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 넘게 안치소 못떠나는 ‘아사’ 탈북 모자의 사연[광화문에서/황인찬]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9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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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 정치부 차장
황인찬 정치부 차장
서울 광화문에 8월 14일 천막이 하나 더 세워졌다. 세월호 추모공간 길 건너편이다. 광화문광장 인근 다른 천막들처럼 설치한 날은 있어도 철거 날짜엔 기약이 없다. 천막의 주인공은 탈북민들이다.

발단은 안타까운 사연 하나였다. 7월 31일 서울 관악구 한 임대아파트에서 바짝 마른 상태의 탈북민 모자의 시신이 발견됐다. 어머니는 마흔두 살, 아들은 여섯 살이었다. 텅 빈 냉장고엔 고춧가루만 남아 있었다. 3월부터 양육수당 10만 원이 이들 모자의 유일한 정기 수입이었다. 정부는 탈북민 전수조사 및 사각지대 지원이란 대책을 내놨다. 모자 사망 소식이 전해진 지 보름여 만이었다.

이렇게 일단락될 것 같았던 사건은 실은 현재 진행 중이다. 무엇보다 이들 모자의 장례식이 아직 치러지지 못했다. 탈북민 단체들과 통일부 산하 남북하나재단이 장례 일정 등을 놓고 여러 차례 비공개 협의를 가졌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탈북민들의 요구 사항은 크게 3가지다. 모자의 사인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며, 재발 방지를 위해 정부와 탈북민이 함께하는 공식 협의기구를 만들자는 것이다. 책임자 격인 남북하나재단 이사장은 사의를 표시했고, 통일부 장관의 수리만 남은 상태다. 또 정부와 탈북민이 참여하는 협의기구에 대해서도 정부는 긍정적 입장이다. 마지막까지 장례의 걸림돌로 남은 것은 ‘아사 여부’다.

지난달 말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부검 결과가 ‘사인 불명’이어서 경찰은 아사 여부를 확정하지 않았다. 사망 시점 역시 ‘추정 불능’으로 나왔다. 이러자 탈북민들은 “정부가 아사를 인정하지 않고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통일부는 “경찰이 ‘사인 불명’으로 판단한 것을 어떻게 뒤집느냐”며 난감하다는 입장이다.

정부와 탈북민의 갈등이 장기화되는 것은 이번 모자 사망 사건을 계기로 그동안 정부에 누적됐던 탈북민 사회의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탈북민 3만 명 시대를 넘겼지만 지난해 탈북민 생계급여 수급률(23.8%)은 일반 국민(3.4%)의 7배나 된다. 한국 사회 정착에 어려움을 겪는 탈북민이 여전히 많다는 것이다. 게다가 정부가 북한에 지나치게 저자세로 나간다는 탈북민들의 불만도 높다. 북한을 의식해 북한 인권이나 탈북민 보호엔 적극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탈북민 A 씨는 “정부가 북한과 동등하게 협상하지 않고 눈치만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탈북민 단체들은 21일 광화문 분향소에서 시민애도장을 열 예정이다. 모자를 추모하는 행사로 실질적인 장례행사는 아니다. 정부와 탈북민 단체들은 시민애도장 이후 장례를 치르는 것을 논의할 예정이지만 여전히 일부 탈북민 단체의 불만 목소리가 크다.

그러나 13평짜리 임대아파트에서 발견됐던 탈북민 모자는 아직도 관악구의 한 병원 안치실의 좁은 공간에 놓여 있다. 5월 말 사망 뒤 두 달여 만에 발견된 모자가 이제는 한 달 넘게 좁은 관 속에 누워 있는 것이다. 망자에게도 엄연히 인권이 있다. 탈북 모자의 마지막 가는 길이 더는 늦춰지지 않게 정부와 탈북민 단체들이 접점을 찾기를 기대한다. 또 이번 사건을 계기로 위기에 놓인 탈북민에 대한 지원 정책도 사각지대 없이 더욱 촘촘해져야 할 것이다.

황인찬 정치부 차장 h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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