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수상한 계좌 ‘촉’으로 환수 확률 3% 뚫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1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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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中企 ‘사기 피해금’ 되찾아준 입양아출신 스웨덴경찰 카린 옌센씨
계좌 동결 등 선제조치 후 1억 환수
최근 방한, 47년만에 친모 상봉 “근면한 한국인 DNA 자랑스러워”

“이번엔 스웨덴 은행 계좌로 대금을 보내주세요.”

지난해 6월 경기도 소재 한 중소기업 대표 A 씨는 중국 거래처로부터 이 같은 이메일을 받았다. 수년간 신뢰가 쌓인 곳이라 약 5700만 원을 즉시 송금했다. 그런데 2∼3시간 뒤 A 씨는 해당 거래처로부터 “은행을 바꾼 적 없다”는 말을 들었다. 확인해 보니 발신자 메일 주소가 기존 거래처의 것과 한 글자 달랐다.

사기임을 알아차린 A 씨는 국내외 은행, 금융기관, 경찰 등에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쉽지 않다”는 답만 돌아왔다. 회수를 포기하다시피 했던 A 씨는 지난달 간신히 피해액 대부분(약 5200만 원)을 돌려받았다. 경찰에 따르면 이메일 무역 사기에 당한 피해 금액을 되찾을 확률은 3%가 안 된다.

7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에서 동아일보 기자를 만난 카린 옌센 씨(위 사진)는 “앞으로도 한국인 대상 사기 피해를 막고 피해금을 
환수하는 국제 공조 수사를 돕고 싶다”고 했다. 아래는 옌센 씨의 입양 당시 여권. ‘오옥희’라는 이름과 출생 일시, 입양 기관 옛
 주소지 등이 적혀 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7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에서 동아일보 기자를 만난 카린 옌센 씨(위 사진)는 “앞으로도 한국인 대상 사기 피해를 막고 피해금을 환수하는 국제 공조 수사를 돕고 싶다”고 했다. 아래는 옌센 씨의 입양 당시 여권. ‘오옥희’라는 이름과 출생 일시, 입양 기관 옛 주소지 등이 적혀 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A 씨의 돈을 찾아준 사람은 한국계 입양아 출신의 스웨덴 경찰 카린 옌센 씨(47)였다. 동아일보 기자는 7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에서 옌센 씨를 만났다. 최근 방한해 입양 후 47년 만에 처음 친모와 상봉했다는 그는 A 씨 사건과 관련해 “남을 돕고 싶어 경찰이 됐는데, 한국 피해자까지 돕게 돼 뜻깊었다”고 했다.
○ 한국 중소기업 사기 피해금 1억여 원 환수
옌센 씨는 스웨덴 말뫼에서 국제 자금세탁·환수를 담당하고 있다. 계급은 한국의 경감급이다. 그는 올 4월 다른 한국 중소기업이 2018년 사기당했던 6500만 원을 4년 만에 돌려받는 것에도 기여했다.

2012년 경찰에 입직해 최근 5년 동안 경제 분야 수사를 맡고 있는 옌센 씨의 ‘촉’이 신속한 계좌 동결에 주효했다. 통상 이메일 사기 범죄 수익은 순식간에 제3국으로 빠져나가거나 가상자산으로 변환된다. 계좌 동결 등 선제적인 조치가 피해를 줄이는 핵심이다.

옌센 씨는 “아시아 지역에서 이체된 사기 피해금이 스웨덴을 거쳐 제3국으로 흘러나가는 일이 빈번했기에 수취인 주소지와 연락처, 이름 등이 불분명한 이체 내역을 보고 먼저 계좌 동결부터 했다”고 설명했다.

옌센 씨는 이후 한국 경찰, 인터폴로부터 공조 요청을 받고 송금인을 확인한 후 돈을 돌려주도록 조치했다. 돈을 돌려받은 A 씨는 “옌센 씨의 노력이 눈물나게 고맙다”고 했다.
○ 47년 만에 친모 상봉 “한국인 DNA 자랑스러워”
옌센 씨는 이달 경찰청과 인터폴이 주최한 ‘국외도피사범 합동검거작전 결과회의’에 범죄수익 환수 기법 공유차 참석했다.

방한에 앞서 옌센 씨는 유전자 확인을 위한 머리카락과 ‘오옥희’라는 한국 이름, 입양기관으로 추정되는 옛 주소지를 한국 경찰에 보내며 “친모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해외 입양아는 서류상 기록이 허위이거나 기록 자체가 없어진 경우가 많다. 그렇다 보니 원하는 이들 중 실제로 한국에서 가족을 찾은 이들은 많지 않다.

그러나 그는 이달 4일 친모, 동생과 극적으로 상봉할 수 있었다. 옌센 씨는 “나와 닮은 사람을 처음 만났는데,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며 “가족을 만났다는 게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옌센 씨를 마주한 친모는 그 자리에서 눈물만 펑펑 쏟아냈다고 한다. 2박 3일간 가족들과 지냈다는 그는 “원래 성은 알고 보니 ‘오’가 아니라 ‘이’ 씨였고 이름 ‘옥희’는 당시 산부인과 의사가 임의로 지은 것이었다. 가족을 찾은 게 기적”이라며 웃었다.

원래 한국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던 옌센 씨는 자신을 닮은 자녀들이 한국에 대해 묻는 걸 보고 “뿌리에 관심이 생겼다”고 했다. 지금 옌센 씨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 프로필엔 ‘카린 옥희’라고 적혀 있다. 그는 “어딜 가든 남들보다 근면하고 추진력이 강한 사람이라고 느끼며 살았다. 알고 보니 제 한국인 유전자(DNA) 때문인 것 같아 자랑스럽다”고 덧붙였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사기 피해금#계좌 동결#방한#스웨덴경찰#카린 옌센씨#한국인 d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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