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무대에서 지워진 한국축구, 작은 것에서 시작하자[남장현의 풋볼빅이슈]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2월 14일 11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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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볼 빅이슈’의 첫 번째 원고인 만큼 밝고, 긍정적인 내용을 다뤄보고 싶었다. 그런데 슬그머니 덮고 넘어가기에 사안이 너무 컸고, 아쉬움이 짙었다. 국제무대에서 지워진, 냉정히 표현해 ‘죽어버린’ 한국축구 외교에 대한 이야기다.

정몽규 대한축구협회(KFA) 회장이 이달 초 바레인 마나마에서 열린 2023 아시아축구연맹(AFC) 총회에서 국제축구연맹(FIFA) 평의회 위원 선거에 낙선한 충격이 여전하다. 과거 FIFA 집행위원회를 대체한 평의회는 다양한 국제축구 현안을 의결하는 최고 기구다.

정몽규 대한축구협회 회장. 뉴시스
정 회장은 입후보한 각국 인사들 7명 가운데 5위 안에도 들지 못했다. 46개 회원국 투표 결과는 참담했다. 고작 19표다. 함께 낙선한 이는 18표의 두자오카이(중국)였다. 그런데 중국 후보는 탈락이 유력시됐다. 중국축구협회는 온갖 부정부패로 얼룩졌고, 한 때 엄청난 자본을 앞세우며 슈퍼스타들을 흡수한 프로축구 슈퍼리그는 사실상 와해했다.

결정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우려를 이유로 2023 AFC 아시안컵 개최권을 반납해 심각한 ‘민폐’를 끼친 일이다. AFC는 중국을 열심히 설득해봤으나 ‘제로(0) 코로나’를 외친 그들의 방침은 확고했다. 결국 개최 1년여를 앞둔 시점에 새 개최지를 결정해야 했고, 지난해 FIFA 월드컵을 개최했던 카타르가 우리를 따돌리고 2011년에 이은 2번째 대회 유치에 성공했다.

이렇듯 정 회장이 사실상 꼴찌로 선거를 마친 가운데 셰이크 아마드 칼리파 알 타니(카타르)가 1위를 찍었고 일본축구협회장인 다시마 고조가 39표로 뒤를 따랐다. 이어 야세르 알미세할(사우디아라비아)이 35표, 마리아노 아레네타 주니어(필리핀)가 34표를 얻었다. 다툭 하지 하미딘 빈 하지 모흐드(말레이시아·30표)가 5위. 여기에 바레인 출신의 셰이크 살만 빈 에브라힘 칼리파 AFC 회장은 단독 입후보해 연임에 성공했다.

셰이크 살만 빈 에브라힘 칼리파 현 AFC 회장. AFC 홈페이지
물론 우리가 막대한 부를 내세운 중동을 이길 힘은 없다. 당장 2023년 아시안컵 유치전이 보여줬다. 월드컵에 활용한 최신식 인프라를 갖춘 카타르는 한국보다 3배 이상의 지원금을 약속했다. 게다가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 아랍에미리트(UAE), 바레인 등 중동 국가들은 간간이 충돌하곤 하나 기본적으론 종교를 통한 정서적 유대감이 깊다. 필요할 때는 확실히 뭉친다는 얘기다.

그런데 정 회장은 아시아권의 주류 세력과 반목해왔다. 안 그래도 2011년 FIFA 부회장 선거에서 요르단 왕자에게 밀려 재선에 실패한 정몽준 KFA 명예회장 시절부터 갈등의 골이 깊었는데, 지금은 도저히 좁힐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 회장을 지지한다고 알려진 서아시아 회원국은 이란 등 극히 일부인데, 전체 판을 보면 ‘왕따’에 가깝다.

반면 다시마 회장은 영리했다. 정 회장과의 친분이 두터우면서도 중동 카르텔과의 관계도 비교적 끈끈했다. 또한 일본 기업들은 AFC 후원사로 활동 중이고 유소년, 프로리그, 지도자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아시아 개발도상국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한국 기업들이 일찌감치 증발한 것과 전혀 다르다. 그래서인지 ‘일본은 동아시아 축구의 리더’라는 인식이 깊이 박혀있다.

그나마 중동이나 일본에 뒤진 것은 이해가 된다. 가장 심각한 점은 아세안에도 밀렸다는 사실이다. 말레이시아와 필리핀은 월드컵 출전이 전무한 축구 약소국이나 정세를 읽는 눈은 달랐다. AFC 본부가 위치한 말레이시아는 국왕과 체육부 장관이 직접 나서 축구 외교관 배출에 총력을 기울였고 필리핀은 동남아시아의 권리를 외치면서 득표 활동에 나서 대형 프로젝트를 성사시켰다.

2027년 초까지 국제무대에서 사라지게 된 한국축구가 향할 길은 명확하다. 일단 바닥부터 다져가야 한다. 중동과는 껄끄럽고, 동아시아에서도 입지가 약하며 아세안에게도 다가서지 못하는 어정쩡한 지금의 상황이 반복돼선 안 된다. 굽힐 때는 과감히 굽히고, 취할 부분은 정확히 취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스포츠동아DB
동시에 작은 부분부터 접근해야 한다. 경쟁도 치열하고 당분간 넘보기 어려운 월드컵 등 FIFA 대회에 무리한 욕심을 내기보다는 아시아 연령별 대회 등 보잘것없어 보이는 대회를 유치하며 잃은 점수를 서서히 만회할 필요가 있다. 후원도 투자도 없이 좋은 축구 실력으로 성과만 내는 현재의 ‘상금 헌터’ 이미지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유능한 참모’ 역시 반드시 필요하다. 유감스럽게도 정 회장 주변에는 국제 정세를 정확히 읽고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며 활동할 만한 사람이 없다. 분명 이름값이 높은 축구 인들은 적지 않은데 KFA 내부에는 보이지 않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축구계 일각에선 임기가 2년 남은 정 회장의 이른 ‘레임덕’ 현상을 우려한다. 하지만 실패를 만회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기도 하다.


남장현 스포츠동아 기자 yoshike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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