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희균]크리스말로윈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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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서태지의 신곡 ‘크리스말로윈(Christmalo.win)’을 듣다 보면 반사적으로 2007년 크리스마스가 떠오른다. 그해 크리스마스이브가 내겐 핼러윈(Halloween)의 이미지처럼 좀 오싹했기 때문이다.

2007년 12월 24일 어둠이 짙어질 무렵 친구와의 만남, 근사한 저녁, 설레는 데이트 등을 기대하며 퇴근 채비를 하던 교육담당 기자들의 휴대전화가 동시에 요란하게 울려댔다. 200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물리Ⅱ 복수정답 논란과 관련해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긴급 기자회견을 한다는 문자메시지였다. 순간 기자들은 일제히 “갑자기 약속을 깨서 미안하다”는 전화를 날리고, 기자실을 뛰쳐나갔다.

당시 평가원은 서울 종로구 삼청동 골목의 끝자락에 있었다. 왕복 2차로의 좁은 도로인 데다 날이 날이니 만큼 삼청동길은 마비 상태였다. 기자들은 추워서 나오는지, 열을 받아서 나오는지 모를 콧김을 씩씩 뿜으며 평가원을 향해 전력 질주했다.

기자회견장에 들어서자 정강정 당시 평가원장이 어두운 얼굴로 입을 뗐다.

“물리 정답처리 과정에서 원장인 제가 관리책임을 다하지 못하였음을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이번 사태 해결의 최우선 과제는 사랑하는 수험생들의 여망에 부응하는 것이라 판단하여…”라고 말을 시작했다. 이어 복수정답을 인정하고 사태 해결 계획을 밝힌 뒤 “이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저는 평가원 원장직에서 물러나고자 합니다”라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역대 원장 중 중도에 낙마하지 않은 이를 꼽는 것이 더 빠르다는 평가원장직을 처음으로 연임한 그가 자리에서 물러나는 순간이었다.

당시 수능 직후부터 수험생과 물리학계가 복수정답을 지적했지만 평가원은 한 달을 미적거렸다. 결국 수시 전형이 다 끝난 뒤에야 복수정답을 인정해 대혼란을 빚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정시 시작 전이었다는 점 정도다. 그리고 2014학년도 수능 세계지리 오류 사태에 비하면 그나마 훨씬 나았다는 점이다.

지난해 교육부와 평가원은 이의신청을 뭉개기에 급급한 것도 모자라 수험생들을 상대로 소송까지 벌이며 1년을 허비했다. 가장 책임이 무거운 성태제 당시 평가원장은 꿋꿋이 3년 임기를 채우고 올해 3월에야 물러났다. 서남수 당시 교육부 장관은 ‘입시의 달인’이라는 별칭이 무색하게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고등법원 판결 이후 거세진 비난 여론에 떠밀려 문제 오류를 인정하긴 했지만, 참사의 주범 중 누구 하나 나서서 고개를 숙이는 사람은 없다. 지난달 31일 문제 오류를 인정하는 기자회견장에 선 것도 현직인 황우여 교육부 장관과 김성훈 평가원장이었다. 물론 이들이 취임 직후 재빨리 이 사태 해결에 나서지 않은 것도 잘못이지만, 사고를 쳐놓고 ‘전직’이라는 그늘 아래로 비겁하게 숨어버린 이들에 비할 바는 아니다.

성 전 원장은 지난해 11월 문제 오류를 부인하는 기자회견에서 “최선을 다해 출제했지만 학생들에게 혼란을 주는 문제를 내서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듣는 이가 울컥 유감스러워질 만한 태도였다. 그는 교과서를 기준으로 정답을 고른 수험생을 위한다고 했지만, 실상은 자신의 보신을 위하려 한 것이라고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성 전 원장은 수능 영역별 만점자 1% 정책, A·B 선택형 수능 등 현장의 반발이 많았던 정책을 불도저식으로 밀어붙인 주인공이다. 세계지리 파동까지 감안하면 임기 내내 수능을 갖고 놀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밤새 고민한 새롭게 만든 정책 어때/겁도 주고 선물도 줄게’라는 ‘크리스말로윈’의 가사가 귀에 꽂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foryou@donga.com
#수능#크리스말로윈#서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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