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몰려 ‘역대 최고치’ 붐에도 日선 “투자=도박” 시선 여전 [글로벌 포커스]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2월 3일 0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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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30년’ 되돌린 日증시]
엔저 장기화에 해외 투자자 열광… 中증시서 빠진 돈 日로 몰려가
정부, 금융투자 우대 정책 내놔… 보수적 日투자자도 눈 돌리기 시작
중장년층은 ‘주식 알레르기’ 여전, “주식 투자 도박 같아” 예금 선호… 전문가 “장기 상승 단언 힘들어”

지난달 10일 일본 도쿄 도심의 증시 전광판. 닛케이평균주가가 3만4391엔을 넘었음을 알 수 있다. 도쿄=AP 뉴시스
“올해는 반도체주와 화학주가 유망합니다. 주주에게 배당을 많이 하는 종목에 관심을 가져 보세요.”

일본 도쿄에 있는 한 정보기술(IT) 회사에 다니는 한국인 최모 씨(35)는 얼마 전부터 인터넷으로 운영하는 한 개인 투자자 학습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수백 명이 동시 접속할 정도로 인기인 이 모임에선 최근 관심 끄는 업종과 종목명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면서 투자를 적극 권한다고 한다.

한국에서 개발자로 일하다가 2022년 일본 회사로 이직한 최 씨는 지난해 9월부터 일본 주식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성적은 괜찮은 편이다. 반년도 안 돼 수십만 엔(수백만 원)을 벌었다. 이렇게 매일매일 일본 주식시장을 들여다보니, 한국에선 낯설던 신에쓰화학이나 도요타자동차 등 대형주 종목명이 그에겐 익숙한 일상의 단어들이 돼버렸다.

“한국에서도 주식을 했는데 너무 빠지기만 해 실망이 컸죠. 일본에 와 보니 일본 증시는 계속 오르더라고요. 작년에도 한 달 치 월급 정도는 벌었어요. 올해는 열심히 공부해서 제대로 도전하려고요.”

지난달 30일 일본 도쿄의 한 증권사 건물 앞에 걸린 전광판에 36138.01라고 쓴 숫자가 보인다. 도쿄=AP 뉴시스
‘잃어버린 30년’이라 불린 일본 경제 장기침체의 상징과도 같던 일본 증시가 최근 확 달라졌다. 지난해 2만 엔대에 머물던 일본 대표 주가지수인 닛케이평균주가는 지난달 3만6000엔 선을 넘었다. 이러다 보니 해외에서도 투자 기피 현상까지 벌어졌던 일본 증시에 국내는 물론 외국인 자금까지 대거 몰려드는 형국이다.

하지만 지금의 호황이 얼마나 이어질지는 확답하기 어렵다. 일본 전문가들도 “일본 증시가 ‘장기 상승 추세’로 갈 것이라고는 단언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일본 경제가 본격적인 회복세에 들어섰다고 말하기엔 아직 이르다는 판단이다. 게다가 ‘투자 알레르기’라 불리는 일본 중장년층의 증시 투자 외면 현상도 여전하다.

● ‘외국인 투자-실적 개선’ 쌍끌이 상승
닛케이주가는 22일 3만6546.95엔으로 마감하며, 거품 경제가 꺼지기 시작하던 1990년 이후 34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올라섰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최근 금리 인상에 신중한 자세를 보인 뒤 주가가 어느 정도 조정 국면에 들어갔지만, 일본 증시는 세계 주요 시장 가운데 가장 큰 오름세를 보였다.

세계 증시의 2022년 말 종가 대비 올해 1월 말 상승률을 보면 이는 뚜렷이 드러난다. 닛케이주가는 38%로 미국(스탠더드앤드푸어스500 기준 28%)이나 한국(코스피 11%)보다 훨씬 높았다. 중국(상하이종합지수)은 같은 기간(13개월) 동안 오히려 8%나 하락한 것과 비교하면, 일본 증시의 상승은 놀라울 정도다.

한국에서도 일본 증시에 관심 갖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른바 ‘일학개미’(일본 주식을 사는 국내 개인 투자자)들이 크게 늘었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지난달 30일 기준 국내 개인 투자자는 올들어 일본 주식 3억4152만 달러(약 4550억 원)어치를 사들였다. 아직 미국 증시 매수액(121억 달러)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지만, 지난해보다 5배 넘게 늘어난 규모다. 국내 개인·기관 투자자들이 한국 증시에선 2조4171억 원가량 순매도한 것을 고려하면 엄청난 관심이다.

일본 증시에 순풍이 부는 가장 큰 요인은 뭘까. 일단은 ‘엔저 장기화’가 꼽힌다. 1일 도쿄 외환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은 146.88엔에 거래됐다. 1년 전보다 엔화 가치는 13%가량 낮아졌다. 미 기준금리가 연 5.25∼5.50%까지 올랐는데도, 일본은행은 여전히 마이너스 금리를 유지하고 있는 영향이 크다. 엔화 환율이 낮으면 수입 가격이 높아지는 부담이 있지만, 일본 기업의 수출 경쟁력이 높아지는 데다 외국인 투자자 및 해외 관광객을 유인할 수 있다.

실제로도 일본 주식의 상승세를 주도하는 건 외국인 투자자다. 도쿄증권거래소에 따르면 지난해 외국인의 일본 증시 순매수 규모는 3조1215억 엔(약 28조3210억 원)에 이른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 시절 ‘돈 풀기’가 이뤄졌던 아베노믹스 첫해(2013년) 이후 최대 규모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 중국의 외국인 규제 등으로 아시아 최대 증시인 중국 시장에서 빠져나온 돈이 일본으로 몰린 것도 호재다. 게다가 일본 상장기업의 지난해(회계연도) 상반기(4∼9월) 순이익은 전년 같은 기간보다 30% 증가해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탈(脫)중국 현상에 일본 기업들의 실적 개선세가 더해져 자연스럽게 외국인 자본 유입이 활발해졌다.

뱅상 모르티에 프랑스 아문디그룹 총괄 최고투자책임자는 NHK 인터뷰에서 “최근 수년간 일본은 투자처로서 고려되지 않았지만 지난해부터 바뀌었다”며 “중국 주식을 팔고 일본 주식을 사는 투자자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이데 신고(井出真吾) 닛세이기초연구소 수석 주식전략가도 “물가 상승과 대폭적인 임금 상승이 겹치며 오랫동안 방치됐던 저렴한 일본 주식에 시선이 쏠렸다”고 분석했다.

● 금융 투자 우대정책에 나선 日정부
실적 개선에 힘입어 일본에선 최근 제조업이나 종합상사 등 일본 경제를 떠받쳐온 기업들의 주가가 새로이 주목받고 있다. 올해 초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일본 기업 경영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올해 유망 종목으로 다이킨공업(전자 화학)과 이토추상사(종합상사), 소니그룹(전자) 등이 꼽혔다. 이들은 올해 닛케이주가가 1989년 기록한 사상 최고치였던 3만8915엔도 넘어설 것으로 봤다.

30년 만에 맞이한 일본 증시 활황에 모처럼 일본 투자자들도 자국 증시로 눈을 돌리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일본에서 증가한 증시 투자액 160조 엔 가운데 절반이 최근 1년간 증가했다. 다이이치생명 경제연구소가 분석한 개인 자금 흐름을 보면 지난해 4분기 예금액은 4400억 엔 줄어든 반면 투자신탁 유입액은 2500억 원 늘었다.

저축에서 투자로 돈의 흐름을 돌리는 건 일본 정부의 숙원 과제였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는 2021년 10월 취임 뒤 ‘새로운 자본주의’란 슬로건을 내걸었고, 이듬해 ‘자산 소득 배증 계획’ 계획도 내놨다. 기시다 총리는 2022년 5월 유럽 금융 중심지인 영국 시티오브런던에서 한 강연에서 “인베스트 인 기시다(기시다에게 투자해 달라)”라고 호소했다.

일본 정부는 2014년 시행한 소액투자 비과세제도(NISA) 통장을 개편한 신NISA를 올해 내놓기도 했다. 20%에 이르는 매매 차익 및 배당 소득세를 감면해 주고, 보유 한도를 180만 엔으로 기존보다 2배 이상으로 늘렸다. 종전까지 20년이던 비과세 적용 기간을 아예 없애버려 누구나 평생 비과세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했다.

정부의 적극적인 금융 투자 우대 정책과 최근의 오름세로 심각할 정도로 보수적이었던 일본의 투자 행태도 조금씩 바뀌고 있다. 우라타 하루카 일본 피델리티 수석연구원은 니혼게이자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앞으로 젊은 세대는 예금만으로는 성공 경험을 쌓을 수 없게 됐다. (투자) 세대교체가 꾸준히 진행될 것”이라 내다봤다. 일본 금융당국에 따르면 일본 39세 이하 개인 주주 수는 196만 명으로 5년 전 대비 70%가량 늘었다.

● 개인 ‘주식 알레르기’는 여전
일본 도쿄 도심에 있는 도쿄증권거래소의 전경. 아사히신문 제공
일본 도쿄 도심에 있는 도쿄증권거래소의 전경. 아사히신문 제공
하지만 분위기가 아직 과거 한국의 ‘동학개미운동’처럼 전국민적 주식 투자 열기로 이어지기엔 난관이 있다. 극단적으로 투자를 멀리하고 예금을 선호하는 일본 국민의 성향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일본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일본의 전체 금융자산에서 현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54.2%에 이른다. 주식이나 펀드 등 금융투자 상품 비중(16.3%)의 3배가 넘는다. 선진국 가운데 금융 자산의 현금 비중이 절반을 넘는 나라는 일본이 유일하다. 최근 들어 금융투자 비중이 20% 정도로 높아졌다는 보도가 나오지만 미국(58%)과 비교하면 여전히 낮다.

특히 50대 이상 중·장년층의 ‘주식 투자 알레르기’는 철옹성에 가깝다. 거품 경제 시절엔 재테크라는 신조어가 나올 정도로 투자 붐이 일었지만, 30년 넘게 자국 증시가 침체하면서 주식을 외면하는 성향이 굳어져버렸다고 한다. 일본 경비회사에서 근무하는 30대 남성 마쓰모토 씨도 “주가가 오른다는 뉴스는 접했지만 주변에서 주식이나 펀드에 투자하는 사람을 거의 본 적 없다”며 “주식 투자는 왠지 도박 같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노무라애셋매니지먼트가 지난해 실시한 금융교육 인식조사를 보면 일본인들이 얼마나 금융 투자에 관심이 없고 투자를 두려워하는지 알 수 있다. 투자 시기를 묻는 질문에 가장 많은 응답은 ‘무슨 일이 있어도 투자는 하지 않는다’(31%)였다. 현재 어떤 금융상품을 보유하고 있냐는 질문에는 ‘아무것도 없다’(53%)는 응답이 절반을 넘었다.


도쿄=이상훈 특파원 sanghun@donga.com
#해외 뭉칫돈#일본 개미#엔저 장기화#해외 투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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