당에서 일하던 때 갑자기 공안이 찾아와 그를 체포했다. 그는 장춘에서 체포된 탈북민 4명과 함께 북송 기차에 탔다. 기차를 타니 멀미가 심했다. 그는 수시로 화장실에 가서 토했다. 하도 여러 번 화장실을 들락거리니 호송원들이 그녀의 수갑을 벗겨주었다. 중국 기차는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설마 24세 여성이 도망을 칠까 방심한 것이었다. 수진은 죽더라도 북한에 다시 돌아가기 싫었다. 지금 탈출하지 못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인생에서 목숨을 걸어야 할 때가 있다면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새벽 5시가 지나자 호송원들도 꾸벅꾸벅 잠을 자기 시작했다. 수진이 앉은 좌석의 창문 쪽 자리엔 평범한 조선족 남성 둘이 앉아있었다. 그는 남성들에게 사정하기 시작했다. “저는 북한으로 끌려가는 탈북 여성입니다. 제가 이제 가면 살아올 것 같지 못합니다. 제발 부탁인데, 창문만 좀 올려주십시오.” 하도 부탁하니 창문 옆에 앉은 남성들이 안쓰러워 보였는지 슬그머니 창문을 올려주었다. 수진은 순식간에 창문을 넘어 기차 밖에 매달렸다. 그가 기억하는 것은 그때까지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눈을 떠보니 어느 집 문 앞에 누워있었다. 얼굴과 온몸이 피투성이었다. 옷도 다 찢어졌다. 자신이 어떻게 민가의 문 앞에 누워있게 됐는지 알 수 없었다. 짐작으론 누군가 선로 옆에 쓰러진 여성을 보고 마을로 데려다놓고 간 것이 아닌가 싶었다. 정신을 차린 그는 동네 미용실을 찾아 들어갔다. 깜짝 놀란 여주인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여주인은 긁힌 얼굴에 약을 발라주고, 옷도 새로 가져다주었다. 여기가 어디냐고 물으니 연길이라고 했다. 그는 장춘의 남편에게 전화했다. 수진은 남편이 전화 속에서 내뱉은 말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잡혀간 줄 알았는데, 또 전화 온 걸 보니 갈 데가 없네….” 수진은 이제 돌아가면 무조건 집을 뜨리라고 결심했다. 장춘에서 시누이가 찾아왔다.● 베이징의 북한 작품 가이드 장춘에 돌아와 얼마쯤 있으니 남편이 돈 벌어온다며 고기잡이 어선을 타러 갔다. 그는 시집에 “북한 집에 좀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집을 나선 뒤 산둥(山東) 성으로 갔다. 같은 마을에 살던 탈북 여성 한 명이 그쪽으로 가서 자리 잡았던 것이다. 그때가 2002년이었다. 산둥에 간 그는 한국 회사에서 식모 자리를 얻었다. 한국인 직원 50명과 일본인 10여명이 일하는 큰 회사였다. 거기서 2년 동안 일하다가 2004년 베이징으로 옮겨갔다. 베이징에선 북한 예술작품을 파는 회사에 취직했다. 사장은 조선족이었는데 북한에서 그림과 수예, 보석화를 받아다가 한국인들에게 팔았다. 수진은 전시장을 찾아온 한국 관광객들에게 북한 작품을 설명하는 일을 맡았다. 한국인들은 그를 조선족 가이드로 알았다. 그림을 좋아하는 그에겐 너무 적성이 맞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 일을 오래하지 못했다. 하루는 북한대사관에서 찾아와 그림 판매 실태를 파악하면서 이것저것 캐물었다. 북한 외교관들을 본 순간 수진은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곧바로 사표를 낸 수진은 베이징에서 한국인 가정집들을 다니면서 밥과 청소를 해주는 일을 시작했다. 그는 하루에 세 가정을 찾아갔다. 한국 가정과의 만남은 그에게 한국에 대한 동경을 키워주었다. “한국 외교관 가정과 LG 현지 직원 가정 등을 다녔는데 모두가 신사다웠습니다. 물론 잘 사는 집도 있고 못 사는 집도 있었지만, 모두 매너가 좋았습니다.” 한국 외교관의 부인은 미인이었는데, 비밀 유지 차원에서 그랬는지 아니면 다른 차원에서 그랬는지 몰라도 남편하고는 말하지 못하게 철저히 차단했던 것이 기억이 남는다. 하지만 베이징엔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2008년 올림픽을 앞두고 외지인들에 대한 단속이 강화됐다. 그는 한국에 가기로 결심하고 2007년 초 한국행 루트를 찾은 뒤 길을 나섰다. 동남아를 통해 한국에 오는 과정은 다른 탈북민들과 똑같았다. “태국 감옥에 들어가니 중국에서 결혼했던 여성들이 이구동성으로 ‘나는 한국에 가면 중국 남편과 아이들을 데려오겠다’고 말을 하더군요. 저는 한국 가정을 2년 가까이 드나들었기 때문에 ‘정작 가봐라. 가면 눈이 높아져 절대 중국 남자 데려오지 않는다. 데려오면 손바닥에 장을 지지겠다’고 했어요. 실제로 중국 남편을 데려온 탈북 여성들은 많지 않지요.”● 한국에서 시작한 작가의 삶 2007년 2월 수진은 한국에 도착했다. 조사기관에서 담당 조사관이 그가 쓴 한자 이름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 다른 중국어도 써보게 하더니 “탈북 이후에 중국어를 배운 사람은 절대 이렇게 쓸 수가 없다. 중국에서 태어나 체계적으로 배운 사람이 아니고선 이렇게 예쁘게 한자를 쓰기 힘들다”고 했다. 덕분에 위장 탈북민으로 오해받아 조사를 좀 더 받기도 했다. 그해 8월 그는 평택에 임대주택을 받고 한국 사회에 정착했다. 3개월 뒤 전자부품 제작 회사에 검사원으로도 취직했고, 하나원과 연계된 대학인 한국폴리텍대학 안성캠퍼스에 디자인 전공으로 입학도 했다. 모든 게 잘 풀리는가 싶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기 직전인 2010년부터 각종 병마가 그를 괴롭혔다. 밥을 챙겨먹지 않고 열심히 일했더니 위궤양으로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다. 거기에 심각한 간경화까지 겹쳤다. 더는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못 됐다. 중증장애인 진단까지 받게 되니 우울증도 찾아왔다. 그는 점점 삶의 희망을 포기해갔다. 그는 공기 좋은 곳에 가서 남은 인생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겠다고 생각했다. 우연히 친구집에 놀러갔다가 경험한 충북 옥천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2010년 옥천으로 내려갔고 지금도 그곳에서 살고 있다. 현지 문화센터에 등록해 도자기 체험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타고난 재능은 거기서도 빚을 발했다. 선생과 수강생 모두가 어디서 전문적으로 배웠냐고 물었다. 아무리 처음 해보는 것이라고 해도 믿지 않았다. 도자기를 빚으면서 그는 난생 처음 편안함을 느꼈다. 온 정신을 집중해 작품을 만드는 것이 좋았다. 나중에 재료비가 들지 않는 작품을 생각하다가 낙엽을 재료로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큰 단풍나무잎을 주어와 칼로 그림을 새기다보면 온갖 시름이 잊혀졌다. 작품 창작은 그에게 삶의 끈이 되었다. 6년을 그렇게 흘려 보냈다. 도자기와 판화로 입문했지만 그림을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생각은 한 시도 떠나지 않았다. 2016년 몸이 어느 정도 좋아지자 서울디지털대 회화과에 입학해 2018년 차석으로 졸업했다. 대학을 다니면서 모래를 재료로 하는 보석화에 빠졌다. 모래에 150가지 색을 입혀 작품을 창작했다. 2018년엔 보릿대를 주워와 작품을 만들었다. 2017년 수진은 제7회 대한민국서화비엔날레에 작품을 출품해 은상을 받았다. 이 일은 그에게 큰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2018년 국제현대미술대전 은상, 대한민국창작미술대전 동상 등 출품작들마다 좋은 평가를 받게 되자 그는 한국미술협회와 한국서화협회에 정회원으로 등록하고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받은 상만 10여개가 넘는다. 작가 심수진을 키운 것은 타고난 재능과 끈질긴 몰입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육체가 받쳐줄 때 가능한 일이었다.● 자유의 땅에서 내 꿈의 여행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건강은 다시 악화되기 시작했다. 한나절 동안 작업을 하면 한나절을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있는 일이 반복됐다. 2020년이 되니 병원에서도 간경화를 더는 치료할 수 없다고 했다. 사실상 시한부 판정이었다. 남은 것은 간 이식밖에 없었다. 간 기증자를 찾기는 너무 어려웠다. 이때 아들이 엄마에게 간을 떼어주겠다고 나섰다. 물론 아들도 쉽게 결정한 일은 아니었다. 아들은 2015년 17세 때 한국에 왔다. 엄마와 살겠다고 중국을 떠나온 것이었다. 원치 않은 결혼과 출산을 거쳐 태어난 아들이고 오랫동안 엄마와 떨어져 자란 아들이지만, 그가 세상에 남긴 유일한 혈육이기도 했다. 한국에 와서 고등학교를 다닌 아들은 국적을 결정할 순간이 되자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국 국적을 얻으려면 군대에 갔다와야 했다. 수진이 “앞으로 엄마와 계속 같이 살려면 군에 갔다오는 길밖에 없다”고 하자 아들은 “엄마 고향 사람들에게 총 겨누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오랜 고민 끝에 아들은 결국 한국 국적을 선택했고 강원도 최전방 부대에 근무한 뒤 만기 전역했다. 전역한 날 아들은 수진에게 “군 복무가 별거 아니었어요. 괜히 많이 고민했네. 갔다 오길 잘했어요”라고 했다. 군에 다녀온 뒤로 아들은 많이 달라졌다. 돈을 아껴 쓰려고 하고, 소소한 음식은 직접 만들어 먹는다. 올해 2월엔 지방 국립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취직을 준비 중이다. 아들이 군 복무를 하던 2020년 수진은 쓰러졌다. 몇 달 넘기기 어렵다고 했다. 그는 아들에게 전화를 했다. “네가 엄마를 좀 살려줘야겠다. 나는 13살에 엄마를 잃고 살았는데, 지금 엄마가 되고 보니 아들이 장가가는 것을 꼭 보고 싶다. 그리고 북한에 있는 형제도 꼭 다시 만나고 싶다. 마지막으로 엄마는 꿈을 다 이루지 못했다. 네가 엄마의 꿈을 이루게 좀 도와주렴.” 아무리 아들이지만 어릴 때 두고 온 터라 그럴 말을 할 염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들은 “엄마는 왜 나를 계속 힘들게 하냐”고 푸념도 했지만 결국 어머니를 위해 수술대에 올랐다. 떼어낸 아들의 간 60%가 수진에게 이식됐다. 이제 수진은 아들의 간으로 남은 일생을 살아야 한다. 간 이식 후 건강은 뚜렷하게 좋아졌다. 피부도 좋아지고 식성도 달라지고 머리카락도 빠지지 않았다. 피곤한 것도 많이 사라졌다. 이젠 살만해졌다. 아들을 볼 때마다 수진은 “내가 살려고 너를 낳았구나”라는 생각이 늘 든다. 항상 미안한 마음이지만 해줄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아 안타까울 뿐이다. 그는 새로 얻은 목숨을 1초도 낭비하지 않고 값있게 쓰고 싶다. 화가 심수진의 한계가 어디인지 끝까지 가보고 싶기도 하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여전히 값싼 재료를 구해 작품을 만들 수밖에 없지만, 그건 지금 느끼는 행복에 비해선 큰 고민이 아니라고 했다. “저는 북에서 19년, 중국에서 10년, 한국에서 15년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저처럼 건강이 나쁜 사람이 북한이나 중국에 있었다면 지금까지 살아있었겠습니까. 한국의 복지제도가 너무 잘 돼 있어서 저같은 사람이 지금까지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여기서 사는 매일 매일이 저에게 찾아온 선물 같습니다. 그리고 이젠 꿈도 펼칠 수 있게 됐습니다.” 2023년 6월 혜화아트센터에서 열린 전시회는 탈북작가 심수진을 알리는 첫 개인전이기도 했다. 그는 이달 30일부터 7월 2일까지 열리는 신라호텔 ‘2023 그랜드 아트페어’ 초대전에도 참가한다. “지금까지 저는 어둠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이제 밖으로 나와 빛을 보려 합니다. 새 생명도 얻고 내 꿈도 펼칠 수 있는 이곳에서 오래오래 살아서 꼭 자신만의 세계를 개척한 작가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보니 그의 첫 전시회 타이틀 ‘자유의 땅에서 내 꿈의 여행’이 담고 있는 깊은 뜻이 남다르게 다가왔다. 그의 여행은 이제 시작됐다. 전시회는 작가 심수진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그 여행길이 오래오래 이어지길 진심으로 기원하며 나는 전시회장을 떠났다.심수진 작가의 작품들을 기록한 유튜브 링크 →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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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북 1호 변호사 이영현 “쌀 한 배낭 구하러 두만강을 건넜죠”[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1997년 6월 어느 아침. 남루한 행색의 14세 소년이 풀밭을 헤치며 두만강 기슭을 헤매고 있었다. 울먹이며 삼촌을 애타게 불렀지만,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간밤 소년은 30대 후반의 외삼촌과 함께 두만강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서로 손을 꽉 잡고 강물을 헤쳤지만, 비 온 뒤의 두만강은 겉으로 보기보다 훨씬 물살이 셌다. 어느새 둘은 손을 놓고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소년은 바닷가에서 자라 수영에 자신 있었지만, 발아래서 돌이 굴러가는 급물살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무작정 손을 휘저으며 버틸 뿐이었다. 어느 순간 소년은 물살에 휩쓸려 정신을 잃었다. 옆에서 “어푸, 어푸”하는 외삼촌의 비명을 들은 것도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소년은 강기슭에서 눈을 떴다. 날이 훤히 밝아 있었다. 강 건너편을 보니 북한이었다. 저녁 8시에 두만강에 뛰어들었는데 간밤의 기억을 잃어버렸다. 정신이 돌아오자 소년은 외삼촌을 찾기 시작했다. 굶주린 배를 부여잡고 두만강 기슭을 오르내리며 몇 시간째. 하지만 끝내 외삼촌은 보이지 않았다. 시신도 없이 사라진 외삼촌을 찾으며 소년은 홀로 앉아 엉엉 울었다. 22년이 흐른 2019년. 소년은 대한민국에서 탈북민 1호 변호사가 됐다. 북한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다 가족과 생이별하고 중국에서 소년공으로 일하며 “하나님, 저에게 제발 공부할 기회를 주세요”라고 애타게 기도했던 소년은 우여곡절 끝에 한국에 왔고 20세에 영어 알파벳부터 배우기 시작했지만, 어떤 역경도 그를 주저앉히진 못했다. 법무법인 이래의 이영현 변호사가 그 주인공이다.● 두만강에서 외삼촌을 잃다 이영현은 1983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걸어서 몇 시간 떨어져 있는 작은 어촌마을에서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수산협동조합 어부였고, 어머니는 협동농장 농민이었다. 부친은 너무 일찍 돌아가 얼굴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가 인민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막 올라갈 무렵, 북한엔 엄혹한 ‘고난의 행군’이 닥쳐왔다. 농민인 어머니가 혼자 세 아들을 벌어 먹여야 했다. 노쇠한 시어머니도 한 집에서 살았다. 배급이 끊어지자 영현의 형제들은 학교를 가지 않고 어머니를 도와 먹고 살기 위해 뭐든 다 했다. 영현도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해왔고, 나무껍질을 벗겨왔다. 그래도 하루 한 끼 풀죽도 먹기 힘들었다. 나이든 할머니부터 쓰러졌다. 먹지 못해 힘없이 누워 있던 할머니는 고난의 행군 첫 해인 1995년을 넘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이듬해엔 같은 마을에 살던 삼촌도 굶어죽었다. 굶어 죽어가도 아무 대책이 없었던 마을 사람들에 비해 그나마 영현의 가족에겐 믿을 곳이 한 군데 있었다. 어머니 친척들이 중국에 있었던 것이다. 1997년 6월 인근에 살던 외삼촌이 집에 찾아와 중국으로 가자고 했다. 어머니는 14살 영현을 딸려 보냈다. “삼촌 따라가서 꼭 쌀 한 배낭이라도 메고 와.” 둘은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기차를 타고 며칠 고생한 끝에 마침내 두만강 옆인 한반도 최북단 함북 온성에 도착했다. 친척들의 전화번호를 모르니 국경에 가서 중국에 전화를 할 수도 없었다. 강을 넘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돈이 없어 국경경비대를 매수할 수도 없었다. 30대 후반의 외삼촌은 어느 날 영현을 데리고 두만강 옆 도로를 따라 걸으면서 어디로 건너가면 좋을지 정찰하기 시작했다. 1997년은 국경경비대도 많지 않았던 터라 도강할 장소가 몇 군데 눈에 들어왔다. 외삼촌이 택한 곳은 두만강 폭이 50m 정도 되는 훈춘 맞은편의 어느 야산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때는 큰비가 내린지 얼마 되지 않던 때였다. 하지만 강에 다가가지 못하고 멀리 도로에서 보니 물살이 얼마나 센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날 밤 어둠이 내리자 외삼촌과 영현은 봐두었던 도강지점으로 이동했다. 어둠 속에서 본 두만강은 유유히 흘러갈 뿐이었다. 어촌마을에서 자란 영현은 어려서부터 바다에서 놀아 물이 두렵지 않았고, 수영에도 자신이 있었다. 외삼촌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손을 잡고 강에 들어갔다. 멀리 강 하구에 보이는 중국 마을이 이들의 목표였다. 떠내려가더라도 앞으로만 헤엄쳐 간다면 마을 근처에선 땅에 발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장마 뒤의 강물은 바다와 전혀 달랐다. 허리까지 들어가자 더는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둘은 저도 모르게 손을 놓치고 말았다. 이젠 계획한 대로 앞으로 헤엄쳐 가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그런 물살에선 헤엄도 제대로 칠 수가 없었다. 그냥 본능적으로 손을 휘저을 뿐이었다. 어두운 두만강에서 영현은 외삼촌을 잃어버렸지만 약속한대로 중국을 향해 무작정 헤엄쳐 나가다가 정신을 잃었다.● 소년을 구해준 조선족 부부 아침에 정신을 차린 영현은 두만강 상류를 향해 걸었다. 삼촌은 자기보다 더 빨리 기슭에 도착했을 것 같았다. 아무리 올라가도 삼촌은 보이지 않았다. 서너 시간을 걸어갔을 때 눈앞에 중국 마을이 나타났다. 간밤 목표로 삼았던 그 마을이었다. 마을이 보이자 소년은 그제야 자신이 처한 현실이 서서히 실감나기 시작했다. “삼촌은 죽었구나. 이제 어떻게 할까. 마을에서 쌀 한 배낭을 구걸해 집으로 돌아갈까.” 집에 너무 가고 싶었다. 그런데 두만강을 보니 다시 뛰어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참을 고심하다가 소년은 마을로 들어가 어느 집 문을 두드렸다. “저는 조선에서 왔는데, 삼촌은 강을 넘어오다가 빠져 돌아가셨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 그러니 밥 한 그릇만 좀 주세요.” 중년의 부부가 내다보더니 혀를 찼다. “이틀 전에도 조선에서 건너온 사람들 도와주었는데 또 왔구나. 일단 들어와라.” 영현은 집에 들어갔다. 주는 밥을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자 부부는 또 한 공기를 퍼주었다. 또 먹었다. 그렇게 서너 공기를 먹고 나니 밥이 없었다. “우리는 밭에 일하러 가야 해. 너는 집에서 씻고 쉬어라.” 훈춘의 조선족 농부 부부는 너무 친절했다. 영현은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처음 본 애한테 밥도 주고, 문도 잠그지 않고 나가다니….” 강을 하나 넘었을 뿐인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밥을 몇 공기나 먹었지만 여전히 배가 고팠다. 부엌에 나가 보니 누룽지가 보였다. 그는 그것도 다 먹었다. 저녁에 돌아온 부부는 “어린 애가 어떻게 이걸 다 먹었냐”고 깜짝 놀랐다. 그 집에서 며칠을 머물렀다. 조선족 부부는 친척을 찾는 것도 도와주었다. 소년은 외삼촌이 오면서 중국 친척들의 이름과 사는 지역을 이야기해주었던 것을 기억했다. 그걸 토대로 두꺼운 전화번호부를 뒤지며 해당 지역 친척과 같은 이름의 전화번호에 무작정 전화를 해봤는데 이것이 성공했다. 찾아낸 친척은 길림에서 살았는데, 고위직이었다. 친척은 “내가 고위직이라 많은 사람들이 우리 집에 드나들기 때문에 북에서 월경한 아이를 데리고 있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친척인데 모르는 척 할 수는 없어 네가 지낼 곳을 찾아주겠다”고 말했다. 친척이 알려준 주소로 가니 훈춘의 어느 농촌마을이었다. 친척은 탈북 아이들을 돌보는 조선족 전도사를 수소문해냈던 것이다. 전도사는 소년을 보고 다시 어딘가에 연락했다. 한 남자가 나타났다. 새로 나타난 남자는 조선족 집사였는데, 북에서 온 아이를 키우고 싶다고 미리 연락을 해두었던 참이었다. 남자를 따라 나섰다. 기차를 타고 멀리 멀리 따라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도착한 곳은 만리장성 동쪽 끝에 있는 항구도시인 허베이(河北) 성 친황다오(秦皇島)였다.● 학교 벽에 매달린 14세 소년공 집사를 따라 시내 변두리의 집에 들어가니 한눈에 봐도 가난해 보였다. 그리고 집사에겐 그와 비슷한 또래의 아들 두 명이 더 있었다. 집에 들어가자 부인이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니, 상의 없이 아이를 데려오면 어떻게 해?” 집사는 못들은 척 대꾸를 하지 않았다. 며칠 뒤 그는 소년을 데리고 파출소에 갔다. 공안들에게 “연변에 살던 친척집 아이가 고아가 돼 데리고 왔다”고 신고하자 그들은 알았다고 끄덕였다. 아직 탈북자가 있다는 말도 들어보지 못한 동네였던 것이다. 집사는 며칠 있다 또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러자 “어린 애가 무슨 밥을 그리 먹냐”는 부인의 타박이 더 심해졌다. 그렇게 한달쯤 눈칫밥을 먹던 영현은 일을 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그 집과 가깝게 지내는 친구 중에 페인트칠을 위주로 하는 인테리어 업자 한족이 있었는데, 그가 영현을 보자 데리고 다니며 일을 배워주겠다고 한 것이다. 집사 부인이 다 낡았지만 그래도 굴러가는 자전거를 하나 가져다주었다. 영현은 그 자전거를 타고 업자를 따라다녔다. 아침 7시에 집을 나가 밤늦게까지 일하고 돌아오는 일상이 반복됐다. 당시 중국에서 국수 한 그릇이 2위안이었는데, 영현은 8위안을 하루 일당으로 받아왔다. 번 돈은 모두 집사 부인에게 주었다. 그러자 그녀의 표정이 달라졌다. 밥도 많이 주고 그때부터 “아들, 아들”하며 살갑게 대해주기 시작한 것이다. 이곳에서 영현은 2000년까지 3년 남짓 살았다. 가끔 학교 외벽 페인트칠을 할 때도 있었다. 밧줄을 타고 벽에 매달려 페인트칠을 하던 10대 중반의 영현은 교실 안에서 교과서를 읽는 자기 또래의 아이들을 볼 때마다 울먹이며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제발 저에게도 공부할 기회를 주세요.”● 다시 찾아간 연변 조선족 집사가 영현을 데리고 온 이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하루는 그가 베이징에 가자며 영현을 데리고 나섰다. 베이징에서 만난 사람은 미국 국적의 한인 선교사였다. 중국에서 피터은(본명 은춘표)이란 이름으로 활동한 그는 미국의 한 한인교회 장로로 있다가 조선족 선교를 하러 중국에 왔다. 하지만 대량 탈북을 알게 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이때 그가 아는 조선족 집사가 탈북 아이를 보호하고 있다고 하자 한번 보자고 한 것이다. 베이징에 간 영현은 일주일 정도 은 선교사와 머물며 성경 공부를 했다. 돌아갈 때는 용돈도 넉넉히 주었는데 그 돈은 집사 부인에게 모두 넘겨주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선교사는 집사에게 영현의 중국 호적을 사라고 5000위안도 주었다. 당시엔 중국에서 2년 가까이 쓰지 않고 벌어야 모을 수 있는 돈이었지만, 그 돈도 집사가 다 착복했다. 영현을 집에 데려온 것은 미국이나 한국 선교사들에게 내세워 앵벌이를 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하지만 그 덕분에 영현은 1년에 한두 번 베이징으로 가 머물며 한인 선교사와 친해졌다. 2000년경이 되자 은 선교사는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아예 연변에 머물며 박사 신분으로 바꾸어 탈북민 사역에 매진했다. 그는 자신이 만난 1호 탈북 소년인 영현을 편법을 써서 단둥에 있는 조선족 학교에 넣어주었다. 하지만 호구도 없이 임시로 들어간 학교에서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두 달쯤 지나자 학교 선생들이 영현을 의심하면서 호구를 제출하라고 닥달질하기 시작했다. 더 버틸 수는 없었다. 영현은 야반도주하듯이 단둥을 떠나 연변에 자리 잡은 은 선교사에게 찾아갔다.● 하늘이 도운 한국행 은 선교사는 수많은 탈북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연변 지역의 어느 깊은 산중에 탈북민 정착촌을 만들었다. 탈북민들은 산을 개간해 농사도 짓고, 가축도 키웠다. 갑자기 외진 산골짜기에 사람들이 모여 사니 신고가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마을은 공안에 적발돼 얼마 유지되지 못했다. 은 선교사는 연변의 농촌에 기술학교도 만들었다. 중국 애들도 공부를 했지만, 탈북민 아이들도 그 학교에서 함께 공부했다. 탈북민 아이들은 농촌에 있는 주택에서 은 선교사와 함께 살면서 학교를 다녔다. 영현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2002년 3월 탈북민 25명이 베이징 주재 스페인 대사관에 집단 진입하기 전까지는 그럭저럭 조용히 숨어살 수는 있었다. 그런데 그 25명 중에는 은 선교사와 한 집에서 살던 소녀도 있었다. 스페인 대사관 진입 사건은 중국에서 큰 뉴스로 다뤄졌다. TV에서 대사관 진입 장면이 반복해서 나오자, 동네 주민이 알아봤다. “저 여자애는 여기서 살며 학교 다니던 애였는데 탈북한 애였네.” 정체가 드러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아이들은 공포에 떨었다. 같이 살던 아이들이 갑자기 하나둘 사라졌다. 며칠 지나니 영현이 살던 집에 남아있는 애들은 3명뿐이었다. 은 선교사도 심각성을 알았다. 그는 어느 조선족 집사에게 아이들을 한국으로 보낼 수 있는 길을 알아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조선족 집사는 몽골 국경까지 사전답사한 뒤 돌아왔다. 4월 20일에 한국으로 떠나기로 날짜가 정해졌다. 하지만 집사가 강경했다. 여기서 더 머무는 것은 너무 위험하니 지체없이 떠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이 받아들여져 아이들은 19일에 집을 나섰다. 25살 여성과 19살 영현, 14살 소년이 한 팀이었다. 그들은 기차를 타고 내몽골 도시까지 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연변에서 들려온 소식을 들었다. 그들이 떠나자마자 중무장한 공안 100여명이 트럭 여러 대에 나눠 타고 그들의 은신처를 급습했다는 것이다. 미처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체포됐다. 은 선교사도 함께 체포돼 50일 넘게 조사를 받은 뒤 미국으로 추방됐다. 이후 그는 중국에 다시 가지 못했다. 조선족 집사는 이들을 국경까지 안내해주었다. 그리고 별 하나를 가리키며, 저쪽으로 계속 가면 몽골이니 쉬지 말고 걸으라고 했다. 며칠 전에도 그는 탈북민 몇 명을 넘겨 보냈는데, 아침에 자고 일어나니 그들이 호텔 앞에 서 있었다고 했다. 그들도 나름 밤새 걷고 걸었는데, 아침이 돼 보니 다시 떠난 위치로 돌아온 것이다. 사막에선 방향을 가늠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다. 영현의 일행은 다시 알려준 방향으로 걷고 걸었다. 한참을 걸어가니 철조망이 나왔다. 바닥을 파고 통과했다. 그런데 한참 걸어가니 또 철조망이 나타났다. 철조망을 한 번만 넘을 줄 알았던 이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철조망도 어찌어찌해서 통과해 걷는데 또 철조망이 나타났다. 밤새 이들이 땅을 파거나 기둥을 잡고 넘어간 철조망은 대략 10여개나 됐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철조망도 더는 나타나지 않을 때쯤 날이 밝기 시작했다. 그때 멀리 마을이 보였다. 가서 살펴보니 중국어를 쓰지 않았다. 몽골에 온 것이다. 그 마을에 좀 머물러 있으니 몽골 수비대 여럿이 나타나 총을 겨누며 안대를 씌웠다. 차를 타고 간 곳은 변방 수비대 병영이었다. 이곳에서 열흘 정도 조사를 받고 울란바토르행 기차에 올랐다. 그곳에서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도착한 날이 2002년 5월 17일이었다.● 마침내 찾아온 공부할 기회 8월 하나원을 졸업한 영현은 무연고 청소년으로 분류돼 임대주택은 받지 못하고 천안에 있는 무연고 청소년 쉼터로 가게 됐다. 가보니 교회 하나만 달랑 있고, 함께 간 탈북 청소년들이 머물 숙소도 없었다. 대량 탈북을 처음 경험해 본 정부는 그때까지도 체계적인 청소년 정착 시스템을 마련해놓고 있지 못했다. 탈북 아이들은 받겠다는 곳만 있으면 현장 답사도 없이 무작정 보내다 보니 살 집도 없는 곳에 보내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영현은 다른 애들과 함께 집을 짓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소년공으로 살았던 것이 도움이 됐다. 벽돌을 나르고 쌓고 겨우 몸을 누울 공간을 만들었지만 이곳에 오래 있진 않았다. 6개월 뒤 그는 2002년 개교한 기독교 대안 특성화학교인 지구촌고등학교에 입학해 부산으로 옮겨갔다. 지구촌고등학교는 2020년 폐교를 했는데, 운영기간 탈북민 사회의 우수한 청년 인재들을 많이 배출했다. 영현은 그렇게 바랐던 공부할 기회를 드디어 얻었다.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꿈이 현실이 된 것이다. 북한에서 생존을 위해 학업을 그만들 수밖에 없었던 영현은 영어 알파벳도 잘 몰랐다. 수학 등 기초 과목도 새로 배워야 했다. 그렇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공부가 힘에 부칠 때면 중국 학교의 외벽에서 밧줄에 매달려 “공부할 기회를 달라”며 부르짖었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2년 동안 죽으라고 공부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05년 연세대 법대에 입학했다. 그의 꿈은 법조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아들을 찾아 탈북했던 어머니와 형제가 북송됐다는 소식을 나중에 들었다. 한국에 와서 고향에 사람을 보냈지만, 찾지 못했다는 전갈을 받았다. 죽었는지, 아니면 수용소로 끌려갔는지 알 수도 없었다. 지금도 그는 북송된 가족의 생사를 알지 못한다. 영현은 법조인이 돼 억울한 탈북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수호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20세부터 공부를 시작한 그가 연세대 법대 과정을 따라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한 번뿐인 배울 기회를 낭비하지 않았다. 시험 기간이면 도서관에서 열흘 남짓 먹고 자며 살았다. 그래도 첫 학기는 평균 C 학점을 피할 수는 없었다. 과연 졸업할 수 있을까 두려움도 들었지만 포기하진 않았다. 방학 때 삭발하고 산에 들어가 공부만 한 적도 있었다. 노력하는 그에게 기회도 찾아왔다. 졸업할 즈음 로스쿨제도가 생겨난 것이다. 2011년 영현은 대학을 졸업하고 경북대 로스쿨에 입학했다. 대학 기간 1년은 영어를 익히기 위해 한인 선교사가 사는 미국에 건너가 공부를 했고, 또 1년은 로스쿨에 합격하기 위해 재수를 하다보니 대학 졸업에 6년이 걸렸다.● 탈북 1호 변호사의 꿈 로스쿨 역시 쉽지 않았다. 경북대는 지방대이긴 하지만 학비가 저렴한 국립대라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그의 동기들은 대다수가 SKY 출신의 ‘학점기계’들이었다. 그들을 따라가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공부하는 것밖에 없었다. 3년 과정을 4년 동안 마치고 2015년 드디어 변호사 시험을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첫 시험은 낙방이었다. 로스쿨 제도가 생겨 2012년에 치른 첫 시험에서 변호사 시험 합격률은 87%를 기록했지만 해가 갈수록 그 비율이 떨어졌다. 2015년엔 61%가 합격했다. 그는 떨어진 39%에 들었다. 이듬해 또 도전했다. 시험 기회는 다섯 번 부여된다. 이듬해 합격률은 55%로 더 떨어졌다. 그는 또 떨어졌다. 그렇게 연거푸 네 번을 낙방했다. 그러는 사이 합격률은 51%, 49%로 계속 낮아졌다. 2019년 마지막 기회가 찾아왔다. 이제 통과하지 못하면 변호사가 되기 위해 바쳤던 15년의 세월이 허무하게 끝나게 되는 것이다. 어느덧 영현도 36세의 청년이 돼 있었다. 합격자 발표가 나기 전날 그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비가 쏟아지는 공원을 정처 없이 걸었다. 잠을 잘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계속 떨어졌지만, 그는 자신이 변호사가 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변호사가 되는 과정이 참 많이 힘들지만, 죽음도 넘겼는데 못 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변호사시험 준비를 하는 내내 눈이 닿는 모든 곳에 ‘합격’이란 글을 써서 붙였다. 휴대전화 알람음도 ‘합격’이었다. 눈을 떠서 감을 때까지 늘 ‘합격’만 머리에 떠올렸다. 하지만 정작 마지막 기회가 다가오니 만감이 교차했고, 심장이 떨렸다. 합격자 발표가 뜬 시각 떨리는 손으로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그는 ‘변호사 시험 합격’이라는 글자가 보이자 두 손을 하늘로 높이 들고 ‘만세’를 큰소리로 외쳤다. 순간 그의 얼굴에는 기쁨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4전5기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그는 탈북민 출신 최초의 변호사가 됐다. 여기저기서 인터뷰 요청이 왔다. 하지만 다 거절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고개를 넘으면 다른 고개가 또 다가온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득한 그였다. 변호사 생활이란 새로운 고개를 들뜨지 말고 초심으로 시작하고 싶었다. 한 중견 로펌에서 실무 수습과정을 마친 뒤 그는 여러 로펌을 거쳐 현재는 법무법인 이래에서 파트너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여느 변호사들처럼 그 역시 형사, 민사, 가사, 보험 등 여러 분야를 다뤄야 한다. 그의 방은 밤늦게까지 불이 켜 있다. 그는 바쁜 변호사업무를 하면서도 대한변호사협회 북한인권특별위원회와 북한이탈주민법률지원위원회 등에 가입해 북한인권과 탈북민 정착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대한변협 인권재단의 사무총장직도 수행하면서 탈북민들에 대한 법률상담과 법률교육 관련 사업을 직접 기획하고 진행한다. 그 외에도 여러 북한인권 관련 기관이나 단체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그는 인류보편적 가치인 북한인권을 개선하고, 먼저 온 통일인 탈북민들이 한국사회에서 잘 정착하도록 돕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말한다. 탈북민 변호사로서 그가 가슴속에 지니고 있는 소명의식은 늘 운명처럼 새겨져 있다. 그는 시대가 부르는 날이 온다면 누구보다 앞장서서, 그리고 절실하게 북한주민과 탈북민을 위해 나설 의지와 각오를 깊은 곳에 품고 살고 있다. “만약 내일이라도 북한 체제가 무너지고 북한으로 갈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저는 주저없이 가겠습니다. 지금 북한 체제에 부역하던 사람들을 법조인으로 재교육시켜 쓸 순 없습니다. 법조인이 없는 공백의 상태가 올 것인데, 새로운 법질서를 이식하는 과정도 겪어야 합니다. 북한 2000만 동포 중 자유민주주의 세상에서 제일 먼저 법조인이 된 제가 당연히 주춧돌이 돼야 할 겁니다. 그게 쌀 한 배낭을 지고 오려고 두만강을 건넌 제게 분단의 조국이 짊어지게 한 운명이 아닐까요.” 그의 표정은 부드러웠지만 어투는 단호했다. 변호사 이영현은 공부가 만들어낸 법조인이 아니라, 시대가 만들어낸 법조인이었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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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돈이냐, 아사냐’ 김정은의 선택은[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

    요즘 중국 다롄(大連)과 단둥(丹東)항에는 안남미 등 식량 포대들이 잔뜩 쌓여 있다고 한다. 식량을 주문한 북한이 대금을 지불하지 못해서이다. 작년 10월부터 북한은 많은 식량을 중국에서 사갔다. 중국 세관에 따르면 올해 3월까지 6개월간 북한의 식량 수입액은 6723만 달러로 월평균 1120만 달러였다. 코로나 이전인 2018년 한 해 식량 수입액이 2260만 달러였음을 감안하면 내부 식량 사정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4월부터 식량 수입이 급감했다. 4월 585만 달러로, 3월 2176만 달러에 비해 73% 급락했다. 5월부터는 식량이 항구에 묶이기 시작했다. 대북 소식통들에 따르면 최근 북한의 식량 가격은 최근 5년 내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특히 서민들의 주식인 옥수수는 코로나 이전에 비해 두 배 이상 비싸졌다. 굶주리는 가정과 꽃제비도 늘고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식량 수입이 늘어나야 정상인데 주문했던 식량도 대금을 치르지 못한다는 것은 외화가 고갈됐다는 증거다. 외화가 없으면 북한의 선택은 두 가지다. 빚지거나 뭘 팔아 버는 것이다. 북한은 빚지는 데는 선수다. 작년 10월 무역이 재개된 이래 북한은 매달 1억 달러가 넘는 대중 무역 적자를 기록했다. 올해 1∼4월 월평균 무역적자는 약 1억3000만 달러였다. 북-중 무역자료가 공개되기 시작한 1998년부터 올해 4월까지 북한의 대중 무역 누적 적자액은 193억8068만 달러나 된다. 그런데 빚지는 것도 한계가 있다. 중국이라고 무작정 북한에 퍼주진 않는다. 중국이 허용하는 적자 범위를 넘어서면 돈을 주고 사와야 한다. 2017년 유엔의 대북제재로 북한 수출의 90% 이상을 차지하던 광물, 수산물, 섬유제품 수출이 금지된 뒤 북한이 외화를 벌 방법은 극히 제한됐다. 3월 북한의 대중 수출액은 2055만 달러였는데, 이 중 가발과 인조속눈썹 제품이 796만 달러로 39%를 차지했다. 식량을 사올 돈도 없으면서 김정은은 요즘 정찰위성을 여러 개 쏘겠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다. 정찰위성 발사에는 막대한 돈이 든다. 한국이 내년까지 정찰위성 5기를 발사하는 데 들이는 예산은 약 10억 달러다. 북한은 인건비가 사실상 공짜이긴 하지만, 반도체 등 위성 발사에 드는 거의 모든 부품은 사와야 한다. 속눈썹 따위나 팔아서 충당할 수 없는 금액이다. 이런 데 쓰는 돈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공식 무역통계에 잡히지 않는 북한의 비자금이 따로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가장 주목해야 하는 것은 중국에 머무는 인력이다. 근로자의 경우 유엔 제재 이후 상당수 귀국했고, 남아 있는 사람들도 1인당 상납액이 크진 않다. 하지만 정보기술(IT) 종사자들은 얘기가 다르다. 현재 중국에서 얼마나 많은 북한 정보기술자들이 활동 중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수천 명인 것은 확실하다. 2017년 313총국(옛 조선컴퓨터센터)이 중국에서 1000만 달러를 벌어 당 자금으로 바치자 김정은은 노동당과 무력부, 보안성, 보위성 등 각급 내각 기관에도 중국에 IT 인력을 파견해 돈을 벌어오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코로나가 발발하기 전에 기존보다 5, 6배 많은 IT 인력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5∼7명 규모로 중국 대도시의 아파트에 은신해 활동한다. 해킹과 가상화폐 탈취 등 온갖 불법 활동으로 막대한 돈을 벌어 김정은의 주머니로 송금한다. 지난해 5월부터 북한 내에서 코로나가 대유행해 더는 강력한 봉쇄를 할 필요가 없음에도 김정은은 지금까지 1년 넘게 해외 교류를 차단했다. 그래서 코로나는 구실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IT로 벌어들이는 돈줄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중국의 북한 IT 인력은 모두 체류 기간이 만료돼 국경 봉쇄가 풀리면 귀국해야 한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을 파악하고 있는 중국이 귀국했던 인력이 다시 올 경우 받아줄지는 미지수다. 김정은에겐 국경 봉쇄 해제는 가장 큰 돈줄을 잃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쌀 사올 돈도 떨어졌는데 마냥 봉쇄를 유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인민들은 하루빨리 국경이 개방돼 중국과 무역이 재개되길 학수고대하고 있다. 김정은이 굶주려 아우성치는 인민의 분노를 언제까지 감당하며 버틸 수 있을지 주목된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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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성증권, 투자시장의 신인류 ‘디지털 부유층’ 고객 유치 집중

    삼성증권에서 계좌 잔액을 1억 원 이상 유지하고, 주 거래를 디지털로만 하는 고객이 2019년 말 3만8197명에서 2022년 말 약 22만5000명으로 3년간 5배 이상으로 늘었다. 이들의 평균 자산도 2019년 1억6500만 원에서 2022년 말 4억3000만 원으로 증가했으며 평균연령은 51세에서 45.6세로 낮아졌다. 엄지족이면서도 고액 자산가인 사람들을 증권가에선 ‘디지털 부유층’이라고 부른다. 삼성증권은 달라지는 환경에 발맞춰 디지털 부유층을 겨냥한 ‘S.Lounge’를 지난해 출범시킨 데 이어 고객들의 수요에 맞춘 서비스를 확대하고 있다. S.Lounge는 삼성증권(S)이 투자 관련 정보, 상담 등을 프라이빗한 공간(라운지)에서 제공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S.Lounge는 투자정보라운지, 세미나라운지, 컨설팅라운지 등 3개의 대표 메뉴를 중심으로 휴먼터치와 자동화된 투자정보를 제공하는 하이브리드 서비스도 제공한다. 투자정보라운지를 통해 제공하는 ‘리서치톡’과 ‘리포트 플러스’는 고객들의 이용률이 특히 높다. 이 서비스는 이용자가 받고 싶은 정보 유형을 선택하면 관련 애널리스트가 작성한 코멘트나 리포트를 고객에게 휴대전화 팝업 메시지로 실시간 제공해주는 기능이다. 세미나 라운지는 실시간 웹세미나를 열어 삼성증권 애널리스트와 전문가뿐만 아니라 자산운용사 대표 매니저 등이 직접 출연해 국내외 주식이나 금융상품과 관련된 주요 이슈를 주제로 설명하고 질의응답도 받는다. 웹세미나는 평균 월 2, 3회 개최하고 있는데 서비스 안내 당일 신청 고객이 평균 400명 이상을 기록한다. 컨설팅라운지는 디지털 고액 자산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디지털PB가 직접 유선으로 투자 상담과 업무처리를 원스톱으로 진행할 수 있게 도와준다. 삼성증권 디지털자산관리본부에는 경력 10년 이상의 디지털PB가 100명 넘게 있다. 오현석 삼성증권 디지털자산관리본부장은 “디지털 부유층 고객들은 투자와 관련해 셀프학습을 많이 한 상태라 많은 양의 정보를 짧은 시간에 비대면 컨설팅을 통해 확인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들의 니즈에 부합하기 위해 디지털PB들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도 확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삼성증권은 이 밖에도 펀드, 상장지수펀드(ETF), 주식 등 개인별 맞춤형 포트폴리오를 제공하는 디지털자산관리 서비스인 ‘굴링’, 연금자산 관리 서비스인 ‘연금S톡’을 제공해 초개인화 시대의 자산관리 서비스를 제공 중이다. 또 삼성증권 애널리스트의 모습과 음성을 인공지능(AI) 기술로 학습시켜 만든 가상인간인 ‘버추얼 애널리스트’를 업계 최초로 개발해 유튜브를 통한 국내외 시황 콘텐츠로 투자정보의 적시성을 높이며 디지털자산관리 서비스를 한층 고도화하고 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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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국가대표 스키선수였어요” 호위사령부 여군 출신 박윤희 씨의 삶

    깜깜한 어둠. 흰눈 덮인 압록강에 10~15명의 밀수꾼 무리가 나타났다. 금속이 든 60㎏짜리 마대를 메고 앞장선 밀수꾼 두목은 30대 초반의 여인이었다. 이름 박윤희. 13살에 북한군 호위사령부에 입대해 국가대표 바이애슬론 선수로 활약했던 노동당원. 현직은 보천보혁명박물관 관리원. 비공식 생업은 밀수꾼 두목. 그에게 40㎏ 마대는 책가방이었고, 60㎏짜리는 일상이었다. 90㎏짜리를 메고 압록강을 넘은 적도 있었다. 밀수를 하다가 3번씩이나 체포돼 노동단련대에 가면서도 고향을 지킨다고 버티던 그는 결국 2013년 설날 마지막으로 압록강을 넘었다. 김정일 친위부대인 974부대를 제대한 남동생도 누나와 함께 강을 넘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박 씨는 한국 생활이 너무나 행복하다며 웃음을 달고 산다. 서울에 오기까지 박 씨의 삶은 다른 탈북민들과는 같은 듯 달랐다.● 삼지연의 소녀 스키선수 박윤희 씨는 1979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 도시에 대한 기억은 없다. 2살 때 아버지를 따라 양강도 삼지연군(현재 삼지연시로 승격)으로 이사를 왔기 때문이다. 부친은 사회안전성 답사관리소에서 일했다. 안전원(경찰) 군복을 입고 있어 어딜 가나 폼은 났지만, 윤희가 태어나서부터 그가 군을 제대하던 2004년까지 25년 동안 상위(중위와 대위 사이)만 달고 있었다. 답사관리소 편제가 그랬다. 그래도 부친은 “이만한 직업이 없다”며 승진도 못하는 자리를 고집했다. 답사관리소는 전국 안전원들이 정기적으로 하는 혁명전적지 답사를 위해 존재하는 여관 개념의 답사숙영소를 3개 운영했다. 윤희의 부친은 왕재산과 보천군, 삼지연에 있는 답사숙영소를 몇 년에 한번씩 옮기며 순환 근무를 했는데, 권력을 가진 안전원들을 먹이고 재우는 곳에서 근무하다보니 집에 먹을 것이 풍족했다. 윤희는 배고픔을 모르고 자랐다. 고난의 행군도 몰랐다. 집에는 쌀과 기름이 넉넉했다. 부친은 과일과 동태 따위의 부식물도 자주 가져왔다. 배급표가 있어도 배급을 타지 못하는 학교 선생들이 집에 찾아왔다. 그러면 부친이 무용지물이 될 뻔한 배급표를 답사숙영소 식량으로 바꿔주었다. 그러다보니 학교에서 윤희의 위신도 높아졌다. 인민학교를 다니던 10살 때 윤희는 삼지연학생소년궁전에서 스키를 배우기 시작했다. 지금은 마식령에도 스키장이 생겼지만, 당시 북한 전역에 경기를 할만한 스키장은 삼지연 베개봉스키장 밖에 없었다. 스키 선수를 키우는 곳도 삼지연과 장진, 랑림 등 몇 개 지역밖에 없었다. 동계 경기 대회 시즌이 오면 전국에 있는 스키선수들이 다 삼지연으로 몰려왔다. 어린 윤희는 이들이 타는 스키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부친에게 졸라 학생소년궁전 스키반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윤희는 뛰어난 실력을 발휘해 몇 년 만에 소년궁전 에이스 스키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전문 체육단에 들어가 선수생활을 해야겠다는 더 큰 꿈을 꾸기 시작했다. 당시 북한에서 스키부가 있는 선수단은 호위사령부 산하의 체육단인 이명수체육단밖에 없었다. 이명수는 백두산 천지물이 흘러내리는 작은 개울인데 삼지연에 있었다. 항일빨치산들의 전적지가 있다고 해서, 북한에선 성스러운 곳으로 꼽히는 개울이고 체육단 이름도 그걸 따서 지은 것이다. 부친은 윤희가 14살 되던 때 삼지연에 훈련하려 왔던 이명수체육단 코치들에게 찾아가 우리 딸을 선수로 뽑아줄 수 있는지 물었다. 코치가 윤희를 부르더니 스키를 타고 훈련장을 몇 바퀴 돌아보게 했다. 그러더니 실력이 뛰어나다고 뽑아가겠다고 했다. 당시 북한에선 스키를 타는 선수 자체가 많지 않았지만, 어떤 선수를 키우느냐에 따라 코치의 성과도 좌우되기 때문에 아무나 받아주지도 않았다.● 바이애슬론 국가대표가 되다 이명수체육단은 호위사령부 소속이기 때문에 이곳에 입단하는 것은 곧 군 입대와 같다. 입대 선서도 한다. 윤희는 소년단넥타이를 매고 다니던 14살 때 이명수체육단 선수로 입단했고, 동시에 군 경력도 시작됐다. 체육단 선수들에겐 군복이 지급됐지만, 시내로 나갈 때는 사복을 입어도 무방했다. 윤희는 오전에는 학교에 다니고, 오후엔 훈련을 했다. 평양 용성 구역 건지리에 있는 이명수체육단에는 축구, 마라톤, 스키 세 가지 종목에 300여명의 선수가 있었다. 스키 선수들은 1년 중 절반은 평양에 있었지만, 겨울 시즌 6개월은 늘 삼지연에 전지훈련을 나갔다. 11월부터 훈련을 시작해 국내 대회를 준비하는데, 이듬해 2월 백두산상 체육대회, 3월 공화국선수권대회, 4월 만경대상 경기대회를 치러야 한다. 대회에서 우승해봐야 공화국선수권 대회만 상품이 있을 뿐 아무런 경제적 보상은 없었다. 윤희는 선수단에 입단한지 2년 뒤인 1995년 공화국선수권대회에서 동메달을 땄다. 동시에 국가대표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가 선택한 종목은 바이애슬론이었다. 사격 훈련할 때엔 수백 발씩 총 쏘는 날도 있었는데, 하루는 700발을 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빛이 바랬다. 1990년대 중반은 북한 체육이 가장 암흑기를 걷던 때이기도 했다. 1991년 8월 북한 유도 국가대표 이창수가 스페인 바르셀로나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했다가 귀국 도중 탈북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격노한 김정일은 2년 동안 북한 선수들의 국제대회 참가를 금지시켰다. 이 때문에 많은 쟁쟁한 선수들이 선수 생활을 접고 은퇴했다. 1991년 영국 셰필드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3관왕을 차지했던 리듬체조 선수 이경희도 이때 선수생활을 은퇴했고, 2007년 탈북해 한국에 왔다. 국제대회 참가 규정이 풀리나 싶었는데 이번엔 김일성이 사망했다. 1994년 김일성 사망 후 갑자기 ‘유훈관철’이라는 말이 생겨나더니 체육계에도 여파가 밀려왔다. 김정일이 “국제대회에 나가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유훈관철을 못한 것이니, 그렇게 나라 돈을 탕진할 바에는 3년 동안 내보내지 말라”고 한 것이다. 한마디로 나라에 돈이 없으니 등수에 들 수 있는 사람만 엄격하게 구별해 내보내라는 지시였다. 윤희가 선택한 바이애슬론은 국제대회 메달권과 거리가 멀었다. 윤희는 국제대회에 나간 경험이 있는 나이 많은 선배 언니가 해줬던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국제대회에 나가 우리 선수들이 메달을 따는 건 불가능해. 오르막은 어떻게 악으로 깡으로 따라 붙을 수 있지만 내리막과 평지에 들어서면 거리가 쭉쭉 벌어져. 유럽 선수들은 키도 크고 몸무게도 많고, 힘도 좋아서 우리가 그 체력을 따라갈 수가 없어.” 게다가 장비도 차이가 컸다. 국가대표 선수들이 사용하는 스키는 러시아제 등 그나마 수입품이긴 하지만, 그래도 서구권 세계 정상급 선수들이 사용하는 장비와는 질적 격차가 심했다. 좋지도 못한 스키도 수입제 중요 장비라고 선수들은 끔찍하게 아끼며 탔다.● 호위사령부 여성 대원 선수단에선 기록을 매우 중시했다. 나이에 상관없이 기록이 좋은 사람은 1조, 기록이 떨어지면 2조에 속했다. 항상 함께 훈련하던 친구라도 기록 측정이 끝나면 식사칸부터 달라졌다. 1조는 이밥에 고기를 풍족하게 먹였지만, 2조는 고기는 언감생심 구경도 못하고 시래기 국을 먹었다. 시래기 국을 먹다가 고기 먹는 1조를 제치고 올라간다는 건 힘든 일이었다. 2조에 속하면 훈련할 때 1조의 장비도 들어주어야 했다. 국가대표급 기록을 갖고 있던 윤희는 1996년 급성 맹장염에 걸려 수술을 받고 일주일 동안 입원하게 됐다. 입원생활은 너무나 편안하고 달콤했다. 침상에 누워 지나온 날을 돌아보니, 언제 제대로 쉰 적이 없었다. 오직 훈련만이 인생의 유일한 목표인 듯 하루도 편히 쉬지 못하고 달려왔는데, 그렇게 훈련해봐야 국제대회에도 못나가는 신세가 처량했다. 그게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는지, 퇴원한 뒤 그의 기록은 자꾸 떨어지더니 그해 급기야 2조로 밀려났다. 국가대표 자격도 박탈됐다. 2조에 가서 다른 선수들의 장비까지 들어주는 처지가 되니 더 서글펐다. 그렇게 살다보니 선수 생활을 더 할 욕구도 사라졌다. 은퇴를 결심했다. 이럴 바엔 일반 부대에 가서 노동당에 입당이라도 한 뒤 집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선수단 간부들을 찾아가 졸랐다. 간부들도 처음엔 안 된다고 하더니 그가 계속 고집을 피우자 어쩔 수 없이 승인했다. 윤희의 경우는 14살에 이미 군에 입대한 것으로 돼 있기 때문에 일반 부대에 갈 때 새로 입대로 취급하지 않고 조동으로 처리한다. 그가 속한 체육단이 김 씨 패밀리를 경호하는 부대인 호위사령부(963군부대) 소속이기 때문에, 그는 1998년에 963군부대 967기갑여단 산하 고사기관총 여성중대로 옮겨갔다. 기갑여단 산하에 여성 중대가 2개가 있는데, 이들은 평양 삼석구역에 주둔하면서 금수산기념궁전 등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얼음물로 목욕하는 중대 윤희네 중대엔 14.5㎜ 4신 고사총 12정이 있었다. 6명으로 구성된 분대가 기관총 1정을 맡았다. 그 외 지휘소대, 남성들로 구성된 견인차 운전수 10여명이 중대에 소속돼 있었다. 그는 일반 부대에 가자마자 죽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고난의 행군 시기라고 해도 선수단은 그래도 배는 곯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간 중대에서는 옥수수를 통으로 삶았고, 토끼풀을 반찬으로 먹었다. 그마저도 양이 충분하지 않았다. 열악하다곤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래도 체육단보다는 일반 부대에 있어야 노동당에 입당할 확률이 높기 때문에 그는 이를 악물고 버티기로 했다. 부대에 간지 일주일 만에 덜컥 무좀에 걸렸다. 신고 간 신발을 고참들에게 빼앗기고 누가 신던 낡은 운동화를 받았는데, 새벽 4시부터 기상해 잠잘 때까지 농사일을 시켜 신발을 벗을 틈이 없었다. 경계근무를 서고 들어가면 부업 농사일이 기다리고, 그걸 끝내고 돌아오면 또 당직이 기다렸다. 선수단에서 그 혹독한 훈련을 견딘 그였지만, 일반 부대 생활은 다른 차원의 악몽이었다. 부대에 전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영양실조에 걸리기도 했다. 김 씨 일가를 경호하기 위해 출신성분까지 보고 특별히 선발한 부대인 호위사령부가 사정이 그랬으니 그때 다른 부대의 상황은 더 말로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나마 호위사령부라고 다른 부대와 구별되는 점은 총을 매년 30발은 쏘게 했다는 것이다. 윤희는 한국에 와서 군인들이 사격을 한 뒤 탄피를 엄격하게 수거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북한군은 탄피를 수거하지 않는다. 호위사령부는 또 여성들에겐 종이로 된 생리대도 공급했는데, 일반 부대엔 없는 것이었다. 중대에 목욕탕이 있긴 했지만, 여름에 부업농사가 한창일 때엔 일주일에 주말 한번이나 목욕을 할 시간을 주었다. 저녁에 씻는 시간이 주어지지만, 손이 빠른 여대원들이나 발까지 씻을 수 있지, 손이 느리면 신발을 벗다가 병실로 뛰어 들어가야 했다. 겨울은 더 열악했다. 전기가 오지 않아 목욕탕 물을 덥히지 못할 때가 비일비재했는데, 주말에 전기가 오지 않으면 욕조의 얼음을 까고 목욕을 시켰다. 얼음물을 몸에 붓기 전 대원들은 마찰열을 만들어 몸을 예열하기 위해 서로 몸을 열심히 비벼댔다.● 하이힐 신은 호위사령부 여대원들 윤희가 기관총 중대에 옮겨가기 직전인 1997년 김정일은 급작스럽게 북한군 복무기간을 10년에서 13년으로 늘이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점점 부족해지는 병력 숫자를 그런 식으로 보충하려 한 것이다. 여성도 7년 복무기간이 10년으로 늘었다. 제대해 집에 갈 날만 기다리던 병사들에겐 청천병력 같은 지시였다. 아무리 장군님 지시라고 해도 이 지시에는 모두가 부글부글 끓었다. 윤희가 부대에 갔을 때는 군기가 말이 아니었다. 17살에 입대해 7년 복무를 채운 여대원들은 거의 부대 규율 생활을 하지 않았다. 주말에는 사복에 파마머리, 하이힐을 신고 평양 시내에 나가 연애를 하는 게 일상이 됐다. 당시 북한에선 여성의 결혼 적정 연령을 24세쯤으로 보았고, 27세면 노처녀라고 잘 거들떠보지도 않을 때였다. 그러니 제대하기 전에 남자를 잡아야 한다는 다급함에 누구나 초조해졌던 것. 남자 부대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만 30세에 제대해 집에 가서 언제 여자를 소개받고, 연애하고 애를 낳느냐는 자조가 부대를 휩쓸고, 나이든 고참들은 주둔지 인근에 나가 여성들을 유혹하기 시작했다. 제대할 때 아이를 안고 간다는 것이 이들의 목표였다. 어느 부대를 막론하고 주둔지 인근에 처갓집을 만들고 거기에 박혀 사는 대원들이 속출했다. 그러다 보니 북한군 전체의 군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이 풀어졌다. 몇 년 뒤 김정은은 복무기간 연장의 부작용을 인식하고 제대 정년을 원상복귀시켰다. 군기가 떨어지면서 부대에선 과거에 없던 사건들도 자주 터져 시끄러웠다. 윤희는 중대에서 한 번은 총알이 사라져 일주일 동안 잠을 못자고 벌을 선 적이 있었다. 김정일을 경호하는 부대에서 총탄이 없어진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사건이었다. 조사 내려온 젊은 보위부 조사관은 중대원들을 병실에 가두고 차렷 자세를 취하게 한 뒤 총알을 빼간 사람이 나올 때까지 자지 못하게 했다. 서서 졸다가 쓰러지는 대원들이 속출했다. 일주일쯤 지나서 나이든 보위부 사람이 나타나더니 젊은 조사관을 향해 “이렇게 병실에 세워두면 총탄을 몰래 꺼내놓고 싶어도 어떻게 꺼내놓겠냐. 나가서 총알을 찾게 해야지”라고 선심 쓰듯 말했다. 온 중대를 총알을 찾으라고 산에 달라붙게 했는데 저녁에 사라진 총알이 한 병사의 탄창주머니에서 나왔다. 공교롭게도 그 병사와 윤희는 한 근무조였는데, 이후 윤희가 총알을 훈친 사람으로 오인 받아 며칠 동안 각종 조사를 받으며 감옥에 갈 뻔했다. 다행히 중대장과 소대장이 “이 대원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다”고 적극 보증해줘 풀려날 수 있었다. 몇 년 뒤에도 총알 분실 사건은 또 터졌다. 이때는 하루 만에 총알을 찾아 중대장 선에서 몰래 사건을 덮었다. 당시 부소대장이던 윤희는 중대장 방에 갔다가 잘못을 고백하는 진술서를 우연히 보고 매우 놀랐다. 중대에서 가장 말이 없고 내성적이던 대원이 훔쳤던 것이다. 고참이 근무시간에 졸았다고 한 시간 더 연장 근무를 세우자 분노한 대원이 고참을 혼내주려고 총알을 뽑아 숨겼던 것이다. 그는 진술서를 훔쳐보면서 그래도 총알을 훔친 게 총을 난사한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했다. 윤희는 고사총부대에서 4년을 복무하고 2002년 제대했다. 1993년에 어린 나이에 입대한 것을 감안하면 꼬박 10년을 호위사령부 소속으로 지낸 것이다. 제대하면서 노동당에도 입당했다.● 밀수조직을 이끄는 노동당원 제대한 윤희는 가족이 사는 양강도 보천군에 돌아왔다. 국가에서 그에게 임명한 직업은 보천군혁명박물관 관리원이었다. 북한은 1937년에 김일성이 국내 진공 전투를 벌였다고 선전하는 보천보를 거대한 사적지로 만들어놨다. 당시 경찰서, 면사무소 등을 옛 모습 그대로 재현해 놓고 백두산 답사를 가는 사람들이 들러 견학하게 했다. 보천보전투는 실제로는 김일성부대 참모장인 왕작주가 인솔한 부대가 진행한 전투이고, 당시 김일성은 압록강을 건너오지도 않았다. 그러나 역사 조작의 달인인 북한은 김일성이 보천보전투 이후 인민들을 모아놓고 조국 광복의 희망을 심어주는 연설을 했다면서 동상과 건물, 박물관 등으로 거대한 ‘혁명신앙구역’으로 만들었다. 박물관에서 그는 청소하고 먼지를 닦는 등의 허드레 일을 했다. 보천군에선 이런 자리도 여성들에게 쉽게 돌아가지 않았지만, 그는 호위사령부 출신에 당원이라 가능했다. 보통 여성들은 농사를 짓거나 돌격대에 나가 험한 육체노동에 시달렸다. 당시 북한 어디가나 그랬듯이 혁명박물관 관리원이라고 배급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먹고 살기 위해선 장사를 해야 했는데, 윤희는 처음에 비닐포대를 농촌에 파는 일을 했다. 농촌에선 포대가 귀했는데, 이걸 봄에 가져다주고 가을에 옥수수 등 곡식을 받아와 팔았다. 그럭저럭 먹고 살 수는 있었지만 겨우 풀칠하는 정도였다. 반면 압록강을 끼고 있는 지리적 조건을 이용해 중국과 밀수하는 사람들은 꽤 잘 살았다. 그도 언제부터인가 밀수를 하기 시작했다. 폐철, 귀금속, 산열매 등을 닥치는 대로 메고 압록강을 건너가 중국에 팔았다. 돌아올 때는 쌀이나 사카린 등을 받아와 장마당에서 팔았다. 밀수할 때는 국경경비대에 뇌물을 주는데, 이들은 눈감아주는 인원수에 맞춰 돈을 받아갔다. 뇌물에 들어가는 돈을 줄이려면 한 사람당 메고 가는 양을 늘려야 했다. 그러다 보니 40㎏ 정도 메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고, 보통 60㎏을 메고 압록강을 건넌다. 한 번은 욕심을 내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메고 가 중국에서 무게를 재보니 저울에 90㎏이 찍히기도 했다. 압록강을 건널 때 언제 잡힐지 모르니 초인간적인 힘이 나오는 것이다. 점점 윤희 옆에 사람들이 붙기 시작했다. 많을 때는 10~15명을 모아 짐을 메고 한꺼번에 강을 넘기도 했다. 그가 밀수조직의 두목 격이 된 것은 부친이 안전원이라 권력 기관에서 함부로 못했던 이유가 컸다. 그는 2013년 탈북할 때까지 밀수를 하다가 세 번 잡혔다. 경비대에 뇌물을 주면 잡힐 일이 없었지만, 체포된 세 번은 모두 뇌물 주는 돈이 아까워 국경경비대가 자리 비운 틈을 노리다가 잡힌 것이다. 하지만 노동단련대로 가서 대개 나흘 정도 있다가 나왔다. 아버지가 안전원이라 다들 봐줬던 것이다. 보천군은 국경 옆이라 밀수를 하지 말라는 강연이 참 많았다. 밀수 근절 회의에 참가하면 그는 속으로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실은 그 회의를 주재하는 당 세포비서도 밀수로 먹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회의를 하라고 하니 어쩔 수 없이 회의는 열리고, 참가자들은 가면을 쓴 채 남의 일인 듯 당의 지시를 받아 적었다. 그리고 회의가 끝나면 또 밀수하러 갔다.● 친위부대 출신 남동생과 탈북 밀수를 하면서 그는 중국이 잘 사는 곳임을 눈으로 보게 됐다. “윤희야, 중국이나 남조선에 가면 다들 잘 산다고 하더라. 같이 가자”는 친구들의 권유도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너나 가서 잘 살아. 난 여기서 살 거야”라고 대답했다. 호위사령부에서 받은 세뇌와 당원이라는 생각이 생각보다 오래 그의 머리 속에 잠재돼 있었다. 그가 막상 북한을 뜬 것은 2009년에 시작한 결혼생활이 몇 년 못 가 실패로 끝난 뒤였다. 깊은 좌절감에 낙담해 있을 때 한국에 먼저 간 친구와 전화를 하게 됐다. “윤희야, 남조선에는 색텔레비(컬러TV)와 비디오가 쓰레기장에 가득해.” 그 말이 귀에 박혔다. 잘 산다는 것은 알았지만, 북한에서 부자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가전제품인 색텔레비가 쓰레기로 버려진다고. 상상해보니 남조선은 얼마나 잘 사는지 알 것 같았다. 북에서 이혼녀라는 굴레를 쓰고 살기보단 남조선에 가서 새 삶을 살아야겠다고 그는 결심했다. 그가 탈북할 결심을 남동생에게 말하자, 동생은 그런 위험한 길에 혼자 어떻게 가겠냐며 자신이 보호자로 따라가겠다고 자처했다. 남동생은 김정일 친위부대인 974부대에 근무하고 제대했다. 동생이 걸어온 길도 누나와 비슷했다. 15살 때부터 스키를 탔고, 군에 입대할 때엔 5과로 뽑혀 김정일 경호부대에 갔다. 11년을 복무하고 2007년 제대했는데 이후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974부대는 제대할 때 원하는 대학에 보내주든가, 원하는 좋은 직장에 넣어준다. 하지만 제대한 뒤 결혼한 아내의 친척 중에 탈북한 사람이 있어 그는 결국 전문대학을 졸업할 수밖에 없었다. 11년 동안 가장 철저한 세뇌를 받는 부대에 근무했어도 동생의 충성심은 누나보다 빨리 사라졌다. 둘은 몇 달 동안 탈북할 준비를 했다. 한국에 있는 지인을 통해 탈북 브로커와 연결됐다. 2013년 1월 2일 윤희는 가족까지 동반한 남동생과 함께 탈북길에 올랐다. 압록강을 넘어가느라 젖은 상태에서 브로커의 차를 7시간 기다리며 얼어 죽을 뻔하기도 했지만, 그 외에는 이동이 순조로웠다. 탈북한 지 보름 만에 이들은 동남아로 넘어갔고, 2월 15일 한국에 입국했다. 탈북 후 한달 반 만에 한국에 입국한 것은 탈북민 사이에선 ‘직행’이라고 불리는 아주 부러운 케이스이다. 입국한 뒤 조사기관과 하나원을 거쳐 그해 8월 청주에 정착했다.● “한국군이 훨씬 강합니다.”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한국에서의 10년은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는 “그렇게 큰 어려움이나 감동적인 사연도 없이 너무 빠르게 시간이 지났다”고 회상했다. 청주에 정착한 지 한 달 만에 돼지막창 식당에서 알바를 하는 것으로 일을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에겐 그 일이 힘든 일일지 모르지만, 숱한 고생을 겪고 온 그에겐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었다. 청주에 있다 얼마 안 돼 취직센터를 통해 고속도로 톨게이트 직원으로 취직해 5년을 일했다. 집에서 톨게이트까지 출근하는데 버스로 2시간이나 걸렸지만, 그는 5년 동안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고 버텼다. “하나원에 있을 때 탈북민들은 사회에 나가면 3년 동안 여기저기 옮겨 다니느라 제대로 정착을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3년은 어떻게든 한 직장에서 버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5년이 됐습니다.” 톨게이트 직원 월급은 많지 않았다. 월 170만 원을 받아 이중 100만 원은 무조건 저축했다. 그는 첫 월급으로 9만 원짜리 빨간 패딩을 사 입었을 때를 가장 행복했던 순간 중 하나로 기억한다고 했다. 그리고 돈을 모아 2019년 광주에 호프집을 차렸는데 이듬해 코로나가 터지는 바람에 2021년 문을 닫아야 했다. 남들은 크게 좌절할 법도 하지만, 북한군에서 10년 단련된 그는 씩씩했다. “나만 망한 것도 아니고, 살다 보면 이런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죠.” 한국에 와서 오랫동안 서비스 업종에 종사했다. 그런 일을 하면서 배운 교훈도 심플했다. “사람 사는 세상은 똑같아요. 여기도 별의별 이상한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세상 어디에 그런 인간들이 없는 데가 있나요. 어딜 가든 피할 수 없는 거라면 지금 스트레스 받을 시간에 즐기는 게 낫지 않을까요.” 호프집을 접은 뒤 그는 지난해에 광명으로 이사를 왔다. 수도권에 가면 좀 더 좋은 취직 기회가 있을 것 같아서였다. 호위사령부 여성 군인 출신이라는 드문 경력 때문에 군부대에 안보강연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부르는 곳이 점점 많아져서 강연이 주수입원이 됐다. 한국 군인들은 정신력이 약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지만, 직접 찾아가 만나보니 정신력에 있어서도 북한군을 당연히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군은 오직 수령결사정신으로만 세뇌돼 살잖아요. 그런데 제가 만나본 군인들은 조국과 국민, 가족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었어요. 그게 맞죠. 보지도 못한 수령을 어떻게 목숨 걸고 지킵니까.” 올해 5월 그는 탈북민으로 구성된 ‘평양초롱꽃예술단’ 대표로 임명됐다. 이 예술단은 공연으로 먹고 사는 다른 예술단과는 다르게 운영된다. 12명의 단원들은 모두 자기 직업이 있고, 주말에 모여 연습을 한다. 일종의 취미활동인 셈이다. 그러다가 가끔 공연해달라는 요청이 오면 차에 장비를 싣고 달려간다. 아직은 한국에 와서 성공했다고 말할 수도 없고 돈을 크게 벌지도 못하지만 윤희는 한국 생활이 너무 만족스럽다. “북한에선 잘 살려고 엄청 노력했어요. 어려서부터 피나게 연습해 국가대표도 됐고, 당원이 되려고 얼음물로 목욕하며 4년을 버텼어요. 제대 뒤에도 밀수 마대를 메고 국경을 넘나들었고요.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계속 고난만 이어지지 삶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한국에 와보니, 제일 좋은 점은 노력한 만큼 잘 살 수 있다는 겁니다. 이 좋은 세상에서 제가 적게 벌면 적게 노력한 탓이니, 못 산다고 불평하거나 누굴 원망할 일이 없습니다.” 그를 보니 이런 낙천적인 정신은 타고 난 것인지, 아니면 오랜 군 생활이 길러낸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다만 분명하게 느껴지는 점은 10년, 20년 뒤 박윤희 씨는 어느 자리에서 어떤 삶을 산다고 해도 탈북해 한국에 온 것에 더 큰 만족을 느끼며, 여전히 웃으며 씩씩하게 살고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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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일을 연구한다면서 탈북민은 없는 통일연구원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

    1948년 4월 김구, 김규식 등 민족주의자들은 북한에 이용당하는 걸 알면서도 평양에 가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에 참가했다. 이들은 북한 정권의 수립에 정당성과 합법성을 부여하는 들러리만 설 것이라는 여론을 향해 “미리 다 준비한 잔치에 참례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의가 없지 않으나, 좌우간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들이 만약 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김일성이 ‘미소 양군 철수, 남북 요인 회담, 총선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 방안’ 같은 제안을 수용하겠다고 했는데도 가지 않으면 그 또한 북한에 명분을 주는 일이다. 김구는 “이대로 가면 조국은 분단되고, 서로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다”며 2년 뒤 일어날 동족 상잔의 비극까지 예언했다. 그러나 평양에 간 민족주의 지도자들에겐 역사를 바꿀 힘이 없었다. 강대국의 힘겨루기 속에서 이상은 껍데기에 불과했다. 그 껍데기를 붙잡고 있다가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코너로 몰린 것이다. 역사는 냉정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통일은 한쪽이 사라져야 가능한 일이었다. 전쟁으로도 소멸이 이뤄지지 않았기에 우리는 지금도 분단을 끝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로부터 이런 교훈을 배우기나 한 것일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여전히 우리는 이룰 수 없는 이상을 통일방안으로 내세우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약 30년 전에 발표된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결코 현실화될 수 없는 허울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제 깨달아야 한다. 노예제, 봉건제, 군국주의, 독재, 세습 등 지금까지 세계에 존재했던 온갖 나쁜 것들만 모아 만든 듯한 돌연변이 북한과 협상을 통해 합쳐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망상이다. 북한이 수용할 리 없고, 우리는 더욱 그럴 수 없다. 통일은 과거나 지금이나 한쪽이 소멸돼야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게 개인적 소신이다. 대한민국은 정치, 경제, 문화 등 어느 영역에 있어서든 북한과 비교 불가할 정도로 강하다. 북한에게 배워야 할 것은 없다. 통일은 사실상 흡수통일이 될 수밖에 없다. 그 시점은 김정은 체제가 붕괴되는 때이다. 그것이 바로 냉혹한 역사가 앞으로 보여줄 필연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통일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연구를 해야 한다. 이건 우리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작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정부 차원에서 통일을 연구하는 공식 조직은 통일연구원이다. 박사급 연구원 40명에 석사급 보조연구원 20명이 있다. 그런데 이런 통일연구원이 있음에도 권영세 통일부 장관은 통일부에 ‘통일미래기획위원회’를 또 출범시켰다. 위원회는 ‘중장기 통일구상과 전략방향 정립’을 목표로 ‘신통일미래구상’ 초안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이런 것이야 말로 통일연구원이 해야 하는 일이다. 위원회의 출범은 통일연구원에 사실상 사망 판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지금의 통일연구원에 신통일미래구상 설계를 맡겨도 될까. 통일연구원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지만, 그동안 정규직 탈북민 연구원은 없었다. 탈북민 박사는 수십 명이나 되지만, 대다수는 통일연구원에서 일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거기는 우리와 다른 이념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끌어주며 존재하는 곳”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통일을 연구하는 곳이라면서 ‘먼저 온 통일’이라는 사탕발림 간판을 하사받은 탈북민은 한 명도 없다. 공채로 뽑힌 박사급 인력들의 역량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다만 통일연구원은 보고서 잘 만들고 영어 잘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북한을 꿰뚫어보고 현실적 대책을 만드는 것이 본질인 곳이다. 실현 가능성 제로인 평화통일 판타지 보고서보다는 굳이 박사가 아니라도 몸으로 북한을 체험한 탈북민의 시각이 훨씬 더 가치가 있다. 마침 통일연구원은 내달 윤석열 정부 들어 첫 원장을 맞이한다. 부디 실질적인 통일 연구 중심이라는 본질적 역할을 회복하는 첫 단추가 되길 기대한다. 75년 전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실현 불가능한 이상을 추종하다가 진퇴양난의 수모를 당하는 생생한 본보기를 보여줬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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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충신’의 집안에서 나온 탈북 화가 [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북한 함경북도 온성탄광에는 전국에 널리 알려진 유명한 ‘온탄 6부자’가 살았다. 아버지와 아들 다섯 명이 당에 충성을 다하기 위해 탄광으로 자원해 열심히 일한다고 북한 매체가 붙여준 이름이다. 북한 선전 매체에 수시로 소개됐고, 집에는 훈장이 넘쳐났고, 명절 때마다 노동당 간부가 찾아와 김일성의 선물이라며 술과 과일 따위를 건네주었다.하지만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했던 1990년대 중반 엄혹한 ‘고난의 행군’ 시절, 온탄 6부자가 충성을 다 했던 지도자는 식량을 주지 않았다.아버지가 1996년 굶어 사망하고, 첫째와 셋째 아들 역시 먹지 못해 죽었다. 특히 셋째 가족은 큰딸 하나를 남겨두고, 아내와 작은 딸마저 죽었다. 넷째 아들은 탈북했다.사실 이 집안에서 탄광에서 일한 사람은 모두 7명이었다. 첫째 자식은 딸이었고, 그 역시 탄광에서 일했는데 북한 당국은 작명이 부담스러웠는지 딸은 빼고 ‘6부자’만 내세웠다. 딸 역시 탄광에서 일하다가 탄차 와이어가 끊어져 수십 명이 죽은 대형사고 때 다쳐 하반신 마비가 됐다.가족을 살리기 위해 돈을 벌려 중국으로 넘어갔던 넷째 아들은 제 발로 다시 북한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조국을 반역했다는 이유로 강제 ‘노동단련대’에 끌려갔다가 모진 고초를 당한 뒤 가까스로 석방됐다. 그는 북한 체제에 환멸을 느껴 온 가족과 동네 사람까지 11명이나 데리고 탈북했다. 그때 아버지를 따라 강을 건넜던 12살짜리 아들은 16년 뒤 한국의 음악방송 ‘Mnet’의 서바이벌 프로그램 ‘쇼미더머니(Show Me The Money)3’에 출연해 신랄한 가사로 북한 지도부를 비판했다.“거기 있는 리설주가 조국의 어머니. But she is not my 어머니. 내 어머니가 아오지에서 얻은 건 결핵. 땅굴 판 돈 착취해서 만든 것은 핵. 배때지에 살이나 빼. 난 두렵지 않아 공개처형. 그래서 여기 나왔다 공개오디션.”그때 그는 탈북래퍼 강춘혁으로 소개됐다. 하지만 그의 실제 직업은 홍익대에서 미술을 전공한 화가였다.모든 탈북민이 각자의 기막힌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듯이, 북한의 최북단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화가로 살기까지 강 씨의 인생 역시 순탄치는 않았다.● 엔화로 살았던 ‘온탄 6부자’1986년 강춘혁이 온성에서 태어났을 때 그의 집은 마을에서 제일 잘 살았다. 그땐 누구도 몰랐다. 10년 뒤 어떤 비참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 줄을….춘혁의 아버지는 온탄 6부자 중 넷째였다. 탄광 선전대에 속한 아버지는 트럼펫을 불었다. 아침 일찍 남들보다 1시간 먼저 출근해 일하러 나오는 사람들을 위해 선전 가요를 연주했다. 그렇다고 악기만 연주한 것은 아니다. 연주가 끝나면 다른 사람들과 같이 탄광에 들어가 석탄을 캤다. 춘혁의 어머니 역시 아버지처럼 선전대에 속해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정식 근무시간엔 탄광 노동자로 일했다.하지만 강 씨 집안이 잘 산 것은 열심히 일한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춘혁의 할아버지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으로 일본 탄광에 끌려갔던 사람이었다. 할머니 역시 한국 태생이지만,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거기서 둘이 만났다.차별 받는 일본 땅에서 살며 늘 조국이 그리워 돌아오려 했지만, 해방이 돼도 오는 길은 막혀 있었다. 그러다가 북한이 먼저 재일동포 귀국사업을 벌였다. 춘혁의 할아버지는 1960년 자식들을 데리고 주저 없이 북한으로 가는 ‘만경봉호’에 올랐다. 그때 춘혁의 부친은 어머니 뱃속에 있었다.북한으로 돌아온 이들은 평양에 살 수도 있었지만, 먼저 귀국한 작은 할아버지가 온성에 살게 되면서 그들도 온성을 거주지로 선택했다.북한 생활은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 배급해 의존해 먹고 사는데 급급했을 뿐, 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일본에 남았던 형제들이 훨씬 더 돈을 많이 벌었다. 일본에 살던 작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쪽 친척들은 1970년대부터 북한에 형님을 보러오면서 수시로 엔화를 들고 왔다.그 덕분에 춘혁의 집은 1990년대 초반까지는 탄광 마을에서 최고의 부자집이 됐다. 큰 기와집에서 살면서 탄광마을에선 매우 드문 천연색 TV는 물론 각종 가전제품을 다 갖추고 살았다. 작은 할아버지는 1980년대 평양에 와서 도로도 깔아주었다. 평양역 앞에서 김일성광장까지 이어지는 도로는 북한에서도 전설처럼 내려오는 구간이다. 대충 삽으로 땅을 파고 돌을 넣고, 그 위에 아스팔트를 깔던 북한은 그때 일본 기술자들이 와서 도로를 까는 모습을 보고 혀를 내둘렀고 지금도 그때 이야기가 전해진다.자갈도 딱 정해진 규격이 아니면 안 쓰고, 그 자갈을 물로 씻어 깔고, 자로 두께를 재면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시공했다. 그래서인지 북한의 다른 도로들은 건설되고 몇 년만 지나면 움푹움푹 패이지만, 평양역-김일성광장 구간은 지금도 끄떡없이 유지된다.그런데 1992년 11월 북한과 일본의 수교 교섭이 중단되고, 일본이 납치 일본인 문제를 제기하면서 강 씨네 집을 찾던 친척들도 더는 오지 못하게 됐다. 돈도 들어오지 못했다. 늘 일본에서 돈이 올 줄 알고 저축하지 않고 살던 춘혁의 집은 형편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1994년 김일성 사망 후 찾아온 고난의 행군으로 탄광도 문을 닫게 됐다.● 11명이 함께 떠난 탈북길1994년의 고난의 행군을 사람들은 배급이 중단돼 굶어죽던 시절로만 기억한다. 하지만 그때 쌀만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전기도 끊겨 늘 정전 상태에서 살았고, 땔감도 없어 떨면서 살았다.배고프니 탄광에 일하려 못나가고, 탄광이 가동 중단되니 석탄이 없고, 석탄이 없으니 화력발전소가 돌아가지 못하고, 발전소가 멎으니 비료 생산도 못하는 식의 악순환이 이어지게 됐다. 탄광에 전기가 오지 않아 1년쯤 방치하니, 온성탄광의 모든 갱도들이 물에 잠겼다. 탄광이나 광산은 양수기로 수시로 지하수를 퍼내야 하는데, 전기가 없어 양수기를 가동할 수 없으니 탄광 자체가 쓸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침수된 갱은 설사 물을 퍼내도 동발이 다 썩기 때문에 다시 사용하기 불가능해지게 된다. 온성탄광은 1996년에 공식적으로 운영 중단을 선포했다.탄광에 일하러 가지 못하게 된 사람들은 산에 올랐다. 나무를 베어 소토지(개인 경작밭)를 일구었다. 하지만 산의 경작지도 한정돼 있었다. 산을 개간하지 못한 사람들은 배운 것이 석탄 캐는 것밖에 없는지라 각자 수직갱을 파서 석탄을 캐서 팔았다.곡괭이와 삽으로 탄맥이 나올 때까지 지상에서 수십m 깊이의 수직굴을 파고 들어간 뒤 석탄을 양동이로 퍼올렸다. 그렇게 원시적으로 캔 석탄을 시장에 팔아 옥수수와 바꾸었다. 탄광 가동이 중단된 뒤 온성탄광 일대에는 이런 수직갱도가 수없이 많았다.하지만 1997년 봄이 되자 땅이 녹으면서 곳곳에서 개인 갱도들이 무너졌다. 또 숱한 사람들이 석탄 캐려 들어갔다가 무너진 흙더미에 깔려 죽었다.석탄 채굴도 할 형편이 못 되자 춘혁의 아버지는 밀수에 손을 댔다. 도 소재지인 청진에 나가 마른 생선이나 해삼, 개구리기름 등을 닥치는 대로 들여와 중국에 몰래 팔았다. 하지만 그걸로 대가족이 먹고 살기엔 역부족이었다.그렇게 살던 어느 날 춘혁의 부친은 직접 돈을 벌어오겠다면서 중국으로 건너갔다. 마을에는 황해도 쪽에 장사하러 떠났다고 소문을 냈다. 춘혁이 살던 온성탄광노동자구(온탄구)에서 두만강을 건너면 중국 도문이다. 중국에 건너간 부친은 어느 국수공장에 취직해 열심히 돈을 벌었다. 그렇게 1년쯤 지났을 때 춘혁의 집에 연락이 왔다. 아버지가 노동단련대에 잡혀있다는 것이다.뜻밖의 소리에 달려가 보니 중국에 있을 줄 알았던 부친이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허약환자가 돼있었다. 알고 보니 도문에서 강 건너 마을을 건너다보며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견디던 부친은 어느 날 술김에 집에 간다고 다시 두만강을 넘어왔다. 그런데 강을 건너와서 경비대에 체포됐고, 노동단련대로 끌려갔다. 춘혁의 집은 없는 돈을 빡빡 끌어 모아 뇌물을 줘서 부친을 병보석으로 꺼내왔다.집에 와서 몸을 추스르던 부친은 어느 날 “이 더러운 세상에서 살 수 없다”며 온 가족과 함께 탈북 길에 올랐다. 12살 밖에 안 된 춘혁에겐 선택권이 없었다.1998년 3월 9일 중국으로 탈북하던 날을 춘혁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떻게 모았는지 춘혁의 가족 세 명뿐만 아니라 다른 마을 사람들까지 모두 11명이 새벽 일찍 길을 떠났다. 가끔 마주친 마을 사람들이 “춘혁이 아버지 어딜 가오”라고 물으면 “저기 아래 남양 장마당에 갖고 올 것이 있어 가오”라고 대답하며 태연하게 걸어갔다.그렇게 두만강 옆의 길을 따라 한참을 가다가 경비대가 아침밥을 먹느라 근무초소를 비운 새벽 6시쯤 일행은 한꺼번에 두만강으로 뛰어들었다. 아직도 강엔 얼음이 둥둥 떠다녔다. 수영도 제대로 못하는 춘혁은 아버지 덕분에 빠져죽지 않고 강을 넘을 수 있었다.중국 땅에 도착해 도로에 올라섰는데 이번엔 10분도 안 돼 공안차가 나타났다. 일행은 뿔뿔이 흩어져 산으로 뛰어올랐다. 차를 타고 온 두 명의 공안원도 저렇게 많은 사람들을 체포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는지 산 아래서 고함을 지르다 다시 사라졌다.산 위에서 11명은 서로 작별 인사를 나눴다. 어차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면 잡힐 게 뻔했다. 춘혁은 그때 헤어진 마을 사람 중 아직 한국에 온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춘혁의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얼마 전까지 다니던 도문의 국수공장으로 다시 찾아갔다. 거기서 얼마쯤 머물렀지만, 국경 바로 옆 도문은 검문검색이 삼엄해 세 명이 오래 머물 곳은 못됐다.이때 이들에게 조선족 브로커가 접근했다. 흑룡강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했다. 한시라도 도문을 뜨고 싶었던 이들은 흑룡강의 어느 깊은 산골에 인력으로 팔려갔다.식구가 처음 간 곳은 버섯을 재배하는 곳이었는데 그곳은 ‘뱀산’이라고 불렸다. 습도가 높아 주변 산에 올라가면 온통 뱀 천지였다. 아침에 일어나 문을 열면 마당 곳곳에 뱀들이 기어 다녔다. 그곳 개들은 뱀을 잡아먹고 살았는데, 가끔 독사라도 만나면 개 얼굴이 팅팅 부었다. 돼지는 독사도 상관없이 잘 씹어 먹었다.춘혁은 자신도 놀지만 말고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해 산에 올라가 뱀을 잡아 돼지 키우는 마을 한족 노인들에게 가져다주기 시작했다. 뱀을 수십 마리 잡아 마대에 메고 한족 노인의 집에 찾아가 돼지우리에 쏟아줬다. 그런 12살 아이를 노인들은 점점 예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나면 중국어도 가르쳐 주었다.뱀산에는 오래 살진 않았다. 1999년 춘혁의 부친은 흑룡강 한 도시의 양꼬치 식당에서 일자리를 잡았다. 월급은 절반 받는 대신 춘혁을 학교에 보내주는 조건이었다. 그곳에 좀 정착할까 싶었는데 어느 날 이들의 신분을 알아본 사람들이 가족을 딴 곳에 팔아먹을 꿍꿍이를 하는 것을 알고 다시 야반도주했다. 이들이 간 곳은 먼저 탈북한 춘혁의 외사촌(고모 아들)이 정착한 연변 왕청의 한 목재공장이었다.● 뱀산에서 그림 그리던 소년춘혁은 중국에 숨어 사는 동안 제대로 공부할 수가 없었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북한에서 학교에 다닐 때 그는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중국에 와서도 혼자 있을 때마다 그는 손에서 연필을 놓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뱀을 잡으려 산에 올랐다가도 멋진 풍경에 반해 그걸 종이에 옮기느라 몇 시간 보내기도 했다. 그림은 불안한 신분으로 사는 춘혁의 유일한 도피처였다.그런데 왕청에 와서 그림이 돈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당시 중국엔 한국 아이돌 바람이 불었는데, 아이돌 사진을 그대로 종이에 그려 문구점에 팔면 돈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아이돌 그림은 얼마쯤 지나 다시 연변에서 유행하던 호랑이 그림으로 바뀌었다.며칠 동안 칠판만한 크기의 종이에 호랑이를 그려 가져가면 1500~2000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아버지가 목재공장에서 일해서 받는 월급은 700위안이었다.그림을 팔아 처음 큰 돈을 만진 날 어머니에게 가져다주었더니 어머니는 아들이 어디서 돈을 훔쳐온 줄 알고 혼을 내려 했다. 사실을 말했더니 어머니는 갑자기 안색이 확 펴지면서 계속 그림을 그려 팔라며 기뻐했다. 춘혁은 드디어 가족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된 듯해 기뻤다. 그는 그리고 또 그렸다. 그러나 재미있는 골 안에 호랑이 나타난다는 속담처럼 그의 행복도 오래가지 못했다.2001년 어느 새벽 갑자기 공안이 문을 따고 집에 들이닥쳤다. 춘혁은 부모와 함께 중국 감옥에 끌려갔다.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공안이 차에 이들을 태웠다. 북송길에 오른 줄 알고 사색이 됐지만 그 공안은 어느 외진 곳에 차를 세우더니 모두 내리라고 했다. 어리둥절 내렸더니 빨리 가고 싶은 곳에 가라고 손짓했다.떠나면 등에 총을 쏘려고 그러는 건가 싶어 겁에 질렸는데 공안이 먼저 차를 타고 가버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체포되지 않은 사촌형이 6000위안이라는 거금을 뇌물로 주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춘혁의 가족은 북송을 면했다.● 가족의 운명을 걸머쥔 3국행석방은 됐지만 더는 무서워 살 수가 없었다. 한국으로 가고 싶었지만 그때에는 방법을 몰랐다. 그때 베트남에 가면 한국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소문이 연변에 돌았다.가족 회의를 열었다. 결과 15살의 춘혁과 26살의 사촌형이 먼저 길을 떠나 한국으로 가는 길을 개척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사촌형은 문구점에 가서 중국 지도 한 부와 세계 지도 한 부를 샀다.베이징을 거쳐 쿤밍까지, 그리고 쿤밍에서 베트남 국경마을까지 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중국에서 이미 3년을 산 춘혁은 중국어도 꽤 유창하게 했다.2001년 6월 장맛비가 쏟아지는 어느 날 춘혁과 사촌형은 국경을 넘기 위해 산에 올랐다. 비 소리가 요란해 남부 국경을 지키는 경비대에게 발각되지 않을 것이란 생각으로 떠났지만, 장대비를 뚫고 산을 오르내리니 금방 지쳤다. 죽을힘을 다해 수풀이 울창한 산을 타고 가다보니 멀리 마을이 보였다. 내려가 보니 중국어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드디어 베트남에 도착했다고 생각한 이들은 하루 넘게 마을과 연결된 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걸어 마침내 한 도시에 도착했는데, 거기엔 한국어로 간판이 씌어진 식당이 있었다. 들어가 도와달라고 하자 이들은 가까운 한국 영사관으로 갈 수 있게 도와주었다.어느 건물에 있는 한국 영사관에 들어가자 관계자로 보이는 한 사람이 나오더니 “어떻게 이곳까지 올라 왔냐”며 놀랐다. 영사관 건물 밖에서 북한 관계자들이 탈북자를 잡으려고 진을 치고 있다는 것이다.영사관 사람은 “우리는 한국에 보내줄 방법이 없다. 이왕 고생한 김에 캄보디아에 가면 한국으로 가게 도와줄 수 있다”고 말하면서 국경도시까지 버스표를 끊어 주었다.버스를 타고 국경도시에 가니 캄보디아까지 오토바이로 태워다 주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들에게 캄보디아로 가자고 했는데, 무슨 수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오토바이 배달부가 이들을 베트남 군부대로 데리고 갔다.베트남 장교가 중국어 통역을 불러 이들을 취조하려고 하자 춘혁은 한국어로 대답했다. 통역이 “이 사람들 한국 사람들 같다고”고 하자 그 장교는 한참을 수소문해 이번엔 한국어 통역을 불렀다. 춘혁은 이번엔 중국어로 말했다. 그러자 그 통역은 “이 사람들은 중국인들”이라며 돌아갔다. 빨리 퇴근해야 되는데, 끌려온 두 청년이 협조를 하지 않자 짜증이 난 장교는 주머니를 뒤져 돈을 빼앗더니 가라고 했다. 포상을 기다리며 그때까지 군부대 정문에 있던 오토바이 배달부는 이들이 석방된 것을 보자 군소리 없이 캄보디아로 데리고 갔다. 막상 가보니 자그마한 다리 하나만 건너면 바로 캄보디아였다.캄보디아에 내리자마자 이번엔 캄보디아 군인들이 오더니 시계와 신발까지 다 빼앗고 장교에게 데리고 갔다. 그런데 반전이 있었다. 감금된 지 하루가 지나자 그 장교가 이들을 자기 집에 데리고 가더니 잘 먹여주는 것이었다. 그리곤 프놈펜으로 데려다주겠다며 이들을 차에 태웠다. 한참 차를 타고 달렸는데 차가 어느 제방에 멈춰서더니 이들을 내리라고 했다. 맞은편에 다른 차가 와 있었는데 거기서 내린 사람이 장교에게 돈 봉투를 건네주었다. 장교는 사라지고 이들은 그 사람의 차를 탔다.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어느 큰 독채 집이었는데, 그곳에 가니 탈북민 10여명이 먼저 있었다.처음엔 이곳이 수감시설인줄 알았는데 먼저 있던 탈북민들이 “잘 왔다“고 환영해주어 이곳이 기독교에서 운영하는 피난처임을 알았다. 그를 데라고 온 사람이 이곳 피난처를 운영하는 서 모 목사였다.이곳에서 춘혁은 3개월을 머물렀다. 머무는 동안 벽에 큰 기독교 관련 그림을 그려주니 목사가 크게 기뻐하며 중국에 선이 있으니 부모님도 데려다 주겠다고 약속했다. 실제로 3개월 뒤 춘혁의 부모가 무사히 캄보디아까지 도착해 함께 한국으로 떠날 수 있게 됐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이 목사는 피난처에 머무는 탈북 여성들에게 너무 많은 성폭력을 저질러 문제가 됐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한국에서 찾아온 방황2001년 8월 30일 춘혁은 부모님과 함께 인천공항에 첫 발을 내디뎠다. 그는 미래가 창창한 16세 소년이었다.그해 12월 말에 하나원을 나올 때 가족은 경남 밀양에 집을 받았다. 서울에 가고 싶었지만, 하나원에 배정된 서울 임대주택은 3채에 불과했다. 7대1의 경쟁에서 떨어진 사람은 지방 대도시도 아닌 소도시에 가야 했다.그때 밀양엔 탈북민을 구경하기 힘들었다. 중학교 2학년에 입학했는데, 주변에 소문이 나서 춘혁에게 와서 시비 거는 애들이 많았다.어느 날 고등학생들이 몰려와서 “너 18살인데 왜 중2냐”고 놀리는 바람에 춘혁은 대판 싸우고 퇴학당했다. 다시 학교에 다닐 생각도 없어졌다.2002년 말 가족은 서울 노원으로 이사 왔다. 얼마 뒤 부모님이 이혼을 하는 바람에 춘혁은 집을 나와 친구의 집에서 살았다. 어렵게 자유의 땅을 찾아왔지만, 부모님은 이혼을 택했고, 오래 살지도 못했다. 어머니는 2013년에 심근경색으로 돌아갔고, 아버지도 재작년에 병으로 돌아갔다.서울에 올라온 뒤 7년 동안 춘혁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방황의 시기였다. 북한과 중국에선 먹고 사는 것, 안전하게 사는 것이 삶의 목표였는데, 그게 다 충족되자 그 다음에 뭘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는 건설현장에 가서 나이를 속이고 일을 했고, 배달도 했다. 그림과도 점점 멀어졌다.2009년쯤 되자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했던 친구들도 대학 학점이나 취직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보니 점점 말도 통하지 않았다.친구들도 “그림을 잘 그리니 미대에 가면 되겠다”며 적극 부추겼다. 춘혁은 방황의 시기를 접고 공부에 매달렸다. 중고등 검정고시를 패스하고 홍익대 미대에 원서를 넣었다.일반적인 대학들은 탈북민을 특별전형으로 뽑아주지만 홍익대는 그렇지 않았다. 실기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입학할 수 없었다.시험장에 들어갔을 때 춘혁은 잠시 멍했다. 시험장 구석에 커피잔, 주전자, 배트민턴채, 공 등을 쏟아놓고 4시간 동안 그림을 그리게 했다. 다른 수험생들이 열심히 그리는 것을 넋을 놓고 보고 있다가 부랴부랴 따라 그렸다.“다 그려놓고 보니 제 그림만 이상해 보였어요. 다른 애들은 다 미술학원에서 배운 방식대로 그렸는데, 저는 그런 시험 방식도 모르고 시험장에 들어갔거든요.”결과는 합격. 4대1의 경쟁을 뚫고 11학번 합격생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대학 기간도 생각과는 달랐다. 대학에 가면 그림을 그리는 법을 배워주는 줄 알았다. 그런데 재료 개념이나 기법, 방향성 등 이론만 많았다. 연필과 색연필로만 그림을 그리다가 유화를 그리는 법도 대학에서 배웠다.그럼에도 다 미술 관련 새로운 이야기라 재미는 있었다. 첫 학기에 춘혁은 90여명 동창생 중 중간 정도의 학점을 받았다. 자신감이 생겼다.2016년 미대를 졸업했다. 그런데 졸업과 동시에 출품한 작품은 그림이 아니라 ‘For the freedom’이라는 제목의 앨범이었다. 세상은 그를 화가가 아니라 탈북 래퍼라고 불렀다. 이렇게 된 데는 사연이 있었다.● 탈북 래퍼의 탄생그가 대학을 다니던 2014년 북한인권시민연합의 김영자 사무국장이 좀 보자는 연락을 해왔다. 알고 보니 ‘쇼미더머니’ 측에서 시즌3의 흥행을 위해 탈북민을 한 명 선정해 넣고 싶다고 연락이 왔는데, 김 국장 보기엔 강춘혁이 적임자로 보였던 것이다. 과거 어느 회식이 끝나고 노래방에 갔을 때 춘혁이 힙합 스타일의 노래를 잘 불렀던 것이 떠올랐던 것이다.춘혁도 힙합이 싫지는 않았지만, 대학 생활에 집중하느라 예능프로그램에 나갈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탈북한 친구 두 명을 소개시켜 주었다.얼마쯤 지났을 때 쇼미더머니3에서 프로듀서를 맡은 가수 양동근에게서 연락이 왔다. 소개시켜준 친구들이 랩 훈련을 받던 중 갑자기 TV에 나가야 된다는 것을 알고 연락을 끊고 잠적했다는 것. 처음에 그냥 랩을 배우는 줄 알았다가 얼굴이 공개되면 북한에 사는 가족 등이 피해를 볼까봐 숨어버린 것이다.그들을 소개시킨 춘혁도 난처해졌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럼 내가 나간다고 했다. 이 일은 춘혁이 북한 인권을 알리는 사명을 갖게 한 계기가 됐다.랩을 하면서 춘혁은 “그림은 전시회장에 한정되지만, 힙합이나 랩은 티비와 유튜브에 올라 전 세계가 볼 수 있으니 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춘혁의 쇼미더머니3 출연은 많은 화제를 낳았다. 언론에서 탈북 래퍼가 나왔다고 기사가 쏟아졌다. 그가 랩을 부르는 모습이 담긴 유튜브도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했다.학교에서도 홍보가 되니 싫은 눈치가 아니었다. TV에 출연한 뒤 그의 인생은 달라졌다. 과거엔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지만, 이후엔 대학 구내에서도 그를 알아보는 학생들이 많아졌다. 내친 김에 졸업과 함께 앨범도 냈다. 하지만 이후엔 전업이 화가인데, 래퍼로 너무 알려지는 것이 싫어 그림에만 전념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음악 관련 요청은 점점 멀리했다.● 배고픈 ‘북한 인권’ 화가의 길졸업과 동시에 그는 전문 화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주변에서 다들 말렸다.미대를 나와도 다들 회사에 취직한다거나 미술 선생님이 되는 등 생업에 뛰어드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의 학번에서도 배고프고, 언제 뜰지도 모르는 작가의 길을 선택한 사람은 3명에 불과했다.춘혁도 남들이 가는 길을 따라 가고픈 생각이 없진 않았지만,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다.“한국에 오기 전까진 먹고 살기 위해 급급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젠 쌀과 물이 다 있는데, 또 그런 삶을 살고 싶진 않았습니다. 제가 북에서 태어나 한국에 와서 미술을 전공한 것에 대한 의미를 찾고 싶었습니다. 북한에서 아직 고생하는 친구들을 위해 저는 그림으로 북한을 전 세계에 알리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전업 화가의 길은 예상했던 것처럼 배고픈 길이었다.재료비를 벌기 위해 다시 공사판에 나가 일을 했다. 돈을 벌면 재료를 사다가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그림은 팔리지 않았다. 팔렸다고 해도 재료를 다시 사면 끝이었다.특히 문재인 정부 시절 북한 인권을 고발한 작품은 어딜 가나 외면당했다.“2018년 광주비엔날레 아트페어에 출품하기로 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북한 만수대창작사 전시회가 열린다고 제 출품이 취소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국가 지원금은 한 푼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여기저기 출품이 취소되니 너무 힘들었습니다.”이 시절 그는 사람들이 무서운 생각이 들어 6개월 동안 방에만 틀어박혀 술만 마신 적도 있다고 했다. 미국이나 유럽으로 망명할 생각도 있었다. 특히 유럽은 예술가들에 대한 망명 허용에 관대하다.하지만 그는 끝내 남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정권이 바뀌니 남은 것이 잘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올해 3월엔 KBS 2TV ‘노머니 노아트’라는 프로그램에서도 그를 불러주었다.비록 우승은 못했지만, 이 프로그램에 출품한 작품은 720만 원에 팔렸다. 전체 출연자 8명 중 그의 그림이 제일 먼저 팔린 것이다.그리고 여기저기 북한 인권을 주제로 한 삽화를 그려 달라, 웹툰을 그려달라는 등의 제안이 오기 시작했다. 물론 요청을 받고 열심히 일해도 아직 먹고 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강춘혁이 존재하는 이유강 씨는 지금까지 그린 그림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으로 ‘정체성의 혼돈’을 꼽았다. 이 작품은 전시만 하고 가격을 매긴 적이 없다.작품에는 부스러져가는 얼굴에 슬픈 표정을 한 남성의 얼굴이 담겨있다. 한쪽 눈에는 태극기가, 다른 쪽 눈에는 인공기가 담겨있다. 춘혁은 “정체성의 혼돈을 겪는 탈북민의 자화상을 담으려 했다”고 설명했다. “탈북민은 북한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한국인으로만 살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사랑하는 것, 구원해야 할 것들이 북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통일은 이런 기억을 안고 있는 우리 세대에서 반드시 이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조금 덜 먹고 힘들더라도 자식들에게 짐을 물려주지 말고, 우리 세대가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고 믿습니다.”그게 가난한 화가 강춘혁이 이 땅에 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화가로 살아야 하는 이유를 떠올 때마다 2015년 9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2차 북한인권주간 때 있었던 일을 떠올린다.당시 현지에선 탈북화가 선무 씨와 강춘혁의 그림 전시회가 열렸고 법학대학에서 북한 인권 관련 토론회도 열렸다. 토론회가 열리고 춘혁의 발언이 시작되는 순간 갑자기 문을 차고 북한 영사관 직원 십여 명이 들이닥쳤다.그림 전시회 때부터 주변을 빙빙 돌며 “너네 일정을 다 아니 조심하라”고 협박하던 북한 외교관들이 급기야 토론회 현장에 쳐들어온 것이다. 카메라를 들고 욕을 퍼부으며 들어오는 그들을 향해 춘혁도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인도네시아 경찰들이 급히 출동해 북한 외교관들을 끌고 나갔다.“그때 솔직히 순간적으로 겁도 났고, 또 흥분도 됐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내 그림이 위협이 되는구나, 내가 존재감이 있고 북한이 두려워하는 의미가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구나’ 싶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북한인권주간 행사를 막지 못한 책임을 지고 북한 외교관들이 북한에 소환됐다고 하더군요.”김정은 체제가 무너지고 북한 인민이 자유를 찾는 날까지 그림으로 북한 인권을 고발하겠다는 강 씨의 결심은 단단하다.“저도 화가인데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러나 북한 인민들이 독재 하에서 신음하는 한 저는 그림으로 그들의 신음과 고통을 고발할 겁니다. 나중에 북한에 좋은 세상이 오면, 저는 캔버스를 들고 북한의 아름다운 곳들을 찾아다니며 자연을 마음껏 그릴 겁니다. 그날이 빨리 오도록 하는 것이 오늘날 화가 강춘혁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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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흑연 전극도 못 만들면서 정찰위성을 쏘겠다니…

    김일성은 70세 이후 잇따른 헛발질로 북한을 거하게 말아먹고 죽었다.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60억 달러의 거금을 투입해 1986년 완공한 서해갑문 건설이다. 1970년대 소련 기술자들이 “안 짓는 게 낫다”고 결론 낸 것을 김일성이 밀어붙였다고 한다. 담수자원이 늘고 남포와 황해도가 연결됐지만 부작용은 훨씬 심각하다. 얼지 않던 앞바다가 매년 수십 일씩 결빙돼 남포항이 마비된다. 평소에도 선박이 갑문을 통과하느라 지체돼 남포항 물류 능력은 확 줄었다. 서해갑문은 한강 하구를 갑문으로 막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었다. 김일성은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와 사리원카리비료공장 건설도 밀어붙였다. 1980년대 북한 사람들은 두 공장만 건설되면 부자가 되는 줄 알았다. 연간 비날론 10만 t, 카바이트 100만 t, 메탄올 25만 t, 질소비료 90만 t, 염화비닐 25만 t, 가성소다 25만 t, 탄산소다 40만 t, 단백질 사료 30만 t, 카리비료 50만 t 등을 생산할 수 있어 이제 이밥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다고 쉼없이 선전했기 때문이다. 건설비만 100억 달러 이상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두 공장 모두 한 차례도 가동되지 못했다. ‘산소열법’이라는 카바이드 핵심 생산 기술은 무용지물이었다. 우수환이라는 박사가 실험실에서 석탄과 석회석으로 카바이드를 만들었는데, 과학기술에 무지한 김일성이 대규모 생산은 힘들다는 다른 과학자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추진한 탓이다. 두 공장 모두 지금은 폐허의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 대항해 이듬해 유치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은 60억 달러짜리 이벤트 행사로 끝났다. 당시 북한의 한 해 예산은 40억 달러 수준이었다. 이렇게 막대한 돈을 어리석게 탕진하다 보니 몇 년 뒤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한 ‘고난의 행군’ 사태를 겪어야 했다. 아직도 완공되지 못한 채 솟아 있는 105층 유경호텔은 1980년대의 실패 사례를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위의 사례들은 김일성의 탓만은 아니다. 김정일에게도 공동 책임이 있다. 김정일은 핵 개발에 몰두하느라 경제를 방치했다. 김정일 사망 1년 전에 노동신문이 ‘새로운 원자탄을 쏜 것 같은 특대형 사변’ ‘인공위성이 단번에 몇 개나 날아오른 것 같은 놀라운 소식’이라며 찬양하던 공장이 있었다. 함흥시 ‘2·8비날론연합기업소’가 재가동됐다는 것이다. 나중에 들어보니 김정일이 시찰했을 때만 비날론 몇 t 생산하고 다시 가동이 중단됐다고 한다. 이런 어리석은 탕진은 김정은 집권 후에도 계속됐다. 짓다가 방치한 원산갈마해양관광단지나 평양종합병원이 대표 사례가 되겠지만, 더 치명적인 실패 사례는 순천인비료공장이 아닐까 싶다. 2020년 5월 1일 김정은은 당시 떠돌았던 자신의 사망설을 종식시키며 공장 준공식을 화려하게 열었다. 그런데 이 준공식은 사기 그 자체였다. 공장은 이후 3년 동안 가동된 적이 없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결정적 원인은 황린전기로용 천연 흑연전극이 계속 부러지기 때문이다. 북한은 3년째 이 문제를 풀지 못해 인을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 화학공장은 특성상 배관들이 엄청 많다. 가동이 수년간 중단되면 배관 부식이 심각해져 사실상 다시 건설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순천인비료공장도 김일성 시대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의 운명을 따라갈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도 김정은은 최근 정찰위성을 여러 개 쏘아올리겠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다. 지난해 12월 북한은 올해 4월까지 군사정찰위성 1호기 발사 준비를 끝내겠다고 발표했다. 김여정도 합세해 한국을 향해 “개나발들을 작작하라”며 욕설을 퍼붓고 “우리가 하겠다고 한 것을 못한 것이 있었는가를 보라”며 큰소리쳤다. 지난달 18일 김정은은 국가우주개발국을 시찰해 “완성된 군사정찰위성을 계획된 시일 안에 발사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아직 소식이 없다. 흑연전극 하나 못 만들면서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한 정찰위성은 제대로 만들지 의문이긴 하지만, 그보다 더 한숨이 나오는 것은 과학기술 분야를 시간을 정한 내기처럼 호언장담하며 접근하는 태도다. 김정은은 선대의 실패 사례를 다시 펼쳐보며 과학기술은 때려죽여도 안 되는 건 안 된다는 것, 한 번 실패하면 결과는 치명적이라는 교훈부터 배우길 바란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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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졸업식 다음날 서울로 유학형 탈북을 했어요”[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고등중학교 졸업식 다음날 점심 무렵, 18세 전주옥은 3살 터울의 오빠와 함께 부모님께 작별 인사를 드렸다. 졸업장까지 받았으니 이젠 서울로 ‘유학’을 떠날 때가 온 것이다. 부모님은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었다. “꼭 무사히 한국까지 잘 도착해야 한다. 걱정 말아. 너희는 중앙당 간부 자식도 못 가는 서울 유학을 가는 거야.” 남매는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다. 원래 압록강을 넘기로 한 시간은 밤 9시였다. 하지만 저녁에 작별 인사를 하고 나오려니 차마 발걸음이 떨어질 것 같지 않아 오후에 집을 나온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함께 걸어가는 남매를 보고 물었다. “너희 어디 가니?” “함흥 고모네 집에 가요.” 오후에 동네를 돌아다니던 남매는 8시가 지나자 슬슬 압록강변으로 접근했다. 나서 자란 고향마을인지라 어둠 속에서도 지형은 훤했다. 그날은 2013년 3월 18일. 계절상 봄이지만, 양강도에선 이때까지 압록강 얼음이 녹지 않는다. 하지만 낮에 얼음 위가 녹았다가 밤에 다시 살짝 얼기 때문에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목까지 물에 빠진다. 부석부석 살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어둠 속에선 크게 들렸다. 강을 건너기 전 오빠가 주옥에게 자기 가방을 넘겨주었다. ‘아니, 지금이 제일 위험한 순간인데, 오빠가 왜 자기 짐을 내게 넘겨주지?’ 원망이 살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찰나 오빠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주옥아, 네가 먼저 건너가. 내가 뒤따라서 갈게.” “아니, 여기까지 왔으면 같이 가야지. 내가 왜 먼저 가.” “혹시 소리를 듣고 경비대가 추격해 오면 내가 뒤에서 유인할 거야. 걱정 말고 먼저 가.” “안 돼.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지. 난 그렇게 못해.” “아니야, 주옥아. 난 너만 살아서 간다 해도 하나도 후회가 없어. 빨리 가.” 둘은 압록강을 건너기도 전에 5분 넘게 실랑이를 벌였다. 속삭이며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동안 가장 비장한 표정들이었다. 결국 둘은 함께 강을 건넜다. 다행히 추격은 없었다. 압록강을 건너 부모님이 가방에 넣어준 휴대전화를 꺼내 마중 나오기로 한 중국 브로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4시간째 브로커가 나타나지 않았다. 강을 건널 때 젖은 발부터 꽁꽁 얼기 시작했다. 마침내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지만 몸이 너무 얼어 손가락으로 버튼을 누를 수 없었다. ‘이렇게 얼어 죽는구나’하는 순간 차량 불빛이 나타났다. ● 완벽한 장마당 세대 전주옥 씨는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이 한창이던 1995년 양강도 김정숙군에서 태어났다. 혜산 바로 아래에 붙어있는 김정숙군은 과거 신파군으로 불렸다. 대한민국 이북5도 행정구역 기준으로 삼수군 신파면 일대에 해당된다. 북한은 김일성의 아내이자, 김정일의 모친인 김정숙이 해방 전에 이곳에서 지하공작을 했다고 해서 1981년 신파의 지명을 김정숙군으로 고쳤다. 이 지역은 과거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먹고 보자’는 말이 나올 정도로 척박한 지역이다. 추운 데다 경작지도 적어 이곳에 유배를 간 사람들은 살아나오지 못한다고 해서 나온 말이다. 이곳은 김일성 시대에도 대표적인 유배지로 활용됐다. 전 씨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도 과거 외교관으로 평양에서 살았지만 외할아버지의 남동생이 월남한 사실이 밝혀져 이곳으로 쫓겨났다. 아무리 북한 체제를 위해 목숨 걸고 큰 공을 세워도 출신성분이 걸리는 순간 반동계급이 되는 것이다. 평양에서 추방을 당한 외교관의 딸과, 신파 토박이의 아들이 결혼해 전 씨를 낳았다. 전 씨 부친의 조상은 먼 옛날 신파에 최초로 정착한 다섯 집 중 한 집이었다고 한다. 전 씨는 태어난 순간부터 완벽한 ‘장마당 세대’였다. 장마당 세대는 태어난 이후 국가에서 배급을 받아본 적이 없는, 부모가 장마당에서 장사를 통해 먹여 키운 세대를 말한다. 고난의 행군은 북한에서 수많은 아사자를 초래한 비극이었지만, 김정숙군은 비극의 시절이 잉태한 장마당 시대에 가장 혜택을 본 지역이 됐다. 먹고 살기 위해 너도나도 밀수에 나서면서 사람 못 살 유배지였던 김정숙군은 밀수의 중심지가 됐다. 전국에서 중국으로 넘기려고 몰려온 밀수품들은 경계가 삼엄한 혜산을 에돌아 김정숙군으로 왔다. 김정숙군은 장진강과 압록강이 합류하는 지점이기도 했다. 함경남도 장진군에서 발원해 자강도 랑림군으로 거쳐 흘러오는 261㎞ 길이의 장진강을 통해 북한 중부 내륙에서 나는 각종 농수산물이 뗏목에 실려 김정숙군으로 몰려왔다. 전 씨의 부친은 뗏목을 운영하는 유벌사업소 검척원이었다. 뗏목이 내려오면 목재 부피를 재서 보고하는 일이었는데, 밀수품을 나르려면 검척원이 눈감아주어야 할 일이 많았다. 유벌공들은 뗏목에 잣이나 약초, 버섯 따위를 마대에 잔뜩 싣고 왔다. 가끔 검열단이 들이닥치면 밧줄에 마대를 묶어 뗏목 밑에 숨겼다. 유벌공은 과거 천하고 위험한 직업이었지만, 밀수가 보편화되면서 갑자기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이 됐다. 전 씨의 부친도 이렇게 돈을 벌어 집안을 먹여 살렸고, 집에 LG TV를 놓을 정도로 돈도 벌었다.● 소년단원 밀수꾼 밀수의 중심지에 살다 보니 전 씨도 학교에 입학한 8살 때부터 밀수에 가담하게 됐다. 매일 아침 단정한 교복에 빨간 넥타이를 휘날리며 학교에 갔지만, 가방 안에는 늘 밀수품이 차 있었다. 어떤 때는 잣이, 어떤 때는 폐철이나 동 또는 약초가 담겨 있었다. 장마당 옆 밀수품을 수집하는 집에 먼저 가서 가방 안의 짐을 넘겨주고 학교에 등교하는 것이 일상이 됐다. 하교 때도 장마당에 들러 뭔가를 나르고 집에 갔다. 전 씨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그렇게 살았다. 그게 부모를 돕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학생들만 아니라 선생님들도 밀수에 가담했다. 그렇지 않으면 먹고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한 번은 학교에서 공개재판이 열려 다들 모이라고 해서 가보니 평소 말수가 없고, 어질다고 평가받던 물리 선생님이 심판대에 올라왔다. 알고 보니 물리 선생님의 부인이 학생들을 시켜 밀수품을 걷었는데, 그중에 케이블 동선이 포함돼 있었다. 북한에선 동으로 된 전화선을 밀수하는 행위는 매우 엄중하게 처벌한다. 밀수 장본인인 부인은 8년, 선생님은 남편이 모를 리가 없다는 이유로 2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것도 매우 관대하게 처벌받은 것이라고 다들 수군거렸다. 지명에 김정일 모친의 이름을 붙였다고 해서 이 지역에 특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김정숙의 사적지를 보존한다면서 읍내 곳곳에 테마파크처럼 일제강점기 때 낡은 집들을 그대로 보존해 수리도 못 하게 했다. 밀수를 통해 돈을 번 사람들은 통제와 규제가 엄격한 시내와 약간 거리가 있는 변두리에 큰 집을 짓고 살았다. 돈 많은 부잣집의 특징은 담장이 너무 높아 밖에서 안을 절대 들여다볼 수 없고, 가까이에 다가갔을 때 군견의 짖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전 씨도 한 번 ‘돈주’라고 불리는 부잣집 친구의 집에 들어가 봤다. 주요 가전제품은 모두 한국산이었다. TV는 로고를 떼버린 LG 제품이었는데, 전기가 없어 그냥 장식품이었다. 부잣집은 휘발유로 가동되는 발전기를 갖고 있었지만, 조명이나 노트북이나 볼 정도이지 TV를 볼 정도의 전기는 생산하지 못했다. 냉장고 역시 로고를 뗀 한국산이었지만 책장으로 쓰고 있었다. 친구는 “전기가 없어서 그렇지 냉장고는 잘 가동되는 새것”이라고 자랑했다. 한국산 쿠쿠 밥솥도 있었지만, 이 역시도 장식품에 불과했다. 삼성이나 LG 노트북만이 부잣집에서 유일하게 많이 쓰는 전자제품이었다. 노트북을 이용하면 발전기 전기로도 충전이 가능해 한국 드라마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보위부가 공급한 한국 드라마 전 씨는 인민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군마다 하나씩 존재하던 1중학교에 입학했다. 1중학교는 군에서 가장 공부를 잘하는 수재들을 뽑아 공부시키는 학교인데, 대학에 가려면 1중학교를 다녀야 했다. 일반 중학교에는 대학시험 자격이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워낙 공부를 잘했던 전 씨는 인민학교 때부터 1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분단위원장과 사로청위원장을 도맡았다. 1중학교에 가니 학생들은 공부를 잘해서 온 소위 ‘자연수재’와 힘을 써서 들어온 고위 간부들의 자녀인 ‘인공수재’ 두 부류로 갈라졌다. 1중학교를 다녀야 대학에 갈 수 있으니 고위 간부들은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자녀를 이 학교에 진학시켰다. 문제는 학교에 입학해도 머리가 나쁘면 공부를 따라가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하루는 같은 반, 군 보위부 최고위직 간부의 딸인 ‘인공수재’ 여학생이 말을 걸었다. “주옥아, 너 우리 집에 가지 않을래? 엄마가 너 데려오면 맛있는 거 많이 만들어주겠대.” 집에 갔더니 그녀의 엄마가 안색이 환해지며 반갑게 맞이했다. “네가 그 공부 잘한다는 주옥이구나.” 맛있는 음식들이 진짜로 한 상 가득 올라왔다. 밥을 먹을 때 엄마가 말했다. “우리 딸 수학 참 어려워하는데 온 김에 몇 문제만 풀어주면 정말 고맙겠어.” 나중에 알았지만, 딸의 수학 점수가 나오지 않자 엄마는 공부 잘하는 주옥이랑 친해져서 공부를 같이하라고 닦달했던 것이다. 둘을 방에 공부하라고 들여보낸 뒤 엄마는 어디론가 외출했다. 엄마가 사라지자 친구가 말했다. “수학은 무슨. 우리 영화나 볼까?” 친구가 집안의 한 장롱을 열었을 때 주옥은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장롱 안에는 온갖 한국 영화 CD가 꽉 차 있었다. 친구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저거 다 단속돼 압수한 거야. 우리가 봐야 저 CD가 집에서 나가. 걱정 마. 우리 집은 단속 올 일 없으니까.” 그날 주옥은 처음으로 한국 영화를 봤다. 너무 재미가 있었다. 돌아가기 전 주옥이 “하나만 좀 빌려볼 수 있을까”라고 묻자 친구가 고민하더니 “그럼 내일 무조건 갖다 놔. 없어진 거 알면 아버지한테 혼나”라며 승인했다. 그날부터 주옥은 뻔질나게 그 집으로 드나들었다. 친구의 엄마가 너무 좋아 입이 벌어진 것은 당연지사. 주옥의 가족은 매일 밤 창문에 담요를 두껍게 치고, 딸이 갖고 오는 한국 영화와 드라마 CD를 보느라 밤을 샜다. 그런 생활은 그가 탈북할 때까지 이어졌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본 드라마는 ‘찬란한 유산’이었다. 그런데 중국에서 들어오는 드라마는 항상 마지막 회가 없다. 드라마 유통업자들의 상술 때문이었다. 마지막 회는 꼭 다른 CD에 담겼는데, 마지막 회를 보려고 그 CD를 사면 뒷부분에는 또 다른 드라마 첫 회가 있었다. 결국 결말을 보기 위해 계속 CD를 사야 하는 것이었다. 주옥이 나중에 한국에 도착한 뒤 하나원을 졸업해 집과 첫 통화를 할 때였다. “무사히 도착했다”는 딸의 전화에 아버지의 첫 말이 “어, 잘 도착한 건 이미 들었어. 그런데 주옥아. 찬란한 유산 마지막이 어떻게 끝나니”였다. 전 씨도 하나원을 졸업하자마자 그 드라마를 찾아서 봤다. “아버지, 한효주랑 이승기랑 키스를 했어.” “그래서 어떻게 되는데. 좀 자세하게 설명해봐.” 한국에 도착한 딸과 북한 아버지의 첫 통화는 그랬다. 그렇게 한국 드라마에 빠져 누구보다 한국에 오고 싶어 했던 아버지는 전 씨가 한국에 온 이듬해인 2014년 병으로 사망했다. 서울에 도착한 뒤 부모를 모셔 온다던 남매의 꿈은 3년 뒤 어머니만 서울로 오는 것으로 끝났다. 나이 50세에 한국에 온 어머니는 새로운 삶을 만끽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 거의 환갑을 앞두고 있는데, 요즘 엄마는 ‘빠순이’ 삶을 즐기고 있어요. 좋아하는 가수 콘서트에 빠지지 않고 피켓을 들고 찾아가 응원하고 있거든요.” ● 서울로 떠나는 ‘탈북 유학’ 김정숙군에선 많은 사람들이 전 씨 가족처럼 몰래 한국 드라마를 봤다. 그가 학교에 다니던 2010년 무렵 학교에서 가장 유행했던 말은 ‘니가 가라 하와이’였다.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 보니 김정숙군 사람들은 타 지역 사람들보다 정보가 빨랐다. 김정은 집권 후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한라산 줄기가 최고지”라고 말하고 다녔다. 한라산 줄기는 가족 중에 한국에 간 사람이 있어 돈을 보내오는 집을 의미했다. 한라산 줄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우리 원수님이야 말로 한라산 줄기 원조가 아닌가”라는 말도 했다. 김정은의 모친인 고용희가 제주도 출신 집안의 재일교포라는 것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전 씨도 어쩌다 보니 한라산 줄기가 됐다. 외삼촌 가족이 탈북해 서울에 왔던 것이다. 전 씨 남매가 한국으로 오는 데는 외삼촌의 역할도 컸다. 부모가 외교관 생활을 하다가 김정숙군 임산사업소 간부로 사실상 추방돼 오자 외삼촌은 체제에 대한 반감을 갖고 컸다. 혜산농림대학을 졸업한 외삼촌 역시 수재로 소문났지만 부모 탓에 크게 승진하지 못했다. 외삼촌은 1980년대에 몰래 라디오를 조립해 한국 극동방송을 매일 빠짐없이 들었다. 탈북 출연자들을 통해 혹시 한국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없을까 싶어서였다. 그러다가 대규모 탈북의 시대가 열리자 먼저 탈북한 뒤 2년 뒤 가족까지 한국으로 데리고 갔다. 한국에 온 뒤 외삼촌은 전 씨 부모에게 “똑똑한 자식을 희망이 없는 곳에서 키우지 말고 남쪽에 보내라”고 독촉했다. 김정숙군에서 전 씨 남매는 유명했다. 공부를 잘해 오빠와 누이동생 모두가 1중학교에 간 집이 흔치 않았다. 오빠는 제17차 전국학과경연대회에서 2등을 한 수재였다. 전 씨의 오빠는 1중학교를 졸업한 뒤 물리전문학교에 진학해 동생이 졸업할 때까지 기다렸다. 전 씨 역시 학교에서 학생 간부를 도맡아 했으니 마을에서 인기가 높았다. 그런 남매를 보면서 부모들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김정숙군은 북한에서도 가장 외진 곳 중의 하나였는데,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간부집 자식들처럼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잘 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출신성분이 걸린 남편 때문에 함께 추방을 온 외교관 출신의 외할머니도 거들었다. “나는 우리 손자들이 비행기 타고 다니는 게 소원이다. 그런데 그건 불가능하겠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이런 환경이다 보니 전 씨의 부모들은 자녀들을 서울에 보내 공부를 시켜야겠다는 마음을 일찍이 굳혔다. 그래서 전 씨도 1중학교를 졸업하기 몇 년 전부터 “네가 졸업하기만 하면 오빠랑 서울에 보내서 더 좋은 교육을 받게 할 거야. 우리는 그 뒤에 따라갈게”라는 말을 듣고 살았다. 중학교 졸업식 다음날 탈북은 오래 전부터 예정된 일이었다. 그래서 부모들도 작별 인사를 나눌 때 담담했던 것이다. 물론 이들이 태국에 도착할 때까지 부모들은 한숨도 자지 못했을 것이다. 탈북 시점을 졸업식 다음날로 정한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얼음이 두꺼운 겨울은 밀수 시즌이라 압록강 경비가 너무 살벌했다. 잘못하면 총에 맞을 수도 있었다. 얼음이 없을 때엔 물살이 너무 세서 수영을 잘하지 못하면 익사할 위험도 컸다. 졸업식이 열린 3월 말에는 얼음이 얇아져 밀수도 거의 이뤄지지 않는데, 이때는 경비대 경비도 가장 느슨해진다. 이런 날이 1년에 열흘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에 전 씨 남매는 졸업장을 받자마자 길을 떠났던 것이다.● “비행기 탄 줄도 몰랐어요” 외삼촌이 한국으로 오는 길을 잘 준비한 덕분에 남매는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불과 일주일 만에 태국까지 도착했다. 전 씨는 나흘 동안 네 개의 계절을 모두 경험하는 신기한 경험도 했다. 떠날 때는 겨울옷을 입고 떠났는데, 하루 동안 차를 타고 달리니 개나리가 보이고 사람들이 봄옷을 입고 있었다. 전 씨는 외투를 벗어버렸다. 다시 하루를 달리니 이번엔 짧은 여름옷 차림이었다. 그래서 옷을 다시 한 꺼풀 벗었다. 동남아에 오니 이번엔 처음 경험하는 무더위가 찾아왔다. 전 씨는 인생 최고의 순간으로, 폭이 좁은 나룻배를 타고 태국에 도착해 첫발을 내디디던 때를 꼽았다. 그 첫발의 촉감을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외삼촌을 통해 메콩강만 건너면 절대 잡혀갈 일이 없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태국 땅에 도착했을 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환희를 느꼈습니다. ‘이제는 죽음의 굴레에서 해방됐다. 나는 겨우 18살이니 미래가 창창하다. 2400만 북한 동포들이 그토록 염원하지만, 극소수만 성공한 그 탈북을 나는 드디어 해냈구나.’ 이런 생각들이 머리에서 한꺼번에 떠오르면서 황홀함이나 가슴 벅차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행복함을 느꼈습니다.” 전 씨에게 있어 태국에 도착한 것은 탈북에 성공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외할머니의 소원인 비행기도 드디어 타봤다. 그런데 그때는 큰 감흥이 들지 않았다. “비행기 타는 줄도 몰랐어요. 밤에 외국 공항에서 이리저리 안내하는 대로 정신없이 끌려다니다가 어디로 들어가더니 앉으라고 하더군요. 저는 그게 비행기 좌석인 줄 몰랐어요. 하늘에 뜨니까 이게 말로만 듣던 비행기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밤이라 밖은 내다보이지 않아서 비행기 타는 게 그렇게 좋은 건가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전 씨 남매처럼 탈북해 일주일 만에 태국까지 온 경우는 대단히 빠른,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매우 운이 좋은 경우에 속한다. 이들의 운은 하나원을 나올 때도 이어졌다. 한국에 온 탈북민들은 대다수가 서울에 집을 배정받길 원하지만, 서울에 나온 임대주택 숫자는 늘 부족해 제비뽑기로 결정한다. 전 씨가 하나원을 졸업할 때도 서울에 할당된 주택은 딱 2개였는데, 오빠가 수십 대 일의 경쟁 속에서 그 어려운 미션을 성공한 것이다. 이런 경험들 때문인지는 몰라도 전 씨는 한국에 와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됐다. “외삼촌이 극동방송을 수십 년 몰래 듣다 보니 탈북하기 전에 이미 비밀교인이 돼 있었어요. 우리가 탈북할 때도 외삼촌은 ‘압록강에선 내가 지켜주지 못한다. 하나님의 능력을 붙잡고 와라’고 했어요. 그래서인가 압록강 넘을 때부터 ‘하나님 무사히 살려 주세요’ 이러면서 내내 왔습니다. 태국에 도착했을 때도 ‘하나님, 감사합니다’고 했고요. 그래서인지 한국에 와서 교회에 가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더라고요.”● 한동대에서 이룬 유학의 꿈 드라마로 보던 서울과 직접 와서 보는 서울은 어떤 차이일까. 전 씨는 “보이는 것은 똑같은데, 삶은 완전히 달랐다”고 말했다. 자신들은 아무 것도 없고, 아무 것도 모르는 애기에 불과했다. 한국에 도착한 뒤 이들의 첫 미션은 대학에 가는 것이었다. 우선 한국에 도착했을 때 21세인 오빠부터 진학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런데 아무리 북한에서 이름을 알린 수재라고 해도 한국에서 대학에 붙기는 쉽지 않았다. 수학이나 물리학은 자신이 있었지만 영어나 국어를 따라갈 수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오빠는 한양대에 입학해 전자공학을 전공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어느 회사를 다니다가 지금은 전업 투자자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북한에서 전국대회 2등을 한 수재가 자본주의 사회에 와서 찾은 길은 투자자인 셈이다. “그게 맞는 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정말 열심히 공부하면서 하는 것 같고, 돈도 버는 것 같아요. 자기 인생이니 자기가 책임져야죠.” 오빠를 대학에 입학시키고 나서 전 씨는 자신이 갈 대학을 찾기 시작했다. 물론 대학에 지원서를 내기 전 컴퓨터 학원이나 영어학원을 다니며 대학 과정을 따라갈 준비도 했다. 서울대가 좋다는 것은 알았지만, 기독교적 분위기에서 공부하는 것이 뭔가 의미가 있고 가치관에도 부합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한 대학이 한동대였고, 2016년에 국제관계학과에 입학하는 데 성공했다. 입학은 했지만 과정을 따라가긴 너무 벅찼다. 특히 한동대는 영어 수업이 많아 따라가기 힘들었다. 북한 1중학교에선 영어를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영어로 전공과목을 이수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전 씨는 죽기 살기로 영어에 매달렸다. 첫 학기 성적은 예상했던 것보다 만족스럽게 나왔다. 전 씨는 대학에 입학하는 다른 탈북민 학생들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첫 학기는 무조건 잡아야 한다”고 조언하고 싶다고 했다. 첫 학기 성적이 좋으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고, 장학금을 받으면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 다음 학기도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다. 반대로 첫 학기 성적이 나쁘면 장학금을 받을 수 없고, 그러면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알바를 하다 보니 공부와 점점 멀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선순환, 악순환의 고리가 1학기에 만들어진다는 이론이다. 그는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았고 대학 기간 각종 공모전이나 대회에도 빠지지 않고 나가 상금도 많이 받았다. 이렇게 받은 상금을 모았다가 방학이면 영어를 배우러 외국에 나갔다. 그는 국제관계학뿐만 아니라 사회복지까지 복수 전공을 택해 모두 좋은 점수를 받았다. 한 학기도 쉬지 않고 공부에 몰두한 끝에 2020년에 학사 과정을 끝냈다.● 전주옥의 해피엔딩 전 씨는 재작년 결혼해 지난해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최근 웹툰 회사 대표가 됐다. 한국에 유학 오는 심정으로 탈북해 웹툰 회사를 차린 까닭은 뭘까. “2019년에 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그걸 보고 어떤 분이 연락을 해오셨어요. 며느리 삼고 싶다고요. 그래서 소개팅 삼아 나갔는데, 남자가 마음에 들었어요. 그가 지금의 남편이고요. 남편의 직업이 웹툰 작가랍니다.” 웹툰 작가 남편을 만나자 전 씨는 욕심이 생겼다. 평소 전 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취직해 돈을 벌며 사는 평범한 삶은 살고 싶지 않았다. 북한에서 신음하는 동포를 위해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고, 그것이 자신이 한국에 온 사명이기도 하다고 믿었다. 그런데 웹툰이라는 세계를 접하면서 이것이 또 자신에게 불현듯 찾아온 중요한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북한 인권이란 이슈는 나이 든 사람들에게만 통하는 올드한 느낌이 있어요.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웹툰을 많이 보잖아요. 그러니까 웹툰을 통해 북한 실상을 알리는 게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또 그림은 국경이 없잖아요. 한국 웹툰은 미국에서도 인기가 많습니다. 최근 한류가 전 세계에서 인기를 끌고 있고, K-컬처라는 말도 나오는데, 이 분위기를 타고 북한 실상을 전 세계에 알리는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아직 그의 회사는 정식 작품을 내놓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손에서 시나리오는 완성돼 가고 있다. 전 씨는 첫 작품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가 대학에 입학하기 전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날 한 탈북민 대안학교에서 낯이 익은 얼굴을 만났다. 분명 같은 동네에서 살던 인민학교 동창생인 듯싶어 말을 걸려는 찰나 귀신을 본 것처럼 얼이 나가 있던 상대방이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래서 쫓아가 물어봤더니 “어떻게 죽은 사람이 여기에 와 있지”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사연은 이랬다. 그와 오빠가 한국에 간 뒤 몇 달쯤 지나 보위부가 슬슬 집에 찾아오기 시작했다. 자식 둘이 몇 달째 사라진 것이 이상했던 것이다. 부모는 결국 이들이 함흥에서 집에 돌아오다가 장마를 만나 물에 휩쓸려 죽은 것으로 이들을 사망 처리했다. 마을에선 그렇게 화제를 몰고 다니던 남매가 죽었다고 난리가 났다. 한국에 먼저 왔던 동창은 어느 날 고향집에 통화를 하다가 “야, 너랑 인민학교 같이 다녔던 주옥이 있지. 걔가 오빠랑 함흥에서 돌아오다가 홍수에 휩쓸려 죽었대”라는 말을 들었다. 너무 슬펐던 동창생은 교회에 가서 “목사님, 주옥이라는 예쁘고 똑똑한 친구가 있었는데 물에 빠져 죽었대요. 명복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라고 했다. 그랬던 주옥이 살아서 나타났으니 그가 넋을 잃은 것이다. 전 씨의 첫 웹툰 작품은 하늘에서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아이들이 빠져 떠내려가고 있소”라는 고함소리가 터지는 것으로 시작된다. 전 씨의 고민은 북한 관련 웹툰이 과연 젊은 세대에게 얼마나 먹힐지 여부다. 아무리 의미 있는 작품이라도 조회수가 오르지 않으면 회사는 생존하기 어렵다. “아마 내년쯤 물에 빠진 북한 아이들이 떠내려가는 웹툰을 우연히 접하게 된다면, 끝까지 봐주시고 북한에 사는 사람들의 삶도 서울에 유학 온 전주옥처럼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게 빌어주세요.”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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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무역보험공사, 기재부 운영평가 단독 ‘최우수’ 선정

    한국무역보험공사(K-SURE)가 지난달 26일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2022년도 직무 중심 보수체계 개편 실적 점검 결과’에서 직무 다양성 및 업무 성과와 연계한 인사 및 보수체계 운영 실적 ‘최우수’ 기관으로 평가됐다. 점검 대상 공공기관 130곳 중 ‘최우수’로 평가된 기관은 무역보험공사가 유일하다. 무역보험공사는 직무 특성을 반영한 보수체계를 확립하고, 연공서열보다 업무 성과를 우선 고려해 승진 기회를 부여하는 것을 골자로 한 직무급 체계 도입을 바탕으로 조직문화 혁신에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지난달까지 고객 만족, 동반성장, 청렴 등 다양한 분야에서 ‘A급’, ‘최우수’ 등의 결과를 거두며 신뢰받는 정책금융기관으로서의 밑바탕을 탄탄하게 다지고 있다. 직무 다양성과 업무 성과를 반영한 체계적인 보수·인사 시스템이 연공서열 중심 조직문화의 틀을 깨고 안정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노사가 합심해 직무평가의 공정성과 구성원의 제도 수용성 확보에 꾸준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다. 무역보험공사는 ‘노사 공동 직무급 협의체’를 소통과 의사 결정의 컨트롤타워로 마련해 노조가 경영진과 동등한 파트너로서 참여하며 협의를 진행했다. 보수체계에서는 노사 양방향 소통을 기반으로 한 조직 수용성을 확보하며 제도의 실효성을 확대했다. 인사 제도에서는 능력과 자질 평가 비중을 높이고 성과 우수자에 대한 ‘승진 패스트 트랙’도 도입했다. 무역보험공사는 2010년부터 일찍이 직무급제를 정식 도입하며 조직문화 혁신을 본격화했다. 체계적인 직무분류체계 수립이나 다각적 직무기술서 기반 직무 평가 절차 도입 등에 있어서 다양한 채널을 통한 노사 간 소통이 밑바탕이 됐다. 무역보험공사는 청렴, 동반성장 등의 분야에서도 속속 우수한 성과를 거두며 혁신 선도 기관으로 거듭나고 있다. 지난해 3월 유엔 산하 글로벌콤팩트로부터 정책금융기관 최초 2년 연속 ‘반부패 어워드’를 수상했다. 올해에는 ‘공공기관 청렴 체감도 평가 1등급’(국민권익위원회), ‘데이터 기반 행정 점검 우수’(행정안전부), ‘공공기관 동반성장 평가 2년 연속 최우수’(중소벤처기업부) 기관으로 잇따라 선정됐다. 또 지난달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2022년 공공기관 고객만족도 조사 결과에서는 4년 연속으로 ‘우수’ 등급을 받았다. 이인호 한국무역보험공사 사장은 “신뢰받는 우리나라 대표 공적 수출 신용기관으로 거듭나기 위한 다방면의 혁신 노력이 점차 결실을 맺고 있다”고 밝혔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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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핵우산 명문화와 김정은의 공포

    지난달 말 미국을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은 미국의 핵우산을 명문화한 ‘워싱턴 선언’을 가장 중요한 외교 업적으로 내세웠다. 이 선언은 미국이 동맹국의 핵 억제를 실현하기 위해 구체적 계획을 담아서 선언하고, 이를 미국 대통령이 약속한 최초의 사례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북한이 핵으로 한국을 공격하면 정권의 종말을 맞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 척에 실린 핵 자산만으로 80개의 북한 도시를 동시에 파괴할 수 있는 전략핵잠수함(SSBN)이 한반도에 빈번하게 전개된다는 보도도 나왔다. 이번 워싱턴 선언은 과거와는 그 의미가 다르다. 예전에도 한국은 미국의 핵우산 보호 아래에 있긴 했지만 이번엔 미국 대통령이 직접 언급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한국이 핵 공격을 받았을 때 미국이 대응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로 변신한 세계적인 성공 사례인 한국이 핵무기에 속절없이 무너지는데 미국 대통령이 약속을 저버린다면 초강대국 미국의 체면은 땅에 떨어질 것이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세계의 핵질서가 무너지는 것이다. 세계 모든 나라는 핵 개발에 매달리게 될 것이고, 직접 만들지 못한다면 암시장에서 사오기라도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지구에 핵무기가 광범위하게 퍼지면 가장 위기를 맞을 국가는 적이 제일 많은 미국이나 중국 등 핵 보유 강대국이 될 것이다. 이와 함께 이번 선언이 김정은에게 실제로 얼마나 공포감을 줄까를 따져봐야 한다. 한국이 핵무기를 보유해야 한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한미 양국의 핵우산 명문화나 우리의 핵 보유가 김정은의 핵 개발을 멈추게 할지는 미지수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민주 국가와 독재 국가의 차이 때문이다. 민주 국가는 대통령이 국가와 국민을 지키는 책무를 완수해야 한다. 그걸 제대로 하지 못하면 대통령은 국민에게 투표로 심판을 받게 된다. 반면 북한은 어떤가. 그곳은 김정은 하나만을 위해 존재한다. 북한 땅에 핵무기가 80기가 아닌, 8만 기가 떨어진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김정은을 심판하지 못한다. 북한군은 나라와 민족을 지키는 군대가 아닌 김정은의 집안만 지키는 가병이다. 북한이 핵 개발에 대한 김정일의 의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발언이라고 선전하는 것이 “조선이 없는 지구는 없다”이다. 그런데 그 조선이 북한 인민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대량 아사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도 눈 깜짝하지 않고, 국경을 꽁꽁 막고 처형과 연좌제로 온 강토를 수용소처럼 운영하는 것이 북한 지도부다. 그들에게 조선은 김씨 일가만을 의미하며, 인민은 노예에 불과하다. 그래서 북한의 구호는 온통 ‘수령결사옹위정신’ ‘자폭정신’ ‘육탄정신’ ‘총폭탄정신’과 같은 섬뜩한 말로 도배돼 있다. 한마디로 김씨 일가를 위해 너희들은 목숨 따윈 서슴없이 내놓으란 뜻이다. 이런 북한에 가장 공포감을 심어줄 수 있는 말은 “북한이 종말을 맞게 될 것”이 아니라 “핵 장난을 치면 김정은의 목숨을 담보할 수 없다”는 경고이다. 북한은 ‘핵에는 핵’이라는 ‘공포의 균형’이 통하지 않는 곳이다. 오히려 김정은의 공포는 스텔스기에서 투하한 스마트 폭탄 한 발이나, 내부에서 쏘는 한 발의 저격용 탄알에서 극대화된다. 따라서 북한의 핵 위협을 억제하기 위해 던지는 메시지는 좀 더 정교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북한을 지도상에서 지운다거나 석기 시대로 돌리겠다는 말보다 더 위협적인 것은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북한 수뇌부를 제거할 능력이 있다”는 말이다. 솔직히 김정은에겐 수십 척의 핵잠수함이 오는 것보다, 근거리 휴대용 미사일을 가진 몇 개의 반체제 그룹이 북한 내에 존재하는 것이 더 위협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드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다. 김정은의 가장 큰 두려움은 자신의 목숨이 강대국의 저울대에 오르는 일일 것이다. 북한을 상대로는 그런 위협을 극대화해야만 진정한 공포의 균형이 만들어진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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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년 전 TV로 방영된 ‘탈북 꽃제비’가 바로 접니다”[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1999년 9월 2일. 한국 관광객들을 태우고 백두산으로 향하던 버스를 향해 남루한 행색의 북한 꽃제비 꼬마 3명이 손을 흔들었다. 중국 연변 화룡현 근처 어디쯤이었다.버스가 서고 몇몇 관광객이 내려 관심을 표하자 아이들은 “우린 북에서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우린 남에서 왔단다. 서울을 아니?” 등의 질문을 던지며 물과 사탕을 주는 어른들에게 아이들은 이름과 고향을 스스럼없이 말했다.이 버스에는 마침 한국 모 방송사 취재팀도 타고 있었다. 꽃제비들의 모습은 북중 국경에서 구걸하는 북한 어린 꽃제비들이라는 주제로 방영됐고, 북한 보위부에서도 방송을 모니터링해 이들의 신상을 파악했다.버스가 떠난 뒤 아이들은 태어나 처음 들은 서울말을 흉내 내며 가던 길을 즐겁게 갔지만, 다음날 중국 공안에 체포돼 북송됐다. 이후 우여곡절을 거쳐 3명 중 한 명은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까지 나왔고, 다른 한 명은 한국으로 와 미디어 관련 회사를 차렸다.한국 방송사 카메라에 잡힐 당시 키 125㎝의 13세 꼬마 전충일 씨가 한국에 온 한 명이다. 그는 한국에 오기까지 두만강을 일곱 번 넘었고, 북송과 감옥 생활을 거듭 겪어야 했다.●가족과 생이별전 씨는 1986년 함경북도 청진시 송평구역 수성동에서 태어났다. 북한 정치범수용소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25호 관리소’, 일명 수성교화소가 전 씨의 집 근처에 있었다.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지질탐사대에 다녔고, 어머니는 전 씨와 네 살 아래 남동생을 돌보며 집에서 부양가족으로 지냈다. 전 씨가 인민학교 1학년에 막 입학하고 몇 달 되지 않았던 때에 김일성이 사망했다. 그리고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 전 씨는 연이어 닥치는 비극을 온 몸으로 받아내며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 했다.그가 인민학교 3학년이던 1997년 아버지는 청진 외곽 석막이란 곳에 부업지 농사 담당으로 파견됐다. 전 씨의 가족도 아버지를 따라 ‘금채동 골안’으로 불리는 외진 산골로 옮겨왔다. 농사를 지으면 굶어죽지 않을 거란 희망은 얼마 안돼 무너졌다. 배고파 종자도 훔쳐 먹는 때에 농사라고 잘 될 리가 없었다.아버지와 어머니가 다투는 날이 많아지고, 급기야 이듬해 어머니가 장사라도 해서 먹고 살아야겠다며 동생을 데리고 시내로 나갔다. 사실상 부모가 이혼한 것이다.전 씨는 아버지와 함께 산골에 남았다. 어머니가 떠난 뒤 아버지는 매일 술을 마시더니 이듬해 2월 간 경화와 복수로 세상을 떠났다. 13세 전충일은 집에 혼자 남게 됐다.● 꽃제비가 되다1999년은 전 씨의 일생에서 가장 힘든 해였다. 아버지가 사망하자 하루는 산에 가서 나무를 모으고, 다음날은 시내에 가서 나무를 파는 일을 하면서 먹고 살았다. 당시 그의 키는 125㎝였다. 이런 꼬마가 손수레에 나뭇단을 싣고 20리길을 2시간 넘게 걸어가 시내 장마당에서 나무를 팔고 돌아오는 일을 쉬지 않고 한 것이다. 당시 석막에서 청진으로 가는 도로에는 나무 실은 손수레를 끌고 가는 아이들이 줄을 이었다.손수레 하나를 팔면 당시 북한돈 20~30원을 받았다. 그 돈으로 손 쉽게 먹을 수 있는 ‘펑펑이 가루’나 콩비지를 사서 끼니를 때우고 또 산으로 향했다.그런데 몇 달쯤 지나자 집에 동생이 불쑥 나타났다. 사연을 들으니 동생은 어머니와 함께 장사를 하러 무산에 갔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동생은 거리를 떠돌며 빌어먹다가 우연히 마을 사람을 만났고, 그가 형에게 데리고 온 것이었다. 자기 혼자도 먹고 살기 힘들었던 충일은 9살 동생도 책임져야 했다.아이들의 어려움을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던지 어느 날 인근에 살던 삼촌이 와서 이들을 집으로 데리고 갔다. 충일은 삼촌 집에서도 나무를 팔아야 했다. 다행히 삼촌이 밑천을 조금 대주어 이번엔 산에 가서 나무를 캐는 대신, 산 아래에서 사람들을 기다렸다가 그들이 갖고 온 나뭇단을 샀다. 그걸 보기 좋게 다시 묶어 장마당에 가서 팔면 두 형제가 먹고 살 만큼의 돈은 벌 수 있었다. 삼촌은 동생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밭에 가서 돼지에게 줄 풀을 뜯어오게 했다.새벽 5시에 일어나 산으로 가는 일과가 반복됐다. 그런데 몇 달 뒤 사고가 터졌다. 8월 어느 날 무더위 속에서 장마당에 갔는데 그날따라 나무가 잘 팔리지 않았다. 피곤했던 충일은 손수레에 기대 잠깐 잠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깨어나 보니 손수레만 있고 나무가 모두 사라졌다.이제 돌아가면 삼촌에게 엄청 매를 맞아야 했다. 삼촌은 두 형제를 수시로 때렸는데, 나무를 잃어버리기 며칠 전에도 죽도록 때렸다. 돼지풀을 뜯어야 할 동생을 몰래 시내로 데려가 그가 좋아하는 ‘까까오(북한식 얼음과자)’를 사먹였다가 들켰다. 동생에게 까까오를 들고 가면 녹아 버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동생을 데리고 갔던 것인데, 삼촌에겐 배은망덕한 행위로 비춰진 것이다.나무를 잃어버리고 빈손으로 돌아가면 삼촌이 어떻게 할지 눈에 선했다. 충일은 그날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꽃제비 무리에 합류했다.그러나 청진역에서 시작한 꽃제비 생활도 며칠 가지 못했다. 단속원들에게 걸려 청진시 해안여관을 개조해 만든 ‘꽃제비 구호소’에 끌려가 수감된 것이다. 먼저 잡혀온 꽃제비들은 “여기에 있다간 굶어죽는다”고 말했다. 실제로 저녁이라고 나온 것을 보니 영양가루로 만든 떡국이었는데, 건더기가 별로 보이지 않았다.잡혀간 날 밤에 충일은 다른 꽃제비 3명과 함께 구호소를 탈출했다. 청진역에 가면 또 잡힐 것 같아 이번엔 기차를 타고 무작정 떠났는데, 종점에 도착하니 북중 국경인 무산이었다. 꽃제비 생활을 갓 시작한 충일은 구걸도 잘 못하고 훔치는 것도 잘 못했다. 이렇게 살다가는 굶어죽을 것 같았다.그때 인민학교 때 봤던 영화 ‘대홍단책임비서’가 떠올랐다. 영화 속에서 당 비서는 지역 내 부모 잃은 고아들을 데려다 돌봐주는 훌륭한 간부로 묘사됐다. 무산에서 대홍단까지는 이틀 길이었다. 돈이 없는 그는 이틀을 내리 걸어 대홍단까지 갔다.가보니 영화처럼 고아를 키우는 곳은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침 그때는 감자철이었다. 무연하게 펼쳐진 감자밭 주변에 경비움막들이 있었는데, 그는 그 움막 중 한 곳에 들어가 도움을 요청했다. 작은 아이가 불쌍했던지 아니면 심심해서였던지는 모르겠지만, 경비원은 그를 움막에서 자게 승인했다. 그때부터 충일은 감자만 구워 먹었다. 일주일 내내 감자만 먹으니 입술이 갈라지고 힘이 없었다. 1998년 10월 대홍단을 시찰한 김정일은 “감자는 곧 흰쌀”이라는 구호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충일이 직접 감자를 먹어보니 일주일도 먹기 어려웠다.● 두만강을 건넌 꽃제비들이곳을 떠나 딴 곳에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무산 쪽으로 가다가 비슷한 연령대의 꽃제비 두 명을 만났다. 한 명은 충일처럼 꽃제비 경력이 별로 없었는데, 한 명은 베테랑 꽃제비로 훔치는 것도 잘했고, 중국에 건너갔다 온 경력도 있었다. 베테랑 꽃제비가 중국에 건너갈 것을 제안했다. 중국에 가서 빌면 돈도 주고 밥도 준다는데, 이들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당시는 백두산 아래 대홍단은 국경경비가 그리 삼엄하지 않았다. 두만강도 물살은 좀 세도 폭이 넓지 않아 건너기 쉬웠다. 세 꼬마는 대낮에 강을 건너 중국에 넘어갔다. 민둥산을 오르며 이들은 하루에 한 마을만 돈다는 원칙을 세웠다.첫 번째 마을에 들어가서 “조선에서 왔습니다”라고 하니 저마다 혀를 끌끌 차며 집으로 데리고 가서 밥도 주고, 옷도 주고, 소고기까지 먹였다. 북한에선 아무리 빌어도 밥 한 숟가락 얻어먹기 힘들었는데, 강 하나를 두고 이런 별천지가 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시내에 가면 교회란 곳이 있는데 그곳에 가면 너희들을 먹여주고 재워줄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다음날 이들은 화룡 시내를 향해 걸어갔다. 첫 마을에서 동정의 온기를 느꼈던 터라 겁도 사라졌다. 이들은 길을 지나가는 차를 세우기 시작했다.그러다가 선 것이 한국 관광객들이 탄 버스였고, 이들의 모습은 한국에서 방영됐다. 버스와 헤어진 다음날 이들은 어느 한족 마을에 가서 다시 “조선에서 왔습니다”고 외쳤다. 밖에서 밥을 먹던 한족 하나가 이들을 불러 밥을 주었다.이때 주변을 지나가던 공안 한 명이 다가와 “고기만두 먹고 싶지 않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먹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공안은 화룡 공안국으로 이들을 데려갔다. 공안국에 가니 정말 고기만두를 사주었다. 아이들은 중국은 안전원도 친절하다고 놀랐다. 도망칠 수도 있었지만, 좀 기다리면 교회에 데려다 준다는 말을 믿고 방에 가만히 있었다.그런데 시간이 좀 흘러 나타난 다른 공안은 태도가 험악했다. “네 놈들 때문에 명절에 쉬지도 못하고 나왔다”며 욕을 엄청 퍼붓더니 조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우릴 어디로 보내나요”라고 묻자 “어딜 보내긴, 조선에 보내야지”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때서야 아이들은 자기들이 잡혔다는 것을 알았다. 변방 구류장에 끌려가 닷새를 보내고, 9월 8일 이들은 북한에 송환됐다. 하도 어린애들이라서 그런지 보위부에선 이들을 때리지도 않고 곧바로 ‘무산구호소’로 보냈다.도망칠까봐 팬티만 입혀놓은 채 방에 가두어 두었는데, 이들은 팬티만 입고 다시 밤에 도망을 쳤다. 마침 다음날이 북한 국경절인 9월 9일이라 감시가 심하지 않았다. 이번엔 한 명이 더 합세해 4명이 됐다.이들이 갈 곳은 뻔했다. 중국을 한 번 경험하면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번에도 아이들은 잡히지 않고 무사히 두만강을 넘었다. 두만강을 넘은 뒤 베테랑 꽃제비가 제안했다. 4명이 몰려다니면 체포되기 쉬우니 둘씩 갈라지자는 것이다.베테랑은 새로 합세한 애와 함께 갔다. 충일은 나중에 미국에 간 친구와 한 팀이 됐다. 그렇게 갈라진 베테랑의 삶이 이후 어떻게 됐는지 충일은 알지 못한다. 지금 살아있으면 그도 37세가 됐을 것이다.●인신매매 브로커친구들과 헤어져 둘만 남은 충일의 팀은 길에서 지나가는 차를 세웠다. 마침내 승용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조선족 남자는 이들을 산에 있는 움막에 데려가 밥도 주고 옷도 사주었다. 며칠 그렇게 살았는데 조선족이 속내를 드러냈다.“너네 조선에 나가 여자를 데리고 올 수 있나. 그럼 내가 돈을 줄게.”충일이 머리를 굴려봤지만 아는 여자가 없었다. 그러다가 대홍단에서 만난, 충일이보다 더 어린 아들딸을 데리고 어디론가 가던 한 여인이 떠올랐다. 그녀는 자식 또래의 충일이 불쌍했던지 밥도 나눠주고 자기 집 주소도 알려주면서 “나중에 잘 되면 찾아오라”고 했다.그녀가 알려준 집은 아오지 탄광으로 잘 알려준 은덕군이었다. 조선족에게 “그 아줌마에게 한번 찾아가면 어떨까”라고 말하니, 안색이 밝아졌다. 이들은 조선족의 차를 타고 국경을 따라 올라가다가 회령 근처에서 두만강을 넘었다.조선족은 여비를 하라며 두 아이에게 각각 인민폐 100위안씩 건네주었다. 북한에 건너가 돈을 바꾸니 2700원이 됐다. 과거 충일이 나무를 한 달 내내 팔아 모아도 만질 수 없는 액수였다. 조선족의 통 큰 씀씀이에 감동한 꼬마들은 반드시 그의 임무를 관철하겠다고 생각했다.며칠 뒤 이들은 은덕에 도착했고, 아줌마를 만나는데 성공했다. 중국에 가면 믿을 만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아줌마는 선뜻 따라가겠다고 했다. 주변에 더 갈 여자가 없냐고 하자 중국에서 살다가 북송된 경력이 있는 동네 여성 3명이 합류했다. 충일과 친구는 은덕 아줌마와 두 자녀, 합세한 여성 3명 등을 데리고 무사히 중국으로 다시 넘어왔다.조선족은 차를 타고 마중 나와 이들을 움막으로 데리고 갔다. 그렇게 며칠을 지냈는데, 어느 날 충일과 친구가 몰래 마을로 나가 밥을 빌어먹고 돌아오니 여인들은 모두 도망가고, 아줌마와 자녀만 남아 있었다. 어차피 팔려가는 길임을 알고 따라온 이들인지라 먼저 살던 곳과 연락해 사라진 것이다. 아줌마도 이들과 함께 도망칠 수가 있었지만, 아이들을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교회로 보내준다는 조선족을 믿어보기로 하고 남았다. 조선족 남자는 돌아와서 불같이 화를 냈지만 이미 끝난 일이었다. 그는 충일과 친구, 그리고 은덕 아줌마의 두 자녀를 차에 싣고 시내 어느 작은 교회로 데리고 갔다. 혼자 움막에 남은 아줌마의 운명은 이후 알 수가 없었다.작은 교회에선 아이들 넷을 다시 연길의 큰 교회로 데리고 갔다. 큰 교회에선 다시 어느 30대 중반의 조선족 집으로 보냈다. 이 집은 한국에서 온 이광식 목사가 운영하는 여러 피난 처소 중 한 곳이었다. 조선족 부부는 6명의 탈북 고아들을 키웠다. 고아들은 부부를 아버지, 어머니라 부르며 자랐다.나중에 은덕 아줌마의 두 자매 역시 한국에 왔고, 훌륭한 청년으로 성장해 한국 사회에 잘 정착해 살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 어머니 소식을 모른다.충일은 그때 일이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저 때문에 두 자매가 어머니와 헤어진 것 같아서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어떻게든 찾아보려 노력했지만 은덕 아줌마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그렇지만 그때 충일은 13살이었다. 은덕 아줌마도 자신이 중국에 팔려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두 아이라도 살리기 위해 결단했을 것이다. 당시 아오지에선 무리로 사람들이 굶어죽을 때였다. 살 수만 있다면 팔려가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던 시절이었다.● 보위부에 체포1999년 한 해 동안 충일에겐 엄청난 사건들이 벌어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삼촌집에서 살다가 꽃제비가 됐고, 탈북과 북송을 반복한 끝에 연길의 한 조선족 집에 양자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 온 이 목사는 아이들의 교육에 관심이 컸다. 가정교사를 불러 여러 처소에서 공부하는 탈북 고아들에게 국어와 중국어, 수학, 영어, 성경을 배우게 해주었다. 이후 국경에서 단속이 심해지자 처소를 청도로 옮겨갔다. 그렇게 4년이 흘렀다. 충일은 17살 청년이 됐다. 처음 넘어왔을 때 키가 또래보다 훨씬 작았지만, 그동안 키도 쑥쑥 커서 167㎝가 됐다.철이 들면서 충일은 늘 고향에 있는 동생이 떠올랐다. 삼촌집에서 교육도 받지 못하고 돼지 풀을 뜯으러 다닐 것이란 생각을 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2003년 충일은 함께 넘어온 친구와 함께 고향의 가족을 찾아보기로 하고 청도를 떠났다. 이번에도 몰래 두만강을 넘는데 성공했고, 삼촌집이 있는 동네까지 도착했다. 삼촌 어머니가 운영하는 매점에 들려 먹을 것을 샀는데, 삼촌 어머니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저녁에 집에 들어가니 삼촌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저 충일입니다”고 하자 삼촌이 엉엉 울었다. 다음날 인근 고모의 집에 갔는데 고모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고모부가 “네가 없어진 얼마 뒤 보위원들이 찾아왔다. 네가 중국 가서 빌어먹는 장면이 남조선 텔레비에 나왔다고 말해주더라. 우린 너를 사망 처리하고 지냈다”고 말했다.동생은 삼촌집에 없었다. 그가 탈북한 후 어머니가 나타나 동생을 데리고 다시 수성의 고향집으로 데리고 갔다는 것이다. 그는 걸어서 집으로 갔다.북한에서 유일하게 엄마만은 한 눈에 아들을 알아봤다. 충일은 엄마에게 4년 전 무산에서 왜 남동생을 버렸는지 끝내 묻지 못했다. 아마 그때 엄마는 중국에 갔다 온 것 같다는 것이 충일의 짐작이다.가족과 재회하고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느 날 보위부에서 그를 찾아와 끌고 갔다. 알고 보니 함께 나온 친구가 중국으로 돌아갈 때가 되자 마을에 와서 충일을 찾았는데, 말투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마을 사람들이 보위부에 신고했던 것이다. 조선족의 집에서 4년을 크다보니 어느새 이들의 말투는 고향에서 이질감을 느낄 정도로 변했던 것이다. 충일의 말투도 친구와 똑같다보니 그도 덩달아 체포됐다.보위부에선 이들에게 한국 사람을 만났는지, 교회에 갔는지를 집중적으로 캐물었다. 둘은 중국에서 농사를 했다고 버텼다. 한 달 쯤 지났을 때 조사하던 보위원이 두툼한 서류를 이들 앞에 내밀었다. 그걸 보고 충일은 경악했다. 청도에서 함께 살던 사람들의 신상이 자세히 적혀 있었던 것이다. 한국 목사가 운영하던 처소에서 4년을 살았다는 것이 드러나자 이들은 평양 국가보위부 본부가 직접 수사하는 죄인이 됐다. 6월에 체포돼 12월까지 6개월 간 보위부 구류장에서 조서를 쓰는 일을 반복하며 보냈다.12월 31일에 갑자기 보위부장이 불렀다. 갔더니 “장군님의 은덕으로 너희는 당시 너무 어렸다는 것을 참작해 석방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2004년 설날은 집에서 보내게 됐다.● 동생을 데리고 다시 탈북중국을 경험했던 충일은 북한에서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그는 동생에게 중국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이야기해주었다. 동생의 눈이 반짝반짝해졌다. 이밥에 고기를 실컷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천국이었다. 어머니에겐 차마 남동생을 데리고 간다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형제는 3월초 집을 나서 눈보라 치는 3월 8일 국제부녀절(세계 여성의 날) 밤에 두만강을 건넜다. 강을 넘어 조선족 양부모에게 전화를 하자 이들이 마중 나왔다. 충일이 북한에 있던 사이 청도에 있던 다른 친구들은 모두 공안에 체포돼 북송됐다. 청도 팀 중 한 명이 신분증을 만들어주지 않는다고 처소를 떠나 떠돌다가 공안에 체포됐는데, 그가 모두 불어버린 것이다.충일은 연길에 다시 머물게 됐다. 5개월쯤 지나자 이번엔 엄마 생각에 견딜 수가 없었다. 갑자기 두 아들이 사라졌으니 얼마나 고통이 클까에 생각이 미치니 마냥 편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두만강을 넘기로 결심했다. 어머니까지 데리고 중국에 나오는 것이 목표였다. 2004년 8월 그는 북한에서 팔 수 있는 옷가지들을 한 짐 쥐고 두만강에 뛰어들었다. 이번엔 운이 나빴다. 국경경비대에 체포돼 여단 구류장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때 무슨 방침이 하달됐는지 군인들이 함부로 옷을 빼앗지 못했다. 구류장에 들어갈 때 옷과 신발 숫자까지 다 장부에 기록하고, 출소할 때 그대로 돌려줘야 한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지침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그래도 그들에겐 방법이 있었다. 조사할 때 군관이 어디선가 가져 온 낡은 옷들을 꺼내들며 “이거 네 것이 맞지”라고 물었다. 맞다고 하면 때리지 않았다. 대신 충일이 갖고 온 새 옷은 낡은 옷으로 바뀐 숫자만큼 사라졌다. 이런 바꿔치기를 두세 번 정도 당하고 나니, 그가 갖고 온 옷 가방은 모두 헌옷으로 차게 됐다. 옷 개수만 맞을 뿐이었다.옷 때문인지, 아니면 제 발로 강을 넘어온 것이 참작된 것인지는 몰라도 그는 보위부에 넘겨지진 않았다. 대신 청진에 있는 ‘도 집결소’에 끌려가 4개월 동안 강제노동을 하고 석방됐다. 석방돼 나와 보니 중국에 살고 있어야 할 동생도 집에 와있었다.● 북한에서 3년 직장생활2004년 충일은 18살이 됐다. 그 나이면 북한에선 군에 입대하든가, 직장에 들어가야 했다. 탈북했다가 두 번이나 체포돼 수감생활을 했던 충일은 군에 갈 수가 없었다. 그는 청진뜨락또르(트랙터) 부속품 공장 노동자로 임명됐다.당시 공장은 거의 가동을 못하고 있었다. 충일은 CD녹화기 수리를 하면서 돈을 벌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뭔가 뜯고 수리하는 일을 즐겼다. 중국에 있을 때도 전자제품만 보이면 무조건 뜯어 분해해보곤 했다. 2003년경부터 북한에는 한류 열풍을 타고 CD녹화기를 장만하는 붐이 불었다. 그런데 고장 나면 중국제 부품들이라 수리를 잘 할 수 있는 곳이 마땅치 않았다. 중국에서 공부했고, 전자회로판을 수없이 만졌던 충일은 중국 부품 설명서를 척척 읽어가며 고칠 수 있었다.고장 난 일본제 TV를 컬러TV로 바꾸는 것도 꽤 짭짤한 수입원이 됐다. 일본제 TV는 수상관은 좋았지만, 110볼트를 쓰게 만들었기 때문에 북한에 가면 흑백으로만 볼 수 있었다. 그는 농촌을 돌며 고장 난 TV를 사서 내부는 중국산 부품들로 바꾸어 컬러TV로 변신시켰다. 북한에서 약전 기술자는 꽤 돈을 버는 부업이었다. 그도 수리를 해주면서 녹화기도 사고, 자전거도 사는 등 나름 돈을 꽤 벌었다.그렇게 충일은 3년 반 동안 북한에서 살았다. 항상 중국에 다시 가고 싶었지만 돈을 잘 버니 다시 한 번 목숨을 걸 엄두가 쉽게 나지 않았다.● 일곱 번째 탈북과 한국행하지만 2007년이 되자 두 가지 견딜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첫 번째는 엄마가 재혼하려 했던 일이다. 충일은 “우리와 같이 살면 되지 왜 딴 남자 만나서 살려 하냐”고 극렬히 반대하다가 집을 나와 버렸다.이제 30대 후반이 된 충일은 그때를 떠올리면 너무 후회가 된다.“지금 같아선 엄마가 누구와 만난다 해도 무조건 찬성할 텐데, 그때 왜 그리 그게 싫었는지 모르겠어요.”집을 나와 사촌누나의 집에서 살았는데, 친척들이 가만두지 않았다. “쟤가 마음잡고 살게 하려면 장가를 보내야 한다”는 것이 친척들의 의견이었다. 어떤 처녀와 일사천리로 혼담이 오가고 강제로 결혼까지 하게 될 판이었다. 그때 그는 겨우 21살이었다.결혼은 죽어도 하기 싫었다. 부모가 이혼하는 것을 보고 결혼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겨난 탓도 있지만, 다시 중국에 갈 수 없을 것이란 두려움도 컸다. 결국 그는 다시 중국으로 향했다. 두만강을 일곱 번째로 넘었다.3년 만에 와서 연길의 양부모를 찾았는데 없었다. 그동안 한국에 갔다고 들었다. 강을 넘자마자 국경 마을에 들어가 도와달라고 했는데, 그동안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조선에서 왔다고 하면 밥을 주며 동정하던 사람들은 이제 거의 없었다. 탈북민들이 중국에서 일으킨 각종 사건사고 소식이 퍼지면서 조선족들은 탈북자란 말만 들어도 치를 떨었고 문전박대했다. 그래도 동정심이 남아 있는 집이 하나는 있었다. 그 집에서 준 30위안의 차비를 갖고 충일은 연길 시내로 들어왔다.변두리에 있는 어느 조선족 교회를 찾아갔더니 목사가 “오늘은 일요일이 아니라서 헌금이 들어온 것이 없다”고 미안해하면서 자기 지갑에 있던 돈을 모두 꺼내주었다. 그래도 300위안의 거금이었다. 그는 그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대련까지 갔다. 대련에 가서 다시 어느 교회에 들어갔는데 마침 어느 선교사가 “너 이광식 목사님 밑에서 공부하던 애가 아니냐”며 알아봤다. 그렇게 이 목사와 연락이 됐고, 그는 다시 이 목사가 심양에서 운영하던 기독교 처소에 들어갔다. 이 목사는 그에게 신분증을 만들어주었고, 그의 적성에 맞게 단둥에 있는 컴퓨터전문학교에 입학시켜주었다. 학교에 입학해 몇 달쯤 지났을 때 한국에 간 양부모님들과도 연락이 됐다. 양어머니는 그에게 한국에 오라며 선까지 연결해 주었다.2007년 11월 그는 중국을 떠났다. 7명이 한 팀을 이뤄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거쳐 2008년 4월 한국에 도착했다. 8월 하나원을 나온 그는 경기도 안성에 정착했다.한국에 와보니, 그가 북한에서 살던 사이 과거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꽃제비 친구는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그는 한국에 오지 않고 3국에서 곧바로 미국행을 신청했던 것이다. ● “안 해본 일이 없어요”충일은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를 타면서 “한국에 가면 모든 일을 다 해보자”고 굳게 결심했다. 그는 지금까지 살면서 제대로 된 직업을 가져본 일이 없었다. 어떤 일이 자신에게 맞을지 너무 궁금했다. 학교는 인민학교밖에 다니지 못했으니 대학에 가서 따라가는 것은 힘들 것 같다고 판단했다.한국에 와서 그는 실제로 그 결심대로 살았다. 첫 직장은 유리공장이었는데, 분위기가 좋았다. 안성에 사는 젊은 탈북민들이 신변 담당 경찰의 추천으로 우르르 몰려가 일했던 것이다. 하지만 1년쯤 지나니 어느새 다 사라져버렸다. 충일도 온갖 일을 다 해보겠다는 다짐을 했던지라 유리공장을 나와 다른 일을 찾았다.이후 그는 스스로 표현대로라면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일했다. 수십 가지 직업을 가져봤다. 그에게 일은 경험이었다. 각종 생산직과 건설 일용직, 식당, 나이트클럽, 노래방 심지어 유흥주점까지 겪어보지 않은 일이 거의 없었다. 로프를 타고 고층빌딩의 유리를 닦는 일도 3개월 했다.경험했던 중 가장 힘든 일은 가방 장식에 도금을 하는 생산직이었다. 가장 적성에 맞는 일은 사무용기기 대여업체에서 했던 프린터 A/S 관리였다.그러다가 2014년 모 통신 대기업 엔지니어로 입사하면서, 이 직업이 제일 잘 맞아 정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역시 수리를 하는 일이 자신에겐 제일 잘 맞았다. 출장을 가서 고장을 고치지 못한 날엔 분해서 잠이 오지 않았고, 밤을 새면서 공부를 해서 완벽히 해결할 수 있게 준비했다. 입사 2년 뒤엔 우수 사원 표창도 받았다.그렇게 4년을 일했다. 하지만 인생이 늘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평온한 삶에 만족하던 어느 날 뜻밖의 교통사고에 연루된 것이다. 지루한 재판을 벌였지만 패소했다. 판결은 금고 6개월형.그는 “음주 운전했던 것도 아니고, 제가 잘못이 없다는 조사결과도 있어서 끝까지 재판을 하려 했는데, 피해자가 보험이 없어 제가 무죄가 선고되면 한 푼도 못 받게 되더라고요. 그게 마음에 걸려 제가 재판을 포기했던 점도 있다”고 했다.이미 북한과 중국에서 수감생활을 경험했던 그는 한국 구치소는 그에 비하면 여관 같았다고 말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평생 다닐 생각이던 직장도 그만두어야 했다.그는 과거엔 자기 또래들이 대학에 가는 것에 관심이 없었지만, 지금은 후회도 한다. “수많은 일들을 해보며 내린 결론은 평생 먹고 살 자신의 직업을 갖는 것이 최고더군요. 그러자면 대학에서 배워야 했습니다.”자신만의 평생 직업을 찾다가 정착한 곳은 영상 촬영 및 편집 일이었다. 해보니 프로그램 작업이 적성에 맞았고, 촬영하는 것도 너무 즐거웠다. 스스로 공부해 지금은 홈페이지 정도는 척척 만들 수 있고 컴퓨터 수리도 자신이 있다.그는 2022년 8월 자신의 이름을 딴 ‘전일미디어’라는 사업체를 만들었다. 각종 영상 및 홈페이지 제작이 주업이다. 6개월 남짓 됐지만 먹고 살 정도의 수입은 된다.그는 돈을 많이 벌면 “내 손으로 직접 집을 지어 사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어렸을 때는 흰 쌀밥을 배불리 먹는 것이 꿈이었는데 이젠 이뤘으니 다음 목표는 직접 짓고 인테리어까지 제 손으로 한 나만의 집을 짓는 것입니다.” 인테리어 관련 아르바이트도 많이 해서 건축도 자신이 있다고 했다.통일이 되면 뭘 하고 싶냐고 묻자 그는 “어릴 적 아픈 기억들이 가득한 금채동 골안에 내 손으로 펜션을 짓고 싶다”고 했다. 자신이 꽃제비로 내몰렸던 그곳에 금의환향해 멋진 집을 짓고 달라진 인생을 보여주고 싶다는 의미가 포함돼 있을 것이다.24년 전 한국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125㎝의 꼬마 꽃제비는 지금 서울에서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는’ 꿈을 꾸며 살고 있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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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센터장이 된 함흥 놀새[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조선족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중국 다롄(대련)의 한 식당에서 일하던 탈북 여성은 한국 대기업 직원으로 중국에 파견된 남자와 우연히 알게 됐다. 둘은 사랑에 빠졌다. 연애 시절 남자가 “꿈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돈 열심히 벌어 지구 한 바퀴를 돌아보는 거예요. 세계 많은 나라들을 구경하고 싶고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너무 궁금해요.” 그러자 남자가 “내가 그 꿈을 이뤄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엔 여자가 “당신의 꿈은 뭐냐”고 물었다. 남자는 “어머니와 함께 목욕탕에 가주는 며느리를 만나고 싶고, 그 며느리와 전국 곳곳을 여행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여자는 “나도 그거 할 수 있다”고 화답했다. 2003년 2월 여자는 우여곡절 끝에 한국에 왔고, 5월 하나원을 졸업한 뒤 보름 만에 남자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렇게 부부의 인연을 맺은 지 어느새 20년이 흘렀다. 둘은 서로의 약속을 지켰고, 또 지금도 지키고 있다. 아내는 지금까지 30여개의 나라와 해외 유명 도시를 다녀왔다. 그가 결혼했을 때 시어머니는 84세였다. 남편은 40세가 훌쩍 넘어 낳은 막내아들이었다. 결혼 5년 뒤 시어머니는 치매에 걸렸다.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97세에 돌아가실 때까지 8년 동안 요양원에 모신 어머니를 매주 찾았다. 요양원에 모시기 전엔 항상 씻겨주고 기저귀를 갈아주며 극진히 모셨다. 부부는 지금도 주말이면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로 훌쩍 여행을 떠난다. 그동안 여자는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했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탈북민의 지역적응교육과 심리 및 진로상담, 취업지원 등을 종합적으로 실시하는 통일부 지정 지역적응센터의 책임자가 됐다. 경기서부하나센터 김성남 센터장의 이야기다. 그의 센터에서 담당한 탈북민만 1600여 명이다. 북한에서 함흥의 놀새라고 불렸던 그가 탈북민 최초의 하나센터장이 돼 다른 탈북민들의 정착을 돕는 오늘까지 걸어온 길은 당연히 순탄치는 않았다.● 남자 이름으로 태어난 여자 김성남 씨는 1975년 함경남도 흥남에서 6녀 1남 중 넷째로 태어났다. 1970년에 맏언니가 태어나고, 1985년에 남동생이 태어났다. 줄줄이 딸들이 태어나면 부모들이 실망할 법도 하지만, 그의 부모는 항상 기뻐했고 축복했다. 그를 임신했을 때 어머니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호랑이가 나무에서 노는 것을 보며 박수를 치는 태몽을 꾸었다. 이번엔 분명히 남자 아이일 것이라고 생각한 부모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미리 이룰 성(成)에 사내 남(男)으로 이름을 지었다. 그런데 또 딸이었다. 지어놓은 이름을 바꾸면 좋지 않다고 해서 그는 김성남이란 남자 이름으로 살게 됐다. 7명의 자녀가 북적이는 집안이었지만, 집안 형편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버지는 흥남비료연합기업소 후방부 노동보호물자공급소 지도원이었다.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소속된 큰 공장의 물자를 담당하다보니 먹고 사는 것은 지장이 없었다. 김 씨의 학창 시절도 큰 시련은 없었다. 공부도 잘해 학교에서 학급반장, 사로청 부위원장 등을 도맡았고 하도 잘 놀아 ‘함흥 놀새’라고 불리기도 했다. 6명의 자매가 같은 학교를 다니다보니 시비 거는 애들도 없었다. 하지만 김 씨는 졸업반이던 6학년 때 높은 곳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치는 사고를 당했다. 반년 동안 학교에 나가지 못하고 쌍지팡이에 의지해 살아야 했다. 그러다보니 대학은 물 건너갔다. 학교에서는 유급을 해 1년 더 다니라고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북한에서는 1년 유급한 학생은 ‘묵은 돼지’라고 놀림감이 되기 일쑤였다. 졸업장을 받고 몇 달 뒤 그는 6시간이나 걸리는 대수술을 받고 다시 걸을 수 있게 됐다. 수술을 받고 회복하면서 집에서 보내던 때, 속도전청년돌격대 간부로 있던 고향 오빠가 신입대원 모집차 출장길에 집에 들렀다가 자기 부대에 가자고 하였다. 김 씨는 학창 시절 클라리넷을 잘 불었는데, 그 오빠는 김 씨도 어릴 적부터 알고 있던 자신의 친구가 부대장으로 있는 여단 예술선전대에 입대해 연주를 할 수 있다고 했다. 당시 노력파견장을 개인적으로 소지하고 있었기에 김 씨는 18세 때인 1993년 속도전청년돌격대 8여단에 개별 입대했다. 속도전청년돌격대는 북한에서 도로, 발전소, 철도, 아파트 등 중요 시설을 도맡아 건설하는 청년조직이다. 건설부대지만 군 편제와 똑같이 운영되며 제복과 군사칭호까지 부여받는다. 복무기간도 군과 똑같다. 여성들도 중학교를 졸업하고 만 16~17세에 입대하면 23세까지 복무해야 한다. 속도전청년돌격대의 입대 자격은 군에 입대하는 것보다 비교적 덜 까다롭다. 출신 성분이 나쁘거나 키가 작은 등 신체 기준에 미달돼 군에 가지 못한 청년들이 주로 돌격대에 입대한다. 비록 입대 기준은 떨어져도 어렵고 힘든 곳에서 고생했다고 제대할 때는 가산점을 많이 주기 때문에 일반 사회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노동당에 입당하거나 대학에 추천받는 것이 비교적 용이하다. 가난한 집에선 ‘입을 덜기 위해’ 자식을 돌격대에 보내는 경우도 많다.● 속도전청년돌격대의 여성들 김 씨가 입대했을 때 8여단은 평북 구장~구성 사이 철도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8여단의 전신은 옛 함경남도 여단이었다. 그래서 신입대원들을 제외한 지휘관들과 베테랑 대원들은 모두 함남 출신이었다. 김 씨는 선전대로 가는 줄 알았지만, 막상 입대하니 명령에 따르는 신입이었을 뿐이다. 여단으로 가는 길 중간에 잠시 머물게 된 5대대 지휘부에서 갑자기 공석이 된 5대대 통계원 자리를 맡게 됐다. 통계원이 하는 일은 각 중대의 통계원들로부터 작업일보를 받아 정리하고, 월급을 계산해주고, 환자나 휴가자 등을 파악해 일지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통계원은 대대 간부들의 심복이 돼야 했다. 휴가나 사적 용무로 부대에 없는 사람도 있는 사람처럼 만들어야 위에서 물자 공급을 그대로 받을 수 있고, 그렇게 받은 물자는 간부들이 빼돌렸다. 통계원 생활 중 가장 고달픈 일은 여단에 보고하러 가는 일이었다. 전화로 보고하면 간단한 일이지만, 그때는 전화가 없었다. 여행증 등 서류도 주고받아야 하기 때문에 통계원이 연락병 역할도 했다. 대대 지휘부에서 여단 지휘부까지 왕복 110리가 됐는데 보통 이틀에 한 번, 어떤 때는 매일 지휘부에 가서 보고해야 했다. 통계원 전용 자전거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가 갔을 때는 누군가 팔아먹어 없었다. 지나가는 차를 잡아타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새벽에 떠나 산길을 꼬박 걸어 여단에 가서 보고한 뒤 다시 밤길을 타고 돌아와야 했다. 저녁까지 대대 지휘부에 도착할 것 같지 못하면 어깨까지 잠기는 강을 건너 물주머니가 돼서 돌아오기도 했다. 이렇게 어려워도 중대에 소속된 여성들보다는 통계원 생활이 나았다. 그의 대대는 250여명으로 구성됐는데, 이중 90명 정도가 여성이었다. 돌격대에선 여성도 남자와 똑같은 강도로 일을 해야 했는데, 보통 남성 2명에 여성 1명으로 작업조가 구성된다. 김 씨가 근무할 때는 철길 공사를 하느라 산에서 통나무를 찍어 메고 나르는 일, 발파를 하고 나온 돌을 등짐으로 나르는 일을 주로 했다. 김 씨는 “돌격대에 나간 여성 대다수가 너무 힘들어 몇 개월씩 생리가 끊긴다”고 회상했다. 여성들에게 가장 힘들 때는 여름이었다. 선풍기도 없는 임시숙소에서 30여명이 함께 생활했는데, 너무 더워 숨이 막힐 지경인데다 밤새 산골 모기에게 뜯겨야 했다. 작업복 여분도 기껏 해야 한 벌뿐이라 장마철이면 늘 젖은 옷을 입고 일하러 나가야 했다. 하루 세끼 밥은 주었지만 늘 배가 고팠다. 영양실조 환자도 종종 나왔다. 통계원으로 일했던 김 씨는 그럴 때마다 대대 비상용 쌀을 빼내 이들에게 밥을 해먹이기도 했다. 대원들에게서 가장 큰 박수를 받았던 때는 출장 나가는 이웃 군부대 차량을 빌려 수백 명이 산에다 채벌해놓은, 작업현장까지 내려오려면 며칠간 해야 할 목재운반 작업을 몇 시간 만에 끝냈을 때였다. 그는 워낙 열심히 일했던데다 여단 간부지도원의 추천으로 입대 2년 만에 청년동맹 간부들을 양성하는 금성정치대학 추천장을 받아 조기 제대해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왜가리떼’를 벗어나 탈북하다 김 씨가 대학 추천을 받고 2년 만인 1995년 집에 돌아왔더니 그새 집이 너무나 가난해져 있었다. 그가 입대한 이듬해에 아버지가 병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었던 것. 맏언니는 결혼을 했지만, 병에 걸린 아버지와 둘째 언니를 포함해 온 식구가 여전히 한 집에서 살고 있었다. 마침 그때 북한은 ‘고난의 행군’ 시기를 맞아 도처에서 사람들이 굶어죽기 시작했다. 대학에 갈 형편이 되지 않았다. 애초에 김 씨가 대학 추천을 받은 것도 돌격대에서 제대하기 위한 목적이 컸지 청년간부가 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결국 집에 눌러앉았다. 그렇지만 북한에선 누구나 취직을 해야 했기 때문에 그는 아버지 직장이었던 흥남비료연합기업소 촉매 직장에 들어갔다. 당시 북한의 많은 공장, 기업소들이 가동을 멈추었지만 비료공장은 간간히 돌아갔다. 당장 굶어죽게 된 사람들은 공장에서 닥치는 대로 훔쳐 팔았다. 비료공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생산했다고 보고한 양과 실제 출고되는 양은 차이가 컸다. 어떤 날은 한 교대가 생산했다고 기록한 수백㎏의 질안비료가 하나도 남지 않고 사라지기도 했다. 공장 보위대가 노동자들의 출입을 단속하긴 하지만 사실 이들도 뇌물을 받고 눈을 감아주는 것으로 먹고 살아야 했다. 김 씨가 들어간 합성촉매 직장에서는 연, 아연, 순철(순도 100% 철)과 니켈, 바나듐, 크롬 등 희귀금속을 주원료로 다루었는데 이것도 남아나지 않았다. 당시 니켈 1㎏은 450원이었는데 이걸 빼돌려 시장에 팔면 한 달은 먹고 살 수 있는 옥수수 18㎏을 살 수 있었다. 공장에서 3년쯤 일했던 때에 직장에서 니켈 150㎏이 갑자기 사라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정도 양이면 분명 간부들이 빼돌렸을 법도 한데, 당 비서가 김 씨를 도둑으로 몰아가며 희생양을 삼으려 했다. 그는 당 비서와 대판 싸우고 직장을 그만둔 뒤 함경남도 간호학교에 입학했다. 허리를 다쳤을 때 입원했던 병원이 그를 좋게 봐줘 추천 서류를 써준 것이다. 간호학교에 입학했지만 정작 가보니 학교에선 학업을 가르치는 시간보다 부업 밭으로 데리고 가서 농사일을 시키는 시간이 더 많았다. 개학한 지 몇 개월 되지도 않은 때 학교에서 각종 ‘과제’를 줘 집으로 보냈다. 과제란 식량, 휘발유, 경유, 약초를 구해오라는 따위였다. 방학 한 달을 주며 과제를 받고 집으로 왔지만 준비하기 만만치 않은 큰 부담이었다. 고민을 하던 어느 날 거리에서 중학교 선생 딸인 학교 동창을 만났다. 그를 보자 동창은 자기 집이 얼마 전에 중국의 친척 도움을 받았다며 “너도 엄마 친척이 중국에 있지 않냐”고 묻는 것이었다. 김 씨 모친은 중국 연고자였다. 옌지(연길)에 친척들이 살았다. 동창을 만난 뒤 김 씨는 중국 친척들에게 도와달라고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는 언니와 함께 여행증을 떼서 북중 세관이 있는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으로 향했다. 남양에 가니 숱한 사람들이 북중 다리 주변에 모여 있었다. 이들을 북한에서 ‘왜가리’라고 불렸다. 하루 종일 목을 빼고 중국에서 친척이 오나 바라본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다. 김 씨도 왜가리떼에 합류했다. 어렵게 연길에 사는 친척과 연락이 됐다. 그런데 그들은 여권에 한국에 다녀 온 기록이 있어 북한 세관에서 입국을 허용하지 않으니 지원물자를 갖고 올 수가 없다고 했다. 막연하게 기다리다가 갖고 온 돈도 다 떨어지게 되자 김 씨는 직접 강을 건너가 친척을 만나고 오자고 마음을 먹었다. 한 달 가까이 남양 세관 주변에 머물러 있으면서, 조기작업에 동원 다녀오면서 국경경비대 잠복초소가 어디에 있는지 하나하나 기억해두었다. 1998년 6월 26일 새벽 3시, 그는 언니에게 “내가 열흘 안에 오지 못하면 다시 함흥에 돌아가라”고 말하고 다짜고짜 두만강에 뛰어들었다. 그때만 해도 김 씨는 자신이 다섯 번이나 두만강을 넘게 될 줄 생각도 못했다.● 돈만 밝히는 국경경비대 남양 맞은편은 중국 도문이었다. 그는 중국에서 첫 번째 만난 사람에게 친척을 찾도록 도와주면 후하게 사례를 하겠다며 도움을 요청했고, 오후 1시경 연길의 친척집에 도착했다. 그런데 믿고 찾아온 친척집은 그를 데리고 온 사람에게 차비만 겨우 줘서 돌려보냈다. 친척들이 모여 의논을 하고 북한으로 보낼 준비를 하느라 시일이 걸리다보니 언니와 약속한 열흘이 훌쩍 넘었다. 7월 중순까지 친척들이 모아준 것은 인민폐 400위안과 100리터 정도 부피의 중고 옷들, 사카린과 미원 등 조미료들이었다. 짐 보따리를 들고 그는 밤에 다시 두만강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강이 생각보다 깊었다. 한 번 넘어지니 보따리가 물에 둥둥 떠내려갔는데 그걸 놓치지 않겠다고 사투를 벌였다. 죽을 힘을 다해 북한 쪽에 도착하긴 했지만 보따리가 물에 푹 젖어 감당할 수 없는 무게가 됐다. 그는 강기슭에 기진맥진해 쓰러졌다. 어느새 국경경비대 군인 두 명이 나타나 총을 겨누었다. 군인들은 그를 잡자마자 돈부터 내놓으라고 했다. 김 씨는 여비 중에 남겼던 북한돈 250원을 주었다. 당시 장마당에서 빵 1개가 5원, 옥수수 국수 한 그릇이 10원을 했으니 적은 돈은 아니었다. 그 돈을 받고도 군인들은 그를 중대 막사로 끌고 갔다. 이번엔 중대장이 돈이 있느냐부터 물었다. 없다고 하자 그를 비 내리는 부대 마당 한쪽에 세워두고 그의 짐을 뒤지기 시작했다. 한참 뒤 다시 끌려 들어가니 갖고 온 짐의 3분의 1이 사라졌다. 돈 되겠다고 생각한 것들을 빼돌린 것이다. 이후 그는 몸수색을 당했는데 속옷 혼솔까지 샅샅이 뒤지며 돈을 찾아내려 하는 모습을 보며 23년 동안 살면서 최대의 수치심을 느꼈다. 그 과정을 끝내고 그는 대대로 이송됐다. 같은 과정이 반복됐다. 이번에도 짐이 대거 사라져 3분의 1 정도만 남았다. 대대 본부로 가니 밤새 강을 넘다 걸린 사람이 그를 포함해 3명이었다. 국경경비대에서는 이들을 온성 보위부로 이송했다. 남양에서 온성군 보위부로 가는 길은 수십 리나 됐는데 군인 두 명이 이들의 호송을 담당했다. 가는 길에 한 군인이 이들에게 말했다. “돈 꽁꽁 숨겨둔 것 있으면 이제라도 꺼내놓는 게 좋아요. 어차피 보위부에 가면 다 뺏기게 돼 있어요.” 김 씨도 그의 말이 맞다고 판단했다. 그가 갖고 온 인민폐 400위안은 아직 3분의 1만 남은 짐 속에 기적적으로 숨겨져 있었다. 중국에서 떠나기 전 그는 돈을 어떻게 숨길까를 고민하다가 중고 옷 중에서 가장 빼앗기지 않을 것 같은 허름한 옷 속에 교묘하게 숨기고 바느질을 했던 것이다. 그는 호송 군인에게 가만히 속삭였다. “내가 인민폐 400위안이 있는데 이걸 보관해주면 절반을 드릴게요. 어차피 나는 중국에 며칠 있지도 않았고, 스스로 돌아왔기에 크게 처벌을 받지 않을 거예요.” 군인의 안색이 밝아졌다. 어차피 400위안을 그가 혼자 가질 수는 없었다. 김 씨가 고발하면 그도 처벌을 받게 되기 때문에 공모자가 되는 것이 가장 이득이었다. 200위안만 가져도 군인은 빵 1000개는 넘게 사먹을 수 있었다. 군인은 “보위부에서 나오면 남양 아무개 집에 와서 나를 찾으라”고 하고는 동행한 일행들이 모르게 옷을 뜯어 돈을 감추었다. 보위부에 들어가니 몽둥이부터 날아왔다. 돈도 없이 왔다니 보위원이 더 화가 난 듯 보였다. 매를 맞아 피를 흘리는 와중에도 김 씨는 남은 짐을 뒤지는 보위원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국경경비대 중대에서 빼먹고, 대대에서 빼먹고 남은 제일 한심한 옷이 보위원 차지가 됐기 때문이었다. 보위부에선 남은 짐까지 몽땅 빼앗았다. 마침 김 씨에겐 운도 따랐다. 며칠 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있어 보위부에선 중죄라고 판단되지 않으면 투표를 하라고 내보냈던 것이다. 김 씨는 중국에 친척 도움을 받으러 갔던 것이 확실하고, 며칠 머물지도 않았다. 자기 발로 북한에 다시 돌아왔으니 보위부에선 감옥에 보낼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보위부에서 나오자마자 그는 군인이 알려준 집을 찾아갔다. 군인은 약속을 지켰다. 200위안을 넘겨주더니 자기 몫은 장마당에 가서 북한돈으로 바꿔달라고 했다. 군인이 중국돈을 바꾸면 의심을 받기 때문이다. 돈을 바꾸어 넘겨주자 군인은 싱긋 웃으며 “앞으로 중국 넘어갈 일이 있으면 나를 찾으라”는 말을 남기고 헤어졌다.● 악어와 임팔라의 추격전 김 씨는 보위부에 끌려들어간 순간부터 석방되면 꼭 중국에 다시 가겠다고 결심했다. “힘들게 갖고 간 짐을 빼앗기지 않았다면 저는 탈북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먹을 것도 주지도 않으면서, 힘들게 중국에서 도움을 받아 자기 발로 조국이라고 돌아갔는데 강도떼처럼 달라붙어 뜯어내고 때리고 수치심을 주니 사람이 눈이 돌아가더군요. 이런 나라를 위해 내가 지금까지 충성을 바치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너무나 억울했습니다.” 한국에 온 탈북민 중에는 김 씨처럼 안전부나 보위부 때문에 원한을 품고 북한을 뜬 사람이 정말 많다. 그런 측면에서 북한 보위부는 체제를 보위하는 것이 아니라, 체제에 등을 돌리는 사람을 만드는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 씨는 다시 무작정 강을 넘었다. 남양 세관 쪽에 왜가리들이 머물러 있다면, 두만강 건너편엔 먹이가 다가오길 기다리는 악어처럼 인신매매범들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두만강 옆을 순찰하듯 돌아다니기도 하고, 밤중에 누가 건너오나 쌍안경으로 감시하기도 한다. 여성이 넘어오는 것이 보이면 접근해 강제로, 또는 유혹해서 내륙에 팔아먹는다. 중국에 아는 사람이 없으면 이런 인신매매범을 통해서라도 팔려가려는 탈북여성들이 많았다. 그게 북한에서 굶어죽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도강 때는 첫 번째보다는 요령이 생겼다. 갈아입을 옷까지 준비해 강을 넘었다. 밤에 강을 건너 옷을 갈아입고 도문 시내로 접근하는데 한 중년 남자가 “어이, 처녀. 조선에서 넘어왔지”라며 불렀다. 둘 사이 거리를 따져보니 도망치면 따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냅다 뛰었는데, 중년 남자가 죽을힘을 다해 따라왔다. 북한 여성 한 명을 팔면 최소 수천 위안이고, 젊은 여성은 더 비쌌다. 남자에겐 1년 공장에서 벌 돈보다 더 많이 벌 수 있는 기회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속도전청년돌격대에서 하루에 110리씩 걸어 다니던 통계원이었다. 새벽 도문 거리에선 악어와 임팔라의 추격전을 연상케 하는 질주가 벌어졌다. 추격전은 김 씨의 예상대로 끝났다. 2~3㎞쯤 헐레벌떡 따라오던 중년 남자는 마침내 포기했다. 김 씨는 도문 시내 시장 골목 사이를 달려 처음 왔을 때 강을 넘는데 도움을 줬던 집에 무사히 도착했다.● 당간부의 지시로 집을 뺏기다 중국에 살기로 마음먹은 김 씨는 친척집에 머물며 재봉기로 바지 오버로크를 치는 일부터 시작했다. 바지 하나를 완성하면 인민폐 2위안이었다. 그런데 도무지 돈이 벌리지 않았다. 그는 식당에 나가 일했다. 그런데 한 식당에서 몇 달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북조선 여자인 것 같다는 의심을 받으면 깡패들이 나타나 떠보기 시작했다. 이들의 목적 역시 팔아먹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그는 도망을 쳤다. 양꼬치집, 순두부집 등등을 전전하다가 연길에선 도무지 살 수 없다고 판단해 2000년 대련으로 옮겨갔다. 2년 동안 번 돈으로 그는 중국 호구를 얻었다. 당시 중국에선 사망한 사람의 호구를 파는 일이 빈번했는데, 탈북자들은 그런 호구를 사서 신분을 세탁했다. 대련에서 그는 조선족으로 위장하고 식당에서 일했다. 이때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대기업 직원인 남편은 중국에 현장소장으로 파견돼 일했는데 조선족 통역이 한국말이 통하는 여성이 있는 식당이라며 그를 데리고 왔다. 남편은 그를 한참동안 조선족 여성으로 알았다. 둘 사이에 사랑의 감정이 싹트고 남자가 한국에 가서 나랑 결혼하자고 말하자 그는 그제야 자신이 탈북여성임을 고백했다. 그러자 남자는 며칠간 침묵하다가 갑자기 한국으로 돌아갔다. 남자는 따로 생각이 있었지만, 김 씨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탈북 여성이라서 도망간 것이라고 오해하기도 했다. 이때 북한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김 씨에게 날아들었다. 그는 고향에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가서 살 생각은 없지만 아버지 묘는 꼭 가보고 싶었고, 아버지 장례를 도와준 사람들에게 사례를 하고 싶었다. 그는 중국에서 모은 돈과 애인이 돌아가기 전에 한국행 준비에 쓰라고 준 돈을 포함해 5000달러를 갖고 연길을 거쳐 다시 밤에 두만강을 넘었다. 이번엔 돈이 있으니 군인을 매수할 능력이 됐다. 함흥에 나타나니 당장 보위부와 안전부 등에서 그를 찾아와 조사를 했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이번에도 체포되진 않았다. 당시 김정일이 “고난의 행군 시기에 먹고 살기 어려워 탈북했다가 제 발로 돌아온 사람은 처벌하지 마라”는 지시를 하달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지시의 유효기간은 몇 년밖에 되진 않았다. 김 씨의 경우엔 두만강을 넘어와 체포된 것도 아니고, 제 발로 함흥까지 돌아왔으니 더 처벌할 근거가 없었다. 보위부나 안전부는 그가 돈을 얼마 갖고 왔는지에만 관심이 있었다. 김 씨는 고향에서 3개월을 머물렀다. 원래 그렇게 오래 머물 생각은 없었는데, 그가 없어진 뒤 가족들이 사망신고를 해 공민증이 말소됐다. 공민증이 없으니 여행증을 뗄 수 없었고, 여행증이 없으면 북중 국경 쪽으로 다시 갈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3개월이 지루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제 떠나면 다시 돌아올 것 같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가족과 있는 시간이 아깝지는 않았다. 있는 동안 그는 큰 집을 사서 이사했다. 기존에 살던 집은 결혼한 언니에게 주고, 자신이 떠난 뒤에 가족이 살 집을 따로 산 것이다. 집을 사는데 든 돈은 북한돈 10만 원인데 달러로는 300달러 정도였다. 그가 갖고 간 5000달러는 함흥에서 괜찮은 집 20채를 살 돈이었다. 이사를 한 다음날 그가 어디에 갔다가 돌아오니 온 가족이 집에서 쫓겨나 거리에 나앉아 있었다. 알고 보니 시당 간부의 지시로 딴 사람이 들어온 것이다. 김 씨는 그 집을 사서 입사증 명의까지 변경했지만, 당 간부의 지시 하나로 집 산 돈도 찾지 못하고 빼앗긴 것이었다. 항의를 해봤지만 시당 간부부에선 “당의 방침에 따라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건데, 어디 중국에서 벌어온 돈으로 감히 까부냐”는 식의 태도를 보였다. 김 씨는 중앙당 조직부 신소과(민원 담당 부서)에 편지를 썼다. 편지를 보낸 뒤 바로 중국으로 떠났다. 그 땅에 더욱 환멸이 났다.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라 국경경비대는 돈만 주면 지옥까지도 데려다 줄 기세였다.● 정착 보름 만에 올린 결혼식 중국에 도착한 날 그는 한국에 돌아간 애인에게 전화를 했다. 이러이런 고생을 겪었고 지금 국경을 넘었다는 말과 함께 당신이 너무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남자도 심경을 고백했다. “사실 처음에 너무 겁이 났다. 나는 북한 여자가 내 아내가 될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결국 내가 이 여자를 지켜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으로 돌아가 당신을 데려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려 했다. 그런데 이내 연락이 끊겼다. 못 만나는 줄 알았다. 어디서든 살아있어 주기만을 간절히 바랬다. 연락이 되지 않을 때 나는 당신의 본명도, 어디 출신인지도 묻지 않았던 것이 너무 후회가 됐다. 이제 왔으니 됐다. 내가 내일 중국에 들어가겠다.” 약속대로 남자는 다음날 대련에 날아왔다. 요즘은 한국에 사는 탈북민이 적지 않고, 관련 프로그램도 많아 탈북여성은 더 이상 낯선 사람이 아니지만, 2002년만 해도 한국 사람이 북한 사람과 결혼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때 중국에서 만난 탈북 여성을 아내로 삼기로 결심한 김 씨의 남편은 탈북여성과 결혼한 수많은 한국 남성들의 원조쯤 된다고 할 수 있다. 한국으로 갈 방법을 찾고 있던 중 김 씨는 공안에 체포됐다. 누군가 그를 북한에서 온 여자라고 신고한 것이다. 그는 공안 구류장에 50일이나 잡혀 있었다. 하지만 애인과 친척, 친구들의 노력으로 북송은 되지 않았다. 공안국에서 풀려난 그는 위조여권을 사서 베이징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태국으로 갔다. 한국으로 가는 것보다는 태국으로 가는 것이 검사가 많이 느슨했기 때문이다. 태국에 도착한 그는 한국대사관을 찾아갔고, 2003년 2월 마침내 한국에 도착했다. 조사를 마치고 하나원을 나오니 5월이 됐다. 그는 남자와 결혼식부터 올렸다. 하나원을 나와 보름 만에 결혼식을 한 사람은 김 씨가 유일할 것이다. 그때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한국 정착 초기 그는 간호조무사학원을 다닌 뒤 병원에 취직했다. 한편으론 남편과 약속한 시어머니와 목욕탕을 다니는 며느리 역할도 충실히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고민도 생겼다. 가장 큰 고민은 애가 생기지 않는 것이었다. 병원에 가 보니 둘 다 이상이 없다고 하는데 몇 년이 돼도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스트레스를 받는 아내에게 남편은 늘 이렇게 말하며 달랬다. “나는 당신을 한국에 데려온 걸로 꿈을 이뤘으니 이제 더 욕심을 부리지 않을 거다. 애는 하늘이 점지하는 것이니 순리대로 따르자.” 결혼 초기 남편이 물었다. “이제 열심히 돈을 모아 집 사고 빚 갚으며 살거냐, 아니면 집이 없어도 하고 싶은 걸 하고 살거냐.” 김 씨는 서슴없이 후자를 택했다. 그는 임대주택에서 사는 지금도 집 욕심은 없다. 그렇다고 번 돈을 혼자만 다 쓰는 것도 아니다. 부부가 매년 500만 원 넘게 기부를 해온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남편은 북한 인권이나 유엔 아동에 관심이 있어 그곳에 기부하고, 김 씨는 여성 인권과 다문화 가정, 학교 장학재단에 기부한다. 남편의 소원인 부부 동반 여행도 꾸준히 하는데, 금요일 저녁이면 남편과 함께 국내 여행을 떠나는 게 일상이 됐다.● “손이 떨리는 날까지 봉사할게요” 김 씨가 사회복지학으로 박사까지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원에 있을 때 자원봉사자로 만난 두 살 위의 한 여성 때문이었다. “저는 그 언니를 만나 사랑한다는 것, 배려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어요. 자기 종교를 강요하지도 않고, 주변에 좋은 영향을 주고, 다른 사람들을 꿈꾸게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어요. 그래서 나도 저 언니를 롤모델로 삼아 사회복지 전문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김 씨가 만난 여인은 이민영 고려사이버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인데, 지금도 친자매처럼 지내고 있다. 어느 날 이 교수는 김 씨에게 자기 모교인 이화여대를 구경시켜주었다. 그때 김 씨는 이 대학에 입학해 배우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이화여대에는 학부 과정에 사회복지과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2008년 그리스도신학대(현 강서대)에 입학해 학부 과정을 마쳤다. 김 씨는 북한에서 학교를 다닐 때부터 공부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는 학부 과정을 4년 만에 마치고 2012년 이화여대 사회복지전문대학원에 입학하여 2015년 석사를 마쳤다. 2016년 석사과정 양옥경 지도교수의 권유로 박사과정에 등록해 2019년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박사 논문 제목은 ‘북한 이탈주민의 영국 이주생활 경험’이다. “2013년에 영국에 갔던 적이 있어요. 그곳에 수백 명의 탈북민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 명이라도 만나 왜 한국을 떠나 다시 제3국에서 살아가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었어요. 그런데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어요. 그때 결심했죠. 내가 꼭 영국에 다시 와서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고요.” 그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을 박사 논문으로 풀어냈다. 이번에는 영국에 날아가 30~40명의 탈북민을 심층 인터뷰했는데, 이는 탈북민의 시각으로 탈북민들의 ‘탈남’ 이후를 들여다본 최초의 시도라는 평가를 받았다. 박사학위 취득 후 북한인권정보센터(NKDB) 연구위원으로 일하면서 탈북민의 북한과 제3국에서의 인권침해 실태 조사 분석 및 기록, 대한민국에서의 경제활동 실태 조사 연구 등의 활동을 계속 진행했다. 그러다가 2021년 1월 경기서부하나센터 사무국장으로 취직했다. 그는 담당 지역인 경기도 부천, 광명, 시흥, 안양, 과천 등지를 돌아다니며 열심히 탈북민의 고충을 듣고 도왔다. 그리고 그해 8월 센터장으로 임명됐다. 한국에는 25개의 하나센터가 있는데 탈북민이 센터장이 된 것은 그가 처음이다. 그의 센터에는 9명이 근무하는데, 이중 4명이 탈북민이다. 김씨는 일하면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잘 살려고 한국까지 와서는 알코올, 마약, 도박에 빠지거나, 각종 범죄에 연루되어 정착을 포기한 탈북민이라고 했다. 그런 사람들을 수렁에서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이 그의 당면 목표다. 꿈꾸는 미래는 어떤 것이냐고 묻자 그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아주 간단해요. 일단 매일 최선을 다하고, 손이 떨리는 때까지 다른 사람을 도우며 모두 함께 미소 지으며 행복한 삶을 사는 게 인생 목표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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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행, 쇼핑 혜택 중심의 ‘삼성 iD NOMAD 카드’ 출시

    삼성카드가 알뜰한 여가 생활을 하려는 고객을 위해 ‘삼성 iD NOMAD 카드’를 출시했다. 여행과 쇼핑을 즐기는 고객들을 주로 겨냥해 설계했지만, 일상 곳곳에서도 실속 있는 적립 및 할인 혜택을 제공한다. ‘삼성 iD NOMAD 카드’는 여행, 여가, 면세점에서 건별 10만 원 이상 결제 시 2만 원 할인 기프트 서비스를 영역별로 1회씩 제공한다. 넉넉한 포인트 적립 혜택도 있다. 해외직구를 포함한 해외 가맹점 이용 건에는 2% 적립 혜택을 제공하며 항공, 여행, 골프, 백화점, 프리미엄아웃렛, 온라인쇼핑몰, 할인점, 면세점을 이용할 때는 1% 적립 혜택을, 그외 가맹점 이용 건에는 0.5%의 적립 혜택을 제공한다. 포인트 적립 혜택은 전월 실적과 상관없다. 넷플릭스, 유튜브 프리미엄, 티빙, 왓챠 등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와 네이버 플러스 멤버십 정기 결제 시 50% 할인 혜택을 월 5000원까지 제공한다. 또 쉐이크쉑과 써브웨이 30% 할인 혜택을 월 1만 원까지 제공하며, 영화관에서 1만2000원 이상 결제 시 할인 혜택을 월 5000원까지 제공한다. 일상 할인 혜택은 전월 실적 50만 원 이상을 충족할 경우 제공된다. ‘삼성 iD NOMAD 카드’의 연회비는 국내 전용 4만7000원, 해외 겸용(마스터) 4만9000원이다. 삼성카드 관계자는 “새로 출시한 ‘삼성 iD NOMAD 카드’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삼성 iD 카드’ 라인업을 지속적으로 추가해 고객들의 다양한 취향을 만족시킬 계획”이라고 밝혔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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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친일파가 창작한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

    대북제재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돈줄이 말라버린 김정은이 북한 사정이 어려워진 원인을 간부들의 정신력 탓으로 돌리며 채찍질하자, 문화예술 관련 간부들도 고민이 깊었던 듯하다. 이럴 때는 모범적인 간부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를 만들어야 하지만 지금은 영화 한 편 찍을 능력도 없다. 그래서 찾은 답이 과거의 인기 영화를 재방영하는 것이다. 문제는 김정은이 수시로 사람들을 처형하다 보니 영화에서 지워야 할 얼굴이 적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마침내 답을 찾은 듯 보인다. 올해 초 방영된 6부작 예술영화 ‘대홍단 책임비서’를 보니 주연배우 얼굴이 컴퓨터그래픽으로 수정돼 다른 배우로 바뀌었다. 1997년에 제작된 이 영화는 대홍단군 당책임비서가 어려운 고난들을 연이어 극복하면서 충성한다는 내용이다. 이 영화에는 장성택의 조카사위인 공훈배우 최웅철이 출연했다. 장성택보다 먼저 처형된 최웅철은 1990년대 가장 유명한 배우였다. 1년에 영화 몇 편 만들지 못하던 시기에 최웅철은 무려 25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최웅철의 얼굴을 지우지 못하면 옛날 선전영화의 상당수를 사장시켜야 한다. 노동당 선전선동부에는 기록영화에서 얼굴을 지우는 작업을 하는 기술팀만 100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앞으로 영화까지 재작업하려면 훨씬 더 많은 인원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컴퓨터그래픽이라도 쓰니 다행이지, 과거엔 배우가 처형되면 영화를 아예 다시 찍었다. 대표적으로 1970년대를 대표하는 미녀배우였던 우인희가 1980년 김정일의 지시로 공개 처형된 이후 그가 출연한 ‘첫 무장대오에서 있은 이야기’ ‘적후의 진달래’ 등 많은 영화가 여주인공이 바뀌어 다시 촬영됐다. ‘반동’의 얼굴을 바꾸는 데 성공한 문화예술 담당 간부들은 지난주 ‘영화예술론’이라는 김정일의 노작(勞作) 발표 50주년 기념보고회를 크게 열었다. 김정일이 31세 때 썼다는 이 저서는 지금까지도 북한에서 인류 영화사의 한 획을 그은 독창적이고 천재적인 저서라고 추앙받고 있다. 영화예술론이 발표된 지 반세기가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북한의 영화는 이 책에서 지시한 대로 제작해야 한다. 참고로 김정일은 각종 노작이란 것을 수없이 남겼는데, 예술분야만 봐도 ‘연극예술에 대하여’ ‘무용예술론’ ‘음악예술론’ ‘건축예술론’ ‘미술론’ ‘주체문학론’ 등 참견하지 않은 곳이 없다. 영화예술론이 발표됐던 시기는 김정일이 ‘피바다’ ‘꽃파는 처녀’ 등 5대 혁명가극과 5대 혁명연극을 창작한다며 바빴던 때였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 가극들의 실제 창작 책임자는 친일인사로 알려진 조명암이었다. ‘낙화유수’ ‘꿈꾸는 백마강’ 등 광복 전에만 700여 곡의 가사를 쓴 조명암은 천재적인 작사가이자 극작가, 연출가였지만 1940년대 들어 ‘아들의 혈서’ ‘지원병의 어머니’ ‘결사대의 처’ 등 군국가요를 대거 창작했다. 지금까지 확인된 노골적인 군국가요 중 3분의 2가 조명암의 가사라고 하니 그는 진심으로 친일을 했던 듯싶다. 이랬던 조명암은 1948년 월북해 조령출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면서 북한에서 숱한 작품을 남겼다. 항일 빨치산이 나오는 북한의 대표적 혁명가극이나 영화들이 알고 보면 일본군을 칭송하던 친일인사 조명암이 제작한 것이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조명암은 공로를 인정받아 김일성 상과 각종 고위 관직을 받았고 1993년 사망한 이후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주체사상 관련 저서들을 사실상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써줬음을 감안할 때 김정일이 썼다는 영화나 연극, 무용 등의 저서도 누군가 대신 써줬을 것인데 조명암이 써줬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김정일은 영화예술론에서 주체니 혁명이니 온갖 미사여구를 늘어 놓았지만, 정작 본인은 전혀 그에 맞지 않게 살았던 위선자였다. 서울에서 성장한 성혜림과 일본에서 온 고용희에게 빠졌던 이유도 북한에서 사상 교육을 받고 성장한 여인들과는 대화가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김정일이 열심히 가르쳤다는 북한의 예술은 지금 영화도 제대로 못 만드는 처지에 빠졌고, 설사 만들어도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맛본 인민에게 재미가 없어 외면 받는다. 이런 처지에서도 반세기 전 발표된 케케묵은 책을 추앙하고 교본으로 삼으니, 마치 거세된 환관이 다산(多産)의 기쁨을 노래하는 광경을 보는 듯한 괴이한 기분이 든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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