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유재동]분초 다투는 기술경쟁 시대… 규제의 유통기한이 짧아진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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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동 경제부 차장
유재동 경제부 차장
“하책(下策) 중 하책이 상한제, 그보다 더 하책은 쿼터제….”

몇 해 전 기획재정부를 취재하면서 한 관료에게 들은 얘기다. 정부의 서비스업 규제 개혁을 총괄 조정하는 업무를 하던 그는 다른 부처들이 말도 안 되는 규제 권한을 틀어쥔 채 고집을 부리고 있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를 포함한 기재부 관료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우리 경제의 혁신을 막는 규제 형태엔 크게 3가지 유형이 있다. ‘상한제, 쿼터제, 면허제.’ 뒤로 갈수록 더 강력하고 잘못 운용됐을 때 부작용도 크다.

상(하)한제는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과 용역의 가치를 정부가 통제한다. ‘이 가격 이상으로는 팔지 말라’, 또는 ‘최소 이 이상의 값은 지불하라’는 것이다. 가격상한제는 남미, 아프리카처럼 민생고가 극심한 나라에서 자주 쓰인다. 정부가 강제로 물가를 누르면 당장에 시장이 안정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싼값에는 물건을 안 팔려고 해서 품귀현상이 생기고 암시장 가격만 치솟는다. 우리나라에서 급격히 오른 최저임금 때문에 일자리가 줄어든 것도 같은 현상이다.

쿼터제는 가격 대신 물량을 통제한다. 기업 매출에 직접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상한제보다 세다. 대학 정원 규제나 영화 스크린쿼터제가 대표적이고 넓게는 대형마트 의무 휴업, 수도권 공장규제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 대부분 자국 산업이나 사회적 약자를 보호한다는 취지로 도입되지만 너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 시장에 역기능을 준다.

면허제는 ‘규제의 끝판왕’이다. 정부가 높은 울타리를 쳐놓고 한정된 집단만 그 안에서 영업을 허용한다. 기업의 신규 사업 진출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기에 가장 강력한 형태의 규제다. 정부의 인허가 도장에 기업의 목줄이 달려있는 셈이다. 이처럼 정부는 때때로 가격을 통제하고, 사업 확장을 제한하며, 높은 진입장벽을 쳐서 새로운 경쟁자의 출현을 막는다. 우리나라의 굵직한 규제들을 거칠게 가지치기 해보면 크게 이 세 가지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 중 요즘 이슈가 되는 게 면허제다. 운송업은 원래 택시기사나 버스회사에만 허용됐지만 카풀과 우버라는 새로운 플레이어가 등장했다. 에어비앤비는 숙박업을 호텔이나 펜션만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있다. 정보기술(IT) 스타트업들도 병원과 금융회사의 밥그릇에 도전장을 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도 늦은 밤엔 택시를 타고 귀가하고, 여행 가면 호텔에서 잠을 자고, 송금은 은행을 통하는 게 상식이었다. 그런 상식의 근간을 흔드는 일들이 지금 봇물 터지듯 나오고 있다.

면허제 같은 강력 규제들도 반드시 필요한 측면이 있다. 상습 음주운전자에게 카풀 기사를 맡기거나, 성범죄자에게 보육교사 자격을 줄 수 없다. 문제는 규제가 세상 변하는 속도에 맞춰 유연하게 진화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ICT기업에 인터넷은행 대주주 자격을 주는 데만 3년이 걸렸다. 1세대 인터넷은행들이 촘촘한 규제 그물에 걸려 허우적대는 동안 국내 핀테크 산업이 추진력을 잃었고 이는 2세대 인터넷은행의 흥행 부진으로 이어지고 있다. 원격진료는 규제 문제가 공론화된 지 벌써 20년이 넘었다. 그 세월을 못 견딘 헬스케어 기업들은 한국을 떠나 해외에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기술 혁신의 속도를 정부가 못 따라가는 것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권과 이념을 떠나서 규제혁신이 늦어도 너무 늦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마치 성장하는 자녀에게 어릴 적 입던 작은 옷을 강요하는 꼴이다. 관료들에게 스스로 쥐고 있는 규제가 시대 흐름에 부합하는지 최소 일주일에 한 번씩은 따져보기를 권한다. 분초를 다투는 기술 경쟁 시대엔, 규제의 유통기한도 짧아질 수밖에 없다.
 
유재동 경제부 차장 jarrett@donga.com
#쿼터제#상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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