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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문화

노예-전쟁포로가 흘린 눈물, 현대 역학의 토대가 되다[책의 향기]

입력 2022-06-25 03:00업데이트 2022-06-26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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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와 전염병/짐 다운스 지음·고현석 옮김/384쪽·2만3000원·황소자리
1789년 영국 인쇄업자 제임스 필립스가 펴낸 ‘브룩스’에 수록된 삽화. 노예선 내부 그림과 함께 소개된 이 그림은 노예무역의 참상을 드러냈다(위쪽 사진). 오른쪽 사진은 영국 물리학자 스티븐 헤일스가 설계한 환기장치. 그는 환기를 통해 병원이나 선박, 감옥의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758년 발표한 논문에서 자신이 구상하는 환기장치 도면을 그렸다. 황소자리 제공
흑사병, 천연두, 스페인 독감 등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전염병은 인류 역사와 함께했다. 메르스부터 에볼라, 코로나19까지 여전히 감염병 대유행이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 역학 토대를 마련하는 데 기여한 이들은 누구일까. 의사나 학자를 떠올리기 쉽지만 미국 게티스버그 칼리지 역사학 교수인 저자는 노예제, 식민주의, 전쟁의 희생양에게 그 공을 돌린다. 노예선, 플랜테이션(대규모 상업 농장), 전쟁터라는 ‘대규모 실험실’이 조성됐고, 의사들은 그 현장에서 질병의 원인과 확산경로를 연구했다. 저자는 공공의료와 역학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지만 조명 받지 않은 흑인 노예와 식민지인, 죄수와 전쟁포로를 비춘다.

공기질이 질병의 확산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의학적 발견은 수개월간 노예선에 갇혀 이동해야 했던 흑인 노예들의 희생으로 인해 가능했다. 대표적 사례는 노예선 ‘브룩스호’다. 스코틀랜드 군의관 토머스 트로터는 1783년 서아프리카 골드코스트에서 흑인 노예 600여 명을 태운 이 배에서 40명이 죽고 300명이 감염되는 과정을 관찰함으로써 더러운 공기와 영양결핍이 괴혈병의 원인임을 찾아냈다. 그의 연구는 병원, 감옥 등에서의 질병 확산을 막기 위한 환기 기구 개발로 이어졌다.

전쟁에 참전한 군인과 전쟁포로의 희생 역시 현대 공중보건이 발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크림전쟁(1853∼1856) 당시 영국 간호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터키 스쿠타리 병원에서 다친 병사들을 돌보며 군 병원의 비위생적 환경이 환자에게 미치는 악영향을 연구할 수 있었다. 전투보다 병으로 죽는 병사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발견한 그는 환기되지 않는 건물, 오물이나 동물 사체가 몇 달째 방치돼 있는 배수구 등 병원의 열악한 위생 환경을 지적했다. 그가 강조한 위생과 예방법 개발은 현대 공중보건의 핵심을 이루는 개념이 됐다.

전염병 퇴치를 위한 백신 개발에는 아이들의 희생까지 따랐다. 19세기 중반 미국 남북전쟁 당시 천연두가 퍼지자 남군은 백신 채취에 사람을 이용하는 인두법을 위해 어린 흑인 노예를 대상으로 삼았다. 인두법은 천연두 환자의 고름이나 딱지를 채취해 사람의 피부에 넣는 방식. 아이 몸에 생긴 물집이 커질수록 백신을 만드는데 필요한 천연두 림프를 더 많이 채취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천연두에 걸린 흑인 아이의 몸에는 평생 흉터가 남았다.

의사들은 사례 연구를 통해 질병의 원인과 해결책을 찾아나간다. 하지만 그 사례 뒤에 존재하는 실존 인물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역학과 공중보건이 첫발을 뗄 수 있었던 데에는 노예와 식민지인, 죄수와 전쟁포로들이 흘린 피와 눈물이 있었다. 코로나19가 엔데믹에 접어드는 지금, 이들의 고통에 현재의 우리가 얼마나 많이 빚지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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