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으면 산골짜기라도 문전성시”… 간판없는 가게 붐

손효주 기자 입력 2021-08-21 03:00수정 2021-08-2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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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Z세대 주인들, SNS로 영업활동
와인바-맛집 등 ‘나만의 아지트’로… 안내문마저 없애 숨은 가게도
맛 자신감-워라밸 추구도 원인
18일 저녁 서울 용산구에 있는 내추럴 와인바 ‘하리’에서 사람들이 와인을 즐기고 있다. 가게 외부 어디에도 간판이 없어 지나가는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18일 밤 서울 용산구 한강로 삼각지역 일대. 인도 쪽 외벽 전체가 통유리로 된 1층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훤히 들여다보이는 내부에선 사람들이 와인을 즐기고 있었다. 와인 가게로 짐작은 되지만 간판은 어디에도 없었다. 외벽인 통유리에 붙어있는 건 ‘@hariseoul’이라는 글귀가 전부. 이마저도 하얀색인 데다 출입문 손잡이 옆에 조그맣게 붙어있어 눈에 띄지 않았다.

이곳의 정체는 올해 1월 문을 연 내추럴 와인바 ‘하리’. 하리를 운영하는 정종혁 씨(31)는 “캄캄한 거리를 밝히는 가게 내부 불빛 자체가 간판이라고 생각해 외벽을 통유리로 만드는 대신 간판을 달지 않았다”며 “간판이 없으니 오히려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인터넷으로 검색한 뒤 더 많이 찾아온다”고 했다.

○ 일자리 잃은 영업사원 ‘간판’

지금까지 간판은 가게의 얼굴이자 ‘무언의 영업사원’으로 불렸다. 지나가는 이들에게 가게의 정체를 알리고 이들을 가게로 이끄는 판촉물이었던 것. 간판 활용은 장사의 기본이었다.

몇 년 사이 ‘간판 없는 가게’가 늘고 있다. ‘K간판’으로 불리며 도시 미관을 해치는 원흉으로 꼽히던 평면 간판이 줄고 가게명만 표시하는 입체 글자 간판이 늘더니 이마저도 달지 않게 된 것. 이 같은 추세는 특히 MZ세대(밀레니얼+Z세대) 가게 주인들을 중심으로 확산되는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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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지역 일대 또 다른 내추럴 와인바 ‘음(Mmm)’의 경우 간판이 없는 것에 더해 꽃가게 위 2층에 정체를 숨기고 있다. 1층 출입문에도 안내문이 전혀 없다. ‘음’을 운영하는 권은지 씨(34·여)는 “우리 가게를 알고 좋아하는 사람만 찾아와 와인을 즐겼으면 하는 생각에 간판을 달지 않았다”며 “손님들에게 ‘나만 아는 공간’의 매력을 주고 싶었다”고 했다.

○ MZ세대 “간판 없어도 괜찮아”

이들이 간판을 달지 않는 것도 모자라 은둔에 가까운 기이한 모습을 하고도 장사를 할 수 있는 비결은 뭘까. 전문가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자유롭게 활용하는 MZ세대의 특성을 간판 없는 가게의 전성시대를 여는 원동력으로 보고 있다. ‘하리’의 경우 예약의 95% 이상을 인스타그램 다이렉트 메시지(DM)로 받고 있다. 손님도 대부분 SNS를 잘 활용하는 MZ세대다. ‘음’ 주인 권 씨는 “개업 초기 출입문에 인스타그램 주소를 잠깐 붙여 놨다 뗐는데 이때 홍보가 되면서 소문이 났다”며 “간판이 없어도 장사하는 데 문제는 없다”고 했다.

숨은 맛집을 SNS 검색을 통해 어렵게 발견한 뒤 ‘나만의 아지트’로 삼고 싶어 하는 MZ세대의 특성도 간판 없는 가게의 확산을 부추긴다. 이승윤 건국대 경영학부 교수(디지털문화심리학자)는 “MZ세대 고객들과 SNS를 영업에 활용하는 MZ세대 주인들이 결합하면서 간판을 달지 않는 추세는 더 확산될 것”이라고 했다.

○맛 자신감-워라밸 중시도 한몫

간판 없이도 맛과 분위기로 승부를 낼 수 있다는 MZ세대의 자신감도 간판을 떼게 하는 원인이다. 서울 종로구 익선동의 이탈리안 레스토랑 ‘간판 없는 가게’는 간판이 없는 데다 가게 이름까지 ‘간판 없는 가게’다. 호텔 셰프 출신 등 1988년생 친구 3명이 뜻을 모아 2017년 문을 연 이 레스토랑은 익선동 대표 맛집으로 소문 나 늘 손님들이 줄을 서있다. 이 가게 주인 정종욱 씨는 “음식이 맛있으면 그 가게가 산골짜기에 있어도 손님이 찾아온다고 생각했다”며 “음식과 맛이라는 본질에 집중하고 싶어 간판을 달지 않았다”고 했다.

‘대박’이 나 큰돈을 벌며 바쁘게 사는 것보다 워라밸을 중시하는 MZ세대 특성도 간판 없는 가게를 확산시키는 배경이다. 대구 중구에서 ‘코러스커피’를 운영하는 최진영 씨(29)가 그렇다. 그의 가게는 1층에 구제품 가게와 보청기 가게가 있는 건물의 2층에 간판 없이 숨겨져 있어 지나가는 사람이 우연히 들어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아는 사람만 아는’ 가게인 것. 최 씨는 “내 가게와 취향이 맞다고 생각해 애써 찾아오시는 분들에게 집중하고 싶었다”며 “대박은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음’ 주인 권 씨는 대기업에서 기획 업무를 하다 퇴사한 뒤 내추럴 와인바를 열었다. 그는 “가게가 너무 잘되는 건 싫다”며 “적당히 돈 벌고 적당히 일하며 내가 좋아하는 내추럴 와인을 즐기며 살고 싶다”고 했다.

이은용 경희사이버대 호텔·레스토랑경영학과 교수는 “MZ세대 주인들도 간판이 없으면 개업 초창기 고객 확보가 어렵다는 걸 잘 알 것”이라며 “그럼에도 간판을 걸지 않는 건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을 하며 자아실현을 하면서 워라밸을 지키겠다는 MZ세대의 명확한 가치관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간판 없는 가게#간판#영업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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