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하더라도 해보고 후회”… 영끌 대신 ‘영꿈 통장’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월 9일 03시 00분


코멘트

[2021 새해특집 / 청년들이 만드는 ‘영꿈 통장’]
<상> 꿈을 적립하는 젊은이들

영꿈 통장을 품은 청년들에게 2021년 ‘또래 청년과 사회에 건네고 싶은 말’을 물어봤다. 윤혁진 씨(28·왼쪽)는 ‘다시 찾아올 우리의 봄’을, 한선영 씨(20)는 ‘실패를 격려해줄 지지대’를 꿈꿨다. 윤혁진·한선영 씨 제공
영꿈 통장을 품은 청년들에게 2021년 ‘또래 청년과 사회에 건네고 싶은 말’을 물어봤다. 윤혁진 씨(28·왼쪽)는 ‘다시 찾아올 우리의 봄’을, 한선영 씨(20)는 ‘실패를 격려해줄 지지대’를 꿈꿨다. 윤혁진·한선영 씨 제공
‘영끌 투자’(영혼까지 끌어모은 투자) ‘빚투’(빚내서 투자)…. 지난해 청년들을 사로잡은 신조어들은 씁쓸함을 자아낸다. 사회 초년생과 대학생까지 주식과 부동산에 열광했다. 자기 집 한 채 마련하기 어렵다는 절망이 겹치며 젊은이의 대화조차 ‘돈 얘기’가 잠식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꽁꽁 얼어붙은 취업 창업 한파는 불안을 더욱 자극했다. 미래는커녕 내일이 흐릿한 시대. 꿈은 사치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꿈은 여전히 꿈꾸는 자의 특권이다. 꿈을 좇는 이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모두가 청년이다. 가슴에 품은 통장에 희망과 노력을 한 푼 두 푼 모아가는 삶. 영혼까지 끌어모아 꿈에 투자하는 게 ‘영꿈(young+꿈) 통장’이다. 청년 영꿈 통장은 다채롭다. 앞길이 보장됐던 전문의는 홀로 품은 영화의 꿈을 담은 신규 통장을 개설했다. 아직 수익률 제로지만 축구 선수가 되겠다며 스페인으로 간 청년도 있다. 변호사를 포기하고 창업에 뛰어든 젊은이는 “오랫동안 간직한 적금 통장을 깬 기분”이라고 했다.

동아일보가 2021년을 맞아 들여다본 청년 21명의 영꿈 통장은 영글지 않아 찬란했다. 그들의 꿈 통장엔 자기 길을 가는 거래 명세가 빼곡히 찍혀 있었다. 11만 자가 넘는 입출금 기록엔 유독 눈에 띄는 단어들이 있다. ‘시작’(88회) ‘준비’(74회) ‘실패’(67회) ‘도전’(58회) ‘경험’(54회) ‘고민’(41회)…. 영꿈 통장은 근거 없는 낙관만 쌓아두는 계좌가 아니다. 부딪치고 실패해도, 치열하게 다시 일어서는 진심이 이자처럼 불어난다.

청년들의 꿈이 만기로 가득 차 기다렸던 ‘적금 타는 날’을 응원하며 그들의 영꿈 통장을 소개한다.

“후회하더라도 해보고 후회” 의사 꿈 잠시 접고 영화인 꿈에 투자



“그때 해보고 싶었던 것 다 해볼걸….”

VIP 병실에 입원한 환자들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죽음의 문턱 앞에서는 십중팔구 ‘이루지 못한 꿈’을 이야기한단다. “더 열심히 일했어야 했는데, 돈을 더 많이 벌었어야 했는데”라고 하는 이들은 만나기 어려웠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인턴으로 일했던 성형외과 전문의 홍우택 씨(36)의 기억에는 그런 모습들이 지금도 또렷하다.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는 또 있다. 의대생들이 가장 힘든 시간으로 꼽는 의대 본과 1학년. 공부에 있어서는 ‘무사(武士)’ 같았던 한 동기가 한순간에 무너졌다. 끝내 그는 극단적 선택을 했다.

“돈이 많거나 적거나, 남들이 말하는 성공을 했느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었어요. 삶의 마지막에 남는 회한은 별반 다르지 않더라고요. 그렇다면 ‘좀 더 하고 싶은 것을 해보자’ ‘후회를 하더라도 해보고 후회하자’ 인생의 방향이 바뀌었죠.”

우택 씨는 결국 평생 부어왔던 ‘의사’란 통장을 잠시 접어뒀다. 아직 아무것도 없지만 새로운 꿈의 통장을 만들었다. 레지던트 3년 차였던 2018년.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영화과에 지원해 합격했다.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영화 공부에 매진 중이다. 우택 씨의 본격적인 ‘꿈 재테크’가 시작됐다.

○ 나만의 가치를 담은 영꿈 통장

“불현듯,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순간이 있어요. 해부학의 인체구조처럼 뼛속까지 다 보이는 그날. 그땐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눠야 해요.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인생에서 뭔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인 거죠.”(홍우택 씨)

우택 씨뿐만이 아니다. 자기만의 ‘영꿈 통장’을 개설한 청년들은 모두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

서울에 있는 한 대학 로스쿨을 다니며 변호사시험을 준비했던 박소현 씨(29)의 그날은 지난해 4월 24일이었다. 오후 5시쯤이었다. 합격자 명단을 확인한 소현 씨는 ‘뎅’ 하고 머릿속에서 뭔가가 울리는 듯했다. 불합격이었다. 응시자 10명 중 5명은 떨어지는 시험이라지만, 살면서 ‘떨어져 본’ 경험이 거의 없던 그에겐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 순간. 이번엔 눈앞에서 ‘띵’ 하고 밝은 불이 켜졌다. 엉뚱하게도 ‘이젠 이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찾아왔다. 1년 뒤 재시험을 보겠다는 생각은 저 멀리 사라졌다.

“사실 변호사로서 미래에 대한 불안함이 컸어요. 로스쿨 1학년 때도 자퇴를 고민하다가 휴학까지 했거든요. 2학년 때는 스트레스로 끼니를 거르다가 체중이 5kg이나 빠졌어요. 이게 내 길인지 확신이 안 들더라고요. 그냥 운이 좋아 여기까지 왔나 싶었는데, 진짜 넘어지고 나니 이젠 내가 하고 싶은 걸 맘대로 해봐야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소현 씨는 합격자 발표 5시간 만에 ‘변호사’란 황금빛 통장을 걷어찼다. 그리고 몇 달 뒤, 자신이 직접 만든 주얼리 브랜드를 선보이는 온라인 쇼핑몰을 론칭했다. 소현 씨는 “지금도 하루 5시간 이상 자본 적이 거의 없을 정도지만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며 “나만의 영꿈 통장을 찾았다는 만족감은 창업 스트레스조차 이겨낼 수 있었다”고 전했다.

○ “실수하면서 배우면 된다. 그냥 하면 돼”

경남도 무형문화재 27호 ‘진주오광대’(진주 지방에서 내려오는 탈놀음)의 전수자인 정현수 씨(36). 그는 자신만의 통장을 되찾기 위해 길고 오랜 길을 돌아왔다. 서른이 넘어서 10여 년 만에 다시 선 ‘복귀 무대’가 그에겐 소중하고 감사하다.

현수 씨는 초등학교 때 어머니 손에 이끌려 진주오광대를 처음 접했다. 농악과 어우러진 탈놀음은 신명이 났다. 전국에서 상을 탈 정도로 재능을 인정받았지만 거기까지였다. 넉넉지 못한 가정 형편 탓에 예술중학교 진학을 포기하며 그는 영꿈 통장을 ‘거래 중지’했다.

“고교 때도 계속 하긴 했었어요. 하지만 어릴 때 느꼈던 신명은 사라진 지 오래였죠. 결국 뭔가를 하고 싶단 꿈보단 ‘돈이나 많이 벌자’로 생각이 바뀌었죠. 군에서 전역한 뒤엔 무조건 돈 많이 버는 일을 찾아다녔어요.”

그가 선택한 일은 조선소 생활. 경남 거제 등에 있는 조선소 생활은 처음엔 달콤했다. 친구들보다 벌이도 많으니 그걸로 만족했다. 한 번에 인센티브 1000만 원을 받을 정도로 열심히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자신을 돌아보니 자신은 그저 ‘일만 하는 기계’가 돼 있었다. 하루 서너 시간밖에 자지 못하고, 끝없이 이어지는 음주와 접대. 그는 갑자기 갈 곳을 잃어버렸다.

돈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아버린 순간. 현수 씨는 몸속에서 뭔가가 다 빠져버린 기분이 들었다. 불행이 겹치며 팔까지 다친 뒤엔 휴식을 찾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미 서른 살에 가까워진 나이. 뭘 해야 할지 막막하고 두려웠다.

그때 다시 떠오른 게 진주오광대였다. 자신을 몰아넣을 수 있는 몰입이 그리웠다. 하지만 너무 오래 ‘휴면 계좌’였던 탈놀음을 다시 할 수 있을까. 다시 만난 선생님은 크게 꾸짖었다.

“어린놈이 뭘 알았겠냐. 두드리다 보면 바위도 깨지는 법이다. 실수하면서 배우면 된다. 그냥 하면 돼.”

현수 씨는 그길로 며칠 뒤에 선생님을 따라 무대 위에 올랐다. 턱없는 연습량. 그런데 이상하게 몸이 먼저 반응했다. 짜릿짜릿, 이게 바로 살아있는 느낌이었다. 거래 중지됐던 그의 영꿈 통장이 다시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냥 손끝에서 감각이 깨어났어요. 어린 시절 세포가 살아났다고 해야 하나. 온몸에 해방감이 쫙 퍼져나갔죠. 드디어 다시 돌아왔구나 하는.”

현수 씨는 올해 전수자 다음 단계인 이수자 시험을 치를 예정이다. 그의 영꿈 통장은 차곡차곡 꿈이 입금되고 있다.

○ 힘든 ‘출금’의 기억, ‘입금’으로 승화


청년들이 영꿈 통장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껏 쌓아온 모든 걸 내던져야 할 때도 있다. 기약 없는 미래에 도전하기 위해선 단호한 결심이 필요하다. 실패도 성장의 발판으로 삼을 각오가 서야 한다.

우택 씨는 영꿈 통장을 갖기 전 자신의 모습을 보며 채찍질한다.

“레지던트 2년 차 때 너무 관두고 싶은 기억들로 괴로웠어요. 그 기억들이 지금의 절제와 통제력을 키워줬다고 생각해요. 인턴 때 부속품처럼 일했던 경험도 나의 꿈을 찾는 자양분이 된 거죠.”

어쩌면 영꿈 통장은 가까운 곳에 있기도 하다. 소현 씨는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좋았다. 초등학교 시절 자수와 레이스도 직접 만들었고 재봉틀도 다룰 줄 알았다. 자신의 영꿈 통장이 된 주얼리 사업도 그간 심심풀이로 하던 취미를 확대시킨 것이었다.

“재미 삼아 만들었던 진주 아이템이 객관적으로 생각해봐도 상품 가치가 있을 수 있단 확신이 들었어요. 내가 좋아하는 일을 정보와 노력만 더하면 내 꿈으로 실현시킬 수 있단 기대감이 들었어요. 얼마 전에 초등학생 때 썼던 일기장을 봤는데, ‘자수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고 써놨더라고요. 잊었던 꿈을 이렇게 다시 찾은 거죠.”



○ 특별취재팀

▽팀장 권기범 기자 kaki@donga.com
▽강승현 신희철 전채은 이소연 김태성 신지환 이청아 기자(이상 사회부)
#영꿈 통장#청년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