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25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푸른 조명이 비치는 무대 바닥에 아기 관객 15명이 엄마, 아빠와 함께 둘러앉았다. 막이 오르자 한 아기가 무대 중앙을 향해 온 힘을 다해, 그러나 아장아장 걸어갔다. 곳곳에 흩어진 황금빛 돌을 조막만 한 손으로 쥐기 위해서였다. 다른 아이들도 속속 부모 품을 벗어났다. 아기들은 두 팔과 다리를 사용해 무대를 마음껏 다니면서 ‘처음 만난’ 세상을 탐험했다.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이는 울음을 쉽게 그치지 않았지만 따가운 시선을 보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날 스페인 극단 엥그루나 테아트르의 공연 ‘내가 처음 만난 우주’엔 생애 처음 공연장을 찾았을 만 0∼24개월 아기들과 보호자들만이 관객으로 참여했다. 이 연극은 관객인 아기들이 무대에 올라 다채로운 빛과 소리, 사물을 느끼고 배우와 상호작용하도록 연출됐다. 공연을 완성하는 건 때론 울고 칭얼대면서 무대를 만드는 아기들이다. 국제아동청소년연극협회가 주최하는 ‘제33회 아시테지 국제여름축제’ 프로그램 중 하나다.이날 생후 16개월 된 딸, 남편과 함께 극장을 찾은 주수미 씨(35)는 “문화센터 놀이 프로그램은 반응이 바람직한지에 따라 아이의 행동을 통제하려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오늘 공연은 부모도 아이도 편안하고 자유롭게 즐길 수 있어 좋았다”며 “무대에서 아이들이 환히 웃는 모습 자체가 작품이었다”고 말했다. 박하얀 씨(44)는 “평소 여섯 걸음밖에 못 걷는 아이가 오늘은 훨씬 많이 걸어 다녀 놀랐다. 공연이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덕인 듯하다”고 했다.40분 길이의 공연은 대사 하나 없이 아기들의 호기심과 감각을 자극했다. 배우들은 입으로 작은 소리를 내거나 노래하면서 공을 굴리고, 끈을 찰랑이게 만들었다. 이 작품을 연출한 미레이아 페르난데스 씨는 “성인 관객과 달리 아기는 서사를 이해하지 못하고, 다 같이 한곳을 바라보게 만드는 데도 어려움이 있다”며 “공연을 ‘보기’보다는 각자 탐험하면서 자기만의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고 했다.최근까지도 국내엔 영아 대상 공연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아동 대상 공연도 관람 가능 연령을 만 3세 이상으로 제한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처음 만난 우주’의 이번 축제 공연 4개 회차는 개막 한 달도 더 전에 전석이 매진됐다. 방지영 국제아동청소년연극협회 이사장은 “영아 공연은 공간적 제약과 안전 우려 탓에 관객 수를 무작정 늘릴 수 없는데, 그에 비해 작품을 개발하고 무대 장치와 소품을 섬세하게 만드는 비용은 커서 수익을 내기 어려운 구조”라며 “하지만 유럽은 정부, 지방자치단체의 지원 덕에 영아 공연이 활성화돼 있다”고 했다.아직 미미하지만 최근엔 국내에서도 공공단체를 중심으로 영아들에게도 문을 여는 공연이 하나둘 생겨나는 추세다. 앞서 5월 광주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는 만 3세 이하 영유아를 위해 국립극단과 공동 개발한 공연 2편의 막이 올랐다. 경기문화재단은 이달 30일까지 수원 경기상상캠퍼스에서 제1회 ‘경기 아기공연예술 페스티벌’을 개최한다. 이 축제는 일본 극단 ‘야마노 온가쿠샤’의 연극 ‘숲속에서’를 비롯해 만 0∼36개월 영유아를 위한 공연과 강연 등으로 구성됐다.한 연극계 관계자는 “영유아와 가족이 자유롭게 문화예술을 즐기며 함께 성장해야 한다는 인식이 수년 전부터 확산하면서 작품 개발이 시작된 만큼 앞으로는 관련 공연이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25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푸른 조명이 비치는 무대 바닥에 아기 관객 15명이 엄마, 아빠와 함께 둘러앉았다. 막이 오르자 한 아기가 무대 중앙을 향해 온 힘을 다해, 그러나 아장아장 걸어갔다. 곳곳에 흩어진 황금빛 돌을 조막만 한 손으로 쥐기 위해서였다. 다른 아이들도 속속 부모 품을 벗어났다. 아기들은 두 팔과 다리를 사용해 무대를 마음껏 다니면서 ‘처음 만난’ 세상을 탐험했다.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이는 울음을 쉽게 그치지 않았지만 따가운 시선을 보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이날 스페인 극단 엥그루나 테아트르의 공연 ‘내가 처음 만난 우주’엔 생애 처음 공연장을 찾았을 만 0~24개월 아기들과 보호자들만이 관객으로 참여했다. 이 연극은 관객인 아기들이 무대에 올라 다채로운 빛과 소리, 사물을 느끼고 배우와 상호작용하도록 연출됐다. 공연을 완성하는 건 때론 울고, 칭얼대면서 무대를 만드는 아기들이다. 국제아동청소년연극협회가 주최하는 ‘제33회 아시테지 국제여름축제’ 프로그램 중 하나다.이날 생후 16개월 된 딸, 남편과 함께 극장을 찾은 주수미 씨(35)는 “문화센터 놀이 프로그램은 반응이 바람직한지에 따라 아이의 행동을 통제하려는 경향이 있는 반면 오늘 공연은 부모도 아이도 편안하고 자유롭게 즐길 수 있어 좋았다”며 “무대에서 아이들이 환히 웃는 모습 자체가 작품이었다”고 말했다. 박하얀 씨(44)는 “평소 여섯 걸음밖에 못 걷는 아이가 오늘은 훨씬 많이 걸어 다녀 놀랐다. 공연이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덕인 듯하다”고 했다.40분 길이의 공연은 대사 하나 없이 아기들의 호기심과 감각을 자극했다. 배우들은 입으로 작은 소리를 내거나 노래하면서 공을 굴리고, 끈을 찰랑이게 만들었다. 이 작품을 연출한 미레이아 페르난데즈 씨는 “성인 관객과 달리 아기는 서사를 이해하지 못하고, 다 같이 한곳을 바라보게 만드는 데도 어려움이 있다”며 “공연을 ‘보기’보다는 각자 탐험하면서 자기만의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고 했다.최근까지도 국내엔 영아 대상 공연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아동 대상 공연도 관람 가능 연령을 만 3세 이상으로 제한하는게 보통이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처음 만난 우주’의 이번 축제 공연 4개 회차는 개막 한 달도 더 전에 전석이 매진됐다. 방지영 국제아동청소년연극협회 이사장은 “영아 공연은 공간적 제약과 안전 우려 탓에 관객 수를 무작정 늘릴 수 없는데, 그에 비해 작품을 개발하고 무대 장치와 소품을 섬세하게 만드는 비용은 커서 수익을 내기 어려운 구조”라며 “하지만 유럽은 정부, 지방자치단체의 지원 덕에 영아 공연이 활성화됐돼 있다”고 했다.아직 미미하지만 최근엔 국내에서도 공공단체를 중심으로 영아들에게도 문을 여는 공연이 하나둘 생겨나는 추세다. 앞서 5월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는 만 3세 이하 영유아를 위해 국립극단과 공동 개발한 공연 2편의 막이 올랐다. 경기문화재단은 이달 30일까지 수원 경기상상캠퍼스에서 제1회 ‘경기 아기공연예술 페스티벌’을 개최한다. 이 축제는 일본 극단 ‘야마노 온가쿠샤’의 연극 ‘숲속에서’를 비롯해 만 0~36개월 영유아를 위한 공연과 강연 등으로 구성됐다.한 연극계 관계자는 “영유아와 가족이 자유롭게 문화예술을 즐기며 함께 성장해야 한다는 인식이 수년 전부터 확산하면서 작품 개발이 시작된 만큼 앞으로는 관련 공연이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일본의 유명 정치인과 전직 배우 부부가 간밤에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집에 불이 난 상태였고 동반 자살로 보였다. 그러나 부검 결과는 ‘화재 질식사로 위장한 교살’. 호흡기관에선 연기 입자가 검출되지 않았고 둘 다에게서 목 졸린 흔적이 발견됐다.그런데 그 자살 위장조차 어쩐지 일부러 들키도록 허술하게 설계된 듯하다. 찝찝해하던 수사본부에 자신이 범인이라고 주장하는 협박 편지가 도착한다. 내용은 이렇다. ‘내 동기는 단순 명쾌하다. 세상을 속이고, 인간으로서 용서받지 못할 행위를 계속해 온 두 사람에게 제재를 가했다.’담당 형사 고다이 쓰토무는 곧장 범인을 쫓기 시작한다. 하지만 수사할수록 정체도, 범행 동기도 의문투성이라 마치 유령을 쫓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범인은 마치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듯한 가공범(架空犯) 같다.데뷔 40주년을 맞은 세계적인 추리 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가 신작을 펴냈다. 1985년 첫 소설 ‘방과 후’를 낸 뒤 ‘용의자 X의 헌신’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등 대표작을 포함해 무려 100편 넘는 책을 쓴 베스트셀러 작가. 국내에도 팬층이 두꺼운 추리소설의 대가답게 서사는 속도감과 몰입감 있게 전개된다.소설은 성실하고 예민한 고다이 형사의 시선에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저자의 전작인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에 등장하는 천재 물리학자 등과 비교하면 범인(凡人)에 가깝다. 예측 불허하고 기발한 추론으로 수사를 휘어잡지는 않는다. 고다이 형사는 양파 껍질을 한 꺼풀씩 벗겨내듯 사건에 얽힌 수많은 인물을 차례로 조사하면서 서서히 수사망을 좁혀 나간다.‘천재형’ 캐릭터가 아니기에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은 더 복잡하고 세밀하다. 용의자들이 무심코 쓰는 어휘의 차이나 값비싼 찻잔을 식기세척기에 넣은 사소한 행동 등에서 어렵사리 하나둘 실마리를 찾아 나간다. “가려운 곳에 손이 닿지 않는 것처럼 답답함만 쌓여 갔다”는 고다이 형사의 심경이 독자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가공범’은 작가의 여느 책과 마찬가지로, 반전을 거듭하는 서사 덕에 손에서 책을 놓기 어렵다. 여기에 간결한 문체, 섬세한 심리 묘사가 긴장감과 몰입감을 배가한다. “방금까지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던 부부의 얼굴이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굳었다”, “히라쓰카 원장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다이가 한 말의 의미를 곱씹는 듯하더니 이윽고 자글자글한 주름으로 감싸인 눈을 부릅떴다” 등의 문장은 진짜 범인이 누구일지 종잡을 수 없게 만든다.다만 반전이 지나치게 반복되는 부분은 누군가에겐 작위적이고 지루하게 읽힐 수도 있다. 반전 장치로 마련된 복잡다단한 인간사도 여러 드라마에서 봤던 것 같은 기시감을 풍긴다. 소설 중후반은 진범과 동조자의 범행 동기에 초점이 맞춰지는데, 가해 사실이 ‘인간적’으로 묘사되는 느낌도 없지 않다.히가시노 작가는 지난해 11월 일본 현지에서 이 책을 출간하면서 “이 소재를 작품으로 쓸 날은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성실한 고다이 쓰토무를 주인공으로 한 새로운 시리즈의 시작이란 점에서 팬들에게는 반갑지만, 전작들과 비교해 반전의 충격이나 신선도는 좀 무뎌진 느낌도 든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1936년 독일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손기정 선수(1912∼2002). 그는 우승 부상인 ‘그리스 청동 투구’(보물)를 꼬박 50년 뒤에야 받았다. 1986년 독일에서 열린 올림픽 50주년 기념행사였다. 당시 손 선수는 “금메달을 두 번 받는 기분이다. 하나는 당시의 금메달이요, 또 한번은 오늘 이 청동 투구”라고 소회를 밝혔다. 그가 뒤늦게 받았던 청동 투구는 기원전 6세기 그리스 코린토스에서 제작됐다. 올림픽 제전 때 승리를 기원하면서 신에게 바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졌다. 오묘한 청록빛, 잘록하게 들어갔다가 유연하게 빠지는 모양새 등이 예사롭지 않다. 베를린 올림픽 당시 그리스의 한 신문사가 마라톤 우승자를 위한 부상으로 내놓았으나 손 선수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손 선수는 수십 년 뒤 투구를 받고서 “1976년 동아일보의 (투구 이야기) 보도를 본 재독 교포 노수웅 씨가 베를린 박물관들을 뒤진 끝에 찾아내 알려준 덕분에 반환 노력을 할 수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청동 투구를 25일 개막하는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두 발로 세계를 제패하다’에서 다시 한번 만날 수 있다. 광복 80주년을 맞아 마련된 이번 전시에선 손기정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는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과 월계관, 우승을 보도한 미국 뉴욕타임스(NYT) 등 18건이 전시된다. 박물관 측은 “금메달과 월계관, 우승 상장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2011년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 기념 특별전 이후 14년 만”이라고 설명했다. 광복을 9년 앞둔 1936년 8월 15일, 손 선수가 한 외국인에게 ‘Korean 손긔졍’이라고 서명해 줬던 엽서도 처음 공개된다. 스포츠 관련 유물을 수집하는 허진도 씨가 1970년대 유럽의 한 경매에서 낙찰받은 엽서다. 권혜은 학예연구사는 “손 선수의 자서전에 따르면 손 선수는 자신이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임을 세계에 알리고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외국 사람들에게 한글로 서명을 해줬다”고 했다. 전시는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일장기를 달고 달려야 했으나 조국을 품고 시상대에 올랐던 손 선수와 그 이후 세계 무대에서 활약한 우리 마라톤 선수들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손 선수는 1947년 제51회 미국 보스턴 마라톤대회에는 태극기를 달고 감독으로 참가했다. 이 대회에서 세계기록을 세운 서윤복 선수(1923∼2017)에게 “너는 조국을 위해 달릴 수 있다는 자긍심이 있다”고 격려한 이야기도 유명하다. 전시에선 그의 이런 여정을 인공지능(AI) 기술로 재현한 영상도 만나볼 수 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K컬처의 뿌리와 저력을 보여줄 수 있는 세계 순회전 ‘한국 미술 5000년’을 2, 3년 내로 선보이겠습니다.” 21일 취임한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76·사진)이 24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취임 사흘 만에 간담회를 열고 “국립중앙박물관은 세계 속 우리 문화와 역사의 위상을 드높이라는 시대적 요구 앞에 놓였다”며 이러한 포부를 밝혔다. 유 관장은 “박물관이 2005년 용산으로 옮겨 개관했을 때만 해도 연간 관람객 ‘100만’이 꿈의 숫자였다”며 “하지만 지난해 400만 명을 넘기면서 세계 10대 박물관들과 견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박물관이 국민에게 우리 문화를 향한 자부심을 심어주는 동시에, 세계적인 명작을 만날 수 있게 하는 곳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향후 박물관 운영의 주요 과제로는 상설 기획전의 ‘레벌 업’을 꼽았다. 유 관장은 “주차시설과 식당 등을 확충하는 것도 시급하다”고 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K컬처의 뿌리와 저력을 보여줄 수 있는 세계 순회전 ‘한국 미술 5000년’을 2, 3년 내로 선보이겠습니다.”21일 취임한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76)이 24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취임 사흘 만에 간담회를 열고 “국립중앙박물관은 세계 속 우리 문화와 역사의 위상을 드높이라는 시대적 요구 앞에 놓였다”며 이러한 포부를 밝혔다.유 관장은 “박물관이 2005년 용산으로 옮겨 개관했을 때만 해도 연간 관람객 ‘100만’이 꿈의 숫자였다”며 “하지만 지난해 400만 명을 넘기면서 세계 10대 박물관들과 견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박물관이 국민에게 우리 문화를 향한 자부심을 심어주는 동시에, 세계적인 명작을 만날 수 있게 하는 곳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향후 박물관 운영의 주요 과제로는 상설 기획전의 ‘레벌 업’을 꼽았다. 유 관장은 “주차 시설과 식당 등을 확충하는 것도 시급하다”고 했다. 현재 무료인 상설 전시의 유료화는 “당장은 어렵지만 어느 시점에 다다르면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로 널리 알려진 유 관장은 명지대 석좌교수, 문화재청장(현 국가유산청장),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 등을 지냈다. 유 관장은 “그동안 글로 독자들을 만났는데, 앞으로는 유물로 이야기하는 전시로 국민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우엽진주산(雨葉眞珠散). ‘비 맞은 연잎에 진주가 흩어진다….’ 창덕궁 후원 연못가의 ‘애련정(愛蓮亭)’ 기둥엔 이런 글귀가 걸려 있어요. 평생 연꽃을 사랑했던 숙종 때에 지어진 정자인데, 여기서 바라본 여름 풍경은 일품이지요.” 22일 서울 종로구 창덕궁. 해설사의 설명을 듣자, 머릿속에서 시원한 빗방울이 알알이 흩어졌다. 등줄기를 볶아대던 더위가 싹 가시는 듯했다. 우리나라 궁궐이나 왕릉, 종묘 등에 가면 쉽게 마주치는 풍경이 있다. 뙤약볕이나 추운 날씨에도 열정 넘치게 설명하는 ‘해설사’들이다. 특히 한국 문화가 낯선 외국인에겐 더없이 소중한 존재들. 창덕궁에서 20년 넘게 우리 역사와 문화를 알려온 성현희, 천대중 궁궐 해설사를 만나봤다. 두 사람이 마이크를 잡은 횟수는 어림잡아도 5000번을 훌쩍 넘는다고 한다. 창덕궁은 경복궁과 더불어 국빈이 가장 많이 찾는 곳. 성 해설사와 천 해설사는 각자 유창한 일본어, 중국어를 무기로 외국 정상 및 장관 등을 상대해 왔다. 이들의 유려한 해설에 시간을 1분 단위로 쪼개 쓰는 국빈들도 귀를 쫑긋 기울인다. 천 해설사는 특히 2014년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부인인 펑리위안(彭麗媛) 여사가 방문했던 때가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는 “예정된 일정을 10여 분 늦추면서까지 해설을 다 듣고 가셨다”며 “보통 국빈들은 말을 아끼는데, 악수를 청하며 ‘정말 좋았다’ 하셨던 것이 떠오른다”고 했다. 궁궐에서의 시간은 해설사들의 한마디에 분위기가 바뀐다. ‘창덕궁 달빛기행’은 봄가을 티케팅 전쟁이 벌어지는 인기 프로그램. 하지만 짙은 구름이 달을 가리는 날이면 곳곳에서 아쉬운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럴 때면 천 해설사는 밤하늘 대신 인정전의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를 가리킨다.“달 모양, 담장 등 궁궐에 숨은 달의 개수를 함께 세어요. 관람객의 경험은 결국 해설사 입에 달렸지요. 창덕궁에 방문하기 가장 좋은 때를 물으실 땐 언제나 ‘오늘’이라고 말씀드립니다.” 그렇다고 해설사를 ‘말주변’으로 버티는 직업으로 여기면 곤란하다. 프로그램 기획부터 자료 조사, 시나리오 작성, 홍보물 번역·감수까지 도맡는다. 1830년대 창덕궁을 기록한 국보 ‘동궐도(東闕圖)’에 그려진 나무 4000그루에 얽힌 궁중 문화를 설명하는 ‘동궐도와 함께하는 창덕궁 나무 답사’는 바로 성 해설사가 기획과 진행 등을 맡은 스테디셀러다.“조선 궁궐 중에 경관림을 가장 잘 간직한 곳이란 점에 착안했습니다. 더 깊이 있는 해설을 위해 숲 해설사 국가전문자격증도 땄어요. 최근엔 관련 대학 강의도 듣고 있습니다.” 요즘은 K콘텐츠 열풍 덕에 외국인 관광객이 부쩍 늘어났다. 특히 휴대전화를 들고 실시간 인공지능(AI)을 돌려 해설의 ‘사실 여부’를 검증하는 이들이 많다. 천 해설사는 “내가 말하는 한마디 한마디에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현장에 있어 보면, (외국인들이) 한국 문화에 대한 호기심도 커졌지만, 동시에 시샘 역시 늘어난 걸 느껴요. 예컨대 온돌을 설명할 땐 일본 다다미나 중국식 온돌과 다르게 발전한 지리적, 문화적 배경을 정확하게 설명해야 합니다. 덕분에 평일 밤이나 주말에도 논문이나 자료에 ‘파묻혀’ 살고 있어요.” 1년 365일 고생스러운 일이건만 해설사들을 지탱하는 버팀목은 뭘까. 두 사람은 조선 정조 때 창덕궁 규장각의 초대 검서관(檢書官)이던 실학자 이덕무(1741∼1793)를 거론했다. 책을 너무 사랑해 ‘간서치(看書癡·책만 읽는 바보)’라 불렸던 인물이다.“규장각에 가면 책을 마음껏 읽을 줄 알았더니, 필사하고 자료 찾으며 격무에 시달리느라 이덕무가 슬퍼했다는 야사(野史)가 있습니다. 쏟아지는 논문들 읽느라 가족에게 핀잔을 듣기도 해요. 하지만 열 번 해설해서 한 번이라도 관람객들 마음에 닿을 수 있다면 그것만큼 기쁜 일이 어디 있을까요, 허허.”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호주에 사는 ‘정자(亭子)새’의 서식지는 짝짓기 철마다 터널 형태 구조물로 가득해진다. 둥지가 아니다. 그 정체는 “수컷의 자기과시 쇼룸”이다. 수컷의 타고난 생김새가 ‘암컷의 선택을 받기 불리하게’ 생겼기에 자신을 치장하고 매력을 뽐내는 대신에 자기 공간을 예쁘고 화려하게 장식한다고 한다. 해양수산부 산하 한국해양과학기술원 부설기관인 극지연구소(KOPRI) 선임연구원이 야생동물 이야기를 밀도 높게 담아낸 책이다. 자신을 ‘야외생물학자’ ‘동물행동학자’로 소개하는 저자는 주요 연구 주제인 조류를 중심으로 각종 야생동물의 행동을 관찰하고 분석한 일을 썼다. 동물의 짝짓기, 먹이 활동 등 생존 방식부터 인지 능력, 감정 표현 등 소통 방식까지 두루 살폈다. 그러다 보니 책은 풍부한 자료를 토대로 한 지식백과에 가깝다.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진화’다. 추운 지역에 사는 북극곰과 저위도 따뜻한 지역의 불곰은 유전적으로 매우 가깝지만 몸집 차이는 상당하다. 수컷 기준으로 북극곰의 무게는 불곰의 2배 이상이다. 저자는 체구가 큰 동물은 열 손실이 적다는 ‘베르그만의 법칙’을 언급하며 “북극곰이 추위에 유리하도록 진화했다”고 설명했다. 다종다양한 동물의 신비한 의사소통 방식을 소개한 대목이 특히 흥미롭다. 코끼리는 초저주파로 소리를 내는 것 말고도 지표면을 따라 전달되는 진동으로도 소통한다. 발바닥과 코끝에 있는 진동 감지 수용체를 통해 미세한 진동을 감지할 수 있다. 이는 “단지 유전적으로 결정된 기계적 행동이 아니라, 발달 과정에서 서로 사회적 영향을 주고받으며 형성된 것”이라는 가설이 최근 학계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한다. 오늘날 동물의 생존을 위협하는 기후 위기도 현장감 있게 다뤘다. 지구온난화로 녹아내린 빙하가 펭귄에게 미치는 영향은 인간이 느끼는 이상으로 훨씬 직접적이고 파괴적이다. 바다로 향하는 길에 떨어진 빙산 조각은 길을 막고, 바다 쪽으로 부는 바람도 막는다. “때문에 펭귄은 새끼에게 줄 먹이를 제대로 구하지 못해 그해 번식은 거의 실패하게 되고, 둥지에는 굶어 죽은 새끼들로 넘쳐난다”는 대목은 절로 가슴이 아린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모두가 ‘한국 무대에 서고 싶다’고 했어요. 이 발레 갈라(gala) 공연을 기획한 보람이 정말 컸습니다.”이달 30일부터 다음 달 1일까지 사흘간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파리 오페라 발레 에투알 갈라 2025’에서 무대 총괄을 맡은 박세은 씨(36)는 17일 서면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밝혔다. 박 씨는 동양인 최초로 세계 정상급 발레단인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에투알(수석무용수)에 올랐으며, 2022년과 지난해에도 갈라 내한 무대를 총괄했다.박 씨가 이번 무대에 캐스팅한 무용수 중에는 발레리노 마티외 가니오(41)도 있다. 가니오는 ‘21세기 파리 오페라 발레의 상징’이라 불리는 에투알이다. 올 3월 ‘오네긴’을 끝으로 파리 오페라 발레단에서 은퇴한 뒤 첫 해외 공연이다. 한국 방문이 처음인 가니오는 “오래전부터 한국에 가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방문하게 돼 기쁘다”고 했다. 가니오는 이번 무대에서 ‘소나타’ ‘인더나이트’ 등의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그는 “같은 2인무라고 해도 ‘인더나이트’는 형식미에 기반한 절제된 감정이라면, ‘소나타’는 보다 직접적이고 생생한 감각에 가까운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무대는 에투알 10명이 출연하는 전례 없는 규모로 펼쳐진다. 박 씨도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 등으로 무대에 오른다. “제가 처음 입단했을 때만 해도 ‘동양인 무용수’에 대한 시선이 조심스러웠는데, 지금은 후배들이 자기만의 색으로 무대를 채우고 분명한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어요. 앞으로도 더 많은 한국인 무용수들이 파리에서, 또 세계에서 빛날 거라 믿어요.”(박 씨)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세계적으로 K콘텐츠가 인기를 모으며 국가 이미지도 크게 제고된 점이 (이번 선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최재헌 건국대 세계유산학과 교수) 부산이 내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개최 도시로 최종 선정됐다. 한국의 세계유산위 개최는 1988년 ‘세계유산협약’에 가입한 지 38년 만에 처음이다. 세계유산위는 15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가진 회의에서 “내년 7월 예정된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개최지로 한국의 부산을 선정한다”고 발표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회의는 세계 문화유산 분야에서 가장 주목받는 연례 행사다. 1972년 체결된 세계유산협약에 따라 196개 협약당사국이 선출한 21개 위원국의 대표단이 모인다. 세계유산 등재와 보존·보호 등 사항을 결정하는 자리로, 개최국은 위원회 안건을 조정하고 발언권을 부여하는 등 회의 전반을 이끄는 역할을 한다. 우리나라의 17번째 세계유산이 된 울산 ‘반구천의 암각화’도 앞선 12일 파리에서 열린 제47차 세계유산위 회의에서 최종 등재됐다. 아시아권에서는 태국 푸껫(1994년)과 일본 교토(1998년), 중국 쑤저우(2004년) 등에서 열린 적 있다. 참석자들에 따르면 파리 현장에선 유력 후보인 부산과 경쟁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고 한다. 지난해부터 한국을 지지하는 국가들이 적지 않았으며, 베트남 등 일부 국가는 우리나라를 의식해 도전 의사를 자발적으로 철회한 것으로 전해졌다. 국가유산청의 송인헌 세계유산정책과장은 “우리나라가 갖춘 국제회의 인프라와 도시 접근성 등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며 “오드레 아줄레 유네스코 사무총장은 사흘 전에 직접 한국 대표단을 찾아 부산 개최에 대한 기대와 지지를 표명했다”고 전했다. 세계유산위 개최지는 문화유산계에서의 입지나 실질적인 개최 역량 등을 두루 따져 정해진다. 비정부기구(NGO), 학계 전문가 등 전 세계 문화유산 관계자 약 3000명이 모이는 자리인 만큼 상당한 비용과 노하우도 요구되기 때문이다. 원래 올해 개최지도 불가리아였으나 예산 부족 등의 문제로 인해 파리 유네스코 본부로 바뀐 것으로 알려졌다. 한 문화유산계 관계자는 “세계유산위를 한 번 여는 데 최소 100억 원 이상 든다고 한다”며 “우리나라는 중국, 일본에 비해 위원국으로 늦게 선출된 데다 그간 예산 확보가 쉽지 않아 기회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세계유산위 개최는 단순히 문화유산 분야를 넘어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인정받는다는 의미도 상당하다. 김지현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정책팀장은 “이전 개최국 가운데 회의 진행 역량이나 물리적 여건이 미흡했던 전례들이 있어 개최 도시를 정할 때 국가 신뢰도를 매우 중요시한다”며 “한국이 유네스코에서 활발히 활동하면서 신뢰를 쌓았기 때문에 이번 선정에서도 환영받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세계적으로 K콘텐츠가 인기를 모으며 국가 이미지도 크게 제고된 점이 (이번 선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최재헌 건국대 세계유산학과 교수)부산이 내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개최 도시로 최종 선정됐다. 한국의 세계유산위 개최는 1988년 ‘세계유산협약’에 가입한 지 38년 만에 처음이다.세계유산위는 15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가진 회의에서 “내년 7월 예정된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개최지로 한국의 부산을 선정한다”고 발표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회의는 세계 문화유산 분야에서 가장 주목받는 연례 행사다. 1972년 체결된 세계유산협약에 따라 196개 협약당사국이 선출한 21개 위원국의 대표단이 모인다. 세계유산 등재와 보존·보호 등 사항을 결정하는 자리로, 개최국은 위원회 안건을 조정하고 발언권을 부여하는 등 회의 전반을 이끄는 역할을 한다.우리나라의 17번째 세계유산이 된 울산 ‘반구천의 암각화’도 앞선 12일 파리에서 열린 제47차 세계유산위 회의에서 최종 등재됐다. 아시아권에서는 태국 푸켓(1994년)과 일본 교토(1998년), 중국 쑤저우(2004년) 등에서 열린 적 있다. 참석자들에 따르면 파리 현장에선 유력 후보인 부산과 경쟁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고 한다. 지난해부터 한국을 지지하는 국가들이 적지 않았으며, 베트남 등 일부 국가는 우리나라를 의식해 도전 의사를 자발적으로 철회한 것으로 전해졌다. 국가유산청의 송인헌 세계유산정책과장은 “우리나라가 갖춘 국제회의 인프라와 도시 접근성 등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며 “오드레 아줄레 유네스코 사무총장은 사흘 전에 직접 한국 대표단을 찾아 부산 개최에 대한 기대와 지지를 표명했다”고 전했다. 세계유산위 개최지는 문화유산 계에서의 입지나 실질적인 개최 역량 등을 두루 따져 정해진다. 비정부기구(NGO), 학계 전문가 등 전 세계 문화유산 관계자 약 3000명이 모이는 자리인 만큼 상당한 비용과 노하우도 요구되기 때문이다. 원래 올해 개최지도 불가리아였으나 예산 부족 등의 문제로 인해 파리 유네스코 본부로 바뀐 것으로 알려졌다. 한 문화유산계 관계자는 “세계유산위를 한 번 여는 데 최소 100억 원 이상 든다고 한다”며 “우리나라는 중국, 일본에 비해 위원국으로 늦게 선출된 데다, 그간 예산 확보가 쉽지 않아 기회가 없었다”고 설명했다.세계유산위 개최는 단순히 문화유산 분야를 넘어 국제 사회에서 영향력을 인정받는다는 의미도 상당하다. 김지현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정책팀장은 “이전 개최국 가운데 회의 진행 역량이나 물리적 여건이 미흡했던 전례들이 있어 개최 도시를 정할 때 국가 신뢰도를 매우 중요시한다”며 “한국이 유네스코에서 활발히 활동하면서 신뢰를 쌓았기 때문에 이번 선정에서도 환영받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불교의례인 ‘봉은사 생전예수재(生前豫修齋·사진)’가 국가무형유산이 됐다.국가유산청은 “봉은사 생전예수재를 국가무형유산 신규 종목으로 지정하고, 사단법인 ‘생전예수재보존회’를 그 보유 단체로 인정한다”고 15일 밝혔다.생전예수재란 살아 있는 사람이 사후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불교의례다. 유산청은 “봉은사 생전예수재는 우리나라 세시풍속을 체계적으로 기록한 ‘동국세시기’에 19세기 중반 윤달의 대표적 풍습으로 나와 있다”며 “그 역사성과 대표성이 확인돼 국가무형유산으로 최종 지정했다”고 설명했다.생전예수재보존회는 서울 강남구 봉은사를 포함해 서울에 있는 사찰 5곳이 2017년 발족한 단체다. 재를 이끌어 나가는 연행 능력 등 봉은사 생전예수재 전승에 필요한 기량과 전승 의지 등을 두루 갖췄다고 평가됐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조선 왕실 건축에서 신성한 공간을 장식했던 최고급 쪽빛 도배지, ‘청능화지(靑菱花紙)’가 종묘 정전에서 발견됐다. 지금까지 실물이 확인된 청능화지 중 제작 시기가 가장 이른 편에 속해 향후 왕실의 도배 및 실내장식 문화 복원에 중요 자료가 될 것으로 평가된다. 국립문화유산연구원(연구원)은 서울 종묘 정전 보수공사 중이던 2022년 8월 반자(전통건축에서 천장을 평평하게 만든 구조물) 윗부분에서 수습한 도배지가 청능화지인 것을 최근 파악했다고 15일 밝혔다. 연구원의 손명희 복원기술연구실장은 “겹쳐 있던 도배지를 분리하는 과정에서 연꽃무늬, 만(卍) 자 무늬가 선명히 새겨진 푸른 도배지가 드러났다”며 “종묘에 청능화지가 쓰였다는 건 지금까지 ‘승정원일기’ 등 문헌 기록으로만 전해졌으나, 그 실체가 처음 입증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사 결과 이 청능화지는 당시 어람용 의궤에 사용된 최고급지인 초주지(草注紙)와 유사한 두께와 품질을 갖춘 것으로 나타났다. 청능화지는 앞서도 경복궁 향원정과 창경궁 숭문당에서 드물게 실물이 확인된 바 있지만 이번에 종묘에서 발견된 청능화지는 그보다 시기가 200년 이상 앞선다. 향원정은 19세기 말 세워졌고, 숭문당도 불타 19세기 재건됐다. 그러나 이번에 종묘 정전 제4실에서 확인된 청능화지의 경우 조선 인조, 현종 대에 해당하는 1630∼1670년대 제작된 것으로 분석됐다.당대 최고급 종이를 쪽빛으로 곱게 물들이고 문양을 찍어 만든 청능화지는 조선 중기까지 신성하고 위계 높은 건물에만 사용됐다. 서양식 제지 기술이 도입된 20세기 이전까진 매우 귀한 실내장식 재료로 여겨졌다. 특히 궁궐에서 도배지는 건물의 위상과 관련이 깊다. 격이 높은 공간일수록 여러 겹을 덧발랐고, 청능화지처럼 문양이 그려진 장식지로 마감했다. 능화문(菱花紋)은 마름모꼴로 서로 연결돼 끊어지지 않는 형태로, 풍요와 길상(吉上)함을 상징한다. 연구원에 따르면 15, 16세기에는 연화문(蓮花紋), 보상화문(寶相華紋) 등 불교와 관련된 문양이 주를 이뤘고, 17세기엔 보문(寶紋), 당초문(唐草紋) 등으로 다양해졌다. 18세기 들어서는 문양지로 실내를 장식하는 문화가 민간에 확산했고, 청능화지도 함께 퍼져 나갔다. 유교적 가치관을 가진 조선이 고급 도배지를 절제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음에도 종묘에 화려하고 값비싼 청능화지가 사용된 까닭은 무엇일까. 김지원 학예연구원은 “역대 왕과 왕비의 제례를 올리는 공간이라 하늘과 재생 등을 의미하는 연화문 청능화지를 사용한 것으로 본다”고 분석했다. 이지영 서울대 조형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실내 문양에 불교 관념을 표현하던 고려시대 장식 관습이 유교적 예치(禮治)의 공간으로 전이된 것”이라고 봤다. 도배지가 문화유산으로 주목받은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김 연구원은 “일제강점기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궁궐 도배지 양식은 간소화되거나 서양식을 따르게 됐고, 지금까지 전해지는 실물이 거의 없다”며 “소모품으로 여겨져 중요성이 과소평가된 탓에 고건축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보존이 안 되고 버려지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정선화 학예연구사는 “도배지는 과거 지류 및 안료의 종류와 역사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 자료”라며 “서울 문묘에서도 최근 유사한 종류의 청능화지가 확인돼 앞으로 비교 연구가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우리나라가 내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개최국으로 최종 선정됐다.15일(현지 시간) 세계유산위원회는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회의를 열고 “내년 7월 예정된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개최지로 한국의 부산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우리나라에서 세계유산위원회가 열리는 것은 처음으로, 1988년 세계유산협약에 가입한 지 38년 만이다.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1972년 체결된 ‘세계유산협약’에 따라 세계유산 등재와 보존, 보호에 관련된 사항을 결정하고자 매년 개최된다. 협약국 196개 대표단과 유네스코 사무총장, 학계 전문가 등 전 세계 문화유산 관계자 약 3000명이 모인다. 아시아권 국가로는 1994년 태국 푸켓에서 개최된 이후 일본 교토(1998년), 중국 쑤저우(2004년) 등에서 열렸다.앞서 정부는 올해 공모 절차를 거쳐 개최 후보지로 부산을 확정했다. 추후 선출되는 세계유산위원회 의장단은 위원회 기간 동안 회의 일정, 의사 진행을 확정하고 업무를 조정하는 등 임무를 맡게 된다. 이달 세계유산 목록에 이름을 올린 울산 ‘반구천의 암각화’ 최종 등재 여부도 이 회의를 통해 결정됐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7말, 8초만 기다리고 있어요.” 최근 영화계 관계자들은 이달 말부터 다음 달 초까지를 올해 ‘극장가 부활’ 여부가 걸린 가장 중요한 시점으로 보고 있다. 이재명 정부가 이달 중으로 영화 할인 쿠폰을 발급하기로 하면서, 하반기 영화관 관람객 회복에 계기가 마련되길 바라는 기대감이 반영된 것이다. 하지만 구조적인 변화 없는 한시적 처방만으론 그 효과가 오래가지 않을 것이란 의견이 팽배하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전국 영화관에서는 이달 25일(예정)부터 10월 31일까지 입장료 할인 지원 사업이 시행될 방침이다. 앞서 기획재정부는 새 정부 추가경정예산(추경)안에 270억 원을 반영해 영화관 할인 쿠폰 450만 장을 공급하기로 했다. 해당 정책의 핵심은 쿠폰을 이용해 영화관 입장료를 회당 6000원 할인하는 것. 극장 티켓값에 부담을 느끼는 관객들이 많아지자 정부가 관람 장벽을 낮추기 위해 시행한 조치로 풀이된다. 주말 기준 2014년 1인당 1만 원이었던 티켓값은 2022년 1만5000원까지 올라갔다. ‘일회성 정책’임에도 영화계는 반기는 분위기다. 한 독립·예술영화관 관계자는 “목이 말라 죽으려고 하니 겨우 물 한 모금 떠먹여 주는 것과 같다”면서도 “우선 살아야 다음을 도모하니 지금으로선 절실한 정책”이라고 했다. 황재현 CGV 전략지원담당도 “일회성으로 보일 순 있지만, 이번 추경은 소비심리가 위축된 상황에서 영화 관람을 다시 활성화시킬 중요한 마중물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본질적인 체질 개선 없이는 ‘일시적 반등’에 그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문화예술계에선 장기적으로 관객 수를 회복하기 위해선 구조적 개편이 불가피하다는 목소리가 크다. 그중 하나로 언급되는 것이 영화관 공간 활용에 대한 패러다임 전환이다. 이대영 중앙대 예술대학원장은 “영화관이라는 하드웨어가 갖고 있는 잠재력은 크다”며 “영화인과 게임 개발자, 스토리텔러 등이 모여 다양한 융·복합 매체를 새롭게 만들어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또 근본적으로 상영하는 작품들의 질 자체를 높여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현재 ‘극장 살리기’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는 옛 영화의 재개봉이나 콘서트 실황 및 스포츠 중계 등은 일시적인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은 “결국 본질은 영화에 있다”며 “대작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중저예산의 활기찬 영화들을 기획·제작하는 등 중장기적인 변화를 이끌어야 영화계도 산업의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한반도 선사시대 문화의 정수가 담긴 ‘반구천의 암각화’가 12일(현지 시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반구천의 암각화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래사냥 그림이 담긴 국보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와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를 아우른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약 6000년에 걸쳐 이어진 암각화 전통을 증명하는 독보적 증거”라고 평했다. 이로써 한국이 보유한 세계유산은 17건으로 늘어났다. 북한의 ‘금강산’도 13일 세계유산에 등재됐다.》12일(현지 시간) 등재된 우리나라 ‘반구천의 암각화’에 이어 백두산과 함께 ‘한반도를 대표하는 명산’으로 여겨지는 북한의 금강산(사진)도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됐다. 13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47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금강산(Mt. Kumgang-Diamond Mountain from the Sea)’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최종 등재됐다. 북한이 등재를 신청한 지 약 4년 만이다. 이로써 북한은 ‘고구려 고분군’(2004년)과 ‘개성역사유적지구’(2013년)에 이어 세계유산이 3개로 늘어났다. 세계유산위원회는 “독특한 지형과 경관, 불교 역사와 전통 등이 얽혀 있는 문화적 경관으로서 가치가 크다”고 평가했다. 앞서 올 4월 백두산의 북한 영토는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등재됐다. 금강산은 해발 1638m의 최고봉인 비로봉을 중심으로 강원 고성군과 금강군, 통천군 등에 걸쳐 있다. 위치에 따라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으로 나뉜다. 다양한 생물 종이 서식해 자연의 보고로도 꼽힌다. 계절별로 바뀌는 산수와 기암괴석, 폭포 등이 어우러진 풍광 덕에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물론이고 주변 나라에서도 큰 사랑을 받아왔다.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1676∼1759)은 비로봉을 중심으로 만폭동 계곡, 기암괴석 등의 절경을 국보 ‘정선 필 금강전도’로 남겼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주말 저녁이던 이달 6일 오후 6시경. 서울 도심 중심가에 있는 롯데시네마 에비뉴엘점은 한산하다 못해 허전했다. 이날 예매율 1위인 ‘쥬라기 월드: 새로운 시작’ 상영 10분 전임에도 입장 관객은 마흔 명 남짓했다. 영화계 극성수기로 꼽히는 7월에 들어선 분위기를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최근 상당한 입소문을 타고 있다는 영화 ‘F1 더 무비’조차 개봉 3주째 누적 관객 수가 130만 명(12일 기준)에 그치고 있다. 심각한 불황에 빠진 국내 극장가가 좀처럼 회복세를 되찾지 못하고 있다. 올 상반기 영화관 총 관객 수는 4200만 명대. 팬데믹 시기(2020, 2021년)를 제외하면 21년 만에 최저치다. 이에 영화계의 심리적 마지노선인 ‘연 관객 1억 명’도 무너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업계 2, 3위 기업이 합병을 추진하는 등 극장가에선 피 말리는 ‘생존 게임’이 시작되고 있다. 하지만 신규 투자가 불확실한 데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의 파급력은 갈수록 커져 분위기를 반전할 타개책이 보이지 않는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공연시장 절반으로 줄어든 영화시장 13일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영화관을 찾은 관객 수는 총 4249만여 명이다. 2004년 상반기(약 2182만 명) 이후 최악의 성적이다. 앞서 국내 영화 관람객은 2013년부터 2019년까지 7년 연속 2억 명을 넘었다가 팬데믹 영향이 심각했던 2020∼2021년 평균 6000만 명으로 줄었다. 그러다 2022년 1억1280만 명으로 회복한 뒤 3년 연속 1억 명을 넘겼다. 하지만 올해 이런 흐름이 하반기까지 이어진다면 다시 1억 명 아래로 떨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극장가에선 이런 하락세의 주요 원인으로 ‘천만 영화’의 부재를 꼽는다. 팬데믹 이후 국내 영화산업이 지지부진하긴 했지만, 흥행작은 꾸준히 있어 왔다. 2022년에는 ‘범죄도시2’와 ‘아바타: 물의 길’이, 2023년엔 ‘범죄도시3’ ‘서울의 봄’이 1000만 관객을 모았다. 지난해에도 상반기에만 ‘범죄도시4’와 ‘파묘’가 각각 11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유치했다. 하지만 올 상반기는 가장 ‘잘나간’ 영화들조차 300만 명 수준에 머물렀다.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상반기 1∼3위 영화는 ‘야당’(337만 명)과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336만 명), ‘미키17’(301만 명)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중박’ 정도로 취급되던 숫자다. 이에 상반기 영화시장 매출은 약 4079억 원에 그쳤다. 같은 시기 공연시장 매출액(7413억 원)의 약 55%로 절반을 겨우 넘는 수준이다.● 영화관 합병, 득일까 실일까 극장가의 위기는 업계 분위기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국내 영화관 시장 점유율 2, 3위인 롯데컬처웍스와 메가박스중앙이 합병을 추진하고 나선 것이다. 양 사는 올 5월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뒤, 2026년 2월까지 합작법인을 세워 대주주인 롯데쇼핑과 콘텐트리중앙이 공동 경영할 방침이다. 현재는 공정거래위원회가 양 사 합병 건에 대한 사전협의를 진행하고 있다. 사전협의란 정식 기업결합 신고 전 자료를 미리 제출해 공정위가 검토할 수 있도록 하는 절차. 합병이 성사되면 이들은 전국 1688개(921개+767개)의 스크린 수를 가진 거대 사업자가 된다. 산술적으론 현 시장 점유율 1위인 CGV(1329개)를 넘어선다. 하지만 영화계에선 이번 합병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뒤섞이고 있다. 한 영화투자사 관계자는 “합작법인을 통해 놀고 있는 상영관이 정리되고 극장가가 내실화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반면 또 다른 영화배급사 관계자는 “유통 창구가 하나라도 더 있는 게 기회적 측면에서 유리하다”며 “양강 구도가 되면 다양한 콘텐츠가 더 살아남기 힘든 구조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이번 합병이 극장가의 분위기 전환을 이끌긴 쉽지 않다는 전망도 나온다. 일단 신규 투자 유치가 어려울 것이란 예측이 상당하다. 양 사는 합작법인의 부채비율을 줄이고 운영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4000억 원 상당의 자금 조달을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여러 투자배급사 관계자들은 “영화산업 자체에 비관적이어서 선뜻 투자할 투자처가 있을지 회의적인 시각이 적지 않다”고 전했다. 합병을 하더라도 ‘영화관 정리’는 또 다른 난관이다. 점포들을 정리해 사업 효율성을 높여야 하는데, 일반적인 영화관은 10∼30년 단위로 장기 임대차 계약을 맺고 있다. 계약 해지 시 위약금 부담이 큰 데다 구조상 용도 변경도 어렵다. 롯데시네마는 전국 점포 중 1곳을 제외한 모든 곳이, 메가박스는 모든 점포가 임대차 계약을 맺고 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OTT의 약진에 대응할 전략이 부재하단 점이다. 방송통신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국내 OTT 이용률은 79.2%다. 국민 10명 가운데 8명이 OTT를 이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로 인해 국내 영화관 시장이 쪼그라든 상황에서 단순 합병만으론 지속적으로 생존을 보장하긴 어려운 구조란 분석이 나온다. 김용진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는 “이젠 영화관끼리가 아니라 OTT-영화관 경쟁으로 구도가 바뀌었다”며 “합작법인의 비즈니스 모델 자체가 바뀌지 않는 한 합병이 큰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국보 울산 반구천 암각화 ‘세계유산’에… 北 금강산도 등재한반도 선사시대 문화의 정수가 담긴 ‘반구천의 암각화’가 12일(현지 시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반구천의 암각화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래사냥 그림이 담긴 국보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와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를 아우른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약 6000년에 걸쳐 이어진 암각화 전통을 증명하는 독보적 증거”라고 평했다. 이로써 한국이 보유한 세계유산은 17건으로 늘어났다. 북한의 ‘금강산’도 13일 세계유산에 등재됐다.》10일 울산 울주군 대곡리 ‘반구대의 암각화’. 오후 4시경 강한 햇빛이 암벽으로 기울자 고래와 거북, 호랑이, 사슴 같은 그림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짧아도 3000년 전, 길게는 8000년 전에 선사시대 사람들이 새겨둔 예술작품. 망원경에 눈을 가까이 대자 활시위를 당기는 사람과 울타리에 갇힌 짐승 등이 마치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듯했다.“크고 작은 고래만 모두 57마리예요. 귀신고래, 혹등고래 등 종류를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정확하게 그렸죠.” 이날 함께 현장을 찾은 전호태 울산대 명예교수(사진)는 30년 넘게 반구대 암각화를 연구한 고대 벽화 전문가. 그에 따르면 높이 4.5m, 너비 8m 암벽에 새겨진 그림은 최대 353점에 이른다. “몸에 작살 꽂힌 고래와 카누 형태의 배도 보이나요? 먹고살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고래 사냥을 나갔던 당시 생활상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반구천의 암각화(Petroglyphs along the Bangucheon Stream)’가 12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47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반구천의 암각화는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와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를 아우르는 단일 유산이다. 세계유산위원회는 “탁월한 관찰력과 창의성을 바탕으로 고래, 고래잡이라는 희소한 주제를 풀어낸 걸작”이자 “수천 년에 걸쳐 이어진 암각화 전통을 증명하는 독보적 증거”라고 평가했다. 반구천의 암각화로서는 2010년 세계유산 잠정 목록에 오른 지 15년 만에 이룬 경사. 당시만 해도 허리께에 그쳤다던 일대 버드나무들이 이젠 수 m 높이로 무성히 자랐다. 18년간 해설사로 활동 중인 김모 씨는 “올 5월 세계유산 등재 권고를 받은 뒤 주말엔 하루 700명 가까이 몰려 숨 돌릴 틈조차 없다”며 웃었다. 또 다른 해설사 황모 씨는 “세계유산만 찾아다닌다는 외국인 관광객 등 해외에서 온 이들도 부쩍 늘었다”고 전했다.반구대 암각화에서 약 2km 떨어진 곳엔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가 있다. 자동차로 10분, 둘레길을 따라 걸으면 1시간 남짓 걸린다. 공룡 발자국이 찍힌 암반 근처에 있는 높이 약 2.7m, 너비 9.8m 바위엔 여러 기하무늬와 기마 인물, 암수 짝지은 동물 등이 600점 이상 빼곡하게 그려져 있다. 기마 인물은 4∼6세기 신라에 확산된 기마 문화와 관련 깊은 것으로 추정된다. 암석 아래쪽에 적힌 신라시대 명문(明文)도 사료적 가치가 높다. 525년 법흥왕의 동생인 사부지갈문왕과 어사추녀랑왕 일행이 ‘서석곡’(書石谷)이라고 이름 지었다는 기록 등이 남아 있다. 전 교수는 “신라 왕족과 화랑, 승려 등이 왕경 끝자락에 있는 이곳을 찾아 글을 남긴 건 특별한 신령스러움을 바랐기 때문일 수 있다”고 말했다. 반구천의 암각화가 세계유산에 등재되면서, 이처럼 정교하고 아름다운 그림과 풍광을 어떻게 잘 보존할 것인가도 숙제가 됐다. 세계유산위원회도 등재를 결정하며 “관리 체계에서 지역 공동체와 주민의 역할을 공식화할 것”을 권고했다. 전 교수는 “인적이 드물거나 접근이 제한된 세계 여타 암각화와 달리, 비교적 접근이 쉽다 보니 여러 차례 훼손된 적 있다”며 “노르웨이 알타 암각화 일대처럼 주민과 협의체를 결성해 상시적으로 관리할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반구천의 암각화가 등재되며 우리나라가 보유한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모두 17건으로 늘어났다. 1995년 ‘석굴암·불국사’ 등 3건이 등재된 것을 시작으로 ‘조선왕릉’(2009년), ‘가야고분군’(2023년)을 포함한 문화유산 15건, 자연유산 2건이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넘어 인류가 함께 지켜야 할 유산이 됐음을 진심으로 환영한다”며 “유산의 보존·관리 수준이 국제 기준에 부합하도록 하고 지역경제 기여 방안도 모색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댐이 물 가둬… 1년 중 38일 침수되는 세계유산1965년 댐 건설 후 큰비때 마다 잠겨수문 설치 계획… 식수원 해결이 과제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된 울산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래사냥’ 그림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곳곳에 남은 ‘숨은 그림’을 찾는 재미도 쏠쏠하다. 뾰족한 귀에 긴 꼬리를 가진 개, 떡 벌어진 몸통에 줄무늬가 그려진 호랑이, 눈코입이 뚜렷한 가면…. 하나씩 살펴보자면 ‘한반도 선사 문화의 정수’라는 수식어에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문제는 이 암각화가 1년 중 약 38일은 물에 잠기고 있다는 점이다. 2014년부터 10년간의 평균치다. 암각화가 발견되기 전인 1965년, 그림을 끼고 있는 대곡천 하류에 사연댐이 건설되면서 큰비가 올 때마다 상류까지 수위가 차오른다. 장마철마다 빗물에 떠내려온 오물은 물론이고 이끼와 이끼벌레까지 암벽을 뒤덮는다.이에 암각화 훼손은 꾸준히 심각한 문제로 제기돼 왔다. 2010년 세계유산 잠정 목록에 오른 뒤 등재까지 가장 발목을 잡은 것도 ‘보존 대책’이었다.세계유산위원회는 12일(현지 시간) ‘반구천의 암각화’ 최종 등재를 결정하면서도 한국에 “사연댐 공사의 진척 사항을 세계유산센터에 보고할 것”을 권고했다. 유산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개발 계획도 알리도록 했다.당국은 암각화의 훼손을 막기 위해 사연댐 수위를 조절할 목적으로 수문 3개를 설치할 방침이다. 국가유산청은 “현재 수문 설치에 관한 기본 및 실시 설계 용역이 진행 중이며, 이르면 내년 하반기 공사에 착수할 것”이라고 전했다.수문 3개의 예상 완공 시점은 2029년 말. 댐 하단에 폭 15m의 수문들이 만들어지면 일일 방류량은 기존 3만 t에서 4만9000t까지 늘어날 수 있다. 이럴 경우 연평균 침수일이 1일로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다만 사연댐 수위를 낮출 경우 부족해지는 울산의 식수원이 주요 해결 과제다. 최근 중앙정부가 수자원 확보 계획을 전면 재검토한다고 밝히면서 식수원 문제는 더 불투명해졌다. 울산시 관계자는 “대체 수자원을 공급받을 취수원이 하루빨리 선정돼야 한다”고 말했다.울산=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12일(현지 시간) 등재된 우리나라 ‘반구천의 암각화’에 이어 백두산과 함께 ‘한반도를 대표하는 명산’으로 여겨지는 북한의 금강산도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됐다.13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47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금강산(Mt. Kumgang - Diamond Mountain from the Sea)’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최종 등재됐다. 북한이 등재를 신청한 지 약 4년 만이다. 이로써 북한은 ‘고구려 고분군’(2004년)과 ‘개성역사유적지구’(2013년)에 이어 세계유산이 3개로 늘어났다.세계유산위원회는 “독특한 지형과 경관, 불교 역사와 전통 등이 얽혀 있는 문화적 경관으로서 가치가 크다”고 평가했다. 앞서 올 4월 백두산의 북한 영토는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등재됐다.금강산은 해발 1638m의 최고봉인 비로봉을 중심으로 강원 고성군과 금강군, 통천군 등에 걸쳐 있다. 위치에 따라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으로 나뉜다. 다양한 생물 종이 서식해 자연의 보고로도 꼽힌다.계절별로 바뀌는 산수와 기암괴석, 폭포 등이 어우러진 풍광 덕에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물론 주변 나라에서도 큰 사랑을 받아왔다.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1676∼1759)은 비로봉을 중심으로 만폭동 계곡, 기암괴석 등의 절경을 국보 ‘정선 필 금강전도’로 남겼다.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한반도 선사시대 문화의 정수가 담긴 울산 ‘반구천의 암각화’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됐다. 이로써 우리나라가 보유한 세계유산은 총 17건으로 늘었다.12일 국가유산청에 따르면 이날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47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반구천의 암각화는 “약 6000년에 걸쳐 이어진 암각화의 전통을 증명하는 독보적인 증거”라는 평가를 받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최종 등재됐다. 2010년 세계유산 잠정 목록에 등재된 지 15년 만이다.반구천의 암각화는 국보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와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를 아울러 가리킨다.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래사냥 그림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높이 약 4.5m, 너비 8m 암벽에 다양한 바다, 육지 동물과 사냥 장면이 새겨져 있다. 첩첩이 그려진 그림을 모두 세면 최대 353점에 이른다.대곡리 암각화로부터 약 2km 떨어진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에는 선사시대부터 신라시대에 이르는 여러 생활상이 담겼다. 높이 약 2.7m, 너비 9.8m 바위에 각종 기하무늬와 기마 인물, 동물 등 그림 620여 점이 새겨졌다. 신라 법흥왕 일가가 남긴 명문도 포함돼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세계유산위원회는 반구천의 암각화에 대해 “탁월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그려진 사실적인 그림과 독특한 구도가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들의 예술성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이어 “고래 및 고래잡이라는 희소한 주제를 선사인들의 창의성으로 풀어낸 걸작이자 동남부 연안 지역에서 발전한 문화의 집약체”라고 등재 이유를 설명했다.우리나라는 1995년 ‘석굴암·불국사’와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 등 3건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창덕궁’(1997년), ‘조선왕릉’(2009년), ‘가야고분군’(2023년) 등 17건을 목록에 올렸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