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의 말없는 죽음…울분의 독립만세 파도 일으켜[동아플래시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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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년 11월 12일 1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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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6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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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의 마지막 임금 순종이 숨을 거뒀습니다. 1926년 4월 25일이었죠. 1907년 대한제국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불과 3년 뒤 쫓겨나야 했던 비운의 왕이었습니다. 아버지인 고종 때 사실상 나라를 빼앗긴 상태였지만 공식적인 국권 상실은 순종 때 일어났죠. ‘융희 황제’에서 ‘창덕궁 이왕(李王)’으로 추락한 채로 외로움과 그리움 속에서 지낸 세월만 16년이었습니다. 민중은 순종의 죽음으로 조선왕조가 끝났다는 사실을 한 번 더 절감했을 법합니다. 10여만 명의 남녀노소가 돈화문 앞으로 몰려와 통곡하고 상점은 문을 닫고 기생들까지 영업을 삼가는 모습에서 이 정서를 엿볼 수 있습니다. 임종했던 옛 신하 민영찬은 ‘(승하하실 때) 아무런 말씀이 계시지 못하였습니다’라고 전할 뿐이었죠.

①조선왕조의 마지막 임금 순종의 승하 소식이 알려지자 그의 거처였던 창덕궁 돈화문 앞으로 몰려든 인파 ②, ③비운의 왕 순종의 승하를 애통해 하는 남녀들이 땅에 엎드려 통곡하고 있다.
①조선왕조의 마지막 임금 순종의 승하 소식이 알려지자 그의 거처였던 창덕궁 돈화문 앞으로 몰려든 인파 ②, ③비운의 왕 순종의 승하를 애통해 하는 남녀들이 땅에 엎드려 통곡하고 있다.


이제 장례가 발등의 불이 됐습니다. 일본 내각은 군소리 없이 국장(國葬)으로 치른다고 결정했죠. 장례일은 왕가의 희망대로 6월 10일로 정했고요. 이참에 1904년 먼저 세상을 떠난 순명효황후의 묘를 옮겨와 경기도 금곡에 함께 안장하기로 했습니다. 일제는 순종의 장례를 적극 지원했습니다. 그런데 일제가 그에 못지않게 신경을 곤두세운 일이 있었죠. 바로 경계활동이었습니다. 순종의 병세가 회복될 가망이 없던 때부터 고등계 형사들은 물론 정사복 순사들을 총출동시켰습니다. 불면불휴(不眠不休) 즉 잠을 자지도, 쉬지도 않으면서 혹시나 불온한 움직임이 없나 눈에 불을 켜고 지켜봤죠. 유언비어를 퍼뜨리거나 혹세무민하면 용서 없이 처벌하겠다고 엄포도 놓았습니다.

①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영구가 실린 대여가 창덕궁을 떠나고 있다. ②창덕궁 안에서 순종의 마지막 떠나는 길을 지켜보고 눈물을 닦고 있는 나인들
①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영구가 실린 대여가 창덕궁을 떠나고 있다. ②창덕궁 안에서 순종의 마지막 떠나는 길을 지켜보고 눈물을 닦고 있는 나인들

드디어 장례행렬이 창덕궁을 출발해 오전 8시 반쯤 종로 3가 단성사 앞을 지나갔습니다. 갑자기 ‘조선독립만세’ 함성이 터지고 격문(檄文)이 공중에 흩날렸죠. 중앙고등보통학교 학생 30, 40명이 앞장선 6‧10만세운동의 첫 거사였죠. 순종의 영구가 장례식장인 동대문 밖 훈련원으로 갈 때 근처 8곳에서 ‘조선독립만세’가 메아리쳤습니다. 순종의 마지막 길을 지켜보러 나온 수십만의 사람들이 순식간에 가세했죠. 동아일보가 사설을 통해 여행 단속, 여관 수색, 신분 조사, 무조건 검속을 자행한다고 비판할 정도로 철통같았던 일제의 경계망이 뚫린 순간이었습니다. 당황한 나머지 정사복 경찰은 물론 기마경찰까지 군중 속으로 뛰어들어 학생들을 붙잡느라 허둥댔죠. 그 바람에 부상자들이 속출했습니다.

왼쪽은 1940년 경성 지도 위에 순종의 장례식장 경로를 검은 화살표로 표시하고 6‧10만세운동이 일어난 위치를 함께 넣었다.  오른쪽은 동아일보 1926년 6월 12일자에 실린 6‧10만세운동 지점의 사진. ①단성사 앞 ②황금정 4정목(현재 을지로 4가) ③관수교이며 지도 위에도 번호로 표시했다.
왼쪽은 1940년 경성 지도 위에 순종의 장례식장 경로를 검은 화살표로 표시하고 6‧10만세운동이 일어난 위치를 함께 넣었다. 오른쪽은 동아일보 1926년 6월 12일자에 실린 6‧10만세운동 지점의 사진. ①단성사 앞 ②황금정 4정목(현재 을지로 4가) ③관수교이며 지도 위에도 번호로 표시했다.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학생들은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통동계(通洞系)로 나뉩니다. 이중 통동, 현재 통인동에 모여 살던 학생들이 뿌린 격문에는 ‘조선민족아, 우리의 철천지원수는 자본제국주의 일본이다, 2천만 동포야, 죽엄을 결단코 싸우자, 만세! 만세!, 조선독립만세!’라고 적혀 있고 ‘조선민족대표 김성수 최남선 최린’의 이름이 들어 있었죠. 이 세 사람이 학생들에게 3‧1운동 때처럼 민족지도자로 각인돼 있었던 셈이죠. 원래 2차 조선공산당과 천도교가 손을 맞잡고 거족적인 6‧10만세운동을 구상했지만 6월 7일 발각되는 바람에 무산됐습니다. 제2의 3‧1운동은 불발로 끝났지만 학생들은 밤새 격문을 찍어낸 뒤 용케 일제의 감시를 피해 경성에서나마 독립만세를 외치는데 성공했습니다.

6‧10만세운동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1926년 6월 11일자는 기존에 사설과 외신기사를 싣던 제작방식과는 달리 만세 사건을 1면에 과감하게 배치했다. ①경찰이 총을 쏘았다더라, 기마경찰이 폭행했다는 기사와 기마경찰 사진이 삭제된 1926년 6월 11일자 1면 압수 지면 ②압수를 피해 해당 기사와 사진이 그대로 실려있던 같은 날짜 지면. 오른쪽은 일제가 6‧10만세운동 소식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동아, 시대일보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들어오는 일본어 신문까지 압수했다는 동아일보 1926년 6월 12일자 2면 기사
6‧10만세운동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1926년 6월 11일자는 기존에 사설과 외신기사를 싣던 제작방식과는 달리 만세 사건을 1면에 과감하게 배치했다. ①경찰이 총을 쏘았다더라, 기마경찰이 폭행했다는 기사와 기마경찰 사진이 삭제된 1926년 6월 11일자 1면 압수 지면 ②압수를 피해 해당 기사와 사진이 그대로 실려있던 같은 날짜 지면. 오른쪽은 일제가 6‧10만세운동 소식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동아, 시대일보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들어오는 일본어 신문까지 압수했다는 동아일보 1926년 6월 12일자 2면 기사


장례기간 내내 순종을 ‘순종효황제’로 표기한 동아일보는 장례식 이모저모를 필름에 담아 한 시간 분량의 영화로 만들었죠. 6월 15일부터 경성 대구 함흥에서 상영했습니다. 순종을 떠나보낸 민족의 슬픔을 승화시켜 새로운 길을 개척하자는 뜻이었습니다. 볼거리가 드물던 시절이기도 했지만 상영관은 인파로 미어터질 지경이었죠. 2회 상영을 즉석에서 3회로 늘렸지만 허탕 친 이들이 더 많았습니다. 상영 장소도 안성, 연일(延日), 평양으로 늘렸고 이어 전국을 순회할 계획이었죠. 하지만 예상 밖의 인파가 몰리자 총독부가 끼어들었습니다. 사전 검열해 놓고도 더 이상 상영하지 말라고 압력을 넣었죠. 일제는 그마저도 불안했던지 8월부터 활동사진검열규칙을 시행해 영화 내용까지 입맛대로 재단했습니다.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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