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평인 칼럼]측은지심마저 정치적인 대통령

송평인 논설위원 입력 2020-11-18 03:00수정 2020-11-1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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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서 사살된 어업지도원 아들에게
손편지 대신 타이핑 편지 보낸 대통령
암투병 파업 기자 병문안과 큰 대비
5·18 유족, 천안함 유족 보는 태도 달라
人之常情마저 정파적이어선 안돼
송평인 논설위원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 가보면 미술평론가 최열의 ‘옛 그림으로 보는 서울’이 눈에 잘 띄게 진열돼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24일 페이스북에 ‘모처럼 좋은 책을 읽었다’며 이 책을 소개했다. 지금은 사라진 옛 서울의 모습을 조선시대 회화를 통해 찾아본 책이다. 문 대통령은 “그림과 해설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오늘날의 모습과 비교해 보노라면 읽고 보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부동산정책은 수습 불가 상태로 가고 있어 집 없는 자들의 분통을 자아내고 추미애의 목불인견(目不忍見) 추태는 끝날 기약 없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실종된 서해 어업지도원에 대한 북한군의 잔혹한 사살까지 겹쳐 나라가 뒤숭숭했는데 대통령만 딴 세상에 살고 있는 듯한 한가한 책 추천이었다. 그 책은 최 씨가 8년 전 펴낸 ‘옛 그림 따라 걷는 서울길’을 확대·보완한 것으로 완전히 새로운 책이라 할 수 없다. 혼자만의 감상이면 모르되 추천으로서는 철 지나도 한참 지난 소리를 한 셈이다.

북한의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짓에 대해 어업지도원의 아들이 문 대통령에게 진상 규명을 호소하는 편지가 공개된 것이 지난달 5일이다. 문 대통령은 열흘쯤 뒤인 14일 답장을 보냈다. 답장은 손글씨로 쓴 것이 아니라 타이핑한 글에 전자서명한 것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바쁜 미국 대통령도 위로의 편지는 손글씨로 쓴다. 비서진이 써준 걸 옮겨 적더라도 그렇게 하는 게 예의다. 손편지 하나 쓸 여유가 없었던 대통령이 자신이 사는 청와대와 그 주변이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호기심이 컸던지 대통령이 스스로 표현한 대로 ‘읽고 보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리는데도’ 그렇게 한 모양이다.

실은 손편지를 쓸 여유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손편지를 쓸 마음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2월 문 대통령은 2012년 MBC 파업을 주도하다 해직된 뒤 암 투병 중인 MBC 이용마 기자를 직접 병문안했다. 2012년 MBC 파업을 의미 있게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도 의문이고 그 의미마저도 논란이 있다. 그런 일로 대통령이 한 개인을 공개적으로 병문안하는 일은 흔치 않다. 이 기자를 향한 대통령의 각별한 배려를 높이 평가할수록 어업지도원의 아들에게 손편지 한 장 쓰지 않은 몰인정함과의 차이는 더 극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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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누군가를 딱하게 여기는 감정은 정치적 입장과는 큰 상관이 없다. 그래서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측은지심이 동(動)하는 데 있어서조차 정치적인 면이 크게 작용하는 유형인 듯하다.

그는 대선 후보 때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이 결정되자 전남 진도 팽목항을 찾아 세월호 방명록에 “미안하고 고맙다”는 글을 썼다. 어른들 말을 너무 잘 들어 구조를 기다리다 죽어간 착한 아이들을 생각하면 자기 아이가 아니라도 가슴이 찢어진다. 그러나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온 고맙다는 말은 어딘지 이상하다. 그저 미안하고 또 미안할 따름이지 무엇이 고맙다는 것인지 인지상정으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문 대통령은 취임한 해 5·18기념식에서 ‘유족의 편지’를 읽고 자리로 돌아가는 한 유족에게 불쑥 다가가 위로하듯 안아준 것으로 따뜻한 감동을 줬다. 그러나 예정에 없는 듯이 연출된 상황이 아니라 돌발 상황에서 인간의 본심이 드러나는 법이다. 올 3월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서 천안함 폭침 전사자의 어머니가 분향하려는 대통령에게 다가가 “천안함 폭침이 누구 소행인지 말씀 좀 해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 어머니를 쏘아보던 눈빛은 차가웠다.

2017년 러시아 혁명 100년에 맞춰 나온 ‘Lenin: The Man, The Dictator, the Master of Terror(레닌: 인간, 독재자, 테러의 대가)’란 책을 읽고 있다. 뉴욕타임스가 서평까지 쓴 레닌 전기로 ‘인간 레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891년 레닌이 변호사이던 때 그의 고향인 볼가강 유역에 극심한 기근이 닥쳤다. 40만 명 이상이 죽어갔다. 톨스토이 체호프 같은 작가들이 국제 구호 캠페인에 나섰다. 그러나 레닌은 왜 차르 체제를 돕는 일을 하느냐며 일체의 구호활동을 거부했다. 그런 레닌에게 그의 누이들은 소름이 끼쳤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측은지심마저 정치적인 사람의 싹수가 어땠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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