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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우드스탁, 곱창전골, 그리고 영혼의 리퀘스트[임희윤 기자의 죽기 전 멜로디]

입력 2020-09-18 03:00업데이트 2020-09-1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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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대문구 신촌의 LP 바 ‘우드스탁’과 운영자 문진웅 대표. 고종석 씨 제공
임희윤 기자
하트의 ‘Alone’, 김동률의 ‘Replay’,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

그날 밤 우리가 바라는 전부는 단 세 곡이었다. 그러나 그날 밤 DJ는 무척이나 야속했다.

“저희가 팝송은 신청곡을 안 받아서요. 그리고 이 곡은 LP로 없네요.”

벽장 가득 빼곡한 레코드의 도열은 휘장 같았다. 높은 DJ 부스는 그날따라 마치 제단처럼 도도하게 느껴졌다. 결국 실내를 쩌렁쩌렁 울리는 ‘기억의 습작’이나 처량하게 따라 부르는 것으로 우리 일행은 만족했다. 무한 스트리밍의 시대에 고작 음악 한 곡을 못 들어 무력해진 상황이 좀 터무니없어 왠지 즐겁기도 했다. 서울 마포구 와우산로 LP바 ‘곱창전골’의 얼마 전 어느 날 풍경이다.

그곳 카운터 앞에 20권쯤 진을 친 똑같은 두꺼운 책에 눈길이 갔다. 신간 ‘신촌 우드스탁과 홍대 곱창전골’(호밀밭). 대중음악평론가 고종석이 쓴 이 책은 음악 리퀘스트(신청)의 성지 두 곳을 다룬 에세이이자 정보서다. LP나 CD가 디자인 상품이나 기념품이 아니라 음악 감상의 필수불가결한 매체였던 시절을 다룬 ‘아재 추억 전집’이다.

#1. 돌아보니 옛날 옛적 우리의 밤을 수놓은 리퀘스트 열정은 KBS ‘사랑의 리퀘스트’ 못잖았다. 아가페적 이웃 사랑보다 구질구질한 치정극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해도. 명치끝에서 자주 뜨끈한 게 올라오던 계절의 이야기다.

“버브의 ‘Bitter Sweet Symphony’ 아니면 라디오헤드의 ‘High and Dry’요.”

‘두 잔째로는 제일 싼 버드와이저 맥주를 시키더라도 리퀘스트만큼은 신촌 최고로 하라!’ 마음속 철칙은 시계처럼 작동했다. 황금 같은 일행이 있었으니까….

#2. 책에 담긴 ‘곱창전골이 사랑한 음악들 51선’은 ‘장현 앤드 더 멘’의 ‘미련’(1972년)으로 시작해 삐삐밴드의 ‘안녕하세요’(1999년)로 끝난다. 팝으로 점철된 ‘우드스탁이 사랑한 음악들 51선’도 볼만하다. 롤링 스톤스의 ‘Paint It Black’(1966년)이 박차고 연 문을 첨바왐바의 ‘Tubthumping’(1997년)이 서둘러 닫아버린다.

#3. 푸른하늘은 ‘오렌지나라의 앨리스’(1993년)에서 당시 강남구 압구정동 소재 카페 이름을 리듬에 맞춰 나열하는 것으로 랩 파트를 대신했다. 오렌지족, 낑깡족 같은 단어가 TV와 신문에 오르내리던 때였다. 아웃사이더를 지향하지만 인사이더를 추구하는 홍대와 신촌의 부족들에게 부탁했다면 다른 랩이 나왔으리라. ‘백스테이지’ ‘블럭’ ‘우드스탁’ ‘놀이하는 사람들’ ‘도어스’ ‘벨벳 언더그라운드’….

#4. 그러니까 이 컴컴한 소굴들에는 아직 20세기가 펄펄하게 산다. ‘닥터 후’나 ‘환상특급’ 같은 이 마법 가게의 문을 2시간 뒤 열고 나가면 서울특별시 대신 영화 ‘매드 맥스 3’의 황량한 바터 타운이라도 펼쳐질 것 같다는 이야기다. 이 낡은 타운의 결투는 검술 대신 음악지식으로 벌어지는 법. 여기서 진짜로 펜은 칼보다 강하다. 오아시스와 라디오헤드에 머물러 있다가는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와 프로디지를 신청하는 동료에게 소중한 짝사랑을 빼앗길지도 몰랐다. ‘Rock ‘n’ Roll Loser’(맨선의 2004년 곡)가 될 수는 없었다.

#5. 바에서 가져온 모나미 볼펜으로 한 사람이 메모지에 신청곡을 적는 그 몇 분을 못 기다린 성미 급한 일행은 주섬주섬 아끼는 개인 펜을 꺼냈다. 그렇게 꾹꾹 눌러 기록돼 날개처럼 퍼덕이며 DJ 부스로 향한 그날 밤의 사운드트랙은 지금 어디쯤을 날고 있을까.

#6. 몇 년 전, ‘곱창전골’에서 열린 아시아 음악 특집 파티에 간 적 있다. DJ들이 파키스탄과 캄보디아에서 공수한 LP판으로 재생하는 듣도 보도 못한 노래들이 궁금한 관객들은 저마다 더듬이 세우듯 휴대전화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샤잠’이나 ‘사운드하운드’ 같은 인공지능 음악 검색 앱을 켠 것이다. 멋진 신세계의 쿨한 파티를 보며 되레 ‘선사시대’의 기억이 떠올랐다.

#7. “야, 이거 누구 노래지?”

3초쯤 서로의 눈치만 살피던 침묵의 끝. 원시 부족 일행의 시선이 한꺼번에 나에게 쏠렸다.

“아, 이거 블라인드 멜론 같은데? 아닌가? 기타 사운드가 꼭….”

당황한 기색을 애써 감추던 나만을 향해 반짝이던 그때 그 초롱초롱한 눈들이 생각난다. 그들을 위한 영혼의 리퀘스트가 오늘밤 거실에서 계속되리라.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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