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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계 대성씨 “해병 입대 신고합니다” [공존: 그들과 우리가 되려면]

입력 2022-01-20 03:00업데이트 2022-02-02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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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이주민 2세가 온다
2000년대 이주민 급증, 2세 28만명… “한국사 왜 배워” 생활속 편견 여전
이중언어 등 강점, 미래 인재 성장… “공존은 존중에서 출발” 한목소리
해안가의 칼바람을 호루라기 소리가 꿰뚫었다. 지난해 10월 25일, 해병대 교육훈련단 앞은 입소자 가족들로 가득했다. 윤대성 씨(20)는 스마트폰을 붙들고 있었다. 영상통화 화면엔 인도네시아 친구들이 있었다.

한국-인니 모두 알아, 양쪽 잇는 사업이 꿈 인도네시아계 윤대성씨 “다중정체성은 나의 힘” 해병대사령부 제공

영상통화가 끝나자 엄마 에코디르미야띠(에코·50) 씨는 아들 대성 씨를 꼭 안았다. ‘이런 날이 현실이 될 줄이야.’ 대성 씨는 한국에서 태어나 중학교까지 마치고 엄마의 나라인 인도네시아로 떠났다. 인도네시아에선 지원자들만 군대를 간다.

지난해 10월 25일 인도네시아계 한국인 윤대성 씨가 경북 포항의 해병대 교육훈련단 입구에서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대성 씨는 해병대에 가기 위해 인도네시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대성 씨에게 군대는 필수 코스가 아니었다. 대성 씨는 한국인 아버지, 인도네시아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인도네시아계 한국인.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하고 인도네시아 국적을 취득하면 인도네시아에 정착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났으면 군대는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한 번 가는 군대, 멋있게 가자고 생각했죠.”(대성 씨)

“다녀올게요!”

머리를 짧게 자른 대성 씨(왼쪽). 친구들과 추억을 쌓기 위해 경기 안산의 대부도로 여행을 떠났다.


대성 씨는 교육훈련단 입구 속으로 훌쩍 사라졌다. 새빨간 바탕에 샛노란 글씨가 새겨진 간판 아래로. 간판의 문구는 ‘해병대는 이곳에서 시작된다’. 대성 씨는 속으로 외치지 않았을까. ‘진짜 한국인’은 이곳에서 시작된다고.

● 우리는 다중정체성 세대

2000년대 초반 결혼이주여성, 이주노동자 증가 등으로 국내 이주민이 급격히 늘기 시작했다. 이제 이들이 낳은 자녀들이 성인으로 자랐다. 군대를 가고, 취업을 준비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국내 이민자 2세(한국인으로, 부모 중 1명 이상이 귀화자이거나 외국인)는 2020년 28만 명이었다. 2040년엔 2.5배로 뛸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을 한국계, 중국계 미국인이 이끌듯 한국을 인도네시아계, 스리랑카계 한국인들이 이끄는 날이 올까.

대성 씨의 어린 시절 모습들. 한글을 배우던 어린 시절(왼쪽)과 인도네시아 고교 농구부 시절. 윤대성 씨 제공
대성 씨는 2002년 경기 광명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직장을 따라 광명시, 필리핀, 경기 안산시 등을 오갔다. 초등학교 때부터는 쭉 안산에서 자랐다.

“대성이 어머니가 인도네시아분인 건 초등학교 2학년 운동회 때 알았어요. 어떤 애들은 놀랐는데요. 덤덤한 애들이 더 많았어요.”

초등학교 동창 이윤재 씨(20)가 말했다. 대성 씨가 손꼽는 ‘절친’이다. “다문화 아이라도 좋은 점이 있으면 그걸 보고 사귀어요. 대성이는 성격 좋고 분위기도 잘 띄워서 친해졌어요.”

대성 씨에게 변곡점은 중학교 3학년, 2017년에 찾아왔다.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가 부도났다. 아버지는 아내의 나라 인도네시아에서 새 기회를 찾고 싶었다. 우선 대성 씨를 2018년 인도네시아로 보냈다.

대성 씨는 한국에서 태어나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경기 안산에서 나왔다. 고등학교는 인도네시아에서 다녔다.
“대성이가 운동만 좋아하고 공부를 안 했어요. 한국은 경쟁이 너무 치열하니까 외국어라도 배우라고 먼저 보냈죠. 근데 대성이 누나 송이가 한국에서 대학을 가겠다고 해서 저랑 남편은 한국에 남게 됐어요.”(에코 씨)

대성 씨는 홀로 인도네시아 자와틍아주 스마랑으로 갔다. 인도네시아의 대표 무역도시 스마랑. 대성 씨는 무역도시의 국제학교를 택했다. 인도네시아어와 영어를 동시에 배우기 위해서였다. 이제 ‘안산 원일중 3학년 윤대성’은 ‘서머스타고 1학년 윤대성’이 되었다.

“이슬람교인 애들도 있었어요. 처음 갔을 땐 새벽 5시 반에 기도 소리가 들려 깜짝 놀라 깬 적도 많아요. 라마단(이슬람 금식성월) 기간에 같이 금식도 해봤는데 재밌었어요. 케이팝이나 드라마를 아는 친구들이 한국을 엄청 좋아하더라고요. 덕분에 저도 인기 많았죠.”

인도네시아 서머스타 고등학교 졸업장.
선생님들은 대부분 터키, 우즈베키스탄에서 왔다. 기숙사엔 인도네시아는 물론이고 중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온갖 국적의 친구들이 있었다.

대성 씨는 이렇게 3년을 보내며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소화했다. 한국과 인도네시아를 결합한 사업을 구상하는 청년이 됐다. 이른바 ‘다중정체성’ 세대다. 여러 언어와 문화에 익숙하고 다른 사람, 다른 문화를 잘 받아들이는 세대.

“한국 친구들을 불러서 같이 사업할 거예요. 인도네시아에 케이팝 틀어주고 한국 연예인 사진을 걸어놓은 인기 음식점이 있거든요. 근데 사장이 중국인이에요. 한국인인 제가 떡볶이처럼 유명한 한국 음식으로 장사하면 더 잘되지 않을까요?”

에코 씨는 입대를 앞둔 아들 대성 씨를 꼭 끌어안았다.

● 남다른 연애
다문화 배경에 고민, 그래도 한국이 좋아 인도네시아계 윤송이씨 “K뷰티 전문가 될 거예요”
“화장품 원료의 성분까지 알아야 마케팅에서도 경쟁력이 생긴다고 생각했어요.”

대성 씨 누나 윤송이 씨(22)는 ‘K뷰티’ 전문가를 꿈꾼다. 피부가 나빠졌을 때 한국 화장품으로 나아진 경험 덕분이다. 지금은 한 대학 바이오화장품과에 다닌다.

“우선 한국 화장품 회사에서 경험을 쌓을 거예요. 그 후에 한국 화장품 시장과 인도네시아 화장품 시장을 연결해 보고 싶어요.”

송이 씨가 직접 여러가지 향을 조합해 만든 향수.
꿈을 이야기할 땐 똑 부러지지만, 연애를 할 땐 말 못 할 고민으로 끙끙 앓기도 한다. 4년 전 남자친구를 사귀기 시작했을 때가 그랬다. 송이 씨는 외모나 말투 모두 평범한 한국인. 남자친구는 송이 씨가 이주민 2세란 걸 몰랐다.

“빨리 말해야 할 것 같았어요. 추억을 더 많이 쌓기 전에…. 남자친구가 싫어할 수도 있잖아요.”

우연히 고백의 기회가 왔다. “나 엄마랑 이모 결혼식에 참석하러 인도네시아에 가.” 송이 씨의 말에 남자친구가 조심스레 물었다. 엄마가 인도네시아인이냐고. “응.” 이후 4년째 사랑을 키우고 있다.

송이 씨의 세 살 무렵 모습(왼쪽 사진)과 고등학생 시절. 윤송이 씨 제공
송이 씨가 고민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같은 인도네시아계 한국인 친구가 이주민 2세란 사실 때문에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친구의 남자친구가 ‘우리 가족한테 네 엄마 한국 사람이라고 하라’고 했대요.”

송이 씨의 고민은 어릴 때부터 뿌리를 키웠다. 초등학생 때 한 또래 아이는 송이 씨를 놀렸다. “너 다문화잖아.”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다문화 가정 이야기가 나올 때 물었다. “송이 학생이 다문화 가정이죠?” 반 친구들의 시선이 쏠렸다. 송이 씨는 그 선생님이 미웠다. ‘굳이 내 이름을 언급해야 하나.’

K뷰티 전문가를 꿈꾸는 송이 씨. 한 대학의 바이오화장품과에서 원료의 성분과 제조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학교에서 비슷한 이주배경 친구들은 종종 이름을 잃었다. 선생님들은 이름 대신 이렇게 부르곤 했다. “야, 인도네시아!” “야, 중국!”

상처가 쌓이며 입은 닫혔다. “상처가 없었다면 저도 당당하게 말을 했겠죠. 움츠러드니까 바로 말하지 못하고, 돌려서 말하려 하고. 제가 그런 성격이에요.”

경기 안산시 외국인주민상담지원센터에서 근무중인 에코디르미야띠 씨. 윤송이, 대성 씨 남매의
어머니다.
엄마 에코 씨는 송이 씨에게 고맙다. 아픔을 딛고 잘 자라줘서. 고등학생 때 용돈을 스스로 벌던 딸이다. 알아서 진로도, 대학도 정했다.

상처를 받은 적도 있지만 송이 씨는 앞으로도 계속 한국에서 살아갈 생각이다. 친구들에겐 당연하지만 송이 씨에겐 당연하지 않은 일이다. 가족들이 인도네시아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송이 씨는 혼자서라도 한국에 남을 생각이다.

“인도네시아는 오래 살아보지 않아서 고향으로 느껴지진 않아요. 저는 한국에서 사는 게 너무 좋아요.”

송이 씨와 대성 씨처럼 이주민 2세들은 이제 한국 곳곳으로 뻗어 나가고 있다. 아픔이 있지만 희망을 얘기한다. 한국 사회는 노력한 만큼 성공할 수 있는 사회라고. 20년 뒤, 과연 70만 명의 ‘다중정체성 세대’는 우리를 어떻게 바꿀까. 세계를 어떻게 바꿀까.

한국 택한 이주배경 청년들


2000년대 초반 결혼이주여성, 이주노동자 증가 등으로 국내 이주민이 급격히 늘기 시작했다. 이제 이들이 낳은 자녀들이 성인으로 자랐다. 군대를 가고, 취업을 준비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국내 이민자 2세(한국인으로, 부모 중 1명 이상이 귀화자이거나 외국인)는 2020년 28만 명이었다. 2040년엔 2.5배로 뛸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을 한국계, 중국계 미국인이 이끌듯 한국을 인도네시아계, 스리랑카계 한국인들이 이끄는 날이 올까.
● ‘다름’은 나의 힘
스리랑카계 한국인 남매인 서샤니 씨(왼쪽)와 서현식 씨.
이주민 2, 3세들은 어릴 때부터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며 자란다. ‘다름’은 이주민 2세가 성장하는 힘이 된다. 다른 사람을 잘 이해하고 돕는다.

스리랑카계 한국인 서현식 씨(29)는 2016년 경기 안양 YMCA에 입사했다. 현재 시민사업부 팀장으로, 공동체 활성화를 위한 강연을 주관한다. 화상회의 플랫폼인 ‘줌(zoom)’ 활용법 강의는 직접 한다.

안양 YMCA의 이현주 아기스포츠단 원장은 현식 씨의 소통 능력을 칭찬했다. “유아부터 어머니들까지 다양한 연령대와 일하면서 모든 세대와 소통하는 유연함을 키웠더라고요.”

한 학부모는 현식 씨를 ‘까만콩 선생님’으로 기억한다. “먼저 그렇게 불러달라고 했어요. 자기소개도, 프로그램 설명도 선생님들 중 가장 똑 부러지게 해서 놀랐어요.”

남다른 아픔 알기에 소통-이해의 힘 키워 스리랑카계 서현식씨 “난 ‘까만콩 선생님’입니다”
현식 씨는 1993년 스리랑카 중남부 웰리마다시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국인, 어머니는 스리랑카인이다. 2002년 아버지가 다니던 스리랑카의 한국 기업이 철수하며 가족은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현지 국제학교를 다니던 현식 씨는 순식간에 ‘안산시 와동초 3학년’이 됐다. 당시 현식 씨가 다니던 학교엔 이주배경 학생이 거의 없었다. 지금의 안산과는 너무도 달랐다.

“우리를 외계행성에서 온 사람처럼, 아주 신기하게 쳐다봤어요. 쉬는 시간에 저를 보려고 교실 창문에 굉장히 많은 친구가 몰려들었죠.”

현식 씨의 가족 사진(왼쪽). 댄스 크루에서 활동한 현식 씨가 지역 행사에 참가한 모습. 서현식 씨 제공.
2002년 월드컵으로 생긴 ‘축구 붐’ 덕분에 현식 씨는 축구를 하며 친구를 사귀었다. 중학교 때 시작한 춤은 그를 ‘인사이더’로 만들었다. 현식 씨는 전문 크루에서 활동하며 지역, 학교 축제에 나가기도 했다.

현식 씨는 자신의 색다른 배경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살렸다. 고등학교 때는 경기차세대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청소년 정책, 다문화 정책을 제안했다. “이주배경 학생도 한국 사회의 일원일 뿐이고, 남들과 다를 게 없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인종이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면 안 되잖아요.”

현식 씨는 2012년 신안산대에 입학해 전자정보통신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대학 때 다녀온 해외 봉사활동이 진로를 바꾼 계기가 됐다. 필리핀의 빈곤 지역에 사는 사람들과 6개월간 어울렸다. 본인도 선입견이 많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쌍하니까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평등한 사람’으로 대하는 게 더 중요했어요. 돈을 많이 벌기보단 다양한 사람을 편견 없이 만나 소통하는 일을 하고 싶어졌어요.”

샤니 씨의 첫 돌 사진(왼쪽)과 7살 때 모습. 서샤니 씨 제공.
현식 씨의 동생 샤니 씨(26)도 편견을 씩씩하게 딛고 성장했다. 샤니 씨가 한국에 첫발을 디딘 건 일곱 살 때. 그때를 어렴풋하게 기억한다. 한국인 아버지와 할머니는 샤니 씨 손을 잡고 유치원을 찾았다. “외국인 아이는 안 돼요.” “한국인이에요. 내가 아빠고, 이분이 할머니예요.”

“외국인 아이는 무조건 안 된다고 했대요. 길게 얘기도 못 했대요. ‘안 되니까 돌아가시라’고 했대요.”(샤니 씨)

결국 동네 한 어린이집만 샤니 씨를 안쓰럽게 여겨 받아줬다. “일곱 살이었는데 4~6세만 다니던 어린이집에 다녀야 했어요. 갈 곳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죠.”

학창 시절 유쾌하지 않은 경험도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역사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샤니 씨를 갑자기 일으켜 세웠다. “한국사를 몰라도 되는 샤니가 98점을 받았어요. 본받아야 해요.”

지원만 바라면 안돼… 자립 노력 계속할것 스리랑카계 서샤니씨 “이주민 돕는 일 하고 싶어”
샤니 씨는 수업 내내 기분이 나빴다. 수업 후 선생님을 붙잡았다. “저희 아버지는 한국인이고, 전 어렸을 때부터 한국에서 살았어요. 제가 왜 한국사를 몰라도 돼요?”

샤니 씨는 더욱 단단해졌다. 고교 졸업 뒤엔 바로 취업에 뛰어들었다. 제약회사, 물류회사를 거쳐 비영리 단체에서 일했다. 저소득층 한국인, 난민, 다문화 가정 등에 기업이 후원한 물품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최근엔 경기 안양시의 한 병원에 취직했다. ‘싱글 라이프’를 즐기기 위한 안정적인 직장이 필요해서다. 20대이지만 이미 개인연금에 가입했다. 월급의 절반은 저축하려 아낀다. “거실 하나, 방 하나 있는 집에서 강아지를 키우며 살고 싶어요. 아파트 청약을 넣어서 독립할 생각이에요.”

남을 돕는 일은 계속하고 싶다. 스리랑카 이주민 상담을 하는 어머니처럼 신할리즈어(스리랑카 제1언어)를 더 배워 같은 일을 해볼 생각도 있다.

“비영리 단체에서 일하며 ‘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 혹시 도와줄 수 있냐’고 하는 이주민들을 많이 봤어요. 스리랑카어를 배워두면 남을 도울 수 있는 기회가 많을 것 같아요.”
● 그래도, 한국
한국 사회에서 꽃을 피우지 못한 채 떠나는 이주 청년들도 있다. 이주민 2세 부디(가명·26) 씨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태어났다. 일곱 살 때 부모님을 따라 한국에 와 초등학교, 중학교를 모두 안산에서 다녔다. 언어도, 문화도 한국이 익숙하다. 한국에서 평생 살 생각으로 한국 이름도 지었다.

부디 씨가 고교 1학년이 됐을 때 삶에 균열이 생겼다. 부모님이 갑자기 인도네시아로 돌아가야 한다고 통보했다. 인도네시아에 계신 할아버지 지병이 악화돼 부양을 해야 했다. 미성년자였던 부디 씨는 부모님을 따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생 부디 씨에게 인도네시아는 외딴 세계였다. 인도네시아어를 부지런히 배웠지만 학교 수업을 따라가기가 벅찼다. 한국이 늘 그리웠다.

안산시 외국인주민상담지원센터에서 근무 중인 서아이라 씨.
혼란스러운 고교 생활 끝에 결심했다. ‘한국 대학으로 가자.’ 부디 씨는 2019년 서울의 4년제 대학에 입학했다. 꿈에 그리던 한국이었지만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보증금 300만 원에 월세 30만 원짜리 원룸을 겨우 구했다. 대학 등록금 외에도 월세, 생활비 등으로 매달 70만 원가량이 나간다. 하지만 부디 씨는 학생비자를 받았기 때문에 규정상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할 수 없다.

미래를 생각하면 더 힘들다. 취업에 성공해야만 취업비자를 받아 한국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취업의 길은 한국인 청년에 비해 더 좁다.

“한국어와 인도네시아어를 모두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그런데 임용시험은 외국인이 응시할 수 없어요. 계약직 교사도 한국인을 선호하더라고요. 안 되면 통역 일을 하려고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을 알아보고 있어요.”

특기를 살려 정보기술(IT) 기업에서도 일하고 싶다. 부디 씨는 초등학생 때 이미 간단한 게임을 만들었을 정도로 IT 실력이 뛰어나다.

부디 씨는 한국이 재능 있는 이주민 청년과 더불어 일할 방법을 찾아주길 고대한다. 정부와 기업이 채용의 문턱을 낮추면 다양한 끼와 자질로 기여할 준비가 돼 있다.

이주민 2세들은 이제 한국 곳곳으로 뻗어 나가고 있다. 이들은 학교의 울타리에선 몰랐던 사회를 알아간다. 현실을 더 날것으로 접한다. 아픔이 있지만 희망을 얘기한다. 한국 사회는 노력한 만큼 성공할 수 있는 사회라고.

“자립해서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노력해야 해요. 지원만 바라고 있으면 안 돼요. 이런 노력을 제도가 뒷받침해 주면 더 좋고요.”(샤니 씨)

“안산 밖에서도 이주민 2세들을 지원하는 센터나 기관이 늘고, 프로그램 질도 높아지면 좋겠습니다.”(현식 씨)

이들은 말한다. 공존은 존중에서 시작된다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가 사회 곳곳에 자리 잡아야 한다고. 20년 뒤, 70만 명의 국내 이주민 2세들은 우리를 어떻게 바꿀까.

히어로콘텐츠팀
▽팀장: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기사 취재: 신희철 김재희 남건우 기자
▽사진·동영상 취재: 송은석 남건우 기자
▽그래픽: 김충민 기자
▽편집: 한우신 기자
▽프로젝트 기획: 위은지 기자
▽사이트 개발: 고민경 임상아 뉴스룸 디벨로퍼
▽동영상 편집: 남건우 기자 박세진 PD 안채원 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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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콘텐츠팀
신희철 기자 hcshin@donga.com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남건우 기자 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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