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눈의 광인’ ‘서준맘’…‘킹받는’ 캐릭터들이 사랑받는 이유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3월 15일 10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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숏폼 콘텐츠를 중심으로 ‘킹받는’ 캐릭터들의 인기가 식을 줄 모르고 있다. 2, 3년 전 ‘카페사장 최준’ 등 부캐(자신의 본모습이 아닌 제2의 자아) 콘텐츠가 열풍을 점화한 데 이어 최근 개그맨 출신이 아닌 크리에이터까지 킹받는 콘텐츠를 제작하며 기세를 확대 중이다. ‘킹받다’는 ‘열받다’에 ‘킹(King)’을 넣어 만든 말로 본래는 ‘엄청 화가 났다’는 의미였지만 최근들어 짜증과 호감을 함께 내포하는 의미로 확장됐다.

●일상에서 겪었을 감정 자극해 공감대 형성

SNL 코리아 시즌3 ‘MZ오피스’에서 에어팟(무선 이어폰)을 낀 채 근무하는 ‘맑은 눈의 광인(김아영 역)’ 캐릭터. MZ세대의 장점과 단점을 극명하게 드러내 공감과 빈축을 동시에 사며 화제가 됐다. 유튜브 화면 캡처.


킹받는 캐릭터들은 공통적으로 하이퍼리얼리즘 문법을 구사한다. SNL 코리아 시즌3 ‘MZ오피스’는 MZ세대 직원들이 회사에서 빚는 갈등을 우스꽝스럽게 담아냈다. ‘맑은 눈의 광인’ 캐릭터는 사무실에서 이어폰을 낀 채 근무하며 상사의 말 중 듣고 싶은 것만 골라 들어 빈축과 웃음을 샀다. ‘사내뷰공업’은 빵집 알바가 ‘이안에 뭐가 있게 샐러드 듬뿍 고로케’ ‘우리 농부 호밀빵’ ‘오븐에 노릇 핏자핏자 피자빵’ 등 다양한 빵 이름을 외워야 하는 등 직종별 알바생의 고충을 비롯해 2000년대 일진 등을 완벽하게 재현해내 호응을 얻었다. 사내뷰공업이 소속된 MCN 파괴연구소는 “출연진이자 제작자인 김소정PD 본인의 경험과 구독자 제보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구성한다”며 “현실에 있을 법한 캐릭터는 시청자들 기억 저편에서부터 공감을 끄집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시청자들은 킹받는 콘텐츠에서 소비자인 동시에 풍자 대상으로도 다뤄진다. 맘카페에서 인기몰이 중인 ‘신도시 아재들’의 ‘서준맘’은 신도시에 사는 ‘젊줌마’(젊은 아줌마)로서 아들을 값비싼 영어유치원에 보내려 애쓰고 화려한 네일아트를 즐기며, 친한 언니들에게 알짜배기 정보를 공유하는 다정한 푼수 캐릭터다. 맘카페 회원들은 “내가 서준맘”이라며 기존 ‘맘충’에 담겼던 혐오를 유쾌하게 탈바꿈시킨다.

‘신도시 아재들’, ‘피식쇼’ 등을 보유한 메타코미디의 정영준 대표는 “과거의 코미디와 달리 지금의 MZ세대(밀레니얼+Z세대)들이 경험했을 법한 일상적 감정을 세밀하게 파고들려 한다”며 “비슷한 상황에서 느꼈을 슬픔, 분노 등을 웃음으로 승화시켜 스스로를 놀릴 수 있는 여유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신도시 아재들’의 서준맘이 친정엄마에게 아들 서준이를 맡겨두고 ‘친한 동생’과 근교 카페에 간 장면. 이들의 대화는 네일아트에서 공동구매(공구), 애들 교육에 이르기까지 쉼없이 바뀌며 공감을 샀다. 유튜브 화면 캡처.


크리에이터와 플랫폼에서 쌍방 소통하며 시청자들도 콘셉트에 과몰입하는 것도 특징이다. 중국 틱톡커를 따라한 닛몰캐쉬 채널에는 “그는 매우 멋진 남자. 그의 선행이 모두를 감동시켰다” “그의 친절은 천사와 같습니다. 그의 친절에 박수를 보내다” “슈트남의 정성에 나는 찬사를 보낸다”등 마치 해외 팬이 파파고 등 번역기를 돌려 쓴 듯한 문체의 댓글로 가득하지만 이는 모두 국내 네티즌들이 쓴 것들이다. 중국어를 자동번역했을 때 나오는 어색한 말투를 그대로 따라하며 콘셉트에 동조하는 것. 닛몰캐쉬(본명 차청일)는 “창의적인 댓글을 주고받으며 더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며 “무조건 웃기고 싶단 생각보단 내 채널이 시청자들의 놀이터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영상을 기획한다”고 했다.

●자조적 젊은층 사로잡은 ‘힘 뺀’ 개그

킹받는 캐릭터들 특유의 자조적 개그와 ‘힘 뺀’ 느낌이 지쳐있는 동시대 젊은층을 매료한 것으로 풀이된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는 “발전주의 시대를 살며 열심히 사는 걸 숭상했던 기성세대와 달리 현재 2030세대는 만성적인 정체 앞에서 ‘하면 된다’는 마음가짐이 오히려 좌절이라는 독이 된다”며 “내면 깊이 자리 잡은 자조적, 냉소적 태도가 킹받는 콘텐츠에 열광하는 트렌드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이어 “집단성이 강하다면 ‘우리 집단이 혐오를 받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나이 외에는 정체성 분모가 느슨한 2030세대는 콘텐츠와 같이 비웃을 수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치료학과 교수는 “특별하고 화려한 것보다 평범한 일상에 관심을 쏟는 ‘노멀크러시’ 현상이 콘텐츠로도 확산했다”며 “과거 기성세대와 비교해 자존감은 높아지고 취향은 다원화한 젊은층은 나와 비슷한 모습에 동일시하려는 양상이 두드러진다”고 했다.

김소정 PD가 출연과 제작에 모두 참여하는 ‘사내뷰공업’의 여러 콘텐츠 중 최근 가장 인기를 모은 2000년대 일진 ‘황은정’ 캐릭터. 서툰 화장, “화장실 청소를 왜 학생에게 시키냐”며 투정하는 모습 등이 완벽한 현실고증으로 공감받았다. 유튜브 화면 캡처.
김소정 PD가 출연과 제작에 모두 참여하는 ‘사내뷰공업’의 여러 콘텐츠 중 최근 가장 인기를 모은 2000년대 일진 ‘황은정’ 캐릭터. 서툰 화장, “화장실 청소를 왜 학생에게 시키냐”며 투정하는 모습 등이 완벽한 현실고증으로 공감받았다. 유튜브 화면 캡처.


플랫폼의 댓글 문화를 기반으로 각자 세분화한 웃음코드에 공감하는 과정은 하나의 놀이문화이자 인정욕구라는 분석이 나온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젊은층이 콘텐츠를 소비하는 모바일은 아주 개인화된 도구인 만큼 웃음코드 역시 아주 일상적이고 B급인 소재가 이용자 특성과 잘 부합한다”며 “누가 뭐라든 자신에게 의미 있는 개그라면 가치부여를 하고 SNS에서 공유하면서 공감 받는 과정 전체가 젊은층의 놀이문화”라고 말했다.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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