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사람들의 탄식 ‘이래서야 망하지 않고 배길쏘냐’ [동아플래시100]

이진 기자 입력 2021-10-15 11:40수정 2021-10-15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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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1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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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는 땅값이 오르고 서울에서는 집값이 뛰던 때입니다.’ 오해마세요. 지금이 아닙니다. 1926년 경성의 집주름, 요즘의 공인중개사가 15년 전을 떠올리며 한 말입니다. ‘합병 공로자’들이 일제로부터 받은 은사금으로 흥청거렸지만 돈을 집에 감춰두자니 강도 맞을까 겁나고 은행에 맡기자니 떼일까 염려돼 그중 튼튼한 대안이 부동산을 사두는 일이었다죠. 1000원에 산 집을 몇 달 만에 만 원 넘게 되팔았답니다. 900%가 넘는 수익률이었죠. 단박에 부자가 된 사람들이 있었답니다. 또 공문서를 써주는 한 대서인은 등기서류를 작성할 때마다 가슴이 뜨끔뜨끔하다고 했죠. 죄다 일본인에게 돈을 빌리고 저당권을 잡히는 등기여서 그랬답니다. 이런 등기가 매일 200건이니 망하지 않고 어찌 되겠느냐고 반문했죠.

조선인 최초로 도쿄사범학교를 졸업하고 20년째 중등교사로 일하는 장응진은 첫 근무지인 평양대성학교에서 자신의 '인도주의 교육철학'을 펼치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교장인 도산 안창호가 나라가 망한 것은 백성이 문약한 까닭이라며 군대식 체조를 가르쳤고 사회분위기도 적개심이 높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교사 생활 내내 결근도 지각도 하지 않은 정성에 스스로 만족한다고 말할 뿐이었다.


동아일보는 1926년 신년호부터 ‘10년을 하루같이’를 16회 연재했습니다. 한 분야에서 10년 넘게 일한 직업인들 소개였죠. 이들의 삶은 그대로 일제강점기 사회사였습니다. 서대문형무소 간수는 대한제국 군인이었죠. 군대 해산 때 참령 박성환이 ‘목을 따고 피를 흘리든 일’이 선하지만 먹고 살려고 사환부터 시작했다죠. 의병으로 잡혀온 과거 군인들은 태반이 동료나 상관이어서 얼굴을 들 수 없었답니다. 감형으로 4, 5년 뒤 출소한 그들은 모두 ‘저쪽으로 나가버린 모양’이라고 했죠. 무장투쟁에 나섰다는 뜻이겠죠. 구세군 부관은 신규모집 때 해산군인들이 각지에서 쫓아와 뽑아달라는 통에 정신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진짜 군인을 선발하는 줄 알았던 것이죠. ‘의(義)의 검을 들고 세상의 죄악과 싸우는 일’이라며 말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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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교 여교사는 3‧1운동 전만 해도 학생들을 불러 모으느라 바빴다고 했죠. 며칠을 두고 학부모를 졸라야 했답니다. 학비를 내지 않아도 됐고요. 1920년 이후부터는 학생들이 넘치기 시작했다죠. 학비도 받고 학생들을 골라 뽑았답니다. 열아홉 살에 산파(産婆)가 돼 일찍부터 ‘할머니’ 소리를 들었던 33세 여인은 한탄을 앞세웠습니다. 산파를 산모나 아이를 잡는 귀신으로 보는 집들이 있다면서요. 자기 손으로 받은 아이만 800명이 넘는다며 산파는 필요한 직업이라고 홍보하기도 했습니다. 제국신문사 광문사 대한매일신보사 등을 두루 거친 인쇄공은 뾰족뾰족한 상투차림에 입담배를 꾹꾹 눌러 담은 곰방대를 빡빡 빨면서 활자를 뽑는 문선공 시절을 떠올렸습니다. 이젠 빛바랜 사진으로만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16년간 무대에 섰던 희극배우는 1917년 무렵 신파연극 때만해도 대성공을 거둬 돈도 많이 벌었다고 했죠. 하지만 이젠 없어진 극단만 해도 50개 정도나 된답니다. 무대를 떠나는 사람도 적지 않고요. 세상이 배우를 업신여기기 때문일까 되묻습니다. 뭇 여성으로부터 염서(艶書)를 받지 않느냐 하자 ‘어느 잡놈이 그것 때문에 이 노릇을 하겠느냐’ 발끈했죠. 한성권번의 18년차 기생은 ‘할머니! 오늘은 어느 할아버지에게 불려갔소?’라고 청년들에게 조롱받지만 조실부모하고 16세 때 이 길에 들어섰다고 했습니다. 자기 허리를 껴안고 지폐로 코를 풀다시피 하던 한량은 아편장이가 됐고 이런 이들이 자기 인력거를 따라오며 ‘아씨, 돈 한 푼 줍쇼’ 하며 구걸한답니다. 예전 생각이 나서 얼마씩 준다죠.

32년째 구두를 만들고 있는 김성근은 조선인 최초로 개인 구두방을 차린 적도 있었지만 결국 실패했다고 한다. 제화공 중에는 자신과는 달리 성공한 사람들도 있다며 '이야기를 다 하자면 끝이 없다'고 했다. 18년간 편지를 배달하는 최윤덕은 오전 6시쯤 점심을 싸가지고 집을 나서 밤 9시에 귀가한다고 했다. 대부분 편지를 받아들고 기뻐하고 눈물까지 흘리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고 말했다.


변호사 검사 형사 같은 전문직업인이나 공무원과 달리 이들은 과거보다 현재의 살림이 팍팍하다고 이구동성이었습니다. 자기 손으로 단발해준 사람만 2500명쯤 된다는 이발사는 이제 늙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며 입을 닫았죠. 겨우 마흔일곱 살인데요. 이들 보통의 직업인들은 과거를 되새기며 ‘그렇게 어수룩한 세월이야 다시 오리라고 바랄 수 있겠느냐’는 심정이었습니다. 이들이 약 100년 뒤 오늘을 본다면 모두 입에 거품을 물고 기절하지 않을까요?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이 연재에 ‘끝’이 5번이나 나온다는 점입니다. 인기가 많아서 횟수를 자꾸 늘렸을까요? 아니면 내 사연도 써달라는 민원 때문일까요? 궁금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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