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영호]‘을사늑약 100년’ 우린 지금 어디에

  • 입력 2005년 11월 18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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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은 구한말 우리 민족이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식민지의 길로 들어서는 계기가 된 을사늑약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조인된 지 만 100년이 되는 날이다. 구한말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에 조선의 위정자들이 국제 정세에 어두웠고 내부 개혁을 게을리 해 결국 우리 민족은 식민지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조선과 달리 서구의 충격에 직면한 뒤 재빨리 내부 개혁을 단행해 부국강병을 달성한 일본은 서구 열강의 뒤를 따라 후발 제국주의 노선을 채택했고 조선을 병탄한 것이다.

을사늑약의 경험에서 올바른 교훈을 얻지 못할 경우 19세기 망국 또는 고통의 역사가 21세기에도 되풀이될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구한말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한반도는 여전히 강대국들에 둘러싸여 있다. ‘어깨’들이 포진하고 있는 일종의 우범지대에 한국이 놓여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사하듯이 마음대로 국가를 옮겨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국가의 지정학적 조건은 국가전략을 수립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어려운 지정학적 조건 아래에서 국가의 생존과 번영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국익에 도움이 되는 동맹관계의 정립이 가장 중요하다. 거친 해일이 일어나는 바다와 같은 무정부적 국제정치 현실에 떠 있는 개별 국가가 혼자만의 힘으로 생존을 유지하겠다는 것은 자만심에 불과하다. 구한말 일본이 을사늑약을 강요했을 때 우리는 진정한 친구인 동맹국을 갖지 못했으며 이는 우리 민족이 국권을 잃는 과정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광복 후 한국은 6·25전쟁을 계기로 체결된 한미동맹조약을 통해 미국이라는 동맹국을 갖게 됐고 이후 한미동맹은 한국의 안보와 경제의 번영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 같은 역사적 경험과 지정학적 현실에 비춰볼 때 우리가 무조건으로 반외세를 주장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국력의 크기와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그 바탕 위에서 국익을 실현할 수 있는 현실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국가전략과 동맹관계를 수립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구한말의 역사적 경험은 보여 주고 있다.

건국과 근대화 과정을 거쳐 21세기 한국은 역사적으로 한반도상에 존재한 그 어떤 국가보다도 경제력과 군사력 측면에서 강력한 힘을 갖게 됐다. 이 점에서 광복 이후 우리 역사는 위대한 국민에 의해 이룩된 자랑스러운 역사로서 결코 청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러한 긍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정글의 세계인 국제정치에서 국력의 절대적 평가에만 안주하면 낭패를 볼 수 있다. 우리가 국력의 신장을 이룬 사이에 상대적으로 중국과 일본은 더욱 큰 국력의 성장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21세기 일본은 패전의 늪에서 완전히 벗어나 미일동맹의 지붕 밑에서 세계 두 번째의 군사강국으로 성장해 가고 있다. 또한 대륙국가인 중국은 근대화 노선을 채택한 이후 꾸준한 국력 성장을 이룩해 군사 및 경제 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21세기 동북아지역에서 열강의 첨예한 이해관계는 한반도를 둘러싸고 재현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광복 이후 전쟁의 폐허 위에서 우리 국민이 혼신의 힘을 다하여 근대화와 민주화를 달성했지만 21세기 주변 국가들의 급격한 국력 팽창은 국제 정세의 변화에 따라서는 구한말 을사늑약으로 시작된 ‘망국의 쓰나미’가 또다시 우리에게 휘몰아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와 주변 열강 사이의 국력 격차는 21세기 들어 더욱 크게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외교 역량을 강화하고 우리의 중요한 안보 자산인 한미동맹을 21세기형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국제 정치에서 점쟁이가 말하는 운명은 통용되지 않는다. 국가의 흥망성쇠는 엄연히 국가전략적 선택의 결과물이다. 마찬가지로 21세기 한국의 미래는 국가지도자의 전략적 선택과 국민의 지지에 달려 있다. 안보 문제를 국내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고 오로지 국익을 중시하겠다는 국가지도자의 확고한 의지만이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외교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는 자화자찬식의 외교와 국력의 한계를 무시한 허장성세의 외교는 국가의 불행을 가져올 뿐이다. 을사늑약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고 21세기 선진한국의 미래를 개척하기 위한 실용주의적 국가전략 비전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때다.

김영호 성신여대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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