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에 관계되는 일[클래식의 품격/인아영의 책갈피]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0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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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아영 문학평론가
인아영 문학평론가
현존하는 가장 천재적인 물리학자이지만 스스로를 15년 동안 정신병원에 가둔 남자가 있다. 바로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희곡 ‘물리학자들’에 등장하는 뫼비우스다. 그가 사랑하는 아내와 세 아이들을 버리면서까지 미친 척하는 까닭은 자신이 발견한 물리학 지식이 인류를 멸망에 이르게 할 파괴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각종 권력으로부터 이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비밀첩보부에서 파견되어 뫼비우스를 염탐하기 위해 같은 정신병원에 입원한 두 명의 물리학자, 뉴턴과 아이슈타인도 있다. 이 셋은 서로가 저명한 물리학자라는 사실을 모른 채 몇 년을 지내다가, 뫼비우스가 한 간호사를 교살하여 벌어진 소동을 계기로 서로의 신분에 대해서 알게 된다.

뉴턴과 아인슈타인은 뫼비우스의 가공할 지식을 각자의 첩보부에 넘기기 위해 그를 설득한다. 뉴턴은 과학의 학문적 자유와 독자적 영역을 주장하는 반면, 아인슈타인은 과학이 가진 막대한 파급력 때문에 특정 정치체제나 이익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뫼비우스는 서로 상반된 가치를 내세우고 있는 두 첩보부의 물리학자들이 자유를 빼앗긴 채 정치이론의 선전이나 산업의 이윤 창출을 위해 이용당하는 현실을 알아차린다. 뫼비우스는 세상을 앞서나간 과학지식을 철회하는 것 외엔 인류를 구할 해결책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세 물리학자가 병원에 남아있기로 맹세한 순간, 정말 정신이 나간 것은 정신병동의 늙은 의사 짜안트 박사였다는 것이 밝혀지고 만다. 짜안트 박사는 미리 수중에 넣은 뫼비우스의 과학지식을 세계정복과 개인적 이익을 위해 마음대로 활용할 것임을 선언한다.

뫼비우스가 발견한 과학적 성과는 꼭 그가 발견하지 않았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똑같이 발견해낼 가능성이 있다. 짜안트 박사의 말처럼 “사고 가능한 것은 무엇이든, 언젠가는 사고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미 사고된 것이 권력의 이익에 악용될 소지는 늘 존재한다. “일단 사고된 것은 철회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침묵될 수 없는 것을 침묵하려고” 한 뫼비우스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것은 당연한 귀결일까. 그가 아무리 과학지식에 대해 가치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한다고 한들, 과학을 과학만의 순수한 영역으로 가두는 순간 그 영역은 거대하고 기괴한 힘에 의해 특수자물쇠로 잠긴 채 격리 수용된 자그마한 방이 될 뿐이다.

뫼비우스가 그의 과학지식을 짜안트 박사에게 빼앗겨 버린 것이 그 혼자만의 탓이라고 할 수는 없다. 과학적 성취가 과학자 혼자만의 것이 아니듯, 그 의무도 혼자 짊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황폐한 세계를 반영한 이 희곡은, 어쩌면 기후위기와 맞물린 팬데믹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모두에 관계되는 일은, 오로지 모두가 함께 해결할 수 있다.”



인아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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