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애란

한애란 기자

동아일보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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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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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14~2026-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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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위는 넘치는데 세상은 왜 안 바뀔까?(feat. 과잉정치)[딥다이브]

    요즘 부쩍 전 세계가 시끌시끌합니다. 올봄 미국에선 ‘노 킹스(No Kings)’를 외치는 반트럼프 시위, 영국에선 ‘유나이트 더 킹덤(Unite the Kingdom)’을 외치는 반이민 시위가 벌어졌고요. 지난해 네팔·인도네시아·필리핀을 휩쓸었던 Z세대 시위는 올해 인도 ‘바퀴벌레당’으로 퍼졌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잠실 ‘개표소 시위’까지. 분노에 찬 시위의 물결이 곳곳에서 넘실대는데요.전 세계적으로 시민들의 정치 활동이 유난히 활발했던 지난 10년. 하지만 그 많았던 대규모 시위가 무엇을 남겼는지 따져보면 좀 애매합니다. 정치적 에너지는 넘치지만, 실질적 변화를 만들어내진 못하는 상황. 벨기에 역사학자 안톤 예거(Anton Jäger)는 이를 ‘하이퍼폴리틱스(Hyperpolitics)’, 즉 ‘과잉정치’라 칭하죠. 정치가 넘치는 과잉정치 시대를 들여다보겠습니다. (안톤 예거의 저서 ‘하이퍼폴리틱스’와 그의 칼럼·인터뷰, 그리고 관련 서평을 참고해 나름대로 정리해보았습니다.) *이 기사는 6월 10일(수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탈정치의 종말, 정치의 부활2000년대만 해도 선거철이면 으레 저조한 투표율을 걱정하는 기사가 나왔던 걸 기억합니다. 2008년 18대 총선은 투표율이 고작 46.1%로 역대 최저를 기록했었죠. 미국 역시 1990년대~2000년대 정치적 무관심이 극에 달했는데요. 시민들은 정치에 관심을 끄고 의사결정은 엘리트(기술관료)에 맡겨버리는, 이른바 ‘탈정치(Post-Politics)’의 시대였습니다.그런데 요즘은 어떤가요. 얼마 전 한국의 지방선거 투표율은 61%로 31년 만에 가장 높았고요(1995년 68.4% 이후 역대 2위). 1996년 51%까지 떨어졌던 미국의 대선 투표율은 2020년 66.6%, 2024년 64%로 역사적인 고공행진을 이어갑니다.대규모 정치적 시위는 점점 빈번해지고 있죠. 미국에선 2020년 조지 플로이드 사망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Black Lives Matter(흑인생명도 소중하다) 시위엔 역사상 최대 규모인 2600만명이 참여했고요. 올해 미국 전역에서 벌어진 ’노킹스‘ 시위엔 800만명이 동참했어요. 또 지난해 벌어진 미국 대학가의 친 팔레스타인 시위와 미국 각지에서 벌어진 이민 단속 반대 시위까지. 정치적 집회가 끊이지 않죠.무엇보다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암살 시도가 무려 세 번이나 있었습니다. 1981년 레이건 대통령 암살 시도 이후 40여 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죠. 그만큼 정치적으로 뜨거운 시기란 뜻입니다.이런 추세는 유럽도 마찬가지에요. 2014년 역대 최저(42.6%)로 떨어졌던 유럽의회 선거 투표율은 2024년 30년 만에 최고치(51%)를 기록했고요. 각종 시위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최근에도 스페인에선 주택난 항의 시위가, 영국에선 반이민 시위가 거세게 일었죠.정리하자면 탈정치는 종말을 맞았습니다. 죽은 줄로 알았던 정치가 다시 살아 돌아왔어요. 그것도 이전보다 한층 강해져서 말이죠. 안톤 예거에 따르면 최근 미국과 유럽의 ‘정치화(정치 참여 열기)’ 수준은 파시즘과 공산주의 대두로 혼란스러웠던 1930년대와 맞먹는 수준입니다. 시위의 규모와 빈도, 정치적 테러 시도, 투표율 같은 수치를 종합한 결과이죠. 이제 정치는 우리 생활 곳곳에 스며들었습니다. 모든 것이 정치화되고 있는 거죠. 어떤 브랜드를 소비하는지, 어떤 스포츠를 보는지, 심지어 영화나 드라마 캐스팅(PC주의 논란)에까지도 정치가 침투했어요. 문화도, 경제도 모두 정치의 영역이 된 겁니다.시위는 많은데 변화는 없다여기까지 보고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정치 참여 열기가 높아지면 좋은 거 아닌가? 그게 뭐가 문제지?네, 시민들이 다시 정치에 열을 올리는 것, 그 자체는 전혀 문제가 아닙니다. 무관심한 것보다는 훨씬 낫죠. 안톤 예거가 지적하는 건 지금의 정치화가 너무 허무하단 겁니다. 폭발적인 에너지에 비해 실질적으로 이뤄내는 게 별로 없기 때문인데요.앞에서 언급한 미국 역사상 최대 시위였던 2020년의 ‘Black Lives Matter(BLM)’를 볼까요. 이 운동은 요즘의 많은 시위가 그렇듯이 조직적인 리더가 따로 없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결집한 군중들이 주인공이었죠. 그들의 핵심 요구사항은 ‘경찰 예산 삭감’이었고요. 그래서 대대적인 시위 이후 어떤 성과가 있었을까요? 전혀요. 2021년 관련 법안은 상원에서 좌초됐고요. 삭감됐던 경찰서 예산은 바로 복원되거나 오히려 더 늘었습니다. 경찰 폭력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2022년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죠.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요. 수백, 수천만명이 모이긴 했지만 ‘조직적 기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소셜미디어 선동가가 시민들을 끌어모아 순식간에 거리를 점령하게 만들 수는 있죠. 하지만 정책을 바꾸는 건 길고 지루한 작업입니다. 지속적인 조직 없이는 그런 인내심을 발휘할 수가 없어요.SNS를 통해 폭발적으로 터져나왔지만 지속성은 없는 정치활동. 이건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는 공통 현상입니다. 예거는 인종 차별과 경찰 폭력에 항의한 미국 ‘BLM’ 시위와 2021년 국회의사당을 습격한 부정선거론자들이 조직 측면에서 보면 유사하다고 지적하죠. 지속 기간이 짧고, 회원 명부가 유지되지 않고, 지지자들이 규율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요. 그래서 성과는 미미하고, 결과는 공허합니다. 분노가 폭탄처럼 터지면서 연기만 자욱했을 뿐, 정작 기존 권력이 입은 실질적 타격은 거의 없죠.예거는 이를 ‘탈 제도화’ 현상과 맞물려 설명하는데요. 전 세계적으로 제도화된 참여, 즉 정당·노동조합·종교단체·시민단체 등에 회원으로 가입된 사람이 빠르게 줄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최저 수준이죠. 그 결과 온라인엔 정치적 표현이 넘치지만, 이를 제도의 틀로 끌어올 만한 연결고리는 매우 약해진 상황입니다. 이를 그래프로 표현하면 아래와 같죠.정치도 주식처럼 단타 치는 시대시민의 정치적 관심은 매우 활발하게 분출되지만, 이를 뒷받침할 조직적 기반은 극도로 취약한 상황. 이것이 ‘하이퍼폴리틱스(Hyperpolitics)’의 정의입니다. 번역하자면 ‘과잉 정치’쯤 되겠죠.소셜미디어가 이런 과잉정치의 토양이 됐다는 건 너무 당연한 분석입니다. 소셜미디어 덕분에 정치적 의사 표현에 드는 비용은 획기적으로 낮아졌죠. 굳이 정당에 가입하지 않고도 밈과 해시태그 공유만으로 정치활동을 할 수 있으니까요. 예거는 이러한 “낮은 헌신과 낮은 비용”이 하이퍼폴리틱스의 특징이라고 지적해요. 정치 참여의 문턱이 확 낮아진 대신, 언제든 팔로워를 취소하고 빠져나갈 수 있게 된 거죠. 당연히 인내심이 부족하고 지속기간이 짧을 수밖에 없는데요.이를 두고 예거는 개인의 정치 참여가 주식시장 투자자의 행동방식과 비슷해졌다는 분석도 내놨습니다. 꽤 그럴 듯한 비유인데요. “투자수익이 보장되지 않으면 즉시 자원을 회수하는” 주식 투자자처럼 정치 참여도 인내심 없이 단기에 그친다는 거죠. 그는 뉴욕타임스 칼럼에선 이렇게 표현했어요. “마치 정치 주식시장의 변동처럼, 투자자들은 주식을 사들이기 위해 몰려들지만 내일이면 다시 팔아치울 수도 있습니다.”영국 사회학자 윌리엄 데이비스도 비슷한 주장을 했는데요. “정치가 점점 더 온라인 현상이 되어가면서 과거 금융시장의 전유물이었던 거품, 폭락, 광풍에 똑같이 노출돼있다”는 설명입니다. 금세 뜨겁게 달아오르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식어버리고 다른 테마로 쉽게 정치적 관심이 옮겨가곤 하는 거죠.아마 지금까지의 분석에 동의한다면 이런 질문을 하게 될 겁니다. 그래서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정치가 달라질 수 있는데?사실 답은 이미 나와있죠. 온라인상의 일시적인 폭발을 넘어서는 지속 가능한 집단적 참여를 이끌어내야 합니다. 문제는 이제 와서 갑자기 사람들을 정당에 가입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그걸 어떻게 하느냐인데요.안톤 예거는 “일상생활 속 공통의 관심사”를 강조합니다. 거창한 대의명분이 아니라 보육·간병·주거처럼 매일 맞닥뜨리는 일상의 문제에서 출발해야만 의미 있는 참여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거죠. 에이, 너무 뻔한다고요? 그런데 그걸 아직 깨우치지 못한 정당과 정치인이 많은 듯한 건 왜일까요. By.딥다이브 *이 기사는 6월 10일(수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1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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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린 바퀴벌레다” 인도 Z세대, 토요일 광장에 집결한다[딥다이브]

    인도의 ‘바퀴벌레인민당(Cockroach Janta Party)’을 아시나요? 인도 청년의 좌절감을 풍자해 생겨난 가상정당이 순식간에 인도 Z세대를 끌어모으더니, 이제 조직을 갖추고 전국적인 청년운동으로 진화 중입니다. 이번주 토요일인 6월 6일엔 첫 거리 시위까지 예고했죠.단순한 온라인 밈이 거리 시위로 번지기까지 고작 20일 남짓. 인도 청년들이 그동안 얼마나 억눌려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라 하겠는데요. 그런데 왜 이들은 시위에서 “교육부 장관 퇴진”을 외치는 걸까요. 인도를 뒤흔드는 바퀴벌레당 현상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이 기사는 6월 5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그래, 우리는 바퀴벌레다“사회에는 시스템을 공격하는 기생충들이 존재합니다. 바퀴벌레처럼 일자리도 없고 전문 분야에 자리도 없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그중 일부는 언론, 소셜미디어, 정보공개 청구운동, 기타 시민운동가로 활동하며 모든 사람을 공격합니다.”아니, 이 무슨 망언인가요. 5월 15일 수리야 칸트 인도 대법원장이 법정에서 공개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생충에 바퀴벌레? 인도의 청년 실업자들로선 참을 수 없이 모욕적 발언이었는데요.다음날, 미국에서 유학 중인 서른살의 인도인 아비짓 딥케가 ‘바퀴벌레인민당’을 창당했다며 홈페이지를 엽니다. “게으르고 온라인에 중독됐고, 최근엔 바퀴벌레라는 소리를 듣는 젊은이들을 위한 정당”이라면서 말이죠. 정당 이름의 약자는 CJP. 인도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소속된 집권당 BJP(인도 인민당)에 대한 풍자였습니다.바퀴벌레라는 모욕에 되레 ‘그래, 우리는 썩은 시스템 때문에 바퀴벌레가 됐다’고 되받아치며 탄생한 바퀴벌레당. 이에 인도 청년들은 열광했고요. 바퀴벌레당의 SNS 계정 팔로워와 웹사이트 가입자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갑니다. 정치에 무관심한 줄로 알았던 Z세대가 보여준 이례적이고 놀라운 결집이었죠. 수많은 청년이 딥케에게 DM으로 “당신이 유일한 희망이니 제발 이 문제를 제기해달라”고 호소했다고 해요.바퀴벌레당은 비록 정식 정당은 아니지만, ‘2029년 총선을 위한 5개 어젠다’도 제시했는데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걸 보면 현재 인도 정치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죠.-대법원장에 퇴직 후 보상으로 상원의석을 주지 않는다 (사법권 독립)-부정투표가 발생하면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테러방지법에 따라 체포한다 (공정한 선거)-국회의원과 내각 장관직의 50%를 여성에게 할당한다 (성평등)-암바니와 아다니(인도의 대표 재벌)가 소유한 모든 언론사의 면허를 취소한다 (언론 독립)-정당을 옮긴 주의원과 국회의원은 20년 동안 출마를 금지한다 (철새 정치인 퇴출) 젊은 민심의 심상찮은 움직임. 인도 정부가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겠죠. 인도 정부는 ‘국가 안보 및 주권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바퀴벌레당의 X 계정 접속을 차단했어요.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같은 ‘외세와 결탁한 불순한 세력’이라는 낙인을 찍은 거죠.그럼, 정부의 압박에 바퀴벌레들이 자취를 감췄을까요. 그럴 리가요. 오히려 ‘우리 목소리를 억누르려는 시도가 우리가 옳다는 증거’라는 인식만 심어줬고요. 바퀴벌레당의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는 하루에 수백만 명씩 쭉쭉 늘어서 순식간에 2200만명을 돌파합니다. 12년째 집권 중인 인도 인민당의 인스타 팔로워 수(약 900만명)를 압도해 버린 거죠.비리와 부패로 얼룩진 대학 입시인도 Z세대를 위한 새로운 정치 커뮤니티의 탄생. 하지만 이것 역시 한때의 인터넷 유행에 그치는 게 아닌가 했는데요. 때맞춰 청년층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을 만한 대형 스캔들이 줄줄이 터져 나옵니다. 의대 입시 시험지 유출 스캔들과 대입 채점 부실 스캔들이죠.의사는 인도에서도 부와 명예가 보장되는 직업으로 통해요. 전국 정원이 11만명인 의대에 입학하려면 반드시 봐야 하는 시험이 의대 입학시험(NEET)인데요. 올해도 227만명의 수험생이 몰렸습니다. 내로라하는 수재들이 겨뤄서 그중 단 5%만 통과하는 서바이벌인 거죠.그런데 5월 3일 지필 시험이 끝난 뒤, 수상한 사실이 드러납니다. 일부 과목 시험문제가 메신저를 통해 약 40만원에 팔렸던 ‘예상 문제’와 정확히 일치했죠. 인도 사회가 발칵 뒤집히면서 수사가 벌어졌는데요. 그 결과 내부 출제 전문가와 브로커, 학원 강사들이 결탁해 조직적으로 문제를 빼돌린 충격적인 비리가 확인됩니다.결국 시험은 취소됐고 전면 재시험을 치르기로 했는데요. 아니, 밤잠 아껴가며 고생해서 몇 년을 공부했더니만, 시험지 유출 비리로 재시험이라니. 수험생과 학부모 입장에선 날벼락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죠. 실제로 합격을 눈앞에 뒀다고 생각했는데, 재시험 통보를 받고 심리적으로 무너져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학생이 여럿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인도에선 우리의 대학수학능력시험과 비슷한 ’12학년 보드 시험’을 2~4월에 걸쳐 보는데요. 인도 중앙중등교육위원회가 5월 13일 성적을 발표한 뒤 난리가 났습니다. 점수가 이상한 사례가 너무나도 많았던 거죠.문제는 올해 처음 도입한 디지털 채점 시스템에 있었습니다. 답안지가 다른 사람과 아예 뒤바뀌거나, 너무 흐릿하게 스캔돼서 몽땅 0점 처리됐거나, 답안지 뒷장이 통째로 누락되면서 점수가 우수수 깎인 거죠.이 사건은 국가적 스캔들로 번졌는데요. 알고 보니, 이 채점 시스템을 담당한 업체는 이미 2019년 한 지역에서 대규모 성적 오류를 일으켜서 수험생 18명이 목숨을 끊게 만든 부실 업체였고요. 당연히 입찰을 금지했어야 하는데, 어떤 이유인지 입찰 자격요건이 수정되면서 계약을 따냈습니다. 정부는 부인하지만, 정부 기관이 부실 업체와 결탁해 특혜를 줬을 거란 의혹이 나올 수밖에 없죠.이건 생존이 걸린 시험이다한 문제를 맞느냐 틀리느냐에 따라 대학에 붙느냐 떨어지느냐가 걸려있는 입시. 그런데 사설 학원엔 유출된 의대 입시 시험지가 나돌고, 수능 답안지는 채점 실수로 0점 처리되다니. 이만저만 큰일이 아닙니다. 이번에 의대 입학시험을 본 한 인도 청년은 분통을 터뜨렸죠. “시험에 합격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아요. 시험에 합격하려고 모든 걸 포기했는데, 재시험을 봐야 하다니. 내년에도 또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어떻게 장담하나요?”이런 절망은 인도의 극심한 청년 실업률과도 맞물려있습니다. 인도는 대학 진학률이 꾸준히 높아졌지만 아직 28% 정도이죠. 대학 나온 사람이 여전히 소수인 나라인데요. 문제는 이렇게 대학 교육까지 받은 고학력자들을 위한 취업문이 너무 좁다는 겁니다. 대졸자들이 원하는 괜찮은 일자리가 워낙 부족하기 때문이죠. 고용 능력이 큰 제조업이 약하고, 금융·IT 같은 소수의 첨단 서비스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경제구조 탓인데요.인도에선 매년 약 500만명의 대졸자가 배출되지만, 이들이 선호하는 안정적인 정규직 일자리는 170만개에 불과합니다. 미스매치가 대단히 심각하죠. 학력이 낮으면 노점이라도 차려서 밥벌이를 할 텐데, 비싼 돈 들여 대학 공부를 한 바람에 이도 저도 못 하고 실업자가 되는 대졸자가 너무 많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25세 미만 대졸자 실업률은 무려 39.3%, 25~29세 대졸자 실업률도 20%에 달한다죠(2023년 기준).일부 상위권 대학을 제외하면 졸업 뒤 실업자가 되거나 평생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머물 확률이 상당히 높습니다. 그러다 보니 명문대 선호 현상이 더욱 커져가죠. 높은 연봉까지 보장되는 의대, 공대 입학은 최고의 꿈이고요. 그게 아니면 학맥을 쌓을 만한 좋은 대학을 나와서 공무원으로 취업하는 게 가장 안정적인 길입니다.즉, 인도에서 명문대 입학은 간판이나 출세의 문제를 뛰어넘어요. 훨씬 더 절박한 생존이 달린 문제이죠. 꼭 대단한 성공을 바라서가 아니라, 하위 계층에서 탈출하려면 일단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만 합니다.그러니 대학 입시 공정성에 목을 매지 않을 도리가 있나요. 그런데 문제 유출이라니, 부실 채점이라니, 비리와 부정부패라니. 형편없는 국가 시스템을 향해 분노하는 게 당연합니다.바퀴벌레, 이제 광장으로그래서 바퀴벌레당이 이 문제에 나섰습니다. 바퀴벌레당은 다르멘드라 프라드한 교육부 장관의 사임을 요구하는 온라인 청원에 80만명의 서명을 모았고요. 6월 6일 뉴델리 잔타르 만타르 광장에서 평화시위를 연다고 공지했어요. 현재 미국에 거주 중인 창립자 딥케는 6일 아침 뉴델리로 돌아가기로 했죠. SNS로 그를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 메시지가 빗발치고 있는데도 말이죠.그는 파이낸셜타임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엄청난 호응이 있고, 수만 명이 시위에 참여할 걸로 예상합니다. 우리가 이 운동을 하는 이유는 현재 정치권에서 아무도 우리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린 청년의 관심사와 열망을 중심으로 국가 정치가 이뤄지는 진지한 운동이 되길 바랍니다.”바퀴벌레당은 조직 체계를 갖추기 위해 3명의 공식 대변인도 임명했어요. 기자·작가·컨설턴트 출신의 대변인들은 기자회견을 열고 “우리는 인도 청년 전체의 당이다. 설사 아비짓 딥케가 체포되더라도 시위는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고요. 집권 여당이 제기하는 ‘야당 공작설’과 ‘불법 자금 조달설’ 같은 루머에도 적극적으로 반박했죠.든든한 지원 세력도 합류했습니다. 저명한 시민운동가 소남 왕추크가 6일 바퀴벌레당의 시위에 동참한다고 공식 선언했어요. 그는 바퀴벌레당의 주장에 대해 “젊은 세대의 매우 건설적인 의견”이라며 “정부도 불안해하지 말고 그들의 의견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지지를 표명했는데요. 시위의 정당성과 무게감을 한층 더해주는 인물입니다.이제 전 세계가 주목합니다. 인도 정부는 과연 바퀴벌레당의 첫 시위를 순순히 허용할까요? 이미 정부 측 인사와 친정부 언론이 ‘바퀴벌레당은 반국가적 외국 세력의 음모’라고 공격하면서 탄압의 빌미를 찾는 분위기인데요. 권위주의 체제를 굳혀가고 있는 모디 정권이기에 그리 호락호락하진 않을 겁니다.하지만 바퀴벌레당이 이미 선언한 대로 와이파이가 되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들의 본부가 있고요. 정부가 그들을 억누를수록 오히려 더 강해질 겁니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죠. 그게 바로 바퀴벌레의 힘이니까요. By.딥다이브*이 기사는 6월 5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6-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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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도체로 부유해진 대만 경제의 그림자: 대만병과 거지 슈퍼맨 [딥다이브]

    인공지능(AI)과 반도체 열풍을 타고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나라, 어디일까요. 한국이면 좋겠지만 아니고요. 바로 대만입니다. 주식시장 시가총액과 1인당 GDP(국내총생산) 같은 지표에서도 대만은 이미 한국을 추월했죠.그런데 이상합니다. 나라가 이렇게 부유한데, 먹고살기가 팍팍하다는 대만 국민은 늘어만 가요. 소득과 자산의 불평등이 갈수록 심화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는 수출 기업 중심의 왜곡된 정책 탓이란 전문가 분석이 나오는데요. 오늘은 잘나가는 대만 경제의 그림자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5월 29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역대급 호황인데, 내 지갑은 왜?요즘 대만 경제엔 놀라운 소식이 가득합니다. 우선 올해 1분기 경제성장률이 무려 13.69%를 기록했어요(전년 대비). 지난해 연간 성장률(8.63%)도 대단했는데, 이건 뭐 경이적인 수준이죠. 1987년 이후 39년 만에 가장 높은 분기 성장률이라는데요. TSMC를 중심으로 한 반도체 수출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성장을 이끌었죠. (참고로 한국 1분기 성장률은 전년 대비 3.6%)2026년 대만의 1인당 GDP는 4만 달러를 돌파할 게 확실시됩니다. 이미 한국을 제쳤는데, 격차가 더 벌어지는 거죠. 동아시아 1위 자리를 더 굳건히 하게 됐고요.주식시장은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이미 3년 연속(2023~2025년) 20% 넘는 상승률을 기록한 자취안 지수는 올해 들어서도 48% 올랐고요. 대만 증시 시가총액은 4월엔 캐나다, 얼마 전엔 인도를 제치며 세계 5위로 올라섰어요. 참고로 TSMC가 자취안 지수 시총의 42%를 차지하죠.최근엔 TSMC 직원들이 성과급 때문에 동요한다는 소식이 나옵니다. 웨이저자 TSMC 회장이 “성과급 최소 30% 인상”을 약속했지만 불만은 가라앉지 않는다는데요. 이 역시 TSMC가 너무 잘나가서 생기는 현상이죠.반도체가 만들어낸 대만 경제의 눈부신 성장.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데요. 이 놀라운 호황에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이를 체감하는 국민이 생각보다 적다는 점입니다. 최근 나온 여론조사 결과에서 이런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는데요.27일 발표된 포모사의 ‘5월 국민정치여론조사’ 결과를 보실까요. 현재 국내 경제상황이 좋다고 응답한 비율은 40.2%, 나쁘다는 응답은 55.1%에 달했어요. 이게 라이칭더 총통이 취임한 2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지지 않은 건데요. 특히 지방 거주, 30대, 고졸 학력에서 경제가 나쁘다는 응답이 많았습니다. 반면 타이베이시에 사는 고학력자는 경제가 좋다는 응답 비율이 더 높았고요.3월 나온 대만 취업포털 ‘예스123’의 설문조사 결과도 의외였는데요. 39세 이하 대만 직장인 중 약 40%가 수입보다 지출이 많은 재정적자를 겪고 있다고 응답했어요. 또 23%는 모아둔 저축이 아예 0이고, 72%는 현재 빚을 지고 있다고 답했고요. 무엇보다 무려 54.9%가 스스로를 “인생의 실패자”라고 여긴다는 우울한 답변을 내놨죠.계란 껍질로 밀려나는 청년들정리하자면 경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데 그 온기를 체감하지 못하는 국민이 너무 많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지금의 역대급 호황을 주도하는 건 반도체 산업이고요. 거기에 속한 일부 선택받은 이들만 그 과실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죠.TSMC를 포함한 반도체 산업은 대만 GDP의 20% 이상을 차지하는데요. 이 분야의 고용인원은 고작 30만명. 대만 전체 노동자(1100만명)의 3%가 채 안 되죠. 범위를 IT 제조업으로 넓혀 잡아도 고용인원은 총 100만명 정도인데요. 서비스업이나 전통 제조업에서 일하는 나머지 90% 이상의 근로자엔 이 AI 붐이 딴 세상 이야기일 뿐입니다.이를 실감할 수 있는 통계가 있는데요. 대만 경제가 그렇게 잘 나가고 1인당 GDP는 4만 달러라는 데도, 대만 통계청이 집계한 근로자 평균월급은 고작 4만6000대만달러(220만원)에 그쳤어요. 한국(월 383만원)의 60%에도 못 미치는 거죠. 중위 임금(일렬로 세웠을 때 가운데 수치)은 3만8000대만달러(182만원)으로 더 낮고요. 그나마 이게 지난 10년 동안 최저임금을 꾸준히 올려서 이 정도라는데요. 사실 대만은 한국보다도 평균 노동시간이 연간 100시간 이상 더 긴, 세계적으로 오래 일하기로 유명한 나라이거든요. 일은 많이 하는데, 손에 쥐는 건 보잘 것 없다는 불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그래도 대만은 물가가 싸니까 먹고살만 하지 않냐고요? 예전엔 그랬죠. 하지만 최근엔 이야기가 좀 달라졌습니다. 물가, 그 중에서도 특히 집값과 임대료가 유독 말도 안 되게 뛰었거든요.우리가 흔히 집값이 가장 비싼 도시라고 하면 홍콩을 떠올리는데요. 수도 타이베이의 최근 중위소득 대비 주택가격 비율은 15.41배로, 이미 홍콩(14.4배)을 넘어섰어요(참고로 서울은 13.9배). 보통의 근로자가 소득을 한 푼도 안 쓰고 15.41년 동안 모아야 겨우 집 한 채 장만한단 얘기죠. 이게 2년 전엔 16배였는데, 그나마 대만 정부가 부동산 규제를 강화하면서 좀 낮아진 겁니다. 한마디로 미친 집값이죠.이제 타이베이는 물론이고 수도권에서는 웬만한 직장인 월급으론 집 사는 게 점점 불가능해지고 있습니다. 대만 주택시장에선 ‘계란 노른자 구역(타이베이 핵심지)’과 ‘계란 흰자 구역(주변 위성도시)’이란 표현이 흔히 쓰이는데요. 요즘엔 흰자도 아닌 ‘계란 껍질 구역’에 집을 얻는 젊은층이 늘어갑니다. 인프라가 열악하고 도심 접근성이 떨어지는 변두리로 밀려난 거죠.타이베이에 원룸이라도 얻으려는 사회 초년생이라면 부담은 더 큰데요. 대졸 초임(반도체 기업이 아닌 경우)은 약 3만5000대만달러(167만원)에 불과한데, 도심 원룸은 아무리 작고 낡은 방도 월 1만5000대만달러(70만원)은 줘야 해요. 월급 받아 월세 내고 나면 별로 남는 게 없죠.이렇게 팍팍한 대만 젊은이들의 삶을 반영한 요즘 트렌드가 있습니다. 바로 ‘거지슈퍼맨(乞丐超人)’. 편의점에서 유통기한이 임박해 할인 판매하는 식품만 골라사는 알뜰족을 일컫는 말인데요. 보통 대만 편의점은 저녁 시간이 되면 도시락 같은 신선식품을 30~35% 할인하기에, 이들은 편의점 앱의 ‘실시간 재고 지도’를 켜고 기다렸다가 매장으로 번개처럼 달려갑니다. 그 모습이 마치 비밀 임무에 투입된 히어로 같다고 해서 ‘슈퍼맨’이라 부르죠.왠지 좀 짠한데요. 한 푼이라도 아끼려면 어쩔 수 없죠. 지난해 한 네티즌은 1년간 편의점 할인식품을 구매하면서 모은 스티커 364장을 빼곡히 붙인 ‘2025년 거지슈퍼맨 기록부’를 스레드에 공개했더군요. 이렇게 해서 1년 동안 절약한 금액이 1만688대만달러(52만원)에 달했다고 합니다.이런 걸 보면 왜 요즘 대만 젊은이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지 알 것만 같죠. 대만의 지난해 합계출산율은 0.695명으로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어요. 저출산 순위에서마저 한국을 제친 거죠.수출 기업을 키우기 위해 국민이 치른 대가혹시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몰라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능력에 따라 빈부 격차가 발생하는 건 어쩔 수 없지 않나? 양극화가 심화하는 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잖아?그런데 여기서 꼭 해야할 질문이 있습니다. TSMC를 포함한 대만 반도체 산업이 이룬 놀라운 성공이 오로지 기업과 임직원의 역량으로 거둔 성과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 성장의 발판을 마련해주기 위해 대만 국민이 감수해야 했던 희생과 부담은 없을까요.바로 이 점을 지적해 큰 화제가 됐던 책이 있습니다. 4명의 대만 경제학자가 2021년 공동집필한 ‘치부의 특권(부자가 되는 특권, Privilege of Wealth)’인데요. 부제(지난 20년간 우리가 중앙은행 정책에 치른 대가)에 나와 있듯이 대만 중앙은행의 정책을 조목조목 비판한 책입니다. 이 책에 따르면 대만 중앙은행은 수출 대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대만 달러의 통화가치를 낮게 유지(평가절하)하는 정책을 펼쳐왔어요. 이에 따라 경제성장률이나 물가상승률과 비교해 비정상적으로 낮은 초저금리를 고수했고요. 중앙은행이 찍어낸 돈으로는 미국 달러를 왕창 사서 막대한 외환보유액을 쌓았죠(대만 외환보유액은 세계 6위로 12위인 한국보다 훨씬 많음).통화가치를 낮추면 기업은 해외시장에서 가격경쟁력을 높일 수 있죠. 이런 중앙은행 정책이 수출 대기업엔 정부가 주는 일종의 보조금 혜택으로 작용했어요. 반면 수입물품을 사야 하는 일반 소비자엔 추가 세금을 부과하는 것과 같았죠. 사실상 가계의 자산을 기업으로 이전하는 결과를 가져왔는데요.그리고 이보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장기간 초저금리로 풀린 막대한 유동성이 부동산 시장으로 쏠린 거죠. 살인적인 집값 폭등을 야기해서 국민의 삶의 질을 무너뜨리고 출산율까지 떨어뜨린 그 주범. 따져보면 바로 수출 기업 밀어주기에 올인해온 중앙은행이었던 셈입니다. 국민을 가난하게 만들면서 대기업을 키워주는 왜곡된 정책이 이런 부작용을 낳은 거죠. 이 현상을 설명하면서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이를 “‘대만병’ 또는 ‘포모사 독감’이라 부를 수 있다”고 지적했는데요.물론 대만 중앙은행은 인위적으로 통화가치를 낮게 유지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진 않아요. 아니, 할 수가 없죠. 그랬다간 ‘환율조작국’으로 찍힐테니 말이죠. 하지만 빅맥지수로 유추했을 때 대만달러는 그 어느 주요국 통화보다도 가장 저평가돼있는 건 사실이고요(미국 달러 대비 59.6% 저평가). 지난해 8.63%라는 놀라운 GDP 성장률에도 불구하고 2년 넘도록 기준금리는 2%로 동결 중입니다.‘치부의 특권’이 출간된 지 5년이 지났지만 통화가치 절하와 저금리라는 정책 기조는 여전히 달라진 게 없죠. 역대급 경제성장에도 국민의 삶은 쪼들리는 모순이 해결될 기미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데요. 과연 대만 경제는 그동안의 성공공식에서 벗어나, 스스로 대만병을 치료할 결심을 할 수 있을까요. By.딥다이브*이 기사는 5월 29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6-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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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고의 제품도 실패한다…화이자·미쉐린이 놓친 ‘혁신의 사각지대’ [딥다이브]

    인공지능(AI) 혁신의 시대, 승자로 올라서기 위한 기업들의 경쟁이 치열하죠. 그럼 누가 승리할까요? 가장 똑똑한 AI 모델을 개발하는 천재 엔지니어? 소비자를 사로잡을 ‘와우 포인트’ 서비스를 한발 앞서 선보이는 기업?글쎄요. 기업의 세계에선 최고의 혁신 제품을 가장 빨리 출시하고도 처참히 실패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왜? 혁신이란 건 기업 혼자 잘해봤자 소용없거든요. 혁신의 ‘생태계’를 만드는 게 중요하죠. 기업의 발목을 잡는 ‘혁신 사각지대’를 분석한 책 ‘더 와이드 렌즈(The Wide Lens)’를 들여다봤습니다.(전략 전문가인 론 애드너(Ron Adner) 다트머스대 터크 경영대학원 교수가 2012년 쓴 책. 한국에선 ‘혁신은 천 개의 가닥으로 이어져 있다’는 제목으로 2012년 나왔지만 절판됐습니다.)*이 기사는 5월 27일(수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선구자가 망하는 이유1979년 출시돼 전 세계를 휩쓴 소니 ‘워크맨’. 시대를 앞서나간 혁신 제품의 대표적 성공 사례인데요. 그럼 이건 어땠을까요. 1998년 한국의 새한정보시스템이 세계 최초로 출시한 MP3 플레이어 ‘MP맨’.MP맨은 꽤 훌륭한 제품이었습니다. ‘디지털화’라는 시장 변화를 정확히 파악했고, 적절한 파일형식(MP3)을 채택했죠. 하지만 출시 직후 ‘충격의 문제작’으로 화제를 끌었던 MP맨은 결국 실패했고요. MP3 플레이어 시장의 진짜 승리자는 3년이나 늦게 나온 애플 ‘아이팟’이 됩니다.그럼 MP맨은 왜 워크맨처럼 ‘선발주자의 이점’을 누리지 못했을까요. 혁신 생태계가 미처 준비되기 전에 너무 일찍 나온 탓이었죠. 1998년만 해도 MP3 파일을 살 수 있는 통로가 거의 없었습니다. 불법 다운로드가 있긴 했지만, 28.8kbps의 느린 모뎀으로 앨범 하나를 다운로드하려면 몇 시간씩 걸렸죠. 그게 바로 워크맨과 다른 점이었습니다. 워크맨은 카세트 테이프의 표준화(1972년)가 끝나고 널리 보급된 이후에나 출시됐으니까요.론 애드너 교수는 이를 ‘공동 혁신의 위험’으로 설명합니다. 아무리 기업이 혼자 빨리 치고 나가도, 그 생태계를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이 맞춰지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괜히 풀 악셀을 밟으며 가장 먼저 치고 나와봤자, 어차피 저 앞 빨간 신호에 걸려서 기다리는 건 경쟁자들과 똑같은 거죠.이와 비슷한 사례가 노키아의 3G폰입니다. 2002년 노키아는 엄청난 기술적 난관을 극복하고 세계 최초의 GSM/WCDMA 호환 3G폰인 ‘노키아 6650’을 출시했어요. 에릭슨과의 기술 경쟁에서 승리했죠.문제는 3G폰으로 이용할 3G 서비스-예컨대 스트리밍 서비스-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엄청난 투자금을 쏟아부었지만, 소비자 입장에서 3G폰은 그저 업그레이드된 2G폰일 뿐이었어요. 노키아 6650은 ‘도로 없는 세상의 페라리’ 같은 신세였죠. 3G 서비스가 실제 의미 있는 매출로 이어지기 시작한 건 2008년이 돼서 였어요.필립스의 HDTV 사례도 마찬가지인데요. 필립스는 1980년대 중반 고화질 TV 개발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했고요. 고객이 열광하고 경쟁사가 따라잡을 수 없는 뛰어난 화질을 구현하는 데 성공했는데요. 하지만 정작 HDTV 구현을 위한 고화질 카메라와 전송 표준의 혁신까진 한참 걸렸고요. 20년 뒤 마침내 HDTV가 대중화됐을 때, 필립스는 되레 25억 달러의 자산을 상각해야 했습니다.결국 혁신은 ‘어떻게’ 못지않게 ‘언제’가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가 강한 추진력을 발휘해 온갖 난관을 뚫고 혁신을 이뤄내는 영웅담에 열광하는데요. 진짜 리더라면 ‘생태계를 구성하는 공동의 혁신가는 지금 어디까지 와있나’까지 계산해야 하는 겁니다. 마지막 퍼즐이 놓이길 기다렸다가 단숨에 치고 나와서 MP3 시장에서 승리를 거둔 스티브 잡스처럼 말이죠.2008년 잡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은 꽤 천천히 일어납니다. 기술의 흐름은 일어나기 훨씬 전에 볼 수 있고, 어떤 흐름을 탈지 현명하게 선택해야 하죠. 현명하지 못한 선택을 하면 많은 에너지를 낭비할 수 있지만, 현명하게 선택하면 실제로는 꽤 천천히 전개됩니다. 몇년이 걸리죠.”미쉐린과 화이자의 값비싼 실수“고객 목소리에 귀 기울여라.” “고객 관점에서 생각하라.” 흔히 이렇게 기업에 조언합니다. 고객을 생각한다는 건 분명 혁신의 성공을 위해 중요한 부분인데요.그런데 그 고객은 누구일까요? ‘타이어 제조사 고객=운전자, 제약사 고객=환자, 영화제작사 고객=관객’인 걸까요? 론 애드너 교수는 기업이 최종 소비자만 바라봐서는 혁신이 성공할 수 없다고 지적합니다. 그 제품이 최종 소비자에 다다르는 중간 과정에 있는 “모든 고객”이 중요하기 때문이죠. 그에 따르면 “최고의 제품이 실패하는 건 소비자가 선택할 기회가 없을 때”입니다.세계적 타이어 제조사 프랑스 미쉐린의 실패 사례를 볼까요. 미쉐린은 7년의 개발 끝에 야심작 ‘PAX 시스템’을 2000년 선보였죠. 타이어가 펑크 나도 시속 88㎞로 200㎞까지 달릴 수 있는 신개념 런플랫 타이어였습니다. 미쉐린은 ”10년 후엔 PAX 외엔 다른 종류의 타이어가 없을 것“이라고 자신만만했고요. 메르세데스 벤츠, 아우디, 르노, 혼다 같은 주요 자동차 제조사도 속속 이 타이어를 채택했죠. 하지만 시장의 열정은 빠르게 식어갔어요. 미쉐린이 간과했던 고객이 있었기 때문이죠. 바로 정비소였습니다. PAX 타이어는 워낙 혁신적인 제품이라 수리를 위해선 새로운 장비가 필요했는데요. 정비소 입장에선 그런 투자를 할 이유가 없었고요. 타이어 수리를 받지 못하게 된 운전자들의 불만이 폭발하면서 집단소송이 줄줄이 제기됩니다. 결국 2007년 미쉐린은 막대한 손실을 입은 채 PAX 사업을 중단해야 했죠.이게 바로 ‘채택 사슬의 위험’입니다. 혁신가와 최종 소비자 사이엔 유통업체, 소매업체, 영업사원 같은 ‘중간자’가 있고요. 그중 단 한 곳에서라도 채택을 거부하면, 그 제품은 최종 소비자에 도달할 기회를 아예 잃고 말아요.또 다른 초대형 실패 사례, 화이자의 ‘흡입형 인슐린’을 볼까요. 2000년대 초, 제약업계를 뜨겁게 달군 아이디어는 ‘주사 없는 인슐린’이었죠. 커다란 천식 흡입기처럼 생긴 ‘흡입형 인슐린’ 개발에 주요 제약사들이 앞다퉈 뛰어들었는데요.2006년 1월, 화이자가 ‘엑수베라’를 출시하면서 경쟁에서 승리했습니다. 화이자는 2010년까지 엑수베라가 20억 달러의 매출을 올릴 거라 예상했죠. 초대형 블록버스터 신약의 탄생인 것처럼 보였어요. 하지만 2007년 10월, 출시한 지 불과 22개월 만에 화이자는 엑수베라 생산 중단을 선언했습니다. 화이자는 28억 달러를 손실 처리해야 했죠. 제약업계 역사상 가장 큰 실패로 남았는데요.도대체 왜? 화이자가 놓친 사각지대가 있었습니다. FDA는 엑수베라를 승인하면서 환자가 간단한 폐기능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는데요. 문제는 인슐린 처방권을 가진 내분비내과 전문의의 진료실엔 폐활량 측정기가 없단 점이었죠. 즉, 내분비내과 전문의가 엑수베라를 처방하려면 일단 그 환자를 호흡기내과 의사에 보낸 다음, 다시 진료 예약을 잡아야 했어요. 그 번거로움을 감수할 전문의가 없었던 거죠.혁신은 ‘윈윈윈윈’이다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지 않나요. 미쉐린이 PAX 타이어 수리 기계를 정비소에 대거 깔았더라면? 화이자가 내분비내과 전문의 대신 폐활량 측정기가 이미 있는 일반의를 먼저 공략했더라면? 그럼 결과가 다르지 않았을까요.이게 바로 론 애드너 교수가 ‘넓은 시야(The Wide Lens)’를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만약 새한 ‘MP맨’처럼 주변 기술이 문제일 땐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만, 중간 고객이 채택을 거부하는 문제라면 그건 해결할 수 있습니다. 혁신 기업이 직접 나서서 생태계를 재구성하는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죠. 미국의 ‘디지털 시네마’ 도입 과정이 그 예인데요. 커다란 릴에 감긴 필름을 영사기에 돌려가며 영화를 상영했던 아날로그 시절을 기억하시나요? 이를 디지털화한 디지털 프로젝터가 최초로 출시된 게 1996년이었습니다. 1999년 뉴욕과 LA에선 ‘스타워즈 에피소드1-보이지 않는 위험’이 인류 역사상 최초로 필름 없이 디지털 프로젝터로 상영됐죠.디지털 시네마는 영화 제작사가 막대한 필름 인쇄·운송 비용을 절감할 수 있게 하는 혁신 기술입니다. 덕분에 배급사는 드디어 ‘전 세계 동시 개봉’이 가능해졌고요. 관객들은 한층 밝고 선명하고 몰입감 있는 화면을 경험하게 됩니다. 모두가 원하던 혁신이었죠.하지만 2006년까지 미국 영화관 스크린 중 디지털 프로젝터를 사용한 비중은 고작 5% 미만. 이 혁신에 유독 저항하는 연결고리가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죠. 바로 비싼 디지털 프로젝터를 사서 설치해야 하는 영화관 소유주(극장주)였습니다. 안 그래도 극장은 운영 마진이 빠듯한데(극장의 주 수입은 관람료가 아닌 팝콘 판매), 스크린당 7만~10만 달러나 드는 업그레이드 비용을 감당할 길이 없었던 겁니다. 혁신을 가로막는 단 하나의 병목 지점. 이걸 해결하기 위해 결국 영화 제작사(스튜디오)들이 나섰습니다. 제작사들이 기금을 마련해서 극장의 디지털 프로젝터 초기 구매 비용을 지원해주기 시작한 거죠. 이를 통해 극장주는 디지털 전환 비용의 약 80%를 보조받을 수 있게 됐고요. 디지털 시네마가 극장주에 더 이상 손해가 아닌 이익이 되자, 급속도로 도입이 이뤄집니다. 혁신 생태계의 막힌 혈이 뚫린 거죠.결국 혁신은 기업과 최종 소비자, 둘의 ‘윈윈’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중간 참여자까지 포함한 모두의 ‘윈윈윈윈윈’이 돼야만 마침내 성공할 수 있는 거죠. 혁신은 경주가 아니라 ‘퍼즐 맞추기’에 가까우니까요. 기업이 승리하려면 앞만 보고 빨리 뛰는 경주마가 아닌, 파트너까지 함께 뛰게 만드는 생태계 리더가 돼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물론 그게 말처럼 쉬울 리는 없겠지만요. By.딥다이브*이 기사는 5월 27일(수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6-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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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경2800조원’ 우주시장 노리는 스페이스X…‘실패’ 경고에도 열광[딥다이브]

    단언컨대, 이런 기업공개(IPO) 투자설명서는 처음일 겁니다. 기업의 야망은 놀랍도록 거창하고, 지배구조는 말도 안 되게 한 사람에 집중돼있고, 투자의 위험요인은 끝도 없죠. 일론 머스크의 우주기업 스페이스X 이야기입니다.역사상 최대 규모이자 세기의 자본시장 빅이벤트가 될 스페이스X IPO. 상장하마자 테슬라를 뛰어넘어, 전 세계 시가총액 6위로 올라설 전망인데요. 이런 대왕고래급 상장기업을 미리 뜯어볼 수 있는 자료가 나왔으니, 그냥 넘어갈 순 없겠죠. 투자자가 주목해야 할 스페이스X의 핵심 포인트를 짚어봤습니다.*이 기사는 5월 22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시총 세계 6위 기업이 온다 일단 알아두실 점. 스페이스X의 정확한 공모 규모와 상장 날짜는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1조7500억~2조 달러의 기업가치로, 최대 750억 달러를 조달할 걸로 알려져있죠. 2019년 사우디아라비아 아람코의 기록(1조7000억 달러 기업가치, 260억 달러 조달)을 깰 게 확실시 되고요.상장 날짜는 6월 12일이 될 거란 보도가 나옵니다. 한동안 미래에셋증권을 통해 한국 개인 투자자도 공모주에 직접 투자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가 있었는데요. 일정이 촉박해서 그건 어려워 보여요.스페이스X는 아마 나스닥100 지수에 조기 편입될 겁니다. 나스닥의 ‘패스트 엔트리(Fast Entry)’ 규칙에 따라 초대형 IPO는 상장 후 15거래일 만에 나스닥 100에 편입되거든요. 나스닥100 지수를 추종하는 수많은 ETF가 모두 스페이스X를 담게 되겠죠. 엄청난 자금의 이동이 예상됩니다. 스페이스X에 크게 관심 없는 투자자라도, 나스닥 ETF에 관심 있다면 반드시 들여다 봐야하는 기업인 건데요.사실 2조 달러의 기업가치는 2025년 매출(186억 7천만 달러)의 107배, 2026년 예상 매출의 약 75배에 해당합니다. 게다가 이 회사는 지난해 연간 49억4000만 달러, 올 1분기엔 42억8000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죠. 재무제표로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초고평가라 하겠는데요. 도대체 무엇이 이를 정당화하는 걸까요.4경원의 시장을 노린다‘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전체 시장 규모(TAM, Total Addressable Market)를 파악했습니다. 당사의 TAM은 28조 5000억 달러(약 4경2800조원)로 추산됩니다.’스페이스X가 제출한 예비 투자설명서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입니다. 이게 맞나 싶을 정도로 큰 수치인데, ‘중국과 러시아 시장은 제외한 것’이란 설명을 덧붙였죠. 어떻게 이런 숫자가 나왔는지를 따져보면, 스페이스X가 도대체 앞으로 뭘 하려는지를 알 수 있는데요. 크게 세 분야입니다.①우주 부문(Space): 3700억 달러=우주선 제조, 발사 서비스가 중심이죠. 스페이스X는 이미 전 세계 궤도 발사량의 80% 이상을 점유하는, 이 분야에서 따라올 경쟁자가 없는 기업입니다. 스페이스X가 장기적으로 노리는 ‘달 경제(Lunar Economy)’는 이 계산에 넣지 않았다고 해요. 달(또는 화성)로 여객과 화물 수송하고, 제조 시설을 건설하고, 소행성을 채굴하는 사업에 대해선 ‘수조 달러 규모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언급했죠. ②연결성 부문(Connectivity): 1조 6000억 달러=현재 스페이스X가 하는 사업 중 유일하게 이익을 내고 있는 ‘스타링크’ 서비스를 말하죠. 스타링크의 위성인터넷 서비스는 전 세계에 1000만명 넘는 가입자를 확보했고요. 위성과 휴대폰을 연결하는 모바일 서비스도 본격적으로 확장할 예정입니다. 스페이스X는 이미 스타링크용 위성을 9600대나 우주에 띄웠고요. 이걸 단기간에 따라잡을 기업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에, 독주체제를 이어갈 겁니다. 스타링크는 앞으로도 이 기업의 ‘현금 창출 기계’ 노릇을 톡톡히 할 거예요.③ 인공지능 부문(AI): 26조5000억 달러=스페이스X가 가장 크게 기대를 거는 분야는 역시나 AI이죠. 기업과 소비자용 AI 소프트웨어 시장은 물론 AI 인프라(데이터센터) 시장에서도 강자로 도약한다는 목표인데요.스페이스X는 이미 AI 모델 ‘그록(Grok)’ 개발사 xAI를 합병하며 우주와 AI를 아우르는 기업으로 변신했어요. 하지만 그록은 시장점유율에서 아직은 3강(오픈AI, 앤트로픽, 구글)에 한참 뒤집니다. 그래서 좀 의아했어요. 뭘 믿고 이렇게 자신만만하지?그런데 믿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단순히 그록의 성능이 월등히 뛰어나서가 아니라요. AI모델을 다른 누구보다도 싸고 빠르게 대규모로 제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입니다. 압도적 가성비(낮은 토큰당 비용)로 경쟁사를 압도하겠다는 거죠. 어떻게? 궤도 AI 컴퓨팅, 즉 우주 데이터센터를 통해서요.‘스페이스X는 궤도 AI 컴퓨팅을 대규모로 해결할 수 있는 전 세계 유일한 기업입니다. 우리는 AI 리더십이 컴퓨팅 용량을 신속하게 확장하는 능력에 따라 결정될 거라고 믿습니다.’스페이스X는 우주 데이터센터에 연간 100GW 전력을 공급하려면 인공위성을 실은 우주 발사체를 매년 수천번 발사해야 한다고 설명하는데요. 그걸 할 수 있는 건 스페이스X가 개발 중인 ‘스타십’ 밖에 없죠. 스타십은 궤도 진입비용을 과거의 100분의 1로 낮춰줄 초대형 발사체이니까요. 우주 데이터센터 구축을 해낼 수 있는 유일한 기업이라는 설명이 틀린 얘기는 아닙니다.‘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무료 핵융합 발전소’인 태양 에너지와 스타십의 저렴한 발사비용, 스타링크로 쌓아온 거대 위성군 운영 능력, 그리고 인텔·테슬라와 손잡고 설립하는 ‘테라팹(Terafab)’에서 생산할 AI 칩까지. 이 모든 걸 결합해 AI 시장의 절대 강자로 올라선다는 게 스페이스X의 야심 찬 계획입니다.머스크 하고 싶은 거 다 해! 어떤가요. 스페이스X의 계획이 그럴 듯하게 와닿나요? 사실 어쩌면 너무 거창해서 뜬구름 잡는 얘기처럼 보일 수 있는 이 계획에 현실성을 불어넣는 건 바로 이 사람이죠. 일론 머스크 스페이스X 이사회 의장 겸 CEO.머스크는 31살이던 2002년 스페이스X를 창업했고요.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봤던 로켓 재사용과 민간 우주 시대의 개막을 현실로 만들어낸 인물입니다. 사실상 머스크는 스페이스X 자체이죠. 배런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머스크가 없었다면 스페이스X의 가치가 얼마였을지를 정확히 말하기 어렵지만, 2조 달러는 아니었을 게 확실합니다.물론 그럼에도 스페이스X의 지배구조는 놀라움을 불러오는데요. 스페이스X 주식은 1주당 의결권 1표를 갖는 A주와 10표를 갖는 B주로 나뉘고요. B주의 93.6%를 보유한 머스크는 전체 의결권의 85.1%를 보유한다고 해요. 극단적인 1인 지배체제인 거죠.머스크는 오직 B주 주주의 투표에 의해서만 해임될 수 있는데요. 본인이 B주를 거의 다 가졌으니까, 사실상 해고는 영원히 불가능한 셈입니다. 뉴욕과 캘리포니아 공공 연기금 담당자들이 “미국 공개 시장에서 가장 경영진에게 유리한 지배구조”라며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고 밝힌 이유인데요.그럼에도 스페이스X에 투자하려는 자산운용사가 줄을 섰다는 게 중요하죠. 경영 감시 따윈 포기한 채 머스크의 천재성에 거액을 걸고 있는 셈입니다. 그가 테슬라에서 보여준 마법(10년간 주가 약 3000% 상승)이 재현될 거란 기대 때문이죠.스페이스X의 놀라운 인센티브 구조도 이를 반영하는데요. 머스크는 화성에 최소 100만 명이 정착하는 식민지를 만들고, 시가총액 7조5000억 달러를 달성하면 10억 주(B주)를 받을 수 있습니다. 또 우주 데이터센터 용량을 100테라와트까지 확장하면 추가로 3억 주를 받게 되고요. 목표도, 보상규모도 모두 황당할 정도로 어마어마한데요. 결국 그 목표 달성할 때까지 쭉 머스크가 회사를 이끌어가라는 뜻인 거죠.계획과 다를 수 있음 주의 모든 IPO 투자설명서엔 그 회사가 처한 위험요인이 빼곡히 적혀있습니다. SEC 제출 서류는 법적 구속력이 있어서, 허위정보를 적으면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인데요.그래서 투자설명서 앞부분은 거창한 사명과 비전으로 가득찼지만-‘우리는 인간이 공룡과 같은 운명을 맞길 원하지 않는다’, ‘생명체가 다행성에서 살 수 있도록 하고, 우주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하며, 의식의 빛을 별까지 확장한다‘- 뒤에 가선 스페이스X도 이렇게 솔직히 털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당사의 여러 계획, 예컨대 궤도 AI 컴퓨팅 등은 검증되지 않았거나 아직 존재하지 않는 기술을 수반하며, 상업적 타당성을 확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스타십의 개발이 실패하거나 지연되면 당사의 성장 전략이 지연되거나 제한될 수 있습니다.’ 과연 계획이 성공할 수 있을지, 얼마의 비용을 들여 언제쯤 달성 가능할지,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건데요. 하긴 돌이켜보면 테슬라 역시 마찬가지였죠. ‘3년 안에 완전 자율주행이 가능하다’(2015년), ‘2020년 로보택시를 상용화한다’(2019년), ‘3년 안에 2만5000달러짜리 보급형 전기차를 생산한다’(2020년)던 머스크의 약속은 아직도 실현되지 않았으니까요.‘알면서도 속아준’ 낙관주의자들이 결국 지금의 테슬라와 전기차 시대를 만들었는데요. 그게 과연 우주에서도 통할 수 있을까요. 투자자는 아니지만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그 답이 궁금합니다. By.딥다이브*이 기사는 5월 22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6-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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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메타에서 쫓겨난 괴짜 천재, ‘91조 방산 기업’으로 복수하다[딥다이브]

    ‘파괴적 혁신을 이끄는 괴짜 천재 창업가’라고 하면 누가 떠오르시나요?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팔란티어의 알렉스 카프?그들보다 훨씬 젊고, 경력과 외양 면에서 더 독특한 인물이 있습니다. 하와이안 셔츠를 입은 실리콘밸리의 거물, 팔머 럭키(Palmer Luckey) 안두릴 인더스트리(Anduril Industries) 창업자(1992년생)이죠.‘방산업계의 테슬라’, ‘팔란티어의 하드웨어 버전’으로 불리는 무기제조 스타트업 안두릴. 얼마 전 자금조달 라운드에서 기업가치 610억 달러(약 91조원)를 인정받으며, 설립 9년 만에 ‘세계에서 12번째로 큰 비상장 기업’으로 급성장했는데요. 현실의 ‘토니 스타크’를 꿈꾸는 엔지니어 기업인, 팔머 럭키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5월 20일(수요일) 발행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차고에서 코일건 만들던 소년 17살(2009년), 캠핑카에서 가상현실(VR) 헤드셋 시제품을 만들기 시작.20살(2012년), 크라우드펀딩 사이트에서 첫 번째 VR 헤드셋 제품 ‘오큘러스 리프트’가 대박.22살(2014년), 페이스북(현 메타)이 오큘러스를 20억 달러에 인수, 억대 자산가로 등극. (포브스 선정 ‘30세 이하 영향력 있는 30인’)25살(2017년), 정치적 이유(트럼프 지지)로 페이스북에서 해고당함.2017년 안두릴을 창업하기 이전까지 팔머 럭키의 경력입니다. 대단히 화려하죠? 아마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집안이 부유했거나, 운이 좋았겠지. 하지만 팔머 럭키의 오큘러스 스토리는 그렇게 뻔하지 않다는 게 재미있는 점인데요.자동차 딜러의 아들인 팔머 럭키는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대신 어머니의 홈스쿨링을 받았습니다. 산만하고 에너지 넘치고 공상과학 소설과 비디오게임에 푹 빠진, 본인 말대로 “요즘 같았으면 ADHD라고 했을” 아이였죠.시간이 많았던 럭키는 10대 시절 집 차고에 처박혀 지냅니다. 거기서 온갖 전자제품을 분해하고 조립하며 놀았죠. 12살쯤엔 홈디포에서 산 가죽장갑에 일회용 카메라 플래시 콘덴서를 잔뜩 붙인 ‘전기충격 장갑’을 만들었고요(금속을 뚫을 수 있었음). 전자기력으로 금속 탄환을 순식간에 가속해 날려 보내는 ‘코일건’을 제작하다가 감전 사고도 당했죠. 이 위험천만한 취미생활을 통해 그는 공학을 독학했습니다.17살에 대학(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롱비치캠퍼스 저널리즘 전공) 입학과 함께 집에서 쫓겨나 집 앞에 주차된 낡은 캠핑 트레일러에서 살게 된 럭키. 비좁은 트레일러 안에서 모니터 6대짜리 컴퓨터를 두고 ‘어떻게 게이밍 PC를 업그레이드할까’를 고민하다, 한가지 결론에 이릅니다. ‘게임의 궁극적 종착지는 가상현실(VR)이 될 것’이란 생각이었죠. 그때부터 그는 VR에 푹 빠졌는데요.당시는 VR 헤드셋이 ‘이미 실패로 끝난 기술’로 취급되던 시절입니다. 소니·도시바 같은 기업들이 1990년대 수천~수만 달러짜리 헤드셋을 내놨다가, 모두 처참하게 실패했기 때문이었죠. VR은 일종의 조롱거리에 불과했는데요.럭키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단종된 헤드셋 수십 개를 헐값에 사 모았어요. 그걸 뜯어보면서 왜 VR이 실패했는지를 연구했죠. 그리고 1년이 채 되지 않아, 스마트폰의 기성 부품들을 조합해 자신의 첫 번째 시제품을 탄생시킵니다. 고해상도 디스플레이와 저지연 센서 같은 스마트폰 부품 가격이 과거에 비해 폭락한 시점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죠.그는 이후 2년 동안 트레일러에서 50개 넘는 VR 헤드셋 시제품을 만들어 냈는데요. 당연히 부모님의 금전적 지원은 전혀 없었고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개발비를 마련하기 위해 쉼 없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죠. 고장 난 아이폰을 수리해서 되팔아서 짭짤한 수입을 올렸고, 롱비치 세일링 센터에서 요트 갑판 청소와 엔진 수리도 했어요.2012년 8월, 럭키가 VR 헤드셋 ‘오큘러스 리프트’ 판매 프로젝트를 크라우드펀딩 사이트 ‘킥스타터’에 공개합니다. 전에 없던 넓은 시야각(110도)을 제공하고 최초로 멀미 현상을 없앤 혁신적인 신제품이었죠. 처음 럭키가 기대했던 펀딩의 목표는 “부품, 제조, 배송, 신용카드/킥스타터 수수료를 충당하고, 축하 피자와 맥주를 사 먹을 10달러 정도만 남기는 것”. 그런데 이 프로젝트는 ‘둠(Doom)’을 개발한 3D 게임계의 전설 존 카맥의 지지를 받으면서 대박이 났고요. 오큘러스엔 거액의 투자금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성공 신화가 시작된 거죠.그리고 이 오큘러스 헤드셋에 반해버린 또 다른 괴짜 기업인이 있었으니. 바로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현 메타) CEO였어요. 그는 오큘러스 본사에서 차세대 헤드셋 시제품을 체험한 지 사흘 만에 오큘러스에 인수를 제안했죠. 2014년 3월, 오큘러스는 20억 달러에 페이스북에 팔립니다. 이 거래로 럭키는 단숨에 수억 달러의 순자산을 보유한 갑부가 됐죠. 부자가 된 기념으로 그는 12만 달러짜리 테슬라 모델S를 장만했어요. 타임지 표지를 장식한 22살의 성공한 기술 덕후의 앞날은 창창한 듯했죠.페이스북에서 쫓겨나다 럭키는 페이스북에 팔린 뒤에도 오큘러스에서 일했습니다. 여전히 VR 헤드셋의 성공을 위해 매진했죠. 오큘러스는 그에겐 ‘아이’ 같은 소중한 존재였으니까요.하지만 2016년 그 모든 게 물거품이 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트럼프 지지단체 ‘님블 아메리카’에 익명으로 9000달러를 기부한 후원자가 팔머 럭키란 사실이 언론에 공개된 거죠. 갑자기 ‘오큘러스 창업자가 인종·성차별주의적 밈을 만드는 단체를 후원했다’면서 온갖 비난이 쏟아졌어요.럭키는 가짜뉴스라며 맞서려 했어요. 님블 아메리카는 인종·성차별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페이스북 측은 이를 막았고, 오히려 그에게 트럼프 지지를 철회하라고 압박했죠. 거세지는 비난 여론 속에서 럭키의 사내 입지는 쪼그라들었고요. 결국 2017년 3월 페이스북은 럭키를 해고합니다. 그의 ‘아이’가 더 이상 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서 말이죠.럭키는 좌절하는 대신 복수심에 불탔습니다. “저는 경력의 정점에 있을 때 해고당했어요. 정말 화가 났고, 제가 단지 반짝스타가 아니라 여전히 큰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죠.”럭키는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마음먹었고요. 비만 퇴치, 교도소 개선 같은 사업을 고민하다가, 방위산업으로 결정합니다. 영화 ‘아이언맨’ 속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현실판을 만들기로 한 거죠. 새 스타트업은 영화 ‘반지의 제왕’ 속 아라곤의 검 이름에서 딴 ‘안두릴 인더스트리’. 오큘러스와 팔란티어 출신 엔지니어들이 여기에 합류합니다.판을 뒤집는 안두릴의 전략 팔머 럭키가 방위산업을 선택한 건 단지 어릴 적 취미 영향은 아니었어요. 실리콘밸리가 외면해 온, 가장 기술적으로 후진적인 분야였기 때문이죠. “기술 기업들은 국가 안보를 남의 문제로 치부했어요. 그 결과 테슬라의 AI는 어떤 미국 항공기보다 뛰어나고, 룸바는 미 국방부 무기 체계보다 자율 주행 능력이 뛰어나며, 스냅챗 필터는 최첨단 군사 센서보다 컴퓨터 비전 기술을 더 많이 사용하죠.”록히드마틴·보잉·제너럴 다이내믹스 같은 전통의 기업이 꽉 잡고 있는 방위 산업을 뒤흔들기 위해 안두릴은 세 가지 핵심 전략을 세웠습니다. 아예 판을 뒤집어버리려는 전략인데요.①‘내 돈 내 산’ 개발 방식: ‘방위 제품 회사’의 속도전=기존 방산기업은 화려한 파워포인트 발표로 계약을 따낸 뒤, 정부 예산으로 제품을 설계·개발하죠. 안두릴은 정부 자금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회사 자체 자금을 들여 제품을 만든 다음, 작동하는 완성품(시제품)을 들고 찾아가서 계약을 따내죠. 당연히 다른 기업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제품을 공급하게 됩니다.럭키는 기업이 자기 돈을 투자하며 위험을 감수해야만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고 설명해요. “두려움 속에서 사는 기업인지, 납세자들의 돈으로 라운지를 누리는 기업인지는 큰 차이를 만듭니다. ‘납세자들에게 연간 수천억 달러를 절약해 주면서 우리는 수백억 달러를 버는 것’이 안두릴이 할 일이죠.”안두릴이 보잉과 록히드 마틴을 제치고 2024년 4월 수주한 미 공군 최초의 자율 전투기 ‘퓨리’는 계약 체결 후 첫 비행까지 556일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하죠. 럭키는 “한국전쟁 이후 가장 빠른 신형 전투기 개발 기록”이라고 자랑스러워합니다.②무기의 두뇌를 지배하다: AI 운영체제 ‘래티스(Lattice)’=자율 전투기, 자율 탱크, 순항 미사일, 잠수함, 감시타워 등 안두릴의 모든 제품은 ‘공통된 두뇌’를 공유합니다. 바로 AI 운영체제 ‘래티스’인데요.럭키는 “안두릴은 래티스 개발부터 시작해 그 위에 다양한 제품을 개발했다”고 설명합니다. 하드웨어 중심인 기존 업체와 달리, 소프트웨어가 핵심인 거죠. 래티스가 ‘방산업계의 테슬라’로 불리는 것도 이런 소프트웨어 중심의 운영 때문인데요. 테슬라 전기차가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만으로 성능이 달라지듯, 무기체계 역시 코드 수정만으로 실시간으로 업데이트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AI를 이용해 무기 체계가 더 똑똑하고 강력해지죠.③과자처럼 찍어내는 무기: 대량생산으로 이기는 법=만약 미국이 중국과 지금 당장 전쟁을 벌이면 미군이 보유한 탄약이 단 8일 만에 동날 거라고 하죠. 드론전쟁 시대에 소수의 정교하고 비싼 무기로 맞서는 건 비효율적이란 점이 이란전쟁에서도 드러났는데요.안두릴은 자동차나 트랙터 생산라인에서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그런 무기를 만듭니다. 부품 수를 획기적으로 줄여서 제조공정을 단순화한 거죠. 예컨대 가성비 순항미사일 ‘바라쿠다’는 기존 미사일보다 부품 수가 90%나 적습니다. 그래야만 압도적인 무기 생산물량으로 적을 압도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인 전투함과 잠수함을 만들어서 포장지에 싸인 트윙키(방부제가 많이 든 과자)처럼 창고에 넣어 둘 겁니다. 그건 1000년 동안 보관할 수 있겠죠.”안두릴의 비전은 미군 현대화를 추진하던 미국 정부의 방향과 맞아떨어졌고요. 특히 트럼프 2기에 들어선 국방 예산 증액의 수혜를 톡톡히 보고 있습니다. 안두릴은 미 육군의 VR 헤드셋 프로젝트, 미 해병대의 드론 방어 시스템, 국방부의 저비용 순항 미사일 공급을 속속 따냈고요. 올여름엔 오하이오주에 무기 공장 ‘아스널 1’을 완공하고 무인전투기 초기 생산에 들어갈 예정이죠. 지난해 안두릴의 매출은 22억 달러, 체결한 계약은 60억 달러에 달합니다. 최근엔 앤드리슨 호로위츠가 주도한 50억 달러 신규투자를 유치하면서, 안두릴의 기업가치가 610억 달러(91조원)로 불어났어요. 1년 만에 두배가 된 거죠.물론 안두릴의 무기 제조 역량에 대해선 회의적인 시각도 나옵니다. 드론 추락, 무인 전투함 오작동 같은 테스트 과정의 실패가 이어졌고요. 미국 내 제조 공급망을 다시 구축한다는 건 여전히 쉽지 않은 과제니까요. 세마포 보도에 따르면 국방부 실세 스티븐 파인버그 차관조차 취임 초기엔 안두릴이 “진짜 회사”인지 아니면 “장난감만 만드는 회사”인지 의문을 제기했다는데요.하지만 팔머 럭키는 “똑똑한 사람들은 무언가를 하지 못할 수백만 가지 이유를 찾는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문제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처럼 생각하라. 만약 저 자신을 한마디로 정의해야 한다면 이겁니다. ‘팔머 럭키, 문제 창조자가 아닌 문제 해결사’” By.딥다이브*이 기사는 5월 20일(수요일) 발행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6-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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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부가 예금 뺏어갈라? 러시아인이 ‘은행 대신 유리병’ 찾는 이유[딥다이브]

    9일 러시아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열린 전승절 군사 퍼레이드. ‘강한 러시아’란 자부심을 고취시키는 이 국가적 행사가 올해는 유독 소박했습니다. 20년 만에 처음으로 탱크, 미사일 같은 무기가 하나도 등장하지 않았거든요. 정부는 보안 때문이라고 주장했지만 ‘과시할 무기가 없다’, ‘우크라이나 드론 공격이 무서워서다’라는 수군거림이 나왔죠.우크라이나와 전쟁을 벌인 지 어느덧 5년째. 러시아 국민은 지쳐가고, 한동안 반짝했던 경제마저 급격히 가라앉고 있어요. 이젠 ‘우리가 승리하고 있다’는 크렘린의 선전이 더 이상 먹히지 않는 분위기인데요. 푸틴 대통령의 운이 다해가는 걸까요. 흔들리는 러시아 경제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5월 15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종이지도와 삐삐의 부활인구 1300만명의 대도시에서 예고 없이 수시로 모바일 인터넷이 끊기면 어떻게 될까요. 내비게이션이 먹통이 되면서 운전자들이 길을 잃고, 신용카드 결제와 모바일 뱅킹이 막히고, 음식 배달기사와 온라인 쇼핑몰 사업자들은 주문이 끊기고, 은행엔 현금을 찾으려는 예금자들이 몰려들죠.이게 폭격 맞은 이란 테헤란 얘기가 아니고요.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서 지난 3월부터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특히 9일 전승절을 앞두고는 일반 휴대전화 통신까지 끊겨서 구급차조차 부를 수 없게 되어버렸었죠.시민들의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현지언론 보도에 따르면, 종이지도와 무선호출기(삐삐), 유선전화 판매가 급증하는 기현상이 나타났고요. 온라인 거래에 의존하는 소상공인이나 배달 기사는 생계마저 위협받을 위기에 처했죠.러시아 정부는 ‘인터넷 블랙아웃’이 방어를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주장합니다. 우크라이나 드론이 러시아 내부 기지국 신호를 이용해 공격해서 어쩔 수 없이 차단했단 거죠. 또 비슷한 이유로 러시아인이 가장 많이 쓰는 메신저 서비스 ‘텔레그램’ 접근까지 제한했어요(러시아 1억4500만 인구 중 약 9000만명이 이용). 우크라이나 정보기관이 텔레그램을 통해 러시아 민간인을 포섭할 수 있다면서요.하지만 정말 그게 이유일까요? 인터넷 차단해도 우크라이나 드론은 날아오던데?(스타링크 이용) 텔레그램을 버리고 러시아 정부가 만든 ‘맥스’ 메신저를 사용하라고? 이거 개인 메신저까지 검열하겠단 뜻 아닌가요?정보를 통제해서 비판적인 여론이 확산하는 걸 막으려는 러시아 정부의 빤한 의도를 눈치채지 못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시민들의 불만이 들끓고 있죠. 특히 정치나 전쟁에 무관심했던 이들까지 비판에 가세하기 시작했는데요.이런 민심의 변화를 보여준 대표적 인물이 유명 인플루언서 빅토리아 보냐입니다. 지난달 그가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푸틴 대통령께 드리는 호소’라며 18분짜리 영상을 올렸죠. “보안기관은 끊임없이 이것저것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정직한 러시아인들을 착취하고 이 나라에서 삶을 견딜 수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파티 참석이나 요트 타는 영상을 주로 올리던, 정치색이 전혀 없는 패션 인플루언서가 이토록 용감하게 사회비판 발언을 하다니. 이 영상은 3100만 조회수를 기록하며 단숨에 큰 화제가 됐고요. 결국 크렘린 대변인이 “영상이 다룬 주제에 대해 조사가 진행 중”이라고 언급해야 했죠.BBC 보도에 따르면 최근 러시아 대통령 행정실 건물 앞에는 수십 명이 긴 줄을 늘어선 이례적인 모습이 포착됐어요. ‘인터넷 검열과 차단을 중단해달라’고 촉구하는 청원서를 푸틴 대통령에게 전달하려는 사람들이었죠. 사실 러시아에선 이렇게 공개적으로 정부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현하는 건 특이하고 위험한 일이거든요. 그만큼 민심의 동요가 심상찮다는 뜻입니다.국영 여론조사 기관이 발표한 푸틴 대통령의 최근 지지율은 65.6%. 3월 73.3%에서 7주 연속 하락한 건데요.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이후 최저라고 하죠.2차 대전보다 길어진 전쟁 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난 지 4년이 지났지만, 러시아 국민 상당수는 한동안 전쟁에 무관심한 편이었습니다. 정부가 동원령을 내린 게 아니라 지원병 체제를 유지했기 때문이죠. 높은 입대 보너스(약 4300만원 수준)에 이끌린 가난한 시골 청년들만 주로 전쟁터로 나갔고요. 또 전쟁 때문에 노동력이 부족해지면서 실업률이 뚝 떨어지고 임금이 뛰는 바람에, 오히려 노동자 입장에선 먹고 살기가 괜찮았어요. 무기 공장이 24시간 쉼없이 돌아가면서 러시아 경제성장을 이끌었고요.하지만 2025년부터 슬슬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왜? 일단 전쟁이 길어도 너무 길어졌고요. 무엇보다 러시아 정부가 돈이 바닥났기 때문이죠.우크라이나 전쟁은 이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과 벌인 전쟁(러시아에선 ‘대조국전쟁’이라 칭함)보다도 길어졌어요. 지금 러시아 청년들은 증조할아버지 세대보다 더 긴 전쟁을 겪고 있는 셈이죠.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러시아군 사상자는 약 100만명. 점점 전쟁으로 다치거나 죽은 친척과 지인을 둔 사람들이 늘어만 갑니다.게다가 전쟁이 이제 국경지대만이 아니라 내륙까지 번졌어요. 그동안 우크라이나 장거리 드론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내륙 깊숙한 곳에 있는 정유시설과 항만까지 타격하기 때문이죠. 집 근처에서 울리는 폭발음이 전쟁을 실감케 합니다.오랜 전쟁과 서방의 제재로 러시아 정부 곳간은 빠르게 비어가고 있어요. 한해 예산의 40%를 전쟁에 쏟아붓고 있기 때문이죠. 러시아 연방 재무부가 집계한 올 1~4월 누적 재정적자는 약 800억 달러. 2026년 한 해 적자 목표치의 절반을 이미 훌쩍 넘어버렸습니다. 이란전쟁으로 유가가 뛰고 러시아산 원유 수출이 늘었다곤 하지만, 이 막대한 적자를 메우긴 역부족이죠.돈이 없으면 돈 나올 구멍을 어떻게든 만들어야겠죠. 그래서 러시아 정부는 지난해부터 세금과 공공요금을 무섭게 올리고 있습니다. 2025년엔 법인세율을 대폭 높이더니(20→25%), 올해는 부가가치세를 인상했죠(20→22%). 수입 차와 가전제품엔 ‘재활용 부담금’을 붙이고, 대기업엔 ‘횡재세(초과이윤세)’를 물리고, 해외 송금에 대한 ‘환전세’를 대폭 올렸고요. 한마디로 전쟁을 위해 온갖 세금을 올려서 국민들을 쥐어짜는 중입니다.민생과 직결된 공공서비스 역시 요금인상 폭탄이 터지고 있어요. 가스, 전기, 수도요금이 전국적으로 평균 12%씩 뛰었죠. 정부가 발표하는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5%대이지만, 아무도 그걸 신뢰하지 않습니다. 중앙은행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 국민이 현재 체감하는 물가상승률은 약 14%에 달하죠.곳곳에서 아우성이 터져나옵니다. 중소기업 면세 혜택이 사라지면서, 세금 때문에 가게 문을 닫는 동네 미용실, 식당, 카페가 늘어가고요. 적자 기업이 늘면서 러시아 회사채 시장 물량 중 25%가 디폴트(채무불이행) 위험에 처했다는 분석이 나오죠. 의료 예산이 부족한 탓에 일부 항암제 공급이 끊기면서 암환자들의 불만이 폭주하고요. 이 와중에 최근엔 이런 루머까지 돌기 시작했어요. ‘정부가 예산 적자를 메우기 위해 루블화 예금을 강제로 몰수하거나 동결할 거래.’물론 정부는 헛소문이라고 일축했지만, 불안감은 커집니다. 안 그래도 요즘 모바일 뱅킹이 자꾸 끊기는데, 이게 혹시 예금 동결과 관련 있나 싶은 거죠. 그래서 아예 은행에서 예금을 왕창 인출해서 현금을 집에 보관하는 사람들이 급증했어요. 연 13%에 달하는 예금이자를 포기하면서까지 말이죠. 1991년의 소련도 아니고 21세기 러시아에서 이게 뭔 일인가 싶은데요. 요즘 러시아에선 ‘반크(러시아어로 은행) 대신 반카(유리병)’이란 씁쓸한 언어유희가 유행이라고 합니다.군사 주도 성장의 한계올해 1분기 러시아 GDP 성장률은 -0.3%. 2023년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했고요. 12일 러시아 경제개발부가 수정한 올해 경제성장률은 0.4%. 지난해 9월 전망치(1.3%)를 대폭 낮췄습니다. 알렉산드로 노박 부총리는 인터뷰에서 “고성장 이후 조정이 뒤따르는 건 정상”이라면서도 “지출 우선순위 설정”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강조했죠. 한마디로 정부가 돈이 부족하니까 아껴 써야 한단 뜻입니다.이게 바로 군사지출로 만든 성장의 한계입니다. 정부가 빚을 내서 무기를 생산하면 당장은 GDP를 끌어올리는 효과가 있죠. 하지만 전쟁으로는 경제의 선순환을 만들어낼 수가 없어요. 탱크나 미사일은 전장에서 파괴되고 사라질 뿐, 새로운 부를 창출해내지 못하니까요. 오히려 전쟁으로 모든 자원(인력과 자본)을 빼앗기면서 민간 부문은 말라 죽어가고 있습니다. 성장의 기반 자체가 무너지는 거죠.러시아는 오는 9월 총선을 앞두고 있습니다. 현재 집권여당인 통합러시아당 지지율은 30% 아래로 추락했어요. 여당 지지율과 푸틴 대통령 지지율은 별개이지만, 그래도 민심 이반을 드러내주는 수치이죠.그럼 혹시 이번 총선에서 여당이 참패하면 푸틴 대통령의 권력 기반도 흔들리는 거냐고요? 에이, 그럴 리가요. 일단 러시아 정부는 선거를 조작해서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낼 능력이 있고요. 어차피 의회 내 야당은 사실상 크렘린에 맞서지 않는 ‘관제 야당’에 불과하거든요. 선거 하나로 푸틴 시대가 저무는 그런 일은 러시아에선 일어나지 않습니다.그래도 선거인데, 푸틴 정권으로선 신경 쓰일 수밖에 없긴 하죠? 바로 그게 요즘 인터넷 검열이 부쩍 강화된 이유라는 해석이 나옵니다. 특히 구 소련의 비밀경찰 KGB를 계승한 정보기관 연방보안국(FSB)이 이런 ‘디지털 철의 장막’ 구축의 중심에 있다고 하죠.하지만 터져 나오는 민심을 언제까지 억지로 틀어막을 수 있을까요. 역사를 보면 1917년 러시아 혁명은 황제에게 바치는 민중의 청원 행렬을 군대가 총칼로 제압한 ‘피의 일요일’ 사건(1905년)이 단초가 됐습니다. 민심을 억누르면 오히려 더 큰 폭발로 이어진다는 것, 그걸 가장 잘 기억하는 나라는 다름 아닌 러시아입니다. By.딥다이브*이 기사는 5월 15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6-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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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I가 내 일자리 뺏을까? ‘창조적 파괴’가 답하다[딥다이브]

    컴퓨터 프로그래머, 고객 서비스(CS) 담당자, 데이터 담당자, 시장 애널리스트…. 앤트로픽이 ‘인공지능으로 대체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던 직업들이죠. 미국에선 AI 영향으로 이미 신입 회계사와 컨설턴트 채용이 줄고 있단 소식도 들리는데요.그래서 이런 질문이 끊이지 않습니다. 인공지능(AI) 기술 혁명은 인간의 일자리를 사라지게 만들까요?이에 대한 논의는 수도 없지만, 이 개념으로 많은 걸 설명할 수 있겠죠. 창조적 파괴(Creative Distruction). 결론부터 말하자면 AI 같은 기술 혁명은 일자리의 상실과 창출, 두 가지 모두를 가져오고요. 그 역동성 속에서 성장이 싹 틀 겁니다.이 ‘창조적 파괴’로 2025년 노벨경제학상을 공동수상한 피터 하윗 브라운대 교수가 14일(목요일) ‘2026 동아국제금융포럼’의 기조 강연을 할 예정인데요. 그의 방한을 기념해 ‘창조적 파괴’와 성장으로 가는 길을 들여다보겠습니다. 2021년 출간된 책 ‘창조적 파괴의 힘(필리프 아기옹, 렐린 앙토냉, 시몽 뷔넬 지음)’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했습니다. *이 기사는 5월 12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200년을 관통하는 성장의 원리 창조적 파괴. 오스트리아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가 1942년 저서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에서 제시한 개념이죠. 이후 피터 하윗과 필리프 아기옹이 1992년 슘페터의 아이디어를 수학적 모델로 발전시키면서, 관련 후속 연구가 쏟아져 나오게 됐는데요.기초 개념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①기술 혁신이 경제성장의 근본 동력이다. ②새로운 혁신은 기존 혁신을 파괴한다. 너무 뻔한 얘기 아니냐고요? 디지털카메라에 밀린 코닥, 아이폰과의 경쟁에서 진 노키아, 온라인 쇼핑에 밀려 문 닫는 대형마트, 넷플릭스로 타격받은 케이블TV, 중국 전기차 공습에 고전하는 독일 자동차 업계 등. 창조적 파괴와 관련지을 만한 사례는 수없이 많죠. 2000년대 IT 혁명을 이미 겪었고, 2020년대 에너지 대전환과 AI 기술 혁명을 지켜보고 있는 우리 입장에선 익숙한 이야기일 수 있는데요.슘페터는 1940년대에 이미 이를 간파했다는 점이 놀랍지 않나요? ‘창조적 파괴’는 물레방아와 풍차를 대체한 ‘증기기관 혁명’이 일어난 1820년대 이후 줄곧 반복되어 온 경제성장의 원리입니다. 증기기관·전기·철도·자동차 등, 지난 200여년 간 벌어진 모든 기술 혁명을 관통하는 개념이죠.이 논리에 따르면 더 많은 창조적 파괴가 일어날수록 경제는 더 빠르게 성장합니다. 즉, 기술혁신으로 새로운 기업이 떠오르고(창조) 도태된 기업이 밀려나는 일(파괴), 두 가지 모두 활발한 게 성장을 위해선 가장 좋은 일이죠.정말 그럴까요? 지난해 노벨경제학상 위원회가 소개했던 미국의 산업별 그래픽을 한번 보시죠.ⓐ새로운 일자리가 활발하게 만들어질수록 ⓑ새로운 기업(법인)이 많이 들어올수록 ⓒ새로운 사업체(지점 또는 공장)가 많이 생길수록 ⓓ비효율적 사업체가 많이 퇴출될수록, 그 산업의 노동생산성이 높다는 걸 보여주는 그래프입니다. 성장하는 산업은 진입과 퇴출, 모두 활발한 역동성이 특징으로 나타났죠. 반대로 물갈이 없이 현실에 안주하는 ‘고인물’만 가득한 산업은 성장성이 떨어집니다.파괴의 고통을 줄이려면 요약하자면 ‘기술혁신으로 쓸모없게 되어버린 제품과 기업이 퇴출돼야, 거기 묶였던 자원(노동력과 자본)이 재배치되면서 경제가 성장할 수 있다’라는 게 창조적 파괴의 핵심 논리입니다. 경제 성장을 위해선 ‘창조’만이 아니라 ‘파괴’도 필수인 거죠.혁신은 생산성을 끌어올리기에, 경제 전체로는 ‘혁신으로 사라지는 일자리<새로 생긴 일자리’가 됩니다. 과거 기술 혁명의 역사를 돌이켜봐도, 우려했던 대규모 실업사태가 일어난 적은 없었죠. 피터 하윗 교수는 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인구의 50%가 농장에서 일했던 150년 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150년 뒤에는 인구의 1% 정도만 농업을 한다’고 하면 그들이 믿겠는가. 또 이들이 나머지 49%가 무슨 일을 할지 상상할 수 있겠나. 제트기 조종사, 자동차 정비사, 블로거 같은 직업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 지금의 AI 혁명 역시 우리가 상상도 못 할 새로운 직업과 기회를 열어줄 날이 오겠죠.하지만 이거 어딘가 좀 불편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개인에 초점을 맞추면 낙관적이기가 쉽지 않거든요. 기업 폐쇄로 실업자가 된 사람이 한창 떠오르는 혁신산업에 합류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예컨대 미국 피츠버그는 철강산업이 붕괴한 뒤 ‘생명공학 허브’로 거듭났고, 조선업이 몰락한 스웨덴 말뫼는 이제 친환경 대학도시로 변신한 지 오래인데요. 그렇다고 해서 과거 그 지역에서 일자리를 잃었던 이들의 고통이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바로 이 점에서 연구자들이 강조한 게 사회 안전망입니다. 창조적 파괴는 필연적으로 일정 부분 실업의 위험을 높이기 때문에, 이들을 보호해 줄 제도를 국가가 고민해야 한다는 거죠. 그 대표적인 사례가 덴마크의 ‘플렉시큐리티’ 제도인데요. 덴마크는 기업의 직원 해고가 쉬운 대신, 실직자엔 최대 3년간 임금의 90%(현재 상한액 약 월 470만원)를 실업수당으로 지급합니다. 그 결과, 미국과 달리 덴마크에선 직장 폐쇄로 일자리를 잃은 경우에도 노동자의 건강상태나 사망률이 악화하지 않았다고 하죠.IMF 외환위기의 역설전기차 시장을 가장 앞서 개척한 테슬라나 AI 업계의 선두주자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 중인 오픈AI와 앤트로픽 같은 기업은 모두 스타트업으로 출발했죠. 대체로 과감한 혁신을 주도하는 건 신규 진입자들입니다. 잃을 게 없기 때문에 더 파격적으로 치고 나올 수 있는 거죠.이에 비해 대기업일수록 이미 장악한 시장을 파괴할까봐 혁신에 소극적인 경우가 많고요. 심지어 적극적으로 혁신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정부에 로비해서 규제 문턱을 높여 새로운 기업의 진입을 막는 거죠. 혁신은 뒷전인 채 정치적 연줄에만 신경 쓰는 대기업은 성장의 적입니다. 결국 성장을 위해 정부는 경쟁을 촉진하는 개방적인 경제정책을 펼치는 게 중요한데요. ‘창조적 파괴의 힘’에서 그 대표 모범사례로 꼽은 게 한국입니다. 역설적으로 1997년 외환위기의 충격이 한국이 ‘중진국 함정’에 빠지지 않고 경제적 도약을 이루게 했다고 보는 거죠.당시 한국은 IMF 요구로 해외투자자의 지분 투자 한도를 대폭 높이고, 독과점 기업에 대한 규제는 대폭 강화하는 식으로 제도를 바꿔야만 했고요. 그 결과 “재벌 기업과 정부의 야합에 의해 방해받던 ‘비재벌’ 기업의 혁신을 촉진함으로써 재벌의 영향력을 제한하고, 한국을 경쟁에 개방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게 연구자들의 분석입니다. 반강제적으로 이뤄진 경제 개혁이 이후 혁신을 이끈 동력이 됐다는 거죠. IMF 외환위기 당시 우리 국민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생각하면, 왠지 묘한 기분이 드는 해석입니다. 예측 대신 행동하라 ‘중국발 공급과잉 충격’은 전 세계적인 화두입니다. 2001년 중국의 WTO 가입 이후 중국산 값싼 수입품이 각국으로 쏟아져 들어왔고요. 이로 인해 시장을 잃고 밀려나는 제조업 기업이 점점 늘어만 가는데요.그럼, 자국 기업의 혁신 의욕을 꺾는 중국산 수입품을 밀어내는 게 답일까요? 관세 방어막을 높이 세워서?프랑스에서 이뤄진 연구 결과는 좀 달랐습니다. 중국발 충격이 기업에 미치는 영향 자체가 제각각이었거든요. 연구진은 이를 ‘공부를 매우 잘하는 전학생이 새로 온 학급’에 비유해 설명하는데요. 원래 성적이 좋았던 학생이라면 전학생에 자극을 받아서 전보다 공부를 더 열심히 할 테지만, 그 반대 경우엔 의욕만 떨어져서 공부를 손 놓게 됩니다. 기업도 마찬가지였는데요. 생산성 상위 10%였던 프랑스 기업은 중국산이 밀고 들어오자, 혁신의 속도를 오히려 더 높였고요. 이와 달리 하위 10% 기업은 더 가라앉고 말았습니다.무엇보다 관세 장벽은 중국의 보복 조치를 불러와서 수출을 가로막을 테니, 성장엔 부정적이고요. 또 관세 장벽이 있으면 국내 기업이 굳이 국내 시장을 지키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게 되니 혁신이 줄어드는 부작용을 초래합니다. 필리프 아기옹 콜레드 주 프랑스 교수가 지난해 노벨경제학상 수상 직후 기자회견에서 최근의 탈세계화 추세를 두고 “이제 먹구름이 몰려오는 것 같다”고 걱정했던 이유이죠.그럼, 중국산 수입품이 국내 시장을 휘젓도록 그냥 두고 보란 말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이들이 제시하는 해법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정부가 연구개발을 지원하는 겁니다. 기업의 연구개발을 촉진하는 세액공제나 보조금, 금융지원은 물론이고요. 1958년 스푸트니크 쇼크로 탄생한 미국 국방부 산하 DARPA(국방고등연구계획국)처럼 국가가 직접 예산을 들여 기초연구에 투자할 필요성도 강조합니다. 물론 상당한 예산이 드는 일이긴 한데요. 이로 인해 생산성이 높아지고 가계 소비가 늘어나는 효과가 비용을 상쇄하고도 남을 겁니다.‘창조적 파괴의 힘’에서 저자들은 이렇게 강조하죠. “자본주의는 혈기왕성한 말과 같아서 제어 불가능할 정도로 날뛸 수도 있다. 하지만 고삐를 단단히 조이면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달릴 수 있다.” 어쩐지 프랑스 작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성채(Citadelle)’ 속 유명한 구절이 떠오르는군요. “미래에 대한 당신의 임무는 예측하는 게 아니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By.딥다이브2026 동아국제금융포럼 5월 14일 오전 9시 서울 중구 롯데호텔 크리스탈볼룸(등록 및 안내: 동아인사이트 홈페이지 www.dongainsight.com)*이 기사는 5월 12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6-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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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혼다 넘은 스즈키, 약자는 어떻게 승리할 수 있나[딥다이브]

    일본 자동차 시장에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2025년도 신차 판매 2위 자리에 혼다를 제치고 사상 처음으로 스즈키가 올라섰어요. 특이한 건 스즈키가 수입차 판매 1위까지 차지했다는 거죠. 인도에서 생산한 스즈키 차량이 일본으로 역수입돼 돌풍을 일으킨 겁니다.44년 전 불모지나 다름없던 인도 자동차 시장에 진출했던 스즈키. 그 도약의 중심엔 고 스즈키 오사무 전 회장(1930~2024년)이 강조했던 ‘중소기업형 경영’이 있죠. 약자가 승리하는 방법이 뭔지를 보여주는 사례, 스즈키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5월 8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인도산 스즈키’가 이룬 역전‘경차의 강자’. 일본 자동차 브랜드 스즈키의 오랜 별명이죠. 그 명성은 1979년 경차 ‘알토’를 47만 엔이란 충격적인 저가에 출시하면서부터 시작됐는데요. 라디오는 물론 시가 라이터까지, 일체의 낭비와 장식을 생략한 알토는 당시 ‘경차=최소 60만 엔’이었던 시장의 공식을 파괴했고요.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일본에 ‘경차 전성시대’를 열었습니다.스즈키는 일본에선 지금도 경차로 유명하죠. 하지만 2025년도(2025년 4월~2026년 3월) 스즈키가 사상 처음 일본 신차(승용차) 판매 2위로 올라선 건 경차 덕분이 아니었습니다. 소형 SUV ‘프롱크스’와 오프로드 SUV ‘짐니 노마드’가 성장을 견인했죠. 특히 짐니 노마드는 단 4일 만에 5만 건 넘는 사전 주문이 몰려 예약 접수를 중단해야 했을 정도로 인기가 폭발적이었다고 해요.프롱크스와 짐니 노마드는 모두 인도산 차량입니다. 스즈키의 인도 합작사인 마루티 스즈키의 현지 공장에서 생산됐어요. 그래서 지난해 스즈키의 약진은 일본 수입차 시장의 판도까지 뒤흔들었죠. 독일 3사(메르세데스-벤츠, BMW, 폭스바겐)가 장악했던 수입차 시장 1위에 처음으로 스즈키가 오른 겁니다.여러모로 새로운 현상이라 하겠는데요. 그만큼 인도산 스즈키 차량의 품질을 일본 소비자도 신뢰한다는 뜻이겠죠. 마루티 스즈키는 인도에선 40% 안팎의 압도적 점유율로 부동의 1위를 지키는 최대 자동차 제조사이니 말입니다.인도에서의 탄탄한 입지 덕분에 스즈키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죠. 인도 자동차 시장이 무섭게 성장해 어느덧 일본을 제치고 세계 3위 판매량을 기록 중이니까요. 스즈키는 2012년 미국, 2018년 중국 시장에서 일찌감치 철수했는데요. 그 덕분에 트럼프 관세 폭탄과 중국 전기차와의 혈투를 피하게 됐습니다. 세계 1, 2위 자동차 시장을 모두 포기한 덕분에 되레 잘 나가고 있는 셈이죠. 미국에 치이고 중국에 밀려서 적자 수렁에서 허우덕 대고 있는 혼다, 닛산과는 대조적입니다.그럼 스즈키는 어떻게 40여 년 전에 인도에 진출할 생각을 했을까요. 인도 시장의 놀라운 잠재력을 간파한 선견지명 덕분일까요? 이에 대해 고 스즈키 오사무 전 회장은 “선견지명은 없다”고 여러 번 밝혔습니다. “대기업처럼 선진국에 진출하고 싶었지만, 경차를 만들어 달라는 나라는 없었다”면서 말이죠. 2021년 퇴임 기자회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냥 직감에 의존하는 편이었죠. 막무가내로 나아가다 보니 인도가 보였고, 상륙해 보니 꽤 잘 풀렸습니다. 지구상에는 아직 보지 못한 새로운 땅이 있으니 계속 걸어가세요. 행동력으로 발견해 나가면 괜찮을 겁니다.”꼭 1등을 하고 싶었다 1980년대 초, 스즈키의 경차는 꽤 인기를 끌었지만 여전히 일본 자동차 업계 순위에선 하위권이었습니다. 도요타나 닛산, 혼다 같은 대형 자동차 제조사와 비교하면 자본과 기술, 모든 면에서 열세였고요. 솔직히 게임이 되질 않았죠. 그런데도 스즈키 오사무 당시 사장은 “어딘가에선 1위를 차지하고 싶다”고 강렬히 열망했습니다.“일본 시장은 어디나 똑같다. 어느 현이든 1위는 도요타, 2위는 닛산이다. 후발 주자인 스즈키가 어느 현에서 1위를 차지한다는 건, 고향인 시즈오카에서도 무리다. 그렇다면 해외로 나가서 1위를 차지하자. 1위를 차지하면 직원 사기는 올라간다. 하지만 선진국에선 스즈키가 잘하는 소형차론 이길 수 없다. 자동차 제조사가 없는 나라에 진출하면 틀림없이 1위가 될 수 있다. 간단하다.” 그렇게 기회를 엿보던 1982년, 오사무 사장은 파키스탄 출장 중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인도 정부가 국민차 생산을 위한 합작 파트너를 찾고 있다’는 신문기사를 보게 됩니다. 그는 곧바로 인도대사관을 찾아갔고요. 이미 모집 마감 기한이 지난 후였지만, 간신히 마지막 예비후보로 이름을 올렸죠.얼마 뒤 인도 정부 대표단이 일본으로 찾아왔어요. 그들은 도요타, 닛산, 미쓰비시 같은 주요 자동차 회사를 먼저 만났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난 스즈키 사장은 공장 배치도를 보여주며 열정적으로 의지를 피력합니다. “스즈키는 대형 자동차 제조사만큼 충분한 자금은 없습니다. 하지만 정성을 다해 기술을 전수해 드릴 수 있습니다.”당시 다른 기업 CEO들은 인도 대표단에 잠깐 얼굴만 비친 뒤, 협상은 임원한테 맡겼다고 해요. 기술 이전에 대해서도 구식 모델만 할 수 있다는 식의 소극적 태도였고요. ‘인도에서 차가 팔려봤자 얼마나 팔리겠어’라며 시큰둥했던 거죠. 인도 시장에 진심이었던 CEO는 스즈키 사장뿐이었습니다. 그 엄청난 열의가 인도 대표단을 사로잡았죠.하지만 스즈키 내부에서조차 인도 진출은 무모하다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당시 인도는 연간 자동차 판매량이 고작 4만대 미만인 보잘것없는 시장이었고요. 인프라와 기술력, 노동환경, 규제 등 모든 조건이 척박하기 짝이 없었죠. ‘성공할 리 없다’는 주변의 경고와 설득이 이어졌지만, 그해 10월 스즈키 사장은 인도 정부와의 합작 계약에 서명합니다. 스즈키가 50억 엔(초기 지분율 26%, 현재는 56%)을 투자해 인도 합작사 ‘마루티 스즈키’가 출범했죠.1983년 12월, 합작법인의 첫차 ‘마루티 800’이 나왔습니다. 인디라 간디 총리가 직접 1호차 열쇠를 전달했을 정도로 국가적인 이벤트였죠. 일본 스즈키의 경차 ‘알토’를 기반으로 만든 작고 세련된 디자인과 뛰어난 연비(L당 15~18㎞), 저렴한 가격(400만원대)까지. 인도 최초의 국민차 탄생에 인도인은 열광했고요. 마루티 800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이후 십수 년간 인도 승용차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합니다. 인도식 실행력과 일본식 시스템자신만의 강점(소형차 기술력+비용 절감)을 살릴 수 있는 틈새시장을 집중 공략해 성공을 거둔 스즈키. 하지만 인도 문화에 일본식 경영을 접목한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죠. 특히 인도의 주가드(Jugaad), 즉 ‘대충 돌아가게 만들면 된다’는 임기응변식 사고방식과 일본의 엄격한 장인정신 ‘모노즈쿠리’, 이 둘은 달라도 너무 달랐는데요.마루티 스즈키를 설립 단계부터 이끌어온 인도인 경영자 R.C. 바르가바는 “마루티 스즈키가 불가능을 가능케 한 기적을 일으킨 건 팀워크·기술·시스템이라는 일본식 경영과 신속한 의사결정이란 인도의 특징이 상충하지 않고 훌륭한 조화를 이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많은 인도 노동자들이 일본 연수 프로그램을 통해 일본의 정교한 생산 시스템을 직접 배웠고요. 스즈키는 인도 근로자의 창의적 해결법을 현장개선(카이젠)에 활용했죠. 이를 통해 인도의 울퉁불퉁한 도로에 맞춰 차바닥을 조금 높이고, 먼지와 고온에 맞춰 에어컨 성능을 강화하는 식의 현지화가 이뤄졌습니다. 일본식 제조 철학과 인도식 실행력이 결합한 독특한 기업 문화가 탄생한 거죠. 1983년 ‘마루티 800’ 탄생과 함께 본격화한 인도 자동차 산업의 이후 성장세는 눈부실 정도입니다. 2025 회계연도(2025년 4월~2026년 3월) 인도에서 판매된 승용차는 무려 464만대. 이제 판매량에서 인도는 세계 3위의 자동차 시장이고요(1위 중국, 2위 미국). 생산 대수에선 중국·미국·일본에 이어 세계 4위입니다.스즈키의 인도 공장 연간 생산량은 210만대. 일본 내 생산량(99.5만대)의 두배를 이미 넘었고요. 인도에서 생산한 차량이 중남미와 중동, 아프리카, 그리고 이제 일본까지 수출되고 있습니다. 스즈키는 지난해 발표한 ‘중기 경영계획’에선 2030년까지 인도 내 생산능력을 400만대로 확대할 거라고 밝혔죠. 300만대는 인도 내수 시장, 100만대는 아프리카 등 세계시장 수출용이 될 거라고 합니다. 인도가 스즈키의 가장 중요한 시장이자 글로벌 수출 거점이 되는 거죠.화려함 대신 ‘딱 좋다’를 팔다“자동차 산업의 미래 같은 거창한 이야기는 대기업에 물어보라. 스즈키는 하마마츠의 중소기업일 뿐이다.” 인도 시장의 놀라운 성공 뒤에도 고 스즈키 오사무 전 회장은 늘 스즈키를 ‘중소기업’이라고 칭했습니다. 2009년 펴낸 자서전 제목도 ‘나는 중소기업 사장이다’였고요.이는 단순한 겸손의 뜻이 아닙니다. 기업 규모가 커져도 ‘중소기업의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담겨있죠. 현 CEO인 스즈키 토시히로 사장 역시 ‘중소기업형 경영’이 스즈키의 중요한 행동 이념이라고 강조하는데요.스즈키의 중소기업형 경영방식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 중 하나가 금융 자회사가 없다는 점입니다. 보통 대형 자동차 제조사는 자동차 대출을 취급하는 금융 자회사를 운영하잖아요. 그래야 금융 프로모션으로 판매를 촉진할 수 있으니까요. 스즈키는 그게 없어요. ‘작고 좋은 차를 만든다’는 본업에만 집중하기 위해서죠. 덕분에 스즈키는 자동차 제조사 중 자산수익률(ROA)이 10.73%로 유독 높습니다(2025년 기준). 방대한 자산이 필요한 금융 자회사가 없으니 자산 효율성이 높아질 수밖에요.자체 기술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업계 선두주자와의 제휴에 적극적이란 점도 특징인데요. 스즈키는 1981년엔 미국 제너럴모터스(GM), 2009년엔 폭스바겐과 제휴 관계를 맺었었죠. 물론 폭스바겐이 친환경 기술은 제대로 주지 않고 자회사 취급을 하는 바람에, 둘의 관계는 국제소송전으로 번졌고 결국 파탄 났지만요. 이후 2016년 스즈키 오사무 당시 회장이 직접 도요타 쇼이치로 당시 명예회장을 찾아가 요청하면서 ‘도요타-스즈키 연합’이라는 강력한 동맹이 탄생했고요(도요타가 스즈키 지분 5% 보유). 이제 전기차와 하이브리드, 자율주행 기술 개발과 관련해 두 회사는 공고한 협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결국 강점을 살릴 ‘이길 수 있는 영역’을 택하고 다른 데로 눈 돌리지 않는 지독한 ‘선택과 집중’이 지금의 스즈키를 만든 전략인데요. 그래서 스즈키에 대해선 미래지향적 기술 혁신이 부족하단 비판도 나오지만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작고 가벼운 차를 싸게 잘 만드는 것 자체가 남다른 기술이라고 믿기 때문이죠.“고객 여러분이 ‘딱 좋다’, ‘이걸로 충분해’라고 느낄 수 있는 자동차를 계속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가볍고 안전하면서, 필요 이상으로 호화롭고 복잡한 장비를 피하는 것, 그리고 단순하고 사기 쉬운 가격을 중시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성능이라고 고객이 구매해 주지 않으면 좋은 상품이라 할 수 없으니까요.” (스즈키 토시히로 사장의 2025년 인터뷰) By.딥다이브*이 기사는 5월 8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6-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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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한애란]은퇴 자금 7조원 몰린 ‘착시의 금융’

    ‘연금’ 또는 ‘노후 현금 흐름’을 얘기하는 주변인이 늘어가는 걸 보면서 나이를 실감한다. 2∼3년 전만 해도 투자와 담쌓고 지냈던 친구들도 이제 이런 질문을 한다. “개인형 퇴직연금(IRP) 또는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에 담을 만한 상장지수펀드(ETF)로 뭐가 있을까?” 정년 연장이 논의되고 있다지만, 월급 없이 30∼40년을 지낼 생각을 하면 솔직히 막막하다. 은퇴까지 남은 몇 년 동안 열심히 투자해서, 죽을 때까지 생활비 걱정은 면할 만한 현금 흐름은 만들어 두고 싶다. 국민연금 빼고 월 200만 원 정도? 기왕이면 300만 원?안정적으로 돈 벌고 싶단 욕구 2030에 비해 모아둔 자산은 많지만, 다가오는 은퇴로 불안한 4050세대. 이들의 투자 성향은 모순적이다. 자산을 불리고는 싶지만, 삐끗해서 원금을 잃을까 두렵다. 앞으로 5∼10년이 자산 성장을 극대화할 마지막 기회이지만, 지금 망하면 재기할 시간이 부족하다고 여겨서다. 그래서 ‘안정적인데 기대 수익률은 높은’ 금융상품을 찾게 된다. 이 무슨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소리인가 싶다. 그런데 이 모순적 욕구를 교묘하게 파고드는 상품이 있다. 바로 ‘커버드콜’이란 이름이 붙은 월 배당 ETF다. 연 15% 안팎에 달하는 분배금을 매달 현금으로 꽂아준다는 특징이 있다. ‘월급처럼 세후 200만 원 꼬박꼬박’이란 홍보 문구가 예비 은퇴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커버드콜이란 주식을 보유하면서, 그 주식의 주가가 오를 때 수익 낼 권리(콜옵션)를 팔아 현금을 챙기는 걸 말한다. 이런 전략 때문에 커버드콜 ETF는 주가가 크게 오르지 않아도 높은 분배금을 나눠줄 수 있다. 요즘엔 보유한 주식 전부가 아니라 일부만 콜옵션을 팔고, 나머지는 그대로 보유해 주가 상승분까지 챙기는 2세대 커버드콜 ETF가 대세다. 안정적인 현금 확보와 주가 상승 수익,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기 위해서다. 설명대로라면 환상적이다. 지난 1∼2년 과거 수익률 기록도 상당히 좋다. 게다가 국내주식형 커버드콜 ETF는 배당소득세도 거의 없다니 더 솔깃하다. ‘배당+성장 다 잡는다’, ‘원금 안 까먹고 월 300 나온다’며 월 배당 ETF를 홍보하는 유튜브 영상이 수도 없이 쏟아진다. 올해 들어 커버드콜 ETF엔 7조 원 넘는 투자금이 몰려, 순자산이 50% 가까이 불어났다.‘원금이 감소할 수 있음’ 하지만 생각해 보자. 원금이 깎이지 않고 영원히 연 15% 분배금을 지급한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미국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의 역사적 연평균 수익률도 약 10%에 불과하다. 지수를 5%나 초과한 수익률을 계속 이어간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자산운용사는 상품설명서에 이렇게 명시하고 있다. “이익금을 초과하는 분배금 지급 시 원금이 감소할 수 있음.” 이익이 안 나면 원금을 깎아서 분배금을 주겠다는 뜻이다. 높은 분배율만 보고 투자했다가, 자칫 해지하려고 보니 원금이 쪼그라들게 될 수도 있다. 이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채 은퇴 자산을 투자한다면 자칫 낭패를 볼 우려가 있다. 무엇보다 자산운용사의 수익 구조를 따져보자. 코스피200 같은 지수를 추종하는 일반 지수형 ETF의 수수료율은 0.01∼0.03%에 불과하다. 수수료가 매우 저렴하다는 게 ETF의 큰 강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커버드콜 ETF는 수수료율이 0.5% 안팎으로 수십 배 더 비싸다. 운용사들이 앞다퉈 새로운 커버드콜 ETF 출시에 열을 올릴 수밖에 없는 진짜 이유다. 노후에 대비한 투자는 필요하다. 하지만 모든 투자엔 원금 손실의 위험이 따르는 법이고, 자산운용사는 고객 수익률과 상관없이 상품을 많이 팔아야 돈을 버는 구조다. 은퇴를 준비하는 개인 투자자라면 이 기본 규칙을 명심해야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한애란 경제부 기자·부장급 haru@donga.com}

    • 2026-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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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짜 부자는 누구인가? 브라질 상위 0.1%에 대한 인류학 보고서[딥다이브]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자는 동경의 대상이죠. 특히 타고난 부자, 예컨대 재벌 2세나 3세의 삶은 강렬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들이 입는 것, 먹는 것, 노는 것의 사소한 부분까지 모두 궁금증을 유발하죠.좀처럼 닿기 어려운 최상위 부자들의 삶을 제 3자 시선으로 관찰해 기록한 흥미로운 책이 있습니다. 아쉽게도 한국은 아니고요. 브라질 인류학자 미셸 알코포라도가 브라질의 상위 0.1% 부자 80여 명(상위 0.01% 부자 60명 포함)을 인터뷰해 쓴 책 ‘부자들의 것(Coisa de Rico)’인데요. 2025년 8월 출간해 지난해에만 10만권 넘게 팔리며 큰 화제를 끌었죠. 흥미로운 가십과 통찰력 있는 인류학 논문이 뒤섞인 듯한 이 책의 핵심 내용을 간추려 소개합니다. 아마 한국 상황과도 오버랩되는 부분이 있을 거예요. (책의 본문을 그대로 인용한 경우는 굵은 글씨로 표기했습니다.)*이 기사는 4월 29일(수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부는 은행 잔고가 아니다진짜 부자란 누구일까요. 나인원한남에 살면 부자일까요? 순자산 100억이 넘으면 부자일까요? 퍼스트 클래스를 타고 여행 다니면 부자일까요?브라질 인류학자 알코포라도는 2010년부터 부자의 삶을 관찰, 연구해 박사학위 논문을 썼는데요. 그의 결론은 이겁니다. “브라질에서 부유함은 ‘조건’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내부인(=부자들) 관점에서 보면, 누구도 진정한 부자가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부자인 것입니다. 재산만으로는 상류사회 진입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즉, 아무리 돈이 많아도, 다른 부자들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이 세계에선 소용없습니다. 그래봤자 외부자인 ‘졸부’에 불과하다고 모두들-남뿐만 아니라 본인 스스로도- 여기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는 ‘경계 투쟁’이 벌어집니다. 전통 부자들은 암묵적으로 같은 계층만 공유하는 표식을 만들어 벽을 쌓고요. 신흥 부자들은 그 게임의 규칙을 받아들여서, 어떻게든 그 경계 안으로 침투하려고 애쓰죠. 이 점에서 소유물(=남에게 보여지는 모든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부자들이 유명 작가의 미술품을 수집하고, 값비싼 와인을 마시고, 해외 여행을 다니고, 명품을 걸치는 건 단순한 ‘돈 자랑’이나 ‘세련된 취향’이 아닙니다. “부자의 소유물이 갖는 힘은 가격보다는 타인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방식에서 비롯됩니다.”미국 추상표현주의 화가 잭슨 폴록의 거대한 그림을 집에 걸어둔 사업가는 미술 애호가일까요? 작가의 부자 친구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들이 그림에 수백만 달러를 쓴다면 얼마나 돈이 많을지 상상해 보세요. 틀림없이 성공한 부자이니, 나도 그들과 함께 투자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들은 예술에 대해 아무 것도 몰라요.” 루부탱 하이힐에서 상상력을 자극하는 요소는 바로 브랜드의 상징인 빨간색 밑창이죠. 하지만 구두를 일단 신고 밑창에 땅에 닿는 순간 그 힘이 바래버리고 만다는 게 큰 문제인데요. 그래서 한 파티장에선 구두 수선 디자이너가 소개한 ‘마법의 물약’이 여성들의 대환영을 받았습니다. 바로 빨간색 루부탱 밑창을 완벽하게 되살릴 중국산 빨간 매니큐어였죠.전통의 부자일수록 중요한 건 외부가 아닌 내부인의 인정입니다. 저자는 부유한 가문 출신 올리비아를 만났을 때 ‘참 수수하게 옷을 입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다른 부자가 올리비아에게 “그 셔츠 안느 거니?”라고 묻는 걸 보고 뒤늦게 깨달았죠. 그건 ‘세계 최고의 화이트 셔츠’로 알려진 프랑스 안느퐁텐 제품으로, 그 중에서도 올리비아가 입은 수놓은 맞춤형 셔츠는 최소 6000유로(약 1000만원)짜리라는 걸요.문제는 이제 소셜미디어에 관련 정보가 넘쳐나면서 일부 명품은 상상력을 잃어가고 있단 점입니다. 한 여성 사업가는 길에서 마주친 강도가 자신에게 이렇게 외친 것에 좌절했어요. “롤랙스 시계를 내놔!” 과거엔 부자들만 알아챘던 롤랙스의 특징을 이젠 누구나 알게 되면서 롤랙스가 부자들에게 위험한 물건이 되어버린 거죠. 시계를 뺏긴 뒤 그는 이렇게 다짐합니다. “난 이제 까르띠에를 살 거야. 그 불쌍한 사람들은 까르띠에가 뭔지도 몰라.” 전통 부자의 개미 탐지기부자는 ‘구별’을 통해 완성되기에, 부자들은 외부인에게 허투루 틈을 내주지 않습니다. 최대한 다른 집단과 멀리 떨어지려하죠. 90세가 넘은 부유한 할머니는 이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알잖아? 발을 헛디디거나, 넘어지거나 하면 개미떼가 몰려드는 거야. 개미떼가 들끓는 집은 질투 때문에 무너져 내릴 인생이지. 없애버려야 해. 개미떼가 완전히 지배하기 전에 말이야.”연구 초반 저자 알코포라도가 번번히 인터뷰에 실패한 이유도 부자들의 ‘개미 탐지기’가 작동했기 때문입니다. 부자들은 낯선 이가 접근하면 까다로운 테스트를 거쳐 판별하는데요. 그들이 중요하게 보는 기준 중 하나는 이겁니다. 얼마나 바쁜 사람인가?브라질 부자들은 바쁩니다. 사전 약속 없이 ‘지금 만날까?’라고 번개 쳤을 때 응하는 부자는 없습니다. 실제로 사업 때문에 일정 빡빡하든, 아니면 직함만 ‘예술가’인 사실상 백수이든 상관없이요. 그래서 바쁨을 과시하고 불필요한 만남을 차단하기 위해 부자들에게 꼭 필요한 게 비서이죠. ‘비서의 수’는 곧 부유함의 척도입니다.작가는 초기에 한 기업 비서로부터 ‘사장님과의 오찬 일정 조율을 위해 비서 연락처를 알려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요. “비서가 없다”고 그가 솔직히 답하자 연락이 끊겨버렸습니다. 질문 하나로 판별이 끝난 거죠.그래서 그는 비서를 만들었습니다. 진짜 비서는 아니고요. ‘레나타’라는 이름의 가짜 이메일 계정을 만들어서, 비서인 척하며 연락을 주고 받았죠.만약 부자들을 처음 만난 자리라면 취향에 대한 테스트를 각오해야 합니다. 미술, 시계, 여행지, 와인 같은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은근히 지식 수준을 떠보는 거죠. 또 인맥도 중요합니다. 유명인을 이름 대신 별명으로 언급하면서, 그걸 이해하고 있는지 보는 거죠. 당연히 테스트 통과는 쉽지 않습니다.신흥 부자들이 자신과 자녀의 영어 학습에 목을 매는 것도 그게 중요한 기준이기 때문이죠. “외국어 구사능력은 신흥부자가 되는 첫 번째 중요한 이정표이자 전환점입니다.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건 극소수만 가능한 일이고, 새롭게 부유해진 이들은 여기 속하길 열망하며 영어 실력 향상에 매진합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명품은 상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지만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려면 시간이 걸리죠.”부자는 언제나 타인초반에 고전했던 알코포라도는 ‘럭셔리 인류학자’라는 새로운 타이틀을 획득한 뒤에야 부자 사회에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런던에서 명품 브랜드 경영을 공부하면서 SNS로 이름을 알린 뒤, 브라질 언론들과 ‘리우데자네이루 시민의 명품 소비 행태’를 주제로 한 인터뷰가 히트를 친 덕분이었죠.갑자기 부자들이 그를 초청하기 시작했어요. 그는 여전히 내부자는 아니었지만, ‘럭셔리 인류학자’로서의 그의 전문성이 관심을 끌었습니다. 부자들은 이걸 전문가에게 확인받고 싶어했거든요. 이건(또는 이 사람은) 럭셔리한가요, 아닌가요? “나는 그들의 시스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내 지식이 확실성을 보증하는 요소라고 믿었기 때문에 나를 영입하고 싶어했죠. 럭셔리 인류학자인 나는 효과를 예측할 수 있는 판단자였어요.”그리고 본격적으로 진짜 부자들을 인터뷰하면서 그가 가장 질리도록 들은 말은 이거였어요. “나는 부자가 아니야.”“이들은 스스로 가난하다고 여기진 않지만, 부유층으로 분류되는 걸 배제함으로써 스스로를 중산층으로 정의합니다. 수년간의 연구 과정에서 인터뷰 대상자들은 자신들이 부자가 아니라는 것을 저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지칠 줄 몰랐죠. 그들은 ‘진정한 부자는 언제나 남들’이란 확신에 차 있었어요.” 상위 0.1%의 부자들조차 항상 더 위를 바라봅니다. 방탄 차, 파리의 저택, 사설 경호원을 둔 이웃을 보며 “나 말고 저 사람이 부자”라고 말하는 거죠. 그러면서 ‘난 그저 괜찮은 삶을 살고 있는 상류 중산층’이라고 여기는데요.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특권을 누리는 게 부당하단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아무 노력 없이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은 자신의 특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사회 불평등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도덕적 부담이나 죄책감에서 벗어납니다. 연구를 진행하면서 들은 수많은 말처럼 이렇게 말하죠. ‘나는 별로 가진 게 없어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게 잘못은 아니잖아요. 우리가 어디서 태어날지는 선택할 수 없으니까요.’”그러니 당연히 자신이 사회 불평등 문제의 일부라는 생각도 없죠. 빈부 격차 해소는 국가의 책임이라고 여기고요. 자선이나 기부활동에도 인색합니다. 영국 자선지원재단(Charities Aid Foundation)이 발표한 ‘세계 기부 종합 지수’에서 브라질은 38점으로 하위권에 머물렀는데요. 참고로 한국은? 브라질과 동점(38점)입니다.“인터뷰 대상자들이 자신들의 소박한 삶을 강조하는 모습이 참 재미있었습니다. 트란코소의 한적한 해변이 내려다보이는 저택은 그들에게 있어 소박한 곳이었습니다. 최고급 이집트산 면으로 만든 침대 시트, 크리스털 잔, 디자이너 가구, 유명 화가의 그림, 대리석 욕실까지. 부자들에게 편안하다는 것은 그 물건을 살 돈이 있다는 뜻이니까요.”이 책의 마지막 사례는 ‘내가 원하는 건 단지 소박하고 편안한 삶을 유지하는 것뿐’이라며 이혼 과정에서 남편에게 연간 207만 헤알(약 6억원)의 생활비 지급을 요구한 상속녀 이야기인데요. 특히 이혼 뒤 자신의 가슴 보형물 교체 수술 비용까지 전 남편이 낼 것을 요구해, 양측이 법정에서 맞붙었죠. 이 사건과 관련해 저자는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가슴 보형물은 ‘사치품(럭셔리)’일까요, 아닐까요?” By.딥다이브*이 기사는 4월 29일(수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6-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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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개월 침묵의 딥시크…엔비디아는 떨고 있다?(feat. 화웨이)[딥다이브]

    요즘 인공지능(AI) 업계는 속도전이 장난 아니죠. 차세대 AI 모델 출시까지 걸리는 기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는데요. 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유독 느리게 움직이는 기업이 있습니다. 중국 AI 스타트업 딥시크(DeepSeek)이죠.15개월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딥시크의 차세대 AI 모델 출시가 계속 미뤄지고 있습니다. 동시에 설립 뒤 처음으로 딥시크가 외부 투자를 유치한다는 소식도 나오죠. 딥시크엔 무슨 일이 있는 걸까요.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왜 딥시크 움직임을 예의주시할까요. 오늘은 조용해서 더 궁금한 딥시크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4월 24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돈 많은데 투자 유치?혹시 기억하시나요? 중국 AI 스타트업 딥시크가 한때 전 세계를 들었다 놨었죠. 2025년 1월 출시한 추론모델 ‘R1’ 때문이었는데요. 성능은 업계 최고인데 훈련비용은 100분의 1로 줄인 미친 가성비에 업계가 깜짝 놀랐고요. 엔비디아 주가까지 요동치게 만들었어요.그리고 15개월이 지난 지금, 다들 이걸 궁금해합니다. 딥시크 차세대 모델, 왜 안 나오죠?딥시크의 차세대 모델 V4가 곧 나올 거란 얘기는 작년부터 있었고요. 애초 2월 설 연휴 무렵이 유력하다는 설도 돌았는데요. 이후 3월로 미뤄지더니, 이젠 4월 말 출시설이 보도됐어요.‘이거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라는 분위기가 파다한 가운데, 얼마 전 새로운 소식이 나왔습니다. 딥시크가 처음으로 외부 투자를 유치한다는 거예요.딥시크는 2023년 설립 뒤 한 번도 외부에서 투자받은 적 없습니다. 투자 제안이 와도 모두 거절했는데요. 창업자 량원펑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 적 있어요. “벤처캐피털은 수익을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대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요.” 수익엔 신경 쓰지 않고 오직 AI 기술 개발에만 매진하는 연구소처럼 딥시크를 운영하겠단 거죠.그럴 수 있는 게 모기업이 워낙 돈이 많아요. 량원펑의 헤지펀드 ‘하이플라이어’가 자금을 지원하는데요. 운용자산 약 800억 위안(17조원)의 하이플라이어는 지난해 벌어들인 수수료 수익만 7억 달러(약 1조원)에 달할 걸로 추정됩니다.요즘 중국 증시에선 하이플라이어가 너무 잘 나가서 개인투자자들 사이에서 량원펑에 대한 원성(=퀀트 헤지펀드가 이익을 독차지한다)이 자자할 정도이거든요. 그러니 돈이 부족해서 딥시크가 투자를 받는 건 아닐 겁니다. 그럼, 목적이 뭘까요?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보도에 따르면 직원 이탈을 막기 위해서라고 하네요. 미국 빅테크 못지않게 중국 AI 업계도 인재 쟁탈전이 매우 치열하죠. 특히 딥시크 연구원은 업계에서 가장 인기가 높고요. 지난 몇 달 동안 실제로 딥시크 핵심 연구원들이 속속 경쟁사로 떠났다고 해요. 특히 딥시크 R1 모델 개발을 이끌었던 수석 연구원 궈다야(郭大雅)가 현금과 주식 인센티브를 포함해 약 1억 위안(216억원)을 제시받고 바이트댄스로 이직해서 화제가 됐죠.물론 딥시크도 직원들에게 스톡옵션을 나눠줬어요. 문제는 그 스톡옵션이 얼마짜리인지 지금은 모른다는 거죠. 외부 자금 조달로 시장이 인정하는 기업가치를 확인해야, 스톡옵션의 금전적 가치를 계산할 수 있으니까요. 바로 이번에 그걸 하려는 겁니다. 지분의 금전적 가치를 확인시켜 줘서 직원들을 다독이려는 거죠. 딥시크가 이번 투자라운드에서 얼마의 기업가치를 인정받을지는 두고 봐야 합니다. 디 인포메이션은 ‘200억 달러(약 30조원) 이상’, 월스트리트저널은 ‘100억~300억 달러(15조~45조원), 홍콩 SCMP는 ‘1000억 달러(약 150조원) 이상’이란 예상치를 각각 보도했는데요. 이미 올해 초 홍콩증시에 상장한 중국 AI 기업 즈푸AI(83조원)나 미니맥스(53조원) 시가총액과 비교한다면, 1000억 달러도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닐지도 모르죠.엔비디아에서 화웨이로 이주 중? 그럼 딥시크의 차세대 모델 출시가 지연되는 건 인력 이탈 때문일까요. 업계에선 그보다 이게 더 큰 이유가 아닐까 추측합니다. 화웨이 칩으로의 이전.딥시크는 기존 모델인 V3 학습에 엔비디아 H800 GPU를 사용했죠. 다른 중국의 AI 모델 개발업체들(알리바바, 바이트댄스, 텐센트, 샤오미, 즈푸, 미니맥스, 문샷)도 여전히 엔비디아 칩을 사용합니다. 최고 성능의 기본 모델을 처음부터 학습시키는 건 엔지니어링적으로 매우 복잡한 일이거든요. 수만 개의 AI 칩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몇 달 동안 학습을 해야 하니까요. 오류를 최소화하고 시간과 비용 낭비를 막으려면 가장 믿을 만하고 검증된 AI칩을 써야 하고요. 그게 바로 엔비디아 GPU인 겁니다.하지만 중국 기업은 이제 엔비디아의 고성능 AI 칩을 구하기 어렵죠. 한동안은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 수출을 막았고, 지금은 트럼프 정부가 H200 GPU의 수출을 허용했는데도 중국 정부가 막고 있어요. 엔비디아 말고 중국산 AI 칩을 쓰게 하기 위해서죠. 그리고 이달 초 미국 매체 디 인포메이션은 이런 단독 보도를 했어요. “딥시크의 차세대 AI모델이 화웨이 칩에서 구동된다.” 딥시크가 개발 중인 V4 모델이 화웨이의 최신 AI 칩인 ‘어센드 950PR’에 최적화된 형태로 출시될 거란 보도였죠. 이게 정확히 무슨 뜻이냐고요? 딥시크가 V4 모델의 초기 학습 단계부터 화웨이 칩을 썼다는 건지, 아니면 학습은 엔비디아 칩으로 했지만 실행은 화웨이 칩에 최적화했단 뜻인지는 아직 알 수 없어요. 아무래도 후자(학습은 엔비디아, 실행은 화웨이)일 가능성이 훨씬 커보이긴 하죠. 아직 화웨이 칩이 대형 AI 모델 학습에 쓸 정도로 그렇게까지 성능이 뛰어나진 않으니까요.하지만 그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긴 합니다. 엔비디아 칩으로 만든 모델을 화웨이 칩에서 성능 저하 없이 돌리기 위해서, 연산자를 통째로 재작성했다는 뜻이니까요. 즉, 엔비디아 칩의 언어인 ‘CUDA’를 버리고 개발자들이 화웨이의 ‘CANN’으로 코드를 처음부터 일일이 다시 쓴 거죠. 조금만 실수해도 성능이 떨어질 수 있어서, 정말 어려운 작업입니다. 왜 출시가 이렇게 지연될 수밖에 없는지 이해가 되죠.이런 시도가 얼마나 성공적일지는 V4 모델이 나온 뒤에나 확인할 수 있을 텐데요. 만약 딥시크가 이번에 성공한다면, 다른 중국 경쟁사도 그 뒤를 따르게 될 겁니다. 엔비디아 칩 구매가 사실상 막힌 상황에서 돌파구를 찾아야 하니까요. 어쩌면 공고했던 엔비디아 생태계에 딥시크가 작은 균열을 일으킬지도 모르겠어요.젠슨 황은 왜 “끔찍하다”고 하나딥시크의 이런 ‘탈 엔비디아’ 시도를 가장 걱정하는 건 당연히 엔비디아입니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이달 중순 한 팟캐스트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어요.“딥시크가 화웨이에 먼저 적용되는 날은 우리나라(미국)에 끔찍한(horrible) 결과가 될 겁니다. (딥시크 모델이) 화웨이에 최적화돼 있고, 화웨이 아키텍처에 맞춰져 있다면 우린 불리한 입장에 놓이게 됩니다. 우리에게 나쁜 소식은 전 세계에서 개발된 AI 모델이 미국산 하드웨어(엔비디아 칩)가 아닌 곳에서 가장 잘 작동하는 겁니다. 그거야말로 배드 뉴스죠.”이런 주장에 대해 팟캐스트 진행자인 드와르케시 파텔은 적극적으로 반박했어요. 화웨이가 엔비디아보다 성능에서 한참 뒤처지는데, 왜 화웨이 칩이 엔비디아를 대체할 거란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느냐고요. 하지만 젠슨 황 CEO가 물러서지 않으면서 둘 사이엔 한바탕 토론이 벌어졌죠. 젠슨 황은 “이 중요한 시기에 전 세계 모든 AI 모델이 미국의 기술 스택을 기반으로 구축되도록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어요. 중국의 AI 생태계 자립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중국 기업이 엔비디아 칩에 계속 의존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였죠.둘 중 어느 주장에 동의하시나요. 젠슨 황 CEO 말대로, 이대로 가면 중국이 AI 칩 성능의 한계를 딛고 ‘탈 엔비디아 생태계 구축’에 성공해서 미국의 기술 패권을 위협하게 될까요? 아니면 그건 중국 시장 점유율이 아쉬운 기업인의 과장 어법일 뿐일까요?현재까지 미국 의회의 입장은 후자입니다.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는 올해 초 ‘AI 감시법’을 통과시켰어요. 엔비디아가 고성능 블랙웰 칩을 중국에 판매하는 걸 전면 금지하고, H200 칩 수출 역시 의회가 막을 수 있게 하는 법안이죠. AI 칩 수출을 거의 무기 수준으로 감시하려는 겁니다. “중국 AI 연구소가 더 나은 모델을 훈련시키는 데 필요한 컴퓨팅 자원을 판매하는 건 어리석은 짓”(보수 싱크탱크 미국기업연구소)이란 판단인데요.젠슨 황 말대로 딥시크는 다시 한번 미국을 놀라게 할까요. 아니면 극복할 수 없는 두 나라의 AI 칩 성능 격차를 확인시켜 줄까요. 일단 앞으로 나올 딥시크 V4를 지켜보시죠. By.딥다이브*이 기사는 4월 24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6-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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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가 걱정, 왜 안 해요? 석유 탱크가 비어가는데 [딥다이브]

    이란전쟁발 에너지 쇼크, 얼마나 걱정하시나요? 주식시장만 보면 이제 전쟁은 거의 다 끝났고 기름값 걱정은 잊혀가는 듯한데요.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죠. 석유 재고량이 빠르게 줄면서 에너지 시장의 충격파가 본격적으로 밀려오기 시작합니다. 전 세계적 ‘항공유 대란’이 이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현장인데요. 석유 보릿고개를 걱정하는 이유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4월 22일(수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호르무즈 열려도 석유가 부족하다배럴당 99달러. 21일 브렌트유 선물 가격은 3월 말과 비교하면 15% 넘게 떨어졌습니다. 아직 불확실성은 크지만, 적어도 이란전쟁이 최악으로 치닫지 않고 종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보는 거죠.그런데 이건 또 무슨 얘기일까요. “이번 주에 전쟁이 끝나더라도 전 세계 원유와 석유제품 재고는 6월 말까지 8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질 전망이다.” 씨티은행이 20일 내놓은 분석입니다. 이미 전쟁 전보다 전 세계 석유류 재고량이 5억 배럴 줄었는데, 6월 말까지 추가로 4억 배럴이나 더 감소할 거란 전망이죠. 전쟁은 끝나도 에너지 쇼크는 최소 두 달 이상 더 이어질 거란 뜻인데요.도대체 왜? 이유는 간단합니다. 호르무즈 해협이 당장 열린다 해도, 배가 있어야 석유를 실어 나를 수 있으니까요.만약 모두의 희망대로 미국-이란의 2차 종전 협상이 조만간 성공적으로 이뤄져 호르무즈 해협이 완전히 열린다고 가정해 볼게요. 그럼, 해상운송 세계에선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일단 지금 중동 항구에 정박 중인 유조선들이 서둘러 출항하겠죠. 여기 실린 원유(약 1억6000만 배럴)가 목적지인 아시아 국가에 도착해 하역을 마치기까지 25일쯤 걸릴 겁니다. 그럼 그때부턴 아시아 국가의 지상 재고량이 쭉쭉 늘어나기만 하느냐 하면, 그건 아니죠. 빈 유조선이 다시 중동에 가는 데 16일, 기름 싣고 오는 데 25일이 또 걸리니까요. 그 사이엔 각국이 보유한 재고를 소진하며 계속 버텨야 합니다.급하니까 다른 지역에 있는 빈 유조선을 중동에 투입하자고요? 현재 미국산 원유를 아시아로 실어 나르려고 미국 항구로 향하고 있는 초대형 유조선이 70척쯤 되는데요. 운임을 엄청 높게 부른다면 이 배들이 유턴해서 호르무즈 해협으로 향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게 아니라 이 배들이 미국산 원유를 싣고 아시아에 하역해 준 다음,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해서 중동 항구에 도착하려면? 최소 80일쯤 걸릴 겁니다. 빨라야 7월에나 가능하겠네요.왜 호르무즈 해협이 열려도 최소 두 달 이상 공급부족이 이어지는지 아시겠죠? 게다가 한번 생산을 중단한 유전은 스위치 켜듯이 곧바로 재가동이 안 됩니다. 유정에 주입한 물과 가스의 압력 균형을 맞추는 데 보통 몇주가 걸리고요. 특히 쿠웨이트·이라크의 중질 유전은 4~5개월까지 걸린다고 해요. 또 미사일 공격 받은 시설 수리도 해야 하는데요. 이란이나 카타르의 일부 석유·LNG 생산시설은 피해가 심해서, 복구에 몇 년이 걸릴 겁니다.돌아보면 지난 3월 이란전쟁 이후 국제유가가 배럴당 120달러까지 급등했지만, 사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왜 이것밖에 안 뛰지?’라는 반응도 있었어요. 세계 석유 공급량 감소가 역사상 최대(하루 1100만~1300만 배럴 추정)였던 것 치고는 그동안 유가가 꽤 선방했는데요. 리스타드에너지는 이게 “충격을 흡수할 완충장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전쟁 전 쌓아뒀던 과잉 재고, 전쟁 직전 유조선에 실린 채 운송 중이었던 원유, 그리고 대대적인 비축유 방출. 이 세 가지 덕분에 한동안은 버틴 거죠.하지만 그 단계는 이미 지나갔고요. 이제 전 세계가 육상 석유 재고량을 빠르게 소진하고 있습니다. 이란전쟁으로 인한 타격이 가장 적은 나라로 꼽히는 미국조차 지난주 예측(210만 배럴 증가를 예상)을 깨고 재고량이 감소세(실제론 91만 배럴 감소)로 돌아섰고요. 이번 주부터는 훨씬 빠른 속도로 줄어들겠죠. 미국 에너지정보청이 매주 수요일 발표하는 미국 석유 재고량 통계는 석유 선물 시장 투자자들이 예의주시하는 중요한 정보인데요. 재고가 급감한 게 수치로 확인된다면 시장이 화들짝 놀랄지 모릅니다.참고로 한국의 현재 석유 재고량은 공개되진 않았는데요. 민간 정유사의 재고 고갈 위기에 대응해 정부가 시행한 정책이 ‘비축유 스와프(교환)’입니다. 기업이 새로 물량을 구하긴 했지만 배가 들여오는 데 시간이 걸리니까, 석유가 선적된 것만 증명하면 정부가 비축유를 빌려주는 거죠. 현재까지 국내 4대 정유사의 비축유 스와프 신청 물량은 3200만 배럴에 달합니다. 그만큼 재고 압박이 심하단 얘기죠.‘항공유 대란’이란 폭풍의 눈 결국 호르무즈 해협이 당장 열리더라도, 석유 시장의 ‘보릿고개’는 피할 수 없게 됐습니다. 한동안은 궁핍의 고통을 견뎌야 한단 뜻이죠. 물론 부자나라는 타격을 덜 입긴 하겠지만,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습니다. 그걸 보여주는 현장이 바로 ‘항공유 대란’이죠.항공권에 붙는 유류할증료가 몇 배씩 폭등해서 난리라고요? 어쩌면 그 가격을 주고라도 휴가철에 비행기를 탈 수 있으면 다행일지 모릅니다. 최근 각국 항공사들이 폭등한 항공유 가격 때문에 항공편을 속속 취소한다는 소식이 마구 쏟아져나오고 있거든요.스웨덴의 스칸디나비아항공(SAS)은 4월에만 1000편의 항공편을 취소했고요. 아일랜드 에어링구스는 올여름 500편을 감축합니다. 에어캐나다는 토론토-뉴욕을 포함한 6개 노선 운항을 중단했고요. 미국 유나이티드 항공도 전체 항공편 5%를 취소한다고 밝혔죠. 태국 타이항공은 5월부터 대폭 감축해서 서울-인천 노선도 하루 3편에서 1편으로 줄이고요. 에어 뉴질랜드는 두 달간 1100편 항공편을 감축했어요. 독일 루프트한자는 21일 “10월까지 총 2만 편의 단거리 항공편을 운항 스케줄에서 제외한다”고 발표했죠. 유류할증료를 올리면 되지, 아예 취소하면 어쩌냐고요? 국제 항공유 가격이 두배 넘게 폭등하면서, 유류 할증료를 최대로 올린다 해도 비용을 감당할 수 없게 된 거죠. 일부 노선은 비행기를 띄울수록 손해가 날 판이니까요. 유나이티드항공의 스콧 커비 CEO는 “연료비조차 충당하지 못할 정도로 손해 보는 항공편을 운항하는 건 아무 의미 없다”고 말합니다.또 비용 문제와 별개로 정말 ‘연료가 없어서 날 수 없는’ 상황도 코앞으로 닥쳤습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최근 보고서에서 유럽의 항공유 재고량이 6주 치밖에 남지 않았다고 경고했는데요. S&P 글로벌에너지의 펠리페 페레스 이사는 “그것(6주)도 후한 추정치”라며 항공유가 이번 위기의 “폭풍의 눈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거래 가능한 항공유가 46% 줄었습니다. 설령 지금 해협이 개방된다고 해도 항공사와 공항이 정상화하는 데는 몇 달이 걸릴 겁니다.”항공유 대란은 단순히 여름철 해외여행을 못 가서 아쉬운 차원의 문제가 아니죠. 항공사는 수익 급감을 피하기 어렵고요. 특히 재정구조가 취약한 일부 저가 항공사는 생존이 위태로울 수 있습니다.또 항공 화물료가 아주 무섭게 뛰고 있죠. 특히 인도-유럽 노선은 운송료가 두배로 올랐다는데요. 이게 전부 제품 원가에 반영되면서 물가 상승을 부추길 게 뻔합니다.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상당해요. 특히 유럽은 항공 여행이 연간 8510억 유로(1482조원)의 GDP와 1400만명의 일자리를 지탱할 정도로 중요한 산업인데요. 최대 성수기 여름 휴가철을 이대로 놓친다면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유럽연합(EU)이 27개 회원국과 ‘항공유 공유 시스템’을 구축하겠다며 대응에 나선 이유죠.고유가가 쏘아 올린 금리인상이렇게 석유 시장 분위기가 심상찮게 돌아가면서 시장이 예의주시하는 분야가 있습니다. 각국 중앙은행의 움직임인데요.최근 싱가포르 중앙은행인 싱가포르통화청(MAS)이 4년 만에 처음으로 통화정책을 긴축으로 전환했어요. “중동의 공급이 재개되더라도 세계 에너지 가격은 당분간 높은 수준을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였죠. 고유가로 인플레이션 압력이 커질 것에 대비해 선제적으로 나선 겁니다.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아시아 국가가 가장 취약한 상황이니까요.다른 에너지 수입국 역시 금리 인상을 피하기 어렵다는 분석이 나오죠. 최근 IMF는 유럽중앙은행(ECB)이 올해 0.5%포인트 기준금리 인상에 나설 거라 전망했고요. 일본은행 역시 당장 이번 달엔 동결하더라도 6월엔 기준금리를 인상할 거란 전망이 대세를 이룹니다. 그럼, 한국은행은? 이제 막 새로운 총재가 취임한 직후라서 아직 힌트가 많진 않은데요. 시장에선 ‘연내 동결’과 ‘하반기 한 차례 인상’ 전망이 팽팽히 맞서고 있죠.미국 연방준비제도의 경우, 제롬 파월 의장이 지난달 “이란전쟁으로 인한 유가 상승 충격은 일시적”이라고 언급한 적 있죠. 당분간은 이런 ‘관망 모드’가 이어질 걸로 예상됩니다. 주요 IB들은 연준이 다시 금리 인하에 나설 시점을 점점 뒤로 미루고 있어요. IB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9월에 금리 인하를 재개해서 연말까지 두 차례 인하할 거란 전망인데요. 금리인하 기대가 빠르게 후퇴하고 있단 뜻입니다. 탄탄한 미국 경제도 유가 불안에선 자유롭지 않은 거죠.이란이 2차 협상에 응하지 않자, 21일(현지시간)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휴전 연장”을 발표했습니다. 이거 어째 쉽게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분위기인데요. 이 에너지 보릿고개를 전 세계가 슬기롭게 버틸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By.딥다이브 *이 기사는 4월 22일(수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6-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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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우디 왕세자의 ‘1경3000조원’ 프로젝트 멈췄다…“감당 안 돼”[딥다이브]

    중동 부국 사우디아라비아가 감당하기에도 너무 원대한 꿈이었을까요. ‘비전 2030’의 핵심인 미래도시 ‘네옴(Neom)’ 프로젝트 공사가 상당 부분 중단됐습니다. 막대한 건설비를 쏟아부은 공사 현장이 거대한 공터로 남게 됐죠.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의 야심찬 꿈이 재정적 현실에 가로막혔는데요. 사우디는 이제 공상과학 영화 같은 미래 도시 대신 좀 더 현실적인 프로젝트에 집중하기로 전략을 바꿨습니다. 꿈에서 현실로 내려온 사우디 ‘비전 2030’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4월 17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사막에 남겨진 거대한 공터2022년 11월 사우디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의 방한으로 경제계가 들썩거렸던 것 기억하시나요. 당시 국내 기업과 290억 달러 규모의 MOU가 체결됐고요. ‘제2 중동 붐’에 대한 기대가 한바탕 일었는데요.지난달 이런 소식이 나왔습니다. 현대건설·삼성물산 컨소시엄의 ‘더 라인’ 지하터널 공사 계약 해지. 170㎞의 선형 도시 ‘더 라인’을 관통하는 고속철도용 터널 공사가 발주처 요청으로 중단된 겁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고속철도를 위해 조성된 도랑엔 바람에 날린 모래가 쌓이고, 한때 활기 넘쳤던 노동자 캠프는 유령 도시처럼 변했다’는 전직 직원의 말을 전했죠.계약이 해지된 네옴 사업은 더 라인만이 아닙니다. 중동 최초의 야외 산악 스키 리조트 ‘트로예나’의 상징인 거대한 인공호수와 다목적댐 건설 계약도 지난달 말 해지됐죠. 이 공사는 이탈리아 건설사 위빌드가 진행해 왔는데요. 메인 댐 건설을 위해 지난해 말까지 투입된 롤러 다짐 콘크리트(CRC) 양만 무려 100만㎥에 달하는 엄청난 대공사였어요(공정률 30%). 이제 계약 해지로 인해 거대한 미완성 콘크리트 구조물만 덩그러니 남겨지게 됐죠. 역시 트로예나에서 스키 빌리지 철골 공사를 진행해 온 말레이시아 건설사 에버센다이도 얼마 전 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고요.네옴 프로젝트의 첫 가시적 성과물이었던 ‘신달라’ 아일랜드도 언제 완공될지 기약이 없습니다. 신달라는 2024년 10월 화려한 개장 파티를 열고 부분 개장했지만, 보수 공사를 위해 시설이 폐쇄됐고요. 월스트리트저널은 ‘고급 레스토랑에선 바카라 크리스털 잔과 악어가죽 의자를 창고에 실었고, 수만 달러에 달하는 23㎏ 어치의 벨루가 캐비어를 버렸다’고 최근 분위기를 전합니다.그렇다고 해서 네옴 프로젝트가 폐기된 건 아닙니다. 야시르 알-루마얀 사우디 국부펀드(PIF) 총재는 15일 5개년 투자 계획(2026~2030년)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에서 네옴 프로젝트를 “상업적 타당성”에 따라 재조정하고 있다고 설명했죠. 당장 수익 내기 어려운 더 라인이나 트로예나 대신 부유식 첨단 산업도시 ‘옥사곤’ 완공에 우선 집중한다는 겁니다. 항만과 그린수소 플랜트가 들어서는 옥사곤은 네옴 프로젝트에서도 가장 돈이 될 만한 사업이기 때문이죠. SF 영화 같은 화려함 대신 실용주의를 택한 겁니다.한계에 부닥친 오일머니 ‘포스트 석유 시대’를 대비한다며 빈 살만 왕세자가 2016년부터 야심 차게 추진해 온 ‘비전 2030’. 그중에서도 핵심인 네옴 프로젝트가 전면적으로 재조정된 이유는 한마디로 돈이 부족해서죠. 사우디는 석유 부국이긴 하지만 오일머니에도 한계가 있으니까요.사우디는 지난해 재정적자가 2766억 리얄(약 111조원)로 2020년 팬데믹 이후 최대였습니다. 지난해 국제유가가 배럴당 60~70달러에 머물면서 재정을 떠받친 석유판매 수입이 급감했기 때문인데요. IMF에 따르면 사우디는 유가가 배럴당 96~105달러여야만 재정 균형을 맞출 수 있습니다. 그 차액만큼이 고스란히 재정적자가 되는 거죠. 이를 메우기 위해 정부가 국채를 찍어내면서 국가 부채는 GDP 대비 32%로 높아졌어요. 다른 나라에 비하면 낮은 수준이지만 10년 전 12%와 비교하면 급증한 거죠. 사우디는 열심히 해외 투자 유치에 나섰지만, 기대만큼의 성과는 내지 못했습니다. 외국인 직접 투자(FDI) 유치의 목표치는 높았는데(2030년 연 1000억 달러), 현실은 한참 못 미친 거죠(2025년 355억 달러). 그래서 사우디 국부펀드는 국영 석유공사 아람코 지분을 일부 더 팔았고요. 이제 국내 부유한 자산가와 펀드매니저, 민간 기업에 ‘애국 투자’를 독려 내지 압박하고 나섰는데요. 그런 와중에 이란전쟁까지 터졌으니, 골치가 아플 겁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석유 수출량이 평소의 절반으로 뚝 떨어지면서,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거든요.빠듯해진 자금 여건은 사우디를 현실주의로 돌아서게 만들었어요. 월스트리트저널이 입수한 내부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네옴은 최종 완공(2080년)까지 무려 8.8조 달러(1경3000조원)가 들어갈 거라고 하죠. 말도 안 되는 규모의 사업인 건데요. 사우디 국부펀드가 1조 달러 넘는 운용자산을 보유했다지만, 현실적으로 감당이 불가능합니다.사우디는 네옴 프로젝트를 대폭 축소·재조정하는 동시에, 좀 더 현실적인 프로젝트에 힘을 쏟기로 했어요. 2030년 세계 엑스포와 2034년 월드컵 개최처럼 당장 코앞에 닥친 이벤트들이 먼저인 거죠. ‘미래의 꿈’ 같은 네옴과 달리 엑스포나 월드컵은 국가 신인도가 달린 현실의 약속이니까요. 이미 네옴 공사 현장에 있던 중장비들은 리야드의 공항과 경기장 건설 현장으로 대거 이동했습니다.일상이 된 ‘비전 2030’아마 여기까지 읽고 ‘현실성 떨어지는 망상 같은 계획이 애초에 문제’라고 생각하실 거예요. 실제로 계획이 너무 거창한데, 누구도 감히 왕세자를 말리지 못했던 게 큰 문제였던 게 맞습니다. 특히 더 라인의 경우, 빈 살만 왕세자의 SF 영화 취향에 맞추다 보니 고층 건물 두 개가 일직선으로 길게 뻗어있는 희한한 구조로 설계됐다고 하죠.하지만 아주 최악은 아닙니다. 이제라도 틀린 걸 깨닫고 계획을 전면 수정했단 점에선 말이죠. 이에 대해 사우디 칼럼니스트 압둘라흐만 알 라시드는 이렇게 설명해요. “왕세자는 쫓기듯 서두르지 않고, 업적이나 언론의 시선에 크게 신경 쓰지도 않습니다. 틀에 갇혀있는 많은 지도자와는 다르죠. 2030년이 2040년이 된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요.”사실 10년 전 서른 살의 빈 살만 왕세자가 경제개혁 청사진을 발표했을 때만 해도, 다들 그게 되겠냐며 코웃음 쳤어요. 당시 왕세자를 인터뷰했던 이코노미스트지가 “급진적인 경제 개혁은 위험한 도박”이라고 지적했을 정도였죠. 사우디 정부 관료가 그걸 해낼 역량이 없고, 국민도 받아들이기 어려울 거라 봤기 때문인데요.돌아보면 그때만 해도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것 중 일부는 이미 실현됐습니다. 여성 운전이 허용되면서(2018년) 여성 노동 참여율이 대폭 상승한 게(2017년 18%→2025년 34%) 가장 눈에 띄는 변화이죠. 이미 2030년 목표치(30%)를 조기 달성했을 정도입니다. 논란이 많았지만, 이전에 없던 부가가치세를 도입하는 데도 성공했고요(2018년). 심지어 초기 5%였던 부가가치세율은 이제 15%로 높아졌어요.무엇보다 석유 의존도를 낮추고 경제를 다변화하는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비석유 부문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17년 35%에서 2024년 55%로 껑충 뛰었죠. 특히 관광과 엔터테인먼트 분야가 이제 사우디 경제의 성장을 이끄는 원동력으로 자리 잡았습니다.2025년 1월 6개 노선 전 구간이 개통된 리야드 메트로는 사우디의 변화상을 실감 수 있는 현장인데요. 개통 직후부터 폭발적으로 이용객이 늘어난 이 무인 도시철도는 출퇴근 시간이면 늘 만원을 이룹니다. ‘비전 2030’이 실제로 시민의 일상을 바꾸고 있는 거죠.관광지로 개발 중인 리야드 외곽 디리야 지구의 모습도 놀랍습니다. 이곳의 ‘부자이리 테라스’엔 세련된 카페와 레스토랑이 즐비한데요. 이곳에선 탁 트인 야외 테라스에 젊은 남녀가 앉아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10년 전만 해도 이건 종교경찰에 잡혀갈 일이었는데 말이죠.리야드 근교에 조성 중인 엔터테인먼트 도시 ‘키디야’엔 세계에서 가장 크고 빠른 롤러코스터가 있는 식스 플래그 테마파크가 지난해 말 문을 열었고요. 이달 말엔 중동 최대이자 사우디 최초의 야외 워터파크 ‘아쿠아라비아’도 개장합니다.홍해의 섬과 내륙 사막 지역을 묶어 개발한 리조트 단지 ‘더 레드 씨’는 2024년부터 이미 리조트가 운영되고 있죠. 식스센스 서던 듄스, 세인트 레지스 레드 씨 리조트 같은 초호화 리조트는 전 세계 유명 인사들이 찾는 곳이 됐습니다.물론 네옴과 비교하면 저비용의 소박한 프로젝트라 하겠는데요. 적어도 ‘진짜 변화가 시작됐다’는 걸 보여줄 수 있는 중요한 핫스폿들입니다. 이제 비전 2030을 발표한 지도 만 10년. 화려한 조감도, 야심 찬 슬로건만이 아닌 눈에 보이는 성과가 필요한 시점이니까요.이란전쟁으로 불확실성이 극에 달했던 3월, 사우디의 건설 계약 규모는 전달보다 450% 급증했습니다. 신기루 같은 네옴은 멈췄지만, 수도 리야드 중심으로 현실적인 건설사업은 늘어나고 있어서죠. 이 새로운 흐름이 부디 한국 기업에 또 다른 기회를 열어주길 기대해 봅니다. By.딥다이브*이 기사는 4월 17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6-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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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냉장고가 TV를 삼켰다…헝가리 ‘포퓰리즘 원조’의 몰락[딥다이브]

    ‘민족주의 포퓰리즘’의 원조가 결국 무너졌습니다. 12일 헝가리 총선에서 야당인 티서당이 압승하면서 빅토르 오르반 총리가 16년 만에 물러나게 됐죠. 유럽 극우 정당과 미국 마가(MAGA) 세력에 영감을 줬던 선구자의 극적인 몰락입니다.입법·사법·언론은 물론 재계까지 장악하며 장기집권의 공고한 성을 쌓았던 오르반 정권. 하지만 반시장적 포퓰리즘 정책이 한계에 다다르며 민심은 돌아섰고요. 시대가 바뀌면서 더 이상 구식 프로파간다도 통하지 않게 됐는데요. 오르반의 참패가 남긴 교훈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4월 15일(수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무너진 오르반노믹스138석(티서당) 대 55석(피데스당). 4월 12일 치러진 헝가리 총선은 야당 티서(Tisza)당의 압승으로 끝났습니다. 16년 만의 정권 교체이자, 티서당이 단독 개헌이 가능한 의석수(3분의 2 이상)까지 차지한 거죠. 앞서 네 차례 선거에서 모두 압승했던 여당 피데스(Fidesz)당의 참패입니다.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르반 정부는 이번에도 총선을 앞두고 필살기를 발휘했습니다. 달콤한 선심성 정책을 마구 쏟아냈죠. 공공요금 인하, 연 3% 고정금리의 주택담보대출 출시, 공무원에 연 100만 포린트의 주택 보조금(480만원) 제공, 세 자녀를 둔 어머니에 대한 평생 개인소득세 면제, 휘발유·경유 가격 상한제까지. 서민을 위하는 정부라는 이미지로 어필하려 했는데요.하지만 이번엔 통하지 않았습니다. 국민들이 그간의 경험으로 깨달았기 때문이죠. 당장 달콤한 그 혜택들이 사실은 미래 성장을 갉아먹는 부담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걸요.2020년대 초까지 헝가리는 유럽에서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는 모범사례로 통했습니다. EU에서 가장 낮은 법인세(9%)를 무기로 외국 제조업체의 생산기지(독일 자동차, 한국과 중국 배터리)를 유치하는 데 성공했고요. 대대적인 공공 근로 프로그램을 통해 실업률을 3%대로 끌어내렸죠. 또 외국 자본이 보유한 통신·금융·교통·유통기업엔 ‘특별세’를 부과해 국가 재정을 강화했습니다. 이를 못 견딘 외국기업들이 떠나면서 전략산업이 속속 헝가리 기업으로 넘어갔고요. 무엇보다 파격적인 출산 장려 정책(세 자녀는 주택담보대출 원금 전액 탕감)으로 그 어렵다는 출산율 반등에까지 성공했어요. ‘외세(EU)를 배격하고 경제 주권을 되찾겠다’던 오르반 총리의 독창적 전략이 통하는 듯했죠.하지만 2022년을 기점으로 분위기는 반전됩니다. 그해 4월 총선을 앞두고 야당 지지율이 들썩거리자 오르반 정부는 대대적인 현금 살포 정책을 펼쳤어요. 자녀가 있는 부모들에게 2021년 낸 소득세를 전액 환급해줬고, 연금 수급자에겐 월 지급액의 100%를 추가로 얹어줬죠(이른바 ‘13개월차 연금’ 지급). 청년들엔 소득세를 면제해주고, 군인·경찰엔 특별 보너스를 제공했어요. 이렇게 수조 원을 뿌린 덕분에 오르반 정권은 총선에선 압승할 수 있었습니다. 대신 재정적자는 한층 불어나고 말았죠. 팬데믹이 끝나고 재정을 재정비해야 할 시기에 거꾸로 간 겁니다.이 총선 직후 EU 집행위원회는 헝가리에 대한 지원금 지급을 동결했습니다. “공공 조달 절차의 심각한 체계적 부정행위”가 이유였죠. EU 기금 중 상당 부분이 오르반 총리 가족과 측근이 운영하는 기업으로 줄줄 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골적인 정경유착은 오르반 정권의 장기집권을 지탱해주는 중요한 시스템이었으니까요. 선거 승리를 위해 돈은 잔뜩 풀어놨는데, EU에서 들어올 외화는 막혔으니. 외환시장은 뒤집어졌죠. 포린트화 통화가치는 채 1년도 안 돼 30% 넘게 급락합니다.설상가상으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에너지 가격이 폭등했죠. 그 여파로 유럽 전역에 인플레이션이 닥쳐왔는데요. 통화가치가 폭락한 헝가리는 최악의 물가고에 처합니다. 2023년 초 헝가리의 연간 소비자 물가상승률은 무려 25%. 계란·빵·버터·치즈 같은 식품 가격은 1년 만에 50~60%씩 뛰었어요. 임금보다 물가가 훨씬 더 빠르게 오르면서 중산층과 서민들은 실질임금이 깎이며 급속히 가난해집니다.헝가리의 미친 물가는 학교와 병원까지 덮쳤어요. 고물가와 낮은 처우에 항의해 교사들이 전국적인 시위를 벌이다 해고되는 사태가 벌어졌고요. 생활고에 처한 의사들이 다른 나라로 떠나면서 지방병원 응급실과 분만실이 속속 폐쇄됩니다. 민생의 기본 인프라까지 무너진 거죠.냉장고가 텅 비었다 2025년 헝가리 경제성장률은 0.4%. 인근의 폴란드(3.6%)는 물론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와 비교해도 한참 뒤집니다. 특히 가난한 이웃나라로 여겼던 루마니아마저 1인당 GDP에서 헝가리를 추월하면서 헝가리인들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죠.다른 경제 성적표도 처참합니다. 2025년 재정적자는 5.7조 포린트(약 27조원)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고요. 국가부채는 2년 연속 늘어서 GDP 대비 74.6%로 불어났죠. 한동안 자랑했던 ‘완전 고용’은 이제 옛말이 됐고, 2026년 2월 공식 실업률은 4.8%로 10년래 최고를 찍었습니다.지금의 경제난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장은 병원인데요. 예산 고갈로 병원엔 기본 의료 소모품마저 동나서 거즈, 소독약, 화장지까지 환자가 준비해야 할 지경이고요. 수술을 하려면 1~3년, 외래진료도 6개월이나 대기해야 할 정도로 의료 시스템이 붕괴됐습니다. 이렇게 쪼들리는데 출산율이 오를 리가 없겠죠. 2021년 1.61명까지 높아졌던 출산율은 이후 해마다 낮아져 2025년 1.31명으로 추정됩니다. 오르반 정권이 대대적인 출산장려정책을 내놓기 전인 2009년 수준으로 다시 돌아간 거죠. 정부가 GDP의 5.5%라는 막대한 예산을 가족정책에 투입한 것을 생각하면 허무한 결말입니다.그렇습니다. 결국 문제는 경제였던 거죠. 어느 정부든 경제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아무리 인기 영합적인 정책을 펼치고, 언론을 장악하고 있다 한들 말이죠.‘TV와 냉장고의 싸움’. 과거 러시아에서 선거판을 설명하며 나온 표현이죠. 정치적 선전(TV)과 국민의 경제적 현실(냉장고) 중 어느 게 승리하느냐에 선거 결과가 좌우된다는 뜻인데요. 전 주헝가리 미국 대사인 데이비드 프레스먼은 이번 헝가리 총선 결과를 두고 뉴욕타임스에 이렇게 말합니다. “(오르반 정권이) TV와 냉장고 사이의 간극을 메울 수 없게 됐습니다. 시민이 병원에서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면서 총리가 호화로운 시골 저택에서 희귀동물(얼룩말)을 키운다면 선전 활동이 할 수 있는 일엔 한계가 있죠.”TV를 무력화한 스마트폰헝가리는 언론 산업 대부분을 정부가 사실상 장악한 나라입니다. 오르반 총리는 취임 직후부터 친정부 언론사엔 정부 광고비를 몰아주고, 독립 언론엔 벌금을 물리는 식으로 입맛에 맞게 시장을 재편했죠. 이 과정에서 많은 언론사가 오르반 총리 측근 기업 소유로 넘어갔고요. 아예 친정부 성향 매체 500개를 묶어 관리하는 ‘중부유럽 언론 미디어 재단’이란 재단이 생겨났을 정도인데요. 인쇄 매체와 라디오 시장의 80% 이상, TV 시장의 57%가 정부의 관리 아래 있는 겁니다.그래서 헝가리 언론매체는 사실상 정부 기관지 노릇을 해요. 일간지들의 헤드라인 제목과 사진이 모두 똑같을 정도죠. 편파보도는 당연합니다. 2025년 국영방송 MTVA 뉴스 방송의 약 4분의 3을 집권여당이 차지했다고 하죠. 애초에 공정한 게임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헝가리 친정부 매체들은 선거전 초반부터 야당 티서당 대표인 페테르 머저르를 ‘가정폭력범’, ‘배신자’, ‘자기애적 인격장애(나르시시스트)’로 몰아갔어요. 머저르는 브뤼셀(EU)의 꼭두각시일 뿐이며, 정권이 바뀌면 헝가리 청년들이 우크라이나 전쟁터에 끌려갈 거란 흑색선전이 난무했죠.예전 같으면 이런 대대적인 언론 공세에 야당은 속절없이 당했을지 몰라요. 하지만 2026년의 선거판은 달랐죠. 이제는 TV(정부의 일방적 선전)와 냉장고(국민의 실제 삶)의 일대일 싸움이 아니거든요. 스마트폰(디지털 미디어)이란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으니까요.디지털 미디어는 정부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영역이고요. 45세의 페테르 머저르는 디지털 콘텐츠의 문법을 아는 사람이었죠. 그는 유튜브, 인스타그램, 틱톡, 페이스북 같은 소셜미디어를 직접 관리하며 민첩하게 소통했는데요. 예컨대 자신을 겨냥한 가짜뉴스나 딥페이크 영상이 나오면 바로 페이스북 라이브를 켜고 실시간으로 반박했고요. 하루 5~6곳을 돌며 강행군하는 유세 현장도 SNS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중계했어요.특히 머저르와 그 지지자들은 흑색선전까지 밈(meme)으로 유머러스하게 역이용했는데요. 머저르가 작은 보트 위에서 춤추는 틱톡 영상이 그 예이죠. 친정부 매체가 자신을 춤추고 술 마시며 놀기 좋아하는 인간이라며 깎아내리자 ‘그래, 나도 춤추고 놀 줄 아는 보통 사람이다’라며 받아치는 듯한 영상을 찍어 올렸어요. 오히려 젊고 열정적인 이미지를 강조하는 결과가 됐죠.머저르와 티서당은 단순히 SNS만 잘한 것이 아니라, ‘티서 월드’ 라는 독자적인 플랫폼을 운영했습니다. 머저르에 대한 가짜뉴스가 나오면 바로 앱이 푸시알람을 띄우고 반박용 카드뉴스를 즉시 공유할 수 있는 기능을 탑재했죠. 실시간 팩트체크로 언론매체의 흑색선전을 무력화한 겁니다. 젊은 인플루언서들도 영향력을 발휘했어요. 21세 틱톡커 오시카 칼라이가 대표적인 인물인데요. 개인 일상을 공유하며 인기를 끌었던 그는 선거를 앞두고 “우리의 한 표가 중요하다. 우리 세대가 헝가리를 바꿔야 한다”면서 젊은 층의 투표를 독려했고요. Z세대의 적극적인 투표 참여는 이번 총선의 높은 투표율(79.5%)과 야당의 압승을 이끈 원동력이 됐죠.결국 이번 선거는 일방적인 프로파간다(TV)와 참여형 쌍방향 소통(스마트폰)의 대결이었고요. 당연히 스마트폰의 완승이었습니다. 역대급 홍보 예산을 쏟아부어 TV와 라디오, 신문, 옥외 광고판을 도배하고도 오르반 정권이 패배한 이유죠.전 세계가 주목한 헝가리 총선은 화려하게 막을 내렸지만, 이 나라의 실질적 변화까지 갈 길은 멉니다. 경제 권력은 여전히 오르반 총리의 측근들이 쥐고 있고, 약속한 공약(교사 임금 인상, 의료 시스템 복구 등)을 이행하기엔 정부 곳간이 텅 비었죠. ‘연료비가 3배로 치솟고, 연금이 깎이고, 세금이 뛸 것’이라며 불안해하는 국민들도 많고요. 16년 만의 정권교체가 헝가리의 새로운 탄생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어쩌면 가장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이제부터일지 모릅니다. By.딥다이브*이 기사는 4월 15일(수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6-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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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이터 센터’ 막으려 총질까지…“전기료-소음 못 참아”[딥다이브]

    인공지능(AI) 기술 경쟁은 곧 데이터센터 구축 경쟁이기도 하죠. 빅테크 기업들이 천문학적인 금액을 데이터센터 건설에 쏟아붓고 있는 이유입니다. 국내 메모리 반도체 업계의 초호황을 이끄는 원동력이기도 하고요.그런데 AI 데이터센터가 늘어갈수록 데이터센터에 대한 혐오도 커져 갑니다. 세계 곳곳에서 지역주민과 정치인이 뭉쳐서 ‘우리 지역엔 안 된다’며 데이터센터 건설을 막아 세우고 있죠. AI 산업의 ‘물리적 병목지점’으로 자리 잡은 데이터센터 님비(NIMBY) 현상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4월 10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미국: 전기료 올리는 주범은? 4월 6일 아침, 미국 인디애나폴리스 시의회 의원인 론 깁슨 집에 12발의 총알이 날아들었습니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식탁 바로 앞까지 총알이 박혔죠. 범인이 문 앞에 남긴 쪽지엔 이런 문구가 적혀있었어요. ‘데이터센터 반대’. 며칠 전 시의회가 데이터센터 개발을 승인한 것에 항의하는 누군가가 총격을 가한 거죠. 미국에서 데이터센터 반대 여론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준 사건인데요.이런 여론에 맞춰 데이터센터 건설을 막아 세우려는 정치권 움직임도 커집니다. 메인주 하원은 얼마 전 2027년 11월까지 대규모(20MW 이상) 데이터센터 건설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어요. ‘전기 먹는 하마’인 데이터센터가 전력망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한다는 명분이죠. 이 법안은 민주당이 장악한 주의회 상원을 무난히 통과 예정이고요. 아마 메인주는 미국에서 최초로 ‘데이터센터 모라토리엄(건설 일시 중단)’을 선언한 주가 될 겁니다.그리고 이건 시작일 뿐입니다. 이미 뉴욕, 오클라호마, 사우스캐롤라이나, 미시간, 조지아 등 10개 주에서 데이터센터 일시 금지 법안이 제출됐거나 추진 중이거든요. 특히 미국 데이터센터 최고 중심지인 버지니아주 의회엔 데이터센터 건설에 반대하는 법안이 60건 넘게 제출됐어요. 모두가 ‘우리 지역은 안 돼’라며 빗장을 걸어 잠글 기세인 거죠.전국적인 움직임도 본격화했어요. 지난달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과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즈 하원의원이 공동 발의한 ‘AI 데이터센터 모라토리엄’ 법안인데요. 미국 전역에서 신규 AI 데이터센터 건설과 확장을 일시적으로 전면 중단하자는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입니다.사실 데이터센터라는 건 1990년대 인터넷 혁명 이후 있었고요. 창문도 없는 상자갑 같은 거대한 건물이 보기 싫다며 건설에 반대하는 여론도 이전부터 적지 않았는데요. 이런 반감이 미국에서 최근 들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배경엔 이게 있죠. 전기료 인상.미국 에너지부에 따르면 2025년 주택용 전기요금은 전국적으로 평균 4.9% 올랐습니다. 전체 소비자 물가상승률(2.7%)을 크게 웃돌았죠. 또 올해도 4%가량 오를 거란 전망이 나와요. 전력 회사들이 송전망 인프라 투자를 크게 늘린 것과 관련 있는데요. 전력망 업그레이드는 항상 필요한 일이지만, 유독 지금 투자가 활발한 데는 AI 데이터센터 영향이 큰 게 사실입니다.AI 데이터센터는 전력 소비량에서 일반 데이터센터와 차원이 달라요. 기존의 일반 기업용 데이터센터는 랙당 5~15kW 수준이었지만, 고성능 GPU를 탑재한 AI 전용 40~100kW를 쓰죠. 말 그대로 ‘전기 먹는 하마’인데요.이런 AI 데이터센터 건설 붐은 전력망에 엄청난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클린뷰 집계에 따르면 현재 미국에서 개발이 진행 중인 데이터센터는 883개로, 총 276.6GW 용량이 추가될 예정인데요. 이는 현재 운영 중인 602개 데이터센터 용량(16.9GW)의 무려 16배에 달하는 거죠. 열심히 송전망을 깔고 변전소를 지어도 이를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그리고 여기서 질문. 그 많은 AI 데이터센터 건설, 도대체 누구한테 이익이 되는 거죠? 일단 AI 기술과 관련된 모든 기업, 특히 앞서나가는 빅테크 기업엔 이익이죠. 데이터센터는 AI 기술 경쟁의 승리자로 도약하기 위한 필수요소니까요. 또 지역 정부 입장에서도 상당한 돈이 됩니다. 그 지역에 데이터센터가 설립되면, 거둬들일 수 있는 재산세가 짭짤하니까요.국가 경제에 대한 기여도는 상당하죠. 배런스에 따르면 2025년 1~9월 미국의 실질 GDP 성장 기여도에서 데이터센터 건설이 차지하는 비중이 14%나 돼요. 건물을 짓고 장비를 사고 전력망을 까는 모든 활동이 경제 호황에 톡톡히 기여하고 있죠. 무엇보다 미국이 세계 AI 기술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선 지금 꼭 필요한 투자입니다. 그럼 ‘이렇게 모두에게 이익이 되니까 전기요금은 좀 감수합시다’라고 하면 주민들에게 먹힐까요? 그럴 리가요. 국가와 기업이 잘 되기 위해 내 지갑을 희생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도 거대하고 못생긴 건물을 매일 마주치고, 24시간 돌아가는 냉각팬의 저주파 소음에 시달리면서 말이죠. 마치 빅테크를 위해 소비자가 일종의 보조금을 제공해야 한다는 허무맹랑한 얘기처럼 들릴 뿐이죠.게다가 AI 기술자라면 모를까, 대부분 주민들은 아직 데이터센터나 AI 기술의 사회적 가치를 실감하지 못합니다. 기술 저널리스트 재스민 선은 이렇게 전하죠. “이곳(데이터센터 인근)에 사는 대부분 사람은 프로그래머가 아닙니다. 그들은 AI를 기껏해야 ‘구글 검색보다 나은 것’ 정도로 여기죠. 제가 만난 사람의 말을 빌리자면 이렇습니다. ‘이 모든 소동이 고작 내 아이들이 부정행위를 하는 걸 돕기 위한 것인가요?’”말레이시아: 먹을 물이 부족하다 사실 데이터센터는 화력발전소처럼 매연을 뿜는 것도 아니고, 물류창고처럼 새벽에 대형 트럭이 오가는 것도 아닙니다. 직접적으로 해를 끼치는 시설이라고 하긴 좀 어렵죠. 특히 AI 시대에 중요한 게 ‘데이터 주권’이잖아요. AI 산업을 키우고 데이터 자산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자국 내에 데이터센터를 둬야 하는 건 맞습니다.바로 이런 이유로 데이터센터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선 신흥국들이 많은데요. 특히 사우디아라비아, 인도네시아, 브라질 등은 법인세와 장비 수입 관세를 파격적으로 감면·면제해주면서 데이터센터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경쟁에서 현재 가장 앞서간 나라를 꼽으라면 여깁니다. 말레이시아.2022년 말레이시아는 해외 디지털 기업 투자유치를 위해 파격적인 혜택을 내놨어요. 데이터센터 구축에 투입된 자금의 60~100%를 세액 공제해주고, 관련한 장비 수입 관세를 면제해 주기로 했죠. 싱가포르의 빈자리를 과감하게 치고 들어온 겁니다. 동남아시아 데이터센터 허브였던 싱가포르는 당시 국토와 전력 부족 탓에 규제를 대폭 강화했거든요.싱가포르와 비교하면 땅과 건설비용은 반값인데, 파격적인 세제 혜택에 싱가포르 바로 옆이란 최적의 입지까지. 글로벌 기술 기업들이 돈을 싸 들고 말레이시아로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오라클,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아마존, 엔비디아 같은 미국 빅테크가 각각 수십억 달러의 투자를 약속하며 진출했고요. 바이트댄스와 알리바바, 텐센트 같은 중국 기업도 말레이시아를 택했죠.유례없는 데이터센터 건설 붐이 도래했습니다. 특히 싱가포르와 다리 하나 사이인 조호르 지역은 북적거렸죠. 야자수와 고무나무 농장을 밀고 데이터센터가 들어섰고요. 2021년 고작 10MW에 불과했던 이 지역 데이터센터 용량은 지난해 1025MW로 불어났습니다. 지금도 건설 공사가 한창이어서, 2027년이면 조호르 지역 용량만 2.7GW가 될 전망이죠. 싱가포르(1.4GW)를 뛰어넘는 동남아시아 최대 데이터센터 허브로 도약할 날이 머지않았는데요.하지만 ‘AI 열풍의 최대 수혜국’이라던 열광은 가라앉고 있습니다. 자원이 너무나 빠르게 고갈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력과 물, 둘 다요.송전망이 포화상태에 이르면서 전력공사는 대대적인 전력망 확장에 나서야 했고요. 이를 메우기 위해 지난해 기본 전기요금을 14%나 올렸습니다. 그래도 전기료 인상은 경제성장을 위해 필요하다며 이해해 주는 분위기이긴 했는데요.진짜 큰 문제는 식수 부족이죠. 지난해 조호르 주민들은 여러 차례 단수를 경험했습니다. 원래도 가뭄에 취약한 지역인데, 엄청난 양의 냉각수를 소비하는 데이터센터가 속속 들어섰으니 그럴 수밖에요. 정부 추산에 따르면 이 지역 데이터센터 47곳(건설 중인 곳 포함)이 필요로 하는 냉각수량은 하루 6억7500만 리터. 올림픽 규격 수영장 270개를 채울 양입니다.참다못한 조호르 주민들이 행동에 나섰습니다. 2월 초 한 데이터센터 건설 현장 앞에 50여 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죠. 말레이시아에서 데이터센터 건설에 반대해 벌어진 첫 번째 시위였어요.분위기는 급격히 반전됐고요. 결국 말레이시아 정부도 속도 조절에 나섰습니다. 안와르 총리는 2월 말 국회 답변에서 “에너지와 물 사용량이 급증해서 주시하고 있다”면서 “AI나 첨단기술과 관련 없는 데이터센터 신청은 이미 모두 중단했다”고 밝혔죠. 앞으론 말레이시아 경제 발전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전보다 더 깐깐하게 따져서 데이터센터 건설을 승인하겠단 뜻입니다. 아일랜드: 4년 만에 모라토리엄 해제데이터센터 님비(NIMBY: Not In My Back Yard)현상과 모라토리엄(건설 중단)의 원조 격인 나라로는 아일랜드가 있습니다. 빅테크의 유럽 데이터센터 허브로 통하는 아일랜드는 2021년 규제당국이 수도 더블린 인근의 신규 프로젝트를 사실상 금지했어요.당시 아일랜드는 이미 데이터센터가 전체 전력의 14%를 차지했고요(2024년엔 약 22%). 쓸 전기가 부족해서 주택과 공장 건설이 지연될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환경단체와 지역 주민들이 대대적으로 들고 일어났고요. 결국 이게 정부의 데이터센터 모라토리엄 결정으로 이어졌던 거죠.그리고 4년이 지난 지난해 12월, 아일랜드가 다시 신규 데이터센터 건설을 허용한다고 발표했습니다. “데이터센터는 혁신적인 경제를 가능케 하는 핵심 인프라”라면서 말이죠. 그런데 무작정 허용은 아니고요. 이전에 없던 엄격한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앞으로 새로 짓는 데이터센터는 가동 후 6년 안에 전력 사용량의 80% 이상을 재생에너지로 채워야 한다는 거죠. 언뜻 보면 너무 무리한 요구 아닌가 싶습니다. 아일랜드의 재생에너지 발전이 늘고는 있다지만, 아직은 그 비중이 40% 정도밖에 되지 않거든요.하지만 실험은 해볼만 합니다. 실제 더블린 북쪽 드로게다에선 재생에너지 발전소와 AI 데이터센터를 결합한 첫 번째 프로젝트가 지난달 발표됐어요. 데이터센터가 쓸 전기는 스스로 알아서 공급하는(그것도 친환경적으로) ‘자급자족형’으로 바뀌는 거죠. 만약 아일랜드의 이 실험이 성공한다면 새로운 표준이 될지도 모릅니다.IMF에 따르면 2030년 전 세계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는 2023년보다 4배로 늘어난 1500TWh로, 인도(세계 3위)에 맞먹을 거라고 하죠. 몇 년 만에 거대한 국가 하나가 생겨나는 셈인데요. 이거 정말 감당할 수 있는 거 맞을까요. AI 기술 경쟁은 결국 송전망과 상수도라는 물리적인 자원의 싸움일 수밖에 없겠습니다. By.딥다이브*이 기사는 4월 10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6-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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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쟁이 앞당긴 태양의 시대…호르무즈 위기를 피한 나라들 [딥다이브]

    전쟁으로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봉쇄되고 LNG 운반선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치솟는 LNG 가격과 바닥난 재고로 각국이 비상상황인 지금, 조용히 승리를 자축하는 나라들이 있죠. 지난 몇 년 동안 극적인 재생에너지 전환을 이룬 파키스탄과 스페인 이야기입니다.호르무즈 해협이 막힌다고 해서 햇빛과 바람이 막히는 건 아니잖아요. 기후변화가 아닌 에너지 안보 면에서 재생에너지가 갖는 효용을 새삼 깨닫게 되는데요. 트럼프 대통령의 전쟁으로 태양이 승리하게 된 아이러니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4월 8일(수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태양이 만든 파키스탄의 반전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봉쇄되면서 아시아 국가의 중동산 원유·LNG 수입이 뚝 끊겼죠. LNG 수입 물량을 전부 카타르와 아랍에미리트에서 들여왔던 파키스탄도 마찬가지 상황입니다. 매달 9척씩 들어오던 LNG 운반선이 3월엔 고작 2척만 입항했으니까요. 예전 같으면 아주 난리가 났을 거예요.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 그랬거든요. 당시 러시아산 천연가스 공급이 끊기면서 LNG 가격이 급등했고요. 파키스탄으로 향하던 LNG 운반선들이 3배 더 높은 가격을 부른 유럽 국가로 유턴해서 가버렸습니다. 이로 인해 파키스탄은 유럽보다 더한 최악의 에너지난에 처하게 됐죠.무더위 속에서 전국적으로 심각한 정전 사태가 일어났고, 가정 전기요금이 150% 넘게 치솟았고, 급기야 비싼 LNG 물량을 확보하느라 외환보유고가 바닥나 버렸습니다. 결국 국가부도(디폴트) 위기에 몰린 파키스탄은 IMF 구제금융을 받는 신세로 전락했죠. 에너지 대란의 최대 피해자는 구매력에서 밀리는 개발도상국이라는 씁쓸한 현실을 확인시켜주는 사건이었습니다.그런데 지금 파키스탄은? 물론 파키스탄 정부도 이란전쟁 이후 에너지 절약을 위해 재택근무와 주 4일제를 권장하고 있긴 한데요. 아직 대혼란의 기미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4년 전과 달리, 지금은 LNG 수입이 막힌다고 해서 전기 공급이 당장 끊길 위기에 처하진 않기 때문입니다. 집집마다 건물 위에 펼쳐진 파란색 패널, 즉 옥상 태양광 발전의 힘이죠.2022년 LNG 위기 이후 파키스탄에선 유례없이 폭발적인 태양광 발전 붐이 일었습니다. 특이한 건 이게 정부가 보조금을 주며 장려해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는 거죠.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친환경적 움직임과도 거리가 멀고요. 이건 어디까지나 시장 논리에 따른 선택이었어요. 비싼 전기요금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개개인이 자기 지갑을 열어 태양광 패널 설치에 나선 겁니다. 초기 투자비를 감당할 수 있는 중산층 가정과 자영업자, 기업들이 앞다퉈 옥상에 태양광 패널을 설치했어요. 때마침 공급 과잉에 시달리던 중국산 태양광 패널이 싼값에 수입되던 시기였고요.그 결과 지난해 기준 파키스탄에 설치된 태양광 발전 용량은 무려 40GW(추산치). 파키스탄 전체 국가 전력망의 설비용량(46.2GW)에 맞먹는 규모입니다. 태양광 발전이 빠르게 급증하면서 이 나라의 LNG 발전량은 과거의 절반 수준으로 확 줄었고요. 한동안은 남아도는 LNG 수입 물량이 골칫거리가 됐을 정도였어요. 10~15년 장기 계약을 맺은 중동산 LNG 수입 물량을 다른 나라에 전매해야 했죠. 그리고 불과 4년 만에 다시 찾아온 에너지 대란. 이번엔 태양광 발전이 파키스탄 에너지 안보의 든든한 방어막이 되고 있습니다. 아와이스 레가리 전력부 장관은 로이터통신 인터뷰에서 “국민 주도의 태양광 혁명이 파키스탄의 에너지 자립도를 높였다”고 강조했죠.카타르 알자지라, 영국 가디언, 일본 니케이 등, 전 세계 언론이 이런 파키스탄을 주목합니다. “태양광 붐이 파키스탄을 호르무즈 위기에서 보호했다”면서 말이죠. 글로벌 에너지 위기의 최약체로 꼽혔던 파키스탄의 놀라운 반전입니다.나홀로 여유만만 스페인 파키스탄과 함께 선견지명을 인정받게 된 또 다른 나라가 있죠. 바로 유럽의 재생에너지 강자, 스페인입니다.스페인은 2018년 사회당 정부 집권 뒤 재생에너지 친화적 정책을 줄곧 펼쳐왔어요. 태양광 발전에 대한 규제를 허물고, 기업이 태양광 발전사와 직접 장기계약을 맺을 수 있게 시장을 열어줬죠. 유럽에서도 유난히 풍부한 햇빛과 강한 바람 덕분에 태양광과 풍력 발전단가는 급격히 낮아졌고요. 지난 5년 사이 스페인의 재생에너지 설비용량은 2배로 급증했습니다. 다른 어느 유럽국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성장세였죠. 이제 스페인 전력의 약 60%는 재생에너지로 생산됩니다. 원자력까지 합친 ‘무탄소’ 발전 비중은 80%에 달하고요.하지만 급속한 재생에너지 확대에 대한 반대 여론도 적지 않았습니다. 가정용 옥상 태양광 위주인 파키스탄과 달리 스페인은 대규모 풍력·태양광 발전단지가 시골에 들어섰는데요. 태양광 패널의 ‘거울 바다’가 경관을 해치고 풍력 터빈이 소음을 유발한다는 불만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고요. 결정적으로 지난해 4월 이베리아반도 역사상 최대 규모 정전 사태로 전국이 마비됐습니다. 이게 다 과도한 태양광 의존 탓이란 비판이 쏟아졌고요. 스페인의 에너지 정책은 국제적인 조롱거리가 됐죠. 실제론 태양광 자체보다는 이를 받쳐주지 못한 낙후한 전력망이 진짜 원인이긴 했지만요.하지만 채 1년이 지나지 않은 지난 3월 19일, 브뤼셀 EU 정상회의에 참석한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밝혔습니다. “지난 토요일 스페인의 메가와트시당 전기 가격은 14유로였지만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에서는 100유로를 넘었습니다. 이건 우연이 아닙니다. 스페인 정부가 지난 8년간 재생에너지 보급의 선두에 서기 위해 노력해 온 결과입니다.” 호르무즈 봉쇄로 LNG 값이 급등하면서 온 유럽이 전전긍긍하던 그때, 스페인만은 달랐던 거죠.이를 두고 폴리티코는 이렇게 전합니다. “유럽의 다른 국가들이 치솟는 에너지 가격에 대한 신속한 해결책을 찾느라 분주한 가운데 , 스페인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동남아도 LNG 대신 태양광이 대세 심각한 에너지 충격은 에너지 정책의 큰 전환점이 되곤 합니다. 이는 1970년대의 미국을 보면 알 수 있죠. 1973년 1차 오일쇼크로 국제유가는 순식간에 4배로 치솟았고요. 이때부터 미국 운전자들이 더 작고 연비 좋은 차를 사면서 일본차의 전성시대가 열렸어요. 1979년 2차 오일쇼크 땐 지미 카터 당시 대통령이 백악관 지붕에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기도 했죠. 미국 엑손 연구소에서 세계 최초의 리튬이온전지가 발명된 것 역시 1970년대였습니다. 절실함은 변화를 가져오는 법이니까요.그럼 이번 에너지 위기는 어떨까요. 벌써부터 여러 나라에서 변화의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동안은 ‘LNG=저탄소 화석연료’라는 공식이 통했고요. 많은 나라들이 석탄을 LNG로 대체하는데 열을 올렸는데요. 이번 전쟁으로 깨닫게 된 거죠. 석유든 LNG든 자기 나라에서 생산할 수 없는 연료에 의존하는 건 매우 위험할 수 있단 걸요. 특히 중동산 화석연료 의존도가 유독 높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바빠졌는데요. 베트남 최대 민간 기업 빈그룹은 얼마 전 하이퐁에 추진해 온 대규모 LNG 발전 프로젝트의 변경을 정부에 요청했습니다. LNG 발전 대신 태양광·풍력 발전과 배터리 저장장치(ESS)를 결합한 발전 방식으로 전환하게 해달라고요. 빈그룹은 서한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밝혔습니다. “비용 요인 외에도 수입 연료에 대한 의존은 에너지 안보, 공급 자율성, 베트남의 전력 생산비용 통제능력에 상당한 어려움을 초래합니다.” 자기네 땅에서 스스로 생산할 수 있는 건 결국 재생에너지라는 결론인 거죠.마르코스 대통령이 ‘국가 에너지 비상사태’를 선포한 필리핀은 파키스탄식 분산형 태양광 발전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3월 말 국영 공무원 연금이 가정용 태양광 패널 설치를 위한 대출 신상품을 내놨어요. 200만 전현직 공무원을 대상으로 최대 50만 페소(1246만원)까지 연 5% 금리로 대출해 주는데요. 출시 하루 만에 1200건 넘게 신청이 들어올 정도로 관심이 뜨겁다고 합니다. 인도네시아 프라보워 대통령도 3월 말 야심 찬 태양광 확보 계획을 발표했어요. 무려 100GW에 달하는 태양광 발전 설비용량을 3년 안에 달성하겠다는 계획이죠. 현재 누적 용량은 고작 1GW에 불과한데 말이죠. 전문가들은 인도네시아의 전력망 인프라나 인허가 기간을 고려했을 때 아무리 빨라도 5년 안엔 불가능하다며 다소 회의적인 반응인데요. 추진력 강하기로 유명한 인도네시아 정부가 밀어붙이고 있으니 두고 볼 일입니다.결국 이란전쟁으로 재생에너지 전환이 기후변화 문제만이 아닌 에너지 안보 문제라는 교훈을 모두가 얻기 시작했습니다. 왜 4년 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겪고도 그걸 모른 채 지나쳤을까라는 한탄이 뒤늦게 나오는데요. 동시에 이 상황이 에너지저장장치(ESS) 호황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국내 배터리 업계에도 봄이 찾아오기를 기대해봅니다. By.딥다이브*이 기사는 4월 8일(수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6-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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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차 오일쇼크? 아니, 더 무서운 첫번째 ‘나프타 쇼크’가 왔다[딥다이브]

    쓰레기 종량제 봉투 사태로 전 국민이 나프타(naphtha)가 뭔지 알게 됐죠. 이란전쟁의 끝이 보이지 않으면서 ‘나프타 쇼크’가 배달용기부터 페인트까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는데요. 이를 보며 새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플라스틱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걸요.연료용 기름이 없으면 휘발유차 대신 전기차를 타는 방법이 있죠. 하지만 생활 속 플라스틱을 대체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불과 70~80년 전만 해도 우리가 플라스틱 없이 살았다는 걸 생각하면 놀라운 점이죠. 이란전쟁으로 흔들리는 플라스틱 세상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4월 3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전쟁이 키운 플라스틱 산업 가볍고 저렴한데 튼튼하고 위생적이기까지 한 소재. 현대 문명은 플라스틱의 등장을 반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19세기 중반 처음 등장한 이 혁신적 소재는 코끼리 상아(당구공)와 거북이 등껍질(머리빗), 깍지벌레 분비물(도료·절연재·레코드) 같은 천연소재 자리를 대체했죠. 1940년 5월 ‘실크처럼 윤기 난다’고 광고한 듀폰의 나일론 스타킹은 미국 뉴욕에 출시된 첫날에만 무려 80만 켤레가 팔려나갔어요.1920~30년대 초기 플라스틱 산업은 원유와 천연가스 정제 과정에서 나오는 쓸모없는 폐기물을 활용하려는 석유기업의 열망에서 탄생했습니다. 이걸 획기적으로 키운 건 제2차 세계대전이었죠. 낙하산, 항공기 부품, 로프, 헬멧 내피 등 수많은 군수품에 플라스틱이 필요했고요. 미국 정부가 석유화학 공장에 대대적인 투자를 하면서, 전쟁 기간 플라스틱 생산량은 4배로 급증했죠.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플라스틱의 전성기는 본격적으로 열립니다. 석유화학 공장을 헐값에 인수한 민간 기업들이 플라스틱으로 만든 가정용 소비재를 쏟아냈기 때문이죠.미국 해병대 구명정에 쓰였던 폴리스티렌은 일회용컵과 아이스박스가 됐고, 영국군이 레이더용 고주파 케이블에 썼던 폴리에틸렌은 마트 비닐봉지와 음식 보관용기로 탈바꿈합니다. 손가락 하나로 들 수 있는 여행 가방, 강철처럼 튼튼한 낚싯줄, 내용물을 확인할 수 있는 투명 포장재, 유리로 조각한 듯한 인공 꽃. 플라스틱 신제품이 열어준 새로운 풍요의 시대에 소비자는 열광했죠. “다양한 시장에서 플라스틱은 전통적인 소재에 도전해 승리했습니다. 자동차에서는 강철을, 포장재에서는 종이와 유리를, 가구에서는 목재를 대체했죠.” (‘플라스틱: 독성 사랑 이야기’ 저자 수잔 프라인켈)플라스틱이 연 풍요의 시대1960년대, 플라스틱은 한국인의 일상에서도 흔해집니다. 덕분에 이전엔 없는 생활상이 나타났죠. 대나무 살의 일회용 비닐우산은 ‘비 오는 날의 새로운 풍물’로 자리 잡았고, 아이들은 학교 앞 구멍가게에서 파는 비닐봉지에 들어있는 불량식품 주스를 사 먹었어요. 두부를 담는 목판은 위생을 이유로 플라스틱판으로 바뀌었고, 질기고 저렴한 화학섬유 옷감이 농촌 아낙네의 일상복이 됩니다. 종이장판 대신 집집마다 비닐 장판이 깔렸고요.하지만 신소재 플라스틱에 대한 열광은 1970년대부터 의심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일부 플라스틱 제품에서 유해물질이 검출됐다는 소식이 국내외에서 터져 나왔기 때문이죠. 이어 1980년대 들어서는 전 세계적으로 환경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넘쳐나는 플라스틱 쓰레기가 사회문제화됐고요. 1990년대 말엔 환경호르몬에 대한 공포(생식기능을 저하시킨다)가 극에 달했죠.플라스틱의 이미지는 추락했지만, 플라스틱 산업의 성장은 결코 꺾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폭발적인 생산량 증가세를 이어갔죠. 1950년대 200만t이던 전 세계 플라스틱 생산량은 2000년대 초반 2억t을 넘어섰고, 2024년엔 4억6000만t으로 늘었습니다. 이제 플라스틱은 거의 모든 생활 영역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플라스틱 마루가 깔린 집에서 플라스틱 베개를 베고 자고, 플라스틱 통에 담긴 물을 마시고, 플라스틱 칫솔로 이를 닦고, 플라스틱 키보드 치고 있죠.사실상 우리는 플라스틱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플라스틱은 현대 자본주의 체제를 지탱해 주는 필수 요소가 되어버렸어요. 생각해 보세요. 만약 플라스틱 없이 면과 모, 종이와 목재, 금속 같은 천연소재에만 의존한다면? 건축이나 제품 생산 기간은 더 길어질 거고요. 천연재료는 공급을 마음대로 늘릴 수 없어서 제품 생산량에도 한계가 있겠죠. 대부분 제품 가격은 지금보다 비쌀 수밖에 없고요. 아마도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많은 생필품들이 소수 부유층만 누리는 귀한 물건으로 남아있을 겁니다. 결국 값싸고 풍부한 플라스틱이 있기에 자본주의가 필요로 하는 생산과 소비의 끊임없는 확장이 가능했어요. ‘탈 플라스틱’이 생각처럼 쉽지 않고 어쩌면 불가능한 이유이죠.이란전쟁으로 강제 ‘탈 플라스틱’?이란전쟁은 평화롭던 플라스틱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놨습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중동산 나프타 수입이 꽉 막혔기 때문이죠. 나프타는 석유를 증류해서 나오는 액체입니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의 석유화학 산업은 NCC(나프타분해시설)를 통해 이 나프타를 분해해서 에틸렌과 프로필렌을 생산하고요. 이 기초유분으로 폴리에틸렌이나 폴리프로필렌 같은 플라스틱을 만드는데요.해상을 통해 들여오던 중동산 나프타 수입 물량 자체가 사라져 버렸어요. 한국은 국내 나프타 수요의 45%를 수입하고, 그중에서도 중동산 의존도가 높았기에(77%) 큰일이 아닐 수 없죠.부랴부랴 비상 대책이 가동됐습니다. 정부는 국내에서 생산되는 나프타의 해외 수출을 막았어요. 물론 그것만으론 턱없이 모자라지만 일단 있는 거라도 지키려는 거죠. 아울러 4년 만에 처음으로 러시아산 나프타를 수입했어요. 미국이 한 달간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풀어줬기에 가능했는데요. 고작 반나절치 물량(2만7000t)만 들여올 수 있었습니다. 현재 남은 나프타 재고량은 2~3주 치 물량. 이대로 가면 줄줄이 셧다운(가동 중단)이 불가피하단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나프타 가격은 이미 전쟁 전과 비교해 두배로 올랐습니다(미터톤 당 633달러→1241달러). 하지만 물량 자체가 없기 때문에, 웃돈을 주고서라도 구할 수 있으면 다행인 판국이죠. 충격파는 곳곳에 미치고 있습니다. 페인트 업체들은 제품 가격을 줄줄이 15~40% 올렸고요. 식품 포장용 비닐 가격은 일주일 만에 1000장에 6만원에서 11만7000원으로 뛰었습니다. 포장 용기 가격이 40% 오르면서 음식점은 배달 장사를 못하겠다며 울상이고요. 화장품 업계는 용기 생산이 중단될까봐, 제약 업계는 약과 수액제 포장재가 떨어질까봐 전전긍긍입니다. 파종을 앞둔 농가는 농업용 비닐이 부족하고, 의류업계엔 합성섬유 가격 급등이 현실화됐죠.갑자기 모든 업계가 강제적인 ‘탈 플라스틱’ 상황에 처했습니다. 라면 봉지, 화장품 용기만 따로 살 일이 없는 소비자들은 당장은 잘 실감하지 못할 수 있는데요. 공급 불안이 초래한 부담은 결국 소비자 가격에 전가되기 마련이죠. 먹을 것과 입을 것, 소비재와 내구재 할 것 없이 가격이 뛰는 결과로 이어질 겁니다.전쟁으로 기름값을 그렇게 걱정했는데, 더 큰 복병이 나타나고 말았습니다. 3차 오일쇼크보다 더 무서운 첫 번째 나프타 쇼크인 거죠. 사실상 전에 겪어본 적 없는 새로운 위기입니다.한편 한국뿐 아니라 일본·싱가포르·태국·인도네시아 등 온 아시아가 나프타 쇼크로 난리인 가운데, 정작 전쟁 당사자 미국의 석유화학 업계는 평온합니다. 단순히 지리적으로 멀어서가 아니라, 원료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죠.천연가스가 풍부한 미국은 나프타(석유에서 나오는 액체) 대신 에탄(천연가스에서 나오는 기체)으로 에틸렌을 생산해요.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든, 나프타 가격이 널뛰든, 원료 공급엔 아무 지장이 없죠. 오히려 전 세계 플라스틱 가격이 뛰었으니 마진만 폭증합니다. 미국 석유화학기업 다우(Dow) 주가가 한 달 새 35% 넘게 뛴 건 다 이유가 있죠.혹시 그래서 이 전쟁이 길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요. 에너지 순수입국 신세가 처량합니다. By.딥다이브*이 기사는 4월 3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6-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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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도체 과잉공급 걱정? 30년전 ‘광통신망’도 그랬다[딥다이브]

    구글이 지난주 공개한 ‘터보퀀트’가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을 흔들고 있죠. 인공지능(AI) 모델의 메모리 사용량을 6분의 1로 확 줄일 수 있는 기술인데요. 한편에선 ‘AI 서비스에 필요한 메모리 용량이 줄어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끝날 것’이란 반응이고요. 다른 편에선 ‘비용 효율성이 높아져서 AI 서비스가 대중화할 테니, 반도체 수요는 오히려 늘어날 것’이란 논리를 펼칩니다.뭐가 맞는 얘기일까요? 지금으로선 그 답을 알 수 없지만, 어쩌면 둘 다 맞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1990년대 후반 시장을 뒤흔들었던 광통신망 구축 붐이 남긴 교훈에 따르면 말이죠. 그리고 이건 기술경제학자 카를로타 페레스가 명저 ‘기술혁명과 금융자본’에서 설명한 기술혁명의 일반적인 패턴이기도 합니다. 그게 무슨 얘기냐고요?*이 기사는 4월 1일(수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유리 섬유가 곳곳에 깔리던 시절흔히 AI 기술을 둘러싼 거품을 1990년대 ‘닷컴버블’에 비유하곤 하죠. 특히 지금의 AI 데이터센터 건설 붐은 닷컴 시절 기억을 소환합니다. 그 시절엔 데이터센터 대신 이게 가장 핫한 첨단 인프라였죠. 광통신망.굳이 비유하자면 지금 AI 데이터센터 건설에 돈을 쏟아붓는 빅테크(아마존·MS·구글·메타 등)는 당시 광통신망을 깔던 통신사(월드컴·글로벌크로싱·퀘스트)와 비슷하고요. GPU를 공급하는 엔비디아는 그 당시의 통신장비업체(시스코·시에나·루슨트), 메모리 반도체 제조사는 광섬유 케이블을 생산하는 코닝 정도의 위치에 있죠.1990년대 후반, 인터넷 혁명으로 세상은 기하급수적인 발전을 이어가는 듯했습니다. 그 시절, 애널리스트 보고서와 스타트업 사업계획서, 각종 컨퍼런스를 통해 반복되는 주장은 이거였죠. “인터넷 트래픽이 100일마다 두 배로 증가한다.”데이터 사용량이 100일에 2배, 1년이면 1500%씩 폭증할 거란 통계는 업계를 열광케 했고요. 1998년 4월엔 미국 상무부까지 이를 보고서에 인용하면서 기정사실화했습니다.‘앞으로 트래픽이 넘쳐난다. 통신망을 아무리 많이 깔아도 부족하다’고 다들 믿었습니다. 기업들이 앞다퉈 광통신망 구축에 뛰어들었죠. 주요 열차노선과 고속도로,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옆으로 땅을 파서 유리로 만든 광섬유케이블을 매립하는 경쟁이 시작됩니다. 대서양과 태평양 해저에까지 광케이블이 깔렸죠.이른바 ‘정보 고속도로’ 구축에 투입된 자금은 엄청났습니다. 1996~2001년 미국 통신회사의 신규 채권 발행 규모가 5000억 달러를 넘었을 정도였는데요. 당시 금융시장이 통신기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줬죠. 일단 통신망을 깔기만 하면 곧 몇 배의 수익으로 돌아올 거라 기대했으니까요. 통신기업의 높은 주가는 부채비율 상승을 정당화했습니다.그리고 2000년, 파티가 갑자기 끝납니다. 미국 연준의 금리인상으로 돈줄이 막히면서 기업들은 부채를 갚지 못하게 됐고요. 급증하는 것처럼 보였던 매출은 사실 회계 기법으로 부풀려진 허상이었다는 게 드러났습니다. 사실 인터넷 트래픽은 100일이 아니라 1년에 2배씩만 늘고 있었거든요. ‘100일마다 2배’라는 수치는 월드컴이 퍼뜨린 허구의 수치였던 겁니다.시장은 빠르게 무너집니다. 2002년 통신업계 거물이었던 글로벌 크로싱과 월드컴이 차례로 파산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죠. 당시 세계 최대 광섬유 제조업체 코닝의 주가는 2000년 최고 113달러에서 2002년 약 1달러로 폭락합니다.다크 파이버와 유튜브의 탄생사실 당시의 공급 과잉엔 당시 광통신 기술의 기하급수적인 진화도 한몫했습니다. 1990년대 중반 상용화된 고밀도 파장 분할 다중화(DWDM) 기술은 처음엔 광케이블 한 가닥에 8개 신호를 보낼 수 있었는데요. 2000년쯤엔 128개 신호를 동시에 전송할 수 있게 됐죠. 갑자기 이미 깔아놓은 광케이블만으로도 공급이 충분하다 못해 남아돌게 된 겁니다.그럼, 거품이 꺼진 뒤 그 많은 광케이블은 어떻게 됐을까요? 2002년 미국 광섬유 회선의 사용률은 고작 2.7%, 2005년 말까지도 15% 정도에 그쳤습니다. 이로 인해 대역폭 비용은 90%나 폭락했죠. 신호(빛)가 흐르지 않아 어둡게 방치된 광섬유를 일컫는 ‘다크 파이버(dark fiber)’라는 말이 생겨났고요. 업계에선 “100년 치 용량이 확보됐다”는 비아냥이 나왔죠. 여기까진 참담한 실패 스토리인데요. 이제부터 반전이 있습니다. 광통신망이 흔하디흔해지면서 드디어 인터넷 혁명의 전성기가 열리기 시작했어요. 가장 대표적인 게 유튜브(2005년)와 넷플릭스(2007년)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의 등장입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비용 때문에 동영상 서비스는 엄두도 내지 못했겠지만, 이젠 가능해진 거죠.또 2006년 아마존의 AWS(아마존 웹 서비스) 출범과 클라우드 컴퓨팅 서비스 등장의 배경에도 다크 파이버가 있습니다. 이미 저렴한 광통신망이 전국적으로 깔려 있었기에, 큰 추가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먼 곳의 데이터센터와 기업을 연결할 수 있게 됐으니까요.2004년 탄생한 페이스북이 전 세계 수십억 명을 연결하는 소셜미디어로 성장할 수 있게 된 것도 대륙을 연결하는 광통신망 고속도로가 이미 깔려있었기 때문입니다.결과적으로 1990년대의 엄청난 과잉 개발은 현대 디지털 경제의 발판이 됐습니다. 다크 파이버는 100년은커녕, 약 15년 만에 소진됐어요. 이후 빅테크들은 직접 나서서 해저케이블을 추가로 깔고 있죠. 결국 인터넷은 세상을 바꿀 혁명이었고요. 이를 실현하기 위해선 대륙과 바다를 가로지르는 광통신망 인프라가 촘촘하게 깔려야만 하는 것도 맞았습니다. 1990년대 투자자들이 내놨던 전망 중 상당 부분은 사실이었던 거죠. 다만 당시의 기대와 달리 기술혁명이 구석구석까지 스며드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고요. 과잉 투자와 수요 폭발 사이엔 시차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중간엔 닷컴버블 붕괴라는 큰 전환점을 겪어야 했죠.그런데 그거 아세요? 1700년대 후반 산업혁명 이후 지난 약 250년 동안의 모든 기술혁명이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는 걸요. 기술혁명과 버블을 논할 때 항상 등장하는 책 ‘기술혁명과 금융자본’(카를로타 페레스, 2002년 작)을 통해 이 내용을 정리해 보겠습니다.AI 혁명, 전환점 다가오는 이유18세기 후반 영국 산업혁명 이래로 경제와 사회를 재편한 기술혁명은 5차례 있었습니다. 40~60년에 한 번꼴로 기술혁명이 찾아온 거죠. 그리고 그 기술혁명의 전반기엔 특히 새로운 인프라에 대한 폭발적인 투자가 일어났죠. 그리고 이는 거품 붕괴 또는 공황으로 이어지는 게 공식이죠. 여기까지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①산업혁명(핵심국가: 영국)-시작: 1771년 영국 아크라이트의 수력 방적 공장 가동-주요 인프라는 운하. 1790년대 초 운하 주식에 대한 광적인 투자 발생-1793년부터 운하 프로젝트의 거품 붕괴하며 은행 파산. 1797년 금융 공황②증기와 철도의 시대(영국)-시작: 1829년 리버풀-맨체스터 철도용 ‘로켓’ 증기기관차 시험 주행 성공-주요 인프라는 철도. 1840년대 중반, 철도 건설 붐이 일면서 주식 투기 극에 달해-1845년 철도 주식 거품 붕괴. 1847년 철도 공황③강철과 전기의 시대(미국)-시작: 1875년 미국 피츠버그에 카네기 베세머 강철공장이 설립-주요 인프라는 강철레일. 과도한 철도 건설로 버블 발생-1893년 주가 급락과 은행 뱅크런을 시작으로 수백개 은행과 기업 파산④석유와 자동차, 대량생산의 시대(미국)-시작: 1908년 미국 포드의 모델T 출시-주요 인프라는 자동차와 도로. 1920년대 내내 극단적인 주식 열풍이 일어남-1929년 대공황⑤인터넷 혁명(미국)-시작: 1971년 인텔 마이크로프로세서 발표-주요 인프라는 디지털 통신. 1990년대 닷컴 버블-2000년 3월 나스닥 거품 붕괴그런데 저자 카를로타 페레스가 진짜 말하려는 기술혁명의 공통점은 따로 있습니다. 광란의 투기가 거품 붕괴와 경기침체라는 대폭락을 불러오지만, 그 혼돈의 시간이 지나면 다시 본격적인 호황기가 찾아오더라는 게 핵심이죠. 그리고 이때 기술혁명은 진정으로 사회를 변화시키고 사람들의 삶에 뿌리내리게 됩니다. 참고로 이 책이 쓰인 2002년은 아직 닷컴버블 붕괴의 한복판이었던 시기인데요. 이미 그는 이후에 인터넷 기술혁명의 정점이 찾아올 것이라 예견했습니다.그럼, 왜 이렇게 역사가 반복될까요. 새로운 기술을 수용하는 데 있어 금융자본과 생산자본의 속도가 확연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금융자본은 움직임이 매우 기민하죠. 높은 이익을 좇아서 빠르게 새로운 기술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신기술에 대한 장밋빛 전망을 쏟아내며 인프라 투자 붐을 일으켜서 막대한 이익을 거둡니다.이와 달리 생산자본(산업계)은 느리고 보수적일 수밖에 없어요. 이미 구체제에서 갖춰진 기술과 설비가 있는데, 단번에 이걸 버리고 옮겨갈 순 없으니까요. 버틸 때까지 버티다가, 새로운 패러다임이 사회적 상식 수준으로 자리 잡으면 그제야 움직이게 됩니다. 이때부터가 기술혁명에 있어선 진짜 ‘황금기’라 할 수 있죠.바로 이런 속도 차이로 인해 기술혁명은 크게 두단계로 나뉘어 진행됩니다. 1단계 구축기는 금융자본이, 2단계 배치기는 생산자본이 주도하죠. 그리고 1단계의 막바지, 즉 금융자본의 기술혁명에 대한 투기가 극에 달한 직후엔 시장이 붕괴하는 ‘전환점’이 찾아오고요. 이를 그래픽으로 표현하면 아래와 같아요.아니, 그럼 고통스러운 버블 붕괴가 없게 좀 천천히 신중하게 금융자본의 투자가 진행돼야 하는 것 아니냐고요? 저자의 생각은 다릅니다. 이렇게 기술혁명 초반에 금융자본이 집중되는 게 “기본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막대한 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효과적 방법”이라고 평가하죠. 투자자들을 열광케 하는 금융시장의 거품이 있었기에 기술혁명을 위한 기반 인프라가 마련될 수 있었단 겁니다. 금융은 그저 자기 역할을 했을 뿐이죠.그럼 2026년 현재 진행 중인 AI 기술혁명은 어디쯤 와있을까요. 주식시장의 분위기나 데이터센터에 대한 엄청난 투자 열풍을 감안하면 1단계의 후반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자가 ‘광란’의 시기라고 부르는 기간이죠. 카를로타 페레스의 논리대로라면 언젠간 한번 큰 전환점이 찾아올 거란 뜻입니다. 페레스는 이 광란의 시기에 나타나는 특징을 이렇게 설명합니다.“광란은 모든 면에서 극도로 불균형한 번영과 양극화가 심화하는 시기이다. 번영의 편에 서 있는 이들은, 끊임없는 성장이 도래했다고 ‘뉴 이코노미’를 찬양한다. 반면, 현대화의 길을 걷지 않았거나 걸을 수 없는 산업, 국가, 지역, 기업들은 명백히 쇠퇴하고 저성장과 자금 부족이라는 악순환에 빠져든다. 그들에게 지금은 끔찍한 시기다. 따라서 ‘광란의 시기’란 부자는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지는 시기이다. 금융자본은 이러한 양극화된 단계의 원심력을 가속하는 역할을 한다. 돈에 대한 사랑은 그 어느 때보다 번성한다. 개인적 이익은 찬양받고, 사회적 이익은 경멸받는다. 부자라는 것은 ‘선한’ 것이며, 그 외의 모든 것은 실패다.“어떤가요. 현실과 비교했을 때 설명이 들어맞나요? 만약 지금 시기가 끔찍하다고 여긴다면, 그나마 다행인 건 이게 영원하진 않고 끝이 있다는 점이겠죠. 하지만 반대로 지금이 더할 나위 없이 좋다는 쪽이라면 조심해야 할 겁니다. 언제 어떻게 낭떠러지가 나타날지 모르니까요. By.딥다이브*이 기사는 4월 1일(수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6-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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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이 미사일 쏘면 금값은 떨어진다…당신이 알던 상식의 배신[딥다이브]

    위기에 강한 안전자산이라던 금. 하지만 이란전쟁 발발 이후 금값은 되레 급락했죠. 이를 두고 시장에선 희한한 일이라며, 각종 분석이 쏟아집니다. 동시에 ‘지금이 금을 살 때인가, 팔 때인가’를 두고 고민도 커지죠.그런데 말이죠. 전쟁 나면 금값이 오른다, 그런 얘기 누가 했던 거죠? 역사적으로 볼 때 미국이 중동 산유국에 미사일을 쏘면 금값은 오히려 떨어졌거든요. 그게 무슨 말이냐고요? 전쟁과 금값의 상관관계를 들여다보겠습니다. *이 기사는 3월 27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안전자산 금값이 왜 이래?-16.2%.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전쟁을 일으킨 2월 28일 이후 금값의 변화입니다(2월 27일 온스당 5247달러→3월 26일 4407달러). 같은 기간 코스피(-12.5%)나 S&P500 지수(-5.8%)보다 더 많이 떨어졌죠. 특히 지난주(16~20일)엔 일주일 만에 금값이 11%나 빠지면서, 주간 하락폭으론 1983년 이후 43년 만에 최대를 기록했어요.금값이 급락하자, 그동안 금 투기를 주도했던 중국 개인투자자들은 패닉에 빠졌습니다. 귀금속 매장엔 금값이 오를까, 내릴까를 묻는 문의가 쏟아졌고요. 중국 주요 6개 은행은 잇달아 “귀금속 가격 변동성과 시장 불확실성에 주의하라”는 경고를 발표했죠. 하지만 동시에 ‘지금이 금을 싸게 살 기회’라고 본 이들이 몰리면서 베이징 백화점의 금괴 판매 매장은 북적거렸습니다. 여전히 ‘위기엔 역시 금’이란 믿음이 남아있는 거죠.그럼, 이란전쟁이란 심각한 위기 상황에서 왜 안전자산인 금 가격이 떨어진 걸까요? 이를 두고 매우 다양한 분석이 쏟아져 나오는데요. 가장 많이 거론되는 건 크게 두가지입니다.①그동안 워낙 많이 올랐다= 금값은 거의 2년 가까이 쉬지 않고 180% 넘게 올랐죠. 특히 지난해 9월을 기점으로 순식간에 온스당 4000달러, 5000달러, 그리고 5500달러 선까지 돌파했는데요. 그만큼 금 투자로 수익을 낸 사람들, 그중에서도 개인 투자자가 많아졌고요. 이들이 전쟁으로 불안해지자 수익 실현에 나섰습니다.②금리 인하가 멀어졌다= 이란전쟁은 보통의 지정학적 위기와 달리 유가를 직접적으로 건드렸죠. 치솟은 유가가 물가를 밀어 올리게 될 거고요. 이러다 각국 중앙은행의 금리인하가 물 건너갈 수 있다, 심지어 금리가 오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커집니다. ‘금리=돈값’이고, 금리가 오른다는 건 돈의 값어치가 커진다는 뜻이잖아요. 금 같은 실물보단 현금, 특히 미국 달러화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투자자들이 금을 팔고 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면 금값은 떨어진다 이런 분석에 공감하시나요? 논리적이긴 하지만 그리 명쾌하진 않은데요. 그래서 찾아봤습니다. 과거 미국이 중동 산유국과 상대로 전쟁을 벌였을 때 금값은 어떻게 움직였는지를요. 크게 두 차례가 있었죠. 1991년 걸프전, 그리고 2003년 이라크전쟁.그리고 공통적인 패턴을 찾았습니다.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즉, 위기가 고조되던 시점엔 금값이 단기간 급등했는데요. 막상 미국이 전쟁에 돌입하자 금값은 급락했어요. 마치 지금의 이란전쟁처럼 말이죠.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1991년 걸프전쟁>1991년 미국의 걸프전 참전은 1990년 8월 일어난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 대한 대응이었죠. 1990년 국제 금값은 이라크를 둘러싼 긴장이 고조되면서 7월 말 이미 온스당 365달러까지 올랐고요. 그해 8월 2일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기습 침공했단 소식과 함께 순식간에 400달러선을 넘었어요. 특히 그해 10월 초엔 온스당 416달러까지 치솟았죠.이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주요 산유국인 쿠웨이트가 위기에 처했고, 사담 후세인이 여기서 멈출지 아니면 사우디아라비아까지 진격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요. 시장에선 ‘이라크가 화학무기라도 써서 전쟁이 장기화한다면 금값이 500달러를 넘길 것’이란 공포스러운 전망까지 나왔습니다.그리고 1991년 1월 17일, 마침내 미국 주도의 연합군이 ‘사막 폭풍 작전’을 개시합니다. 미 해군 함정이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로 토마호크 미사일을 날리며 전쟁이 시작됐죠. 그리고 금값은? 전쟁 발발 소식과 함께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어요.약 5주간의 공중전에서 연합군은 압도적인 화력을 보여줬고요. 1991년 2월 24일 지상공격을 시작한 지 불과 100시간 만에 연합군은 쿠웨이트를 해방시켰습니다. 그해 2월 말 금값은 온스당 363달러.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이후 올랐던 상승분을 모두 반납했죠.<2003년 이라크전쟁>2002년 9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유엔 총회에서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비난하며 “행동이 불가피하다”고 연설했습니다. 미국이 이라크 공격의 명분을 쌓으며 위기가 고조되자 금값이 요동쳤고요. 불과 4개월 만에 20% 넘게 폭등했죠(2002년 10월 온스당 320달러→2003년 2월 388달러).이후 유엔의 외교적 협상이 결렬되면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기정사실화했던 2003년 2월. 금값은 고점을 찍고 내려오기 시작합니다. 아직 전쟁 발발 이전이었는데도 시장은 이미 ‘전쟁은 일어난다’는 걸 가격에 반영해 버린 거죠. 2003년 3월 20일 미국 지상군이 이라크 국경을 넘었을 때 금값은 이미 온스당 340달러로 떨어져 있었고요. 바그다드가 함락되고 미국의 승리가 확실해졌을 땐 전쟁 이전 수준인 320달러 선으로 돌아갔습니다.소문에 사서 뉴스에 팔라 두 역사적 사례로 알 수 있는 건? “소문에 사서 뉴스에 파는” 금 시장의 역학이 작용한다는 점이죠. 안전자산인 금값을 끌어올리는 건 불확실성입니다. 전쟁이 일어날지, 얼마나 심각할지를 알 수 없다는 그 공포가 금값 상승의 가장 큰 동력이죠.하지만 첫 번째 미사일이 발사되면? 최악의 시나리오는 현실이 되고 불확실성은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가격을 끌어올릴 새로운 공포가 생겨나지 않죠. 이미 오를 대로 오른 가격이 부담스러운 스마트 머니는 수익 실현에 나서고요. 그렇게 금값은 하락세로 돌아섭니다.지금의 이란전쟁도 이런 공식에 대입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미국이 ‘에픽 퓨리 작전’을 개시한 건 올해 2월 28일이지만, 이란을 둘러싼 군사적 긴장이 고조된 지는 상당히 오래됐죠.따져 보면 2024년 4월 13~14일 이란이 드론과 탄도 미사일을 동원해 이스라엘 영토를 사상 처음 직접 공격한 게 중요한 전환점이었는데요. 한동안 잠잠했던 금값이 이즈음부터 본격적으로 뛰기 시작했고요. 이후 거의 2년 가까이 놀라운 상승세를 이어갔습니다. 물론 상승분이 모두 이란 때문인 건 아니지만, 이란에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이 금값 상승에 어느 정도 일조한 셈이죠.이후 올해 1월 초 이란에서 대대적인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고, 이란 정부는 무자비한 무력 탄압을 벌였는데요. 이를 계기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국의 군사 개입을 강하게 경고하고 나섰습니다. 미국이 이란에 대해 군사행동에 나설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급격히 고조됐고요. 1월 초 온스당 4400달러에 머물던 금값이 불과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5600달러로 치솟았어요. 불확실성과 공포가 극에 달했던 시점이죠.그리고 미국이 진짜로 테헤란에 미사일을 날린 지 4주가 되어가는 지금의 금값은? 다시 온스당 4400달러대로 돌아왔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매우 강력한 타격을 받게 될 것”이라고 이란에 처음 경고했던 시점(1월 9일)과 비슷한 수준입니다.그래서 전쟁 끝나면 다시 오를까?여기까지 봤을 때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이겁니다. 지정학적 긴장이 고조되기 직전에 금을 사서, 전쟁이 터지면 얼른 금을 팔아야 한다는 거요.아니, 이미 그럴 기회를 놓쳤다고요? 그렇다면 우리가 알아봐야 할 건 이거겠죠. 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 그땐 금값이 오를까요 떨어질까요.이 역시 앞서 미국이 이라크와 벌였던 전쟁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과거 두 전쟁 이후 금값 흐름이 정반대였거든요. 1991년 걸프전 이후 금값은 안정세를 보이며 장기 약세장에 진입했지만, 2003년 이라크 전쟁 이후엔 금값이 무섭게 뛰며 대세 상승장이 펼쳐졌습니다. 왜 이렇게 달랐을까요? 두 전쟁이 미국 경제에 끼친 영향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입니다. 1991년 걸프전은 미국이 연합군 지원을 받아 벌인 단기 전쟁이었죠. 그래서 전쟁 비용 중 80%가량을 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일본·독일 등 동맹국들이 나눠 냈습니다. 국제 유가도 금세 안정을 되찾았고요. 전쟁 이후 회복이 빨랐고, 미국 경제에 그리 큰 부담으로 남지 않았죠.반면 2003년 이라크 전쟁에 들어간 비용은 거의 다 미국의 몫이었는데요. 미국이 투입한 직접 전투 비용만 7500억 달러, 장기적 총비용은 무려 2조~3조 달러로 추정됩니다. 이걸 메우기 위해 미국은 엄청나게 국채를 찍어내야 했고요. 이는 미국의 막대한 재정적자와 통화가치 하락으로 이어졌죠. 게다가 이라크의 원유 생산능력 회복이 예상보다 늦어지면서, 국제 유가까지 무섭게 뛰었습니다. 당시 금값이 2004년 400달러에서 2008년 1000달러까지 급등한 배경엔 이런 이라크 전쟁의 후폭풍이 있었던 거죠.이번 전쟁 이후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이 전쟁이 얼마나 길어지느냐, 미국 경제와 중동 원유생산 능력에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기느냐가 결국 관건이 될 겁니다. 아직 그 답을 알긴 어렵지만, 한번 지켜보시죠. By.딥다이브*이 기사는 3월 27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6-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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