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부형권]‘기득권 아닌 척’하는 기득권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8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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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형권 국제부장
부형권 국제부장
“세계 빈민의 70%가 여성이고, 읽고 쓰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의 3분의 2가 여성입니다. 아동과 노인의 대부분을 일차적으로 돌보는 사람이 바로 여성입니다. 인간의 권리는 여성의 권리이고, 여성의 권리는 인간의 권리입니다.”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71)이 1995년 9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제4차 세계여성회의에서 한 연설이다. 당시 그는 대통령 부인 자격으로 미 대표단을 이끌었다. 이 명연설은 힐러리를 ‘소외된 여성의 글로벌 대변자’로 각인시켰다.

그 힐러리가 2016년 대선에서 ‘아웃사이더(소외된 주변인) 열풍’ 때문에 낙선했다. TV토론 등에서 “유권자는 (도널드 트럼프 같은) 아웃사이더를 원하는 것 같다. 대통령 부인, 연방상원의원, 국무장관까지 지낸 당신은 기득권 세력(the establishment) 아니냐”는 공격에 시달렸다. 힐러리는 “워싱턴에서 여성보다 더한 아웃사이더가 어디 있느냐”고 반박했지만 ‘기득권 낙인’을 벗겨내진 못했다. 어렵게 쌓은 ‘준비된 대통령’ 이미지가 득표에 방해되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실제로 “‘첫 여성 대통령’을 보고 싶긴 하지만, 그 이유 하나 때문에 힐러리를 찍고 싶진 않았다”는 2030 젊은 여성이 적지 않았다. 미 언론들도 “기성 정치에 실망한 유권자들이 ‘내 분노를 대변해줄 비정치인(트럼프)’을 더 원했다”고 분석했다.

그렇게 당선된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후에도 ‘아웃사이더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러시아 스캔들’을 수사 중인 로버트 뮬러 특검팀이나 비판적 주류 언론을 향해 수시로 “마녀사냥(witch-hunt)”이라고 공격한다. 마녀사냥은 중세 기독교 권력이 ‘마녀’라는 희생양을 통해 민중의 불만과 저항을 해소시키는 수단이었다. 그 대상은 힘없는 여성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힘센 미국 대통령이 ‘나는 힘없는 희생양’이라고 주장하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트럼프 무역정책도 그 연장선에 있다. 현 국제경제 질서를 가장 주도적으로 만든 나라는 최강국 미국일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불평등한 기성체제의 피해자, 대미 무역 흑자국 중국 한국 등은 가해자’처럼 만들어 버렸다. 도대체 누가 ‘억울한 마녀’이고, 누가 ‘가혹한 사냥꾼’인가.

트럼프 대통령에게만 뭐라 할 순 없을 것 같다. 한국 정치에서도 ‘아웃사이더 전략’ ‘피해자 코스프레’는 만연하다. 인터넷상 불법 댓글 조작 사건, ‘드루킹 사건’이 터져 나왔을 때 청와대 반응은 “피해자는 정부·여당”이었다. 이런저런 의혹이 끊이지 않는 여당 소속 도지사는 “거대 기득권이 나를 죽이려 한다”고 주장한다. 헷갈린다. 권력을 잡고 있고, 지방선거에서도 압승한 여당의 주요 인사를 ‘억울한 마녀’로 만들어 ‘가혹한 사냥’을 하는 기득권 세력은 도대체 누구인가. 아웃사이더와 피해자 말고, 각종 의혹을 풀어주고 어려운 민생을 보듬을 유능한 책임자는 어디 있는가.

권력을 잡은 다음에도 트럼프 대통령처럼 ‘억울한 피해자’ ‘소외된 아웃사이더’ 연기에만 몰두하면 그 부작용은 책임 회피, 책임정치의 실종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잘되면 ‘내 탓’, 안 되면 ‘나 아닌 어떤 기득권 탓’을 하라고 국민이 표를 준 것은 아닐 것이다. “당신이 바로, 책임져야 할 기득권이잖아”라는 ‘진실의 순간’이 반드시 오게 돼 있다.

참담한 고용과 민생 때문에 대통령의 입에서 “청와대와 정부의 경제팀은 직을 건다는 결의로 임해 달라”는 당부가 나왔다. 경제팀뿐만 아니라, 이미 권력을 갖고 있는 기득권 세력이라면 같은 결의로 일해야 한다. 기득권을 걸어야 기득권을 지킨다.
 
부형권 국제부장 bookum90@donga.com
#힐러리#트럼프#기득권#아웃사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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