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 되는 일’에만 찰떡 호흡 맞추는 여야[한상준의 정치 인사이드]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4월 18일 14시 00분


코멘트
“어느 정당 할 것 없이 자신들 지지 세력만 듣기 좋아하는 주제로 경쟁에 몰두한다.”(더불어민주당 박재호 의원)
“지금의 정치는 지속 불가능한 정치다. 막장까지 온 정치를 바꿔야 한다는 데 모두가 공감한다.”(국민의힘 조해진 의원)

10일부터 13일까지 진행된 국회 전원위원회에서 여야 의원들은 이처럼 구구절절한 반성문을 읽었다. 극단적인 진영 논리가 판을 치고, 공천에 눈이 멀어 당 지도부의 눈치만 보는 여야의 현실을 의원들도 알고 있다는 의미다.

극우 진영과 헤어지지 못하는 국민의힘과 이른바 ‘개혁의 딸(개딸)’이라고 불리는 강성 지지층을 두고 어찌할 줄을 모르는 민주당의 상황은 닮은 구석이 있다. 두 당 모두 친윤(친윤석열)과 친명(친이재명) 진영이 주류가 되면서 비주류들의 목소리는 철저하게 묻히고 있다. 자연히 여야 온건한 목소리는 국회에서 설 자리를 잃었고, 타협과 협치는 이제 정치학 교과서에나 나오는 말이 됐다. 20년 만에 전원위가 열린 건 이런 상황을 반성하고 타개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보자는 의도였다.

13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는 국회의원 선거 제도 개선을 위한 국회 전원위원회가 열렸다. 전원위 나흘째인 이날 본회의장 좌석 상당수가 비어 있다. 뉴시스


● 100명의 의원이 펼친 ‘백가쟁명’ 전원위
반성에서 중요한 건 말이 아닌 행동이다. 그러나 나흘간의 전원위에서는 말 그대로 100명의 의원이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백가쟁명(百家爭鳴)’이 벌어졌다. 토론도, 논쟁도, 질문도 없이 개별 의원들이 단상에 나서 자신의 주장을 읊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정신을 더 잘 담을 수 있는 선거 제도를 찾아보자는 거창한 취지에도 불구하고, 전원위는 그 어떤 접점도 찾지 못했다. 이를 두고 한 여당 의원은 “(전원위를 처음 제안한) 김진표 국회의장의 꿈을 이뤄주기 위한 ‘100인의 쇼’”라고 혹평했다.

오히려 전원위에서는 현재 300명인 의원정수 축소 여부, 47석의 비례대표 의석수 조정, 소선거구제 및 중대선거구제 도입 등을 두고 여야는 물론이고 개별 의원들의 이견만 여실히 드러냈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은 의원정수 축소 여부를 두고 팽팽하게 맞섰고, 소선거구제 및 중대선거구제 도입에 대해서는 국민의힘과 민주당 내에서도 의원들이 서로 다른 주장을 펼쳤다.
부산을 지역구로 둔 국민의힘 박수영 의원은 대도시에서는 중대선거구제, 농어촌에서는 소선거구제를 도입하는 도농복합 선거구제를 주장하며 “국가 균형 발전의 정치적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같은 당 소속으로 역시 부산이 지역구인 안병길 의원은 “(중대선거구제는) 출마자의 인지도가 승패를 좌우하는 핵심 요인”이라며 현행 소선거구제 유지를 주장했다. 이런 전원위를 두고 기본소득당의 용혜인 의원은 “전원위는 실패했다. 진지한 숙의 과정이 아니라 남는 것 없는 말잔치로 끝나고 있다”고 했다.

게다가 대다수 의원들은 전원위가 이렇게 백가쟁명으로 끝날 것이라고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한 야당 의원은 “1인당 7분씩 단상에 나가서 각자 하고 싶은 말만 하는 방식으로는 100명이 아니라 200명, 300명이 발언해도 아무 결론도 안 난다”며 “진짜 선거구제 개편을 성사시킬 의지가 있다면 전원위가 아닌 다른 방식을 찾았어야 했다”고 말했다. 여당의 한 원외 인사 역시 전원위를 두고 “여야가 손잡고 공통의 알리바이를 만든 것”이라며 “현역 의원들은 지금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는 게 최선이기 때문에 크게 손볼 생각이 애초부터 없다”고 했다. 국회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전원위라는 요식 행위를 통해 “노력은 했지만 잘 안됐다”는 핑계를 만들고, 21대 총선의 규칙을 조금만 손봐 내년 총선을 치르겠다는 의도라는 것.

● 텃밭 숙원 사업에는 ‘일사천리’ 합심한 與野
여야는 민주주의의 근간인 선거 제도 개편을 두고 미적대는 사이 정작 다른 분야에서 놀라울 정도로 합을 척척 맞췄다. 12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위원회에서 여야는 사회간접자본(SOC) 사업 등에 대한 예비타당성조사(예타) 면제 기준을 낮추는 법안을 만장일치로 처리했다. 예타 기준이 1000억 원으로 상향되면 각 지역의 선심성 사업이 더 쉽게 추진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예타 기준이 국회 기재위 전체회의와 본회의를 통과하면, 당장 내년도 예산안 추계 때부터 적용된다. 총사업비 1000억 원 미만 사업은 예타를 거칠 필요가 없어 내년도 예산안을 짤 때부터 관련 예산을 집어넣을 수 있게 되는 것. 국회 관계자는 “총선을 앞두고 ‘지역 숙원 사업 예산을 반영했다’는 현수막을 걸고 싶은 여야 의원들의 경쟁이 불을 뿜을 것”이라고 했다.

여야의 합심은 이튿날에도 이어졌다. 여야는 13일 대구·경북 통합 신공항 특별법과 광주 군공항 이전 특별법을 일사천리로 처리했다. ‘쌍둥이법’으로 불리는 두 특별법은 지금까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한 번도 논의된 적이 없다. 그러나 여야는 13일 두 특별법을 위한 ‘원포인트’ 법사위를 열고, 곧바로 본회의 표결까지 끝냈다. 그동안 여야는 본회의 법안 표결을 놓고 매번 표 대결을 벌였지만 두 특별법에는 200명이 넘는 의원들이 일제히 찬성표를 던졌다. 두 사업의 사업비는 20조 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국민의힘과 민주당이 손잡고 자신들의 텃밭인 대구·경북, 광주의 숙원 사업을 하루 만에 통과시킨 것. 그동안 여야가 법안 협치를 못 한 게 아니라 안 했다는 걸 스스로 보여준 셈이다.

두 특별법을 하루 만에 처리하는 열정으로 선거 제도 개편에 나서면 좋겠지만, 여야는 전혀 그럴 뜻이 없다. 공직선거법상 국회는 선거일 1년 전인 10일까지 내년 4·10총선의 선거구를 획정해야 했다. 이미 획정 시한을 넘겼지만 국민의힘도, 민주당도 다급한 기색이 전혀 없다. 여야 모두 “이달 말까지 끝나는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기한 연장 등을 포함해 앞으로 협상을 해볼 것”이라는 태도다. 선거구 획정이 늦어질수록 개편 폭은 줄어들고, 이는 현역 의원들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선택적 협치’를 이어가는 여야 의원들에게 4년마다 돌아오는 선거의 규칙 제정을 맡기는 게 맞는지, 유권자들의 의구심은 커져만 간다.

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