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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포커스]전쟁없는 평화… 거품붕괴 디플레… 지진-화산 재해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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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포커스]전쟁없는 평화… 거품붕괴 디플레… 지진-화산 재해 상처

도쿄·가와사키=박형준 특파원 입력 2019-03-09 03:00수정 2019-03-11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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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무는 日 헤이세이 30년, 3대 키워드
2019년 1월 아키히토 일왕(오른쪽)과 나루히토 왕세자가 군중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아키히토 일왕이 4월 30일 퇴위하면 헤이세이 30년은 역사 속으로 저문다. 아사히신문 제공
1엔짜리 휴대전화 발매(1996년), 1900엔짜리 유니클로 양털 점퍼 대히트(2000년), ‘욘사마(배용준)’가 이끈 한국어 공부 열풍(2004년)…. 요즘 일본 TV와 신문에 연일 등장하는 지난 30년을 상징하는 사회현상이다.

요즘 도쿄 시내를 거닐면 과거로 돌아간 느낌이 물씬 풍겨난다. 어디를 가도 아키히토(明仁·86) 일왕 시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마케팅이 한창이다. 야마자키 제빵은 1990∼2000년대 유행했던 히트 상품을 모아 한정 판매하고 있다. 호린도 서점엔 고(故)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전 총리가 관방장관으로 재직하던 1989년 1월 7일의 사진이 걸렸다. 그날 오부치 장관은 새 연호 ‘헤이세이(平成)’를 발표했고, 이튿날 아키히토 일왕이 즉위했다.

아키히토 일왕이 다음 달 30일 퇴위하면 헤이세이 시대가 끝난다. 30년간 일본이 걸어온 길을 △평화 △디플레이션 △재해 3개 키워드로 정리한다.


○ 근대화 이후 유일한 ‘평화’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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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年號)는 특정 일왕의 연도에 붙이는 호칭을 말한다. 일왕 1명에 대한 연호를 1개만 붙이는데 이를 ‘일세일원(一世一元)’이라고 부른다. 645년 다이카(大化) 때부터 시작됐다.

헤이세이는 ‘평화를 이룬다’는 뜻이다. 나라 안팎과 천지의 평화를 추구한다는 의미가 담겼다. 일본인이 꼽는 헤이세이 30년의 가장 큰 특징도 ‘평화’다. 메이지(明治·1868∼1912), 다이쇼(大正·1912∼1926), 쇼와(昭和·1926∼1989) 시대 일본은 매번 전쟁을 치렀다. 헤이세이는 일본 근대화의 시초인 메이지 유신 이후 약 150년간 유일하게 전쟁이 없었던 시대. 아키히토 일왕도 지난달 24일 마지막 재위 기념식에서 “근현대에서 처음으로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시대”라고 자평했다.

5일 가나가와(神奈川)현 가와사키(川崎)시 평화관을 찾았다. 전시관 2층 천장에서 태평양전쟁 때 미군이 대량 투하한 M69 소이탄(燒夷彈) 모형이 불꽃을 뿜으며 떨어지는 형상이 만들어져 있었다. 양옆에는 1945년 4월 대공습으로 무너진 가와사키 시내 건물 모형도 있었다. 기자를 안내한 전문조사원 데루오카 료조(暉峻僚三) 씨에게 “평화박물관인데 전쟁 자료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관람객에게 평화라는 개념을 깊이 각인시키기 위해 일부러 전쟁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는 묵직한 답변을 내놨다. 이어 “전 세계 120여 개 평화박물관이 있는데 이 중 30여 개가 일본에 있다”며 “일본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역사를 모두 갖고 있어 평화에 대한 열망이 강하다”고 덧붙였다.

단체 관람하는 초중학생도 많았다. 학교 수업을 대신해 평화박물관을 견학한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평화의 중요성을 몸에 익히는 것이다.

일본 정계에 헤이세이는 어떤 의미일까. 관방장관 시절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 모집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고노 담화’를 발표한 고노 요헤이(河野洋平·82) 전 자민당 총재는 5일 아사히신문 인터뷰에서 “30년간의 정치를 대략 말하면 ‘좋았다’고 생각한다. 전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91년 걸프전 때 미국 요청으로 고꾸라질 뻔했지만 위기를 잘 넘겼다”고 했다.



○ 디플레 이후 등장한 신인류 ‘1마일족’


헤이세이가 시작된 1989년 일본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세계 2위 경제대국이 된 일본은 미국 부동산과 주요 회사를 가전제품 사듯이 수집했다. 미국 기업도 앞다퉈 “일본을 배우자”며 소니와 도요타 공장을 시찰했다. 하지만 1990년대 초 거품이 꺼지고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 출범 전까지 일본은 기나긴 디플레이션을 경험했다.

1989년에 태어난 이들의 올해 나이가 30세다. 태어나서 줄곧 일본 경제가 위축되는 것만 경험한 ‘신인류’인 셈이다. 디플레이션은 가족 형태도 바꿨다. 미래가 불확실한데 결혼해 애를 낳아 가족을 꾸리면 소위 ‘가성비’가 안 나온다는 사고로 무장했다. 총무성 조사에 따르면 아이가 있는 가구는 1990년 37%였지만 2015년엔 27%로 줄었다. 독신 가구는 같은 기간 23%에서 35%로 늘었다.

독신 가구는 일본 소비 시장의 큰손이다. 식품기업들은 잇따라 1인용 식품 출시를 늘리고 있다. 일본인이 즐기는 카레만 봐도 알 수 있다. 한 조사에서 2017년 처음으로 1인용 카레 판매액이 가족용을 제쳤다. NHK의 대표 요리 프로그램 ‘오늘의 요리’도 시대 변화를 반영한다. 2000년대 초중반엔 4인분 기준의 음식을 만들었지만 2009년 2인분으로, 지금은 1인분 기준의 식단을 소개하고 있다.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는 분위기도 확산됐다. 2008년 한 일본 민영방송사는 디플레이션 이후 해외여행, 도전 등을 꿈꾸지 않고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소박하게 사는 일본 젊은이들을 ‘1마일족’이라고 불렀다. 자기가 사는 곳에서 반경 1마일(약 1.6km) 이내에서만 생활한다는 의미다.

관광 가이드북 ‘루루부(るるぶ)’는 2000년대 초반 ‘일상생활에서 지나쳤던 지역의 재발견’이란 모토를 걸고 지역판을 냈다.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젊은이들이 이 책을 손에 들고 동네 맛집과 숨은 명소를 찾아다녔다. 지역판을 낸 구가 30곳을 넘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지금도 이런 양상은 이어진다. 일본 젊은이들은 ‘1마일족’이란 단어에 만족한다. 도쿄의 한 중견기업에 다니는 와타나베 고스케(渡邊光助·29) 씨는 기자에게 “굳이 비행기 타고 해외로 가기보다 내 집 주변이 더 좋다”며 “해외여행을 가 보지 않은 동료들도 수두룩하다”고 말했다.

○ ‘재해’의 깊은 상처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 때 일어난 쓰나미로 이와테(巖手)현 리쿠젠타카타(陸前高田)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주택 8000여 채 가운데 5000여 채가 수몰됐다. 주택 잔해가 온 사방에 흩어져 어디가 도로고, 어디가 밭인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당시 현장을 방문했을 때 목격한 참혹한 광경 때문에 입을 다물지 못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8년이 흘렀다. 리쿠젠타카타의 택지는 이제 반듯하게 조성됐고 도로 정비도 끝났다. 하지만 주민을 찾아보긴 어렵다. 작업 인부들을 위해 일찌감치 들어선 슈퍼와 상업시설 옆에는 ‘분양 중’이란 안내 푯말만 있을 뿐 마을이 조성되지는 않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능 오염 문제도 현재진행형이다. 꾸준한 제염 작업으로 민간인 거주 지역은 원전에서 반경 10km 안팎으로 넓어졌다. 지난해 4월 초등학교 8곳과 중학교 6곳도 문을 열었다. 죽은 마을을 다시 살리려면 젊은 세대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한 일본 정부는 93억 엔(약 940억 원)을 들여 학교 시설을 고쳤다. 교복과 급식도 무료 지원한다.

하지만 14개 학교에 입학한 학생은 단 135명. 재해 전의 3.4%에 불과하다. 8곳 중 한 초등학교는 올해 신입생이 없어 문을 닫아야 한다. 주민들도 보이지 않는 방사능 잔재를 두려워한다.

헤이세이 시대에는 동일본 대지진뿐 아니라 한신 대지진(1995년), 온타케산 화산 분화(2014년), 구마모토 지진(2016년) 등 대규모 인명피해로 이어진 자연재해가 유난히 많았다. 하지만 일본은 여기서 배웠다. 리쿠젠타카타 택지는 과거보다 10m 높게 조성돼 쓰나미가 다시 오더라도 문제가 없도록 만들어졌다. 건축 기준들도 강화됐다. ‘재해에 쓰러지지 않는 일본’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진하게 담겨 있다.

도쿄·가와사키=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시대의 아이콘’ 아무로… 한일 문화교류로 ‘한류 열풍’

대중문화로 본 헤이세이 30년

드라마 ‘겨울연가’로 일본에서 엄청난 인기를 모았던 ‘욘사마’ 배용준이 2011년 도쿄 하네다 공항에 입국하는 모습. 이날 공항에는 약 5000명의 팬이 몰려 북새통을 이뤘다. 키이스트 제공
최근 3년간 헤이세이(平成) 시대를 수놓았던 문화 아이콘들이 잇달아 무대를 떠났다. 이들의 음반 판매량을 모두 합치면 무려 9600만 장. 일본인은 입을 모아 “진정으로 한 시대가 저무는 것 같아 슬프다”고 한다.


○ 일본 문화 개방과 한류


헤이세이 시대의 문화적 사건으로 활발한 한일 문화 교류를 빼놓을 수 없다. 1998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전 일본 총리는 ‘21세기 한일 파트너십 공동 선언’에서 문화 교류 확대를 공언했다. 두 달 뒤 한국 정부는 일본 문화에 대한 단계적 개방을 발표하며 음지에 있던 일본 영화·만화·음악 등을 양지로 끌어올렸다.

1999년 개봉한 이와이 슌지(岩井俊二) 감독의 영화 ‘러브레터’는 당시 140만 관객을 동원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자 주인공의 대사 ‘오겐키데스카(잘 지냅니까)’가 회자될 정도로 큰 인기였다. 박효신 등 유명 가수들도 일본 노래를 잇달아 리메이크했다. 곤도 세이이치(近藤誠一) 전 문화청 장관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문화 교류는 양국 관계의 기본이자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했다.

2000년대에는 한국 문화 콘텐츠의 일본 수출이 본격화됐다. 가수 보아의 데뷔 앨범은 오리콘 차트 1위에 올랐고 드라마 ‘겨울연가’가 일본 내 신드롬을 일으켰다. 배용준·동방신기가 주도한 1차 한류, 카라·소녀시대 등 걸그룹이 이끈 2차 한류까지 잇따라 성공하자 일본에서는 케이팝과 드라마를 앞세운 한류가 당당한 문화 장르로 평가받았다. 한류 연구가 이형진 와세다대 조교수(국제교양학부)는 “한국 문화에 대한 호기심은 물론이고 서구 문화 콘텐츠에서 느낄 수 없는 친근함과 동질감이 인기 요소”라고 분석했다.

2012년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으로 가라앉았던 한류는 2017년 걸그룹 트와이스와 아이돌 방탄소년단이 이끄는 3차 한류 이후 다시 주목받고 있다. 콘텐츠 소비뿐 아니라 한국 스타일로 화장하고 한국어를 배우는 일상 영역으로 한류가 확대됐다. 이 교수는 “10여 년 전 엄마 무릎에 앉아 한류 드라마를 보던 10, 20대들이 현재 한류의 주 소비층”이라고 진단했다.



○ 당당한 여성 vs 유약한 남성

일본의 전형적 남성상과 여성상도 바뀌었다. 1990년대 중반 긴 통굽 부츠를 신고 긴 생머리를 날리며 춤추던 아무로 나미에. 2000년대 중반 섹시한 이미지를 앞세운 고다 구미(倖田來未). 당당하고 강한 이미지의 여가수들은 일본 여성의 ‘워너비’였다.

아무로의 패션과 화장법을 따라 하는 ‘아무러(Amurer)’, 만화 속 캐릭터 같은 짙은 화장을 한 ‘가루(girl의 일본 발음)’는 암묵적으로 순종과 귀여움을 강요받았던 일본 여성에게 일종의 반란 기폭제였다. 저출산·고령화, 독신여성 증가 등 사회 변화 속에서 남편과 아이를 뒷바라지하는 대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가려는 여성들이 대거 등장했다. 아무로가 은퇴를 발표했을 때 ‘아무로스’(Amuro+Loss·아무로가 사라진다는 뜻)란 신조어가 등장했을 정도다. 그만큼 여성들의 ‘아무로 사랑’은 뜨거웠다.

남성은 소심해지고 약해졌다. 연애보다 취미가 좋다는 남성들이 도쿄 유명 전자상가 아키하바라를 중심으로 만든 ‘오타쿠 문화’, 방 안에 틀어박혀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히키코모리’는 헤이세이 시대의 남성상을 상징한다. 하지만 이들 중 극소수는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흉악 범죄를 저지르기도 했다. 1995년 도쿄 지하철역 사린가스 테러를 자행한 옴진리교 신도 중 일부가 ‘과학 오타쿠’로 알려지면서 온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도쿄=김범석 특파원 bsis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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