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포탕, 용광로? ‘원팀’이라 쓰고 승자독식이라 읽는다[윤다빈의 세계 속 K정치]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3월 31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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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의 수준은 왜 나아지지 않을까?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를 각각 두 번씩 취재하며 가졌던 의문입니다. 닫힌 섬과 같은 여의도만 보고선 해답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시야를 넓혀 세계 각국의 정치 현실을 살펴보고 한국 정치와 신랄하게 비교하겠습니다. 때로는 ‘우리만 그런 게 아니구나’라는 위로를, 때로는 우리 정치의 품격을 한 단계 높일 해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언젠간 K팝, K드라마, K푸드처럼 K정치도 호평받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내년 미국 차기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에서 흥미로운 주장이 하나 나왔습니다. 공화당 전국위원회 의장에 재선된 로나 맥다니엘은 최근 CNN과의 인터뷰에서 “대선 토론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공화당 후보는 최종 승리한 후보를 지지하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공화당 전국위원회 의장은 대선후보를 뽑는 전당대회를 주관하는 중요한 자리입니다. 그런 이가 한국 정치에서 유행하는 소위 ‘원팀 선언’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한 셈이죠. 이 발언은 묘한 파장을 낳았습니다.

맥다니엘 의장은 “우리는 2024년에 조 바이든을 이겨야 한다”라는 당위를 내세웠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서로를 너무 공격해서 민주당을 이겨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수 있다”며 “의견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우리는 옳은 일을 하는 큰 그림을 위해 그것(입장 차)을 해결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맥다니엘 전국위 의장은 재선 과정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당연히 트럼프에 반대하는 측에서는 맥다니엘의 주장에 대해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고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공화당 로나 맥대니얼 전국위원회 위원장이 1월 27일(현지 시간) 미 캘리포니아주에서 열린 위원회 회의에서 의사봉을 들고 연설하고 있다. 그는 대선 경선에 앞서 ‘승자 지지 서약서’를 써야 한다고 주장해 당내 논쟁을 일으켰다. 캘리포니아=AP 뉴시스
공화당 로나 맥대니얼 전국위원회 위원장이 1월 27일(현지 시간) 미 캘리포니아주에서 열린 위원회 회의에서 의사봉을 들고 연설하고 있다. 그는 대선 경선에 앞서 ‘승자 지지 서약서’를 써야 한다고 주장해 당내 논쟁을 일으켰다. 캘리포니아=AP 뉴시스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항마로 꼽히는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는 언론 인터뷰에서 “맥다니엘의 리더십 아래 세 번의 선거에서 표준 이하 결과를 얻었다”고 꼬집었습니다. 대선 후보 경선 출마를 고려하고 있는 아사 허친슨 전 아칸소 주지사는 “도널드 트럼프가 나라를 위한 올바른 방향이 아니라고 믿는 나 같은 지도자에게 포용 서약을 하게 하는 것은 문제”라고 했습니다.

현재 트럼프 전 대통령은 공화당 대선 경선 레이스에서 선두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공화당은 ‘트럼프 대 반(反)트럼프’의 구도입니다. 트럼프와 경쟁하는 후보 입장에서는 ‘원팀 선언’이 사실상 트럼프 쏠림 현상을 가속할 수 있다는 우려를 할만한 상황입니다.

● 민주당, 달콤했던 ‘원팀’의 추억
한국 정치에서 원팀이란 단어의 저작권을 가진 곳은 민주당입니다. ‘단합’ ‘단결’을 상징하는 원팀 정신이 대두된 건 문재인 당대표 시절입니다. ‘비문(비문재인) 진영’과 사사건건 마찰을 빚던 문 대표는 2015년 당 개혁의 일환으로 온라인 권리당원 육성 계획을 밝힙니다. 이때 약 10만 명가량의 문 대표 지지자들이 민주당 당원으로 가입했습니다.

자신을 ‘대깨문(대가리가 깨져도 문재인)’이라고 칭한 열성 지지자들은 비문 진영 의원들을 향해 ‘문자 폭탄’을 보내며 당을 친문 중심의 원팀으로 빠르게 바꿔나갔습니다. 요즘에야 극성 지지자들이 정치인에게 문자 폭탄을 보내고, 사무실과 집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게 일상이지만 이때만 해도 당원이 같은 당 소속 의원을 공격하는 건 드문 일이었습니다.

당 분위기가 바뀌자 눈치를 보는 의원들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한 재선의원은 기자들과의 술자리에서 화합과 단결의 상징(?)이라는 ‘소맥 폭탄주’를 만들며 자신이 얼마나 원팀 정신이 투철한 사람인지 역설했습니다. 당에서도 ‘원팀 선거대책위원회’ ‘원팀 후보자 회동’ ‘원팀 서약식’ 등 ‘원팀 브랜드’를 선거에 적극 활용했습니다. ‘원팀’을 많이 외칠수록 민주당 정체성을 인증받는 시기였습니다.

‘원팀 민주당’은 처음에는 일사불란해 보였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의 전신인 새정치민주연합 시절 한 번 의원총회가 열리면 보통 5시간씩 난상토론을 하곤 했는데, 원팀 민주당에서는 30분, 1시간이면 끝났습니다. 지도부 보고에 대해 반대 토론이 없었기 때문이죠.

기사에 당내 비판 목소리를 담고 싶어도 익명으로라도 논평해주는 의원이 거의 없었습니다. 익명 관계자발 기사가 나가면 지지자를 중심으로 해당 인물을 색출하는 작업이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찍히면 원팀을 배신한 ‘첩자 정치인’이 되는 현실에서 의원들도 쉽게 입을 열 수 없었습니다.

더불어민주당 대선 예비후보들이 2021년 7월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선거 ‘원팀 협약식’에서 원팀 팻말을 들고 자세를 취하고 있다. 전국 선거에서 세 차례 패배한 이후 민주당에서 원팀 정신은 빛바랜 기억이 됐다. 왼쪽부터 추미애, 박용진, 이낙연, 정세균, 김두관, 이재명 후보. 동아일보DB
더불어민주당 대선 예비후보들이 2021년 7월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선거 ‘원팀 협약식’에서 원팀 팻말을 들고 자세를 취하고 있다. 전국 선거에서 세 차례 패배한 이후 민주당에서 원팀 정신은 빛바랜 기억이 됐다. 왼쪽부터 추미애, 박용진, 이낙연, 정세균, 김두관, 이재명 후보. 동아일보DB


하지만 원팀이라는 약의 내성이 생기자 점점 더 센 자극을 필요로 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다른 의견에 대한 지지자들의 폭력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금태섭, 김해영 같은 소신파 정치인이 설 자리는 없었습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이분법적 사고관이 당을 장악해갔습니다. ‘단팥 없는 단팥빵’처럼 민주당에 ‘민주주의’가 사라졌습니다.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이 한창이던 2021년 7월 28일 김두관, 박용진, 이낙연, 이재명, 정세균, 추미애 후보가 한자리에 모여 “우리는 원팀”이라는 선언을 했습니다. ‘원팀 배지’를 서로에게 달아주면서 페어플레이를 다짐했습니다. 대선 패배의 암흑이 드리운 상황에서 ‘원팀 브랜드’를 어떻게든 살려보려는 마지막 발버둥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미 약발이 떨어진 ‘원팀’의 마법은 더 이상 승리를 안겨주지 못했습니다. 이재명-이낙연 후보 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서 아무리 원팀을 외쳐도 지지층의 좌표 찍기는 멈출 줄 몰랐습니다. 이재명 후보가 당내 경선 승리 후 경쟁자인 이낙연 후보 측 인사를 포함해 ‘용광로 선대위’를 꾸린다고 했지만 친문은 “친명(친이재명)이 다 해 먹는다”고, 친명은 “친문과 이낙연 후보가 선거에서 팔짱만 끼고 있다”고 감정의 골을 드러냈습니다.

2021년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와 2022년 대선, 지방선거에서 연달아 패하면서 이제 민주당에서 원팀을 입에 올리는 사람은 없어졌습니다. 한때 민주당의 승리를 부르는 마법의 주문이었던 원팀 정신은 이제 아무도 찾아 듣지 않는 흘러간 유행가가 됐습니다.

● 원팀 바통 이어받은 ‘친윤 일색’ 국민의힘
그런데 여기, 민주당에서 약발이 떨어진 ‘원팀 브랜드’를 자신들이 가져가겠다고 나선 정당이 있습니다. 바로 집권여당 국민의힘입니다.

대선과 6‧1지방선거 이후 국민의힘에서는 선거 승리 정당이라고 보기 힘든 기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친윤 세력들은 대선 기간 내내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한 윤핵관(윤석열 대통령 측 핵심 관계자)과 갈등을 빚었던 이준석 대표를 성 상납 혐의로 대표직에서 쫓아낸 것이죠.

이 대표에 대한 반감이 컸던 친윤 세력은 대선 기간에도 공공연히 ‘당선만 되면 이준석은 자리를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스스로 물러나게 하되 안 될 경우 당 윤리위원회를 동원해 징계하겠다는 시나리오도 제기됐습니다.

사실 듣고도 잘 믿기지 않았습니다. 윤리위를 통한 당대표 사퇴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원과 국민에 의해 선출된 당대표를 인위적으로 징계한다는 게 가능할까 싶었죠. 게다가 이 대표는 대선과 지방선거를 연이어 이긴 ‘승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친윤 일색의 국민의힘은 10년 전 혐의를 다시 꺼내 이 대표를 결국 쫓아냈습니다. 그리고 다음 목표는 ‘친윤 일색’의 원팀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친윤은 ‘대통령의 의중은 김기현’이라는 말을 공공연히 퍼트렸고, 지지율 1위를 달리던 나경원 전 의원을 압박 끝에 주저앉혔습니다. 대통령실은 나 전 의원을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직과 기후환경대사직에서 전격 해임하는 강수를 뒀습니다. 이 과정에서 김대기 대통령비서실장까지 나서 “대통령이 나 전 의원의 처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본인이 잘 알 것”이라고 직격했습니다.

국민의힘과 대통령실, 정부 고위 인사들이 지난달 19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국무총리 공관에서 국민의힘 새 지도부가 선출된 이후 첫 고위 당정 협의를 가졌다. 참석자들이 회의 시작 전에 ‘우리는 원팀’이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동아일보DB
국민의힘과 대통령실, 정부 고위 인사들이 지난달 19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국무총리 공관에서 국민의힘 새 지도부가 선출된 이후 첫 고위 당정 협의를 가졌다. 참석자들이 회의 시작 전에 ‘우리는 원팀’이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동아일보DB


윤 대통령과 대선에서 단일화를 했던 안철수 후보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과거 민주당 출신인 그는 정체성 공세에 시달려야 했죠. 불출마 선언을 한 나 전 의원이 뒤늦게 김 의원 지지 의사를 밝히자 그는 추앙의 대상이 됐고, 가까스로 ‘원팀’의 일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김 의원은 “당정은 부부 관계이자 운명공동체”라면서 대통령과의 ‘원팀’을 강조하고 당대표에 당선됐습니다. 연포탕(연대·포용·탕평) 정치를 하겠다던 김 대표는 친윤 일색으로 당직을 꾸렸습니다. 실제 연포탕은 다양한 재료가 섞여서 국물이 맑고 시원한데, 이 연포탕은 감칠맛 대신 짠맛만 강한 것 같습니다.

지난해 6·1지방선거는 국민의힘의 압승으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전국적인 압승 속에서도 주목할만한 현상이 있었습니다. 윤 대통령과 각을 세웠던 유승민 전 의원이 경기지사 선거에 출마하자 친윤 세력은 대항마로 김은혜 의원을 밀었습니다. 윤석열 캠프 출신 인사들이 대거 김은혜 캠프에 합류하면서 ‘윤심(尹心) 인증마크’를 달아줬습니다.

경기도 59개 당협위원회 중 50곳 이상이 김 의원을 지지할 정도로 압도적인 당심을 얻어 김 의원은 경선에서 대선주자인 유 전 의원을 꺾습니다. 하지만 본선에서는 김 후보는 민주당 김동연 후보에게 패하고 맙니다. 당내 원팀이 작용해도 국민의 선택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민주당의 원팀 정치가 실패하는 과정을 보고도, 경기지사 선거의 패배를 겪고도 친윤 세력은 제대로 교훈을 얻지 못한 것 같습니다.

● 진정한 ‘원팀 정신’ 보여준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이 의회를 생략한 채 연금 개혁안을 밀어붙이면서 이에 반발하는 시위가 프랑스 전국을 뒤덮고 있습니다. 프랑스 야당들은 즉각 마크롱 내각 불신임 안을 표결에 부치면서 정국은 그야말로 ‘극한 대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 야당 의원 대부분은 내각 불신임안 투표 하루 뒤 마크롱 정부가 제출한 ‘원자력발전소 건설 법안’에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에서도 에너지난이 심각해진 상황이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원전 6기를 새로 건설하는데 필요한 승인 절차를 간소화하는 법안이 시급하다는데 동의한 것입니다.

야당은 연금 개혁에 대해서는 “국민적 저항”을 촉구하고, “내각 총사퇴”를 주장했지만 국가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정책에는 여당과 힘을 합쳤습니다. 정당이 다르고, 가치가 달라도 경우에 따라 얼마든지 ‘원팀’이 될 수 있다는 사례를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는 특정 정당 당원이거나 커뮤니티에서 정치 뉴스를 실시간으로 소비하는 일부 시민을 제외하고 다수가 정치 뉴스를 불편해합니다. “맨날 정치인들끼리 싸움질하는 걸 보기도 싫다”는 반응이 일반적이죠. 그러다 보니 정치권에서도 당내 이견을 없애고 ‘원팀’을 내세우는 마케팅이 일시적으로는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원팀의 약발은 일시적입니다. 약의 내성은 결국 당내 다양성을 해치고, 상식 있는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할 것입니다. 내부 경고등이 없는 정당은 민심과 멀어지고 선거에서 심판받게 되죠. 이 뻔한 이치를 이번엔 누가 받아들일까요? 총선이 1년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윤다빈 기자 empt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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