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노인이 행복하다, 노인이 일하는 사회가 행복하다[서영아의 100세 카페]

서영아 기자 입력 2021-05-02 08:50수정 2021-05-02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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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자의 일, 창의력이 필요하다
부양받는 위치서 스스로 버는 위치로
인생의 보람, 세상과의 접점, 노후의 풍요
고령자의 노력과 사회의 지원 맞아떨어져야
2016년 도쿄 특파원 부임 직후 전입신고와 의료보험 신청 등을 위해 구청에 갔을 때다. 담당 창구를 찾는 기색을 보이자마자 딱 봐도 70세를 넘긴 노인이 다가와 용건을 물었다. 그리고는 부탁도 하기 전에 척척 필요서류를 챙겨주고 설명해준다. 촉탁직으로 일하는 전직 공무원이라는 그는, 어느 창구직원보다도 가장 많이 알면서도 가장 낮은 자세로 민원인을 대했다. 일을 즐기는 차원을 넘어 소명의식 같은 것마저 느껴졌다.

○도처에서 일하는 노인들

세계에서 가장 빨리 초고령사회가 된 일본에서는 열심히 일하는 고령자를 어디에서나 마주칠 수 있다. 2019년 여름 세미나 참석차 갔던 홋카이도 신지토세 공항에서는 붉은 색 조끼를 입은 시니어 도우미 열댓분이 입국자를 맞아들여 안내했다. 이들은 비행기가 도착할 때마다 쏟아져 들어오는 입국자들을 내국인과 외국인 등으로 나누어 줄 세우고 입국심사에 필요한 서류를 갖췄는지 점검했다. 말을 걸어보니 주로 70대 지역주민들이고 최고령자는 84세라고 한다. 하루 7시간씩 주 3~4일 일하는데 2시간마다 휴식시간, 점심시간이 있어 전혀 피곤하지 않다고. 줄곧 서서 일하지만 잠시도 쉬거나(의자도 없다) 잡담하는 법이 없다. 그러고보니 일본 전국의 공항 출입국 심사 보조인력 대부분을 고령자들이 맡고 있었다.

다음날 들른 홋카이도 개척촌 박물관. 1900년대를 재현한 파출소에는 할아버지가 하얀 경찰복을 멋들어지게 입고 앉아 있었다. 86세 지역주민으로 관광사업에 도움이 되고자 자원봉사 중이라고 했다. 관광객이 사진촬영을 요청하면 흔쾌히 응해준다. 뒷쪽의 밀랍인형과 같은 차림으로 별 움직임 없이 앉아 계셨던지라 처음에는 깜짝 놀랐다. 옆에 서 있던 백발의 경찰 역시 자원봉사자였다.

경찰관으로 분해 관광객들을 응대하는 홋카이도 고령자들. 의자에 앉은 쪽(오른쪽)이 86세 주민이다. 서영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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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어서도 일해야 하는 이유

일본에서는 2013년부터 ‘고령자 고용안정법’이 시행돼 본인이 원한다면 법정 정년인 60세를 넘어 65세까지 고용을 보장해준다. 2001년부터 점진적으로 연금 수령 연령이 65세까지 늦춰져 2013년 전원에게 적용되면서 은퇴자들의 소득공백을 막는다는 취지가 컸다.

국가가 기업에 고령자 복지부담을 떠넘기는 것이라는 지적이 적지 않았지만, 생산가능(만 15¤64세) 인력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불가피한 고통분담이란 의미부여도 있었다. 대신 정부는 기업들이 고용 보장만 해준다면 급여수준이나 업무 방식 등은 관여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60세 이후 고용은 대부분 임금 피크가 적용돼 급여가 절반 이하로 줄어든 파트타임 일자리들이 늘어났다.

그 뒤로도 일손부족이 해결되지 않자 일본 국회는 지난 3월 고령자 고용안정법을 개정해 고용을 70세까지 늘리기 위해 ‘노력’할 것을 의무화하기로 했다. 다만 기업들의 의무 부분에 대해서는 고령자들의 다른 회사 재취업이나 창업을 지원해주는 등의 노력을 하는 정도로 해 부담을 줄여줬다. 한국은 일본의 인구구조를 약 20년 뒤쫓아가고 있으니 조만간 비슷한 현상들이 나타날 수 있다.

○노년, 자신이 ‘있을 곳’을 마련하라

인류역사 대부분의 기간, 대부분의 인간은 죽을 때까지 일했다. ‘죽을 때까지’라는 표현이 가능한 것은 평균수명이 짧았던 덕도 있다. 기대수명이 60대에 머물렀던 1960년대까지도 정년 후 남은 시간은 평균 10년이 채 안됐다.

하지만 일본처럼 인구 4분의 1 이상이 고령자가 되고 기대수명이 늘어나면서 고령자들도 일해야 하는 세상이 됐다. 막연했던 노인의 노동이 점차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1975년 도쿄 에도가와 구에서 태동해 1980년대에 일본 정부 지원으로 전국에 설치된 실버인재센터는 당시 노인 노동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잘 보여준다. 이곳에서 소개되는 일자리는 단기·임시직으로 한정해 현역세대의 일을 빼앗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했고 고령자들의 수입보다는 삶의 보람과 사회공헌이란 측면이 강조됐다.

일본 실버인재센터 본부 홈페이지.


○실버노동, 주변부 인력에서 중심으로

실버인재센터는 60세 이상 일할 의욕이 있는 사람들이 회원으로 등록하면 공공 민간 개인 등 일손이 필요한 곳의 일감을 의뢰받아 구직자들에게 연결해준다. 일감을 의뢰한 곳은 노동의 대가로 센터에 비용을 지불하고 센터는 이를 회원들에게 ‘배분금’이란 형태로 지급해준다. 일감 대부분은 청소 서빙 주방보조 계산원 등 단기적이고 시간 구속이 없는 가벼운 것이 많지만 외국어 통번역 운전 페인트칠 의류수선 등 어느 정도 전문성이 필요한 일도 늘었다. 센터가 홈페이지에 밝힌 바에 따르면 회원들은 평균 월 8~10일 정도 일하고 월 3~5만엔 정도 받아간다고 한다.

2019년 현재 등록 구직 회원은 72만 5000명, 연간 3215억 엔의 일자리 계약 실적이 있다. 하지만 회원수는 2009년 79만 여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일손부족이 심해지고 제대로 일하고 싶은 고령자는 늘어나면서 센터를 통하지 않고 직접 취업하는 경우가 늘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직접 편의점 계산대 알바로 취직하면 시급 1200엔을 받지만 센터를 통하면 각종 비용을 빼고 남은 액수를 배분받는 식이 된다.

○노인 일자리, 스스로 창조해야
‘일하는 노인’은 세계적인 추세다. 미국에서는 베이비부머(1946~1965년생)들이 일하는 비율이 갈수록 높아지면서 역대 가장 강한 ‘시니어 파워’를 자랑한다. 고령화와 일하는 세대의 감소 또한 세계적인 추세라 연금에만 기대기 어려운 세상으로 바뀌고 있다. 설사 수입이 충분하다 해도 늘어난 수명아래 인생은 너무 길다.

인구감소와 고령사회의 출구는 무엇일까. 국내에도 2014년 경 ‘60세 이상만 고용합니다(북카라반)’란 서적으로 소개된 종업원 100여 명의 중견회사 가토(加藤)제작소는 ‘노인 맞춤형 일자리’ 창출의 모범사례다. 일본 기후 현 나카스카와 시에 있는 이 회사는 자동차와 항공기에 쓰이는 금속 부품을 생산하는 판금 가공 공장이다(건설장비 제조업체인 대기업 가토제작소와는 다른 회사다). 1888년 현 사장인 가토 게이지(加藤景司) 대표의 증조할아버지가 건립한 철공소가 출발점이 됐다.

‘60세 이상만 고용합니다’에 등장하는 대장장이 학교 소개 사진과 책 표지(작은 사진). 가토제작소에서는 기술이 뛰어난 노인 직원들이 직접 관련 교과서를 만들어 다른 직원들을 가르치는 대장장이 학교를 운영 중이다.

이 회사는 2001년부터 주말과 공휴일에 일할 60세 이상의 실버 직원을 채용해 일본에서 노인일자리 창출 기업으로 손꼽히게 됐다. 당시 상황이 가토 사장이 쓴 책에 상세히 나와 있다. 주문이 쏟아지면서 주 7일 라인을 가동해야 겨우 납품이 가능했지만 인력이 부족했다. 연일 초과근무를 시키기도 어려운데다 야근과 주말수당을 준다면 납품원가가 올라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도 문제였다. 젊은이를 새로 고용하고 싶어도 다들 대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나선 상황이었다. 우연히 ‘나카쓰가와시의 노인 인구 중 절반이 미취업 상태로 그중 17%가 취업을 희망한다’는 연구 결과를 접했고, 노인인력을 활용한다는 데 착목했다.

즉각 ‘의욕 있는 분 구합니다. 남녀 불문, 경력 불문, 단, 60세 이상인 분만’이라는 광고전단을 200장 만들어 가정에 배달되는 신문에 끼워 배포하자 다음날부터 사무실에 문의전화가 쇄도했다. 첫 채용자는 15명이었다. 이들이 주말에 나와 일하면서 주 7일 생산이 가능해졌다. 이후 공장은 1년 365일 연중무휴로 운영되면서 평일 작업자 평균 나이는 39세, 주말 작업자의 평균 나이는 65세 이상이 맡는 체제가 굳어졌다. 불과 몇년 만에 매출은 3배 가까이 늘었다.

○‘의욕 있는 분 구합니다. 남녀·경력불문 단, 60세 이상’
가토 제작소는 2020년 4월 현재 직원 115명 중 52명이 고령자다. 정년은 ‘직원이 그만두고 싶을 때’다. 80대 직원까지 일하고 있어 60대 직원들은 ‘청년’으로 불린다. 2008년 리먼 사태로 일본 전역에 ‘해고 열풍’이 불었으나 이들은 단 한 명도 해고하지 않았다. 이때도 고령 근로자들이 가진 조건이 도움이 됐다. 기본적으로 연금이 있으므로 수입이 줄어도 생계에 타격을 입을 정도는 아니었다.

가토 제작소에서 일하는 고령 직원들(위). 일하는 기쁨을 말하듯, 표정들이 밝다. 가토제작소 홈페이지에 소개된 고령자 모집광고 사진. ‘토요, 일요일은 우리들의 평일’ 이란 제하에 지금은 고인이 된 할머니 직원이 환한 표정으로 웃고 있다(아래). 이 사진은 가토 제작소 회의실 앞에도 붙어있다고 한다. 가토 제작소 홈페이지 캡처.

이는 ‘주 28시간 이하 근무’를 조건으로 하는 시니어근무의 특성 덕에 가능했다. 일본 근로기준법상 정규 근로시간(40시간)의 3분의 2 이상 일하면 연금을 받을 수 없다. 고령 직원들은 하루 6~7시간, 1주일에 3~4일 일한다. 회사가 고령 직원들에게 지급하는 시급은 800~900엔으로 월급으로 치면 한 달 100만원 정도. 노인들 입장에선 연금과 월급을 동시에 받는 게 이익이어서 그 이상 일할 이유가 없다. 회사도 꼭 필요한 시간에 그들을 활용할 수 있다.

직원들은 “연금 외에 약간의 수입이 생기니 삶에 여유가 생기고 정기적인 일이 주는 리듬감이 생활에 생기를 준다. 무엇보다 ‘나도 사회에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가장 큰 기쁨을 준다”고 말한다.

○사회와 본인의 필요에 따라 서로 ‘윈윈’해야
실버들의 노동은 개인에게는 생계를 위한 수단이자 삶의 보람과 의미를 찾는 과정이다. 사회 전체로는 복지와 의료의 부담을 줄이고 생산성을 유지하는 수단이 된다.

우리나라는 현재 낮은 출산율에 평균수명이 늘면서 고령화 속도가 급격히 빨라지고 있다. 국내 생산가능 인구는 2017년 3757만 명으로 정점을 찍고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이대로라면 2010년 생산가능 인구 6.6명이 노인 1명을 부양했던데 비해 2030년에는 2.6명이 노인 1명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된다고 한다.

노인들의 노동 참여에 대한 욕구도 충만하다. 그러나 제대로 된 일자리는 많지 않아 보인다. 한국에서 ‘노인일자리사업’으로 불리는 노인노동은 특정 공공일자리에만 한정되는 등 책상머리식 사고에 머물러 있다. 결국 노인에게 주어진 일은 젊은이들과 경쟁해야 하는 극한직업이거나 풀뽑는 시늉이나 하다 끝나는 공공일자리사업 등 양극단의 선택지밖에 없어 보인다.

○노인의 일은 노력에 의해 발굴된다

이런 가운데 일본의 일부 실버인재센터에서 벌어지는 일이 흥미를 끈다. 프로 뺨치는 직업집단을 만들어 자체사업에 나서는 곳이 늘고 있다는 것. 일례로 가와코시 시의 사업팀은 관광가이드사업에 나섰다. 1986년 5명 정도 회원에서 시작했던 이 팀은 현재 36명의 자격있는 가이드가 포진한 지역관광사업의 맹아로 떠올랐다. 이들은 몇년에 걸쳐 공부해야 따낼 수 있는 지역 가이드 자격증을 만들고 자체 사업을 펼치면서 지역 관광에도 이바지하고 있다. 관광가이드에 지역의 역사와 설화 등을 접목시켜 유령의 집 코스 등을 연출하고 도깨비 분장을 하기도 하며 1시간에 1800엔의 수입을 올린다고 한다. 이런 일은 실버 인재들 본인들이 제안하고 준비해서 만들어냈다.

결국 실버들의 일도 사회의 필요와 본인의 부응에 따라 서로 ‘윈윈’이 가능한 선에서 이뤄진다. 일한다는 것, 노동은 세상과의 접점을 가진다는 의미다. 그것이 주어진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점차 새로운 직업을 발명해내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일본은 세계 최고령 사회의 첨단을 가고 있는데 한국이 딱 20년 뒤 따라간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한국은 일본과 역사도 문화도 국민성도 다르지만, 인구 구조 변화가 초래하는 사회현상은 유사할 수밖에 없다. 노후에 대한 고민은 은퇴를 앞둔 세대에 한정되지 않을 것이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기자페이지 바로가기>
※인생 후반, 더 중요해지는 ‘돈 건강 행복’
풍요로운 100세 인생을 맞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돈과 건강, 그리고 행복입니다. 이 모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갖춰지는 게 아니고 30~40대부터 차근차근 조금씩 준비해나가야 합니다. ‘100세 카페’에서는 특히 인생 2막을 잘 맞이하기 위해 미리미리 준비해야 할 돈과 행복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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