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마지막 황세손’ 이구, 한국말 서툴렀던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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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년 12월 6일 11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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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영친왕 부부와 이구(좌), 이구와 줄리아 리(우)
사진=영친왕 부부와 이구(좌), 이구와 줄리아 리(우)
영친왕(英親王·이은·李垠)의 아들로 지난 2005년 일본에서 타계한 이구의 부인 줄리아 리가 지난달 26일 미국 하와이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는 소식이 뒤늦게 전해졌다. 이를 계기로 멸망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세손 이구(李玖·1931∼2005)의 삶도 재조명 되고 있다.

이구는 영친왕과 일본 왕족 출신인 이방자(李方子) 여사의 아들로 할아버지 순종 사후인 1931년 태어났다. 일본 아키히토 국왕과는 외증조부(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가 같은 6촌 방계 친척지간이다. 전주 이 씨 대동종약원이 올린 사시(私諡)는 회은황세손(懷隱皇世孫).

그의 형 이진은 그가 태어나기 10년 전 아기였을 때 사망했다. 영친왕의 후계자가 된 그는 이왕세자(李王世子)로 불렸다. 세계 2차 대전 이후 1947년 일본 헌법이 시행되면서 왕가의 지위를 상실했으며, 같은 해 10월 18일에는 일본 왕족의 명단에서도 제외돼 일본 국적도 잃었다. 1953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명문 매사추세츠공대(MIT) 건축학과를 졸업했다. 구 일본 왕족인 후시미 히로아키와 어린 시절부터 친분을 쌓다가, 함께 미국 유학을 꿈꾸게 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 후 뉴욕에서 중국계 미국인 유명 건축가 이오밍 페이의 회사에 취업해 건축가로 활동했다. 2015년 젊은작가상 대상을 수상한 정지돈의 단편소설 ‘건축이냐 혁명이냐’가 건축가로서 이구의 삶을 다룬 바 있다.

미국 여성 줄리아 리(본명 줄리아 멀록)과 사랑에 빠져 1958년 결혼했다. 1963년 줄리와 리와 귀국해 창덕궁 낙선재에 기거하며 사업을 벌였다. 그러나 경영하고 있던 신한항공이 1979년 파산하며 위기를 맞는다.

부부는 별거에 들어갔고, 결혼생활 24년 만인 1982년 파경을 맞았다. 그는 이후 일본으로 떠났다. 정확한 이혼 이유는 알 수 없는데, 줄리아 여사가 후사를 잇지 못했다는 이유와 그가 한국 여성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종친들이 이혼을 종용한 것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도 알려졌다.

한국어가 서툴렀던 이구는 주로 미국이나 일본에서 머물렀다. 그는 지난 2005년 일본 도쿄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에서 타계했다. 같은 해 7월 창덕궁에서 장례를 치렀고, 아버지 영친왕의 묘역인 영원 인근 묘역 회인원(懷仁園)에 안장됐다.

이구에게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이로써 대한제국의 적통(嫡統)은 끊겼지만, 그의 사후 전주 이 씨 대동종약원은 의친왕의 9남인 이충길의 아들 이원을 이구의 양자로 발표했다.

박예슬 동아닷컴 기자 ys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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